493강-YouTube강의(애굽의 장자 시편 136:10)20241217-이 근호 목사
제493강, ‘애굽의 장자’. 시편 136편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애굽의 장자는 애굽인에게 제일 소중한 자들입니다. 장녀가 아니고 장자.
왜 장녀보다 장자가 더 소중하냐? 대를 이어간다는 것은 옛날에 여자는 시집을 가버리면 성씨가 다른 집안사람으로 소속이 돼요. 딸을 낳아 시집가면 저쪽 사람이 돼요. 딸이 시집가면 시집사람으로 호적이 올라가기 때문에 탈락이죠. 내 가정에서는 탈락이 되는 겁니다. 서양에서도 여자가 결혼하면 성(姓)이 바뀌어요. 이제 그쪽 사람이니까 성이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이 장자라는 것은 자식, 내 자식이 있고 아들이 있음으로써 죽고 난 뒤에 내가 존재했다는 내 존재 의미도 자식에게 계속 그 일부가 남겨지는 겁니다. 하나의 족보가 세워지는 거예요. 자기 아버지보고 ‘누구세요?’ 할 수 없잖아요. 아버지가 있으매 그다음에 내가 있듯이, ‘자식아, 네가 있다는 것에 내 몫도 있다.’ 사실은 50% 내 몫이 있죠.
그렇게 되게 되면 자식을 통해서 자신이 아주 소멸되고 다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논리가 그런 게 아니고 인간의 본성상 그래요. 많은 재산을 남의 자식 주지 않고 아주 집착하듯이 자기 자식에게만 물려주게 되어 있어요. 자식이 어떤 자식이라도 남의 자식보다 못하다 할지라도 내 자식에게 재산 물려주지 않으면 누구한테 물려주겠느냐 하는 식으로 그렇게 대를 이어가고 족보를 이어가는 것이 인간세계의 영원을 향한, 자기존재의 영원함을 구사하고 유지시키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육적인 집착을 이미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느냐 하면 “너희들 족보가 대대로 영원히 이어질 걸로 너희들 생각해? 내가 너에게 찾아가서 너희들 족보는 끝났어. 끝 날까지 갈 때까지 가봐서 확인할 필요 없어. 내가 지금 확인해줄게. 너희들 족보는 살 가치도 없는 족보다.”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이라는 사건을 일으킨 거예요. 유월절 사건.
인간의 모든 족보의 끝은 저주로, 또 다른 말로 하면 죽음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내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내가 낳은 자식조차도 죽음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중이에요. 아담도 그랬고 아담 그다음 자손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아담의 몇 대 후손이지만 마찬가지고 우리 자식도 마찬가지고. 끊임없이 우리네 운명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죽음으로 가는 것.
그런데 왜 인간은 태어나면 필히 저주받고 죽어야 되는가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죠.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아니니까 모르잖아요. 하나님께서는 “내가 알려줄게.”라고 하면서 장자를 당겨서 죽여요.
어린 장자를 당겨서 죽이는데 당겨서 죽인다고 해서 ‘아, 이래서 죽는구나.’ 몰라요. 모르는데 장자를 죽이되 다 같은 장자를 죽이는데 ‘어? 한쪽에는 맏이인데 안 죽는 아들도 생기네?’라는 현상이 일어날 게 아니겠습니까. 애굽 나라의 모든 장자는 다 죽는다. 그런데 특별히 예외조치가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쉬운 예로 노아 때 땅에 있는 사람 다 죽는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죠. 땅 위에 그냥 있으면 다 죽는데 하나님께서 노아가족 여덟 식구는 땅 위에서 살게 한 게 아니고 역시 땅에서 벗어나서 물 위에서, 심판하는 물 위에서 사는 조치를 내렸습니다. 그게 뭡니까? 방주였죠. 그게 방주였습니다. 그게 언약이었어요.
언약이라는 것은 ‘너희만큼은 심판에서 빼줄게.’가 아니라, 너도 심판받아. 너도 심판받는데 구원은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언약을 준 게 아니고 언약 자체를 건져내기 위해서 너는 그 일에 대해서 네가 같이 휘말린 거예요. 방주라는 것의 가치를 위해서 그들이 차출되었고 거기에 동원된 겁니다. 구원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거예요.
‘노아 너희 식구만큼은 내가 구원해줄게.’ 이런 거 없어요. 그럼 노아 식구는 그냥 높은 산에 가서 남들 물 심판받는 거 구경만 하고 노아 여덟 식구는 물이 차오르고 차오르다가 어디서 스톱하겠습니까? 노아 여덟 식구 있는 발 끝에서 스톱될 때 ‘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는구나.’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방주라는 것은 생뚱맞은 거예요. 엉뚱한 거예요. 이게 왜 필요한지 모른단 말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데 그냥 우리가 사는 땅, 딛는 땅 그것만 빼놓고 나머지는 물로 심판할 때 우리는 ‘아, 하나님은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니까 지옥 가게 하고 나는 구원받고.’ 이게 되는데, 아니, 내가 살던 땅, 고향 땅까지 물에 잠겨버리면 ‘도대체 하나님의 이 심판사건 취지가 누구를 구원하기 위함인가?’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만들어요.
방주 구원이죠. 그런데 방주는 노아 때까지 없던 거예요. 그전에 방주 있었습니까? 없죠. 없는 것이 구원받는 거예요. 없는 것이. 없는 것이 구원받아요. 노아는 있잖아요. 있으니까 구원 안돼요. 없는 것이 구원받고 없는 것이 구원받는 데에 거기에 참여 받고 초청받고 청함을 받은 자가 노아가족이다 이 말입니다.
똑같은 원리에요. 유월절에 다 죽어요. 장자 다 죽어요. 애굽나라의 장자들 다 죽습니다. 저주받는 게 합당해요. 하나님께서는 애굽 장자를 치고 그다음 이스라엘도 장자를 칩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이미 네 아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죽었다 치자. 네 아들은 이미 죽은 건데 그 죽은 것을 대신해서 너희들이 키웠던 양의 죽음으로 ‘우리 아들 죽었어요.’라는 식으로 우리 아들 죽었다고 문설주와 문지방에 네 아들 죽은 피를 발라라.
그러면 아들 죽은 것을 뭐로 대신한다 했습니까? 양이 대신하죠. 그러면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문지방에 바르면 그 집안은 뭐가 되겠어요? ‘우리 아들 이미 죽었어요.’가 되겠죠. 그러니까 아들을 찾아서 다 죽게 만드는 천사가 와서 “이 집안은 착한 집안이야. 이 집안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집안이야.” 그래서 넘어갑니까? 아니에요. “이 집안의 사람들은 신앙이 좋아서 죽이기 아까워. 우리 죽이지 말고 그냥 넘어가.” 이래서 넘어갑니까? 아닙니다.
죽음의 천사가 넘어간 이유는 단 하나에요. “야, 가자. 가자. 이 집안은 이미 손 봤다. 이미 아들은 죽었어.” 다 죽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뭐냐? 장자 한 사람을 두고 볼 때에 그 장자는 죽은 장자에요. 죽은 장자인데 그 유월절 밤이 지나고 양은 죽고 장자는 살아남았잖아요. 그게 바로 인간들이 생각지 못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된다는 거예요. 사랑이 된다는 거예요. 은혜라는 거예요. 은혜.
그러니까 제 말은 은혜라는 것은 반드시 무슨 환경을 전제해야 돼요? ‘다 죽여버린다’를 전제로 할 때만 하나님의 은혜가 새롭게 감사가 되죠. 세상 살면서 이런저런 짜증나는 일 있죠? 화딱지 나는 일 있죠? 남하고 다투고 억지로 참아야 되는 일 있죠? 그럴 때 우리는 성급하게 이런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번 문제만 해결해준다면 하나님께 감사하겠습니다.’ 그냥 평소의 우리 본성대로 자연스럽게 그런 태도를 보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거 안 받죠.
‘네가 죽어 마땅함을 아느냐?’ 이 조건 하에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생겨납니다. ‘네가 지금 뭐 엉뚱한 걸로 화내고 싸우고 짜증내는데 네가 과연 네가 보기에 그런 일로 짜증낼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냐? 너는 죽어 마땅해.’라는 것을 분명히 할 때, 비로소 시편 136편 10절의 말씀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장자 칠 때 나도 마땅히 당연히 죽어야 되는데 살아서 주님의 인자하심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증거하게 해주셔서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증인되게 하셔서 고맙습니다. 그게 바로 진정한 고마움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