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인
2025년 1월 1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2:1-5
(32:1)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십년 곧 느부갓네살의 제십팔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32:2)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32:3) 이는 그가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취할 것이며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 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운 바 되리니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
(32:4)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가리니 시드기야가 나의 권고할 때까지 거기 있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32:5) 너희가 갈대아 인과 싸울지라도 승리치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가 가로되 네가 어찌 이같이 예언하였느뇨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더라
인간은 자신의 한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필요한 것들만 생각합니다. 이는 모든 것을 경험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마음자세를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을 쉬지 않고 제공해주셨습니다. 이는 세상은 인간들의 경험한 것의 총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제공하신 것은 극히 일부인에게만 전달됩니다. 선지자에게만 주어집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일관된 오해로 무장되어 살아갑니다. 본인들이 하나님을 찾으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지켜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편이 아닙니다. 그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편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로지 하나님편이라는 점을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면 ‘하나님은 내편이다’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편’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지상에 전쟁을 일으키므로서 인간이 하나님의 적이라는 점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인생도 여기에 속합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적으로 살면서, 즉 자기 위주로 살면서 하나님편에 산다고 위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일으키신 전쟁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의 편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어떤 식으로 드러날까요?
이점을 드러내기 위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민족 중에서 유독 이스라엘 민족에 애틋한 사랑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은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레미야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들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예언이라는 형식으로 수용받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예레미야에게서 나오는 예언은 ‘이스라엘 멸망’입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의 적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적으로 간주되는 바벨론 제국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는 그 사실이 더 경악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 시드기야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예레미야를 궁전에 가두기를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틀렸고 자기네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됨을 나중에 전쟁에 돌아와서 확인하고 싶었던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바로 그런 뜻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을 이방나라에 포로잡히게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원대로 여전히 이스라엘이 다루어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싶어하셨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신 그 원칙을 이제는 이방나라 전체에 확대시키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서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자는 예레미야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뜻이 자기 신세보다 더 선행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즉 내 인생이 어떻게 되든 그런 일조차도 하나님의 뜻과 예언에 의해서 차질없이 이루어지는 일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뜻의 증명체입니다. 예레미야는 결코 자신의 원대로 뜻대로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자기로부터 벗어나고 탈출한 상태에 놓인 겁니다. 이럴 경우에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말고 따로 외래 존재가 계셔서 그에게 일어난 일에 준해서 자신의 일생이 진행될 뿐인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시드기야의 볼모로 잡히게 됩니다. 그런 조치를 한 시드기야 하나님께서는 볼모로 잡아 버립니다. 마치 악어를 잡아서 만든 악어가죽 가방을 가진 여자를 악어를 잡아먹는 식이 되는 겁니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주인노릇하면 안됩니다.
모닝이라는 차에 벤츠의 로고를 붙인다고 해서 우리가 그 모닝 차를 벤츠라 불러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나 이방민족으로 ‘나’라는 기조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마치 선불교에서 스승되는 스님이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문제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 회초리 있다고 한다면 너는 이 회초리로부터 맞는다.”
“만약에 이 회초리가 없다고 한다면 너는 이 회초리를 맞는다” “만약에 네가 이 회초리에 대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으면 너는 이 회초리에서 맞는다”고 했습니다. 이 제자 중이 스승 중에게 회초리를 맞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여기에 ‘없음’을 집어넣으면 됩니다. 즉 “여기에 회초리가 있거나 없는 게 아니라 회초리에 맞은 제자도 없고 회초리를 든 스승도 없다”고 말입니다.
이 ‘없음’의 원리가 출애굽 12:42에 나옵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여호와의 밤’이란 언약 사람 야곱에게 찾아온 그 하나님의 세계를 말합니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창 32:22-25)
이러한 만남의 결과에 대해서 야곱은 이렇게 평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창 32:30) 즉 그 여호와의 밤에 야곱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 없었던 ‘이스라엘’이 새롭게 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외래인으로서 홀로 물세례와 성령세례와 불세례(=아버지로부터 저주받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관계로 인해 이 인간세계는 캄캄한 어두움의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는 인간들은 자신들이 ‘여기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여기 있는’ 자신을 도와줄 줄로 알았던 겁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복음이 말해주는 것은 고린도후서 4:4,6에 나옵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어두움을 낮이라고 오해하지 않고 도리어 이 세상이 캄캄한 밤, 곧 여호와께서 지배하시는 세상이기에 새로운 피조물이 외지분의 방문으로 생겨났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심으로부터 비로소 참 이스라엘임을 인정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8강-예레미야 32장 1~5절(외래인)250119-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2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1102페이지입니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 십년 곧 느부갓네살의 제 십 팔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이는 그가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취할 것이며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운바 되리니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가리니 시드기야가 나의 권고할 때까지 거기 있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찌라도 승리치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가 가로되 네가 어찌 이같이 예언하였느뇨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더라”
서로가 서로를 가두고 있습니다. 서로 충돌하고 있는 입장이고요, 서로 좋게 지내는 관계 아니지요. 이 본문 말씀은 하나님 쪽에 서 있는, 또 하나님을 대변하고 있는 예레미야 쪽과 예레미야 외에 모든 인간은 지금 예레미야와 충돌되고 있는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세계 자체가 하나님과 대립하는 관계인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대립이라고 하는 것은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고, 그 전쟁 속에서 ‘내 말이 옳아, 아니 내 말이 옳아’라고 서로의 말이, 시간이 지나고 보면 서로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위해서 내 뜻과 위배 되는 사람을 포로로, 볼모로 잡아 와서 가두게 된 겁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가두었고, 하나님은 시드기야를 가두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하나님 편에 서 있다고 그렇게 쉽게 생각하죠. 그런데 여기 있는 바벨론도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편에 서 있습니다. 이 점이 상당히 이상스럽게 느껴질 겁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좋게 봐서 하나님 편이라고 해야 하는데, 바벨론 어디를 봐도 하나님이 좋게 보지 않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원수가 어떻게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고, 하나님의 명대로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장기알 같은 존재가 되어 있느냐. 그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규정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적을, 하나님에게도 적이지만 이스라엘이 적으로 간주하는 것조차도, 이스라엘의 적인 동시에, 하나님의 편에 서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내가 중심에 서서, ‘저 사람은 내 편이다. 아니야, 저 사람은 내 적이야’라고 판단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겁니다. 우리 편이라는 거, 내 편이라는 것은 애당초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에요. 애초부터 그건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해서 일방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 것이지요. 하나님이 내 편 되는 건 아니에요. 하나님은 하나님 편입니다. 내 편 아니에요. 내 편 아닌데, 하나님께서 하나님 편이라고 간주함으로써 하나님 편이라고 우기는 우리가 얼마나 평소에 하나님의 적인가를 드러내는 겁니다. 소형 자동차인 모닝(morning)에다가 벤츠 로고 붙이고 다닌다고 우리가 그걸 벤츠라고 불러야 합니까? 아니지요.
벤츠라는 로고를 달았다고 그걸 하나님 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 편이 아니에요. 진짜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은 ‘나를 볼모로 잡아가. 세상에서 나를 잡아 가둬버려. 그게 하나님의 뜻이야. 나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상관없어. 나는 벤츠 아니고 모닝이야’라고 이렇게 당당하고 자유롭게, 자기 팔자 생각하지 않고, 자기 인생 챙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내가 하나님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명쾌하게 알게 되었을 때 오는 그 자유로움, 그 기쁨.
하나님은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비로소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겁니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원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본문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다시 한번 이스라엘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해요. 이스라엘이 무엇인가.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슬슬 잠이 오기 때문에, 제가 마음이 급해요. 이스라엘은 인간 말고 외부인의 그림자, 그분의 활동을 이 땅에 펼쳐서 보여주는 민족,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인간 말고 외부인, 외부의 상황과 움직임과 활동을 지상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그러한 역할, 또는 대상체라고 보면 됩니다. 그걸 신약에 와서 다시 설명하면 간단해요. 예수님은 물세례와 성령세례와 불세례를 다 받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물세례, 성령세례, 불세례(예수님의 십자가)를 다 받았어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세례까지 다 받은 거예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뭐? 그거 내 일 아니잖아. 내일 할 일과 별로 관계없는데. 예수님이 물세례와 성령세례와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저주받고 심판받는 불세례까지 받은 거, 그거 외부인이잖아. 나 아니고 나 바깥에 외부인 일이잖아.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나에게 하지 말란 말이야. 나는 내 일도 신경 쓰기 바쁜데 나와 상관없는 외부 일을 나에게 왜 이야기해?’라고 했을 때,
바로 그 사람은 이스라엘이 망했던 그 코스대로 간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반영 해줘야 하는데, 예수님은 예수고 나는 나인데, 그 예수 이야기를 왜 자꾸 나에게 끄집어내냐고 할 때, 이걸 따로 논다고 하는 거예요. 따로.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런 사람과 차이점이 뭐냐 하면, 본인은 따로 놀면서 앞에 로고는 벤츠로고를 달고 다니는 거예요.
‘하나님과 따로 놀면서도 우리는 하나님 백성이다’라고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룰 때, 어떻게 하느냐면, 너희를 집어삼키는 바벨론과 네가 똑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죠.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라고 모닝 주제에 벤츠인 척하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줄 거다’라고 하는데, 바벨론이 쳐들어온다.
‘우리를 치는 것은 하나님을 치는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저들을 물리치게 하옵소서’라고 평소에 그렇게 살았던 거예요. 교회 나오니까 일이 잘 풀린다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나를 하나님이 마땅히 지켜줄 거라고 생각한 거죠. 자기가 하나님을 안 버렸으니까. 그런 생각이 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적들이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하고 매달린 이스라엘을 그 적들의 손으로 친히 침공하게 해서 쳐버렸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에게 남아 있는 것은 뭐가 될까요? 이스라엘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겁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마치 갈증이 난다고 해서 독약을 마셔서 갈증을 해소하는 그 방식의 반복이었던 겁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제사하면서, 내 영혼의 갈증을 해결해달라고 그렇게 애쓰는 것밖에 안 되지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그렇게 멸망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취지가 없어지지 않느냐.
그런데 오늘 본문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예레미야가 나옵니다. 예레미야와 이스라엘의 차이점을 눈여겨봐야 하죠.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들을 귀 있는 자와, 들을 귀 없는 자로 차별화시키는 말씀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바깥에 있는 외부인이 곧 나를 대신하시는 분이라고 아는 사람은,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먹혀서 알아듣는 사람이에요.
이 말씀을 지킬 분은 나 말고 나 바깥에 외부인이 따로 있다는 거, 그분이 따로 계시고 나는 이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것으로 맺어지고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나는 못 지키고 주님은 지킨다. 그래서 주님만이 모든 말씀을 이루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말씀을 못 지키는 나와 연결되어 있고 결합 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러면 성도이지요.
그런데 성도 아닌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면, ‘나 말씀 못 지켜. 주님이 알아서 다 하시겠지’라고 뻗대면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나는 못 지킨다. 그 사람은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과정을 밟아줘야 해요. 그래야 그들은 주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똑같은 말씀을 하는 데, 말씀에 의한 차별화로 인해서, 나는 못 지키는데, 그 이유는 다른 분이 다 지키기 때문에 그분과 떨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말씀의 효과, 열매, 내가 원하는 거, 그런 것은 나에게 안 돌아와도 괜찮습니다. 저는 말씀의 뜻이라면 세상에 갇혀서 죄인으로 살아도 괜찮아요’라는 이것과 ‘나는 말씀을 못 지키는데, 뭐, 나는 내 맘대로 살래’라는 식으로 자기 하는 일에 자기 정당화시키고 자기 합리화시키는 경우라서, 이건 정반대의 상황이 되는 겁니다.
여기 32장 1절에 보면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 십 년 곧 느부갓네살의 제 십팔 년에”라고 나오는데, 성경에서 사람 이름 나오고, 연도 나오면, 잠시 고민이 되는 겁니다. 이 성경을 계속 읽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넘어가야 하는지. 굳이 시드기야라는 남의 나라 족보까지 알려고 한다면, ‘태, 정, 태, 세, 문, 단, 세, 예, 성, 연...’ 우리나라 조선시대 왕들도 다 못 외우는데, 굳이 이걸 꼭 외워야 구원받느냐고 나오죠.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시드기야가 나왔다는 말은 내가 말씀대로 못 산다는 것을 다시 한번 조명해 주는 말씀이에요. ‘뭐, 못 지킬 거 성경 왜 보는데? 안 볼래. 어차피 봐야 못 지킬 거’라는 게 아니고 성경을 보면서 못 지킨다는 게 기쁨과 동반해서 새롭게 느껴지면서, 더 이상 나의 일에 내가 신경 안 써도 된다는 자유함이 제공되는 겁니다.
시드기야는 요시야의 족보에 해당하는 겁니다. 요시야의 아들이 여호야김, 여호야김의 아들이 여호야긴, 그리고 여호야긴의 삼촌이 시드기야(요시야의 아들)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사람이 늙게 되면 염색체 쪽에 텔로미어(telomere)라는 것이 닳아지면서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온다고 생물학자들은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텔로미어를 유지 시키면 오래 살 수 있다는 거죠. 그렇듯이 이스라엘의 꼬리, 꼬리가 개판 되었습니다. 그 꼬리 부분에 등장한 것이 요시야 왕의 아들들과 손자들, 그러니까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이런 식구들이 이스라엘을 말아먹은 겁니다. 이스라엘을 말아먹었을 때, 예레미야가 BC 667~580년, 그러니까 거의 40년 동안 줄기차게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뭐라고 외쳤느냐 하면 “너희들은 이방나라에게 포로 잡혀갈 것인데, 포로 잡혀간 이유가 하나님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너희들은 좀 포로 잡혀가 줘”라는 예언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주 개무시 한 거죠. 우리도 열심히 해야겠다거나, 우리도 사람답게 해야겠다거나, 이런 걸 일체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해서 다른 나라에 포로 잡힐 때, 너희들이 멸망한 원리원칙 그대로 너희들 잡아낚은 그 이방 나라가 너희들처럼 망할 때, 하나님의 뜻은 일관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케이? 잡혀갈 거죠?’라고 예레미야가 이야기한 거예요. 예레미야는 외부인의 약속과 활동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어요. 선지자니까. 일체 ‘이렇게 하면 여러분들이 이익이 옵니다. 손해가 옵니다’라는 이야기를 안 해요. 인간은 손해이고 이익이고 그럴 입장이 못 됩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인간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독해요.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정도로 독해요. 불교에서 나온 선불교에 어느 늙은 중, 그러니까 스님이 제자를 불러서 제자를 가르친다고 선문답합니다.
“여기 회초리가 보이지?”
“예, 보입니다. 스승님”
“네가 회초리가 있다고 하면 내가 회초리를 들고 너를 때릴 거야”
이 말을 듣고 제자는 없다고 하면 되겠다고 생각하죠.
“만약에 네가 회초리가 없다고 하면 내가 회초리를 들고 너를 때릴 거야”
이 말을 듣고 제자는 아무 말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죠.
“회초리가 있다고 해도 때릴 거고, 없다고 해도 때릴 거야. 그리고 이것에 답변 못 하면 이 회초리가 너를 때릴 거야. 내가 때리는 것이 아니고 회초리가 너를 때릴 거야. 너는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이것이 너에게 내린 숙제다”라고 하는 거죠.
인간들이 얼마나 독하고 독한지, 내가 왜 여기 살며, 왜 존재하며, 나는 무슨 이유 때문에, 무슨 의미로 사는지를, 인간은 계속해서 자기에게 집중해서 24시간을 오직 자기만 집중해서 ‘하나님이여, 뜻이 뭡니까?’라는 자기 집중을 전제로 깔고 하나님께 질문을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에게 외부인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이게 숙명이고, 슬픈 운명이에요. 인간은.
자기가 자기에게 남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질문이 나오는 거죠. “진리가 무엇이냐?” 인간은 답변할 수 없는 끝장을 보면서 끝을 보면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알 수 있는 지혜와 진리를 다 확보하려고 선불교에서 그런 질문을 낸 거예요. 어느 누구도 답변 못 하게. 만약에 이 질문을 선지자나 세례요한이나 사도바울에게 질문하면, 그들은 어떻게 답변하겠습니까?
“당신이 만약 나를 때린다면, 이 자리에 당신의 제자는 없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나를 때리지 않는다면 당신의 제자도 없습니다. 아무 소리 안 한다고 때린다면 당신의 제자는 여기 없습니다”라고 답변했을 거예요. 이 말은 또 무슨 말이냐. 이 말은 여기 없는 분이 유일하게 계시고, 있는 자는 몽땅 없다는 뜻이에요. 이게 복음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없는 자 같은 존재가 자꾸 있는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모닝이 벤츠 흉내 내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하나님’이라고 찾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끌어당긴 거예요. 이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을 해내야겠습니까?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자기 있음을 명백하게 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무슨 수로 이런 인간을 없음의 세계로 잡아당기냐는 말이죠. 정답 알려 드리겠습니다. 출애굽기 12장 42절에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야곱이 있음에, 주께서는 밤에 야곱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옴으로써, 진정 이 밤에 누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밤을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경험케 했던 겁니다.
이 밤에 야곱은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이건 야곱이 고백한 거예요. 죽었다. 이제 내 앞에 있는 자는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다. 이게 정답이에요. 없는 껍데기에 주님이 안에 내용을 채워서 그걸 성도라고 부르는 거예요. 예레미야가 하나님 말씀 전할 때는 망한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망했다고 전하는 거예요. 이게 없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없다.
너희들은 지금 이스라엘 있으니까 안 망하게 해달라고 했지? 예레미야는 그 있음에서 없음으로 넘어가 버린 거예요. 있음에서 없음으로 넘어간 거예요. 넘어갔을 때, 진정으로 그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세계에 여전히 한결같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넣어준 약속이었다. 그래서 그다음 시간에 예레미야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부동산 투기를 시킵니다. ‘조카야, 땅 사놔라. 사두면 나중에 땅값 오를 거야’
이게 뭐냐 하면, 모든 것은 없음부터 늘 새로 출발해야, 주님이 다루는 대상이 됩니다. 내 것이 있으면, 주님이 다루는데, 나 있음이 방해물이 되는 겁니다. ‘내가 왕년에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집사였습니다. 목사였습니다. 복음 전했습니다’라고 나오면, 주님께서 “네가 나를 방해한다. 나에게 이 세상은 어두움의 세계야. 깜깜한 어두움의 세계”라고 하십니다.
이 구절하고 마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4~6절에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그리고 6절입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우리가 어두움에 불과했다. 그러나 우리 외부인은 빛이었다. 이제 외부인의 빛의 코스가 껍질에 불과한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빛의 백성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있음에서 없음으로, 그 없음이 예수님의 있음으로 바꿔주는 그 작업.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히 살아계신 말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약이나 신약이나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잘되기 위해서 말씀을 믿었다면, 그것조차 마귀 짓이고 어두움의 짓인 것을 이제는 기쁨으로 깨닫게 하옵소서. 그래서 나로부터 내가 탈출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