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강-YouTube강의(칼 창세기 27:40)20250318-이 근호 목사
제495강, ‘칼’. 보통 사람이 요리사나 또는 미용사나 사람이 칼을 들고 있죠. 그런데 칼이 사람을 들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습니까? 칼이 사람을 들게 하는 사람이 창세기 16장 12절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 누가 나오느냐 하면 이삭보다 열세 살 형이 되어있는 사람, 이스마엘이에요.
이스마엘과 이삭은 아버지가 같아요. 아브람으로 같습니다. 같은데 그건 이스마엘 생각이고, 이삭의 경우는 아브람이 아버지는 맞아요. 그러나 자기 출생에 더 근원에 접근해보면, 자기 아버지는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내가 너를 낳았다.’를 하지 못하도록 아들이 어떤 의미에서 아버지를 낳는 그러한 현상을 하나님이 지상에서 발생시켰어요.
다윗의 후손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에요. 그런데 다윗의 주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죠? 다윗의 조상은 예수님이고 다윗의 후손은 예수님이고. 그럼 그 구조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이 되어야 될 구조냐?
이 땅에서는 다 육이니까, 육의 구조에서는 아버지가 없으면 자식이 없어요. 그런데 언약 구조에서는 후손이 없으면 아버지가 없어요. ‘아들이 아버지를 낳았다’는 말은 못하지만, ‘그 아들이 되기 위해서 준비된 아버지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 돼요.
초점이, 아버지 있고 그다음에 아버지의 아들, 또 아들이 아버지 되고 그다음 자식 낳고 이렇게 쭉 내려오는 거예요. 내려오는 그것을 쳐 올라가게 만들어버리면 이렇게 됩니다. ‘내려오는 것과 올라가는 것이 똑같다’가 돼요. 내려오는 것과 올라가는 것이 똑같다.
아담에서부터 예수님까지 내려왔을 때 예수님은 아담의 표상이다. 나를 위해서 아담이 있었다고 이야기해요.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아담이 있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족보도 그렇고 누가복음의 족보가 내려옴, 올라감 방향이 반대죠.
예수님 족보를 소개하면서 두 가지 족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 세상에서는 아버지가 먼저고 자식은 나중이거든요. 그러면 그 자식은 자기의 소속과 존재 자리가 아버지에게 종속돼요. ‘아버지 없으면 내가 없다’가 돼요. 아버지 없으면 내가 없다,가 된다고요. 그걸 지금 하나님께서 엎으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이 칼을 쥐고 사용한다. 칼은 도구니까. 그런데 창세기 16장 12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이스마엘의 경우도 그렇고요. 창세기 27장 40절, 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다. 칼을 믿고 생활하겠다는 거예요.
에서가, 칼을 믿고 생활하겠다. 그러면 보통은 뭘 믿어야 되느냐? 아버지를 믿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세계의 기본인데 뭐가 빠졌어요? 아버지가 자기한테 저주해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이 자식은 믿을 아버지가 없어요. 믿을 아버지가 없고 자기 자신부터 새로 시작해야 된다고요.
그런데 그러한 삶의 환경을 누가 제공했느냐 하면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이삭이 에서한테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다고 할 때, 에서에게 있어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고 칼이니까 자기 힘으로 이제 버티고 나가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야곱에게는? 반대로 야곱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죠.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지옥 가는 사람은 이 땅에서 자기 말고는 믿을 사람이 없는 거고, 천국 가는 사람은 천국 가기 이전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인간으로 간다. 하나님의 복이 만들어져있는 복의 하나의 결론으로 만들어지는 대상이 바로 축복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더 확대해봅시다. 이사야 보겠습니다. 이사야 보면 이방나라가 있는데 10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이 말은 ‘앗수르가 몽둥이 들고 이스라엘을 팬다.’ 그렇게 보통 생각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앗수르 자체를 몽둥이로 삼아서 하나님의 야구 방망이로 앗수르를 삼아서 하나님이 자기 이스라엘을 친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점에 대해서 여기 도끼 예를 들어서 나와요, 이사야에. 그 점에 대해서 앗수르나 바벨론이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이사야 10장 15절에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라고 되어 있어요.
이건 뭐냐 하면, 하나님과 연관성 없이 관계없이 스스로 자기가 쌓아놓은 자기 힘에 의지해 살아가는 모든 보편적인 인간들을 앗수르나 바벨론을 통해서 그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저주를 받은 자, 믿을 것은 자기밖에 없어요. 아까 에서도 그렇고 이스마엘도 또한 그렇죠. 복에서 잘렸으니까. “나가! 우리 집에서 나가. 약속의 집에서 나가!” 밀어냈단 말이죠.
그럼 제자들은 어떻게 했겠어요? 제자들 본성은 어땠겠습니까? 마태복음 26장 51-52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많이 들어봤던 말씀인데요.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사실 이 말씀은 이렇게 해야 돼요. 망하는 사람이 의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고, 자기가 들고 있는 도구로서의 칼. 자기는 주인이 되고 칼은 도구가 되는 거예요. 시편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요. 이방민족은 말을 의지하고 마차를 의지하지만,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뿐이다.(시 20:7) 전쟁은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름뿐이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자,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보여주는 그러한 매개체로 하나의 작품으로 살아가셔야 돼요. 그걸 어떻게 하느냐? 내가 나를 지키지 않는 식으로 살아가야 된다 이 말이죠. 내가 나를 지키지 않는 식으로.
내가 지키는 무기들을 집안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뭐 올림픽 금메달 딴다든지 이런 거 있잖아요. 남 앞에 힘이 될 만한 것들, 그걸 자랑하면 안돼요. 그건 마치 몽둥이가 주인을 드는 것처럼, 도끼가 자기 주인을 들려고 하는 것처럼 그것은 망하는 사람들이 하는 모습이죠.
주께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주께서 사용하면 사용하는 대로 주의 손에 들린 하나의 도구가 되어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자신의 판단은 완전히 제로가 되어야 돼요. 아이큐가 영(0)이 될지언정 내가 내 행동에 대해서 개시점이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