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오실 엘리야

아빠와 함께 2024. 10. 18. 09:20

오실 엘리야

2024년 10월 16일         본문 말씀: 말라기 4:4-6

(4: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4: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끝까지 율법으로 밀어붙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입각해서 더러운 자들은 천국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한 하나님께서 밀어붙이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 속에 담긴 내용입니다. 평소에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 내용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더럽기 짝이 없는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는 겁니다.

이것을 위해서 선지자 인생 자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특이한 변화입니다. 예룰 들면, 호세아 1:2-3의 내용 같은 겁니다.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호 1:2-3)

음란한 아내를 취하게 되면 선지자 자신의 구원은 다른 사람들 보기에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는 평을 받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개인의 구원 성공이나 명예심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로지 장차 오실 예수님의 본성과 본질을 선지자 내부에 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일반인들의 급선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 육신의 생존입니다. 우선적으로 일단 살아 남고 보자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이나 깨끗함은 늘 생계 문제에 밀리게 됩니다. 사람이 살만해야 그다음에 하나님의 영광이나 하나님을 위해 바른 삶을 산다는 것이 육신적으로 당연시 올라오는 본심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하나님께서 율법을 퍼부어도 인간의 육신 자체가 이미 더럽기 짝이 없는 생각에서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즉 내가 굶어 죽고 아파 죽는 마당에 무슨 하나님의 입장까지 생각하느냐는 겁니다. 바로 그점이 선지자들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비-율법적 생각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들이 전면적으로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 또는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같은 말씀입니다. 즉 모든 이미 멸망의 대상으로 확정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다른 조치가 또 준비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택한 백성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주입하여 그것으로 인하여 완전한 의인으로 만들어 하나님 아버지와 합류가 가능하게 한다는 겁니다. 이 일을 가능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다시 엘리야를 보내시겠답니다.

이는 엘리야 선지자의 기능을 제대로 완성하실 분이 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처음 왔던 엘리야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로마서 11:2-3에 보면,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험한 세상에 대해서 엘리야는 주저없이 하나님께서 송사하십니다. 또한 누가복음 4:24-26에 보면,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천하가 다 의도적인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놓여 있더라도 선별적으로 구원할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심판 속에서의 구원입니다.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 두 번째 엘리야가 오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엘리야가 왔습니까? 엘리야가 왔다고 하면 이는 이 세상이 벌써 전면적인 심판 속에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구원을 요청할 그 어떤 자격자도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구원되고 구원되지 않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오실 엘리야의 몫입니다. 누가복음 1:16-17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받은 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례 요한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 제사장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에서 내뱉아지는 모든 말들이 밖으로 나왔다하면 거짓이요 왜곡이요 더럽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말로 인해 가리워지지 않는 말을 사가랴의 아들인 세례요한 입에서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말을 해야 될 법을 배우는 자가 아니라 자기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우는 자입니다. 하지만 이 세례 요한마저 여전히 율법+선지자라는 구약의 계시에 갇혀 있는 자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변화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마 17:2-3)

구약이란 계시 한계는 예수님에 의해서 넘어서고 완성이 됩니다. 진정 최종 ‘오실 엘리야’는 예수님이 되십니다. 즉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께서 돌릴 수 있는 능력은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어떻게 나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크게 소릴 질렀던 두 외침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27:26입니다.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큰 모독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누가복음 23:46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놓고서는 그 버림받은 영혼을 도리어 아버지에게 부탁하십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 사이에 예수님의 이런 과정이 실이 되어 새로운 통합된 원단으로 꿰매어져서 하나로 연결됩니다.

따라서 진정 구원받은 성도는 이 실이 주입되어 있기에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저를 충분히 모독하셔도 괜찮아요!” 사도 바울에 고백은 이러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주님 마음으로 충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강-말라기 4장 4-6절(오실 엘리야) 241016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말라기 4장 4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아멘.

구약성경은 이렇게 해서 오늘 이 본문으로 끝이 납니다. 본문 끝까지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그 내용은 바로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입니다. 왜 이것을 끝까지 하나님께서 앞장세우시느냐 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율례와 법도를 찾으시는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많은 숫자가 구원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의로움입니다. 거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호렙산에서 율례와 법도를 주셨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들이 전체적으로 더럽다는 겁니다. 이것은 더러운 인간은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양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에요. 변경하지 않는 어떠한 융통성도 없는 단호함입니다. 더러운 인간은 천국에 가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더럽다, 안 더럽다, 깨끗하다, 안 깨끗하다를 너희들이 결정하지 말고 내가 모세를 통해서 준 그 율법에 준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더럽다고 하시고 무엇을 깨끗하다 하시는가, 그 율법을 기억하면서 너희들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겁니다.

돌아보게 되면, 인간들은 자기 자신들이 참 더럽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하나님은 더러운 자를 천국에 안 받아줍니다. 그런데 율법을 받은 인간들은 본인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더럽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뭐 대책 없지요. 아무 대책 없어요. 더러운 자는 하나님께 합류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여기 이 말씀을 남기는 말라기가 선지자입니다. 말씀을 보게 되면 그 선지자, 모세 율법만 주신 것이 아니고 선지자도 같이 겸해서 주셨다는 데서 구원의 희망을 주께서 피력하셨어요.

그 선지자 말 내용에 모세 법에 의해서 더러운 것은 하나님께 올 수 없다는 것도 분명히 하고, 또 하나가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낸다는 것”을 선지자 말라기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니 이 말은 말라기는 계통은 어떤 계통이냐? 전에 왔던 엘리야 선지자 계열에 따라서 말라기 선지자가 마지막 선지자인데 그 전에 있던 계통에 따라서 보면 엘리야가, 그 엘리야가 최초의 선지자거든요. 엘리야 계통에 따라서 말라기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가 말하되 엘리야가 온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똘똘 말렸어요. 시작 하신 분도 엘리야인데, 마무리 짓는 것, 마무리 짓는 것도 엘리야다. 오셨던 엘리야가 오실 엘리야가 되는 겁니다. 엘리야가 왜 두 번이냐 이 말이죠. 모세는 두 번 아닌데 엘리야는 두 번이에요. 말라기도 두 번 아닌데 엘리야는 두 번이에요. 두 번 나타나는 겁니다. 두 번 나타난다는 취지는 그 율법을 주면서 율법도 완성되고 자기 백성도 의롭게 되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그 방법의 비책이 오실 엘리야 속에 담겨있다는 뜻입니다. 율법을 주고 더러운 인간은 절대로 안 받아요.

그런데 그 말라기가 예언하는 엘리야 선지자가 해야 될 일이 갖고, 해야 될 일, 그냥 놀러 오는 게 아니고 구경하러 온 게 아니라 해야 될 일을 갖고 오시는 겁니다. 그 해야 될 일을 오늘 본문에서 말라기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5절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이렇게 했어요.

크고 두려운 날이라 하는 것은 율법에 준해서 전면적으로 심판 해버리는, 잔혹하게 심판하는 그때는 반드시 온다는 거에요. 심판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전면적인 심판을 전제로 하고, 또 6절에, “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그러니까 이 구약의 마지막도 뭐로 끝나는가? 그냥 저주로 끝나요.

처음에 왔던 엘리야 선지자가 어떤 일을 했느냐 하면, 그 로마서 11장 2절에 보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을 율법에 준해서 고소하고 소송한 그 일을 누가 했는가? 그 일을 엘리야가 했어요. 율법에 준해서. 그러니까 이 율법에 준해서 주님께서 계속해서 선지자를 보내서 소송을 계속 그동안 해 왔다는 겁니다.

그것은, 소송을 하는 이유가 율법을 준 그들이 남의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이 선택한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그런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율법을 주고, 그게 더럽다는 것을 일깨워서 그다음에 선지자 보내어서 더럽다는 것을 더럽게 분명히 소송하고 고발하는 작업을 하나님께서 겸하여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참 부지런하셔요. 기어이 하나님께서 더러운 인간 속에서 정결하고 깨끗한 자기 백성을 건져 낼려고 그렇게 시도하신 겁니다.

소송한 거에요. 그러면, 이 선지자 안에 두 개의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은 더럽다는 것, 근데 더럽다를 더럽다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건지시기 위해서 더럽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고맙지 않습니까? 감사하지 않습니까? 잘난체하지 말라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그러면 그 더러운 것을 싫어하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더러운 인간을 안 받는다고 분명히 해놓고는 자기 백성 된 자를 하늘나라에 들여보내느냐? 그것은 선지자가 와서, 엘리야 선지자가 다시 오는거에요. 엘리야 선지자가 다시 와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신다”는 거에요.

여기에 자녀입니다. 아무나 돌이키는 게 아니고 자녀에게 해당되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궁금한 게 뭐냐 하면, 인간은 모두 다 추접고 더러워서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는데 그 자녀에게 온다는 것은 모두가 자녀 될 건 아니겠고, 어떤 자가 자녀냐? 어떤 자는 자녀고 어떤 자는 자녀가 안 되느냐?하는 그런 것이 또 우리가 의문점이 들 거에요. 궁금할 겁니다. 엘리야의 기능 가운데서 바로 그것이 나와요.

누가복음 4장에 보면, “내가 참으로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4장 24절에, 25절에 보면,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라고 되어있어요.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아까 이야기한 선지자의 기능은 고발 기능, 소송기능, 그리고 심판 기능을 전제로 하지요.

여기 “온 땅이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는 그 중 한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라고 되어있어요.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가장이 없고 여자 혼자 자식 놓고 살면서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좀 이렇게 자비를 베풀어서 도와주실 만도 한데 “엘리야는 그중에 한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라고 되어있어요.

이거는 뭐냐 하면 전면적인 심판 속에서 선별적인 선택으로 구원하시는 거에요. 그런데 전면적인 심판을 할 때 여기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라는 말이 나옵니다. 엘리야 시대에 큰 흉년이 들었어요. 이거는 뭐냐 하면, 인간이라는 그 존재가 하나님이 율법 주시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아무리 들어내도 관심사가 뭐냐 하면, 자기 몸뚱아리 하나 생존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에요. 인간은.

이 급선무가 뭐냐 하면 밥 먹고 사는 거에요, 인간은. 하나님도 좋고 뭐 율법도 다 좋고, 죽은 다음에 천국 가는 것도 다 좋지만, 그거는 나중 문제고 인간이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은 제일 앞에 코앞에 떨어진 이야기는 뭐냐? “어떻게 밥 먹고 살 수 있느냐?”하는 그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바로 그 문제에 허겁지겁 매달린다는 것을 너무 잘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생존과 생계가 인간의 뜻대로 자기 마음대로 안 되게 조성해 버립니다. 그게 심판이에요.

“너희들이 밥 먹고 사는 것부터 먼저 원했잖아. 하나님은 뒷전이고, 하나님 말씀도 뒷전이고 약속도 뒷전이고 우선 살고 보자, 그게 제일 급하지, 그지? 내 너희들 마음대로 안 해준다.” 이게 심판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들은 어떤 꼼수가 있느냐 하면은요, “하나님의 율법도 지키고 말씀도 지키고 다 좋지만, 그것은 일단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난 뒤에 그다음에 하나님 말씀에 관심 갖겠습니다.”쪽이에요 인간은.

“일단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되고 난 뒤에 천국 갈 수 있도록 바르게 살겠습니다.” 이거에요. “의롭게 살겠습니다.” 이게 인간들의 내민 카드에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걸 의롭다고 그걸 깨끗하다고 봐주지 않고 그걸 더럽다고 간주, 이미 작정하신 거에요. 그 생각이 더럽다고요. 그러면 인간 쪽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뭐 바르게 살고 하나님 말씀도 좋지만, 뭐 배고픈데 뭘 바르게 살아가 되겠습니까? 우선 하나님 쪽에서 먼저 살려 주시면 은혜 감사합니다 하고 하나님 말씀 지키겠습니다.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인간 쪽에서 이야기하겠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러니까 너는 그 더러움에서 못 벗어난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가뭄이 들든 굶어 죽든 간에 그게 나의 우선 문제가 아니고 어떤 상황이 온다고 할찌라도 주님 앞에 더럽지 않는 삶, 이게 우선 문제라 하는 것은 니 마음속에 아예 없지 그지? 아예 안 들어있지 그지? 나 그거 잘 알거든?” 그렇게 돼요. 그래서 선지자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선별된 택한 백성에게는 그들의 먹을 것, 입을 것을 제공함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깨끗함과 의로움이 이거는 내가 말씀을 지켜서 성취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딱 찍어버리는 거에요. 택한 자라고 딱 찍어버린 자에게는 깨끗함이 어떤 것이 깨끗함이냐 하면, 딱 선택했다는 것, 하나님의 은혜가 일방적인 은혜가 주입되고 은혜가 찾아왔다는 것, 이것이 모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움의 응축이 되는 거에요. 거룩함의 응축이 돼요. 덩어리가 되는 거에요.

그게 뭐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사렙다 과부는요, 어떤 태도였냐 하면, 굶어 죽기로 작정한 사람이에요. 굶어 죽기로 작정했는데 엘리야 나타나서 살려줬잖아요. 그럴 때 그 과부는 이미 자기는 죽은 자에요. 그것도 굶어 죽은 자에요. 그러면 그다음부터 남아있는 세월은 자기 생에는 뭡니까? 감사와 감사로 이어지는, 은혜로 이어지는 삶인 것을 알 때 그것보다 더 의로운 게 어디 있습니까? 그것보다 더 깨끗한 게 어디 있어요? 주님이 주신 것으로만 감사하는데 그것보다 더 완전한 의로움이 어디 있어요. 그게 최고의 의로움이에요. 그래서 선택한거에요, 엘리야가. 선택 해놓고 의롭다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원칙을 오늘 본문에서는 뭐냐? 먼저 아버지가 자녀에게 찾아가는 거에요. 선택한 자녀에게. 그러면 선택된 자녀는 뭘 아느냐?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거에요. 첫째는 뭐냐? 더러운 인간은 못 들어간다는 그 마음을 이해하고요. 두 번째는 인간의 힘으로 의로울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돌이키는 마음까지라도 은혜로 선물로 줄 때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로 의로움이라는 사실, 그것 두 가지를 그 자녀는 알게 되는 겁니다.

말라기 4장에서 이 말씀을 했을 때,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얼마나 학수고대하며 기다렸겠습니까? 드디어 누가복음 1장 17절에 보면, 16절, 17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누가복음에 이 이야기를 누구한테 하느냐 하면, 세례요한의 아버지한테 이야기해요. 그런데 그때 이 이야기가 세례요한 아버지가 이름이 사가랴인데요.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에요. 사가랴한테 이야기할 때 아직 세례요한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말라기의 말씀이 먼저고 그 말씀 따라서 하나님의 인물이 배정을 받고 이 땅에 태어나는 거에요. 이게 세례요한이거든요. 이게 택한 세례요한이다 이말이죠.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어때요? 여러분이 먼저 태어나서 예수 믿고 구원 받았습니까? 아니면 말씀이, 예언이 먼저였어요? 말씀이 먼저였어요.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아니 창세 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되고 예정된 자 이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 속에 주입되는 겁니다. 이 오늘 본문 말라기 말씀이 여러분 속에 주입되는 거에요. 이것이 세례요한이 먼저 시범을 보여준 거에요. 샘플을 보여주는 거에요. 이렇게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리는데 사람들은 이 대목을 보면서, “야, 이 세레 요한이 아주 큰 일을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을 겁니다. 세례요한이 앞으로 태어나서 많은 일을 하겠다. 주의 백성을 많이 돌아오게 하니까.

그리고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 많은 말을 하면서 돌아오게 하겠다. 이렇게 생각하죠. 그러나 그거는 오산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한 그 세례요한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례요한 아버지 사가랴ㅋ에게 말을 못하게 하는겁니다. 왜 말을 못하게 하느냐 하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요 다 구라에요. 거짓말입니다. 인간이 말을 한다는 것은 그 말 속에 사기성이 농후하고 거짓으로 가득 담겨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상 아담에게 악마가, 마귀가 들어왔기 때문에, 마귀가 들어와서 인간은 말만 시작 했다 하면 그다음부터 사기와 거짓말과 오류가 마구마구 터져 나옵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마음에서 나온 마귀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께서 사가랴의 말을, 말을 못 하게 했어요. 그러니 이 말은 뭐냐?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고 말 못 하는 법을 배워야 그다음부터는 인간이 말 못 함에 의해서 인간의 말함에 의해서 가리워지지 않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 나오는 조치가 세례요한을 통해 나올거에요. 오늘날 성도도 말을 쏟아 낼 때, 성령께서 “또 거짓말 하고 있네”라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진짜 진리가 “내가 말 잘 할수 있다”에 가리워지지 않도록, 내가 저 사람을 설득해서 구원받게 해준다는 데 가리워지지 않도록, 성도로 하여금 말 못 하는 법, 다시 말해서 내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그쪽으로 성령께서 작용을 해 주십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나는 거짓말만 했는데 상대가 구원받았다. 그럼 누구 업적이에요. 누구 생산물입니까? 주님의, 성령의 생산물이지요.

말빨 좋아가지고 사람 구원하고 이런 법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사도바울이 그런 말을 했죠.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그래서 사가랴에서 세례요한이 태어났습니다. 태어났는데 문제가 이제부터 조금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왜 복잡해지느냐 하면, “오실 엘리야가 과연 세례요한이냐?”하는 그 문제에요. 오실 엘리야가 과연 세례요한이냐?

여기 엘리야라는 것은 구약 인물이에요. 전에 있던 엘리야가 다시 구약 인물인 엘리야가 또 온다고 되어있습니다. 그 이야기 마저 뭐냐? 율법과 선지자 속에 포함이 되게 되어있어요. 이 말조차. 엘리야가 다시 온다는 것조차 포함이 되어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 11장 이야기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11장 13절에 나옵니다.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하는 것이 요한까지니”라고 되어있어요.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하는 것이 요한까지니. 그러니 이 말은 뭐냐? 요한조차도 구약에 속한다 이 말이죠. 요한조차도 율법과 선지자에 해당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선지자의 완성, 율법의 완성은 세례요한 넘어에 있는 거에요. 세례 요한까지 구약적 인물이 되다가 그다음부터는 그 너머에 율법과 선지자에 했던 내용이 율법 속에 있는 사람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율법을 완성한 분이 모세와 선지자를 다 완성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변화산 이야기 아시죠. 변화산 이야기할 때 그 때 예수님이 딱 등장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놀랬어요. “야, 예수님이 해같이 빛나는데.” 근데 그 옆에 볼 때 예수님 혼자인 줄 알았는데 그 옆에 누가 있느냐? 모세가 있고 엘리야가 있어요.

모세는 율법, 엘리야는 선지자. 모세와 선지자로 모든 말씀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그걸 포함하는, 모세와 선지자의 예언을 해같이 빛나는 예수님이 완전히 포함을 시켜서 완성을 하는거에요. 그래서 그러면 세례요한은 왜 왔는가? 세례요한은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을 아비로 돌리는 그 기능을 세례요한을 통해서 맛보여주고 그 세례요한의 한계점, 세례요한이 그 말라기 말씀을 온전히 이룰 수 없고 다른 다음의 제대로 된 엘리야한테 넘겨 주는 그 기능까지만 세례요한이 하는 거에요.

마태복음 11장에서 옥에 갇힌 세례요한이 3절에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합니다.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세례요한이 옥에 갇히면서 자기는 분명히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구약적 안목을 가지고 이해하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오롯이 제대로 전부 다를 알 수는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세례요한의 한계가 등장합니다. “과연 맞습니까?”라고 의문시, 의문의 태도를 갖게 돼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4절에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요한아, 너의 몸을 통해서 예언한 그것이 이제 나,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이 된다고 주께서는 알려주시는 겁니다. 혹시 잊어버릴까 싶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마는, 엘리야의 기능이 뭐냐? 전면적인 심판이라고 했어요. 전면적인 3년 6개월 전체 다 심판.

또 뭐라고 했습니까? 그 심판을 먼저 깔아놓고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선별적으로 택한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는 것, 이게 엘리야의 기능이었습니다. 그 기능을 전에 엘리야가 하는 것처럼, 마지막 엘리야 대신 예수님께서 그 기능을 이제 해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그 기능에 대해서도 아직 율법적인 안목을 가지고 자신의 기능, 돌아온다는 태도에 대해서 하나님께 인간이 돌아 올려면 어떻게 돌아오느냐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세례 줄 때 백성들이 물었어요. 누가복음 3장 10절에,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이렇게 했어요. 그럼 이거하면 구원 받습니까? 아니거든요.

이거는 뭐냐 하면 세례요한도 구약의 율법에 속해서 이렇게 하게 되면 마치 아버지께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처럼 그렇게 곡해를 해서 소개 해준거에요. 자, 그러면 오실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인간이 옷 두벌 있는 사람은 옷 없는 자에게 나눠주는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아버지께 돌아간다고 예수님도 세례요한과 똑같이 언급했습니까? 그건 아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의 방식은 뭐냐? 이게 예수님의 방식을 제가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예를 들겠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오게되고, 자녀를 아버지에게 돌리게 되면 이거는 아버지의 마음과 자녀의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고 묶어진다는 거에요. 연결되고 묶어지는 이 방식에 대해서 바리새인, 유대인들 방식이 있고요, 세례요한 방식이 있고 예수님 방식이 다 달라요. 어떻게 다른지를 제가 손 바느질 기법을 가지고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바느질에 보면 ■공그르기 방법이 있고 ■박음질 방법이 있고 또 ■홈질 방법이 있고 네 번째, ■새발뜨기 방법이 있어요. 공그르기, 공 구르는 것 말고, 공그르기 방법이 뭐냐하면, 원단 중에서 시접, 시접이란 게 있어요. 시접이 뭐냐 하면 원단에서 접혀져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원단 솔기 같은 것, 접혀진 것. 접혀진 것 하고 접혀진 것 하고 바느질 할 때 시접과 시접을 만나서, ‘접’이란 것은 접혀진다는 뜻이에요. 접혀진 그 두 부분을 연결할 때 하는 바느질이 공그르기에요.

굉장히 어려운 용어에요, 공그르기. 두 시접, 삐져나오는 연결된 시접에다가 안쪽으로 바느질해서 뒤쪽으로 나오고 뒤쪽으로 바느질 해서 바느질 해 나가는데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행한 것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과, 아까 뭐 옷 두벌 중에 한 벌 바치고, 한 것과 만나서 그것을 실로 연결 시키면 우리의 순전한 마음으로 연결 시키면 그거는 하나로 묶어진다. 꿰맴이 성립된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적 사고방식이에요.

유대인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 안 해도 되는데 여분의 구원하라고 율법이라는 시접을 줬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마중 나와서 우리의 선한 양심과 정결한 신앙심으로 마중을 나와서 이건 우리의 시접이에요. 시접과 시접을 이렇게 하나로 바느질해서 묶어줄 때 그 바느질 실은 뭐냐? 우리의 착한 심성, 회개하는 심성 그것가지고 바느질하면 된다는 거에요. 이게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했던 주장들입니다.

예수님한테 욕 바가지 얻어먹죠. 그게 바로 마귀의 방법이라는 거에요. 두 번째, 박음질. 세례요한의 방식인데요. 박음질은 시접이 있는게 아니에요. 그냥 원단이 있어요. 두 개의 원단을 겉이 보이지 않으면서 안쪽에만 박음질한 실이 보이는 방법으로 하는 것. 실이 지나간 라인이 있잖아요. 스티치라고 하는데, 그 스티치가 보이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주의 말씀대로 우리를 박아버리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연결된다. 나라는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이게 세례요한의 방식이에요. 그리고 이 박음질은 밖에서 보면 실 엮어가는 스티치가 보이지가 않아요. 실의 라인이 안 보인다 이 말이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하겠죠. 그런데 세례요한의 문제가 있어요. 뭐냐 하면, 이거는 구원받기로 했는데 내 한테는 공로가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마음을 주시면 우리는 구원 받는다가 되어요. 그러니까 먼저 뭐가 있냐 하면, ‘나’라는 원단을 주께서 그냥 하나님 원단하고 합치시킨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근데 마태복음 11장 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천국에서는. 세례요한 자체가 천국에 작은 자보다는 천국에 대한 인식이 많이 모자란다는 뜻이에요.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천국의 어린아이가 세례요한보다 훨씬 더 크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세례요한의 박음질은 이것도 주의 온전한 뜻이 아니라는 뜻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하신 것은 뭐냐? 세 번째, 새발뜨기. 새발뜨기라 하는 것은 새의 발자국이라는 뜻이에요. 이건 어떠냐 하면, 병장들 바지 밑단 할 때 어떻게 하느냐? 큰 정장 입고 밑단은 밑에 대롱대롱 달린 채 바느질 하는거에요. 달린 채. 매달린 채 하는 거에요. 하는데 이게 그 뜨개질 하면서 나란히 보기 좋게 하는 것이 아니고 새발처럼 삐쭉삐쭉 앞면엔 나타나지 않고 뒤쪽에 삐쭉삐쭉삐쭉삐쭉 새발처럼 이렇게 나타난다고 새발뜨기라고 된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아까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찾아 올 때 우리 구원을 위해서 찾아오는 게 아니고 주님의 자신의 실로 인하여 매달릴 필요도 없는 우리를 매달리게 만드는 거에요. 하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오시는 거에요.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고 예수님 마음이 오는 거에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하면, 예수님 자신이 더러운 죄 안에 들어오셔서 아버지로부터 모독을 받는 경우를 하는 거에요. 그 경우가 새발뜨기의 실이 돼요.

마태복음 27장 46절에 보면,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거에요. 이것은 뭐냐? 아버지로부터 저주받고 버림받는 자에 대해서는 일체 그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이 없는데 구원이 없는 그 저주받음. 내침을 당함. 버림받음에 예수님이 거기에 가담이 되어버리면, 예수님이 실이 돼요.

그 다음에 그렇게 하게 하시고 누가복음 23장 46절에 보면, 이때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할 때 소리 질러 이야기했거든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외친 소리 지르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소리 지르는 경우가 두 개 있어요.

누가복음 23장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조금 전 까지 소리 질러서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마지막에 내 영혼을 아버지에게 부탁하나이다.” 매달리는 거죠. 아버지께 매달리는 것. 새발뜨기를 예수님께서 먼저 시범을 보인 거에요. 내 구원은 없어요. 예수님부터 구원하는 거에요. 예수님 구원하시고 그 예수님 자신의 피, 예수님 자신의 몸이 우리 안에 바느질해서 이 꿰맴을 당한 사람이 있어요. 택한 백성이에요. 창세 전에.

그걸 가지고 뭐냐? 예수 안에서 선택된 사람. 주님이 꿰뚫어 올 때에 바로 우리는 제가 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고 구원이고 지금 제일 급한 게 밥벌어 먹는 거에요. 밥부터 먹고 난 뒤에 교회를 가든 뭘 하는 거에요. 우리는 그 정도로 악마가 집어 넣어준 이 마음에서 우리는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 탈출할 수 없는 거기에 꿰뚫어버린다고요, 바느질해서 끌고 가는 거에요. 바느질해서. 아프죠. 아프지만 그걸 바느질을 해서 강제로 매달리는 식으로 우리를 결합시켜버리는 겁니다. 연결 시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고백이 나오느냐 하면, “주님이 원하시면 주님이여 저를 충분히 모독하셔도 괜찮아요. 주님의 뜻이라면 저를 충분히 이 땅에서 모독받는, 조롱받는 삶이라도 저 괜찮습니다.” 이게 철저하게 주님에 의해서 차압당하고 포획당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주님의 바느질은 가지런하지 않아요. 새발뜨기. 새발처럼 왔다갔다 왔다갔다 해요. 그런 사람이 있느냐? 있습니다.

로마서 9장 3절, 언제봐도 정말 놀랍기 짝이 없는 말씀. 3절에,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주님의 뜻이 펼쳐진다면 주님 저같은 것 구원 안 해주셔도 됩니다.”라는 태도. 이것이 주님의 고난이 실처럼 이미 내 속을 관통하고 끌고 갔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내 영혼을 맡깁니다.”라는 주님의 고백이 그 사람 속에 살아있는 겁니다.

꿰맨 실 안에 살아있는 거에요.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이 이미 관통된 자녀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에서 어린아이라도 세례요한보다 더 위대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기껏해야 구약에 머물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돈은 돈대로 챙기고 육신을 챙기면서 감히 구원을 운운하는 이 오류와 이 어리석음과 무지함을 주의 십자가 피로 깨우쳐 주옵소서. 내가 원해서 구원되는게 아니라 주님이 친히 원했음을, 그 원했음을 우리 영혼 속에, 마음속에 영원히 꿰뚫고 지나갈 수 있도록 주께서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수요설교(241016)요약 말라기 4장 4~6절(오실 엘리야)

수요설교 한 것 요약하겠습니다. 그 흐름이 중요하겠죠. 엘리야가 다시 온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 다시 오심과 연관성이 있다는 거죠. 왜냐하면 제사장 율법은 율법대로 예수님이 오시기 때문에 말라기에서 엘리야가 다시 온다는 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는 것과 관련성이 있어요.

엘리야가 왜 등장했는가? 초반에 온 엘리야가 뭐 못 다한 게 있느냐? 엘리야의 특징은 불수레 타고 올라간 거거든요(왕하 2:11). 올라가신 분이 다시 온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심판을 하시겠다는 거예요. 심판하겠다는 것은 구원할 게 더는 남아있지 않다는 아주 무서운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이사 갈 때 중요한 것, 챙길 거 다 챙겼다는 뜻이에요. 이제는 전부다 불 질러도 괜찮다 할 정도로 중요한 것 다 챙겼다는 뜻이에요. 중요한 것을 챙겼을 때 세례 요한이 오해한 것은, 현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구원하시는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자식이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라면 아버지의 마음을 돌이키고 자식의 마음을 돌이키는 데 있어서 내가 이스라엘에게 해줄 이야기하고 여기서 끝냅시다. 모든 것을 이제 불심판합시다.

이렇게 했는데 아무 심판 현상도 안 일어나니까 세례 요한이, 혹시 오실 분이 당신 맞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메시아가 오자마자 작살나는 걸로 되어 있는데. 자기 아는 시나리오는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밍기적거리고 하늘이 아주 말짱하고 그렇다 이 말이죠.

그럴 때 모세와 선지자, 말라기 선지자죠,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은 예수님 쪽에 와서 다시 총정리 되어가지고 이것이 완성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완성이 되는 날 작살낼게. 완성이 되는 날. 완성이 되는 날 작살낸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배척받을 때 못 자국, 창 자국 있죠? 못 자국, 창 자국 있는 그 몸체로 승천하는 거예요.

올라가버리면 ‘예수님 빼놓고 구원 얻을 자는 단 하나도 없다’가 되어야 돼요. 예수님 빼놓고. 그러면 예수님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아비를 자식에게로 자식을 아비에게로 돌리는 그 완성된 기능이 있죠? 완성된 기능을 율법으로 나눠주면 끝나는 거예요. 성령을. 그 전에 성령주면 소용없어요.

율법과 선지자가 완성이 되어야 거룩이 되고, 말라기 예언이 완성되고 난 뒤에 완성되었다는 그것을 자기 백성 속에 집어넣어주면 되는 거예요. 그 작업이 끝나면 이제는 두 번째 엘리야가 해야 될, 유황불로 말라기 4장 1절의 유황불로 작살내는 일이 남아있는 거예요.

세례 요한이 무시무시한 선지자 일을 할 때 인간은 주둥이를 다물어야 되겠죠. 아버지의 말을 감히 인간이 말로 가리면 안 되겠죠. 그래서 그 아버지가 벙어리가 됨으로써 앞으로 세례 요한이 하는 모든 말은 사람이 하는 게 아니고 아버지의 말 그대로가 담길 것을 아버지를 통해 알려줍니다.

이렇게 알려주고 그다음에 엘리야가 했던 것, 전면적으로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더라도 그 가운데서 오직 사렙다 과부한테만 양식을 주죠. 그럼 과부는 이미 죽은 자에요. 마지막 남은 것을 먹고 아들과 죽으려고 했으니까 그거 먹고 죽으나 한끼 당겨죽으나 죽은 것은 확정 난 상태에요.

그런데 거기서 밀가루 통이 계속 차고 참기름이 계속 나온다는 말은, 이제부터 하나님 쪽에서 너를 살리는데 이유는 뭐냐? 엘리야가 하는 것처럼 율법은 냉혹하지만 선지자 속에 살리는 것이 있어요. 그것을 제가 설교시간에는 이야기 안했지만 요약에는 적어놨어요. 호세아.

[하나님은 끝까지 율법으로 밀어붙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입각해서 더러운 자들은 천국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한 하나님께서 밀어붙이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 속에 담긴 내용입니다. 평소에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 내용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더럽기 짝이 없는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는 겁니다.

이것을 위해서 선지자 인생 자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특이한 변화입니다. 예를 들면, 호세아 1:2-3의 내용 같은 겁니다.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호 1:2-3)

음란한 아내를 취하게 되면 선지자 자신의 구원은 다른 사람들 보기에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는 평을 받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개인의 구원 성공이나 명예심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로지 장차 오실 예수님의 본성과 본질을 선지자 내부에 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호세아 선지자 자신이 음란한 아내와 혼인함으로써 음란한, 저주받을 자식을 낳죠. 호세아 선지자 개인적으로는 더러운 자이기 때문에 구원이 안 되는 쪽으로 평이 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방법을 사용해서 자비를 베푸는 거예요. 음란한 여인을 값을 치르고 데려오는 것을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하죠.

선지자 기능 속에 자비와 은혜가 들어있는 거예요. 율법은 율법대로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듯이, 호세아는 사랑이니까요, 사랑을 보여주듯이 말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두 가지 기능을 예수님이 완성해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사렙다 과부에게 주듯이 똑같이 대상자들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성령을 줄 때, 성령 준다는 말을 ‘우리가 구원받을 때 성령이 오는구나.’로 이해하는 그것은 공그르기(blind stitch, 실땀이 겉으로 나오지 않게 속으로 떠서 꿰매는 바느질법)죠. 공그르기. 그것은 박음질에 해당되는 겁니다. 접힌 부분만 바느질하는 것. 하나님 쪽에서 내놓고 내 쪽에서 내놓고. ‘나’라는 원단이 계속해서 보장되는 것.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거저주신 은혜를 생각하는 것은 공그르기이고 박음질 정도죠.

그러나 새발뜨기(catch stitch, 단을 꺾어 접었을 때 가장자리를 밑감에 고정시키는 바느질 방법). 남자들 바지 밑단에 보면 되어 있는 새발뜨기. 아래쪽이 중력에 의해 너무 축 늘어지지 않도록 위쪽에서 붙들어 매는 그 바느질. 새발뜨기로 하면서 위쪽의 사랑이 아래쪽 죄인을 강제로 붙들어 매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입니다.

십자가 달릴 때 큰소리를 두 번 냈는데 하나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또 하나의 큰소리는 뭐냐?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눅 23:46) 그 절차를 그대로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게 되면, 우리는 버림받아야 마땅하다. 그리고 버림받아야 마땅한데 하나님은 버림받아 마땅한 것을 주님께 일임해서 주의 뜻에 쓰이도록 하셨습니다.

그게 로마서 9장 3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사도 바울이, 내가 주의 뜻에 쓰인다면 저주받는다 할지라도 저는 상관없어요. 괜찮아요. 마음껏 사용해달라는 거예요. 이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어떤 식으로 모독한다 할지라도 저한테는 그것이 모독이 아니고 도리어 당연한 걸로 받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사람의 태도라는 겁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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