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아비삭

아빠와 함께 2024. 10. 26. 12:49

아비삭  

2024년 10월 23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1-4

(1:1) 다윗 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1:2) 그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저로 왕을 모셔 봉양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1:3) 이스라엘 사방 경내에 아리따운 동녀를 구하다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1:4) 이 동녀는 심히 아리따운 자라 저가 왕을 봉양하며 수종하였으나 왕이 더불어 동침하지 아니하였더라

다윗의 후손들이 당연히 이스라엘의 왕들이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이들이 왕위를 차지하는 이스라엘은 멸망하는 이스라엘, 역사 속으로 침몰하는 이스라엘입니다. 여타의 민족들의 역사와 한데 섞어 희석되고 증발되어 버리는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왕으로 영원한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왕으로 계신 한, 이스라엘도 영원합니다. 과연 이 ‘영원한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어떻게 나타날까요? 다윗의 후손 왕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열왕기는 ‘아비삭’이라는 여인의 관한 내용으로 출발합니다. 다윗은 노쇠했고 그는 스스로의 체온조차 조절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이 있지만 이미 일반적인 이스라엘 정치판이나 백성에게는 권력 구도에서 배제된 존재입니다. 즉 있어도 없는 존재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신하들이 아비삭이라는 궁녀를 다윗에게 붙여주는 것은 죽어가는 과거와 더불어 소실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다윗은 그 궁녀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정식으로 다윗 왕가의 권력에 끼어들 인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치 다윗이 말년에 권력판에서 배제된 것처럼 아비삭 또한 다윗과 하면 역사 저편으로 사라진 존재로 취급됩니다. 그런데 왜 이런 여자가 열왕기 초반을 장식해야 합니까? 그것은 죽음을 앞두고는 다윗 시대에 설쳐대는 모든 이들은 실은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이는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을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소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리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언급해도 최종 증명하려는 것은 ‘내가 확실히 있고 나는 기어이 구원을 따내야겠다’는 자기 집념 뿐입니다. 하지만 정작 다윗은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다윗은 시편 51에서는 자신이 진적에 죽은 자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이는 율법에 의해서, 곧 하나님의 안목 앞에서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까지 살해하고 난 뒤, 왕이라는 이유로, 권력으로 이 사태를 억누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행위를 낳게 된 이유는 자기만큼 끝까지 살아남을 가치있는 자로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12:4-6에 보면,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이 율법적 판단에 대해서 나단 선지자는 이렇게 분명 지적합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 즉 율법에 의해서 마땅히 죽어야 될 자는 바로 다윗 당신이라는 겁니다. 이는 곧 진정한 이스라엘이신 왕 앞에서 다윗은 이미 죽은 자인 겁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나단 선지자와 만났던 이 상황을 이렇게 해석을 내립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4-5)

  Against Thee, Thee only, I have sinned, And done what is evil in Thy sight, So that Thou art justified when Thou dost speak, And blameless when Thou dost judge.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만 죄를 얻은 몸, 당신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한 이 몸, 벌을 내리신들 할 말이 있으리이까? 당신께서 내리신 선고 천번 만번 옳사옵니다.

즉 다윗의 본인의 살아 있음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죄인인가를 드러내기 위해 살아있다는 겁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 실은 죽은 자로 살아있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노쇠한 것을 그 당시 백성들이나 솔로몬이나 아도니야는 하나님의 권력이 다윗의 노쇠와 함께 쇠퇴했고 이제 이 이스라엘은 권력은 백성들이 납득할 만한 권력 기관을 조성해서 왕이라고 선포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에서 진정 살아있고 보존하고 있는 것이 바로 ‘다윗 언약’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물리학에서 모든 사물이 한결같이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가 한결같이 보존한다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에너지는 결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물의 형태의 변화는 생존 패턴의 전환을 통해서 에너지의 총량은 그 어떤 모습으로 달라져도 영원히 보존함을 압니다. 언약은 비록 인간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약의 능력은 사그라진 적이 없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이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그 왕됨이 바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구현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이나 솔로몬이나 아비삭이나 밧세바나 나단 선지자나 모두 보이지 않는 언약의 흔적이요 언약의, 글자요 언약의 기호들입니다. 아비삭은 분명 일개 궁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권력 분포에서 늙고 죽은 다윗 자투리에서 남아 있는 인물이 바로 아비삭입니다.

아도니야는 왕권에서 밀린 후에 마치 동생인 솔로몬이 다윗 다음의 이스라엘의 권력을 인수인계받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합당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살아 있음, 곧 자신이 다윗 권력의 일부로서 한 몫을 건진채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다윗의 궁녀였던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달라고 밧세바에게 요청합니다.

이는 분명히 솔로몬만이 왕이 된 시대에서 다윗에게 내려온 권력의 일부를 자신이 차지하고 있음을 백성들 앞에서 알리고 싶은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솔로몬은 대노합니다. 솔로몬의 통치가 온전치 않게 만들기 위한 정치적인 수완이라고 간주한 겁니다. “가로되 청컨대 솔로몬 왕에게 말씀하여 저로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왕이 당신의 얼굴을 괄시치 아니하리이다”(왕상 2:17)

자신이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들은 모두 나름대로 권력을 휘감고 살아있는 겁니다. 자신이 죽은 자라면 자기 구원도 당연히 없습니다. 진정 살아 있는 것은 다윗 언약 뿐입니다. 이런 권력 투쟁의 장에서 아비삭은 여전히 살아 있는 죽은 다윗의 증표입니다. 소위 살아 있는 자들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만의 권력을 취득하려고 하는지 드러내는 증표로서 아비삭이 존재하는 겁니다.

진정한 이스라엘의 권력은 살아 있는 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죽은 다윗에게 주신 ‘다윗 언약의 살아 있음’에서만 나옵니다. 이 흔적이 바로 오늘날의 성도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자는 오직 ‘다윗의 후손’이니까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살리는 구원이 아니라 우리 안에 주님을 살리는 구원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강-열왕기상 1장 1-4절(아비삭) 24102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상 1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다윗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그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저로 왕을 모셔 봉양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이스라엘 사방 경내에 아리따운 동녀를 구하다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이 동녀는 심히 아리따운 자라 저가 왕을 봉양하며 수종하였으나 왕이 더불어 동침하지 아니하였더라” 아멘.

열왕기상, 이스라엘 다윗 이후에 연속되는 왕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이 성경은 엉뚱하게 아비삭이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밝힌 수넴 여자 하나를 등장시킵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왕이 어떻고 그다음 왕이 어떠냐 이런 이야기를, 이런 생각을 기대했다면, 이 아비삭이라는 여인이 초반부터 어떤 선두 주자처럼 튀어나오는 것이 그다음에 왕 이야기하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죠. 그래서 열왕기상에서 아비삭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네. 알아들었습니다.”하고 “됐고”하고 치워버리고 본격적으로 솔로몬과 아도니아의 권력 싸움에 치중해서 다윗 다음에 차기 왕은 누가 될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정치에 대해서 관심을, 우리가 제 삼자 입장에서 바라보죠. 그런데 이 아비삭이라는 여인이 왜 등장했느냐 하면, 여기 등장한 이유가 있어요. 다윗이 나이가 많아서 늙었다 했어요. 다윗이 나이가 70입니다. 30에 왕 되어서 70살 때까지, 죽을 때까지 왕으로 살았어요. 다윗이 왕이 되었으니까 이제 곧 뒷방 노인 취급을 당할만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으니까요. 인간으로 맛이 갔다 뭐 그런 뜻이죠. 인간으로 제구실 못 한다 그런 뜻입니다.

다윗이 그냥 조용하니 있고 이제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줘서 솔로몬이 어떻게 통치하느냐, 여기에 사람들은 관심이 있는데 끈적끈적하게 늙은 다윗 이야기가 이 열왕기상 초반에다가 착 들어서고 있는 거에요. 늙은 다윗이, 늙은 다윗이라는 말은 앞에 늙었다는 말은 쓸모짝이 없다는 거에요. 쓸모짝이 없는 자기 역할 못하는 그 다윗이 이제는 40년 동안 왕 했으면 이젠 조용하게 물러나고 그다음에 아들, 10번째 아들 솔로몬이죠. 10번째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기는 은퇴해서 이름 없이 소리 없이 그냥 사라지면 그만이다 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열왕기상에서 전체 내용을 보게 되면 다윗이 사라지지 않아요. 죽어도 사라지지 않아요. 다윗이 죽어도 다윗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윗 그다음에 나타난 왕들이 없는 존재들이 나타납니다. 없는 존재가 나타난다는 말이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것처럼 느껴지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내가 없는 존재로 여기 있다.” 이게 무슨 말 일까요? 내가 없는 존재로 여기 있다. 이 말은 “내가 있는 존재로 여기 있다”가 아니라는 거에요. 있기는 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없는 존재로 다루어진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거에요.

성경은 초반에 다윗이 늙었다. 다윗이 늙으면 사람들은 “다윗은 이제는 곧 죽겠네. 그러면 죽으면 없는 존재가 되겠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늙고 죽는 다윗 대신에 팔팔하게 젊은 솔로몬이 다윗 대신 있으면 되잖아.”라고 생각할 거에요. 솔로몬이 다윗을 대신해서 왕이 된다고 생각한 게 인간들의 생각이라면, 그게 아니고 성경은 “죽은 다윗이 젊은 솔로몬을 대신해서 계속 있다.” 이 말이에요.

죽은 다윗이 없어진 다윗이 지금 살아있는 솔로몬을 대신해서 계속 있는 형식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을 이끈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이 다윗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가 산자를 대신한다 이 말이에요. 이게 열왕기상에 핵심 중추 원리로 등장하는 거에요. 아까 우리 자신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없는 존재로 여기 있다” 이 말이죠. 없어야 되는데 왜 여기 있는가?

“어떤 분이 내가 내 대신 계신 분으로 계시고 어떤 분이 예수님 나 대신 계시고 나는 그 분 앞에서 없는 존재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럴 때 신앙이란 게 형성이 돼요. 신앙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는 나를 믿는 게 신앙이 아니에요. 신앙이라 하는 것은 나 말고 다른 분을 믿기 때문에 여기 있는 나는 그 다른 분을 믿는 신앙에 방해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주님께서 삭제시켜 나가는 그 상황이 신앙 상황입니다. 신앙 관계에요.

그러면 내가 여기 없다는 말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 구원이 없다는 뜻이에요. 나의 구원이 없고 너의 구원도 없고 구원은 주님에게 일어난 그것만 구원이지 나에게 일어나는 것은 구원이 아니다 이 말이죠. 없는 존재인데 내가 있어야 뭐 구원을 받든지 하지, 내가 없는 존재인데 내 구원도 같이 없는 거에요. 없는 겁니다. 이스라엘 왕이 다윗 다음에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다. 보통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이스라엘 왕은 다윗뿐이에요. 그 뒤에는 없는 왕이에요. 그러면 다윗만 왕인가? 그럼 다윗만 왕인가? 그것도 아니에요. 다윗 안에 계시는 분이 왕이죠.

여호와가 왕이죠. 이스라엘에. 그래서 다윗만이 왕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다윗은 살아있고 그 살아있는 다윗의 자손이 이스라엘 왕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 다윗의 자손이 누구겠습니까?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죠. 예수그리스도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이고 그 외에는 왕은 없어요. “그 외에는 왕이 없고 왕은 영원토록 다윗의 자손뿐이다.”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 다윗에게 자식이 있고 그 자식은 없음이라는, 다윗이 있으면 자식은 없다는 그것을 계속해서 역사 속에서 시연되기 위해서, 시연, 보여주는 거에요. 역사 속에서 시연되기 위해서 솔로몬, 그다음 르호보암 없어지고 없어지고 없어지고 없어지고 하는 거에요. 어디까지 없어지느냐?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까지 그 중간에 있는 자는 잠시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겁니다.

그것을 솔로몬도 몰랐고 솔로몬 시대에 있던 같이 다윗의 네 번째 아들 아도니야도 몰랐고 열 번째 아들 솔로몬도 몰랐어요. 네 번째하고 열 번째 아들 솔로몬하고 아도니야가 열왕기상 1장과 2장에서 지금 권력다툼에 돌입하고 있는거에요. 그 권력다툼에 대해서 다윗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왜? 연세가 많으니까. 나이가 많으니까. 권력 구도에서 빗겨나 있는 거에요. 권력 구도에 끼어들지 않고 있어도 없는 존재로 취급받으면서 이거는 뭐 아버지 다윗은 한물갔으니까 제끼고 우리끼리 이 이스라엘의 차기 왕이 누가 될 것인가 권력을 누가 잡을 것인가 그렇게 서로 견제하고 있다가 누가 선빵을 날리느냐 하면 아도니야가 먼저 선빵을 날렸어요.

다윗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에 아도니야는 설쳤던 겁니다. 아도니야가 어떤 인물이냐 하면 1장 6절에 보면, “저는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요 체용이 심히 준수한 자라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다윗을 섭섭하게 한 적이 없이 그야말로 다른 사람 봤으면 다윗의 참 합한 아들이다. 그러니까 첫째 암논 짤리고 첫째 둘째 셋째 넷째 중에서 압살롬이 그중 아들 가운데 최고니까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하나님에 의해서 짤렸잖아요.

그다음에 그 왕을 지켜보고 있는 관찰자 입장에 있는 백성들 입장에서 “우리 이스라엘 책임 질 왕은 그 다윗의 아들들 가운데 누가 적당하냐?” 그것을 역지사지, 백성의 마음으로 바꾸어서 입장이 되에서 한번 생각해 볼 때 역시 첫째 둘째 셋째, 셋째는 죽었으니까 셋째가 괜찮았는데 죽었으니까 넷째가 아버지의 마음에 합당하고 성품이나 모든 인품에 의해서 결함이 없는 결점이 없는 사람이라서 그럴 것이라고 아도니야가 생각한 거에요.

그런데 지금 아도니야라는 이 사람이 지금 뭐를 모르고 있느냐 하면, 뭐를 모르고 있는지에 대해서 어쩌면 우리들도 지금 이 열왕기상을 보면서 사태 파악이 안 되고 있는 거에요. 왜 솔로몬과, 열 번째 아들 솔로몬과 네 번째 아들 아도니야가 권력 다툼을 하는데 있어서 왜 다윗은 왜 가만히 방치하고 있느냐에 대한 의구심. 그 의심이 확 올라오는 거에요. 물론 다윗은 늙어서 뒷방 늙은이 돼서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을 정도로 체온유지가 안 되는 사람이에요. 체온유지가. 뭐 떤다거나.

36.5도 조차도 지금 그걸 자기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그런 입장에서 그렇게 되면 권력에 누수가 생겼다. 구멍이 뚫린 거에요. 왕이 있으나 마나에요.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이 22퍼센트. 그럼 78퍼센트는 뭐. 권력에 구멍 뚫린거에요. “22퍼센트는 저리가세요. 혼자서 김건희하고 잘 노세요.”하고 나머지는 이거는 무주공산, 권력 없는 세상이 되어서 누가 적당하겠느냐? 이 권력다툼. 백성들이 관심사를 갖고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게 뭐가 문제인가 하면 이런 겁니다. 백성들이 스스로 자기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 권력자들, 아도니야도 자기가 있다고 생각하고, 솔로몬도 자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없는데. 본인들이 없어요. 본인들이 자꾸 있는데 왜 없다고 이상한 이야기를 하느냐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제가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예를 드느냐 하면, 탁자 위에 사과가 있습니다. 탁자 위에 사과가 있는데 손으로 탁자 위의 사과를 이렇게 밀면, 탁자 범위 안에서 사과는 움직이죠. 사과는 움직인다고요.

사람들이 탁자 위의 사과를 밀든지 아니면 사과를 탁자 위에 놓을 때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 하면, 사과를 탁자에 놓으면 절대로 탁자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믿음 같은게 있어요. 믿음 같은 것. 사과가 그 두꺼운 탁자 두께를 뚫고 내려온다. 이게 뭐 이스라엘 미사일입니까? 지하 벙커까지 폭파시키는... 아니잖아요. 그냥. 그냥 일개 사과다 이 말이죠.

그런데 뉴턴을 비롯해서 물리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학자들, 물리학자, 과학자들은 사물을 그렇게 안 봐요. “사과는 사과다.” 일반인들이고요. “탁자는 탁자다.” 일반인들 사고. 그러나 물리학 하는 사람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사물 보존의 법칙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무슨 법칙을 하느냐? 에너지보존의 법칙을 이야기하죠. 에너지보존의 법칙. 에너지는 눈에 보이지 않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존되고 사물들은 에너지에 의해서 언제든지 변형이 된다는 겁니다.

사과를 탁자위에 놔두고 13년 5개월 있어보세요. 썩어버리죠. 시간따라 썩는다고요. 사물은 변형돼요. 그러나 사과는 보존되지 않는겁니다. 그냥 보존 되는 것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에요. 사과는 형태가 달라져요. 그러나 에너지의 질은, 에너지의 형태는 달라질지라도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이게 에너지 보존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의해서 과학자들이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모든 변화는 에너지가 변형되면서 뭐를 형성하느냐? 패턴을 만들어요. 에너지 패턴을.

사람이 죽어서 화장대에 죽어버리면 그 사람은 없어져도 사람이 품고 있었던 그 에너지는 다른 열에너지와 빛 에너지로 변형이 되는 거에요. 그 에너지의 총합을 합하면 달라지는 게 없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언약 보존의 법칙을 해요. 언약 보존의 법칙. 인간 보존의 법칙이 아닙니다. 근데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게 있으니, 권력자고 사람이니까, 눈에 보이는 게 자기 자신이니까, 나 보존의 법칙. 나처럼 저 사람 보존의 법칙으로 생각해서 아도니야가 이길까 솔로몬이 길까? 이런 식으로 세상을 그렇게 보는 거에요. 왜 그렇게 보는가?

그렇게 보는 자기 자신은 보존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어렵죠. 지금 어려운 이야기 하고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늙든지 다윗이 죽는다 할지라도 다윗은 하나님과의 언약 보존의 법칙에 해당 되는 핵심 문자에요. 핵심 기호에 해당 됩니다. 다윗이. 그리고 그 다윗이 핵심 기호에서 줄줄이 파생돼 나오는 연결된 기호들이 있어요. 그 기호들이 뭐냐? 솔로몬, 아도니야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 부인 밧세바. 나단, 아비아달, 아도니야, 요압, 브나야 이런 사람들.

지금 뒷방 차지하고 있는 아무 쓸모 짝도 없는 그 다윗이 죽어요. 죽지요. 다윗은 없다가 죽어요. 우리도 마찬가지고, 죽는데 문제는 다윗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 하면 다윗과 함께 있는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 보존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에요. 그 언약이 보존될 경우에만 이스라엘은 비로소 이스라엘에게 구원이라는 게 주어지는 겁니다. 나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언약 안에 들어올 때 우리가 구원되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구원은 언약이 독점하고 있고 언약이 보존된 게 구원이고 그 언약이 보존되어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흔적, 또는 글씨, 또는 기호, 싸인, 문자, 그 문자가 뭐냐? 다윗이고 솔로몬이고 아도니야고 그런 거에요.

그것도 모르고 인간들은 아도니야가 살아있다, 솔로몬도 살아있다. 붙어라 붙어라. 누가 왕 되는지 한번 붙어라. 아도니야가 먼저 선빵을 날렸는데 아도니야가 선빵 날릴 때 같이 동조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도니야는 자기가 왕이니까 그다음에 보좌로 요압이라는 백성들로부터 그동안 전쟁하나는 끝내주고 항상 승리만 가져줬다는 유명한 장군, 요압 장군. 요압 장군이 딱 보조해서 아도니야 편에 선거에요. 왜 섰느냐? 요압 장군이 딱 보기에 이미 권력은 백성에서 나오기 때문에 백성들이 다윗에서 요압이라는 장군이 얼마나 큰 활약을 해서 지금 이 시점까지 굳건하게 이스라엘 왕국을 다윗 중심으로 딱 중심을 잡았던 것은 바로 요압이다.

그 사람의 그 정도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요압이 결정한 것에 대해서 백성들도 고개 끄덕이면서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왜? 그만큼 공로가 많으니까요. 그리고 그 같이 붙어있던 뭐냐? 또 하나의 권력의 3인방. 왕, 그리고 최고 군인, 세 번째는 제사장. 하나님과 백성들의 중간 계열. 제사장. 그중에 제사장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에게 붙었습니다. 이 아비아달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는 것은 사무엘하 15장 29절에, “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고 거기 유하니라” 다윗 시대에 사독이라는 제사장과 아비아달이라는 제사장이 같이 협력해서 백성들 앞에 비취기에 다윗 최측근으로서 두 제사장이 있는데 두 제사장이 서로 같이 일해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유지하고 지켜냈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신앙을 언약궤 중심으로 지켜냈던, 성전 중심으로, 성전을 짓기까지 언약궤를 보호해 줬던 공로자라는 인식을 그 당시에 다윗 시대의 백성들은 다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비아달이 제사장, 다음의 차기 왕, 다윗의 정신을 이을 차기 왕, 제사장으로서 아비아달도 괜찮아. 요압은 당연히 괜찮고. 공로자니까. 아도니야는 바로 다윗의 넷째아들이니까. 열째아들이 아니고 넷째아들이니까 평소에 아버지를 근심케 하지 않는 아들이니까 딱 그림 나왔잖아요.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백성들이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했을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한 거에요. 그런데 그들이 결정적인 오류가 있었어요. 그건 뭐냐? 다윗을 배신했다는 거에요. 다윗을. 다윗의 재가를 받지를 않았어요. 왜? 다윗은 지금 늙었으니까. 자기 체온 간수도 못 하니까. 다윗이 어떤 사람 입니까? 다윗은 왕가에 속한 사람이 아니에요. 이름 없는 어떤 이새라는 그냥 보통 아저씨의 여덟째 아들이 다윗입니다. 목동이었어요.

목동 치다가 졸지에 사무엘이 기름 부은거에요. 사무엘도 자기도 몰랐죠. 자기가 선택하지 않는 아들인데 일곱의 아들 세워놓고 기름 부으려하니까 하나님께서 말려 가지고 “걔 아니야, 걔 아니야, 걔 아니야” “여기 없네요.” 없다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 땅에 남길 때에는 없음을 기본으로 까는 거에요. 없음을. 없는 존재에게 기름을 부어버린 거에요. 왕이 되게 한 거에요. 없는 존재.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여기 있다고 하면 모든 근심 걱정과 모든 고민이 내가 여기 있음에서 나와요.

이거는 아무리 강조해도, 제가 강조한다고 이게 실감나는 건 아닌데... 여러분들 백설 공주 알죠? 백설 공주가 비록 계모한테 쫓겨서 난쟁이한테 보호받으면서 숲속에 그냥 외롭게 산다 할지라도 한번 공주는 공주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그 공주가 일곱 난쟁이한테 시중받는다고 해서 일곱 난쟁이가 공주의 베필자가 될 수 없다 이 말이에요. 왕가는요, 왕가에서만 내려와야 돼요. 근데 다윗은 사울 왕가가 아닙니다. 다윗은 엉뚱한 사람이고 다윗이 사울 왕가에 들어간 것은 사위로 들어갔어요.

그 딸, 딸과 결혼했는데 그 딸과 결혼한 것도 사울 왕이 좋아서 한 게 아니고 죽이려고 결혼시킨 거에요. 사위 만들어서 죽이려고. 그러니까 사울은 끝까지 저 다윗을 나라는 왕가, 이 왕족에 넣어주지를 않았던 겁니다. 하나님의 왕가에 다윗은 없는 존재였어요. 여기서 오늘 열왕기상, 제목이 왕들의 이어짐, 족보같은 그런거다 이 말이죠. 나열. 왕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거기에 아비삭이라는 여자가 왜 등장하느냐?

아비삭이라는 이 여인은 왕족이 아닙니다. 일곱 난쟁이가 백설 공주의 남편감이 못 돼요. 시중은 들었지만 남편감은 못됩니다. 백설 공주의 남편은 우연히 지나가다가 백설 공주가 독사과 먹고 거의 죽었을 때에 뽀뽀한 사람이에요. 죽은 백설 공주를 살린 사람이 왕자죠. 그때 일곱 난쟁이가 데모했습니까? 어디서 날라온 돌이 박힌 돌 빼느냐 뭐 이런 식으로 데모 안 했죠?

아비삭은 젊은 처녀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궁녀에요. 궁녀. 궁녀인데 이 궁녀가 늙은 다윗의 신체를 따뜻하게 해서, 체온이 자꾸 떨어지니까, 따뜻하게 해주려고 수종드는 사람이었는데 여기에 대해서 4절에 보면, “왕이 더불어 동침하지 아니하였더라” 되어있어요. 동침하지 아니했어요. 왕비가 될 수 없어요. 9번째 왕비가 아닙니다. 부인이 아니에요. 이점이 중요하다고요. 왜 중요하냐? 아비삭은 기존에 있는 자들의 권력 분포, 있는자들의 권력 쟁투에 개입되지 않은 거에요. 없는 존재에요 아비삭은.

소위 있는 것들이 다윗의 왕권을 누가 차지하겠느냐? 있음과 있음이 갖고 있는 권력다툼에 아비삭은 없는 존재입니다. 없는 존재에요. 이게 없는 존재인데 없는 존재인데 왜 거기에 없으면 그냥 없어야지 왜 다윗이 죽고 난 뒤에 아비삭 이름이 왜 또 거론되느냐? 바로 외부 존재에요. 없는 존재, 외부 존재인데 아비삭은 뭐냐? 동침은 하지 않았지만, 죽은 다윗의 짜투리, 죽은 다윗의 그림자처럼 아비삭은 존재하고 있어요. 아비삭은 권력구조에서 존재 없음인데 존재 없음이 한때 다윗과 함께 있다는 것 때문에 권력에서 존재 있는 여인으로서 여기에 등장합니다.

본인은 전혀 그걸 의도하지 않았는데 솔로몬의 적 아도니야가 그걸 아비삭에 대해서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게 논리적으로 상당히 어렵지만 그냥 넘어가면 안 돼요 이게 핵심 요소로서 차지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2장 17절, 이제 아도니야가, 아도니야 3인방이 패배했어요. “아도니야, 요압, 아비아달, 이렇게 권력의 중추. 백성들이 생각하기에 권력은 그렇게 삼각형으로 갖추어야 돼. 그래야 우리 여호와 앞에 완전한 왕권이라고 할 수 있어.”라고 백성들 쪽에서 생각했던 그 삼각형, 삼각편대. 그 삼각편대를 그들이 임의로 구축해서 하다가 그들은 실패로 끝났어요. 끝나고 난 뒤에 게임은 솔로몬이 이겼어요. 이기고 난 뒤에 열왕기상 2장에, 아도니야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아도니야가 밧세바를 찾아와요. 밧세바를 찾아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15절에, “저가 가로되 당신도 아시는바여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을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위가 돌이켜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이렇게 돼요. 아도니야가 자기가 왕 되려고 선빵 날린 이유가 여론조사에서 자기가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았어요. 여론조사에서. 78퍼센트하고 22퍼센트.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내가 왕 되는데 있어서 백성들의 허락은 따논 당상이다 이렇게 생각한 거에요.

제가 아까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이 백성들이 뭐에요? 스스로 자기가 없다고 여기는 자일까요? 있다고 여기는 자입니까? 있다고 여기는 자에요. 그러면 다윗은? 늙은 다윗은 이미 과거의 일이고 없는 자에요. 있는 자들끼리 있는 자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본 거에요. 이거는 사물 보존의 원칙이에요. 이거는 에너지보존의 원칙도 아니고 언약 보존의 원칙도 아니고 이거는 눈에 보이는 있는 것들, 사과, 바나나 이처럼, 인간, 나무 있는 것들이 보존하면 이것이 우리에게 합당한 현실이라고 우기는 그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전혀 아는바 없는 자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고 곡해하고 있는거에요.

이런 현상이 오늘날도요, 태반이에요. 신학 토론하는 걸 제가 보니까, 신학 토론이 뭐 십자가냐 부활이냐 뭐 이런 토론을 제가 어떤 동영상을 전달받고 봤는데 기본적으로 뭐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 “구원받을 인간이 없다.” 왜 시작을 이거부터 왜 안 하죠? “우리는 있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때 십자가로 구원할까? 부활로 구원할까?” 이것 가지고 논쟁하고 있다고요. 그러니 시작 자체가 잘못된 거에요.

인간은 없고, 인간 없으면 뭐도 없습니까? 구원도 없는 거에요. 내가 없는데 무슨 구원이 있어요. 내가 없는데. 구원 자체가 없어요. 없는데 무슨 “하나님이 저를 십자가로 구원할 거에요, 부활로 구원할 거에요?” 이러고 있는거에요. 제가 부산에 강의 마치고 부산역으로 이렇게 어떤 목사님이 데려다 주는데, 데려갈 때 어떤 때는 광안대교를 통해서 부산역까지 데려다 줘요. 광안대교를 이렇게 가다 보면 멋진 풍경이 나오거든요. 해운대 마린시티. 고층 건물로 쫙 돼있는.

그 고층 건물로 되어있는 그걸 바라보면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인간들의 구원관이 생각나는거에요. 인간들의 구원관은 뭐냐 하면, 마린시티에 보면 88층, 지금은 100몇층 105층인가, 지금 쫙쫙 올려져 있거든요. 빌딩 숲이 되어있다 이 말이죠. 그럴 때 만약에 강력한 태풍이 분다면, 어느 건물이 살아남을까? 낮은 1층 2층 3층 건물은 다 물에 잠겨서, 태풍에 잠겨서 엉망이 되더라도, 88층 90층 100층짜리 건물은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뭐냐하면, 찰싹 찰싹 태풍나도 내 발목만 적시고 내가 굳건하게 내가 여기 몸통 있는 내가 있음을 버티면 나는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런 구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구원이 있느냐? 모조리 다, 노아같은 경우에는 모조리 다 물속에 다 잠겨요. 100층이 되든 200층이 되든 88층이 되든 해운대 건물이 다 잠기는 거에요. 노아 때 생각하면 다 잠겨요. 그럼 구원은 없는 거에요. 구원은 없는데 거기서 구원이 없음에서 떠오르는 게 있어요. 방주 같은 것. 방주는 인간들의 생각에 없어요. 그거는 언약에만 있는 거에요. 방주가 있다는 것은 언약이 있다는 뜻이고, 방주가 있다는 것은 언약의 흔적이고 보이지 않는 언약의 문자요 언약의 글씨요 언약의 싸인이고 언약의 증거에요.

그 안에서만 구원받는 거에요. 없음 안에서만 구원받는 거에요. 없음 안에서. 언약 보존의 법칙이에요 정말. 아비삭은 다윗이 죽고 난 뒤에 짜투리로서 있는데 이 아비삭에 대해서 아도니야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다 여론조사 해서 내가 왕이 돼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아우의 것이 되었음을 하나님께 “이건 다 여호와께 말미암음이다.” 그러니까 언뜻 보면 믿음 좋아 보이죠. 믿음 되게 좋아 보이죠. 근데 이게 믿음이 아닌 이유가 뭐냐? 아도니야는 아직도 자기가 여기 있다고 여기는 거에요. 있다고.

여기 있다고 여기면서 “십자가로 구원받는다, 아니야 부활로 구원받는다.” 그 자체가 구원이 아니에요. 그리고 아도니야가 말합니다. “제가 이 정도 신앙 있는데 이 정도 내가 솔로몬이 왕 되는 것은 필연적이고 하나님이 개입해서 그런거니까, 오케이, 내가 졌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러니까” 밧세바보고 “저를 괄시하지 마세요.” 뭐냐?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소서.” 이렇게 되어있어요. 아비삭을. 아도니야는 아직도 아버지 다윗이 다윗 언약과 관계있어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없는 존재입니다. 왕가가 아니에요. 사울 왕가도 아닐뿐더러 심지어 다윗이 살아생전에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아야 돼요. 그게 유명한 선지자, 이름도 유명해요. 나단. 나단 선지자가 와서 “왕이여 백성 가운데 이런 사람이 있으면 왕은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자기 양 빼놓고 하인양 빼서 손님 대접하는 것. 이런 인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거는 율법대로 죽여버려야지 그거.” 이랬거든요.

그러면 율법대로 죽여버리면 그 주인은 있음에서 없는 존재에요. 나단 선지자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게 당신입니다. 당신은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에요. 율법에 의하면. 율법에 의하면 있어선 안 되는 존재인데 율법의 완성에 의하면 있어야 될 존재. 없음이 마땅한 있어야 할 존재로서 당신은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는 거에요. 그때 다윗은 말하기를, “내가 죄에서 만들어졌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할 때 그게 성령의, 성신의 외침이었어요.

내가 있음이 아니라 나는 있음의 증거에요. 내 뒤에 누가 계세요? 예수님의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잠시 태어난 거에요. 아도니야는 그런 생각 없습니다. “내 있음에 그 다윗의 권력의 짜투리, 그 다윗에게 옆에서 봉사한 궁녀라도 내가 차지하게 되면 내 자존심이, 다윗 권력과 약간 연계되어 있으니까 백성들 보기에 아직도 나는 권력자다.”라는 인식. “다윗의 정통적인 것은 솔로몬이지만, 나도 다윗의 한몫을, 한 주식을 하고 있다.” 이렇게 주장할 때 그 소리 듣고 솔로몬이 나서서 하는 말은, “어머님” 밧세바보고, “어머님.” 비꼬면서 이야기합니다. “왜 그 아비삭 준다하지 말고 내 왕권도 줘 버리죠 왜? 그 제사장 아비아달과 그 요압도 다시 원상 복귀 해주죠?” 이런 식으로 놀리는 게 22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내가 아도니야 살아있으면 내가 하나님께 저주받는다.” 해서 그다음에 군인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통해서 아도니야를 죽여버립니다. 죽여요. 이땅에 태양은 두 개의 태양은 될 수 없다. 그러면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비삭의 역할은 뭐냐? 아비삭의 역할은 소위 살았다는 인간 사이에 돌아당기는 자유전자 같은 것. 눈에 띄지만 보이지 않는 상태로 다윗의 아바타로서 다윗의 영혼으로서 죽은 다윗의 그러한 일부로서 다윗 죽고 난 뒤에 살아있는 살아있는 후손들 사이에 돌아당기는 그러한 없는데 있는 것처럼, 있는 듯 없는 모호한 존재로서 다윗 언약의 보존의 법칙을 보여주는 역할이 아비삭 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권력 휘두르는대로 휘둘릴 수 밖에 없고 자기의 권한, 자기주장을 일체 못하는, 마치 있어도 죽은 자처럼 다루어 지지만 그 아비삭으로 말미암아 권력 분포와 권력 구도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조종하는지를 중간에 아비삭 하나가 들어옴으로써 그 구도가, 그 구도의 진행 과정이 하나님의 언약 관점에서 드러나고 노출되는 거기에 들어가는 기능자, 그게 아비삭이에요.

오늘날 보이지 않는 주님을 대신해서 여기에 등장한 유령 같은 존재, 우리가 아비삭 입니다. 비록 아리따움까지 얼굴이 이쁜 건 아니지만, 언제 죽어도 상관없고, 그리고 안 죽고 살아있어도 상관없는 자유자, 진정한 언약 안에서 이미 구원된 자유자. 구원 안에서 구원되지 않는 지옥 같은 세상을 활동하는 성도의 모습. 이게 아비삭의 역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 보이지 않는 주께서 아비삭 같은 기능과 역할을 저희에게 맡겨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세상 권력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지, 모든 것이 헛된 것만 찾고 있다는 것을 저희를 통해서 알려지는 계기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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