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장막
2024년 11월 1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0:18-24
(30:1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포로된 야곱의 장막들을 돌이키고 그 거하는 곳들을 긍휼히 여길 것이라 그 성읍은 자기 산에 중건될 것이요 그 궁궐은 본래대로 거하는 곳이 될 것이며
(30:19) 감사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자의 목소리가 그 중에서 나오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케 하리니 쇠잔치 아니하겠고 내가 그들을 영화롭게 하리니 비천하지 아니하겠으며
(30:20) 그 자손은 여전하겠고 그 회중은 내 앞에 굳게 설 것이며 무릇 그를 압박하는 자는 내가 다 벌하리라
(30:21) 그 왕은 그 본족에게서 날 것이요 그 통치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며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므로 그가 내게 접근하리라 그렇지 않고 담대히 내게 접근할 자가 누구뇨 여호와의 말이니라
(30:22)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30:23) 보라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30:24) 나 여호와의 진노는 내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깨달으리라
장막이란 임시 거처를 말합니다. 영원한 거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13-16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비한 한 성’과 대조되는 개념이 장막입니다.
땅에 있는 것은 장막이요 하늘에 있는 ‘한 성’입니다. 이 둘 사이의 연결은 언약이 찾아드는 겁니다. 창세기 18:1에 보면, 아브라함 장막에 누가 찾아옵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천사 세 명이 아브라함의 찾아듭니다.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 장막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이름이 바뀝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전환됩니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곧 인간으로는 ‘능치 못할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계속 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서 자기 가치를 확보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시각, 미각, 촉각, 청각, 후각들입니다. 이러한 외부 감각을 통해서 인간들은 끊음이 자극적인 것을 유발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치 못할 일을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일로 가려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일어나는 일은 장막에서 일어나는 것과 대비가 됩니다.
장막은 이 땅의 것으로 머무르는 것을 거부하는 거처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찾아들었기 때문입니다. 언약이 찾아오게 되면 이때부터 그 장막은 인간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 주도권을 쥐게 됩니다. 인간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말은, 인간의 자기 시간 의식으로 모든 일을 추진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과 ‘하나님 시간’이 다릅니다. 인간의 시간은 미래의 희망에 준해서 현재에 느끼는 시간 감각이 현저하게 달라지게 됩니다. 즐겁고 좋은 일을 앞두고 인간의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갑니다. 그러나 암담하고 절망적인 사태를 예상하고자는 시간은 참으로 더디갑니다.
반면에 자연의 시간은 참으로 차갑고 기계적으로 이어집니다. 하늘의 달과 별과 해가 땅 위의 인간 기분에 맞쳐줄 리가 없습니다. 자연의 시간은 해와 달과 별의 변화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이 변화에 따라 이스라엘 나라에 안식일, 안식년, 희년 등이 의미있는 내용으로 전달됩니다.
이로서 인간의 자기 기분에 따라 변동되는 시간감각과 자연의 시간은 전혀 상관없이 따로 움직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과는 달리 따로 성립됩니다. 즉 하나님에게 있어 시간은 ‘스톱’됩니다. 멈춰져 있습니다. 이 지상의 자연시간과 인간 시간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의 시간감각에 대해서 자연시간을 갖고 조정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미래에 기대되는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무산시켜 버립니다. 그 징후와 징조가 인간의 장막으로 쳐들어온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성립됩니다. 천사가 찾아왔던 아브라함 장막 말고 그 뒤에 이스라엘의 장막에 무엇이 들어오게 될까요?
출애굽기 26:33-34에 보면, “그 휘장을 갈고리 아래에 늘어뜨린 후에 증거궤를 그 휘장 안에 들여놓으라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리라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위에 속죄소를 두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장막 안에 언약궤가 들어오므로서 장막의 주도권은 인간에게서 언약궤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종적인 것은 아닙니다. 최종적인 것은 신약성경에서 이루어집니다. 마태복음 1:23에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능치 못할 일이 없음’입니다.
즉 장막을 가운데 두고 그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음과 인간이 할 수 없음을 극단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언약에 의해서 이름이 바뀌는 이유는, 인간의 할 수 없음을 극단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살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함께 사시겠다는 나오십니다.
따라서 장막 안에서 이 작업을 위해 언약궤가 들어오고 그 언약궤 취지가 자체적으로 완성이 되면서 인격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됩니다. 언약궤의 취지는 십자가에서 완성이 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빈 무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빈 무덤을 통해서 승천에 이릅니다. 이는 예수님의 본래의 세계로 가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된 백성’은 예수님의 코스를 밟아서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아담의 육적인 것도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면서 인간의 육신 자체가 이 지상에서 ‘나그네’의 운명을 밟게 됩니다. 이러한 신약적 결론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거쳐서 이루어집니다.
이사야 7:14에 보면,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처녀 안에서 임마누엘로 오실 분은 이스라엘이 왕이 되십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신의 약속을 위한 하나님임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29강-예레미야 30장 18~22절(야곱의 장막)241117-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0장 18~22절입니다. 구약성경 1099페이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포로된 야곱의 장막들을 돌이키고 그 거하는 곳들을 긍휼히 여길 것이라 그 성읍은 자기 산에 중건될 것이요 그 궁궐은 본래대로 거하는 곳이 될 것이며, 감사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자의 목소리가 그중에서 나오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케 하리니 쇠잔치 아니하겠고 내가 그들을 영화롭게 하리니 비천하지 아니하겠으며, 그 자손은 여전하겠고 그 회중은 내 앞에 굳게 설 것이며 무릇 그를 압박하는 자는 내가 다 벌하리라, 그 왕은 그 본족에게서 날 것이요 그 통치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며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므로 그가 내게 접근하리라 그렇지 않고 담대히 내게 접근할 자가 누구뇨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보라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나 여호와의 진노는 내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깨달으리라”
오늘 본문 내용의 핵심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기 전에 야곱의 장막을 돌이키고 난 후에 심판이 된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야곱의 장막에 있는 요소와 그 외에 심판받을 요소가 확연히 차이 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되어있어요. 하나님께서 지금 이 본문의 상황은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데, 이 건진다는 내용을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인양한다는 거예요. 인양.
인양할 때 플라스틱 같은 쓰레기 인양하지는 않잖아요. 뭔가 하나님이 자기 것을 잃어버렸는데, ‘아, 여기 있었네’라는 기쁨으로 자기 것을 자기 쪽으로 끄집어 당길 때, 인양되는 것 안에 있는 내용과 하나님의 원래 마음이 하나로 합치되는 조건 하에 인양이 됩니다. 보통 인양할 때, 경찰들이 저수지에 빠진 시체를 주로 인양하죠.
보통 인양할 때, 확성기에 대고 ‘나오세요. 알아서 나오세요’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로 시체로 나오기 때문에, 시체는 죽은 채로 그대로 인양되죠. 인양해야, 그 시체 안에서 죽는 증거가 나올 것이 아닙니까. 자기 백성을 시체로 건짐으로써, 예수님 자신이 죽었던 이유가 그 시체에 담겨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고 기어이 찾아서 공개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인양, 구출하는 거, 이게 구원인데요. 이러한 방식과 관련 되어있는 유사한 방식이 1940년도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도 있었습니다. 스탠다드오일이라는 미국의 원유회사에 한 지질학자가 사우디아라비아를 쭉 둘러보다가 와디와 제벨의 위치와 모습이 좀 특이하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와디라는 것이 뭐냐. 비올 때는 강이 되고 비가 안 오면 길이 되는, 바짝 마른 강을 와디라고 하고, 제벨이라는 것은 현지 아라비아 사람의 말로 표현하면 그냥 산인데, 그 산이 자꾸 움직이고 돌아다니는 산이에요.
이상하죠? 한국의 산과는 다르잖아요. 자꾸 돌아다녀요. 왜 그러냐 하면, 제벨의 모습이 위쪽은 고원처럼 되어있고 서 있는 모습이 한쪽 방향으로 삐뚤어진 모습, 그러니까 방금 얼마 전에 지하에서 억지로 솟구쳐 올라온 형태를 가진 그런 흙산을 가지고 제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지질학자가 ‘야, 이거 뭔가 이상하다. 뭐가 있는 것 같아’라고 탐사를 해 보니까, 거기서 가스가 확 올라왔고, 그때부터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 대국이 된 겁니다.
발견하게 된 거죠.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추 박아서 시추탐사를 했죠. 보통 시추탐사는 99퍼센트가 꽝이고, 1퍼센트가 되면 대박 나는 건데, 탐사해 보니 엄청난 매장량이 발견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양할 때, 그냥 ‘너 구원해 줄게’라고 인양하지 않습니다.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지 위에 저주받은 자로 내놨기 때문에, 인간의 소원, 인간의 요구사항은 일체 없습니다.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자기 말씀을, 언약을 쫙 뿌려놓은 거예요. 언약을 뿌려놓고, ㉯땅에 있어야 할 그 언약이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해 땅 밑으로 스며든 거예요. 제가 말하는 땅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인간세계에 땅이 있다면, 인간세계에서 하나님의 뜻이 사라진 겁니다. 그것을 노아 홍수 때 분명히 남겨줬습니다만, 홍수 이후에 그 뜻은 힘이 없었죠.
무슨 일 있었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했는데? 이런 식으로 다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언약을 주시되, 그 언약이 와디나 제벨처럼 뭔가 지상에 흔적을 남기는 식으로 하나님 자신이 뿌린 그 언약을, 또는 말씀의 뜻을 회수하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뭐가 되느냐 하면, 18절에 “보라 내가 포로된 야곱의 장막들을 돌이키고”라고 여기 ‘야곱의 장막’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야곱의 장막이라고 하는 것은 임시거처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텐트니까요. 텐트지만, 일단은 살 곳이 있어야 하니까 두는 거처, 떠날 거지만 일단은 계획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임시적으로 거하는 그것을 장막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어디서 살았는가. 장막에 살았죠. 장막이라고 하는 것이 표현하는 것은 ‘나그네’예요.
나그네인데, 요즘 용어로 하면 하나의 징후, 또는 흔적 같은 겁니다. 오늘날 성도의 삶도 하나의 징후요, 흔적입니다. 이 말은 특이하게 있는 경우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이 장막을 하나님께서 할 때, 장막 안에 들어있는 내용은 뭐냐. 어떤 내용이 있기에 안 보이는 것처럼 텐트를 치느냐. 아브라함의 장막 안에는요, 아브라함 언약이 들어있고, 이삭 장막에는 이삭 언약이 들어있고, 야곱 장막에는 야곱 언약이 들어있어요.
여러분 집의 장막에는 뭐가 들어있죠? 뭐, 부부 중심의 가정이 들어있겠죠. 낚시 오라고 하는데, 간데, 안 간다, 이런 거 들어있죠. 인간 장막은 거주용이에요. 미리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장막은 신약에 오게 되면 텐트도 필요 없고 아파트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임마누엘’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신약의 장막이고, 구약은 아직까지 그 정도의 영적인 세계가 완성이 안 되었으니까, 그냥 임시텐트를 치면서 그 안에 하나님의 언약을 담게 됩니다. 그러면 이 언약을 담았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언약’이라고 써서 액자를 만들어 놓으면 언약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언약은 외부에서, 하늘에서 누군가 찾아올 때, 그 장막에 찾아오게 되어있어요.
예를 들면 이런 창세기 같은 경우에, 아브라함의 장막에, 창세기 18장 1절에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천사 두 명을 대동해서 아브라함이 사는 거처에 찾아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찾아오죠.
그래서 그 장막에서 아브라함은 오신 천사 3명에게 정성껏 맛난 음식을 가지고 대접을 했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것이 뭐냐는 겁니다. 이만큼 얻어먹었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시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능치 못할 일을 주시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가 능할 일을 주시지 않고, 능치 못할 일을 주시는가.
인간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줘버리면요, 그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이 없고, 그냥 자기가 열심히 해서 일궈낸 자기 터전에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왜? 모든 것이 내 가능성에 의해서 집대성된 거니까. 이것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오질 못하죠. 그러나 능치 못할 것이 오면 그다음부터 아브라함은 자기를 부인하게 됩니다. ‘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단 안 받는구나’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단 안 받는다는 이 사실이 바로, 이미 아브라함은 구원된 사람이에요. 인양중에 있음을 깨닫고 감지한 사람이에요. 내가 하나님에 의해서, 시체가 건져지듯이 위에서부터 나를 끌어당긴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으로 당긴다는 거, ‘그래, 자식 낳았다. 자식 낳으면 내 자식이잖아’라고 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능치 못한 것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려주느냐 하면, 새로운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알려줍니다. 이런 이야기가 하나하나 다 어려운 이야기인데, 기왕 어려운 거, 그냥 어렵게 갑시다. 이게 뭐냐 하면, 시간관인데요, 인간의 시간관과 자연의 시간관과 하나님의 시간관과 상호 다 달라요.
인간의 시간관은 미래를 앞당겨서 현재를 바라보는 시간관입니다. 그러니까, 미래에 어떤 계획이 없으면 오늘이 지루하고요. 만약에 미래에 어떤 계획이 있으면 오늘의 시간 의식이 빨리 가요. 조급증이 나면서. 그런데 자연의 시간관은 인간의 이런 심리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적 시간관은 해와 달과 별의 변화에서 규정된 시간관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라 할 때 동원된 시계가 뭐냐. 해와 달과 별이에요. 해 지고, 해 뜨고, 이게 하루입니다. 해 지고, 해 뜨고, 해 지고, 해 뜨고 가 6번 되는 날에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했어요. 하나님도 다 손목시계가 있어요. 해와 달과 별. 이거는 뭐 가차 없어요. 아주 기계적으로 움직입니다. 너의 사정이 어떻든 간에, 돌아오는 7년째가 되거든, 네가 남에게 돈 빌려준 거 받지 말고 다 돌려줘.
이게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시간관을 가지고 안식일과 이스라엘을 옥죈다고 하죠. 구속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사적으로 개인적인 스케줄이나 계획은 자연의 시간에서는 어림도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네게 아름다운 계획이 있더라도, 오늘 밤에 너의 영혼 데려가면, 그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는가. 자연의 시간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자기 기분에 도취해서 자기 기분이 업(UP)이 되어서 하는 것입니다. 기분이 업이 된다는 것은 상세히 이야기하면 이겁니다. 미각, 촉각, 후각, 청각, 시각,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이걸 외부에 자극되는 거, 새롭게 자극되는 걸 다 받아들여서, 이 자극되는 것에 유혹받아서 거기에서 자기 욕망의 쾌감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삶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자극되고, 괜찮아 보이고, 좋아 보이는 거, 이것이 어떤 식으로 그렇게 되는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가리는 용도가 되어버립니다. 자극적인 거, 마약 하는 거, 술 담배, 이런 것들을 모아서, 자기 즐거운 자기 시간 스케줄을 만들어 버리면, 자연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을 가로막게 됩니다. 놀러 가는 것은 좋은데, 다음 주 김장하잖아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시간은 뭐냐. 하나님의 시간은 스톱(정지)되어 있어요. 멈춰있어요.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로 완료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시간은 아브라함 자기의 수평적 계획을 위한 시간이 아니고, 위로 떠오르는데 소요 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막벨라 굴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무덤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가 야곱의 마지막 고백이 무덤에 가는 그 고백이 왜 중요하냐 하면, “무덤에서 만나자”라고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나중에 신약에 오면요, 그 무덤은 시체를 치워버리는 무덤이에요. 아주 불가능한, 인간으로는 능치 못할 일이 벌어지는 무덤. 빈 무덤. 내가 갖고 있는 신체가 흙이 될지라도, 나에게는 손해가 전혀 없는 시간. 그동안 내 몸 가지고 주님의 시간을 가렸잖아요. 그러니 내 몸이 없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죠.
너의 시각, 미각, 촉각, 청각, 이런 것들로 인해, 완전히 하나님의 뜻과는 괴리 상태에서 자기 즐거움에 몰입해서 ‘안 떠날란다. 안 떠날란다’라고 이러고 있단 말이죠. 마귀에게 놀아나면서. 그런데 그러한 고질병에 주께서 그런 인간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고 차분하게, 인간의 시간에서 하늘의 시간으로 떠오르게 하는 겁니다.
떠오른다는 이런 표현은, 성도가 구원받을 때 하늘로 떠오른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 승천의 재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꼴사납지만, 우리가 지금 승천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지금 요양병원으로 가고, 장례식 화장터로 가는 그것을 승천으로 보겠어요?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그걸 승천으로 보는 거예요.
왜?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대로 복제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승천하면 좋은 것이 뭐냐. 높은 데서 보면 세상을 넓게 보는 좋은 점이 있어요. 전에는 심각한 문제가 지금은 별만 시답지 않은 시시한 문제가 되고 말았어요. 시시한 문제. 그때 내 촉각을 자극했고, 미각을 자극했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그런 쓸데없는 것에 왜 내 신경을 다 썼는지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런 생각이 안 들면, 지금 올라갔다가 도로 땅과 밀착되어서 가라앉은 샘이 되죠. 전에는 대통령이 국민의 힘이 되어야 한다고, 민주당이 되어야 한다고 하다가, 약간만 올라가면 그때는 누가 되든 어차피 우리는 장막이니까, 그건 별 의미가 없는 거죠. 그러면 이 장막이 나중에 이스라엘의 멸망될 지점에 주님의 언약을 놓는 장막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인격체로 바뀌는 대목이 이사야에 나와있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 이제 다음 달 되면 크리스마스잖아요. 유며한 말씀이에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다음에 유명한 구절이에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 임마누엘을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 오늘 예레미야 본문도 그렇게 나와 있어요. 하나님께서 야곱의 장막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을 그때 완성한 날이 올 것인데, 그 완성의 모습이 뭐냐.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겁니다. 임마누엘, 함께 있겠다고 하신 거예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들이 약속의 땅에서 죽치고 앉아 있는 그 버릇을 나는 용납하지 않겠다. 추방해 버리겠다. 이 땅은 너희를 위한 땅이 아니야. 내 언약을 위한 땅 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주입시키고, 주입시킨 상태에서, 포로된 상태에서, 오늘 본문에 보면 18절에 “포로 된 야곱의 장막들을 돌이키고”
포로 된 야곱의 장막을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인격적인 장막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 장막에 어떤 내용을 채울 것인가를 한번 보겠습니다. 민수기 17장 7절 “모세가 그 지팡이들을 증거의 장막 안 여호와 앞에 두었더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장막이, 하나님의 언약이 오게 되면, 오기 전까지는 내가 주인공이고, 인간이 주인공이고, 아브라함이 주인공, 이삭이 주인공, 야곱이 주인공인데, 거기에 누가 들어오느냐.
거기에 언약궤와 지팡이가 들어와요. 그러면 서서히 조짐이 무슨 조짐이냐. ‘야, 인간아, 너는 언약의 증인으로 빠져나가. 이 장막의 주인공은 네가 아니야’라는 식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을 이 순간 한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누가 들어있지요? 이걸 사도행전 15장 16절에 이렇게 나오는데요,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사야 11장 1절에도 보겠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하면서 아래 쭉 나오는데,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그분이 이사야 9장에 보면 6절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라고 되어있고, 그 이름이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라고 하시면서 마지막에 “평강의 왕!”이라고 되어있어요.
오늘 본문에서 포로 된 야곱의 장막을 돌이키면 내가 너희에게 왕을 주겠다고 하셨는데, 그 왕이 이사야 9장에서는 하나님 본인이 왕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하나님 본인이 왕이 돼요. 그러면 능치 못할 일에 담당자가 우리 안에 주인으로 떡하니 차고 들어온 것이 됩니다. 그러면 담당자 예수님에게 일어나는 현상, 아까 말한 ‘승천’이 우리 안에서 자기 승천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내(주님) 백성일 때, 떠오르는 작업을 수행하시는 겁니다.
옛날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잠시나마 약속의 땅, 현재 이스라엘 땅으로 잠시 왔지만, 신약에서는 위로 올라가요. 위로. 그 이유가 뭐냐. 영원한 왕이 우리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왕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우리를 통해서 흔적과 징후로써 남기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겁니다. 우리 생명은 하늘에 있는 거예요.
제가 어떤 분에게 이런 이야기 하면, ‘목사님, 저는 무게가 좀 나가서 뜨는데 곤란한데요’라고 하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그 무게 나가도 나중에 연세 많으면 먼지처럼 다 부서져서, 다 툭툭 털어버리면 남는 거 없습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어떤 분이 말하기를 ‘이 믿음 가지고 빨리 죽고 싶다’라고 기도하고 싶다고 했는데, 세상에 무슨 욕심을 그렇게 부립니까.
순서를 지키세요. 순서를. 그런 빨리 죽는 호강을 누릴 자격이 됩니까? 뭔가 툴툴 털고 가야지요. 텐트는 접고 가야지요. 접고. 낚시터 가서 살래요? 아내가 있는 집에 와야 할 거 아닙니까. 문어 한 마리 들고서. 부산에 벡스코 가고, 신세계 백화점 가도 빨리 집에 와야 할 거 아닙니까. 집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께로 가면서 딱 하나만 기억하세요.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이루어짐에 감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능치 못할 일을 못 함을 날마다 깨닫게 해주시 옵소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주의 말씀의 일이 아닌 것을 알게 해 주시고, 못 한 것을 들어서, 인양하듯이 건져주심에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