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마네킹
2024년 11월 13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2:1-4
(2:1)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2:2)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2:3)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2:4)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죽을 사람이 죽기 전에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유언입니다. 하지만 본인이 죽고 난 뒤에 살아 있는 사람이 자기 부탁을 안 들어주면 어쩔건데요? 그래서 유인을 듣는 사람들은 그저 죽어가는 사람이 죽어가면서 희망사항을 한 것으로 여겨서 참조할 뿐입니다. 즉 죽은 사람이 아무리 대단한 업적을 남겨도 그 영향은 제한 적입니다.
하지만 과연 다윗언약에 대해서 그러할까요? 쉽게 무시해도 될 유언일까요? 아닙니다. 히브리서 9:16-17에 보면,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언약을 유언으로 남기는 관계에서는 산 사람이 도리어 그 유언에 매여버리게 됩니다.
솔로몬은 본의 아니게 아버지 유언에 묶여버린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스스로 고독을 자처해야 될 일입니다. 살아가면서 그 어떠한 산 사람들을 만난다 할지라도 솔로몬은 죽은 아버지 다윗과 상대해야 합니다. 다윗 언약에 족쇄 채인 겁니다. 솔로몬은 자기에게 뒤집어쓰게 된 운명을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자율성? 자기 의견? 용납되지 않습니다. 죽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죽은 다윗과 결별할 입장이 못됩니다. 솔로몬 곁에는 늘 아버지의 유언이 함께 합니다. 이 원리는 신명기 17장에 나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신 17:18-20)
이 신명기 말씀은, 왕이 된 자가 다른 형제를 대하면서 교만스러운 것을 지적해 줄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있어 왕이란 하나가 아니고 둘입니다. 한 분은 하나님 품에 계신 독생자이시고 다른 한 사람은 지상의 이스라엘에 나타난 왕입니다. 이 지상의 왕은 일종의 하늘의 왕의 마네킹 역할을 위하여 세워졌습니다.
실질적인 이스라엘의 왕은 왕 옆에서 말씀으로 조종하는 그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왕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의 말씀, 곧 천상의 왕의 행하심을 가리지 않는 역할입니다. 교만이란 하늘의 왕되심을 가리는 것을 뜻입니다. 과연 솔로몬은 이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를 우리는 살펴야 합니다.
열왕기상 11:2-5에 보면,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 왕은 후비가 칠백 인이요 빈장이 삼백 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솔로몬 왕은 변질되었을까요? ‘변질’이란 이미 인간 본래의 속성화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25에,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3:7에는,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여기 몸이 있는데 ‘벗은 몸’으로 있다”는 것이 인간의 시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벗은 몸에 대해서 네가 왜 보고 있느냐?”라고 문제 삼으십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뒤에 달라진 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에는 그들은 ‘말씀 환경’으로 꽉 차 있는 곳에 있어 굳이 자신의 벗은 몸이 신경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범죄하고 난 뒤에는 드디어 자기 몸에 대해서 독자적으로 신경 쓰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전에 꽉 차 있던 말씀이 환경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환경을 따로 만들고자 시도하게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문제 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 언약으로 완성된 환경을 준비하셔서 더는 성도가 자신의 행함에 대해서 모습에 신경쓰지 않게 해주시려는 겁니다.
그 방식이 바로 솔로몬을 마네킹으로 삼아서 아버지 다윗이 보여준 환경이 ‘결과적 형태’로 솔로몬에게 덮치게 해주십니다. 그 내용이 바로 심판과 자비입니다. 솔로몬 왕이 지나가면서 이스라엘 하나의 이스라엘이 두 개의 이스라엘로 분리됩니다.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나라가 그것입니다.
이는 솔로몬의 나라가 두 조각으로 갈라진다는 것은 곧 솔로몬 자체가 두 조각 난 것으로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모든 인간이 자신을 원인으로 간주하고서는 모호하고 관념적이고 비 현실적인 바를 관념적으로 희망하고 있음을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일단 ‘결과’부터 먼저 내어놓아 그것 자체가 지독한 현실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언약 자체는 극단적인 실용성으로 전개되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의 결과가 아니라 그 결과를 통해서 두 개의 원인을 살펴보게 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시도가 원인으로 개입되는 것, 다른 하나는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시행하시는 원인. 이 두 가지 원인이 두 가지의 상반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두 개의 솔로몬 나라’입니다. 하나는 저주의 결과를, 다른 하나는 자비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유다 나라는 ‘다윗의 등불’이 살아 있습니다.
솔로몬 개인적 입장에서 그는 아버지의 유지를 거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왕을 속인다면요? 과연 솔로몬 왕의 왕 자리를 사의하겠습니까? 그만 놓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어떻게 된 그 우상 섬기는 백성마저 껴 안아서 이스라엘 자체가 지켜내려고 할 겁니다.
그런데 하늘의 왕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백성들로부터 도리어 배척받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백성들과 헤어졌습니다. 과연 누가 구원될 자인가 하는 것은 예수님 관점에서 자신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자에 한합니다. 자신의 원인성, 즉 자율성을 포기하고 현재 자신의 모든 것은 주님의 자비의 결과임을 아는 자들이 참된 다윗 언약에 속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처럼 언약에 의해서 동일한 단절면을 가진 자들이 바로 주님의 증인으로서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보는 우리 자신의 자리가 저주의 자리임을 알게 하옵소서. 또한 그 저주에 예수님의 피가 묻어 있음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수요설교(241113)요약 열왕기상 2장 1-4절(언약의 마네킹)
수요 설교 요약을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냐 하면, 솔로몬은 다윗 언약에서 배제되어야 비로소 다윗 언약의 실체가 드러난다고 했어요. 이스라엘 역사가 지상에 펼쳐지더라도, 천년 가까이 펼쳐지더라도, 왕의 역사는 다윗과 솔로몬, 그 둘로 끝났어요.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유일하게 이스라엘이 하나였습니다.
그럼, 사울은 뭐냐? 사울은 왕이 아니에요. 왜 왕이 아니냐? 지상에서 올라온 거기 때문에, 인간에서 나온 왕이기 때문에, 그 안에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있는 왕은 다윗 언약이 최초입니다. 왜냐 하면, 부산강의에서 이야기했듯이, 다윗은 기름 부을 때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없었는데, 없는 자에게 기름을 부어버리죠.
인간의, 심지어 선지자의 판단까지 전부 다 주님께서는 배제해버리고, 배제하는 거예요. 솔로몬이 다윗 언약의 진수로부터 배제당할 때, 비로소 아버지 다윗 언약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그 배제하는 방식이, 솔로몬 마지막 말년에 우상이란 우상은 다 이스라엘 곳곳에 세워집니다. 솔로몬이 좋아서 그렇게 한 게 아니에요.
솔로몬이 무엇을 못했느냐 하면, 왕 사표를 못 내서 그래요. 사표를 못 냈어요. 권력의 맛이 그런 거예요. 지지율이 5%라도 사표 안냅니다. 쫓겨 갈지언정 사표 내는 건 없어요. 솔로몬이 사표를 낼 이유가 없는 게, 내가 이스라엘 왕이니까, 이스라엘이 존재해야 내가 왕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 우상 섬기는 사람들까지 아울러서 자기가 보듬어주려고 한 거예요.
그런데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있으려면 주변으로부터 전쟁이 없어야 자기가 평강의 왕이 돼요. 전쟁이 멈춰야 돼요. 멈추려고 그들과 결혼 계약을 한 겁니다. 결혼하다보면, 주변 나라 공주들이 시집을 올 게 아니겠습니까? 본처가 300이고, 첩이 700이고, 토탈 천 명이니까. 그들이 올 때, 추억을 버리고 오겠어요?
‘나의 살던 고향’ 다 들고 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옛날 자기 고향에서 섬기던 신들을 다 가지고 온단 말이죠. 그런데, 왕권이 강화되어야 질서가 유지되잖아요. 그래서 왕권이 강화되려면 옆에 있는 공주의 출신 나라와 외교적으로 안정이 되어야 나라의 번영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솔로몬이 그들 마음속의 요구 사항을 어쩔 수없이 들어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 일을 쭈욱 하면서 결국 나중에 솔로몬이 잠언이나 전도서에 보면, 솔로몬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다윗의 아들이 쓴 지혜다.” 그건 뭐냐? 헛되고, 헛되며, 만사가 헛되다. 헛되지 않은 것은 바로 다윗에게서 받은 그 약속은 헛되지 않고 계속해서 진행된다.
나는 헛되다. 헛되면서 알게 된 지혜는 내가 망하면서 비로소 내가 내 실정, 내가 제대로 왕 짓을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잠언서에 보면, ‘왕이란 뭐냐?’가 쭉 나와 있어요. 자기가 실천에 못 옮겼음을 체득하면서 쫘악 거기에 왕이란 이래야 되고, 이래야 되고, 자비와 공의를 행해야 되고, 쭈욱 이렇게 해야 되고.. 내가 그걸 해 볼라고 전도서에 보면 많은 책을 보고, 많은 좋은 관계를 했지만, 인간이 하는 것은 다.. 의로운 인간이나 악한 인간이나 끝은 똑같이 끝나더라. 죽는 데는 차이가 없더라는 거예요.
나중에 허리 부러지고, 귀 안 들리고..전도서에 나오죠?(전12:3~4-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인간은 똑같이 허무하단 사실을 내가 그렇게 공부를 해도 왜 몰랐었는가?
이게 실제로 그 자리에 내가 앉을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 내가 낄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때, 내가 성도라는 자리에 낄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때, 성도입니다. 이게 바로 성도예요. 왜? 더 이상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우기 때문에. 이것은 자기의 못남을 안 경우에서만,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을 아는 경우에만 튀어나오기 때문에, 그게 바로 잠언이고, 전도서인데, 그것이 바로 신약의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다 이루어지거든요.
그러면, 솔로몬 이후의 왕들은 뭐냐? 다윗 언약에 두 가지 속성이 있는데, 하나는 공의로움과 그리고 아주 잔인한 심판과 그리고 모든 것을 용납하는 너그러운 자비심,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성격이 다윗 언약 안에 들어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저주 받아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간은 심판의 대상인데, 주께서는 다윗 언약을 포함하기 때문에 부활되고 난 뒤에는 예수님이 자비를 베풀어서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자비로써, 사랑으로써 건지는 그 작업도 다윗 언약 속에 들어있어요.
그래서 이 다윗의 후손에게는 자비로움이 있어서 문둥병 환자들이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잖아요. 그래서 그 두 가지 요소가 솔로몬으로서 이미 이스라엘 역사는 끝났어요. 이제 남아있는 것은 깨어진 이스라엘 역사, 두 개의 역사 가운데서, 다윗 언약 안에 들어있던 속성이 두 개의 실질적인 이스라엘 멸망할 때까지의 역사가 두 노선으로 이어집니다.
노선이 쭉 이어진다고요. 다윗의 시작을 BC천년으로 보면, 이스라엘, 유다가 망한 것이 BC586년, 많이 봐줘야 500년 정도, 많이 봐줘도 그것밖에 안돼요. 쭉 속성을 쏟아내면서 이어져 가고 있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두꺼운 종이를 강제로 큰 칼날로 수천 장을 잘라버리면 단면이 나오죠.
이제 남은 것은 뭐냐?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에서 둘로 쪼개짐으로서 그 단면에서 하나는 저주받는 나라, 하나는 자비로운 나라로 두 단면성을 보여주면서 이스라엘 역사는 점점 역사 속에서 없어지고 마는 거예요. 그래서 솔로몬, 다윗, 다윗과 솔로몬 사이에 그 사이에서 모든 것이 다윗 언약이 압축이 되면서, 나머지는 성전도 이제는 망가지고 전부 다 비실비실 안개처럼 없어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런데 남쪽에는 뭐냐? 다윗의 등불이 있는 거예요, 다윗의 등불. 다윗의 등불이 있는 유다는 약 170년 이상 더 오래 가요. 백만 한 번, 백만 두 번, 밧데리가 좀 더 오래 가요. 오래 가면서 특징이 뭐냐, 오래 가는 이유가 뭐냐? 유다나라, 남쪽 나라의 특징은 쿠데타가 별로 없고, 항상 왕이 못나도, 혈통적인 다윗과 솔로몬 그 계통으로 왕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 혈통, 다윗 혈통은 비록 못났지만, 혈통을 꾸준하게 주께서 야무지게 붙든다는 것은 장차 메시아가 이 혈통대로 온다는 거예요. 이걸 볼 때, 제가 어제 수요설교에서 내린 결론은 이겁니다. “극단적인 실용성”이라고 표현한 거예요. 극단적인 실용성.
말씀은 우리가 지켜서 나오는 결과가 아니라 결과부터 먼저 주고, 그 결과의 원인을 추적해보면 두 개가 나와요. 하나는 북이스라엘처럼 내가 잘 해보려고 하는 것, 또 하나는,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은총의 결과다. 이 두 개를 오늘날 성도는 둘 다를 알고 있을 때, 성도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실용성입니다.
내가 나를 말씀 지켜서 지켜낸 게 아니라, 주의 말씀의 결과물로 우리가 존재하는 거예요. 그래서 두 가지 면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야 되는데, 방법은 십자가 사건, 다윗 언약에 보면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매일같이 절단합니다. 한 번 보여줄까요? 빵 잘린 거. 사진이 있으면 좋은데..잘라진 빵의 단면이 보이는 겁니다. 끝입니다.
■ 4강-열왕기상 2장 1-4절(언약의 마네킹) 24111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2장 1절입니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찌라,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아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자식에게 유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부모 자식 간에는 아버지가 어떤 유언을 하든 거부권은 자식한테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돌아가시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고 살아있는 것은 자식이니까 아무리 아버지의 돌아가시면서 신신당부한 부탁이라도 자식이 아니라 하면 아닌거죠.
“내 죽고나면 절대로 화장하지 마라.” 부모가 그렇게 유언해도 자식은 그런 것 안 통합니다. 화장하지요. 매장하지 않고 화장합니다. 나중에 벌초 누가 할건데. 그 벌초 담당 누가 할건데... 감당 못 하잖아요. 그래서 지금 다윗이 솔로몬에게 당부를 하는데 다윗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왕이 되게 하신 사람이에요. 따라서 솔로몬은 거부권이 없습니다.
다윗이 하는 그것을 그대로 이어받는 거죠. 올림픽에 400m 릴레이 할 때 네 명의 주자가 달리면서 첫 번째 주자, 두 번째 주자, 세 번째 주자, 마지막 주자까지 뭐를 전달하느냐 하면, 바톤을 전달하죠. 그 바톤을 만약에 도중에 놓쳐버렸다. 그러면 그 게임에서 메달은 물 건너 간 겁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어쩔 수 없는,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고 말았어요. 요즘 사람 같으면 아버지가 자식에게 뭘 이야기하고, “니가 교회 가도 교회 잘 다니고 꼭 예수 믿어라”하면, 자식들이 가신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예, 걱정하지 마시고 아버지나 편한데 가세요.” 해놓고는 장례식 끝나고 부조 받고 그다음부터는 교회 안 나오죠.
“교회 나오고 안 나오고, 믿고 안 믿고는 이거는 내 결정이다”라는 겁니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하나의 참조 사항은 될지언정, 나의 인생을 주관하는 실질적인 현실로서는 자식들이 안 받아 줍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의 현실은 내가 만드는 것이지 죽은 아버지가 이미 확정 지어진 그러한 현실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그냥 부탁하는 걸로 그치고 사라지시고, 이제부터는 내 인생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그러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이 솔로몬에게 세 가지를 부탁했어요. 첫 번째는 뭐냐 하면, “니가 어딜 가든지 하나님의 모세의 율법대로 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신명기 17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신명기 17장, 14절에서 20절 길게 나오는 말씀이지만, 제가 이렇게 축약해서 말씀드리면, “만약에 이스라엘 가운데 왕이 있다면 그 왕은 평생에 자기 옆에다가 율법 책을 옆에 두고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율법의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에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명령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라.” 방금 제가 말씀한 게 신명기 17장 18절에서 19절 말씀이에요.
여기에 율법 책을 옆에 두는 이유가 뭐냐 하면, 여기 신명기 17장 20절에 의하면, “그리하면, 그 형제 중에서 마음이 교만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왕 되었다고 건방 떠는 일이 없게 된다는 거에요. 그러면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다윗은 비록 죽었지만 다윗이 하는 그 말은 솔로몬 옆에서 다윗이 안 죽었다가 돼요. 솔로몬 지금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은 아버지의 말씀이 바로 율법처럼, 율법처럼이 아니고 율법이에요. 언약이니까. 율법으로서 옆에서 자기를 지금 압박하고 있는 겁니다. 통제하고 있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니는 이제 죽었어. 니는 니 마음대로 못해. 니는 내가 말하는 상황 속에 가두어졌어. 꼼짝 마라야, 너는 이제부터.”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솔로몬은 아버지가 설정한 그 고독을 본인이 물려받아야 돼요. 그 고독함.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알고부터 고독하지 않던가요? 무슨 친구가 그렇게 많은지, 고독을 못 느꼈습니까? “내 친구 내가 결정한다.” 이게 고독입니까? 아니죠.
“내가 사귀고 싶은 사람 내가 정한다.” 이건 고독이 아닙니다. 내 결정권이 있고 내 자율권이 있어요. 그러나 성도한테는 결정권도 없고 선택할 여지도 박탈당하고, 그냥 하나님의 유언대로, 예수님의 유언대로 십자가 그 새 언약, 히브리서에서는 유언이라 되어있거든요. 예수님의 유언대로 “꼼짝 마라”하는 지경에 놓여있는 것이 바로 성도며, 이 말은 예수님의 유언에서 새롭게 창조된 자가 성도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 졌습니다. 이제는 그 주님의 복된 말씀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주님이 우리를 데려가고자 한 천국에서 탈출 불가입니다.
천국에서 벗어나 지옥 가고 싶어도 우리 마음 대로 안 됩니다. 이 말씀이, 주의 유언이 내 행동 거지를 모두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솔로몬이라고 합시다. 사실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를 솔로몬으로 다 만들어 놨는데, 솔로몬이라고 칩시다. 솔로몬이 어떤 생각을 갖느냐 하면, 솔로몬도 자기의 고집이 있잖아요. 지 하고싶은 대로 사는 충동 같은게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돌아가시면서 내하고 뭐 의논하거나 상의한 것도 없이 그냥 한쪽에서 “너의 운명은 이렇게 결정됐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너는 이렇게 살아야 돼.”라고 도장 빵빵 찍듯이 이미 자기 인생은 없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정해놓은 인생대로 갈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솔로몬이고 우리가 현장에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갖게 되느냐 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의 뜻이 진리고 맞는 말이기 때문에, 내가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지키겠나이다.” 그런 마음이 들거죠. 든다 이 말이죠. 그렇게 들었다면 솔로몬은 지금 아버지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솔로몬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라는 그것이 아버지의 깊은 취지를 전혀 모르고 하는 이야기에요. 더 정확하게 말해서 “너에게 준 말씀이 살기 위해서는 너는 이 말씀으로부터 배제 되어야 한다. 내가 준 말씀으로 배제될 때 비로소 너는 이 아버지가 준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서 안다”는 거에요.
이거는 여러분 아시다시피 솔로몬이 자기가 통치의 마지막에 결국 많은 우상을 끌어 땡겼잖아요. 많은 우상을... 왜 솔로몬이 말년에 통치하면서 우상섬기지 말고 여호와를 섬기라고 당부했는데 뭐 우상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엄청난 우상이 이스라엘 곳곳에 세워집니다. 우리가 그 성경 열왕기상을 쭉 보면서, 그렇게 똑똑하고 지혜롭고 믿음 좋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응답받을 정도로, 그리고 재판할 때도 하나님의 뜻대로 재판할 정도로, 그리고 시바 여왕까지, 남방여왕까지 와서 지혜를 칭찬하고 “이건 하나님이 당신한테 주신 것이라”했는 그 솔로몬이 왜 망가져도 그렇게 형편없이 망가졌는지 우리가 열왕기상을 보면서 그게 이상하지 않던가요? 그게 의심스럽지 않던가요?
너무 부요해서 교만했나? 너무 아는 게 많아서 까불었나? 지식과 지혜가 넘쳐서 그게 감당이 안 돼서 그렇게 우상 섬기고 이스라엘을 엉망으로 만들었을까? 왜, 그 해답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에요. 솔로몬이 왜 그렇게 그렇게 엉망진창 되었느냐 이 말이죠. 대통령 통치 말기에 권력의 해이함이 발생되었는지... 그 이유는 하나님의 왕이 하나님께서 2명의 왕을 세웠기 때문에, 2명의 왕... 한 분의 왕은 하늘나라에 숨어있어요. 예수 그리스도. 숨어있고 하나의 왕은 숨어있는 왕이 나타나기 전에 ‘가라’로, 일본 말로 ‘가짜’로, 왕 흉내 내기로, 마네킹 용도로 이스라엘에게 왕을 다윗 후손을 통해서 줄줄이 마네킹들을 세워놓았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솔로몬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말씀대로 살고 싶어요. 그런데 그 현장에 우리가 왕이라고 돼 보세요. 우리는 이런 오해를 해요.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하게 되면 백성들은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왕이기 때문에 백성들은 나를 존경하고 참된 왕으로 인정해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 쉽잖아요. 처음에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 교회 처음 나오면, 이제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면 세상에 나가서 하는 내 일이 몽땅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는 그런 오해들을 하잖아요. 만사형통 하던가요?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왕을 백성들이 싫어한다는 걸 생각 해야 돼요. 솔로몬 왕이 백성들에게 속아 넘어간다면, 그때 솔로몬 왕은 어떤 대처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거에요. 솔로몬 왕이 하나님 말씀대로, 나중에 나옵니다만, 기도할 때 솔로몬 왕의 기도에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이 많은 백성을 저 혼자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대로 다스리게 해주옵소서.”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니가 너의 건강과 너의 원수가 빨리 죽는 것과 부귀 영화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하는 방식으로 통치하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그대로 빼다 박은 마네킹으로 그런 식으로 하겠다는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 니 소원대로 해주겠다.”라고 해서 지혜를 준거에요.
그럴 때 솔로몬은, 내가 왕 되는 것에 어떤 자신감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거는 지 혼자 자신감이고 백성들의 생각이 엉뚱한 데 가 있다면 여러분은 왕으로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1번, 왕 사퇴한다. “지지율 20퍼센트도 안 되는데 대통령 때려 치울란다.” 자, 이렇게 해서 왕 사퇴한다. 2번, 끝까지 백성들을 내 뜻대로 밀어붙인다. 몇 번이겠습니까? 솔로몬이 몇 번했습니까? 2번을 한 거에요. 그게 솔로몬의 잘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퇴했어요. 예수님의 왕되심은 아주 노골적으로 유대 백성들이 예수님의 왕 됨을 얼마나 지독하게 싫어하는지를 예수님은 온몸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3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너의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되어있죠. 그 말씀. 버스 정류장에 보면 그런 것 많이 붙어 있잖아요. 그 근처 큰 교회에서 돈 들여서 해 놨잖아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너의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데 그 말씀에 오해하기를 “내가 예수 잘 믿고 기도 열심히 하면 내 집안 식구들이 나를 따라서 예수 믿는다.”라는 생각을 가질 거에요. 이게 바로 솔로몬의 오산이고, 인간들의 오산입니다.
정작 아버지의 옴팍, 100퍼센트 아버지의 뜻으로 오신 우리의 왕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한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떤 것도 예수님의 마음처럼 된 사람 한 명도 없어요. 왜 그러냐? 그게 바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준 하나님의 말씀이요 언약입니다. 이 점을 제가 쉽게 하기 위해서 예를 들겠습니다. 종이 만드는 제지공장에서, a4 용지를 이렇게 뭉치로 나올 때 한 장에다가 딱 맞춰 가지고 칼 가지고 자르고 이러지는 않죠.
한 천장, 2천 장, 2천 장이 뭡니까, 한 5천 장 놓고 날카로운 칼날로 한꺼번에 힘주어서 한꺼번에 싹둑하고 잘라버리죠. 자르면 뭐가 나오냐 하면, 그 잘린 5천 장의 종이는 그게 얇지만, 얇은 폭이 있지만 폭 은 동일한 칼날이 지나갔다는 단면을 보여줄 거에요. 다윗 언약은 강제로 여러 사람 볼 것 없이 한꺼번에 폭력을 써서 잘라버리는 칼날과 같은 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그 언약에 베임을 당한 사람은 똑같은 단면을 지니게 되어있어요. 똑같은 단면. “나는 하나님 말씀을 오해했다. 착각했다. 잘못했다. 너는?” “나도 착각했는데? 너는?” “너도 착각했어? 우리끼리 뭘 착각했지?” “내가 말씀대로 살게 되면 이제부터는 내가 주변 환경은 내 뜻대로 될 것이다”라는 것. 그 내 뜻대로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그 내 뜻이라는 것을 딱 들고 와서 내 뜻을 잘라버려요. 말씀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 말씀 지킨다고 너 뜻대로 되는 게 아니야. 그런데 인간은 타고난 게 자기 뜻이, 타고났으니까 너가 지키면 너 뜻대로 잘 될 것이 아니라, 너부터 먼저 말씀으로 두 동강 쪼개지자. 그걸 솔로몬이, 인생을 통해서 솔로몬이 그걸 보여주는 거에요. 솔로몬이.
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창세기 2장과 3장에 보면, 특히 창세기 2장에 보면, 그 창세기 2장에서 끝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했다.라고 되어있어요. 아담과 이브, 남자와 여자가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거에요.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제일 먼저 아담과 이브에게 생긴 현상은 여러분 아시다시피 “벗은 몸을 알고 가리웠더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자, 이것을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쉽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몸이 있다. 몸이 여기 있다. ‘몸이 있다’에 대해서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의 몸이 있는데 이 몸을 딱 보니까 자기가 벗었거든요. 그러니까 ‘몸이 있는데 벗은 몸으로 있다.’ 이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뒤에 생긴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그 다음에 나타났잖아요. 나타나서 이야기 하신 게 그거에요. “너희들은 벗은 몸을 너가 보고 있다.” 이렇게 지적한 거에요.
그 차이점이 뭐냐? 아담과 하와는, “어, 내가 몸이 벗어 있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담과 하와의 이미 범죄하고 난 뒤에 몸에 나타난 현상이라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야. 왜 니 몸이 벗었다는 것에 대해서 니가 왜 신경 쓰고 관심 있게 그걸 보느냐?”하고 그걸 따지는 거에요. 여기 어떤 차이가 있어요. 어떤 차이냐 하면, 전에는 둘이 벌거벗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환경 속에 있기 때문에 말씀이라는 환경 속에서는 굳이 자기가 옷을 입었든 벗든 그게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어요. 말씀이 꽉 차 있고 말씀이 나를 다스리는 차원이기 때문에,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는 입장이기 때문에 내 몸이 입었냐 벗었냐는 이거는 관심 둘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이게 자립심이 생겨서 독자적인 생각이 들어서, “아이고. 이게 벗었네.” 이렇게 돼서 자기가 자기를 방어하고 자기가 자기 자신을 수세에 몰렸다고 생각하는 것. 어떤 수치감을 느낀다는 것은 뭐가 빠졌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빠져버린 거에요. 이 환경 자체가 말씀 없는 환경, 그 말씀 없는 환경을 저주스럽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환경,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환경. 내가 스스로 나를 추슬러야 숨 쉬는 어느 정도로 견딜만한 환경,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는 타락되었다고 하는데, 저는 이렇게 보겠습니다. ‘변질 되었다.’ 타락보다도 변질 된 거에요. 밥이 쉬었다고 하죠. 잡채도 안 먹고 오래 놔두면 쉬잖아요. 못 먹잖아요. 하나님이 다룰 수 없는 대상. “갖다버려. 갖다버려. 갖다버려.” 왜? 그 인물 그 몸인데 안 돼요. 왜? 하나님의 언약이 없고 말씀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담에게 약속한,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 약속을 한 것은 뭐냐 하면, 마지막에 언약이 뭐냐? 인간은 손 안돼도 환경 자체가 홀라당 바뀌는 그 환경 바뀜 안에서 굳이 나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더라도 천국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환경으로 바꾸어주겠다는 것이 아버지 다윗에게 준 말씀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아버지 말씀대로 살고 싶어요. 그렇게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 때문에 내가 왕이 되었는데 의리상 배척할 수 없지만, 백성이 우상을 섬기는데 어떻게 합니까? 우상을 섬기겠다는데. 백성이 여호와보다 우상이, 다른 신이 더 좋다는데 어떻게 할 거에요? 예수님처럼 백성한테 얻어맞을 그러한 용기 있습니까, 솔로몬이?
없어요. 그거는 예수님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돼요. 솔로몬은 그냥 마네킹 왕이에요. 진짜 왕은 하늘나라에 하나님의 품 안에 아들, 독생자 아들이 진짜 아들이고, 이스라엘 왕이고, 그분은 이스라엘 왕으로 오셨다고요. 예수님 오실 때 그냥 오신게 아니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어요. 이스라엘 왕은 조건이 붙어요. 다윗에게 준 율법과 말씀대로 온전히 이룰 때에만 이스라엘 왕이 돼요. 근데 예수님 오시기 전에 어떤 인물도 이스라엘 왕이 아닙니다. 그들이 왜 왕이 되었는가?
‘왕이 아니다’는 것, 하나님의 왕 돼야 될 조건, 다윗 언약과 비교해볼 때 절대로 이거는 오래가지 않는 왕이라는 것을 예수님 오실 때까지 마네킹 원, 마네킹 투, 마네킹 쓰리 계속 왔다가 엎어지고 왔다가 엎어지는 거에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참 임금님 나쁘다.”했죠. 좋은 임금님 요시아, 히스기아 왕도 엎어졌어요. 그럼 뭐냐? 인간이 환경을 못 이긴다 이 말이죠. 왕 되고 난 뒤에 사표 낸 왕이 없어요. 열왕기상과 하를 보세요. 하나님께 맞아 죽든지 회충에 뭐가 죽든지, 전쟁이 나서 죽든지, 끝에는 이방 나라에 포로 잡혀 죽든지, 자기가 자진해서 “나 왕 그만 둘래.”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왕이 아닙니다. 왕이 아니라서 왕은 그만둬도 상관없어요. 왕이 아니라서.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택한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다는 말은, 그 택한 백성이라는 게 언약 안에, 약속 안에,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미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지금 홀로 자기 인생을 꾸려나가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고 있는 입장이죠. 그 애쓰는 가운데 “나 죽어서 천국 갈래요. 구원받을래요.” 이렇게 하는거에요.
그러니 이거는 가짜죠. 이거는 가짜입니다. 내가 스스로 애써서 천국 가려는 이 자체는 천국이 아니에요. 죽어서 좋은 세상, 좋은 세월 보내겠다고 부리는 욕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짜 천국은 우리 자신의 어떤 노력과 수완에도 그런 식으로 우리가 천국 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때 우리는 우리 인생을 아낌없이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에요. 아낌없이.
“나 아니구나. ‘나’ 아닌 ‘나’가 구원되는 ‘나’였구나.” 지금 나라고 여겼던 그 나, 이 나 이것이 주님께서 십자가로 싹둑 종이 자르듯이 잘라버리면, 두 동강 나버리면 비로소 그 단면에 나타난 것은 “나는 그 예수님의 피 없이는 안될 정도로 내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피로 우리는 합격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 증거를 묻혀준 것.” 그 피를 묻힘으로써 나 말고 내게 묻어있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그분의 피가 내게 묻혀질 때 “나는 아니고 예수님이십니다”라고 내세울 게 있는 것. 그 언약이라는 걸 내세울 게 있을 때 우리 주변은 우리에게 찾아온 예수님의 환경입니다. 십자가의 환경입니다. 그 환경 속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리는 구원 받습니다.
왜? 나 잘나서 구원받았다 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해서 구원받는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지금 설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솔로몬은 어쩔 수 없어요. 자기가 아버지의 유언대로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애를 써도 본인과 백성들이 그 말씀에 합치되는 식으로 이 나라를 최종적인 이스라엘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경험해야 됩니다.
그러면 솔로몬의 말년에, 끝부분에 솔로몬이 남긴 것은 뭐냐? 처음에 제가 이야기했어요. 왕은 하늘에 하나님 품속에 있는 독생자의 왕, 그분이 왕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마네킹으로서 이스라엘 지상에 있는 왕 두 개있죠. 솔로몬이 죽고 난 뒤에도 솔로몬은 죽어도 다윗 언약, 아버지가 남긴 유언은 살아있습니다. 살아있으면 솔로몬 이후는 어떻게 되는가? 솔로몬이 받은 아버지의 언약은 아주 지독한 극단적인 실용성을 갖고 있어요, 실용성. 또는 다른 말로하면 현실성. 실용성을 갖고 있는데, 이것 상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나라가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이스라엘로 두 조각 나요. 언약에 의해서 잘라집니다. 잘라지게 되면 북쪽은 뭐냐? 하나님의 다윗의 언약의 그 성격상 ‘지키지 아니하면 필히 잘린다, 망한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북쪽 나라가 솔로몬 이후에 북쪽 나라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남쪽 나라는 인간은 말씀대로 못 살지만 하나님의 다윗 언약은 살아서 말씀대로 못산다는 인간, 말씀대로 기어이 달성한다는 언약, 이 둘이 합쳐버리면 너무나 극단적인 실용성으로 이스라엘 역사가 꾸려나가게 되는 거에요.
여러분 제가 지금 실용성이라는 말을 굉장히 강조했는데 실용성이란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말씀을 지켜버리면 이거는 말씀은 관념이 되어버려요. 허황된 관념이 되어버린다고요. “내 해볼라고 애씁니다. 노력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알아서 해주세요.”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런데 실용성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했더니만 이런 모호한 결과를 기대합니다”가 아니라, 이미 결과부터 다 챙겨 놓고 원인을 두 개로 보는 거에요, 원인을...
이런 결과를 두고 볼 때 이거는 내가 한 원인과 그리고 하나님의 원인 두 가지 원인이 실제로 실용성으로, 현실로 이런 결과를 낳았다는 거에요. 한 개의 원인은 뭐냐?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반드시 이루어진다.” 두 번째는 “그 말씀을 받은 나는 고집스럽게 말씀 하나도 못 지킨다”는 이 원인. 말씀을 하나도 못 지키는 원인과 말씀 못 지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씀대로 못살면서도 기껏 탕자에 불과하면서도 아들로 받아주는 아버지의 심정이 담긴 언약의 완성.
이 두 가지를 북쪽과 남쪽으로 나누어지는 거에요. 이게 북쪽과 남쪽 이스라엘이 두 토막 나는 것은 언제냐? 솔로몬 이후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을 통해서 이미 다윗과 솔로몬 사이에 언약이 솔로몬 이후의 모든 이스라엘 역사가 결정되었어요. ‘망하는 가운데 구원된다.’ 우리내 인생도 죽어가잖아요. 이거 망한거거든요. 근데 죽어가면서 구원된다. 죽어가면서 천국으로 가는 진수식이다. 배를 만들어놓고 바다에 띄운다 했죠? 어떻게 띄운다 했습니까? 미끄러지듯이 띄운다 했죠. 미끄러지듯이...
못난 우리가 미끄러지듯이 천국 가는 것은 우리 공로가 아니고 바로 우리의 환경을 지배하는 지독한 실용성. 지독한 실용성이라는 것은 이 물 마시는 것도 예수님께서 주셨다 이 말입니다. 예배 시간에 찬송 부를 때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서 왔다 갔다. 어쩔 수 없이 갈 수 밖에... 그것 누가하신 거에요? 지독한 실용성이에요. 주님이 결과를 만든 거에요. 주님이. 이 세상에 어떤 것 하나, 딸이 폐렴 걸리는 것 어떤 것 하나, 지독한, 아주 지독한 정말 지긋 지긋하게 실용성이에요, 이게 말씀이.
내가 지켜서, 내가 지킨다는 원인으로 나온 결과가 아니라 이미 결과부터 부여받고 그다음에 우리는 이런 실제적으로 일어난 일의 원인은 찾아가 보면 딱 두 가지입니다. 못난 나와 너무나 고마우신 주님, 그 두 가지에 도달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뭐냐? 한쪽은 저주, 하나는 축복. 다윗 언약 가운데서는 이 두 가지가 다 들어있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심판하러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솔로몬 왕에게 마지막 당부하는 게 뭐냐 하면, 심판하는 거에요. 왕의 역할이 뭐냐? 심판하는 겁니다. 그것을 누가 하느냐? 이미 다윗이 해 왔어요. 다윗이 40년간 통치했잖아요. 하여튼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 통치를 했거든요. 하면서 다윗은 두 가지를 보여줬는데 그 두 가지가 죽어가는 가운데서 이 두 가지를 부탁했어요.
5절에 이제, 첫 번째는 신명기 말씀대로 잘 지켜라. 지키는데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 5절에 보면,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장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저가 저희를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로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이게 저주입니다. 죽어가는 다윗이 살아있는 자기 시절 때 군대장관, 국방부 장관에 대한 저주에요.
근데 반면에 7절에, “마땅히 길르앗 바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저희로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예하게 하라” 바실래의 자녀들이 아버지가 압살롬에게, 아들에게 반란을, 쿠데타 당해 쫓겨 나갈 때 너무 너무 잘해줬거든요. “그 잘해준 그것에 대해서 니가 잘해줘라.” 이거는 축복입니다.
그리고 또 8절에 나와요. 시므이가 나오는데 이 시므이는 “독한 말로 나를 저주했다.” 독한 말로 저주했거든요.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한 이유가 있어요. 사무엘하 16장에 보면 쭉 나옵니다. 그 저주한 이유가 이 시므이가 누구 집안이냐 하면, 다윗 집안이 아니고 사울 집안이에요. 사울 집안. 그러니까 만약에,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윤석열 대통령이 되기 전에, 문재인 대통령의 집안이 윤석열을 공격을 했다 이 말이죠. 대통령 안될 줄 알고. 실컷 저주했어요.
“술이나 퍼먹는 인간이 무슨 대통령이냐”, 이런식으로... 욕을 했다 이 말이죠. 하고 난 뒤에 윤석열 대통령 됐잖아요. “내가 대통령 되고 난 뒤에 봐주기는 봐주지만 절대로 그때 대통령 되기 전에 욕했던 그 문재인 대통령 집안 누구 누구를 일체, 그 딸인지 일체 용서하지 마라” 뭐 이런거... 지금 이건 예를 든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렇게 윤석열 문재인 예를 들면 “목사님, 실제로 있는 이야기입니까?” 라고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실제로, 실용성, 지독한 실용적인 이야기가 다윗 언약 이야기입니다. 언약은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에요. 내 몸이 벌거벗은 게 부끄럽다는 게 이게 말씀 지켜진 결과입니까? 아닙니다. 이게 주님이 설정한 환경 때문에 생긴 이건 명백한 현실이에요. 명백한 현실이라고요. 이스라엘 자체가 언약에 의해서 있는 현실이라면,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도 명백한 현실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게 헛짓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안 해도 될 짓을 하고있는 게 아닙니다. “말씀을 대하는 것이 돈도 안되는데 왜 하느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에요. 자꾸 우리가, 내가 원인을 하고 결과를 하려 하니까 이런 성경 이야기 이게 모호한, 추상적이고 힘아리 없고 관념적이고 이거 뭐 몰라도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자체가 말씀의 만들어낸 현실입니다. 우리 자체가.
그러니 다윗 언약이 갖고 있던 두 가지 요소. 자비와 그리고 저주, 이거는 실제로 솔로몬 이후에 현실화 되어서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두 쪽이 되는 겁니다. 하나는 북이스라엘, 하나는 남쪽 유다. 둘 다 못났어요. 둘 다 못났지만, 남쪽 유다는 다윗의 등불이 꺼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죽은 다윗이 살아 있다는 거에요. 그걸 다윗 언약이 그들과 함께 있다. 지금은 “돌아가신 예수님의 새 언약이 우리와 함께해서 믿자”가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자”가 아니라 주님이 계시다는 결과물이 오늘날 복음을 알게 된 이 기이한 현실, 기이한 십자가가 이게 실제라는 것이 받아들여지는 것, 우리가 바로 예수님의 살아있는 증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현실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내 몸도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듯이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말씀에 의해서 생긴 파생된 결과물인 것을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다시 한번 접하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솔로몬이 딴에는 훌륭하게 살고자 했지만 완벽한 메시아가 아닌 것처럼 오직 주님만이 완벽한 메시아로 오기 전에 모형과 그림자로 있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