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옛 언약의 한계

아빠와 함께 2024. 12. 31. 08:10

옛 언약의 한계 

2024년 12월 2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27-30

(31:2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31:28)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 것 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1:29)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31:30)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하나님의 계획에 인간들은 늘 말려들고 이용당할 뿐입니다. 그게 피조물의 마땅한 입장입니다. 하나님께서 단단한 각오로 스스로에게 다짐하시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때처럼 이스라엘을 다시 세울 작정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시할 수가 있습니다.

멸망시킬 때는 무슨 기준으로 멸망시키고 다시 회복하실 때는 무슨 기준에 의해서 회복하시는지 궁금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멸망시킬 때의 기준과 회복하실 때의 기준이 동일하냐에 대한 의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기준을 알려주신다면 인간은 대비해서 그 기준으로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다짐은 해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놓치면 아니됩니다. 즉 이스라엘은 결코 이스라엘이 예측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없던 나라가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졌기에 이스라엘을 망친다고 해서 이스라엘 입장에서 손해라고 간주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야무지게 망치고 다시 세우는 이유는 기준 자체에 대한 변경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에 의해서 제시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인간들 입장에서 “왜 일방적으로 심판 기준을 변경하십니까”라고 요구한 권한이 인간에게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존의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는 이유는 멸망시키는 작업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불만이 터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즉 출애굽기 20:5에서 나온 기준을 자신들이 믿었다는 겁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즉 아비가 우상을 섬기면 그 저주가 삼 사대까지 이르게하시겠다고 하나님께서 다짐하신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이 기준에 준해서 자신들의 나라가 망한 것은 자기 탓이 아니라 조상탓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조상도 물론 잘못이지만 그 시대에 살던 자들의 잘못도 섞여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조상탓’이라는 당연한 전의 기준을 거론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옛언약에 대체할 새로운 언약을 벌써 준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레미야 31:31에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렘 31:31-32)

그런데 이 새언약을 바쳐주는 원칙은 옛언약과는 다른 내용입니다. 그것은 예레미야 31:29-
30에 나와 있습니다. “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즉 아비와 지식 사이를 새언약을 파고 들어가게 되면 ‘육신의 고리’는 기존의 층 위에 새로운 층이 생겨납니다. 모든 인간이 이 새언약에 준해서, 새 층에 의할 것같으면 모두 다 죄인이 됩니다. 기존의 옛언약 층에서 생각으로는 육신의 층 위에 있는 층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일이 야곱 시대에 있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그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하리니 당신이 이왕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 손에 받들게 되리이다”(창 40:9-13)

여기서 요셉의 꿈은 인물과 시간 모두를 지배하는 내용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경험한 오늘은 미래로 나아가는 장벽같은 겁니다. 오늘을 살기에 그 어떤 경우라도 내일에 대해서는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주저없이 사흘 뒤를 말해줍니다. 요셉에게 왜 이런 능력이 있는 하며는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언약 의하면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창 37:26-27) 아버지 야곱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요셉이 채색옷 입고 다시 자기쪽으로 오지 않으니 죽은 자에 다름없습니다.

즉 요셉은 언약적으로 이미 죽은 자로 다루어지기에 꿈에 함유된 내용으로 움직여질 뿐입니다. 바로 이런 점이 인간 육신으로 움직이는 세상 위에 존재하는 말씀의 층에서 벌린 일입니다. 그만큼 ‘죽은 자’ 요셉 앞에서 땅의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서 무능합니다. 종속적입니다. 그들의 자신들의 앞을 알지 못하고 꿈의 함축된 내용으로 펼쳐질 뿐입니다.

이 하늘 층에서 새로운 기준이 내려옵니다. 이 기준은 인간이 통과할 수 없는 미래에서 이미 확정난 기준입니다. 어느 인간도 스스로 자신을 죽여서 하늘에다 옮겨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저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 기준을 최종 확정지으신 분은 ‘언약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그분 뿐입니다.

그분이 씹었던 신포도 안에서는 윗층의 세계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소위 살아 있다고 자부하는 모든 자들은 이로서 윗층으로 나아갈 자격은 애초부터 박탈당한 처지입니다. 이제 누가 구원되고 아니되고는 윗층 나라에서는 벌써 확정이 난 상태입니다. 따라서 구원되는 자들은 요셉처럼 꿈의 징후를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될 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구원되었습니까?” 여기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새언약 준한 피의 기준에서 구원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의 결정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자신에 대한 그 어떤 기준도 주님의 기준에 비할 바가 못됨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5강-예레미야 31장 27~30절(옛 언약의 한계)241229-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1장 27~30절입니다. 구약성경 1102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 것 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경성(警省)’이라는 뜻은 정신 차린다는 뜻이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를 멸망시킬 때, 제정신으로 정신을 바짝 차릴 때 멸망시키셨다는 겁니다. 똑같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백성으로 세울 때도, 멸망할 때와 똑같은 그런 경성 함으로, 정신 바짝 차려서, 실수 없이, 오류 없이, 그들을 백성 만들겠다고 그렇게 하십니다.

자, 그러면 그들을 멸망시킬 때는 그 기준이 무엇이며, 그들이 새로 만들 때는 기준이 무엇인가. 멸망시킬 때의 기준에 대해서는 29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멸망한 이유에 대해서, 멸망하면서 그들은 이런 이유를 토 답니다.

무슨 토를 다냐면, 출애굽기 20장 5절에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여기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한다고 나오죠. 아버지가 우상을 섬기면 그 죄가, 그 저주가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겠다고,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20장에 5절에 보면 십계명에 그렇게 새겨넣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짐하신 거예요. 아버지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아버지가 포도를 심었는데 포도가 시단 말이죠. 그러면 아버지만 신 포도 먹고 이가 신 것이 아니고, 그 신 맛을 삼 사대에 이르기까지, 아들과 손자, 증손자로 이르기까지 신 포도의 독한 맛을 느끼게 하겠다고 하나님께서 먼저,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신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걸 믿었죠.

그래서 그걸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었죠. 믿으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지금 망하는 것은 우리 죄 때문이 아니고, 우리 부모가 지었던 죄 때문에, 우리가 그 처벌을 같이 받게 된다’라고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이 하는데, 그것 때문에 내가 너희를 멸망시키신다는 말입니다. 일은 하나님이 시작을 해놓고, 그 책임은 인간에게 돌리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죠.

그러면 왜 그렇게 하나님이 하시느냐. 그 점에 대해서는 그 출애굽기만 가지고는 모르지요.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아버지가 잘못한 거 삼 사대까지 내려간다. 저주가 내림 된다”라고 저주를 끊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신단 말이죠. 물론 그 저주를 끊기 위해서는 ‘도를 아십니까’라는 그런 사람들처럼 천도 제 드리고 할까요?

물론 그 비슷한 것이 교회에도 있습니다만. 천주교는 노골적으로 있지요. 돈 대서, 신부 통해 미사 넣으면, 아버지의 저주가 우리 대에서는 끊어진다는 겁니다. 하여튼 편리해요. 되게 편리해요. 복 받고 구원받는데 환장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끊임없는 수완들을 다 동원해서 그걸 종교화시킨 거예요. 종교 테크닉(technic)을 발휘하게 되면, 저주도 축복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겁니다.

아버지를 그렇게 전도해도 성당 안 갔는데, 지금 아버지가 죽어서 어디 갔는가. 1차 심판 장소, 그러니까 논산 훈련소 가 있는 거죠. ‘연옥(煉獄)’에. 빨리 빼내야지 않습니까. 빼낼 때는 뭘 해야 하느냐. 후손들이 목돈을 줘야 해요. 성당에 기부해야 해요. 성당 사람들에게는 그게 기분 나쁘게 들리는 것이 아니고, ‘고맙다. 하나님’ 이런 식으로 들려요.

왜? 우리가 행한 것으로 우리에게 내린 저주, 우리 가문의 저주가 풀릴 수가 있도록, 이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감사합니다. 기독교도 이거 도입했으면, 주일날 푼돈보다도 역시 목돈, 부동산이 목돈이에요, 부동산이. 역시 목돈 들어와서 천주교 재단이 그렇게 크잖아요. 파티마 병원부터 해서, 학교들도 그렇고, 그게 다 부동산 기부받아서 그런 거예요. 마약범이랑 싸워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그러니까 이러한 종교적 테크닉의 발휘가 모든 인간에게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난처할 수밖에 없어요. 삼 사대까지 이른다면, 왜 이제 와서 하나님 쪽에서 말을 바꾸느냔 말이죠. 말을 바꾸면, 말을 바꾼 하나님이 그게 믿음직스러워요? 이랬다저랬다. 약속이라 해놓고, 약속 바꿔놓으면 그게 믿음직스러워요. 안 되잖아요.

그러면 전에 했던 원칙 적용하지 않고, 내가 새 원칙을 적용하겠다는 뜻이거든요. 새 원칙이 뭐냐. 예레미야 31장 31절에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그러면 새 언약이 등장하는 순간 삼 사대에 이르기까지 저주가 이른다는 말은 졸지에 뭐가 되느냐 하면 구닥다리, 이건 폐기 처분해야 할 옛 언약에 속하는 거죠.

그러면 이걸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뭐라고 나오느냐. ‘그럼, 진작에 이야기하지. 진작에. 진작에 미리 이야기하지. 삼 사대에 이르지 않는다고 진작에 이야기하지’라고 나오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새 언약은 옛 언약의 취지에 속한 인간들은 새 언약에 대해서 반대하는 인물인 것을 규정하기 위해서 옛 언약을 준겁니다. 말이 좀 복잡하죠.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옛 언약을 딱 준겁니다. 주니까 인간에게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이 모든 것이 조상 탓이지 내 탓이 아니라는 인간의 본성이 탁 튀어나온 거예요. 이건 내 탓이 아닙니다. 이건 조상 탓이에요. 나라가 어지러운 것은 전부다 대통령 탓이고. 다, 남 탓이라고 돌리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30절에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라고 새로운 언약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미리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걸, 좀 어렵게 나타내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새 언약은 뭘 공격하느냐 하면, 인간과 시간을 공격해요.

인간과 시간을 공격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인간 자체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이 인간 공격이고, 부정당한 그 인간이 생각해 놓은 시간의 스케줄이 있잖아요. 앞으로의 약속이라든지 과거의 기억, 이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새로운 언약을 하나님이 준비해 두셨습니다. 제가 말로 이렇게 하니까, 상당히 어렵지요. 두 개의 예시를 제가 제시하겠습니다.

하나는 요셉의 경우입니다. 창세기 40장 9~12절에 보면, “술 맡은 관원장이 그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라는 꿈을 꿨는데, 이 꿈에 대해서 네가 한번 해석을 해볼래?

어린 요셉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요셉이 그 꿈을 딱 넘겨받아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그러니까 앞으로 3일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에게는 용납이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오늘이 미래로 가는 장벽입니다. 오늘이 되었다는 것은, 내일 모레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장담할 권한이 없어요.

그러한 추진력도 현실감이 없습니다. 내일 살 수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반응한 사람도 없지만. 왜냐 하면 어제의 내가 오늘 산다고 장담하지 않았는데, 오늘 살았어요. 그러면 성경은 이렇게 풀이합니다. “네가 산 것은 너의 장담이나 시간 약속에 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말씀, 약속에 따라서, 언약에 따라서 너는 오늘날 하루 더 지속되었다”라고 판정을 내립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누구신데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약속에 준해서 규정된 대로 살 때까지만 살 뿐이라고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하십니까?’라고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그분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 땅에서 살다가 죽었거든”이라고. 이 땅에서 살다가 죽었기 때문에, 어떤 현상이나 결과가 나오느냐.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일단 다 죽었어요. 일단 다 죽었습니다. 죽고 난 뒤에 누구를 더 살리고 누구를 더 안 살리고 하는 권한이, 층이 생겼어요. 이 세상이라는 층, 눈에 보이는 층 말고, 그 위에 다른 층이 있는데 그 층이 부활 층입니다. 부활 층은 “다 이루었다”라는 층이에요. 그 십자가에 하나님이 죽으시고 부활해서 만든 층이 부활 층이고, 그 부활 층에서 볼 때, 이 땅은 그 실재하는 부활 층의 그림자, 어른거리는 지면에 실루엣 같은 그림자 층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층이에요.

그래서 주님은 미래에 대해서 이미 확정 났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누가 합격인지, 누가 불합격인지 그것마저 이미 확정 났습니다. 서울대 교무과에 이미 합격자 명단이 벌써 끝났어요. 이미 정해진 그 진리, 누가 합격이고 누가 지옥이고 누가 천국 가는 그 확정된 사실을 지금 요셉을 통해서는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요셉의 꿈으로 나타난 거예요.

그래서 요셉은 같이 교도소에 있는 왕의 신하의 미래에 대해서 요셉이 먼저 나서서 ‘당신은 이렇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어요. 요셉 본인 자체가 꿈의 이끄심을 먼저 받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요셉이 왜 이렇게 꿈을 해석할 권한이 있느냐. 그것은 그 전에 요셉이 먼저 죽었기 때문에 그래요. 창세기 37장 26절에 보면,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그러니까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자고 했고, 이것은 요셉을 살려 보내지는 말자는 뜻이에요. 집에 있는 아버지 입장에서는 요셉이 죽었든, 내가 채색옷을 입혔던 그 아들이 안 돌아오든, 아버지 야곱의 입장에서는 이래저래 이미 부재, 죽은 자예요. 그런데 그 야곱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은 자예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인데, 자기가 사랑하는 독생자같은 아들이, 채색옷을 그에게만 입혔던 아들이 야곱 앞에서는 이미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죽은 자가 되는데 요셉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꿈과 자기 목숨과 야곱의 집에서는 맞바꾼 셈이 된 겁니다. 언약받은 아버지 입장에서 요셉은 이미 죽은 자이고, 요셉은 죽은 자로 애굽나라에 돌아다니고 있는 거예요. 마치 예수님처럼요. 죽을 것을 확정 짓고 죽음을 향하여 십자가 죽기 위해서, 갈릴리와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을 돌아다니신 예수님의 행적을 지금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적으로 보지만 요셉에게는 숨어있는 하나님의 위층에 있는, 이 세상 위에 있는 하나님 말씀의 층입니다. 계시의 층입니다.

그러니까 층이 몇 개냐 하면 둘로 나누어졌어요. 전에 옛 언약에서는 아버지의 잘못이 아들에게 그대로 물려집니다. 동일하게 물려갔어요. 그런데 새 언약은 이 층을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쪼개버렸어요. 층으로 각각의 인간들로 하여금 새로운 어느 층에 포함될 인간인 것을, 이제는 새 언약 입장에서는 내가 새롭게 심판하고 분류작업 나서겠다는 겁니다. 분류작업.

주님이 이 땅에 하신 것은 유통업이에요. 물류창고 만드신 겁니다. 이것은 전라도 갈 거, 이것은 경상도 갈 거, 이것은 서울 가고, 이것은 강원도 갈 거, 대규모 물류창고에서 분류하잖아요. 이거는 좋은 고기, 이거는 나쁜 고기, 이거는 천국 갈 거, 이것은 지옥 갈 거, 그게 새 언약이에요. 새 언약이 되는 조건이 뭐냐. 모든 인간은 죄인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과연 어떤 인간도 하늘나라에 합당한 의로움, 깨끗한 인간은 예수님 빼놓고는 아무도 없었다는 걸로 이미 증명이 났습니다. 이미 결정 난 거예요. 이제는 누가 천국 가고 지옥 가고 하는 것은, 이것은 천국 가고 싶다고 손든다고 그 의견 반영해 주지 않습니다. 그냥 있어. 아마 꿈이 갈 걸? 요셉에게 꿈이 갈 걸?

꿈이 가게 되면, 아직 인생을 마감하지 않더라도 인생이 끝장나고 난 뒤에 상황까지 앞당겨서 미리 체험할 수 있는 그러한 징조를 하나님의 천국 가는 사람에게만 허락이 됩니다. 그러면 그 성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오은영 박사처럼 됩니다. 말썽꾸러기 아이를 둔 엄마들 상담해 주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입니다. 부부 갈등도 상담해 주고요.

그 상담가가 창세기 40장에 요셉이잖아요. 상담해 주고 있는 거예요. 뭐라고 상담해 주느냐 하면, 그 관원장이 포도나무에 세 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요셉이 듣고 이렇게 상담을 해줍니다. 12절에 보면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시간상으로 보면 하루, 이틀, 사흘이라고 이렇게 해석해요. 이건 무슨 터무니없는 해몽입니까. 이게 논리적으로 합당합니까?

저는 신기한 게, 막 던지듯이 해명해도 그 받는 관원이 그걸 수긍했다는 거예요. 이거 둘 다 미친 거 아니에요? 이게 장단이 조가 맞아요. 막 던져도, 막 아멘 이에요. 마구 받아들여요. 일방적으로 요셉이 꿈에 사로잡혔지만, 요셉이 꿈에 사로잡힌 혜택을 그 관원도 보고 있다는 겁니다. 사실은 혜택을 보는 게 아니고 정해진 코스대로 갈 뿐인데.

제가 이렇게 해석했으면, 아마 저는 돌멩이 많이 맞았을 것 같아요. ‘꿈 이야기해 보세요’라고 제가 물으면 ‘목사님, 제가 꿈을 꿨는데, 포도나무에 세 가지가 나옵니다...’라고 할 때, ‘스톱!! 그건 사흘 뒤에 일어날 일입니다. 그다음 또 이야기해 보세요’라고 하겠죠. 그러면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습니다’라고 계속 말하면,

‘아, 그것은 당신이 옥에 오기 전에 술을 바치는 관원장인데...’ 술을 바친다는 말은 소믈리에(sommelier)라고 해서 좋은 포도주 선별만 해주는 그런 일이 아니고, 이 관원장이 한 일은 독이 들어있는지 그것까지 선별해 낼 정도로 가장 최측근이어야 가능한 일이에요. ‘당신은 사흘 뒤에 다시 술을 드리는 일에 복권(復權)됩니다’라고 하니까, 이 해석을 들은 관원은 희망이 확 올라오면서 신이 났어요.

신이 났는데, 그 사람이 놓친 게 있어요. 그 놓친 것이 창세기 40장 15절입니다.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라고 요셉이 말하지요. 다시 말해서 나중에 권력을 다시 잡거든, 교도소에 있는 어린 종이 하나 있는데, 억울하게 잡혀있더라고 내가 여기서 나갈 수 있도록, 아버지 집에 다시 가도록 좀 해달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꿈의 계획에 의해서 그걸 까맣게 놓치게 됩니다.

왜냐 하면 요셉의 꿈은 기껏 신하들 꿈을 해몽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왕인 최고 권력자의 꿈을 해몽해서, 세상 적인 권력자 위에 보이지 않는 영적 층, 애굽의 바로까지 지배하는 하나님의 층의 지배자 노릇까지 해줘야, 이것으로 언약이 인간세계 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꿈의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것이 요셉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요셉은 그걸 모르죠. 자기 신세타령만 하고 있는 거예요. 억울하다. 억울하다. 요셉은 남의 꿈은 해몽하면서도 자기 꿈은 해몽 못 해요. 왜? 꿈에 사로잡혔으니까. 신하는 꿈을 갖고 있었지만, 꿈에 대한 해몽을 소지하고 있었지만,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서 온 꿈, 아버지의 그 언약에 요셉은 사로잡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 내가 말씀을 소유하고, 언약을 소유하고, 이렇게 뭘 소유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소유 당해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 공부의 한계가 이거죠. 지식을 소유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차질 없이 그냥 진행될 뿐이에요. 그리고 16절에 계속 보면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길함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그러니까 나도 나도 꿈을 꿨다는 거예요. 먼저 사람의 해몽을 들어보니 해몽이 너무 좋거든요. 16절에 “나도 꿈에 보니 흰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그러면 제가 요셉이라면 또 듣고 ‘스톱!! 사흘입니다’ 17절에 그 관원이 이야기합니다. “그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제가 만약 요셉이라면 ‘그 식물을 새들이 먹는데, 새들은 왕궁에서 키우는 새이고, 새들이 먹었다는 것은, 그만큼 맛있다는 뜻이고, 임금도 아마 당신의 떡이 그리웠다고 하면서 복권해 줄 겁니다’라고 이렇게 좀 좋게 해석해 주면 안 돼요? 같은 인간들끼리 그렇게 해석해 주면 요셉의 복권이 좀 더 원활하게 될 거 같은데, 요셉은 어떻게 합니까?

사흘은 동일한데, 19절에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당신은 죽는다고 말한 거예요. 사람이 너무 냉철하고 너무 잔인해요. 뭘 곧이곧대로 그렇게 이야기합니까. 듣는 사람 기분 나쁘게. 이게 뭐냐 하면, 인간들의 시선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 위에 있는 다른 층, 다른 층이 요셉의 꿈이라는 모습으로 등장해서, 앞으로 진행되는 모든 현실은 그 꿈에서 이미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요셉을 통해서 드러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가 요셉 입장이라면, 우리는 뭐냐. 십자가 입장에서,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는 입장에서, 세상에 대해서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해요. 내 피가 아니라, 내 순교가 아니라, 내 핏방울이 아니라, 주님의 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미래, 천국 갈지 지옥 갈지 그것은 주님의 피에 달려있지, 당신이 주님 앞에, 하나님 앞에 뭘 한다고 해서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냉철하게, 좀 냉혹하고 매정하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 팔자, 이 팔자가 천국의 팔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 대 사람의 만남에서 기분 좋게 하는 것이 세상사는 요령인 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는 다른 층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이런 처지에 대해서 주님 앞에 영원토록 무한히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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