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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헬의 본질

아빠와 함께 2024. 12. 15. 21:36

라헬의 본질

2024년 12월 1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15-16

(31:1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31: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라마는 유대민족의 포로가 바벨론으로 포로잡혀가는 길목이자 집결지입니다. 거기서 수많은 이스라엘의 쓸만한 인재들이 적군에게 잡혀가서 영원히 살던 고향을 떠나게 됩니다. 단순히 고향을 떠나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살던 땅은 조상 히브리 민족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한 데서 벗어나 비로소 마음껏 노예로 대우받지 않는 정복자의 삶을 살게 해준 땅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주변에 인간들을 상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본인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하지만 약속의 땅에서 살던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같은 인간들을 상대해서 그들의 생존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이미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을 지키고 싶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관계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닙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을 좀 살만하기 하나님을 치워버린 겁니다. 그저 살던 땅은 어떻게든 지켜주시겠지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어떤 하나님의 희생이 들어 있는 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혜택받을 생각을 하며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이 하나님의 희생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에 상처가 주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타민족에게 분노하기 이전에 자기 백성들에게 분노하십니다. 슬픈 하나님의 마음은 곧장 이스라엘 민족에 슬픔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속 마음이 어느 정도로 슬픈지 그것을 이스라엘도 같이 겪여야 합니다. 이는 일종의 역주행과 같습니다. 평소에 그들은 이방민족을 공격해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공격했음이 분명하게 드러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 방식은 하나님께서 옛적의 포로생활을 재현하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적이 어떤 존재인지를 파악이 되고 그 적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원래의 이스라엘이란 도대체 뭔가’를 재정립하는 기회가 됩니다. ‘라헬’이라는 표현은 야곱의 아내 이름이면서 야곱의 나라의 운명을 반영해 주게 됩니다. 전체 이스라엘이 당하는 바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종속된 가족들도 같이 슬픈 일을 겪는 겁니다.

이러한 슬픈 일의 본질은 창세기 35:16-19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신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벧엘에서 베들레헴으로 내려가는 길에 야곱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인 라헬이 죽습니다. 그런데 그 라헬의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생산과 관련을 두고 일어난 슬픈입니다. 아이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발생되지 않을 일입니다. 라헬은 자기가 낳은 자식과 죽어가는 자신과의 분리를 염두에 두고 이름을 짓습니다.

‘슬픈의 자식’이라고 자신의 심정을 담아 이름을 짓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즉각 그 이름을 바꿉니다. ‘슬픔의 자식’에서 ‘오른손의 아들’로 바꿉니다. ‘오른손의 아들’이란 곧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이런 어미의 죽음이라는 슬픔의 환경에서만 등장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아들은 희생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슬픔의 원리가 이스라엘 역사 내내 내부에 살아있어 이 내부를 본질을 갖추어져야만 완전한 이스라엘이 성립한다는 겁니다. 천국이란 ‘하나님이 사시는 곳’이 아니라 ‘아들을 인해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따라서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아들’이 지상에서 당했던 그 환경을 공유해야만 하는 겁니다. 이것이 완전한 이스라엘로 나아가는 노선입니다. 마태복음 2장에 보면 아기 예수님의 출생과 더불어 주변에 슬픈 일이 같이 일어나는데 이 관련성을 갖고서 ‘라헬’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 2:16-18)

베들레헴이 기거하는 백성들 중 2세 이하의 남자 아이들이 몰살당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기 예수님을 애굽으로 빼돌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과 연관해서 이러한 불상사가 계속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이 세상의 불순함 때문에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 희생당해야 하고 이 본질에 같이 참여되는 자만 구원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미리 예수님을 모시고 메시야를 받아들이기 위해 불행한 사태를 유발하거나 각오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에게 일어난 희생과 불행을 짐작할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사 52:13-15)

이렇게 되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사전에 하나님의 아픔을 모방하고 흉내내려는 모든 순교 시도는 거짓임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의 효과로서 구원이 되어야 하는데 자신의 고난이 자기 구원에 밑거름이 되고자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하나님을 옆에서 시중드는 이 엄청난 자리를 얻은 것이 결코 예수님의 고난을 자신이 시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도리어 놀라야합니다. 이 놀라움이 그동안 세상에 친숙하려고 애썼던 모든 것을 가볍게 포기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진정 신앙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들이 시도하는 모든 고난이 얼마나 어설픈 것임을 자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3강-예레미야 31장 15~16절(라헬의 본질)24121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1장 15~16절입니다. 구약성경 1101페이지입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라헬이라는 그 인물과 하나님의 연속적인 일과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이 궁금하고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하시는가 그것을 알고 싶을 때, 라헬이라는 그 여성에 대해서 주목하라는 거죠. 라헬이 옛날 야곱하고 같이 있으면서 일어났던 그 일이, 나중에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되잖아요. 그 열두지파가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될 때, 라헬의 그 슬픈 요소가 삭제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같이 갔다는 겁니다.

그 슬픈 것을 왜 같이 가느냐. 마태복음 1장, 특히 2장이 크리스마스 때 자주 인용되는 그 구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상한 이스라엘, 참된 천국 백성이 나타납니다. 그 백성들은 공통점이 있어요. 공통점이 뭐냐 하면, 라헬의 눈물에 참여한 자만이 천국 백성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라헬의 눈물은 원인이 있어요. 원인이 뭐냐. 요셉의 아들 예수님이 하나님의 원수로부터 죽임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은 빼돌리고, 그 빼돌린 현장에 남아있던 2살 밑에 아이들이 몰살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2살 밑에 아기들과 그 어미들, 라헬들이죠, 그 수많은 라헬들은 먼저 예수님에게 희생을 당했기에 예수님과 더불어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된다는 논리입니다. 천국 백성이 된다는 거, 그냥 뽑으면 되잖아요. 왜 그렇게 복잡하냐. 그것은 천국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이기 때문이에요. 예수님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되는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 죽지 아니하면, 아예 하늘나라가 없어요.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 계시는데 끼어들어 같이 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요소가 있어야 해요. 천국의 요소가 예수님의 십자가라면, 그 십자가에 참여된 자만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원칙을 하나님께서는 계속 고수하게 되어있어요.

그 원칙을 이미 이스라엘에게 역사 속에서 그걸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면 그 원칙이 우리에게는 껄끄럽고 우리를 거부하고 싶으냐. ‘그냥 조용하게 살다가 데려가소서. 천국으로’라고 하고 싶은데, 왜 라헬의 눈물을 흘리는 원칙을 우리는 거부하느냐. 그것은, 그동안 우리는 사는 법에 익숙했지, 그보다 높은 법, 죽어야 산다는 법에는 우리가 낯설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 어릴 때, 불쌍한 시골 누나들, 아직 고등학교도 못 가고, 중학교밖에 못 나온, 또 중학교도 못 나온 그런 어린 소녀들이 서울에 와서 돈 벌겠다고 그들이 갔던 학원이 있어요. 이건 60년대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학원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아려요. 그 학원이 미싱(재봉틀) 학원이에요. ‘아가씨 어디 나왔어요?’ ‘미싱학원 다녔어요’라고 하면 봉제 공장 다녔다는 걸 알아요. 밟았구나. 마구잡이로 밟았죠. 하루에 16시간씩 근무하면서 밟았죠. 서울 평화시장에서.

그럴 때, 주위의 많은 사람이, 참 안 됐다. 불쌍하다. 공부할 나이에 공부도 못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서 오빠들 대학 보내고, 자기는 아무것도 옷도 못 해 입고, 동생들 뒷바라지하고 그랬다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왜냐 하면 그 당시 서울에서 봉제 공장 취직한 것만도 어딘데요. 사람들은 이미 지나간 시대에서 ‘안 됐다. 불쌍하다’라고 하지만, 막상 그 시대에서는 남는 게 뭐냐, 어떻게 하면 내가 사는 법에 끼어들 수 있느냐.

그냥 사는 게 법이에요. 그냥. 내가 살아남는 게 가장 우선 문제이지, 불쌍하다는 그건 사치입니다. 이점을 그 미싱하는 아가씨 생각을 하면서 다시 마태복음 2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 우리가 빠뜨리는 대목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정치적 국가적 난폭함, 권력의 난폭함에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른다는 거예요.

왜? 친숙해졌으니까요. 살기 위해서는 상황에 친숙해야 하죠. 그 친숙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한 상대에게 자기의 목숨을 보존해 달라고 굴복하는 것만이 유일한 사는 길입니다. 목숨을 보장받기 위해서 굴복하는 거. 그것을 사람들은 비굴하다고 말 못 해요. 비굴한 것도 아니고, 그게 그냥 사는 거예요. 이 세상에 사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특이하지, 이방 민족은 전혀 특이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들이 천국 백성이라면, 주님의 뜻은 이렇게 주어질 겁니다. 어떻게 주어지느냐 하면, 나의 이익이 돌아오지 않는 한, 맘 놓고 살아라. 나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는 조건하에, 네 멋대로 살아라. 맘 놓고 자유롭게 살아라. 너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는 한. 이런 말이 성경에 나오는지 물으시는데, 나옵니다. ‘나는 그런 구절 처음 들어보는데’라고 하실텐데,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지금 이 구절이 어느 상황에서 돌아오느냐 하면, 지금 2살 밑에 다 죽은 아이들의 엄마들도 마찬가지고요, 베드로의 상황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님이 정치적으로 밀리기 시작했어요. 예수님의 지지율이 11%까지 떨어졌어요.

지금 따라다니는 제자들도 목숨이 위태합니다. 지금 잡아들이라고 현상수배 걸렸어요. 모든 직무 정지되고. 그런데 이 판에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간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한복음 13장 36절에서 베드로가 2가지를 물었어요. 여기는 한 가지만 물었지만 사실상 2가지를 물었어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그때 주께서 답변을 2가지를 하셨어요.

어디로 가는 것에 대해서 너는 모르고, 그다음에 중요한 것을 답하셨어요. “지금 너는 따라올 수 없다”라고. 그래서 베드로는 감을 잡았지요. 아, 예수님께서 우리 다 놔두고 홀로 어디를 가시는데, 그게 죽음과 관련되었다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 그래 놓고 14장 1절에 “그러니까 너는 마음 놓고 너의 이익 생각하지 말고, 너 살길 생각하지 말고, 마음 놓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라는 이게 얼마나 도발적인 신앙 강권입니까.

신앙은 이 정도 되어야 신앙이죠. 자기 이익 챙기는 것은 신앙 아닙니다. 그건 요령 부리는 거죠. 주께서 그건 놓치지 않죠. 미싱학원 다니는 옛날 누나들이 자신들은 고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 딴에 열심히 사는 법에 익숙해지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라헬은 왜 울었는가. 친숙함에서 낯섦으로 바뀌기 위해서.

친숙한 환경이 위태로운 환경이 된 거예요. 그걸 성경에서는 곤궁(困窮)이라고 합니다. 곤란한 처지. 어떻게 내가 손쓸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놓인 거예요. 친숙한 것에 익숙한 나의 환경이 이제는 곤란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그 원칙이 오늘 예레미야의 본문에 의하면, 그 원칙이 있어 줘야, 이게 진짜 이스라엘이 개시되고 출발 된다고 보는 겁니다.

누가 친숙함에서 자진해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친숙함을 떼 낼 생각은 아무도 안 합니다. 익숙해진 거, 그동안 친숙하고 친근함을 갖기 위해서 얼마나 공을 들였습니까. 서로 좋은 관계 하고 돈도 많이 썼을 거고, 바쁜 시간 억지로 내서 만나준 것은 친숙함이 내 사는 법에 유리하다는 계산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주위에 아는 사람, 도움 되는 사람을 원했잖아요.

그런데 그 친숙함이 하나님의 천국 원리가 개입되어 버리면 위태함으로 넘어가 버려요. 곤궁한 입장, 곤란한 입장에 놓이는 겁니다. 이제 예레미야에 와서 본격적으로 라헬이라는 여인이 왜 등장하느냐, 그런데 이게 어렵습니다. 창세기 35장 16~17절에 나옵니다. 벧엘에 와서 라헬이 해산을 하는데, ‘벧엘’이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의 집’이에요.

하필이면 야곱이 첫 꿈에서 하나님의 사닥다리를 만났던 그 장소, 이름도 하나님의 집, 연락이 서로 통하는 장소에서 라헬이 죽어요. 근데 야곱은 레아가 죽는 것은 그다지 섭섭지 않아요. 그건 1+1이기 때문에. 그런데 진짜 꽂혀서 그대 없이는 나는 죽을 거야 하는 정말 사랑하는, 사랑 앞에 자기는 없어진다고 했잖아요, 그대만 있다면 나는 없어져도 좋아요.

결국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 열두 명 낳은 이유가 사랑하는 여인의 자식을 낳을 때까지 계속 줄줄이 소시지처럼 계속 낳은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여인에게 자식 생길 때까지. 딱 자식이 생기니까, 야곱은 유니폼을 채색옷으로 입혀버려요. 아주 유난을 떨고 있어요. 최고급, 제일 비싼 옷으로 해서, 다른 자식은 자식도 아니라. 요셉이 최고예요. 요셉 볼 때마다, 일찍 간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새길 수 있었습니다.

야곱이 왜 라헬을 사랑했을까요. 이건 남자에게는 아주 어려운 문제가 아니에요. 이뻤어요.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면, 언니가 못났어요. 한번 이쁜 것은 영원히 이쁜 거예요. 못난 것은 영원히 못난 거예요. 못난 사람은 아무리 뭘 해도 못났어요. 이상해. 이건 어쩔 수 없어요. 국민을 위해서 그렇게 봉사하고 희생한다고, 저 여자는 국회의원 나가야 한다고 하면, 유권자는 뭐라고 하느냐면, ‘이쁘냐?’ 이쁘면 무조건 한 표죠.

라헬이 벧엘, 야곱이 계시받은 곳에서 라헬이 죽습니다. 야곱은 살맛을 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도 이 여자만큼은 허락하라고 임재범처럼 외쳤던 그 라헬이 하나님의 계시받았던 그 장소에서 죽었을 때, 그때 라헬도 남편 되는 라헬을 그렇게 사랑했던 모양이죠. 그래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때 이름을 지었어요. ‘아이고, 얘야, 내가 이렇게 귀한 아들을 낳았지만, 나 없이 어떻게 살려고’라고 하면서 이 슬픈 나의 팔자의 덩어리가 너라는 뜻에서 이름을 베노니라고 했어요.

18절에,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슬픔의 아들’입니다. 결국 내 남편과 내가 만나서 기껏 생산했다는 것이 슬픔만 나았다는 그런 아픔을 내놓았어요. 아픔을 내놓았는데, 그걸 보고 야곱이 이름을 바꿨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유언처럼 남겼지만,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그 즉시로 바꿨어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은 이렇게 슬픔을 지니고, 이 땅에 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오른손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오른손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일을 개시하기 위해서 오른편에 계신 분을 지상에 보낸 그 자리, 보내는 그 자리가 오른쪽이에요. 하나님의 일이 하늘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지상으로 연장될 때는 오른쪽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오른쪽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오른쪽에서 내려오시는 그분은 항상 오른손의 아들이에요. 오른손의 능력을, 하나님의 오른손 능력의 사명과 능력을 부여안고 이 땅에 오셨고, 돌아가신 자리도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가신 거예요. 출애굽 때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의 오른손의 능력으로 적들을 무너뜨렸어요.

그런데 여기서 왜 슬픔을 지녔는데, 슬픔의 현장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렇게 지칭할 수밖에 없는가. 하나님께서 이름을 왜 그렇게 짓도록 하셨는가. 그 장소가 뭐냐 하면 베들레헴은 아니고, 베들레헴 길에 장사했다고 했어요. 벧엘에서 시작해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그 길에, 하나님의 아들의 모친을 장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이미 야곱 때, 지정받아 확정된 겁니다.

미가 5장 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하나님의 메시아가 나온다는 겁니다. 어떻게 나오느냐.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나오는 모습을 이사야 52장 13~15절에서 말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그러니까 그 얼굴이 망가진 거예요. 망가지는데, 너무 심하게 망가지니까 다른 사람들이 놀라는 겁니다. 하지만 심하게 망가졌고, 심하게 슬픈 모습을 할 때, 그들은 나중에 그 영광스러움을 생각해 보면 너무나 대조적인 것을 보고 그들은 놀랄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사야 53장은 여러분 잘 알다시피, 방금 이야기한 이런 사실을 누가 믿었으리오. 누가 알았으리오.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천국은, 천국 가는 당사자도 몰라요. 예상 못 했습니다. 인간들은 누구나 자기 사는 환경에서 살기에 친근하고 이미 거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이대로 천국 가면 좋겠다고 이렇게 나오거든요. 아니요. 여기서 뭔가 틀어지는 게 있어야 해요. 천국 가는 본인도 놀랄 정도로, ‘이게 뭐야’라고 할 정도로, 특이한 변곡점 같은 것이 발생 되는 거예요.

이쯤 이야기하게 되면 사람들이 살며시 걱정해요. ‘내가 길을 가다가 아내가 아기 낳다 죽는 이런 일이 꼭 있어야 합니까...’라는 식으로 슬그머니 시나리오를 짜기 시작해요. ‘가만있어봐라. 친근함에서 벗어나 난처하고 당황스러운, 내 예상과 어긋나는 그런 인생이 어떤 것이 있을까?’ 그거 알아서 뭐 하는데? ‘알면 미리 대비하려고’

여러분, 미리 대비해서 가는 천국은 없습니다. 그냥 사시면 되는 겁니다. 혹시 또 국가 권력이, 참혹한 권력이 괜히 종교적 문제 때문에 환란을 줘서, 집안이 거덜 나는 것이 아닌지, 이제부터 교회 나가면, 다 잡아 죽인다고 하는 건 아닌지, 자꾸 얻어들은 풍월로 시나리오를 짜지 마세요. 그거 다 꿈속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친근함에서 벗어나 특이함으로 갈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그런 상황을 걱정하는 사람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건 자기의 본마음을 속이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내가 순교를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 열심히 순교 준비하는 거, 그거 안 속아 넘어갑니다. 속아 넘어가지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 구원되고 안 되고의 그 토대가 우리 걱정하는 마음과 섞이는 것이 아니고, 따로 결정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 홀로 일어난 일이 우리로 하여금 이 말씀이 우리에게 그냥 적용되게 하는 것이지, 내가 고생했다고 너도 나처럼 고생하면 구원해 준다는 이런 엉터리같은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런 것은 이단에게 배우세요. 이단에게. 삼단에게 배우든지.

자꾸 본인이 성경 보면서 본인을 각색하려고 해요. ‘이 정도 고난받으면 좀 구원해 주겠지’라는 참 같잖지도 않아서. 평소에 우리 마음대로 안 삽니까? 평소에 우리 마음대로 살면 그냥 그대로 사세요. 우리가 성도가 되어서 우리 전부 다 구원받는다면 놀랄 일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내가 주님 섬기는 것이 내 본성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런 혜택을 준다는 거예요.

주님 섬기는 자리를 마련했으니까, 빨리 오라는 통보는 누가 놀라냐 하면, 우리 자신이 놀라야 해요. 그 놀라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성도의 기쁨은. 미리 대비하고 고난받고 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공산당이 오면 나는 어디서 기도할까?’ 이런 거 하지 마세요. 잡히든 말든 그냥 사세요. 중요한 것은 이런 일, 어떤 일을 겪는 것은 주님 소관이고, 놀라운 것은 결과예요.

오로지 나만 생각하고, 내 밥벌이할 것만 생각하는 내가, 어느 날 순간적으로 천사처럼 주님 옆에서 섬기는 그 귀한 자리에 앉는 그게 나의 도착 지점이고 내게 이미 고정된 내 자리라는 것을 아무 논리도 없이, 원인도 없이, 그냥 단박에 성령에 의해서 나에게 통보가 왔을 때, 이게 바로 2살 아이 죽는 것보다 더 놀랄 일입니다. ‘제가요? 제가 말입니까? 이건 놀라 자빠질 일인데요. 제가 왜 그 자리에 가죠?’

“싫어?” ‘싫은 게 아니고 너무 좋아서 하는 말입니다. 제가 뭘 했다고요?’ 이 마음을 가지고 다시 한번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한, 여러분 마음대로 사세요. 하나님의 모든 지정된 것은 일단 여러분에게 여러분 자신을 확정시켰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마시고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이 꼼수에 꼼수를 남발했습니다. 성경 보고 믿는 자 비슷하게 가려고, 얼마나 부질없는 짓거리, 그렇게 마귀에게 놀림 받는 짓거리를 더 이상 하지 말게 해주시고, 성령의 말씀대로 주께 일어난 모든 일이 이미 우리에게 적용되었음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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