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마네킹
2024년 11월 13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2:1-4
(2:1)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2:2)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2:3)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2:4)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죽을 사람이 죽기 전에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유언입니다. 하지만 본인이 죽고 난 뒤에 살아 있는 사람이 자기 부탁을 안 들어주면 어쩔건데요? 그래서 유인을 듣는 사람들은 그저 죽어가는 사람이 죽어가면서 희망사항을 한 것으로 여겨서 참조할 뿐입니다. 즉 죽은 사람이 아무리 대단한 업적을 남겨도 그 영향은 제한 적입니다.
하지만 과연 다윗언약에 대해서 그러할까요? 쉽게 무시해도 될 유언일까요? 아닙니다. 히브리서 9:16-17에 보면,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언약을 유언으로 남기는 관계에서는 산 사람이 도리어 그 유언에 매여버리게 됩니다.
솔로몬은 본의 아니게 아버지 유언에 묶여버린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스스로 고독을 자처해야 될 일입니다. 살아가면서 그 어떠한 산 사람들을 만난다 할지라도 솔로몬은 죽은 아버지 다윗과 상대해야 합니다. 다윗 언약에 족쇄 채인 겁니다. 솔로몬은 자기에게 뒤집어쓰게 된 운명을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자율성? 자기 의견? 용납되지 않습니다. 죽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죽은 다윗과 결별할 입장이 못됩니다. 솔로몬 곁에는 늘 아버지의 유언이 함께 합니다. 이 원리는 신명기 17장에 나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신 17:18-20)
이 신명기 말씀은, 왕이 된 자가 다른 형제를 대하면서 교만스러운 것을 지적해 줄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있어 왕이란 하나가 아니고 둘입니다. 한 분은 하나님 품에 계신 독생자이시고 다른 한 사람은 지상의 이스라엘에 나타난 왕입니다. 이 지상의 왕은 일종의 하늘의 왕의 마네킹 역할을 위하여 세워졌습니다.
실질적인 이스라엘의 왕은 왕 옆에서 말씀으로 조종하는 그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왕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의 말씀, 곧 천상의 왕의 행하심을 가리지 않는 역할입니다. 교만이란 하늘의 왕되심을 가리는 것을 뜻입니다. 과연 솔로몬은 이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를 우리는 살펴야 합니다.
열왕기상 11:2-5에 보면,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 왕은 후비가 칠백 인이요 빈장이 삼백 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솔로몬 왕은 변질되었을까요? ‘변질’이란 이미 인간 본래의 속성화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25에,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3:7에는,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여기 몸이 있는데 ‘벗은 몸’으로 있다”는 것이 인간의 시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벗은 몸에 대해서 네가 왜 보고 있느냐?”라고 문제 삼으십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뒤에 달라진 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에는 그들은 ‘말씀 환경’으로 꽉 차 있는 곳에 있어 굳이 자신의 벗은 몸이 신경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범죄하고 난 뒤에는 드디어 자기 몸에 대해서 독자적으로 신경 쓰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전에 꽉 차 있던 말씀이 환경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환경을 따로 만들고자 시도하게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문제 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 언약으로 완성된 환경을 준비하셔서 더는 성도가 자신의 행함에 대해서 모습에 신경쓰지 않게 해주시려는 겁니다.
그 방식이 바로 솔로몬을 마네킹으로 삼아서 아버지 다윗이 보여준 환경이 ‘결과적 형태’로 솔로몬에게 덮치게 해주십니다. 그 내용이 바로 심판과 자비입니다. 솔로몬 왕이 지나가면서 이스라엘 하나의 이스라엘이 두 개의 이스라엘로 분리됩니다.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나라가 그것입니다.
이는 솔로몬의 나라가 두 조각으로 갈라진다는 것은 곧 솔로몬 자체가 두 조각 난 것으로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모든 인간이 자신을 원인으로 간주하고서는 모호하고 관념적이고 비 현실적인 바를 관념적으로 희망하고 있음을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일단 ‘결과’부터 먼저 내어놓아 그것 자체가 지독한 현실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언약 자체는 극단적인 실용성으로 전개되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의 결과가 아니라 그 결과를 통해서 두 개의 원인을 살펴보게 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시도가 원인으로 개입되는 것, 다른 하나는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시행하시는 원인. 이 두 가지 원인이 두 가지의 상반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두 개의 솔로몬 나라’입니다. 하나는 저주의 결과를, 다른 하나는 자비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유다 나라는 ‘다윗의 등불’이 살아 있습니다.
솔로몬 개인적 입장에서 그는 아버지의 유지를 거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왕을 속인다면요? 과연 솔로몬 왕의 왕 자리를 사의하겠습니까? 그만 놓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어떻게 된 그 우상 섬기는 백성마저 껴 안아서 이스라엘 자체가 지켜내려고 할 겁니다.
그런데 하늘의 왕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백성들로부터 도리어 배척받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백성들과 헤어졌습니다. 과연 누가 구원될 자인가 하는 것은 예수님 관점에서 자신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자에 한합니다. 자신의 원인성, 즉 자율성을 포기하고 현재 자신의 모든 것은 주님의 자비의 결과임을 아는 자들이 참된 다윗 언약에 속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처럼 언약에 의해서 동일한 단절면을 가진 자들이 바로 주님의 증인으로서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보는 우리 자신의 자리가 저주의 자리임을 알게 하옵소서. 또한 그 저주에 예수님의 피가 묻어 있음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수요설교(241113)요약 열왕기상 2장 1-4절(언약의 마네킹)
수요 설교 요약을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냐 하면, 솔로몬은 다윗 언약에서 배제되어야 비로소 다윗 언약의 실체가 드러난다고 했어요. 이스라엘 역사가 지상에 펼쳐지더라도, 천년 가까이 펼쳐지더라도, 왕의 역사는 다윗과 솔로몬, 그 둘로 끝났어요.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유일하게 이스라엘이 하나였습니다.
그럼, 사울은 뭐냐? 사울은 왕이 아니에요. 왜 왕이 아니냐? 지상에서 올라온 거기 때문에, 인간에서 나온 왕이기 때문에, 그 안에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있는 왕은 다윗 언약이 최초입니다. 왜냐 하면, 부산강의에서 이야기했듯이, 다윗은 기름 부을 때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없었는데, 없는 자에게 기름을 부어버리죠.
인간의, 심지어 선지자의 판단까지 전부 다 주님께서는 배제해버리고, 배제하는 거예요. 솔로몬이 다윗 언약의 진수로부터 배제당할 때, 비로소 아버지 다윗 언약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그 배제하는 방식이, 솔로몬 마지막 말년에 우상이란 우상은 다 이스라엘 곳곳에 세워집니다. 솔로몬이 좋아서 그렇게 한 게 아니에요.
솔로몬이 무엇을 못했느냐 하면, 왕 사표를 못 내서 그래요. 사표를 못 냈어요. 권력의 맛이 그런 거예요. 지지율이 5%라도 사표 안냅니다. 쫓겨 갈지언정 사표 내는 건 없어요. 솔로몬이 사표를 낼 이유가 없는 게, 내가 이스라엘 왕이니까, 이스라엘이 존재해야 내가 왕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 우상 섬기는 사람들까지 아울러서 자기가 보듬어주려고 한 거예요.
그런데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있으려면 주변으로부터 전쟁이 없어야 자기가 평강의 왕이 돼요. 전쟁이 멈춰야 돼요. 멈추려고 그들과 결혼 계약을 한 겁니다. 결혼하다보면, 주변 나라 공주들이 시집을 올 게 아니겠습니까? 본처가 300이고, 첩이 700이고, 토탈 천 명이니까. 그들이 올 때, 추억을 버리고 오겠어요?
‘나의 살던 고향’ 다 들고 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옛날 자기 고향에서 섬기던 신들을 다 가지고 온단 말이죠. 그런데, 왕권이 강화되어야 질서가 유지되잖아요. 그래서 왕권이 강화되려면 옆에 있는 공주의 출신 나라와 외교적으로 안정이 되어야 나라의 번영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솔로몬이 그들 마음속의 요구 사항을 어쩔 수없이 들어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 일을 쭈욱 하면서 결국 나중에 솔로몬이 잠언이나 전도서에 보면, 솔로몬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다윗의 아들이 쓴 지혜다.” 그건 뭐냐? 헛되고, 헛되며, 만사가 헛되다. 헛되지 않은 것은 바로 다윗에게서 받은 그 약속은 헛되지 않고 계속해서 진행된다.
나는 헛되다. 헛되면서 알게 된 지혜는 내가 망하면서 비로소 내가 내 실정, 내가 제대로 왕 짓을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잠언서에 보면, ‘왕이란 뭐냐?’가 쭉 나와 있어요. 자기가 실천에 못 옮겼음을 체득하면서 쫘악 거기에 왕이란 이래야 되고, 이래야 되고, 자비와 공의를 행해야 되고, 쭈욱 이렇게 해야 되고.. 내가 그걸 해 볼라고 전도서에 보면 많은 책을 보고, 많은 좋은 관계를 했지만, 인간이 하는 것은 다.. 의로운 인간이나 악한 인간이나 끝은 똑같이 끝나더라. 죽는 데는 차이가 없더라는 거예요.
나중에 허리 부러지고, 귀 안 들리고..전도서에 나오죠?(전12:3~4-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인간은 똑같이 허무하단 사실을 내가 그렇게 공부를 해도 왜 몰랐었는가?
이게 실제로 그 자리에 내가 앉을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 내가 낄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때, 내가 성도라는 자리에 낄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때, 성도입니다. 이게 바로 성도예요. 왜? 더 이상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우기 때문에. 이것은 자기의 못남을 안 경우에서만,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을 아는 경우에만 튀어나오기 때문에, 그게 바로 잠언이고, 전도서인데, 그것이 바로 신약의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다 이루어지거든요.
그러면, 솔로몬 이후의 왕들은 뭐냐? 다윗 언약에 두 가지 속성이 있는데, 하나는 공의로움과 그리고 아주 잔인한 심판과 그리고 모든 것을 용납하는 너그러운 자비심,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성격이 다윗 언약 안에 들어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저주 받아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간은 심판의 대상인데, 주께서는 다윗 언약을 포함하기 때문에 부활되고 난 뒤에는 예수님이 자비를 베풀어서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자비로써, 사랑으로써 건지는 그 작업도 다윗 언약 속에 들어있어요.
그래서 이 다윗의 후손에게는 자비로움이 있어서 문둥병 환자들이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잖아요. 그래서 그 두 가지 요소가 솔로몬으로서 이미 이스라엘 역사는 끝났어요. 이제 남아있는 것은 깨어진 이스라엘 역사, 두 개의 역사 가운데서, 다윗 언약 안에 들어있던 속성이 두 개의 실질적인 이스라엘 멸망할 때까지의 역사가 두 노선으로 이어집니다.
노선이 쭉 이어진다고요. 다윗의 시작을 BC천년으로 보면, 이스라엘, 유다가 망한 것이 BC586년, 많이 봐줘야 500년 정도, 많이 봐줘도 그것밖에 안돼요. 쭉 속성을 쏟아내면서 이어져 가고 있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두꺼운 종이를 강제로 큰 칼날로 수천 장을 잘라버리면 단면이 나오죠.
이제 남은 것은 뭐냐?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에서 둘로 쪼개짐으로서 그 단면에서 하나는 저주받는 나라, 하나는 자비로운 나라로 두 단면성을 보여주면서 이스라엘 역사는 점점 역사 속에서 없어지고 마는 거예요. 그래서 솔로몬, 다윗, 다윗과 솔로몬 사이에 그 사이에서 모든 것이 다윗 언약이 압축이 되면서, 나머지는 성전도 이제는 망가지고 전부 다 비실비실 안개처럼 없어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런데 남쪽에는 뭐냐? 다윗의 등불이 있는 거예요, 다윗의 등불. 다윗의 등불이 있는 유다는 약 170년 이상 더 오래 가요. 백만 한 번, 백만 두 번, 밧데리가 좀 더 오래 가요. 오래 가면서 특징이 뭐냐, 오래 가는 이유가 뭐냐? 유다나라, 남쪽 나라의 특징은 쿠데타가 별로 없고, 항상 왕이 못나도, 혈통적인 다윗과 솔로몬 그 계통으로 왕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 혈통, 다윗 혈통은 비록 못났지만, 혈통을 꾸준하게 주께서 야무지게 붙든다는 것은 장차 메시아가 이 혈통대로 온다는 거예요. 이걸 볼 때, 제가 어제 수요설교에서 내린 결론은 이겁니다. “극단적인 실용성”이라고 표현한 거예요. 극단적인 실용성.
말씀은 우리가 지켜서 나오는 결과가 아니라 결과부터 먼저 주고, 그 결과의 원인을 추적해보면 두 개가 나와요. 하나는 북이스라엘처럼 내가 잘 해보려고 하는 것, 또 하나는,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은총의 결과다. 이 두 개를 오늘날 성도는 둘 다를 알고 있을 때, 성도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실용성입니다.
내가 나를 말씀 지켜서 지켜낸 게 아니라, 주의 말씀의 결과물로 우리가 존재하는 거예요. 그래서 두 가지 면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야 되는데, 방법은 십자가 사건, 다윗 언약에 보면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매일같이 절단합니다. 한 번 보여줄까요? 빵 잘린 거. 사진이 있으면 좋은데..잘라진 빵의 단면이 보이는 겁니다. 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