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언약
2024년 11월 2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1-6
(3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31: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31:3)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31:4)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로 너를 장식하고 즐거운 무리처럼 춤추며 나올 것이며
(31:5)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원을 심되 심는 자가 심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31:6)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수꾼이 외치는 날이 이를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말은 처음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하나님쪽에서 알려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돌아온 결과는 약속의 땅의 풍요한 삶이 아니라 추방이었습니다. 지금 추방될 지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또다시 자기 백성을 사랑하고 이 약속의 땅에서 살게 하시겠답니다.
과연 이번에도 굳이 믿어야 할까요? 맨 처음 사랑이 부도났다면 이번에도 사랑하시겠다는 말은 부도날 가능성이 있는게 아닐까요? 이번의 사랑은 꼭 믿을 수 있는 확실한 근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절단과 단절이 선행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로 하여금 ‘상위 포식자’에게 맡겨서 절단하시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이 세상 최고 포식자 손에 맡기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 곁에서 따나보내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이 세상의 구조에 맡겨서 그 힘의 구조에 의해서 소실되게 하시는 작업을 선행시키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함’의 일관성은 새로운 언약의 투입으로 성사하시겠다는 계획을 하나님께서 펼치시게 됩니다. 예레미야 31:31-32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전에 있지 않는 ‘새’ 언약을 투입시키겠다는 것은 새로운 조건 하에서는 이스라엘을 만드시겠다는 겁니다. 즉 전에 너희들이 기대한 새 이스라엘은 결단코 하나님은 생각하시지 않으신 이스라엘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이해하고 사랑이란 ‘자신들의 뜻의 관철’을 중심 내용으로 해서 이해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소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혹은 ‘하나님을 사랑하겠노라’고 하는 그 인간들 중심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생각에 대한 잘림’을 본 내용으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인간의 희망과 인간들의 기대와 포부 같은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러한 생각에 대해서 새 언약을 가지고 다 막아내고 거부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세우시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조건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만 정해놓으시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이스라엘을 잘라내시고 그 그루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새 이스라엘을 새로 만들어내십니다.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11-13)
‘잘려나간면’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절단면이 이스라엘의 뿌리가 됩니다. 철저히 인간의 의사를 배제한 이스라엘, 그런 천국을 만들겠다는 겁니다. 이 작업을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유대 땅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유대땅은 율법을 지켜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는 의지로 충만한 땅입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그들은 구제하고, 그들은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키려 애를 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3-15) 즉 천국이 천국문을 막는 겁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주님께서 친히 막아섭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자신도 느끼지 못할 지경으로 위선과 외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자신의 한계를 모릅니다. 예를 들면, 구제에 대해서 사람들이 일반 성직자들에게 문의하면 이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정신껏 성의와 마음을 다하고 구제받은 사람을 이해하면서 구제를 하라”고 할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발언은 이러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 이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단절시키겠다는 말씀입니다. 기도와 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도하면서 같은 요구를 계속해서 반복하게 됩니다. 열심히 정성을 다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도는 이런 인간들의 의도를 싹뚝 살아버립니다. 달라고 하는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겁니다. 너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필요없는지는 우리 주님이 이미 알고 계시다는 겁니다. 따라서 진정한 기도는 이미 주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서 우리가 주님의 지시 따라 쓰여질 수 있게 요청하는 기도이어야 합니다.
즉 내 것을 더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어떻게 주님의 것이 네게 주었는지에 대한 반응으로서 나오는 기도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금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식했다는 티를 내지 말라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원칙은 새로운 이스라엘이나 천국이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의 일방적 행함으로 달성된다는 겁니다.
시편 78:67-71에 보면, “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다윗의 후손’에 새로운 이스라엘이 새롭게 세워진다는 겁니다. 이 택함이 바로 사랑인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신 그 공로 앞에서 우리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은 깔끔하게 단절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0강-예레미야 31장 1~6절(단절의 언약)241124-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1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1099페이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로 너를 장식하고 즐거운 무리처럼 춤추며 나올 것이며,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원을 심되 심는 자가 심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에브라임산 위에서 파숫군이 외치는 날이 이를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
전에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한다고 해놓고 아주 깔끔하게 버리셨죠. 다시 그들을 바벨론에 포로 잡히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레미야 본문에 보면 또다시 “너를 사랑한다. 너를 긍휼히 여겨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얻게 하겠다. 너로 하여금 포도원에 심고 그 과실을 먹을 것이고, 네가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 살 것이다”라고 이렇게 또 말씀하시는데, 뭐, 한 번 속지 두 번 속을 일 있습니까?
전에도 이랬잖아요. 처음 나올 때도 이러했어요. 이랬는데,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똑같은 말씀을 하시게 되면, ‘이번에도 안 되면 삼세판인가? 또 세 번째 말씀하실 것인가?’라고 나올 것이 뻔하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왜 같은 취지를 두 번을 하시는가. 그것은 전에 처음 이야기했을 때, 너와 이 땅에서 끝까지 살겠다고 했을 때, 그들은 추방된다는 것을 생각도 못 했어요.
힘들어서 자기 백성을 약속의 땅에 보내줬는데, 그 땅에서 이스라엘이 결국 나라가 잘 운영되지 못하고 다시 산산조각 나듯이 전 세계로 흩어져 버렸다는 것을 처음 말씀하실 때는 그런 뉘앙스가 없었다는 겁니다. “사랑한다. 내가 너를 지켜줄게”라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너희들은 다 쫓겨날 거야. 너희들은 나에게 미움받을 거야’라는 그런 내용이 마치 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단절이에요. 하나님이 첫 번째 사랑하시는 것과 오늘 본문에서 나온 사이에 어떤 단절, 끊어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심으로 인해 발생 된 끊어짐, 그 끊어짐이 예레미야 31장 31~34절까지 그게 나와 있습니다. 31절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한다’라고 하시죠. 그러나 항상 사랑한다는 이 말에 ‘내가 건 조건하에 사랑한다’라는 ‘조건’이 붙어요. 그 조건이 뭐냐. 새로운 언약을 투입하면서 조건을 만든 거예요.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자꾸 그런 조건 걸지 말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백 프로 동의하면서 우리 식대로, 우리 소원대로, 그냥 사랑하고, 그냥 좋게 해 주고, 그냥 우리 뜻대로 다 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단절이 없는 조건, 주님은 단절을 집어넣은 조건, 그 두 조건에 차이점은 어디서 비롯하는가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 차이점을 의도적으로 두시느냐 하면, 인간이 조건 없이 우리 소원대로 그냥 해달라고 할 때, 무엇이 우리 쪽에서 누락 되느냐 하면 ‘상위 포식자’라는 상황을 우리가 고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위 포식자라 하는 것은 동물의 세계에서, 약한 것들은 좀 센 것에게 잡아먹히고, 센 것은 더 센 것에게 잡아 먹히고, 결국은 정글의 세계, 동물의 세계에서 어떤 먹이사슬이 구성되는데, 제일 상위에 포식자, 그 포식자 본인만 살리기 위해서, 나머지는 하루살이처럼 삭제되고, 제거되는 운명의 사슬로 이 세상이 되어있습니다.
재벌이 하층에 하청을 주고, 하층에 하청을 줄 때, 취직했는데, 하층의 하층, 그 하층의 하층에 취직했다. 그러면 체불임금, 돈을 못 받았다. 그러면 왜 돈은 못 받았는가. 위에서 돈을 안 주더라. 왜 돈을 안 줘요. 더 위에서 돈을 안 줘서. 이렇게 최상위 포식자 중심으로 이 세상은 형성되어 있고, 우리는 그 세계에 놓여있습니다.
그러면 그 최상위 포식자는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현재 있는 이 세상이 있는 조건은 바로 최상위 포식자만이 살아남기 위해서 굴러가는, 그리고 변화하고 있다는 조건을 최상위 포식자인 악마가 그렇게 걸었던 겁니다. 하나님은 그걸 아는데, 이스라엘은 자기 배후에 보이지 않는, 나를 잡아먹는 그런 환경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집어넣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일단 끊어내는 거예요. 일단 끊어낸다는 것을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성도라면 주님의 지시를 날마다 받게 되어있는데, 만약 주님의 지시가 없으면 거기에 악마가 틈탑니다. 백 프로입니다. 여러분들이 걱정되고 고민이 됩니까?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주님의 지시를 안 받아서 걱정되고 염려되는 거예요. 내 지시 따라 내가 움직이려고 할 때, 여기서 단절이라는 요소가 빠져버리면, 그다음부터는 우리는 악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뭔가 주님의 지시가 먼저 있고, 그다음에 주님의 지시에 대해서 우리가 반응을 나타내는 식으로 주님과의 대화가 성립되어야 하고, 그 대화에 따라서 기쁨과 감사가 주어지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그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에 주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을 단절시키는가를 한번 보세요. 마태복음 6장 2~3절에서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고 되어있어요.
만약에 오늘날 목사나 신부 같으면요, ‘목사님, 구제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으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성심성의껏 그 사람을 사랑해서,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형편을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도와줘라’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성직자라면.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단절이 없어요. 끊어짐이 없어요.
마음을 가다듬고, 내 속에 있는 착한 심성은 다 끄집어내서, 그걸 모아 모아서, 상대방에게 다가서면, 상대방은 감동할 거다. 그렇게 해서 만든 것이 신천지이고 교회조직이고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는가. 단절을 집어넣어요.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이거는 네가 구제할 잽이 되는 지를 너부터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기도를 한번 보겠습니다. ‘목사님, 기도는 어떻게 합니까?’ ‘간절한 믿음으로 하면 주께서 응답하십니다’라고 하죠. 그러면 ‘간절’이 뭡니까? ‘빡세게’ ‘빡세게’가 뭡니까? ‘열심히’ 그러면 ‘열심히’가 뭡니까? 음식을 끊을 정도로 정성을 다하여. 이건 우체국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미장원 옆에 우체국’ 그러면 미장원은? ‘우체국 옆에’
이건 하나 마나 한 소리. 아무 소용이 없는 소리예요. 정답은 뭐냐. ‘네가 과연 기도할 잽이 되는지를, 기도할 재주가 있는지를 네가 지금 몰라? 모르고 있지, 그렇지?’라는 이런 거예요. 오늘 제목이 다시 세우는 거예요. 다시 세울 때는 반드시 단절부터 가야 해요. 예를 들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영광을 봤거든요.
이사야가 평소에 영광 보기 전부터 이미 이사야는 말씀을 전하고 똑바로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하나님 성전을 보고 완전히 자기가 깨졌죠. 깨지고 난 뒤에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내린 지시가 참 특이해요. “네가 백날 전해봤자, 너의 말을 아무도 못 알아들을 것이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은 이제 종쳤다. 없다. 이제는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잘라내야죠. 십분의 일 남았다고? 잘라내 버려요. 다 잘라내요. 남는 것은 뭐냐. 그루터기입니다. 남는 것은 그루터기예요. 그루터기 특징이 뭐냐. 잘렸다. 잘렸다는 것이 그대로 살아있을 때 그게 그루터기예요. 장로님은 기도 어떻게 합니까? 기도한다고 까불다가 잘렸다. 이게 기도의 그루터기예요.
구제는 어떻게 합니까? 열심히 하려고 하다가 주께서 그거 엉터리라고 잘렸다. 마태복음 6장에 한 가지 더 나오지요. 금식 나옵니다. 16~17절에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말끔하게 하란 말이죠. 찡그리지 말고. 말끔하게 하면 누구에게 금식했다는 티가 나지를 않아요. 타인이 내 금식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논리가, 이상한 논리를 집어넣으면 이렇습니다. 금식했습니까? 12시에 금식했어요? 그러면 얼굴 핼쓱하겠죠. 그러면 이 금식의 티를 안 내려면, 세수해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12시에 금식했으면, 저녁이 6시라면, 그 사이에 3~4시쯤 통닭을 먹던지 뭘 먹어줘야 해요.
내가 금식했음을 안 들키기 위해서 밥을 먹는데, 그 밥 먹는 이유가 뭐냐. 늘 금식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밥을 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금식을 완성하기 위해서 밥을 먹는다. 이 논리가 인간으로서는 가당치 않은 거예요.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잘리는 단면을 어떻게 내가 만듭니까? 그래서 오늘 오후 설교 때, 제가 핵심 문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천국은 천국 문이 막아요. 지옥문이 천국을 막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 천국 문을 막아요. 천국에 계신 주님이 천국 문을 막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에 나온 말씀이에요. 11절에 보면 세례요한을 칭찬하면서 “이 세상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라고 할 때, 그 말 듣고 사람들이 ‘야, 세례요한이 최고야. 우리는 세례요한처럼 살면 돼’라고 나오잖아요.
여기에 하나님께서 아주 단절을 해버려요. “그러나” 벌써 이 그러나 나올 때 ‘우리 생각이 또 틀렸구나’라고 감 잡아야 해요.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세례요한보다 더 대단한 신앙인이 되려면 가장 작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건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과 정반대 방향이죠.
이것도 잘리는 거죠. 그리고 12절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내가 그동안 천국, 천국, ‘내가, 천국이 너희의 천국을 막을 거야’라는 식으로 지금껏 계속해서 왔고, ‘세례요한도 똑같은 취지에 의해서 천국 가려는 사람을 저지하려는 활동을 지금 세례요한은 하고 있는데, 그 세례요한의 했던 활동을 이어서 내가 너희 천국 가고자 하는 천국행을 막을 거야’라고 하신 겁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천국행을 막았던가요? 막았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에서 이렇게 막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라고 하시면서 천국으로 오신 주님이 그 바리새인의 천국을 막아버렸어요.
그런데 그 바리새인의 천국을 막으면서 뭔가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근거가 뭐냐. 너희가 “외식”하는 자라는 겁니다. 외식. 바리새인에게 외식한다고 하는 말은 듣는 바리새인에게는 도저히 예수님을 밀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는 지금 천국에 일 번 타자로 들어간다고 지금 선전을 다 해놨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희도 못 들어가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도 너희가 막는다”라고 하신다면,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그 소리 듣고 어떻게 정리해야 합니까. ‘나 잘렸다’라는 것이 되겠습니까? 인간의 고집은요, 어떤 경우라도 잘렸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지 못하는 최고의 포식자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잘렸다는 것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네가 나에게 한번 잘려 봐라’라는 식이지, 절대로 잘렸다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서 이스라엘을 다시 세운다고 할 때, 어떤 끊어진 것을 접합하는 원칙이 있어요. 끊어짐과 접합의 원칙을 제가 오늘 설교에서 시편 78편 67~71절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끊어짐부터 먼저 나오거든요. 시편 78편 67절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라고 나옵니다. ‘북쪽 이스라엘을 택하지 아니하시고’ 주께서 잘라버리셨죠. 그런데 그 자른다는 행위, 잘라낸다는 행위가 무엇으로 이어지느냐. 잘라냄이 있어 줘야 함께 등장하는 행위가 68절에 나옵니다.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이게 정답입니다. 시온산을 택하시는데, 거기에 누가 나오느냐 하면 70절에,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정답이 다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를 잘라내시고, 잘라내신 그루터기에서 잘린 유다 지파로 오셔서, 유다 지파에게 잘리시고, 잘린 그 유다 지파 안에서 다윗의 후손을 끄집어내시고, 끄집어내신 분이 통합된 새롭게 만들어 낸 이스라엘이에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택한 자라”(마3:17) 결국 이게 무슨 뜻이냐.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좀 가만히 있으라는 이야기예요. 나는 예수님과만 일할 테니까, 넌 좀 가만히 있어. 너는 지금 최후 포식자에게 먹힌 상태야. 너의 힘으로 우리는 그 악마의 위세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행동 하나하나를 보세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이런 이야기 하면 윗사람이 나를 계약 해지, ‘나가세요~’라고 할 수도 있는 문제인 거죠. 그러면 꼭 직장생활을 해야 하나. 내 사업하면 되지. 사업하면? 혼자 합니까? 다른 쪽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문 닫을 판인데요. 세상에 모든 것이 남의 힘을 의식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살아낼 수 없는 구조 안에 놓여 있습니다.
드라마 한번 보세요. 드라마 보면 주스, 또는 음식 박스를 상대에게 주는 게 있어요. 오늘 낮에 세종에 강 집사님께서 뭘 하나 들고 왔어요. 쌍화탕 박스를 들고 왔는데, 나는 드라마를 많이 봐서 그런지, 그걸 뭘로 생각했느냐면, 그 안에 5만 원권 지폐가 가득 들어있는 줄 알았어요. 딱 열면, 마약 판 돈, 불의한 돈으로 꽉 채워서 검사장에게 뇌물 주는 돈, 이게 우리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 말씀에 새 언약 들어갈 때는 ‘아, 우리가 빠져나갈 수 없는 한계에 우리가 갇혀있구나’라는 우리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해요. 한 촌마을에서 방송국에서 나온 사람이 인터뷰하는데, 그것이 너무 생생하게 한계로 다가와서 기뻤던 적이 있어서 제가 메모를 했어요. 거기가 영덕 앞에 촌 동네인데 인터뷰하려고 방송국에서 갔어요.
‘돌아보니까 동네가 조용한데, 옛날 연세 많으신 분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라고 물었어요. 저는 예상하기를 ‘그 연세 많으신 분들 다 하늘나라 갔습니다’라는 대답을 생각했는데, 거기 이장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연세 많으신 분들 저기 산에 갔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얼마나 정확합니까. 저 산에 마을 공동묘지가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이 단절 되어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람이 천당 간 지 난 모르겠고, 내가 아는 것만 이야기하는데, ‘다 묻혔습니다. 지금’이라는 이 말이 우리 일상의 언어생활 속에 우리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우리는 못 합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그 한계를 넘어섭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분이 우리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본인 혼자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사실을 우리에게 통보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택하심의 연속적인 반복이 온전한 새로운 이스라엘을 새로 만들어 내신다는 거예요.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 내지 못하고, 오직 주께서 세우는 집으로써만 천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 예레미야의 예언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계를 느끼게 하옵소서. 세상 살면서 모든 것이 힘의 구조인 것을 애써 모른 척하지 말고, 온몸으로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복음의 기쁨과 이 세상이 주는 기쁨이 얼마나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을 늘 깨닫고, 이 사실을 증거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