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안식

아빠와 함께 2024. 12. 20. 07:50

[24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10 - 안식

24,12,02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오늘은 교재 79페이지부터 하겠는데, 여기 중간 부분에 보면 '안식'에 대해서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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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님, 왜 창조에 대해서 하면서 안식을 이야기해야합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창조의 최종 단계를 안식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이 아니면 아직도 창조가 안 된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시면 됩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을 창조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존재하는 것을 창조로 보지 않고, 안식을 이룰 때 그것을 창조로 본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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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창 2: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 2:4)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 창조한 것은 창조가 아니었다 !!

이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창조한 것은 창조가 아니었다" 라는 것인데, "창조한 것은 창조가 아니고, 안식이 될 때 창조가 완료된다는 겁니다. 안식이 빠져버리면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참 안식의 요소가 없으면, 그것은 창조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안식까지 끌어가야 창조가 완성되는 것인데, 보통은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했다" 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창조가 아니라는 말이죠. 안식에 들어가야 창조된 인간이지, 하나님은 안식에 들어가지도 못한 인간은 인간이라고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인간을 하나님은 창조한 적이 없는데, 안식이라는 요소가 포함될 때, 비로소 창조라고 마무리를 지운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은 창조를 시작한 것이지 창조를 마무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인데, 안식이 오지 아니하면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흔히 우리는 존재하는 것을 두고 창조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을 창조로 보지 않고, 안식에 이를 때만 그것을 창조로 본다는 말이죠.

* '없음'을 위한 '있음' !!

우리 인간은 범죄하고 난 뒤에, "내가 여기 있잖아. 존재하고 있잖아. 이렇게 있는 것은 하나님이 만들었으니까 창조로 좀 봐줘" 라고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은 인정해주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있는 것은 없어지기 위해서 있기 때문에 말이죠.

그렇게 없어지기 위한 있음에서 그 다음에는 없음이 되는데, 그렇게 없다는 것은 무엇이 있을 때 없음이 성립된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있지 아니하면 오지 않는데,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없음이 되고, 그리고 그 없음 다음에 안식이 될 때, 그러한 절차가 완료될 때 이것을 '창조' 라고 한다는 말이죠.

* (있음) → 없음 → 있음 → 안식 = 창조 !!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봅니까? 왜 이게 낯선고 하니, 우리는 성경을 봐도 성경을 보는 태도가, "하나님, 나 여기에 있어요" 라고, 그렇게 있는 것부터 출발해서 성경을 보니까, 성경을 100독해도 성경의 하나님의 뜻과는 맞지 않다는 겁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나 여기에 있는데, 내일 모레가 되면 죽어요"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 사람은 어디까지 이야기합니까? "나 여기 있습니다" 라고 하는 있음과. "내일 모레 죽습니다" 라는 없음까지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것을 창조로 봅니까? 보지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안식까지 이르러야 된다는 겁니다. 안식까지 말이죠. 그래서 인간에게는 무엇이 없느냐 하면, 첫 번째 중요한 것이 나왔는데, "인간에게는 불운이 성립되지 않는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아, 나는 운이 너무 없어" 라고 하는 것이 인간한테는 성립이 안 된다는 말이죠.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운이 없도록, 그것을 예방조치하기 위해서, 그렇게 백신을 맞기 위해서 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미리 당겨서 기도를 빡세게 해놓으면, 나중에 불운이 비켜 갈 것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런 모든 노력이 어디에 머뭅니까? 안식에 이르기 위함이 아니고, 어디에 머물기 위함이라는 겁니까? 처음 있음을 고집스럽게 붙잡기 위해서 계속 그렇게 노력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안식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즉 하나님이 생각하는 창조는 생각하지 않고, "내가 여기 만들어졌으니, 이 만들어진 것을 그냥 붙잡자"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있음에 머물러버리는데, 여기에서 나온 것이 뭐냐 하면, 그것이 바로 '종교' 라는 말이죠.

* 종교란, '나' 있음을 위한 조치 !!

이 종교를 구약에서는 우상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모든 종교의 내용은 딱 하나밖에 없다는 겁니다. "나 있음이 불운하지 않기 위한 조치다" 라는 것이죠. 불운의 반대말은 대박인데, 즉 '나' 라는 존재가 멋있게 대박나기 위해서 종교라는 것을 인간들이 만들었는데, 물론 마귀의 사주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종교에 속아서 넘어가겠습니까?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이런 인간의 종교행위에 대해서 관심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관심이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도 고집이 있는데, 안식에 이르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거칠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냥 밀어붙이신다는 말이죠.

"너는 무슨 종교를 가졌는가?" 라는 것을 하나님은 묻지도 않는데, 있음 자체를 없애고자 하신다는 겁니다. 살아있는 인간을 죽이고자 하시는데, 어떻게 인간이 만든 종교에 하나님이 속아넘어가겠느냐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죽지 않으려고 종교를 믿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뭐냐 하면, 있는 것을 다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없음이 없으면 어디에 도달하지 못하는고 하니, 안식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없어질 것을 왜 만들었겠는가? 그럴 하나님이 아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즉 "왜 없어질 것을 만들어놔서, 그냥 있어도 없는데. 그렇게 있어서 굳이 없음을 만들 이유가 없지 않느냐?" 라고, 논리적으로 그렇게 따진다는 말이죠.

그런데 시편 102편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룰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라고 한다는 겁니다.

(시 102:25)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룰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시 102:26)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 인간 있음의 눈에 띄는 강아지 !!

하나님이 처음에 땅을 만들고 하늘을 만들었는데,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은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줄 알고 확 달려들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과학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해와 달과 별과 나무와 짐승, 그런 자연현상이 없으면 과학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해와 달과 별과 나무와 짐승, 그런 것은 다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있는 것입니까? 그런 것은 우리 인간의 눈에 띈다는 말이죠. 즉 "인간이라는 있음의 눈에 띄는 강아지",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인간에게는 전부 다 있음과 있음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 없는 것은 우리 인간이 파악을 합니까? 우리 인간은 없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인간 자체에 그런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말이죠.

천문학자들이 우주를 관찰하면서 별을 발견하고, 그 별의 총 무게를 계산해봤는데, 그런데 별의 무게가 우주의 총 무게의 25%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75%는 없는데,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75%가 빈다는 것이죠.

그 비는 것을 천문학자는 뭐라고 이야기하는고 하니, '암흑 물질' 이라고 하는데, 깜깜한 물질이라는 것인데, 즉 "보이지 않는 물질이 있다" 라는 겁니다. 천문학자들은 그렇게 예상을 해본다는 말이죠. 그것이 몇 퍼센트라고요? 75%인데, 있는 것은, 즉 눈에 보이는 것은 25%라는 겁니다.

그래서 천문학자들은 "있는 것보다 없는 게 3배나 더 많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제 그들의 고민은 뭐냐 하면, "왜 없는 것까지 추가해서 우주를 만들었느냐?" 라는 것인데, 그 점에 대해서 "우리는 모르겠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몰라, 몰라, 몰라 !!

과학자들이 연구를 참 많이 하는데, 결국 결론은 무엇이라는 겁니까? '모르겠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게 어떻게 진리가 되느냐는 말이죠. 모르겠다는 것도 과연 진리가 됩니까? 그런 것인가요?

과학자들이 자연을 바라보는 것은,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서 자연을 연구하는데, 그런데 자연을 연구한 그 결론이 '모르겠다' 라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나에 대해서 내가 모르겠다" 라는 것인데, 그리고 자기에 대해서 모르면, 그것은 "왜 살아가는 지도 모르겠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겠고, 왜 결혼하는지도 모르겠고, 왜 취직하는지도 모르겠고, 왜 죽는지도 모르겠고" 라는 것인데, 그렇게 모른다고 하면 그냥 조용히 있어야지, 모르는 사람이 큰소리를 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모르는 자가 큰소리를 치는데, 그냥 솔직하게 "나는 이제 모르겠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나는 모르겠다" 라고 하면서도 큰소리를 친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아는 쪽이 목소리를 낮춰야 될 판이라는 겁니다. 그러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죠.

* 김장을 하는 이유는?

성경말씀을 보기는 보는데 모르겠고 듣기는 들어도 모르겠고, 그렇게 전부 돌아오는 것은 '모르겠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김장준비를 하는데, 물론 김장준비를 하는 이유도 모르면서 열심히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정답을 알려드리겠는데, 김장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 김치를 먹고 죽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모두들 모여서 김장을 한다는 것이죠. 죽는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가 김장을 하다가 죽는 것이고, 김장김치를 맛있게 먹다가 죽은 것이라는 말이죠.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

결국 마지막 골인지점은 하나님께서 정했다는 겁니다. 인간에게서는 이미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인데, 그것이 히브리서 9장 나온다는 말이죠. 인간에게 정해진 것인데, 그것을 성도는 알고 있다는 겁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렇게 태어난 것은 죽어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 성도가 아닌 자들은 "왜 죽어야 하는데? 태어날 것을 만들지는 말지, 만들어 놓고 왜 죽어야 하는데?"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 대한 정답은 무엇입니까?

안식이 되어야 창조가 완성되기 때문인데, 그래서 교회는 죽기 위해서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죽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 말이죠. 교회에서 사는 이유 찾지 마시고, 기도를 하더라도 죽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죽는 이유를 알려고 기도하는 사람은 너무나 귀하다는 말이죠.

아까 본 시편 102편에서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주는 영존하시겠고" 라고 했는데, 여기에 해답이 있다는 겁니다. 왜 없어져야 합니까? 만들어진 그 환경이 주님의 영존하심을 위한 환경이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런 환경이 있다가 없어지면서 등장하는 것이 있는데, 누가 등장한다는 겁니까? 마지막 때에 우리 주님이 등장하신다는 겁니다.

* 예수님의 안식으로 인한, 성도 !!

그러면 자연은 영원합니까? 영원하지 않는데, 인간은 영원합니까? 영원하지 않다는 말이죠. 누구만 영원하고 영존합니까? 예수님만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뭐냐 하면, 성도는 예수님이 새로 만들었는데, 즉 예수님이 안식해서 만들어진 것이 성도라는 말이죠.

이게 참으로 중요한데, 성도라는 것은 현재 있음이 있음으로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안식으로 인해서 새로 창조된 것인데, 즉 예수님의 안식이 창조라는 겁니다. 이런 창조의 차원에서, 예수님의 안식을 드러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자가 성도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제 해답이 나왔는데, 처음에 성도가 아닌 무엇이었다는 겁니까? 인간이었는데, 그 다음에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는 누가 관여하느냐 하면, 그게 바로 예수님의 활동이라는 말이죠.

그러한 예수님의 안식을 위한 활동이 없음에 가입하게 되면, 여기서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인간은 반드시 죽고, 즉 인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이 성도라는 말이죠. 그게 로마서 6장에 나온다는 것이죠.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저리 가라 !!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심으로써, 인간의 아이디어로 만든 모든 종교에 대해서는 "저리 가라" 라는 것인데, 인간의 모든 종교와 교파가, 불교도 성당도 이스라엘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물론 장로교, 감리교도 다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만들거나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종교는 모두 다 차단을 시켜버리는데, 인간은 종교를 통해서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물론 기독교를 통해서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죠.

* 인간과 행함 !!

그렇게 인간을 없애버리는데, 그런데 인간이 없어질 때 그 인간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 '행함'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죽어버리면, 이 행함은 누가 행할까요? 자기가 행하는데, 그러니 자기가 곧 행함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나' 라는 것이 그만 죽어버리니까, 이 인간의 행함은 어떻게 될까요? 인간은 없어지는데, 그러니 인간이 행해서 구원받을 일은 결단코 없다는 겁니다. 즉 행함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행한 자는 어디에 가는고 하니, 행함 책에 기록된 대로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인간은 행함으로 천국에 가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 수 있다고 뒤에서 자꾸 부추기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악마라는 말이죠.

* 먹지 못하는 감 찔러나 보자 !!

물론 악마도 천국에 가지 못하는데, 이왕 가지 못하는 것이니, 먹지 못하는 감을 찔러 본다는 식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자기는 멸망할 것이 확정되었으니 인간을 인질로 삼기 위해서, 악마는 뱀으로 변장하고 아담을 찾아와서, 하나님의 계획에서 이탈하라고 꼬셨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안식에서 이탈하라고 말이죠.

그래서 창세기 5장에서 아담은 자자손손 뭐를 물려주는고 하니, 죽음을 물려준다는 겁니다. 이것을 '아담의 형상'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아담의 형상, 즉 죽음을 물려주는데, 그 어떤 인간도 물려받은 죽음의 위세 안에서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갓난애들을 보면 참 예쁜데, 흑인이든 백인이든 황인이든 모두 예쁘다는 말이죠. 갓난애들이 예쁘다는 말은, 생명력이 계속해서 처음 그대로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예쁜 아이들이 점점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됩니까? 예쁘지 않게 된다는 말이죠.

처음에는 예쁘기 때문에 옷을 입히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데 이제는 예쁘지 않으니까 뭔가 추가적으로 보태지는 게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옷을 입혀야 한다는 말이죠. 여기에서 나이가 들면 이제 메이크업 화장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이가 더 들면 화장을 해도 예쁘지 않고 옷 입혀도 예쁘지 않게 되는데, 나이가 80이 넘으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저는 아직 80이 되지 않아서 이런 이야기를 자신만만하게 하는데(ㅋㅋ), 60대는 그래도 보톡스 주사를 맞고 수술이라도 하고 했는데, 그런데 80대가 되니까 중력에 의해서 모두 다 내려앉아서 그야말로 대책이 없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의 대책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행위가 지옥에 갈 행위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게 악마의 행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거기에 주님 자신의 행위를 대비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 물이 포도주로 !!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가나 혼인잔치가 기록되어있는데, 거기에 예수님의 행위가 하나 나온다는 말이죠. 그게 무슨 행위냐 하면,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는 겁니다. 포도주가 포도주로 되는 게 아니고, 맛없는 포도주가 맛있는 포도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요 2: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요 2: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물일 당시에 포도주는 아예 없었고, 그리고 포도주가 되었을 당시에도 물은 아예 없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물이 포도주가 된다는 것은, 주님의 안식계획을 함축해서 보여주는데, 물이 포도주가 될 때, 그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죠.

인간들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붙들고 천국에 보내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때 주님께서 제시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인데, 그렇게 물이 포도주가 될 때, 여기에 여섯 항아리가 등장한다는 말이죠.

(요 2: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요 2: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그 장소가 가나 동네인데, 제가 그 집에 가봤다는 겁니다. 물론 그 집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이스라엘에서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서 골목초입부터 온 천지에 여섯 항아리 그림을 그려놨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곳에 성당을 지어놓았다는 것이죠.

기독교 초창기 때는 이스라엘 땅은 특별한 주인이 없었는데, 그때 유럽에서 온 귀족들이 돈을 많이 주고 그 부동산을 구입했다는 겁니다. 그게 오늘날 이스라엘 성지인데, 그러니 그 땅의 주인이 누구냐 하면, 그게 이스라엘의 소유가 아니고, 그것이 다 귀족들, 즉 교회의 땅이라는 말이죠.

* 막벨라 굴 이야기 !!

그렇게 돈을 주고 산 이야기가 바로 아브라함의 막벨라 굴 이야기라는 겁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이 안식을 너무나 잘 대변해주고 있는데, 그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 막벨라 굴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면, 여기에서 창세기 25장 14절에서 20절을 보겠습니다.

(창 23:14)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창 23:15) 내 주여 내게 들으소서 땅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교계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창 23:16)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좇아 에브론이 헷 족속의 듣는데서 말한 대로 상고의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창 23:17)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을 바꾸어 그 속의 굴과 그 사방에 둘린 수목을 다
(창 23:18) 성문에 들어온 헷 족속 앞에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정한지라
(창 23:19)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창 23:20) 이와 같이 그 밭과 그 속의 굴을 헷 족속이 아브라함 소유 매장지로 정하였더라

막벨라 굴에 처음 묻힌 사람은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인데, 그게 17절에 나온다는 말이죠. 이 매장지를 헷 족속의 에브론이 그냥 주겠다고 했는데, 그러면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참 좋을 것 같다는 겁니다. 돈도 들지 않고 무사히 장례도 잘 치르게 되니 말이죠.

* 약속을 묻은 아브라함 !!

하지만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안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있음이 죽었으니 없음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없으면서 안식이 되어야 하는데, 부활의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부활의 장소는 죽는 게 전부가 아니고, 죽는 것은 중간 과정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죽을 때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고 난 뒤에는 슬퍼할 일이 없는데, 왜냐하면 죽었으니 말이죠. 그래서 죽기 전에 슬퍼하게 되는데, "내 인생이 왜 이래? 더 오래 살아야 하는데, 내가 백수를 못 채우고 99세에 죽네" 라고 하면서 운다는 겁니다. 99세나 100세나 한 끗 차이인데, 100세를 넘었다고 누가 금메달을 줍니까?

군대에서 제대를 늦게 해달라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루라도 빨리 제대를 해서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빨리 죽으면 축하할 일이지, 뭐가 좋다고 지옥에서 어슬렁거리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빨리 갈 사람은 빨리 가야한다는 것이죠.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었는데,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은 사라를 묻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도 죽게 되면 막벨라 굴에 묻히게 되는데, 그런데 그게 자기가 죽는 게 아니고 언약이 죽는다는 말이죠. 즉 약속을 묻는다는 겁니다.

인간은 죽어도 생명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새 생명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언약을 심어버리면, 즉 한 알의 밀 알이 죽지 않고 썩으면 거기서 많은 열매가 맺듯이, 언약을 묻으면 거기서 드디어 안식의 성공을 향해서 막바지로 달리면서, 거기서 영원히 안식을 누릴 많은 열매들이 생겨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평소에 자기 계획을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계획을 생각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가 점심 때 먹은 것 가운데 동태탕이 있었는데, 거기에 보면 알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 알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한 마리 안에 수백 마리, 아니 수천 마리의 알이 들어있느냐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고 계획이 모두 들어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계획에 따라서 있다가도 없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나갑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하늘에서 이룹니까? 땅에 와서 이룹니까?

땅에 와서 이루시는데, 왜냐하면 죽음의 땅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늘에서는 천사가 죽지 않은데, 죽지 않는 게 골칫거리라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이 보시기에는 죽는 것이 골칫거리가 없는 것인데, 하지만 땅에 있는 우리는 늙고 죽는 것이 골칫거리라는 것이죠.

* 죽어야 산다 !!

하지만 주님은 그게 아니고, "죽어야 산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인데, 그런데 우리는 일찍 죽었다고 어떻게 나옵니까? 불운하다고 슬퍼하는데, 그래서 하나님을 붙들고 따질 판국이라는 말이죠.

"우리 오빠를 살려내라" 라고, 누가 그런 짓을 했어요? 자기 오빠를 살려내라고 예수님에게 닦달을 낸 자매가 있는데, 그들이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겁니다. 얼마나 믿음이 없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믿음이 있으라고 예수님이 당부를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자 마리아 "예, 믿습니다" 라고 하는데, 주님에게 달려들면서 도대체 무엇을 믿느냐는 겁니다.

지금 주님의 계획은 무엇인고 하니,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물을 가지고 아무리 주물럭 대봐야 여전히 물인데, 아무리 기도를 해도 물이 포도주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지금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데, 그게 바로 믿음의 내용이라는 겁니다. 즉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는 일을 주께서 하셨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교회에서 그것을 믿습니까? 그게 아니고 "깡으로 기도하면 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무슨 새우깡도 아니고 말이죠.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이 어디 깡으로 될 일입니까? 예수님은 깡으로 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물론 우리는 깡으로 해도 안 된다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를 했지만, 이것이 인간의 행함으로 될 일이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행하다가 그냥 죽을 인생인데, 그렇게 까불다가 죽으면 된다는 것이죠.

* 죽음의 의미를 생각했던 아브라함 !!

지금 아브라함과 일반 사람들과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은 자기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내 죽음도 하나님의 계획이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죽음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말이죠.

그게 아브라함인데, 놀랍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내 아내가 죽는 것도 하나님의 언약적 실행 과정이다" 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나중에 요셉도 애굽이 아니라 막벨라 굴에 묻히게 되는데, 여호수아에 의해서 그 근처 땅에 묻힌다는 말이죠.

* 성도가 묻히는 장소는 한 군데, '십자가'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모든 언약에 속한 사람이 묻히는 장소를 하나님께선 한 군데로 정해 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한국에 있는 성도가 부활되기 위해서는, 한국을 떠나서 지금 전쟁 중에 있는 이스라엘의 막벨라 굴로 가야 할까요?

실제로 예루살렘 근처에 가면 촘촘히 무덤들이 많이 있는데, 메시야가 오실 때 부활이 된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면 그게 누구의 무덤일까요? 여기서 보기를 드리겠는데, "1번, 기독교인들 무덤이다. 2번, 유대인들 무덤이다. 3번 모슬렘들 무덤이다" 라는 것 중에서, 몇 번입니까?

이슬람교 신자들의 무덤이 제일 많은데, 코란경에 보면 아브라함의 근처에 메시야가 올 때 다시 산다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무덤도 많이 있는데, 물론 기독교인들 무덤도 있고 말이죠. 왜냐하면 부동산을 사놓았기 때문인데, 족장들에게 돈을 주면 된다는 겁니다. 그 당시에 예루살렘은 황폐화가 되었고, 또한 그들은 예루살렘의 의미도 모르고 양이나 치면서 살았다는 것이죠.

아무튼 장소를 하나로 정해놨는데 그것이 곧 십자가라는 겁니다. "십자가에 나를 묻는다" 라는, 그리고 "물이 포도주가 된다" 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것은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은 너희들은 못한다" 라는 것인데, 예수님은 "너희들은 못한다" 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는 겁니다. 심지어 "너희들이 나를 믿어도 못한다" 라고 나오신다는 것이죠.

인간은 그냥 죽어서 없어지면 되는데,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안식을 향한 하나님의 창조를 위해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땅에 내려오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땅에 내려와서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 인간이 가는 길을 하나의 판으로, 새카맣게 그려보겠는데 말이죠.

* 성도의 인생은, 김밥인생 !!

어제 아침에도 김 이야기를 했는데, 이렇게 김을 깔아 놓는다는 겁니다. 그냥 김인데, 그런데 이 김에다가 밥을 이렇게 놓는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께서는 여기 위에서 우리의 육신과 같이 가신다는 말이죠. 우리가 이렇게 누워 있는데, 주님께서 그 위에 눕는다는 겁니다. 우리의 육신 위에 주님께서 자신의 육신을 같이 놓아버린다는 것이죠.

그래서 가나 혼인잔치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뭐라고 합니까? "예수여, 여기에 포도주가 다 떨어졌구나" 라고 하는데, 그럴 때 예수님의 첫 마디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여자여, 포도주가 떨어진 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요 2: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요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러한 예수님의 첫 번째 답변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이 원하는 것은 자기의 살아있음을, 즉 있음을 있음이 되도록 하기 위함인데, 그렇게 계속 살아남는 것을 우리 인간은 소망한다는 말이죠.

주최측에서는 결혼식을 잘해야 좋은 소리도 듣고, 그렇게 잘해야 앞으로 계속해서 사이좋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포도주가 필요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요구하는 것이 주님에게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무관함, 즉 '상관없음' 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 인간이 요구하는 이 상관없음에 주님께서는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거기에 뛰어드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여자여, 포도주가 없는 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하신 그 말씀인데, 그렇게 하시면서 주님께서 물을 무엇으로 바꾸십니까?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다는 말이죠.

* 예수님 자신의 결혼식 !!

그러면 그 혼인잔치의 주인공이 누구로 바뀌는 겁니까? 마리아의 친척집 혼인잔치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결혼식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신랑이 신부를 만드는 방법의 장소가 되는데, 그리고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내 때는 이렇게 되는데, 그렇게 될 때는 아직 내게 남아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죠.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데, 포도주가 있다는 것은 즐거운 혼인잔치를 의미한다는 말이죠. 주님은 상관할 필요가 없는데, 그런데 주님은 자신의 안식을 위해서, 즉 하나님이 주신 안식의 사명을 띄고 왔기 때문에, 그 안식을 이루어야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상관도 없는 인간을 찾아오신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물, 즉 인간은 뭐냐 하면, "그 혼인잔치에서 맛있는 포도주는 없었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없는데 누구의 개입으로 생겼습니까? 예수님의 개입으로 맛있는 포도주가 되고, 그리고 만족할 만한 결혼식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결혼식은 인간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결혼식으로 탈바꿈이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때가 안식의 때로 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안식의 때는 어떤 때일까요? 그것은 바로 무조건 하나님과 주님이 하신 일을 기뻐하는 때인데, 그 세계가 곧 안식의 세계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 가운데서 인간은 도구로서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진다는 겁니다.

* 다시 막벨라 굴로 돌아와서 !!

다시 막벨라 굴로 돌아와서, 이 막벨라 굴에 아브라함 자신도 묻히는데, 아브라함은 무엇을 알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잡으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삭이 없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있으면 아브람이 있는 것인데, 이스마엘이 있으면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람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삭이 있다는 것은, 이삭 때문에 누가 영원하냐 하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이 영원해지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서, 아브람이라는 이름이 아브라함이 된다는 것이죠.

* 아브람은 물, 아브라함은 포도주 !!

여기서 아브람은 물이고 아브라함은 포도주라는 겁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 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여러분과 여러분이 성도라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중간에 예수님의 개입이 있어야 성도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성도가 되는 조건은 '나' 라는 인간은 죽어야 하는데, 약속을 위해서 자기가 죽지 않으면 성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이죠.

나사로의 죽음으로 여동생들이 정말 슬퍼했는데, 마르다가 "예수님이 여기 계셨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겁니다" 라고 하니, 예수님은 "오빠가 다시 산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부활 때는 다시 살아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살아있을 때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살아있을 때 죽는 방법은, 이제 '나'로서 사는 게 아니고, '성도'로서 사는 계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자기 이름으로 사는 게 아니고, 즉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일어나야만 한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에게는 불운이 없다" 라고 했는데, 그게 성도라는 말이죠. 성도는 한 평생이 모두 운발인데, 행운과 행운의 연속이라는 겁니다. 횡재도 그런 횡재가 없는데, 재수의 연발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혼상담과 같은 것은 할 필요가 없는데, 전부가 다 행운이라는 겁니다. "저런 인간과 굳이 살아야 되나?" 라고 하지 말고, 행운이니 살라는 말이죠.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자식을 둔 것도 행운이라는 겁니다. 요즘 고추농사가 잘 되지 않는데, 그것도 행운이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주님이 접수한 존재라는 겁니다.

* 나는 자식을 위한 소모품이었다 !!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감을 잡았는데, 그것을 두고 믿음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나는 자식을 위한 소모품이었다" 라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을 때, 아브라함은 "내가 자식을 가진 게 아니고, 이삭을 위해서 내가 과감하게 버려져야 한다" 라는 것을 믿음으로 감수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14장 7절과 8절에서 그야말로 엄청난 말씀을 쏟아내고 있는데,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라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롬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신약성경에 기록된 발언들, 그것을 '초자연적' 이라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보통은 초자연적이라고 하면 오로라와 같은 자연의 희한한 현상들을 말하는데, 그런데 성경에 보면 주께 감사하는 성도의 일상을 두고 초자연적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너는 무엇을 보고 그렇게 감사해?" 라고 하면, "나도 몰라, 그냥 감사가 나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 아브라함의 재혼 !!

우리가 이것을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찾아볼텐데, 그게 뭐냐 하면 "왜 이삭인가?" 라는 겁니다.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아내인 사라가 죽고 난 뒤에 다시 결혼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창세기 25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4절입니다.

(창 25:1)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창 25:2)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고
(창 25:3)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창 25:4)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창 25:5)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주었고
(창 25:6)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국으로 가게 하였더라
(창 25:7)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칠십오 세라

우리는 보통 의리를 지킨다고 재혼은 하지 않는데, 아닌가요? 의리를 지켜봐야 인간인데, 그냥 존재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존재에서 나오는 그 어떤 행함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의리를 지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약속의 진행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보통 아브라함의 처가 3명이라고 하는데, 하갈는 종이라는 말이죠. 두 번째이자 마지막 아내가 '그두라' 라는 겁니다. 사라를 막벨라 굴에 장사를 지내는 것으로 끝내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두라라는 여자와 또 결혼하게 만들었느냐는 것이죠. 왜 하나님의 약속의 차원에서 그렇게 하셨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이삭의 존재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인데, 아브라함은 여기서 자식을 몇 명을 낳느냐 하면, 2절과 3절에 보면 "그가 시무란과 욕상과 무당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으며"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 뒤에 그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나오는데, 그러면 그들을 아브라함이 가까이에 두고 살았을까요? 멀리 떼어놓았다는 겁니다. 그들로 하여금 동방 동쪽으로 가게 했는데, 가깝게는 요르단, 멀리는 예멘, 사우디, 아라비아과 같은 쪽으로 보냈다는 말이죠. 전부 동쪽으로 빨리 독립하도록 약간의 돈을 주어서 보냈다는 겁니다.

* 이삭에게 주었다 !!

하지만 모든 소유는 5절에 보면, 누구한테 주었다고 합니까? "이삭에게 주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삭을 특화시키기 위해서, 즉 특별한 존재를 하나 인식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후처를 하나 더 들여서, 그 후처에서 자식을 6명이나 더 낳게 했다는 겁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137살 정도 되었는데, 참 대단하기는 대단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당시는 지금과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는다는 말이죠.

결국 아브라함이 한 평생 행한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죽고 이삭은 살리고", 딱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신약적으로 말하면, "나는 죽고 예수님은 살리고" 라는 것인데, 아브라함이 한 평생 그 일을 했다는 말이죠. 믿음에 속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 격리조치 !!

그것을 4글자로 '격리조치' 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언약이 실제로 활동하고 있음을 어떻게 확인할 수가 있느냐 하면, 복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현상이 생긴다면 하나님이 손수 개입했다고 보시면 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연세가 많은 시어머니를 잘 봉양했는데, 그래서 "야야, 너 같은 며느리도 없다" 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겁니다. 그러자 며느리가 "어머니, 이제 저의 말을 한번 들어 보이소" 라고 하는데, 그게 십자가 복음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러면 시어머니는 "치워라. 네가 생업까지 포기까지 나에게 잘해주는 것은 고맙다만, 그 이야기는 딱 듣기 싫네" 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누가 개입하신 겁니까? 복음을 잘못 전해서 그런 겁니까? 말재주가 없어서 그런 겁니까? 그게 아닌데,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해봐야 안 될 것인데, 굳이 왜 하노?" 라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개입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개입한 것이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복음 말발이 얼마나 먹히느냐?" 라는 것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개입이라는 겁니다.

다른 것은 모두 다 받아들이면서도 복음 이야기는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이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겁니다.

* 더 이상 우리 교회에 나오지 마소 !!

굳이 병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찾을 것도 없는데, 같은 교회 내에서도 뚜렷히 등장한다는 겁니다. "자꾸 그런 소리를 하려면 더 이상 우리 교회에 나오지 마소" 라고 하는데, 주로 목사가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이것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복음으로 자꾸만 따지려고 하지말고, 그냥 믿기만 하세요" 라는 식인데, 여러분은 어떻게 이런 경험이 있습니까? 괜히 참지 못하고 이야기를 하면 욕만 얻어먹기 때문에, 그냥 입을 꾹 다물고 계십니까?

시편 101편 7절과 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격리조치를 하셨는지가 거기에 나온다는 말이죠.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시 101:7)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시 101:8)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죄악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여기에 마지막에 보면 '끊어지리로다' 라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노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태평성대가 아닌데, 안식에 이를 때까지 주님은 부지런을 떠신다는 말이죠. 주님께서는 성도 옆에 그런 인간들을 달라붙지 못하게 하시는데, "그놈은 지옥에 갈 인간이야" 라고 하시면서 계속 떼어내신다는 겁니다.

* 끊어지리로다 !!

심지어 자식, 남편, 아내라고 하더라도, 그런 것이 천국에 가는데 조건이 됩니까? 안 되는데, 무조건 안식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있으면 인간이고, 그게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성도를 사용하시면 그때그때마다 참으로 희한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기뻐하면 되는데, 물이 함부로 포도주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것은 함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 2개의 다이어그램, "인간, 하나님" !!

지금까지 한 것을 다이어그램으로 표시를 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우상의 시대에, 지옥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인간들을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겁니다. 앞에서 종교는 악마의 행위라고 했는데, 그런 악마의 행위를 인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모든 종교가 다 마찬가지인데 말이죠.

이렇게 두 개의 동그라미를 그려보면, 하나는 인간의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신의 나라라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디로 가고 싶어하는고 하니, 죽어서 신에게로 가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신을 아니까, 신의 절대적인 나라를 아니까, 즉 이 세상에서도 잘 살았지만 죽어서도 좋은 곳에 가고 싶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중간에 겹치는 부분이 있는데, 그 겹치는 부분을 인간은 무엇으로 보느냐 하면, 선행으로 본다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업보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것을 어느 쪽에서 채워야 하겠습니까? 인간 쪽에서 채워야 한다는 말이죠.

악마가 인간에게 준 것은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인데, 그래서 인간들은 악을 버리고 무엇만 모아서 '나'를 만듭니까? 선을 모아서 여기에 집결을 시킨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자기가 죽어서 염라대왕, 또는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자기가 했던 착한 것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말이죠.

여러분,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묻는 제가 나쁜데,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이렇게 살아간다는 겁니다. 굳이 말은 하지 않고 행동은 하지 않지만,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모든 인간은 이미 선악을 알고 있기 때문에 종교인인데, 절대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철학자도 무신론자로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 그림에서 인간은 벗어나지 못하는데, 인간의 정서, 인간의 마음, 인간의 심리, 그것이 이 그림 하나로 끝이라는 겁니다.

이 그림을 조금 더 설명하게 되면, 인간은 있음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신은 무엇입니까? "내가 있다" 라는 말은, 누군가가 자기를 만들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만든 어떤 분이 계시는데, 그것을 신이라고 하자는 말이죠. 그렇게 있음이라는 겁니다.

불교도 신이 있고 힌두교도 다 신이 있는데, 이슬람도 신이 있고, 심지어 종교가 없는 인간도 다 신이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있음과 있음, 그것 계속되는 있음의 연속이라는 겁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합류가 된다는 말이죠.

* 신데렐라 !!

시중에 방영되는 모든 TV 드라마의 주제가 이것인데, 어릴 때 어렵게 자라나서, 그렇게 구박을 받으면서 무시를 당하면서 살다가, 우연히 누군가에게 착한 일을 해주었는데, 그 남자가 바로 재벌 3세였다는 겁니다. 물론 자기는 그것도 모르고 그냥 헤어졌다는 말이죠.

그리고 겨우 대학을 졸업해서 대기업의 인턴시험을 보는데, 지방대학 출신이라서 가능성은 거의 제로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계단에서 커피를 들고 가다가 부딪혀서 커피를 엎지르게 되고, "아가씨, 좀 조심하지" 라고 해서 보니, 자기가 도와주었던 그 남자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 남자의 도움으로 취직이 되고, 결국에는 그 재벌 3세와 결혼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드라마를 왜 방영하는 겁니까? 모든 인간들의 마음 속에는 이 드라마 같은, 마치 신데렐라와 같은, 즉 자기의 착함이 성공으로 이끄는, 그런 것을 희망하는 마인드가 있다는 말이죠. 이 모든 인간들은 이게 다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그것을 채워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채워주는 설교가 교회에서 목사가 하는 설교라는 말이죠. 교회에 온 고객들의 마음속에 그것을 고정시켜줌으로서,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다는 겁니다. 물론 요즘은 노인들만 와글와글하지만 말이죠.

그렇게 "있음, 있음, 있음 …"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첫 번째 있음, 두 번째 있음, 세 번째 있음인데, 그러면 여기서 무엇을 추가하면 됩니까? 이제 여러분이 답변을 해주세요. 그것이 착함인데, 이 착함의 종류가 무엇입니까? 선교, 기도, 헌금, 예배 참석, 봉사, 이게 착함으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착함이라는 행위가 자기로 하여금 어디에 도달하게 해준다는 겁니까? 그게 천국에 도달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저도 시골교회에 오래 있었지만, 거의 11년 동안 있었는데, 여기서 시골목사와 시골권사의 대화를 잠시 들어보겠습니다.

* 시골목사 : 권사님, 하나님을 아십니까?
* 시골권사 :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천국에 보내주시는 분이시죠.
* 시골목사 : 그러면 예수님은 아십니까?
* 시골권사 : 물론 알아요.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분이잖아요.
* 시골목사 : 그런데 하나님만 알면 되지, 왜 예수님이 끼어 들어야 합니까?
* 시골권사 : ???

심방을 가서 물어보면 모르는데, 그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게 어디 시골교회뿐이겠습니까? 도시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에게 오직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는 것인데, 그뿐이라는 말이죠.

* 3개의 다이어그램, "인간, 하나님, 예수님" !!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다이어그램이 이렇게 되는 것이 일반인이라고 하면, 성도의 경우에는 3개를 그려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 하나님, 예수님",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다이어그램이 이렇게 3개가 된다는 것이죠.

처음에 그린 다이어그램의 경우에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인간의 선행이 끼어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인간의 선행이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으면 되는데 왜 예수님이 왜 끼어 듭니까?" 라고 물었을 때, 시골교회의 권사님만이 아니라 대부분이 답변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 예수님 끼어 드는고 하니, 여기서는 중간 과정에 인간이 끼어 든다는 말이죠. 인간의 행함은 그 존재가 무엇입니까? 인간은 있음인데,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자꾸 착한 일을 모아 놓는다는 겁니다. 있는 자의 착함이 중간에 끼어 들어서, "있는 나를 천국에 있는 나로 옮겨 놓는다" 라는 것인데, 그게 인간의 아이디어라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끼어 들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의 행함이 하나님께 바로 가지를 못하고, 여기 중간에 보면, 이렇게 3개가 겹치는 부분이 생기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겹치는 부분을 통해서 간다는 말이죠.

하지만 지금 이렇게 동그라미 3개를 그려 놓고 설명해도 사실은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 행함이 여기에 이렇게 끼어 들게 되면, 그것은 바로 마귀의 행함이 끼어 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의 행함과 예수님의 행함이 끼어 들면, 그러면 "인간이 행한 것 50%, 예수님이 행한 것 50%", 그렇게 합해서 100%가 되는데, 그렇게 해서 하늘나라로 가게 되는 겁니까? 과연 그런가요? 설령 이것을 "인간이 행한 것 0.1%, 예수님이 행한 99.9%" 라고 해도, 그것을 합쳐서 천국에 간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여기 중간에 있는 인간의 행함은 악마의 행함인데, 그러면 이것은 무엇입니까? 죄가 들어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행함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물위를 걷는 것이 들어갑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피가 들어갑니까? 예수님의 피가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죄와 예수님의 피가 만나서 하나님의 의가 들어가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는 말이죠. 그렇게 가르쳤는데 제자들이 이것을 과연 알아들었을까요? 알아듣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 인간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은 없다 !!

여기서 제가 그림을 바꾸겠는데, 알아들을 수 있는 그림으로 말이죠.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 하나님 쪽을 실선으로 그려놓았는데, 그것을 점선으로 바꾸어보자는 겁니다. 그렇게 점선으로 바꾸게 되면, "인간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은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거늘" 라고 하셨을 때, 이게 그들이 하나님을 본다는 겁니까?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현재 있음이 되기 때문인데, 그러면 보지 못하면 없음이 된다는 겁니다.

(요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인간은 자기가 눈에 보이는 당사자이기 때문에, 자기가 눈으로 확인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나옵니까? 도마가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 라고 했는데, 그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피부로 느끼지 아니하면, 그것은 인간에게는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동안 뭐냐 하면, 인간은 상상을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처음에 그린 동그라미가 두 개 있는 것인데, 인간은 상상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그냥 상상 아니고, 상상하는 것에는 어떤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내용은 어디서 가지고 옵니까? 인간은 자기의 심성과 본성, 이런 것을 총동원해서, 거기에서 착한 것과 거룩한 것을 끄집어내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일 것이다" 라고 해서, 신을 만들어놓았다는 겁니다. 그것이 종교라는 말이죠.

그런데 정작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그 내용을 누구에게 인수인계를 했는고 하니, 예수님에게 모두 인수인계를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상상하는 하나님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 너는 뭐냐?"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오늘날 교인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라고 하지만, 그런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은 우상인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믿으라고 보내준 분은 예수님뿐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고 누구입니까? 이삭이었는데, 그게 이삭을 죽이라는 명령이었다는 겁니다. 즉 "네가 이삭을 죽일 수 있느냐?" 라는 것인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본 내용은 이 땅에 '언약 사건' 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이 땅에 구체적으로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셨다는 말이죠.

* 이삭 이야기 !!

이삭 이야기를 좀 해보면, 이삭은 있음에서 나왔습니까? 없음에서 나왔습니까? 없음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이삭이 없다는 것은, 그 안에 태가 이미 죽었다는 말이죠. 즉 "없는 데서 나왔고 죽은 데서 나왔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 '나왔다' 라는 것을 빼버리면, 원래 죽은 태, 즉 없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아브라함은 자식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없으면 없는 것으로 살아가면 되는데,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식이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자극을 했다는 말이죠.

그러자 아브라함이 자기 여종을 통해서 아이를 낳게 되는데, 왜냐하면 사라가 임신이 안 되니까 임신되는 종을 통해서 자식을 낳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뒤에서 누가 부추긴 것입니까? 하나님이 약속을 부추겼다는 말이죠. 약속이 부추겨서 자식도 아닌데, 자식을 낳게 했다는 말이죠.

그게 아브라함인데, 그러니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러면 아브라함도 아브라함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되어야하는데, 왜냐하면 아브람의 하나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브람에게 없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아브람에게 죽었다는 겁니다. 육신은 아브람인데, 그 아브람이 이삭과 함께 죽고 난 뒤에 다시 태어났는데, 그 이름이 바로 아브라함이라는 말이죠.

* 없음의 있음, 그리고 죽은 자 !!

제가 이 이야기를 복잡하게 하는 이유가 있는데, 예수님은 죽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죽었으니까, 우리 인간은 그것을 없음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없는데, 그런데 그 없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음으로써, 있다고 여기는 '나'는 이미 죽은 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복음이라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를 교회에서 하면, 저쪽에서 먼저 격리조치를 하지 싶은데, "이것이 무슨 소리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선교하고, 그리고 예배참석을 해야지, 지금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어?"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교회에 왔으면 교회가 크게 되도록 해서 하늘나라가 확장되고 마귀나라를 이기도록 해야한다는 것인데, 그리고 시간이 되면 광화문에 나가서 태극기도 좀 흔들고 말이죠. 그런데 그런 것을 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하면, 다니던 교회에서 그만 격리조치를 당하게 된다는 겁니다.

* 오잉, 물이 포도주라고?

눈에 보이는 것이 그만큼 위험한 것인데, 아니 물을 떠가면서 그걸 포도주라고 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는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는 말이죠. 물이 포도주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그것을 믿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인간도 아닌 것을 성도가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친히 다룬다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물론 간혹만 잊어도 진짜 고마운 일이지만 말이죠.

이처럼 점선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일어난 일만이 하나님의 일이고, 예수님께 일어나지 않은 하나님의 일은 일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 예수님 자신에게 일어난 일만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이죠.

제자들이 이것을 믿지 않는데, 그래서 제자들이 도망치고 난 뒤에 누가 뒤따라옵니까? 주님의 스파이더맨 손에서 거미줄이 나온다는 겁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스파이더맨처럼 무엇이 나옵니까? 성령이 나오는데, 예수님과 연결된 선이 나온다는 말이죠.

예수님과 연결된 선, 그 예수님의 마음과 짝하여 꽂혀버리면, 예수님에게서 도망쳤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세계로 갔다가 다시 기존의 세계로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들어와서는 예수님의 했던 창조완성, 즉 안식의 때를 위한 절차에 합류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합류를 하면서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나의 죽음이 곧 주님의 살아계심입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을 보여줬던 분이 스데반 집사님이라는 겁니다. 평소에 늘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게 아니고, 죽었을 때 누가 나타났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일어나서 스데반 집사님을 반겼는데, 즉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는데, 그러니 짱돌에 맞아서 머리가 깨진 것은 문제도 아니라는 말이죠. 자기가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데, 그러니 "내가 죽고 나면 저 어린 자식은 누가 키우나? 생명보험은 누가 타나?"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러면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살아있을 때에나 죽고 난 뒤에나 한결같이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용했다는 점인데, 즉 "예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았다" 라는 겁니다. 그게 중요하다는 말이죠.

* 스바냐 선지자가 전하는 복음 !!

이제 끝으로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안식을 위해서 주께서 대규모적으로 준비한 게 있다는 겁니다. 그 준비한 것이 '스바냐서'에 나오는데, 스바냐서는 좀 생소하지요? 구약에 있는 선지서데, 여기서 스바냐서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떠난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물었는데, 참 솔직한 질문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모르는 길로 가려고 하셨는데, 그렇게 알 수 없던 길, 즉 있음으로는 갈 수 없는 길이라는 말이죠.

베드로가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고, 베드로가 있을 때 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조치하신다는 겁니다.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있을 때부터 주와 함께 할 수 있도록, 그래서 주께서 성령을 주신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너는 인간이 아니고 성도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인간이 아니고 성도이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너의 장래에 대해서 네가 걱정할 것은 이제 전혀 남아있지 않다" 라고, 즉 "네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 안에 같이 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제 스바냐서를 보겠는데, 1장 7절입니다.

(습 1: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이게 상당히 중요하고 재미가 있는데, 마지막 때가 되었는데, 마지막 때에 준비할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게 무엇입니까? 희생을 준비하고, 그 희생에 참여할 자를 특별히 구별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에 살아남을 자는 무엇입니까? 희생 속에 들어온 자만 마지막 때 구원이 되고, 나머지는 다 제거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제거되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라 하는 자들을 벌한다" 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습 1:12)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 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그러니 주님께서는 아무런 일도 안 하고 모든 일을 누가 한다는 겁니까? "내가 빡시게, 내가 하루 10시간 일하면서, 내가 일해서 내가 먹고 산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지금의 시대가 그런 시대가 아닙니까?

제가 어제 낮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우리 인간은 "내가 노동해서 산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안식은 자기 안식이라는 말이죠. "좀 쉬자. 진짜 좀 쉬자. 힘들어 죽겠다" 라고 하는 것은 누가 안식한다는 겁니까? 자기 존재의 있음에 대한 자기 안식인데, 그것을 안식이라고 자꾸만 우긴다는 겁니다.

주께서 자기를 없애는 게 안식인데, 자기 있음을 안식이라고 여기니까, 그러니 인간의 안식이 하나님의 안식을 도전하고 공격하게 된다는 말이죠.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네가 있나? 있다고? 그러면 내가 없애줄게. 그게 마지막 때야" 라고 하시면서 다 없애버린다는 겁니다.

그 다음으로 14절에서 16절을 보겠습니다.

(습 1: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습 1:15)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습 1: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하나님께서 지금 무슨 일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모든 있음을 무엇으로 바꾸겠다는 겁니까? "있었냐? 내가 없애줄게" 라는 것인데, 그날이 바로 마지막 날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모두 다 죽는데,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지요? 누구는 살아남는다는 겁니까?

주님의 희생에 참여한 자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다 죽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날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됩니까? 스바냐서에서는 무엇을 준비하는 게 아니고, "이런 것도 소용이 없다" 라고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그게 18절에 나오는데, 누가 한번 크게 읽어보세요.

(습 1: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라고 하는데, 은과 금이 아무리 많아도, 즉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의 분노에서 건질 수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주위에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있습니까? 요즘은 병원이름도 잘 지어야 하는데, 속 편한 병원도 있고 말이죠. 속 편한 것은 내과고 허리 편한 것은 외과라는 겁니다. 누가 주식을 해서 대박이 났다고 하면, 그런 사람이 부럽습니까? 너무 노골적으로 질문을 해서 미안한데, 그게 부럽습니까?

* 덜덜덜덜덜 !!

지금 10초간 답변을 못하고 계신데(ㅋㅋ), 그렇게 부럽습니까? 우리 인간은 그게 부러운데, 부러워야 인간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 육신의 안식은 돈이 있어야만 해결이 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돈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깨가 좀 이상하고 허리가 좀 이상하다 싶으면 보이프랜드를 사서 "덜덜덜덜덜", 그렇게 하면 된다는 말이죠.

자식이 부모를 무시한다고 하면, 그러면 무엇만 있으면 됩니까? "야, 이 통장을 봤지? 이래도 무시할 거야?" 라고 하면, "제가 모실게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도 돈만 있으면, 죽을 때까지 위세를 떨 수 있다는 말이죠.

돈으로 안 되는 게 없는데, 다 된다는 겁니다. 돈이 없어서 한탄을 하지, 돈이 있는데 왜 한탄을 합니까? 스피노자가 "내일 지옥을 가더라도 오늘은 사과나무를 심겠다" 라고 했는데, 그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아무튼 솔직한 고백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세상이 왜 이럴까요? 그것은 성경 자체가 격리를 시키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마지막 때에 희생에 참여될 자와 참여되지 않을 자는 스바냐서의 복음만 터져 나와도 알 수가 있다는 것이죠.

* 구원받은 자는, 예수님뿐 !!

이제 진짜 끝으로 이것만하고 마치겠습니다. 노아 때에 몇 명이 구원되었습니까? 여러 명이 구원되었는데, 그 숫자가 많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약 때는 누가 구원이 되었습니까? 몇 명입니까? 한 명인데,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예수님만 구원되고 다 멸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내는고 하니, 성령을 보냄으로써 "구원을 받아라" 라는 것이 아니라, "너는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라. 그리고 그 죽은 너를 살아있는 내가 사용하겠다. 오케이?" 라는 것인데, 그게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도 구원받을 수가 없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사용하여 주시니, 물이 포도주가 되는 놀라운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복음으로 인하여 격리되고 또 격리되게 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얼마나 주님께서 안식을 위해서 일하고 계시는지를 깨닫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11,25 오후 3시에 마침.

오직 주님이 만든 포도주에 취하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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