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70908a약1장2절(실화)-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1장입니다. 야고보서의 내용을 보게 되면 신약 적이라고 보기에는, 이게 신약 안에 있는 구약을 신약적으로 해석을 했다. 이리 보시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율법으로 표현된 복음 또는 율법으로 표현된 예수님 이야기가 야고보서에요.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율법과 예수님이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보통 관련성은 어디서 회수가 되느냐 하면, 없어지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율법은 끝났지요. 율법은 끝났는데, 이런 것이 참 재미있어요. 십자가 안에서 이미 율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나니. 정죄함이 없다는 말을 다른 강의에서는 처벌 없음. 가락강의에서 ‘처벌 없음’이라고 했거든요. 처벌 없음. 일체 처벌이 없어요. 있습니까? 믿어요? 안 믿는 거 아닙니까? 일체 처벌이 없습니다.
아~ 고생은 있어요. 고생은 처벌이 아니고 예수님의 공생애 길을 가다보면 받는 거고, 그게 처벌이 아니고 오히려 ‘아~ 주님이 요 길로 가셨구나! 아~ 요쪽으로 가셨네!’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주님 가신 길을 가게 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처벌입니까? 그게 구원이지요. 복이지요.
보통은 율법에 관해서는 십자가 안에서는 처벌이 없는 동시에 율법도 이미 완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완성이 되었는데 야고보서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그 완성되었음을 십자가라는 고 영적 범위 안에 있는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겁니다. 실제화 시켜요. 말로 설명하면 이해가 좀 안되겠지요.
자,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잖아요. 십자가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고 율법은 완전히 완성을 이루었습니다. 율법이 원래 노리는 게 있었는데 율법이 완성이 되었어요. 그럼 율법이 노리는 게 없어요. 율법은 예수님과 상대하고 우리하고는 상대를 안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가 하나의 현실이 된다면 십자가 안에 있는 내용이 고스란히 요렇게 빠져나와서 요렇게 펑퍼짐하게 부추 전처럼 퍼져있겠지요. 밀가루 반죽해서 후라이팬 위에 해놓으면 퍼지잖아요. 십자가안의 내용이, 내장이 훅 현실에 퍼졌다 보시면 되는 겁니다. 이게 야고보서에요. 야고보서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바깥에 있는 사람은 요 십자가 안에 있는 율법의 완성을 보게 되면 이해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요 안에 같은 현실로 되어있지만 현실에 살면서 이해를 못해요. 율법에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기는 것이라는 말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이해를 못해요.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다는 것을 이해를 못합니다.
量(량) 또는 양이라는 뜻이거든요. 부피를 갖고 있는 양. 그런 양이란 한자인데, 세상 사람에서는 뭘로 보느냐 하면 이 세상을 균형을 맞출 때 선과 악 중에서 자기 선이 양이 많으면 자기가 죽어도 좋은데 갈 줄로 알아요. 모든 걸 양적으로 측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뭘로 하느냐 하면 이것은 질로, 성질로 측정 되거든요. 성질로. 이건 성질이고 저건 양이고.
양은 무엇이 전제되어야 하느냐 하면, 반드시 양이 될 때는 나라는 것이 있어야 돼요. 나라는 것이. 내가. 내 안에 선한 양이 많으냐, 악한 양이 많으냐, 나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제가 강의 처음에 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뭘 빠져 나온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는 양으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것이냐, 아니면 십자가 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이냐 하는 걸로 측정한다고요. 그러면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중요해요. 나는 항상 내 가치는 내 양으로 측정 돼요.
나는 나쁜 짓한 것 보다 착한 일한 게 많고 교회 빠진 날보다 참석한 날이 많고 이런 쪽으로 항상 내가 먼저 선점이 되어있으면 나는 양으로 측정해서 나쁜 것과 옳은 것과 죄악 됨과 의로움과 어느 것이 많으냐를 늘 측정하는 것은 이미 누가 있다? 내가 여기 포기하지 않고 여기 있다는 뜻이에요. 상당히 우리 자신이 우리한테 굉장히 위험한 존재에요. 우리 자신이 우리한테 굉장히 위험해요.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한테 물을 때는 “니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것이 있느냐?” 고 묻는 거예요. 어떤 질의, 예수님의 성질이 있느냐를 물어요. 그러면 우리는 양으로 대답하면 안돼요. “율법을 100개중에서 99개를 지켰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안 된다고요. “그러면 하나는 못 지켰느냐?” “하나는 못 지켰지만 99개는 지켰잖아요.” 이렇게 양적으로 대답해버리면 야고보서에 의하면 하나를 어기면 모든 것을 다 어긴 게 되어버려요.
다이아마트 창고가 있는데 그 창고에 다이아마트100개가 있는데 한 개에 불이 붙었어요. 까짓 거 한 개 에 불이 붙었는데. 이러면 안 되지요.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 창고가 폭발하겠지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두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니 몸 가지고 그리스도 몸으로 들어올 수 있는 그러한 방법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어요. 이게 없다 말이죠.
없는데,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자기가 착하니까 착한 것 중에서 십자가까지 믿어서 현재 나의 착함의 양에다가 십자가까지 추가해버리면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아직도 쓸 만한 존재가 된다. 라는 인식을 안 믿는 사람들은 계속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걸 쫓아내는 거죠. 이걸 추방을 하는 겁니다. 야고보서를 통해서. 그런 식으로 믿으려면 그건 믿음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추방을 하는 겁니다. 로마서 같으면 십자가로 이야기하겠는데 야고보서에서는 십자가 앞에 현실화된 널부러진 십자가의 법을 가지고 이쪽의 불신자를 추방을 하는 겁니다.
추방을 하게 되면 남는 게 뭐냐 하면 여기 야고보서1장 1절에 흩어져있는 열 두 지파라고 되어있지요. 이건 지난 시간에 진짜 정말 상세하게 이야기해 드렸습니다. 흩어진 열 두 지파 할 때 그 열 두 지파라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과 상관없이 야곱이 이스라엘 될 때 애들이 12명이었어요. 야곱이 이스라엘 되면서 머리 부분이 바뀌니까 그 자식들은 바뀐 분의 혜택으로 혜택을 입게 되어있어요.
육으로 난 자식이 열 두 명인데 아버지가 육에서 영으로 바뀌었잖아요.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면 그 안에 야곱언약에 준해서 그 야곱에게 태어난 열 두 아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그대로 전수가 되는 겁니다. 전달이 되게 되어있어요.
이삭의 복은 누구한테 전해집니까? 에서가 아니고 야곱이지요. 아브라함의 복은 누구한테 전해집니까? 이스마엘이 아니고 이삭이지요. 그러면 야곱의 복은 누구한테? 열두 명에게 몽땅 다. 요셉은 그걸 위해서 희생했고. 열두 명 몽땅 다 해당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뭐냐 하면 “저, 착해요. 저 잘났어요. 열심히 했어요.” 라는 말을 하지 말라 이 말이죠. 그거 해 봐야 양적이 돼요. “니 누구 믿지?” “지금 누구 믿지?” “누구 믿기는? 나는 나를 믿어요.” 이러면 그건 야고보에서 추방되는 겁니다. 요건 가짜. 이렇게 추방되는 겁니다.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외롭고, 의지하고, 기대고 싶고, 이 3가지가 인간의 늙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 바닥에 깔려있어요. 의지하고 싶고, 의지한다는 말이 기대고 싶은 것. 어린 애들이 특히 이런 게 많지요. 그래서 남자나 여자나 나이 되게 되면 뭘 못 견디느냐 하면 외로운 걸 못 견뎌요. 외로운 걸. 개나 키우던지 다른 걸 키우던지. 자식이 없으면 고양이 세 마리 키우던지. 제주도에 민박집 하던지 이런 거.
그 다음에 남자고 여자고 간에 자꾸 누굴 의지하려해요. 부모는 자식 의지하고 자식은 부모 의지하면서 이용할 것 이용해 먹고. 자꾸 의지해요. 남편은 아내 의지하고 아내는 남편 의지하고. 그리고 비슷한 말인데 기대는 것. 힘들 때 무조건 자기 힘든 것을 의지하고 기대가 좀 차이가 나는데.
기댄다는 것은 뭐냐 하면 3가지 다 비슷한 이야기입니다마는, 내 옆에 있을 때 당신이 이렇게 든든하게 있어주면 좋겠다. 하는 그건 의지 쪽에 강하고 기댄다는 말은 뭐냐 하면 화나잖아요. 스트레스 푸는 용으로 내 말을 경청해 둬. 경청이라 하는 것은 대인관계의 기본은 경청입니다.
자기 말만 하면 대인관계 안돼요. 상대방에게 바톤을 넘겨줘야 돼요. 당신이 나 부를 때 뭔가 할 말이 있었잖아. 내가 들어줄게. 말할 필요 없어요. 들어줄게 하고 죽 이야기하거든요.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려운 말인데, 전혀 엉뚱한 단어지만 이게 ‘질서’입니다.
질서는 뭐로 구성되느냐 하면 언어로 돼요. 언어. 문자와 음성을 언어라고 하거든요. 언어로 질서를 만들어요. 그러면 이 대자연은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자연이 갑자기 해가 나한테 이야기하고 이런 게 있어요? 없어요? 코스모스가 나한테 이야기 안하지요. 프란체스카는 이야기했다고 하는데. 새들이 짹짹 거리면서 하다가 얼마나 외로웠으면 감정이입했겠어요.
자연은 질서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 질서가 있고 인위적 질서, 인공질서가 있는데, 인공질서는 반드시 뭐로 구성되어 있느냐 하면 언어와 언어로 되어있어요. 언어로. 말을 못하는 벙어리라도 수화를 해야 돼요. 부부의 위기는 말문을 닫을 때. 말문을 닫을 때 이건 이미 위기가 온 거예요. 둘이 차타고 가면서 아무 말도 안하는 거예요. “니 와 한 시간 동안 말을 안 하나?” “하기 싫어서. 왜?” “그래도 말 해야지.” “꼭 해야 되나?” 이건 끝나는 거예요. 끝난 거예요. 언어를 통해서 질서가 유지되는 겁니다.
자, 그런데 이게 반칙이라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왜냐하면 인간끼리 왜 말을 하느냐 이 말입니다. 인간끼리. 뭐 말하라고 혀를 만들어주셨고 구강구조를 만들어 놓고 왜 말을 하느냐? 하나님 뜻은 이거에요. 야고보서에 나오지만, 야고보서에 혀 중요한 거 나오지요. 혀 조심하라고. 내가 준 언어 사용하느냐, 아니면 너희끼리 쓰는 언어 사용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들끼리 언어가 뭐냐 하면 야고보서4장에 보면 나오는데 세상과 짝하는 거예요. 세상과 짝하는 여자들에게 저주를 퍼붓거든요. 이 야고보서가. 이제 야고보서 주제가 어느 정도 윤곽 갑니까. 뭐냐 하면 십자가가 현실화 될 때에 분명히 내가 너희에게 하늘이 담긴 언어를 줬건마는 너희들 이 세상에서는 하늘이 준 언어는 이건 완전히 차단되어 있고 너희가 너희끼리 통하는 언어를 사용해서 어떤 질서체제를 갖추고 있으니, 질서체제는 어떻게 갖춘다고요?
외로워서, 기대고 싶어서, 의지하고 싶어서 말을 하는 겁니다. 외롭고 의지하고. 나이 한 80후반 되어가지고 있을 때 왜 혼자 못 사느냐 하면 노인정 가서 자꾸 말해야 돼요. 안 그러면 힘들어서 못 살아요. 자꾸 말을 해서. 지금 며느리 직장 생활하는데 자주 전화 걸고 “잘 있는가 전화해봤다.” 끊자 해놓고 잠깐만 해놓고 30분 이야기해버리고.
특히 며느리가 직장 고만두고 집에 있다. 이건 밥이지요. 계속 불러대는 거예요. 일이 있으면 그거 핑계대고 다 불러내요. 2층이 물세를 안 주는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 아휴, 내가 이야기했잖아요. 니가 와서 한 번 통장 봐라. 오라 이 말이에요. 통장 보는데 5초만 보면 됩니다. 와가지고 나랑 같이 놀자는 거예요.
십자가의 원수를 가지고 세상이라고 합니다. 야고보 4장4절에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누구 입장이에요? 십자가 안에 있는 하나님 입장이고. 십자가 모르는 세상의 입장에서는 누구하고 살아야 돼요? 아니 세상 사람하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야고보서는 세상하고 이렇게 너무 친하게 지내면 1장에 나오는 흩어진 열 두 지파 의미가 사라진다는 겁니다. 열 두 지파 이스라엘을 어떻게 만들어놨는데, 그 열 두 지파 이스라엘이 이 세상 이방나라 속에 있었다는 그 취지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유지를 시키려 하는 거예요. 유지를.
유지시키는 방법이 뭐냐 하면 “열두 지파들아! 너희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그런 언어를 사용하라.” 이 말입니다. 야고보가.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 야고보서가 이게 미쳤나? 무슨 이야기인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마치 십자가의 그 질, 그 성질이 세상 사람한테는 십자가 의미를 모르는 것처럼 심지어 교회도 몰라요.
이쯤해서 다시 확인 들어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산다고요? 나라는 것이 구축되어 있으면 어떻게 산다고요? 내 안에 뭘 따진다? 양을 따지지요. 무슨 양? 나는 착한 양이 많으냐, 나쁜 짓이 많으냐, 보고 착은 것이 많으면 흐뭇하고 안심인 거예요. 안전빵이라. 착한데다가 예수까지 믿으니 얼마나 착해요. 하지만 그게 뭐가 모자랐습니까? 이미 나라는 것을 존재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했지요. 나라는 것을.
나라는 것을 유지하게 되면 나는 양적으로 선과 악이 양분되어 있다니까요. 양분됐다는 말은 이쪽에 어떤 양이 있고 저쪽에 양이 있어가지고 차려놓은 양들을 비교하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나 십자가에 있는 열 두 지파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모든 율법을 지켰다. 대단하잖아요. 그러나 하나를 어겼다. 양으로 어느 쪽이 많아요? 의가 많고 죄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전혀 십자가 안의 원리 원칙과 안 맞는 다른 성질에 속한 인간이 되는 겁니다.
질서에는 자연의 질서가 있고 인간의 질서가 있다고 했지요. 자, 그럼 인간의 질서에 있는 이쪽에서는 언어가 활발하게 오고갑니다. 언어가. 무슨 이야기인지 그렇게 이야기가 많아요. 남자들이 여자들 이야기하는 거 보면 남자들이 옆에서 보면 어떤 한심스러울 때가 있어요. 줄여서 3분만 하면 되는 이야기를 3시간 동안 이야기하고 있다고요. 결론은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데 이쪽 자연의 언어는 어떻게 언어가 있습니까? 아니면 침묵입니까? 침묵이지요. 요게 중요한 거예요. 가끔은 우리가 침묵해야 된다는 사실이에요. 가끔은. 가끔은 노가리 푸는 것을 중지를 할 때가 있어요. 이건 어디서 이걸 인위적으로 억지로라도 이걸 훈련하느냐 하면, 천주교에서 많이 해요. 피정. 정을 피하는 겁니다. 세상사는 정을 피하는 겁니다. 이 세상사는 정을. 억지로라도 병이나 보고 주둥이라도 다물라고. 말 좀 하지 말라고.
왜냐하면 이게 참 인간이라는 게 이래요. 인간에게 언어를 한다는 것은 아까 친구하고 커피숍에서 한 두 시간동안 노가리를 풀었잖아요. 언어로 말했잖아요. 집에 와서도 한 시간 동안 전화로 한다고요. 집에 잘 들어 갔나 해가지고 한 시간동안 마저 한다고요. 만약에 전화도 안하고 카페에서 안 만났다면 인간은 가만히 있느냐, 인간은 누굴 상대로 계속 이야기를 해요.
그게 왜냐 하면 외롭고 의지하고 기대고 싶기 때문에 인간은. 외롭고 의지하고 기대요. “그럼 목사님, 인간은 왜 외롭고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습니까?” 인간은 개별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개별자가 아니고 아담 안에 속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두 사람이 아니고 세 사람이 아니에요. 하나에요. 그래서 어떤 종족에 보면 부정관사가 없습니다. 부정관사가 없다는 말은 어떠한 물건이라든지, 물건, 숟가락이든지, ‘어떠한’ 이게 없어요. 어떤 종족에는 이게 없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개별자를 인정하지 않아요. 개인 개인을 인정하지 않아요. 그럼 개인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를 통합체로 보는 거예요. 통합체. 하나의 통합체.
우리는 전화 걸고 맛있는 거 서로 나눠주고 떡 나눠줄 때 우리는 친구라고 보잖아요. 그런데 어떤 종족은 태어나면서 이미 자동적으로 한 가족이 되고 하나의 친구에요. 인구 숫자는 얼마 안 많겠지만. 남이라는 게 성립 안 된다니까요. 그냥 우리에요. 우리. 태어나면서부터 우리에요. 그러니 남의 집이 없어요. 저쪽 집에 불라면 내 집에 불난 거예요. 마치 50년 전에 촌에 골짜기에 살 때, 이쪽 마을 이쪽 마을 따로 있잖아요. 보통 성씨가 하나지요. 이 성씨에서는 고모, 삼촌 따로 없고 전부 다 한 식구잖아요. 한 식구. 그런 종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그래서 부정관사가 없다는 말은 특정한 따로 떨어진 게 없고 전부다 한 공동체가 된 거예요. 한 공동체. 그런데 요새 공동체라는 것은 “우리가 노력하세!” “우리가 개인이지만 모아서 한 공동체하세!” 라고 공동체를 추구하는 식으로 공동체지만 이런 가족은 추구해서 얻는 공동체가 아니고 태어나면서 이미 공동체에요. 태어나면서.
그럼 마음가짐이 어떻겠어요? 전혀 불안하지 않지요. 이런 나라가 전 세계에 아직도 이런 나라가 있어요. 그 나라 이름이 세계 현재 220나라 중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1등한 나라에요. 돈이 많냐, 지질이 가난한 나라입니다. 인구가 많냐, 그렇지가 않아요. 무기가 발달했어? 아니에요. 그 나라가 무슨 나라인가, 부탄이에요. 부탄.
당연히 종교는 하나에요. 불교. 티벳 불교. 부탄나라. 소득은 그냥 양치고, 염소치고, 히말라야 산기슭에 할 게 뭐가 있다고요. 그러면 곡식은? 곡식은 그냥 일년치 곡식도 안 나와요. 마을 단체로 곡식을 경작하는데 니땅 내 땅도 없어요. 그냥 막 하는데 해봐야 히말라야 산맥에 돈이 있어 비료를 사겠어요? 그저 일년치 고정도. 잉여 농산물이 안 나와요. 시장에 내다팔게 없고 먹는 거예요.
그런데 무지 무지 행복해요. 왜 행복하냐, 행복의 기준이 뭐냐 하면 내 게 있을 때는 불행합니다. 뭐든지. 이건 수십억 천억 있어도 소용없어요. 내게 있으면 무조건 불행해요. 내게 있으면. 그렇지 않습니까? 내게 있으면 타인이 있지요. 내가 있기 때문에 뭐가 있어요? 타인이 생겨요. 자동적으로 생겨요. 그러면 거기서 긴장관계 있어요. 긴장관계. 내걸 뺏으려고 관여하는가, 내가 공격하지 않는가, 나는 수비자세가 되면서 바짝 온 몸이 긴장이 되겠지요.
방아쇠를 당겨야 될지, 얼싸 안아야 될지, 대상으로 구분해야 되니까. 아비멜렉처럼. 자기가 있는 동네에 낯선 인물이 왔으니까 이건 경계대상이 되는 겁니다. 밀쳐야 되고. 우물 파면 우물 덮어버리고. 우리는 고생해도 이렇게 안 되는데 니는 언제 100배나 양이 많고 소가 많고. 긴장상태에 돌아가는 거죠.
부탄 같은 데는 뭐냐 하면 니거 내거 없으니까 비교대상이 없으니까 행복한 거예요. 그 중에 누가 독특하게 잘 살게 되면 졸지에 가만히 있어도 가난한 자가 되는데 에부리바디 다 가난해요. 아니 가난이 없어요. 다 그렇고 그런 거예요. 어떤 할머니가 돌아가셨잖아요. 돌아가시면 그 돌아가신 날이 뭐냐, 또 다시 공동체가 하나 됨을 확인해야 되는 축제의 순간이에요. 축제의 순간.
오늘 또 여러분의 실력을 높입시다. 축제란 뭐냐, 존재의 변신이에요. 존재의 변신인데 존재의 변신은 뭐냐 하면, 창조성 발휘인데, 이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재창조성. 축제라 하는 것은 현재 존재를 변신하는데 그게 재창조를 계속 거듭 거듭 창조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마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러면 그 날을 죽음이지요. 죽음을 뭐로 보느냐 하면 재창조의 원료로 사용하는 겁니다. 신이 또는 부처가 할머니를 제거한다는 것은 할머니 죽음을 뭐로 보느냐, 속죄 제물로 보는 거예요.그 나라나 그 공동체가 세상 돌아가는 것을 현재 자기 존재를 긍정하는데 얼마나 잘 활용합니까.
할머니가 죽는데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을을 위해서 평소에 부처님께 또는 신에게 기도를 열심히 한 그분이 죽는다는 말은 의인으로서 희생한 걸로 봐요. 그러면 의인의 희생은 이게 다 살아남은 자에게 속죄의 효과를 제공한다는 겁니다. 속죄의 효과.
일종의 구약에 있는 맏물에 해당돼요. 맏물. 맏이. 장자. 장자가 죽음으로서 다른 사람이 사는 겁니다. 요점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그래서 유럽에서 축제가 많고 모든 종족의 축제가 빈번한 겁니다. 옛날부터. 축제가 이 공동체를 회복시키고 복원시키는 창조 그 때, 그 창조의 균형 잡힌 창조로 회복하기 위해서 축제를 벌이는 겁니다.
축제는 뭐가 필요 하냐 하면 사람을 늘 죽일 수는 없으니까 희생제물이 필요한 겁니다. 그러면 희생 제물이 필요하다는 말은 양 잡고 소 잡는데 단순히 양 잡고 소 잡는 그것은 하나의 외형적인 모습이고 실제로는 뭐냐 하면 ‘용감하게 신의 저주를 온 몸으로 뒤집어 쓴 사람 = 영웅’ 이 되는 거예요. 영웅. 이게 영웅이에요.
그러면 신의 저주를 뒤집어쓴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어디 벼락 맞는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고 그 공동체에 어떤 나쁜 짓을 한 사람이라든지 형질을 한 사람 같으면 그 사람에게서 어떤 의로운 사람이 나서서 그 사람을 죽여 버립니다. 죽여 버리면 원래 누가 누구를 죽여 버리면 이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살인죄에 해당되기 때문에 또 하나의 더 큰 범죄가 유발된 게 돼요.
그런데 그 공동체에서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나쁜 사람을 제거할 때, 나쁜 사람을 제거한다는 것은 아예 죽여버리는데 죽게 되면 나쁜 사람을 죽인 그 사람도, 나쁜 사람도 저주받고 그 죽인 그 사람도 저주 받는데 내가 나쁜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서 아낌없이 나는 나한테 퍼부어주옵소서. 주여! 하는 사람을 하나님에게 새롭게 이 마을을 유지하기 위해서 갱신하기 위해서 주께서 주신 희생자로 간주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겁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그 사람이 용감하게 자진해서 저주 받았다는 행위가 희생제물이 되면서 그 효과를 마을 사람이 받게 되게 되면 그게 속죄가 돼요. 마을 사람에 대한 전체가 속죄가 되면서 창조의 축복은 또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이 말입니다. 그런 아이디어를 인간들이 가지고 있어요. 모든 민족에게. 모든 족속에게 그 아이디어를 갖고 있어요. 이렇게 하니까 구약 이스라엘이 확 들어오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만 그런 게 아니고 모든 민족에 속죄가 있고 희생이 있는 이유를 몰랐지요? 그동안. 아이 이스라엘만 종교있는 게 아니라 다른 민족도 이스라엘과 비슷하게 다 소 잡고, 양 잡고 하던데 다 피 내고 잡거든요. 그들은 피 없다 하는데 피 없는 게 아니고 다 피 있어요. 피 내게 해요. 지금도 아프리카에 가면 부족 같은 경우 닭 목에 피 내어 바치고 양 바친다니까요.
왜 아프리카 토족 민족이 양 바치는 것은 그것은 구원이 안 되고 왜 이스라엘 어린양만 구원되느냐, 일방적이 아니냐, 독선적 아니냐, 기독교 독단적 아니냐,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궁색하지요. 할 말이 없어가지고. “성경에만 있는 내용인줄 알았는데. 지금도 그것이 있다는 말이야?” “있어.” 하면 “그거 왜 있지?” 이리 되거든요.
구약에 있던 여러 가지 율법으로 준 그것이 그게 효과가 있으려면 그 당시에도 많은 희생적인 영웅들이 있어요. 아버지가 만약에 희생 됐잖아요. 진짜 아버지가 희생되고 전쟁 나가 죽으면 그 다음에 차기 왕은 누구냐 하면, 그 아버지의 은덕을 기르기 위해서 그 아들이 아버지의 은덕을 아들이 중요한 게 아니고 아버지가 중요해요. 돌아가신 아버지의 은덕을 기립니다. 라는 표시로서 아들을 그 다음에 후계자로 세운 그것이 왕의 세습제에요.
처음에 왕이 될 때는 그냥 왕이 아니고 영웅적인 이렇게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적인 행동을 한 사람이 왕이 되고 그 다음부터는 그 왕을 우대해야 죽은 왕이 우리에게 복을 주니까 계속 후대 왕을 자식들로 뽑는 거예요. 그게 바로 김일성 다음에 누굽니까? 김정일이고, 김정일 다음에 김정은 되는 거예요. 이건 이미 북한 주민들이 종교화 됐다는 의미하는 겁니다.
종교화 됐기 때문에 정치적인 발언해가지고는 북한의 핵폭탄 멈추지를 못해요. 종교화 되었어요. 여러분, 다시 말해서 통일교로 보시고 여호와증인으로 다시 보면 돼요. 북한을 여호와증인, 통일교로 보시면 돼요. 통일교한테 너희한테 돈 좀 해줄게. 핵폭탄 멈추라 하면 하겠어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신의 뜻에 의해서 핵폭탄 만들어놨는데 협박한다고, 협박하면 뭘로 보겠습니까? 오늘 본문 마찬가지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뭡니까? 너희가 시련 받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하지요. 지금 북한 이야기처럼 그리 들린다니까요. 북한한테 핵폭탄을 하지 말라고 하게 되면 인민들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이게 바로 우리 인민들을 잘되는 걸 시기한 전 세계가 대결하기 때문에 이럴수록 어떻게 하자. 허리띠 졸라매고 우리 김정은 지도자 중심으로 다시 단결해서 이제는 핵폭탄에다가 미사일 위에 꼭대기에다가 핵폭탄 실어서 괌에다가 터트리자. 왜 괌이냐, 날아가는 게 그것밖에 못 날아가니까. 그것밖에 안 떨어지니까. 괌에다가 날리자.
그러면 그 북한주민들은 종교화된 거예요. 종교화. 여러분, 종교와 정치의 차이점을 말씀 드릴게요. 오늘 참 중요한 거 많이 배운다. 종교라 하는 것은 순수를 지향합니다. 순수. 하나의 오점도 없어야 돼요. 불순물이 끼어들지 않는 것을 지향하는 게 종교입니다. 분명히 이야기했는데 나중에 물어볼 거예요.
정치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양적이에요. 양 또 나왔다. 선과 악 중에서 선과 악을 양분해서 조정하는 게 정치에요. 나쁜 사람은 감옥에 넣고 착한 사람은 상주고 이게 정치에요. 로마서13장에. 종교는 일체 나쁜 사람이 있으면 안돼요. 속죄가 뭡니까? 정화잖아요. 정화. 깨끗하게 하나의 악이 없는 걸 이 종교가 추구하는 거예요. 정치는 악을 제거할 수가 없어요. 다만 양분시키지요. 악한 놈들은 교도소 보내고 수용소 보내고 착한 사람들은 일반인으로 살게 만들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프놈펜 캄보디아에서 무릇 40만명 학살 했지요. 그 학살할 때 그 오야봉되는 사람이 왜 그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공산주의가 정치인데 이걸 뭘로 결성하려했냐 하면 정치가 아니고 종교로 만들려고 했어요. 그러면 공산주의 사상이 있는 자는 단 한명이라도 거기 있으면 돼요? 안 돼요?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군에 의해서 단 한명도 남기지 않고 다 죽인 거예요. 아버지가 그러면 아들도 혹시 모른다 해서 또 죽여 버리고.
그러니 북한은 뭡니까? 정치집단이 아니고 종교집단이에요. 종교집단. 교회에서 이단 용납합니까? 못 하지요. 왜? 교회는 종교단체이기 때문에. 종교단체거든요. 자, 그러면 한 번 물어봅시다. 여러분들은 정치선에서 머물 겁니까?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종교로 나갈 거예요?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말해서. 종교로 나아갑니다. 정치적으로 말고.
다시 말해서 나는 악한 것도 있고 선한 것도 있다.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해요. 그러면 점점 더 교회에 보면 도 닦는 사람들 있잖아요. 한 번도 결석 안하고 새벽기도에 나온 사람들. 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점점 비율을 차이를 크게 해요. 나쁜 것은 점점 줄이고 좋은 것은 극에 달하다가 그것도 나쁜 이것도 기분 나빠. 아예 없게 해버려요. 그러면 그 뒤에 어떤 경지냐, 순수단계에 들어가요. 순수라 하는 것은 일점의 오점이 없는 것. 그 단계에 들어갑니다. 꼭 뭐와 같으냐 하면 자동차 스피드 경기 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그 경지에 이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목사. 일체 어떤 마음에도 나쁜 마음 일체 품지 않고 그야말로 순수함에 있다. 라고 하면서 그들은 카리스마를 강조하죠. 카리스마를.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할 때 교인들은 오히려 편해요. 왜냐하면 모델이 생겼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는 목표가 생겼다는 말은 우리가 꾸준히 어느 경지까지 이르면 우리 목사님처럼 그렇게 될까? 라고 목표점이 생겼으니까. 아주 교회 다닐 때 뭐든지 과제가 남아있으면 지칠 줄 모릅니다. 인간은.
인간은 완전히 다단계도 그렇고, 다단계도 사기 치는데 전부 다 그래요. 따박 따박 이자가 통장에 들어오면 계속해서 투자해요. 처음에는 오십만원하다가 오백만원하다가 이천만원하다가 2억하다가 계속 부어가지고 이참에 완전히 벼락한 번 맞아보자. 이참에 다하자. 하다가 나중에 다 걸려가지고 다 날아가잖아요.
그거 왜 그러느냐 하면 사기꾼 욕하지 마세요. 본인이 순수함을 제거하려고 하는 거예요. 순수함을 제거하려고. 인간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야고보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야고보서는 그런 게 아니에요. 야고보서는 마찬가지가 아니라 가려내는 거라니까요.
자, 십자가가 다 이루었잖아요. 이걸 지상에 펼칩니다. 지상에 펼치는데 지상이 뭐냐 하면 흩어진 열 두 지파가 누군지 알 수가 없어요. 흩어져 있기 때문에. 흩어진 열 두 지파가 알 수가 없어요. 한데 모여 있어가지고 고 집회에 한 교인이 150명 몽땅 다 순수하게 성도였으면 좋겠는데 만약에 그렇게 되면 그 교회에서는 야고보서가 필요 없어요. 아니 성경책 자체가 필요 없어요. 본인이 이미 순수했는데 이거 볼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미 순수한데.
그런 교단 있어요. 지방교회라고. 지방교회 중에서도 어떤 교회냐 하면 위트니스 쪽에 속한 그 쪽에서 그렇게 했고, 유병언이라는 단체가 있었잖아요. 구원파에서는 뭐냐 하면 성도는 죄 짓지 않는다는 거예요. 요한일서5장에 의해서 성도는 죄 짓지 않는다. 죄 짓지 않는다는 말에 사람들이 왜 그리 그 말을 듣고 거기다 재산을 갖다 바치고 십일조 갖다 바치고 왜 그리 바쳤느냐 하면 죄 짓지 않는다니까 뭘 원했는가, 순수하거든요. 순수하잖아요. 순수를 자기가 원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최종 목표점의 순수한 걸. 순수한 걸 제공하니까 얼마나 좋아요.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러면 십자가마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리 이야기 또 할 거예요. 순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처벌이 없지요. 처벌이 없다는 말은 뭐냐,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거예요. 십자가 피가 순수함이 있지, 우리의 하는 행세는 순수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순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순수하지 않아요.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 주께서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십자가 피가 우리에게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구원파는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구원파는 뭐냐 하면 양적으로 나와요. 이게 벌써 몇 번 나와요. 개인이 먼저 선점되게 되면 반드시 뭐가 있다? 바로 양적으로 따져요. 양적으로. 양적으로 따진다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한다? 개별자로 하잖아요. 그런데 구원에는 개별자가 아니고 흩어진 열 두 지파라니까요. 이제 연결이 되십니까?
내 개인이 구원 받는 거 없어요. 흩어진 열 두 지파의 머리는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에요. 야고보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호출해서 구원받은 거예요. 아무 이유도 없어요. 그냥 호출한 거예요. 은혜 줄자에게 은혜 줬고 그 피를. 긍휼을 받아놓고 이 양 말고 니가 얼마나 착하냐 말고, 이 질, 이 성질, 십자가 피 성질, 성질대로 된 사람이냐를 보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야고보서를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내가 이랬었었지. 내가 지금도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야고보서 4장 끝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거든요. 우리 생명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했는데, 안개라고 하니까 확 안 닫지요. 그래서 저는 요거 표현을 바꾸겠습니다. 안개라 하지 말고 ‘물 한 방울’ 우리 인생은 뭐라고요? 물 한 방울입니다.
이걸 더 극적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태어날 때 눈 뜨잖아요. 잠간 눈 뜨면 지옥, 눈 감으면 천국이에요. 인생은 뭐냐, 잠시 눈 떴다가 눈 감기는 그 기간이 인생입니다. 온갖 것 다 보입니다. 개도보고. 눈 떴으니까 잠간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뭐로 되어있어요? 잠간이지요. 잠간.
눈 떴는데 나이 94세 되어 아버님이 돌아가셨답니다. 권사님이 딱 죽으면 고 죽는 순간 눈감잖아요. 그러면 지나온 그 1년부터 94년이 그 잠간 안에 다 날아가 버렸어요. 그게 잠간이에요.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생은 잠간이요. 잠간할 때 무슨 짓을 하느냐, 죄란 죄는 다 지어요. 잠간할 동안에. 하지만 그 잠간 짓는 죄에 대해서 너무 주눅 들지 마세요. 괜찮아요. 왜? 어차피 눈꺼풀 무거우면 나중에 수술할 생각하지 말고 내려올 때 꾹 감고 죽으면 돼요. 감으면 앞에 있는 잠간 안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석되느냐 하면 그럼 살아온 내가 죄 지었다는 말은 뭐냐 예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 이미 흩어진 열 두 지파기 때문에. 나 존재보다 언약이 먼저 있고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라는 존재를 잠간 이 땅에 잠시 눈 뜨고 살게 하시고 빠지게 만드는 겁니다. 내가 보니 아직 눈 감을 날이 먼 거 같아.
야고보는 열 두 지파니까 야곱의 언약을 위해서 우리가 이 지상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리고 율법이 우리와 함께 주어졌고 뭐하라고? 열 두 지파 언약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위대한가를 너희들만큼은 세상에 나와서 증거해야 된다는 겁니다. 흩어진 열 두 지파로 흩어져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증거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증거 할 때, 바로 증거하는 그 양을 보지 말고 어떤 질을 갖고 있느냐를 보시라 그 말입니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합시다.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까 분명히 세상은 지옥이고 악마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을 죽였느냐, 거기에 대해서 야고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죽였느냐 하면, 동일한 것이 아니기에. 같은 것이 아니기에.
현재 인간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언어라고 했지요. 대화. 아버지가 아들한테 훈계할 때 언어로 하지요. 그래서 학자들은 언어로 이 세상이 구성된다. 이걸 상징계라 합니다. 상징계. 같은 것이 반복정도가 아니고 같은 것이 교류가 돼요. 언어라 하는 것은 같은 단어가 교류될 때 언어가 되는 겁니다. 이게 매직펜이잖아요. 매직펜 달라 하는데 볼펜을 주면 안 되잖아요. 같은 의미가 안 담겼지요. “니 학교 나왔나? 이게 매직이야.” “아, 그러나” “정신 차려 너!” 이래잖아요.
같은 의미를 주고받아야 이게 세상이 유지된다 말이죠. 그런데 세상은 결국 높이가 있어요? 없어요? 높이는 없어요. 그냥 평탄해요. 부추전처럼. 그냥 평평하게 해물전처럼. 그냥 평등하다니까요. 높이가 없어요. 키 좀 커봐야, 빌딩 지어봐야 맨 그 높이. 위에서 보면 맨 그 높이에요. 높이가 없다니까요.
높이가 없다는 것은 위에 것이 없다는 말이 야고보서는 뭐냐 하면 가장 좋은 것은 어디서 온다? 위에서 온다 했어요. 야고보서1장 17절,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위로부터 온다는 것은 수평에서 무슨 인식으로 바꿔라? 수평적 인식에서 뭐로 바꿔라? 수직인식이지요.
그럼 야고보서에서 복음이 없다면 모든 인간은 고만 고만해요. 별거 없어요. 다 그래요. 조선시대고 발전하고 나라가 21세기 돼도 다 고만 고만하다니까요. 콩을 바닥에 깔아놓은 거 하고 똑같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느냐 하면 고만 고만한데 예수님은 고만고만 안하잖아요. 뭔가 언어를 사용하는데 분명히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어요. 무슨 말인지를. 그러한 대우를 받았었는데 제가 부탁하지만, 성령이 부탁하지만,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대우를 받으셔야 됩니다.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세요. 하고, 그들의 반응을 한 번 보세요. 그들이 내 말을 이해하느냐, 안 하느냐, 지 맘대로 이야기해요. 지 맘대로. 복음 모르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무슨 말인지를. 왜? 세상은 양적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어떤 말을 들을 때 저 사람의 저 말을 들으면 내 속에 선이 더 증가하겠는가, 악이 증가하는가, 그 기제가 메카니즘이 그 공장기계가 작동하고 있어요. 어떤 사람의 말을 들을 때. “친구야! 요번에 아이템이 하나 있는데 사업할까?”우리 보통 흔히 듣는 이야기 아닙니까? 남편 되시는 분이 “여보, 어떤 친구가 있는데 내 친구 알지? 그 애가 나보고 사업 아이템이 있다고 같이 하자고 하는데 2억이 필요 하되. 돈 좀 구할 수 있어.” 이런 이야기할 때 그 취지가 이해가 되지요.
그 말은 왜 이해가 되느냐 하면 사업이 끝났을 때 나한테 얼마 준데. 은행 이자가 2%인데 50%준데. 손도 안대고 투자만 하게 되면 이자 50%준데. 하면 이자가 1억이잖아요. 그러면 나는 갑자기 3억의 사모님이 되는 거예요. 가만히 앉아서.
이건 뭐냐 하면 나라는 존재는 뭘 따진다? 돈의 양으로 따지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부도나서 2억이 날아가 버리면 2억이 빠진 게 돼요. 양으로 빠진 거예요. 그런 언어를 듣는 순간 갑자기 예수 믿다가 수직적으로 서다가 같이 콩처럼 완전히 콩이 된 거예요. 완전히. 오늘 제목은 콩으로 할까. 완전히 수평이 돼가지고 다시 개별자로 돌아와요. “여보, 세상에 이런 행운이 어디 있나?” 가장 좋은 것은 위에서 오는 건데 돈이 아니에요. 양이 아니고 질이라니까요.
구원 받을 때 질로 구원받지 양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니거든요. 아~ 보세요. 얼마나 많은 유혹을 지금도 받고 있습니까.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해요? 그건 10분 쉬고...
안양20170908b약1장2절(실화)-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결합시다. 지옥이란 같은 것의 반복이에요. 동일한 것의 반복. 낯설지 않잖아요. 이미 사람들은 언어로서 자기의 모든 의사를 통일시켜났기 때문에 거기서 독특한 것이 나오게 되면 용납이 안돼요.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겁니다.
예수님이 나쁜 짓해서 돌아가신 게 아니잖아요. 강도도 예수님 때문에 살아났잖아요. 그 사람을 죽인 강도도 살아났지만 예수님은 죽었잖아요. 그리고 누가 죽였습니까? 주동자는 있지만 거기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사람은 제거할 때 이게 선동이었습니까? 아니면 자발적이었습니까? 자발적이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되면요, 여러분들이 지금 교회 다니는 거, 아직 교회 다니면서 목숨 부지한 거,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만큼 아직까지 이 세상이 너무 순해. 자, 오늘 제목 나옵니다.
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뭔가 분명히 예수님께서 위에서 났다 해도 그 말 안 믿었어요. 왜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위에는 여호와 계시는데 니가 왜 그 위에 있었느냐, 이리 된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위에 있는 것도 땅에 와버리면 같이 땅이 되되 이게 안 맞는 겁니다. 이질적인 거예요. 이질적이면서 거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죽음이 발생되는 겁니다. 죽음이. 죽음이 발생되는데 성경은 이 죽음을
㉰사도바울의 복음이나 야고보나 사도들의 역할은 뭐냐, 이 죽음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걸로 바꾸는 거예요. 실화. 실제 있었다. 이걸로 바꿔요. 실화로. 실제로 이게 실화로 되어버리면, 중요한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실화가 되어버리면 내가 나를 생각하는 이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망상이 돼요. 망상입니다.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착각 속에 있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음을 통해서 어디서 빠져 나왔는가, 이 세상에서 빠져나왔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뭐냐 하면 이 세상의 일부잖아요.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 몬 이 세상은, 이 세상 사람들은 본인이 살아있는 걸 실화로 봤어요. 내가 지금 숨 쉬고 있는 것을 실화로 봤는데, 실제로 있는 이야기로 봤는데, 성경은 사도는
㉳예수님의 죽음을 실화로 봄으로 말미암아 “니가 얼마나 망상에 빠졌으면 진짜로 죽이지 않아야 될 분을 죽여 버렸다. 이 인간들아! 이 하늘의 복수가 이제 시작된 거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얼마나 니가 착각에 빠졌으면 죽어야 될 분과 죽지 않아야 될 분을 구분도 못하고 있었다 말이지요.
㉴그러면 나는 여기 살아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아야! 아야! 나는 이거 꿈꾸는 거 아니야. 살아있다.” 해도 이게 망상이 되는 거예요. 뭐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내 몸은 살아있다. 주사 더 나아주세요. 더 살고 싶어요. 호스 꼽아라. 나는 100살 더 살란다. 이 모든 짓거리가 이게 거짓이 되는 거예요. 거짓이라는 것은 없는 게 아니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추방시키는 그러한 범주 안에서 못 벗어나는 게 거짓이 되는 겁니다. 그저 우리 애만 잘되면 되고, 우리나라만 잘되면 되고. 이게 전부 다 왜 거짓이 되느냐 하면 실화와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실화가 연결이 안 되는 동네에 일방적 주장이기 때문에 이게 망상이 되고 허상이 되는 겁니다. 자, 허상의 특징은 뭐냐 하면 되게 오래간다고 여기지만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이 임시적이고 일시적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게. 여기서 누가 돌아가시면 이 아무개 돌아가면 이 임시, 박 임시, 임시적 조치였다는 거예요. 그것보다 더 노골적인 것은 박 마네킹, 최 마네킹, 하나의 작은 인형입니다. 그 인형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시한폭탄이 들어가 있어요. 우리 속에. 하늘이 주신 시한폭탄이 들어와 가지고 지금도 착칵! 착칵! 착칵! 심장고동소리가 시한폭탄이에요. 고거 멈추면 끝나는 겁니다. 고거 멈추면 모든 게 다 죽습니다. 왜? 죽음만이 실화기 때문에. 그 실화가
㉵우리 속에 들어있는 유일한 실화는 내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죽는 것만이 진짜로 실화인데 이걸 지난 낮 설교에서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죽음만이 순수라 했어요. 아까 배웠지요. 순수는 뭐가 순수라고 했습니까? 일체 이물질이 없는 것. 불순물이 없는 게 순수지요. 깨끗한 거 순수지요. 진짜 깨끗한 것은 예수님 십자가 죽음만이 깨끗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만 의인이 돼요. 깨끗해요. 아까 개가 권사님에게 달려 들었잖아요. 달려 들었을 때 제가 언뜻 생각한 게 있어요. 저게 멋진 예화다 생각했는데. 그걸 한 번 해보겠습니다.
권사님 머리카락이 이렇게 있거든요. 앉아있는 모습을 그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걸 그리스도 안으로, 십자가 안으로 내가 만들겠습니다. 이 전체를 투명함으로 십자가 안의 효과, 성령의 효과로 덮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두나(개이름)가 깽깽거리면서 지금 붙들고 있었다고요. 못 들어오거든요. 못 들어온다고요.
이 흩어진 열 두 지파를 하나님이 파견을 합니다. 파견을 해서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과 다른 사람이 이질적인 것을 너희들도 몸소 체험하라는 겁니다. 요 유리판을 벗겨버리는 거예요. 요 투명함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분명히 십자가 안에 있기는 있지만 예수님께서 실제로 당했잖아요. 실화니까. 실제로 예수님이 아팠고.
우리는 이렇게 투명막이 있으면 달려들어도 할 건데 이걸 없애버리면, 이 개를 마귀로 보면 마귀가 우리를 달려들 때 뭐로 보느냐 하면,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마귀가 계속 달려드는 거예요. 개처럼. 왕! 왕! 왕! “니 그러다가 죽는다!” “니 굶어죽는다.” “니 우사스럽게 죽는다.” “니가 그러면 외로워서 죽어.” “니가 의지 할 데 없어 죽어!” 모든 것을 마지막 공포, 마지막 두려움, 극단적인 두려움이 뭐냐 하면 “니 그러다가 개망신하다가 죽는다.” 모든 것을 죽음과 연관을 시켜가지고 협박 공갈을 해대는 겁니다. 히브리서2장15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목사의 설교나 강의할 때의 자세는 뭐냐, “나, 이거하다 죽을래.” 이리 되어야 돼요. 죽기 위해서 해야 돼요. 그런데 사람들을 보게 되면 불신자, 신자도 마찬가지에요. 불신자들 보게 되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마귀 좀 쫓아 보내가지고 죽는 것이 안 두렵게 살게 하옵소서.”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살기는 사는데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 상태에서 편안하게 살게 하옵소서. 이런 조로 나오는데 그건 주의 뜻이 아닙니다.
㉶“주여,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냥 죽게 하옵소서.” 이리 되어야 돼요. 그냥 죽게 하옵소서. 하면 마귀가 떠나는데 요령 부려가지고 사탄을 이기면서 살게 하옵소서. 앞뒤에 붙여가지고 끝은 살게 하옵소서. 자꾸 살려고 하니까 일곱 귀신 계속 달려드는 거예요.
어차피 눈 뜨면 지옥이고 눈 감으면 천국인데. 그거 뭐 나중에 눈꺼풀 힘 빠지면 그냥 감으면 돼요. 감는 것도 못해요? 이 눈 내려앉으면 되거든요. 살아가면서 가정문제나 자식문제나 이 모든 것이 계속해서 마귀한테 시달리게 되어있어요. 이게 보호막이 없으니까 완전 노출됐잖아요. 지금 공부할 때는 야고보서 공부할 때는 위에서부터 오는 속죄에 사랑에 감사하다 해놓고 나가면 또 어떻게 살꼬. 또 시작된다 말이죠.
어떤 분이 저한테 질문을 하는데 인천에 사시는 분인데 “목사님, 지금 목사님 강의를 듣고 있는데 기도를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제가 답변했어요. 함축해서 간단히 하시면 됩니다. 함축해서. 지지리 늘어난 것을 함축해서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니 그 다음에 또 오기를 “자식을 위해서 기도를 안해야 되는데 자꾸 기도가 되는데 어떡하면 좋습니까?” 자식으로서 기도 안 해야 되는데.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 했으니까 자식 기도가 자꾸 나오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제가 기도 좀 조작하지 마세요. 기도 조작하지 마시고.
제 취지는 뭐냐, 이걸 질문할 게 아니고 기도라 하는 것은 요런 질문을 그냥 하나님 앞에 내놓는 거예요. 내 놓는 것이지 어떤 결과물을 손에 가지는 게 아니거든요. 기도라 하는 것은 끌어당김이에요. 기도를 정기적으로 하는 것은 의미 없고요. 기도 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갑자기. 학교 간 아이가 걱정될 때는.
기도는 끌어당기고 주님 십자가를 경유해서 다시 주님의 뜻이 포함된 채로 우리에게 응답으로 제공되는 겁니다. 염전이에요. 염전. 물하고 소금하고 다 끌어 모아 놓고 물을 증발시키면 뭐만 남지요? 천일 소금 남지요. 그걸 되돌려 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답변하기를, “기도는 의무가 아니고 삶입니다.” 삶이 의무입니까? 살아야겠어! 살아야겠어! 이렇게 삽니까? 그냥 설거지하고 방청소하고 이게 삶이잖아요. 사는 게 곧 기도에요. 하다보면 주께서 순간 순간 물기 빼고 천일염을 우리한테 가끔 줄 때가 있어요. ‘아이고! 이런 사실을 몰랐네.’ ‘아~’ 다시 요런 깨달음. 고게 천일염이에요.
우리를 염전으로 사용해서 우리가 마귀한테 이런 수모, 이런 서러움 다 가지고 와! 다 가지고 와! 쓱~~ 가져와 가지고 그 조치는 우리가 하는 게 아닙니다. 그 천일염 빼는 작업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지요. 하게 되면 우리한테 뭐냐 하면 기쁨이 오지요. 빠진 게 뭐냐 하면 이거예요. 사소함.
돌아보면 전부 다 사소함 또는 심각하지 않음이에요. 왜 그러냐 사소하지 않고 심각한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큰 일이 생겨서가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을 때는 모든 일이 심각하고 사소하지 않아요. 그러나 내가 오늘 25분 뒤에 나는 눈 감을란다. 이런 사람한테는 내가 살아왔던 이혼3번하고 11년 동안 노래 안하다가 11년 만에 노래하고 이런 모든 이야기. 요번 주일날 설교에 이런 이야기 나올 거예요. 요새 교인들이 믿기는 언제 믿었습니까? 요새 관심이 나훈아 리사이틀만 관심 있지.
내가 살고자 하는 이 모든 것에서는 심각하고 사소하지 않은 게 되어버려요. 왜? 마귀가 역사하기 때문에. 마귀가 우리를 그렇게 우쌰 우쌰 자꾸 불을 질러요. 니 살아야지! 살아야지! 자꾸 살아야지! 사는 게 남는 거야. 이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사니까 그 다음부터는 기도가 의무가 되어버려요. 기도가 2번 빠졌으니까 내 사는데 지장이 되지 않겠는가, 헌금이 의무가 되어버리고, 성경읽기가 의무화 되고. 예배참석이 의무화 되어버리고.
야고보서 입장에서 보면 예배참석 할 때, “니 11시인데 왜 11시3분에 왜 왔어?” “아이고, 마침 고 때 차가 약간 밀려가지고.” “니는 11시3분에 왔기 때문에 요번 주는 니는 벌 받아야 돼! 매매해야 돼!” 이게 뭐냐 하면 스스로 뭘 만들어요? 내부에서 법을 만들어버려요. 그런데 법을 만들면 문제가 뭐냐 하면 법을 온전히 다 못 지킨다는 거예요. 문제는.
그 법을 마귀가 만들었거든요. 마귀가 왜 자꾸 법을 만들겠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갑갑하게 만들어버려요. 왜? 우리는 양적으로 보니까. 착한 일 이만큼. 나쁜 일 이만큼. 양으로 자꾸 생각하다보니까 마귀의 완전 밥이 된 겁니다. 그거 해야지! 그거 해야 착한 일 하지. 나쁜 짓했잖아. 이제 착한 일 2번해야 저게 상쇄되는 거야. 뭐해? 빨리해! 우리는 자꾸 휘둘린다고 할까요. 우리의 마음이 평안도 없고 무거워요. 참 무겁거든요. 거제에 사는 69세 된 노인네가 헬스하다가 90Kg의 역기 들다가 깔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 인생의 무게가 90Kg가 넘어요. 우리는 깔려죽습니다. 마귀가 90에다가 또 90을 추가해요. 들 수 있다! 들 수 있다! 들잖아요. 그러면 하나 더 추가합니다. 270Kg들어야 돼요.
그러면 어디서 문제입니까? 우리가 실화가 아닌데 우리 자신을 이 세상의 실화인지 알고 마귀가 준 망상으로서의 마치 영원할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야고보서는 그걸 짧은 순간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짧게 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이 준 성령의 기능이 중요하지, 내 존재가 중요하지 않아요. 가장 좋은 것은 어디서 온다 했어요? 위에서 오잖아요. 우리는 고만, 고만한 것들끼리 너무 많이 비교를 했어요. 너무 많은 비교를 했어요.
그래서 그 기도 질문한 사람에게 이야기했어요. 잔느 귀용이라는 중세에 유명한 여자 분이 있어요. 경건한 책을 많이 해가지고 교회가 너무나 실망스러우니까 영적 서적이 많이 팔려요. 허운석선교사도 브라질 선교사도 아마존에서 그 책 많이 읽어가지고 저한테 권하고 저도 그 책 읽어봤는데. 어떤 사람이 그 잔느 귀용의 책을 봤는데 어떻게 읽을까요, 도움 될까요? 하길래 도움 된다고 이야기하고 다만 그게 모델이 아니고 본인 사는 게 모델입니다.
자꾸 남 비교한다는 자체가 뭐냐 하면 나는 더 살고 싶다는 하나의 발산의 표현이에요. 더 살고 싶은 표현입니다. 왜 살고 싶다고 하냐면 모델을 자꾸 만들거든요. 그 모델은 어디서 오겠어요? 괜찮아 보이는 곳에서 이미 봤기 때문에 온다 이 말이지요.
주께서는 직접 나를 만드는데 우리는 모델을 딴 데서 찾고 있어요. 딴 데서. 그럼 주님이 만드신 인생과 내가 원하는 모델과 모델사이에 격차가 나지요. 격차가 나게 되면 나오는 것은 불평과 원망과 불만밖에 더 나오겠어요. why me rod? 이런 거 있잖아요. 왜 하필이면 저에게? 주께서 친히 만들어줬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내가 만든 모델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늘 주님 앞에 불평하면 그것은 데살로니전서5장16절 성령 안에서 범사 감사하라는 말이 어떻게 됩니까? 감사하라는 말이 날아가 버려요. 감사 대신 불평을. 고마움 대신 원망을. 프란체스카 기도와 반대가 되어버렸어요.
전부 다 뭐냐 하면 나를 지키기 위한 의무 입장에서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입니다. 왜 자꾸 의무를 만드느냐 하면 그래야 내 속에서 양으로 볼 때 착한 일이 늘어나게 되면 늘어난 만큼 내가 어떤 안전빵인 줄 알고 이제는 어지간해도 벌 안 받는 줄 알고 그러한 양적 계산이 자꾸 자유하고 있거든요. 그거 허구입니다.
야고보서1장3절 봅시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믿음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믿음에 시련이 있지요. 믿음에 시련이. 이렇게 서론 했으니까 이제 본론 나오면 알겠지요. 믿음에는 반드시 뭐가 따른다? 시련이 따른다. 다시 한 번 설명해 드리겠어요.
왜 믿음이 시련이 따르느냐 하면 ■이 믿음이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잖아요. 예수님이 시련 받았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 끝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은 믿는 자에게 시련을 주는 거예요. 이 세상 끝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시련이 오거든요. ■믿음의 시련이 뭐로 바뀐다고 했습니까? 오히려 더 기뻐하라 이 말입니다. 야고보가 지금 이야기하는 거예요. 기뻐하라는 율법이 아니고 “아마 기뻐하게 될 걸.” 이렇게 해석하면 여러분이 제일 편하게 해석하신 거예요.
너희들에게는 성령의 은사가 있기 때문에 위에 것이 있기 때문에 너희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 특이해. 다른 사람이 보기에 니는 좀 이상해. 미친 거 아니야? 그런 소리 들을 거야. 그럴 때 어떻게 하라고요? 벌벌 떨지 말고 조마, 조마 하지 말고 도리어 뭐하라? 기뻐하라 이 말이죠. 니들이 게 맛을 알아? 이런 식으로 튕겨줘라 말이에요. 니들이 게 맛을 알아? 하늘에서 떨어진 대게인데 맛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럼 저 쪽에서 “니는 어떻게 맛을 아는데?” “나도 몰랐지. 위에서 주니까 아는 거지.” “어떻게 주는데?” 열 두 지파한테는 반드시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게 되어 있어요. 야곱의 자식들에게는 야곱에게 준 복을 주게 되어있어요. 예수님이 야곱이거든요. 인자가 돼요. 인자. 예수님이 야곱의 완성이잖아요. 언약의. 예수님이 야곱의 언약이니까. 자기 백성에게 열 두 지파에게 주겠어요? 안 주겠어요? 당연히 주지요. 야곱에게 일어난 그 사건을 완성된 단계에서 그들에게 할당을 해버린다는 거예요.
우리는 가만히 있다가 할당받은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냥 촌에서 농사짓고 있는데 갑자기 서울의 법률사무소라 해가지고 전화 와가지고 “혹시 어떤 할머니 알고 계십니까?” “그 할머니 이름은 들었는데요.” “할머니께서 당신을...주민등록증 한 번 대보세요.” “아, 그래요.” “당신을 벌써 양자로 삼아가지고.” “아~ 그 할머니. 그 할머니한테 내가 지난 5년 동안 옆집에 살면서 돌봐줬습니다.” “그 할머니가 자식이 없어가지고 할머니 부동산이 한 7채에다가 주식 한20억 되는데 자식도 없고 조카도 없고 아무도 없어가지고 양자해가지고 당신한테 모든 것을 할당했습니다.” 그 할당이 위에서 주신 할당이에요. 예를 들면.
우리는 열 두 지파 될 사람도 없어요. 그냥 일상생활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통보해서 이미 결정했대요. 합격을 했대요. 합격을 하고 통지서를 보낸 거예요. 그 통지서 보냈는데 예수님이 당했던, 받았던 완성의 통지서기 때문에 우리 앞에 오게 되면 주변에서 시련이 우리한테 오는 거예요. 말이 안 통한다는 이것 때문에. 가족끼리도 부모 자식 간에도. 부부끼리 말이 안 통하기 때문에 시련이 온다는 겁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라? 슬퍼하라는 말입니까? 기뻐하라는 말입니까? 기뻐하라 이 말입니다. 기뻐하라. 그럼 우리는 생각하기를 주님 빨리 이 땅에서 죽이던지 살리던지 빼내주세요. 하지만 아니야! 니가 시련에 인내를 만들어서 해야 돼요. 왜?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열 두 지파의 이스라엘의 기능을 유지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걸 이렇게 표현하면 돼요. 미답. 미답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아직까지 디디지 않은 미지의 땅. 미답의 땅하잖아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구원받고 난 뒤에 열 두 지파가 이동하지요. 이동 할 때 그게 미답의 지역이에요. 미답의 지역. 처음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 이스라엘이 어떤 개인적으로 간다면 미답이 아닙니다. 평소에 다 알던 그 흙먼지 나는 광야요, 그냥 산야고 들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면서 주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해가 갑자기 멈추고 난리도 아니지요. 전쟁이 일어날 때 햇불과 항아리가지고 이기고, 낯선 현상들이 일어나지요. 이게 뭐냐 하면 땅을 새로 가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쟁기에요. 이스라엘이 그냥 민중이라면 그 하나 섞이나 마나 그렇고 그런 세상이에요.
그 세상은 그걸 환상으로 보지 못하고 그냥 옛날 그대로 이게 진짜 현실이라고 볼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동행하사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이방나라 가게 함으로서 그 가면서 만난 나라가 모압, 압몬, 블레셋 그런 나라잖아요. 그런 나라가 생소한 경험하는 거예요.
처음에 애굽에서는 이스라엘 분리될 때 애굽에서는 상상도 못한 경험을 했습니다. 온 나라의 맏이가 다 죽어버려요. 맏이가 죽는다는 것은 대가 끊기는 겁니다. 대가 끊긴다는 것은 인간의 육은 아무 무가치하다는 뜻이에요. 왜 그 부모들이 맏이에 대해서 그렇게 애착을 할까요? 맏이에 대해서 왜 애착을 하느냐 하면 그 맏이가 아버지를 대표하는 겁니다. 나는 죽어도 나는 죽지 않았다. 그게 맏이가 있을 때 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맏이가 없어버리면 나는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이리 되겠지요. 맏이라는 게 뭐냐 하면 옛날에는 신을 믿었잖아요. 신을 믿는데 신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증거물로 맏이를 삼았습니다. 이방나라도 마찬가지에요. 신이 살아있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신이 안 살아있으면 우리를 보호 못한다고 본 겁니다.
제사지낼 때 맏딸이 드리는 게 좋겠어요? 맏이가 드리는 게 좋겠어요? 맏딸은 착실하게 아버지 모시고 맏이는 어디 갔는지 지금 어디서 뭘하고 있는지 소식도 없지마는 아버지는 누굴 기다립니까? 안 믿는 사람 같으면. 맏딸 니가 제사 드려라. 하겠습니까? 빨리 맏이 찾아와가지고 오라 합니다. 왜? 나 죽으면 누가 제사를 드리느냐 이 말이죠.
그러니 이 맏이라 하는 것은 아버지가 죽으면서도 안 죽었다. 라는 유일한 흔적이 둘째 셋째가 아니고 맏이에요. 그런데 그 맏이를 죽였다 말이죠. 하나님께서. 전부 다. 이건 사람의 목가지 위를 자른 거나 똑같아요. 목가지 자르니까 인간이 아니지요. 없으니까. 처음부터 니가 인간들이 아니야! 환상이었고 꿈이었다 말이죠.
그럼 맏이를 그냥 꽂아놓으면 어떻습니까? 꽂아놓으면. 이게 실화지요. 그래서 로마서8장에 보면 예수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모든 믿는 자의 맏아들이 되게 함이라. 그럼 우리는 뭐만 제공하면 돼요? 우리 얼굴 제공하지 말고 우리 몸체만 제공하고 맏이 부위는 남겨두고, 맏이 부위는 누굴 꽂아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로 꽂아 놓아버리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겁니다.
이런 소리하니까 세상에서는 이질적이어서 못 알아듣는 거예요. 이 언어가 한국 언어지만 못 알아들어요. 이질적인데. 그러니까 뒤에서 수근, 수근 할 때 그게 시련이에요. 시련이 우리로 하여금 이스라엘 역할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지금 믿었다. 데려간다. 아닙니다.
남겨둔 이유는 이 땅에서 진리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고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증인으로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살게 하고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고난에 동참함으로 말미암아 점점 더 아래의 것은 버리고 위에 것을 마음 두고 살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거기에 야고보서가 필요하지요.
그 다음에 4절 봅시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방금 이야기한 거고요. 이미 하나의 통째로 들어가 있으니까. 아까 권사님 그림으로 그렸었지요. 투명막으로 그리고 개가 달려들었잖아요. 개가 달려들 때 시련이 뭐냐 하면 시련은 있어도 실천은 없습니다. 아무리 달려들어도 주님께서 주안에 있는 사람 같으면 결국은 위에서 오는 그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바라보게 해요. 마지막에는. 결국은 십자가 바라보게 합니다.
“주여, 십자가가 먼저 왔잖아요. 제가 믿은 게 아니잖아요. 십자가가 먼저 왔잖아요.” 지난 수요일날 처음 설교할 때 이렇게 했지요. 자꾸 우리 쪽에서 갔다 댈 생각하지 마라. 우리 것은 안 받고 주께서 찾아와서 쪼갠다 했잖아요. 쪼갤 때 우리는 뭐냐 하면 나는 나를 몰라요. 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를 몰라요. 그래서 저는 뇌종양 같다고 했지요.
안에 쪼개보면 “이런 게 있었네.” 그게 하나의 시그널, 신호를 자꾸 외부에 보내니까 내가 하는 뜻대로 안되고 내 뜻대로 뭐든지 안 되는 겁니다. 내 뜻대로 안돼요. 뭐든지. 안 되는 그것이 시련이다 이 말이에요. 안 되는 그것이 실패가 아니고 성공이에요. 내 뜻대로 해보세요. 우리는 세상적 사람 벌써 됐어요. 안 그래도 세상 사람이지만.
5절에 보세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했는데 생각해 보세요. 지혜를 아쉬워하는 사람 그 자체가 이미 성도입니다. 돈이 아쉽지 지혜가 아쉽습니까? 딱 깨놓고 이야기합시다. 아이 돈이 아쉬워서 늘 궁시렁 궁시렁 거렸지. 오늘 강의 제목을 이걸로 해도 괜찮은데. “제발, 징징대지 마오. 제발.”
제발, 징징대지 마세요. 주님은 이것보다 훨씬 당했어요. 그래도 우리는 얼추 말 통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안 믿는 친구는 있지요. 아직까지 시련을 덜 당해서 그래요. 주님은 모든 사람이 다 싫어했어요. 제자들도 다 배신했잖아요. 그러니까 세상 살아가면서 징징대지 마세요. 일곱 귀신 붙어있는 것 같아요. 살고자 하니까 자꾸 이런 것들이 징징댈 일이 있잖아요.
후히 주시는 지혜가 뭐냐 하면 후닥 밀어 붙이거라. 에 필요한 지혜들에요. 지혜. 5+7=12 이런 지혜 주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죽는 것을 목표로 해서 살 수 있는 요령. 죽으란 말이 아닙니다. 지금 제 말 잘 들으셔야 돼요. 죽으라는 말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죽는 것을 목표로 생을 할 수 있을까. 죽는 것을 목표로 하면 되는 거예요.
그때는 유명한 노래 나오지요. 정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줬지만 이제는 남이 되어 떠나가느냐! 이제는 남이 되어 다 떠나버리지요. 아~~ 얄미운 사람. 세상 얄밉다 하지 마세요. 본인이 지금 꿈꾸고 있는 거예요. 실화는 예수님의 죽음이 실화지 내가 순수하지도 않고 순수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만 순수해요.
그러니까 눈 뜰 때, 하고 싶은 대로 사세요. 그냥. 눈 뜰 때. 나중에 눈 감아놓고 “아이고~ 해 볼걸.” 하지 말고, 눈 뜰 때 하고 싶은 대로 살아요. 지혜라 하는 것은 이제 앞으로 나올 거니까 그 때 죽 2장, 3장 지혜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건 하고. 하여튼 주신다는 것.
그 다음에 6절 봅시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이 대목을 교회에서 얼마나 오해를 하고 있는지. 의심하지 말고 기도하면 주께서 주신다는 겁니다. 뭘? 그건 이야기 안 해요. 그건 이야기 안하고 무조건 주신다는 거예요.
자, 사람들이 신을 다루는 심보가 이래요.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듭니다. 어떻게 채무자로 만드느냐, 내가 먼저 선심을 써버려요. 하나님 앞에. 선심을 쓰게 되면 하나님은 선심을 쓴 사람에게 되갚아야 될 심리적인 압박을 제공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앉아서 기도하면 될 걸 신발을 벗고 난로 펴도 되는 걸 있는 난로도 꺼버리고 그것도 방석을 치워버리고 이렇게 꿇어앉아 함으로 말미암아 심리적으로 하나님께 압박을 가하는 거예요.
이 정도까지 해주는데 진짜 안 해주면 섭합니다.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들어버리고 내가 채권자가 되어버려요. 선심해서 줘놓고 보자~ 이리 나온다 말이죠.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들어버려요. 이런 심보가 있는데 마귀는 자꾸 이런 식으로 가르쳤거든요. 하나님은 늘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늘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다. 계속해서 마귀가 설교자에서 계속해서 그걸, 설교자는 마귀의 조직원들이니까. 양아치들이니까.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교인들에게 채무를 느끼게 만들어야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보통 교회를 뭐냐 하면 교회를 운영한다고 하죠. 운영. 운영이란 말은 앞에 어떨 때 운영이라는 말을 붙입니까? 회사 될 때 운영이지요.
그러면 교회 실패가 뭐냐, 운영이 실패하게 되면 교회 실패가 되겠지요. 성경에서는 뭐냐 하면 마네킹에다가 머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를 꽂은 것을 그게 바로 교회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건 운영이 아니에요. 그냥 존재 자체에요. 존재 자체.
그러나 교회가 운영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이 교회 운영이 뭘 방해한다? 교회를 방해하는 거예요. 교회 있음이 교회를 훼방질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그래서 그 교회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기도해도 응답 없다는 이유가 믿음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믿음이 없느냐, 두 마음을 품어서 그렇습니다. 8절에 보면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기도를 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를 할 때는 마음이 하나로, 그러니 기도응답 받는 방법은 이대로 하면 흔들리지 말아야 되고 그 다음에, 한 놈만 조진다 하는 것처럼 하나만 보고 기도해야 된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기도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이유가요, 이게 하늘이 주신 은사고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기도할 때는 반드시 기도의 응답을 노리고 기도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기도하는 시각이 A라면 반드시 B라는 시각을 생각 안할 수가 없어요.
사람이 노동할 때 목적 없이 노동하지 않잖아요. 목적이 있잖아요. 목적이 기도응답이고 그 원인제공을 기도가 제공한다면 요 사이에 뭐가 남느냐 하면 결핍이 생기잖아요. 결핍이. 결핍이 생긴다는 자체는 이미 두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는 뜻이에요. 안 되면 어떻게? 안되면 어떻게? 안되면 기도를 새로 늘여봐? 기도 그냥 하지 말고 헌금하고 기도해봐? 꿇어앉아 기도해봐? 안되면 중보기도처럼 기도 잘하는 어떤 권사를 모시고 같이 해봐? 아님 목사한테 기도를 부탁해봐? 온갖 것이 헛일이라는 그 자체가 이미 기도 자체가 이건 엉터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령이 오고 하늘이 주신 은사로 기도할 때는 그럼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목적이 뚜렷하면 돼요. “죽겠습니다.”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가 한 기도지요. 다시 말해서 내가 이 왕궁의 왕비가 된 것은 이 자리에서 죽으라고 왕비가 된 것을 상상하나이다. 이때를 위함이라. 내가 지금 왕비가 된 것은 왕비로서 살려고 한 고 때가 아니라 죽을 때가 따로 있음. 죽고 나면 왕비고 뭐고 소용없잖아요.
왕비로서 죽을 이때를 위해서 죽으면 제가 왕비 그만두고 죽겠나이다. 하고 기도한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의 모든 의미는 십자가에서 나오거든요. 십자가 자체가 죽음이잖아요. 죽음을 이 땅에서 다시 반복해 버리면 이 세상이 무슨 세상이냐, 이 세상이 죽음의 세상이고 예수님의 죽음 안에만 뭐가 들어있다? 영생이 들어있다 라는 것을 맞닥뜨리면서 확인시켜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응답은 이미 얻었습니다. 정해져 있어요. 정해져 있는데 그 정해진 응답이 영 시원찮고 마음에 들지를 않아요. 한 예를 들면 딸이 내일 모레 결혼한다. 그러면 결혼하기 전에 기도 안 될 수가 없지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지요. 기도하지요.
기도할 때 또 갑자기 이근호 목사가 또 인간적으로. “주여, 결혼할 때 영광이 되게 하옵소서.” 하다가 조작 좀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아하 있는 그대로 해야 되지. “주여, 일단 날씨는 좋아야 되겠습니다. 결혼할 때 이 결혼 무효다! 이리 나오면 우사 당하니까..., 역시 제일 중요한 것은 요번 이억오천 들었는데 주여, 좀 이렇게 퇴직 안했으니까 3억3천 나와 가지고 그래도 결혼식 하고 딱 끝나고 내 수고비는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6천정도는 뽑아가지고 신혼여행 왔을 때 한2천 남고 4천은 우리 수고했다고 크루즈여행갈 수 있도록...” 겉으로는 말 못하고 속으로는 그게 있지요. 기도할 때.
날씨 좋고, 역시 끝나고 나서는 부주가 많이 들어와서 요번에 집하나 사주는데 그 집 사준다고 우리 집 한 2억 나갔는데 그거마저 보충해야 될 거 아닙니까. 결혼하고 우리도 살아야 될 거 아닙니까. 그래가지고 부주를 좀 은혜롭게 해주시옵소서. 주여, 이게 얼마나 참 말도 안 되는 기도를 하는 겁니다. 라고 기도하게 되면 응답은 어떻게 나오겠어요? 응답은.
이렇게 나온다고요. 응답을 내가 미리 또 점쟁이처럼 해볼까요. “니 딸 키운 게 누구 덕이고?”이리 나와요. “주님이요.” “그럼 니가 생전 남자 없다가 사랑하는 이 남자 아니면 안 된다고 바쳐가지고 만난지 2개월만 결혼한 것이 누구 마음을 준 거고?” “주께서 주신 겁니다.” “그럼 이 결혼식 처음부터 누가 주관할 건데?” “주님이 주관하실 겁니다.” “그럼 부주 받는 거 오만원짜리 가고 그 대신 오천만원짜리 올 건 그거 누가 할 건데?” “주님 하실 겁니다.” “그러면 지금 니가 기도 은밀하게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 것은 결국은 니 일한거야? 주의 일한거야?” “제 일입니다.” “니 일 한 거 맞지?” “맞습니다.” “니 죄인이야?” “죄인 맞습니다.” 이게 응답 아닙니까?
주님 일은 주님 일대로 벌려 놓고 주의 일하면서 주의 일은 어디서 나온다? 내가 어느 정도밖에 안 된다는 인간을 그 현장에서 내가 죄 짓는 그 현장에서 비로소 같이 계시는 주님이 자기 발언을 하는 거예요.
아까 인간들의 발언은 뭡니까? 인간들이 납득이 되는 이야기지만, 주님과 우리 이야기는 믿는 자만 이해가 되고 믿는 자만 알아채는 응답을 받는 거예요. 그 응답을 남한테 이야기하지 마세요. 못 알아듣습니다. 본인만 알고 계세요.
“주여, 이 딸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키워온 것도 결혼식 하게 된 것도 결혼식 날에 모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님께서 주관하시는 주체측이 되는 혼주가 되는 그런 결혼식 되게 하옵소서. 하고 예수님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고 탈탈 무릎 털고 일어나면 뭐 그 다음부터는 주께서 시키는 대로 “아이고, 오셨습니까? 먼 길에...” 이것만 하면 되는 거예요. 주께서 벌이는 결혼식에 자기는 서빙만 하면 돼요. 서빙만. 그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고 결혼식을 하게 되면 구름 한 점 오면 이걸 비오면 어떡하나? 오늘 비오면 오백만원 할 사람이 비 온다고 안 오면 어떡하나? 조그만 그런 걱정해가지고 비오면 또 음식이 쉬게 되면 결혼식하고도 음식이 상해서 치료비 물어주면 또 비용도 다 나가고. 또 결혼식 하는데 축가하는 인간이 또 세곡해가지고 결혼식 짜증내고 하면 안 되고 음식도 밥맛없다고 하면 안 되고 걱정하게 되면 이 인상이 결혼식 하는 혼주가 어두워져요. 나중에 아들 결혼식 할 때는 기도 꼭 그렇게 하세요. 아직 멀었다 마는.
이게 바로 두 마음이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내 상황을 지금 나를 둘 다 죽여 버려요. 없애버려요. 기도하면 없애면 나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참여만 할 뿐이에요. 주님이 벌인 혼인잔치에 나는 그저 밥이나 얻어먹는 식으로 살면 이게 바로 기도입니다.
자, 그렇다면 기도는 누가 하느냐, 예수 이름이니까 결국은 예수님 이름을 이야기하는 내가 시작했다가 끝은 진짜 주의 이름이 기도를 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확인할 수가 있어요. 그게 야고보에요. 됐지요.
9,10절에 봅시다. 10절하고 마치겠습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야~~ 이 말씀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낮은 형제가 자기 높음을 자랑하게 되면 그 사람은 높아진 거예요? 낮아진 거예요? 결국 높아진 거죠. 높아지니까 또 낮아져야 돼요. 이건 말로서는 잘 안 되는 거예요. 결국은.
먼저 된 자가 나중됐다는 말은 그럼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 자면 나중된 자가 먼저됐으면 그 사람 다음에 또 뭐해야 돼요? 먼저 됐으니까 또 어디로 가야 돼요? 나중되어야 되지요. 나중 됐으니까 또 높은 자로 또 가겠지요. 그러니 이 말은 뭔가 무한 수난을 끊어주는 그게 있어야 돼요.
낮은 형제는 자기 높음을 자랑할 때 이 자기가 예상한 자기가 아니고 주님 안에 있는 자기에요. 아까 그 그림 다시 그려볼까요. 이 바깥을 가지고 상상하다가 현실도 아닌데 현실인 줄 알고 상상하다가 다시 쏙 들어올 때 높게 해주시는 분이 따로 있음을 이야기할 때 본인이 덩달아 높은 것이지 내가 높다는 것은 높은 게 아니에요. 그건 건방진 거예요. 자고한 것이고 교만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예수 믿음 안에 있어야지 자기가 예수 믿어버리면 그건 교만한 거예요. 주님이 주신 믿음 안에서 우리는 의롭게 되는 것이지 내 믿음 가지고 의롭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말은 뭐냐, 가난한 사람이 바깥에 있는 그 가상현실을 보고 진짜 현실인 줄 알고 “나는 지지리 더러운 팔자라서 아직도 가난하냐?” 이렇게 나올 때에 뭐를 모르느냐 하면 니가 속한 이 공간이 주님 보시기에 하나님께서 높여준 공간인 것을 깜빡 잊은 거예요.
그럼 잊은 것을 어떻게 조치하느냐 하면 갑자기 여기 부자들을 배치해 버려요. 부러움이 안 될 수 없지요. 야씨~ 좋겠다. 이리 되잖아요. 마치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방나라가 보는 앞에서 쑥 들어가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로 하여금 어디에 빠집니까? 우상숭배에 빠지는 경우잖아요.
이게 흩어진 열 두 지파가 옛날 열 두 지파한테 우리가 참고로 해야 될 그 요소입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 망했잖아요. 이 흩어진 열 두 지파 안 망해요. 안 망하는 이유가 보게 해요. 옛날 생각하면 망했어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은사는 보고 부럽냐? 저들이 바로 낮은 거예요. 저게 바로 마지막 사형수가 먹는 만찬이에요. 돼지죽일 때 마지막 사료 많이 주는 거 하고 마찬가지에요. 이거 먹고 곧 가요. 그게 끝이에요.
제가 주일 낮 설교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세상에 대한 복수는 어떻게 한다고 했지요? 그걸 외울 필요는 없지만. 묻는 제가 잘못이지만. 세상에 대한 복수는 내가 구원받는 게 복수지요.
세상에 나가서 팔 벗고 복수하지 마세요. 내가 아듀~~ 안녕! 바이 바이! 이게 복수에요. 그래 잘 먹고 잘 살다가 잘 뒈져라. 나 간다. 나는 너희들이 갈 수 없는 곳에 가. 하고 손 흔드는 사람 그게 거지 나사로입니다. 끝까지 거지에요. 하나님 고집도 대단해. 끝까지 고집해요. 예수 믿고 뭘 믿어도 끝까지 거지였어요.
너희들 나보기에 거지로 보이나? 환상적인 그런 안목으로 보니까 거지로 보이지. 나는 아브라함 품에 안기는 거예요. 아브라함 품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올 때 말이 그렇지 사실은 거지와 한 가지 아닙니까. 인자는 뭐를 둘 데가 없다? 노숙자지요. 예 노숙자. 노숙자에요. 노숙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엎어서 부한 자를 뒤집어버리고 자꾸 뒤집어 버리고 뒤집어버리는 이유가 실제로 그 하늘나라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 나라 있기 때문에 뒤집는 거예요.
그 나라가 실화고요, 우리 같은 건 다 이것은 망상인데, 사람들은 망상밖에 안 보이니까 이게 진짜 실화인 줄 알고 거기에다가 언어를 주고받으니까 그 언어하고 성령이 하는 복음 언어하고 이게 이해를 못 하는 겁니다.
이해 못하면 그들에게 많은 서러움과 핍박을 겸하여 받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여기 보게 되면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여기 꽃, 풀이라 되어있지만, 여기다가 이 세상 아는 사람들 혹시 신문지상에 나온 방송에 나온 사람들 하나, 하나 대입해보세요.
이건희 회장에다가 꽃을 대입하고, 잘 나가는 사람에다가 풀을 대입하고, 하여튼 여러분을 속상하게 했던 이런 사람들, 집주인한테 꽃을 대입하던지, 여러분 돈 떼어먹고 사기 친 사람들한테 해보세요. 여러분들 힘들게 한 사람들에게 대입해 보세요. 그러면 그들은 뜨거운 바람이 불면 다 바짝 마른 풀로 다 환원됩니다.
자, 마지막 묻습니다. 이 꽃이 실화입니까? 아니면 바짝 마른 풀이 실화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결국 바짝 마른 풀이 실화에요. 실화.
이게 진실이고 현실입니다. 다른 현실 생각하지 마세요. 이게 바로 팩트 fact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자신이 문제였습니다. 괜히 미워하고 싫어했지만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을 싫어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은 게 문제였습니다. 자꾸 살고자 하는 이것이 우리에게 주님 복음에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차라리 죽는 주와 함께 있는 것을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