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간수들의 감옥

아빠와 함께 2024. 12. 3. 21:40

[24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09 - 간수들의 감옥

24,11,18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창조자 VS 창조물

오늘은 교재 71페이지에 나오는 '창조론'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창조에 대해서는 두 가지를 생각해주어야 하는데, 창조됨, 즉 "나는 창조되었다" 라는 것과, 그리고 다음에는 '창조자', 이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디에 관심이 있느냐 하면, 앞에 '나' 라는 것이 등장해버리면, 창조론의 내용이 창조자에게로 향하지 않고 '나' 라는 것, 창조됨으로 관심이 쫙 쏠리게 된다는 말이죠. 즉 "나니까 창조되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창조자에게 대한 관심이 뚝 떨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면 창조물이 무엇을 가리느냐 하면, 창조주를 감추는 식으로 활동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하셨는데, 창조주가 되시는 분이 스스로 창조됨에게 합류를 해버렸다는 말이죠. 그리고는 그 창조된 자에게 쫓겨났다는 겁니다.

* 창조세계에서 추방된 창조자 !!

그러면 이야기를 이렇게 전개해봅시다. 창조된 자들의 집합이 바로 이 세상인데, 그 집합에서 추방된 창조자, 그분이 주님이라는 말이죠. 그분이 바로 창조주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창조된 자들의 집합체인 이 세계에서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는 말이죠.

창세 때에 창조된 자가 여기 창조된 자들의 집합체, 즉 세상 속에서 대빵 노릇을 하는데, 그러면 그게 누구일까? 피조물인 악마인데, 이 집합체 전부를 자기 손아귀에 꽉 잡았다는 겁니다. 그것을 '악마의 왕 노릇', 또는 '죄의 왕 노릇' 이라고 하는데, 즉 악마가 왕질하고 있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인간 세계라는 겁니다.

* '땅' 개념이 달라요 !!

그 인간 세계를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하는데, 그 중에서 하나가 '땅' 이라는 말이죠. 이것이 어려운데, 땅이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물질을 의미하지만, 성경은 창조된 자의 집합체, 그 사회성을 땅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흔히들 자연 세계를 땅이라고 표현하지만, 성경은 그 초점이 자연 세계가 아닌 인간들의 집합체에 두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늘은 무엇일까요? 땅의 반대말인 하늘은 구원받은 자의 집합체인데, 그것이 천국이 된다는 것이죠. 그게 하늘이라는 겁니다. 과학적으로 천국을 증명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과학에 말하는 땅 개념부터가 성경의 땅 개념과는 다르다는 말이죠.

그러면 왜 창조된 자의 집합체를 하나님은 땅이라고 보시느냐 하면, 그것은 여기에 예수님이 다녀가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의미와 개념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하면, 예수님으로부터 출발을 한다는 말이죠.

"저기에 해와 달과 별이 있고, 여기에는 산이 있네. 우리는 이것을 땅으로 규정하겠다" 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의 생각이고, 우리 주님의 생각은 뭐냐 하면, "모든 그 의미와 개념은 전부 취소다. 너희들이 보기에 합당할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합당하지 않아. 내가 다녀간 코스 안에서 하늘과 땅이 규정된다" 라는 겁니다.

* 초등학문에서 벗어나라 !!

그러니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그런 것들은 이미 예수님의 생각과 틀어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에서 그런 인간의 학문을 '초등 학문' 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이제는 초등 학문의 시절에서 벗어났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갈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초등 학문으로 구원과 천국과 지옥,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제 그만해라" 라는 것인데, 그러면 신학은 어디에 해당합니까? 초등 학문에 해당이 된다는 말이죠. 이런 초등 학문과 복음의 차이가 무엇인고 하니까, 초등 학문은 인간의 이해도를 모아서 만든 것인데, 그래서 철학과 신학이 다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해할 수가 없는데, 주님은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만 하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초등 학문에 완전히 굳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12제자들을 포함해서 누구도 말이죠.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이해하는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것은 그 사람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았다는 의미는 뭐냐 하면, 자기 힘으로, 즉 자기 지혜로 아는 것 더하기, 거기에 자기가 그동안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 그렇게 같이 두 개를 겸하여 알게 해주는 것이 성령이라는 말이죠.

*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 !!

성령은 예수님의 영인데, 고린도전서 2장에서 성령을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깊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셔야 알 수 있는데, 즉 "은혜로 주신 것들 알게 하심이라" 라는 겁니다.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내놓지 않는데 의도적으로 자신의 깊은 것,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만이 아시는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공짜로 내어줄 때, 우리는 우리 인간이 아는 것에다가, 하나님끼리만 아는 것을 더 보태서, 둘 다를 알게 된다는 말이죠. 중첩된 것인데, 그렇게 해서 둘 다를 알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1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창세기 전에 너희를 택해서, 이제는 그 계시를 너희가 성령을 통해서, 즉 너희가 계시의 영을 받아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는 말이죠.

(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기서 땅에 반대말은 하늘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창조된 자의 집합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무슨 말인고 하니, "창조주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기의 인간들은 그 창조주를 추방할 수밖에 없었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은 어떤 모종의 성격이 이 안에 담겨있다고 보시면 된다는 겁니다.

* 어떤 식으로 만들었는가?

그것을 염두에 두고 교재 71페이지부터 차근차근히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창조론에 들어가면서 제일 먼저 명심해야 될 것이 무엇인고 하니, "누가 만들었는가?" 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식으로 만들었는가?" 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방금 제가 "누가 만들었는가?" 라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 도발적인 발언을 했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지옥에 가는 인간들도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주가 만들었다고, 그렇게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살해를 당했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이 세상을 자기들이 만들었다고 합니까?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합니까? 하나님,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들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창조주 여호와를 죽였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세상 만물을 하늘이 만들었다는 것을 알면 구원을 받습니까?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 천지를 하나님께서 만들었어요. 찬양합시다" 라고 한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 창조론을 가지고서, "내가 창조론을 다 안다" 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제사와 동일하다는 말이죠. 가인이 제사를 누구에게 드렸지요? 자기 부모님에게 드렸습니까? 그렇지 않은데,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렸다는 겁니다. 가인이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것 같았으면 아예 제사도 드리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죠. 가인은 하나님을 믿었고, 심지어 하나님과 대화도 했다는 겁니다.

* 창조론도 계시론이기에 !!

여러분, 그 정도로만 해도 대단한 창조론이 아닙니까? 하지만 제가 처음에 이야기를 했는데, "계시는 구원의 효과까지를 포함해야 제대로 된 계시이고, 창조론도 계시론이라면 구원의 효과를 포함해야만 제대로 된 창조론입니다" 라고 말이죠.

아벨의 창조론과 가인의 창조론에는 차이가 있는데, 가인은 그냥 "나는 하나님이 만든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오늘날 교인들의 사고방식도 대부분이 이러한데, 즉 "신이 만든 몸이기에 이 몸을 신에게 헌신하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게 얼마나 대단한 믿음으로 평가되는지는 알 수가 없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으로 스스로 만족해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저를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을 믿습니다. 저에게 징계를 내리지 마옵소서. 저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제발 저주를 내리지 마소서" 라고 하면서, 어떤 불안감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류 역사상 유명한 과학자들, 즉 갈릴레이, 뉴턴, 아인슈타인 등등, 그들이 전부 신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겁니다. 최초로 인간의 발자국을 달에 남긴 암스트롱은 달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말이죠. 차범근 축구선수도 골을 넣고 운동장에서 '주여' 라고 기도했는데, 그러면서 많은 간증집회를 다녔다는 겁니다.

이것을 두고 성경에서는 "범사에 종교성이 많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구원받을 사람의 모습은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했다" 라는 것을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 죽을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

그래서 다른 창조가 개입해야 하는데, 다른 창조론은 "세상이 만들어졌다" 라는 창조론이 아니라, "죽을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 라고 하는, 그것이 다른 창조론이라는 말이죠. 창조는 반드시 파괴되도록 창조되었다는 겁니다. 즉 만들어진 것은 반드시 파괴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히브리서 1장 11절에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허무는 용도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파괴된 중에 누가 포함이 되어있지요? 우리 자신이 포함되어있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왜 우리를 만들었습니까? 우리는 파괴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히 1: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창조는 뭐냐 하면, 이런 창조가 아니고, 즉 '창조1'이 아니고 '창조2' 라는 것인데, 이 '창조2'를 뭐라고 합니까? '새 창조' 라고 한다는 말이죠. 창조와 새 창조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창조1'에는 하나님의 죽음이 들어있지 않다는 겁니다.

* 십자가 죽음이 포함된 새 창조 !!

그런데 새 창조에서는 누가 들어있어요? 하나님의 죽음, 즉 십자가가 포함된, 새 언약이 포함된 창조인데, 그것이 곧 완료된 창조라는 겁니다. 지금의 이 만들어진 창조는 누가 여기에 들어갔는고 하니, 십자가가 들어간 것이 아니고, 악마가 들어갔다는 것이죠. 악마의 품성이 말이죠.

그렇게 악마의 품성이 들어가서, 바리새인들의 아비가 악마니까, 그러면 악마의 졸개가 바리새인들이라는 것인데, 그래서 그들이 줄기차게 뭐라고 주장합니까? "너 자신을 위해서라도 하나님 믿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요즘 교회식으로 말하면, "너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어야지" 라는 것인데, 전도를 그렇게들 한다는 말이죠. 물론 "나는 죽고 주님으로 산다" 라고, 교회에서 이 말도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자신은 죽고, 주님하고 살아야 합니다" 라고, 그게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오니까 하기는 한다는 것이죠.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안 되고, "나의 구원은 죽고, 주님의 구원으로 산다" 라고,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같은 의미인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나는 죽고 주님으로 산다" 라는 것이, 결국 "내가 산다" 라는 것으로 귀결이 된다는 겁니다.

참으로 비겁하고 얍삽한데, 일종의 돈 놓고 돈 먹기인데, "여러분이 죽어야 여러분이 삽니다" 라고, 즉 "그래, 내 한 몸이 죽어서 내가 살면 되지"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경은 그런 의미가 아닌데, 아예 '나의 구원' 이라는 것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산다" 라고 하는데, 인간이 자기를 부인할 재주가 있어요? 내려놓고 또 내려오고 해도, 그런 책이 있는데 말이죠. 몽골에 선교사로 간 사람이, 내려놓고 내려놓았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백날을 내려놔 봐야, 내려놓은 그 밑에 또 지하실이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끝도 없이 내려놓는데, 그러면 어느 세월에 구원을 받습니까? 내려놓고 내려놓았다고 하는데, 그런데 파보면 지하실이 또 나온다는 겁니다. 지하 50층, 지하 100층이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으로 구원으로 산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새 창조의 집합체 안에 있는 원리라는 겁니다.

* 창조는 파괴되고, 새 창조로 이어진다 !!

그러면 오늘 강의를 해야할 것은 이것인데, 즉 "창조는 파괴되고 새 창조로 이어진다" 라는 겁니다. 이 노선을 다시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기존 창조는 파괴되고 새 창조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 중간에 하나의 과정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까, 노선 변경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노선 변경이 일어나면 노선이 하나라는 겁니까? 두 개라는 겁니까? 노선이 두 개가 된다는 겁니다. 창조가 말이죠. 우리 육신도 창조된 것인데, 악마가 지배하고 있는 육신의 본성이 하나의 노선을 형성한다는 겁니다.

이 창조에서는 악마가 우리를 "이리 가자" 라고 하면서, 우리는 말로 부리면서 계속해서 진행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갈 때, 그런데 우리는 이 노선에서 탈피해서 중간에 빠져나오게 되는데, 그래서 다른 노선으로 가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는 "이리 가자"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새 창조에서 마중을 나오기 때문에, 방향이 바뀌면서 주님이 우리를 끌고 가신다는 말이죠. 그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 라는 것인데, 그 목자의 존재 자체가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겁니다.

(시 23: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런데 우리 육신의 죄악된 본성은 뭐냐 하면, 자기가 납득하고 만족할 만한, 스스로 부족함이 없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그렇게 악마가 시키는 대로 이 노선을 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계속해서 더더더 모아야 하고, 완벽해야 하고, 완전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마중을 나온 노선은 무엇인고 하니, "목자만 있어도 내게 부족함이 없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이게 어떻게 됩니까? 자기 육신이 가지고 있는 "부족함이 없다" 라는 것은 떨어내야 한다는 말이죠.

몸도 건강하고 봉사도 많이 하고, 그러면 교회에서 사람들이 다들 칭찬을 한다는 겁니다. "정말 꼭 필요한 분이다" 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분이 어느 날 몸이 아프다고 하면, 그러면 교인들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지옥 노선은 뭐냐 하면, 오늘 여기에 김 장로님은 없지요? "김 장로님은 교회봉사도 잘하고 헌금도 많이 했더니만, 이번에 아들은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딸은 의사와 결혼했어. 하나님이 복을 왕창 주셔서 부족함이 없게 했구나" 라는 것인데, 그게 기존의 노선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는 무엇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겁니까? 기존의 창조 노선을 고수하는 자의 눈에 부족함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새로운 노선은 무엇입니까? 새로운 노선은, 이쪽으로 가서 다른 노선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마중을 나와야 새 노선이 생기게 된다는 말이죠.

* 참 묘하다 !!

왜냐하면 그것을 떨어내기 때문인데, 성령을 받은 자는 이 두 개를 모두 다 알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 육신을 통해서 남들에게 그럴싸하게 복을 받았다는, 그러한 티를 낼 수 있는 요소들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너무나 잘 안다는 말이죠.

이번에 교회 장로님이 보훈병원에 검사를 받으려고 들어가시다가 그만 넘어져서 쇠기둥에 머리를 부딪혔는데, 그래서 입원을 하셔서 더욱 적극적으로 검사를 받았다는 겁니다.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으로 결과가 나오기는 했는데 말이죠.

그래서 그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전화를 했고, 나중에 퇴원을 하셔서 장로님이 저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 내용이 딱 한마디였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표현이 너무 마음에 드는데, "참 묘하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장로님이 그때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역대상을 언급했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입에서 성경말씀이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이 나올 경우에는 자신의 수치스러움을 같이 섞여서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입을 다문다는 것이죠.

그러면 수치스럽다는 것은 뭐냐 하면, 악마가 지배하는 노선, 즉 자기 자랑거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으로 자신의 수치스러움을 덮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자라고 해서, 성도라고 해서 이것이 없어질까요? 그게 아닌데, 계속해서 유지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것을 감추는 용도로서 다른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럴싸한 모습을 보인다는 겁니다. 그러면 감추었던 것이 바깥으로 튀어나오고, 그러면 이것이 바로 "참 묘하다" 라고, 즉 "내가 감추어놓은 것이 드러나네. 참 묘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저가 칼을 집에 꽂았더라 !!

장로님이 말씀하신 역대상의 상황이 어떠한고 하면, 그것을 장로님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나를 즉사시켰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역대상 21장인데, 장로님이 다윗의 타작마당 이야기를 하셨다는 말이죠. 물론 장로님은 성경본문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제가 목사로서 찾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죠.

(대상 21:26)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대상 21:27) 사자를 명하시매 저가 칼을 집에 꽂았더라
(대상 21:28) 이 때에 다윗이 여호와께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응답하심을 보고 거기서 제사를 드렸으니
(대상 21:29) 옛적에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여호와의 장막과 번제단이 그 때에 기브온 산당에 있으나
(대상 21:30) 다윗이 여호와의 사자의 칼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 앞에 가서 하나님께 묻지 못함이라

여기 27절에 "저가 칼을 집에 꽂았더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장로님이 저에게 전하고 싶은 내용이 이것인데, "하나님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래서 천사가 즉사시켜도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이 번제단의 존재, 천사의 존재, 하나님의 존재를 그 순간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 살려두셨다" 라는 겁니다.

바로 이 역대상 21장의 말씀을 장로님은 자기에게 적용을 시키면서, "이 역대상 이야기를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나를 그때 병원에서 즉사시키지 않고 유예를 시켜주셨다" 라고, 그렇게 고백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상황을 설명하시면서 한마디로 표현하기를 "참 묘하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가 성경을 알려고 애를 쓴 게 아니고, 외부에서 다른 조치가 올 때, 그야말로 자기가 상상도 못한, 자기가 전혀 기대하지도 못한 상황에 빠진다는 겁니다. 즉 묘한 기분에 빠졌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어제 죽어도 아무런 이상할 것이 없는데, 그런데 왜 그때 죽이지 않았지? 결국 죽이는 것도 하나님 마음대로이고, 그리고 사는 것도 주님의 자기 마음대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날마다 그날이 자기가 파괴되는 최후의 날이었다는 것인데, 즉 하루하루가 최후의 날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즉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나는 여기 있다. 주께서 오셨기 때문에 나는 구원을 받겠지" 라고 하는, 즉 "나는 창조되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열심히 봉사를 할 테니, 하나님은 기다리세요. 하나님께로 가겠습니다" 라는 노선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 노선은 전혀 묘하지 않다는 것인데, 이것은 오히려 계획적인데, 자기 인생의 계획 중의 하나라는 겁니다. 일종의 영적인 보험에 들은 것과도 똑같다는 말이죠. 즉 "교회에 다니면서 착실히 살다가, 나중에 천국에서 만납시다" 라는 것인데, 이것은 전혀 묘한 게 아니고, 이미 자기가 예상하고 있다는 겁니다.

* 노선의 파괴 현상 !!

그래서 중간에 이것을 끊어버려야 한다는 말이죠. 지옥으로 가는 이 노선, 여기서 다른 노선이 마중을 나오려고 하면, 이때 무슨 현상이 일어나야 한다는 겁니까? 파괴 현상이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죽어서가 아니고, 살아있을 때 자기 죽음을 체험해야 한다는 겁니다. 살아있을 때 자기가 파괴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 파괴라는 것은 어떤 경우를 의미할까요? 그것은 자기의 모든 가치가 파괴되는 것인데, 즉 자기의 모든 가치가 취소되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자기 파괴와 동시에 새 생명 노선으로 가입이 된다는 말이죠.

어떻게 제가 여러분을 보고 좀 축하를 해드려도 되겠습니까?(ㅋㅋ) 무슨 말인고 하니, 장로님이 "내가 넘어져서 나를 부인해야지" 라는 작전을 꾸민 것이 아닌데, 그것은 완전히 자기가 생각한 범주 바깥에서 주께서 손을 대서 벌어진 일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넘어져서 쇠기둥에 부딪쳤으니 끝났다는 말이죠. 그런데 살아났으니까 묘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자기의 모든 가치가 없어진 것이 슬픕니까? 아니면 기쁩니까? 이것이 이론상 전혀 슬퍼할 타이밍이 아니고, 기뻐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기뻐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동안 몸이 참으로 튼튼했는데 병원에 가보니, 그만 말기 암이라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갑자기 그 순간 "내가 알았던 복음은 전부 다 도루묵이고 소용이 없구나" 라는 생각이 밀려올 때, 그렇게 자기가 생각했던 복음의 세계가 그만 환상으로 날아가 버리고 다시 원천 복귀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동안 자기가 이 새로운 노선에 있다고 착각을 했을 뿐이지, 실제로는 기존의 노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만 자기가 노력한 환상의 덩어리이지 않았는지, 그것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죠.

* 다시 정리하면 !!

이것을 다시 정리를 해보면, 기존의 창조 노선에서 새로운 노선으로 노선 변경이 일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새로운 노선으로 변경이 될 때, 여기에 무엇이 투입되는고 하니, 창조에서 노선 변경을 할 때는 파괴 일어난다는 말이죠.

그렇게 노선 변경으로 새 창조를 할 때, 여기에서 수치, 또는 수치성을 동반해서 노선 변경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수치성, 즉 부끄러움이란 말이죠. 여러분은 어떤 경우가 가장 부끄럽습니까? 그것은 아까 제가 말씀을 해드렸는데, 자기의 모든 가치가 소실될 때 인간은 가장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가치가 날아갈 때 인간은 칩거를 하는데, 집 밖에 나오질 않는다는 말이죠. 남들에게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어서, "너희들은 내 인생이 망가진 것이 보고 싶어?" 라는 식인데, 그래서 사회에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는 겁니다.

* 나는 깡통인생이 싫어 !!

50살 먹은 남자가 20년 이상을 살다가 아내와 이혼을 하면서, 자기에게 떨어진 재산 분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차를 몰고 단체로 조깅을 하고 있는 가운데로 치고 들어가서, 무려 46명이나 죽게 하는 사고가 일어났다는 말이죠.

이게 한국이 아니고 중국에서 일어난 일인데, 그 남자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자기 개인사 문제를 가지고 화가 난다고 해서, 차를 몰고 왜 그런 짓을 했느냐는 겁니다. 자기 안에서 무엇이 올라온 겁니까? 수치가 올라왔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수치는 왜 올라옵니까? 방금 했는데, 이 수치는 자신이 내세울 마지막 가치가 날아갔을 때에 올라온다는 겁니다. 즉 "나의 나다움이 바닥을 드러냈다" 라는 것인데, 그게 깡통이 되었다는 것이죠. 이게 자기 파괴 현상인데, 즉 "내가 파괴된 이상 너희들도 파괴되어야 한다" 라는 겁니다.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라고 말씀을 하시고 기적을 베푸셨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처음에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쳤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을 자기들에게 혜택을 줄 분이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저분은 나쁜 사람 아니고 우리에게 도움을 주실 분이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추종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초반에 했던 귀신을 쫓고 병을 고쳐주고, 그렇게 남들에게 혜택을 주던 예수님의 행동과 말씨가 점점 어디를 목표로 해서 나아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연결될 수 있는 그 지점에 대한 파괴로 나아갔다는 말이죠. 그게 "내가 성전을 헐어버리겠다" 라는 것인데, 이럴 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어떻게 나옵니까? 즉 성전을 가지고 밥을 빌어먹고 살아가던 인간들이 공격을 받았을 때, 그들이 가만히 있을 놈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일반 백성들도 동조를 할 수밖에는 없었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고마운데, 그런데 점점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도무지 납득이 안 된다는 말이죠. 거기에 합류가 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 인간은 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는가?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이 납득 안 되었는데, 동조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베드로가 말렸는데,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고 "사단아, 물러가라고"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무슨 취지로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죠.

제가 아까 이야기를 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해가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이 이 땅에 살면서 노리는 게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자신의 구원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의 협조로 자기 구원을 이루겠다고 나오는데, 그러니 지금 인간들의 세계는 자기 구원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의 구원이 너희를 구원 못하게 만든다" 라고 하시는데, 오히려 그것이 장애가 된다는 말이죠.

* 존재로서 투정부리지 말라 !!

여기서 주님의 지적은 이것인데, "존재로서 투정부리지 말라" 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징징대지 말라. 너희는 징징댈 권한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하나님, 저 괴로워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엄살 부리지 마라. 너희들은 모두 이미 다 죽은 존재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너무나 더럽고 수치스러워서 천국에 가지도 못할 인간들이, 그런데 그러한 자기 주제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자기를 구원시켜달라고 하면서 징징대고 있는데, 그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지금부터 예수님의 취지에 이것이 기본으로 깔렸다는 그 증거를 대보겠습니다. 인간 존재가 예수님에게 "제발 도와주세요" 라고 징징대면서 찾아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그래, 병을 고쳐줄게" 라고 하시면 되는데, 그런데 주님은 "네 죄사함을 받았다" 라는 말씀을 하신다는 겁니다. 중풍병자에게 말이죠.

(마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죄가 있다는 것인데, 그 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너는 저주받아 마땅하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주님께서 이야기를 하신다는 겁니다. 심지어 "죄사함을 받았다" 라는 것도, 여기서 인간은 죄가 무엇인지 사함이 무엇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말이죠.

"아하, 내 존재 자체가 사함을 받았구나" 라고 하는 게 아니고, 기껏해야 "내가 나쁜 짓을 한 것만 골라서 사함을 받았구나" 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가 무효라는 것인데, 그렇게 무효로 돌릴 정도로 자기가 무가치하다는 것을 자기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말이죠.

* 모든 인간의 이름은, '아담' 이름에서 파생된 것 !!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갔던 여인 이름이 무엇입니까? 마리아인데, 예수님의 어머니 이름도 마리아이고, 둘 다 마리이라는 겁니다. 인간 세계가 이름에 갇혀있는데, 그러면 무슨 이름에 갇혔을까요? 로마서 5장에 보면, 아담 이름에 갇혀 있다는 말이죠. 모든 인간의 이름은 아담 이름에서 파생이 되었다는 겁니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창세기 5장에 보면 이름이 줄줄이 나오는데, 이름이 백날 나와도 모두 다 아담의 형상에 복제판이라는 말이죠. 이름이 있다고 해서 그 이름대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 아담의 이름에 실려있는 운명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그것이 마치 국화빵을 찍어내듯이 똑같이, 첫 번째 아담, 두 번째 아담, 세 번째 아담, 그렇게 계속해서 똑같이 찍어내서, 그 결과는 무엇인고 하니, 창세기 5장의 각 절의 끝에 보면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몇 백년을 살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결국은 죽는다는 말이죠. 500년, 900년을 살아도 '죽었다' 라는 것에 도달하면 기존의 노선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노선은 이 노선에서 이탈되지 않고, 같은 노선으로 계속 간다는 말이죠. 그렇게 줄곧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름이라는 것은, 보통 자식의 이름은 부모가 집에서 자기의 성을 붙여서 짓지만, 하지만 그런 이름은 아무리 지어봐야 '아담' 이라는 이름의 재연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아담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나는 솔로다' 라는 TV프로에 보면, 똑같은 이름을 다른 사람들이 공유를 하는데, 정숙, 정자, 광수 등등, 그런 여러 이름이 나온다는 말이죠. 16개의 정숙, 21개의 광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 프로를 보면 동일한 이름을 공유해서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물론 여러분은 TV를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말이죠(ㅋㅋ).

여기 이 노선, 즉 아담의 노선에 새로운 노선이 개입하는데, 그것이 무슨 노선입니까? 주님으로부터 마중 나온 노선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름에 누구 이름이 끼어들겠어요? 목자의 이름이 끼어든다는 말이죠. 그러면 목자의 이름은 무슨 이름입니까? 주님의 이름이라는 겁니다.

* 성도는 이름이 두 개 !!

그러면 이 이름에는 무엇이 실려있습니까? 그 사람의 운명이 실려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도는 이름이 몇 개일까요? 이름이 두 개라는 겁니다. 하나는 아담에서 내려온 이름이고, 또 하나는 주님이 마중을 나오는 이름이라는 말이죠.

이렇게 두 개의 이름이 중첩이 되어있는데, 다른 말로 하면, 두 개의 세계가 중첩되어있다는 겁니다. 두 개의 운명이, 두 개의 팔자가 중첩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한 쪽 팔자가 다른 한 쪽 팔자를 이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두 개의 이름이 아닌, 즉 주님의 이름이 아닌 그냥 아담의 이름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이 아담의 이름은 이미 누구의 힘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느냐 하면, 그것은 악마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다는 말이죠.

* 악마는 이름이 없어 !!

그렇게 악마의 이름으로 하면, 그러면 악마가 이름이 있습니까? 악마는 이름이 없는데, 악마는 왜 이름이 필요치 않습니까? 악마는 스스로 있는 자인데, 즉 신이라는 말이죠. 이름을 지으려고 하면, 그 신 위에 또 다른 신이 있어서, 그 신이 이름을 지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악마는 자기는 신이기 때문에 이름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다만 악마는 자기 이름을, 즉 자기 속성과 성질을 우리 인간에게 집어넣고서는, 그 인간을 지배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름이 없는 것이 이름이 있는 것보다도 더 무섭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악마의 지배를 받는데, 악마, 즉 뱀의 후손이라는 말이죠.

현재에 있는 피조물, 그 뱀의 후손을 통해서 마지막 후손이 악마로 나온다는 겁니다. 뱀의 성질을 그대로 닮은 피조물이 나오는데, 그 뱀의 후손과 대조가 되는 것이 누구의 이름입니까? 뱀의 후손과 대조되는 것이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이죠.

* 여자의 후손도 이름이 없어 !!

그러면 여자의 후손은 이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름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남자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인데, 이 세상에서 여자는 단독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 순서가 아담부터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아담이 무엇으로 바뀌어집니까? 처음에는 아담뿐인데,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들면서 아담을 남자로 만든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든 것이 아니고 아담을 만들었는데, 즉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이죠. 제 말이 맞죠? 무슨 말이냐 하면, "왜 처음부터 하나님께 남자와 여자, 그렇게 두 사람을 만들지 않았는가?" 라는 것인데,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먼저 남자를 만들고, 그리고 여자를 만들었는데, 그러니 순서가 남자에게서 여자로 간다는 말이죠. 이것이 아담의 세계인데, 그러면 "아담이 죽었다" 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나타내시는고 하니, 여자로부터 남자에게로 가게 만드는데, 즉 "여자가 한 남자를 안았다" 라는 겁니다.

(계 12: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계 12: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남자가 아들을 안는데, 그러면 마리아가 낳은 것이 딸입니까? 아들입니까? 아들인데,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기존의 남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그러면 기존의 남자 이름으로 지어진 모든 인류의 조건은 어떻게 될까요? "이 세상은 하늘나라에서 인정하지 않는 집단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아들로 태어나서 어떻게 됩니까? 비록 마리아에서 아들로 태어났지만, 예수님은 남자의 후손이어야 됩니까? 여자의 후손이어야 됩니까? 여자의 후손으로 오심으로서, 즉 "이쪽 세계에 속하지 않는 분이 이쪽 세계에 들어왔다" 라는, 그런 뜻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복잡하게 일을 하시는데, 그렇지요? 왜 그렇게 복잡하게 하시느냐 하면, 악마가 모든 인간의 사고방식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란 말이죠. 하나님께서 그 어떤 율법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누가 해석한다는 겁니까? 악마가 해석을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믿고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 라고, 자꾸만 기존의 노선을 고집한다는 말이죠. "네가 구원될 수 있어" 라고, 자꾸만 인간 구원에 대해서 격려하고 희망을 준다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받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미 악마의 육신이기 때문에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내 구원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종교 자체가 어떻게 됩니까? 전부 다 거짓말이고, 교회는 사기단체가 되고 만다는 말이죠. 구원이 없는데 왜 종교가 필요합니까? 왜 교회와 성당이 필요하냐는 겁니다. 인간의 자기 구원이 없는데 말이죠.

* 나의 구원은 죽고, 예수님의 구원으로 산다 !!

그렇게 여자의 후손이 남자의 세계에 들어온 것인데, 그러면 예수님이 오실 때 그냥 달랑 혼자 오셨겠습니까? 배후에 여자의 후손의 세계도 달고 오셨겠습니까? 여자의 세계도 달고 오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 이름 안에 들어있는데, 그 예수님 이름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임마누엘'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이 임마누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함께 있다" 라는 것인데, 즉 "더 이상 그 어떤 인간들과도 함께 있지 않고, 예수님이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그 우리와 하나님이 함께 있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여기에는 과연 무엇이 필수적일까요?

예수님의 기능, 그 활동이 더러운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데, 즉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 라는 것이 아니고, "나의 구원은 죽고 예수님의 구원으로 산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의 구원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될 때, 즉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때, 이미 악마의 속성을 갖고 있는 모든 인간들이, 심지어 예수님의 12제자들과 마리아까지도, 이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뿌리면서 "제발 오랫동안 썩지 않게 해주세요" 라고 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가보니 향유를 바를 시신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이 없다" 라는 것에 대해서, 마리아는 "내가 없다" 라는 것으로 이해를 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주님은 없고 나는 여전히 있다" 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의 한계인데, 그러면 "주님이 살아났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내가 죽었다" 라는 뜻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게 얼마나 간단하고도 심플한 논리냐는 겁니다. 그렇지요?

* 왜 예수님은 먼저 광야를 가셨는가?

마태복음 4장에서, 거기에 나오는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에서는 이게 두 번째 시험으로 되어있는데 말이죠. 왜 성령께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바로 현장에 투입하지 않고, 광야에 가도록 하시느냐는 겁니다.

그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금식을 하시는데, 그 기간도 하필이면 40일라는 말이죠. 이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던 것, 그때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태어나서 애굽에서 살아온, 즉 그들이 원했던 양식은, 애굽생활을 전제로 해서 모두 다 끊어버렸다는 겁니다.

광야에는 짜장면도 없고 짬뽕도 없는데, 그래서 제 아무리 짜장면을 시켜도 "여기 짜장면을 시키신 분?" 라고 하면서 배달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ㅋㅋ).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끊어버렸다는 겁니다.

* 우리가 왜 아직 살아있지?

그렇다면 그들이 과연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요? 그런데 이것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광야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질문을 다음과 같이 해야하는데, "우리가 왜 아직 살아있지?" 라고, 즉 "하나님은 왜 우리를 자꾸만 억지로 살려내시지?" 라고 질문을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아무런 양식도 없는 곳에 집어넣었을 때, 그러면 그냥 죽이시든지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분명히 환경은 죽이는 환경인데, 그런데 그 속에 왜 자꾸만 살려내는 요소가 투입이 되느냐는 말이죠. 하늘로부터 왜 새벽마다 만나가 주어지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광야는 감옥이기 때문인데, 즉 광야는 일종의 감옥이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과연 어떤 감옥이었을까요? 여러분은 이런 감옥을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 광야는, 간수들의 감옥 !!

그게 '간수들의 감옥' 이라는 것인데, 이게 뭐냐 하면, 자칭 자기가 간수라고 여기던 자들만 다 모아서 집어넣는 감옥인데, 법무부 직원들만 골라서 집어넣는 감옥이 과연 있을까요? 그런 것도 좀 있으면 좋겠는데,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마귀에게 겪으신 세 번째의 시험을 통해서, 제가 왜 광야를 간수들의 감옥이라고 표현을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4장 8절과 9절을 보겠습니다.

(마 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 4: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악마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기존 아담의 노선으로 끌고 가게 해서, 거기에 매몰되도록 한다는 말이죠. 이게 시험이고 유혹인데, 그러면 그런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악마는 천하만국의 영광을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게 유도를 해왔다는 겁니다.

* 인간은, 악마가 만든 감옥 !!

그러면 인간은 이미 이러한 악마의 목표에 의해서, 인간은 여기서 벗어날 길이 도무지 없다는 말이죠. 인간은 이미 악마의 감옥인데, 인간 자체가 악마가 만든 감옥이라는 겁니다. 감옥, 이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말이죠.

우리 인간은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은 자기가 만들어 간다는 겁니다. 자기가 목표로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즉 자기 환경을 자기가 만들어 간다는 말이죠. 자기가 살아가는데 적합한 환경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자기가 주식을 하는데, 거기에 자기 돈을 2억을 집어넣었다는 겁니다. 하면 바짝 신경을 쓰는데, 매일 컴퓨터를 통해서 주가를 살펴본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자기가 주식에 투자를 했으면, 그 주식시장은 없어져야 합니까? 계속해서 있어야 합니까?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 모든 영광은 누가 만든 겁니까? 자기가 만들어 가는데, 그렇게 자기가 만들어 가면서 하는 소리가 "이 세상은 참 더럽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자기 노림수가 있다는 것인데, 세상을 자기가 만들어가고 있으면서 왜 더럽다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이 세상은 자기가 꾸역꾸역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인데, 그렇다면 그것이 간수들의 감옥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말이죠. 알다시피 간수들은 판정관인데, 즉 판정을 하고 감시를 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 이 세상을 감시하는 인간들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은 자기가 투자하고, 자기가 염두에 두고, 자기가 은근히 노리는 이 세상, 이게 자기 뜻대로 제대로 돌아가는지 돌아가고 있지 않는지, 그것을 매일같이 우리는 신경을 쓰면서 바라보고 있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자기가 신차를 하나 샀는데, 그런데 곧 바로 25년 신형이 나왔다고 하면 신경이 쓰이게 된다는 겁니다. "조금만 더 기다릴걸, 저 신형이 더 좋은데" 라고 하면서 말이죠. 차를 살 땐 기분이 참 좋았는데, 그런데 차를 사고 난 뒤에 신형이 나오면 그런 기분이 그만 사라지고 만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백화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옷을 하나 샀는데, 그래서 기분이 좋게 입고 다녔다는 말이죠. 그런데 얼마 뒤에 더 좋은 신상이 백화점에 딱 걸려있는 것을 보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잘 입고 다니던 옷은 그만 옷장으로 들어가고 만다는 겁니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자기가 만든 이 세상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는데, 그래서 매일같이 감시를 하면서 쳐다보고 있는데, 우리 인간은 그런 것으로 세월이 가는 줄을 모른다는 말이죠. 그게 살아가는 재미라는 겁니다.

* 시간이 달라요 !!

제가 어제 오후시간에 인간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이 다르다고 했는데, 인간의 시간은 자기가 즐거운 계획이 있으면 시간이 빨리 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으면 지루해서 미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의 시간은 객관적이지 않는데, 철저히 자기 위주라는 말이죠. 그래서 수학시험 시간에 자기가 아는 문제가 나오면 신이 나지만,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그냥 나오고 싶다는 겁니다. 50분의 시간이 그렇게 지루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철저히 자기 위주인데, 자기가 투자한 세계가 곧 자기 세계라는 말이죠. 이 세상은 자기가 투자해서 자기가 만들어 가는 자기 세계라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만 그렇겠어요? 남들도 다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설교시간에 목사가 "여러분, 이 세상은 지옥입니다" 라고 백날 이야기를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 희망을 걸고, "나의 나됨은 이 세상에서 증명해줄 것이다" 라고 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목사 네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나는 이 세상을 포기하지 못해. 나는 이 세상에 희망을 걸었어"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자기 세상이니까 말이죠.

* 영광스러운 세상 !!

그런데 마귀가 뭐라고 합니까? 그러한 세상이 어떻다는 겁니까? 이 세상을 그냥 만국이 아니고 천하만국이라고 하면서, 그리고 그 뒤에 '영광스럽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마귀는 그냥 세상이 아니고 영광을 보여주겠다고 하는데, 영광스러운 희망을 말이죠.

이 세상의 영광, 그게 바로 아담의 노선이라는 겁니다. 이게 아담의 노선이니까, 어떤 영광이 눈에 띄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준비하시고 마련하시고 데려가시는, 그렇게 마중을 나오신 노선, 즉 예수님의 새로운 창조의 노선, 그 세계의 영광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 묘하다 !!

이사야 6장 5절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무엇을 보았기에 자기 자신을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는데, 하늘의 영광을 보니까 이 세상의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가 없었다는 말이죠.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여기서 나오는 말은 뭐냐 하면, 장로님이 말씀하신 '묘하다' 라는 겁니다. "너는 어제로 죽었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가 죽으면 무엇도 같이 죽는 겁니까? 자기가 자기의 영광을 기대하면서 투자했던 모든 것도 다 자기가 죽는 순간에 다 날아간다는 것이죠. 자기의 가치가 말이죠

그렇게 되면 슬퍼해야 하는데, 그런데 다윗의 타작마당에 서니까 지금 그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더라는 겁니다. 자기의 건강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살았던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져도, 그게 문제가 되질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나는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마땅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 이 세상 모든 건축물의 원형은, 감옥 !!

이 세상의 모든 건축물의 원형이 감옥인데, 감옥에서 나왔다는 말이죠. 참 묘하지 않습니까? 감옥을 지을 때 어떻게 짓는고 하니, 바깥에서는 장엄하고 안쪽에서는 어두움이라는 겁니다. 그게 감옥의 특징이라는 말이죠. 그 대표적인 게 성전인데, 그래서 성전의 바깥은 장엄하고, 안쪽은 '꼼짝마' 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초월적인 권위가 압도하듯이,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관계와 구조를 건축으로 구성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감옥시설' 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런 감옥에 누가 가두어져야 합니까?

자기가 선악원리에 의해서 스스로 판정한, 즉 "이것은 옳다, 이것은 그르다" 라고 하면서 남을 판단했던, 즉 간수도 아닌 주제에 자기가 간수 노릇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자기가 감옥에 집어넣어지게 될 때,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리는 기꺼이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죠. 죄인이니까 말이죠.

* 인간은, 한 순간도 감옥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 !!

그러니까 죄가 무엇이냐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회개해도 죄는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셔서 "너는 감옥에서 출생했고, 감옥에서 성장했고, 감옥에서 결혼했고, 감옥에서 아파트를 샀고 차를 샀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요양병원이라는 감옥에 갔다" 라고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일대기를 보면 어느 한 순간도 감옥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말이죠. 언제 우리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하는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그런 말씀이 나오니 나도 해야지" 라고 하는 게 아니고, '묘하게' 그런 순간이 온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다리에 힘이 빠져서 넘어지면서 쇠기둥에 부딪쳐봐야, 그렇게 제대로 한번 죽어봐야, 다시 산다는 것이 그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이죠. 자기가 행할 수 없는 묘한 체험을 주께서 가져다주셨는데,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에게 그런 체험을 자꾸 하라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제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여러분 정도의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면, 적어도 7차례나 8차례 이상으로 죽을 뻔한 경험들이 있었을 것이란 말이죠. 4살 때 홍역을 앓아서 죽을 뻔했을 수도 있고, 20살에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아마 다들 그런 경험이 있었을 것인데,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그만 잊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이 주신 묘한 것을 다들 잊어버리고, 또 다시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 장엄한 건물은 악마의 솜씨 !!

이게 무엇인고 하니, 감옥의 구조가 모든 것을 압도한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 세계를 압도하는 힘은 과연 누구일까? 악마인데, 그렇다면 악마가 건물을 짓는다고 하면 어떻게 짓겠습니까? 당연히 장엄하게 짓는다는 겁니다.

큰 이슬람 사원, 큰 예배당, 그리고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에 있는 '부르즈 할리파' 인데, 163층(828m)으로 우리나라의 삼성물산이 지었다는 말이죠. 두 번째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메르데카118' 인데, 118층(678m)으로, 역시 삼성물산이 지었다는 겁니다.

세 번째가 중국 상하이의 '상하이타워'로서, 128층(6328m)인데, 남들에게 기죽지 않으려고 짓는다는 말이죠. 우리나라는 123층(554m)의 '롯데월드' 인데, 세계 7위라는 겁니다. 거기에서 내려다보면, 인간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 장엄함 인간의 이상, 마음속의 이상을 그대로 표출해서 지은 건물이 바로 바벨탑인데, 즉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라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어떻습니까?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라는 것인데, 정말 별 볼일이 없는 쪽으로 가시는데, 그러니 어떤 제자도 주님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는 말이죠.

그분이 바로 창조주인데, 그 창조주의 아픔, 창조주의 슬픔, 창조주의 피, 창조주의 고통이 섞이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새 창조의 천국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제가 감히 장담한다는 말이죠.

* 우리 동네가 아니네 !!

그래서 새 창조된 사람들은 어떠한고 하니, 성령을 받아서 새로 창조된 사람은 늘 느끼는 것이 이것인데, 그것은 "우리 동네가 아니네" 라는 겁니다. 말을 해보니깐 같은 반 친구가 아니라는 말이죠. 교회에서 이야기하고 동창회에 가서 이야기할 때도 자기 동네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저를 보고 "목사님,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서 지리산으로 가서 초막을 짓고 기도하면서 살까요?" 라고 할 수도 있는데, 물론 겉으로 화난 표정을 짓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죠.

저는 그런 사람한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포항제철이 이단이라고 해서 사표를 내야하느냐?" 라는 겁니다. 포항제철이 공기업인데, 월급이 대단하다는 말이죠. 하지만 자기가 다니는 직장이 이단이라고 해서, 십자가를 전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표를 내야 하느냐는 것인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 제가 아들 단속을 잘 하겠습니다 !!

그 어떤 여전도사님이 아들과 같은 교회에 다니는데, 그 엄마는 그 교회의 전도사라는 겁니다. 그 아들이 교회의 청년회에 소속이 되어있는데, 청년회에서 자기 교회의 가르침이 이단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 엄마가 참으로 난처한데, 그냥 교인이 아니고 교회에서 월급을 받는 입장이라는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자기 아들을 다른 교회에 다니게 하면, 교인들이 "전도사가 되어서 자기 아들을 다른 교회에 다니게 하면 되나?" 라고 나올 것이 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들을 할 수 없이 데리고 나오는데, 그런 딜레마에 빠졌다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답변을 해드렸는데, "제가 아들에게 잘 이야기해서 단속을 잘 하겠습니다" 라는 게 저의 답변이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교회의 집사님이라면 그 교회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다 따져서, "이렇게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교회입니다. 그러니 나오세요" 라고 하겠는데 말이죠.

그런데 지금 그분에게 그 교회는 포항제철과도 같다는 겁니다. 그 교회가 아니면 그 여전도사님은 자기 아들과 같이 밥을 먹고 살아갈 수는 방법이 없다는 말이죠. 그것은 여러분의 직장도 마찬가지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 아하, 이게 망하는 노선이구나 !!

그러니까 제가 저 끝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이것인데, "나와라, 나오지 말라'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고, 직장을 다니더라도 자기 자신이 중첩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충분히 열심히 다니시라는 겁니다.

제가 생활비를 주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제가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어서 나오세요" 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런 말을 어떻게 해요? 제가 무슨 돈이 있어서 책임감도 없이 그런 말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판정을 내리는 그 판정 자체가, 그런 간수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아무 것도 모르면서 죄인인 주제에 "이게 옳다, 그르다" 라고 함부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모두가 감옥에 갇혀있는 간수들이라는 것인데, 세상 영광을 바라보면서 몸 건강하고 돈도 잘 벌고 가정이 화목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노선이 무슨 노선이라는 겁니까? 아담에서 나오는 노선이라는 말이죠.

* 다른 노선이 마중을 나와서 !!

그러면 성령을 받으면. 이 노선이 아닌 다른 노선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화로다, 지금 내가 있는 이 노선이 이게 망하는 노선이구나" 라고 하면서, 그런데 그 노선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돈을 벌어야 밥이라도 먹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요양병원에서 요양사로 일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 "이 요양병원에는 복음이 없어. 너무나 세상적이다" 라고 하면서 뛰쳐나올 수 있습니까? 그렇게 뛰쳐나와서 다른 직장에 가면 어디 복음이 있습니까? 그런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 나는 매일같이 간수짓을 하고 있구나 !!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이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끊임없이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그렇게 선과 악을 논하고 있는 그 간수짓을 멈추라는 것이 아니고, 그게 아니고, "이렇게 내가 내 나름대로 나의 수치를 감추려는 묘한 묘책을 내가 만들어내는구나" 라는 것을 인정하자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내 잘난 맛에 살아가고 있구나. 내가 무엇을 다 알고 있는 척, 더 똑똑한 척, 그래서 남들보다 뛰어난 척을 하고 있는데,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나의 수치를 더욱 더 감추기 위한 나의 발작이구나" 라고, 그렇게 정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딸꾹질이 나면 자기가 스스로 어떻게 그것을 멈출 수 있습니까? 없는데, 그런 것을 증상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우리는 매일같이 그러한 증상에 시달리고 있는데, 죽을 때까지 말이죠. 이것을 두고 경계선, 혹은 판단선이고 판정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인간에게는 그런 것이 있어서, 앞뒤로 계속 교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현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매일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 죄가 뭐냐 하면, 나름대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판정을 내리는 것인데, 자기 힘으로는 딸꾹질을 멈출 수가 없다는 겁니다.

* 고무줄 놀이 !!

끝으로 한 쉬운 예를 하나 들고 마치겠는데, 우리가 어릴 때 했던 놀이가 있는데, 그것이 고무줄 놀이라는 말이죠. 누가 고무줄 놀이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여자친구 둘이 이렇게 앉아 있는데, 고무줄 두 줄이 한 줄이라는 겁니다.

이 고무줄 놀이를 보면, 선은 하나인데 여기에 갔다가 저기에 갔다가, 마치 자기가 선과 악의 주인공처럼 움직인다는 말이죠. 마귀처럼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때 부르는 노래가 무엇입니까? "금강산 찾아가자. 1만 2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금강산은 신기하기지 않은데, 무엇이 신기합니까? 그런 것은 뻔히 다 아는 것인데, 전혀 묘하지 않다는 겁니다. 정작 묘한 것은 따로 있는데, 묘한 것은 한번 죽어야 "나 자체가 참 묘하다"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얼마나 묘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악마는 우리를 조정하는데, "네가 교회에서 복음을 들었지? 그러면 복음에 대해서 네가 판정해봐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악마는 또 다시 우리에게 "네가 복음인지 아닌지를 판정해서, 그 판정된 것으로 구원을 받아라" 라고, 우리를 매일같이 속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그런 것은 없다" 라고 하면 곤란하고, 그런 것이 반드시 생기게 되어있는데, 그것이 바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것을 가로막는, 우리 자신의 남은 육신이고 그 본성인 줄 알면 된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말릴 없고 고칠 수 없는 고질병, 이제는 그 고질병을 고칠 생각을 하지 말고, 그게 죄로 드러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묘한 십자가의 능력인 것을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그 어떤 경우에라도 감사가 막히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11,25 오후 3시에 마침.

먹고 사는 것이 아무리 중요해도, 주의 말씀이 기억나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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