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겨울수련회 다니엘 강해 제 6강 : 70이레 – 이 근호 목사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이번 다니엘에서 제일 난해한 대목에 도착했습니다. 시간의 해상도(解像度)에 관한 겁니다. 사진에만 해상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에도 해상도가 있어서 시간 자체를 더 세밀화하는 그 과정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번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이루어진 절차가 수평적인 시간 속에서 어떻게 내용이 깊어지고 진보가 일어나고 중첩이 일어나는가?
이미 예언된 것을 조금씩 조금씩 실현해 가면서 예언은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 7장에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이야기가 나오는데 8장에 보면 거기에 대해서 또 달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수양과 염소로 나뉘어서 이야기가 나옵니다.
7장에 나오는 네 짐승, 사자, 곰, 표범, 그리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괴물, 앞에 있는 짐승들을 다 집어삼키니까 앞에 있는 짐승도 괴물이어서 괴물들을 집어삼킨 그 괴물은 이름을 붙일 수가 없을 정도로 그 앞의 괴물들의 요소가 다 포함이 되어 있는 겁니다. 마지막 짐승이 로마인데 이것은 경제 속에 살아 있는 짐승의 마음, 이런 식으로 정리가 가능합니다.
경제활동 속에 살아 있는 짐승의 마음, 태어나서부터 출렁이는 경제판에 끼어들게 되는 인간들의 모습, 원하든 원치 않든 생존의 투쟁 자리에 놓이게 됩니다. 이유 없는 전쟁, 이유 없는 싸움, 그리고 지기 싫어하는 힘의 의지의 다툼, 칼과 활이나 총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싸우는 현실의 경쟁 마당, 자본주의 시장.
앞에 있는 소소한 싸움, 칼 들고 설치면서 성을 차지하는 이러한 싸움은 차라리 순진하고 소박하다고 볼 수 있어요.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얻느냐가 아닙니다. 여전히 정신의 안정을 얻을 수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많은 돈과 권력으로도 정신적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어떠한 기회도 잡지를 못합니다. 정신적 안정을 못 얻으면 우리 자아는 늘 해리되고 해체되지요. 종잡을 수 없어요.
내가 불안하니까 안정을 취하기 위해서 뭐라도 하려고 하고 온갖 것에 다 도전하는 거예요. 불안정을 메우기 위해서 더욱더 불안정한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는 처참한 현실 미래의 시간에 자꾸만 기대를 걸면서 뭔가 내일은 잘될 거야, 1년 후에는 잘될 거야, 앞으로는 잘풀릴 거야, 하는 맹목적인 희망에만 매달려 살아가는 한심스러운 현실의 모습, 이것이 각본대로 다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네 짐승 이야기 나오고, 8장에 보면 거기에 수양과 염소가 나오지요. 수양은 메대바사고 염소는 알렉산더 이후의 헬라제국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게 8장 20, 21절에 나옵니다. “네가 본바 두 뿔 가진 수양은 곧 메대와 바사 왕들이요 털이 많은 수염소는 곧 헬라 왕이요 두 눈 사이에 있는 큰 뿔은 곧 그 첫째 왕이요” 이렇게 죽 나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에는 시간의 해상도, 시간 속에 무엇이 뚜렷하게 있는가? 9장에 들어가 봅시다. 다니엘은 이제야 알았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70년 후에 다시 돌아온다는 그 70년의 의미를 알았다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미리 예언했던 그 70년의 의미를 나는 알게 되었다.
예레미야는 다니엘의 선배예요. 릴레이하면서 후배가 선배의 예언의 바통을 받고 다시 트랙을 달리고, 또 다른 선지자가 이어받고 계속 달려서 어디까지 달리는가? 세상 끝 날이 이를 때까지 그 예언이라는 바통은 계속 이어지고 이어지는 거지요. 세상 끝 날이 이를 때까지.
그러면 오늘날 성도는 바통을 누구에게 이어주는가? 자식한테 복음을 전해서 이어주는가? 아닙니다. 오늘날 성도는요, 바통을 이을 필요가 없어요. 그냥 갖고 노는 거지요. 세 바퀴 네 바퀴 돌면서. 끝이 매일 같이 우리에게 주어져요, 매일 같이. 그러면 자체적으로 반복적으로 복음의 활성화가 이어지는 겁니다. 범사에 감사가 이어지는 현상이 일어나지요.
왜냐하면 시간은 끝났기 때문에. 예수님 십자가로서 모든 시간은 이제 끝입니다. 그러면 남은 시간은 뭐냐? 끝의 슬라이스, 끝의 반복이지요. 끝의 반복이에요. 끝의 반복이라면 시간이 그냥 없어진다는 뜻인가? 아니지요. 완전한 해상도를 갖추었던 시간이 반복되는 것, 그것을 가지고 묵시의 세계라고 합니다.
묵시의 세계에 대해 신약성경에는 여러 곳에 많이 나와 있는데 그중에서 제일 확실하게 알려주는 것이 골로새서 3장 3절에 나오지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나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살았다는 이야기에요, 죽었다는 이야기에요?
네가 살았다, 죽었다가 아니라 네가 두 세계에 걸쳐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쪽세계에서는 죽었고 저쪽 세계에서는 살았다. 모가지를 쭉 빼면 그 모가지 있는 곳에서는 너는 살았고, 하체가 땅에 있다면 그 땅에서 너는 죽었고. 너의 죽음이 확실하면 확실할수록 비례해서 나의 살았음이 더 감사가 되고 기쁨이 되는 그 구조가 종말의 구조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살았고, 그리고 동시에 이 땅에서 예수님은 이미 죽었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반복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살았음을 반복하는 이 땅의 방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도 똑같은 처지에 있지요. 특히 에베소서 2장 6절의 경우에는 사도바울이 아주 대담해요.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우리는 이미 살아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느니라.
그 자리에 어떤 자리인데요? 어디에 앉았는데요? 이미 너희 신분은 하나님 우편에 주님과 함께 앉아 있는 신분이니라. 대범한 발언을 하고 있어요. ‘논리를 이야기해야 우리가 차근차근 익힐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푹 들어오면 어떻게 믿으라는 말인가?’라고 할 때 “너희가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너희에게 확인시켜 준다는 거예요. 확인시켜 주는 거예요.
어떻게 확인시키는가? 이 땅에서 어떤 신분도 제거될 신분인 것을, 목사가 되었든, 집사가 되었든, 장로가 되었든 이것은 없어져도 그만인 신분을 우리에게 제공함으로써 이 신분과 족히 비교될 수 없는, 이미 성도라는 신분의 본류가, 그 원천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는 겁니다. 하늘에 있는 거예요.
하늘에 있으면서 이 지상에서는 집사, 장로, 권사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뭐든지 이 땅에서 실수 안 하려고, 실패 안 하려고 할 이유가 없어요. 원래 이 땅은 실패를 가중시키고 실수를 더욱더 많이 하도록 유도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실수하고 실패할 때마다 오히려 입에서 찬양이 막 나와야 하지요, 기쁨이. “주여, 또다시 실패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그것도 실패냐? 아직 남아있는 실패가 한둘이 아니다. 안심하지 마. 더 큰 실패를 하게 해줄 테니까.” 이런 식으로요.
그래서 ‘70년 만에 돌아온다’ 할 때 그 의미를 알았다는 말은, 선배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역대하 36:21), 다니엘 9장 2절에 나오는 대로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년 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해서 ‘70년 만에 마친다.’라고 한 그것,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그 70년은 하나님의 꿈에 의해서 ‘70 이레’가 현실이 흐르는 이 시간 속에서는 ‘70년’으로 표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70 이레가 이 땅에서는 70년으로 예레미야에게 일찍 전달되었다는 거예요. 전달받은 사람은 ‘70년은 70년’이라고 받았는데 그게 ‘70년’이 아니고 ‘70 이레’였어요. 그러면 70년에서 70 이레로 바뀌려면 꿈의 침투, 시간이 없는, 모든 것이 종결, 완료된 그 꿈의 침투가 시간을 사용할 때는 70년을 70 이레로 사용한다는 그 내용이 여기에 들어가게 되는 거지요.
사람들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70 이레, 이레는 7년이니까 70 × 7 = 490년, 이런 식으로 해석해요. 주석마다 이런 해석을 하는데 이 해석자체가 무엇의 침투가 없는 거예요? 바로 꿈의 침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묵시로 해석해야 할 것을 시간으로 해석하니까 490년으로 늘어난 것 뿐이잖아요. 이런 식으로는 해석이 안되지요.
다니엘 12장에 나오는 1,290일이라든지 1,335일, 이러한 것을 해석할 때 이미 70이레 안에서 파급된 것, 사진의 해상도가 아니고 시간의 해상도에 의해서 또렷하게 보여준 묵시의 의미가 담긴 시간 해석을 다니엘은 예언을 했고 그 다니엘의 예언을 받아낸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이 받아서 ‘3일 반’ 만에 십자가에 완성을 해버렸지요. ‘3일 반’ 만에, 70 이레를 ‘3일 반’에 다 끝냈어요.
끝내고 난 뒤에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것이 ‘3년 반’이 되어버렸어요. 3년 반. 그러니까 도대체 성경이 뭘 분명하게 이야기를 해야지 3일 반인지 3년 반인지 42달인지, 1,290일인지, 1,335일인지, 70년인지 490년인지 분명히 이야기 해야 하는데 왜 분명하지 않은가, 라고 하면 성경은 이렇게 합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벧후 3:8)다고.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이 말은 뭐냐? 시간 계산 하지 말라는 거예요. 예수님 부활하고 40일 동안 계실 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
즉 “언제 회복되는 겁니까?” 했을 때 주님께서 “너 나와! 너 뭐라고 질문했어? 언~제? 언~제? 아직도 네가 시간에 매여 있어? 시간 계산해서, 스케줄 따져서 뭐 할 건데? 미리 대비하려고? 달력에 체크해 놓으려고? 네가 제대 얼마 안 남은 군인이야? 뭘 체크해?” ‘언제’가 아니라 무슨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되면 그 사건 안에 이스라엘의 모든 회복은 들어 있다는 겁니다.
시간을 초월한 사건, 그 사건 속에 들어가는 것,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는 “나는 십자가사건 안에 있다.”라고 사도바울은 간단하게 이야기해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나는 십자가 안에 있고 세상은 십자가사건 밖에 있다.’ 십자가 안에 있으니까 이것은 거룩이고 십자가 밖에 있으니까 더럽고, 그렇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인간이 뭘 했느냐가 아니라 우리에게 무슨 사건이 주어졌고, 그 사건 안에 포함되어 있느냐를 복음으로서 사도바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신약에 있는 이 간결한 문장이 다니엘에서는 그 시대상에 맞게 70 이레라는 모습으로 길게 나와 있어서 우리에게 해석을 지금 강요하고 있습니다. 70년 만에 돌아온다, 라는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 나옵니다. 그 70년이 뭐냐?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나오면 그게 돌아가는 것이 된다는 거예요.
그냥 70년 만에 약속의 땅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예루살렘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그 사건이 일어난 것이 곧 70년 만에 예루살렘에 돌아간 것이 되는 그런 상황이 된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에서 무슨 사건이 있는가?
다니엘 9장 24, 25절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영원히 속함)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사건이 터지고, 또 사건이 있을 것이고, 그 사건 다음에 또 하나의 사건이 있고, 합해서 70 이레라는 세 개의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이 끝나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가? 모든 날이 끝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방금 훅 지나갔는데 눈치 빠른 사람은 뭘 찾아낼 수 있느냐?
예루살렘에서 사건이 일어날 때 예루살렘과 무엇의 만남이냐? ( )와의 만남이다. ‘예루살렘 + (기름 부음을 입은자)’ 이 만남으로써 모든 일은 끝납니다. 예루살렘과 기름 부음을 입은 자와의 만남에서 끝나는 거예요. 모든 죄용서, 영원한 거룩, 영생, 천국, 기름 부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일을 마치면 모든 것의 토대가 완전하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의 그 일이 일어나도 안 믿으면 우리한테는 헛방이 되지 않느냐?’ 이렇게 걱정을 하는데, 이렇게 일이 벌어지게 되면, 기름 부음의 확장에 의해서, 모든 과업을 완수한 기름 부음이 그대로 우리에게 택배로 전달됩니다. 그걸 새벽 탁송이라, 합니다. 예상도 안 했는데 새벽에 문 앞에 선물이 도달했어요. 뜯어보니까 모든 과업을 다 완수한 기름 부음의 예루살렘이 너희에게 도달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있는데 왜 저에게 주십니까?” 그게 뭐냐? 기름부음이 하시는 일 속에 자기 백성에게 찾아가는 일까지 마무리 짓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기름 부음뿐만 아니고 예수님처럼 기름 부음 받은 자가 생기는 것까지 작업이 전달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기름부음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시편 2편을 보겠습니다. 1-6절까지 보겠습니다. 1절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어? 여기 민족들과 열방이 나오지요. 우리가 알기는 민족들과 열방 자기들끼리 싸우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자기들끼리 입에 양갈비 물고, 무조건 차지하고 무조건 정복하고 내 것으로 만들고, 이러한 괴수, 짐승의 본심을 감추지 않고 설치는 이것이 민족들인데 여기 보니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지향성, orientation,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그 지향성이 어디까지 가느냐?
2-6절에, “세상의 군왕들이…” 여기 대한민국 대통령도 포함됩니다.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요게 하나님의 스케줄이고 계획입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신다는 것은 ‘이제는 나에게 왕이 생겼습니다.’라는 뜻이에요. “주 예수를 믿습니다.” 하는 것은 ‘저의 모든 것을 책임질 왕이십니다.’라는 뜻이에요.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고 나 대신 다른 분이 책임지는데 그분이 우리 왕이시고, 그 왕은 하늘에서 내리신 왕이시고, 그 안에는 하나님이 선택한 기름 부음이 있고, 세상의 모든 군왕은 그 관계, 구원받는 그 관계를 끊고자 그동안 모든 활동을 해오고 있었다는 내용도 같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새벽탁송, 택배안에 그 내용이 다 들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다니엘을 보면서 그 특징이 뭐냐? 내가 뭘 할까, 내가 뭘 안 해야 하는가, 이게 다니엘서에 일체 없습니다. 내가 뭘 지키면 됩니까, 뭐에 신경 쓰면 됩니까, 가 일체 없어요.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막 근질근질하다. 노래하고 싶어서.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내 안에 뭘 틀어라? 둥지를 틀어라. 내 안에 둥지를 틀어라.
주님 기름 부음 안에 둥지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의 군왕들은 자기가 뭘 안 하고, 뭘 끊고, 뭘 조심하고,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서 천국 가려고 애쓸 때 그 사람은 어떻게 되겠어요? 그 기름 부음의 문밖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만 두드리고 있다는 말이지요. “주께서 말씀하셨잖아요.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백날 두드려 봐라. 천국 문이 너를 가로막을 것이다.”
문밖에 있는 그 사람들을 두고 뭐라고 하느냐? 그것을 “문밖에 있는 그대”라고 해요.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오늘은 거기서 울지만 그렇게 버려둔 내 마음속에 어떻게 사랑이 남아요. 한 번 떠난 사랑은 내 마음엔 없어요. 추억도 내겐 없어요.” 이거 누가 이야기했는가? 박강성이 이야기했어요. 다른 나라에서 온 분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이 노래 가사에 나옵니다.
“빠빠바빰~” 간주 나오고 이제 와서 “문 열어주세요.” 하는데 “이제 와서 너희에게 줄 사랑은 남아 있지 않다.” 그 이야기 창세기에서 누가 이야기했어요. 이삭 앞에서 애걸복걸했던 맏이 에서가 “혹시 내게 떨어질 콩고물은 없습니까?” “없다!” 에서는 ‘문밖에 있는 그대’가 되었어요. ‘문밖에 있는 그대’는 찬송가에는 없고 유튜브에 나옵니다. 그 가사를 보세요. ‘그때는 싫다고 떠나놓고는 이제 와서 울고불고. 너에게 줄 남은 사랑은 없다.’
자, 그렇다면 시편 2장 9절,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물으면 12절 “그 아들에게” 뭐하라 했습니까?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그런데 사실은 현실적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발에 입맞춘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에 입맞춘 거지요.
이게 놀라운 거예요. “세숫대야 가져와!” “스승님, 세숫대야는 왜?” “자, 줄 서. 한 사람씩 내 앞으로 와. 내가 발 씻겨줄게.”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을 왜 스승님이 하십니까?” “어서 빨 씻자. 내가 다 씻어줄 거야.” 뭐 백석대학교입니까? 백석대학교에서는 정기적으로 그렇게 한답니다. 교수가 제자들 발을 씻어준답니다. 하여튼 별짓을 다 해요. 돈이 남아도는 모양이라. 광고를 그렇게 내고.
베드로가 주책이지만 우리 속마음을 그대로 소개해 주고 있어서 베드로에게 참 고마워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 “뭐 뭐?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그렇다면, 이 발을 씻어서 깨끗하게 된다면 제 발만 아니라 몸 전체를 다 씻어주옵소서.” 이걸 세자로 ‘싸가지’라고 합니다. 하여튼 싸가지가 없어요. 한번 봉사해 주니 아예 잡아먹으려고 덤비네요.
주님의 말씀이 놀랍습니다. 발을 씻었다는 그 뜻은 이미 다 씻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오늘날 주님께서는 우리의 발만 씻어줘요. 누구는 손가락만 씻어주고요. 어떤 사람은 귀만 씻어주면서, 이걸 반복하면서 내 쪽에서 너희 죄를 다 씻었다는 것, 순간순간 우리 죄에 대해서 주께서는 용서를 이야기하는데 일부를 통해서 이미 전체가 완료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의 구원과 너의 현실에 대해서 네가 손대지 말라. 이것은 내 담당이지 네 담당이 아니다.” 그 말이지요. 시편 2편에 대해서 여러분이 이제 감잡았겠지만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 이미 정해져 있지요. 이것도 다윗의 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이 점점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중복적으로 더 뚜렷하게 그 해상도를 높여가는 겁니다, 시간 속에서. 그게 최종적으로 다니엘서에서 ‘70 이레’에요.
이제부터 70 이레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미리 이야기 하지만 이 70이레가 너무너무 복잡해요. 복잡하지만 여러분에게 발만 씻어 드리겠습니다. 나머지는 저절로 다 알 수 있도록 발만 씻어 드리겠습니다. 70이레라고 해놓고 하나님께서 조각을 냈어요.
이렇게 쪼가리 내는 것은, 70이레가 위쪽 끝 지점을 향하여 묵시적으로 탑처럼 접근하는 것이니까 70이레를 옆으로 쪼가리 내는 것이 아니고 수직적으로 쪼가리를 내면 밑바닥 7이레가 역사에 가까운 쪽의 미래라면 제일 위는 1이레가 되는 겁니다. 7이레와 1이레 사이의 간격이 62이레가 돼요.
갈수록 뭐가 되겠어요? 갈수록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그러면 사건은 세 가지 사건이냐? 세 가지 사건은 맞는데 1 이레, 62 이레, 7 이레의 세 가지 사건은 아니고, 62 이레는 하나의 간격을 이야기하고 70을 채우기 위해서 하는 거고요, 이 1 이레가 1/2 이레와 1/2 이레로 나눠집니다.
이 이레도 7이잖아요. 7도 둘로 나눠지면 뭐가 됩니까? 3.5+3.5. 요한계시록의 ‘3년 반’이 여기서 나오게 되는 겁니다. 3년 반을 달로 계산하면 42달. 이게 어디서 일어나느냐? 7 이레와 62 이레와 1 이레, 다 합해서 70 이레가 일어나는 그 장소를 특정했습니다. 그 장소가 성전이에요. 성전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7 이레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재건할 것이다. 성전 재건하는 것. 어떤 성전? 부서지기 위해서, 무너지기 위해서 성전을 재건하는 거예요. 이 성전이 어떤 성전인가? 무너지는 성전. 무너지는 성전은 과거에 모든 이스라엘 역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필히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무너지는 성전을 지었다.
요즘 주일 낮 설교에서 히브리서를 하거든요. 히브리서는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간단하게 이걸 모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모형은 실체가 나타나게 되면 자기의 역할을 다 했기에 필히 무너지는 거예요. 모형이 무너졌다는 것은 드디어 실체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뜻입니다. 교회가 무너졌다, 그 말은 교회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내 육신이 죽었다는 그 말은 진짜 육신이 영광스럽게 나타나게 되었다 하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을 때 가짜는 가고 진짜 스데반 집사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 위치가 하나님 우편에 있었다는 사실이 나타나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스데반 집사가 그 이야기를 하잖아요.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
그러니까 돌 던진 그 사람들이 그냥 던진 것이 아니고 어떻게 했는가? 두 손으로 어떻게 했어요? 귀를 막았어요. 주파수가, 음파가 들리지 않도록 귀를 막았습니다.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행 7:57) 납득되는 말만 들어서 우리의 돌 던지는 결정이 옳다는 것을 견지하기 위해서 나는 너의 말을 듣지 않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스데반 집사 입장에서는 ‘돌 던지는 것이 나쁘다’가 아니라 돌 던지는 그것이 스케줄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도행전에 있어서 성령의 일은 십자가의 다양성을 사도들의 사건을 통해서 계속해서 이어서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이거든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당했던 그 고난의 유형이 사도들의 유형에 따라서 반복해서 이어지는 그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사도들의 모습을 통해서 죽었다가 살아났다, 사도 베드로에게서 죽었다가 살아났다, 사도바울에게 죽었다가 살아났다, 를 반복하고 나머지는 성도들이 그 시대에 죽었다가 살아났다, 를 반복함으로써 ‘다 이루었다’가 역사속에서 어떻게 퍼져 있다는 사실, 퍼지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보면 됩니다. 무너지는 성전은 모형이기 때문에 무너진다면 오늘날 우리의 모형은 뭡니까? 60개의 세포로 된 우리 자신이 모형입니다. 모형 너무 꾸미지 마세요. 이거 손대고 붙이고 올렸다 내렸다 하지 마세요. 백날 해봐야 중력을 못 이깁니다. 어쨌든 모형이니까 이 모형안에서 무엇이 또 모형이냐 하면, 시간 자체가 모형입니다.
70년 만에 돌아온다는 사실. ‘아, 이게 모형이구나, 모형’ 해 뜨고 해지는 그날부터 계산해서 창세기 1장 16절에 나오는 해와 달과 별을 가지고 우주적 달력을 만든 그 자체가, 이 우주 자체가, 이 자연 세계 자체가 모형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스크린 역할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 영화관에서 스크린 안을 보지 스크린 뒤에 뭐가 있는가를 봅니까?
저는 어릴 라디오 뒤에 뭐가 있는지가 그렇게도 궁금했어요. 자꾸 소리가 나서. 없어요. 모형이 모형을 파악하니까 모형 뒤로 못 나가는 겁니다. 우리 자체가 모형으로서 관찰자기 때문에 기껏 마주 서서 관찰하는 대상이 역시 모형에 국한되는 거예요. 모형 아닌 것은 분석할 권한 자체가, 그런 실력 자체가 우리한테 없는 겁니다.
그래서 시간 자체가 모형이 되는 거예요. 그 70년이. 모형이다. 모형이라면 무너지는 것이 필연적 절차여야 한다. 무너지는 성전을 위하여 성전을 무너뜨리는 사건이 필요하다. 그래서 7 이레 동안 짓고, 62 이레 동안 그것이 다 서서히 무너지면서 1 이레에 도달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다니엘의 계산에 의하면 어느 것이 완전히 무시되어야 하느냐?
그게 바로 마카비 혁명입니다.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외경에 나오는 마카비 혁명. 천주교나 구약학자, 신약학자라는 사람들이 마카비 혁명에 의미를 둬요. 그런 역사가 있었기에 하나님이 예언은 살아 있다고. 아닙니다. 마카비 혁명은 예언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포함되는 것이 아니에요.
혁명이 있다, 없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역사에 해당되는 것은 이래도 시답지 않고 저래도 시답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하나님의 예언이 중요하지 역사적 구성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천주교에 대해서 이야기했잖아요. 천주교 역사와 전통, 그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아요. 교회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거기에 무슨 구원의 능력이 있어요?
“이것은 내 살이다.” 빵 먹이고, 카스테라 납작한 것 먹이고, 포도주 먹이면서 “내 피다.” 하는 그런 것들. 맘속으로 이런 생각이 수없이 올라와요. 저 포도주, 술값이나 확 올렸으면 좋겠다. 왜 쓸데없이 그걸 주느냐는 겁니다. 그게 뭐예요? 그거 왜 줍니까? 저절로 무너지게 되어 있는 스케줄은 무너져야 하지요. 지었잖아요?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성전 무너지면서 마지막 무너지는 성전에, 기름 부은 자가 여기에 도착합니다.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짐승의 시간 아래서 막 달려요. 멋도 모르고 달려요. 자기들끼리 전쟁한다고, 정복욕에 빠져서. 정신도 없어요. 뭐가 탈이 났는지 관계없이 그냥 무조건 달리는데 그렇게 달리던 와중에 성전의 지성소를 건드리는 그 시점에 타이밍 맞춰서 하나님께 아들을 절벽에서 미는 거예요.
물론 여느 유-투버는 아니지만, 하나, 둘, 지금! 하고 밀어버리면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어디서 만납니까? 성전에서 만나서 경상도 말로 디비 버리지요. 성전을 디비 버립니다. “뭐야 이거? 이거 뭐야?” “성전인데요?” “몇 년 동안 지었는데?” “46년!” “딱 3일 만에 다 짓는다.” 하니까 ‘이게 무슨 소리인지?’(요 2:20)
점점 더 묵시에 가까울수록 인간이 통하던 언어가 여기서는 통하지를 않는 거예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인간의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해요. 묵시에 속하기 때문에, 70 이레에 속하기 때문에 이것은 남이 접근할 수 없는 사건에 속하기 때문에. 이 사건은 주님이 독보적으로 활동해야 할 사건이기 때문에 열두 제자 모조리 전부 다 그 사건에서 어떻게 되겠어요?
마땅히 배제당해야 해요. 목자를 치니 양들이 어떻게 돼요? 흩어지는 겁니다(막 14:27). 이사야 53장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주님께서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홀로 십자가 집니다. 홀로 십자가 지면서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죽어 가면서 뭡니까?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상당히 역설적이에요. 70 이레를 다 이룬 거예요. 한 이레를 반으로 나눴는데 그 반으로 나눈 내용에 대해서 다니엘 9장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26절에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이것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에피파네스의 뜻은 뭐냐? 신이 현현(顯現)했다. 성육신했다는 뜻이에요.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이게 무슨 뜻이냐? 육적인 전쟁이 드디어 기름 부은 자와 만남으로서 성격이 바뀌어요. 영적 전쟁으로 성격이 바뀌는 그것이 남아 있는 ‘반 이레’라는 겁니다. 그게 ‘반 이레’에요. 영적 전쟁. 이렇게 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요? 요한계시록 11장을 보겠습니다.
2-5절에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그다음에 몇 달입니까?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3년 반입니다)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이것은 뭐냐? 성전 안의 내용물이 바깥으로 튀어나온 것을 말합니다. ‘성전 안의 내용물이 두 촛대인데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려 하면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 이렇게 보면 두 증인이 이길 것 같은데 그 뒤의 내용을 보면 두 증인이 이기지 않아요. 죽습니다. 8절에,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 영적 전쟁이 벌어지게 된 거예요.
어디를 관통하면 영적 전쟁이 되느냐? 그전까지는 역사 속에서 성전이 무너지지만 한 이레에 들어가면 육적 전쟁이 영적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것은 기름 부은 자의 존재와 관련된 사건이 일어나서 그 모든 전쟁의 성격도 영적 전쟁의 일부로서 흡수 통합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전체가 몇 이레라고요? 이게 ‘70 이레’에요.
예레미야가 예언한 ‘70년 만에 돌아온다.’라는 그 말은 ‘70년만 지나면 솔로몬 성전에서 제사하던 그 일을 우리는 다시 반복할 수 있다.’라는 것이 그 전까지의 이해였어요. 다니엘도 오해했고 사람들이 오해하면서 그때를 기다렸지요.
BC 536년에 시작해서 중단되었다가 BC 520년에 재개해서 BC 516년에 성전을 다 짓습니다. 70년 만에 돌아와서 짓는데 고레스가 칙령을 내리고 다리오 왕 때 다 짓게 되어 있어요. 에스라 느헤미야에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에스라와 느헤미야도 그렇고 뭘 모르느냐 하면, 이 성전을 왜 짓는지를 몰라요.
이방 나라에서 이스라엘의 성전을 지으라고 왜 지원까지 해주고, 재료는 물론이고 감독까지 다 지원해 주는데 줘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지요. 그들은 오해했어요. ‘옛날 이스라엘처럼 살려고 돌아가는구나.’ 그렇게 오해했습니다. 시간의 흐름은, 시간은 비가역적이에요. 다시 뒤로 갈 수가 없습니다. 없어요.
시간은 계속 앞으로 진격하면서 함몰되어야 해요. 저주 앉아야 해요. 없어져야 해요. 시간의 끝 날이 되어야 거기서 영적 세계가 출현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을 지으면서도 성전 짓는 이유를 에스라 느헤미야는 오해해서 ‘성전을 지었으니 옛날처럼 살자. 그게 뭐냐? 율법대로 살면 되잖아. 옛날에는 율법을 위반했는데 이제는 우리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율법대로 바르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이게 에스라 느헤미야의 한계였고 다니엘은 그 한계를 넘어서 버렸어요.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다 이루시는 분이 따로 오시는 자기만의 노선을, 자기 선로를, KTX 선로를 하나님 본인이 깔아놓고 그 기차가 홀로 통과한다는 거예요. 홀로 모든 투쟁을 하십니다. 영적 전쟁을 주님 혼자 해요.
우리는 영적 전쟁을 못합니다. 무슨 재주가 있어야지요. 마귀도 못 알아보는데 무슨 영적 전쟁을 해요? 주께서 영적 전쟁을 해요. 그러면 우리는 빠지는가? 빠지는 게 아니고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지요. 주님이 하시는 영적 전쟁의 도구로 사용해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영적 전쟁의 일부로서 우리 일상의 삶을 살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 70 이레의 역할은 뭐냐? 그 역할은 한 마디로 죄의 깊이를 끝까지 체험하는 거예요. 죄의 깊이를. 어느 정도로 체험하느냐? 이게 참 중요한데요. 도대체 죄의 깊이를 어디까지 체험해야 되는가? 도저히, 도저히,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까지 체험해야 됩니다.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
이렇게 하면 우리는 상상합니다. 성폭행 사건? 토막살인 사건? 잔인하게 사람을 먹는다든지 이런 것? 또 뭐가 있을까, 하는데 도저히,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가 뭐냐? 인자를 거역하는 죄에요. 인자를 거역하는 죄, 마태복음 12장 32절에 나오는 죄.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여기서 인자를 거역하는 죄.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해도 용서를 받는다는 것. 야, 이게 복음이라면 이것은 교회에서 상품으로는 못 하지요. 예수 믿지 않고 예수께 대들어도 구원받는다. 무슨 그런 인간이 있어요? 있어요. 누구? 사도바울. 그러니까 도대체 우리가 경험해야 될 죄는 우리의 본성 자체가 주님을 싫어하고 거역한다는 그 점을 매일 느끼는, 그 깊이를 알게 하는 그 전쟁이 무슨 전쟁입니까? 영적 전쟁이에요, 영적 전쟁.
악마는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똑바로 살아. 바르게 살아야지. 성경 폼으로 있는 줄 아나? 지키라고 있는 거야.” 그렇게 할 때 거기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나는 이미 성경에 대한 위반자야. 나는 포행자고 나는 주님을 핍박하는 자야. 됐냐!”
“너는 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잠재력이 있어. 영광 돌릴 수 있어. 성경 말씀, 사도바울의 모든 말씀을 지킬 필요가 있는 거야.” 그러면 우리는 말합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숨기고 있는 우리의 악마적 본성을 폭로하는데 충분하게 우리에게 활용되고 있다. 됐냐! 말씀을 모를 때는 죄 아닌 줄 알았는데 말씀을 대하면서 다시 한 번 우리는 용서 받지 못할 사람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됐냐!”
마귀가 “재미 하나도 없어! 나 갈래, 집에 갈래.” “마귀야, 지옥이나 가라!” 얼마나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어떤 연민 같은 것, 우리 자신의 자세를 사수하려는 본능을 타고났어요. 타고났기 때문에,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정신분열증 환자가 무기를 챙기는 것은 공격용이 아니고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 자기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안 다치기 위해서 일본도를 수집하고 있는 거예요.
맞기 전에 먼저 선방 날린다는 태도지요.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 같아요. 다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 같은 이런 환각 같은 것. 이런 것은 좀 노골적이지만 모든 인간에게는 다 그런 것이 있어요. 말을 이렇게 했는데 그 말에 대해서 예민한 반응을 나타내요. 지금 내가 예민한 반응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방어에 굉장히 예민하게 대처하는 본능을 갖고 있거든요. 유기체 자체가, 모든 생물 유기체가 막, 세포막을 갖고 있지요. 그 막이 뭐냐? 그 막을 통해서 나라는 것이 발생되기 때문에 그래요. 생물체의 한계에요.
나라는 것이 막을 통해서 나와 나 아닌 것과 구분합니다. 원숭이든 코끼리든 인간도 마찬가지고 그게 형성되어서 그런 본능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도저히, 도저히 죄 안 짓고는 못 삽니다. 매일 죄 아닌 것이 하나도 없어요. 지금 시계 보면서 정확하게 시간 맞추려고 애쓰는 이것도 우리 죄의 한계입니다. 70 이레에 대해서 마저 저녁 식사하고 난 뒤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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