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창고

세마포 귀신

아빠와 함께 2024. 9. 8. 21:50

안양20180112a약1장23절(세마포 귀신)-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1장해봅시다. 야고보서1장은 사람들이 이 대목은 너무 어려워가지고 무슨 말인지 그냥 넘어가는 경우에 해당되는 구절이에요. 야고보서1장23절부터 하는데 22절 보겠습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절에 보면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여기까지는 사람들이 성급하게 아~ 쉽다. 이리 나와요. 그런데 쉽다 하는 사람이 뭐가 벽에 탁 부딪치냐 하면 25절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 이 율법 앞에다가 뭘 붙여놨어요? 자유하게 하는 율법.

22.  But be ye doers of the word, and not hearers only, deceiving your own selves.
23.  For if any be a hearer of the word, and not a doer, he is like unto a man beholding his natural face in a glass:
24.  For he beholdeth himself, and goeth his way, and straightway forgetteth what manner of man he was.
25.  But whoso looketh into the perfect law of liberty, and continueth therein, he being not a forgetful hearer, but a doer of the work, this man shall be blessed in his deed.



이 말은 뭐냐 하면 “여러분, 율법 아시지요? 알았으니까 이젠 마음껏 자유롭지요?” 라고 지금 묻고 있는 인상을 주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은 법을 알게 되면 자유로워요? 속박됩니까? 속박되지요. 여기서 이제 벽에 부딪히는 거예요. 앞부분의 해석부터 상식에 의한 해석은 다시 수정을 요구하게 되는 겁니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이 라는 느낌이 오지 아니하면 25절을 통과하지 못하지요. 듣고 행하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을 수가! 라고 되지 아니하면 율법 앞에 자유라는 말에 대해서 거부감을 유발하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자유 하는 율법을 모르고 난 뒤에 앞에서 “도를 행하는 자가 아니고 듣기만 하게 되면 자기는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딱 하게 되면 이건 뭐가 되는가 하면 요거 됩니다. 숙제됩니다. 숙제.

숙제. 참 짜증나요. 공부 끝나고 난 뒤에 마음껏 공차고 싶은데 집에 가서 놀고 싶은데 숙제가 올무 돼가지고 끝까지 따라오잖아요. 숙제를 해줘야 그 다음부터는 자율시간 되잖아요. 오늘 강의 너무 어려운데. 자유라는 것이 자유를 주는 요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 어떤 부담도 없을 경우를 우리는 자유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유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자율.

사실은 자유라고 하는 것은 너무 허황된 개념 같아서 딱 와 닿는 개념은 자유보다도 자율입니다. 자유 한다고 그냥 멍청하니 앉아있지는 않잖아요. 나는 3시부터 4시까지 뭐하고 5시부터 뭐해야지. 뭐해야지. 요게 자기가 세운 자기 규칙이지요. 자기 삶의 시나리오가 자기를 짜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짜놓은 거기에 대해서 속박이란 말을 사람들은 못 느낍니다. 신나지요. 그러면 인간이 생각하는 자유라 하는 것은 숙제를 딱 마치고, 숙제라 하는 것은 본인이 내는 게 아니지요. 남이, 타인이 내는 겁니다.

타인이 숙제를 냈고 그 해달라 하는 대로 해주고 이제는 간섭하지 마세요. 이제부터는 내 생활입니다. 내 생활 돌입했으니까 할 도리 했으니까 더 이상 추궁하지 말고 벌준다 이런 협박하지 마세요. 내 자유입니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 머리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세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지 말고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리라.” 되어있는데 말씀을 그냥 듣기만하고 행하지 아니했다. 또는 행했다. 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아이~ 참 빨리 해줘버리고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스스로 내 인생 꾸려가는 그런 생활을 해야지.’가 밑바탕에 깔려가지고 이 22절, 23절 말씀은 그냥 해주는 셈이 되어버리지요.

율법의 도를 행한 걸 자유라고 봅니까? 아니면 그거 빨리 숙제를 끝내버리고 뒷부분이 자유입니까? 이걸 제가 묻는 거예요.

오늘 성경대로 하게 되면 율법의 도를 행하는 그 자체가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렸던 나의 유일한 즐거운 시간. 자유 시간. 이렇게 생각을 하지요? 라고 지금 우리보고 묻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이상해. 율법을 듣고 행하는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그게 아! 막 기분 너무 좋아! 우리 외손녀 맨날 아이 좋아~, 아이 좋아~ 하는데. 아이~ 좋아! 하고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율법을 행하는 것이, 나 듣는 건 짜증 나. 듣기만 하면 짜증 나. 행하는 거 아이 좋아~~ 이거 어떻게 가능하냐 말이죠. 뺀질이처럼 “예, 예, 알았습니다.” 하고 내 빼고. 나 혼자 살면서 이게 즐겁지요. 이게 어떻게 가능해요?

그러니 이 성경 말씀이 현실하고 안 맞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게 될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어디서 뚫리느냐 하면 25절에서 뚫립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자유 하는 율법 앞에 사이에 뭐가 포함돼 있습니까? 자유하게 하는 그 앞에 뭐가 있지요? 온전이지요. 온전한 율법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기존에 율법에 대해서 숙제관념으로 다가온 것은 크나 큰 이건 우리의 실수고 착각이고 무책한 겁니다. 율법을 우리의 속박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야고보서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이 이야기한 율법정신과는 너무나 달라요. 온전 이라는 말을 이 건물로 봅시다. 10층 건물이 있다 합시다. 10층 건물을 어떤 사람이 사려고 갔는데 한 3층보고 난 뒤에 온전히 내가 전부 다 알았습니다. 이러지는 안을 거 아니에요. 4층 아니지요. 5층 아니지요. 그러면 뭐냐, 10층이라면 10층을 보고 난 뒤에 그 사람은 건물에서 온전한 것을 다 봤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온전한 율법이라 하는 것은 율법 속에서 우리는 뭘 알 수 있느냐 하면 미진한 것이 남아있게 되면 이건 뭘 붙이면 안 되느냐 하면 온전한 말을 붙이면 안돼요. 율법을 볼 때 온전치 못한 쪽으로 율법을 보게 되면 이건 율법의 속박을 받고 자유하고 관계가 없습니다. 이건 율법의 지적을 받아요.

옛날에 고등학교 때 보면 지각생 있잖아요. 늦게 오긴 왔고 들어오라 하니까 얻어맞을 것 같고. 야~ 들어 와 들어 와! 하잖아요. 매 맞더라도 들어오라 하잖아요. 율법을 인간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율법 속에 들어오면 되는데 율법이 법이니까 율법 속에 안 들어오고 밍기적 밍기적 거리는 거예요. 밍기적 거린다. 머뭇거린다. 머뭇거리면서 머뭇거린다는 말은 뭐냐 하면 자기 자유 시간을 지금도 계속 쥐고 있는 거예요. 내 즐거움을 포기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후딱 숙제 해치우고 빨리 내 자율적으로 자꾸 내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율법에서는 들어와! 들어와! 빨리 들어오라는 거예요. 이리 되어버리면 아무리 숙제를 해도 이게 온전치 못합니다.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2장10절에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율법은 우리로 완벽한 자유인데 어떤 짓거리를 해도 자유가 돼요. 지난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저주를 통과 못하고 심판을 통과 못하면 그것도 성도냐? 했지요. 수요일날 끝부분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적어도 성도라면 무슨 저주, 동탄 저주, 어떤 저주라도 이미 그건 다 아이고~ 잘 통과했다! 터널을 통과하고 난 뒤에 뒤돌아보는 거예요. 아! 고생되게 했다. 법 지키려고 고생 되게 했다. 지금은 자유에요. 그리고 자율이고. 저거 지킨다고 그거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별짓을 다했어요. 별짓을.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거니까. 이미 율법을 통과하고 난 뒤에는 무슨 세계냐 하면 이게 원천의 세계입니다. 원천.

성도의 원천입니다. 성도의 원천. 성도의 본향. 출현, 출현이란 말이 적당하네요. 성도가 처음부터 성도로서 뽑혀 나오는 자리. 이게 그냥 율법이 아니고 온전한 율법이에요. 자유케하는 온전한 율법이에요. 율법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나 지금 겁을 집어먹고 있었던 거예요. 벌벌벌 떨고 있었어요. 아까 이야기한 야고보서2장10절에 의하면 누구든지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를 어기면 모든 법을 어긴 자가 된다. 이런 협박성, 공갈성 앞에서 우리는 내뺄 준비만 하고 있었어요. 못 지키는 걸 뻔히 아니까.

그런데 율법은 곧 들어오라는 거예요. 백날 내빼봐야 율법에서 머뭇거리면서 조금 해내다가 또 자기가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예요. 그 저주성과 두려움, 공포 그 하나님의 하신 일을 완전히 개모독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자기 딴아 조심스럽게 착실하게, 성실하게 산다 하지만, 그게 지 생각이고 자기 패턴이고 진짜 하나님의 패턴에서 보면 이건 이런 모독이 없어요. 들어오라 하는데 안 들어와. 그것도 자유롭고 온전한 율법이라 하는데. “그냥 열심히 지키겠습니다.” “내가 니 보고 열심히 지키라는 게 아니고 들어오라고!”

왜냐하면 이 원천이 성도라는 것은 니가 말씀 지켜서 성도되는 게 아니에요. 먼저 원래 장소가 있어요. 골방이 있어야 돼요. 만들어지는 장소가 율법 안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 분의 모델이 누구겠어요? 바로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

지금 야고보가 예수님의 제자, 12제자는 아니지만 그냥 사도라고 할 수 있어요. 사도급이 되지요. 70인 중에 있다고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어쨌든간에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이 성경이 있는 이상 야고보도 성령의 글입니다. 힘들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를. 자꾸 숙제를 주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쉽게 말해서 너는 지금 머뭇거리면 내가 원하는 그 인간 아니라는 겁니다. 천국 가는, 하늘에 속한 그 인간 아니라는 거예요.

진짜 천국 가는 인간 같으면 출발점을 니 선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고 니가 생각하는 니 선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 속에서 튀어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것도 그냥 율법이 아니고 자유케하는 온전한 율법 속에서 니가 잉태되어야 돼요. 마치 엄마 자궁처럼 잉태되어서 이거 출현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무엇이 달라지는가 하면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요, 행한다. 할 때 그 행함 개념이 우리가 생각하는 행함 개념하고 완전히 달라요. 아주 역으로 달라요. 정 반대로 달라요.

자, 그럼 요것을 지금부터 설명해 갑니다. 율법에서 출현한다. 그러면 여기까지는 어려운 게 없으니까 쉽다고 생각하고. 율법에는 뭐가 있는가 하면 율법은 중심이다. 어떤 중심이냐. 세상의 중심이다. 세상의 중심지. 이리 보시면 돼요. 오늘날 세상의 사람들 보면 뭐가 없어요? 중심이 없지요. 유행 따라 세파 따라 분위기 따라 막 흔들리잖아요.

그런데 율법을 거울로 본다는 말은 아침에 그냥 안 나오잖아요. 거울을 보잖아요. 그러면 거울이 있다는 말은 지금 내 자신이 어떤가 거울을 보고 한다 말이죠. 거울은 그 사람을 그 앞에 고정시키게 만듭니다. 거울 앞에서 까불락 까불락하면 지가 보면 지가 어지러워. 거울 앞에서는 반듯하게 보지요.

그러면 흔들리는 나를 어디서 딱 잡아야 돼요? 거울 앞에 봐야 되지요. 거울 역할을 한다는 말은 다시 한 번 내 중심을 되비쳐보는 겁니다. 만약에 내 출현, 내 진정한 내 영혼의 고향이 율법 속이라면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라면 우리는 아침에 거울만 볼 게 아니고 어디 앞에서 다시 한 번 옷 몸새를 십자가 앞에서 한 번 봐야 되는 거예요.

그 율법, 그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자유하게 하고, 열심히 해서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온전한 율법에서 파생된 것. 확정된 것. 그게 늘어난 것. 거기서 출생한 것. 중심에서 출생하니까 우리는 세상 어디를 가도 중심으로서 살아가고 활동하게 되어있어요. 중심으로.

율법을 지키는 게 아니고 중심을 우리가 속해있는 직장이나 가정이나 어디가도 중심의 중심됨을 세상에 중심 있다. 이미 결론난 중심이 있다는 것을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부분적 율법 아니고, 온전하고 자유로운 율법을 전파하는 증거 하는 기능자가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에 나와서 “아휴! 집사님. 나는 이거 지켰는데 이건 못 지켜서 어떻게 합니까?” 막 이렇게 불안해하고 “나는 이거 지켜서 복 받는다 생각했는데 아휴 2시간 뒤에 이런 나쁜 짓을 해가지고 이건 완전 저주 오는 게 아닙니까?” 할 때 “아닙니다.” 라고 자기 자신의 체험담,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드러내면 그게 바로 그 자리에 박혀있는 온전한 율법의 중심적 기능이에요. 야고보가 사도잖아요. 그러면 야고보 본인도 마찬가지고 야고보에서 이야기하는 그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어디에 가도 니가 중심이 되라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일단 쉽다고 칩니다.

참, 문제는 이겁니다. 그러한 증인이라 할 때, 우리는 어떠한 생각을 하느냐 하면 세상은 진공이다. 진공이란 텅텅 빈 공간이란 뜻이거든요. 세상은 진공이라 하는데 흔히 우리가 복음 알고 성도라 할지라도 자꾸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제가 보기에는 안타까워요. 성도한테는요, 성도는 세상이 텅텅 빈 게 아닙니다. 상대자가 있어요. 이 상대자가 누군지는 재수 없으니까 내가 붉게 쓰겠습니다. 이게 사단이에요. 사탄.

이렇게 성도님들하고 이야기해보면 자꾸 뭐를 까먹고 있느냐 하면 “목사님, 제가 이렇게 살면 저 반듯하게 살지요?” 노골적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의 반듯하고 성도답게 살려고 이런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민하고 있고 이렇게 늘 말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기까지만 이야기해요. 나는 지금 누구하고 싸웁니다. 말을 안 해요. 왜냐하면 이건 나무라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누구든지 하게 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지 몸 편한 게 최고입니다. 몸 편한 게 최고에요.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내가 쳐놓은 나만의 공간에 누구 침범하고 나가게 되면 메꾸는데 에너지가 엄청나게, 원상 복귀하는데 힘들어요. 집에 손님 왔잖아요. 가보세요. 방 치우는 에너지는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그 사람이 와가지고 내거 보고 나무라지는 않는가, 흉보지는 않는가, 설거지 안했다고 꼬라지 하고는 하여튼 한 5분, 10분 왔다가도 왔었을 뿐인데 아이구~ 마침 내가 옷을 안 맞는 옷을 입어서..., 온갖 생각을 다해요. 안 해도 될 그 에너지를 소비를 한다니까요. 이게 우리의 일상의 사람살기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고방식하니까 자유란 딴 게 없어요. “제발 내 영역에 쳐들어오지 마!” 이게 자유입니다. 그냥 자율이지요. 제발 내 일에 내가 이렇게 딱 한 일에 대해서 니가 들어오지 마! 왜 들어오면 안 되는가? 나, 불편하니까. 왜 불편하면 안 되는데? 나 편해야 되니까. 왜 편해야 되는데? 묻지 마! 그 다음부터는 묻지 마! 나는 무조건 편해야 돼요. 건강하다. 편하다. 두 개 합치면 행복이거든요. 건강하 게 편한 것. 어디 아픈 데 없이 편한 것. 엄지 척! 최고에요. 최고.

이런 사고방식이 다 잠재되어 있는데, 복음 들었다. 성경 들었다. 이래가지고 복음 성경 잘 알았는데 막상 대화해보면 상대자를 자꾸 누락시켜요. 상대자를.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까 세상을 뭐로 보는가 하면 눈에 너 있고, 나 있고, 중간에 텅텅 비어있으니까 진공상태로 보는 겁니다. 진공상태로.

그러나 야고보서1장할 때 제가 누누이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 진공 아닙니다. 세상 자체가 텅텅 빈 곳이 아닙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원수가 에너지의 권력장을 이렇게 촘촘히 박아놨습니다. 권력장. 이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걸 ‘분위기’라고 합니다. 분위기. 그 분위기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기분이 나오지요. 제가 아까 집사님한테 이야기했지만, 현대인은 사물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고 기분을 소비해요.

바둑 두는 데를 기원이라고 합니다. 기원에 가면 남자들이 소위 허풍 좋아하는 남자들은 만원짜리 내기 바둑을 둬요. 사실은 액수 큰 거거든요. 그런데 그걸 딱 보면서 저는 만원을 보면 뭘 생각하느냐 하면 저게 진라면 몇 봉지가 되거든요. 제가 사고실험을 해봤어요. 만원을 딱 대면 종이가 얇아가지고 잘 안보여요. 진라면 3통을 쌓아놓고 내기해 보세요. 진라면 20개 이상 놓고 지금 바둑 두는 거예요. 도박이 그래서 무서운 거예요.

아줌마들이 그 도박 푼돈 같으면 살림 장롱 완전 새로 갈아치웁니다. 그런데 도박장에는 그걸 몰라요. 돈 귀한 줄 모른다 말이지요. 이게 뭐냐 기분입니다. 기분. 요걸 땄을 때 기분. 그냥 쇼핑을 막 하잖아요. 특히 명절 끝나고 난 뒤에. 에이 씨~ 시어머니 때문에 신경질난다. 백화점가서 막 긁어요. 결국 뭘 소비합니까? 다 입지도 않을 걸, 다 쓰지도 않을 걸 다 산다고요. 기분을 소비해요. 사물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고.

자, 어째서 이러한 현대인이 되는가, 물론 그 배후에는 누가 있겠습니까? 야고보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있어요. 사탄이 있다고요. 우리는 지금 사탄과 상대해야 됩니다. 사탄의 특징은 지금부터 어렵습니다. 이겨내야 돼요. 상당히 어렵습니다. 사물은 물건이지요. 이 세상은 물건과 물건을 교환하면서 필요한 것을 챙기는 거예요. 고기 100마리를 잡았는데 다 먹을 수는 없고요, 2마리는 먹고 나머지98마리는 시장에 내다 팔지요. 거기에 애들 필요한 운동화도 사고 쌀도 사고 밀가루도 사고  하잖아요. 그렇지요?

이게 뭐냐 하면 시장경제원리입니다. 이렇게 시장경제원리를 말 안 해도 그냥 이렇게 사는 거예요. 이렇게 산다 말이죠. 한 번 정리해 보면 인간은 옛날에는 농업 했는데 자급자족했다. 자급자족이 끝나고 난 뒤에 노동을 하면서 정착을 하니까 내가 먹는 거 이상으로 많이 나왔어요. 그걸 가지고 남는다 해서 ‘잉여생산물’이라 합니다. 잉여 생산물.

잉여생산물을 다른 데 특화된 그 쪽의 특산물하고 교환하기 위해서 중간에 시장이 말하면서 옛날에는 물건 들고 갔는데 불편하드라 이 말이죠. 그래서 조개로 대처하던지 화폐였습니다. 옛날에는요, 조개 이런 게 귀하고, 하다가 금, 은 이런 것으로 또 화폐가 바뀌어요. 성경에 나오잖아요. 금 몇 달란트 했잖아요. 그러면 이 생산물을 화폐로 바꾸면 화폐 자체적인 어떤 가치를 통해서 시장에 바꾸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태까지는 내가 노동해서 물건 얻는 것 가지고 다른 노동 한 것 가지고 노동을 맞바꾸는 것과 똑같아요. 돈은 교환 수단일 뿐이에요. 물건이 많은 게 좋지, 돈이 많은 게 안 좋은 세상이었어요. 그때는. 그런데 말입니다. 자본주의라는 게 등장했어요.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뭐냐 하면 미래의 자아를 미리 돈 주고 지금 마련하고 싶은 거예요. 미래의 자아상. 현재에 미래에는 도달하지 않았지만 미리 당겨서 나를 그런 인간으로 만들고 싶은 겁니다.

그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유럽에서 배를 타고 저 아시아나 인도 쪽으로 무역하는 사람들이 내가 배타고 저 인도의 면화를 사서 팔게 되면 그 때는 향신료, 설탕, 홍차, 그런 것들을 엄청나게 했거든요. 만약에 풍랑 없이 제 때 온다면 이건 일확 부자 되는 거예요. 한꺼번에 부자가 돼요. 부자가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밥을 굶는다는 뜻은 아니고 밥을 많이 먹은 게 부자입니까? 옛날에는 밥을 많이 먹으면 부자였어요. 옷이 많으면 부자였어요. 그게 아니고 장래에 여유 돈을 갖고 있는 게 부자라는 개념이 무역상을 통해서 베네치아부터 시작돼서 그 때부터 새롭게 된 거예요.

그러면 사람이 살다보면 농사짓는 사람이 농사 잘될 때도 있지만, 못 될 때도 있잖아요. 그러면 못 할 때에 일년 뒤에 갚을 테니까 돈 좀 빌려주세요. 지금 내 곡식을 살 수 있는 돈이란 수단을 매개체를 빌려주세요. 하려면 여유 돈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야 되지요. 여기서 뭐가 생기는가 하면 이자가 생긴 겁니다. 이자. 이자이기에 이게 바로 자본주의에요. 이자를 위해서 투자가 있고 요새는 투자가 노동생산성을 재껴버리고 투자를 위한 투자로 모든 인간들이 투기꾼이 됐어요.

살 집을 사는 게 아니에요. 투기 대상으로서의 아파트를 사는 거예요. 그냥 눕고 그냥 밥 먹는 자리를 사는 게 아닙니다. 가만히 있어도 되는데 옆자리에서 얼마 올랐다. 얼마 내렸다가 나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어요. 그냥 뜨듯한 밥 먹고 살면 되는데 세상에 다른 단지에 2억 올랐데. 우리는 5천 내려갔데. 이게 저주처럼 그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배후에 악마가 절대로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요. 악마가 드러내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기호입니다. 기호. 이 기호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가치로 표시한 거예요. 표시. 아까 가치를 표현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돈 또는 돈의 액수가 되는 거예요. 돈의 액수가 기호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기호가 되면 기호, 요거 이런 세상을 기호체제라 합니다. 이걸 기호 네트워트가 됩니다. 네트워크. 설명하는데 어렵다마는 참아내셔야 돼요.

자,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사람은 내가 존재한다. 왜 존재하느냐, 묻지도 않아요. 이 세상은 그런 거 안 묻습니다. 이 세상에는 중심이 없어요. 중심은 없고 이 세상은 율법이 없지요. 온전한 율법이 없지요. 미래가 있다는 말은 온전한 율법이 없다는 말이에요. 미래를 미래라 하는 것은 지금 흔들리고 있다는 거예요. 중심이 없어요. 기호체제하고 반대말이 뭐냐 하면 율법체제에요. 야고보서에서. 율법체제. 하나님체제에요. 여기는 자유롭고 온전한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진공이 아니라고 했지요. 진공이 아니고 무슨 체제냐 하면 기호체제입니다. 왜 사탄의 체제라 하지 않고 기호 체제냐, 사탄은 자기를 이 기호라는 관념 뒤에 숨어버린다고요. 기호를 창조하는 것은 앞서서 존재가 있고 존재는 뭘 하느냐 하면 요걸 아시면 오늘 다 풀려요.

존재는 존재감을 갖는다. 차이점이 달라요. 존재는 존재감을 갖고 존재감은 뭐냐 하면 자신한테 이익을 입고 이익이 뭐냐 하면 가치를 따지고 그 가치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시장에서 찾는 거예요. 여기를 설명해야 됩니다. 하나 하나 차이점을 이야기할게요.

존재라 하는 것은 평소에는 없어요. 몰라요. 나는 존재한다. 미친 사람 아니면 그런 소리 안 합니다. 뭔가 움직이지 나는 움직이고 있는 게 나는 존재한다. 이리 하지 않잖아요. 존재는 없는데 뭔 감은 있어요? 존재감이 있어요. 존재감은 혼자 있을 때는 존재감은 안 나와요. 누가 불러줬을 때 “혹시 여기 택배 왔는데 계십니까?” 누가 부르잖아요. “예, 여기 있어요.” 갑자기 자기를 겨냥한다니까요. 우리 외손녀가 “이거 내거! 이거 내거!” 잘 밝혀요. 지금 그 단계라. 남이 불러줘서 존재감할 수도 있고, 내가 저게 탐이 날 때, “저도 바나나 하나 먹어도 돼요?” “저도 바나나 먹어도 돼요?” 슬금 슬금 다가갈 때 저 사람이 내 존재를 받아줄까 할 때 존재감이 생긴다니까요.

그럼 존재감부터 뭐가 생기느냐 하면 반드시 뭐를 노린다? 이익을 노리는 거예요. 이익을. 이게 제일 중요한 겁니다. 당신 이거하고 무엇을 얻을 건데요? 당신이 이러면 이걸 잃어버리는데? 당신 그럼 얻는 게 뭐냐? 이게 존재감에서 나온 거예요. 누구 앞에서? 이미 상대를 의식하지요. 상대를 의식할 때, 자기 존재감이 나온다니까요.

평소에 집에 있을 때, 나는 자고 있다. 이런 바보 같은 사람 없어요. 그런데 방에 있는데 누가 들어왔다. 누군지에 따라서 다르지요. 아는 사람 같으면 그냥 누워있고 “아이고, 오셨습니까?” 존재감을 느끼면서 존재감 행동 하나, 하나가 막 가동되면서 어떤 말을 해야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나한테 이익이 되고 손실을 최소화 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아까 제가 예를 들었잖아요. 누구 하나 왔다가 가버리면 “아이고, 세상에 내가 이 속옷을 안 치우고 이게 무슨 짓이고” 손해 본 느낌 들어요. 손해 본 느낌. 그리고 가구가 깔끔하다. 아~ 내가 얼마나 우리 집 청소했다는 걸 알겠지. 어떤 이익감을 느낀다니까요. 이익감을. 존재감이지요.

그럼 이익을 구체화로 얻을 수 있는 것. 아! 그 사람 좋더라. 예를 들어서 사장님이 “아이고, 김대리 훌륭하다. 훌륭해. 착해. 정말 훌륭해. 월급20만원 깎는다. 이해해라.” 이거 말이 안 되지요. 훌륭해. 착해. 한 달 뒤에 당신은 차장으로 승진! 그게 뭐냐 하면 칭찬에 실질적인 획득이 되어야 돼요. 실질적인 획득. 그럼 경쟁에서 이기는 거잖아요. 그게 가치에요. 그러면 이익에서 가치가 오면서 여기에 뭐가 오느냐 하면 대리라는 기호에서 뭐로 바뀝니까? 과장이란 기호로 바뀌지요. 요 기호의 네트워크가 세상이 되는 겁니다.

기호라 하는 것은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옛날에는 뭘 생각했느냐 하면 기호라 하는 것은 의미입니다. 의미가 있는 게 아니고 가치가 있다니까요. 의미가 아니고. 그 가치는 기호로 나타나는데 그 기호가 무슨 네트워크냐 하면 시장네트워크, 나한테 어떤 구체적인 돈 몇 푼. 대리인데, 200만원 받다가 과장되어 150만원 받으면 이건 말도 안 되잖아요. 과장의 기호에 맞는 추가적인 가치 잉여가치가 부가되어야 돼요. 그러면 200만원 받다가 250만원 받으면 50만원은 왜 줍니까? 니가 시장에 살 때 전에는 200만원치 물건사다가 당신은 얼마나 자유가 있다. 250까지 구입할 수 있는 그런 힘을 소지했다고 언어가 모든 이 네트워크가 사회가 부여하는 겁니다. 혹시 회사 직분이? 과장! 아~ 과장님! 기호적으로 서로 소통하는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거예요.

가치를 지니고 그걸 기호가 붙고 그 기호가 비로소 힘 있는 의미로서 우리에게 주고받고, 주고받고 되는 겁니다. 특히 자녀들 선볼 때 “총각, 뭐하노?” 묻잖아요. 교회에서 “집사님입니까? 권사님입니까?” 묻잖아요. 그게 뭐예요? 그게 전부 다 기호세계라니까요. 그런데 그 기호세계에 누가 있다고요? 하나님의 원수, 마귀가 숨어있으면서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 놨다니까요. 이익이냐, 손해냐, 무얼 얻을 것이냐, 무엇을 잃을 것이냐, 전부 이렇게 돌아가게 만들었다니까요. 목쉬어도 할 수 없다. 이거 중요한 거니까.

처음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우리는 어떻게 이야기하게 되면 이 세상이 진공인줄 알아요. 진공. 진공이고 나만 율법대로 말씀대로 착하게 살면 주께서 아이고, 착하구나! 이렇게 복 줄줄 알아요. 그런데 착하게 살면 된다. 할 때 착하게 살 때, 실질적인 우리 존재감이 “하나님이여, 저 여기 있어요. 착하게 살게요.”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니가 존재감을 갖고 있다는 것은 뭘 노리는 거예요. 이익이고, 이익은 어느 네트워크에서? 이 세상의 네트워크에서 물건을 힘을 보다 많이 획득할 수 있는 힘을 이렇게 율법을 지키고 말씀을 지킬 때 힘을 추가적으로 얻는다는 그 생각이 배후에 누가 있다? 사탄이 있는 거예요.

육의 세계! 그럼요. 야고보서1장 나오는 거. 계속 강의한 내용이 이거에요. 1장부터 죽 이야기한 게. 우리는 너무 추상적으로 보는데.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어느 세계에 다녀갔느냐 말이에요. 예수님이 지붕 속으로 갔습니까? 예수님이 없을 때는 이 세계가 전부에요. 푹 담그고 빼는 순간 “죽여야 된다. 저 사람을.” 하고 숨어있는 악마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부추겨가지고 심지어 민중들도 다 부추겨가지고 죽여 버려라. 왜? 이유는 없다. 무조건 죽여 버려라. 우리하고 안 맞는 사람이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진공상태가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이 네트워크에 집중하다 보니까 자연스럽지요. 특히 운전하시는 분들 그런 거 느끼잖아요. 운전할때는요, 처음에 운전할 때는 차 따로, 나 따로에요. 차가 어른 같아. 모셔야 돼. 그런데 운전 5년10년 하다보면 나하고 한 몸이에요. 이 핸들은 나의 긴 팔의 연장이에요. 이야기하면서 운전 다 돼요. 왜? 한 몸이니까. 차가 어디에 바치고. 다 느끼지요. 다 알아요. 전부 다 느껴져요. 전부 한 몸이니까.

이 세상은 태어나면서 훈련이 됐기 때문에 이 세상과 한 덩어리에요. 한 덩어리. 한 덩어리이기에 너무 친숙하고 떨어진다는 게 이상해. 이익 없이 움직인다는 것이 이상한 짓이에요. 이익 없이 행동한다는 게. 남한테 뭔가 희생해주지요. 그거 그냥 공짜 아닙니다. 좋은 인상 남기고 그 사람에게 해가지고 결국 뭔가 노리는 게 있어요. 바보 아닌 이상 공짜로 친절하지 않습니다.

제가 요번 수련회 하면서 어떤 문장을 이야기했잖아요. ‘관용이란, 확신 없는 자들의 미덕이다.’ 기억납니까? 날 리가 있어요? 사람이 관용하니까 어지러워 보이지요. “세상에~ 목사님 관용도 많고 세상에~ 성경대로 산다. 성령의 열매로 충만한 거 같다.” 참,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확신이 없어요. 확신이 없는 것을 관용으로 감추는 겁니다.  그리고 그걸 뭐로 티냅니까? 아름다운 모습으로. 확신이 없어요.

확신이 없다는 말은 첫째 강의에서 중심이 하나도 없어요. 어디 천국을 가려고 시도하지 천국에서 나온 사람이 아니에요. 성도가 아니에요. 관용하는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는 못돼 처먹어야 돼요. 배려는 손톱만큼도 없어야 돼요. 왜? 언약이 없는 이방나라는 하룻밤에 185천명이 죽었잖아요. 요번 수련회 때 했지요. 히스기야하고 붙은 거. 185천명. 하룻밤에 천사가 와서 다 죽였습니다.

그 185천명 가운데서 효자도 많고 집에서 정비소하는 사람도 많고 농사짓는 참신한 사람 얼마나 많아요. 나라의 부름 받고 온 사람들 많아요. 그 젊은 아들 미래가 창창하고 자기 네트워크에서는 전부 다 한가닥하고 사랑하는 아들이고 세월호에 빠진 아들보다 더 귀한 아들이에요. 제천에 죽은 아줌마보다 더 훌륭한 주부들입니다. 한꺼번에 다 죽였어요. 뭐가 없기 때문에? 언약이 없기 때문에.

온전한 율법이 없기 때문에. 사탄에 매인 것이 자유가 없는 거예요. 사탄에 풀린 것이 그게 자유입니다. 이런 분위기, 이런 기분, 이런 네트워크의 출신이 아니어야 돼요. 여기 소속이 아니어야 돼요. 이건 성도의 상대자입니다. 성도가 매일같이 싸워야 될 상대자에요. 이 네트워크가. 우리는 무심코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살아갑니다.

지난 낮 설교하면서 그 이야기하면서도 내가 참 이야기 잘했다 싶은 대목이 뭐냐, 인간은 24시간 중 23시간 멍청히 있다고. 그냥 멍청하게. 특히 의사들. 입 벌리세요. 멍청히. 예~~ 아이고, 요거 빼야 돼요. 요건 안 빼도 되겠네요. 이 자체가 멍청한 거예요. 택시 운전사하는 사람들. 삑삑. 탔습니까? 모든 게 멍청해요. 주부들 설거지하면서 멍청해요. 그러다가 안 멍청할 때가옵니다. 혹시 누구 계십니까? 그 때가 뭐가 생깁니까? 존재감생기는 거예요. 예. 예. 아니오. 문 열지 마세요. 아이고~ 머리 한 번 보고. 거울을 보고. 중심 잡고. 못 빠져 나옵니다.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야고보서 율법하는 것은 예수님만 이야기하면 돼요. 쉽게 말해서 로마서율법은 다른데 그냥 예수님이라고 보면 됩니다. 율법, 예수님이 딱 오니까 이거는 유지하면서 지키려고 하니까 상대자 없는 절대적 존재감가지고 하나님하고 상대하려하는 거예요. 맹탕으로. 자기는 평소에 누구하고 상대하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단독자로 ‘나는 내 할 것만 충실히 했습니다. 이 충실함가지고 성경 말씀 충실히 지키면 하나님 기뻐하시겠지요.’ 라고 일방적 생각을 주님 앞에 들여놓습니다.

그럴 때 야고보서2장 10절 다시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어기게 되면 모든 것이 범한 자가 된다는 원리를 니가 아느냐, 라고 묻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의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는 방금 했던 이 기호의 네트워크인데 이 기호의 네트워크에서 율법 지킨다는 말은 결국 뭘 노리는 겁니까? 이익이죠. 주의 말씀대로 복음대로 지키면 나한테 어떤 이익이 옵니까? 되겠지요. 그런 식으로 노리다가는 그 배후에는 누가 있다? 사탄이 자꾸 그런 율법가지고 그런 짓하는 거예요.

그런데 온전한 율법은 인간이 지키는 게 아닙니다. 온전한 율법을 구성하고 이 땅에 집어넣으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이 야고보서에는 구약에 있는 모든 말씀을 율법이라 보고 그 율법을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라 하는 것은 여기 있다가 예수님 안에 들어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새롭게 여기서 만들어내요. 생산해 내요. 이게 하늘에서 온 은사라고 되어있어요. 야고보서1장에서는.

쉽게 말해서 로마서로 말하면 하늘의 성령을 받는다.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님이 새롭게 만들어 낸 피조물이 성도에요. 그러니 출발점부터가 이미 자유롭고 뭐하다? 온전한 율법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이미 온전한 율법으로부터. 행동 여하에 따라서 온전에서 미온전으로 가는 게 아니고, 여기서 자연적으로 행위가 나오는데 복음적 행위가 나오는 그 자체가 이미 그 자체가 온전하고, 온전하다는 말은 누구한테 지적을 받는다? 안 받는다? 이미 지적을 거치고 난 뒤에 주어진 율법이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해도 그 자체가 온전한 거예요. 그걸 은사라고 해요. 은사의 특징은 뭐냐 하면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이 드는 겁니다.

다시 해봅시다. 존재에서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존재감 나오지요. 존재에서 존재감 나오는데 존재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지금 예수님이 나와야 한다 이 이야기에요. 이 성경은. 존재에서 존재감 나오면 여기서 바로 뭐와 관련되어있어요? 존재감 자체가 이익과 관련되어있어요. 이익과. 이거 지키면 천당 보내줍니까? 내가 이거 지키면 천당 보내주는 이익을 제 소유화 시킬 수 있습니까? 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건 사탄의 짓이에요.

그래가지고는 율법을 몇 개 지켜야 돼요? 그것도 정신 멀쩡할 때 지켰다가 정신 멀쩡하지 못해도 못 지키면 어떻게 할 건데? 성경에 보면 못 지키게 되면 뭐한다? 지가 지켰던 거 다 무효인데. 니가 모든 걸 지켰어도 하나라도 어기면 무효라는 말은 온전하다는 의미가 니 행위로 온전함이 취소되는 그런 소속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소속이 다르다는 말은 여기 있다가 거기 간다는 말이 아니고 출생지 자체가, 출현 자체가 하늘의 은사로부터 출발한 거예요. 하늘의 은사. 성령으로 출발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하여튼 이것도 모르고 그동안 야고보서 보게 되면 이건 뭐 예수 믿다가 에이 씨~ 야고보서 보니까 이건 뭐 할 것 다 해야 되고 나 미치겠다. 그러니까 숙제 빨리 끝내고 숙제했으니까 저 요번 괜찮겠지요? 숙제했으니까. 이리 나온다 말이죠. 그게 이익에 따라 돌아가는 기존에 사탄적 네트워크에 푹 젖어 있어서 그래요. 푹 젖어 있어서. 여기는 돈 주고 사야 되고 그래야 생산되는 겁니다.

하지만, 이 존재가 예수님이 된다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는 존재감이 예수님 존재감이 나와요. 예수님감. 예수님의 감각이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의 감각이. 예수님의 감각을 야고보서2장에서는 뭐냐, 형제사랑이라 해요. 누구 사랑 안한다? 형제 사랑이 누구 사랑 안한다? 내 사랑 할 필요 있다, 없다? 왜 내가 내 사랑해야 됩니까? 내가 왜 내 관리를 해야 돼요? 출생지가 어디입니까? 예수님 속에서 나왔지요. 그럼 책임자가 누구에요? 누가 책임자고 누가 나를 세상으로 그냥 살게 하십니까? 주님이 살게 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누굴 사랑했어요? 예수님이 이웃형제를 사랑했잖아요. 그 사랑을 연이어서 우리도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랑? 내 사랑을 안 하고 가는 거예요. 도대체 보통 자신감 아니지요. 그런데 여기서 미리 쉬기 전에 이야기하지만, 그 이웃사랑이 그 태도가 관용이다. 온유하다. 그런 겁니까? 아니면 사가지 없는 거예요? 어떤 거예요? 사가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거예요. 예수님이 친절하지 않아서 돌아가신 거예요. 마음 맞춰주려고 공통점 찾으려고 안 해서 돌아가신 거예요.

교회에서 예수님 얼굴보다 십자가가 낫지요. 예수님은 얼굴보다 십자가가 더 예수님다워요. 얼굴 그려놓으면 참 친근하다. 착하다. 이리 생각되잖아요. 십자가는 뭡니까? 어느 인간도 공통점이 없었다. 이 말입니다. 인간과 전혀 안 맞는 분으로서 돌아가신 거예요. 지금 제자들도 외면했으니까요. 제자들이 외면한 그 외면의 자세가 지금 그게 우리를 만들었다니까요.

내 품성을 주님이 만들어냈지 내가 만들고 하면 이게 또 나의 이익으로, 요거 하면 이익 옵니까? 내가 천당 가는데 유리합니까? 또 이렇게 따지더라 말이죠. 그러니까 그런 걸 따진다면 이미 그건 따지기 전에 하늘의 은사를 안 받은 사람이 돼버려요.

결국은 이런 이야기한다는 것은 1장을 새로 보라는 거예요. 하늘의 은사가 없고 성령이 없으면 야고보서 이거 백날 해봐야 소용없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지 않으면 그 뒤 이야기가 전혀 납득이 이해가 안돼요. 그래서 이게 상당히 어려운 거예요.

성도의 거처가 어디냐, 이걸 묻는 겁니다. 니 얼마나 착하냐를 묻는 게 아니고 니 소속이 어디야? 너 어느 출신이야? 전라도야? 경상도야? 어느 쪽이야? 묻는 것처럼 하늘이야? 땅이야? 묻는 겁니다. 땅에서 하늘로 가는 게 아니에요.

제가 수요일날 그런 질문하라 했잖아요. 수요일질문 해볼까요. 땅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의 본향에 갈 수 있습니까? 슈퍼맨도 아니고 어떻게 올라갑니까? 정답 이야기했는데 또 돌아서면 다 까먹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또 이야기해줄 테니까. 이 땅에서 죽는 거예요. 죽을 때 그냥 죽으면 안 되고 예수님을 죽였던 그 원리 원칙대로 공히 같이 죽으면 그 안에서 누가 반겨주느냐, 예수님이 반겨줘요. 예수님이 반겨줍니다.

그러면 그 안에 뭐가 있느냐,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차곡 차곡 포개진 게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그게 베옷이지요. 시체를 덮었던 예수님 다니시던 베옷이지요. 그거 이야기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180112b약1장23절(세마포 귀신)-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자, 첫째시간에 그 율법이 자유라 하는데 그 자유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겁니다. 그 자유는 기존에 있는 인간들은 그 자유는 안돼요. 왜냐하면 율법에 속박이 되기 때문에. 사탄의 속박이 되어있기 때문에 율법에 대해서 숙제로서만 이해할 뿐이고 어떤 과제로만 이해할 뿐이지 그게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의미로 받아줄 수는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실 때는 뭐를 끌고 오느냐 하면 하늘의 은사를 끌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홀로 혼자 왔다가 간 것처럼 보이지요. 혼자 와서 혼자 가면 예수님 혼자 구원받아요. 그러면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야고보서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있는 열 두 지파가 형성이 안 되는 겁니다. 흩어져있는 열 두 지파. 예수님 혼자 왔다가 혼자 구원받으면 열 두 지파가 생기지를 않아요. 열 두 지파라는 개념이.

아까 첫 째 시간에 했잖아요. 여기는 기호체제라 했지요. 기호체제 또는 기호 네트워크라 했지요. 반대로 여기는 야고보서에서는 복음을 율법이라 하니까 율법체제에요. 율법체제라면 이게 성도한테는 상대자와 싸우면 상대자가 있어야 돼요. 진공상태에서 성도가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늘 이렇게 싸워야 돼요. 기호체제와 싸워야 돼요. 기호체제.

기호체제라 하는 것은 추상적이에요. 아까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했지요. 뭘 산다? 기분을 산다 했지요. 기분을 소비하는 거예요. 이거 하면 남들이 어떻게 봐줄까, 라는 그런 네트워크 같은 동류의식이 있어가지고 니도 기분 따라 살아. 나도 기분 따라 산다. 이런 게 있다 말이죠. 공무원? 우이 그런 거 하노? 이 시대가 아니잖아요. 와~~ 하는 시대다 말이죠.  분위기가 그렇게 형성되어있어요.

그런데 그런 기호체제가 되려면, 기호체제란 인간이 반드시 기본적으로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인간은 존재는 있는데 존재는 못 느껴요. 그런데 존재감이 생기면서 여기서 뭐냐 하면 독자적인 자아의식이 굉장히 강렬해집니다. 자아의식이. 자아의식이 강렬하면 뭐가 되느냐 하면 누구야? 나의 자유를 방해하는 게? 이리 돼요. 심지어 하나님한테도. 누구야? 자아의식이 생겼으니까. 누구든지 내 영력을 침범하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된다? 가만두지 않는다. 왜? 내 영역은 무슨 영역이냐 하면 이익을 수집했던 공간이거든요. 이익이 모이는 그 공간이 자기 공간이라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세상에 나오면 하나의 자기가 기호가 돼요. 내 하나는 기호가 된다고요. 직장 어떻게 됩니까? 직급 어떻게 됩니까? 하나의 기호로서 된다고요. 나는 나다. 이건 아무도 안 알아줘요. 안 먹힙니다. 차는 뭐 타고 다니시고, 한 달 수입은 얼마 되시고. 기호로서 이야기해요. 기호로서. 따님은 뭐하시고, 아드님은 뭐하시고. 기호로서 체결해요.

그런데 이것은 중요한 것이 온전치 않아요.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어려운데 해야 되겠어요. 기호체계가 가동되려면 계속해서 차이가 발생돼요. 이 차이를 노리고 투자하고 투기하는 것이 인용된 것이 뭐냐 하면 비트코인입니다. 오늘날 비트코인. 비트코인은 사기입니다. 형체가 없어요. 비트코인은 네트워크 자체를 돈 주고 사는 거예요. 판 돈 모았으니까 판  돈에서 벼락부자 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니까 투자하세요. 뭐 팝니까? 파는 거 없어요. 그냥 판 돈 팝니다.를 팔아요. 참 사기도 희한한 사기에요. 판 돈 모이는 걸 팔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익에 대한 극대화, 짧은 시간에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판 돈 팝니다. 를 돈 주고 사는 거예요. 비트코인의 생산과정이 그래요. 비트코인은 누가 지시한데가 없어요. 컴퓨터 내에서 자생적으로 발생된 겁니다. 어떤 어려운 암호를 풀게 되면 비트코인을 보너스로 더 주게 되는 그런 체제로 되어있어요. 누가 주는 사람 없어요. 어떤 어려운 문제를 풀면 비트코인이 나오는데 보너스로 비트코인을 주는데 그걸 하려면 컴퓨터를 늘려놓고 카드를 용산에서 부속을 사가지고 전기가 마구 돌아가야 돼요. 돌아가는 그것을 체굴이라 하는 거예요. 꺼내는 것.

그러니 이건 처음에는 참가하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비트코인이 많이 생산되는데 이게 참가인이 많아버리면 생산되는 단가가 숫자가 적어져요. 적어지니까 이게 값이 비싸지는 거예요. 비싸지니까 그 차이. 단가 노리고 왁 투자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모습이 자본주의의 극대화에요. 자본주의가 사실은 돈 놓고 돈 먹기지 상품을 사는 게 아니고 돈이 돈을 사는 거예요.

아파트를 돈으로 본다니까요. 아파트로 보지 않고. 아파트를 돈 덩어리로 본다니까요. 이미 우리는 그런 존재감속에 있어요. 내 존재가. 나중에 공무원 하다가 월급적다고 때려치울 수가 있어요. 국가에 대한 봉사로 하는 게 아니고 니는 얼마, 나는 얼마, 공무원 얼마 이것 가지고 따진다고요. 이러니까 이 자체가 살아가는 것이 이게 문제는 이것이 친숙하다는 거예요. 이거 외에는 다른 세계가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얼마나 손해 봤느냐, 이익 봤느냐. 얼마나 얻었느냐, 잃었느냐. 그런 식으로 따지는 외에는 다른 세계가 상정을 안했어요. 우리 인간에 상정을 안 해요. 그 배후에 누가 있겠어요? 사탄이 있다는 것을 몰랐지요. 언제 아느냐, 이게 체제 이 세상이 전부인데, 이 세상에 하늘에서 누가 오신 분이 있어요.

하늘에서 나풀 나풀 오신 분인데 하여튼 별 따라 별이 인도해서 오신 분이 왔다 다녀가니까 세상이라 하는 것이 기호체계가 허풍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진짜 하나님의 체계는 기호 체계가 아니고 율법체계에요. 율법체계.

율법체계는 율법은 인간을 죽여 버립니다. 죽일 만해서 죽여요. 온전하게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면 죽여 버립니다. 심판해버리고 저주해버려요. 인간은 그동안 하나님이 죽인다는 사실은 모르고 살아있는 자기들끼리 머리 맞대가지고 자기들끼리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자는 그런 주의로 세상이란 걸 만들었어요. 월드 세상이란 걸 만들었어요. 우리는 그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수학, 영어, 물리, 과학, 화학 모든 체제는 이 체제 안에 종속돼 있습니다.

율법체제와 무관한 거예요. 화학, 생물 전부 다. 언어학, 기호학, 고고학, 모든 세상의 학문은 기호체제가 네트워크가 돌아갈 수 있도록 그 안에서만 하는 거예요.  그럼 기호체제는 누굴 밀어내겠습니까? 율법체제는 안 밀어내요. 율법체제를 완성한 분을 밀어내지요.

왜냐하면 율법체제가 그냥 오게 되면 유대인들처럼 지키면 복 받겠지. 이리 되기 때문에 계속 미흡하지만 지키려고만 애를 쓰잖아요. 오늘날 교회하고 똑같잖아요. 온전히 다 지켰다는 생각은 안하고 온전히 다 지켜서 이제는 지킬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아니고, 성도니까 나름대로의 시간 짬짬히 내어서 열심히 지키게 되면 보너스로 복이 오겠지. 그걸 노린다니까요. 그걸.

만약에 안 오게 되면 징계 받겠지. 이리 돼버려요. 이건 정확히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악마의 자식이에요. 사탄의 자식이에요. 율법으로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벌 받는다는 유대인의 지도자들, 그 악마의 자식들이 그걸 유포한 겁니다. 그런데 그걸 유포할 때 이 기호체제 속에서 하는 우리는 오히려 그 악마가 종들이 이야기하는 말이 설득력이 있어요.

왜, 본인이 차이를 계속 늘여가면서 그걸 구입하려고 하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훌륭하게 율법 지키고 지금보다 더 성실하게 성경말씀 지키고 이 논리가 우리 살던 체제하고 맞아요. 딱 맞아요. 살면 보너스 주고 못하면 비트코인 날아가고. 그러니 이게 딱 맞잖아요.

그런데 복음은 뭐냐 하면 이미 율법을 온전히 지켰다고 되니까 그게 실감이 안 나는 겁니다. 이렇게 허접한데. 나는 생각하면 내 생각밖에 안하는데. 나는 내 편한 것과 건강한 것을 합치면 행복. 거기에 돈도 있어야 돼요. 나는 이게 전부인데 그게 어떻게 온전함이 되느냐. 여기서 뭐냐 하면 바로 죽여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이 율법체제에서 생산되는 열 두 지파들은 예수님이 열 두 지파를 만들어내요. 그런데 열 두 지파를 만들려면 기존의 열 두 지파는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되느냐 전부 다 죽여 버립니다. 그들을 총살해서 죽여 버리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대신해서 죽어요. 그게 누가복음 24장 12절 한 번 봅시다.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모르지요. 예수님이 계신 무덤인줄 알았지요. 빈 무덤이란 소문을 듣고 한 번 가봤는데, 설마 이 사람들이 미쳤구나! 허탄한 말이라고 앞에 나와 있어요. 뭘 실없는 소리하느냐고 자기 눈으로 보려고 가보니까 예수님 계셨어요? 안 계셨어요? 없지요.

그러면 예수님 떠난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뭔가 남겨져있었습니까? 세마포. 이 세마포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을 때 입었던 옷이지요. 옷은 있는데 뭐는 없다? 본 몸은 없지요. 그러면 이 세마포가 무슨 의미이냐 하면 생과 사의 경계선이에요. 오늘 제목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지금 이런 기능한다는 것을 제가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성도는 기호네트워크에도 속해있고 그리고 성도는 온전한 율법에 속해있어요. 그 중간에 경계선에 있습니다. 있어서 양쪽을 다 알고 있어요. 성도입니다. 교인 말고 성도. 하늘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특징이 달라요.

뭐냐 하면 이미 나는 죽었고 이걸 말로 설명하게 되면 충격적인데. 제목을 뭘로 할까? 지금 고민 중에 있어요. 이게 뭡니까? 귀신. 귀신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안 죽고는 귀신이 안돼요. 죽어서 싸대야 이게 귀신이 되는 겁니다. 성도는 곧 뭐다? 귀신이에요. 귀신.

로마서6장에 나옵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다시 사는 사람들.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이미 너희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에 있는지라. 싸돌아 돌아다니고 레슨하고 차로 돌아다녀 봐도 귀신이 탄 거예요. 귀신이. 차에 귀신이 탔다니까요. 귀신이. 귀신은 뭐냐하면 세상에 속하지 않으니까 그게 뭐냐하면 자유로운 영혼이에요. 자유로운 영혼. 귀신. 어디가도 괜찮아요. 남쪽가도 빈 아파트 가도 괜찮아요. 귀신이 사는 집이에요. 물론 혼자 가는 귀신이지만.

이게 욕이 아닙니다. 이건 축복이에요. 공무원. 기쁘지요. 하지만 공무원 월급 돼가지고 공무원 된다고 귀신 되는 겁니까? 미완료에요. 이건 온전치 못해요. 공무원하면서 얼마나 스트레스 받겠습니까? 자기는 온전하고 싶어도 그 마을주민들 때문에 짜증나요. 화나고 모릅니다. 하고 불성실하게 대하면 또 신고 들어와요. 돈값을 하는구나. 때려치울까. 잘사는 남자 만나가지고 키 큰 남자 만나가지고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살림이나 할까. 이럴 수도 있어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친구들은 유럽도 가는데 나는 무슨 짓인고. 이럴 수 있다고요. 그 귀한 직장을 때려치워버리고. 그럴 가능성 있어요. 자유영혼.

그러나 세상의 그런 자유가 아니고 진짜 본질 자체가 본인이 안 자유롭고 싶어도 주님께서 귀신 만들어놓은 사람이 성도입니다. 하늘의 은사에요. 이 귀신의 오야봉이 있어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그냥 귀신이 아니고 하늘에 살았던 귀신이 아닙니다. 이 땅을 다녀가서 귀신이에요.

귀신이라 하는 것은 누구로부터 살해당한 적이 있어야 돼요. 예수님은 누구한테 살해당했느냐 바리새인 아니요, 사두개인 아닙니다. 이 세상, 오는 세상 전부 지난 모든 인류, 모든 세상으로 살해당했습니다. 기존 아담에게 살해당하신 거예요. 살해당했는데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이에요. 마지막 아담은 어디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느냐, 기존의 아담 속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갔어요.

그렇다면 여기 한 번 봅시다. 아담밖에 없던 세상에서 그들은 기호적 네트워크. 목사님은 왜 자꾸 어려운 말을 씁니까? 기호라는 말이 뭐냐 하면 이게 추상적이라는 말이에요. 그럼 추상적인 기호라는 말을 왜 씁니까? 배후에 사탄이 추상적인 개념이거든요. 사람들에게. 지금 악마가 있습니다. 하면 악마 키가 몇 센티입니까? 이리 묻지를 않잖아요. 악마는 모든 네트워크를 관리하는 쪽이에요. 인간들의 욕심은 앞장세우면서 욕심의 원 주인은 지금 안 보이고 있어요.

외롭잖아요. 여러분, 외로운 게 욕심 아닌가 싶어요? 외로운 것도 욕심이에요. 누구를 사랑하는 것도 욕심이에요. 욕심이 아닌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니 본자리 다시 말해서 후딱 죄인의 자리에 서지 아니하면 자기의 본인들이 죄인임을 망각하고 나, 인생 왜 이렇게 힘들어? 그 자리를 뛰쳐나오는 순간 우리는 욕심쟁이 우후후! 되는 거예요. 우리는 욕심쟁이에요.

외롭다고 징징대지요. 징징대는 게 욕심이라니까요. 새벽기도 한다고 징징거리잖아요. 주여, 시험에 떨어져서 기도했는데 왜 합격해주십니까? 이게 욕심이라니까요. 죄인의 자리로 빨리 돌아가야 돼요. 죄인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나와 버리면 단독자가 돼요. 단독자. 단독자는 외로워서 못 살아요. 누가 붙어줘야 돼요. 내가 사랑하는 자가 늘 말 걸어주고 늘 곁에 있어줘야 나는 흐뭇해요. 그런데 이렇게 될 때 이게 얼마나 큰 욕심인가를 본인은 몰라요.

그런데 하늘의 은사가 와서 죄인이 되어버리면 “주님, 저를 용서한 것만 해도 제가 입이 백 개라도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나 같은 인간을 용서를 해주고 지금 천국 속에 있게 하고 천국 가게 해 주시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그 순간 1초 내지 2초 동안만 욕심 아니고 돌아서면 이렇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데 왜 주님께서는 이 기호 네트워크에서 필요한 거 왜 안 주십니까? 하고 또 단독자 행세를 또 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제가 경계선에 있다 하는 거예요. 귀신같으면 아예 경계선이 아니지요. 귀신같으면 아예 완전히 주님과 함께 있지요. 인간은 그런 인간이 없어요. 경계선에 있다 하면 주님 보는 거 1초 내지 2초. 나머지는 전부 이 세상 바라보고 있어요. 너희끼리 놀래? 나도 좀 놀아줘. 이리 돼요. 외로워서 못 살겠다. 심심해서 못 살겠다. 남한테 인정받고 싶고 남이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박수쳐주고 박수만 치지 말고 돈도 좀 가져다주고, 내가 넉넉하게 아이고~ 저 사람은 풍족하게 잘 산다. 재수가 따라붙네. 이런 소리. 뭘 해도 재수가 붙고 뭘 해도 프리미엄이 붙고, 이리 되면 좋겠어요. 행운을 몰고 다녔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안했는데 행운이 막 오고 이랬으면 좋겠다 했는데.

이번에 수련회 아무리 기억이 안 나도 제일 마지막 9강에서 했던 이야기가 있어요.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나 같은 여자를 왜 이리 사랑하는지..., 왁스가 불렀던 <화장을 고치고> 라는 가사에요.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해줬는지. 제가 마지막 대목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뜬금없는 게 아닙니다. 총 정리한 거예요.

내 인생에 대해서 손대지 마세요. 왜냐, 수요일날 이야기했잖아요. 불법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불법 점유에요. 율법에서 나왔잖아요. 율법의 완성자가 누굽니까? 예수님께서 뭐했다? 열 두 지파를 퍼트렸잖아요. 야곱에서 뭐가 나온다? 열 두 지파가 나온 거예요. 야곱의 아들 12아들이지요. 야곱 안에 예수님 들어있어요. 그동안 야곱이 몰라가지고 지금까지 창세기 강의 했었는데, 야곱이 그걸 누르고 있어요. 뭐를? 이스라엘을.

나중에 몇 번 지나면 야곱이 삐져나오고 안에 이스라엘이 드러날 겁니다. 야곱은 표현형이에요. 안에 이스라엘은 본질이에요. 본질을 야곱이란 표현이 나타나는데 야곱이 뭐하느냐, 속이는 자이거든요. 이 속고 속는 세상에서 예수님도 하나님도 그들의 속이는 분으로 나타나신 거예요. 속이는 분으로.

그래서 야곱의 12아들이 아닙니다. 야곱의 12아들은 전부 다 표현형들의 질이 낮은 그 여자들의 자식들이에요. 이름도 지 욕심대로 부르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 욕심 많던 아들을 전부 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버렸어요. 그 대신 희생하는 자가 있어야 돼요. 희생은 누가 희생하느냐, 본처의 아들, 본처의 아들 둘이 있어요. 하나는 요셉이고, 하나는 베냐민인데, 베냐민, 요셉 둘 다 창세기 끝까지 가게 되면 남은 열 아들과 부모를 살리는데 아주 절대적 기여자가 돼요.

요셉은 떠나서 떠난 게 아니고 죽었지요. 요셉은 죽어서 애굽에 가있고 베냐민은 살아서 아버지 품에 있고, 나중에 베냐민까지 요셉이 오라 하거든요. 확인해야겠다. 그렇게 해서 그 부모를 다 약속대로 하늘의 별과 같이 번창하잖아요. 이 원리 기능이 언약적인 기능이 예수님에게 그대로 주어졌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모독하는 자고 우리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 야곱의 열 아들의 한 인간이에요. 그런데 우리와 같은, 같은 형제로 오셔가지고 우리 형제를 살리기 위해서, 형제가 누군지 모르지요. 따로 떨어져서 하늘의 은사가 제공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하나님의 새로운 열 두 지파로 처음부터 결정된 사람입니다. 그것이 온전한 자유로운 마귀한테 속하지 않은 자유로운 온전한 율법의 완성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 자들이 예수님의 표현형이 되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보이는 예수님으로 그들은 나타나는데 기능은 귀신의 기능이에요. 귀신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율법이 줄 수 있는 저주는 이미 다 해당사항이 없어요. 이거하면 저주 받는다. 징계 받는다. 이러면 너는 지옥 간다. 그것을 어떤 것을 당해도 귀신은 샤~샤~샤~ 화살 속을 뚫고 그냥 지나가요. 해당사항이 없어요.

말을 하는 것보다도 고린도전서15장 55절 한 번 봅시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누구한테 사망아 니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은 사망아! 나한테는 해당이 안 돼.  소용없어. 협박 공갈 안 통해. 라는 것은 이미 죽은 귀신한테 해당됩니다. 귀신한테는 죽인다! 하면 죽인다? 내가 옛날에 퇴원했잖아요. 그런데요, 니 돈 20억 줄 테니까 예수를 포기하라. 그런데 돈이 뭐지요? 죽은 귀신한테는 이미 죽었다가 부활할 때는 돈으로 부활했으면 돈이 귀하겠지만, 예수님의 피로서 귀신이 됐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예수의 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중한 것은 없어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했잖아요. 예수의 피가 그게 율법의 중심 거울이 돼요.

아침에 출근할 때 피보고 출근해야 돼요. “주여, 귀신입니다.” 귀신의 존재감을 가지고 가요. 귀신의 존재감. 귀신의 존재감이 되게 되면 이익이냐, 손해냐, 나한테 큰 유혹이 되지를 않지요. 지금 경계선에서 이쪽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양쪽 다 있어야 돼요. 양쪽 다가 있으니까 우리가 골치 아픈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것만 계속 나오면 우리는 신나지요. 참 신나는 거예요.   

어쨌든 예수님 쪽 이야기한다면 피보고 이미 투명인간 귀신이 되어가는 겁니다. 귀신이 된 겁니다. 그래서 니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니가 겁주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미 우리는 같은 교인들 만나잖아요. “집사님, 안 죽었어요? 죽었지요.” 나도 죽었는데. 그 죽은 사람끼리 이야기는 뭐냐 하면 세상 이야기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를 기본으로 해야 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제가 주님 앞에서 죄인인 입장에서 서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서로 연락취하라 했어요. 교인은 모여야 되지만, 성도는 서로 자주 연락하는 게 좋아요. 연락하고 하면서 연락하는 것은 딴 소리가 아니고 장 담갔습니까? 김장 했습니까? 그것도 좋겠지만, 복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건 늘 좋아요. 귀신끼리 통하는데 안 믿는 사람이 옆에서 들었으면 진짜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지요.

예수님이 아까 세마포를 남겼잖아요.  세마포를 누구한테 목격하게 한다? 베드로에게 보이잖아요. 세마포를 볼 때 베드로 자기가 입었던 것도 아니고 요한이 입었던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입었던 거예요. 예수님이 벗어놓고 가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어디 갔느냐, 부활돼 있습니다.

부활은 편재성이에요. 편재성이란 말은 아니 계신 곳이 없는 곳. 모든 것이 주님의 나라.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주님의 나라인데, 이게 막상 주님의 나라와 접촉되는 순간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건이라고 합니다. 사건은 한 번 일어나면 다시 그 현장에 가보면 없어요. 폭죽 같아요. 사건을 억지로 인간의 역사로 만들면 안 됩니다.

사건의 특징이 뭐냐, 편재성에서 오거든요. 편재성은 이미 예고된 거예요. 예언된 거예요. 한 가지 예로 들면 제가 오늘 올라오는데 올라오면서 강의 준비하거든요. 강의 준비하는데 대전에서 했는데 이상하게 지겨워요. 이상하다. 천안 지나서 광명역에 오는데 천안이 안 지난 느낌이 들어가지고 왜 지루하지? 언제 천안 지나지. 이리 약간의 짜증을 낸 거예요. 가만히 보니까 무슨 생각이 나느냐 하면, 주님의 음성이라고 위장하고 음성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위장해서 이야기하지만.

 근호야! 언젠가는 도착한다는 거예요. 언젠가는 니가 있을 곳과 언제 니가 있을 시각에 너는 언젠가는 도착한다는 거예요. 물론 그 입장은 뭐냐, 광명역에 언제 도착한다는 말은 되지만,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요. 이 땅에서 니가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고생하는 건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님이 정해놓은 그 시간에는 반드시 천국에 가게 되고 정해 놓은 하늘나라에는 반드시 도착한다. 이미 다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고생을 좀 한다는 것이 뭐 그리 대수냐, 그 말입니다.

어차피 시간 늦어질 것도 아니고 어차피 딴 곳에 갈 것도 아니라면 어차피 정해진 것이라면 이 하늘나라는 정해진 거거든요. 주의 약속대로. 야고보서5장10절에 보면 형제들아! 좀 참아라. 하거든요. 욥도 참았다. 이게 무슨 뜻이겠어요? 지금 문 앞에 계시다 이 말입니다. 니가 있을 시간에 광명역에 12시37분에 도착해요. 내가 기차 안에서 얼마나 짜증을 부리고 느리게 느끼던 빠르게 느끼던 상관없이 내가 들썩한다고 빨리 가는 것도 아니고 기차는 12시 37분에  딱 도착하게 되어있어요. 내 기분하고 관계없어요. 내가 이렇게 슬프다. 나는 죽고 싶다. 자살할까? 이런 기분 아무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살하는 놈만 바보라니까.

‘관용은 확신 없는 인간들의 미덕이다.’ 이미 운명이 확정된 귀신인데, 누구 평가에 휘둘릴 필요 있어요, 없어요? 휘둘린다고 천당에 빨리 도착합니까? 천당에. 안 휘둘리면 먼저 도착해요? 이미 정해진 하늘나라. 내가 죽는 순간은 이미 확정되어있어요. 요번에 강의할 때 했잖아요. 유다의 여호람이 있어요. 엘리야가 당신은 죽을 때 창자 터져 죽는다고 이야기했지요. 그러니 뭐라고 설명했던가요. 나쁜 짓해서 창자 터진 게 아니고 창자 터지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나쁜 짓을 해서 창자 터지는 것과 니가 한 나쁜 짓을 연계시키기 위해서 엘리야는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너는 무슨 짓을 해도 지정된 천국과 지정된 시간에 간다. 라는 주님의 자기 숙제에요. 주님은 자기 숙제를 확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기에 걸 맞는 일들이 행동들이 나오게 되는 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의 뭐냐 하면 율법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자라는 이야기에요. 아이구, 정말 진짜 어렵다. “이 말씀 지켜야지.” 가 행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은사대로 내 소속이 어디냐를 예수님을 대신해서 세마포로서, 세마포는 눈에 보여요. 예수님은 안 보여요. 우리는 보이는 기능을 세마포 뒤집어 쓴 귀신. 예수 귀신. 예수님의 지체의 귀신으로서 살아가는 거예요.

행할 때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것은 뭐냐, 이 바나나를 먹는 것과 관계없이 천국은 가고 주님하고 하나가 돼요. 바나나 두 개 먹으면 욕하겠지. 조심해야 돼! 하나 먹어야 돼! 이건 배려도 아니고 이건 관용도 아니고 이런 짓거리하고 관계없다니까요.

그런데 만약에 온전한 율법 아니고 내가 율법을 지킨다면 요새 감기 조심해야 돼! 내가 묻혀가지고 온 집안에 감기 걸리게 하면 그럼 내가 가슴아파가지고. 자꾸 자기 단도리를 하는 거예요. 행동을 조심해야 돼! 관리해야 돼! 절제해야 돼! 이건 뭡니까? 미흡한 거예요. 온전한 율법을 하나 어기면 도로묵이 되는 겁니다. 몽땅 다 거짓말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 교회가 이 사기를 치고 있어요. 세상에 친근한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야고보서를 거론하면서 “여러분, 야고보서2장22절에 뭐라고 되어있던가요? 여러분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면 안 되지요. 설교는 잘 듣고 왜 돈은 안 내십니까? 십일조는 왜 안 하십니까? 충성봉사는 안하고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도 없습니까? 여러분이 교회니까 관심들을 가지고....” 온갖 법령을 계속 제작하잖아요.

심지어 목사가 그렇게 해도 목사 욕하지 마세요. 우리가 그걸 기다린 겁니다. 우리가 기다렸어요. 이 기호 네트워크에서. 뭘 얻기 위해서? 존재감은 뭘 느껴요? 이익을 얻기 위해서. 누구로부터? 하늘로부터. 말씀을 줬으니 말씀대로 살면 내 자식 잘되고 내가 하는 일 잘 되겠지. 하는 이익을 얻기 위해서.

이익은 어떤 이익이냐, 새로운 이익. 이익가지고 세상에 나가면 오! 나보다 더 많은 이익이 있으니까 차이를 느끼지요. 차이를 느끼면 더 착해지려해요. 더 착해지면 저 사람 따라 붙일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엄마는 새벽기도 열심히 해가지고 딸이 못 다한 기도마저 해가지고 기도의 응답받아가지고 그걸 딸 용도로 퍼주는 거예요. 이런 율법적인 그게 굉장히 친숙해져있어요. 우리가.

배후에 누가 있는가 하면 바로 악마가 예수님의 온전한 십자가의 복음을 거부하라고 우리를 앞장세우는 겁니다. 세마포 이야기 좀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세마포를 던짐으로서 약간 어려워요. 아까 편재성을 말했는데 편재성은 어디 아니 계신 곳이 없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편재성이 어디에 담겼느냐 하면 기호체계니까 기호로 담겨요. 기호로. 기호라는 것은 단어라고 할 수 있고 문자라고 할 수 있어요. 또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름 단어니까. 기호니까. 기호와 기호사이에는 붙어있어요? 떨어져있어요? 떨어져있어야 의미가 발생되는 겁니다. 의미가.

횡단보도에 빨간색, 파란색 있잖아요. 빨간색은 뭔 뜻입니까? 건너지 마세요. 고 파란색은 건너가세요. 지요. 그러니까 차이가 나야 의미가 발생된다니까요. 그러니까 세마포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귀신이지만, 이 땅에 왔을 때는 기호 네트워크에 돌려버립니다. 여러분이 어릴 때 떡 방앗간이나 고추 빻는데 보면 기계가 휙 돌아가지요. 할 때 주인이 아주 솜씨 좋게 떡을 하려할 때 벨트를 바꾸지요. 고추 빻다가 떡으로 돌릴 때 나무 작대기로 벨트를 갈지요. 솜씨가 좋아서 감탄합니다. 휙 휙 돌아가는데다 벨트 하나 바꾸면 휙 휙 돌아갑니다.

주님께서는 이 기호 벨트에다가 주님께서 귀신처럼 날아다니면 참 좋겠는데 도깨비처럼. 그게 아니고 하나의 응축된 세마포처럼, 세마포가 뭐가 귀합니까? 그 당시 시장에 가면 파는 게 있잖아요. 누가 봐도 누더기 아닙니까? 때 묻은 누더기. 아무것도 아니에요. 누가 봐도 갔다가 버릴 거예요. 그걸 그 안에다가 귀신같은 우리를 박아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속에는 귀신인데 온전한 율법의 자유자인데 겉모습은 알아주지를 않네. 이 기호체계에서.

아~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게 26절에 나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왜 여기서 고아와 과부를 거론했을까요?

고아와 과부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하잘 것 없는, 시시하기 짝이 없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발 내 팔자는 저리 안 되었으면 좋겠다는 대상자가 고아와 과부입니다. 옛날에는 복지가 잘 안 되어있었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기 위해서 특별히 복지 기금이 마련돼 있게 되어있어요. 기금을 가지고 세자로 십일조라고 했어요. 3년마다 내는 십일조는 고아와 과부에게 집중적으로 용도가 그렇게 쓰였는데 사람들이 십일조를 내지를 않았어요. 십일조를 거의 내지를 않았습니다. 재투자한다고 안 냈거든요.

그러니 고아와 과부가 전쟁할 때 일어나면 많이 아버지가 전사하면 많이 생기잖아요. 고아와 과부가. 고아와 과부가 많이 늘어난 것에 대해서 그 당시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고아와 과부 많은데 왜 십일조 안하느냐고 하면 그 사람들이 하나님보고 뭐라고 했어요? 전쟁을 일으킨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입니까? 하나님이 일으켜 가지고 우리입니까? 사람을 죽게 한 게 우리입니까? 하나님이 죽게 해 놓고. 하나님 본인이 책임져야지 왜 우리보고 책임지느냐고 나오겠지요.

자, 고아와 과부 십일조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면 이게 십일조에 나오는 율법정신인데요. 이게 뭐냐 하면 방금 이야기했지만, 누구 때문에 그런 운명이 됐느냐 하는 거예요. 1번 자기 죄 때문이다. 2번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 뜻이에요. 잠언서에 나옵니다. 부한 것도 가난한 것도 본인 잘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흔히 팔자라고 이야기하지요. 그 사람의 팔자라고 하는데 팔자라 하는 것은 기독교식 용어가 아니고 성경 용어가 아니고 어디서 나온 거예요? 세상에서 나온 거죠.

자, 그러면 한 번 봅시다. 팔자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기호체계에서의 운명 또는 지 팔자다. 지 운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왜 그렇게 했습니까? 에 대해서 질문을 회피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무슨 나타난 건 있는데, 세상에 나타났는데, 이 세상을 누가 조정하는 자는 본인들이 안다,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말이 팔자다. 운명이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도 알다시피 골로새서1장16절에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누굴 위해서 만들었어요?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었지요. 그게 뭐냐 율법체제가 중심이에요. 중심. 그런데 기호체제는 돌아가기 바빠 가지고 중심이 없어요. 어떤 부자가 중심이 됐다가 그 부자가 가난하게 되면 더 다른 부자에게 옮겨 타고, 아이고, 나는 부장님이 좋아요. 하다가 부장 퇴직하면 다른 부장에게 붙어가지고 나는 부장님이 최고에요. 해가지고 그 회사에 살아남으려고. 모든 것은 이렇게 중심이 없어요.

중심을 들여다볼 수 있는 온전한 율법 거울이 없어요. 제가 만약에 복음이라는 거울을 제시하게 되면 거울 깨버립니다. 나는 내 잘남을 비추는 거울이 필요하지 다른 거울은 필요 없습니다. 할 거예요. 그러나 야고보서는 율법체제가 거울이기 때문에 거울보고 살라는 말이지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보고 살으라는 말이지요.

니가 소속이 어디인지, 출신지가 어디인지, 니 현재 자리가 어디인지, 니가 산 사람인지 아니면 귀신인지. 오늘 제목 귀신으로 정했다. 안 되겠다. 이게 제일 시원하다.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어요.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귀신인데, 참 실감을 못해요. 왜냐하면 우리가 세마포거든요. 세마포가 냄새나거든. 예수님이 입은 옷이  어느 체계냐 하면 기호체제에서 나온 겁니다. 예수님의 옷을 어디서 샀습니까? 예수님이 오자마자 하늘에서 세마포를 아버지가 “아들아! 이거 입어라.” 던져줬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있는 물건을 사용했어요.

다만, 그 물건을 통해서 하늘과 땅의 차이점을 이야기한 거지요. 왕 같으면 말을 타야 되는데 예수님은 겸손하게 뭘 탔습니까? 타기는 탔는데 나귀를 탄 거예요. 예를 들어서 벤츠를 타야 되는데 모닝을 타고 오신 거예요. 내려 보니까 왕이에요. 사람들한테 어떻게 비취겠습니까? 겸손하게 비취겠어요? 제가 광주강의 때 했어요. 사람들은 그걸 겸손인 줄 모른다고요. 형편이 그래서 타는 줄 알지. 성도가 이렇게 이런 집에서 사는 거 겸손인 줄 알지요. 여기해도 이게 자유에요. 중요한 건 내가 귀신이냐가 중요합니다.

귀신이 돼가지고 어디 가서 사나? 그게 자유에요. 내가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으로서 이 아파트 평수가 전혀 나한테 보탬도 없었고 그게 도움된 적도 없었어요. 내가 차장이냐, 부장이냐, 그것도 마찬가지이고. 내 남편, 내 아버지 뭐하느냐, 딸이 뭐하느냐, 그건 내가 구원받는데 관계없고 오직 예수의 피. 그 피에서 내가 새롭게 출생된 거예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영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에서 출생한 자만이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니까 뭐냐, 고아와 과부를 돌본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이 땅에서 비록 아버지, 어머니 살아계시지만 고아다 이 말이죠. 나는 나그네고. 이 땅에 마음 둘 필요는 없다. 이 땅에 마음 둘 필요는 없어요.

이혼하자 하면 해야 되고, 했다가 만나자고 하면 만나는 기고 이 땅에 어떤 것도 구애될 필요 없습니다. 어머? 무서워라. 귀신이 무서워할 리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비유로 이야기했잖아요. 심판과 저주를 통과하지 않으면 이건 누가 뭐래도 교회 수십년 다녀도 그건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는 성도다워야 돼요.

자기의 처지가 고아라면, 과부라면, 주께서 맡은 자기 역할입니다. 할당된 자기 사명이에요. 고아와 과부가 율법에 의하면 세상이 얼마나 추하냐, 더러우냐를 그걸 들추어내는 기능적인 역할이 고아와 과부입니다. 고아와 과부는 기분 나쁘지만. 팔자지만 팔자라 하는 것은 기호체계이고 사실은 예수님의 명령이지요. 왜? 기호체제가 아니고 실은 율법체제기 때문에. 주의 복음체제기 때문에.

지금 기호체제는 눈에 보이는 표현형이고, 진짜 본질은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진 거예요. 우리는 그걸 알고 있잖아요. 그것만 알면 안 되지요. 내가 귀신인 것도 알아야 되지요. 그것만 알면 안 되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할 필요 없어요. 열심히 하는 게 아니에요. 주어진 대로 하면 돼요. 아이고~ 세상 왜 이리 안가나? 도착하게 돼있을 거예요. 너무 시계 볼 필요 없어요. 결국은 이리 사나 저리 사나 가는 곳은 천국이고, 때 되면 죽게 돼 있어요. 살고 싶어도 보약 먹고 영양제 꽂아놔도 죽을 때 되면 죽고. 죽으라고 목 졸라도 안 죽을 때는 안 죽어요. 그게 자유 아닙니까. 내가 내 인생에 손 떼도 괜찮은 것.

낙하산 내릴 때도 양쪽으로 팔 벌리고 내리잖아요. 팔을 안으로 모으지 않잖아요. 양 팔을 벌리잖아요. 2초 내지 3초밖에 안되고. 1초 늘여줍니다. 봐줘가지고.  그런데 우리 평소에 살아가는 것은 양 팔을 가슴에 모으잖아요. 맨날 우이 사노? 외로워서. 힘들어서 우이 사노? 그래서 수련회 때 사는 게 무섭다 했지요. 죽는 게 무서운 게 아니고 죽으면 안 무서워요. 그런데 안 죽기 때문에 죽는 게 무서워지는 거예요. 죽는 게 무섭다는 것은 살아가는 순간 순간이 오늘 또 찬거리 뭐해줄고? 전에는 미역국 해줬다고 또 미역국이라 하겠지. 아이고~ 무서워라. 무서워라. 미역국 말고 매생이국 해줄까? 콩나물 오뎅국 해줄까? 내 좋아하는 거 막 나온다마는. 성도면서 왜 그렇게 살아요? 성도면서.

복음 뭐 들었어요? 교회 가나, 교회 주님 계신 곳 아닙니다. 편재성이에요. 편재성. 우리는 교회 갈 때는 세마포로 가는 거예요. 안에 귀신 있다! 목사 보니까 안에 귀신이 아니야. 살아있어요. 벌벌 떨고 있어요. 살아있으니까 벌벌 떠는 거예요. 이 교회 키워야지. 이 교인 수 나가면 안 되는데. 설교할 때 벌벌 떨어요. 돈 내야 됩니다. 하늘나라 확장해야 됩니다. 벌벌 떨고 있어요. 아이고~ 인간아!

그런데 거의 없는데 혹시 귀신만나면 반갑다! 친구야! 교제하고 얼싸안고 서로 소통하고 사랑하고 성도끼리 뭐가 그리 가로막는 게 있고 장벽이 있을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가로막는 무슨 장벽이 필요합니까? 가릴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이미 우리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거든요. 주님의.

니가 살아온 것에 한 번 보라. 왜 구원 받았는데 봅니까? 니 자랑 하라고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 증거하라고 보내는 거야.  세마포로서 보내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에서 이미 다녀간 거예요. 다녀갔는데, 그게 제 이야기 아니고 요한복음 17장에 나와요. 겟세마네 기도에 나온 거예요. 너희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걸 내가 아는데, 너희를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이 땅에서 니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남겨 둔 거예요. 지금 남겨 둔 거예요.

살려주세요! 가 아니라 세상 사람은 살려주세요!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빨리 가는 게 좋은데 안 죽이는 것이 답답한 거예요. 좀 죽여주시면 좋겠는데. 남겨두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너희들 때문에 지금 주께서는 안 데리고 가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회수를 안 하고 있는 거예요. 아이고~ 이 이야기하고 죽고 싶다. 정말. 더 이상 무슨 이야기를 할 게 있어요?

항상 후딱, 귀신의 자리로, 죄인의 자리로 후딱 돌아오세요. 후딱 돌아와야 되지 안 돌아오게 되면 자기의 귀신인 것을 망각해버리고 세상과 단짝이 돼가지고 그것들하고 웃고 울고 등선 넘고 북한 핵하니까 워~ 미국 도와준다고 위이~ 지금 여기에 놀아나고 있다 말이죠.

제가 마음 같아서는 여러분과 다 같이 <신과 함께>라는 영화를 관람하고 싶어요. 한국 영화는 지루하다 해서 안 본다 하는 게 있기 때문에 제가 보자마자 십자가마을에 우리교회에 올려놨지요. 여기에 처사가 나와요. 처사. 이게 뭐냐 하면, 아까 귀신 했지요.  이 땅에서 활동하는 변호사 귀신이야기 나오거든요. 물론 이 처사는 착하게 살면 구원받습니다. 그런 쪽이지만, 야고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율법을 어기면 다 어기게 된다. 이 말은 그럼에도 그렇게 2장10절에서 해놓고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완전하고 또 그 앞에 중요한 게 뭐예요? 너를 뭐했다? 자유케 한 사람 같으면 이것은 니 행동 여하에 따라서 천국, 지옥, 탈락, 합격이 되는 게 아니고 이 땅에서 니는 예수님처럼 고아와 과부처럼 살기 때문에 언제든지 고아와 과부를 볼 때에 뭘 전한다? 복음을 전할 수 있어요. “야, 니 고아와 과부인데 고아와 과부로 돈만 밝히지. 그러지 마! 예수를 믿어야 돼. 니가 고아 과부된 것은 니가 세상이 나빠서도 아니고, 원래 나쁘지만. 너도 나쁘지만, 그것 때문에 고아, 과부된 게 아니고 주의 뜻이야. 세상 모든 것은 율법체제지 기호체제 아니야.”라고 아주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마음껏 퍼부을 수 있다는 이것이 얼마나 즐겁습니까.

자유롭고 즐거운 가운데서 주께서 부르실 때까지 세마포로서 세마포 뒤집어쓰고 주께서 하시는데 우이합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 구원받으려고 이용당했던 세월 생각하게 되면 참 우리 자신도 그들도 나쁘지만 우리 자신도 나빴습니다. 이제 하늘의 은사, 성령이 오고 난 뒤 모든 것이 그것이 악마적인 것을 알았사오니 우리가 날마다 이 사탄과 싸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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