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구원 장치

아빠와 함께 2024. 12. 1. 21:38

구원 장치

2024년 12월 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 7-9

(31: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31:8)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31:9)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 자손’은 전부 예외에서 거룩한 민족이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과 영원히 같이하는 구원백성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주도자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시겠다는’ 것을 마치 우리 ‘인간이 구원을 따낼 수 있다’로 오해하면 아니됩니다.

참으로 구원받는 백성이 누구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점차 일을 벌려가면서 구체화됩니다. 동시이 인간들의 선입견과 어떤 식으로 불일치를 보여주는 지도 나타납니다. 인간들의 오염된 데이터로 인간의 뜻과 마음을 알아 차릴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불일치는 당연합니다.

어떻게 되었든 구원은 분명 혈육적 혈통 전부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혈육적 혈통을 배제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 4:22) 그렇다면 같은 혈통이라도 어떤 이는 구원되고 어떤 이는 구원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기준은 어떻게 지정되고 정해질까요? 그것은 혈통에서 끊어져 둘이 되면 그 사이에 절단면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 절단면이 무엇인지 알면 됩니다. 혈육에서 떨어지게 되면 누구나 분노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소유물과 하나가 된 채 살아가기에 조금이라도 내 물건에 손되면 불쾌감을 느낍니다.

그 중에서 제일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가족관계입니다. 가족끼리 싸울 수는 있어도 타인이 내 가족을 건드리면 힘이 합하여 싸우게 됩니다. 그렇게 결속이 강한 가족까리 영원히 갈라서는 상황이 맞이해야 한다는 것을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을 겁니다. 나중에 사도가 되는 사울이라는 사람의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땅 외지에 사는 유대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본토에 사는 유대인들과 결코 남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혈통적으로 같은 유대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는 사상적으로도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서 합치된 견해로 뭉쳐져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울은 자신, 아니 자기 민족이 신봉하는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심정에서 예수라는 이단을 믿는 자들을 정리해서 없애는 일에 나서고자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주위가 휘황찬란해 지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핍박한다”고 일러주셨습니다.

이때 사울은 전에 가졌던 자기 견해가 오류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게다가 그 광채로 인하여 사울은 그는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라는 집에서 간호를 받게 되었는데 이때 사울은 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나왔습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행 9:18)

즉 사울은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음 속에 달라진 변화를 넉넉히 소화할 수 있는 눈을 장착하게 된 겁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된 겁니다. 예수님의 혈통을 따르게 되어 자연적으로 이 주님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남은 혈육과는 차이화가 생긴겁니다.

이렇게 사울이 소개하는 새로운 가족은 로마서 8:14-17에 나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이 대목에서 처음에 모든 인간들은, 어떤 혈통을 가졌든지 하나님 안목에 보면, 죄의 종이 되는 겁니다. 그 죄의 특징은 뭐든지 무서움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었다는 겁니다. 왜 무서워할 까요? 이점에 대해서 구약에 나오는 요나 선지자의 경우를 통해서 일아보면 됩니다. 요나 4:9에 보면,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욘 4:7-9)

요나는 고국, 이스라엘에 자신이 받았던 하나님의 계시와 지금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에 차이를 느끼면서 분노하고 있습니다. 자기 지식과 진리에 차이가 나버린 겁니다. 니느웨성은 분명 40일 지나는 멸망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 멸망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요나 선지자는 자기 말에 대해서 본인조차도 자신감이 없어진 겁니다.

따라서 선지자로 할 수 있는 게 없게 되어버린 겁니다. 자기 마음 안에 혼선이 발생된 겁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가 바로 요나 선지자 본인에게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의 잘못은 자기가 생각한 자아를 위하여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자기에게 가져온 겁니다. 하지만 멸망의 대상이었던 니느웨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 소식이 즉각적으로 그들 마음 내부에 자리잡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말씀을 지킨 것이 아니라 말씀에 장악당한 겁니다. 다시 사도 바울에게 돌아와 봅시다. ‘무서워 한다’는 것은 여전히 자신이 자기를 지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서워하지 않는 영을 받았다가는 것은 더 이상 지킬 자아가 자신에게서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혈육에서 분리된 절단면을 지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는 바로 자신에게 성령을 주신 그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감사함으로 갈수 있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사도 자신이 자립적으로 완전하다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완전히 주님에게 한 가족으로 의존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나로 인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인하여 살게 된 겁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죄를 의로 바꾸는 장치가 내장되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능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끊어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주님이 가신 고난 속에서 하나됨이 확인됨을 알게 아홉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31강-예레미야 31장 7~9절(구원 장치)24120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1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1099페이지입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남은 자’라는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이거는 ‘다는 아니다’라는 뜻이죠. 그러면 남은 자가 뭐냐? 9절 끝에 보면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은 가족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가족은 아니고, 그중에서 남은 자에 한해서는 특별히 가족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조치를 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이 계획에 대해서는 하나님 자신의 충실성이 담겨있습니다. 어떤 방해도 받지 아니하시고 충실하게 이 일을, 스스로 작정하신 일에 대해서는 그냥 밀어붙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게으르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열심으로 반드시 이루어 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열심히 이루어 내는 이 일에 있어서 남은 자만 가족이 되기 때문에, 그 남은 자 외에 남은 자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잘려야 합니다.

잘려 나가야 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저는 남은 자 될래요. 잘려 나가기 싫어요’라고 여러분들이 생각하실 겁니다. 그것은, ‘내가 남은 자에 해당하느냐, 잘린 자에 해당하느냐?’라는 구분은 잘린 면에 있어요. 잘라낼 때 잘린 면에 대해서, 잘려 나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른 면에 대해서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그래, 잘 먹고 잘살아’라는 식으로 분노를 금할 길이 없지요. 화를 내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잘린 면을 아는 자들은 고마움과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잊을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본인에 의해서 잘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개입으로 잘렸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은 나의 어떤 바램이나, 나의 희망이 아니라, 주님의 희망이 작용했다는 것에 대해서, 내 희망보다 주님의 희망이 압도적으로 나의 희망을 눌러가면서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희망이 자기 성취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고마움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화를 내는지, 그 점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봐야 하겠죠. 사람들이 평소에 화를 내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내 것 건드릴 때 화를 냅니다. 거의 백프로예요. 내 몸을 치는 것은 물론이고, 직접 내 몸을 치지 않더라도 만약 어떤 여자분이 내 차에 핸드백을 얹어 놓는다면 기분 나쁩니다.

그리고 길 가면서 차주가 있으면 안 할 텐데, 차주가 없는 줄 알고 세워진 차 창문 앞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어요. 차주가 창문을 스르륵 내리죠. ‘뭐 하십니까?’ 민망스러워서 바로 자리를 뜨죠. 이게 다 내 것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내 물건 건드리지 말라고. 물건이야 뭐 닦으면 되고, 그 핸드백이 뭐 무게가 얼마 나갑니까?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닌데, 내 자식을 건드렸다.

아, 이건 내 가족을 건드렸기 때문에, 인간은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 참지 못하는가. 남의 가족이 뭐 물에 빠지든, 산에 가서 죽든 그것은 별로 신경 안 쓰는데, 내 가족이 뭔가 조금이라도 손상이 가면 우리는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다. ‘엄마, 액정 깨졌어’라고 하면 보이스피싱이고 뭐고 우선은 그냥 돈 보내줍니다. 가족은 분명 몸이 따로 있거든요. 딸의 몸 따로 있고 내 몸 따로 있고.

하지만 딸에 대한 생각, 아들에 대한 생각은 아무리 애를 먹여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혈육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가족을 잘라낼 때 인간은 분노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혈육을 잘라냅니다. 혈육을 잘라내서 인간으로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요. 있는 가족을 잘라내서 남은 자를 만드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여기 7절에 보면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여기 야곱이라는 이름이 나오죠. 이 야곱이라는 이름이 나중에 이스라엘이 됩니다.

그래서 7절에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라고 할 때 이스라엘은 혈통적으로 야곱의 자손이기 때문에, 자동으로 구원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이삭의 후손이고, 이스라엘의 후손이다. 그래서 나는 자동 구원이다.

그러면 우리는 예레미야에 근거해서 이렇게 이야기해야 해요. 아닌데. 잘리는데. 가족이라도 잘리는데. 부모 자식 사이에도 잘리고 부부라도 잘리는데. 오직 남은 자만 구원된다는데. 그럴 때 저쪽에서 고집을 부려요. ‘아니야, 하나님은 약속대로 밀어붙이는 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반드시 혈통적 이스라엘로 다 구원된다고 했어’라고 이렇게 주장하겠죠.

그런데 그 혈통적 이스라엘이 절단면을 내면서 혈통 기준의 가족에서 다른 기준의 가족으로 이게 바뀌게 됩니다. 혈통은 소용없다는 것이 아니라, 혈통은 전제가 되지만, 그 혈통이 일관성없는 토대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일관성 없는 토대. 인간의 육신과 혈통을 우리는 전적으로 믿고 싶지만, 믿을만한 토대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결론을 제가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5~26절에 이 결론을 여러분이 들어 보시고, 여러분 가족 중에 구원받은 사람이 있지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가 나와요. 가족과 혈육에 사로잡힌 자가 아니고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가 등장합니다. 성경에.

이 말은 뭐냐. 앞에 마귀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혈육에 속한 자는 몽땅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형편이라는 겁니다. 성경이 굉장히 과격하죠. 봐주는 거 없죠. 우리가 성경을 읽어서 이해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성경 주실 때부터 우리가 모르는 이해 불가한 환경을 이미 주님께서 아시고 성경을 주신 거예요. 성경을 주심으로써 나는 이만큼 알던 것이, 성경 안에서 성령으로 인해 내가 알던 것이 오염된 데이터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알기 위해서 데이터를 수집하는데, 그게 악마로부터 온 오염되고 왜곡된 데이터이고, 그것으로 내 구원을 성급하게 단정했던 겁니다. 성경에 “하나님께 사로잡혔다”라는 말은 사로잡혀있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 하나님께서 사로잡고 활용해 주시는 거거든요. 활용해 주시는 그 사업 내용이 뭐냐. 네가 오염된 데이터를 통해서 하는 성경해석을 예수님 안목으로 성경해석 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할 때, 결코 사울 본인도 예수님의 가족 되기 싫고, 이단 가족 되어서 뭐 할 건데요, 안 되죠. 그리고 주님께서 사울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간주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핍박자요, 포행자로 간주했어요. 예수님 바깥에서 예수님을 공격하는 쪽에 선봉자로 인정한 겁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9장에서 사도바울이 역시 하는 일은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해서 옥에 가두기 위해서 일행과 같이 가다가 거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서 사울만 알아듣는 대화를 몇 번 주고받다가, 아나니아의 집으로 예수님께서 몰아세우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 18절에 보면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복음의 광채로 눈이 완전히 갔어요. 눈은 갔는데, 마음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니까, 부정하지 못했죠.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어요.

이제는 마음이 부정할 수 없어서, 부정할 수 없는 이 마음이 사도바울로 하여금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 육체의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멀쩡한 눈으로 예수님을 만나서 역시 멀쩡한 눈으로 이방인의 사도가 되면, 그것도 가능할 거 같은데,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만난 순간 눈이 멀게 만들고, 눈이 먼 육신을 가지고 마음으로 믿었던 것과 육신을 새로운 육신으로 변화를 줍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이게 사울에게 절단면이죠. 끊어진 면이 보인 거예요. 비로소 사울은 내가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구원받은 것은 나의 혈통과 전혀 무관한 것이고 그럼 누구와 관련된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새로운 혈통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예수님과 한 패밀리(가족)가 되면서 예수님이 보고 있던 세상의 안목을 공유하게 된 겁니다.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그 아들의 양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아들이기 때문에 받았던 성령을 사도도 같이 성령을 받아버리니까, 이제는 가족이어야 알 수 있는 세상 보기를 그리스도와 함께 보면서 예수님의 계시를 받아서, 드디어 세상에 나가 예수님의 하신 일을 전파하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가족이십니까? 아니면 끊어내기 힘든 여러분의 혈육적 조상의 가족인지, 그냥 아담의 가족인지.

그것은 성경에 새로운 예수님의 가족이 된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 14~15절에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결정타입니다. 무슨 단어가 나오느냐 하면 “무서워하는”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자기 존재를 스스로 버텨내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사울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것이 혈육적 관계 속에서 그동안 무서워하면서 떨면서 했던 일이에요. 행여나 탈락 하면 안 되니까, 실패하면 안 되니까. 성공해야 하니까. 하나님이 원한다면 뭐든지, 예수 믿는 사람도 잡아 죽이면서 할 수 있다고 이 정도 객기를 부려가면서 자기 구원이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 늘 떨며, 무서워하면서 살았던 거예요.

그 사울이 로마서 8장 15~16절에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이 말이 뭐냐 하면 성령 받았으니까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이게 단절 면이죠, 내가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금요 철야기도 때, 서울 교인들은 ‘아버지~! 아버지~!’ 경상도 교인들은 ‘아부지애~아부지애~’라고 부르면서 하는 그건 아니고요, 친히 증거하는 것은 우리가 악을 쓴다고 되는 게 아니고, 주께서, “가만 있어봐. 네가 아들인 것을 앞으로 살아가는 모든 상황 속에 내가 친히 경험하게 해 줄게”라고 한 거예요. 그 경험이라는 것이 뭐냐. 17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고난입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의 길도 가야 한다는 겁니다. 고난인데 무섭지가 않아요. 희한하죠. 이 말이 뭐냐 하면 고난받는 게 무섭거든 땡 탈락이라는 겁니다. 이게 지금 신약이거든요. 구약에는 옛 언약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아직 이 정도는 아니에요. 구약 요나서에 보면 요나와 하나님 사이에 의견충돌이 일어납니다.

요나서 4장에 8절에 보면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요나는 자기가 이스라엘을 떠날 때 하나님께 받았던 그 지식과 실제 현실이 안 맞는 거예요. 지식과 하나님이 벌이신 진리가 합치되어야 선지자의 폼이 살고 큰소리를 칠 수 있는데, 선지자 말은 따로이고 하나님의 일은 따로 해버렸어요. 본사와 하청업자가 서로 핀트가 어긋난 거예요.

그래서 요나가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어요. 뭐냐 하면, 이 니느웨성이 멸망한다고 해서 멸망한다는 이야기를 요나가 전했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멸망 시켜줘야 하지 않습니까? 나는 분명히 멸망한다고 했는데, 왜 멸망을 안 합니까? 여기서 요나가 하나님 앞에 대듭니다. 그렇게 하니까 하나님이 요나에게 4장 9절에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내 지식과 하나님의 실제적인 진리가 안 맞는 데 있어서 장애물, 방해물이 바로 ‘너’라는 겁니다. 왜냐 하면 나는 선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이제는 잘릴 일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 증거해야 하는데 본인이 하나님을 많이 증거했기 때문에, 증거해 놓고, 하나님 증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증거함으로써 내가 구원받았음을 확보하려는 이 노림수가 요나에게 있었던 것을 주님께서 놓칠 리가 있습니까.

이게 하나님을 이용하는 거예요. 바로 이것을 깨는 거예요. 성령께서. 두려운 환경을 마련해주시고, 네가 그 두려운 환경이 생긴 이유가 네가 십자가에서 같이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주님 혼자 죽으세요. 나는 주님 죽으신 것을 믿음으로 나는 안 죽으렵니다’라는 식으로 죽는 것을 대체하려고 십자가를 지식으로 믿는 것으로써 내 구원을 확보하려는 시도. 주께서 가족 만들려는 사람은 가만두지 않습니다.

그렇게 가만두지 않는 게 가족이에요. 누구나 그래요. 누구나. 그러니까 성경 말씀을 알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또다시 무서워하는 종을 경유해요. ‘우짜노~기도해도 소용없다. 우짜노...’라고 하다 보면 ‘어떻게 해, 무서워, 못 견디겠어’라고 하는 이것이 내가 지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또 비닐이 눈에 덮인 거예요. 비닐이 또 싸여 버렸어요.

그런데 그건 정상입니다. 말씀이 늘 씻어내야 하지, 한번 구원받은 내가 안약 눈에 뿌려서 될 일이 아니고, 말씀이 늘 우리에게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죽을 때까지 반복해서 적용되려고 하면 이런 요나의 경우와 사도바울의 경우를 매일 같이 겪어야 합니다. 그 작업을 성령님이 하십니다. 바다의 물고기가 뭘 먹지요? 사람들은 민물에 사는 고기들은 민물을 먹고 바다의 고기는 소금물을 먹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물고기가 소금물 먹으면 회가 짜요. 바다에 사는 고기는 소금물을 먹긴 하지만 안에 소금을 제거하는 장치가 있어요. 그래서 회가 짜지 않아요. 그런데 척추가 없는 어패류같은 경우에는 짜요. 봉골레 파스타에 들어가는 조개는 짜요. 이게 물고기 안에 뭐가 들어가 있느냐 하면 아가미에 ‘미토콘드리아 리치 셀’이라는 게 있어요. 미토콘드리아가 풍부한(리치=rich) 세포(셀=cell)라는 거죠.

‘미토콘드리아’라는 것은 세포 내에서 에너지를 만드는 발전소 같은 겁니다. 그 장치가 있어서 소금물과 민물을 고기 자체 내에서 분류시키는데, 여기에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미토콘드리아 발전소가 많은 거예요. 주님께서는 요나로 하여금, 그렇게 성내도록 하면서 주님의 은혜에 주님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모두 다 쏟았다는 사실을 요나에게 알려줍니다.

여기 교회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샛길이 있거든요. 샛길에 근처 중(스님)이 키우는 개가 똥을 자주 눠요. 낮에는 똥이 보이니까 피해 가면 되는데, 밤에는 뭣도 모르고 가다가 밟아요. 밟으면 똥 묻은 신발을 신고 집으로 가니까, 똥이 계단부터 집안 현관 쪽까지 다 퍼져서 물론 씻어내도 잘 안 씻겨요. 아침에 보니까 또 똥을 싸놓은 거예요. 그때 어떤 사람이 좋은 아이디어를 하나 냈는데, 저는 생각도 못 했어요.

플라타너스 잎이 넓거든요. 그 이파리로 똥을 덮어놓으니까 무심코 밟아도 잎 위쪽을 밟으니까, 똥이 묻지 않는 시스템이 되는 거예요. 혈육에서는 인간은 계속해서 뭐가 올라오는가. 죄가 올라와요. 맨날 분내고, 맨날 성내고, ‘왜 하필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라는 이런 고난이 올라오는데, 주님께서 그 올라온 죄를 대신 담당하신 그 십자가가 플라타너스 잎이 되어서 막아주니까 가족들에게 죄에 대한 징벌이 없게 하는 거예요.

‘네가 어떤 짓거리를 해도 죄에 대한 징벌은 없다’라는 것이 무서워하지 않는 영이에요. 왜? 영은 십자가에서 나오기 때문에. 십자가를 앞장세우시는 영이기 때문에, 똥을 밟든 뭘 밟든 천국 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겁니다. 끝까지 십자가 앞장세워 가는 거, 이게 바로 남은 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아무것도 모르고 하나님을 편리한 대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어찌 다 아시고 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죄 씻어주시고,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눈에 있는 비늘을 떼주시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이 범사에 합력하여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이룬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것만이 속에 있어서, 이것만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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