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08 - 두 개의 시선
24,11,04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천주교와 자연계시 !!
오늘은 교재 60페이지에 나오는 '자연계시'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이 자연계시는 성경에 나오는 말이 아니고 신학자들이 지어낸 것인데, 즉 "자연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종교가 곧 천주교인데,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와 같은 자들을 통해서 이러한 천주교의 신학이 이미 중세말기에 확립이 되어있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여전히 그 범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어떻다는 겁니까? 전적으로 타락한 게 아니고, 약간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느냐 하면, "약간이라도 남아있는 그곳에 교회전통으로 호소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마리아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천주교인데, 물론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언급을 하기는 하지만, 그 예수님 또한 마리아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이라고 하기보다는, 마리아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그야말로 완벽하고 철저하게 계산된 이단이라고 여기시면 되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그냥 이단이라는 말이죠. 인간의 감정과 인간의 이성에 호소를 하는데, 그것이 그들 주장의 전부라는 겁니다.
* 성경보다 중요한 교회역사 !!
그렇게 인간의 이성에 호소할 때, 그들이 호소할 수 있는 근거는 뭐냐 하면, 그게 유구한 교회의 역사라는 것인데, 성경말씀이 아니라는 말이죠. 성경말씀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교회의 역사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교회, 그들은 그것을 성당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 성당에 들어오게 되면 거기에 대기하고 있는 자가 있는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특별히 교회가 직분을 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신부(神父)' 라고 하고, 그들 신부의 약간의 우두머리를 대주교라고 하고, 대주교가 있는 성당은 그 크기와 상관없이 대성당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주교에서 더 올라가면 마지막에 최종적인 우두머리가 있는데, 그 우두머리 그 이전에 소위 각료들이 있다는 말이죠. 즉 추기경(카디널)이 있고, 그런 추기경들의 모임이 일종의 국회 역할을 해서, 거기에서 대표를 뽑으면 그 사람이 바로 교황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황과 주교에 의해서 사람이 구원되기도 하고 구원되지도 않기도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천주교는 "이단이냐? 아니냐?" 라는 것은 아주 간단한데. 그 천주교의 교주를 인정하지 않으면 이단이라는 겁니다. 이미 천주교라는 집단이 생겼으니까 말이죠.
* 천주교의 특징, '믿음이 없어야 한다' !!
그래서 천주교의 특징은 믿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천주교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믿음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믿음의 자리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이성이 들어간다는 겁니다.
이성이란 것은 따지고 분석하는 것인데, 그래서 교회역사와 전통에 대해서 보다 많은 이성적인 사람들의 집단이 뭐냐 하면, 그게 바로 신부들, 즉 성직자들이라는 말이죠. 아까 성직자들의 우두머리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그게 교황이란 겁니다. 왜냐하면 성직자 그룹에서 교황을 뽑으니까 말이죠.
그래서 일반 천주교 신자들은 절대로 믿음이 있으면 안 되고, 이성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이성에 의해서, 보다 더 발달된 이성을 가진 성직자를 통해서 그들은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우리가 교재로 사용하는 이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라는 책에 잘 나와있다는 것이죠.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보고 뭐라고 하십니까? 바리새인들, 그들은 자기들도 천국에 가지 못하고, 천국에 가고자 하는 사람도 차단을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아비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그들의 아비는 악마라는 말이죠.
(마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악마가 만든 종교가 천주교인데, 오직 이성이라는 겁니다.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 듣는 것, 보는 것, 느낀 것을 마음속의 이성을 통해서, 그런데 이성을 통해서 생기는 것은 누구의 것이 될까요? 자기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것으로 채워진 이성적인 지식이 자기를 구원한다는 것, 그것이 천주교라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궁금한 것이 있는데, 천주교가 그렇다고 하면 개신교는 과연 무엇이냐는 겁니다. 개신교는 천주교의 똘마니인데, 즉 동아리라는 말이죠. 그래서 천주교를 그대로 따라한다는 겁니다.
* 질문 - 목사님, 그러면 예수님 당시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제자들에 대해서 이제 설명할 것인데, 강의 중에 질문하는 사람은 처음이지 싶은데 말이죠(ㅋㅋ). 물론 질문을 해도 괜찮은데, 너무나 감사한 일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동영상을 보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대신해서 질문을 해주셨다는 것이죠.
개신교가 천주교의 분파인데, 그러니 똑같다는 겁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방금 이야기했지만, 둘 다 믿음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믿음이 없다는 것은, "믿음을 용납하지 않는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자기를 구원하고 싶은데, 그런데 믿음은 애초부터 우리 인간에게는 없었다는 겁니다.
* 이성이 아닌, 믿음은?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누가복음 18장 8절에서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이 어느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따지는 이성이 아니고 믿음이라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눅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7장 5절에 보면, 그 당시에 예수님이 말씀을 아주 과격하게 하시니까 제자들이 걱정이 많이 되었던 모양인데, 그래서 예수님에게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느 정도가 되어야 믿음이냐 하면, 그 뒤에 예수님이 뽕나무 이야기를 하시는데 말이죠. 뽕나무를 보고 바다에 빠지라고 했을 때, 그 뽕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지는 정도가 될 때, 그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 너희에게는 믿음이 없다 !!
(눅 17: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눅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마태복음 17장에도 보면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물론 언뜻 보면 비슷하지 않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는데 말이죠. 마태복음 17장 19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뭐라고 합니까?
그들이 "우리가 어찌하여 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라고 하시면서, 역시 믿음을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마 17:19)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마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지금 너희에게 믿음이 없다" 라는 것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그렇게 믿음이 없다는 것을 강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구원받는 것은 이성으로 하는 게 아니고 무엇으로 한다는 겁니까? 믿음으로 받는다는 겁니다.
* 믿음 없음을 감추고 있는 인간들 !!
그런데 그동안 인간은 믿음 없음을 무엇으로 가렸는고 하면, 자연계시를 통해서, 즉 자연을 더듬어서 찾아서 하나님에게 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을 통해서 자기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내가 탐구하리라" 라는 것인데, 이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둘러서 이야기하지 말고 딱 대놓고 이야기하면,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믿음이 없어요" 라는 겁니다.
그렇게 믿음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더듬어서 찾겠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이것은 탐구하고 분석하는 것인데, 전혀 믿음이 아니고 이성적으로 따지는 것으로, 즉 "신은 거기 계실 것이고" 라고 하면서 그렇게 따진다는 말이죠.
* 더듬어 찾는 인간들 !!
그러면 이제 교재를 한번 봅시다. 거기에 보면 사도행전 17장 27절에서 31절까지 말씀이 나오는데, 조금 길어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행 17: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 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행 17: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행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다 !!
여기 28절에 시인이 나오는데, 철학가라는 말이죠.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신의 소생이기 때문에 신을 찾아가야 되고, 그렇게 해서 신을 찾게 되면 우리는 이성적으로 모든 진리를 확보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신을 어떻게 찾아가는고 하니, 신이 이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러면 금이나 은이나 돌, 이런 것들도 누가 만들었어요? 이방인이 보기에는 신이 만들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 자신은 신의 소생이니까, 자기를 누가 만들었어요? 역시 신이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더듬어 찾아보니, 자기도 하나님이 만들고, 금이나 은이나 돌도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만든 내가, 나의 이성으로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금과 은과 돌 가지고,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각을 다듬으면, 그것이 비록 완전한 신이 아니라도 신을 찾아가는 노력은 된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한 열심, 순수함, 즉 "하나님이 만든 내가, 나름대로 하나님을 찾겠다고 애를 쓴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가 보기에도 참으로 대견스럽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어떨까요? 당연히 대견스럽게 여기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천주교를 비롯한 천주교의 아류에 불과한 개신교, 그리고 모든 인간들이 시도하는 종교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런 시도가 딱 무엇이 없다는 겁니까? 믿음이 없다는 것인데,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원하는데, 그런데 인간에게는 내놓을 믿음이라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믿음이 없으니까, 인간들이 구차하게 어떻게 합니까? 믿음을 대신해서 무엇을 더듬어서 찾는다는 말이죠.
*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는 무엇인가?
그러면 이제 자연계시라는 것, 즉 자연 속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찾아 나서는 것,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를 주었다" 라고 했을 때, 그 계시는 과연 무엇이냐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 쪽에서 찾아갈 만한 것들을 주는 것이 계시가 아니라고 하면, 즉 하나님께서 "이렇게 오느라, 이렇게 오너라" 라고 하는 게 계시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러면 무엇이 계시냐는 말이죠.
"내가 군데군데 어떤 흔적을 남겨놨으니까, 그 흔적을 찾아 더듬어서, 이성적으로 잘 판단해서 구성하면 그게 얼추 하나님처럼 된다" 라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게 금지가 되어있다면, 그러면 하나님이 딱 주시는 계시는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교재 61페이지의 사도행전 17장의 말씀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데, 여기서 30절과 3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행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 회개하라 !!
30절에서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라고 하는데, 여기서 '회개' 라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잘못 생각했구나" 라는 겁니다.
그리고 31절에서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라고 하면서, 무엇을 주었다고 합니까? "믿음 만한 증거를 주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들이 증거에 들을 수도 없는 것을 증거로 삼아서, 그것을 사도행전 17장 27절에서는 '더듬어 찾아'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더듬어 찾는 방식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그게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더듬어 찾아가는 게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것을 그냥 말로 하면 안 되고, 글로 한번 써보겠습니다. 믿음의 증거가 뭐냐 하면,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고 하는데, 그 믿음의 증거가 뭐냐 하면, 첫 번째는 인간 쪽에서는 회개라는 겁니다. 즉 "인간 쪽에서는 회개할 마음의 준비를 하라"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 온 세상이 심판 안에 있다 !!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그게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온 세상이 심판 안에 있다" 라는 것인데, 마지막에는 심판이란 말이죠. 즉 "온 세상이 심판을 받는 것은 이미 확정이 되어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이죠.
이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온 세상이 죽음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중요해서 빨간 것으로 적어보겠는데, 보통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출생하면 그 다음이 성장인데, 그 중간에 중요한 것이 결혼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결혼을 했다면, 그 다음에는 늙어서 사망이라는 말이죠.
* 너는 죽음 안에서 죽는다 !!
그러니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이것을 직선으로 표현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출생했다고 하면, 그러면 학교를 다니고 결혼을 하고 취직을 하고 하는데, 그러다가 결국은 사망, 즉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 죽음을 어디에 기재를 합니까? 선에 기재를 하는데, 보통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태어났다. 내가 죽는다. 그리고 그동안 여러 가지의 일들이 있었다" 라고 하는데, 그게 인생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고, 즉 선으로 보지 않고 동그라미로 본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죽음 안에서 태어났다" 라는 것인데, 즉 "너는 죽음 안에서 아파트를 샀고, 너는 죽음 안에서 출세를 했고, 그리고 너는 죽음 안에서 죽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결혼을 하든 금메달을 따든 노벨상을 타든, 그런 것에 상관없이 그 모든 일어나는 상황은 무엇이라는 겁니까? 죽음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라는 것인데, 그래서 인간은 죽음 안에서 더듬어 찾아서 죽음 밖으로 나가려고, 그렇게 천국에 가려고 했다는 겁니다.
자연계시를 가지고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 이성이라는 것, 지식이라는 것, 그러니 천주교에서는 무엇이 이단인지를 다 보여주었다는 말이죠. 오히려 천주교에 참 고맙다는 겁니다. 천주교에서는 믿음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믿어라 !!
그러니까 인간의 이성인데, 이때 천주교에서 말하는 이성은 "천주교회를 믿어라" 라는 겁니다. 왜 천주교회가 믿을 만하냐 하면, 거기에는 역사와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묻지도 따지지 말고 믿으라고 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이게 전통이야. 묻지 마라. 이게 역사야. 따지지 마라" 라는 것인데,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천주교에서 관행이 되어있고 관습이 되어있는 미사, 거기에 참석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거기에서 대기하고 있던 신부들이 "이것은 예수님의 몸입니다" 라고 하면서 나누어주는 것을 받아먹으면 되고,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의 피입니다" 라고 하면서 주는 포도주를 마시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참으로 쉽다는 말이죠. 참 포도주는 주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하면 무엇이 안 된다는 겁니까? 출생을 해서 결혼했다는 겁니다. 아내가 천주교회에 다니니까, 자기도 아내 등살을 아기지 못해서 억지로 가봤다는 말이죠. 중간에 결혼하고 난 뒤에, 전에는 불교였지만 이제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자기가 성당에 다녀주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는 무엇입니까? 교회, 즉 성당출석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마지막은 죽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당에 출석하고 나서 죽으면 나는 천국에 간다. 이것을 보장해주는 것이 곧 천주교회다" 라는 것이죠.
* 모든 것이 심판의 대상 !!
그런데 정작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성경은 모든 것이 심판이라고 하는데, 심판 안에, 즉 죽음 안에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죽음 안에 있으니, 출생을 해도 죽기 위해서 했고 성당이나 교회에 다녀도 그것도 역시나 지옥에 갈 행위이고, 그렇게 이 땅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도 심판을 받게 되는 행위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그 어떤 것도 어떤 것을 하더라도 역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인데, 여러분이 이게 정말로 믿어지십니까? 그런데 "내가 성당에 안 나왔으면 큰일날 뻔했다. 내가 교회에 안 다녔으면 큰일날 뻔했다" 라고 한다면, 이것은 과연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원이 아니고 직선을 생각하는 것인데, 그렇지요? 즉 "그때 내가 교회에 안 다녔으면 지옥에 갈 뻔했는데, 그런데 그때 내가 교회에 다녀서 이 선 자체가 그대로 천국에 가는 선이 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생각이지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복음은 뭐라고 합니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떻다는 겁니까? 이미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선을 생각하는 인간으로서는, 이미 죽음 상황이라는 것을, 즉 심판 안에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까 살펴본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셨는데, 인간에게는 믿음이라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없으니깐 더듬어 찾는데, 그래서 "어느 교회에 가면 됩니까? 어느 교단이 좋습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는 "네가 믿을 만해?"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제가 어떤 교회의 동영상을 보았는데, 김서택이라는 목사의 은퇴식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퇴직금을 얼마나 받는지, 그런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저는 퇴직금을 얼마나 받았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30억을 받았다고 하자는 말이죠(ㅋㅋ).
아무튼 교회에서 어떤 은퇴 목사가 30억을 받았다고 하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권한이 그 교회 교인들에게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것을 자꾸만 감추면 안 된다는 겁니다.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지만, "돈을 안 냈으면 말하지 마세요" 라는 것이죠.
이 죽음의 세계에서는 모든 게 돈인데, 돈도 안 내고 남의 일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돈을 내었을 때는 하시라는 말이죠. 돈 값으로 하시라는 것인데, 돈 값으로 한 마디를 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돈을 냈기 때문에 말을 해도, 그런데 자기의 말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면, 그러면 그것은 사기를 당한 것인데, 자기가 사기를 당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그 단체에서 사기를 당한 겁니까? 아니면 자기가 자기한테 사기를 당한 것입니까?
자기가 자기한테 사기를 당한 것인데, 즉 "내가 이 교회에 돈을 내면 이 교회가 나를 구원해줄 것이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 생각인데, 그러한 자기 생각에 자기가 사기를 당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이 지금 이 세상, 그런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이 다 돈을 낼 경우에만 발언권을 획득하는 이 세계, 돈을 내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입을 다물라" 라고 강요를 당하는 세계, 그 세계 출신자가 누구냐 하면, 그게 바로 우리 자신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아까 본 사도행전 17장에서 "이 세상은 심판 안에 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제가 중요한 것을 말씀해드리겠습니다. 믿음이 뭐냐 하면, 믿음은 두 개의 시선으로부터 출발해서, 이것이 한 개의 시선으로 모아지는 힘, 그게 믿음이라는 겁니다.
* 두 개의 시선 !!
이 두 개의 시선은 뭐냐 하면, 두 개의 시선이니, 시선이 하나가 아니고 두 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먼저 하나는 뭐냐 하면, ■1"이 세상에서 돈 없이는 사람구실을 하지 못한다" 라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가 없다는 말이죠. 우리는 평생을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만 쳐다보는데, 아는 것이 그게 전부라는 말이죠. 열심히 돈을 벌어야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 그게 몸으로 체득이 되었다는 겁니다. 스펀지 안에 물이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축축하게 되는데, 우리 몸은 그 생각으로 축축해졌다는 것이죠.
* 이제 교회에 가볼까?
그러면 이제 돈도 좀 벌었고 하면, 이제 걱정이 되는 게 뭐냐 하면, 죽고 난 뒤에 어디에 가느냐는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교회가 그게 전문이라고 하는데, 교회에 가볼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돈을 내지 않으면 말이 먹히지 않으니, 돈을 조금 내면서 "교회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겁니다" 라고, 그렇게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말이죠.
여기서 교회에 나오는 다른 사람은 자기 말이 막히니까, "저 장로님은 도대체 얼마나 냈지?" 라고 묻는데, 그러면 "저 사람이 아니었으면 교회운영이 안 됐어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장로님을 다 따라간다는 겁니다. 이게 시골교회도 그렇고 도시교회도 그렇고, 다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면 개척교회는 어떨까요? 개척교회를 할 때 처음에 그 돈을 누가 냈습니까?
개척교회니까 누가 냈겠어요? 목사 자신이 내었다는 겁니다. 자기가 대출을 받든지 해서 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교회는 누구의 것입니까? 주주가 누구입니까? 목사 자신의 교회인데, 그래서 "내 말을 들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개척을 할 때 얼마나 냈는데?" 라고 하는, 이게 우리의 시선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우리가 모른다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살기 때문에 모른다고 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거기에 또 하나의 시선이 쳐들어온다는 말이죠.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심판이라는 겁니다. 즉■2 "그런 사고방식으로 인해서 너는 심판 가운데 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같이 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시선이 몇 개입니까? 두 개라는 겁니다.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자기 쪽에서 이 세상과 하나님을 바라보는, 즉 '나'를 지키려고 하는 시선이 있고, 그러면 또 하나의 시선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고발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인데, 그것이 누구의 시선이라는 겁니까? 그것이 주님의 시선인데, 그러면 시선이 몇 개입니까? 두 개인데, 그런데 이렇게 두 개가 있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두 개가 다 큰일이 났다고 하고 있는데, 그런데 여기에 두 개의 시선을 하나로 모으는 힘이 있다는 말이죠.
* 두 개의 시선을 하나로 모으는 힘 !!
그렇게 하나로 모으는 힘, 그것이 바로 하늘의 시선이고 하나님의 시선인데, 그것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그분의 능력으로 인해서, 이 두 개의 시선에서 출발해서 하나의 시선으로 초점이 모아지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을 '믿음'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믿음은 두 개의 시선이 하나로 모아지는 것인데, 두 개 시선이 날아가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는 죽을 때까지 두 개의 시선이 나란히 가는데, 그런데 우리는 이 두 개의 시선을 다 알고, 여기서 자기가 믿는 것은 어느 쪽이라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온 세상은 심판 속에 있다" 라는 것을 이제 믿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믿음 가운데서 무엇이 부정되겠어요? 죽음의 상황 속에서 태어난 자기 자신, 그것이 부정된다는 말이죠. 그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회개'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이 생겼으니까 회개가 나온다는 것이죠.
회개하고 나서 믿음을 받는 게 아니고, 믿음이 생겼으니까 회개라는 것이 있고, 그런 회개가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육체는 여전히 시선이 몇 개 되어야 합니까? 하나가 되면 안 되고 두 개가 되어야 하는데, 이 두 개가 수시로 하나로 모아진다는 겁니다.
* 수상한 육신 !!
그렇게 모아지고 다시 또 두 개가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이 아주 수상한 육신이라는 말이죠.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너희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라고 염려하지 말라고 했는데, 즉 커피를 어떻게 탈지 염려하지 말라는 겁니다.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면 "염려하지 말라" 라는 말씀은, 우리가 염려하고 있다는 겁니까? 염려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까? 염려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시선이 몇 개라는 겁니까? 예수님이 모든 말씀은 우리의 시선을 두 개로 만드는 말씀이라는 말이죠.
지옥에 가는 이방인들은 그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라는 문제 때문에, 그것 때문에 계속 고생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데,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 나라 의를 구하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시선이 몇 개입니까? 시선이 두 개인데, 한 쪽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아니 우리가 무슨 수를 버립니까? 우리 태생이 저주받은 것인데, 그렇게 우리는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육신 자체가 아무리 교회에 다녀도, 돈이 없고 아프고 하면 짜증 짜증 왕짜증이 난다는 것이죠.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도저히 속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 너무나 자연스러운 천주교와 개신교 !!
그런데 이 천주교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그리고 개신교도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말이죠. 믿음이 없어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거기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것, 그것은 자기가 자기한테 속아넘어간 것이란 말이죠.
그렇다면 이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거부를 하겠어요? 하지 않겠어요? 당연히 거부를 한다는 겁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 라고 하는데, 즉 "열심히 믿으려고 노력하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믿음은 노력하는 게 아니고, 그렇게 나오는 것 자체가 믿음에 대한 거부라는 겁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노력해서 얻고자 하는 것인데,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관심을 두려고 애를 쓴다는 말이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그 '나'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애를 쓰는 것인데, 그런 것이 전부 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자기 사랑을 약간 떼내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시도하는 것, 그게 바로 믿음이 없다는 뜻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천주교나 교회나 전부 다 노력하는 것뿐이라는 겁니다. 정말 믿음이 있다고 하면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요? "성당도 심판 안에 있고 교회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다" 라고, 그렇게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베드로전서에 나오는데, 4장 18절입니다.
(벧전 4: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베드로도 참으로 대단한데, 교회를 아예 심판의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집이 교회인데, 하나님의 집부터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당이든 교회든 간에,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라는 겁니다.
* 교회가 곧 심판의 대상 !!
우리는 교회가 심판을 받는다고 짜증을 내거나 불평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오히려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가 전한 계시 앞에서 즐겁게 뛰놀아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가 심판을 받는다고 하는데, 너무 신나지 않아?"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말씀을 믿지 교회를 믿지 않으니까 말이죠. 10억을 주든 20억을 주든, 그것은 심판 대상에서 자기들끼리 돈놀이를 하고 있는데, 그것을 왜 신경을 쓰냐는 겁니다. 다만 자기가 돈을 냈을 경우에는 "내 돈인데, 내 돈을 저렇게 날리면 안 되는데" 라고 하면서 신경을 써야하지만 말이죠.
하지만 평소에 교회에 돈을 낸 적이 없다고 하면, 점심값만 냈지 돈을 낸 적이 없다는 겁니다. 요즘 교인들은 돈을 잘 내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것은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자기 돈으로 자기 살려고 하는 불신의 태도 때문이라는 말이죠.
* 영적인 것을 어디서 볼 수 있는가?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시작하겠습니다. 이 질문이 어려운데,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보세요. 질문을 크게 쓰겠는데, 즉 "영적인 것을 볼 수 있습니까?" 라는 겁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질문은 "어디서 봅니까?" 라는 것인데, 누가 답변을 해보세요. 영적인 뉴스를 어디서 보느냐는 것이죠.
이초석 목사가 있었는데, 성경에서 자꾸만 영적으로 거듭나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자기 욕망에 이끌려서 그 다음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고 하니, 자기가 구원받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영적인 것을 눈으로 목격했으면 좋겠다. 만졌으면 좋겠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초석이 무슨 짓을 하느냐 하면, 자기가 안수한 물을 가지고, 그것을 영험한 물이라고 해서, 병도 고치고 한다고 하면서 비싸게 팔았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방법을 그대로 사용한 사람이 바로 허경영이라는 겁니다.
"내 눈을 바라봐" 라고 하면서 공중부양을 하고 하는데, 대통령 후보로 나와서는 국회의원들을 모두 다 없애버리겠다고 하고 말이죠. 그렇게 이초석과 허경영이 하는 이야기기가 사람들에게 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이초석은 이단이야. 허경영은 사기꾼이야. 집어넣어야 돼" 라고 하면서도, 그러면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나는 영적인 것은 어디서 보느냐?" 라는 것인데, 즉 "영적인 것을 어디서 어떻게 어떻게 볼 수 있느냐?" 라는 문제가 남아있다는 말이죠.
* 노아 방주와 영적인 것 !!
그것을 제가 답변해드리겠는데, 노아 때 방주가 떴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방주 안에 여러분이 그 방주 안에 들어갔다고 치자는 말이죠. 그러면 노아와 같이 1년 동안 생활을 하게 되는데, 방주 안에 영적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 낙타에 무엇을 실어 놨는데, 영적인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주님과 함께 통과해 왔는데, 그들이 광야에 와서 물을 마셨고, 그리고 만나를 먹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영적인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에게 영적인 것은 보이지 않고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양식이 없고 물이 없을 때, 누구를 원망했어요? 모세를 붙들고 닦달을 낸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상하게 모세는 백성들을 보고 닦달을 내는 것이 아니고, 모세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제가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지시를 받고 있는데, 그런데 모세는 알고 있는 그 사실, 즉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백성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는 겁니다. 만약에 있었다고 하면 백성들이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그러나 백성들은 계속 원망을 했는데, 모세를 보고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는 겁니까? 도대체 당신은 우리를 어디로 몰고 가는 겁니까?" 라고 나왔다는 겁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눈에 보이는 것과 듣는 것을 다 했는데, 그렇다면 영적인 것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 축복과 저주 !!
그 해답은 노아 방주에서 나와서 주어진다는 말이죠. 노아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이 둘로 분류가 된다는 겁니다. 셈과 함과 야벳인데, 그런데 여기에서 함과 그 아들인 가나안은 저주를 받고, 또 다른 한 쪽은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즉 보이지 않는 영이 이러한 저주 역사와 축복 역사의 기반이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너는 어떻게 해도 천국에 가야 되고, 또 너는 어떻게 해도 지옥에 가야 돼" 라는 것인데, 그러니 주도권이 인간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닌데, 인간의 이성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행함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인데, 이렇게 자기 행함에 있지 않은 모든 이해가 바로 영적이라는 말이죠. 그게 곧 영적인 것인데, 그런데 그동안 왜 영적인 것을 몰랐을까요? 그것은 자기 덩치가 영적인 것을 덮어버렸다는 겁니다.
* 목사님, 요새 영적생활이 바닥입니다 !!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목사님, 요새 내가 영적생활이 도대체 완전히 바닥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아요?" 라고 말이죠. 그러면 저는 답변을 말로 하는 것보다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낫고 여겨지는데, 그렇다고 해서 행동으로 보여줄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 의자가 권사님이라고 하고, 이 의자가 저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면, 저는 "권사님, 좀 나오세요" 라고 하면서 이 의자를 당긴다는 말이죠. 그러면 권사님이 나오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목사님, 요새 신앙생활이 바닥입니다. 도대체 신앙생활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어요. 교회에 가도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기도는 끊은 지가 오래고, 그냥 세상 사람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기억 속에는 신앙생활이 참 기쁘고 감사했는데, 어떻게 하면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라고 말이죠.
거기에 답변은 말로 하는 것보다도 행동을 보여주는 게 좋다는 말이죠. 그러면 저는 이 의자를 그만 깔고 앉아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의자가 뭐라고 합니까? 영적으로 죽겠다고 하면서 난리를 친다는 말이죠. 자기 덩치가 영적인 것을 깔고 앉아놓고는 괴로워한다는 겁니다.
제가 아까 두 개의 시선이라고 했는데, "돈이 있어야 산다" 라는 것은 출생해서 죽을 때까지, 이게 우리 육신에서 스펀지처럼 되어 가지고 죽을 때까지 계속 간다는 말이죠. "돈 없이는 못 산다" 라는 것은, "나는 그동안 돈 관리에 성공했기 때문에, 지금 나이가 많아도 밥이라도 먹고 산다. 나름 성공했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이게 바로 이성적 시선인데, 이런 타고난 시선이 그동안 무엇을 깔고 앉아버렸습니까? 우리 주님을 깔고 앉아 버렸는데, 그러면 주님은 그 다음부터 말씀으로 따지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다 누구 것이지?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다 누구 것이지?" 라고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답변을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가 고생해서 얻은 자기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것은 주의 것입니다" 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만약에 주의 것이라고 하면, 주님이 "너는 아파트 사기를 당해서 다 날려도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어" 라는, 합리적인 추론이 뒤따르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그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내 몸은 내 것이 맞다" 라는 생각이 강렬하고 하니까, 그 딜레마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괴로워한다는 것이 바로 무엇입니까? 감사의 조건이 된다는 말이죠. 지옥에 갈 사람은 그런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이 히브리서에 나오는 '징계' 라는 것인데, 히브리서 12장 8절에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라고 하는데, 즉 징계가 없으면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의 괴로움을 주신다는 겁니다.
(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그리고 그런 괴로움 주시는 이유에 대해서, 히브리서 2장 14절과 15절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우리 인간은 죽음의 상황 속, 즉 아까 말한 동그라미 속에서 태어났다는 말이죠.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항상 그 마귀에 의해서 "내가 죽으면 안 돼. 내가 사는 것은 성공한 것이고, 죽은 것은 실패한 것이야" 라는, 그런 생각을 평생토록 우리는 마음속에 익혀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가 자기한테 그만 사기를 당한 것인데, 물론 악마의 속임수 때문이지만, 자기에 속았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즉 버려야 될 자기를 버리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 다시, 영적인 것을 어디서 볼 수 있는가?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면, "영적인 것을 어디서 볼 수 있는가?" 라고 하는 질문에 있어서, 그것은 자기 자신이 영적 존재라는 것을, 즉 우리는 영적 존재라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내가 영적 존재로 구원받는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악마적 생각이고, 그러니 그게 아니고 "영적인 주님이 나를 사용한다" 라는 것, 그게 성령의 생각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돈만 챙기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사용하시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만약에 손자가 폐렴에 걸려서 그야말로 다른 일도 하지 못하고 고민이라면, 고민을 더 하시라는 겁니다. 고민을 실컷 하세요.
그러나 하나의 시선, 그게 자기의 시선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다른 시선을 잃어버리면 안 되는데, 그게 죽음 상황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죽음상황 속에 태어났다는 것이죠. 시편 51편에 보면, 거기에 다윗의 고백이 나온다는 겁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 속에서 태어났다. 나는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은 이렇게 죽음 상황이라고 보는데, 이것을 예수님 차원에서 말씀을 드리면 그냥 간단한데, '무덤' 이라는 겁니다. 즉 "나는 어디서 태어났느냐? 무덤에서 태어났다" 라는 것이죠. 우리는 무덤에서 태어난 것인데, 이게 아주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 !!
왜냐하면 예수님과 관련된 계시가 뭐냐 하면, 이게 사도바울이 사도행전 17장에서 이야기한 것인데, 예수님의 무덤은 무슨 무덤인고 하니, 그 앞에 글자가 하나 다 붙는데 말이죠.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라는 겁니다.
이 얼마나 신기합니까? 무덤 속에 있게 해놓고, "너의 무덤을 빈 무덤이 되게 해줄게" 라는 겁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가 어디에 갔다 왔습니까? 군대를 갔다왔습니까? 자기 무덤을 다녀왔다는 말이죠.
마리아가 그것을 보고 믿었는데, 그래서 나중에 마리아는 자기가 시집을 가려고 모아놓은 향수를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는 겁니다. 물론 그게 없다고 해서 시집을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다와 마리아 오빠인 나사로가 죽었다가 나흘만에 살아났다는 겁니다. 나사로는 무덤에 갔다왔다는 말이죠. 그러면 12장에서는 뭐냐 하면, 그 동생 마리아가 향수를 예수님의 발에 모두 발라버린다는 겁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자기에게 향수를 부은 이유를 영적으로 해석을 하신다는 말이죠. 우리가 그렇게 보고 싶은 영적인 것이 이렇게 예수님 말씀에 모두 나와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뭐냐 하면 "나의 장례식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요 12: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다시 말해서, 예수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곧 죽음의 세상이라는 것을 전제로 깔아야, 그게 영적인 말씀으로 이해가 된다는 말이죠. 10억을 주든 20을 주든, 죽은 무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다 괜찮은데, 다만 자기가 거기에 돈을 좀 보탰다고 하면, 그 돈이 날아간 것이 아깝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정도는 미리 눈치를 좀 채고 하지 않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는 겁니다(ㅋㅋ).
드디어 사도행전 17장 30절과 31절을 보게 되었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행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여기에 보면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라고 하는데, 지금 여기까지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회개와 심판, 아직은 기억이 나지요?
* 과연 무엇이 '영적' 이라는 것인가?
이제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뭐냐 하면,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라는 것인데, 이 증거가 바로 영적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성령을 받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 다음에 어떤 말이 이해돼야 되느냐 하면, 여기서 교재 60페이지 밑에서부터 61페이지 위에까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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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 동생이 있으면, 동생을 보고 보이지 않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으니 동생이 태어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시장에 있는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가리켜 '저분이 우리 아버지이며 어머니다' 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죄인이라는 생각을 인정하지 않게 나온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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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을 보면서 단번에 우리를 만드신 창조적인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즉 진짜 부모를 아는 사람이라면, 시장에 많은 사람이 있더라도 '저분은 우리 아버지고 저분은 우리 어머니다' 라고 알아봐야 합니다. 섞여 있어도 알아봐야 하는데,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두고 부모를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나 보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좀 닮았는데요' 라고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더듬어 찾는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신이 우리 아버지가 되십니까? 우리 어머니 되십니까?' 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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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렇게 "당신이 우리 아버지가 되십니까? 우리 어머니 되십니까?" 라고 더듬어 찾는다는 것 자체가, "이 사람은 믿음이 없고, 아직도 자기 부모를 찾지 못했다" 라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즉 자기 부모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 영적인 것이 아닌 것이 없어 !!
그러니까 영적, 즉 성령을 받아서 이미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하면, 성경말씀뿐만이 아니고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무엇으로 본다는 겁니까? 믿음 현상으로, 즉 영적 현상으로 보게 된다는 말이죠. 영적인 것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겁니다.
미국투표가 어떻고, 한국의 김건희와 윤석열가 어떻고, 북한의 김정은이 어떻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떻고,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이 어떻고, 그런 모든 것들도 무엇으로 이해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까?
이런 모든 것들이 영적으로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드라마를 보든지 예능 프로그램을 보든지 무엇을 보더라도, 물론 자기의 가정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도 역시 영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아까 영적으로 보는 방법을 알려드렸는데, 시선이 처음에 몇 개부터 출발한다고 했습니까? 두 개로부터 시작해서, 물론 자기 힘으로는 하나로 모으지 못하지만 영적인 힘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로 모으게 된다는 말이죠.
두 개가 있는데, 그 한 쪽에 대해서는 그것을 시답지 않은 일로 여기고, 그리고 다른 한 쪽, 즉 오직 진짜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분, 그분이 우리를 무덤에서 빈 무덤으로 빼돌리는 분이라는, 그 사실에 대해서 감격하면서 받아들이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살아가면서 내 신상에 어떤 일도 일어나라" 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괜찮은데, 뽕나무가 바다에 빠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또 산에 옮겨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말이죠. 왜냐하면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그것을 해낼 수 없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누가복음 17장 5절 말씀을 다시 보겠는데, 이번에는 여러분에게 믿음이 있다고 치고, 이번에는 여러분을 너무 의자에 깔고 않은 상태에서(ㅋㅋ),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눅 17: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눅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5절에 보면, 사도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라고 하는데,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참 힘들게 하시는데 말이죠. 여러분, 뽕나무와 대화가 됩니까? 안 되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겨자씨의 믿음이 있으면 뽕나무하고 대화가 된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뽕나무야, 바다에 빠져라. - 예", 그렇게 말이죠.
그러니 뽕나무가 순종하겠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실 때, 지금 제자들이 그것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믿음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제자들 = 뽕나무 !!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성령이 오게 되게 되면 제자들이 뽕나무를 보고 지시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제자들을 뽕나무라고 여기게 되는데, 그러면 제자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슨 말인고 하니, 성령이 오게 되면 제자들이 주님의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아주 중요한데, 주님의 믿음이 오게 되면, 주님이 뽕나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을 때, 제자들은 거기에서 누구이어야 한다는 겁니까? 뽕나무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뽕나무는 순종했습니까?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순종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고 바다에 빠지라고 하면 빠지겠어요? 빠지지 않겠어요? 빠지는데, 순종하게 된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 사도바울을 통해서 !!
그러니 믿음이라는 것, 자기가 믿음을 가지고 공중부양을 하지 말고, 자기가 어떤 아주 신기한 마술을 행하려고 하지를 말고, 그 어떤 경우라도 어떻다는 겁니까? 유두고가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그것을 누가 했어요? 주님이 하셨는데, 누구를 통해서 말인가요?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사도바울이 죽은 사람을 살렸다 카니까 누가 억울한 겁니까? 그런 소리를 듣는 사도바울 자신이 억울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자기는 순종을 했을 뿐이지, 자기가 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사도바울이 손수건을 가지고 덮으니까 죽은 자가 살아났는데,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오해를 하느냐 하면, 사람들은 영적인 눈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모르니까, 눈에 보이는 대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죠. "사도바울이 죽은 자 살려. 그래서 우리가 따른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가슴을 치는데, "이 손수건은 내 손수건 아니야. 그것은 주께서 하신 것이야" 라고 말이죠. 그러자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저거 미친놈이 아니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영적인 것이 이야기 계속 들어보면 미친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집사님이 천국에 가게 되었을 때, "집사님은 무엇을 해서 천국에 갑니까?" 라고 한다면, 그 집사님은 "내가 아니야. 아니 내가 어떻게 천국을 가? 주께서 가게 하시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은 죽을 때만 그런 게 아니고 평소에도 주께서 하게 하셨다고 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보는 영적인 안목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30억을 가져가도 거기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셨으니까 말이죠.
지금 제가 목사가 퇴직금을 받는 것에 대해서 나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예화라는 겁니다. 그 목사가 얼마를 받았는지 저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설령 70억을 받았다고 해도 거기에 관여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 내 스케줄은 소용이 없다 !!
방금 이야기한 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내 목표, 내 스케줄은 소용이 없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같이 오늘의 자기 스케줄을 짜게 된다는 것이죠. 누가 짜게 하십니까? 주님이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데, 그런데 이것이 영적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해도 천국에 가야 되는데, 왜 주님의 지시가 있으니까 말이죠. 그래서 스케줄을 짜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스케줄을 짜게 되면, 여기서 두 개의 시선이 나오게 된다는 말이죠.
* 나 : 오늘은 내 스케줄대로 돼야 하는데...
* 마귀 : 왜 돼야 되는데?
* 나 : 그래야 내가 성공을 하지.
* 마귀 : 네가 성공해서 무엇을 할 건데?
* 나 : 성공하면 좋잖아.
* 마귀 : 참으로 좋기도 하겠다.
이게 뭐냐 하면, 아까 의자에 앉아있던 그 주님을 자기 나름대로, 자기 중심으로 주님의 것을 깔고 앉아버렸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깔고 앉아버리니까, 이상하게 요즘 생활이 하는 것마다 다 술술 풀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고민거리가 없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영적으로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제가 울산에 가면 운전을 해주시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인데, "목사님, 걱정거리가 없어요. 몸도 건강하고, 남편도 잘해주고, 자식들도 자기 할 일을 잘하고, 주변에 욕하는 사람도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여러분이 영적으로 세상을 보고, 영적으로 자기를 보고, 영적으로 성경을 본다는 전제 하에서 시편 2편을 보겠는데, 1절에서 3절입니다.
(시 2: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시 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시 2: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공격하는 대한민국 !!
이제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죠? 세상의 열방들, 즉 세상의 모든 자들이 한 곳을 노리면서 공격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나라가 잘 되어야 한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나라가 어디에 속합니까? 하늘나라에 속합니까? 열방에 속합니까? 열방에 속한다는 말이죠.
대한민국이란 이름의 열방이 누구를 공격한다는 겁니까?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공격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누구입니까? 그것이 요한일서 2장 27절에 나오는데,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시편 2편에서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아들을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구약이 신약에 오게 되면 동일한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등장하는데,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성도라는 것이죠.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여왕들이 무엇을 공격한다는 겁니까? 성도를 공격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지금 일어나고 있으니까 예를 들어보면, 여러분이 저에게 질문을 하지는 않지만, 궁금증이 있을 것 같아서 미리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 목사님, 동성애 반대 데모에 참석할까요?
"목사님, 동성애 반대 데모에 참석할까요? 말까요?" 라고 하신다면, 그런데 그것을 자기 집에서 혼자서 하면 안 되나요? 왜 모여야 되죠? 동성애 반대를 혼자서 하면 안 되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동성애를 왜 반대하죠? 그 반대하는 이유를 추적해보자는 말이죠.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서, 제가 임의대로 세상 사람들의 말을 만들어서 해보겠습니다. "동성애를 왜 반대하는가?" 라고 하면,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에 반대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동성애에 대해서 하나님이 기분 나빠하시는데, 그게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자기가 기분이 나빠하는지, 그것을 한번 따져보자는 겁니다. 이 세상은 어디 안에 있습니까? 심판 안에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세상에 악마가 설치는데, 그러면 이 세상이 죄악의 죄악의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세상은 말씀대로 어떻게 됩니까? 그야말로 이제 망하기 직전인데, 이미 시작된 종말이라는 것이죠. 시작된 종말, 즉 마지막 때가 이미 시작된 것을 전혀 감추지 못하고 티를 내고 있다는 겁니다.
* 동성애가 없는 나라는 하늘나라인가? 열방인가?
그렇다면 계속해서 질문을 해봅니다. 만약에 자기가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서울의 광화문에 갔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은 200만, 어떤 사람은 110만, 어떤 사람은 20만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거기서 있는 사람들이 "우리 110만의 찬송을 들어봐라. 우리의 합심기도로 인해서 하나님이 움직일 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다루겠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움직이겠다는 말입니까? 동성애가 없는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동성애가 없는 나라가 하늘나라입니까? 열방입니까? 그것은 열방에 속한다는 말이죠. 어디까지나 세상나라라는 겁니다.
그러면 동성애가 없게 해달라고 기도한 그 사람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무엇이죠? 기분이 좋아지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은 이유는,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승리했고,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되려면 하나님이 살아있고 그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했다는 것을 세상적인 사건으로 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그것이 증명이 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까 천주교를 언급했는데, 천주교는 무엇입니까? 보고 듣고, 그것을 내부적으로 분석해서 믿을 만한 증거로 삼는다는 겁니다.
* 결국은 자기 상실이 아닌, 자기 행복 !!
결국 이 모든 이야기가, 그 안에 누가 들어있어요? 누구의 기쁨과 누구의 행복이 들어있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기도하는 자기 행복과 기쁨이, 거기에 전부 다 끼어들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자기 망함, 자기 파괴, 자기 상실을 자기가 싫어하고 있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자기가 어떤 교회에 갔는데 100명의 교인 중에서 99명이 동성애자라는 겁니다. 전부가 남자들끼리 여자들끼리 연애질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는 어떻게 됩니까? "1번, 기분 좋다. 2번, 기분 나쁘다" 라고 한다면, 여기서 몇 번이어야 하느냐는 말이죠.
"왜 나는 그들의 죄에 가담하지 못하게 막았습니까?" 라는 것인데, 죄라는 것은 분위기 파악, 즉 상태 파악이라는 겁니다. 어떤 집단에서 죄를 안 짓는다는 것은, 그 집단의 일원이 되는 경우를 의미한다는 것이죠. 그 집단에서 인정받을 때, 그 구성원들과 한 통속이 될 때 부담 없이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99명의 동성애자들이라고 하면, 자기도 동성애자가 되어야 그들과 함께 어울릴 수가 있는데, 경제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돈도 대출을 받을 수가 있다는 말이죠. 중요한 것은 돈인데, 자기 먹고 사는데 돈이 필요하고, 그럴 때는 사람을 탓하지 말고 분위기 파악을 해서 동조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 태어났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99명이 동성애자인데 자기가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왕따를 당한다는 겁니다. 그 집단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여러 경제적인 것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죠.
동성애자가 아니면 취직자리가 취직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결국 모든 인간의 행동의 기본에는, "나도 밥이나 빌어먹고 살자" 라는 것이 감추어져 있는데, 이게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된다는 말이죠. 이게 뭐라고 했습니까? 바로, 시선인데, 즉 '시선 1' 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그게 없어지는 게 아닌데, 인간은 그렇게 태어났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뭐든 그것은 나중의 문제고, "일단 밥이나 먹고 살자" 라는 것인데, 이게 기본이라는 겁니다. "내 육신이 편하고, 잠잘 때 괜찮고, 돈도 약간의 용돈 정도는 있고, 그러면 나는 나름 성공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기본으로 깔려있는 이상, 그 다음으로 나오는 성경말씀은 당연히 구석진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의 핑계에 불과한데, 그냥 자기 메이크업에 말씀을 더하는, 즉 자기 화장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인간에 속아놓지 않는 분이 계셨으니, 그분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주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을 어떻게 하십니까? 육적으로 하지 않고, 영적으로 하신다는 말이죠. 영적으로 말씀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말씀이 주어지게 된다면, 동성애 문제 때문에 모여서 데모를 하는 것이 아니라, "왜 당신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습니까? 이 세상이 심판 안에 있다는 것을 왜 믿지 않습니까?" 라고, 그래서 110만이 모여야 한다는 겁니다.
* 복음으로 모이게 하소서 !!
이제 모이는 목적을 아시겠습니까? 복음을 위해서 모여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복음을 위해서는 어떻습니까? 서울 광화문은 고사하고 자기 교회에도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죠.
그 마음은 뭐냐 하면, 사람이 자기 행복이 우선이지, 그리고 "내가 이렇게 동성애자가 아니고 예수를 잘 믿는다" 라는 자기 과시, 즉 남들에게 인정받는 신앙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그게 먼저였지, "주님은 무엇을 기뻐하느냐?" 라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뒤로 미루었는데, 그런 수치스러운 자기 본색이 그만 튀어나와 버렸다는 것이죠.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것은, 점점 더 동성애가 늘어나고, 그리고 점점 더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없어진다는 것인데,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것이 모두 약속대로 되어진다는 점이라는 겁니다.
심판이 교회부터 시작되는데, 그러니 나머지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심판은 얼마나 가혹하게 주어지겠느냐는 말이죠.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오는 그 말씀이 실감나게 다가올 때,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됩니까?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동안 자기가 주의 말씀을 자기 덩치로 가리우고 있었다는 것인데, 자기 스케줄대로 안 된다고, 자기 인생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고 짜증을 내면서 말이죠. 물론 자기 인생도 아니면서, 그렇게 주님을 핍박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아까 어떤 성도님이 "기도 가운데 영적으로 본다" 라고 했는데, 그 기도의 내용은 바로 두 개의 시선으로부터 출발을 한다는 말이죠. 기도의 내용이 "나는 나 나름대로의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자기 스케줄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 스케줄을 이해하고 거기에서 박살이 날 때, 즉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영적이리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기도의 내용대로 응답이 되지 않는 것, 그것이 기도의 응답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주님이 살아계신다는 영적인 증거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주셨는데 우리는 미처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나의 자존심과 나의 명예와 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다치지 않으려는데 신경을 쓰면서 살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이러한 육신적인 태도가 지금도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가리는 기능이라고 하면, 날마다 성령께서 피만 드러나게 하시고, 우리는 죄인으로 기뻐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11,22 오후 4시에 마침.
먹고 사는 것이 아무리 중요해도, 주의 말씀이 기억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