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아빠와 함께 2025. 4. 23. 10:09

496강-YouTube강의(개 시편 22:16)20250422-이 근호 목사


제496강, ‘개’. ‘멍멍’하는 그 개입니다. 사람이 개를 바라보면서 ‘저거는 개고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이다.’ 분명히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서 자기 본질에 대해서 제대로 확정을 한다, 그렇게 자부합니다.

만약에 사람보고 개라고 이야기하면 모욕적이고 그것은 내 인간됨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그렇게 간주합니다. ‘저를 개라고 봐줘서 고맙습니다.’ 뭐 이런 거 없어요. ‘내가 어딜 봐서 사리분별도 못하는 개입니까? 내가 어딜 봐서 사람 취급보다 더 떨어진, 짐승 취급만 받아도 넉넉한 그러한 개 부류에 속하는 자겠습니까? 나도 대우받을 만큼 대우 받을만하고 인정받을 만큼 인정받습니다. 나는 고상하고 존엄한 인간에 속하지, 개 아닙니다.’라고 우기고 싶죠.

그처럼 인간은 더러운 짐승… 개 같은 경우에는 옷도 입지 않고 맨발로 더러운 거리를 자기 마음대로 설치고 다니니까요. 개한테는 양심이라는 것도 없고 윤리도 없고 도덕도 없죠. 그러니까 인간보다 쳐줄 하등의 근거가 없어요, 개한테는. 바깥에 자도 마땅하고 들개가 되도 합당하고. 인간들의 레벨과는 족히 비교하지 않는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그렇게 거룩하고 천사하고 비등할 정도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는 인간을 개로 표현해버립니다, 성경에서.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시편 22편 16절에 나옵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여기 ‘악한 무리’는 비록 악하지만 인간이라고 쳐줄 수 있어요. 그러나 이 악한 무리를 성경은 그냥 짐승으로 봐주는 것이 아니고, ‘개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개가 한두 마리가 아니죠, 무리니까. ‘그 개’가 아니라 ‘개들’이.

인간인데 개라고 규정지을 만한 그러한 계기가 뭐냐? ‘나’를 에워쌌잖아, 나. 나를 에워쌌단 말이죠. 좋게 에워싼 것이 아니고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시편 22편 16절의 이 예언의 말씀은 과연 인간들이 생각하는 ‘우리끼리는 다 인간이라 치자. 개는 결코 아니야. 소도 아니야. 고양이 아니야. 우리는 그것보다 존엄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이야.’라고 서로 이렇게 의견을 같이 한다할지라도 성경은, ‘그건 네 생각이고 나는 너희들을 개라고 규정하겠다. 그 근거는 바로 너희들이 나를 에워싸고 내 수족을 찔렀잖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인간인 것을 자부하고 있는데, 인간이라고 자부하는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오신 거예요.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께서 딱 와보니까 아, 하나님 스스로 만든 인간이 그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고장 났어요. 인간 값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는 인간 값을 하라고 만들었는데 그 값이 안 나와요. 인간들이 굉장히 수상합니다.

이사야 1장에 그런 말씀 있죠. 내가 너희를 낳았지만 자식이 아비를 못 알아본다. 소보다 못해요. 차라리 소는 자기 주인을 알건마는 너희들은 네 아비를 알지 못한다(사 1:2-3).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아들로 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출애굽기 4장 22절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이렇게 해서 아담의 장자가 아니고 그 노선을 틀어버려서 기존의 아담 노선 말고, 아브라함 노선을 따로 하나님의 율법으로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살피는 거예요. 네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인정해서 아버지 말을 듣는지 안 듣는지를 계속 살피는 겁니다. 보니 이거는 뭐 자기 아비를 못 알아봐요.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이렇게 인간을 개라고 전락시킴으로써 여기 개들에 에워싸여 있는 ‘나’를 갑자기 부각시킵니다. 도대체 여기 ‘나’라는 게 과연 누구기에 그 사람을 죽인 자가 더는 사람이라는 권한을 행사할 수 없이 될 정도로 그냥 개에 불과한가. 그것은 바로 에워쌈을 당했던 ‘나’라는 이 존재가 인간도 아닌 개 같은 인간들에게 둘러싸임으로써 이것이 들추어지고 부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뒤에 18절,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이것은 뭐냐 하면 그 개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옷을 벗겨서 자기 소유화시키는 그 대목인데 마가복음 15장 2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못박고 그 옷을 나눌쌔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예수 당신은 끝까지 당신 옷조차 걸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그 정도로 당신은 무가치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자기가 고상한 인간이라고 자부하는 인간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거예요, 예수님에 대해서. 입던 옷을 벗김으로써 ‘거봐, 당신 옷 벗겨놓으니까 바로 뭐… 볼 거 뭐 있어? 유별난 거 있어? 똑같네, 일반 죄수하고. 뭐 특별한 거 없네.’ 이런 겁니다.

그런 동화 있죠. 어떤 암탉을 얻었는데 암탉이 매일같이 황금 알을 낳는 거예요. 황금 알을 낳으니 참 얼마나 고맙습니까. 참 고마운데 조바심이 난 거예요. ‘저 닭 안에 황금 만들어내는 기계 장치가 있다.’ 이렇게 한 거예요. 그 이야기 아시죠? 그래서 배를 쪼갰잖아요. 똑같아요! 똑같아.

예수님도 옷 벗기니까 똑같아요. ‘뭐? 우리 괜히 주눅 들었잖아. 똑같잖아. 저 봐. 우리한테 체포된 거 봐. 반항도 못하는 거 봐. 진작 보낼 걸.’ 이런 식이란 말이죠. ‘뭐 난 대단할 줄 알았지. 하늘의 천사라도 내려올 줄 알았지. 뭐 없네. 개뿔도 아무것도 없네.’ 이런 관점.

주님은 끝까지 자기 몸을 벗겨서까지라도 인간의 정체를 폭로시켰습니다. 그게 말씀화 되어서 오늘날 말씀으로 준 거예요. 예수 믿음으로 뭔가 지금보다 더 향상된 질이 좋은 더 우수한 내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주님 가까이 가보니까… 별 거 없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건 안 믿어도 돼.

‘그동안 내가 인간성 좋아서 믿어줬는데 이제는 안 믿고 싶어. 오십 년 믿었으면 됐지, 뭐. 그 정도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나 할 도리 다 했다.’ 이러한 거들먹거림. 거들먹거림. 아직까지 그 정도 세월이 오십 년까지 안 되니까, 속으로 싹은 났어요. 복음의 싹이 아니고, 거들먹거림의 싹은 났는데 좀더 복음 알고 교회 다녀보면…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예수 믿는 거! 그런 조바심이 황금 닭을 미리 잘라본 거예요. ‘아니, 뭐 아무것도 아닌데 괜히 쫄았잖아, 정말.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인데 뭐.’ 이런 식으로.

그게 바로 우리 주님이 십자가로써 끝까지 죽음을 통해서 어느 인간 가운데 인간 같은 인간, 하나님이 처음 만든 인간은 nobody, 아무도 없음을 십자가를 통해 알려주신 것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합시다.

'유튜브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물고기와 새  (0) 2025.04.23
  (0) 2025.03.21
내일 일  (0) 2025.03.21
애굽의 장자  (1) 2024.12.18
음녀  (0) 2024.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