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 언약
2015년 1월 1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35-37
(31:35) 나 여호와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 바다를 격동시켜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내가 말하노라
(31:36) 이 규정이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폐함을 입어 영영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31:3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위로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아래로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행한 모든 일을 인하여 그들을 다 버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람들은 자신의 지킬 규정에 신경 씁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양보없이 지키시는 규정에 대해서는 신경 안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자연세계에 모범생을 심어놓았습니다. 그것은 해와 달과 별입니다. 그것들과 하나님 사이에 언약이 있어 그들 해와 달과 별은 어태껏 그 언약을 위반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새언약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새언약을 주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해와 달과 별처럼 빈틈없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움직이는 나라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새언약대로 움직인다는 이스라엘됨을 소원할 것이 아니다 왜 우리 인간들은 해와 달과 별처럼 하나님의 규정대로 살지 못하느냐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란 거저 주시기는 하지만 그 그저 주신다는 것은 우리 내부의 문제점을 여지없이 다 폭로시키게 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가치는 다치지 않고 추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약속은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 살게 하셨습니다. 거기는 포도가 잘 자라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른 것을 보게 하십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 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사 5:2-4)
좋은 포도가 맺혀야 하는데 못 먹는 들포도를 맺었다는 것은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을 포도같은 피조물로 다루시겠다는 겁니다. 포도가 이스라엘을 만족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족하기 위함인 겁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인간들은 창조주를 만족함에 방해하는 요소가 내장되어 있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의 관심사는 새언약에 가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렘 31:31-32)
이 언약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언약을 파했다’는 경우가 어떤 경우인지를 인간쪽에서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새언약은 스스로 언약 파기와 그것이 곧 새언약 완성의 내용이 된다는 점을 모두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겁니다. 누가복음 22:1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눅 22:17-18) 이 말씀의 의미는 새언약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이 끼어들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하시고 진행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일단 언약이 완성되고 난 뒤에는 시간을 종결시켜 버립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 위해 ‘최후의 언약’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 ‘새언약 내에 그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 시간의 끝은 어디일까요? 바로 ‘죽음’이지요. 인간들은 ‘죽음’을 최고의 실패 모습으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죽은 망자에게 최대한도로 애우해 주는 것은, 아직 그런 마지막 실패에 도달하지 않아서 살아있는 자신을 여전히 희망이 유효하게 남아 있는 성공자로 자처합니다. 덜 실패한 자가 완전하게 실패한 자(망자)에 대해서 배려 차원에서 보상해 주려는 것이 장례의식입니다. 하지만 운명은 무덤입니다.
무덤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이는 곧 인간이 ‘존재의 뒤편’을 못보고 있는 겁니다. 2001년에 루마니아 시골 여인이 자신의 장례식 관속에서 기절해 있다는 다시 깨어나서 자신의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음을 놀라서 관속에서 급히 뛰어나갔다가 지나가는 트럭에 받혀서 즉사했습니다. 이래서 그 여인은 그날이 역시 장례식의 날이었습니다.
이처럼 인간 세계는 자신의 존재 뒤편에 죽음이 있는데 그 죽음 뒤편으로 나아갈 줄을 모릅니다. 막혀 있고 저지당합니다. 그래놓고서는 여태껏 자신이 평생을 최선을 다해 잘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과연 제대로 살았을까요? 예수님의 포도나무에 난 것을 제공하고 난 뒤에 알려진 내용이 성경에 나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0-18)
하나님의 새언약 입장은 모든 인간은 존재 뒤편에 대해서 이토록 무지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어느 정도로 무지한 지를 본인이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놓고서는 자꾸 자기 연민으로 똘똘 뭉쳐져 삽니다. 여기에 대한 대책이 뭘까요? 그것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고후 5:13) 즉 맨 정신이 문제였던 겁니다. 사도의 제안은 주님이 주신 사랑에 미쳐버리면 된다는 겁니다. 인간의 존재 뒤편에 이미 주님의 사랑이 대기해 있습니다. 인간이 실패라고 단정한 그 죽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이 사랑에 접근하려면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망나니였나를 겪여야 합니다. 비록 남들 보기에 “하나님 때문에 그럴 필요가 있나”하더라도 즐겁게 주님의 최종 사랑에 모든 것을 던져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이 얼마나 하나님의 수긍하는지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7강-예레미야 31장 35~37절(포도나무 언약)25011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1장 35~37절입니다. 구약성경 1102페이지입니다.
“나 여호와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 바다를 격동시켜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내가 말하노라, 이 규정이 내 앞에서 폐할찐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폐함을 입어 영영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위로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아래로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행한 모든 일을 인하여 그들을 다 버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자연에 모범생을 줬는데, 그 모범생이 어느 정도로 모범생이냐 하면 하여튼 말을 어기는 경우가 없어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하는 모범생을 자연에 허락했다는 겁니다. 그게 해이고, 달이고, 그게 별이라는 거예요. 해와 달과 별은 하나님의 지시를 곧이곧대로 지켜서 처음에 움직이라는 대로 움직이고 활동하라는 대로 활동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와 달과 별이 활동할 때, 그들 사이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언약이 있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대로 모범적으로 움직이는 해와 달과 별이 있다. 따라서 너희는 해와 달과 별을 보면서, 저들은 저렇게도 하나님의 말을 잘 듣는데, 왜 우리는 지독하게 말을 안 듣고 살아가느냐를 발견해야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과 맺은 약속을 이스라엘이 모르기 때문에, 그 규정을 모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해와 달과 별과 맺은 그 규정에 의해서 처벌받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멸망하는 것은 너희들 잘못이지, 이 하나님 잘못 아니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하나님 이야기하시는 것이 냉정합니까. 이게 이렇게 차갑게 들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 인간 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돌봐주신다’라고 자꾸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우리 편을 들고,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우리에게 약속을 주었다고 오해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35~37절에서 주님께서 비비 꼬시면서 이야기하시는 거에요. “너희들은 내 규정을 알면 멸망하지 않는다. 그런데 너희들은 내 규정을 모르기 때문에 필히 너희들은 멸망해도 싸다”
그러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우리가 멸망해버리면, 하나님 쪽에서는 뭐가 이익이냐. 우리 멸망 시켜놓고 하나님 쪽에서 얻고자 하는 게 뭐냐는 식으로 인간들이 나오겠지요.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에게 내린 규정이 본래 완성을 보겠다는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고 내 목적이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너희들을 나는 믿지 않는다. 해와 달과 별처럼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 왜 시킨 대로 안 해? 왜 시킨 대로 안 하느냐?”라는 거죠. ‘뭐 세상 다 더러운데’라고 하는데, 해야 더럽냐? 달이 더러워? 별이 더러워? 더러운 것은 인간만 더럽지 해와 달과 별은 지금 멀쩡하게 하나님의 지시대로 지금 잘 따르고 있잖아. 거기에다 하나 더 추가하면 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다 따르고 있습니다. 천사의 할 일은 뭐냐. 하나님의 지시대로 그냥 세상을 완전히 다 멸망시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유명한 영화 제목에 이런 게 있어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라는 옛날 영화가 있어요.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거. 왜 하나님은 인정사정 안 보는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자꾸 인정사정을 봐주느냔 말이죠.
이건 우리에게 하나님의 규정이 삽입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너무 우리 위주로 자꾸 우리를 변호하고, 우리 자신을 편애해요. 뭐 ‘우리 자신이 불쌍하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래서 이 언약 규정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정사정없이 그냥 원칙대로 밀어붙이는 그런 하나님에 오히려 우리는 안심해야 하고, ‘야, 진짜 믿을 만한 분이다. 우리 인간까지 쳐내는 거 보니까 정말 하나님은 자기 원칙이 분명하구나’라고 그런 하나님으로 우리가 개정하고 수정해야 합니다.
나 빼고 믿는 하나님, 나 복 주는 하나님 빼고 믿는 하나님,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 그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하나의 편애, 또는 나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에, 진짜 하나님을 믿는데 방해가 되었어요. 우리 자신이 하나님 믿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이 방해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제 방해물 제거하시고, 이것을 뽑아내십니다.
뽑아낼 때 동원되는 것이 뭐냐, 또 하나의 자연물이 인간 가까이 갑니다. 해와 달과 별은 하나님 시키는 대로 하지만, 너무 멀리 있어요. 그런데 여기 가까운 데 있으면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피조물이 있습니다. 동물도 아닙니다. 포도나무예요. 식물입니다. 포도나무. “내가 약속의 땅에 포도나무 심으라고 했어, 안 했어? 심으라고 했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도나무 심는 이유를 이렇게 오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여기서 살찌우라고 포도를 주신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포도 심으라고 한 이유는 너희들이 여기서 밥 먹고 살라고 약속의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너희 내부에서 나오는 내부의 성격, 그 욕망이 참 좋은 포도나무를 심어도 그걸 뭘로 바꾸느냐, 심어놔도 들포도, 먹을 수 없는 들포도가 나오도록 내가 너희들을 그 작업에 동원 시킬 것이다”
주님께서는 인간 내부에 포도나무를 심어도 못 먹는 나무가 될 수밖에 없는 요소가 인간 내부에 가득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걸 빼내지 아니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겁니다. 그 일을 어디서 하는가. 약속의 땅에서 하는 거예요. 약속의 땅에 대한 오해가 또 있습니다. 약속의 땅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우리에게 거저 주신다는 이걸 약속이라고 보는데, 그렇지 않고 약속의 땅에서 실제로 삶을 살게 만들어요.
그리고 그 약속을 주시기 전에, 우리가 약속을 위배하는 요소가 우리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들통 내고 발각시키는 그 작업, 하나님의 치밀한 작업 같은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이렇습니다. “말씀을 믿어라” ‘믿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말씀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그게 아니고 말씀이 네 안에 들어오면 네가 캐내지 못한 말씀에 대한 원수, 하나님에 대한 훼방을, 말씀이 친히 네 안에서 다 끄집어낼거다. 그 요소를 다 끄집어내 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말씀이 성취되는 과정입니다. 여러분은 의사들이 친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침대 누우세요. 이제 마취 들어갑니다. 이제 칼 들어갑니다’라는 무슨 이런 친절이 다 있습니까? 째야지요. 째고, 끄집어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암세포를. 그런데 결국 다 낫고 난 뒤에는 ‘의사 선생님, 고맙습니다’라고 돈까지 주지요. 고맙다고.
특히, 치과가 친절하던가요? 저 이빨 뽑을 때 죽을뻔했어요. 아파서. 이건 뭐, 죽으라고 빼요. ‘야, 이거 과잉치료 아닌가. 보통 내 상식으로는 흔들흔들 할 때 빼야 하는 건데, 안 빠지는데 펜치(pilers)가지고 억지로 빼니까, 이건 물주 왔다고 억지로 하는 게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카라멜 먹다가 이가 두 개 빠졌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두 개나 빠졌는데 하나도 안 아파요. 왜? 임플란트 이가 빠졌어요. 임플란트 빠질 때 안 아픈 거 처음 알았습니다. 빠져도 안 아프게 해주는 거, 이제 다른 거 임플란트 빠져도 안 아플 거예요. 내 것이 내 것으로 분리되는데, 하나도 안 아파요. 분명히 이빨이 내 이빨인데 빠져도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아프지도 않고.
바로 하나님의 원칙을 버리고, 나에게 연민을 주는 나를 사랑하는 원칙 버리고, 주님의 원칙으로 나으려면, 주님의 포도나무 절차를 주목해야 해요. 포도나무 절차에 대해서 누가복음 22장 18절에 나옵니다. 역시 성경들은 어려운 대목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 어려운 대목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하늘나라와 포도나무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 두 개의 개념을 그냥 엮어버립니까? 그 이유가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라고 할 때, 그게 어디서 나오는 거냐면, 포도나무에서 나온 것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약속이라는 것을 구체화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친절은 이거예요. 제자들 눈에 보이는 그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포도주를 가지고 모든 설명을 다 해주시는 거.
이게 얼마나 고마운 친절입니까. 모호한 천국, 모호한 지옥, 허황한 모든 개념들, 사랑, 믿음, 모든 소망, 다 허황한 데, 그게 허황한 것이 아니고 포도나무에서 나온 포도주를 가지고 설명을 친절하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 해줬어요. 오늘 예레미야 31장은 거기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레미야 31장에 “내가 너희와 새 언약을 세울 것이니, 새 언약이 너희들 속에 들어가서, 이제는 너희가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너희 속에 있는 약속이 너 대신 모든 법을 네 속에서 완성할 것이다”
“따라서 너는 몸만 다오. 그것도 죄 없는 몸 말고, 죄로 가득한 몸만 나에게 다오. 네 속에 내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집어넣어서 그렇게 새 언약을 이루자. 우리” 이 약속이 바로 예레미야 31장이잖아요. 그러면 우리 인간은 가만히 있지 않고 버티기 들어갑니다. 제가 나름대로 열심히 할게요. 교회 나오고, 충성하고, 교회 봉사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제가 열심히 해서 제가 구원받겠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5장은 완전히 거부합니다. 5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혈과 육은,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행할 수 있는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가 없습니다. 바통을 이을 수가 없어요. 하늘나라에 바통을 잇는 것은 새 언약을 이루신 예수님의 혈과 육만이 가능합니다.
예수님 자신의 몸을 짜서, 예수님 자체를 짜서, 주님의 몸을 짰어요. 그게 포도나무예요. 그리고 그렇게 포도나무에서 난 자를 가지고 포도나무의 열매라고 하고, 그 열매만이 천국의 열매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열매입니다. 노선을 분명히 해요. 우리 노선 안 되고요. 주님의 노선부터, 그 포도나무부터 시작해서, 그 포도나무는 들포도 아닙니다.
못 먹는 포도 아니에요. 하나님의 상에 들어갈 수 있는 포도나무예요. 주님의 포도나무 짜서 거기에서 나오는 그 엑기스, 그 액체가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우리는 그 포도나무의 열매라고 지칭하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면, 그 포도나무에서 먹는 그 시간, 그 시간으로 이미 모든 시간은 무의미한 시간으로 이어지겠지요.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인간은 이러한 인간들의 요소가 예수님이 포도나무를 통해서 한 것을 제가 아까 방해했다고 했지요. 그러한 한 예를 들겠습니다. 2001년도에 루마니아의 시골에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분이 병들어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마을 사람들이 그 여성의 장례를 치러줬는데, 원래는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그 여자분이 시골이라서 그런지 의사가 좀 실력이 없었는지, 안 죽었는데, 그냥 기절한 건데, 관에 넣어서 뚜껑을 덮어서 무덤으로 들고 가는 거예요.
무덤으로 가는 중에 여자가 기절했다가 깨서 관을 두드리니까, 사람들이 놀라서 보니 아주머니가 아직 안 죽은 거예요. 관을 내려놓고 뚜껑을 여니까, 누가 더 놀랐느냐 하면, 마을 사람들도 놀랐지만 더 놀란 사람은 막상 자기가 죽은 사람으로 간주 되었다는 것에 더 놀라서, 관에서 뛰쳐나와서 달려가다가 마침 옆에서 나오는 트럭에 받혀 죽었어요.
그러니 그날이 그 여자의 장례식 맞아요. 이것을 운명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운명은 시간을 가지고 설명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운명은 언약으로 볼 때 갇혀 있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트럭에 받히지 않고 20년 더 살아도 역시 죽어요. 왜냐면 이 공간 자체가 무덤 속이니까. 언약이 없으면 기존의 세계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것은 여전히 처음부터 죽음이고, 계속 죽음이고 그런 겁니다.
종교단체도 그렇고,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 사람을 애도해서 장례를 치르는데, 그 장례의 취지가, 이미 그 사람은 죽었기 때문에, 죽은 자는 그 순간부터 사람들은 실패자로 간주해요. 아무리 잘 먹고 잘살아도 죽었으면, ‘참 안 되었다. 실패했다. 우리는 성공했지, 그치? 우리는 아직 살아있으니까 실패 안 한 거지?’라고 위로 하면서 죽은 자를 실패자로 간주하면서 실패자에 대한 최대한의 예우와 배려와 보상을 해주는 것을 가지고 장례 의식이라고 합니다.
비록 죽은 자는 죽음 자체가 실패이기 때문에 끝났지만, 여유 있는, 살아있는 우리가 망자를 위해서 가신 길 고이 보내드리기 위해서 최대한으로 예의를 갖춰주는 거. 결국은 이 장례식은 죽은 자를 위함이 아니고, 산자가 얼마나 마음이 넓고 마음이 후하고 베풀어 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을 티를 내기 위해서 장례를 거창하게 치르는 겁니다.
밤새도록 장례 치르고 자기는 나중에 술 먹고 행패 부리고 싸우고 난리지만, 그처럼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찾아오면 안 되는, 실패도 그런 실패가 없는 게 죽음이에요. 그런데 이 죽음의 문제가 존재의 뒤편까지 못 간다는 겁니다. 데모할 때 이렇게 밀어붙이자고 하는데, 보통 경찰에 막히잖아요. 우리도 이 땅에 살면서 주춤주춤 물러가는데, 뭐가 툭 바쳐요.
물러가도 더 이상 물러가지 못한다는 것은, 이제 내가 어떤 계획과 목적이 있더라도, 그 모든 것을 여기서 접어야 한다는 절망감을 알려주는 그 존재의 뒤 칸막이, 장벽, 그것이 죽음이에요. 왜? 죽으면 실패니까. 어떤 사람은 그게 너무 일찍 오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100살이 넘었는데, 아직 안 오는 사람도 있어요. 김형석 박사, 그 사람은 104살인데 아직 안 왔어요. 지금도 수영하고 있어요. 건강을 위해서 매일.
어쨌든 공통점은 있어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툭’하고 받히는 곳이 있어요. 그 존재의 뒤쪽, 뒤편이에요. 이제 남은 문제는 그 존재의 뒤편 장벽이 뭐가 있는지 돌아보기를 해줘야 합니다. 돌아보기를 해야 하는 데 오늘 예레미야 31장이 그거예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별과 해와 달에게 적용되는 그 언약 적용의 입장에서 너희들은 필히 폐해져야 하고 망해야 한다.
하여튼 지독하게 말을 안 들어요. 지독하게 안 들어요. 그래서 이것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입니다. 극단으로 밀어붙이는데 고마운 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로마서 3장에 나오는, 우리 존재의 뒤편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봤던 예레미야는 그게 절망이에요. “나중에 보면 하나님의 법이 네 마음속에 오겠지만 지금의 너는 좀 망해줘. 처벌을 받아. 그게 너에게 딱 맞아. 다른 생각하지 마. 너는 존재의 뒤편이 죽음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왜 죽는 줄을 모르잖아”
존재의 뒤편을 소개할 수 있어서, 저는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로마서 3장 10~18절에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남을 두려워했지 언제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까? 이게 우리 존재의 뒤편이에요. 그러면 끝으로 설교 마치면서 해답을 줘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럼 목사님의 대책은 뭡니까? 뭐 제 대책이 필요가 있겠습니까? 성경 대책이 대책이죠. 그럼 대책이 뭡니까? 사도 바울의 대책이 뭡니까? 간단합니다. 멀쩡하지 말고 미치라는 겁니다. 맨정신으로 살지 말고 미쳐버려.
미치라는 거예요. 자꾸 맨정신으로 사니까, ‘나는 그래도 하나님 찾았어. 나는 그렇게 거짓말만 한 게 아니야. 가족들에게 얼마나 성실한데’라고 자꾸 존재의 뒤편을 생각하지 않고 과거에 경험했던 내 존재가 얼마나 성실한가를 그걸 자꾸 끌어모아서, 그것을 가지고 자기방어에 나서는 거예요. 자기 존재의 뒤편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지독하게 말 안 듣는, 너희는 하여튼 하나님의 계약에 의하면 썩은 포도나무고, 지독하게 말 안 들어.
이러한데, 그것을 볼 생각은 하지 않고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5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미치자”[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남들이 미쳤다고 해도, 오히려 영광스럽게 여기고, 남들이 맨정신으로 살더라도 그걸 부러워하지 말고 미쳐버려. 어디에 미치는가. 사랑에 미쳐버려. 주님의 사랑에 미쳐.
이번 수련회가 주님의 사랑에 미쳐버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맨정신으로는 제가 다 커트시킬 거예요. 뭐, 좀 ‘안다, 똑똑하다. 성실했다, 나름대로 선방하는 인생을 살았다’라는 그게 맨정신입니다. 맨정신은 안 돼요. 자기 존재의 뒤편을 가리는 비겁한 짓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사랑은 연약한 갈대를 삼켜버리는 강물이라고
또 누군가는 말합니다. 사랑은 당신의 영혼을 피 흘리게 하는 면도칼 같다고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사랑은 끝없이 목마른 갈망과 같다고
하지만 나에게 사랑은 꽃이고, 당신은 유일한 꽃의 씨앗입니다
로즈(The Rose by Bette Midler)라는 미국의 팝송이에요. 팝송 가사예요.
밤이 너무 고독하고 갈 길이 너무 멀게 느껴질 때,
그저 사랑은 행운이 따르는 강한 자의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이걸 기억하세요 겨울에 혹독한 눈 속 깊이 잠자는 씨앗이
따스한 햇빛을 받으면 봄에는 장미로 피어난다
씨앗이 우리 속에서 포도나무가 그 씨앗이, 주님이 포도나무의 열매로써 사랑을 할 때, 우리의 존재 앞면만 보고 있는 우리는 주님 뒤쪽에 죽음을, 그 죽음 안에 감춰놓은 주님의 죽음의 씨앗, 새 언약의 죄 용서하심인 사랑을 본다면 우리가 앞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는 이것이 족히 비교되지 않는, 사랑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멀쩡하게 살았던 것은 사랑을 오히려 모독한 겁니다.
사랑을 무시했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나름대로 멀쩡하게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사랑만 있으면 충분해요. 다른 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죽음 안에 주님의 사랑을 심어놓은 주님의 친절함과 은혜에 대해서 감사 하는 저희들 됩시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멀쩡하려고 하니까 문제 해결이 안 되었습니다. 남들 보기에 대단한 존재처럼 여겨지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점점 더 어깨 위에 강하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차라리 사랑에 미쳐버릴 때, 사랑이 우리 안에 움트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인 것을 저희들 체험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The Rose | |
Bette Midler | |
Some say love, it is a river | 어떤 사람들은 사랑은 강물이라고 해요 |
That drowns the tender reed | 연약한 갈대를 익사시키는 강물이라고 |
Some say love, it is a razor |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면도날이라고 해요 |
That leaves your soul to bleed | 당신의 영혼을 피 흘리게 하는 면도날이라고 |
Some say love, it is a hunger |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굶주림이라고 해요 |
An endless aching need | 끝없는 고통을 주는 굶주림이라고 |
I say love, it is a flower | 나는 사랑을 꽃이라고 해요 |
And you, its only seed | 그리고 당신은 그 유일한 씨앗이라고 |
It's the heart afraid of breaking | 상처받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
That never learns to dance | 춤추는 법을 배울 수 없어요 |
It's the dream afraid of waking | 깨고 싶지 않은 꿈에서는 |
That never takes the chance | 결코 기회를 얻을 수 없죠 |
It's the one who won't be taking |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
Who cannot seem to give | 줄 줄 모르는 사람이예요 |
And the soul, afraid of dying | 죽음을 두려워하는 영혼은 |
That never learn to live |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없죠 |
When the night has been too lonely | 밤이 너무 외롭고 |
And the road has been too long | 길이 너무 멀게 느껴질 때 |
And you think that the love is only | 시랑은 운 좋은 사람이나 |
For the lucky and the strong | 강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
Just remember in the winter | 겨울에 그냥 기억해요 |
Far beneath the bitter snows | 매서운 눈 더미 아래 |
Lies the seed that with the sun's love | 봄의 햇살을 받으면 |
In the spring becomes the rose | 장미로 피어나는 씨앗이 숨어 있단 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