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새 언약의 차이점

아빠와 함께 2025. 1. 5. 17:24

새 언약의 차이점

2025년 1월 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31-34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쪽에서 전에 먼저 주신 언약과 차이나는 언약을 새롭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한결 같으심’에 기대를 걸던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주체측에서 바뀌면 따라야 하는 자들은 거기에 맞추어 자신도 달라짐을 요구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바뀔려면 전의 언약과 새로운 언약, 모두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전의 언약과 새로운 언약, 모두를 알지 못합니다. 옛 언약을 통해서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문제점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데 인간들에게 이러한 자정능력이 없습니다. 외부가 바뀌고 타인이 바뀌기를 요구할 뿐이지 자신이 바뀌는 경우는 없습니다. 문제는 바뀌지 아니하면 새로운 언약에 의해서 제거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점입니다.

전의 기준과는 다른 새로운 기준에 준해서 세상을 구성하겠다는 계획에 옛 언약에 미련갖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방해꾼이 될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두 개인의 차이나는 언약을 준비하신 취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있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점은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에게 마찬가지로 적용된 문제 상황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처나, 자식이나 육신적으로 버릴 수 있는 것은 다 버린 자들입니다. 예수님만 한결 같다면 그들은 선택을 성공작처럼 여기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이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 자신이 바뀐다면 그들의 예수님 따르기는 다 헛수고가 될 공산이 큽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요구에 부응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전폭적으로 자신들의 황금 기간을 예수님께서 앞서 가게 해줄 것을 소망했습니다. 하지만 동행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선입견에 호응해주실 마음이 전혀 없으십니다.                      

제자들 앞에서 제자들이 예상하는 그런 메시야가 아닌 다른 모습의 메시야상을 전달하십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도저히 함께 하실 수 없는 분임을 점차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회의를 갖게 되었고 심지어 그 중 한 제자 가룟 유다는 내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하나님께서 기획하시는 새 언약을 받아줄 마음 자체가 성립되어 있지 않았던 겁니다. 도대체 제자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 걸까요? 그것은 인간들은 자체적으로 예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고난의 길’을 나설 위인들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혜택을 받아 원래 본인들이 고대하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집중했던 겁니다.

이스라엘에 있어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 길의 들어서자 그들 내부에 불만이 터져왔습니다. “이럴려고 했으면 우리는 애굽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만큼 외부 환경이 고생스럽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우리들에게 자기네 인생은 자신들의 예측에 의해서 꾸려나가고 싶었던 겁니다.

즉 인간에게는 ‘외부의 언약’이라는 요소는 없고 스스로 자체적으로 자기를 지켜내는 언약을 만들어내고 간직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언약은, 이처럼 인간들이 자생적으로 조작해내는 언약을 겨냥하는 식으로 주어진 것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눅 12:4-7)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들을 때, 얼마나 심적으로 불안감에 휩싸이겠습니까. “두려워 말라”는 말씀은 실제로 도저히 안 두려워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는 말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절망적인 상황을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인간은 미래를 뚫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미래에서 오게 되어 있습니다. 미래에서 바라볼 때,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뚫어낼 수 없는 세계에 하나님께서 미리 와 계신 겁니다. 인간들의 그 어떤 가능성으로도 하나님과 합류할 수 없는 그런 세계입니다. 바로 이 노선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들을 이끌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하신 바가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 시대인 이 신약 시대 관점으로 구약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히브리서 11:24-26에 나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우리가 보기에 모세는 어떤 선택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구약적 관점에서 보면 모세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모세는 강제조치를 당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해 온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하는 일로 인간은 망해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선택은 새 언약 관점이 장착되지 못하고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려는 시도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과로 현재에서 예측한 천국은 천국이 아니며 소망은 소망이 아닌 것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환란을 통과하지 못할 때, 혹은 환란을 거부했을 때 나타나는 소망은 진정한 소망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선택이나 결정 짓기 앞에서 미래에서 미리 주어진 능력 같은 것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삽입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하나님이 하신 미래의 결정을 현재에 운반하는 전달체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의 전달체’입니다. 이 안에서 “다 이루심”이 있기에 그 어떤 난관이나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말씀이 이 환란 속에서 기어이 “다 이루심”을 구현해내게 됩니다. ‘새 언약의 위력’이 이런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6강-예레미야 31장 31~34절(새언약의 차이점)25010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1장 31~34절입니다. 구약성경 1101페이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언약은, 이런 새로운 언약을 약속하는데, 그 대상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입니다. 대상자가 이방 나라 민족이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에 대해서 조건이 있는데요, 이 조건 때문에 이 언약을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어떤 조건 때문에 그런가. 32절에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같지 아니하다는 겁니다. 같지 아니하다는 것은 다르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뭔가 다르다는 그 차이를 알려면, 전에 주어진 것도 알고 나중에 주어진 것도 알아서 그 두 개 다를 알고 있어야, ‘아, 이런 차이가 있구나’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부터 모르느냐 하면, 먼저 주어진 언약조차 몰라요. 그리고 다음에 주어진 언약도 역시 몰라요.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언약을 주신다고 했기 때문에, 그러면 아는 방법은 뭐냐. 그 방법을 내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우리 자신이 바뀌는 거예요. 우리는 외부에서 어떤 말을 들으면, 내가 바뀔 생각은 안 하고 ‘저 사람이 저렇게 이야기했지.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지’라고 하면서, 저 사람 이야기 한 번 들어보고, 그다음 이야기도 들어봐서 그 차이점을 내가 알아서 내가 의미로 파악하자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남녀가 ‘우리 내년 5월에 결혼하자’라고 했는데, 신년 초에 1월 1일부터 와서 하는 말이 ‘우리 헤어지자’라고 되었단 말이죠. 지금 결혼식 날짜, 예식장 날짜 다 잡아놓고 이제 5개월만 있으면 결혼하는데, 이제야 와서 ‘헤어지자’라고 하면 데이트폭력이 괜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죠. 혼수랑 명품 가방 다 가져가고 나서 이제야 와서 헤어지자고 하면 누구나 그래요.

왜? 왜? 왜 그런데?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왜 그렇게 말을 다 바꾸는데? 준비 다 했는데. 곧 결혼식 하는데. 그러면 상대가 하는 말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요. ‘당신이 변했거든’이라고 하죠. 내가 왜 변해, 내가. 그런데 변했다고 해요. 어떤 점이 변했는지 조목조목 이야기하라고 하면, 상대가 말하죠. ‘말해도 몰라. 그냥 헤어져’라고 하니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그 바뀐 것을 굳이 내가 꼭 이야기 해줘야 해?’ ‘그래, 이야기해 봐’ ‘안 해’ ‘왜?’ ‘네가 알아서 스스로 밝혀내’ 참 답답하죠. 그러면 다른 사람이 와서 ‘결혼 파토 났다면서? 누구 잘못이야?’라고 물으면 ‘저쪽 잘못이야. 억지를 부리잖아. 억지를. 나는 달라진 게 없는데 저쪽에서 달라졌다고 파혼하자고 해. 무슨 핑계가 그런 핑계가 있는지 모르겠어’라고 나온단 말이죠.

하나님 쪽에서 바꿨어요. 첫 번째 말고, 다른 언약을 주셨어요. 그러면 하나님은 한결같다고 이야기하고, 우리는 한결같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바뀌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오늘날 인간들에게도 똑 마찬가지예요. 하나님 쪽에서 바뀐 것처럼 그렇게 나타나는 경우, 우리는 당황스럽지요. 예를 들면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도 굉장히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어요.

“인자는 구름 타고 온다”라고 하니까, ‘아, 오시겠지’ 그런데 “인자는 죽는다”라고 하시니까, 베드로가 기절초풍할 일이에요. 구름 타고 오신다고 해놓고, 특히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지만, 마지막 심판을 이 땅에 하신다고 했잖아요. 우리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대기하고 있습니다. 대기상태인데 왜 하나님 쪽에서 틀어버리십니까? 듣는 우리가 난처할 정도로.

일관성이 하나도 없어요. 그냥 하나님 일을 하셔서 자기 백성 살리고, 나머지 다 심판해 버리고, 우리는 그런 계획이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야 와서 왜 자꾸 틀어버리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제자들 보고 “내가 너를 택하였다. 너는 내 백성이다. 열두 제자 택했다”라고 하시면 제자들 입장에서는 ‘아, 주님이 우리를 택했구나. 우리는 구원받으면 되지’라고 하는데.

중간중간에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 있는데, 제자들에게 하셨거든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라고 하시면 제자들 입장에서는 그래요. 왜 이제야 와서 파토를 놓느냐는 겁니다. 이제야 와서. 답변을 우리는 알고 있어요.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 들어도 안 달라졌다는 겁니다.

제자들이 안 달라지고 싶어서 안 달라집니까? 모든 가족을 버리고 재산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다녔는데, 그 정도 각오와 다짐이 있는데, ‘아이고, 나는 싫어’라고 이럽니까? 아니죠. 이 상태로 꾸준히 가자는 마음 준비를 다 했는데, 안 달라졌데요. 이게 전부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원인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지요. 그냥 난처한 질문만 해서 될 것이 아니고, 원인을 알아야 해요.

원인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주님은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제자들은 미래에 대해서 막혀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이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벽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현재를 압살시키기 위해서 몰아붙이는 거예요. 벽이 일종의 방패가 되어서 방패를 앞장세워서 밀어붙이는 것과 똑같아요. 인간은 현재에서 미래로 갈 수가 없어요.

인간은 능력이 그래요. 내일 일을 모릅니다. 말로 하는 것보다 성경 구절을 말씀드릴게요. 누가복음 12장 6~12절에 보면, 누가 너희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6절에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라고 주님께서 설명하시는 거예요. 제가 설명하는 게 아니고. 참새 다섯 마리가 시장에서 두 앗사리온에 팔린다는 거죠. 그리고 뒤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왜 하시는 거예요. 너희들 신세가 세상 권세를 이기지 못하고 여지없이 작살나고 팔려나가는 신세로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는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들을 이 세상에서 다치지 않도록 보호할 것이라는 선입관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신다’라는 그 말이 시편에 나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23:1)

내가 하는 일이 주께서 인도하시니까, 앞으로도 어려움이 없이 인도하실 것이다. 설마 우리가 세상 권세에 팔리거나, 심지어 누가복음 12장 6절 말씀에서처럼 우리가 죽는 그런 불상사는 아마 안 일어날 거란 생각을 가지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시는 품새가, 그 느낌이 이렇게 되어있어요. 누가복음 12장 7절에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만약에 우리 중에 누가 주님과 같이 있었다면, ‘주님, 그러한 불안스럽게 만드는 말씀은 좀 하지 마시고요, 우리가 걱정되는 말씀은 굳이 안 하셔도 되잖아요. 왜?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니까 그런 일은 없을 거잖아요’라고 하는 게 바로 베드로가 하는 말과 똑같은 거예요.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주님은 그런 것이 아니고 “너희들에게 절망스러운 일이 닥칠 것이다”라고 하시죠.

내가 그동안 예수 믿고 살았다는 것이 모두 무용지물이고, 다 헛것이었고, 소용없는 짓이라고 낙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겁니다. 신약시대도 예외가 아닙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평화를 누리자”라는 이런 말씀 얼마나 좋습니까. ‘평화, 화평, 됐어! 나는 이제 구원받아’라고 하면서 그렇게 쭉 갈 줄 알았는데,

3~4절에 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천국 간다는 소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뭘 경유해야 하는데, 그 경유가 뭐냐. 우리가 낙담할 수밖에 없고, 환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절차를 통해서 전에 내가 알던 천국의 소망과 전혀 다른, 달라진, 변화된, 차이 나는, 다른 예상 못 한 천국으로 우리에게 비치는 그런 코스가 준비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여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참 힘들게 하려고 아주 작심을 하신 것 같아요. 그냥 곱게 가는 법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고 히브리서 11장 24~25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되어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있는 것보다 백성과 함께 있는 게 더 좋다고 하는 거기까지는 참 좋았어요. 그런데 그 뒤에 보니까, 백성이 그냥 백성이 아니고, 고난의 길을 참여하는 그 코스를 밟아야 백성을 백성답게 뽑아낼 수가 있는 겁니다. 부산에 가면 유명한 국수가 있어요. 구포국수인데요, 밀가루 반죽을 해서 면을 뽑아내잖아요. 그냥 밀가루 반죽은 구포국수가 아니에요. 어떤 기계를 통과해서 가늘게 뽑아져 나와야 구포국수가 되는 거예요.

실제로 먹어보니까 아주 맛있어요. 주님께서 맛있게 드시는 국수같은 성도. 이건 뭔가 뽑아내는데,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기계에 들어가서 인간의 능력으로 통과할 수 없는 불가능한 환란을 통과했음이 될 때, 쾅! 쾅! 하고 합격 제품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히브리서 11장 26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것은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리스도로 받는 능욕을 한편에 두고, 여기는 모든 애굽의 보화를 한편에 두었을 때, 네가 전에 같으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하는 겁니다. 전에 같으면. 전에 같으면 세상 적인, 호사로운, 풍요로운 생활을 선택하고, 그게 행복이라고 여기겠다고 하겠는데, 모세는 그러지 않았다는 겁니다.

모세의 믿음은 선택할 때, 애굽의 모든 보화를 거절하고 오히려 백성과 함께 그리스도가 받는 능욕 쪽이에요. 이거는 내가 고생해야 구원받는다는 차원이 아니고, 내가 모르는 미지의 그분이 갖고 있던, ‘미지’라는 것은 미래인데, 미래에 오실 예수님이 받는 그 미래의 고난을 앞당겨서 미리 받는 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어느 정도로 가치가 있는가.

애굽의 모든 보화를 거절할 정도로 막강한 소중함과 귀중함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새언약이라면, 어느 인간이 새언약을 선택하겠습니까. 이게, 이 튜브가 새언약이에요.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로 자기가 망한다고요. 공무원 하면 공무원으로 망하고, 교사하면 교사로 망하고, 농사하면 농사로 망하고. 어떤 남자는 4만 평 농사를 짓는다고 하는데, 농사지으면서 망해요.

어떤 사람은 과수원을 하는데, 과수원 하면서 망해요. 목사는 목사 해서 망해요. 인간의 하는 모든 일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생을 줄이고 호강하기 위해서 일하는 것들이에요. 이것은 새언약이 필요치 않습니다. 고생 안 하기 위해서 애쓰는 겁니다. 이거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 아니고 내가 나에게 약속한 언약이에요. 내가 나에게 새끼손가락 스스로 걸고 한 거예요.

‘열심히 일하자. 열심히 노력하자’라고 스스로 격려하는 거죠. 피곤하고 코피 나지만, 참고 일해야 나중에 퇴직연금이라도 좀 나오고, 나중에 물가 좀 오르더라도 빼먹을 돈이 생긴다고 하면서, 자꾸 ‘이기자! 참자! 파이팅! 젊어서 고생하면 늙어서 편하다’라는 이게 나에게 내가 약속한 새언약이잖아요. 이건 외부인이 내 인생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증거예요. 외부인이.

그래서 어떤 사람은 새언약을 이해할 때, 이렇게 오해한 사람이 있어요. 내가 열심히 주를 위해서 고생하면 구원받는다. 그건 새 언약 아닙니다. 혼자서 요령 부리고 있는 거예요. ‘주님처럼 고난받으면 구원받겠지’라고 하는 그런 것은 내가 지어낸 거예요. 그런 거 없습니다. 스스로 환란을 자처해서, 이만큼 환란 받았으니까, 하나님께서 구원할 거라는 그런 것은 새언약 아니고 자기 스스로 조작해서 만들어 내는 겁니다.

다시 누가복음으로 오게 되면 해답이 나오는데요. 12장 7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내가 나보기에 귀하다는 것은 언약 없이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자기보다 더 소중한 사람은 없어요. 자기가 제일 소중해요.

그런데 어떤 환경이 주어지게 되면, 내가 원치 않는 환경이 주어졌을 때, 그 환경 안에 들어있는 예수님의 약속이 소중하다는 나보다 더 소중하다는 느낌을 느껴야 해요. 주께서 친히 이끄시는 이 환경이, 내가 귀해서 내가 알아서 지키려는 이 환경보다도 더 앞서서 소중해요. 우리는 미래에 될 것에 대해서 막혀있고, 주님의 말씀은 현재를 뚫고 미래까지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나중에 여러분들이 구원받으시거든, 제가 너무 낙관적인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이 나중에 천국 가시거든, 누가복음 12장 6~7절 말씀이 틀린 말이 하나도 없고 다 맞는 말이었다는 것을 두고 영원토록 주님께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말씀을 지킨 것이 아니에요.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도 하나에 자기 조작이에요. 나는 고생하기 싫어요. 그리고 감기 걸리기도 싫어요. 독감 걸리기도 싫고, 가난한 것도 싫고, 누구 가정에 아픈 것도 싫고, 누구와 싸우기도 싫고, 그냥 좀 편안하게 환란같은 이야기 들리지 말게 하시고.

‘환란이 뭐예요?’ 어떤 분은 5년 만에 감기를 처음 걸려봤다는 거예요. 그게 환란이잖아요. 처음 걸려봤으니까. 누가복음 12장 5절에, 너희를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너희를 지옥에 보내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어요. 지금까지 여러분이 들었던 이야기를 가지고 간단하게 정리가 됩니다. 지옥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미래 이야기예요.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거예요.

이건 하나님이 말씀을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거예요. 우리는 미리 당겨서 지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의 말씀에 의하면, 만약에 지옥에 어떤 사람이 간다면, 지금껏 조심조심하면서 살았던 모든 것이 다 허사가 되고 아무짝도 쓸모없습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승자라고 했잖아요. 마지막 웃는 자가 되려면 현재에서 미래까지 파악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새언약이 뭐냐. 미래에 되어질 것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들어올 때, 어디까지 들어왔는가. 옛날에 애굽에서 나올 때 있던 언약은 우리에게 호소했어요. ‘지켜라. 바르게 살아라. 바르게 살면 복, 못 지키면 저주’라고 했지만, 새언약은 그게 뭐냐 하면 아예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뚫고, 미래에 전혀 알 수 없는, 이 현재밖에 모르는 내 마음에, 주님의 미래가 내 안에 들어와서, 내 안에 주님이 다 이루심, 다 이루어졌다는 거, “보라, 내가 다 이루었다”라는 그 사실이 이미 현재 안에 자리를 잡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걸 새언약이라고 합니다.

아파도 괜찮고, 가난해도 괜찮고, 죽어도 괜찮고, 망해도 괜찮고. 왜? ‘다 이루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다 이루심’과 대비되는 ‘너는 어느 쪽을 선택할래? 다 이루심을 선택할래, 아니면 지금의 너를 선택할래?’라는 것을 주께서 이미 다 이루어 놓고 그것을 우리에게 즐겁게 되묻게 하시는 겁니다.

그럴 때, 새언약이 있는 사람은, 다른 말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아, 우리 안에 다른 분의 능력이 들어오셨군요’라고 하면서 그 다른 분의 능력을 운반하는 전달체, 주님의 새언약을 전달하는 운반체로 살아갈 때, 그것을 가지고 새언약의 백성이라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 진짜 이스라엘에게 주는 언약이 그런 식으로 우리 안에서 구현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망하기 싫고, 아프기 싫고, 가난하기 싫고, 힘들기 싫고, 싫고, 싫고, 우리는 내가 원하는 현실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믿음에 입각해서 볼 때, 주님께서는 과감히 그것을 버리고 미래의 천국을 우리 안에 집어넣었사오니, 이제는 세상보다 우리 안에 있는 천국을 더 사모하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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