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기쁨의 차이

아빠와 함께 2024. 12. 8. 18:08

기쁨의 차이

2024년 12월 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10-14

(31:10) 열방이여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무리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31:11) 여호와께서 야곱을 속량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니

(31:12)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 그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31:13)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니라

(31:14)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 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의 남은 유대인들은 이 약속과 말씀에 기뻐하고 이런 상황을 고대했고 이 상황을 충실하게 위해서 처신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파멸이었습니다. 어디서 어긋났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그들은 자기 기쁨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그들은 힘든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라는 도저히 감당치 못하는 거대 제국의 눌려 살면서 그들의 자율성은 박살이 났습니다. 사람이 자율성이 보장받을 때 자유의 희열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악의 힘은 이런 점을 너무나 잘 간파해서 그들로 하여금 정치적, 경제적 자율 뿐만 아니라 종교적 자율까지 개입했습니다.

즉 그들이 원하는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게 된 겁니다. 유대인 사회에 당연한 심리적인 불안감이 확산되게 마련입니다. 강력한 외부 세력에 의해서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을 빌미로 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민족을 더 압제케 하지는 않는지 제대로 정립이 되지 않는 겁니다.

자연적으로 기쁨이란 소멸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레미아의 예언의 내용은 하나님 홀로 신이 나 있습니다. 거칠 것이 없고 장애될 만한 것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마음껏 즐거워하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은 하나님의 기쁨에 흡수될 때나 성립하는 겁니다.

즉 내가 원하는 기쁨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보장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름대로의 기쁨이 따로 설정되어 있었던 겁니다. 인간의 기쁨에서 하나님의 기쁨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단절’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즉 ‘존재→환상→혼돈→새 질서’가 되는 절차입니다. 사람들은 중간과정을 모르는 겁니다.

나의 존재가 환상에 불과하기에 내가 원하는 기쁨도 헛된 기쁨인 것을 감을 잡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혼돈을 준비하셨어 모든 것이 마땅히 멸망되어야 될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점을 다음과 같이 달리 말씀하셔도 됩니다. 인간 자체가 환상이 되는 이유는 인간의 가치 토대는 인간이 아니라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의 나무들은 모두 ‘하나님의 기쁨=에덴’을 위해서 그곳이 있습니다. 그 많은 나무 가운데서 인간의 죽음과 생명과 관장하는 나무는 딱 두 나무로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는 선악나무요 다른 나무는 생명나무입니다. 바로 이런 모든 조치가 모아져서 ‘에덴’ 즉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동산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은 그 기쁨의 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두 개의 나무가 있던 곳에 추방되어 환상의 세계 안으로 가두어졌습니다. 이곳은 불로 저주받기로 작정된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쁨은 이 세계 안에서 어떻게 성립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세 번째 나무를 준비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1-2) 이상한 나무가 하나 등장합니다. 떨기나무입니다.

이 나무의 특징은 외부에서 에너지를 주지 않더라도 자체적으로 불이 붙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와 같은 존재가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이방 민족에게 일개 늙은이일지 모르겠지만 모세는 불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산에서 갖고 나온 돌판도 불에서 나온 겁니다. 이는 이 세상 자체가 심판과 저주의 대상일 뿐임을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계속 확인시켜 나가는 겁니다.

그 한 가지 예가 열왕기상 21:1-2에 나옵니다.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 왕 아합의 궁에서 가깝더니 아합이 나봇에게 일러 가로되 네 포도원이 내 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나물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합의하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여기서 인간, 즉 아합왕의 기쁨과 하나님의 기쁨에 또 차이가 납니다. 나봇이 아합왕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그 포도원이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봇은 단지 관리자입니다. 나봇의 포도원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의 주신 상속분이 연착륙하듯이 이스라엘 내에 이어져 나갔던 겁니다.

나봇에게 하나님의 기쁨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존재가 등장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아합의 아내 이세벨입니다. 그녀는 무역업으로 나라는 크게 번창시킨 시돈왕의 딸이면서 바알 종교의 여사제였던 겁니다. 아합왕은 국력을 키우기 위해 사돈왕의 협정을 맺었습니다.

이때 북쪽의 강대국인 앗수르나 남쪽이 강대국인 이집트가 외부 사정을 신경을 못쓸 때입니다. 따라서 아합왕 때, 북이스라엘은 참으로 번영했던 시기입니다. 여기에 이세벨의 정치력이 영향을 입혔습니다. 그녀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여선지자 400명을 신학교까지 세워서 양성했습니다.

온 나라는 국가 권력에 몸을 맡기고 그 정책에 환호했습니다. 그 당시에 바알에게 무릅을 꿇지 않는 자는 7,000명 정도 뿐이었습니다. 즉 온 나라가 세상 기쁨에 도취되어 있었던 겁니다. 인간 세계는 이렇게 인간들의 기쁨의 집결에 사족을 못쓰는 겁니다. 과연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진정한 기쁨의 상태에 대해서 시편 84:10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즉 이 혼돈의 세계 속에서 더는 자신의 자리를 따로 찾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에 편입되는 겁니다.

끝으로 신약 시대에서 소개하는 하나님의 기쁨의 상황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29-31)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을 가리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2강-예레미야 31장 10~14절(기쁨의 차이)24120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1장 10~14절입니다. 구약성경 1101페이지입니다.

“열방이여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무리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속량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니,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 그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찌어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것임이니라,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 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데 있어서 본인이 기뻐하는 것이 따로 있어요. 내가 기뻐하는 것이 일어나야, 사람은 기쁩니다. 근데 오늘 본문에 나온 기쁨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기쁨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우리에게 덮어씌우신 겁니다. 그래 놓고 “나의 기쁨과 같이하지 아니하면 내 백성 아니다”라고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목자를 보내서 양 떼를 모을 때, 목자의 기쁨에 동참하는 자라야 그 목자의 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기쁨을 고집하고, 왜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대로 안 해줄까. 이러면 하나님의 목자가 아니라, 본인이 본인을 이끄는 목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에 이렇게 예언되어 있을 때, 유대인들은 이 말씀대로 되고자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열심히. 그런데 망했어요.

왜냐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과 자기가 기뻐하는 것에 큰 골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내가 내 기뻐하는 것이 항상 내 마음에 터져 나오니까, 그것이 무엇을 막았느냐.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그 기쁨이 막혀버린 거예요. 주님이 주신 기쁨이 수입되지 못하고, 내 기쁨을 달성하려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심하게 요구를 해놓고는, 그들은 왜 내 뜻대로 안 됐냐고 하나님께 실망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겁니다.

따라서 이렇게 보면 됩니다. 오늘 본문이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다. 하나님의 기쁨을 방해하는 이스라엘 망하고, 하나님의 기쁨이 뭔지도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기쁨에 의해서 기쁨으로 모집될 그날이 있을 것인데, 그들에게 이 말씀이 그대로 정확하게 적용된 상황, 결과물이라는 겁니다. 14절에 제사장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제사장을 기뻐한다’라고 할 때, 도대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에 내 죄를 사해주는 제사장을 기뻐해요?

차라리 내 죄를 사해주는 제사장이 있기보다는, 내가 죄를 짓지 않는 멋있는 사람 되는 것이 나에게 더 멋있지 않습니까. 남에게 흠 잡히지 않고, 남에게 내세울 것이 있고, 남들 보기에 내가 자랑스러운 존재, 그게 좋습니까, 아니면 ‘너 이리 와. 양 잡아. 양 없이는 너는 죽어’라고 이렇게 하는 제사장이 오히려 기쁨을 주느냐는 말이죠.

제사장의 존재를 기뻐한다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해도 내 기쁨의 죄를 내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한 자에게나 제사장이 필요한 겁니다. 영원한 제사장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이 제사장으로 오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목자가 되어서 모집하실 거예요. 따라서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현지 사정과 이 예언의 말씀 사이에 갭이 있습니다.

뭔가 뚝 끊어져 있어요. 그 끊어져 있는 것을 뭐로 채우느냐. 예레미야 31장 33~34절에 내용인 새 언약으로 채울 거예요. 여기 새 언약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인간이 예상하는 것과 하나님이 예상한 것과 차이를 두고 그 차이를 메울 수 있는 것은 너희가 옛날에 알았던 율법 말고 새로운 언약이 오게 되고, 새로운 언약이 혼돈스러운 네 마음까지 정리 정돈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 오후 설교에서 제가 결론 부분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특히 오후 설교에서는 점심 먹고, 간식 먹고, 과자 먹고 해서 피곤해요. 그렇기 때문에 결론을 미리 합니다. 나중에 ‘무슨 결론이었습니까?’라고 하실까 겁이 나서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시편 84편 10절에 보면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기에 문지기가 나옵니다. 성전 문간방에 사는 거예요. 옛날 우리 어릴 때, 촌에서 못 살다가 도시에 부자로 사는 먼 친척 집 살이 하다 보면, ‘조카야, 너는 문간방에 가서 네 방으로 해라’라고 하면, ‘예~아저씨’라고 하죠. 아주 먼 친척 벌이니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꽤 살았어요. 그래서 주위에 못사는 사람들이 많이 신세를 졌습니다. 그냥 놀 수는 없고 일을 하되, 문간방에서 사는 거죠.

문간방에 크기가 너무 작아요. 작지만, 우리 할아버지에게 예속된 식구들 보기에는 ‘아우, 어떻게 저런 데서...개집도 아니고 어떻게 사나’라고 하지만, 그 일하는 사람은 아주 기쁩니다. 거기에 심부름하러 온 사람도 있어요. 역시 문간방으로 들어가야 해요. 역시 문지기로 있으면, 성전의 문지기는 문간방을 말해요. 지금 구조가 그리 되어있어요. 그 문간방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세가 처량하냔 말이죠.

그런데 여기 시편의 내용은 뭐냐. 내가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보다도 하나님 성전에 문간방이 백배 천배 낫다는 거예요. 이게 기쁨이거든요. 어떻게 사람이 변해도 이런 식으로 변할 수가 있느냐. 그 과정에 뭐가 들어가느냐. 그 과정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의 죽음과 생명을 관장하는 것은 에덴동산에 그 많은 나무가 있더라도, 딱 두 가지 나무예요.

하나는 선악과나무, 또 하나는 생명나무. 두 개의 나무가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관장합니다. 그런데 그 낙원의 이름이 뭐냐. 기쁨의 동산이에요. ‘에덴동산’ 기쁘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기쁨의 조건은 이미 범죄 해서 타락한 인간의 기쁨과는 괴리가 생긴 거예요. 하나님의 구비 조건이 갖춰질 때,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다고 이야기하는데, 인간은 독자적으로 ‘내가 기쁜 것이 기쁘다’라고 나와버리면, 이것이 서로 당연히 연결될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 번째 나무를 준비합니다. 인간이 죽고 사는 것은 나무 두 개가 전부인데, 무슨 세 번째 나무가 거기서 도입되느냐. 그 세 번째 나무가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나옵니다. 1~2절에 보면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여기에 떨기나무가 나옵니다. 이 떨기나무는 역사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품고 있는 자신의 자태로 표현될 수 있는데, 이 떨기나무는 나중에 어디로 인수인계되느냐 하면, 모세에게 인수인계됩니다. 떨기나무는 외부에서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으로 불이 피어나요. 그러니까 보통 나무에 불을 지르잖아요. 불을 안 질렀는데 자체적으로 불이 붙는 거예요. 이 떨기나무가.

그렇다면 모세와 다른 이방 민족과 전쟁하는데, 모세는 움직이는 떨기나무와 같은 존재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 보기에는 모세는 떨기나무가 아니고 그냥 보통 영감쟁이죠. 그냥 나이 많은 사람. 나이 80 넘은 나이 많은 사람인 거예요. ‘지가 뭘 할 수 있느냐’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모세가 시내 산에서 가지고 내려온 것이 불속에서 나오는 율법, 돌판이었습니다.

모세가 사명 받은 것도 불이고, 모세가 손에 든 돌판도 불속에서 나왔어요. 그렇다면 세 번째 나무는 하나님 속에 네가 들어오라는 것이 가능한 나무, 너는 너 독자적으로 있지 말고 내 속에 들어오라고 할 수 있는 나무가 세 번째 나무입니다. 모세에게 그게 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자도 그게 가능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말씀이에요.

쉽게 말해서 혼자 살지 말라는 거죠. 그 떨기나무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신발 벗어라. 이제는 네 식대로 못 산다. 너는 나의 종이다. 내가 가라고 하면 무조건 가야 하고, 내가 시키면 시킨 대로 해야 한다”라고. 이제 자립심은 날아갔죠. 그렇다면 모세 입장에서 기쁨은 뭐냐. 모세 입장에서 기쁨은 이미 시편 84편에 말씀처럼 “성전 문간방에 있어도 좋습니다”라는 철저히 하나님의 종으로 시작을 개시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세 번째 나무가 어떻게 인간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느냐. 그것은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설명을 간단하게 알 수 있게 축소하겠습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거짓되고 환상인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 환상은 뭐로 끝나는가. 혼돈으로 연결됩니다. 그다음에 그 혼돈에서 범죄 하기 이전의 새로운 질서가 성립됩니다.

겨울철 되니 난로 펴서 따뜻하니, 말씀하는 대로 주무시면 됩니다. 우선, 내가 존재하는 이것은 환상이다. 이 존재를 혼돈으로 만든다. 혼돈으로 만들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언약을 통해서, 거기서 새로운 질서를 끄집어내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혼돈으로 들어가면 되지요.

이제 혼돈으로 들어가는 그런 정황을 말씀드리고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혼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멋진 예들이 있어요.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여자 하나 나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악독한 여성이라고 지금까지 거론되고 있는 그 이름은 ‘이세벨’(Jezebel)이고 이걸 서양 사람들은 ‘이세벨라’(Isabella)

이세벨이 어느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냐 하면 남편의 인장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사람이었어요.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남편이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인데, 그 사람이 나봇의 포도원을 너무 맘에 들어서 갖고자 했어요. 그래서 나봇에게 제안합니다. ‘더 토지 질이 좋은 걸로 내가 바꿔 줄게’라고 했는데 나봇이 이렇게 말합니다. 질서를 이야기하는데, ‘이 포도원은 제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사고팔고 할 입장이 못됩니다’

쉽게 말해서 저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포도원을 넘겼기 때문에, 사고팔고를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조상 대대로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여호와의 상속이 땅에 내려와서 그 상속이 땅에서 땅으로 활주로처럼 계속 이어져가고 있는 상황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는 지킴이, 그저 관리자에 불과하고, 그래서 이 땅을 못 판다고 한 거죠.

물론 바꾸자고 한 땅이 좋은 건 아는데, 좋은 땅을 갖겠다는 것은 나의 기쁨이라는 겁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내 기쁨을 지키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뭘 기뻐하시는지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존재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아합왕이 이스라엘 사람이라 율법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이 맞거든요. 말이 맞는 건 맞는데, 아합 본인이 기쁘질 않아요. 끙끙거리는 거죠.

나도 일개 왕인데, 내 말이 먹히질 않는다고 끙끙거리고 있을 때, 옆에 대단한 여자 이세벨이 있다가, 이세벨은 뭐냐 하면 시돈왕의 딸이에요. 시돈왕은 바알을 섬기는 무역하는 나라의 왕입니다. 그 당시 아합왕은 시돈 땅, 가나안 땅은 북이스라엘을 통해서 농산물, 양식, 이런 것들을 원했고, 북이스라엘은 나라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무역을 해야 하니까 무역에 대한 경제적 지식이나 여건, 단골을 확보하기 위해서 시돈왕과 아합왕이 계약을 맺었는데, 맺는 방법은 시돈 왕의 딸과 정략적으로 결혼한 거예요.

그런데 그 시돈의 딸이 아버지가 바알 제사장이면서 시돈 왕이니까, 쉽게 말해서 바알의 전도사예요. 바알 전도사. 바알 전도사이면서 여자이기 때문에, 아세라 전도사가 됩니다. 아합왕 때, 450명의 남자 바알 제사장과 아세라, 여신의 여자 사제가 400명 있었습니다. 850명을 이세벨이 신학교를 세워서 종교를, 여호와 종교에서 바알 신학을 전파하는 신학교를 세운 거예요. 총신. 합신. 창신. 감신. 바알 종교를 세운 거예요.

그렇게 유포를 시켰는데, 유포를 시킨 그것을 가지고 번영신학[재정적 축복이나 물질적 풍성함이 항상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신앙이 자신들의 물질적 부를 증가시킨다고 믿는 은사주의 기독교 신학]이라고 합니다. 왜냐? 아합왕 때 가장 나라가 번영했거든요. 북쪽의 앗수르가 영향력이 약해졌고, 남쪽에 이집트가 영향력이 없어져서, 이스라엘을 건드리는 나라가 아무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 모든 덕이 바알 신 덕분이라고 선전해서, 백성들의 마음에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라는 희망을 부여한 거예요. 그냥 농사만 짓지 말고 장사와 무역을 하고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펴야 나라가 잘된다는 말이죠. 온 백성에게 안 퍼질 수가 없어요. 제가 울산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바뀌는 왕이 나쁜 것이 아니고 백성들이 나빠요.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어요.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 누구든지 나를 잘 살게 해준다면 그 신이 어떤 신이든 언제든지 그 신을 받아들일 용의가 되어있어요. 자기의 꿈과 나의 기쁨을 보장할 수 있는 신이 진정한 신이라는 겁니다. 아합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못 건드려서 끙끙 앓고 있으니까, ‘여보 인장, 도장 가져와. 도장’

도장을 찍는데, 어떤 도장을 찍었느냐 하면, 나봇이 왕을 험담했다는 도장을 찍었어요. 그리고 그것을 장로들에게 주면서, ‘장로들이여, 당신들이 여호와 말씀을 지킨다고 하는데, 왕이 이렇게 험담하는 것이 율법에 위반됩니까, 안 됩니까? 위반되지요? 그러니까 나봇을 가만히 두면 됩니까, 안 됩니까?’라고 하면서 나봇을 죽였어요.

죽이고 난 뒤에 주인이 없잖아요. ‘여보, 포도원은 당신 거 해라. 됐지? 내가 당신 편인 거 당신 믿지?’ 부부사기단이죠. 부부사기단. 여기에 대해서 어떤 백성들도 이의를 못 겁니다. 왜냐. 850명의 전도대가 전 국민의 거의 90퍼센트 이상을 바알 종교가 점령했어요. 그래서 엘리야에게 이렇게 했어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자가 칠천 명. 그것도 달랑 칠천 명.

전체 숫자에 비해서 너무나 퍼센트가 턱없이 적습니다. 그런데 그 칠천 명도 바른 소리를 못 해요. 국회에서 한번 결의하면 끝나는 거예요. 아무 소리 못 해요. ‘나는 그래도 보수다’라고 하는 사람은 한두 명 있을까 말까. 나라는 권력을 쥔 사람이 최고입니다. 그리고 권력에 종속되는 것이 나의 기쁨이에요. 왜? 나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그런 세계에 살고 있어요. 하나님의 기쁨요? 아무 관심 없어요. 내가 기뻐하면 그제야 한번 믿어 줄까. 이게 우리 존재의 한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걸 혼돈으로 만들어버렸어요. 그러면 그 말이 맞다고 하면 혼돈 중에도 뭔가 새로운 낌새, 새 질서에 대한 낌새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 포도원 사건 있고 난 뒤에 이세벨에 대해서 예언을 합니다.

열왕기상 21장 19절에 보면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라고 이렇게 이세벨을 개에게 피 핥음을 당하도록 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여기서 꼭 아셔야 하는 게 있습니다. 뭐냐 하면, 여러분은 이 예언의 말씀이 그렇게 기쁩니까? 아벨이 형에게 맞아 죽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뒤늦게 찾아왔다. 그게 아벨에게 무슨 도움이 됩니까? 그러니까 철저히 하나님께서 말씀할 때는 철저히 끝까지 나의 기쁨은 일체 고려하지 않아요.

여기에 열혈사제 나타나서 마약 단 때려 부수고, 살아있는 그 나쁜 인간에게 마약 빼앗고 나쁜 인간들 쳐부수자는 이런 것이 있어야, 좀 사는 데 시원한 박하사탕 같은 어떤 맛이 나는데, 그 맛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도 다 한통속이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성전 문간방에 있을 마음이 우리 속에 없어요. 우리는 나름대로 나의 기쁨을 챙기려는 음흉한 생각을 육신이 있는 한 지울 길이 없습니다.

끝으로 한 문장만 보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고린도전서 7장. 그런데 이 해결되는 문장 보면 기뻐야 하는데, 기쁘든 아니든 그건 내 소관 아니니까, 그냥 여러분들이 들어보기만 하세요. 고린도전서 7장 29~31절에 봅니다. 이제 기쁠 준비 하세요.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기뻐요? 이게 그렇게 기뻐요? 차라리 이렇게 하세요. 에라, 차라리 너도 망하고 나도 망하고 같이 망해버리자. 나는 세상에서 천날보다, 재벌처럼 잘 먹고 잘사는 것보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루를 살더라도, 문지방에서 살아도, 참새 보금자리처럼,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찾는 것처럼, 나도 성전에 한 자리 허락된 것만 해도 나는 에덴동산의 회복이다. 주께서 나를 품어서 천국 넣어준 거, 이 기쁨과 세상에서의 나의 기쁨을 과감하게 바꿀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기쁨이 주의 기쁨을 막았습니다. 주께 기뻐한다.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은연중에 나에 대한 모든 복수를 해주기를 은근히 기다리는 나의 꼼수에 주께서 그걸 들어주지 않음에 대해서 감사하게 하옵시고, 이 지옥같은 세상, 죄짓고 지나가는 걸로 감사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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