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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수련회8강 한 때 두 때 반 때

아빠와 함께 2025. 1. 18. 09:56

2025 겨울수련회 다니엘 강해 제8강 : 한 때 두 때 반 때 - 이 근호 목사


여덟 번째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일곱 번째 강의 끝에 나타난 다크 서클을 좀 지워드려야 되는데… 절망적이에요, 절망적. 자신감이 뚝 떨어져버리는 거죠. 그 원인은 뭐냐? 한 때 두 때 반 때를 이해하려면 주께서 죽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나 그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12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12장에 한 때 두 때 반 때가 나와요. 12장에 보면 책에 기록된 자만 구원을 받습니다. 12장 1절에 나와 있죠.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확정된 겁니다.

그다음에 영생을 얻을 자가 나오는데 영생을 얻을 자가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2절에 보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그러니까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뭔가 경유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살아있으면서 “영생 주세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가능성, 잠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영생의 취지에 잡티가 섞일 가능성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일단 죽어버리면 이제는 내가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종결 났습니다. 죽은 자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난 뒤에 주님께서는 그것을 건져주죠. 살아있는 인간이 죽음의 체험을 하는 그 남아있는 지상의 시간대가 여기 나옵니다. 다니엘 12장 7절에 보면 “… 영생하시는 자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한 때 두 때 반 때가 성도의 숨통을 끊어놔 버려요. 제발 좀 죽어줘. 제발 좀 죽어줘. 그때가 11절에 보면 일천이백구십 일, 더 기다려서 일천삼백삼십오 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기다려서 일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이 말은 무슨 뜻이냐? 다니엘 12장 원칙을 쓰면 이렇습니다. ‘흙에 묻혀 이미 죽은 자가 책에 기록된 자에 한해서 영생을 얻는다.’ 그러면 살아있는 인간을 죽여주는 절차가 있어야 책의 효능이 발휘되거든요. 책에 기록된 대로. 그러면 책과 대비되는 것이 뭐냐 하면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그 가능성은 책의 내용에 대해서 대드는 요소가 되는 겁니다. 반발하는 요소가 됩니다. ‘책에 뭐가 기록됐는지 모르고 그건 난 모르겠고 나는 내 나름대로 열심히 구원 얻기 위해서 활동하겠습니다.’라는 이러한 자세가 온전히 책에 기록된 자만 건진다는 그 취지에 도전하는 내용이 되어버린단 말이죠. 도전하는 내용이 되어버려요.

왜냐하면 책에 기록된 것은 누구의 솜씨입니까? 오직 인자되시는 분의 솜씨고 멀쩡하게 살아있어서 열심히 해보겠다는 것은 순전하게 인자되시는 분의 솜씨가 아니고, ‘나도 ‘내’ 구원이니까 나도 좀 기여하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내 구원에 좀 보탬 되는 활동을 하는 게 그렇게 나빠요? 그게 그렇게 나빠요?‘ 이런 식으로 나오게 되면 여기에 준비되어있는 게 뭐냐? 마귀야, 귀신아, 출동! 출동하는 겁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를 가지고 출동하는 겁니다.

그게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나오죠. 한 때 두 때 반 때. 12장 13-17절,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되어 있어요.

이게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죠. 한 때 두 때 반 때가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기 위해서 마련되고 장만된 그런 시간개념이냐? 여기서 우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시간이라 하는 것은 창세기 1장 15절, 16절에 의해서 천체가 한 바퀴 돌게 되면 그게 하루가 되게 되어 있어요. 해와 달과 별을 통해서 일자와 날, 시간을 정했다 하니까요. 시간은 인간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새겨준 천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천체의 시간은 한 바퀴 돌면 1이 돼요. 1, 1, 1, 1,… 이것을 서열화하면 1, 2, 3, 4,…가 돼요. 그런데 여기서 ½이라는 것이 성립 안 됩니다. ½때라는 것이 뭐지? 그런 때가 다 있나? ½때가 뭐냐? ½때라는 것이 어떻게 되는가?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1, 2, 그다음 뭐가 나타나야 정상입니까? 3이 나타나야 돼요. 3이 나타나야 되는데 ½때라는 것은 3을 쓸 수가 없다는 거예요. 순차적으로 내려오는 1과 2가 성립되는 이 지상의 시간에 갑자기 여기서 미지의 시간대가 들어와 돌입하게 되면 이 시간대는 소실돼요. 소실되면 아예 0이 되어야 될 텐데요. 한 때, 두 때, 끝, 이렇게 소실되어야 되는데 여기에 ½이라는 어떤 여지, 낌새가 남아있다는 것은 기존의 시간대에 다른 시간대가 개입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소실되어야 마땅한데 온전히 소실되지 않고 ½때라는 것은 1, 2, 3이라는 기존의 시간대에 완전히 종속되어버리지 않고 소멸되면서 동시에 하늘에서 구원하는 때와 마주치는 그것을 시간으로 표현하면 서로 상이한 두 시간대가 마주한다 해서 ½로 표현하는 거예요. 기존의 시간대로 보면 반 토막 났다 이 말입니다.

그럼 ½때란 것은 없으니까 반 토막은 여기서 점선으로 표현돼요. 그럼 이것은 뭘 뜻하느냐? ‘기존 시간의 질이 천상의 시간으로 전환되는 그러한 순간을 시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도 이게 무슨 말인지를 여러분들이 당연히 모르죠. 이게 무슨 말이냐? ½이라는 것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제가 지어낸 건 아니거든요. 성경에 나온단 말이죠.

그럼 이것을 알기 쉽게 볼 수 있는 게 사도 바울의 편지에 나와요. “이미 너는 죽었고 하늘나라에 너는 살았다.”가 되는 겁니다. ‘죽었다, 살았다’를 시간적으로 표현할 때 ½은 ‘죽었다’에 걸쳐있고 ½은 ‘살았다’는 위쪽에 걸쳐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늘나라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은 ½이다.

따라서 이 ½시간을 먼저 사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사셨는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도 고난을 받았잖아요. 그렇다면 성도야, 예수님의 그 남은 고난, 그 고난의 모양새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너는 이 땅에서 고난을 받는 자체가 천상에 속했다는 증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께 제가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기껏 아이디어로 생각해낸 것이 옛날 수십 년 전 TV에서 방영한 <스타트랙>이라고 있습니다. 뾰족한 당나귀 귀를 가진 등장인물이 우주여행을 하는데 지구에서 안드로메다를 가려고 하면 너무 멀잖아요. 그럼 어떻게 가느냐? 순간이동. 양자 얽힘에 의해서 이동할 수 있는 그런 투명한 샤워부스 비슷한 데에 들어갑니다. 들어가게 되면 한 3초 동안 모습이 보이다가 삐리삐리삐리삐리 신비로운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조금 있으면 저쪽 안드로메다에서 “저 도착했어요.” 하죠.

이쪽에 있는 모든 세포의 정보만 챙기고 다 분해시킨 다음에 양자 얽힘의 원리에 의해 저쪽에서 그 정보를 재생시키면 내 몸이 이쪽에 있다가 저쪽으로 이동한다는 아이디어입니다. 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드라마니까 유사 물리를 이용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한 몸인데 위에서 보면 살았고 땅에서 보면 죽었고. 그런데 그 죽음이 늙어죽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해서 이 사람의 죽음과 고난은 지금 예수님께 속해있다는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상의 시간, 한 때 두 때라는 시간 말고 반 때에 돌입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반 때에 돌입했다.

따라서 죽지 아니하면 살 수 없다는 그 원리는 충실하게 원리대로 살리면서 성도는 그것을 자각하게 하는 그 이중의 것을 다 획득할 수 있는 겁니다. 죽어야 살아요. 이것은 예수님이 그랬으니까. 죽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일은 이룰 수 없습니다.

죽어야 사는데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오게 되면 이미 죽었는데 그게 주님 안에서 살아있기 때문에 그냥 죽은 게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을 표현하는 식의 죽음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이 땅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내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성도가 되는 거예요.

다니엘 당시에는 이 신약 시대를 모르기 때문에 그냥 시간으로 계시 받은 거예요. 한 때, 두 때, 갑자기 반 때가 되고 말았어요. 한 때가 24시간이니까 반 때가 12시간입니까? 12시간이면 하루가 아닌데? 그럼 나머지 12시간은 어디로 갔지? 이렇게 되겠죠. 이 지상의 시간인 24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12시간 맞지만, 하나님의 시간 개념으로 보게 되면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이미 살았다는 두 개의 하나님의 약속이 한 몸을 통해서 둘 다 양면성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이 일을 위해서 누가 필요하냐? 악마가 필요한 거예요. 왜 악마가 필요하냐? 악마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달려든 거예요. 인간한테는 달려들 필요 없어요. 자기 종인데요. 자기 종을 닦달내서 뭐할 건데요? 예수님에게 속했기 때문에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우는 사자같이 꼬실려고 달려드는 거예요. 이미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악마가 공격할 대상자가 되는 겁니다. 이제 뭐 다크 서클 좀 없어졌습니까?

주님의 고난, 십자가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주위로부터 억울한 소리를 듣고 비난받고 배제당하는 느낌을 받을 때 그 사람은 본인은 이미 죽었지만 하늘나라 생명이 있는 산 사람의 이중성을 띄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굳이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다니엘 12장에 의하면 죽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양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죽은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이 살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눈감고 있으면 되지 않습니까? 눈감고 있으면 여전히 자의식이 있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고난 받는다는 자체가 내 구원에 도움 된다는 그러한 엉뚱한 잘못된 생각을 계속 나타내게 되어 있어요. 죽는다는 것은 내가 할 것은 완전히 더 이상 없음이에요. 죽은 자가 뭘 해요? 죽은 자는 깨워도 깨지 않잖아요. 아무것도 못하는데 살았다는 이중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이중성을 살리기 위해서 주님이 악마로부터 당하는 고난에 이 땅에서 동참함으로써 그 티를 내는 겁니다.

다니엘 7장을 다시 한번 봅시다. 25절,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아, 성도가 누구한테 붙인 바 된다고요? 예수님을 공격하는, 즉 악마의 손에 붙인 바 되어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낸다는 거예요. 그 고난의 기간이 1290일, 약간 더 있으면 1335일이고 그런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이걸 뭐라고 했죠? 두 자로. 여자의 남은 자손이 어디에 기거한다고 했습니까? ‘광야’에 기거한다. 그래서 제가 얼마 전 대전 강의에서 광야는 죽음의 튜브라 했죠. 죽음의 튜브. 지하에 땅을 파고 튜브를 설치하고 초전도체 깔아놓으면 서울서 부산까지 25분 만에 돌파한다. 자기부상열차. 택배 보낼 때는 뭐 싱싱한 채소가 바로 가는 거죠.

죽음의 튜브 그 안에서 생명체는 자기 시간, 자기 역사를 계속 체크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이미 죽은 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래서 광야 생활에서는 애굽에서 먹던 음식, 양파, 정력에 좋다는 수박 일체 다 끊어버리고 기껏 준다는 게 뭘 줬습니까? 만나. 그것도 이제 고기 없다 하니까 메추라기. 메추라기, 만나 이런 걸 줘요. 요새 같으면 줘도 안 먹습니다.

만나, 메추라기 이게 뭐냐 하면 주님 가신 길, 고난에 동참하기 위한 양식입니다. 이 양식을 신명기 8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만나를 먹는 게 아니고 말씀을 먹는다. 요한복음 6장에서는, 내 살과 내 피를 먹는다. 이게 만나를 먹는 거예요. 내가 너희를 위해서 받았던 고난을 너희가 먹으면 너희가 영생을 얻을 것이다.

쉬운 말로, 통과하라. 어떤 튜브 안을 통과하라. 우리가 선택해서 통과하는 게 아니에요. 친절한 악마가 이런 광야의 상황을 적절하게 다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마귀도 주의 지시 따르거든요, 지시 따라 마련해서 죽음의 튜브를 형성합니다. 죽음의 튜브를 통과하려면 어떤 마음자세여야 하냐? 간단하죠.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주님이 산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잖아요.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너 뭐할래?” “나 죽었다니까.” “뭐 해야지.” “죽었다니까. 내가 죽었다니까요.” “그럼 기도 안 할 거냐?” 주님이 하게 하실 거예요. 죽은 자가 기도를 하든 전도를 하든 헌금을 하든 주께서 하실 거예요. 얼마 전 강의할 때 알려줬잖아요. “커피 뭐 마실래?” “가만있어봐라. 은밀한 분에게 물어보고 하자.” “왜 그래?” “나 죽었으니까!” 내 선택이 아니고. 오늘은, 오늘은… 짬뽕이다. 부채도사 하는 것처럼. 가만있어봐라. 아, 느낌 왔어, 느낌 왔어. 오늘은 카푸치노다. 이게 너무 번거로우니까 “카푸치노 한 잔.” 이렇게 간단하게 넘어가면 돼요.

이처럼 항상 모든 상황은 한 때, 두 때, 반 때를 통해서 주님의 지시에 의해 친절하진 않지만 하여튼 마귀가 와서 이 땅을 광야로 조성해놓고 여기서 우리가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늘 확인시키면서 아울러 생명의 기쁨도 같이 누리게 하는 것, 이게 바로 인자만이 해내는 일인 것을 순간순간 우리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한 때, 두 때, 반 때인데 여기에 적그리스도라든지 마귀의 자식들의 많은 협조가 주어집니다.

데살로니가후서 한번 보겠습니다. 거기 보면 아주 친절하게 잘 되어있어요.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보면 3절,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지금까지 한 것이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요. 구체적으로 불법이 누군지도 모르고 정체도 모르고 언제 나타나는지도 모르고요. 그럼 그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는 재림이 안 온다는 뜻이고, 재림이 오려면 불법의 사람이 먼저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고. 그럼 우리가 불법의 사람을 알아채야 그다음에 재림을 기다리든지 말든지 할 텐데 아직까지 불법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재림은 멀었다는 이야기이냐? 뭐 여러 가지 복잡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겠죠.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그 뒤의 이야기로서 다 정리가 됩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 성경구절을 이렇게 바꾸어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어떤 분이 나타나서 기적과 능력으로 임하고 모든 사람에게 진리의 사랑으로 임할 것이다.’ 그렇게 바꿔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러한 것이 거짓되고 이러한 것이 사탄이고 이러한 것이 나쁘다 할 때, 그 ‘나쁜’ 것을 다 한번 빼보는 겁니다. 빼보게 되면 뭐냐? 평소에 이미 나는 죽었고 살아있다는 것을 기뻐하지 않은 채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한테는 이런 사람들이 딱이죠. “골라~ 골라~ 왔어요. 애들은 가라.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신앙 생활했으면 어떤 이득을 얻어야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왔을 때, 우리가 ‘죽었고’가 아니고 ‘좀 더 살아보자’ 할 때 이런 사람이 훅하고 우리에게 매력 덩어리, 미혹 거리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보실 때에 성경은 사탄의 역사라 하지만 자기 보기에는 참 좋으신 분처럼 생각되죠. 사람이란 이렇습니다. 존경스러운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을 원해요. 좋은 소리할 때는 좀 받아 적으세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존경스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게 아니고 나한테 잘해주면 그 사람이 존경스러운 사람입니다, 나한테 잘해주면.

내가 매점에 가서 매운 떡볶이하고 모짜렐라 치즈 먹고 싶다 하면 옆에서 딱 보고 그거? 편의점에서 사다가 소세지 썰어 넣고 딱 차려주고. 내가 운동하고 싶다 하면 트렁크 탁 열어서 운동화 딱 준비해가지고 여기서 걷든지 아니면 농구하든지 하게 하고. 우산이 하나밖에 없다면 우산 주면서 자기는 비 맞고 가면서 ‘차가지고 모시러 오겠습니다.’하고. 또 매운 거 먹는데 머리가 길어서 거추장스러워하면 분홍색 고무 밴드 딱 준비해서 ‘이걸로 머리 정리하시고 잡수세요.’ 완벽한 비서에요. <완벽한 비서> 제 4회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 못 만나서 아직까지 결혼 못하고 있는 사람 있잖아요.

아니, 성경에서는 죽었다는데. ‘아, 그런 건 나 모르겠고 호강이나 좀 해봅시다. 호강하며 살겠습니다.’ 자꾸 이런 마음이 꿈틀거릴 때 하나님께서 한 때 두 때 반 때의 메커니즘을 가동시켜버립니다. 가동시켜서, 아휴, 난 그 사람이 적그리스도인 줄 몰랐다. 나한테 너무 잘해줘서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적그리스도고 놀라운 능력을 행사해서 나는 되게 존경스러워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뒤통수 치고 자기 본색을 드러내더라. “나를 따르세요. 당신을 구원하겠습니다. 방향제 사업해서 망하지 말고 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원받으려면 우리 단체 오세요. 우리 단체 오면 여러 사람들 지금 구원받아서 기뻐하고 있으니까 당신도 그 구원에 동참해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뭐 이런 식으로 하면 ‘그래, 내가 잘 판단해야 돼. 정신 바짝 차리고. 하도 이단들이 많으니까 조심해야 돼.’ 이단들이 많으니까 조심하라고 하는 그게 이단이에요, 그게. 이미 죽었다는데 뭘 이단을 조심해요? 이미 죽었는데.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결정이고 판단인데요. 친절한 비서, 완벽한 비서를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결국 예수님이 그만큼 위대하다는 뜻이에요. 자기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을 놓치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한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면서 더욱 더 예수님이 혼자 다 했다는 것에 대해서 내 구원에 내가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사후적으로, 일이 되고 난 뒤에 사후적으로 돌이켜보면서 그동안 못했던 감사와 기쁨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죠. 죽어도 좋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대로. 제가 주를 위해서 산다는 것이 제 뜻이 아니고 주님 자신의 뜻인 것을 다시 한번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다시 다니엘로 넘어가봅시다. 한 때 두 때 반 때를 통과해서 그 다음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가 된다는 겁니다. (7:27) 자, 이 이야기가 다니엘 7장에 나옵니다. 이게 여러분들에게 위로가 됩니까? 문제는 위로가 되느냐 하는 거죠.

다니엘 8장을 보게 되면… 방금 이야기한 것, 참 여러 번 이야기해도 정말 이것은 너무 어려운 이야기라서 또다시 제가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은 수평으로 흐르는데 하나님의 꿈과 약속의 세계는 수직으로 쌓여가요. 쌓인다 했죠. 쌓이는 거예요. 그럼 수평으로 A라는 시점에서 B라는 시점으로 계속 간다면 B라는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은 또다시 여기에 수직적으로 쌓이는 겁니다. B시점에서 탑처럼 쌓이고 C의 사건은 C의 사건으로 쌓이고 D의 사건은 D의 사건으로 쌓이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시간의 해상도가 점점 더 뚜렷해지면서 구체적으로 짐승이 노리는 것이 인간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홀로 다 이루심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역사를 통해서 밝혀지는 겁니다. 마귀가 나를 공격한다? 내 머리가 막 돌아가고 신부가 와서 퇴마한다고 “쌍투스, 쌍투스” 라틴어 쓰면서 물 막 뿌리고 십자가 휘두르고 하는 것은 그렇게 퇴마하는 신부 본인을 지금 흥분시키는 거예요. 악마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본인이 본인 하는 일에 지금 감동받아버린 거예요. “주여,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내가 대견스럽습니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부흥회도 그런 거잖아요. 자기가 자기를 부흥해놓고 성령 받았다고 우기고. 참. 개그는 개그일 뿐 따라하지 맙시다. 전부 다 개그 같아요, 개그 같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는데 그렇게 집단적으로 최면을 거는 행사가 왜 필요합니까? 우리 십자가마을 여기 와서 박수치고 찬송가 부른 적 없어요. 진짜 하고 싶으면 누구 하나 나와서 피아노 치고 노래 한 곡 부르던지요.

요란스러울 필요도 없고 요란스러울 이유도 없어요, 여기는. 주께서 사건을 일으키시는데 그 사건은 이미 예정된 사건이에요. 이미 예정된 사건이란 말이죠. 그래서 어렵다는 게 뭐냐 하면 이루어진 것이 이 역사에서 계속 세밀화되고 더욱 구체화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다니엘 8장입니다. 다니엘 8장에 보면 그 짐승이 갑자기 숫양과 숫염소라 해서 8장 11절에 “또 스스로 높아져서 군대의 주재를 대적하며 그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를 제하여버렸고 그의 성소를 헐었으며 범죄함을 인하여 백성과 매일 드리는 제사가 그것에게 붙인 바 되었고” 안티쿠스 에피파네스 4세 이야기에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짓밟는 이 일이 언제까지인가? “이천 삼백 주야까지” 그런 짓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뒤로 갈수록 정보가 조금씩 더 구체화되면서 신약 성경의 십자가에서 모든 실체가 다 드러나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님을 핍박하고 성전을 핍박할 때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유대인들은 이 낌새를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죠. 왜 모르는가? 본인 자체가 짐승이니까. 본인 자체가 짐승의 앞잡이로 행동했으니까. 자기가 하는 일은 지금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일로 여겼던 거예요.

그들은 열심히 제사 드리고, 안티쿠스 에피파네스 4세가 했던 일을 상기하면서 다시는 그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는 조치를 다하자. 무슨 조치를 했습니까? 로마한테 막대한 세금을 갖다 바쳤죠. 다른 건 다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우리 성전만은 좀 안 다치게 해 달라. 그런 협약에 의해서 다 갖다 바친 거예요. 그런데 갖다 바쳤던 것 소용 없었어요. AD70년경에 성전이 불타고 말았습니다.

실컷 공들여서 안티쿠스 에피파네스 4세가 했던 일만큼은 제발 제발 일어나지 않고 로마당국이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예수님이라는 그 작자까지 사형시켜서 갖다 바칠 테니까 로마는 제발 우리 편이 되어서 좋은 관계를 이루어서 제사만은 허락해 달라 그렇게 부탁했건만 로마는 결국 유대나라를 뭐로 바꿨습니까? 헬라종교 제우스의 나라로 바꿨습니다. 실패로 끝났죠. 그 와중에 누가 다쳤고 누가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그런데 다니엘은 그것이 하나님이 이미 계획하신 대로 된 거라는 거예요. 계획된 대로 되었다.

자, 이제 남은 이 시간동안 제가 하고 싶은 일은 이겁니다. 다니엘 10장입니다. 참,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일념에 대해서 ‘과거 역사에 우리가 어떤 실패를 했는지 그 사실을 안다는 차원을 주께서 감안하셔서, 이렇게 반성하고 스스로 회개하며 하나님의 성전만큼은 고수하면서 제사가 진행되기를 바라는 이것 하나만큼은 주께서 지켜주시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그 자체가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비는 마귀다.

그러니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교회를 하기 위해서 온갖 헌신을 다하고 모든 노력을 다했으니까 이 정성을 갸륵하게 여기는 하나님께서 소위 양심이라도 있다면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이것을 무산시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 그게 마귀적이라는 생각을 도무지 못하는 겁니다.

그 일을 하려면 본인이 ‘죽었다’가 안 되고 본인이 여전히 살아서 자기 구원에 자기가 기여할 수 있다는 여지를 자기가 계속 지키고 싶은 거예요. 내 구원인데 내가 보탬 되는 것이 주님 보기에도 굉장히 수월하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네가 내 일에 협조하니까 뭔들 너 하는 일을 안 도와주리? 이런 거요.

“네가 너의 영광을 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했기 때문에 네가 원하지 않는 오래 사는 것과 건강과 나머지 모든 일, 집구석 잘 되고 행복한 것은 내가 보너스로 줄게.”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 아닙니까? 솔로몬의 기도처럼. 솔로몬의 기도는 정말 원하지 않았는데 주님이 주셨고, 그 뒤에 사람은 원하지 않은 척하면서 원하는 것을 기도하기 때문에 그 꼼수에 주님께서 넘어가지 않는 거예요.

그냥 주께서 하신 말씀대로 로마서 7장의 말씀처럼 율법이 왔을 때 이미 너는 죽었다는 거예요, 율법으로 인하여. 네가 율법으로 이미 범죄했고 네 속에 악이 있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것을 하는 너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너는 곤고한 사람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 누가 나를 살릴까? 누가 살리겠어요? 그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죄의 모습으로 와서 이제는 율법으로 하지 않고 성령의 법으로 우리를 해방하였느니라. 지금 그 고백을 하고 있다고요.

그러니 사도 바울이 일종의 트릭을 쓴 거예요. 천하에 다크 서클을 하고 “이 곤고함에서 누가 나를 구원할까? 나는 나쁜 놈이고 죄인이고 내가 원치 않는 죄만 짓는구나.”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하는 것 같다가 “헤헤헤헤” 하면서 기뻐하는 거예요. 이게 뭐에요, 이게. 이중적이잖아요. 뻔히 알면서도, “아, 나 요새 연기력 많이 약해졌어.” 이렇게 하면서….

그게 속임수를 위함이 아니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대할 때 실제로 그 순간 그대로의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다시 한번, 또 다시 한번 반복해서 “나 죄인 맞습니다. 내 속의 악이 나의 선을 이겼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이 내 대신 하신 모든 일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버릇처럼 매일같이 반복해서 영광을 돌렸던 거예요. 우리보고 그렇게 이중 연기를 하라는 게 아니고요.

자, 다니엘 10장을 해보겠습니다. 천사 이야기입니다. 아, 어렵습니다, 천사 이야기. 천사 이야기가 어려워요. 천사가 등장하는 이유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에요. 다니엘의 한계 때문에 천사가 위로차 방문한 겁니다. 다니엘 8장 27절에 보면 “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동안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난 뒤에 계시가 감당이 되지 않았어요. 미래의 역사가 감당이 되지 않아서 너무 무거워서 수일동안 기절해 있었어요. 하나님의 계시가 감당하기 힘들어서. 역시 다니엘도 인간이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계시를 받았으니까 쓰러지는 거죠. 계시의 무게가 그만큼 무겁다는 뜻이죠.

그런데 10장 2절에 보면 여기에 누가 등장하느냐? “그때에 나 다니엘이 세 이레(21일) 동안을 슬퍼하며” 3절에 “세 이레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 그전에 뭐 고기하고 포도주를 많이 먹었던 모양이죠. “정월 이십사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가에 있었는데 그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천사가 등장했습니다.

자, 어떤 점에서 이게 어려우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를 줬느냐, 천사한테 계시를 줬느냐? 천사가 끼어듦으로써 하나님의 계시활동에 대해 인간의 것을 제한하느냐, 아니면 대신 다 하느냐? 그래도 인간이 할 몫이 좀 남아 있느냐 하는 그런 문제들이 계속해서 이어지죠. 천사의 활동에 한계가 있느냐, 아니면 인간을 완전히 대체하느냐 그런 문제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여러분 잘 알다시피 예수님의 계시가 바로 사도 요한에게 오지 않고 중간에 전달자가 있어요. 바로 천사를 통해서 계시가 전달됩니다. 그만큼 완화되는 효과가 있어요. 어떤 점에서 완화되느냐 하면 “너는 그냥 계시를 받고 사실을 사실대로 증거하면 돼. 나대지 마. 설치지 마. 네가 받은 대로 그냥 증거하는 그것도 못하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럼 활동은요? 활동은 천사 몫이에요. 천사 담당이에요, 활동은. 마태복음 13장에서 심판은 누구한테 맡겼습니까? 천사가 하죠. 그러면 사람은 남을 심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심판 못해요. 로마서에 나오죠. 모든 원수는 누구한테 맡겨라? 내게 맡겨라. 네가 나대지 마라.(롬 12:19) 왜? 너는 너 자신이 늘 변화하기 때문에.

지금 기분이 업 되어서 좋아하다가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쁘기 때문에 네가 심판할 수가 있는 거예요. 제가 옛날에 교사생활을 잠깐 한 적이 있는데 교사생활을 하면서 아침에 일어나서 기분 좋을 때하고 기분 나쁠 때하고 학생에게 드는 매의 횟수가 달라져요.

오늘 담배 피운 놈 걸리기만 해봐라. 오늘 내가 죽인다. 하필 담배피운 애가 걸렸네. 교사가 수업마치고 교무실 앉아있으면 되는데 괜히 화장실 뒤로 간다고요. 누구 걸리기만 해봐라. 그때는 안 때리면 교사가 아니었어요. 학생들이 때려주기를 기다렸기 때문에. 사랑의 매였으니까. 본인이 맞기를 원하니까. 너희 아버지 못하는 거 내가 대신하니까 귀하게 여겨라 했죠. 그게 기분 따라서 사람을 판단하는 거예요. 기분 따라서. 그런데 무슨 좋은 일이 있다. 담배피우다 걸렸다. 훈방조치. “앞으로 그러지 마. 담배 백해무익한 거야.”

제가 교사하면서 느낀 것은, 애가 어떻게 마음을 고치고 이런 것은 욕심이고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그런 증거만 남기자. 그걸로 끝냈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기 감정에 휩싸이지 말고 판단하고 이런 것은 천사한테 맡기고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그것을 증거하면 되는 겁니다.

“사실은 이렇습니다.”하고 증거하면 되지, “내 증거를 네가 안 받아줘? 너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내 밑천이 지금 15만원 들어갔어. 네가 인간이라면 적어도 양심적이라면 교회 한번 나와 주는 게 도리 아니야?” 그런 것 좀 하지마세요. 보험회사 영업사원도 아니고요. 꼭 계약해야 됩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천사가 왔다는 것은 다니엘에게 주어진 계시의 업무량을 다 덜어주는 거예요. 천사가 와서 하는 말이 13절부터 쭉 나옵니다. “바사국 군이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 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뭡니까? 15절에 “그가 이런 말로 내게 이를 때에 내가 곧 얼굴을 땅에 향하고 벙벙하였더니 인자와 같은 이가 있어 내 입술을 만진지라 내가 곧 입을 열어 내 앞에 섰는 자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주여 이 이상을 인하여 근심이 내게 더하므로 내가 힘이 없어졌나이다 내 몸에 힘이 없어졌고 호흡이 남지 아니하였사오니 내 주의 이 종이 어찌 능히 내 주로 더불어 말씀할 수 있으리이까”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과연 낄 자리인가? 하나님 일에 낄 자리도 아닌데 하나님이 계시를 준 이유는 뭐냐? 이걸 다시 한번 다니엘이 생각토록 한 겁니다. 일은 주님이 하시고 주님의 지시에 따르는 천사들이 중간에 다니엘보다 더 활동성 있게 맹렬하게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활동을 보면서 비록 하나님의 약속과 꿈에 속한 다니엘이지만 천사들의 활동이 너무 활발하니까 너무 분주하니까 자기로서는 어떻게 대처할 수가 없어서 그냥 낙담하고 있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1장에 사도 요한처럼. 자, 이것을 저는 ‘유쾌한 파멸’이라 합니다. 나를 하나님의 활동에서 배제시키면서 그것이 어떤 기분을 들게 합니까? 아주 유쾌하게 하는 거예요. 야, 내가 영적 세계에 대해서 너무 무지했구나. 활동은 천사가 다 하는데 마치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준 일은 내가 알아서 다 해야 되는 것처럼 부담을 지고 그동안 살았었구나.

가제트 형사 일을 누가 했어요? 조그마한 소녀와 강아지가 다 했잖아요. 그리고 자기는 프로펠러 달린 모자 쓰고 다니면서 기자회견할 때 자기가 나서서 “내가 범인 잡는데 일 다 했습니다.” 이런 식이에요. 일은 천사가 다 했는데 꼭 우리가 나서서 해야 마치 내가 구원받은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여기는 그것, 바로 다니엘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이런 경험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19절에 하신 말씀이 “가로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맥없이 만들어놓고 여기서는 또 강건하라 하고.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가로되 내 주께서 나로 힘이 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

20절, “그가 이르되 내가 어찌하여 네게 나아온 것을 네가 아느냐 이제 내가 돌아가서 바사 군과 싸우려니와 내가 나간 후에는 헬라 군이 이를 것이라 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는 너희 군 미가엘뿐이니라” 미가엘 천사, 전쟁하는 천사가 내 지시를 따라서 열심히 할 테니까 너는 거기서 구경만 해라. 결과만 챙겨. 내가 알아서 다 하는 거야. 주님께서 이러한 위로를 다니엘에게 했습니다.

이제 밤도 깊었습니다. 다크 서클 이제 거두시고 일은 보이지 않는 천사가 다 하십니다. 시편 127편 솔로몬의 시편처럼 사랑하는 자에게 뭘 주신다 했습니까?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거예요, 토론을 주시는 게 아니고. 사랑하는 자에게 푹 잠을 주는 겁니다.

그것 마지막으로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에게 잠을 준다는 것은 우리 스케줄에서 하루치만 허락한다는 거예요. 잠은 사망의 전조에요. 자, 잠을 뛰어넘어서 다시 깰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잠을 자되 푹 자되 하나님께서 계속 자게 만들면 그것을 사망이라고 하죠. “여보, 여보!” 안 일어나. 그래서 마음 같아서는 자기 전에 쪽지를 써서 이마에 붙이는 거예요. ‘나 잠자는 중. 깨우지 말라.’

그런데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누가 깨웠습니까? 그건 뭐 주님께서 깨웠겠죠. 어제부로 죽었고 오늘은 새로운 지시와 업무가 너한테 주어질 것이다. 오늘 저녁에 죽을 때까지 네가 마지막 슬라이스, 너는 끊어진 시간으로 살아라. 이것을 주님께서 계속 해내는 거예요. 그럼 일은 누가 합니까? 천사가 하잖아, 천사가.

그러면 여러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의 원형은 마하나임이에요. 이스라엘 뜻은 ‘싸우는 부대’에요. 우크라이나 북한 부대 말고, 하늘나라에 싸우는 부대에요. 이 원형이 마하나임. 천사들의 집합체. 창세기 32장에 나온 것처럼 야곱이 천사의 집단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고 난 뒤에 아, 그들이 모든 일을 차질 없이 다 해내고 야곱은 그냥 그 결과물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야곱은 알게 된 겁니다.

똑같은 원칙으로 바로 지금 주님께서 천사와 함께 요한계시록대로 활동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뭘 하고 안하고는 이제 없습니다. 죽은 자가 뭘 안하고 죽은 자가 뭘 하는 게 있겠습니까. 다만 주께서 다 하신다를 증거하면서 오늘도 마지막 밤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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