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5수련회4강 끝의 중첩

아빠와 함께 2025. 1. 18. 07:56

2025 겨울수련회 다니엘 강해 제4강 : 끝의 중첩 - 이 근호 목사

네 번째 강의 주제는 ‘시간의 중첩’입니다. 시간이 중첩이 된다. 이것이 잘 이해가 안 되죠. 왜냐하면 시간은 수평적으로 가기 때문에 중첩이 되는 게 아니죠. 역사는 흘러가면 과거는 사라지고, 현재는 남고, 미래는 아직 대기하고 있는 상태, 기차가 지나가는 선로처럼 시간은 하나의 선로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여기에 어떤 폭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걸 과거로 보면 과거로부터 일직선으로 쭉 가는 거예요. 일직선으로 가게 되면 이게 선분이 되거든요. 선분이 되면 여기에 숫자로 매길 수 있는 그런 조건이 마련됩니다. 이걸 ‘연대기’라고 해요. 연대기를 측정할 수 있죠. 그런데 이게 바로 땅 위 시간 속에 있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시간의 중첩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이것이 이렇게 미래로 나아가야 할텐데, 이게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시간 개념인데, 위로 나아가는 거예요. 위로 나아가면 마치 탑처럼 일어난 일, 거기에 더 보태기, 또 보태기…, 일본의 홋카이도에 눈 오듯이 눈 온 것에 또 1미터 오고 또 눈 쌓이고, 쌓이는 거지요. 눈 덮인 들판에서 오겡끼데스카(거기 잘 계십니까!)

이렇게 자꾸 위로 올라가는, 시간이 중첩이 되는 현상을, 다니엘은 이것도(수평적 시간) 보여주고 이것(수직적 시간)도 보여주고 둘 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기차는 수평적으로 달리는데 목적지는 위쪽이다? 이게 말이 돼요? 수평으로 달리는데 어떻게 도착점이 어떻게 수직이 되겠습니까? 안 되겠죠.

왜 그런가? 수직적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는 이것이 꿈으로서 이미 선행되었기 때문에, 이 꿈을 이렇게 좍 밀어버리면 이게 엎어지겠죠. 엎어지게 되면 먼저 수직으로 세상 끝날까지 이어지는 것,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높아지는 거예요. ‘시간은 흐른다.’가 아니라 시간은 점점 갈수록 탑처럼 높아지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이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시간을 눕혀버립니다. 눕혀버리면 여기 추가적인 중첩된 내용이 계속 이어지게 되는 거예요.

다니엘 2장에서 꿈의 내용에 금신상이 나오죠. 금신상은 어쨌든 간에 수직적으로 서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금신상을 만들어놓고 이걸 눕혀버리면 신상의 머리부터 금, 은, 그 다음에 놋, 철, 그 다음에 ‘철+진흙’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걸 세우면 금신상이 되고 이걸 눕혀버리면 느부갓네살 이후에 진행되는 역사가 되죠.

이 역사는 어떤 역사냐? 이 점이 참 중요해요. ‘이미 확정 난 역사’ 이미 확정 난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에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로봇이 되기 때문에, 인간의 선택과 결정은 아무 의미 없기 때문에 인간 쪽에서 이걸 아주 강력하게 거부해요. 확정 난 역사가 이미 고정적입니다.

왜 이게 확정되어 있느냐? 이걸 세워보면 알아요. 결국 밑의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끝까지 채우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래서 확정된 거예요. 끝나기로 확정된 역사를 인간은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시작이 느부갓네살부터 되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느부갓네살 속에 들어왔던 꿈, 느부갓네살을 지배했던 꿈이 느부갓네살을 다루고 있는 거예요.

이 꿈의 내용은 뭐냐? 이미 느부갓네살을 통해 끝장을 보기로 확정된 내용이 그 꿈의 내용이고 그것이 현실로 펼쳐지는 겁니다. 확정돼서 펼쳐지는 거예요. 펼쳐질 때 ‘꿈대로 다 됐네, 뭐가 문젠데?’ 여기에서 끝이 확정된, 그 끝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시대마다 활동하게 만들어요.

다니엘 3장에 누가 나오냐? 다니엘의 세 친구가 나옵니다. 그때 다니엘은 어디에 있었는가? 뭐 어디 출장 갔겠죠. 다니엘은 없고 세 친구가 등장합니다. 세 친구가 보여주는 것은 뭐냐? 모든 역사가 끝이 되었을 때 그 끝난 현상과, 지금 끝이 아닌 역사 속에 있는 것과 얼마나 큰 괴리, 즉 간격이 벌어져 있다는 것, 인식이 벌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 속에 들어갑니다. 자기들이 자진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불을 질러놓고 강제로 집어넣어서 불 속에 들어갔다, 이 말이죠. 다니엘 세 친구를 공격한다고 기껏 준비된 현실이 불이라면 이 불 끝부분에 불과 관련된 그러한 끝이 이미 인간 속에서는 시작을 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어렵게 제가 말씀을 해서 죄송합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끝을 끝 되게 하기 위해서 인간 쪽에서 준비한 것은 불이고, 그 불로써 인간은 다 불타버린다, 이 말입니다. 다 불태워집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내가 열심히 하는 그 일이 나를 계속 망하게 한다.’ 내가 열심히 하는 그 일이 나를 망하게 한다, 나로 하여금 끝장 보게 한다, 내가 하는 일이 나로 하여금 우상 숭배자라는 것을 들춰낸다.

이게 뭐 교직이 됐든, 농사가 됐든, 고기를 잡든, 장사를 하든, 목사가 되든, 백수로 놀든 간에 열심히 하고 있는 그 일이 나로 하여금 ‘끝내 이기리라.’가 아니라 ‘끝내 망하리라.’로 만드는 그 충실한 절차에 우리는 충성스럽게 봉사하고 있고 참여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망하게 하는 일에 우리가 열심을 다 하고 있는 거예요.

특히 어린이집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어린이집을 열심히 하면서 이 어린이집이 나를 망하게 하는 이유들을 나에게 다 보여주는 거예요. ‘이래서 너는 안 되는 거야, 이래서.’ 평생토록 아무 직장도 없이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주부를 했다면 ‘주부 했기 때문에 그래서 넌 망해도 마땅한 거야.’라는 그 일에 본인들이 종사하고 있는 거예요.

왜? 우리 각자가 탑이니까, 우리가 바로 금신상이니까요. 느부갓네살이 우리의 모델이거든요. 느부갓네살이 했다면 우리가 그걸 그대로 지금 하고 있는 중입니다. ‘나를 빛내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그 일을 멈출 기미도 없고, 멈출 생각도 없고 나는 내 일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리라.’ 느부갓네살의 이 짐승의 본성이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다 퍼져 있어요. 다 퍼져 있습니다.특히 해외 나가서 유네스코 이런 데서 봉사하는 것.

제가 언제인가 수요 설교 시간인가, 퀴리 부인의 집안에서 노벨상 여섯 개 받았다고 했죠. 여섯 번째 상이 노벨 평화상인데 그게 누구냐 하면, 퀴리 부인의 둘째 딸 이브 퀴리의 남편이에요. 헨리 라부이스라고 유니세프(UNICEF, 국제연합아동기금) 대표로 활동하면서 노벨 평화상 받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노벨상 여섯 개 받고 노벨상 받은 그것이 자기를 지옥 가게 만듭니다.

한강 작가의 그 노벨문학상도 마찬가지예요. 열심히 하는 거예요. 왜? 그래야 망하니까. 감사해야 할 것은 망하는 코스를 하나님이 알려줬다는 데서 감사해야 돼요. ‘아, 나 어떻게 망하는지를 몰라.’ 아니에요. 지금 내가 너한테 허락한 모든 것이 너를 망하게 하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 나를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알아채게 하시는 데서.

어떤 일을 해도 인간의 기억 속에 자기가 행한 일을 잊을 수 없다는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상성을 띄고 있습니다. 어느 댓글에 제가 이렇게 했거든요. ‘인간의 육신은 우상성이 된다.’ 했어요. 인간이 육신이 있다면 반드시 이게 우상화가 되게 되어 있어요. 우상화가 되고, 우상성을 갖고 있고, 그게 돌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라고 했어요. 그 우상성의 돌을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이 우상성에서 하나님에 대한 만남이 있거든요? 다니엘에 보면 만나잖아요. 어제 이야기 한 거 더 해 볼까요? 바다에서 괴물들이 올라왔다, 이 말이에요.

괴물의 특징은 물어뜯는 거고, 무너뜨리는 거고, 부서뜨리는 거예요. 괴물의 본성이 그러니까요. 괴물 자체의 본성이, 괴물이 하는 일이 그냥 닥치는 대로 다 무너뜨리는 거예요. 무너뜨릴 때 시간을 타고 무너뜨리는 거예요. 점차 순서가 있는데 두 번째는 첫 번째를 그대로 무너뜨리고, 세 번째는 첫 번째 두 번째를 무너뜨리고, 네 번째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그 모든 것을 합류해서 무너뜨리는 식이에요. 다 무너뜨려요.

그 무너뜨림의 끝은 어디인가? 끝에 누굴 무너뜨립니까? 바로 이 땅에서 천국 이루러 오신 예수님을 물어뜯는 거죠. 무너뜨리는 거예요. 이게 모든 인간 속에 다 들어있다, 이 말입니다. ‘내가 신인데 네가 왜 신이어야 돼? 나는 내 말을 들어. 네 말을 듣는 게 아니고 나는 내 말을 듣는다고. 나도 클 만큼 컸으니까 나보고 교회 가라고 하지 마세요. 내가 신이기 때문에 판단과 결정은…,’

다시 말해서 마지막이라는 게 뭐냐? ‘…그 대미를 멋있게 장식하는 그 마지막은 내가 정하고, 그 마지막에 내가 폭죽을 터트릴 때가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내 코스가 있는 이상은 부모라고 할지라도 여기 관여하지 마세요. 내가 신입니다.’ 이 말이에요, 모든 인간이 그래요.

제 이야기를 듣고 “아이고, 목사님! 우리는 교회 다니고 복음을 알기 때문에 당연히 신이 아니겠지요.” 복음을 믿는 그것이 여러분을 망하게 할 겁니다. 복음을 알기 때문에 그것이 여러분에게 우상이 될 거예요, 복음을 안다는 것. 그러니까 복음을 아는 우상이 되었다는 이 사실을 여러분, 기뻐해야 돼요. ‘아, 참 주님께서 친히 손대고 있구나.’ 하는 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따라서 다니엘 세 친구는 자신의 마지막을 본인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아, 이래서 내가 가는구나.’ “너 그 우상에게 절 안 하면 죽어. 법대로 하는 거야. 너 불 속에 들어가 죽는 거야.” 하니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주의 뜻이기 때문에 그건 내가 신경 쓸 거 없고, 주님이 알아서 할 거고, 주님이 알아서 해서 주님께서 구원하든지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내가 여기에 대해 절할 하등의 이유는 없습니다. 우상 만들어놓고 절하는 것은 너나 하세요. 너나. 나는 절하지 않는 일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누가 착하냐’ 하는 것은 둘이 따져서 될 문제가 아니고, ‘어느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우리 선에서의 입장이 아니고 당신은 우상 만든 식으로 끝내고 나는 우상 섬기지 않는 대로 끝내고, 다 끝난다는 점에서는 차등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균등화 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니 순교라는 것은 성립이 되지 않죠, 순교라는 게. 그냥 할 일을 하면서 망할 뿐이지 무슨 거기 순교라는 게 성립됩니까? 순교라는 것도 악마의 유혹이라는 것을 우리가 늘 잊지 말아야 돼요. 자식이 교회를 안 간다. 부모가 되어서 자식이 교회 안 가는 것에서 부모하고 자식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교회를 가든 말든 부모가 왜 관여를 하죠? 관여할 때부터 수상하죠. 그런데 부모가 아니라 신자로서 교회 가라고 이야기한다, 신자로서 교회 가라고 한다는 이건 부모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죠. 주의 일입니다. 내 가족이기 때문에 내 씨족 사회, 내 가족에 애착을 가지고 뭘 해 보겠다는 그것도 우리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죠. 이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 가지 말라고 해야 하느냐? 교회 가라고 할 때 주의 일의 차원에서 이야기해야 하지요, 주의 일의 차원에서. “이게 내 할 일이야. 너 보고 교회 가라고 하면서 내가 망할게. 너는 교회 안 가면서 망해라.” 둘 다 망하기는 마찬가지예요. “교회 가면 복음 듣고, 잘도 되고…” 이런 식으로 미끼를 던지지 마시고 나는 교회 가라고 하면서 망하고, 너는 교회 안 가면서 망하고, 망한다는 점에서 둘 다 어느 지점에 있다? 이미 끝 지점에 있다. 끝 지점에 있는 거예요.

끝 지점에 있다는 말은 어떻다는 뜻입니까? 이제 여러분이 공부했으니까 알겠죠. 끝 지점에 있다는 것이 뭐냐? 이 모든 시간은 날아갔다는 뜻이에요. 이 시간은, 어떤 시간이 되던 끝의 반복이에요. 그래서 주일 낮 설교 끝부분에서…, 시계를 보면 막 시간이 끝나가니 급하게 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끝 지점에서 시간을 슬라이스, 자른다고 했죠. 시간을 잘라요. 마치 끝날 때 카운트가 막 끝나기 직전처럼 현재 모든 시간은 이틀 치를 허락받지 못하고 하루치만 받는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슬라이스를 해 주는 거예요. 끊어주는 거예요. 칼로 자르듯이 시간을 잘라주는 거예요. 왜? 우리가 시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시간의 조각들이고 파편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끝 지점, 끝의 모양새를 보여줄 책임이, 그런 사명이 오늘날 성도에게 있습니다. 뭘 해도 우리에게 오늘이 끝이라는 것을 기쁘고 즐겁게 나타내면 되는 거예요. 내일 죽는다고 치고 오늘 뭐 할 거냐? “자식들아! 교회 가거라.” 이게 뭐냐 하면 본인 자체가 나는 이미 끝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니엘 세 친구는 아무것도 잘한 일이 있을 리가 없어요. 아무 잘한 일이 없어요. 그냥 맡기는 거예요, 끝이니까. 자기의 시간은 남아있지 않고 자기는 끝부분에 있으니까, 끝부분을 소개하기 위해 이 시대에, 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착각의 시대에 이 끝을 가지고 투입 시키는 거예요. 이건 마치 꿈이 어디 속에 투입된다? 아직도 현실이 전부라고 여기는 그 속에 현실 바깥에 있는 꿈의 내용이 현실 속에 삽입되어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죽일 때 “제발 좀 신상에 절 좀 해라. 고개 한번 숙이는 그게 뭐가 어렵냐?” 다니엘 세 친구에게 처음부터 너 죽인다고 그러지는 않았을 거란 말이죠. “부탁한다. 너에게만 특혜 줄 수는 없다. 법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인 너희가 훌륭한 건 아는데 우리가 오래 살아서 같이 일하자. 네가 만약에 고개 숙인다면 너의 동료 고문들도 ‘야, 우리가 같은 공동체다.’ 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수용할 것이고 남한테 인정받으면 너도 일하는데 수월하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그게 뭔데? 일반 서민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또 고려해야 하는 그것이 왕의 입장 아니겠어? 그런 것 고려해서 그냥 한 번 고개 까딱, 딱 여기까지만, 절한다고 할 것도 없이 갑자기 자연스럽게 ‘목 운동 한번 해볼까?’ 하는 식으로 찰칵 사진 찍듯이 그냥 넘어가면 되잖아.”라는 식으로 온갖 회유를 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다니엘 세 친구의 주장은 뭐냐? “끝났습니다. 끝이 아닐 경우에는 그런 짓을 하면서 갖은 요령을 부리겠지만 이미 끝난 입장에서는 그딴 게 다 의미 없습니다.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끝이라는 것 그거뿐입니다.” “그래? 끝이야? 그러면 우리의 끝도 한번 보여줄게. 네가 끝이다. 불 질러라.” 불을 질러서 끝을 보여줬죠.

그래서 드디어 불속에 들어갔습니다. 그 끝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네 번째 사나이가 등장해요, 네 번째 사나이. 끝에서 네 번째 사나이. 이것은 다니엘 세 친구도 예상 못 했어요. 자기들은 그걸로 끝났어요. ‘아, 주께서 우리를 이렇게 망하게 하는구나, 불 속에서.’ 했는데 여기서 다니엘 3장 봅시다.

다니엘 세 친구를 불에 집어넣는 이 이야기에서 보통 교인들 입장에서 안타까운 게 뭐냐? 다니엘에게 그런 혜택을 받았으면 이제는 좀 정신 차리고 우상 만든다든지 이런 짓은 좀 안 했으면 좋겠는데 얼마 지났다고 또 이렇게 우상 만들어가지고 애꿎은 다니엘 세 친구까지 죽게 되는 이런 결과를 낳을 때 왜 하나님은 성도로 하여금 이 땅을 힘들게 살도록 하느냐?

그리고 성경에서 다니엘 세 친구가 참 대단하다고 하지만 그다음에 교인들에게 다가오는 불안감은 뭐냐? 만약 지금이라도 예수 믿으면 불에 태워진다고 할 때 우리가 다니엘 세 친구같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단 3:18) 크게 외치면서 경찰에 잡혀갈 수 있는 그런 용기는 없다는 데서 우리의 정체성에 혼란을, 정신분열증을 또 일으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알아야 돼요. 끝부분에 있는 사람은 계속 끝부분이 오기 때문에 우리가 미리 계획하거나 예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상한 대로 살게 되면 내가 하는 요령이 투입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내일 일을 예상 안 하고 주에게 맡기면 내일을 대처하는 방법조차도 주님의 지시가 주어지지 내 뜻이 거기에 개입되지는 않아요. 그걸 여러분, 믿으셔야 합니다. 믿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SKY에 들어갑니다. <스카이캐슬>이거든요.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이 부모님들아!”

내일 되면 내일 치의 요령과 방법까지도 주께서 주실 거예요. 왜? 매일 슬라이스, 매일 시간이 끝이기 때문에. 어느 장소에서 무슨 말을 할까를 염려하지 말라는 게 마태복음 10장 이야기죠.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9, 20).

‘어떤 경우라도 네가 말하지 않게 하고 네 속에서 말하시는 이는 너희 속의 성령입니다.’ 분명히 이게 성경에 나오는데 또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교인들이 마귀라, “성령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또 걱정이 늘어져요. “성령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이 없으면 요령껏 하겠죠. 그래서 뭐 또 밥 먹고 살겠죠. 그리고 또 행복하겠죠. 뭐? 그렇게 살면 되잖아요. 성령이 없으면 성령이 없는 채로 망하면 되잖아요. 왜 그런 용기가 없습니까?

그래서 이 다니엘 세 친구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요. 다니엘 3장 15절 끝에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그러니까 “좀 절해라. 너희를 이렇게 풀무 속에 집어넣고 구원할 수 있는 신은 있다, 없다? 없다!” 이게 바로 인간의 시간 속 인간들의 현실을 대변해 주고 있는 발언입니다. 이 현실을 우리가 견디셔야 됩니다, 이 현실을.

맨정신으로 살면 뭐가 없고? 신은 없어요. 신은 없다. 어깨 아프면 풀어주면 되지, “작은 귀신이 두 마리 있습니다.” 이래서는 해결이 안 되잖아요. 왜 귀신이 거기에 낍니까? 그거 빼야죠, 과학 시대인데. 맨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것이 합리적인 정신이기 때문에 신이 필요치 않습니다. 신이 필요치 않아요.

그러면 하나님은 계시고 우리가 맨정신일 땐 뭐로 바꾸면 돼요? 맨정신을 뭐로 바꾸면 됩니까? 미친 정신으로 바꾸면 되잖아요. 미치면 사는 거예요. 미쳤다는 것은 내 맨정신을 아낌없이 포기했다는 겁니다. 맨정신을 포기한 거예요.

그런데 포기할 수 있는 그 동기를 부여한 것은 하나님이 살아있기 때문이에요. 미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어요? 다 맨정신으로 살고 싶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서 미친 사람이었잖아요. 그런 소리 들었잖아요. 말씀 자체가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미친 사람이 우리 속에 들어오니까 같이 미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미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어느 정도로 미치면 됩니까?” 또 미치는 걸 미리 준비하고요, 뭐 시험 칩니까? 미침의 레벨이 있어요? 그때 가면 미치는 게 나올 거예요. 염려하지 마세요. 그때 되면 ‘아, 사람이 이렇게 정신 나갈 수가 있구나.’ 그럴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타이밍이 미칠 수밖에 없는 타이밍, 그래서 우리 정신은 우리 관리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니엘 세 친구가 불속에 들어갔다는 말이죠. 들어갔는데 느부갓네살이 놀랐습니다. 24절에 “우리가 분명히 세 사람을 넣었는데, 왜 세 사람이 아니고 네 사람이냐?” 그것은 세 사람의 친구들과 마지막에 나타날 네 사람이 평소에도, 불속에 들어가지 않았던 평소에도 세 사람과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 사실을 동행하게 되는 다니엘 세 친구도 몰랐어요. 그냥 주어진 환경대로 사는데 네 번째 사람이 만들어낸 그 환경 속에 우리가 미리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이걸 어제 잠시 언급했어요. 필드(field), 장이라고 해요. 영역개념입니다. 내가 뭘 하는 것이 아니고 유리 캡슐처럼, 비눗방울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있어요.

현대 생물학이나 물리학에서도 이걸 이야기해요. “모든 기관들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그걸 파악해서 세포의 기능을 알 수는 없다. 세포는 세포 장(field)이 있어서 그 장(field)이 하는 대로 모든 기관이 반응할 뿐이다.” 물리도 마찬가지고 생물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이것들 하나하나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알 길이 없고 장(field), 에너지 장이죠, 에너지 장(field)에 맞춰서 기관이 있지, 기관이 활동한다고 해서 에너지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발상해서 과학이 완전히 신학으로 들어갑니다. “설명할 수 없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 기존의 방식을 바꾸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이거 노벨상 받겠어요? 못 받죠.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이 말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걸어가기에 홀로 걸어가는 것 같지만, 사람들이 홀로 걸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투명한 동그라미 속에서 다 걸어가고 있다.” 지금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이게 맞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은 그냥 전체로 하나의 동그라미 속에서 자기들끼리 사는 거예요. 감옥 속에 갇혀 있는 겁니다.

감옥의 장(field)이 인간으로 하여금 무섭고, 두렵고, 떨리고, 초조하고, 불안하게 이렇게 살게 하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시간적으로 끝장난 세계 속에 그냥 갇혀 있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확인하느냐? 주님이 이 세계에 다녀가면서 확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니엘 세 친구는 뭘 보여준다? 끝을 보여준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는 뭘 보여준다? 이 시대가 이미 끝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끝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끝 지점에 올라가서 아래 지점을 다시 내려다보면, 비록 미래는 모른다고 할지라도 끝 지점에서 보면 가봤자, 가봤자 이미 일어난 일의 반복이고 되풀이고 확장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 시대에 살았던 다니엘 세 친구는 알게 된 겁니다.

이 모든 일은 네 번째 분이 저지른 일이고, 우리는 그 분이 하는 영역 속에, 필드 속에 놓여 있다는 거예요. 이게 3장의 내용입니다. 자, 이쯤 했으면, 이쯤 했으면 인간적으로 느부갓네살이 정신 차려야 되지 않습니까? 정신 안 차립니다. 정신 안 차려요. 정신 차린 것처럼 뭔가를 이렇게 해도 그것은 하나의 예의상 해 주는 거예요.

다니엘 4장 4, 5절 “나 느부갓네살이 내 집에 편히 있으며 내 궁에서 평강할 때에 한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두려워하였으되 곧 내 침상에서 생각하는 것과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을 인하여 번민하였었노라” 이 4장의 내용은요, 앞에 있었던 2장의 내용과 중첩이 되게 되어 있어요. 역사라고 하는 것은 주어진 씨앗이 점점 더 그 외형을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씨앗이 갖고 있던 그것이 양파 껍질이 붙고 또 붙는 식으로 덧붙여지는 것처럼 계속 확장이 되는 거예요.

꽃다발 위에 꽃을 또 추가하는 것처럼 엎친 데 덮치는 것으로, 콘크리트를 타설하고 거기에 더하여 또 타설하는 것처럼 핵심을 계속해서 확장시켜 나가고, 자체적으로 생성해 가는 방법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꿈 해석도 마찬가지예요. 처음의 꿈은 뭐냐? 꿈의 내용 자체를 몰랐는데 꿈의 내용 자체를 알려주고 해석까지 했잖아요.

두 번째는 뭐냐? 꿈 내용을 알려줘요. 그 꿈의 해석, 왕의 꿈을 해석할 때 왕의 국가 경영 정책에 대해서 보좌하는 다른 박사들이 어떻겠습니까? 수월하겠습니까,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훨씬 수월하죠. 이바구만 잘 떨면 되니까요. 이미 나와 있는 내용이니까 해석을 좋은 쪽으로 해주면 되잖아요. 그럼 자기 목숨은 건지잖아요.

아예 꿈이 무슨 내용인지도 모를 때는 이게 기가 찰 일입니다. 그런데 이미 꿈의 내용이 나와 있을 때는 그 꿈의 내용을 가지고 적당하게 그냥 멋지게 해석하는 겁니다. “그런 겁니다. 임금님 앞뒤 맞죠? 그럼 그냥 넘어갑시다.” 넘어가면 되잖아요. 더 수월할 것 같은데 이게 더 수월한 게 아니에요.

다니엘 4장 6절에 “이러므로 내가 명을 내려 바벨론 모든 박사를 내 앞으로 불러다가 그 꿈의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매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가 들어왔기로 내가 그 꿈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나 그들이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못하였느니라”

아, 이것은 저번 꿈 못지않게 그 해석이 어렵네요. 그들이 꿈 해석을 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했겠죠.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그냥 수월하게 못 들은 척 넘어가면 되는데 퇴짜를 놓습니다. “아니야. 그 해석 아니야. … 아니야 아니야 그 해석도 아니야. 내가 알아. 뭔지는 모르지만 그 해석은 아니야. 나는 딱 느낌 아니까. 그거 아니야.”

목사님들이 설교를 할 때 힘든 것 중 하나가, 그럴싸하게 은혜롭게, 진짜 은혜 충만하게 설교를 해도 성령 받은 교인들의 마음속은 뭡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거 아니에요.’ “그럼 당신이 설교하지.” “나는 설교는 못 하는데 아니라고 하는 것은 낌새를 잡습니다. 그건 아니에요.”

“설명해 보라니까!” “설명은 안 된다니까? 설명은 안 되니까 당신에게 묻잖아요. 설명은 못 하는데 이상스럽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은혜로운 거 맞고 고마운 줄 알겠는데, 굉장히 긍정적으로 논리를 펼치는 건 고마운데 이상하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럼 뭡니까?” “글쎄 그걸 몰라서 답답하다니까, 그래서 지금 번민하고 있다니까요.” 목사님들은 ‘어쩌라고. 나보고 어쩌라고?’ ‘아니야, 아니야. 영 성에 안 차.’

그러니까 이게 수월한 게 아니에요. 꿈을 모를 때도 쉽지 않았지만 알면서도 그 해석이 쉬운 게 아닌 것이, 느부갓네살은 역사를, 현실을 만들어가는 하나의 대표자로, 샘플로서 하나님이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기뻐했다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고 내놓은 그 해석이 모든 남아있는 역사에 대한 펼쳐진 현실과 합치되기 때문에 또다시 다니엘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다음에 나와요. “다니엘아, 네 속에 은밀한 분이 계시잖아. 네 속에 은밀한 분이 계시잖아. 따라서 네 해석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고 네 속에 계신 분이 이 꿈에 대해서 뭐라고 해석을 내려 주느뇨?”라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십자가 마을 교인들도 앞으로 대화할 때 이렇게 대화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카페에 가서 “뭐로 할래?” 이렇게 다짜고짜 묻지 마시고요, “당신 속에 있는 은밀한 분이 카푸치노를 원하든가요, 아메리카노를 원하든가요?” 이렇게 물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렇게 묻기가 힘든 게 너무 번거롭잖아요. “뭐 먹고 싶어?” 이게 간단한데 “이번에는 뭐 먹고 싶은데? 전에는 카푸치노 먹었잖아.” “아니야. 오늘 기분이 그게 아니야. 느낌이 카푸치노 느낌이 아니야.” ‘짬뽕이냐, 짜장면이냐’ 다 마찬가지입니다. 은밀한 분에게 물어보세요, 은밀한 분에게.

은밀한 분이 제시를 하는데 여기서 뭐가 있느냐? 마태복음 13장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3장 비유, 하나의 겨자씨를 뿌렸는데 뭐가 컸다? 거대한 나무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느부갓네살은 무엇의 모형이 되었냐 하면, 나중에 지상에 예수님이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앞당겨 샘플로서 보여준 인물, 느부갓네살의 대제국이라는 거예요.

왜? 신상이 몇 개입니까? 전 세계를 통해서 신상이 몇 개예요? 단 하나, 그 시작은 느부갓네살. 왜 느부갓네살이 시작점이 됩니까? 비언약을 삼켰으니까.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언약이 그 바벨론 나라에 삼킴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전 이방 민족이 언약 체제의 재료가 되는 그 시발점이 바로 느부갓네살이에요.

이제는 이방인들도 언약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그 시간대에 들어온 겁니다. 그때가 언제냐? 끝날 지점에, 이스라엘 말고 구원받을 유대인,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언약에 참여해서 함께 천국 백성이 될 그 시점이 끝 날에 주어지는 겁니다. 그 끝 날은 이제 다음 시간에 줄줄이 해야할 최고의 난제 70 이레, 70 이레는 다니엘의 계시에 의해서 밝혀질 겁니다.

‘이 지상의 시간이 끝 날까지 어떤 역사가 이어지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건으로 중간중간 단절 사건이 일어나는가?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시간은 슬라이스, 잘려진다. 잘려질 때마다 거기에 사건이 개입되고, 그 잘려지는 70 이레 사건을, 그 함축된 일을 한 몸에서 다 보여주는 분이 예수님의 육신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육신은 누워있으면 인류의 전 역사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 육신, 그 시체가 누워있던 발치에 누가 있어요? 천사. 머리맡에 누가 있어요? 천사. 예수님의 시신이 부활되고 난 뒤에 빈자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사는 발치와 머리, 양쪽에 있으면서 이미 다 이루었기에 여기에 누가 누웠다가 사라졌다는 것을 천사 둘이 마리아에게 소개하고 있죠.

빈 무덤의 구조로 이 현실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것은 이 세상 자체가 무덤이었다는 거예요. 주께서 무덤 속에 들어와서 무덤을 헤치고 무덤 바깥으로 나오시는 그 일을 예수님이 하신 겁니다, 천사는 위에서 개입되어 있고. 이게 전부다 언약의 완성과 관련되어 있겠죠.

그래서 다니엘 4장에서 해석을 해 주는데 한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가 둘이 아니고 한 나무입니다. 하나밖에 없는데 그 나무의 끝은 어디에? 하늘에 닿았다, 나무의 끝은 하늘에 닿았습니다. 임금님의 바로 하나밖에 없는 제국의 끝이 하늘까지 닿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 등장하느냐? 순찰자예요. 이 다니엘 해석에 있어서 또 하나의 변수 또 하나의…, 인간입장에서는 독립 변수에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종속 변수이지만, 이 변수가 하나 딱 등장합니다. 순찰자가 딱 등장해요. 순찰자는 거주하지 않는다는 그런 기초가 되어 있죠. 거주하지 않고 그냥 순찰하는 사람, 일종의 드론이죠. 하늘나라에서 띄운 드론이 살피고 갑니다. 순찰하고 보고하기 위해서 다시 원래 왔던 하늘나라로 되돌아가는 거죠.

순찰자가 옴으로서 뭐가 바뀌느냐 하면, 인간의 왕, 인간 세계의 주도권이 순찰자에게 바뀌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하늘의 먹구름이 가까이 인간의 수평적 시간 위에 그만큼 전보다 한층 더 가까이 당겨졌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당겨졌다는 말은 높이 있는 끝이, 먹구름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져서 지평에 가까이 다가오는 식으로 끝에 일어나는 사건들이 곧 일어날 낌새를 가지고 가까이 와있다는 겁니다, 가까이 와있는 거예요.

그걸 먼저 느부갓네살이 맛봐야 되는 거예요. 꿈의 무게죠. 꿈이 주는 무게입니다. 이 낌새를 아니까 박사들이 이야기한 것은 다 퇴짜 놓는 거예요. “아니야. 그 해석 아니야. 그렇게 안일한 게 아니야. 그 해석은 나도 지어내겠어. 심각해. 뭔지는 모르지만 내가 예상한 이상으로 심각해.”

바로 끝을 보여주는 그 심각함을, 이 먹구름을 느부갓네살이 이제는 감을 잡습니다. 그 순찰자에 의해서 70 이레와 관련된 내용이 나옵니다. 16절,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무슨 마음? “짐승의 마음을 받아” 그다음에 무슨 때? “일곱 때를 지나리라.”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니 곧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라고 되어 있어요.

어떻습니까? 지금 바뀌었다는 뜻이에요, 가까이 왔다는 거예요?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 곧 먹구름이 폭풍우가 될 것 같아요. 가까이 와 있다, 가까이 와 있는 그 징후를 느부갓네살 몸 하나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느부갓네살에게 왜 이 징후가 오느냐? 그 이유가 뭐냐, 하고 물으신다면 하나밖에 없는 나무, 하늘까지 닿았던 모든 인간의 권세, 하늘까지 닿았던 유일한 사람이 느부갓네살이기 때문에 그래요.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모델이 되는 겁니다. 모든 권세자보다 뛰어난 권세자, 하늘까지 권세가 뛰어났던 그자가 어디까지 낮아진다? 짐승까지 낮아지는 거예요. 짐승까지 낮아지는데 거기 누가 관여했습니까? 순찰자가 관여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순찰자는 뭐겠습니까? 마태복음 13장에 마지막 때 인간을 심판하는 것은 천사 담당이거든요, “심판하시는 천사가 마지막에 인간 세계를 휘젓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6장, 7장, 8장의 이야기입니다. 천사들이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자기 활동을 활발하게 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조금만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4장 22절,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 그런데 왕이 깨달아야 할 것은 왕은 하나님이 주셨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 32절,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니”

33절에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었느니라” 자, 이 모양새가 사람 모양새입니까, 짐승 모양새입니까? 짐승 모양새죠.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은 ‘이 세상에 인간 같은 인간은 없고 짐승의 마음을 닮아있다, 짐승 같은 존재’라는 것을 창세기 2장의 원칙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지독하게 끈질기게 인간의 실체를 느부갓네살을 통해 보여주게 됩니다.

드디어 35절,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땅의 모든 거민들이 어떻게 됐다고요? 없는 것같이 되죠. 그러면 어떤 경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끝이 될 때는 땅에서는 주민이 없고 구원받을 자는 하늘나라로 이미 다 빼돌린 이후이기 때문에 땅에서는 있어도 없는 자로 전부다 모든 것이 마감이 된다, 이 말이죠.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은 결국 땅으로, 짐승으로 내려갈 거예요. 순찰자가 순찰을 철저히 하기 때문에 결국 망합니다. 그런데 이 계통, 끝을 알고 계신 분이 만약에 이 땅에 와서 인간 세계를 다스린다면 이미 끝부분에서 왔기 때문에 그 나라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의 나라, 언약의 완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미리 느부갓네살의 바빌론 제국을 만들고, 그리고 그 제국 다음에 또 다른 제국과 제국을 언급을 하면서 점점 더 인류의 역사는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느부갓네살이라는 짐승의 마음이 동작하고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 계시가 바로 다니엘 계시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다니엘과 세 친구는 뭐냐? 그냥 관람하면 되죠. 자기는 이미 끝부분에 와 있기 때문에 “구경 한번 잘했네~” 이런 식으로 중첩된 양쪽을 다 아는 마음에서 시간의 끝과 그 끝에 이르기까지 시간은 어떤 절차를 밟는가를 편하게 즐겁게 늘 바라보면서 점심식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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