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5수련회5강 꿈의 인물

아빠와 함께 2025. 1. 18. 07:57

2025 겨울수련회 다니엘 강해 제 5강 : 꿈의 인물 - 이 근호 목사

다섯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다니엘 5장이요. 벨사살 왕, 여전히 바벨론 시대를 보내고 있습니다. 왜 7장에 나와야 할 벨사살 원년이 갑자기 5장에 미리 당겨져 나왔는지 그 이유가 있어요. 그건 다니엘 자체가 역사적인 순서가 아니라 다른데 관심이 있어요. 꿈이 점차 점차 현실 속에 더 깊숙이 섞이기 시작했다는 그 점을 지목하는 겁니다.

꿈 1, 꿈 2, 꿈 3, 점차 내려가면서 꿈이 현실 속에 노골화 돼요. 노골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꿈 1은, 꿈은 모르는데, 모든 인간이 꿈에 대해서 모르는 입장에서 다니엘이 그 꿈을 대신 알려줌으로써 현실을 지배하는 주도권이 다니엘에게 있으면서 어쨌든 일시적이나마 꿈이 현실 속에 개입을 했습니다.

두 번째(꿈 2), 꿈을 줘 놓고 역시 다니엘에 의해서 더 깊숙이 현실로 개입하게 됩니다. ‘실제로 꿈을 꿨다. 그런데 문제는 해석을 못 하겠다.’가 됩니다. 첫 번째(꿈 1)는 ‘아예 꿈에 대해서 모르겠다. 존재 자체를 모르겠다. 꿈꾼 적이 있는데 내용은 모르겠다.’라면 이건(꿈 2) ‘내용은 기억하게 하면서 해석은 못 하겠다.’ 세 번째(꿈 3)는, 7장에 나와야 될 벨사살왕이 미리 5장에 나옵니다.

5장에서 꿈은 현실의 일부로 편입됩니다. 현실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손가락이 나타납니다. 벨사살왕이 잔치를 엽니다. 술 파티를 열었죠. 술 파티를 열었을 때 하나님 뜻은 이겁니다. “술 파티를 굳이 열 만큼 현실 삶이 그렇게 서글프냐?”라고 묻는 거죠.

귀인들과 많은 집단들이 술 파티를 벌이는 게 좋습니까, 아니면 술 파티를 안 해도 되는 상황이 좋습니까? 어느 쪽이죠? 안 해도 되는 상황이 좋죠. 그러나 그들은 술 파티를 벌이면서 억지로 기분을 끌어올리려는, 좋게 하려는 그러한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건 그만큼 자기의 동질성이 유지되어야 하는데 축 처져 있었단 말이죠.

여기서 술 파티를 엶으로서 우리의 위상이 역시 잘나간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도 그렇지만 자기 스스로도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 파티를 여는 겁니다. 그 파티를 열 때 동원된 기구들이 옛날 유대 성전에서, 그리고 왕궁에서 가져온 것 가지고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때 그 파티에 누가 참석을 해요. 손가락이 참석을 합니다. 아, 파티 분위기 완전히 다 버려놨습니다.

손가락만 참석했어요. 투명 인간도 아니고, 손가락만 나타나가지고 그 손가락이 자율 주행 차처럼 누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움직입니다. 일론 머스크한테 지시받은 것도 없고, 원격 조종되는 것도 없는데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입니다.

저절로 움직임으로서 편입될 수 없는 어떤 사실이 현실 속에 편입이 되었을 때 기존 현실은 드디어 어떤 문제성이 있음이 발각 당하죠. 흡수 통합을 하지 못하는 다른 이질적인 요소를 현실이 감당을 못합니다. 이건 마치 UFO가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미확인 물체로 인하여 확인된 모든 것들이 위기를 맞이하게 되죠.

꿈이 현실의 일부로 편입됩니다. 그러면 그다음 네 번째,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네 번째는 꿈이 노골적으로 현실의…, 그전까지는 현실의 일부로 편입 되었잖아요. 네 번째는 현실의 전부를 지배하게 되죠. 다섯 번째는 현실이 있고 이게 바로 꿈이 되면서 이것은 어떤 현실이냐? 모든 진척 과정이 망하기로 되어있는 확정된 그러한 현실로서 꿈 안에서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현실 속에 사는 인간들이 현실에 충실할 수 없는 이유가, 현실을 둘러싼 꿈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니까, 더 철저하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바로 ‘갇혀있다. 현실이 갇혀있다.’ 현실이 갇혀있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시간 자체가 꿈속에 갇혀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시간의 끝이 오기 전에 시간 속에 산다는 것 자체가 끝이다, 우리가 시간 속에 산다는 것 자체가 종말 속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현실 자체가 꿈의 지배를 받고 결국에는 꿈이 되는 이 내용이 다니엘 11장에 나옵니다. 그래서 다니엘 11장을 미리 보겠습니다. 다니엘 11장의 내용이 “내가 또 메대 사람 다리오 원년에 일어나 그를 돕고 강하게 한 일이 있었느니라. 이제 내가 참된 것을 네게 보이리라 보라 바사에서 또 세 왕이 일어날 것이요 그 후의 넷째는 그들보다 심히 부요할 것이며…”(1-2) 쭉 나옵니다.

이 내용을 보게 되면 누가 봐도 “이건 역사네, 역사 그 자체네.”라고 할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 다니엘 11장을 쭉 읽어보게 되면 지루하기도 하고, 뭔가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는데 여기 등장인물의 특징이 뭐냐? 고만고만하다는 거예요.

고만고만하다는 것은 자기들끼리 피 터지게 싸우기는 싸우는데 그 싸움의 의미가 파도치는 물결 있죠, 출렁이는 파도처럼 그 존재가 그 존재고, 자기들끼리는 되게 싸우는데 그 싸우는 하나하나가 각본대로 움직인다는 거예요. 예언대로, 각본대로 움직이고 싸우고 하는 거예요. 본인들은 굉장히 진지한데 감독이 “큐!”하는 사인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것도 월급도 없이, 출연료도 없이 움직입니다.

북방 왕 남방 왕이 이렇게 싸웁니다. 싸울 때 여기 쭉 보면 “헬라국을 칠 것이며 장차 한 능력 있는 왕이 일어나서 큰 권세로 다스리며 임의로 행하리라.”(2-3절) 되어 있고 “남방의 왕은 강할 것이나 그 군들 중에 하나는 그보다 강하여 권세를 떨치리니”(5절)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그다음에 나오는 게 이제 북방의 왕이 또 있겠죠. 그래서 이 11장에 나오는 현실을 하나님께서는 분류를 할 때 남방 왕과 북방 왕 둘로 분류, 쪼개고 남방 왕과 북방 왕이 싸우는 그 내력을 쭉 이야기 하는데 이 이야기 하는 취지가 뭐냐? 그들이 싸우면서 그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격으로, 그들이 세상 현실 속에서 무의식으로 그저 자기가 승리하고자 싸우면서 의외로 다치는 곳이 있어요.

그 다치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성전이 있는 곳이에요. 용 두 마리가, 악어 두 마리가 싸우는데 두 마리가 싸우는 그 접점 지점에 딱 위치한 게 예루살렘이에요. 북방 왕 마지막 지점과 남방 왕 제일 위 지점이 마주치는 그 지점에 성전이 있습니다.

성전이 그 두 왕의 피 터지는 싸움 가운데서 이래도 얻어맞고 저래도 얻어맞고, 얻어맞는 그 위치에 일부러 하나님께서 장치를 해놓고 그 예루살렘 중심에서 북쪽과 남쪽을 나누어서 역사적으로 둘이 신나게 싸우도록 그렇게 조치한 내용이 11장의 내용입니다.

역사적으로 쭉 보면 프톨레미 1세(단 11:5), 2세(단 11:6), 3세(단 111:7-9), 4세(단 11:10-13), 5세(단 11:14-15), 클레오파트라 7세(단 11:17) 이게 이집트, 남쪽 프톨레미 왕조의 왕들입니다. 북쪽 왕은 셀류커스 왕조입니다. 셀류커스 1세(단 11:5), 안티오코스 2세(단 11:6), 그다음에 셀류커스 3세(단 11:10), 안티오코스 3세(단 11:4-10), 안티오코스 4세(단 11:15) 이런 식으로 포진되어 있어요.

그게 페널티킥 차는 겁니다. 이쪽에서 다섯 명, 저쪽에서 다섯 명 나와 가지고 한 번 차서 전광판에 1대 0, 또 상대편에서 골 넣으면 1대 1, 이런 식으로 하는데 그 공에 해당되는 것, 그 공에 해당되는 것이 하나님 계신다는 성전입니다. 누가 이기든 예루살렘은 이래도 치이고 저래도 치이게 되어있어요.

프톨레미 4세 같은 경우에는 졌다고 화나서 예루살렘에 가서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주위에서 반대를 하니까 나중에 유대인들 4만 명을 죽입니다. 졌다고 삐져서 성전 지성소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못 들어가게 하니까 4만 명 죽인 거예요.

북쪽 왕 안티오코스 4세 같은 경우에는 이겼다고 좋다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을 박살 내는 겁니다. 그래 놓고 안티오코스 4세 같은 경우에는…, ‘깃딤’이라는 데가 나와요. 깃딤이라는 곳이 로마입니다. 로마한테 자기의 권세가 막히니까 이번에는 또 화난다고 해서 어디에 들어가느냐? 11장 31절에 나오는데 여기 “성소 곧 견고한 곳”이라고 나와 있거든요.

‘견고한 곳’ 성전에 가서 그것을 또 공격하고 그렇게 했어요. 이걸 이 시간에 다 못 하고요, 구체적인 것 하나만 하면 이렇습니다. 11장 6절 “몇 해 후에 그들이 서로 맹약하리니 곧 남방 왕의 딸이…” 여기서 남방 왕은 프톨레미 2세입니다. 그의 딸 이름은 ‘베르니케’에요. “북방 왕에게 나아가서 화친하리라” 북방 왕은 안티오코스 2세, 그 안티오코스 2세한테 프톨레미 2세가 자기 딸, 공주를 시집보내서 “우리 좋게 지내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프톨레미 1세와 셀류커스 1세, 이 사람들은 알렉산더 밑에 있던 부하들인데 프톨레미가 나이가 많고 사수로서, 그리고 셀류커스는 조수로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토는 셀류커스 1세가 현재 이라크와 이란 전부 다를 차지하고, 프톨레미는 이스라엘부터 해서 애굽 나라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두 왕 카산더와 리시마코스는 터키와 지금의 그리스를 차지했습니다. 그들은 후에 일찍 망하고 이 두 왕, 셀류커스는 북쪽, 프톨레미는 남쪽을 차지해서 다니엘 11장에서 실제적인 역사 전투에 하나의 주연급으로 그들이 참여하게 된 겁니다.

다니엘 11장 6절에, 프톨레미 2세의 딸인 베르니케 공주가 안티오코스 2세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때 그 왕이 총각이 아니고 이미 결혼해서 자기 부인이 있어요. 부인 이름이 라오디케에요. 그런데 부인인 라오디케와 강제로 이혼하고 공주 베르니케와 결혼을 한 겁니다. 그후에 공주의 친정인 프톨레미 2세가 죽어요.

죽고 난 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안티오코스가 다시 공주를 멀리하고 자기 이전 부인 라오디케를 다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라오디케라는 여인이 화가 나서 남편, 왕이죠, 안티오코스 왕을 죽이고, 남쪽에 있는 공주도 죽이고, 공주 수행원들도 다 죽이고, 공주 경호 실장 있잖아요, 그도 죽여 버리고, 그래서 다 죽였어요. 그래서 “그때에 도와주던 자가 다 버림을 당하리라” 그렇게 되어있죠, 6절에.

물론 공주의 아들도 죽였어요. 라오디케라는 여인은 원래 남편하고 낳았던 셀류커스 2세를 왕으로 옹립하고 자기는 배후에서 통치했죠. 그 사실을 알고 남쪽 이집트에 있는 프톨레미 3세, 그러니까 베르니케 오빠가 쳐들어와서 북쪽을 공격해 복수에 성공합니다. 뭐 그런 이야기, 치정에 얽힌 이야기, 그게 꿈의 일부로서 현실화 될 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누가 이기든 그렇고 그런 별 의미 없는, 자기 딴에는 굉장히 심각하고, 굉장히 진지한데 성경의 꿈에서 보게 되면 원래 그렇게 해서 “둘 다 망해라. 둘 다 박치기해서 망해버려라.” 하는 식으로 세상이 흘러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평화롭게 잘 살자, 했는데 안티오코스 3세가, 자기가 당했으니까 이걸 복수하기 위해 또 남쪽으로 쳐들어가는 이야기가 쭉 나와요.

뭐 북방 높아지고, 남방 엎어지고…, 페널티킥 하는데 2대 2, 2대 3, 3대 2, 이런 식으로 계속하는 데 그때 안티오코스 3세가 연합을 합니다. 그게 다니엘 11장 10절에서 14절까지 나오네요.

“그 아들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심히 많은 군대를 모아서 물의 넘침 같이 나아올 것이며 그가 또 와서 남방 왕의 견고한 성까지 칠 것이요 남방 왕은 크게 노하여 나와서 북방 왕과 싸울 것이라 북방 왕이 큰 무리를 일으킬 것이나 그 무리가 그의 손에 붙인바 되리라 그가 큰 무리를 사로잡은 후에 그 마음이 스스로 높아져서 수만명을 엎드러뜨릴 것이나 그 세력은 더하지 못할 것이요 북방 왕은 돌아가서 다시 대군을 전보다 더 많이 준비하였다가 몇 때 곧 몇 해 후에 대군과 많은 물건을 거느리고 오리라 그 때에 여러 사람이 일어나서 남방 왕을 칠 것이요 네 백성 중에서도 강포한 자가 스스로 높아져서 이상을 이루려 할 것이나 그들이 도리어 넘어지리라”

연합을 해서 혼자 쳐들어가는 게 아니고 마케도니아 빌립 왕과 더불어서 남쪽 이집트로 쳐들어가는 내용이 여기 죽 나옵니다. 쭉 나오는데 처음에는 이겼어요. 이기다가 나중에 까불다가 적진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서 패배해 버렸어요. 그래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라는 식의 이야기가 죽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11장의 내용을 성경에서 보게 되면 ‘아, 궁금하다. 이게 역사적으로 어떤 사실인가?’ 어떤 사실인지 궁금한데 성경은 “몰라도 돼.” 이런 식이에요. “그거 다 시답잖은 거야. 인간의 역사 자체가 시시한 거야.” 누가 이기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고 누가 지든 무슨 의미가 있는가?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싸움에서 무엇이 다쳤는가?’를 주목하라는 거예요, 무엇이. 그게 숙성되는 거예요. 인간들이 자기 야망, 정치적 야심이 자꾸 무르익어서 점차 어디로 접근하느냐 하면 애꿎은 성전 자체에,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보복이 가해지는, 해가 가해지도록 하나님께서 꿈 안에 장치를 그렇게 만든 거예요. 자기들끼리의 사적인 복수심에서 남쪽과 북쪽이 갈라져서 전쟁하는데 누가 이기든 지든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다쳤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마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서로 싸우면서 그 와중에 누가 다치죠?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시죠. 그게 바로 현실 속에 들어온 꿈의 운명, 또는 꿈의 내용을 위하여 모든 것이 정립되어 있는 현실상, 현실 속에 살면서 인간이 꿈을 배제하고 현실을 이해할 때 그들의 사적인, 시답잖은 시시한 욕망의 부침,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그것만 인간의 역사 속에 남아서 “역사는 흐른다.” 뭐 이런 내용으로 TV에 나오잖아요.

“과거의 현대사를 공부합시다.” 또는 “고대사를 공부합시다.” 또 “조선 시대의 역사는…, 고려 시대의 역사는…” 고려 시대건 삼국시대건 간에 뭐 어떤 시대든, 단군이 4000년 전에 어떻고, 삼국이 어떻고…, 주님 보시기에는 그 모든 것이 다 시답잖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역사에서 교훈을 배운다? 배울 거 뭐가 있다고요. “용서는 하되 역사는 잊지 말자.” 잊으나 안 잊으나 다 마찬가지인데요. “일제시대라고 하지 말고 일제 강점기라고 해라.” 강점기라고 하든 강정을 만들든, 오꼬시를 만들든 모든 것은 다 꿈의 일부에 불과한데 꿈을 모르니까 그게 무슨 역사적으로 꼭 기억을 해야만 될, 후손들이 길이길이 숙지해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왜 일본은 사과를 안 하냐?” 사과 200번 했어요. 사과를 200번 해도 우리 한국 사람들은 사과를 안 했대요. 일본입장에서는 미치는 거예요. 200번 했으면 많이 했는데 안 했대요. 왜냐하면 사과라고 하는 것은 사과받는 쪽에서 사과 같아야 사과지, 안 그러면 귤이나 감 같은 아무 의미도 없는 거예요.

여기서 남방 왕, 북방 왕, 이렇게 하다가 드디어 안티오코스 4세에 와서 몹쓸 짓을 하게 됩니다. 여기 30절에 “이는 깃딤의…” 깃딤은 로마라고 했죠. 이 로마에 대해서 민수기 24장에 이미 예언되어 있어요. 그걸 보면 발람이라는 사람이, 그 선지자가 대단합니다.

민수기 24장 24절, “깃딤 해변에서 배들이 와서 앗수르를 학대하며 에벨을 괴롭게 하리라마는 그도 멸망하리로다 하고…” 발람이 아주 긴 세월까지 내다보고 있어요. 깃딤은 로마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꿈속에서 이뤄지는, 즉 꿈이 현실 속에 들어왔다가 이제는 현실이 꿈으로 대체되어 버렸어요. 그리고 대체 됐다는 말의 의미가 뭐냐? 어떤 현실이 일어나든 상관없이 꿈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이 각본대로 움직이고 시나리오가 확정되어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어쨌든 다니엘 11장 30절에 와서 “그가 낙심하고 돌아가며 거룩한 언약을 한하고 임의로 행하며 돌아가서는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는 자를 중히 여길 것이며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이 안티오코스 4세와 그들이 한 게 뭐냐? 한 다섯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예루살렘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제사를 폐지했어요. 그것만 보면 “제사하지 마.” 뭐 그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다음에 성전 앞에 돼지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세 번째가 안식일과 할례를 금지했어요. 네 번째,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에 제우스 동상을 세우고 숭배하게 했습니다. 다섯 번째,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안식일에 일 안 한다는 것을 빌미 삼아서 안식일에 골라서 가차 없이 다 죽였습니다. 이런 일들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걸 보면서 뭘 생각해야 하느냐? 우리가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핍박받는 모습으로 현실 속에 개입했다. 마치 십자가의 희생 모습으로 개입했다.’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우리는 뭘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왜 안티오코스 4세가 굳이 이렇게 아무 관계도 없는 남의 종교에 가서 의도적으로 이런 행패를 부리는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이유는 뭐냐? 없어요.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없다는 것이 현실과 꿈의 연결점이에요. “왜 복음을 안 받아들입니까?” 정답은? 이유가 없어요. “왜 하나님을 안 믿습니까?” 이유가 없어요. “왜 교회 안 갑니까?” 이유가 없어요. 뭐 굳이 이유를 댄다면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왜 없습니까?” “모르겠어요.” 결국 모르겠다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의 복음과 관련해서는 이유 없이 움직이도록 되어있습니다, 이유 없이. 아무 계획적인 것 없이 그냥 복음에 대해서 충돌하고 반대하게 되어있어요. 이것을 성도입장에서는 굉장히 기뻐하고 감사해야 돼요. 왜? 그들이 이유 없이 복음을 거부한다는 것은 똑같은 인간의 입장에서 우리도 당연히 백 퍼센트 복음에 대해서, 십자가에 대해서 이유 없이 무관심해야 돼요. 이게 너무나 지당한 일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놀라운 사실이냐 하면, 복음, 예수라는 젊은 사람이 십자가에 죽는 게 돈이 나와요, 밥이 나와요? 우리 생활에 아무 관련성이 없잖아요. 관심 둘 이유가 없다고요. 이유가 없어서 복음을 거부하는 거예요. 믿을 이유가 없어서 안 믿는 거예요, 믿을 이유가 없어서.

“힌두교 종교 왜 안 믿습니까?” “그걸 왜 믿어야 돼요? 힌두교가 무슨 종교인지는 모르겠고, 그걸 왜 믿어야 돼요?” “왜 안 믿습니까?” “왜 꼭 믿어야 돼요, 힌두교를?” 오히려 반문하고 싶죠. “십자가 복음을 왜 안 믿습니까?” “그걸 내가 왜 믿어야 돼, 왜?” 왜 믿어야 됩니까?

그래서 십자가 복음을 안 믿는 사람에게 “왜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교회에 안 나가십니까?” 하면 “우리 오빠가요, 사실은 목사거든요. 그런데 안 믿어요.” 이렇게 하거든요. 이거 무슨 이야기에요? ‘오빠는 믿지만 나는 안 믿는다.’ 이 말을 풀이하면 ‘오빠의 자율성에 의해 자기는 목사 됐는지 모르지만 나는 내 자유대로 움직입니다.’ 이런 뜻이에요.

‘당신에 대해서는, 당신의 그 질문은 나에게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는 논리입니다.’ 그런 뜻이란 이 말이죠. ‘너는 너 하고 싶은 대로 믿고 나는 안 믿는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오늘날 복음을 믿고 십자가 믿는다고 할 때 이유를 달면 그건 백 프로 가짜입니다. 이유 없이 믿어져야 돼요, 이유 없이.

“우리 가족이 삼 대째 기독교…” 이렇게 달게 되면 전부다 가짜에요. 교회 다니는 것이 그냥 아까 말한 대로 씨족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족 아이가?” 해서 얻어먹은 게 많지요. “공부는 누가 시켜줬는데?” 뭐 이렇게 하면 골치가 아파요. “교회 나가줄게.” 이게 되는데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입장에서는,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뭐냐? 나를 부인해야 되는 거예요. ‘나의 모든 역사와 삶 자체가 부정당해도 좋습니다.’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이게 인간의 힘으로는 성사될 수 없는 일이고 현상입니다.

따라서 안티오코스가 아까 다섯 가지로 해서 유대 민족을 말살한다. 왜? “이유 없어. 그냥 성질나서 나 하고 싶은 대로 했어, 끝. 이제부터 우리 정책은 헬라 종교, 제우스 섬기는 것이지 여호와 종교 믿는 게 아니야. 이건 내 정책이야.” “왜 그런 정책을 씁니까?” “내 마음대로다, 왜? 내 마음대로 정치하겠다는데 내가 왕이지, 네가 왕이 아니잖아.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러면 해답이 굉장히 간편하게 끝나죠.

그래서 여기서 제가 공식을 두 개 만들었으니까 여러분, 제가 잘 안 하는 짓을 시키는데 한 번 따라 해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적을 테니까 저와 같이 따라 해보세요. 공식 1. 그래서 현실은 손댈 수 없다. 자, Repeat after me 한번 따라 해보세요. “그래서 현실은 손댈 수 없다.” 이게 복음 아닙니까? 이게 복음이거든요.

이게 복음이에요. 손 안 대면 되잖아요. 뭘 노리고 손을 대요? 뭘 얻고자, 어떤 이유를 얻고자? 그러지 마세요. 현실은 꿈이 손대기 때문에 우리가 손대면 안 돼요. 이것이 공식 1. 오늘 수련회 다 끝나고 다른 건 잊어도 공식 원과 투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공식 2, “나의 구원에 내가 손댈 수 없다.” 이것도 한 번 따라 해봅시다. “나의 구원에 내가 손댈 수 없다.” ‘내가 미쳤지. 내가 그걸 왜 믿어?’ 교회 다니는 것은, 내가 의지대로 주일 아침에 일어나서 될 수 있으면 가도록 하는 그것은 되는 데 복음에 대해서는 내가 손댈 수 없습니다. 왜? 믿을 이유가 없고, 안 믿을 이유도 없고, 이건 내 선에서 결정될 문제가 아닌 게 이게 바로 복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 이유가 뭐냐?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당하겠다고 작심하고 나타난 사건이 복음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안 믿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깔아서 내세운 십자가를 믿어라.” 이거에요.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안 믿는 것이 지극히 정상인데 복음, 십자가의 피가 내 죄를 용서한다는 걸 안 믿는 게 정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뭐냐? “내가 십자가 피를 안 믿는 것이 당연합니다.”를 믿으시면 여러분 구원 받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아요.

왜냐하면 나 자체가 꿈의 일부라는 사실을 그런 식으로 간접적으로 고백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 현실을 내가 관리한다? 맞아요. 당연한 겁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 사건은 현실에 속한 게 아니고 꿈에 속해있기 때문에 이건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다가설 수 없고, 내가 어떻게 노력해도 십자가에서 발을 뺄 수가 없는 그 사건에 발목 잡힌 게 돼죠. 사건에 발목 잡힌 게 되는 겁니다.

지난 시간까지 한 그것이, 바로 끝에 섰기 때문에, 끝의 존재, 성도 자체가 끝에 나타날 십자가 사건과 접목되어 있는 존재라면 성도는 끝에 나타나는 존재입니다. 성도의 일상은 뭐냐? 이 땅의 끝, 바다에 맞닿은…,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바닷가에 가보는 거예요. 바닷가에 가면 조그마한 끝에 바위가 있죠.

바위에 양말 벗어놓고 맨발을 이렇게 백사장 끝에 놓으면 그 바람 없는 잔잔한 파도가 와서 내 벗은 발의 뿌리를 살포시 둘러싸서 쓰다듬고 난 뒤에 자기가 알아서 빠집니다. 좀 더 있으면 다시 파도가 약속도 한 적이 없는데 자기가 알아서 다시 와서 발을 딱 둘러싸서 쓰다듬고 간질여 주고 다시 또 빠지죠.

그 과정속에서 나는 조금씩 모래밭에 그때마다 약간씩 빠져요. 물 빠지면서 빠진다고요. 이게 뭡니까? 우리는 매일 역사의 끝과 접합되어 있는 사람이다, 이 말이에요. 움직인 쪽은 끝이 움직입니다. 왔다가 갔다가, 왔다가 갔다가, 이런 거 뭐 꼭 실험 안 해도 알겠죠? 뭐 실험하기 위해서 차비 들여서 바닷가 가서 할 순 없지만, 그 끝의, 썰물과 밀물과 접합되어 있는, 현실 속에 살면서 약속이 맞닿는, 꿈이 맞닿는 그 사건의 경계선에, 십자가 경계선에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꿈의 세계를 수시로 접합할 수 있는 기회를 성도이기 때문에 맞볼 수 있습니다.

성도의 삶의 기쁨은 이런 데에 있어요. 끝이 매일 같이 와서 나를 보듬어 준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에게 공식 1과 공식 2를, “현실은 내가 만드니까 네가 만들지 마.” 차를 타고 가는데 앞에서 어떤 차가 막 역주행 해서 온다? 공식 1을 생각해야 하죠. ‘앞 차가 와서 박더라도 넌 아무것도 하지 마.’ 하면서 핸들을 확 꺾어버립니다. 안 그러면 자기가 빡! 그대로 죽으니까.

현실 속에서 꺾어버리면 그 차가 역주행하게 된 그 배치, 무대 장치, 핸들 꺾은 모든 것이 약속의 각본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 놓고 “야, 당신 그 핸들링 솜씨가 대단해. 어떻게 그렇게 운전을 잘해?” “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의 말씀이 절로 막 나오는 거예요.

애 공부를 어떻게 그렇게 잘 시켜서 반에서…, 반에서 1등 한 것은 시시하다, “어떻게 이번에 사회과목 100점을 맞고, 수학에서도 100점을 맞고, 어떻게 공부를 했습니까?” “다 주께서 하신 은혜입니다.” 이게 나로 하여금 내가 할 수 있는 실천력을 하나님이 끝을 통해서 “하지 마. 약속이, 하나님 꿈의 능력이 너로 하여금 꿈대로 이뤄진다는 것을 내가 느끼게 만들어 줄게.”

그 작업을 하나님께서 다니엘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꿈이 왔는데 그 꿈이 현실 속에 조금씩, 조금씩 들어오다가 아예 현실 속에 꿈이 들어와 섞이고, 나중에는 꿈이 현실 전체를 꿈 각본대로 움직여 나가는 그게 바로 다니엘입니다.

자, 그러면 다시 다니엘 5장으로 들어가 봅시다. 아까 술 파티 이야기, 손가락 이야기, 손가락 이야기가 나오면서 꿈이 삽입됐어요. 물론 손가락이 늘 들어오는 건 아니에요. 지금은 중간 단계이기 때문에 꿈 3이기 때문에 ‘전체 현실은 따로 있고 꿈이 따로 있다’가 구분되는 그 상황 속에 들어온 거예요,

벨사살 왕 때, 그때 손가락을 가지고 벽에 글씨를 썼어요. 그 글씨가 바로 25절에 나옵니다. 다니엘 5장 25절,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끝났다, 끝났다, 부족하다. 그다음에 페르사.’ 이런 뜻이에요. 끝났다, 끝났다. 이유가 뭐냐? 부족해서,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해서. 어떻게 끝났다? “우”, ‘그리고’ “바르신” ‘페르사로 넘어간다.’ 이거에요.

이미 확정된 꿈이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에게 찾아와서 모든 것은 각본대로 이루어졌음을 알려주죠. 다니엘 5장 30절에, “그날 밤에 갈대아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 이세였더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매대 사람’ 메대 그다음에 이제 페르시아, 바사가 나와요. 메대, 바사가 1에서 2가 되니까 두 나라가 연합해서 한 나라 바벨론을 멸망시켰습니다.

벨사살 왕이 술 파티할 때 자기가 그날 밤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죠. 그 사실을 몰랐어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늘 끝이 보살펴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끝이 돼도 마땅하다, 당연하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일반 사람들은 자기가 끝이라는 것을 생각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이제 6장으로 넘어가게 되면 6장에 어떤 일이 있는가? 사자 굴 이야기가 나옵니다. 메대 바사 나라의 서열 3위까지 다니엘이 올라갔습니다. 그때 다니엘의 나이가 86세쯤 됐어요. 참 오래 살았어요. 올라갔을 때 다른 사람이 다니엘 하나를 끌어당기기 위해서 국회에서 법을 정하죠. “경호법을 수정하자.” 이런 거요. 하나를 끌어당기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아셔야 할 것은, 다니엘 자체가 꿈에 속한 꿈의 인물이에요. 다니엘 자체가 꿈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현실적으로 사람들에게 그때 그 당시에 느부갓네살이 꿈꾸고 해석한 것 그것은 많은 긴 현실 속에서 조그마한 일부예요, 일부. 그것을 사건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건이라고 하거든요.

사건은 그냥 시간으로 측정이 안 될 정도로 짧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면 마치 원상 복구가 되는 그걸 사건이라고 하잖아요. 다니엘 존재가 하나님의 꿈의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 정도로 알았어요. 물론 나중에는 사건이 퍼집니다. 확대가 되어버려요. 사건이 확대가 되면서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시간 전체를 관장하는 스케줄이 다 나와요. 그게 70 이레입니다.

십자가가 벌어지면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고 끝까지 ‘알파요, 오메가’ 그 내용이 하나의 스케줄로 거기 다 나오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현실은 이렇게 치이나 저렇게 치이나 치이는 용도로 이 현실이라는 게 지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현실에 통하는 언어는 약속, 꿈에 대해서 아무런 이해를, 접근을 못 하는 거죠. 마치 요셉의 꿈에 대해 요셉 본인도 꿈의 내용에 대해 아는 것 없이 그냥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직접 체험해야 알 수 있는 것처럼요.

그래서 이 사건에 대해서 다수의 현실적 시간이 다니엘 자체를 제거하기 위해서 법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그 법을 알죠? “30일 동안에 누구든지 어떤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넣는다.” 아, 이거 이 국회의원들이 너무 노렸어. 표적 수사, 누구 하나를 잡으려고 아주 작정을 하고 만든 법이에요. 저는 이걸 ‘다니엘 법’이라고 하거든요, 다니엘 처단법. 임금을 조종해서 다니엘 처단법을 이렇게 만든 겁니다.

여기서 이거 하나 아셔야 돼요. 여기서 잠시 복습을 하겠습니다, 벌써 잊어버렸으니까. ‘이 세상이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다.’ 만남이 세상입니다. 사람이 사람과 그냥 만나지 않죠. 여기서 물자 교환이 일어납니다. 물자를 교환해서 세상에서 무엇이 축적이 되느냐 하면, 에너지가 축적이 돼요. 에너지가 축적이 되면 이 남는 에너지는 과잉 에너지에요.

과잉 에너지로 말미암아 나오는 게 뭐냐? 여분의 에너지, 잉여 에너지는 전쟁해서 해소시켜야 해요. 이것이 축적이 되어버리면 내부적으로 남아도는 에너지를 탐내기 때문에 바깥 전쟁을 일으켜서 소모를 시켜야 됩니다. 히틀러가 2차 대전을 벌인 이유는 바로 과잉 에너지 때문이에요. 남아있는 에너지를 바깥으로 내놔야 해요.

이게 모든 생물 유기체의 본능입니다. 지구라는 환경에서 에너지가 쌓이게 되면 이걸 바깥으로 내보내서 전체 엔트로피를 조정할 필요가 있는 거예요. 식물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고 인간의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느냐? 인간은 유기체, 미토콘드리아에서 ATP(Adenosine Triphosphate)라는 형식으로 에너지가 만들어지는데 그 만들어지는 하루의 양이 70킬로에서 75킬로의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가 나와요.

엽록체에서 만든 포도당에 여섯 개의 탄소가 있는데 피루브산(pyruvic acid)이라고 해서 해당과정(解糖過程)으로 세 개로 나눠지면서 그게 미토콘드리아에서 ATP로 생산되고 그게 마지막에 폐를 통해 호흡을 1분에 10회에서 15회만큼 하게 되면 산소가 흘러 들어오고 산소와 결합하게 되면 그 ATP, 에너지가 원활하게 수급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신체에서 생명이란 전자의 쉴 곳, 전자가 쉬는 것을 생물학에서는 생명이라고 합니다. 여분의 전자가 자리 이동하고 배치되는 것, 생명이라고 하죠. 그러면 이 모든 게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말미암아 어디로 가는 겁니까? 에너지로부터 시작해서 에너지로 말미암아 에너지로 가는 거예요.

이 에너지는 어디서부터 왔어요? 지구 바깥에서 태양 에너지로 오죠. 그러니까 옛날에 태양신 믿는 것, 이집트가 태양신 믿는 거나 오늘날 과학자가 태양 믿는 거나 논리가 좀 정교하다 뿐이지 똑같은 신을 믿고 있는 거예요. ‘보이는 것이 우리를 살리니까 우리를 살리는 것을 아울러서 그것만 다루면 우리는 계속 살아갈 수 있다.’ 그중 하나가 식량, 양식이고 남아도는 비축된 양식은 전쟁을 통해 소비를 해야 돼요.

전쟁을 통해 소비하는 이 타입, 이것이 바로 타입 B거든요. 혈통의 호혜적 관계 방식의 타입 A에서 타입 B, 그리고 화폐라는 매개체를 통해 남아도는 것을 교환 해버릴 때 그것이 C 타입, 자본주의 시장입니다. 자본주의 시장은 바로 남아도는 에너지를 투자해서 더 많은 에너지를 얻는 거예요.

더 많은 에너지를 얻어서 어디에 쓸 거냐? 자본주의에서 더 어디에 쓸 거냐는 없어요. 돈을 모으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돈 모아서 어디에 쓴다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돈을 모아야 돈을 벌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많은 돈을 모아서 어디에 쓸 거냐? 또 더 많은 돈을 모으는 데 쓰는 거예요. 끝! 그것뿐이에요. 그것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라는 철학자는 자본주의 시장에 있는 사람들 전부다 정신분열증 환자라고 합니다. 목적도 이유도 없이 수단 그 자체를 끌어모으는데 모든 정력을 다 소비하는 거예요. 인간이 욕망하는 게 아니라 욕망이 인간을 만들어 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왜 왕이 그 국회의원들 말을 들었느냐? 왕은, 이런 게 참 어려운데요, B 타입에서 왕이 정복하고 보호해 줄 때 보통 왕이 한다고 하잖아요. 명목상 왕이 앞장서서 해요. 그렇게 하는 데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면, 귀족들이 있어요. 이 귀족들은 어디서 나오는가? 씨족 사회입니다. A 타입이 견제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씨족 중에서 괜찮은 씨를 왕으로 뽑아내는 겁니다. 이게 로마 제국이에요. 로마 제국은 전제 왕국이 아니고 씨족들과 화의를 통해서, 어떤 보이지 않는 계약을 통해 명목상 왕을 통해서 평화롭게 유지하는 겁니다. 그 씨족 사회에서 충분하게 뭘 보장해주는가? 그것이 바로 상업 관계, 상업 활동을 보장해 주는 거예요. 상업활동입니다.

상업 활동이 산업이 되려면 귀족들을 잡아서 조지고, 최고의 절대 군주가 되어서 국가 힘으로 이 산업을 보호할 때 이게 산업 시대, 산업 혁명이 되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상업입니다. 상업은 그냥 시간 차이로 이윤을 남기는 거고, 산업은 단순히 시간 차가 아니라 신용 차이를 통해 더 많은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계속해서 식민지를 개척해야 하는 그 시대가 온 겁니다. 이게 절대 군주에 의해 그렇게 된다, 이 말이죠.

이 절대 군주, 국가가 뭐냐? 유럽에서 그렇게 하는데 유럽의 중심이 주권 국가에요. 주권 국가니까, 인도네시아 같은 경우에는 씨족 별로 되어있던 것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들어와서 하나로 통일하면서 너희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말을 하고, 그때 19세기부터 민족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거예요, 민족이라는 게.

“민족 단위로, 다른 주권 국가들로, 즉 우리처럼 산업이 발달하고, 기술이 발달하고, 국가의 국력이 신장 되는 단일 체계로 내가 너희 민족들을 만들어 줄게.” 하는 그것이 주권 국가에요. 그 주권 국가가 지금 몇 개라고 했습니까? 220개. 그중에 하나가 “아~! 대한민국!” 대한민국이에요.

그러니까 이미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누가 아이디어를 만들어 낸 게 아니고…, 제가 첫 번째 강의 시간에 했잖아요. 모든 인간은 전부 다 균등화되고 균일화되어 있다고요. 뭐 밥 먹고 사는 게 똑같아요, 전부다. 추구하는 게 똑같아요. 캐나다 가나, 미국 가나, 한국에 있으나 똑같다고요.

그러니까 이 다리오 왕도 마찬가지예요. 다리오는 왕이지만 귀족들을 무시하지 못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왜? 물자라는 에너지의 잉여, 축적이 있어야 나라가 되기 때문에요. 그렇다면 다니엘의 에너지는 뭡니까? 다니엘은 에너지가 필요 없어요. 나를 위해서 에너지가 왜 필요 없는가?

다니엘 자체가 꿈이기 때문에, 꿈의 존재기 때문에, 이미 끝을 보여주기 때문에, 다니엘은 인자(人子)기 때문에 에너지라는 게 필요 없습니다. 살기 위해서 어떻게 뭘 하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그 다니엘 법을 제정하고 난 뒤에 사람들은 JTBC, MBC부터 해서 YTN의 카메라를 전부다 다니엘의 집 창문에 대고 있을 때 다니엘이 창문을 활짝 열어버렸어요.

활짝 열고 기도해요. ‘잡아라. 날 잡으라고. 한 판 붙자.’ 에너지를 원하는 쪽에서는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고, 그것을 생명이라고 여기는 쪽과 “나 에너지 없다. 한번 해보자.” 그 사이에서 누가 발발 떨겠습니까? 다리오 왕은 발발 떠는 거예요. “내가 괜히 도장찍어서 서명했어. 이것이 다니엘을 잡을 줄은 내가 몰랐는데.” 이러면서. “다니엘아, 잘 있느냐?” 안부는 왜 묻는지 모르겠어요. “다니엘, 오겡끼데스까, 거기 잘 계십니까?” 묻는 거예요.

다니엘은 이제 굴속에 들어갔습니다. 다니엘을 집어넣었어요. 집어넣고 난 뒤에 다리오 왕이 벌벌 떨며 대기 하면서 “다니엘아, 다니엘아! 하나님이 너를 살려줄 줄을 믿는다.”(단 6:16) 자기가 다니엘을 사자 굴에 집어넣고는 비겁하게 이제 와서 다니엘 편드는 것처럼 내 뜻이 아니었다는 것을 티 내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럴 때 다니엘 6장 21, 22절에, 아이고 이거 큰일났다. 벌써 시간이 56분인데 천사 이야기 하고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자, 여기서 묻습니다. 사자가 장애 사자입니까? 뭐 고장 난 거예요? 그게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24절에 보면 다니엘을 고소한 사람을 다니엘이 있던 자리에 집어 넣으니까 사자가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오자마자 다 씹어 먹었어요. 이쯤 되면 다리오 왕이 회개할 만도 하잖아요? 이상하게 다리오 왕은 “미안하다.” 그걸로 끝내요.

왜냐하면 현실은 꿈에 접근할 수 없고 들어갈 수가 없어요, 임의로. 꿈은 이미 이쪽을 정복했고 누가 정복자냐? 그건 10분 뒤에 합시다. 아, 내가 시간이 이만큼 지난 줄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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