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복음 안의 내용

아빠와 함께 2024. 12. 25. 08:23

[24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11 - 복음 안의 내용

24,12,16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오늘은 교재 92페이지부터 하겠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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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을 아는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은 예수님의 의로써 심판합니다' 라고 이야기했고, 그런데 교인들의 생각은 '우리의 양심대로 살았습니다' 라는 것으로 심판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하고 싶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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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으로 심판합니다 !!

교인들은 양심으로 심판받기를 원하는데, 즉 "양심상 바르게 살았으니까 죽어서 좋은 곳에 가기를 원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을 아는 목회자는 "하나님께서는 복음으로 심판합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참 어려운데, 왜냐하면 "복음으로 심판합니다" 라고 했을 때, 복음 자체가 뭐냐 하면, 기쁜 소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복음, 즉 기쁜 소식으로 심판을 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심판은 아주 끔찍한 것인데, 그런데 기쁜 소식을 가지고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사람들에게는 잘 납득이 될 수가 없다는 말이죠. "회초리로 때린다" 라는 것은 말이 되는데, 그런데 "돈으로 혼을 내겠다" 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돈은 좋은 것인데, 어떻게 돈으로 혼을 내느냐는 겁니다.

돈과 야단을 치는 것이 어떻게 관련성이 있는지,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거부감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마찬가지로 "양심으로 심판한다" 라고 하면 납득이 되고 아멘이 되는데, 그런데 "복음으로 심판한다" 라고 하니까, 난처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복음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이게 기쁜 소식인데,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기쁜 소식이란, 하나님에게 기쁜 소식이라는 말이죠. 인간들은 죄로 있는 인간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니고, 하나님께 기쁜 소식이라는 겁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하늘에서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하는데, 하나님에게 기쁜 것이 하나님의 홀로 기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쁨이 덮쳐진 입혀진 사람에게 그게 평화로 공유가 된다는 말이죠.

(눅 2: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제 크리스마스가 되면 찬송도 많이 나오고 하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기쁨이 입혀지려면 우리의 개인적인 기쁨은 어떻게 됩니까? 포기를 해줘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기쁨은 어디서 나옵니까? 우리의 기쁨은 양심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 나는 나의 잘남으로 산다 !!

그러면 왜 우리의 기쁨이 양심에서 나올까요? 양심은 마귀가 집어넣은 선악체계이기 때문에, 이 양심은 뭐냐 하면 "나는 나의 의로움 의로움으로 산다" 라는 것인데, 쉽게 바꾸면 "나는 나의 잘남으로 산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게 우리의 기쁨인데, "나는 살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나는 당당하게 산다" 라는 것인데, "나는 조금도 하자 없다. 나의 의는 진짜 의다. 그러니 나의 의는 하나님께서도 인정을 해줘야해"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너의 양심으로 네가 십자가를 알게 되었느냐?"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을 때, 그 당시의 유대인들과 권력자들과 본디오 빌라도가 "양심상 저분은 죽어서는 안 된다" 라는 결정을 내렸지 않느냐고 묻고 있다는 말이죠.

(고전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고전 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고전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평소에 그들은 양심대로 사는 사람들인데, 양심의 자기 판단에 의해서 "예수님은 아무런 쓸모짝도 없어서 필히 죽여야 한다" 라는 것을 결정했다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저렇게 설치고 다니면 누구한테 밉상을 받느냐 하면, 치안을 담당하는 로마 당국의 밉상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설치고 다니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의 국가 질서가 좀 복잡한데, 치안 담당은 본디오 빌라도가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본디오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본부가 있는 게 아니고, 저기 북쪽의 헤롯이 로마 신도시로 건설한 가이사랴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소요 사태가 나니까 임시로 예루살렘으로 왔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게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부터 자치 국가로 허락을 받았는데, 로마 당국과 협상을 해서 "세금은 바치겠는데 우리의 양심상 종교는 좀 봐주세요" 라고,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로마가 종교에 관해서 관대한 정책을 시행했다는 말이죠.

다른 나라들은 로마와 똑같이 로마의 일부로 만들기도 했는데, 아무튼 유대인들은 유별났다는 것이죠. "전통적으로 우리 조상들이 믿던 여호와 하나님의 종교를 그대로 유지시켜 주신다면 우리가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세금을 따박따박 납부하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 트러블메이커 !!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왔습니까? 그 협상에 대해서 문제의 소지를 일으켰다는 말이죠. 유대 지도자들은 원래 예수님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런데 로마 당국의 눈치를 봐야한다는 겁니다. 로마 당국은 팔짱을 끼고 "저 유대인 지역에 무슨 소란이 일어나는지 한번 보자" 라는 식이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소란이 일어나게 되면, 로마 당국에서는 다른 곳에 있는 병력을 빼내서 유대지역의 치안을 유지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막대한 군사적 비용이 추가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니 로마 당국에서는 짜증이 좀 난다는 말이죠.

그런데 조용하게 되면, 그 남는 군사력을 다른 곳에, 즉 북아프리카와 같은 곳을 정복하는데 사용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에 소요사태가 나서 병력을 이동시키면,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전쟁을 하고 있는데, 러시아가 계속해서 시리아에 주둔을 하겠습니까? 빨리 보따리를 싸서 도망을 가야한다는 겁니다. 마찬가지인데, 본디오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너희가 하나님을 믿든 누구를 믿든 간에, 세금만 잘 내고 그냥 조용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아닌데, 조용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유대 당국자가 이미 감을 잡고 있었는데, 그들은 치안을 빼놓고, 여기에 약간의 치안도 포함이 되지만, 아무튼 그 나머지 행정적인 권한은 자기들이 일임을 받았는데, 그런데 예수라는 자가 설친다는 말이죠.

* 예루살렘 성전으로 다가가시는 예수님 !!

물론 처음에는 그냥 놔뒀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어느 쪽을 건드렸냐 하면, 점차 갈릴리에서 시작해서 유대지역까지 왔다는 겁니다. 유대지역에서는 무엇이 중요하냐 하면, 거기에 예루살렘이 있으니 성전 제사가 있다는 말이죠.

처음에 그들은 "그냥 저러다가 말겠지" 라고 했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고 하니, 그것을 경상도 버전으로 하면, "고마 다 치아뿌라. 여기는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인기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백성들이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려면, 그것을 통해서 수익이 생기고, 그래서 그 당시 성직자들이 월급을 받고 밥을 먹고 살았다는 말이죠. 그 주된 수익이 뭐냐 하면, 그게 바로 환차익이라는 겁니다.

그때도 유대인들이 외국에 흩어져서 많이 살았는데, 본토 유대인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는 말이죠. 본토는 규모도 적고 주로 바깥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인데, 과거 바벨론 포로 이후에 흩어졌다는 겁니다. 이집트로 북쪽으로 흩어지고, 여러 나라들로 흩어졌다는 말이죠.

그 사람들이 1년에 3번씩 예루살렘에 와서 절기를 지키는데, 그렇게 해야 그것이 아브라함의 전통이 되는데, 그러면 "아브라함 전통에 의해서 할례를 받은 자는 무조건 거룩한 백성이 되고, 그러면 메시야가 오면 구원을 받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자주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1년에 3번은 어디에 옵니까? 예루살렘에 와서 절기를 지키는데, 그것이 이스라엘의 3대 절기로서, "유월절, 오순절(칠칠절), 초실절(수장절)" 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때 그들이 양을 멀리서 데리고 오겠습니까? 아니면 예루살렘에 와서 돈으로 양을 사겠습니까? 당연히 돈을 가지고 와서 사는데, 그것이 그 당시의 산업이라는 겁니다. 양을 비롯한 제물들을 성전에서 비싼 값으로 팔았다는 말이죠.

그리고 성전에는 성전에서 사용하는 돈이 또 따로 있었는데, 그 돈으로 환전을 해주면서 엄청난 이윤을 남겼다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두개인들을 비롯한 성전의 권력자들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는 말이죠. 종교라는 이름으로 부과되는 잉여 가치, 그것에 기대서 종교에 전담하는 자들이 빌어먹고 살았다는 겁니다.

* 디비버리시는 예수님 !!

그러니까 이게 일종의 종교질서인데, 그렇게 종교질서가 유지될 때 그들은 밥을 빌어먹고 사는데, 그런데 이것을 누가 흔들어버립니까? 예수님이 흔들어버리는데, 그러면 그들의 입장이 무엇이 됩니까?

그들의 입장은 "좀 좀 가만히 있어라. 어지간히 해라. 내가 봐줄게, 병을 고치고 하는 것은 내가 봐줄게. 그런데 우리의 기본적이고 근본이 되는 권력층은 손대지 마라. 제발 적당히 해라" 라는, 그런 뜻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봐주고 하는 것이 없는데, 그래서 슬슬 성전에 다가간다는 겁니다. 가서 장사하는 상을 디비버리는데, 비둘기를 파는 것들 완전히 엎어버렸다는 말이죠. 그렇게 뒤집었다는 것은, 현재 그들이 지키는 절기 제사에 대해서, 더 나아가서 모든 체제와 질서에 대해서 도전했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 유대인들, 참 희한하네 !!

그러니까 지금 종교를 모르는, 세금만 받아 챙기고 치안만 대충 유지하면 된다는 본디오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유대인의 종교에 대해서 신경을 쓰겠습니까? 그렇게 신경을 쓸 것이 뭐가 있겠느냐는 말이죠. 제사를 어떻게 드리든, 성전을 디비든 말든 별로 관계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죄에 대해서 본디오 빌리도가 볼 때, "유대인들, 참 희한하네. 저게 무슨 죽을 죄인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본디오 빌라도, 즉 로마 쪽에서 오히려 납득이 안 된다는 겁니다.

로마 입장에서의 죽일 죄는 뭐냐 하면, 백성들에게 강도질을 하고 살인을 하는, 즉 바라바와 같은 인간이 더 예수님보다 나쁘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신천지 내부가 서로 싸운다고 하면, 그러면 국가에서 주동자를 잡아서 사형을 시킵니까?

어느 큰 교회에서 교인들끼리 싸웠는데, "전임 목사가 낫다, 후임 목사가 낫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굳이 경찰을 동원해서 체포를 해야합니까?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 그래서 경찰에 가도 "서로 알아서 잘 하세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예수 한 사람을 죽여서 !!

그것이 본디오 빌라도인데, 그런데 유대인들은 "죽여라, 죽여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데, 그들이 로마의 눈치를 보니, "예수 한 사람을 죽이면 로마 당국에서 우리를 좋게 볼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요 11:49)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요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그렇게 알아서 치안에 문제가 되는 인물을 제거하자는 것인데, 그러면 로마로부터 또 예쁨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세금을 협정할 때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겁니다. "저 유대인들은 로마에 엎어졌다. 그러니까 우리가 너무 거기에 대해서 간섭하지 말자"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유대인들이 얻는 이익은 무엇입니까? 로마 당국으로부터 실질적인 힘이 적게 오게 되면, 유대인들은 그만큼 여호와를 섬기는데 있어서 자유로워진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는 의미는 아니지만 말이죠.

* 양심대로 살기 !!

지금까지 했던 모든 이야기가 뭐냐 하면, "양심대로 살기" 라는 것인데, 즉 "양심대로 하나님을 믿고 양심대로 살자" 라는 겁니다. 그리고 양심대로 하나님을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살 만한 가치가 아직도 나에게는 남아있다. 그것은 하나님도 인정해주신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사람들은 이런 보람으로 사는데, 여러분은 과연 무슨 보람으로 삽니까? 양심으로 삽니까? 자기 의로 삽니까? 아니면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로 삽니까? 제가 이렇게 질문을 하면 "목사님, 둘 다 하면 안 됩니까?" 라고 하시는 분도 있는데, 그렇게 둘 다 할 것 같으면 주님께서 성전을 디비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이 와보니, 인간들이 참 재미있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쉽게 말하면 이러한데, 즉 아버지가 미국에 출장을 가서 그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다음부터는 아내가 자식들과 함께 날마다 제사를 드린다는 겁니다.

* 오겡끼데스까?

그래서 "여보, 하늘나라에서 잘 있지요?" 라고 하는데, 그것이 "오겡끼데스까?" 라고 일본 영화 '러브레터'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라는 말이죠. "내가 자식들을 잘 키웠으니까, 하늘나라에서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지금 잘 있습니다" 라는 겁니다. 얼마 전에 이 여배우가 죽었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아저씨가 집으로 찾아오는데,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보, 그동안 잘 있었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너무나 놀란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다음에는 그 죽었다던 남편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일 먼저 무엇을 디비겠습니까? 드리고 있는 제사를 디빈다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죠.

자기는 양심적으로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찾아와서, "지금 뭐하노?"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줄 알았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그게 너의 의야? 나의 의야?"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이것은 내가 존재하는 가치이고 의미입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디비버리시는데, 왜냐하면 복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와 우리 인간의 의가 같이 공존할 수 없다는 말이죠. 도저히 공존이 안 되는데, 그래서 교회마다 이 복음을 싫어한다는 겁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싫어한 이유를 알겠지요?

교인들은 자기 잘난 맛에 오는데, 그러면 목사는 "당신은 참 훌륭합니다" 라고 해주어야 하는데, 그런 기쁜 소식을 전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다른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되면, 교회에 사람들이 올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교회가 운영이 안 되는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 계속해서 '복음으로 심판을 받는다' !!

그러면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복음으로 심판을 받는다" 라고 했는데, 이 안에는 무슨 내용이 들어있냐 하면, 여기서 로마서 9장을 찾아보겠습니다. 13절을 우리 다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여기에서 '야곱은' 라고 하고 그 다음에 무엇이 붙어 있습니까? '사랑하고' 라고 하는데, 그런데 '에서는' 라고 하고, 그 다음에 '미워하였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야곱은 사랑이 붙어있고, 예서는 미움이 붙어있다는 말이죠.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인간들은 개별적으로 양심대로 살면 된다" 라는 것인데, 자기 양심에 자기가 나쁜 짓을 했으면 나중에 죽을 때 지옥으로 갈 각오를 하고, 그리고 착하게 살았으면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그게 양심인데, 그런데 복음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개인적으로 양심상 내가 어떻게 죄책감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조심스럽게 살아가는가?" 라고 하는, 그것을 완전히 주께서는 개무시해버린다는 말이죠.

* 택하심을 따라 !!

그게 뭐냐 하면, 여기 로마서 9장 11절에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라고 하는데,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합니까? "택하심을 따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이 엄청난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롬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 이제 목회는 안녕 !!

진짜 이게 미치는 것인데, 진짜 이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 목사라고 하면, 목회를 계속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교인들은 "양심상 내가 바르게 살았으니까 천국에 넣어주세요" 라고 나오고,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목사는 하나님 편에 서서 전해야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합니까?

"당신의 그 양심 활용은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이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사는 것, 그것은 당신의 미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라고, 그렇게 설교를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제 목회는 끝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목회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위선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서로 섞이지 않는 내용을 교인들이 눈치를 채지 않도록 잘 섞어야 한다는 겁니다. 둘 다를 만족시키는 것처럼 설교를 해야한다는 것이죠. 왜 그래야 자기도 밥을 먹고 살아갈 수 있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교인들 가운데 진짜 주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나옵니까? 일단 팔짱을 끼는데, 그러면서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 종이 아니라고 했는데, 당신은 얼마나 우리 인간을 기쁘게 하는지 사기를 쳐보세요" 라고 하든지,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지 한번 봅시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보기만 해도 짜증나는 얼굴, '에서' !!

이게 왜 중요한고 하니, 여러분에게도 그런 사람이 혹시 있습니까?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나는 얼굴, 괜히 미운 얼굴, 그게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에서가 그렇다는 말이죠. 에서가 태어나서 착한 일을 하고 아버지도 속이지 않고 바르게 사는데, 그래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짜증이라는 겁니다.

양심적으로 바르게 사는 그 자체가 짜증인데, 왜냐하면 그 사람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 행함도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바르게 산다고 애를 써봤자, 하나님께서는 "많이 해봐라. 나는 이미 다 결정했어. 나는 너를 미워하기로 결정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어떻습니까? 우리 인간의 모든 신학과 성경 지식과 모든 철학을 다 동원해도, 주님의 이러한 마음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인간 쪽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평생을 교회에 다니고 해도, 하나님의 마음도 모르고 다닌 셈이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마음은 간단한데, "나는 네가 엄청 짜증이나. 내가 다 치우라고 했지? 나는 절대로 안 받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에 서 : 하나님, 제가 농사를 열심히 지었습니다.
* 하나님 : 어서 치워라. 나는 안 받는다.
* 에 서 : 하나님, 왜 그래요?
* 하나님 : 내 마음이다. 왜?
* 에 서 : 제가 무슨 나쁜 짓을 했습니까?
* 하나님 : 태어나기도 전에 너는 미움을 받기로 되어있었어.
* 에 서 : 미워하는 것을 왜 창조합니까?
* 하나님 : 너는 미움을 받도록, 그렇게 내가 창조했어.
* 에 서 : 미워하려면 창조하지 말아야지요.
* 하나님 : 미워하는 것도 필요해.

그러면 하나님은 왜 미워하는 것을 창조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미워하는 것이 있어줘야, 그렇게 마귀와 한통속이 되어줘야, 비로소 지옥이라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렇게 에서가 잘리고 난 뒤에는 야곱에게 복이 돌아갔는데, 그러자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 "이제 남은 복은 없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12장 17절에 보면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라고 하는데, 찔찔 울었다는 것이죠.

(히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히 12:17)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 너에게 줄 복은 없다 !!

에서가 그렇게 나오자 아버지 이삭이 어떻게 했습니까? 불쌍히 여겼습니까? 이번 야곱의 사건을 통해서, 이삭은 하나님의 마음을 입수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삭의 결정은, 그 하나님을 대신하는 냉정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창세기 27장에 나오는데, 에서는 이삭이 평소에 미워한 자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진짜 좋아했던 자식인데, 아버지 이삭은 냉정하게 "이제 너에게 줄 복은 없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자 그놈이 울면서 "아버지, 정말로 남은 것은 없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때 아버지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창 27:37)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창 27:38)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은 바로 이 '없음'을 기준으로 해서 자기 백성 모집에 나선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들은 양심이 있기 때문에, "신을 내가 결정한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즉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면 우리가 찾아가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찾아가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인고 하면 "네가 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찾아갈게"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결정은 "네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결정해서 내가 찾아가는데, 그때 비로소 진짜 하나님이 너에게 나타남을 알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하는 것과 하나님이 하는 것이 항상 이렇게 반대가 되는데, 왜냐하면 인간의 배후에는 누가 있다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악마가 뒤에 있기 때문인데, 그 악마가 인간 뒤에 숨어서 부추긴다는 말이죠.

* 하나님은 어떻게 찾아오시는가?

그러면 여러분이 여기서 궁금해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찾아오시는가?" 라는 겁니다. 과연 하나님이 어떻게 찾아오셨을까요? 그 순서를 번호를 달아보면, "1번) 하나님의 찾아오심(만남), 2번) 이별, 3) 다시 찾아오심",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만남과 이별이 있고, 그리고 또 다시 찾아오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라고 하면, 한 번에 만나서 "우리 같이 가자" 라고 하면 끝날 문제인데, 그런데 다시 찾아오시고, 그리고 그 중간에는 이별이 있다는 말이죠.

이별, 즉 헤어짐의 순서가 여기에 왜 끼어 드느냐는 것인데, 그것은 모든 인간이 양심, 그 배후는 악마라는 겁니다. 악마의 마음, 양심, 선악 체제, 이게 다 같은 말인데, 그 양심으로 하나님과 헤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게 문제가 된다는 것이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고 예수님을 보고는 "우리의 랍비다" 라고 했는데, 이런 대상이 된 자들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제자들이라는 겁니다. 그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그들과 계속 함께 계셨습니까?

* 끼어든 '이별', 왜?

중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 그만 이별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찾아놓고, 즉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 라고 해놓고는, 그때는 계속해서 같이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게 해놓고는 헤어진다는 말이죠.

제자들이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해도, 주님은 "따라오지 마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희는 모르고, 또한 그곳은 너희가 따라올 수 없는 곳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아무리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라는 말이죠.

(요 13: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요 13: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그것을 통해서 제자들을 비롯해서 모든 인간들은 어떻다는 겁니까? "새롭게 개조되지 않는 이상 인간은 구원될 수 없다" 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동안 개조되지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겼고, 그리고 예수님을 찾았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 위해서,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을 주님께서 오셔서 어떻게 하십니까? 바꿔치기를 하시는데, 그런 바꿔치기의 필수절차가 헤어짐이라는 겁니다.

제자들이 그 시범조교였는데, 그러면 여러분에게는 이 헤어진 경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면 혹시 아직 만나지도 못한 것은 아닌가요? (ㅋㅋ) 이 헤어짐이 무엇인고 하니, 들어보면 "아, 그거였구나" 라고 하지 싶은데 말이죠.

* 주님과의 이별 !!

사람들은 "주님과 나는 이별을 한 적이 없어요. 지금까지 50년 동안 교회에 다니는데, 주님은 저를 자르지 않았어요" 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주님과의 이별이 무엇인고 하니, 지금부터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자기와의 이별이 있는데, 자기 양심으로 자기 잘난 맛으로 살다가, 어느 날 교회에 가서 설교시간에 복음을 듣고, "야, 내가 알던 나는 지옥에 가는 나구나. 내 속에 있는 양심말고, 내 속에 십자가 피가 들어와야 되겠구나" 라고 한다면, 그게 자기와 이별하는 순간이라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주님께서 넣어주신 주님의 다 이루심을 나를 보호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때부터 여러분은 자기와의 이별을 고하는 순간이라는 겁니다.

부모와 친척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받았던 교육에서 다져진 자기의 기억, 하지만 그 기억은 결국 천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오직 자기 잘난 맛에 유지되는 그 엉터리, 이제 그딴 것은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무엇만 있으면 됩니까? 이제는 오직 예수님의 피만 있으면, 그 피에 생명이 있으면 단호히 과거에 잘난 척을 하던 자기와는 헤어져서, "이제는 주님이 나를 다루시기를 원합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때는 노래를 하나 불러주어야 하는데, 패티김의 '이별' 이라고, 어쩌다 생각이 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게 어쩌다 생각나면 다행인데, 돌아서면 또 생각이 난다는 겁니다. 5분도 안 돼서 또 말이죠. 잘난 자기로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또 회개를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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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김의 '이별'(1973)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때로는 보고파지겠지
둥근 달을 쳐다보면은
그날 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지난 날을 후회할 거야
산을 넘고 멀리 멀리 헤어졌건만
바다 건너 두 마음은 떨어졌지만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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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가짜다 !!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한순간 한순간, 이제부터는 자기가 그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항상 이기적인 생각을 하지만, "이것은 가짜다" 라는 것을 자기가 안다는 말이죠.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고 으시대고 하는 것은 육의 본성인데, 이것은 죽을 때까지 계속 가는데, 그 낌새를 자기가 느낀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여. 제가 맨날 하는 것은 죄뿐입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래서 우리교회 집사님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항상 그 시작이 "주님, 저는 무엇을 해도 죄인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죄인이라는 것, 평소에 이게 자기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사람들 앞에서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저는 죄인이 맞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죄만 짓는 나와는 이제 이별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 그런 자기 자신에게 미련을 두기 싫다는 것이죠.

이제 자기와 이별을 이미 각오하고 있다는 것인데, 주님께서 부르신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갈 용의가 있다는 겁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에 대해서, "내가 위선적으로 사는 것이 너무 지긋지긋합니다" 라고 하는데, 아무것도 아닌 게 있는 척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 그게 얼마나 피곤한지 모른다는 말이죠.

* 성령으로 찾아오신 예수님 !!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제자들은 3번에서 경험하게 되는데,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실 때는 무엇으로 오셨는고 하니, 오순절 날에 성령으로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물론 제자들이 낙담을 하고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갔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찾아오셨지만 말이죠.

하지만 그때는 모든 제자들을 다 찾아온 것이 아니고, 일곱 제자에게 찾아왔고, 또한 그들은 예수님과 헤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헤어지는 하나의 절차 중에 포함이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다시 찾아오기 위해서는, 1번과 2번의 조건과 다시 찾아온 조건이 다르다는 겁니다. 1번과 2번의 조건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육신이 유지되는 조건인데, 첫 번째는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찾아오셨다는 말이죠.

이별과정에서 다시 찾아왔을 때는, 그때는 예수님이 부활체로 오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때 마리아가 만지니까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만지면 안 된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네가 가지고 있는 육체는 부활되기 이전의 육체고, 나는 이미 부활된 육체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갈 수 있지만, 너는 나를 만지면 안 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가서 고기도 잡아주고 했는데, 그리고 같이 식사도 했지만, 그러나 그 반대로 예수님에게 접근하는 것은 안 된다는 말이죠. 그것은 "네가 모르는 격리 구조가 있다" 라는 것인데, 격리, 즉 떨어져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하나 나오는데, "양심구원과 복음구원은 격리가 되어있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양심 속에는 자기 의기가 있기 때문인데, 양심이 있다는 것은 "나는 잘났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양심으로 받는 구원과 복음으로 받는 구원은 서로 떨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양심으로 밀어붙이면서 격리된 것을 완전 무시하고, "나는 복음으로 구원받았다" 라고 하니까, 주님께서는 그것을 수정하기 위해서 복음을 이야기하신다는 말이죠. 그러자 제자들은 "우리는 이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천국에 간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천국에 가면 우리 중에서 누가 오른편에 앉고 누가 왼편에 앉습니까?" 라고 하는데, 출세욕에 차서 말이죠. 그런데 나중에 이별했을 때, "예수님은 우리와 근본적으로 같이 할 분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메시야를 믿고 천국에 간다는 것, 이것은 그야말로 주제파악이 전혀 되지 않은 오버였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게 자기 자신들의 탐욕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나오십니까? 그 격리된 것을 타고 넘어오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데, 예수님 쪽에서 우리가 넘어갈 수 없는 세계, 부활의 세계까지, 그래서 부활체로 오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오셔서 이별을 통보하시고, "내가 다시 오겠다" 라고 하시면서 약속대로 오신 것이 세 번째라는 말이죠.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육신인데, 그러면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예수님의 마음을 전달하신다는 겁니다.

* 예수님의 마음, 곧 성령 !!

그 예수님의 마음을 뭐라고 합니까? 그게 바로 성령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아버지와 아들만이 아는 비밀, 그 비밀을 고스란히, 그 정보를 그대로 담아서 자기의 택한 백성들에게만 나누어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이 올 때는 다음과 같이 물어봐야 하는데, "주님, 왜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그 귀한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까?" 라고 말이죠. 그게 바로 로마서 9장에 나오는 내용이라는 겁니다.

* 주님 : 나는 너를 사랑하거든, 나는 너를 좋아해.
* 성도 : 주님, 참 부끄럽습니다.
* 주님 : 왜 그래?
* 성도 : 제 꼬라지를 보세요. 이게 사랑받을 놈입니까?
* 주님 :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나는 네가 좋아.
* 성도 : 제가 교도소를 7번 갔다왔습니다.
* 주님 : 그래도 사랑해.
* 성도 : ???

* 나는 네가 좋아, 그래도 좋아 !!

(롬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주님께서는 자기 사랑을 먼저 설정하고, 그 사랑의 대상으로 우리를 만들기로 작정했기 때문인데, 그게 '택하심' 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제가 이렇게 나쁜 짓을 했는데, 어떻게 제가 그 거룩한 곳에 갈 수 있습니까?" 라고 나오는데,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너 자체가 나야 의야. 너에게 나의 영생이 들어있어" 라고 하시는데,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즉 주님의 희생이, 그분의 피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것보다 더 완벽한 의는 없다는 것이죠.

* 성도 : 주님, 저 사람은 왜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까?
* 주님 : 저놈의 꼬라지가 나는 보기 싫어.
* 성도 : 저 사람이 얼마나 착한 일을 많이 하는지 몰라요.
* 주님 : 그래도 나는 싫어.
* 성도 : 정말로 부모님을 잘 섬깁니다.
* 주님 : 그래도 싫어. 정말 싫어.

이게 주님의 취향인데,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취향을 시비를 걸 수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이 내린 결론은 "미워하는 자는 내가 필히 미워할게. 지옥까지 보낼게. 사랑하는 자는 무슨 짓을 해도 끝까지 사랑할게. 천국까지 보낼게"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 결정력이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데, 4절에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라고 하는데, 즉 "창세 전에 예수 안에서 나는 너를 선택했다. 예수의 피로 너를 구원하기로 작정했다" 라는 겁니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제가 가끔 상상을 해보는데, 큰 교회에 가서 설교시간에 이 이야기를 그대로 전한다는 말이죠. 이제 겨우 설교시작인데, 그런데 벌써 시끄러워지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다들 나간다고 하면서 출입구가 복잡하다는 말이죠.

그렇게 나가면서 뭐라고 합니까? "저 설교는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야말로 짜증이 난 얼굴을 하면서, 그래도 체면은 차린다고 고성은 지르지 못하고,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면서 나간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앉아있어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심지어 전화를 거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오는 이유는 간단한데, "하나님이 다했다고 하면서, 왜 우리가 할 것을 제시해주지 않는가? 왜 그것을 차단하는가?" 라는 겁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고 하니,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특히 자기가 잘난 것을 했을 때는, 하나님을 보고 "신이시여, 나의 이 잘난 것을 빨리 다 받으소서"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께 명령을 해왔다는 것인데,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이 참 무서운 이야기인데, 영적 전쟁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시편 96편 5절을 보겠는데,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시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을 언급할 때, 하나님은 그냥 "내가 만국을 지었다" 라고 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왜 다른 신들도 다 이야기를 하니까 말이죠. 그래서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그 앞에 붙는 것이 있는데, "만방의 모든 민족들 신, 모든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은 다 헛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라고 해야합니까? 진짜 천지를 만든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했을 때, 그들은 "오로지 우리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들었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이때 김용옥과 같은 철학들은 뭐라고 합니까? "우리 한 민족도 신이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왜 우리가 남은 나라인 이스라엘의 신을 섬겨야 하는가? 여호와만 신이냐? 우리 민족도 신이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가 동양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그렇게 나올 수 있는데,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뭐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오늘 강의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사랑했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나머지 민족은 어떻게 됩니까? 단군의 자손들은 어떻게 되느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한 것인데, 보기만 해도 짜증이 올라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 인간이 "양심대로 구원을 받겠다" 라는 의도를 계속해서 밀어 붙여보겠는데, 여기서 교재 97페이지의 '신론'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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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신과 다른 신을 구별하고 싶어 할 겁니다. 교인들에게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과 다른 종교에서 믿는 하나님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하면 어떻게 답변을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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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그 차이점은?

여기에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도 있으니까 이 답변이 가능할 것 같은데, 뭐라고 답변을 하면 될까요? "천지를 창조했다" 라는 것은, 다른 종교에서도 다들 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힌두교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불교의 미륵 신도 천지 만물을 창조했다고 한다는 말이죠.

불교에 부처도 있지만, 다시 오는 미륵신이 있다는 겁니다. 부처의 삼위일체인데, 이 미륵신은 재림하는 신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기독교와 아이디어가 똑같은데, 그것을 교회에서 이야기해주지 않다는 겁니다. 다른 종교에도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말이죠. 인간의 아이디어가 거기서 거기인데, 별 다른 것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 교재에 "대부분의 목사들은 삼위일체를 특징으로 내세웁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래서 "기독교에는 삼위일체가 있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믿지 않으면 이단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삼위일체의 믿음을 정통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삼위일체라는 아이디어는 플로티노스라는 철학자가 이미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은 기독교 신자가 아닌데, 신이 삼위로 되어있다는 것은 그 이전부터 헬라 철학에 다 나와있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 이제부터 그것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지금 종교가 무엇이고 신이 무엇인지,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그런 종교가 어디서 나왔는지, 그 뿌리부터 살펴보자는 겁니다.

* (1) 인간은 힘들다 !!

지금부터는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또는 자기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그 점에 대해서 말씀해드리겠습니다. 그 출발점은 "인간은 힘들다" 라는 것인데, 이게 1번인데, 사는 것이 힘들다는 말이죠. 맞는 말인데,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해야하고, 그러면 온 몸을 다 소비해야하는데, 그러면 나중에 나이가 들고 병이 들면 어떻게 됩니까? 망가지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겁니다. 다 망가졌는데, 놀다가 망가진 게 아니라는 말이죠.

감을 따다가 넘어지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다치고, 그렇게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신자와 불신자가 구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신자와 불신자는 어디서 구분이 될까요? 그것을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 (2) 욕망 때문에 !!

그게 어디서 구분되는고 하니, 인간이 힘든 이유에 대해서, 불신자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연구한 것을 많이 펼쳤는데, 먼저 그것을 살펴보자는 겁니다. "사는 것이 힘든 이유는 욕심 때문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인간의 욕망 때문에 힘들다는 말이죠.

지금 이 말이 맞지요? 마트를 하나만 하면 되는데, 2개를 하다가 그만 망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2개를 왜 했을까요? 하나만 해도 밥을 먹고 사는데, 그런데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밥만 먹고 살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개도 제법 비싼 사료를 먹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개가 아닌 인간인 이상, 그냥 먹고 사는 것이 전부일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개도 기분이 좋으면 뒤집어져서 까불고 잠도 자고 한다는 겁니다. 산책은 기본이고 말이죠.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뭔가 남들보다 멋있어 보이고 잘나 보이고 싶은데, 그것이 '자기 의' 라는 말이죠.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하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힘든 이유는 욕망 때문이라는 것인데, 그게 2번이라는 것이죠.

* (3)욕망을 줄이면 덜 힘들다 !!

그렇다면 3번은 무엇인고 하니, 그 욕망을 줄이면 힘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고, 덜 힘들다는 겁니다. 즉 "욕망을 줄이면 덜 힘들다" 라는 것인데, 맞지요? 그들이 생각이 맞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해서는 신자와 불신자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2번에서 3번으로 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2번에서 3번으로 가려면 억지를 부려야 한다는 겁니다. 무소유를 외치면서 소유를 많이 했던 스님이 있는데, 그분이 법정 스님이라는 말이죠. "모든 것을 버리면 행복해진다" 라고 해서, 떼돈을 번 중들이 많다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청빈하게 산다고 하면서도 평일에 필드에 나가서 골프를 치는 신부들, 물론 목사들이야 당연하지만 말이죠. 목사들의 목적은 교회성장인데, 신부들처럼 청빈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교회를 잘 키우면 위대한 목사가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신부는 월급은 위에서 대주니까 돈에 대한 욕심은 별로 없지만, 골프를 치고 하는 욕심은 또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숫자가 0.1%도 안 된다는 말이죠. 수녀들이 수도원에 가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참기름을 짜고 된장을 담그고 한다는 겁니다.

* 참기름이 팔려야 할텐데 !!

그런데 일반 공장에서는 참기름을 짜려면 노동자들의 월급을 줘야하니 값이 비싼데, 하지만 수도원은 그런 인건비가 들지 않으니, 거기서 나오는 참기름은 비교적 질이 좋고 저렴하다는 겁니다. 사실은 그런 것도 아니지만 말이죠.

아무튼 수녀들의 복장은 청빈하지만, "참기름이 팔려야 할텐데, 된장이 잘 팔려야 할텐데"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억지를 불러도, 이 욕망이라는 것이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누르면 누를수록 반발 더 세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어떻게 우리 장로님은 그런 욕망을 좀 누려본 적이 있습니까? 한번 넘어졌으니까 점점 더 눌러버리면 나중에 어떻게 될까요?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개냐? 먹고 자고, 이게 무슨 사람이 사는 것이야. 모르겠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래" 라고 하면, 드디어 욕망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 퍼지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뭐냐 하면, 불신자들의 세계에는 속임수가 등장하는데, 지금의 욕망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욕망이 없어지지 않으니까, 특수한 임무와 사명을 지닌 자들만 3단계에 들어가고, 그 나머지 인간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특수한 임무와 사명을 지닌 자들에게 생활비를 대주는데,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비록 욕심은 부리지만, 욕심이 없는 당신들을 믿는 것으로 해서 우리도 죽었을 때 천국에 가게 해달라" 라는, 그런 어떤 협정과 같은 것이 형성된다는 겁니다. 일종의 종교사업이라는 것이죠.

* (4)욕망을 줄였으니, 의롭다고 해줘 !!

이제 4단계로서, 이게 마지막이라는 겁니다. 일단 3단계까지 왔다고 치고, 이게 제일 중요한데 말이죠. 4번은 "욕망을 줄였으니, 의롭다고 해줘" 라는 것인데, 즉 자기가 남들이 가지 않는 좁은 길로 갔으니, 그 행위에 대해서는 의롭다고 해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으로서는 마지막 가는 길인데, 티벳 불교의 달라이라마와 같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는 겁니다. 베트남의 틱 스님도 그렇고 말이죠. 또한 인도에 가면 도사들이 있는데, 족히 10만 명은 된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에도 등신불로서 자기 몸을 태운 고승들이 있고, 그리고 지금도 수도원에 가면 자발적인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죠. 비교적 자유로운 수도원도 있지만, 거의 감옥과 같은 수준의 수도원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의 끝은 이것인데, 언뜻 보면 이런 불신자들이 참으로 대단해 보이지만, 우리가 얼마든지 파악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욕망을 줄였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무엇으로 해달라고 합니까? "나를 의롭게 해달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런 사람들의 특징을 우리가 알아볼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 이 정도의 경지면 대단하다는 겁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고 하면, 이것은 약간 어려운데 말이죠.

* 말은, 타인에 대한 억압이고 강압이고 명령 !!

이게 왜 어려운고 하면, 인간이 말을 한다는 것은, 자기 욕망을 실어서 상대방께 쏘는 것, 그게 말이라는 겁니다. 말은 제 아무리 친절하게 하더라도, 타인에 대한 억압이고 강압이고 명령이라는 것이죠. 그렇지요?

예를 들어서, "날씨가 참 좋아" 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은 이것이 명령으로 들리십니까? 명령으로 들리는 게 아닌데, 날씨가 좋아서 좋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명령이냐는 겁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그러나 듣는 사람은 뭐냐 하면, 상대방이 지금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이제부터 너하고 나하고 친구하자"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강제로 말이죠. 그래서 "날씨가 좋아요" 라고 해주면, 오늘부터 친구로 먹게 된다는 것이죠.

제가 서울강의를 하고 지하철을 탔는데,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있는 아가씨라는 겁니다. 나이가 30살 정도로 보였는데, 광명역에서 만났다는 것이죠. 자기 혼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내가 오늘 차표를 취소하지 않았는데, 참 잘했어. 철도공사에서 취소하라고 했는데 하지 않았어. 그래서 탈 수 있었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혼자라도 자꾸만 말을 하는데, 왜 말을 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외롭다' 라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이제부터 내 말에 맞장구를 쳐달라" 라고 하는 지시와 명령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이 말을 할 때는, 거기에는 항상 자기 욕망이 실려있다는 겁니다.

* 말하지 말기 !!

그렇다면 4번째 단계로서, 욕망을 포기한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끊어버리는데, 그 끊어버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인데, 그러면 누구에게 말을 합니까?

하나님께 말을 하는데, 하나님께 "종알종알종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여서 최소한의 노동과 수입으로 살아가는데, 그러면서 하루 종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기도를 한다는 말이죠. 그게 기도라는 것이죠.

이것은 모든 종교가 다 그러한데, 불교도 그렇고 기독교도 그렇고 천주교도 그렇다는 겁니다. 이슬람도 그러한데, 거기에도 신비주의가 또 따로 있다는 말이죠. 그들이 연구해보니까 세상과 단절하는 방법은 간단한데, 말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말을 하게 되면, 그렇게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 이 세상에 신경을 쓰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그러면 그와 동시에 또한 말이 들려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집에 무엇이 없겠어요? TV가 없고, 휴대폰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다 끊어버리고, 그리고 누구와 통화를 합니까? 하나님과 대화할 때, 그때 그 모습이 너무나도 고귀하고 장렬하기까지도 하다는 겁니다. 거기에 감동해서 "저 사람들 저러다가 굶어 죽으면 큰일난다" 라고 해서, 참기름도 팔아주고 된장도 팔아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의 이상적인 4번 단계를 바라보는 조건 하에서, "나는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4번인 천국 쪽을 바라봤기 때문에, 제가 세상에서 돈을 벌고 해도, 좀 너그럽게 봐주소" 라고 하면서, 후원금을 낸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 무리와 한패다" 라는 것인데,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바로 그런 식으로 해서 종교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말이죠. 종교 공동체, 어떻습니까? 살아가는 방법도 가지각색인데, 그리고 성격상 이런 게 취향에 맞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죠.

* 욕망이 아닌 죄 !!

지금부터 두 가지를 이야기하겠는데, 이제 4번까지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을 아는 사람은 4번 뒤에 오겠습니까? 아니면 완전히 격리가 되겠습니까? 격리가 되는데, 1번, 2번, 3번, 4번과는 다른 조건이라는 겁니다. 그 다른 조건이 뭐냐 하면, "욕망이 아닌 죄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 1번, 2번, 3번, 4번을 보면, 이것은 욕망을 무엇으로 봅니까? 죄로 보는데, 그러나 복음의 세계에서는 욕망이 죄가 아니고, 주님의 선택하심을 받아들이지 않는 선악 체계 자체가 죄라는 겁니다.

조금 어렵습니까? 자기가 욕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죄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양심적으로, 즉 "욕심이 죄다" 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것은 아무리 하나님과 대화를 해봐야, 그 모습 자체가 바로 죄라는 말이죠.

* 해결하지 않으면 된다 !!

그 모습이 죄인데, 따라서 이쪽 복음의 세계에서는 죄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이 됩니까? 해결이 안 된다는 겁니다. 태어났던 것 자체가 죄인데, 그런 우리의 본성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해결이 안 되면, 그 방법은 뭐냐 하면, 해결하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죠. 이게 복음의 세계라는 겁니다.

참 쉽죠? 그러니 1번, 2번, 3번, 4번을 굳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죠. 죄인이면 그냥 죄인으로 살면 된다는 겁니다. 죄인이면 죄인답게 살면 된다는 것이죠. 너무 쉬워서 여러분이 수긍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아닌가요?

* '죄' VS '죄의식' !!

그러면 이게 마지막 부분이니 어렵게 해보겠습니다. 죄인데, 죄의식을 굳이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죄의식과 죄가 구분이 되는데, 우리가 존재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여기서 죄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이 죄의 개념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는 말이죠.

"저는 부족하고 있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그래서 우짜라고?"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 소리를 한다고 해서 주님은 좋은 평가를 해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냥 살면서 자기 육신의 한계를 계속 드러내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육신의 한계가 뭐냐 하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즉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안 된다" 라는 사실을 안다는 겁니다. 그렇게 알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그 차이에서 감사가 나오고, 그 다음에는 사랑이 나온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주님, 저의 주제를 파악하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래서 자기가 무엇을 해도 자기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는 겁니다. 좌절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지금껏 자기가 살아온 것이 어떻다는 겁니까? 자기가 하나님과 헤어지기 전의 모습은, "하나님, 제가 악착같이 살았습니다. 교회에 가서 기도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하면서 하나님을 영광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에 속합니까? 자기 나름대로의 죄의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좀 봐주소" 라는 식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나'와 헤어져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존재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태어난 자체가 곧 죄인데, 그래서 그만큼 감사할 뿐이라는 말이죠. 그만큼 더욱 더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이 한 가지 더 남아있는데, 죄의식에서 이것을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이죠.

* 다시 정리하면 !!

이제 칠판에 적힌 것을 지우겠는데, 지우기 전에 다시 한번 해보겠습니다. "인간은 힘들다. 사는 게 힘들다" 라고 했는데, 맞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힘든 이유는 "너무 욕심을 부린다" 라는 겁니다. 이것도 맞지요? 사업이 잘될 줄로 알았는데,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 망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욕심이라는 것을 알면, 그러면 사람들이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또 또 욕심을 낸다는 겁니다. 욕심이란 것은 나중에 돌아보니까 욕심이지, 그 당시에는 최선을 다한 것이지 욕심이 아니라는 말이죠. 항상 지나고 난 뒤에 다시 보니까, 그게 욕심이라는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욕심을 줄이자" 라고 하는데, 그게 자기 마음대로 줄여집니까? 허리 사이즈는 줄여도 욕심을 줄이지 못한다는 말이죠. "욕심을 줄인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자" 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면 "내가 아예 머리를 깎고 중이 될까?" 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3번과 4번은 아주 낮은 확률인데, 되지도 않은 일을 그냥 한번 해본다는 말이죠. 여기서 남아있는 중요한 것은 이것은, 바로 죄와 죄의식이라는 겁니다. 죄와 죄의식은 구분을 해야하는데, 그런데 여기서 죄의식이 진짜 골칫거리인데, 왜냐하면 이게 '개별적 의식' 이라는 말이죠.

* 죄의식은, 개별적 의식 !!

개별적 의식이 무슨 말이냐 하면, 예를 들어서, 엄마가 딸을 보고 "딸아, 엄마가 이번 일을 잘못해서 죄의식을 느끼거든. 그러니 너도 같이 느껴라" 라고 한다면, 이게 말이 됩니까? 안 된다는 겁니다. 엄마가 죄의식을 느끼면 딸도 죄의식을 느껴야 합니까?

딸은 "엄마,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라" 라고 하지, "엄마, 나도 죄의식을 느껴" 라고, 그렇게 나와야 하느냐는 말이죠. 그렇게 강요할 권한이 엄마에게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죄의식은 개별적이라는 것인데, 그러나 이 '개별' 이라는 말은 우주에서 단 한 분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분이 누구입니까? 여기서 골로새서 1장 16절과 17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개별의식을 집단의식으로 !!

개별적인 것은 예수님에게만 그 권한이 있지, 그 나머지는 개별적인 권한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인간이 개별적으로 "나는 죄의식을 느낀다" 라는 이야기를 했을까요? 뭔가 수상한데, 인간의 마음속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는 말이죠.

"너는 신이 될 것이다" 라고 하는 마귀의 생각이 우리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죄의식을 느끼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는 말씀으로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개별의식을 무엇으로 바꾸겠습니까? 이 개별의식을 집단의식으로 바꿔주신다는 것이죠. 집단 의식으로 말이죠.

예를 들어서, 바벨탑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바벨탑이 개인이 지었습니까? 집단이 지었습니까? 바벨탑은 집단인데, 그러면 그들이 집단으로 지을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들이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인데, 그런데 같은 언어를 사용한 것을 주께서 그 차단시키고 흩어버리니까, 그 거대한 집단이 다 깨어져서 뿔뿔이 흩어졌다는 겁니다.

(창 11: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창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 11: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렇게 그들이 헤어졌으면, 그들이 혼자서 살아갑니까? 또 집단을 이루는데, 자식 낳으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이루어진 집단의 언어가 어떻겠습니까? 그들만이 아는 언어가 또 생기게 된다는 겁니다.

* 언어와 집단의식 !!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하나의 집단에서 개별화되면서 그 하나하나가 나름대로의 어떤 집단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데 그들이 아는 것이 뭐냐 하면, 그게 바로 언어라는 말이죠. 그러면 언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언어에 제가 쉽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언어라는 것은 개인의 생각이 아니고, 자기가 들었던 풍월이 담겨서, 마치 자기 것처럼 오해해서 생기는 것이 언어의 내용이라는 겁니다. 남들이 다 이야기를 해서 이미 공중에 날아다니는 것들인데, 그 생각들을 자기 언어에 담았다는 말이죠.

프랑스의 최고급 브랜드인 '루이비똥' 이라는 것이 있는데, 세계 최고의 똥이라는 겁니다(ㅋㅋ). 그리고 '샤넬' 이라는 것도 있다는 말이죠. 그런 단어를 좋아하는 어떤 집단이 있고, 또한 그것을 들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여자 의사가 있는데, 루이비똥이 무엇인지 샤넬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말이죠. 그런 것에는 신경을 못하고, 의사생활이 바빠서 사치도 전혀 모르고 맨날 병원에 운동화만 신고 다녔다는 겁니다. 이것은 "샤넬이 좋다, 나쁘다" 라는 문제가 아니고, 나이 40이 넘어서도 샤넬을 들어보지 못한 여자가 실제로 있었다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지금 제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내가 쓰는 언어에 나의 관심사가 담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관심사는 자기만이 아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고 집단적이라는 말이죠. 그게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자기가 교회에 갔다는 말이죠. 그러면 교인들이 먼저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관심사가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했더니만 암이 나았고, 그리고 자식이 갑자기 떼돈을 벌어서 엄마에게 집을 사준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역시 내 기도빨이 먹혔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교회에 가면 그런 교회 선배들이 반드시 있는데, 그들로부터 들려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효과를 봤다" 라는 이야기인데, 그게 지금 교회에서 통용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개념이 언어에 실리는데, 그게 언어라는 말이죠.

목사가 "여러분, 올해는 꼭 전도하셔야 됩니다. 지금의 의 빈자리 보세요. 부끄럽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제가 올해에 꼭 10명을 전도하겠습니다" 라고 결심을 하면서 기도를 했는데, 그런데 과연 10명을 전도했다는 말이죠. 교회에 가면 그런 것이 들려온다는 겁니다.

*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는 시간절차 !!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자기가 암에 걸렸는데 의사 선생님이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때가 9월인데, 그러면 "나는 내년에는 당신을 볼 수 없네" 라고 하는데, 이게 어느 영화의 대사라는 겁니다.

이것을 함축하면, 인간의 시간질서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런 인간의 시간절차를 하나님은 받지 않는다는 말이죠. 3개월도 살지 못하니까 내년에는 보지 못한다고, 그렇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대목이 영화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시간절차가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 것은 없다는 겁니다. "네가 누구냐?" 라는 것이 중요하지, "네가 몇 월에 병에 걸렸고, 얼마나 더 사는가?" 라는 것은 인간들의 관심사이지, 주님의 관심사는 아니라는 것이죠.

* 주님의 언어가 담긴, '성경' !!

그렇다면 주님의 관심사가 담긴 언어가 무엇입니까? 바로 성경인데, 이 성경에 보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에게 근거한 시간절차를 계산해서 성경을 보니까, 이 성경을 엉터리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무조건 사랑하시고 에서는 무조건 미워하시는데, 이러한 두 부류를 두고서, 사랑하는 자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통하는 개념을 담아서 성경을 주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자기 중심의 시간절차로서 성경을 본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 중간에 누가 끼어 듭니까? 이 격리를 성령님이 끼어 들어서 무엇으로 바꿔주십니까? 자기 위주의 성경해석을 주님의 다 이루심의 성경해석으로 바꿔줄 때, 그게 바로 택한 집단이고, 천국에 가는 집단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천국에 가는 사람은 말 자체가 어떻다는 겁니까? 내용이 다른 것이 같이 실린다는 겁니다. 그런 다른 것이 주님의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인데 말이죠. 자기가 보기에도 자기가 많이 미흡하고 많이 모자라지만, 하지만 성경에 보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 소리를 딱 듣고 난 뒤에는 루이비똥과 샤넬, 그런 것을 사지 않아도 생기는, 그런 것보다 몇 배나 더 큰 기쁨과 감사가 생겨날 때, 그러면 "주께서 또 다녀가셨군요. 주님이 또 나에게 손을 댔군요"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주님께서 왜 우리를 다녀가시고 손을 댑니까? 그것은 "옛날 너와 이별하라" 라는 겁니다.

* 성도는 매일매일 작별하면서 !!

이제 끝으로 이 말씀만 드리고 마치겠는데, "성도는 작별이다" 라는 것인데, 작별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한강' 이라는 작가는 작별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성도는 매일같이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작별할 때 섭섭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고맙고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주님의 사랑을, 그 잊어버린 사랑을 다시 느끼면서 기꺼이 주님의 뜻대로 사용되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정말 우리가 사용하고 말하는 개념 자체가 바뀌어야 되는데, 그것을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주님의 '다 이루심'으로 일해주시는 줄 압니다. 복음으로 이미 결정이 났다고 하는 그 안도감, 그런 하늘의 평화를 감사함으로 누리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12,22 오후 3시에 마침.

오늘의 이별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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