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12 - 의미 삭제
25,03,03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지금부터 2025년도 대구강의를 시작하겠는데, 시편 96편 5절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찾으신 분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시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여기에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남들이 믿는 신을 헛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고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제시할 수 있는 증거는 무엇이냐는 겁니다.
우리가 모두 다 똑같은 인간이고, 그런 같은 인간들이 각자 신을 믿는다고 하면, 그런 가운데 "남들이 믿는 신은 엉터리고 내가 믿는 신은 옳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는 과연 무엇이냐는 말이죠.
* 여호와 하나님 VS 만방의 신 !!
시편 96편에 5절에서 "이스라엘을 빼놓고 모든 신은 다 가짜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구약에서 근거를 제시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을 '언약'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신은 자기가 필요해서 믿는 신인데, 그것이 이방인들이 믿는 신, 즉 우상이라는 이방신이고 만방의 신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가 필요해서 믿는 신이 아니고, 하나님이 필요해서 스스로 나타내신, 즉 스스로 일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여호와의 특징은, 사람의 요구에 부응하는 신이 아니고, 모든 인간의 요구를 거절하고, 하나님이 스스로 하나님을 구성하는 신이라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인간의 의지가 끼어 들 수 있습니까? 도저히 끼어 들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의 의지가 끼어 들면 뭐가 되지요? 만방의 신이 되는데, 모든 인간들의 신이 된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들이 원하고 필요한 신은 만방의 신에 해당한다는 겁니다.
* 여호와 하나님의 특징 !!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이 끼어 들 수가 있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이게 구약성경에서 어떤 특징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다음과 같다는 말이죠.
제가 몇 가지만 이야기할게요. "나를 찾아주셨다", "나에게 다녀가셨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나를 건져주셨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여기에 있는 '나' 라는 것은,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고 주인공은 따로 있는데, "그 주인공에 의해서 내가 다루어졌다" 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까? 만방의 신은 자기가 필요로 한 신인데, 그런데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를 구성하는 신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찾아오시고, 다녀가시고, 건져주시는, 그런 특징을 갖고 있다는 말이죠.
* 오늘로서 내 인생은 끝 !!
우리 대구모임에서 여러분의 평균 연세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오늘로서 자기 인생이 모두 끝났다고 여기고, 그러면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 남아있을까요?
자기 인생을 이제 다 끝냈는데, 그리고 나서 자기 뒤돌아볼 때, 우리에게는 과연 무엇이 남아있을까요? 이것을 객관식으로 해서, 여기서 제가 친절하게 보기를 드리겠는데, "1) 지난 시간, 2) 의미" 라는 말이죠.
오늘로서 이제 모든 것이 끝났는데, 그렇게 끝나고 난 뒤에 무엇과 무엇이 남아있느냐는 말이죠. 여러분은 '지난 시간'이 남아있습니까? 지난 자기의 생애가 남아있느냐는 겁니다. 아니면 '의미'가 남아있습니까? 어느 쪽이냐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뒤돌아보면 자기 의미가 남아있는데, 자기 의미, 즉 "내가 몇 살 때 세례를 받았고, 교회를 몇 년 동안 다녔고, 성경공부를 얼마나 했고, 열심히 기도해서 애들을 잘 키웠고", 그렇게 자기가 생각하는 의미, 즉 자기가 주인공이 된다는 말이죠.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님을 구성하는데, 그래서 자기는 그 하나님을 철석같이 믿었다고 생각하고 뒤돌아보았는데,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무엇이 튀어나온다는 겁니까? '나의 의미' 라는 것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의미의 찌꺼기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것인데, 그게 잠재되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냐는 말이죠. 그래서 그동안 평생을 진짜 하나님을 믿었는지, 아니면 만방의 신, 즉 모든 인간이 필요에 따라서 믿는 신을 믿었는지, 그것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의문을 자아내게 하신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천국의 경우에, 인간들은 천국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하면, 베드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말이죠.
* 천국은 위치인가? 의미인가?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위치를 궁금해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찾아가겠다는 겁니다. 자기가 거기에 맞추어서 살겠다는 말이죠. 그래서 부자 청년도 "나도 영생을 얻었으면"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위치에 대해서 말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정답이 아니고 진짜 정답은 "천국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야 한다는 말이죠. 천국의 위치를 찾는 것은 "내가 찾아가 찾아갈 수 있는 천국이었으면 좋겠다" 라는 것이 들어있지만, "천국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라는 것은, "내가 어디 있든지 간에 그 의미가 나에게 꾸준히 내려왔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폭설이 내리듯이 내려와 주어진 것인데, 7살 때 주님의 의미가 주어졌고, 20살 때 주님의 의미가 주어졌고, 또 30살 때 주님의 의미가 주어졌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이제 살아갈 만하니까, "이제 슬슬 천국이나 가볼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은 어디서 어디서 발견합니까? 어디에 가면 천국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자꾸 위치를 두리번거리면서 위치를 찾는다는 말이죠. 즉 "이제 내가 챙길 내 것은 챙겼다" 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정도면 내 것은 확보가 되었고, 이제 천국에 가는 것만 남았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위치를 찾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도,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동안 자기가 생각했던, 자기가 들어가는 천국, 즉 자기 의미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진짜 천국의 의미는 무엇이냐 것인데,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하나님은 스스로 구성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 의미에 우리 인간의 자기 의미가 끼어 들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이만큼 키웠는데" 라고 하면서, 어느새 자기 의미가 주님의 의미에 자꾸만 파고 들어간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아빠와 엄마가 아이와 침대에서 같이 자다가, "이제는 네가 독립해야 한다. 어릴 때부터 혼자서 자야지" 라고 하고 하면서 아이의 방에서 따로 재우게 되면, 그런데 눈을 떠보면 어느새 아이가 엄마와 아빠 사이에 끼어 들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아주 실감하게 느끼는 게 언제인고 하면, 그것이 엘리베이터를 탈 때인데, 엘리베이터가 이제는 꽉 찼다는 말이죠. 그런데 매너가 없는 사람은 거기에 마구 끼어 든다는 겁니다. 사람이 꽉 차서 이제 올라가야 되는데 말이죠.
그런데도 계속해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미 타고 있는 사람이 전력을 다해서 그 사람을 밀어낸다는 겁니다. "이 양반이 지금 어디를 밀치고 들어오려고, 저리 꺼져라" 라고 하면서 말이죠.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즉 스스로 하나님이 스스로 천국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누가 자꾸 끼어 들려고 합니까? "나도 좀 끼워 주이소" 라고 하면서 자기 의미가 자꾸만 끼어 들 때, 그러면 주님께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주님은 그 '나의 의미'를 밀어내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밀어냄을 느낄 때, 우리는 "아하, 천국은 나를 넣어주지 않는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천국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천국은 '나'를 밀어내면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밀어내는데, 그러면 왜 '나'를 밀어내느냐 하면, 그 '나' 라는 것이 있을 때, 그것은 '나'의 의미를 품은 '나' 라는 말이죠. 자기 의미, 즉 "나는 이렇다, 나는 이렇다, 이렇다" 라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 다시 정리하면 !!
여기서 다시 해보겠는데, 천국의 의미는 뭐냐 하면, 천국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즉 스스로 일하시는 분이 스스로 하시기 때문에, 천국의 의미는 다른 인간들은 끼워 넣어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천국의 의미는 뭐냐 하면, "내가 끼어 들 수 없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나' 라는 것이 끼어 들 수 없다고 허면, 그러면 그 '나'는 천국에 갑니까? 못 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천국에 못 간다' 라는 의미가 천국에서 나와서 나에게 찾아오고, 나를 불러내고, 나를 건져줄 때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간단하지요? "일체 나의 행함은 의미가 없다" 라는 것인데, 인간은 하루에 8만4천가지의 생각을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혼자서 계산해봤다는 말이죠. 하루가 24시간이니, 나누기를 해서 1초에 몇 번을 생각하는지 계산해보니, 잠자는 시간 6시간을 빼고 나머지 18시간으로 해보면, 거의 1.71.3초당 한 번씩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의미' 라는 말이죠. 자기 의미인데, 그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 "나는 다음에 무슨 행동에 나서면 되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자기 스케줄이고, 자기 계획이고, 자기 목적이라는 겁니다.
그게 쌓이고 쌓이면 한 평생이 되고, 그렇게 오늘로서 마지막 인생을 끝냈을 때, 돌아보고 남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나의 의미' 라는 말이죠. 주님이 찾아와서 구원을 하신 것인데, 그것이 주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자기가 무엇을 해서 구원이 되었다고 하니까,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가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면, 밀어낸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밀어내는 것, 이게 천국의 의미고, 주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 파괴되지 않으면 멸망한다 !!
어제 낮에 설교한 것 중에서 두 문장을 이야기해보겠는데, 오늘이 월요일이니까 아직은 가능하지 싶은데 말이죠. 두 문장 중에서 한 문장은 뭐냐 하면 "파괴되지 않으면 멸망한다" 라는 겁니다. 이것과 같은 뜻으로 표현한 것이 있는데, "인간은 정신을 차려서 지옥에 간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정신을 차려, 돈도 안 되는 복음에 왜 아직까지도 신경을 쓰고 있어? 너의 생활, 너의 시간을 다 빼앗아 가는데, 왜 아직까지 그걸 붙잡고 있어? 너는 너의 의미를 가져야지. 너를 키워주고 너를 지켜주는 것은 너밖에 없어. 정신 차려라" 라는 것인데, 하지만 그렇게 정신을 차려서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마귀는 인간을 어떻게 합니까? 스스로 인간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었는데, 그런데 성령은 인간을 주님의 몸종으로 만들었다는 말이죠. 몸종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일에 의미가 다 날아가 버린 사람인데, "시켜만 주이소" 라고 하는, 그게 몸종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타신 나귀가 있는데, 그 나귀가 자기 마음대로 못한다는 말이죠. 이런 이야기가 인간을 얼마나 모독하는 것인지 모르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너는 네 줏대를 살려야지. 너는 배알도 없어? 네 의지가 있고, 네 계획이 다 있잖아?" 라고, 그런 식으로 나오면 그것은 우리가 납득이 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래, 나는 내 것을 챙겨야지. 다른 누구도 내 것을 챙길 수 없어" 라는 것인데, 하지만 이렇게 되면 무엇이 안 되는 겁니까? 파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렇게 파괴되지 않으면 지옥행이라는 말이죠.
* 나를 파괴시키는 일만 주입된다 !!
제가 두 번째 언급한 것은 뭐냐 하면, 이게 같은 뜻인데, "나를 파괴시키는 일만 주입된다" 라는 겁니다. 자기 육신은 멀쩡한데, 문제는 자기 속에 자기 의미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자기 의미는 만방의 신을 믿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필요한, 자기를 구원해주는 신을 믿는다는 말이죠. 그것이 신천지인데, 사실은 한국교회가 다 그렇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신을 자기가 믿는다는 것이죠. 그러니 자기가 필요로 해서 믿는 신을 자기 손으로 허문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자기가 필요해서 믿는 신을 자기가 왜 파괴를 합니까? 그런 일은 누군가가 와서 "그것은 가짜야" 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파괴해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말이죠. 그 일이 무슨 일이냐 하면, 이게 주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전체가 뭐냐 하면 "찾아오셨다, 다녀가셨다, 나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다, 나를 건져주셨다" 라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성경의 내용이 다 그러한데, 선지자부터 성도까지 다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 예수님의 설교현장, '없다' !!
그런 증거들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볼게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이 설교를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의 설교현장에서, 그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지요?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내 영생이 없다"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을 그렇게 따르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설교 현장은 '없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요 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그 다음에 스데반의 설교현장은 어떻게 되었어요? 돌을 들고 마구 달려들었다는 말이죠. 세 번째 사도바울의 설교현장은 어떻게 되었지요? 이것은 사도행전 마지막에 나오는데,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라는 것인데, 이게 무엇입니까? 이런 것들과 오늘날 교회현장을 한번 비교해보시라는 겁니다.
(행 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이 왜 떠나고, 왜 죽이려고 하고, 왜 깨닫지를 못합니까? 그들 속에 무엇이 있기 때문인가요? 누구의 몸종이 되기 싫다는 것인데, 그런데 배알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주님에 의해서 그게 파괴되고 작살나서, 이제는 시키는 대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온다는 말이죠. 로봇도 그런 로봇이 없다는 겁니다.
그게 곧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파괴이고, 최대한도까지 끝까지 인간을 모독하는 것인데, 그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고, 스데반의 설교이고,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이라는 말이죠.
성경해석은 간단한데, 즉 "인간을 최대한으로 모독하는 것인데, 너는 이것을 감당할 수 있겠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즉 인간의 시선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타인의 신체가 닿으면, 그게 모독이 된다는 말이죠.
이것을 실제로 사람에게 시킬 수 없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이것을 코라고 하고, 이것을 눈이라고 하자는 겁니다. 이렇게 인간의 시선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외부의 신체가 자기 신체를 건드리면, 그렇게 "임마, 니가 뭔데? 니가 뭔데?" 라고 할 때가 가장 가장 모독스럽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선 넘지 마라. 네가 뭔데 나의 의미 영역에 내 허락도 없이 침범해?" 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설교가 그러했고, 스데반의 설교가 그러했고, 사도바울의 설교가 그러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설교부터 사도바울의 설교가 그대로 수집되고 편집된 것이 신약성경이라는 것인데, 사도요한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신약성경, 우리가 이런 말씀을 듣고 있다는 것 자체가 두 종류인데, 하나는 뭐냐 하면, 전혀 성경의 의미를 모르면서 듣는 경우이고, 그게 아니면 이익을 보려고 듣는 경우라는 겁니다.
이 두 가지 경우밖에 없는데, 만약에 진짜 의미를 알게 되면 "나는 안 들을 거야" 라고 하면서 도망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세 번째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말씀 자체가 살아있어서 '나'를 파괴할 경우인데, 그러면 그 말씀에 중독되어서 끌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말씀은 생명이 되고, "그 말씀 없이는 나는 못 살겠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하나를 살펴보겠는데, 요한복음 8장 23절에서 25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 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8: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 8: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 Who are you?
23절에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세상에 속하고 나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라고 하는데, 이게 뭐냐 하면 "너희는 괜찮다. 너희는 죽었다" 라는 겁니다. 아주 인격적인 모독이라는 말이죠.
그럴 때 그들이 중요한 질문을 하는데, 그것이 25절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 누구십니까?" 라는 것인데, 50년 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평생 복음을 들었는데, 왜 우리는 그동안에 이 질문을 진솔하게 한 번도 하지 않고 살았느냐는 겁니다. 교회만 다니면 구원을 받는다는, 안일함 때문은 아니라는 말이죠.
이것은 실존적인 질문인데, "누구냐, 너는?" 라고, '올드보이' 영화에 그런 대사가 나온다는 겁니다. "나를 모독하고 파괴하는 당신은 누구세요?" 라는 것인데, 그러자 예수님은 "나는 너에서 너를 쫓아내기 위해서 왔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너에서 너의 의미를 쫓아내는, 너 자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 스스로 만들어진 세계에서 왔기 때문에, 네가 구성하려는, 네가 스스로 만드는 세계를 나는 용납하지 않고 심판하겠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심판인데, 원만한 대화가 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대화가 안 된다는 것이 구약 때부터 이미 예고가 되어있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잠언서 1장 23절을 보겠습니다.
(잠 1: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여기서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라고 하는데, 이렇게 신을 부어주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력을 발휘하겠다는 뜻이란 말이죠. 그러면 그 결과 하나님이 신이 왔을 때, 이 사각형 안에 우리가 무엇을 넣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는데, 교재 99페이지를 통해서 미리 한번 살펴봅시다. 이 사각형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되는지, 여기 교재에 그것이 나오는데, 아주 재미있는 문제라는 말이죠.
교재 99페이지 중간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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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수학점수가 95점, 80점, 50점, 0점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95점을 받은 사람은 0점을 받은 사람보다 천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수학점수로 심판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95점을 받았던 0점을 받았든 상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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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진짜 문제가 나오는데, 그러면 저쪽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러면 수학공부를 안 해도 되겠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한 정답은 무엇인고 하니, "아무리 해도 똑같은 편이다" 라는 것이란 말이죠.
벌써 "내가 얼마나 편하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의미를 챙긴다면, 그것도 여전히 자기 의미가 자기에서 쫓겨나지 않은 입장인데, 그러면 95점이든 0점이든 주님의 의미, 즉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겁니다. "죄를 용서한다" 라고 하니, "그러면 죄를 지어도 괜찮겠네" 라는 것은, 아직도 자기 의미를 챙기고 있다는 것이죠.
* 야호 !!
어제 낮 설교제목이 "죄를 기억치 아니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두 글자로 줄이면 "야호!"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야호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기억치 않으면 죄를 아예 보지 않아야 하는데, 그런데 죄를 다 기억하신다는 말이죠. 죄를 다 기억하면서 죄를 기억치 아니하신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다시 교재 99페이지를 보면 "아무리 해도 똑같은 편입니다.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전혀 넘어가지 못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자기 의미의 경계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는 말이죠. 자기 의미를 자기에서 쫓아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죄를 지어도 괜찮겠네" 라고, 즉 "빵점을 맞아도 괜찮겠네" 라고 하는데, 이것은 곧 만방의 신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이 자기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지, 즉 자기 의미로서 하나님을 납득해서 믿고자 하는 이방신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인데, 여호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 이 사각형을 한번 채워보겠는데, 아무래도 채우지 못할 것만 같은데 말이죠. 여기에서 사각형을 채운다고 하는 것은, "나의 신을 너에게 보여주게 되면 그 결과로 어떤 현상이 나오느냐?" 라는 겁니다. 이것을 크게 쓰면, '책망' 이라는 겁니다.
* 책망의 능력으로 !!
잠언서 1장 23절에서 "내가 나의 신을 너에게 부어준다" 라고 해놓고, 24절에서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의미 쪽에서 우리를 책망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주님의 찾아오심이고, 주님의 방문하심인데, 그러니 주님에게서 건짐을 당할 때 책망을 듣고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잠 1: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잠 1:24)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 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다시 말해서, 책망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 이 얼마나 고맙고 신나는 일이냐는 겁니다. 회개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책망을 듣고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책망하는 능력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한의사가 침을 놓으면 그 침이 파고 들어오는데, 그게 아프다는 말이죠. 그런 아픔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게 구약인데, 그렇다면 신약에도 그런 말씀이 있을까요? 물론 있는데, 그게 누가복음 2장 35절에 나온다는 말이죠.
여기서 누가복음 2장 25절에서 35절까지 보겠습니다.
(눅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눅 2: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눅 2: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눅 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 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 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눅 2: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눅 2: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눅 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예루살렘에 '시므온' 이라는 경건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한 말 중에서 유명한 것이 29절에 나오는데, 우리끼리 유명한가요? "주여, 이제 종을 편안히 놓아주시는군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자기에게서 자기가 빠져나오는데, 그렇다면 그 자리는 무엇이 차지를 했습니까? 주님의 몸종이 차지한다는 겁니다. 즉 주님의 의미를 위해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오나이다" 라고 하는 것이 더해졌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그 이전까지는 자기가 주인공이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자기가 주인공이라는 그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주님이 다 쫓아내어 주시는데, 그렇게 쫓아낼 때는 성령이 오셔서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27절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성령이 오시게 되면, 그 이전 것은 다 쫓겨나고 주님의 의미가, 이전에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하던 그 의미를 자리를 차지한다는 말이죠.
* 대체했다 !!
그것을 사도바울은 '대신하셨다', 혹은 '대체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대체' 라는 것, 즉 자기가 확보하고 있던 자기 자리를 쳐들어와서, 그것을 성경에서는 '침노' 라고 하는데, 주님께서 쳐들어와서는 "이것은 내 자리다" 라고 하시면서 바꾸어버린다는 겁니다. 자기가 주인이던 자리를, 주님이 주인으로서 그 자리를 꿰차버렸다는 말이죠.
여기서 우리는 "그럼 나는요?" 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는 없는데, 그러면 주님은 "너는 나의 몸종이 되어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달란트 비유인데, 즉 주인이 있든 없든 간에 주인이 하신 대로 움직이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평을 받게 된다는 말이죠.
마태복음 22장에 혼인잔치가 나오는데, 그게 누구의 혼인잔치인고 하면, 임금님의 아들 혼인잔치라는 겁니다. 여기서 백성들은 "임금님의 아들 혼인잔치에 꼭 가야 됩니까?" 라는 문제로 다투고 있는데, 그래서 그들이 내린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가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것은 핑계가 아니고, 자기 일이 바쁜데 왜 남의 잔치에 가느냐는 겁니다.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누가복음의 경우에는, 심지어 자기 결혼식이 있는데 그 자기 결혼식 때문에 임금님이 베푼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고 작살이 난다는 말이죠. 이게 도대체 납득이 되느냐는 겁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데, 소 장사는 소를 팔아야하고. 농사를 짓는 사람은 밭을 갈아야 하는데, 장사하는 사람을 장사해야 하고 말이죠.
그렇게 전부가 "우리는 바빠서 못 가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정중하게 거절을 했는데, 그 정중함이 결국은 자기 파멸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건방지다는 것인데, 왜 자기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죠.
하나님의 일방적인 횡포인데, 그 횡포는 인간에 대한 모독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나를 한없이 무한하게 모독과 궁지에 몰아넣어 주시는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사도바울에게서 표현된 성도의 특징이라는 말이죠.
한없이 우리를 밟아주시는 주님인데, 즉 "내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라는 겁니다. 자기 의미와 자기 자존심을 챙긴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성신에 와서 알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찾아와서 알았지요" 라고 하면서, 그것을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라 기쁘게 여기는 사람, 그런 사람을 두고서, "나의 의미 자리에 주님의 의미가 대신 찬 사람이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성령을 받은 시므온이 "이제 종을 편안히 놓아주신다" 라고 해놓고, 누가복음 2장 34절과 35절과 보면 자기에게 있던 경험을 그대로 일반화를 시킨다는 겁니다. 특히 35절에서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라고 하는데, 이게 주님의 일관된 일이라는 것이죠.
칼, 즉 "나의 의미를 파괴하지 않으면 주님이 찾아온 흔적이 있는 자가 아니다" 라는 것인데,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고 싶은데, 하지만 그것을 파기하지 않으면 주의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잘한다고 하면서 부추기는 것은 마귀의 일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잠시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는데, 여러분은 제가 이런 말을 하든 말든 그대로 살기 때문에 편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을 다시 한번 정리하는 입장에서 어렵게 해보겠습니다.
* 예수님은 응집이다 !!
"예수님은 응집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한 곳에 다 모으는 것을 두고 '응집'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일어난 모든 일, 우크라이나 전쟁이든 탄핵이든 비상계엄이든, 그 모든 것을 우리 주님이 일으켰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모든 의미는 예수님 한 분의 의미로 응집, 즉 집중되기 위해서 있다" 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냄비가 있다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요리를 할 때 모든 음식재료들이 결국은 이 냄비 안으로 다 모인다는 말이죠.
* 우리는 토핑의 재료들 !!
그래서 여러분이 라면을 끓일 때, 요새는 무인 라면가게가 생겨서, 거기서는 라면에 다른 것을 추가하면, 그것을 '토핑' 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라면이 8,000원이 될 수 있고, 2,000원짜리 소시지를 추가하면 만원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토핑을 하듯이 한다는 말이죠.
이게 어려우면 더 쉬운 예를 들어보겠는데, 역시 냄비라는 겁니다. 눈이 올 때 눈을 이 냄비에 담으면 수북하게 빙설처럼 쌓이는데, 그리고 거기에 불을 지펴서 끓이면 모든 형체는 어떻게 됩니까? 없어지는데, 눈은 없고 물처럼 다 녹아버린다는 말이죠.
고체가 액체로 바뀌었는데, 그렇게 바뀌면서 다시 새로운 고체가 된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 몸이 된다는 말이죠. 우리의 몸이 중간에 주님에 의해서 녹여져서 그리스도 몸의 하나의 부분, 즉 지체가 되는데, 이 작업을 우리 주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즉 주님의 죽음에 함께 참여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 몸이 가지고 있는 영생을 공유할 수가 없다는 원리라는 말이죠. "나와 함께 죽지 아니하면 내 몸에 섞일 수 없다" 라는 것인데, 이 주님의 몸에 섞여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천국의 의미인데, 이것도 모르고 베드로는 "천국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자꾸 위치를 이야기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위치를 찾으면 '나'는 어떻게 돼요? 녹아지지 않고 자기 응집이 유지가 된다는 겁니다.
자기 응집, 그렇게 자기 의미에 유지가 되면서 "나는 어떤 행동을 해야 구원을 받는가?" 라고 해서, 자꾸만 자기한테 의미를 강화시키면, 그러면 이 고체가 액체가 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자기한테 미쳐버리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 자신이 그만 응집의 최종 목표가 되니까, 즉 냄비가 주님의 냄비가 아니고 자기 냄비가 되니까, 여기에다가 선교, 전도, 헌신, 순교 등등, 이런 온갖 고난을 마구 마구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 이혼숙려캠프 !!
TV 예능프로에 '이혼숙려캠프' 라는 것이 있는데, 이게 법적으로도 있는 것으로, '이혼숙려제도' 라고 해서, 부부가 법원에 협의이혼의 의사확인을 신청할 경우에 일정한 숙려 기간이 지나야 협의이혼의사를 확인하는 제도라는 겁니다.
아무튼 그 프로에서 농구선수 출신 서장훈 씨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인간의 죄 중에서 가장 나쁜 죄는 나쁜 죄는 자기의 죽음을 담보로 협박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이 양반이 제법 똑똑하다는 겁니다.
남편은 축구선수 출신이라서 돈도 못 벌고 해서, 결혼을 할 때부터 여자 쪽에서 시가 쪽에 다 돈을 대주고 했기 때문에 부부싸움이 일어났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자가 "이제 돈을 주지 말고 우리끼리 살자" 라고 하니, 이 남자가 원가족이라고 하면서, 저는 그런 용어를 처음 들었는데, 옛날에는 시집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아무튼 그 축구선수가 아파트의 창틀에 매달려서 "그럼 나는 그만 칵 죽을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아파트가 없었기 때문에 창틀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고, 소주 5병을 마시고 땡깡을 부렸다는 말이죠.
"여보, 지금 씨도 뿌려야 하고 모내기도 해야 하는데, 당신은 이게 무슨 짓이고?" 라고 하면, "그래, 모내기를 할 게" 라고 하면 되는데, 소주를 마시고 이불을 푹 뒤집어 씌고 하는 말이 "그러면 나는 콱 죽어불끼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서장훈 씨가 하는 말이 "인간의 가장 나쁜 죄는 자기 죽음을 담보로 협박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 짓을 인간이 누구한테 하느냐 하면, 하나님에게 이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내가 지금까지 50년을 이렇게 교회에 봉사하는데, 나를 구원해주지 않으면 나는 콱 죽어불끼다"
하나님을 상대로 협박을 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왜 책망을 고맙게 여기지 못하느냐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냄비, 즉 모든 것이 주를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이게 '단일 냄비'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라는 단일 냄비에 대해서 자기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인데, "나도 단일 냄비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자기도 냄비라는 것인데, 자기도 단일 냄비이고 또한 최종 냄비라는 겁니다.
"나는 지금 주님을 존경합니다. 주님의 고난의 길을 가겠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마음을 낮추라고 하니까 마음을 낮추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것은 무엇입니까? '나' 라는 단일 냄비에다가 마음 낮추기, 고난 받기 헌신하기, 순종하기를 다 담았다는 말이죠.
* 십자가인가? 하나님인가?
그러면 그것은 누구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까? 자기가 남들에게 내세울 것은, 즉 자기에게 뭔가 있을 때 '나' 라는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누구를 만나게 되면, 이것은 하나의 팁인데 말이죠.
저는 누구를 만나면 그 사람에게서 제일 먼저 살펴보는 것은, 그 사람의 입에서, 사실은 말을 하나 하지 않으나 관계없이 그 사람의 행동이나 태도에서 십자가가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저는 이것부터 먼저 본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가 아닌 하나님이 나온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자기 냄비는 그대로 있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여기에 토핑을 해서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하나님, 교회, 성경, 이런 것을 다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껏 내세운다는 것이, 하나님을 빙자해서 무슨 의미가 나옵니까? '나의 의미'를 계속 내세울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나의 의미'가 나온다는 것은, 주님이 성령이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렇게 성령이 찾아오지 않으면 무엇이 안 됩니까? 책망이 안 된다는 겁니다. 즉 책망을 받는 기쁨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인데, 자기가 주님한테 얻어맞는 기쁨이 말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십자가가 나온다는 겁니다. 주님에게 참 많이 얻어터지고, 앞으로도 더 많이 얻어터질 것입니다.
주님에게 많이 얻어맞는다는 것, 그것은 바로 십자가 옆의 두 명의 강도들 중에서 한 명의 강도가 한 고백인데, 즉 "예수님의 하신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의 마지막 인생을 사형을 당하는 것으로 마감하게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동안의 모든 냄비가 중간에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것이죠.
어제 오후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 보편성과 특수성 VS 일반성과 특이성 !!
이제 어려운 것을 본격적으로 하겠는데, 어렵다고 하는 것이 뭐냐하면, 이제 4개의 단어를 쓰겠습니다. "보편성과 특수성", 그리고 "일반성과 특이성" 이라는 것인데, 논리학에서 이 구분을 좀 명확하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설명을 해봤자 이게 설명이 쉽지 않은데, 제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이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것은, 인위적 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말이죠. 보편성은 일반나라, 특수성은 미국, 즉 보편성은 젤렌스키, 특수성은 트럼프라는 겁니다.
일본의 총리와 미국의 트럼프가 회담을 했는데, 일본의 총리가 사전에 트럼프의 성향을 알고 나라의 이익이 될 수 있도록 잘 연습해서 회담을 준비했다는 말이죠. 먼저 일본 총리가 "우리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유세 때 저격을 당했는데, 하나님이 살렸습니다" 라고 하면서 아부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트럼프가 "그렇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액자사진을 건네주는데, 그게 뭐냐 하면 총알이 자기 귀를 스치는 스타일러 사진이라는 겁니다. 분위기가 참으로 화기애애했는데, 모두들 만족해했다는 말이죠. 그 정도면 성공적인 정상회담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회담 전에 일본 총리가 국민들에게 장담을 했는데, "이제는 미국과 일본을 동등한 동등한 관계로 새로운 세계 역사의 장을 열겠습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앞으로 미국과 동등하게 나가겠다는 것인데, 그러니 보편성과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고 하니, 미국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것이 일본 자동차인데, 그 자동차 관세를 25%나 때려서 일본의 뒤통수를 쳐버렸다는 말이죠. 이게 무엇입니까? 미국이 "평등 같은 소리하고 있네" 라고 하는데, 보편성에서 미국은 특수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위적이라는 말이죠.
이런 인위적인 세계에서는 무엇이 작동하느냐 하면, 힘이라는 겁니다. 힘의 질서, 힘의 계층이 작동한다는 말이죠. 힘이 많은 쪽과 힘이 작은 쪽이 있는데, 그러면 힘이 많은 쪽에 기대어서 빌어먹어야 계층들은 어떤 계층입니까?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인데, 인간세계라는 것이죠.
보편성과 특수성, 그런데 여기에서 보편성이란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내 빼놓고 전부 다 똑같다" 라는 겁니다. 자기 빼놓고, 즉 "나는 옳고 나는 특수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모두가 보편성 가운데 있는데, 그런데 자기는 특수하다는 겁니다.
* 베토벤 VS 모차르트 !!
이해가 잘 안 되지 싶은데, 그래서 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음악의 작곡가들 중에서 최고의 작곡가는 누구냐 하면, 베토벤이라는 말이죠. 다른 작곡가들 보다 베토벤이 최고라는 겁니다. 그러면 모차르트는 뭐냐 하면, 모차르트는 특이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게 무슨 뜻일까요?
여럿 중에서 최고와, 여러 부류에 속하지 않는, 그 집합에 속하지 않는 다른 세계에 속한다고 하는 것, 그렇다면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셀까요? 인위적인 세계에서 최고로 제일 힘이 센 것은 트럼프의 미국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일반성은 뭐냐 하면, 이 보편성과 특수성 합쳐서 '일반성' 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런 인간적인 생각이 있을 수 없는 아주 특이한 것, 즉 '낯섬' 이라는 겁니다. 이 낯섬, 그 특이함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죠.
일본은 미국과 동시대에 같이 존재한다고 여기는데, 일본 사람들은 미국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그러면 일본 사람들이 이 시대에 낯섬과 같이 존재한다고, 즉 예수님과 같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받아들입니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 우리는 특수하다 !!
예수님의 설교현장, 스데반의 설교현장, 사도바울의 설교현장에서, 그들 유대인들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즉 "다른 민족들은 여호와가 없지만 우리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특수하다" 라는 여겼다는 말이죠.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늘나라가 무엇인지 알아요? 유대인의 왕인 다윗이 다시 세상을 다스리는 나라가 하늘나라라는 겁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정통주의자들이 고대하는 게 있는데, 지금 그곳에 이슬람의 황금돔이 지어져 있지만 말이죠.
메시야가 그 예루살렘의 성전에 오게 되면, 나머지 모든 민족들은 이스라엘에게 굴복하고, 자기들은 왕 같은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 그것을 현재 유대교에서는 희망으로 삼고 있다는 겁니다. 지상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게 유대교라는 말이죠. 지상에서 하나님이 왕이 되어서 통치를 하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문자대로 성경을 봐야하는데, 성경의 예언대로 봐야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1948년 이스라엘의 영토가 보장될 때 돌아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알리아' 라고 해서, 흩어져 있는 자기 백성을 모집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그러면 메시아와 컨택할 순간이 가까이 왔다고 본다는 말이죠.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누가 동조하느냐 하면, 구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 동참을 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제3성전을 세우고 주위에 있는 아랍을 작살내고 예루살렘을 다시 회복해면 그때 메시아가 재림한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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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리아 운동 - 열방의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것을 뜻한다. 히브리어 원어로 '알리야' 라는 것은 '올라가다' 라는, 즉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19세기 말부터 시작해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던 시오니즘 운동을 통해서, 2,000년 동안 흩어져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1948년 이스라엘의 국가 주권과 국토가 회복되면서 이스라엘로 돌아와 정착하고 있다. 건국 당시는 이스라엘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약 70만 명이었지만, 현재는 이 알리야를 통해서 약 700만 명으로 10배나 증가하였다. (원뉴맨패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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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성전(3차 성전) - 솔로몬 성전을 1차 성전이라고 하고, 그리고 스룹바벨 성전을 2차 성전이라고 한다. 헤롯 성전은 스룹바벨 성전의 연장선으로 보는데, 헤롯 성전이 스룹바벨 성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지만, 제사를 중단하지 않은 상태에서 증축을 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솔로몬 성전에서 스룹바벨 성전으로 넘어갈 때는 모든 것이 다 단절된 상황이었기에 1차와 2차로 구분한다. 2차 성전이 완전히 무너진 이후에, 유대인들은 3차 성전을 지음으로서 메시야의 도래를 소망하는데, 지금은 이슬람의 황금돔이 자리잡고 있어서, 계속해서 분쟁의 불씨가 될 것으로 보인다. (녹취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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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규직이니까 무조건 구원을 받고, 비정규직인 그 외의 민족 가운데서 돌감람나무가 아닌 참감람나무에 붙어있던 가지들도 구원을 받는데, 그게 로마서 11장 26절 말씀이라는 겁니다.
(롬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그렇게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 구원을 받는 그날이 최후의 날이라는 것인데, 그것을 믿고 있다는 말이죠. 유대교도 형제라고 하는데, 사실은 형제 정도가 아니고 선배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그들이 빈자리만 채울 뿐이라고 하는데, 따라서 기본 뼈대는 100퍼센트 마땅히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죠.
그러면 과연 그 이스라엘은 과연 누구를 의미할까요? 현재에 과연 그 이스라엘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들이 말하는 이스라엘, 그런 순수혈통은 없다는 말이죠. 우리 한민족도 순수혈통이 아니라는 겁니다. 쌍꺼풀은 남방계통인데, 베트남 계통이라는 말이죠. 북방계통과 남방계통이 한반도에서 만났다는 겁니다.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침범해서, 그들을 다 이주시키고, 그리고 기존의 이스라엘 땅에는 다른 민족을 데리고 와서 혼합을 시켰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그리심산에 새로운 재단을 쌓고 자기들의 유대교를 믿고 섬겼는데, 아직도 그 사마리아 유대교를 믿는 자들이 소수가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기존의 유대교와 대비가 되는데, 그래서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우리는 그리심 산에서 섬깁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저들은 예루살렘에서 섬기고 우리는 그리심산에서 섬기는데, 그러면 어디에서 섬겨야 하나님께 도달됩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요 4: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그러면 이것은 무엇입니까? 의미입니까? 위치입니까? 위치인데,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죠.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박살내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나는 이런 식으로 해서 구원을 받겠다" 라는 자기 행함으로 계속 버티고 있다는 말이죠.
첫 번째의 이 '보편성'과 '특수성'을 이제 알았지요? 둘 다 같은 동네라는 겁니다. 다만 한 쪽은 사람이 우르러 볼 수 있는 영웅적인, 즉 "참 좋겠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래서 "예, 살려만 주이소" 라고 하면서 빌빌 기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일본이 미국과 정상회담을 할 때 미리 2조원인가 얼마를 미국에 투자한다고 하면서 아부를 떨고 난리가 났었다는 겁니다. 물론 대만도 마찬가지인데, 벌써 완전히 기가 죽어서 시작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일반성이라는 것은, 보편성과 특수성, 즉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일반성에다가 담아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일반성은 인간의 가능성인데, 즉 인간이 마음만 먹고 야무지게 노력하면 될 수 있는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특이성은 무엇인고 하니, 이 특이성은 낯섬이라는 겁니다.
이 '낯섬' 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용어로 하면, 귀신이나 유령이 여기에 속한다는 말이죠. 또는 외계인이 낯섬이라는 겁니다. 이런 것들은 기존의 일반성에서는 공포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반성은 누가 주인공인고 하니까, "나의 세계에 있어서 내가 주인공이다" 라는 것인데, 이것을 달리 말하면 "나에게 있어서 내가 어른이다" 라는 겁니다. 이게 현대인의 특징이라는 말이죠.
* 어른이 없다 !!
그러한 현대인의 특징이 정신병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우울증이라는 겁니다. 우울증의 특징은, 지난 겨울 수련회 때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죠. 이런 정신병자의 특징은 자기 안에 어른이 없다는 겁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요즘 결혼식에는 무엇이 없는고 하니, 주례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어른이라는 겁니다. 즉 "누가 감히 나에게 지적질을 해?" 라는 것인데, 이게 요즘 젊은 사람들의 결혼식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자식을 키울 때도 어른이 없는데, 그렇게 어른이 없으니까 자기가 어른 노릇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무엇에 협박을 받습니까? 낯섬에 협박을 받는다는 말이죠. 낯섬의 협박, 그러면 그 낯섬을 무시하면 되지 않느냐고 할지 몰라도, 낯섬을 무시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욕망은, 자기가 어른이 되어도 이게 밟히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욕망은 계속해서 더 완전한 것, 더 큰 것, 더 좋은 것, 더 대단한 것을 추구하는데, 그 목표가 되는 세계, 그것을 정신분석학에서는 실제로 있는 세계로 본다는 겁니다.
인간은 이 실제로 있는 세계를 상상의 세계로부터 실제로 있다고 여기니, 여기서 정신병이 생긴다는 말이죠. 그래서 정신병을 해소하려면 상상의 세계에서 무엇을 거쳐야 되느냐 하면, 상징의 세계를 거쳐야 실제 공포로부터 견딜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신병 치료라는 말이죠.
쉽게 말하면, "나는 쭈구리다" 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그게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모습이라는 말이죠. 즉 "나는 못난이이기 때문에 트럼프한테 기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숨을 쉴 수 있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을 단련시키고 훈련시키는 것, 그게 이 세상에서 정신병자지만 티내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요령이라는 말이죠.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는 강하게 나가는 것, 그게 비록 정신병자지만 숨을 쉬고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비빌 줄을 알고, 또한 때에 따라서 큰소리도 칠 줄도 알면서 살아가는 것, 그게 삶의 비결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무슨 해결책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게 오히려 공포이고, 공포의 대상이라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집에 아이가 세 명이 있다고 하면, 큰 아이가 "엄마, 취직했어" 라고 하면, "잘했다, 잘했어" 라고 하는데, 그리고 둘째 딸이 "엄마, 곧 시집을 갈 거야" 라고 하면, "잘했다, 잘했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셋째는 취직도 하지 못하고 장가도 가지 못하면, 자식들 3명이 모두 잘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실제인데, 그런데 왜 자식들 3명 가운데서 2명이 잘 되는 것보다도 하나가 못 되는 게 그렇게 공포스러우냐는 것이죠.
* 이상의 '오감도(烏瞰圖)' !!
1927년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입학해서 1929년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그 이후에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취직한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의 필명이 '이상' 이라는 겁니다. 본명이 이해연이지 싶은데, 결국은 26살에 폐결핵으로 일본에서 죽었다는 말이죠.
그 사람의 시가 뭐냐 하면 조감도(鳥瞰圖)가 아닌 '오감도(烏瞰圖)' 라는 겁니다. 까마귀 '오(烏)' 라는 것인데, 그러니까 벌써 시커멓고 불길하다는 말이죠. 왜 불길한고 하니, 실제의 세계, 즉 자기가 취직을 해서 월급 따박따박 받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나라 전체가 일제 제국주의 전쟁에 말려든 것에 대해서 자기는 참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게 무엇인고 하니, "니는 니 할 일이나 하세요" 라는 것이 안 된다는 것인데, 왜 인간의 욕망은 자기 할 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죠. 그 시에 보면, "한 아해가 무섭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아해' 라는 것은, 요즘말로 아이라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둘째 아이도 무섭다고 하고, 셋째 아이도 무섭다고 한다는 말이죠. 12명의 아이가 다 무섭다고 하고, 그리고 13번째 아이도 무섭다고 한다는 겁니다.
이 시가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가 되었는데, 너무 반발이 많아서 중단이 되었지만, 이게 무슨 의미냐는 말이죠. 어린아이니까 무서움에 민감하다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질주하는데, 왜 질주하는지를 모른다는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 그 당시에 현대인들이 의미가 없이 그냥 남이 가는 대로 달려갈 뿐이라는 겁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데, 그냥 상징의 세계, 눈에 보이는 세계, 그냥 이 허상의 세계에서, 어릴 때 읽었던 동화의 상상력만 믿고서 어떤 야망을 위해서 설치는데, 그런데 왜 설치는 지도 모른다는 말이죠.
* 아이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괜찮다 !!
그래서 이 이상이라는 사람의 해결책이 뭐냐 하면, 아이는 아이답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겁니다. 현대인들은 여기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는데, 공포에 질려서 질주하는 것에서 말이죠. 하지만 벗어나면, 거기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벗어나면 귀신, 유령, 외계인의 세계라는 겁니다.
이것이 무엇인고 하면, 특이성이라는 말이죠. 특이성, 즉 낯섬의 세계라는 겁니다. 이런 낯섬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이 교회에 왔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교회에 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또 다시 꿈꾼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세계에 누가 계시는고 하니, "주님이 계신다, 성령님이 계신다, 하나님이 계시신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복음입니까? 어때요? 복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일반성에서 자기가 요청한 특이성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게 자기가 요청한 특이성이니까, 이것은 일반성에서의 특이성이 아니고, 특수성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자기를 구원할 어떤 영웅적인 상(像), 그게 바로 메시야 상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에 미켈란젤로부터 시작해서 그림을 그린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 마리아의 그림, 그냥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간 속에 있는, 이런 낯섬에 대한 야망을 충족시키는, 그런 종교가 곧 천주교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보다 더 심한 것이 동방교회인데, 즉 러시아 정교회라는 겁니다.
성화(聖畵)를 섬기는데 그들이 천주교보다도 한 수 위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죠. 그게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자기 속에 감흥을 일으키는 방법인데, 그 천주교를 닮아있는 것이 영국 성공회라는 겁니다.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보다 더 심하게 눈에 보이는 것을 섬기는 게 있는데, 그게 에디오피아의 콥트 교회라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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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엔트 정교회 - 칼케돈 공의회에서 결의된 교리를 거부하는 기독교의 일파이다. 동양 정교회, 중동 정교회 또는 동방 독립교회라고도 부른다. 이에 속하는 교회로는 콥트 정교회,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등을 들 수 있다. 주로 서아시아와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에 분포한다. '동방 정교회'로 불리는 칼케돈파 정교회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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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벗어날 길이 없어, 그런데?
이러한 논리구조, 즉 "보편성, 특수성, 일반성, 특이성", 이 논리구조의 사설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벗어날 길이 벗어날 길이 없는데, 왜 그것을 이 귀한 강의시간에 설명을 할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찾아오심, 다녀오심, 삭개오를 보고 "너희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라고 하는 것, 또한 베드로를 보고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 라고 하는 것, 이것은 난데없이 그냥 당한 것이란 말이죠.
이제 끝으로 이 말씀만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찾아오심, 즉 예수님이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그 찾아오심을 요한복음과 사도바울은 '선택'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사도바울은 선택 이전에 하나를 더 땡기는데, 그게 뭐냐 하면, 로마서 8장 30절에서,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라고 한다는 겁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러면 '선택' 안에 '미리 아심'과 '부르심', 그 두 개를 다 넣어보세요. 여기에서 더 놀라운 사실은, "미리 아시고" 라는 것 다음에 "차차 구원하자" 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이미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하는데, 이미 종결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 안' 이라는 말이죠.
* 의미의 중첩 !!
어제 낮 설교를 하면서, 어려우면 다시 설교를 들어보라고 했는데, 물론 다시 듣는다고 해서 알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성도의 육신은 이제 그 소유권이 누구한테 넘어갔습니까? 주님한테 넘어갔다는 겁니다.
우리의 이 육신에 뭔가 정보가 실리는데, 그것이 의미인데, 아까 천국의 의미가 뭐라고 했습니까? 지상에 있던 예수님의 육신이 우리의 육신과 여기서 겹친다는 말이죠. 즉 중첩인데, 그렇게 겹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이 육신으로 말미암아서 겪었던 게 뭐냐 하면, 인간의 경험했던 과거, 인간이 경험하지 못했던 과거, 그리고 경험했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과거, 인간이 경험하고 있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현재, 그리고 인간이 알지도 못하는 미래, 그 모든 것을 예수님의 육신이 한꺼번에 다 경험을 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다 경험한 것을 우리의 육체에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여기에 정보를 집어서 복제를 시킨다는 말이죠. 영화 '미키 17' 인데, 프린트를 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프린트를 해버리면 우리의 육신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육신은 스노볼안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이미 예수 안인데, 그렇게 예수 안에 들어가 버리면, 그 예수 안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과거, 현재, 미래는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미 주님이 경험해서 결론이 난 과거, 현재, 미래가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현재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육신이 바로 현재인데, 그러니 그 현재에 방금 이야기한 이런 모든 내용이 다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 구두쇠 영감 '스크루지' !!
여러분, 구두쇠 영감 '스크루지'를 아시죠? 동업자이자 친구인 말리는 7년 전에 죽었지만, 스크루지 영감은 아직 죽지 않았는데, 그 말리의 유령이 찾아왔다는 말이죠. 그래서 과거의 자기 모습과 현재의 자기 모습과 미래의 자기 모습을 다 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 모습은 뭐냐 하면, 말리라는 친구는 쇠사슬을 끌고 있는데, 인생 자체가 무거운 쇠사슬로서 묶여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쇠사슬을 끌면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결국 마지막은 뭐냐 하면, 무덤가에 있다는 겁니다.
디킨스의 그 소설에 보면, 그 무덤이 자기가 죽고 난 뒤에 그냥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회사에 있던 스크루지의 모든 소유물을 남들이 훔쳐간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죽은 것이 속상한 게 아니고, 그동안 평생 모아놓은 것을 엉뚱한 인간들이 다 가지고 간다는 것이 화가 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제가 이 안경을 쓰고 있는데, 이것을 다른 누가 쓰고 있는 것을 보면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고인을 생각해서 사용하던 소지품을 어떻게 합니까? 불에 태우든지 해서 없애버린다는 겁니다. 그것을 그냥 놔두게 되면 다른 사람이 쓴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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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비니저 스크루지(Ebenezer Scrooge) -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1843년)'의 주인공이다. 돈 욕심이 아주 많은 고리대금업자로 남에게 늘 인색하게 굴었으나, 어느 날 밤 죽은 친구인 말리의 유령과 함께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본 뒤 깨달음을 얻고 베푸는 삶을 살게 되는 인물이다. 구두쇠 캐릭터의 대명사로 흔히 '스크루지 영감'으로 불린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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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설에 3종류의 유령이 등장하는데, 그 유령이 3가지 시간성을 가지고 오듯이, 이미 우리 안에는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라는 것인데, 우리 안에 누가 산다는 겁니까? 예수님이 사는 방식으로 우리 육신이 있다는 말이죠.
우리 육신이 죽지 않는 이유가, 주님이 쓸 곳이 있어서 아직까지 죽지 않았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아직 뭔가 용도가 있기 때문에, 설교제목이 '육신의 용도' 인데, 그래서 우리가 아직까지 죽지 않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나의 육신은 지금 여기에 있지만, 내 생명은 하늘나라에 있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그게 현재와 미래라는 말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의 육신에는 사탄의 가시가 있다는 겁니다.
생명은 하늘나라에 있는데, 육신은 지금 몸에 가시가 박혀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암이라고 하면, 사도바울이 그것을 좀 낫게 해달라고 하는데,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러면 너에게서 복음이 나오지 않는다" 라고 하시는데, 즉 주님의 의미가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에게 사탄의 가시가 있어야, 계속 너의 의미는 책망을 받고 나의 의미만 나온다" 라는 것인데, 그것 때문에 우리의 육신은 지금 현재가 최적이라는 말이죠. 어디에 있든지, 퇴직을 하든 무엇을 하든지 지금이 최적화가 된 상태라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기 위해서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이 어디 있느냐고 묻지 말고, 성령 안이 곧 천국이고, 십자가 안이 천국이고, 예수 안이 천국이기에, 우리가 항상 우리 몸을 통해서 십자가의 다 이루심만이 펄펄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5,03,08 오전 9시에 마침.
당신, 누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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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감도(烏瞰圖)]
(1934년 7월 24일자 조선중앙일보에 게재)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러케뿐이모혓소.(다른事情은업는 것이차라리나앗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길은뚤닌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 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