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부활의 빈 자리

아빠와 함께 2024. 12. 22. 19:29

부활의 빈 자리

2024년 12월 2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21-22

(31:21)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31:22)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21.  "Set up for yourself roadmarks, Place for yourself guideposts; Direct your mind to the highway, The way by which you went. Return, O virgin of Israel, Return to these your cities.
22.  "How long will you go here and there, O faithless daughter? For the LORD has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 A woman will encompass a man."

‘이스라엘’ 앞에 ‘처녀’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그 어떤 남자와 동침하여 자녀를 낳아본 적이 없는 여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기존의 모든 사람들을 천국에 불허하시겠다는 취지입니다. 신명기 19:21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후손, 즉 인간들을 너무 잘 아십니다. 그들 속에서 스스로 멈출 수 있는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십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자신의 어릴 때, 하루 세 끼를 먹지 못하고 두 끼만 먹고 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 끼만 먹어도 소원이 없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계속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어느 인간은 두 끼에서 세 끼 먹는 것으로 스톱이 되는지 말입니다. 세끼에서 멈추는 인간은 없습니다. 놀러도 가야하고 더 고급스러운 식당도 찾아다니고 해외 여행도 형편만 되면 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자신을 구성할 권한이 없음을 말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은 복수의 한계를 말하는 겁니다.

분노가 일어난다고 해서 피해 입은 상황보다 더 가혹한 보복을 가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 품은 분노는 원상회복으로 만족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가겠다’는 것, 즉 ‘나중에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욕망은 인간의 자기 주제 파악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인간은 천국가겠다든지 구원받겠다 하는 것은 다 욕심에 해당되고 소용없는 헛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헛말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역사를 통해서 필히 하나님 말씀은 성취를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이사야 7:14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즉 처녀로 태어난 자만이 하나님과 함께 하실 수 있는 자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처녀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아무도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을 만나 대화하십니다. 그 자리에서 천국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거론하면서 부정(否定)적으로 거론하십니다. ‘∼못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동안 자기 인생살이에 전적으로 의미를 실어서 살아온 니고데모에게 난감한 소식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다음과 같이 대꾸합니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 3:4) 이게 바로 ‘여자의 후손’이 아니라 ‘남자의 후손들’의 한계입니다. 자기가 그동안 채워놓은 자기 인생을 여전히 견지하고 살고 있는 겁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집대성으로 니고데모는 감히 천국 입성을 노리고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은 절망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의 자식’이란 기존의 ‘아담의 후손 노선’과 별개로 나타납니다. 이는 사람들이 손 쓸 수 없는 상황을 놓이게 만드신다는 뜻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는 이루어진다’는 점을 중점으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주 기도문’입니다. ‘주 기도문’을 완성된 양상이 그냥 ‘주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이 주 기도문을 말씀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우선 이방인들의 기도부터 언급하셨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7-8)

이방인들의 기도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 ‘주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자들이 이미 ‘여자의 후손’ 출신자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뭔가 새로 시작해야 하는 자들이 아니라 항상 결과적인 생성자로 활동하게 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처녀 마리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녀 마리아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본인이 관여할 수가 없이 결과적 사태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담의 후손들, 즉 사람들이 끼어들지 않고 천사가 관여하는 인생을 새롭게 맞이해야 했습니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0-31)

인간은 모르고 천사는 아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은 예수님의 부활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요 20:11-13)

두 천사가 고정적으로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경우는 법궤 위 천사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결코 들여다봐서는 안 되는 공간을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천사의 위치 배정을 보게 되면 한 천사는 머리맡이요 다른 천사는 발 쪽입니다. 마치 조금 전까지 예수님께서 여기 누워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두 천사에 의해서 범위지워진 그 빈 자리가 실은 온 역사를 다 품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집중되기 위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후손인 마리아 눈에는 그 자리는 비워있는 양상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자기에게 빈 자리를 만들지 않고 낭만적인 자신의 행함으로 꽉 채워넣었던 겁니다.

이렇게 되면 기껏해서 ‘자기를 위한 자기 인생’에 머물고 당연히 ‘하나님과 함께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성도는 자기 안에 예수님의 친히 성취해내신 말씀이 늘 팝콘 터지듯이 터지는 공간이 됩니다. 내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신 주님의 인생이라는 이것이 ‘여자의 후손의 노선’에 해당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뜻대로 되는 것을 모조리 뭉개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4강-예레미야 31장 21~22절(부할의 빈자리)24122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1장 21~22절입니다. 구약성경 1102페이지입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성경을 인간들이 지은 어떤 소설책, 세계 문학상 정도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어디서 부딪히느냐 하면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소설은 이미 되어진 것을 참조해서 만들어 내지만, 성경은 없는 것을 만들어 냅니다. 창세기 말씀에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는 것처럼, 성경은 하나하나가 모든 것이 창조되고, 또 창조되고 또 창조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이스라엘 앞에 뭐가 붙어요. “처녀 이스라엘아” 처녀 이스라엘은 이것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씀에 처녀 이스라엘이 있으니까, 말씀대로 만들어질 뿐이에요. 처녀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사야 7장 14절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있으려면 처녀가 나타나야 하고, 그 처녀가 아들을 낳아 줘야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천국 갈 수도 없습니다. 그 소관은 주님의 말씀에 입각한 창조가 일어나야 성사되는 일이, 이 천국이라는, 구원이라는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구원받는 자는 결과적으로 구원받는 사람이에요. 본인이 뭘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신 일에 결과로 구원받는 겁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 아브라함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주께서 하셔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이 성 중에 의인이 50명만 있으면 심판을 보류해 주세요”라고. 의인이 50명만 있어도 어떻게 악인과 의인을 함께 멸할 수 있습니까? 그건 모순입니다. 멸망한다는 것은 악인에 대한 심판이라면 의인도 악인이 받는 그 벌을 의인이 받는다는 것은 이건 성립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의인 50면 봐서라도, 뭐 천 명, 만 명, 십만 명의 악인이라도 심판 내리지 마옵소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만, 응답 없었습니다. 뭔가 아브라함이 핀트가 안 맞은 거예요. ‘아, 내가 뭔가 숫자를 너무 크게 잡았구나’ “45명은요?”라고. 이건 뭐 경매하는 것도 아니고, ‘얼마 부를 게요~, 여기는 얼마~’라는 식으로 45명으로 줄였습니다.

꽤나 적다고 생각했죠. 응답 없습니다. “40명은요?” 응답 없습니다. “30명은요?” 응답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마음 야무지게 잡고 ‘설마 그 인기 있는 도성에, 잘산다고 소문난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10명은 없겠느냐’라고 생각하면서 마지막 불러봅니다. 경매 숫자 “10명은요?” 응답 없습니다. 10명도 없어요. 아예 없습니다. 그 소돔과 고모라에 종교단체가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종교단체 소용없어요. 종교기관 소용없어요. 예배당 소용없습니다. 아예 없습니다. 성경에 나온 택한 백성 이스라엘은 처녀여야 해요. 처녀 이스라엘입니다. 처녀 이스라엘 보고 이야기했고, 처녀 이스라엘은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피조물에 국한합니다. 사람에서 난 사람은 구원 못 받습니다. 예수님이 낳은 사람만 구원받아요.

사람들이 성경을 모르겠다고 결국 성경에서 손 떼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요. 열심히 악바리처럼 애써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그렇게 쓸데없는 짓을, 아무 소용 없는 짓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 오늘 본문에, 여자가 남자를 안는다는 거, 처녀 이스라엘이 딸이 아니라, 한 아들을 낳는다는 거, 생산한다는 거, 임신해서 생산한다는 거, 이것은 도대체 무슨 조화냐.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창세기 3장 15절에 뱀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인간은 아닙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아닙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악마와 대적하기 전에, 이미 악마 사탄이 인간의 목숨을 쥐고 있습니다. 죽기를 무서워서 발발 떱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마귀에게 굴종하고 복종해서 그저 ‘살려만 주이소’라고 하는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다입니다.

‘그저 계엄 해제하고 남은 임기만 대통령 하게 해주이소’라는 이거 원하듯이, 그냥 ‘그냥 살려만 주이소’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에요. 악마는 인간에게는 큰소리칩니다. 심지어 악마는 예수님에게도 큰소리쳤어요. ‘돌이 떡 되게 해라’ 쉽게 말해서, ‘돈 없이 못 살잖아. 돈 없이 못 사는데, 굶어서 되겠어? 건강해야 주의 일을 할 거 아니야. 돌이 떡 되게 해라. 내가 팍팍 도와줄게’라는 이걸 거부할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뭐, 종교고 복음이 어떻고. 배고파 보세요.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돈이 기본이에요. 내가 사는 게 우선이고. 이미 목숨줄은 마귀가 쥐고 있어요. 이걸 제가 구체적으로 분명히 이야기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왜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고 안 받아들입니까?’ 뭐 핑계야 많죠. 잠이 오고, 사투리를 쓰고, 말씀이 어렵고, 어쩌고저쩌고.

진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한 명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솔직히 제가 말씀드릴게요. 시킨 대로 했어요. 복음을 왜 거부하느냐. 시킨 대로 했어요. 마귀가 시킨 대로 복음을 거부한 거예요. 딱 이에요. 다른 군소리 필요 없어요. 악마가 ‘듣지마라’라고 하면 끝나는 거예요. 듣지 말라고 하면 못 듣는 겁니다, 열심히 친절하게 어떻게 배려해서 동정을 베풀어 도와주면서 복음 들어보라고 해도 안 들립니다.

어둠이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에 못 들어요. 어두움의 세계에 장악 자는 악마고요. 악마는 다른 말로 하면 천사입니다. 결국 이 일은 천사에 관한 이야기예요. 여자가 아들을 낳는 것은 천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빠지세요. 그런데 인간은 악마가 인간을 내세웠기 때문에, 인간은 안 빠집니다. 안 빠지니까 주님께서 빠지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율법입니다.

신명기 19장 21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 이게 뭐냐 하면 눈으로 한 것은 눈으로 갚고 발로 한 것은 발로 갚고 이로 한 것은 이로 갚으라는 겁니다. 주의 이 말씀은 인간이 안 건드리면 굉장히 본인이 점잖은 사람인 줄 알아요.

그런데 건드리면 속에 마그마같은 분노가 들어있어서 이게 폭발해 버립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해코지했던 것에서 멈추질 못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어릴 때, 참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때는 하루 세 끼도 못 먹고 두 끼 먹었습니다’라는 그런 사람이 있거든요. 그러면 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보자, 저 사람이 하루 세 끼에서 인생 만족하는지, 아니면 더 나아가는지 한번 보자’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은 두 끼 먹었기 때문에, 세 끼 먹으면 그걸로 족하다는 사람을 저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어요. 아웃백(스테이크 하우스) 가서 칼로 쓸어야 해요. 세 끼에다, 때 따라 생일 다 챙겨야 하지, 칠순 챙겨야 하지, 해외 놀러도 가야 하지, 다 챙겨야 해요. 어릴 때 못 살았기 때문에 세 끼 먹는 게 소원이기 때문에 소원이 세 끼에서 멈추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욕망이 인간을 삼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는 절대로 인간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왜? 욕망을 보호할 생각이 하나님께 없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예수님도 감안해서 마태복음 6장에서 이야기했어요. 어떤 분이 이야기하다가 주기도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제가 그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주기도문을 압축하면 그게 바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주 기도문의 내용에 이게 들어있어요.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리라. 이건 예수님 몫이고 예수님의 종이 되는 천사들의 몫이에요. 인간은 할 수가 없어요. 다시 말해서 천사들이 하는 기도를 너희들이 하게 될 것이라는 기도가 주기도문 내용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대로 못 살아요. 그러기 때문에 그 주기도문 하기 전에 주께서 먼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네게 있어야 할 것을 내가 다 안다” 왜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것처럼 네가 주체가 되어서 너의 욕망을 기도라는 명목으로 그걸 객관화하고 정당화하느냐. 욕망인데. 그래서 주께서 가르치시기를 “내 뜻대로 하는 기도는 뭐든지 다 들어줄게”라고 하신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네 뜻은 있는 족족히 다 밟아버릴 거야. 너의 뜻은 내가 다 밟을 거야.

너의 욕망에서 나온 뜻은 내가 용납하지 않고 다 밟을 거야. 그래서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오게 할 거야. ‘주여, 내가 지금껏 살아온 것은 주님의 뜻대로 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고백 나올 때까지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우리는 이 욕망이 쓸데가 있지요. 짓밟히기 위해서 계속 나올 수밖에 없어요.

시골에서 어떤 부부가 하루 16시간 근무하면서 감나무를 열심히 재배하는데, 너무 감나무 일에 몰두하고 바빠서 뭐 사는 이유, 이런 것도 모르고 그냥, 뭐 여자의 후손 그런 것도 몰라요. 창세기 3장에 그런 거 나온 지도 모르고 여자가 남자를 안는다는 것도 모르고 그냥 감나무, 감나무 하다가 40년을 한 번도 바깥에 외출한 적이 없답니다. 좀 각색하면 그래요.

그래서 인간극장의 PD가 자꾸 부추겨서, 40년 만에, 오랜만에 남자가 놀러 가자고 해서 대둔산에 가서 케이블카를 탔어요. 남자가 먼저 나서서 아내에게 그동안 못 해준 거 미안스럽고 해서 보상차 케이블카를 태워준 거예요. 그렇게 탔는데 남편이 마음으로 감동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카메라가 찍고 있지요. ‘내가 가슴이 떨린다’라고 하니까 여자가 하는 말이 뭐 ‘고마워요’라고 해야 뭔가 이야기가 되는데, ‘나는 지금 다리가 떨린다’라고 한 거예요. 하여튼 장단을 안 맞춰줘요. 장단을.

여기에서 바로 하나님의 일은 처녀가 아기를 낳는 것부터 해서 이건 천사가 개입을 해줘야 하고, 성령님께서 개입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건 인간을 배제했다는 말은 인간에게는 남자에게서 난 모든 자식은 임마누엘이 되지 못하고 그 자식은, 그 결과물은 하늘나라에서 배제되고, 육신이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살아 움직여야 하니까, 여기에서 하나님의 일이 성취되어야 하거든요. 성취되는데, 우선 여러분은 아기를 낳는 마리아 이야기는 다 아시기 때문에, 약간 미루고요.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이 어떻게 죽으셨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2절에 보면 부활 될 때, 베드로와 제자들이 와보고 현장검증하고 가고, 사도들은 와서 ‘예수님이 없구나. 부활하셨구나’라고 확인하고 가고 남아있는 마리아가 울면서 무덤 속을 보니, 그다음 차례에 마리아가 혼자 있을 때,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가 누웠던 곳에 있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보면서 뭘 발견했느냐 하면, 천사가 같이 있다는 것은 구약 때, 언약궤 위에 두 천사가 나란히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에게 허락된 것이 천사 모형까지만 허락되고 언약궤 안은 못 들여다봅니다. 들여다보면 죽어요. 말씀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보면 죽어요. 아담의 후손이 아닌 자만 볼 수 있는데, 천사는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까 볼 수 있죠. 그런데 천사의 위치가 같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는 머리맡에 있고 하나는 발 편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천사가 어떤 공백을, 자리를 열어주는 모양새입니다. 여기에 누가 있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마치 아이들이 장난치다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 사이를 메우지 못하고 그대로 있는 것처럼, 지금 천사 하나는 머리에, 다른 하나는 발밑에 있었고, 예수님은 그 자리에 빈자리로 안 계십니다. 이것은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하는 일에 시작과 끝이 예수님 자체에 의해서 이미 완결되었음을 알려주는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예수님의 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위해서, 활용 되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천사가 정해놓은 그 범주가 이 세상의 범주예요. 끝이에요. 천사는 알고 아담의 자손인, 인간들은 이점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뭐냐. 비어있어요. 왜? 예수님이 부활했으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천사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예수님 하는 일을 마리아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자손 마리아는 그것도 모르고 그냥 울어요. 계속 울어요. 그러니까 천사가 인간의 말을 사용합니다. “왜 우느냐”라고 하니까 “우리 주님을 사람들이 어디로 데려갔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한 거예요. 생각하는 수준이, 천사가 왔음에도, 마리아는 천사를 무시하고, 천사가 제공하는 그 빈 공백, 그 빈자리를 빈자리로 놔둘 줄을 몰라요. 믿음이 없으니까.

뭘 채워야 믿는 인간의 한계, 인간의 시선의 한계, 비어있게 만드는 거, 내가 할 수 있는 그 빈자리를 비어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천사의 일이고 성령의 일이고 주님의 일이에요. 내가 평생 애쓴 걸로 그걸 메우면 안 되는 겁니다. 인간의 하는 일은 자기가 손으로 메워왔던 일과 일의 동그라미, 그게 인간이 죽자고 붙들고 있는 그거예요. 감나무 키우기, 케이블카로 위로해 주기, ‘봐라. 내가 해줬다. 기억하지?’라는 이런 거.

그게 아니고 빈자리. 정말로 감나무 부부가 성령이 임해서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그동안 천사에 이끌려서, 성령에 이끌려 온 게 우리가 떨리지 아니하냐. 이런 것은 그렇게 적용해야 해요. 지가 40년 만에 케이블카 태워준 거 자랑질하지 말고. 왜 우리는 그 빈자리를 왜 모릅니까. 나를 위해서 살았던 내가 그것을 틀어막아 버렸어요.

그렇게 보시고, 다시 누가복음 1장에서 마리아가 임신할 때,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누가복음 1장 26~27절에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라고 되어있어요. 이미 그 앞에 마태복음 1장에서 이미 성령이 한번 마리아에게 임해서, 처녀 마리아가 임신을 해버렸어요.

여러분, 이 말이 굉장히 과격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너 어떻게 태어났어?’ ‘아빠랑 엄마가 결혼해서 태어났어’라는 그 소리 말고, ‘성령에 의해서 태어났어’라는 그 이야기를 성령이 없는 사람은 못 알아듣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니고데모예요.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 간다고 하니까, 니고데모 하는 말이 ‘그건 너무 심한 말이네요. 해도 너무 했어요. 어떻게 어른이 다시 태어납니까?’

너무 당연하지요. 니고데모가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늙었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납니까?’라는 그 이야기할 때마다 제가 늘 느껴지는 노래가 있어요. 최백호가 불렀던 ‘낭만을 위하여’라는 노래. 인생을 살면서 나이가 들면서, 인간이 기억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는 성령에 의해서 태어났다는 생각을 못 하고, 낭만을 위해서 립스틱 짙게 바른 마담 아줌마랑 쌍화탕 하나 시켜서 날달걀 띄워서 수다 떠는 그 이야기.

‘낭만을 위하여’라는 노래 가사에 그렇게 나오거든요. 옛날 추억 이야기하고 있다고요. 이게 인간의 범주 아닙니까. 내가 한 걸로 꽉꽉 채워나가는. 이게 바로 악마에 매인 구원받지 못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란 말이죠. 성도는 알아요. 인생에 낭만도 알고 낭만 없는 것도 알아요. 인생은 기껏 내세울 것이 자기 추억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하나를 더 알아야 해요.

그런 인간을 일체 하나님께서 뭘 얻으려고 생각하지 않고 뭔가 요구하지 않고 제켜버리고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피조물을 주께서 천국 넣어준다는 거, 그것과 함께 임마누엘이 된다는 거. 그러니까 시작은 아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시작은 성령부터 시작해야 하죠. 성령부터 시작할 때, 눈에 보이는 형태가 처녀 마리아예요.

마리아가 임신했다. 이 말을 누가복음 1장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리아가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을 임신했다”라고 이야기해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성령 받았습니까. 마리아처럼 예수님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계신다고 하지 말고요. 성경 전체가 내 안에서 박하사탕처럼 톡톡 튄다고 하세요. 수시로 말씀이 팝콘이 안에서 튀잖아요. 팝콘 튀듯이 말씀이 늘 튀어서 내 안을 버터 향기로 채운다고 하세요. 수시로.

어떤 때는 넓은 길로 가지 말라는 그 말씀이 탁 튀고, 어떤 때는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는 말씀이 탁 튀고, 성경을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본 것으로도 말씀이 내 안에서 작동할 때, 이게 바로 말씀이 함께 있는, “다 이루었다”가 함께 있는 오늘날의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여자가 남자를 안았다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참으로 과격한 말씀이고, 모든 인간을 고발하는 말씀인 것을 이제는 기쁨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시고, 이제는 그것이 우리 자체로, 결과적으로 현실화 되었음을 또 한 번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일오후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 언약의 차이점  (0) 2025.01.05
옛 언약의 한계  (1) 2024.12.31
라헬의 본질  (2) 2024.12.15
기쁨의 차이  (1) 2024.12.08
구원 장치  (1) 2024.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