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겨울수련회 다니엘강해 제 7강 : 짐승의 역할 - 이 근호 목사
일곱 번째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일곱 번째 강의의 내용은 다니엘 7장 9절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 7장에서 짐승, 짐승, 짐승 이야기가 나오죠. 비현실적인 개념입니다. 짐승은 동물에 있는 것이지, 이렇게 마구 정치적으로 설쳐대는 것을 인간세계에서는 그걸 짐승으로 보지 않고 대단하고 위대한 인간세계 영웅으로 간주합니다. 큰 역할을 하고 큰 일을 해내고 있는 특출한 능력을 가진 영웅. 대표적으로 알렉산더 같은 경우에 그 사람을 짐승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짐승으로 나와 있고 9절부터 보면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모양부터가 다릅니다.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보좌가 있는데 그 분이 서 있는 위치가 어디냐? 위치가 13절에 나옵니다.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다니엘 7장을 보게 되면, 앞에는 짐승 나오고 뒤에는 하나님 나오고. 인간의 설 자리는 7장에서 빠져있습니다. 없습니다. 인간이 빠져있는데, 이 현실 속에서 인간이 빠져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 건가? 그것은 인간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인하여 짐승도 뭉개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사실도 뭉개버리고, 남아있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활발한 활동, 역사 그것만 이 역사 속에 현실로 부각되어서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거예요.
다니엘 7장의 내용은 인간을 빼는데, 그러나 실제로 우리 일상생활은 ‘인간뿐이다. 오로지 인간들의 세계뿐이다. 모든 역사는 인간들의 활동과 지혜가 동력이 되어서 지금까지 문화라는 이름으로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이끌어왔다.’ 학교에서 그렇게 배웁니다. 그래서 인간을 뺄 자리가 없는 거예요.
인간이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다니엘 7장을 해석한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인간의 입장에서 짐승을 이해하고 인간의 입장에서 인자되시는 하나님을 이해했을 때, 과연 그런 이해 속에서 인간이 빠질 수가 있느냐? 안 빠지죠. 빠질 수가 없어요. 인간이 먼저 있고 인간이 이해한 짐승 개념이 성립되어 있고 그다음에 인자 개념이 성립되어 있으니까 인간이 빠져버리는 경우는 없어요. 이런 경우, 저런 경우에도 인간은 안 빠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럼 해석에서 이제 문제가 되는 겁니다. 다니엘 주석 전체, 모든 성경 전체, 신학 전체에서 인간을 빼지 않고 인간의 이해를 기초로 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 반칙이죠. 이것은 잘못된 겁니다. 그것을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교회가 해왔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해석을 하면서 뺍시다. 뭘 빼는가? 인간이라는 것을 뺍시다. 뺄 때는 이유가 있어야 되죠. 함부로 나를 부인한다고 해서 빼면 안 되고, 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성립되어야 됩니다.
다니엘 7장에서 네 짐승이 나오는데 네 짐승에 있어서 인간을 지우는 방법은, ‘인간세계에서 인간 위에 짐승의 힘이 있었다. 그 힘에 인간은 종속되었다. 노예처럼 종속되었다. 그래서 역사의 주인공은 짐승이었지, 종속된 인간에게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할 수는 없다.’ 이렇게 설정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쭈구리가 되는 거죠.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이겨내지 못하고 또는 짐승의 활동에 주눅 들어서 이유도 없이 ‘꼼짝 마라’가 되는 거예요. 휩쓸리게 되죠. 그래서 이것을 ‘바람’ 또는 같은 말로 ‘날개’. 날개 달리고 바람 부는데 인류는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굴복당해 왔습니다. 바람과 날개의 공통점이 뭐겠습니까? 인간이 손댈 수 없는 힘의 생산이죠. ‘힘이 나오는 그 힘의 동력에 있어서 인간은 억눌릴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관점은 어디서 나온 관점이냐? 이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언약’ 또는 ‘꿈’에서 나왔습니다. 그럼 언약의 주인공이 누구냐? 그게 바로 다니엘 7장 9절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죠. 하나님인데 어떤 하나님이냐? 이 지상에 등장하게 되는, 지상에 실제로 등장하신 하나님. 그 이름을 뭐라고 합니까? 인자(人子). 남아있는 것은 인자와 무엇의 대결이 남아있어요? 짐승의 대결이 남아있기 때문에 인간은 빠집니다.
그럼 인간이 빠진다는 이런 사실, 인간이 빠진 것이 인류의 역사가 되는 이 사실은 이미 성경 어디에 예언되어 있는가? 창세기 3장 15절. 거기에 역사를 움직이는 두 개의 주체가 있어요. 하나는 여자의 후손, 또 하나는 뱀의 후손.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에서 인간은 양쪽 다에서 들러리. 양쪽 다 들러리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이쪽에 속하든지 저쪽에 속하든지 인간 자기가 주인 노릇하는 건 애초부터 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가 돼요. ‘인간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자격은 없다’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일반학교에서는 인간이 주인공이냐 이 말이죠. 인간이 왜 주인공이냐? 일반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잠시 증거하면 이렇습니다. 시작은 어디서부터 하는가? 가정, 가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혈육관계. 일반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아주 간단해요. 가족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다음에 시민사회가 되고 시민사회가 되어서 이게 국가를 이룬다. 끝. 이거죠, 뭐.
가정과 가족에서 출발해서 사회에 나가는데 도시가 발달하면 시민이죠. 시민사회를 이루고 그것이 국가를 형성한다. 그 국가 안에서 인간은 살다 죽는다. 이것은 너무나 마땅하고 이상할 게 하등 없습니다. 이 굴레 안에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자의 후손 나오고 뱀의 후손 나오고 사람은 여기에 주인공으로 나서지 못합니다.
자, 어느 쪽이 맞느냐? 어느 쪽이 옳은가? 어느 쪽이 옳은가 하는 것은 어떻게 판별하는가? 가정에서 시민으로 살면서 그걸 큰 단위로 묶었을 때, 하나의 큰 공동체로 묶었을 때 그것은 국가가 된다. 그럼 여기서 묻는 것은, 그래서? 그래서 무엇을 해결했는가? 이렇게 우리는 가정에 태어나서 하나의 직장인으로 살다가 국가 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나중에 요양병원에 가서 숨 거두면 죽는다. 그래서 어떤 게 해결됐는가? 아무것도 해결된 것 없어요. ‘죽는다’에요.
생일 축하합니다~하고 태어났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다. 그러면 죽음 뒤에는? 모르죠. 왜 태어났는지? 모르죠. 그건 몰라요. 결국 역사라 하는 것은 가정에서 시민사회로 국가로, 이런 무심하고도 지루한 굴레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반복하고 계속 반복해왔다는 겁니다. 조선시대, 고려시대 관계없이, 삼국시대 관계없이 어느 나라 관계없이 그걸 계속해서 그냥 반복한 겁니다. 반복이라 하는 것은 새로움이 없다는 것이고 새로움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닫혀있다는 겁니다. 아무 의미 없이 허망하게 살다 죽는 거예요. 아무것도 해결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세계에서 성경세계를 공격하겠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이런 식으로 세상을 설정해서 해결한 것은 뭐가 있느냐? 여자의 후손에서는 죽음 뒤에 영광스러운 부활을 해결하죠. 여자의 후손에서. 가정, 국가 이런 세계에서 따지죠. 죽었다가 부활한 사례가 있느냐? 있다. 뭐냐? 십자가에서 사흘 만에 빈 무덤 되어서 살아났다. 십자가에서 살아났다. 부활했다.
그럼 가정, 시민사회 국가 쪽에서 또 따지고 들어갑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서 그래서 뭐가 새롭게 밝혀졌는데? 어떤 게 밝혀졌는데? 인간들은 그동안 뱀의 후손, 악마에 매여 살았고 악마의 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여자의 후손들은 천국 가게 되고 뱀의 후손들은 지옥에 간다. 요한계시록 말씀대로 유황불, 지옥에 들어간다는 이 내용까지 포함해야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계획, 스케줄의 완료가 된다. 이렇게 정리가 되는 거예요.
“이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시렵니까?”라는 질문은 소용없는 질문이에요. 가정→시민사회→국가의 세계에서 태어나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세계를 거쳐서 천국을 가든지 지옥을 가든지 이렇게 되어 있죠. 가정으로부터 시작하는 이것은 현실세계이고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이라 하는데, 현실세계는 약속세계의 재료, 시료가 됩니다.
약속이 약속답기 위해서는 가정, 시민, 국가에 갇혀있는 이 세계가 필수적인 토대를 이루고 있으니까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 가정, 시민, 국가생활에 충실하면 되죠.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네 마음대로 사세요. 네 마음대로 사세요. 그냥 사는 거예요. 마귀도 우리가 어찌할 수 없고 주님도 어찌할 수 없고. 우리는 그저 우리의 제한된 가정, 시민사회, 국가 여기에 멈추고 있는 겁니다.
이 가정, 시민사회, 국가를 주장한 사람은 바로 헤겔(1770-1831)입니다. 헤겔이라는 독일 철학자가 이렇게 정리를 했어요. 그전에 많은 철학자가 해온 것을 본인이 정리한 거예요. 특히 이 국가라는 것을 마지막에 내세움으로써 국가 철학, 국가경영이 시민사회와 가정을 교육하는 거예요. 교육에 필요한 것은 뭐냐? 단일 언어. 단일 언어로 교육할 때 이것을 민족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무슨 민족? 단일민족. TV틀면 나오는 모든 내용은 우리 민족에 대해서, 우리 민족에 관한 이야기만 쫙 펼쳐지죠. 쫙 펼쳐져요. 우리는 그것을 평생 동안 늘 느끼면서 사는 겁니다. 단일민족의 특징은 가족과 시민사회, 국가 안에 법이 자리 잡고, 이 법은 어떤 법이냐 하면 상호 도와주기. 상호 배려하기.
우리는 단군의 자손으로서 네 자로 무슨 인간이라 합니까? 홍익인간이라 해요. 홍익인간. 이것 모르면 우리나라 시민권 없는 사람이에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홍익인간이죠. 두루 두루 이롭게 하지만 예외 되는 것이 북한은 빼놓고 러시아 빼놓고 하마스 빼놓고요.
주권국가가 되지 못한 상태를 테러집단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다른 나라가 우리 민족을 단일국가, 주권국가로 인정해서 UN에 가입시켜줬기 때문에 자부심을 갖고 이 세계에 기여할 수 있는 성숙된 시민의식을 키우자. 국민을 상대로 한 국어 교육을 하게 되면 점점 더 단일민족으로서 의식이 고취되는 겁니다.
이런 단일민족 의식이 함양되어야 배드민턴 금메달 따면 태극기 보며 눈물 흘리면서 “잘한다, 안세희.” 축구는 “손흥민 잘한다.” 우리의 자랑이에요. 임윤찬 피아노 치면 “저 임윤찬이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것은 이 시대의 영광이다.” 이러죠.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이런 것들이 벌써 형성되어 있는데 여기에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 짐승 이런 것은 전혀 끼어들 자리가 없죠. 끼어들 자리가 없단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덩달아 뱀의 후손의 실체, 곧 약속, 꿈이죠, 꿈을 저 역사 속에 삽입해서 일어나게 만드는 겁니다. 일어나게 만들죠. 사람이 주인공인데 사람이 주인공으로 설명했을 때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을 이 말씀과 약속을 통해서 알려주게 됩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여러분들이 강의 듣기에 제일 난해했던 내용이 무엇인가 제가 일방적으로 생각한다면 이거에요. 제가 일방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여러분들 생각과 다를 수 있지만, 네 번째 나라 로마를 제가 해석하기에는 자본주의 사회로 보거든요,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너무 비약되고 오버가 아니냐? 로마라는 지역이 있으니까 직접 로마를 중심으로 ‘로마는 이렇다. 그렇게 해서 로마는 괴물이다.’ 로마 역사가 있으니까 역사 속에서 그 요소를 따내야 이게 마땅한데요.
바벨론, 바벨론 역사, 메대 바사 역사, 알렉산드리아 전부다 역사, 역사, 고정된 자기 고유 영토가 있었단 말이죠. 교재 뒤에 보면 고정된 영토 나오죠. 로마도 고정된 영토가 있잖아요. 그러면 로마를 이야기할 때도 고정된 영토가 언제 망했고 어떻게 됐고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열 뿔이 뭐고 세 뿔이 뽑히고 한 뿔이 유난히 등장한다, 그 뿔이 적그리스도다.’ 할 때 어떤 역사적 사실을 두고 이야기해야 되는데 갑자기 자본주의가 등장해버렸단 말이죠. 왜 이런 돌발적이고 획기적이고 어떻게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이런 해석이 어째서 나오는가?
바로 로마의 생성과 더불어서 육적인,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그러한 말씀 성취가 보이지 않는 사건 위주로 넘어가게 되어버렸어요. 영적 세계죠. ‘시공간 자체가 이제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하나님의 시선으로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개념이 확대되었다.’라는 것을 근거로 해서 자본주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 속에 짐승 들어있다고 이렇게 판정내릴 수 있습니다.
그 근거를 제시하라면 요한계시록에 얼마든지 근거가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3장 17절에 보면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무엇의 이름입니까?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람의 모든 존재가 짐승에 의해서 이름 부여를 받는다. 부림을 받는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이름은 날아가버리고 인간 존재의 주도권은 날아가버리고 짐승이 인간에게 짐승의 이름을 부여해서 노예처럼 부리고 있는 상태에 돌입하는 것이 최후의 짐승의 내부 상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러한 요한계시록 13장 18절 해석, 도대체 그 해석으로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뭐냐?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옵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저쪽에 짐승의 숫자는 얼마에요? 666. 666 숫자가 어디서 나왔는가? 어떻게 해서 666이 나왔느냐? 왜 하필이면 육백육십육이냐? 그 근거는 어디서 나왔는가? 그 근거는 십사만 사천에서 나온 거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둘 다 만만치 않아요. 둘 다 인간을 철저하게 배제하기 위해서 인간이 사용하는 숫자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666, 144000에 대해서 나름 선입적인 개념을 갖고 있는 인간이 함부로 뛰어들 수 없는 숫자를 사용해버린 거예요. 뛰어들 수 없는. 해석하려면 해봐! 되는가.
어떻게 구원받은 사람이 기껏 십사만 사천밖에 안되느냐? 십사만 사천을 인구로 따지면 얼마정도 됩니까? 밀양 인구보다는 많겠고요. 십사만 정도 되는 우리나라 도시가 어딥니까? 군산? 서산? 하여튼 십사만 정도면 우리가 보기에 그다지 크지 않은, 걸어서 30분만 돌면 그 시가지 윤곽이 얼추 나오는 그런 도시. 30분은 너무했나? 한 시간 잡읍시다. 한 시간 돌아다니면 시가지에 우체국 어디 있고 병원 어디 있고 목욕탕은 어디 있는지 대충 다 아는 동네, 그게 십사만 사천 정도 아니겠습니까. 마산? 창원 빼고 마산 그 정도.
그 주민들 숫자만큼만 천국 가고 나머지는 안 간다고 주장하는 단체. 구천지가 아니고 무슨 천지? 신천지. 구천지는 가라, 신천지가 떴다. 십사만 사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전도 많이 하고 돈 많이 바쳐라 그거죠. 빨리 전도를 해야 십사만 사천 임원진으로 들어가니까요.
자, 십사만 사천을 어떻게 풀이하느냐? 그것은 바로 12×12×1000. 언약×언약×1000이죠. 1000이라는 숫자, 12라는 언약의 숫자, 12라는 또 하나의 숫자. 그것은 야곱이 열 두 아들에게 축복했다는 증거로 남겨진 그 열 두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완성, 일관성 있는 성취성을 남기는 그런 내용으로 꾸준히 야곱 언약이 유지되고 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발달해서 이삭 언약, 이삭 언약이 발달해서 야곱 언약. 그 야곱 언약의 열두 아들을 가지고 족장 개인의 범위에서 벗어나서 국가, 하나님이 원하는 국가 이스라엘로 딱 지정하면서 그 이스라엘의 왕이 야곱 언약에 준한 왕으로 오면 거기에 속한 백성은 별칭이 뭐냐? 십사만 사천이 되는 거예요. 언약이 언약답게 완성했다는 그러한 증거로 꽉 차있는 나라가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그러면 마귀의 나라는 뭐냐? 그것 빼놓고 전부. 십사만 사천 빼놓고 전부가 되는 거예요. 언약이 없는 비언약적 세계. 비언약적 세계가 바로 악마한테 넘겨준 짐승의 숫자. 이것을 666이라고 이렇게 한 거예요. 666이니까 6까지는 차고 넘치는데 이상하게 느낌에 7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어요. 7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고 6자가 세 개 붙어있는데 어떤 것이라도 미완성의 느낌을 주는 것이 바로 666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짐승으로 표기되었는데 그게 한계 지어졌다 이 말입니다. 여기서 더 이상 넘어가면 안 돼. 선 넘지 마. 긋는 선이 저쪽에 있는 하나님의 7로 진행하는, 하나님이 7일 만에 창조했잖아요, 창조세계 그 본래의 하나님의 목적에 도달할 수 없고 차단된, 7일 만에 창조했던 그 창조의 취지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세계에 근접하지 못하고 항상 6으로 막혀있는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이 짐승의 숫자 666이 되는 거죠. 이렇게 되면 사람이 쓰는 용어가 배제되었기 때문에 인간도 역시 이러한 마지막 현실에 있어서 인간은 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시 다니엘로 돌아가 봅시다. 인간이 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인간이 할 게 없다면, 인간이 못한다면 그럼 하나님은 뭘 하시는가? 넷째 짐승에 종속되어있는 그 넷째 짐승은 충실하게 넷째 짐승이 해야 될 일을 다 하도록 하나님께서 꾸준하게 허락하면서 “다 했냐? 다했어? 네가 할 수 있는 게 그것까지지? 자, 보낸다. 내가 인자 보낸다. 영원토록 함께 계시는 인자를 구름타고 보내버린다.”라는 그런 시점이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짐승의 지배 아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게 만들고 “다 했냐? 그게 한계지? 끝이지? 자, 이제부터 너희들이 하지 못하는 거 나간다. 인간을 앞장세워서 하지 못한 것, 이제 할 거야. 어떻게? 대조적으로.” 짐승이 할 수 있는 것에 극한을 지우고 그 극한 너머서 짐승이 하지 못하는 것을 이제 누가 합니까? 인자되시는 분이 이 땅에 와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하신 말씀처럼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맞는 말이 되는 거예요. ‘아, 내 구원 문제라든지 교회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인간이 낄 자리는 없구나. 인간이 나선다는 자체가 이게 말이 안 되는구나.’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되는 겁니다.
그걸 신약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구원받은 것이 율법을 지킴이냐 아니면 성령의 일하심이냐. 갈라디아서 3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네가 구원받은 것이 율법을 지킨 네 행함의 결과냐, 아니면 성령의 일하심으로 네가 구원받았느냐?” 사도 바울이 아주 노골적으로 따지고 있습니다. 그냥 “성령으로 했느냐?” 하면 “예.” 하는데, “성령도 하고요. 저도 빡세게 열심히 했습니다.” 이런 소리를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인간을 배제해야 되니까요.
그러면 주께서 하시는 일은 뭐냐? 간단하죠. 인간이 해내지 못한 것을 주께서 해내십니다. 어떻게 하느냐? 책이죠. 다니엘 7장 10절, 이미 주께서 나올 때부터 책을 들고 나오는 겁니다. 그동안 모든 인간에게 짐승의 힘이 스며들어 있다면, 책에 기록된 자에게는 짐승의 힘이 빠지고 예수님의 행하심이 짐승이 행했던 그 자리를 다 채우면서 책에 기록된 자만 구원받는 그러한 전략, 그러한 작업을 주께서는 하십니다.
그걸 ‘책에 쓰여진 대로 심판 받는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심판이란 말은 뭐냐 하면 분류한다. 책에 기록되었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분류하는 작업을 주께서는 하십니다. 분류하시면서 짐승은 어떻게 되는가? 불에 던진 바 되고 남은 모든 짐승은 권세가 빼앗기고 그리고 나머지는 주께서 마무리하기 위해서 허락된 짐승의 활동을 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짐승이 하는 일과 주님이 하는 일이 어디서 교체되는가? 교체되는 지점은 어디냐? 이게 바로 성전. 성전에서 교체가 돼요. 그래서 악마가 이 땅에서 하는 일이 어디까지냐 하면 그리스도를 흉내내고 모방하는 그 일까지 하게 됩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이 허락하느냐 하면 “주님이 하시고 성령이 하시지, 나는 못합니다. 나는 못합니다.”하고 버릇처럼 이야기하지만, 은연중에 “주님이 하시고 성령이 하시지 나는 못합니다,라는 그 내용의 고백을 제가 할 수 있습니다.”라는 그 사람을 솎아내기 위해서.
잘 들으셔야 돼요. ‘주님이 다 하셨습니다. 주님 홀로 다 했습니다.’라는 그 생각은 내 믿음에서 나왔습니다,하는 그러한 가라지를 다 솎아내는 작업을 하는데 그때까지 주님께서는 이 성전을 적그리스도가 접수하도록 허락하시는 겁니다. 아이고 뭐 철저하게 일해요. 주님은 오류도 없고 실수도 없고 실패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그 일을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 보면 마귀가 하는 일이 뭐냐? 다른 영을 받게 하고 다른 복음을 전하고 다른 예수를 전해요. 예수, 복음, 성령. 너무나 순결하기 짝이 없는, 순수한 하나님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여기에다가 어디까지 하나님께서 마귀를 통해 허락하느냐 하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을 전하게 해요.
전하게 함으로써 다른 예수와 예수, 다른 복음과 복음, 다른 성령과 성령을 인간의 힘으로 골라내지 못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내가 진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골라내었다는 그 행함조차 믿는 사람들을 천국에서 배제시키는 작업을 해요. 이야기 들어보니 상당히 절망적이죠. 대단히 절망적이죠. 어쭙잖게 흉내내지 말라는 거예요. 어쭙잖게.
사도의 정신은 이거에요. 사실을 사실대로. 사실은 사실대로. 따라하지 말라. 사실을 그냥 사실대로 전하는 거예요. 13절에 보면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궤휼적인 거짓 활동을 하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뭐로 봅니까?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느 것이 거짓 사도고 어느 것이 진짜 사도인지 골라내는 작업에서 네가 손 떼라는 거예요, 우리보고. 이거 또 뭐 골라낸다고 “보자.” 해서 돋보기 들이대든지 헬라어, 히브리어 등장해서 골라내는 것, 그 자체가 인간의 행함이 개입되는 거예요, 구원에. 자기 구원에 자기가 손쓰는 거예요.
왜 하지마라 하느냐? 하지마라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면 그렇게 주님을 못 믿냐 그 말이에요, 결국은. 그렇게 못 믿으니까 맡겨야 될 분에게 맡기지 못하고 본인이 선별작업에 나서는 거예요, 본인이. 성경공부 많이 하고 신학 많이 해서 이단과 이단 아닌 것을 본인이 구분하겠다는 거예요.
이걸 우리가 구분 못하는 이유가 우리가 한결같이 동일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기분 따라서 날씨 따라서 정치 상황 따라서 우리는 늘 회까닥하고 늘 변하기를 고대합니다. 달라지기를 고대하는, 내가 나를 도무지 종잡을 수 없고 믿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우리 자신의 결정과 판단을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절대로 우리 자신을 믿으면 안돼요.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 역사를, 우리의 기억을 믿을 필요가 없어요. 요한복음 6장 39절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에 다 살린다면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그러면 간단한 문제잖아요.
인간 속에 아버지가 없다는 게 문제라 했죠. 정신병이라 했죠. 주님이 계시다면, 턱하니 안정되어 있다면 주님이 알아서 하시겠죠. 그러면 우리는 뭐 안 해도 되겠네? 성경대로 하실 거예요, 성경대로. 성경대로 하면 이제 분류 작업하실 겁니다.
자, 그러면 이제 남아있는 것이 ‘주님이 뭘 하셨는가?’에요. 뭘 하셨는가. 마태복음 24장 30절-31절,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죠.
정말 성령 받고 믿는 자라면 이 본문을 보고 아무 염려 없이 기뻐하고 감사하면 되는 거예요. “야, 우리 주님이 안 노시는구나. 우리 주님은 농땡이가 아니구나. 정말 말씀대로 하시는구나.” 끝. 이러면 끝날 문제를 내가 여기에 개입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주님이 구름타고 오는데 내가 그때 감기약 먹고 잠들어 있으면 안 되는데.” 이런 거. “그때 뭐 딴짓 한다고 주님 구름타고 오는 거 못 보면 나 어떡해?”
그리고 나아가 더 심한 경우는, 내가 믿는다고 자부했는데 그래서 주님 앞에 “주님이여, 환영합니다. 어서 오소서. 호산나!” 불렀는데 주님 쪽에서 하는 말이 “누구세요?” 마태복음 7장에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강의를 하고 수련회하고 뭐 이렇게 했습니다.” “나는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한다.” 이렇게 된다면 나는 완전히 쪼다 되고, 그동안 내가 믿는다 믿는다 하는 것이 결국은 전부 다 헛방이 되잖아, 이런 걱정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헛방 되면 헛방 되는 그것도 주의 일이니까 감사하라.” 이렇게 감사로 이끌어버려요. 주님한테 “저는 잘렸는데요.” “네가 잘려서 저주를 받는다 할지라도 주께서 원한다면 그게 얼마나 기쁜 일이냐!” 이렇게 나온다고요. 인간을 솎아냅니다. 인간을 뽑아내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믿는 자에게는 전혀 고민거리도 안 되는 그 문제가 성령을 안 받아놓고 받는 척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성경말씀을 들이대도 다크 서클, 어떤 말씀을 해도 어두움이 가득해가지고, 내가 고민 중에 죽나이다. 고민 끝에 죽나이다. 안돼. 이거 못 참겠어. 내가 타인으로부터 확답을 받지 않으면 못 참겠어. 목사님, 우리 토론 한번 합시다. 203호로 불러서 토론하면서 내가 진짜 신앙인인지 아닌지를 전문가이신 당신이 한번 확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쓸데없는 짓을… 누가 누구를 판단해요?
그래서 요한일서에 보면 정말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 나옵니다. 요한일서 4장 13절,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성령 없는 사람에게 이 말은 하나 마나에요. 약 올리고 있어요.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줘야 되는데 요한일서 4장 13절에서 하는 말이 “네가 구원받았고 주님의 사랑 안에 있고 영생 받은 것을 네 안에 있는 성령이 너에게 증거한다.”
“성령 말고 다른 외부 증거 없습니까? 뭐 전도를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실제적인 그런 거 없습니까?” “없다. 네 안에 성령이 그렇게 증거할 것이다.” “그러면 성령이 안 오면요? 성령이 안 오면 어떻게 합니까?” 안 오면 안 오는 거죠. 안 오면 안 오는 겁니다.
“나는 완전히 조졌네요.” “그건 네 자유고.” 네가 조졌는지 안 조졌는지 남이 굳이 네 사정에 대해서 알 필요 없고, 사실이 그렇다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이제 누구한테 ‘구원받았습니까?’ 물으며 쫓아다니면서 참 잘했어요 도장 받을 필요 없이 네 안에 성령이 네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증거한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단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거예요. 갑자기 이단 이야기를 왜 끄집어냅니까?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돈 바치고 시간 바치고 이단이 “성령이 여러분을 증거합니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참, ‘믿습니까?’라는 말은 또 왜 하는 거예요? 본인이 알고 있으면 되지, 굳이 남한테 확인받아야 됩니까?
그러니까 이런 말씀 자체가… 요한일서 2장 18절 봅시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요한일서에서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다는 거예요. 이것은 어떻게 아느냐? 성령을 통해서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나는 거예요.
적그리스도가 하나가 아니고 많다는 거예요. 그리스도는 몇 분입니까? 한 분이죠. 하나와 다수의 대비상태에요. 우리는 한 분이 하신 일을 믿으면 되는데, 많은 그리스도가 등장해서 마귀가 사람들을 혼란케 하는 겁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등장했다, 저기서 그리스도가 등장했다. 그리스도가 왜 그렇게 많아? 많이 등장한 거예요, 많이.
그렇게 혼란하다는 것은 이게 나쁜 게 아니에요. 정말 성령 받은 사람은, 증언하는 이가 셋 있다 했어요, 성령과 물과 피(요일 5:6-8), 이 십자가 사건의 유효성에 의해서 이미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짐승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거예요.
요한일서 2장 15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어디서 왔습니까?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게 바로 네 번째 짐승이에요.
네 번째 짐승은 세상 전체에요, 어느 영토든. 이스라엘, 이탈리아, 프랑스, 로마가 아니라 로마는 이미 예수님의 영적인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성령 사건 그 외의 모든 세상은 로마제국이 되어버려요. 그 로마제국에서 모든 인간들의 심성은 바로 바벨론 짐승의 심성을 전부 균등하게 다 부여받은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생각은 로마가 바벨론이란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로마가 바벨론이에요. 성경에 그런 게 있습니까? 있습니다. 어디 나옵니까? 베드로전서 5장에 나옵니다. 베드로전서 5장 13절, “굳게 서라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것은 다니엘에 의하면 바벨론 교회라 하면 안 되죠. 무슨 교회? 네 번째 짐승이니까 로마 교회라고 해야 되는데 바벨론에 있는 교회라고 해요. 그러니까 로마를 바벨론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원래 하나밖에 없는 짐승의 금 신상에서 로마, 네 번째 짐승은 발가락의 진흙으로 이미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이미 확정되어 있고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첫째 짐승, 넷째 짐승 그거 연구할 게 아니고, 어디까지가 짐승의 한계고 어디까지가 인자의 세계인지를 그것만 파악하면 돼요. 어디까지가 아, 이게 짐승의 활동이고 여기까지가 주님의 활동이구나. 이 양쪽이 서로 대비되니까요.
아직까지 제가 어떻게 로마가 자본주의 사회가 되는지 그 비약적 해석에 대해 그게 과연 가능하냐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설명하고 넘어갈게요. 요한계시록 18장에 보면 거기 바벨론이 나오는데 18장 2절에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라 하고 그 내용이 나와요.
11절에 보면 “땅의 상고(상인)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무역하는 물품들, “계피와 향료와…” 어디까지 무역하느냐 하면 사람의 영혼까지, 노예까지 팔아넘기는 겁니다.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이들이 애곡하고 통곡합니다. 왜? 그들이 장사한 이윤이 다 날아갔으니까.
하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에 로마제국은 무역으로 하나로 뭉쳐졌어요. 무역이라는 것이 인간 악마세계의 마지막 모습이에요. 그 무역 속에 인간의 욕망은 살아있는 거예요. 국가조차도 돈벌이하는 국가로 전락합니다. 여러 가지 220개 국가가 있더라도 무역으로 밥 먹고 사는 점에서 전부 다 균등화되었어요. 모든 주권국가들이 똑같아요. 그렇지 않고 우리는 종교로서 하나 되겠다 하면 그것은 테러집단이 되는 거죠.
그럼 테러집단이 안되고 국가가 되려면 다른 나라와 동일하게 무역 사무실을 개설하고 대사관을 설치해야 돼요. 대사관, 무역 사무실은 어떻게 합니까? 내일이라는 물품을 우리의 물품과 바꾸면서 국제사회라는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 인정을 해줘버리는 거예요. 그게 안 되면 그 나라는 테러집단으로 간주되어서 문 닫아야 돼요. 더 이상 나라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가정, 시민사회, 그다음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국가. 그게 바로 짐승의 세계이고 네 번째 짐승의 한계입니다.
그러면 다니엘 7장으로 넘어가서 인자의 나라는 뭐냐? 책들이 펴져있고 그 책에 기록된 사람만 뽑아내는 겁니다. 쏙쏙 뽑아내죠. 뽑아내는데 어디서 뽑아내는가? 넷째 짐승에서 뽑아내는 거죠. 넷째 짐승에서. 하나밖에 없는 바벨론 제국에서 뽑아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자의 후손도 정점에 이르렀고 그 정점에 이른 것을 계기로 해서 인자의 나라가 개시하는 겁니다. 자, 한번 뽑아보자.
그럼 뽑아볼 때 시간적으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7장 25절,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그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한 때, 두 때, 반 때. 반 때가 뭐냐? 반 때라는 시간이 있느냐? 그것은 10분 뒤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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