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3강-다니엘: 출렁이는 정신
(강의:이근호 목사)
세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느부갓네살에 있어서 꿈이 옴으로써 그동안 사람들과 상대했던 느부갓네살이 자기 자신 홀로 있을 때는 자기가 감당을 못했습니다. 명령하고 지시하고 그들의 존경을 받고 그들의 복종을 받는 그 삶을 자기의 정체성, 같은 말로 동일성이라 할 수 있어요.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이게 왕이다. 이게 대제국의 왕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왕의 정체성은 백성들로 둘러싸여 있으면서 자기 정체성을 왕이라고 한 겁니다.
왕, 스스로 인간이죠. 백성, 인간이죠. 인간들의 정체성은 인간과 인간이 같이 있음으로 확립된다. 이것이 현실 세계입니다. 현실 세계는 인간들이 자기 정체성, 자기 동일성을 타인과의 만남과 둘러싸여 있음으로서 그것이 형성되거든요. 현실 세계의 시작은 혈육관계에요. 쉽게 말해서 이건 뭐냐? 가족이죠. 결혼해서 애를 낳음으로서 애를 가진 그 가정, 가족에서부터 자기 정체성과 동일성이 시작이 되고, 그게 확산되면서 현실 세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제 이야기한 것처럼 서론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었는데 초반에 나온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이 현실 세계의 동일성이 현실 바깥에 있는 꿈의 침입으로 인하여 뭐가 깨어지는가? 동일성, 정체성이 깨어져버려요. 그래서 느부갓네살에게 주어진 것은 정신분열증 증세에요. 내가 누군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정신분열증 증세를 다니엘 2장에서는 짐승의 마음이라 한 겁니다.
짐승의 마음이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넷째가 뭐라 했습니까? 로마 이후에 B.C.168년 이후에 현재까지 이어지는 로마시대 이후에 로마라는 단일국가지요. 단일국가에 소속된 구성원들, 백성들의 마음이 모든 인간들 내부에서 발작을 일으키고 있다. 이거는 바로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은 출렁이는 파도와 같다. 어느 면에서? 비물리적인 면, 비물리적인 것을 보통은 정신적인 면이라 하는데 제가 정신적인 면이라는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왜 그러냐? 오늘날은 정신적인 면을 물리적인 면의 범위로 확대시켜서 물리적인 면을 정신적으로 풀어내기 때문에 이 정신적인 것은 또 따로 도망을 쳐야 될 판이에요. 왜냐하면 물리학의 공격에서 대상이 안 되는 게 없거든요. 인간의 모든 정신은 두뇌 안에 있는 전기적 신호에 의해서 정신이 나오는 걸로 이미 정리가 돼 있었고 그와 유사하게 나온 게 AI이잖아요. 인공지능(人工智能, Artificial Intelligence)이란 말이죠.
물리학은 뭐로 돼 있느냐 하면 선형적 의식으로 만들어졌어요. 선형적 의식이라 하는 것은 미리 예측이 가능한 거예요. 도표로 하면 하나의 직선이니까 직선이 아니더라도 곡선이라도 다 선형적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선형적이 아닌 것은 비선형적인데 비선형적인 것을 선형적으로 어떡하든 해석해서 이걸 수학에서 구조해석이라 하는데 영적, 동적, 선형적, 비선형적 구조로서 현재 우리가 물리적으로 파악하려는 사실을 그대로 우리 앞에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데까지 물리학은 멈추지 않고 연구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물리학으로 모든 걸 설명하느냐 하면 이것 때문에 그래요. 정체성 때문에. ‘나란 인간은 객관적인 사실을 내가 증명을 함으로써 그것이 곧 나의 주관이 된다.’ 그러면 선형적인 것은 예측이 가능하고 예측이 좀 불가능하고 비례적으로 가중된 힘과 거기에 대한 변이관계가 비례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정복의 대상이 될 수가 있어요. 물리학은 멈추지 않고 계속 정복해 나가니까.
그러면 정복의 대상이 된다면 정신이 뭐가 되겠어요? 정신은 하나의 객관적 탐구대상이 되는 거예요. 객관적 탐구대상이 되어서 물리적으로 다시 말해서 과학적으로 대상이 안 되는 요소가 하나도 없게 만드는 세상, 이것이 바로 동일성, 정체성의 세계인데 현대인의 모습인데 이 정체성의 세계에서 원 모델이 느부갓네살입니다.
느부갓네살을 왜 모델로 세울 수밖에 없느냐 하면 느부갓네살이 비언약이거든요. 하나님의 약속, 율법과 전혀 상관없이 도리어 율법이 있는 유대인을 집어삼킬 정도로 비언약에 성공한 거예요. 바벨론이 전쟁할 때는 어떻게 하느냐? ‘Divide and Conquer’ 정복이 안 될 때는 나누어서 정복하라. 이게 물리학에도 그대로 적용돼요. 비선형적을 분석할 때는 나누어서 정복하라. 순간순간을 정복하는 거예요.
조건이 있어요. 이 비언약적 조건은 주일 낮에도 제가 언급을 했지만 주일설교는 시간이 제한되어서 더 설명을 못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시간의 조각’이다. 땅은 시간이 흐르는 곳이거든요. 그래서 조건이 뭐냐 하면 시간이 계속 우리한테 무한대로 허락된 이상은 우리는 모든 진실과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그 발견된 그것이 나의 정체성의 내용으로 채워지고 채워진다. 단 조건은 시간이 있다면.
시간이 있다면 세상 모든 만물을 증명할 수 있고 공식을 세울 수 있다. 그러한 원칙들을 물리학에서 했던 인물이 뉴턴(Isaac Newton, 1643~1727)입니다. 시간만 있다면 관성의 법칙은 진리다. 뉴턴의 제2법칙에 나와요. 문제는 ‘시간이 있다면’이에요. 그럼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현실 세계에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앞으로 진화하고 발전할 가능성 있으니까 돈이라 하는 것은 가만있으면 안 돼.
시간을 사면 그 시간에 이자보다 더 많은 이율이 시간에 붙어있다는 미래에 대한 예측을 보고 저축하지 말고 계속 투자를 해나가면 내가 나중에 부자가 되고, 그 부자 되었다는 사실이 지금의 나의 동질성과 부합이 된다. 합치가 되는 거예요. 왜 삽니까? 부자 되기 위해서. 어려운 답변 아니지요. 왜 사십니까? 부자 되기 위해서. 언제쯤, 몇 년 뒤에? 시간이잖아요. 몇 년 뒤에는 부자 될 겁니다. 잘 살 겁니다.
그런데 당신은 죽잖아. 죽지만 자식한테 물려주면 되지요. 우리 가문은 빛나니까. 이게 뭐라고요? 혈육관계죠. 씨족사회, 혈육관계, A type에요. 그러니까 부모가 자식한테 집을 사준다. 요새 다들 사주지요. 참 부끄럽습니다. 집을 사준다. 자식이 하는 말이 “아버지, 우리 힘으로 집 살 수 있는데 부모님이 집 사주시면 고맙긴 한데 노후에 지장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뭔데? 가족 아니냐. 가족. 나한테 고맙다 하지 마. 섭섭해. 부모는 그냥 주고 네가 받으면 아버지, 엄마는 그걸로 더 이상 큰 기쁨은 없어.”
그래서 서열이 형성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우리의 안정적인 정체성의 본류에요. 원류가 뭐냐? 혈육의 안정성이에요. 가족입니다. 나라가 어지럽다. 이민 가면 되지요. 혼자? 아니에요. 가족끼리. 요샌 이민 갈 나라가 없어요. 캐나다 후진국이죠. 호주, 뉴질랜드 여자 총리 되고 난 뒤에 엉망 됐지요. 마오리족 데모하지요. 호주는 서양인보다 서쪽에서 온 사람, 인도사람이 더 많아요. 중국. 유럽은 물가 높아서 지금 못 산다고 허리띠 졸라매고 있고, 시리아 난민들 들끓고, 터키 난민들 설치고. 도대체 이 세상에 갈 데가 없어요.
갈려고 하면 말레이시아 가서 국가 지정해준 보디가드해서 한국사람 자기들끼리 살면 되는데 그것도 재미가 없어요. 싱가포르는? 싱가포르는 시민권을 주지를 않아요. 수십 년 살아도 저희들끼리 살아요. 안 돼요. 유럽에 가도 잘 사는 나라는 시민권 자체를 안 줍니다. 두바이도 마찬가지고요. 벌어먹기만 하고 시민권은 안 줘요. 그래서 국민소득이 높은 거예요. 그러니까 갈 데가 없어.
하여튼 혈육관계로서 동일성, 정체성, 내 혈육 가족중심으로 움직이면서 눈치 보기, 창문 열고 바깥의 눈치 보면서 내 가족 챙기는 것, 이것이 바로 뭐냐 하면 자기 정체성 동일시인데 제가 오후설교 때 이걸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맨 정신’이라 했지요. 물리적으로 바깥의 선형적인 질서를 체계를 잡고 절서적이고 안정적인 것이 내 안에 내 정체성의 안정으로 차고 있을 때 우리는 사는 것이 안정적이다, 다른 말로 행복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느부갓네살은 바로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왕이 되고 그들은 백성이 되어서 더할 나위 없이 안정적이었어요. 그게 뭐냐? 비언약적으로. 비언약적으로 안정적이긴 했는데 여기서 꿈이 침입을 했어요. 꿈이 침입을 하니까 뭐가 깨지느냐 하면 안정적 정체성이 깨어졌어요. 정신분열적 증세를 보입니다. 내가 누군지를 모르겠어요. 이 정도가 나였는데 나에 점선으로 돼 있는 추가적으로 뭔가 붙었어요.
여러분, 가끔은 양쪽 어깨가 무겁지 않던가요? 그거는 두 마리의 귀신이 어깨에 앉아서…. ‘귀신이 어깨에 앉아 있다.’ 이게 옛날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정체성, 동질성을 정신병자 되지 않기 위해서 귀신, 영적 존재, 신령한 존재까지 이쪽에서 해석이 가능한 대상으로 본 겁니다. 귀신이 있기 때문에. 귀신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돼요? 주술을 불러서 쫓아내야 되지요.
파푸아뉴기니에서 이상한 병이 돌면 주술사가 마녀 사냥하듯이 그 사람들 죽였다는 거예요. 그 파푸아뉴기니는 형식적으로 기독교 신자가 98%입니다. 그런데 못 살기는 세계 220개국 중에서 196등을 이번에 차지했어요. 그러니까 주술적이라 하는 것은 마녀 사냥은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고 방어하기 위함이에요. 나의 흔들리는 정체성, 구멍 난 정체성을 날 위해서 좀 죽어줘. 이 말이에요.
그래서 타인에 대한 공격은 자기 정신병 되지 않기 위해서 방어적인 본능을 발휘하는 거예요. 거리에 성범죄자가 있다. ‘나라 뭐하냐? 저 인간 좀 죽여주든지 교도소 보내.’ 왜? 우리가 불안해서 못 살겠다는 거예요. 범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로 인하여 자기 주변에 있던 것이 자기의 선형적인 체제에 있는, 예측이 가능한 구조 안에 내 쪽에서 안정적인 나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데 이 느부갓네살은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었다는 말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모든 인간들, 현대인들은 정신분열증 환자입니다. 전부 다.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내가 누군지를 몰라서 계속 내가 누군지를 발굴하고, 체험하고, 찾아가고, 일본 가고 미국 가고 유튜브 찾고, 배낭 메고 유럽 가고. 계속해서 삼십 대까지 돈 번 것으로 배낭여행 가서 내가 누구 게, 하면서 계속 자기 자신이 누군지 정립이 안 되는 거예요.
정립이 안 된 이유를 정신분석학에선 이렇게 합니다. 자기 안에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없다. 또는 다른 말로 아버지가 남긴 개념이 빠져 있는 가운데서 아버지 없이 자기가 아버지 노릇하려니까 새로운 환경에 부합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 젊은 사람들은 본인이 주인공인데 이 주인공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 못하는 주인공이니까 새로 교체를 해나가야 되잖아요. 교체를 해나가려니까 불안하기 짝이 없어요.
새 아파트, 좋은 차, 계속 렌트해서 한 달에 이백 만원씩 벤츠 타고 다니면서 이게 나일까? 끊임없이 내가 누군지를 몰라서 그걸 찾아나서는 것. 회사 때려치우고 바리스타 배워서 카페 한다고 하지만 90% 망하잖아요. 90%는 봐주는 거예요. 95% 망해요. 또 딴 짓하고, 딴 짓하고 계속해서 하는 것이 그게 뭐냐? 정신병의 일종이에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안에 아버지가 없으니까.
아버지란 말은 육신의 아버지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중심 잡아줄 중심개념이 형성이 안 된 거예요. 어떤 난관이 있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돌아갈 수 있는 고향 같은 게 있어야 되는데 그게 없어진 거예요. 이것은 커서도 마찬가지고. 없으니까 외부의 모든 사람의 만남이 친하지만 늘 불안하고, 불안하니까 여기서 공격당하기 전에 공격한다는 선방 날리고, 사기 치고 범죄 일어나고.
왜 그러냐? 그쪽이 나를 해코지 할까봐 싶어서 내가 먼저 공격했습니다. 그런 핑계나 대고. 그럼 남들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르느냐, 하면 남들의 괴로움보다 형사님은 내가 얼마나 괴롭게 사는지 모르잖아요, 이런 식으로. 남 괴로운 건 모르겠고 내 괴로움을 내가 정리정돈하기 위해서 이 비선형적인 세계를 선형적인 세계로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뻥하니 떴지요. 이게 짐승의 마음이에요. 느부갓네살의 마음입니다.
원인은 어디 있느냐? 아버지가 없지요. 우리 아버지 맨날 술 먹고 본받을 것 없고. 그 아버지 말고 본받을 것 없는 아버지 말고 영원한 아버지, 바로 언약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지 않으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박혀있지 않으니까 돌아갈 고향이 없어요.
룻기를 여러분 아시지요. 룻기가 엘리멜렉 집안, 유다 민족에서 모압 쪽으로 이민을 왔던 그 가족과 혼인을 하면서 그 룻이 발견한 것은 뭐냐? 영원한 아버지를 발견한 거예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고, 어머니의 나라가 나의 나라고 나는 어머니의 나라의 백성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나 망했는데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안에서 남자란 남자는 다 죽었잖아. 너도 과부됐고 나도 내 남편 잃고 너도 네 남편 잊고 시집 가. 나 따라오지 말고.”
나오미 하는 말은 간단해요.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하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 맞잖아요. 진짜 아버지잖아요. 망하게 했기 때문에 더욱더 믿음이 가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말씀은 정체성으로 인하여 제공되는 것이지 수고스럽게 내가 만들 이유가 없단 말이죠. 내가 만드는 것은 이건 한계에 이르러요. 새로운 환경 앞에서 내가 만든 것도 아무짝도 소용없는 겁니다. 왜? 인간은 인간의 만남이니까.
인간의 만남을 능가하고 초월할 수 있는 어떤 인간을 만나도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이 가능한 만남을 주께서 주선한다면 내가 기꺼이 그 관계에 내 몸을 던지겠습니다. 나오미도 알았고 룻도 알았고. 우연히 진짜 마침 우연히 보씨 집안을 만나서 발치부터 기어들어가잖아. 이불 속으로. 그게 팔자 고치겠다는 하나의 수법이 아니고 모든 일어났던 그것을 인간 보기에는 우연이지만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입장에서는 말씀의 필연성의 연장이라고 본 겁니다. 하나님 말씀의 체계라고 본 거예요.
그래서 나온 게 뭐냐? 비선형이 나오지요. 원인, 결과로 예측이 가능한 라인은 선형적인 것에서 비선형적인 것, 다시 말해서 혈육적으로 혈육적 관계지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자가 비선형 속에 침입을 해서 나온 것이 바로 다윗의 출생이죠. 다윗이 그렇게 해서 출생했다면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룻이거든요.
이렇게 왔다면 선형적이 아닌 비선형적이라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분도 선형적 세계에서 현실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침입한 비선형적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다음부터 중요한 것은 그 예수님의 비선형적 언약체계가 새로운 우리의 정체성으로 주입될 때 그것을 다윗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완성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교회입니다. 비선형적인 것.
다윗의 자손의 원칙이 그대로 복제를 해서 인간 속에다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무슨 마음이 날아가고? 짐승의 마음이 자리 잡던 그 자리에 짐승을 이긴 예수님의 마음이 자리 잡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중첩적인 두 가지의 세계가 다 같이 함께 있게 되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여기는 아무 상관없고, 내가 안에 들어온 이 두 개의 세계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그걸 나타내는 데 주께서 충실하게 사용할 겁니다.
그 사용된 사람의 공통된 이름을 가져요. 여러분 다 아시겠지만 나름대로 어려워서 설명을 할 수밖에 없어요. 이름은 뭐냐? 이름은 불러준 분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또는 미래적으로 이걸 어떻게 표현할지, 이름이란 최종적으로 또는 미래적으로 이름을 불러줄 때 함께 생겨나는 것이 이름이다. 이름을 지어주고 불러주는 최종적입니다, 최종적. 최종적으로 일치가 될 때 선행적으로 주어진 게 이름이에요.
그러니까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고 다른 이름으론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주께서 우리를 불러줄 때 우리 이름을 불러주는 게 아니고 주님 자신의 이름의 연장된 관계로서 우리 이름을 불러주는 거예요. 주님과 우리가 같이 주의 이름 안에서 만난다 이 말입니다. 그럼 주의 이름을 부르면 만사가 형통하느냐? 아니요. 최후적으로 최종적인 이름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위해서 우리의 관계를 철회하지 않습니다.
왜냐? 부르는 쪽이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광스럽게 하셨다는 로마서 8장 30절 말씀의 그 절차가 주님으로부터 제시됐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꽂혀있으면 더 이상 나의 체계, 정체성, 나의 동일성을 우리가 구성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다니엘 이름이 뭐라고요?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고 사람으로 쳐주는 거예요. 너는 사람이다. 그럼 다른 쪽은 뭡니까? 짐승의 마음을 가졌으니까 다른 쪽은 짐승이 되겠지요.
방금 제가 설명한 것이 다니엘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이거는 맨 정신이 뭐가 됩니까? 정신분열증 증세가 되는데 더욱더 미치는 것은 이 정신분열증 증세가 지금은 자기가 흔들리고 있다는 이게 문제가 아니고 더 큰 문제가 뭐냐 하면 해결책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정신분열증 환자인데 거기에 대해서 내가 어떤 응답을 해야 되는데 내가 응답할 자신도 없고 재주도 없고 능력도 없어요.
일은 터졌는데 나는 어떤 식으로도 해결 안 되고, 남들도 내 마음을 몰라줘요. 그래서 남도 소용없고 바로 남과 관계해서 혈육적 관계부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라는 것을 절대적인 대상자가 나를 구축했는데 정신분열증 증세를 나타내게 되면 여기에 대해서 어떤 해결책이란 건 전혀 없습니다. 그냥 파괴돼 갈 뿐이에요. 시간에 따라서.
그런데 이것이 로마 이후의 모든 인간이 다 이렇다는 거예요. 돈 있든 없던 가정이 화목하든 화목하지 않던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성격이 좋든 나쁘든 뭐 어떤 것도 다 이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해결책을 위해서 정신분석학자, 정신과의사 찾아가고 MBTI 검사, 심리분석. 심리분석을 한다는 자체가 점치는 것과 다른 점이 뭐예요? 심리 분석하는 것은 선형적인 신호에요. 내가 나에 대해서 알겠다는 거예요. 문제가 더 꼬입니다.
강원도 정선에서 감자 캐는 나이 구십 넘은 노인네 정신 분석합니까? 안 하지요. 그냥 아침에 나와서 감자 텃밭 가꾸고, 정선이나 영월 그쪽의 장날에 몇 푼 받고 팔고, 집에 와서 또 낮에는 좀 주무시고 저녁 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그저 남편 따라 가는 거예요. 남편 왜 따라 갑니까? 그 심리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남편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남편을 잊지 못하는 거예요. 내가 나답게 되었던 그 정체성 중심에 먼저 죽었던 남편이 들어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곧 따라갈게.’ 그게 사는 이유입니다.
얼마나 허무합니까? 언약이 없는 세계, 말씀이 없는 세계가 이처럼 살아 있으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차라리 나이 구십 넘었으니 죽으면 좋겠는데 아직도 육체는 멀쩡하니까 정신분열증은 물리적으로도 해결이 안 돼요. 심리적인 분석을 백날 해도 이게 해결이 안 됩니다. 약 먹어봤자 일시적인 현상이에요. 완화시키는 것이지 치료가 되질 않아요.
그래서 정신분석학은 말합니다. 정신분석이 있는 이유는, 또는 정신분석과 반대되는 게 뭐냐 하면 이게 편집증, 편집증도 마찬가지지만 히스테리라는 게 있어요. 히스테리는 자기 안의 아버지가 너무 세. 너무 강해서 뭘 해도 겁이 나요. 아버지보고 물어봐야 되는데. 물론 아버지가 돌아가셨더라도 아버지를 대신하는 남들이 나를 뭐라고 평가할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해놓고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이 기도를 제대로 했다고 응답을 해줄 것인가, 말 것인가 걱정하고 있어요. 그것도 약간은 정신적인 신경증이라 하는데 신경증이나 정신병이나 거기서 거기니까. 제가 어떤 책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를 여러 번 해드렸습니다.
자기가 자꾸 옥수수라고 여겨서 닭은 보고 겁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아서 “당신은 옥수수가 아니고 사람입니다. 이제 믿습니까?” “믿습니다, 믿습니다. 아이고, 이 병원 오길 잘했어요.” 했는데 나가자마자 곧 튀어 들어왔어요. 그 정신병원 앞에 하필 닭이 있어서 나는 내가 옥수수가 아닌데 저 닭이 나보고 옥수수라 해서 물어뜯으면 어떻게 하느냐 말이죠.
이게 웃을 일이죠. 웃을 일인데 모든 젊은 사람들이 다 그래요. 내가 보기에는. 자꾸 주저하고 멈칫거리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그걸 때우기 위해서 술 하고 담배하고 마약했는데 그거는 그때뿐이고 돌아서면 난 누구지, 이러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직장에서 상사가 어떻게 생각하고 이렇게 출렁이는 파도 같아요. 그래서 세 번째 제목을 미리 정해봤습니다. ‘출렁이는 파도’ 도대체 늘 변해요. 고정적이지 않고 안정적이질 못해요.
그래서 이 느부갓네살이 정신분열증 증세를 일으키니까 자기 정체성이 깨져버리니까 뚜껑 열린 거죠. 뭔가 정리가 안 되니까 여기 사각형이 있다면 뭔가 점선이 귀신이 갖다 붙은 거예요. 우리 같으면 그냥 꿈이니까 신하들이, “잊으세요. 그냥 꿈입니다. 한두 번 꿉니까?” 이게 안 되는 겁니다. 뭔가 붙었으니까. 붙은 이유가 이게 다니엘 때문에 붙은 거예요.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신하들 모아놓고, “나 좀 살려 달라. 나 못 살리면 너희들 다 죽여 버린다.” 방어적이면서도 공격적으로 신하들에게 명령한 거예요. 죽이는 날은 다가오고. 옛날 맨 정신일 때는 자기가 왕이잖아요. 복습합시다. 왕은 뭐 때문에 있다? 왕의 왕다움은 주변에 복종하는 자로 둘러싸일 때 왕의 지위가 정체성이 유지가 되는데 이 신하들이 나를 갖고 놀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기 분노를 회수하지 않고서는 자기가 옛날의 왕다움으로 돌아갈 길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정신분열증은 뭐냐 하면 애꿎은 남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있을 수 없는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내 꿈을 해석하라. 다니엘이 없다고 한다면 이 꿈을 꾸었겠어요? 이 꿈은 꾸질 않습니다. 결국 내가 어제 저녁에 이야기한 것처럼 현실은 따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꿈에서 출발해서 꿈이 꿈 되기 위해서 현실은 중간과정에 등장한 것이 바로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입니다. 현실 세계에 우리 인간이 포함돼 있고.
인간도 아닌 게 인간처럼 행동하는 것,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꿈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 2장으로 돌려놓는 거예요. 하나님도 참 어지간해요. 끈질겨요. “그때 선악과 따먹은 것 잊은 줄 아느냐? 나는 잊지 않았다. 끝까지 너희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고 나의 일을 훼방질한 사람으로 간주하겠다.” 그 역사를 계속 현실이란 이름으로 역사란 이름으로 계속 일구어온 거예요.
여기서 우리의 질문은 그래서 다니엘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질문을 이래 던지면 안 돼요. 일단은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꿈 내용을 몰라요. 이게 소설과의 차이점입니다. 한강 소설과 차이점이 이거에요. 드라마와의 차이점이. 모릅니다. 모르는 상태에서 신하들 다 죽이는 장관 이름이 아리옥이라고, 이름은 참하네. 2장 15절에 나옵니다.
그다음에 24절에 보면, “이에 다니엘이 왕이 바벨론 박사들을 멸하라 명한 아리옥에게로 가서 이르매 그에게 이같이 이르되 바벨론 박사들을 멸하지 말고 나를 왕의 앞으로 인도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 해석을 왕께 보여 드리리라” 이러한 발언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19절에 드디어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꿈의 내용을 알려줘요. 다니엘이 평소 도사가 되어, 이런 것 없어요. 수동적으로 움직입니다.
수동적으로 움직여서 다니엘이 자신의 구원을 안 챙기게 돼요. 하나님은 내 구원을 위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사실, 다른 사람에게 절망이라면 다니엘도 동일하게 그 절망을 맛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이 한계에 있는 것처럼 자신도 똑같이 한계가 있다는 사실, 내가 특출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자기 백성들에게 그것을 똑같이 대우합니다.
앞으로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단 차이점이 있다면 성도가 아닌 사람한테는 영원한 아버지가 없지만 성도한테는 되어질 일은 모르겠는데 우리 안에 오신 아버지의 언약이 거기에 걸 맞는 환경이 나타나겠지요. 우리 속에 있는 말씀이 말씀 되게 함에 있어서 딱 일치되는 환경만 성도 주변에 발생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해주시는 겁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란 말이 그 말이에요.
우리가 해결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 구원 문제 해결한다는 말은 아니고 내 구원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말씀이 자체가 현실화돼 있는 것과 일치된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것을 증거할 수 있는 환경 속에 놓이도록 아직도 우리가 살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니 마음대로 사세요,’ 이것 말고는 없어요. 여러분 마음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누구 평가받지 마시고, 정신분석 벌벌 떨지 마시고. 히스테리 부리지 마시고.
우리 옆에 있는 유일한 타인은 하나님, 예수님 외에 다른 타인은 다 허깨비고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짜 타인은 주님뿐이고, 그분이 현실을 만들어나가는 데 그 기초 원재료는 뭐냐? 우리에게 온 말씀이 말씀대로 되도록 현실이 만들어가니까 중간에 있는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우리가 초조하거나 불안하거나 할 필요 없다 이 말이죠.
오죽 했으면 주님께서 혈육관계에 대해서 시비 걸겠습니까? “누구든지 네 아내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말씀은 네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나오니까. 얼마나 우리에게 지독하게 혈육관계라든지 가족관계라는 것이 아버지 값도 못하면서 아버지 자격으로 들어앉아 있는 것인지 우리가 알지요.
그래서 이렇게 이 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요동치는 파도 같은 세계가 얼마나 감사한지 이것을 통해서 말씀이 하늘나라에서 고요한데 전달되는 게 아니고 요동치는 지옥 같은 세상 속에서 말씀은 끄떡도 없이 자기의 본분, 말씀의 본질대로 펼친다는 게 이 땅에 있으면서 찬양과 감사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제치고 나를 무시하고 일을 벌이시는 주님께 감사하는 거예요. 나를 우습게보면서 일하시는 주님께 감사하는 거예요. 내 소원과 기도응답 일체 안 해주는 식으로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내 기도에 침묵이십니까? 하나님은 듣는 하나님…, 무슨 침묵이냐? 지금 윤석열 계엄했는데 그것도 침묵이야? 되어진 모든 일이 말씀대로 이뤄지는데 그걸 네가 침묵으로 느껴지나? 얼마나 개인주의적이야. 개인주의란 자기 정체성 확립 외에는 관심 없다는 뜻이잖아요. 정체성 확립을 새삼스럽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이 이미 접수했으니까요.
그래서 다니엘 2장에 죽이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가 나섭니다. 나설 때 이 대목 24절, 25절, 그다음에 28절까지 그걸 보는 사람한테는 궁금해 미칩니다. “뭐였어, 뭐였어.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도대체. 빨리 말해 다니엘. 우리 편 다니엘 빨리 말해줘.” (갑자기 꿈이 침범하는 것 같아.) “빨리 말해줘. 무슨 내용이었어?”
그 내용이 뭐냐 하면 모든 인간에게 들이닥칠 비언약적 현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이 없고 말씀이 없고 다니엘이 없을 때 나타날 때 인간은 없고 인간은 뭐였다? 인간은 짐승이었다. 인간은 짐승이었고, 그리고 짐승인 줄 모르면서 우상 흉내 내는 우상이었다. “임금님은 큰 신상을 보았습니다.” 이것부터 하지요.
이 다니엘 하면서 어려운 대목이 한두 가지가 아닌 데요. 그중에 하나가 이렇게 느부갓네살 다니엘에게 충고를 받았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이제는 개과천선해야 되잖아요. 안 해요. 이게 안 된다고요. 그러면 꿈의 효과가 없었나? 내가 이 정도로 하나님의 뜻을 전했으면 당신이 눈물 흘리면서 내가 하나님을 믿어야지, 이렇게 나와야 될 텐데 그런 게 없어요.
“아아. 이게 풀리네. 여봐라. 다니엘에게 상을 주어라.” 그렇게 되면 뭡니까? 그 사람은 동일성의 왕 됨에서 해결되니까 선형적 속에 점선에 있던 이것이 실선으로 바뀌면서 역시 자기가 옛날에 왕이었다는 그 정체성에 편입이 돼버렸지요. 계속해서 자기는 ‘내 밑에 훌륭한 다니엘 같은 신하가 있어서 감사하다.’ 그 다니엘에게 나라를 넘겨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제가 대전강의 전에 이런 일 있었거든요. 우리 김성은 집사님이 체했어요. 그래서 어떤 분이 마사지를 해줬어요. 체해서 얼굴이 시퍼렇게 있는데 마시지로 풀렸어요. 풀렸으면 적어도 아파트 등기는 넘겨야지. 그것 넘겨야 마땅하잖아요. 체해서 죽을 뻔했는데 죽으면 아파트 주인이 없는데 이제는 아파트 넘겨야 되지 않습니까? 안 넘깁니다. 아파트가 자기 동일성이기 때문에.
고마운 건 알겠는데 가장 고마운 것은 네가 고마운 사람이라고 알아주는 내가 더 고마운 존재가 돼요. 주님이 고마운 건 알겠는데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믿어줬던 내가 나한테 더욱더 대견스럽고 대단한 존재에요. 이게 바로 느부갓네살의 한계입니다. 얼마나 처 맞아야 자기를 부인하게 될는지. ‘짐승은 짐승일 뿐 따라하지 맙시다.’ 모든 인간은 짐승에 불과한 거예요. 결국은 나중에 짐승 됩니다. 나중에 꿈 하나 더 꾸고 난 뒤에 그때는 꿈을 꾸고 꿈을 해석하면서 짐승 되지요. 천만다행인 줄 알아야 돼요.
그래서 여기서 꿈으로 인하여 두 대표자 생겼습니다. 꿈의 투입으로 느부갓네살류 그 노선과 다니엘 노선, 두 노선으로 인류가 대표된다는 것이 등장하게 됩니다. 느부갓네살은 선형적입니다. 뭔가 미리 알면 미래는 예측이 가능한데 다니엘은 뭡니까? 다니엘 본인도 미래에 대해서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비선형적입니다. 대책 없어요. 대책을 준비 안 하면 되는 겁니다.
‘올해 퇴직했는데 앞으로 뭐할 겁니까?’ 남들이 묻잖아요. 대책 없는 게 대책입니다. 산에 가고, 그런 것도 없고. 대책 없는 게 대책이에요. 다른 사람이 뭐할 거냐고 묻는 이유는, 특히 혈연관계에서 묻는 이유는 ‘이제 우리 뭐 먹고 살아.’ 이거거든요. ‘까먹으면 안 되잖아.’ 이런 것. 우리 속에 느부갓네살이 그대로 짐승이 여실히 살아 있습니다.
‘내가 나를 보호하는 것이 나의 마지막 임무다.’ 아니죠. 그건 마지막이란 말을 붙이면 안 됩니다. 마지막은 시간이 우리를 낚아갈 거예요. 예수님의 시간이 우리 중심의 시간을 낚아채면 그 날이 마지막 날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우리보고 계속 느부갓네살과 함께 있으면서 기다려라. ‘다니엘아 네가 할 일이 있다.’ 마지막 날이 어떤 시간으로 마감되고 그 후에 어떤 세계가 오는지를 기존의 현실 속에서 충실하게 살아내야 될 책임이 다니엘에게 있었던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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