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창고

의도

아빠와 함께 2024. 9. 4. 17:01

안양20170811a약1장1절(의도)-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1장 봅시다. 야고보서 유명한 구절이 있지요. 야고보서2장에 보면, 믿음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니고 행함으로 신앙 생활한다는 내용이 야고보서2장18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이리라.’ 요 대목. 그래서 이 대목을 먼저 보게 되면 사람이 하나님에게 보일 것은 딱 2종류밖에 없는데 하나는 행함과 하나는 믿음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믿음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야고보서는 행함을 보이는데. 자, 여기서 약간 복잡해요.

믿음+행함 이러면 아무 문제없는데 믿음이면 믿음이고 행함이면 행함을 보이라는 거죠. 행함도 있고, 믿음도 있고 둘 다를 내보이지 말라는 거예요. 이 말이 상당히 어려운 거잖아요. 쉽게 말해서 행함90%, 믿음10% 이거 안 된다는 겁니다. 반대로 행함10%, 믿음90% 이것도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딱 딱 끊으라는 거예요.

행함이면 행함, 믿음이면 믿음. 그러니까 대표적으로 너를 내세울 게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던지, 행함이라고 하던지, 둘 중에 하나만 하라. 그런 이야기에요. 좀 전에 시작했습니다. 새로 다시.

야고보서할 차례입니다. 야고보서를 하면서 사람들이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이 뭐냐 하면 다른 로마서에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야고보서는 믿음은 아주 취급도 안하고 행함 내놓으라는 이야기에요. 행함. 믿음은 내놓지 말고 행함 내놔라 이 말이죠.

그러면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꼭 행함이 없는 것들이 믿음을 내놓는다는 겁니다. 야고보에 의하면. 그러면 야고보서가 이렇게 2장에서 믿음과 행함 둘 중에 둘 다 내놓지 말고 둘 중에 하나를 내놓는다면 야고보서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야고보서 앞에 뭘 내놓겠습니까?

야고보서가 이렇게 믿음에 대해서 아주 싫어하고 거부하고 행함만 딱 내놓으라고 할 때 우리는 그러면 야고보 사도 앞에서 우리는 뭘 내놓겠습니까? 야고보가 이렇게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 믿음 있습니다.” 라고 내놓겠어요? 어떻게 됐겠어요? 뭐라고 하겠어요? 야고보가 앞에 있다면. 그렇게 강조했다면.

야고보가 그렇게 믿음 갖고 오지 말고 행함 갖고 오라고 했으면 지금 그 분이 이 앞에 앉아있다 합시다. 그 분이 또 “자, 한 번 보자. 보자. 뭘 내놓을래?” 할 때 그렇게 신신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요.” 하고 내놓을 사람 있겠어요? 없겠어요? 뭐라고 했겠습니까? “야고보, 당신이 사도가 좋아하는 행함 가지고 왔습니다.” 이렇게 되겠지요.

그게 야고보서의 주제에요. 쉽지요. 야고보서의 주제가 뭐냐 하면 행함으로 보여주는 믿음이 주제입니다. 그러면 야고보의 모든 명령과 지시는 믿음에 관한 게 아니고 어디와 결부되어야 된다? 행함과 결부되어야 돼요. 여기서부터 어렵습니다. 진짜 어려워요. 제 말 잘 들어보세요. 제 말이 틀리면 중간에 논리가 틀렸다고 이야기하세요.

야고보가 행함을 지금 요구하고 있지요. 그렇잖아요. 그렇다면 이 행함이 여기 나타났으니까 있음입니다. 있음. 여러분한테 이게 어렵기 때문에 묻는 식으로 하겠습니다. 행함이 있을 때, 나타났을 때, 행함이 없을 때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행함을 보이라 할 때 “예, 행함 있습니다.” 라고 가져올 때 이 행함이 없을 때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없을 때가 없겠습니까?

더 쉽게 합시다. 중국집에서 “자장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자장면을 내놨을 때에 그 자장면이 없을 때가 있어요? 아니면 내 놔라 할 때 자장면을 만드는 겁니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중국집에 이만큼 쌓아놓지는 않잖아요. 누가 와서 “뭐 드실 겁니까? 짬뽕? 자장면?” “자장면” “예, 자장면 준비하겠습니다.” 없는 자장면을 달라고 지시하는 동시에 자장면이 새롭게 만들어지지요. 그러면 자장면이 없는 그 순간이 있는 것처럼 행함을 달라할 때는 행함이 없는 그 순간이 있다 말이죠.

이 없음이 어떤 상태냐 하는 겁니다. 이 없음이. 행함이 없던 상태가 어떤 상태냐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여기서 오해합니다. 행함이 없던 상태는 인간이 있고, 야고보가 또 하나님이 “야, 너의 행함 보자.” “여기 있습니다. 제가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지요.

그런데 야고보는 놀랍게도 행함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 또는 주님이 계셔서 나오는 행함이에요. 그러니 로마서하고 똑같은 거예요. 로마서에서는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했지요. 그거 보다가 야고보서 2장을 보고 여기는 니는 믿음 보이느냐, 나는 행함 보이겠다. 이렇게 하니까, ‘야~~ 야고보하고 사도바울하고 만나면 둘이 싸우겠네.’ “이 씨~ 내 말이 맞아.” 같은 예수님의 사도이면서도 내 말이 맞아. 이런 싸움이 되면 안 되지요. 본인들의 사견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명령이기 때문에 같은 주님이기 때문에 싸울 리가 없지 않습니까.

주님의 사도가 같이 안 싸운다면 오늘날 일반인들이 야고보서 보고 로마서 보면서 싸우면 돼요? 안돼요? 싸우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뭔가 놓친 게 있어요. 로마서에서는 “야! 너가 행함을 내놓을 거냐? 믿음을 내놓을 거냐?” 할 때 “행함이요.” “그건 안 돼. 구원은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야.” 라고 사도바울이 했을 때, 인간이 먼저 있고 인간에게서 행함도 나올 수 있고, 인간에게서 믿음도 나올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야고보서에서 행함은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에게서 믿음이 나오지만, 행함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인간의 출처가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출처가 오는데 그 출처를 야고보서1장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은사’라고 되어있어요. 은사를 다른 말로 하면 ‘선물’입니다. 선물. present. 선물이에요.

아주 알기 쉽게 말해서 야고보가 “야, 너희들 성도야?” “예, 성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받은 행함을 내놔.” 이리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 받은 게 행함이던, 믿음이던 로마서에서는 그걸 통합해서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로마서에서는. 로마서에서는 인간에게서 나온 것은 무조건 그게 믿음이던 행함이던 그건 행함이 되는 거예요. 좀 복잡하긴 하지만, 일단은 정리됐다고 칩시다. 일단은 우격다짐으로 칩시다.

그 다음에 진도 나갑니다. 야고보서2장에서 행함이냐, 믿음이냐 이야기를 누구와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나님과 사도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같은 인간들끼리 이야기하겠지요. 같은 인간들끼리. 오늘 내용이 참 복잡해요. 인간들끼리 이야기하잖아요.

인간들끼리 이야기하는데 “야, 너 신앙생활 어떻게 해?” “나, 믿음으로 해.” “아이고, 참, 믿음으로? 야고보서에서 사도가 그런 거 하지 말라 했어.” “그러면 너는?” “나는 행함으로 하지. 그거 야고보 사도가 이야기한 거야.” 라고 둘이 대화를 한다고 했을 때에, 이건 행함과 믿음의 문제가 아니고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선물로서의 행함은 어떤 인간과 대화하면서 무엇을 가름하느냐 하면, 니는 신자다. 니는 신자 아니다. 가름하는 이야기가 돼요. 니는 신자다. 니는 신자 아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로마서에서 믿음이냐, 행함이냐를 통해서 그 사람이 신자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것처럼 야고보서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냐, 니가 하는 것이냐에 따라서. 그러니까 인간이 행함을 내놓으면 야고보서에서는 그건 믿음이 돼요. 출처가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이기 때문에.

결국 야고보서도 뭐냐 하면 니는 신자다. 신자 아니다. 를 행함 가지고 구분을 짓는다는 것에서 로마서나 야고보서나 같은 겁니다. 그럼 여기서 그 다음 문제. 그걸 왜 구분 지으려 하는가.

권사님한테 물어봅시다. “권사님, 어떤 사람이 있는데 신자냐, 신자 아니냐, 구분 짓고 싶어 하지요? 그런데 그걸 왜 구분 지어야 되지요? 그걸 왜 구분해야 됩니까?” 가게에 손님이 왔는데 옷차림이 보니까 촌스러워. 그러면 옌벤 사람인지 서울 사람이지 이상하게 가게 주인은 구분하고 싶어 해요. 옌벤은 덤탱이로 씌우던지 아니면 우리나라 사람은 깍쟁이라서 조심해야 되던지 이런 고민인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뭔가 오게 되면 구분을 하는데 신자의 특징은 본인과 같은 신자일까를 가지고 구분을 해요. 본인과 같은 신자일까.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오면 저 사람이 성당 다닌 사람인가. 실례지만 대구의 어느 성당 다니셨습니까? 대구에서 이사 왔다 하면.

그러니까 내가 묻는 것은 왜 그걸 구분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왜 구분하지요? 그게 오늘 1장1절과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묻는 겁니다. 아무 관련 없는 걸 묻는 게 아니에요. 그걸 왜 구분되느냐 하면, 결국은 인간은 자기중심이라는 것을 야고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거예요. 결국은.

그걸 왜 구분하느냐 하면, 하나로 통합의지가 있어요. 그 하나가 누구냐 하면, 나라는 하나에요. 나라는 하나. 투표할 때 문재인 찍었느냐, 홍준표 찍었느냐 이리 묻잖아요. “목사님은 누구 찍었습니까?”라고 묻는 이유가 대구사람 같으면 자기는 이미 홍준표 찍어놓고, 서울 사람 같으면 문재인 찍어놓고 시작하는 거예요. “내편 되세요.” 라는 뜻이에요. 내편 되세요.

나라는 하나. 하나로 통합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요. 그 의지. 이것을 의지라 하는데. 저는 더 알기 쉽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늘 아마 제목이 될 가능성이 있어요. ‘의도’ 의도라고 명하고 싶네요. 의도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신앙생활 죽 하면서 본인이 신앙생활 잘하고 있느냐, 못하느냐, 다른 사람이 잘하고 있느냐, 못하느냐를 싶게 판정하는 방법은 교회 다니는 의도가 뭐냐? 자기 의도를 늘 수상히 여기고 분석해 보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는 의도가 뭐냐? 이건 일부러 물어야 돼요. 이거 안 물으면요, 지금 잘하고 있는 짓이라고 착각한다니까요.

교회 다닌다면, 교회 왜 갔지? 의도가 뭔데? intention이라고 하는데. 의도. 그 의도가 뭔데? 그 의도가 야고보서에서는 우리의 의도는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환경에 우리 의도보다도 먼저 뭐가 주가 되느냐 하면 주님이 이 지상에 대한 의도가 더 강렬하기 때문에 신자라면 내 의도가 있더라도 주님의 의도로 바뀌어져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내가 만약에 자석에서 내가 만약에 성향이 S극이라면, 주님이 와버리면 주님은 나의 S극을 N극으로 강력하게 의도를 바꾸면 우리 내부에서는 S극과 N극이 날마다 우리 속에서 투쟁하고 싸우게 되는 겁니다. 투쟁하고 싸우게 돼요. 나, 태국에 놀러간다. 태국에 놀러간다 하니까 친구들이 좋겠다. 신나겠다. 바람 쐬고 온나 이렇게 하겠지요.

그런데 친구한테 태국에 놀러간다. 자랑 질하면서 한 번 생각해 보는 거예요. 내가 태국에 놀러가는 것이 의도가 뭐냐는 거예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태국에 가야 주님이 계십니까? 아니면 내가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성지 순례하는 건 이해되는데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태국 가서 부처한테 빌면 영광 돌리겠어요?

그러니까 모든 의도는 인간에게는 태어날 때 갖고 있던 자기  중심. 그 의도가 강렬한 거예요. 강렬한데 그 의도가 태국 가는 것뿐만이 아니고 모든 주변의 만나는 사람마다 무조건적이에요. 무조건, 무조건이에요. 무조건 내 의도에 맞추라고 상대방에게 무언적인 강요를 하는 거예요. “수련회 참석하실 겁니까?” 무언중에 “아이고, 청심원.” 아이고~ 뒷골 댕겨. 무언중에 뭐야? 갑이야? 무언중에 충격. 무언중에 어떤 강한 의도를 느끼는 거예요. 강한 의도를. 모든 게 다 그래요.

심지어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에요. “여보, 백화점 나와. 당신 이 가방 찾았지?” 가방을 샀다. 일단 아내는 감사하다 하고 챙기고. 일단 챙겨야 돼요. 어떤 군소리하면 마음이 또 바뀌기 때문에 일단 챙겨 놓고. 다 챙기고 “기분 좋지?” 하고 약 한 16분45초간 기분 좋아요. “그런데 여보! 의도가 뭐야? 뭐? 뭐? 뭐 일이 있었지? 응? 나한테 숨겨놓은 일이 있지? 의도가 뭐야?” 다시 말해서 “내가 요구하지 않은 것을 당신이 나한테 먼저 어떤 행세를 할 수 있어?” 이러거든요.


그러면 인간에게는 뭐가 있습니까? 행함이 있지요. 그런데 “주님이여, 의도가 뭡니까?” 그 의도를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라고 합니다. 내 의도는 주님에 의해서 박살나는 그 의도를 야고보서는 말합니다. 내놔라. 야고보서의 말을 지키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이 어려운 거예요.

야고보서에 “보자~ 뭐 하지 마라.” ‘지키지.’ 지키는 게 아니고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자기 의도가 있어요. 이 모든 야고보서에 나온 말씀은 지금 그 의도가 성도라면 내 의도와 정면  충돌한다는 거예요. 충돌하고 누가 이긴다? 주님의 의도가 내 의도를 이긴 그 증거물의 행함을 가져오라는 겁니다.

‘목사님, 과도하게 해석하는 게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진짜 요 본문 보게 되면 절대로 과도하게 한 게 아님을 아시게 됩니다. 어디를 보느냐 하면 바로 야고보서2장 23절 봅시다.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그렇지요. 23절에 행함이 나오잖아요. 그 행함이 21절에 나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무엇을 제단에 받쳤습니까? 이삭 받쳤지요. 이삭 바친 것이 아브라함의 본인 의도입니까? 하나님의 의도입니까? 하나님의 의도잖아요. 이제 야고보서 전체가 납득이 되십니까? 이해되십니까?

다시 할게요. 우리가 성경이 이리 하면 우리는 자신의 의도가 마치 없는 것처럼 본인의 의도가 없는 것처럼 순수가 그 자체인 것처럼 “말씀만 하이소. 지키겠나이다.” 이러는데. 그러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하던 것을 달라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바치는 것이 아브라함이 평소에 하던 상식이에요? 평소에 하던 행세였습니까? 평소에 아버지가 아들을 못 죽여서 환장한 분이에요? 아니잖아요. 그게 해답이라니까요. 그게. 우리가 평소에 하는 그거 아니에요.

뭐 라면 끓인다고요.  “그래, 행함으로 보이라.” 하니까 “예, 라면 끓여드리겠습니다. 나는 진라면 좋아합니다.” 이래 가지고 그거 끓여 준다고 이게 행함이 아니고. 도저히 나의 의도에서는 애초에 애시 당초에 없던 거. 그걸 하나님의 의도가 침범했거든요. 침범해버리면 그건 성도에요.

성도는 혼자 사는 게 성도가 아니고 낯선 분의 침투 침범을 받는 겁니다. 낯선 분이 내 허락도 없이 나와 함께 동행을 하는 거예요. 최성수의 동행.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동행입니다. 동행.

그러니까 성도는 뭐냐 하면 나를 내보이는 게 아니에요. 나 야고보 시킨 대로 이렇게 착하다. 이걸 보이는 게 아니고 나와 함께 하신 분이 함께 했음을 확인하고 증명해주는 거기서 나온 그 행함인데 그 행함은 낯설고 나에게도 낯설고 특이하고 기이하고 이것은 내가 원래 늘 주특기로 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고 주께서 함께 있는 경우에만 나올 수 있는 그 특이성을 나한테 보여라, 입니다. 그게 2장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1장 내용에도 있겠어요? 없겠어요? 당연히 1장에도 있어요. 1장, 2장, 3장, 4장, 5장 전부다 하나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나오는 특이한 행함을 두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런데 거기에다가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니까 야고보가 화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에이고 그런 믿음은 귀신도 믿겠다. 내 좋아라고 하나님 믿는 거 누가 못 믿어요. 야고보는 그런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제 야고보 2장의 행함과 믿음 차이를 아시겠지요. 출발점이 나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부터 출발하느냐, 아니면 나로부터 출발하느냐,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그게 행함이 됐든 믿음이 됐든 그건 행함이 야고보서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 1장에 보게 되면, 1장 16절, 오늘 여러분들이 컨디션이 안 좋기 때문에 내가 그냥 읽을게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속지 말라 했어요. 속지 말라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평소에 이런 식으로 속아져 왔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속지 말라 한 거예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다 어디서부터 옵니까? 위로부터 오지요.

그러면 평소에 이 말씀 이전에 사람들이 속아온 것은 뭐냐 하면, 위로부터 오지 않더라도 내게 기본적인 양심과 인격과 품격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라는 말에 절대로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거예요.

그 다음에 내가 진짜 중요한 거 오늘 강의 때 제일 중요한 거 묻습니다. 그러면 내게 없는 것을 내놓는 게 행함이라 했지요. 하나님께 선물로 받았으니까. 그러면 내게 있는 걸 내놓을 경우에는 그것은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훈련과 교육으로 성립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내게 있는 걸 내놓을 때는 고도의 훈련과 반복적인 성찬이나 아니면 그러한 학습으로 내놓겠어요? 안 내놓겠어요? 내게 있거든 내놓는다면. 내놓겠지요. 왜냐, 평소에 하던 거니까. 라면 잘 끓이지요. 중국집에 가가지고 자장면 됩니까? 우리는 자장면 없습니다. 하면 이건 이상하잖아요. 평소에 하던 게 자장면이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약에 내놔라 할 때는 평소에 훈련된 거예요? 훈련 안 된 거예요? 훈련 안 된 거죠. 그러면 훈련 안 된 것을 내놓으라 했으니까 훈련 안 된 것을 내놓으면 뭐가 방해되느냐 하면 평소에 내가 잘한 짓. 잘하는 것이 방해되겠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내놓으려면 무엇을 부인해야 하느냐 하면 평소에 내 잘한 것을 내놓고 이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내가 나한테 속이는 그 속임에 내가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오늘 내가 가만히 생각해도 참 어렵다. 정말 어려워요.

교회 가서 새벽기도를 하는데 시계를 딱 봐요. 오늘은 마침 무슨 일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새벽기도를 전에는 2시간 했는데 오늘은 30분만 한다. 30분하더라도 2시간 하면서 기도제목에 평소에 집어넣었던 모든 인물과 일가친척과 기도 대상들은 2시간해야 다 채워지는데 오늘은 시간이 30분밖에 없기 때문에 빨리 빨리 해가지고 2시간에 했던 항목을 30분에 압축해서 테이프를 빨리 감듯이 빨리 해서 해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했는데 과연 그렇게 될까? 하고 시계를 봤는데 시계 보면 타이밍이 있잖아요. 찰칵 찰칵 있잖아요.  .....아멘. 딱 끝나니까 30분 딱 됐어요. 그러면 그건 은사에요? 훈련된 거예요? 훈련된 거죠.

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님께 십자가 은혜를 알아서 다 이루었다. 이제 행함 필요 없이 주께서 행함으로 다 구원받았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행함으로 주께서 해 놓은 거니까. 그걸 성령으로 수용하면 우리가 다 이룬 거예요. 세상에 이걸 이론은 알았는데 오늘 아침에 생각나기를 이렇게 실제하다는 것을 몰랐다. 너무 감사하다. 라고 해서 이런 복음을 전해준 우리 담임목사님한테 헌금을 만원 드리겠다. 하고 봉투에 했을 때, 그 헌금은 평소에 늘 만원씩 했던 헌금입니까? 아니면 헌금을 하더라도 그것과 다른 취지의 헌금이겠어요? 다른 취지의 헌금이지요.  그걸 가지고 과부의 두렙돈이라 하는 겁니다.

주님이 원인으로 유발되어서 나온 것. 또는 성령이 원인이 되어서 나오는 헌금. 액수가 문제가 아니에요. 그 안에 돈으로 희생하지 않고 그러니까 주여 이제 내 영혼을 거두어도 저는 OK. 자기 목숨을 만원에다가 얹어서 주는 거예요. 만원에다가. 또는 오만원에 얹어주는 거예요. 오만원 얹으면 거기에 방해자가 있어요. 신사임당이 방해해요. 어쨌든 방해하든 그 신사임당의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고 그 돈을 내면서 주님 이건 정성 정도가 아니고 이참에 저를 데려간다 할지라도 저는 조금도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은혜 받아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게 뭐 몇 초 몇 분 안가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그야말로 성령에 의해서 한 거예요.

언젠가 제가 그런 설교를 했는데, 아나니아 삽비라 헌금 있잖아요.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그 사람이 헌금의 반을 냈기 때문에 죽은 겁니까? 아니면 하나도 안 냈기 때문에 죽은 겁니까? 아니면 다 내어도 죽을 겁니까? 어떻게 됩니까? 헌금을 반만 내는 게 아니고 다 내어도 죽겠어요? 안 죽겠어요? 다 내어도 죽을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살아있어 내 돈을 저쪽에 전달하기 때문에 그런 헌금은 아닙니다. 헌금은 뭐냐 하면 헌금은 돈을 주고받는 게 아니고 소속을 확인하는 거예요. 돈을 내나 안 내나 이 몸의 소속은 주님 겁니다. 그 기쁨으로 확인해 주는 거예요. 헌금도 마찬가지고. 봉사도 마찬가지고. 자기가 살아서 봉사하게 되면 반드시 말썽이 생겨요. 살아서.

지가 살아서 처리하려 하면 문제 있어요. “그 봐! 연습 안했잖아. 틀렸잖아. 나 이렇게 연습했는데.” 그런데 못난 테크닉이지만 나는 못 났지만, 주의 피로 구원받음에 감사, 이리 되면 아름다운 선율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5초 내지 15초가면 많이 갑니다. 아예 처음부터 생기지 않을 수 있어요. 더운데 빨리 하고 가자. 이럴 수도 있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보면서 사람들이 자꾸 지키려고 하는 거니까 이런 게 다 빠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잔소리한다고요? 예, 지킬게요. 됐지요? 지키자! 이게 바로 행함 없는 믿음이에요. 왜, 자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말씀을 준 것은 내 자신이 깨어지라고 준 거예요. 내 자신이 박살나라고 준 거예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교회 오는 것은 뭔가 더 알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고 깨어지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그 과정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자,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지요. 예수님부터 아버지한테 깨어졌지요. 저주받고 죽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 앞장세워서 성령이 오시게 되면 예수님께서 뭐했느냐 하면 다 이루었다 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할 때 말씀을 다 이루었잖아요. 이 말씀이 있는데, 이 성경책이 있는데 이 성경책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 이룬 입장이지요. 예수님이 다 이루어서 우리 대신 죄를 용서한다는 말은 이 성경 말씀대로 우리가 다 지킨다? 못 지킨다? 어설픈 우리는 못 지키지요.

그러면 성령께서 오신다는 것은 우리보고 못 지키는 걸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깨어지라는 거예요. 깨어지는 동시에 뭐가 삽입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여기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만원을 헌금했다. 이건 자기 돈 내는 게 아니고 주님이 주신 돈을 주님의 십자가에 담아서 주님 앞에 도로 드리는 겁니다. 내놓는 겁니다. 그걸 돈을 내놓는 게 아니고, 더러운 내 몸 자체도 주님의 의를 위해서 쓰여 지도록 제가 내놓습니다. 그런 뜻이다 말이죠. 이게 바로 행함이란 말이죠. 이게 행함.

아브라함이 누굴 바쳤어요? 이삭을 바쳤지요. 이삭은 원래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하나 있었어요. 이스마엘이지요. 아브라함 자식은 저주 받아요. 이스마엘이 저주 받는 게 성경에 어디 나옵니까? 또 어떤 사람은 환장하는데. 갈라디아서4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처가 있는데 아들 하나 있고 또 하나가 있는데. 하나는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은 육체로 난 아들이에요. 그 말 자체가 무진장 어려운 말인데, 원래 자식은 아버지하고 육체적 관계에요.

육체로 난 자식이라는 말은 뭔 뜻입니까? 니 눈에는 자식은 그게 그런 식으로 자식이라고 다 생각하지? 아니야! 아니야! 육체로 나지 않은 자식이 있어. 라고 나온 말이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 안 믿는 사람한테 이야기하게 되면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안 믿는 사람이 듣게 되면 발칵 화를 냅니다. “당신이 나하고 이야기하면서 예의를 지켜야지. 왜 나 모르는 이야기를 하느냐.”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예의를 지켜야지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이해 안 되는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이해되는 이야기를 할게요. 당신, 쓰레기야! 이제 이해되십니까? 당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쓰레기야! 왜? 육으로 났기 때문에.” “당신, 아버지 계시지요?” “예” “모친 계시지요?” “예” “쓰레기입니다.” “그 아버지 엄마 말고 따로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하늘의 어머니가 없기 때문에 쓰레기입니다.”

예루살렘의 어머니, 성령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용하셔요. 충분히 사용하시되 “그건 아니거든”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충분히 사용하셔서 “그건 아니거든.” 이리 되는 겁니다. 그럼 야고보서에서 믿음으로 구원 받겠다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했던 나로부터 출발하는 그건 하나님 뜻이 아니거든. 그럼 뭐냐, 은사로서 받은 행함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나? 받은 적 없는데.” 받은 게 없으면 여기 1절에 나오는데 이제부터 할 건데요. 흩어진 12지파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12지파는 특징이 에서의 자식들이 아니고 야곱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서의 자식은 자식을 육으로 낳을 수 있어요. 그런데 야곱의 자식은 육으로 못 낳습니다. 약속으로만 낳아요. 약속으로만. 왜? 두 여자가 다 불임여성이기 때문에 애기를 못 낳아요.

처음부터 12아들을 준 게 아니고 애기를 못 낳게 만들었어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것은 에서와 야곱도 마찬가지고. 리브가가 애기를 못 낳는다니까요. 애기를 못 낳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육의 자식이 있다? 없다? 없다는 뜻이에요. 육의 자식은 없고 한 박자 쉬고 자식을 주거든요. 그럼 한 박자 쉰다는 것은 뭐냐, 육의 자식은 끊어졌다는 거예요. 요번 수련회 때 이야기하면 절연. 끊어진 거. 다른 말로 하면 누전. 끊어진 거예요. 전선이 이렇게 흘러야 되는데 엉뚱하게 흘러버린 거예요.

이쪽은 우리는 육을 가지고 행함을 가지고 아까 한 로마서의 행함,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이지요. 내거 가지고 충당하겠다고 열심히 유대인처럼 구약성경 달달 외우고 예배드리고 있는데 그럼 주님의 전기가 이렇게 와야 되는데 이렇게 오는 거 같은데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의 십자가의 뚝 끊어짐이거든요. 어느 누구도 십자가를 자진해서 급구할 수 없기 때문에 저렇게 가버려요.

저렇게 가면서 여기서 만약에 이삭이 태어나고 이쪽은 뭐가 태어나고? 이스마엘을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뭐 둘 다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니까 괜찮겠지.’ 괜찮은 게 아니에요. 저쪽은 끝은 뭐냐, 저쪽의 끝은 천국이고, 이쪽의 끝은 지옥이에요. 인간은 딱 두 종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믿게 되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네 가정에 대해서 다른 주님의 안목가지고 가정을 살피는 셈이 됩니다. 보자~ 저 자식은 둘 중에 어느 쪽이야? 상당히 심각한 문제되지요. 저 남편은 어느 쪽이야? 보나마나지요. 저 외숙모는 어느 쪽이야? 올케는 어느 쪽이야? 이렇게 살피게 되지요.

고 살피는 시선이 성령이 주신 시선이기 때문에 성령의 시선이라 하는 것은 이건 그림으로 해야 돼요. 성령의 시선이 궁금하지요? 철판으로 로봇 비슷한 얼굴을 만든다 칩시다. 철판으로 용접해서 안에는 텅텅 비었어요. 요 안에 사람이 들어와 가지고 두 눈을 이렇게 해가지고 이쪽의 시선으로 내놓는다면 이건 철판이 보는 겁니까? 안에 들어있는 분이 사람이 보는 거예요? 안에 들어있는 사람의 시선이지요. 그리고 요 철판은 우리라면 하나의 들어있는 분은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의 안목으로 볼 때는 이삭이야? 이스마엘이야? 이리 본다 말이죠. 그럼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요걸 가지고 아바타라고 합니다. 아바타. 오늘 제목도 또 있다. 아바타.

아바타에요. 이게 성령 받은 특징입니다. 아바타기 때문에 이 아바타 되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이 행함으로 신앙생활을 보이고 있는 겁니다. 그 아바타 중에서 유명한 사람이 아까 말한 아브라함이다 말이죠.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에요. 자기 아들을 그것도 죽어서 바친 게 아니고 생 아들을 바친다는 말은 죽이는 그 모습을 보겠다는 거예요. 잔인하지요. 아들을 정육점에 가가지고 다 처리하고 고기를 바치는 게 아니고 죽이는 그 모습을 보겠다는 거예요. 이건 뭐냐 십자가 사건을 보겠다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을.

십자가는 지나가고 우리는 효과 보자. 이게 아니고 날마다 십자가에요. 날마다. 반복되는 십자가. 그걸 보겠다는 겁니다. 바이올린을 켜든, 첼로를 켜든 나팔을 불던 그 자체가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기를 원한다 이 말이에요. “니 아바타냐?” “예” 그러면 십자가고. “아바타냐?”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건 철판 속에 아무것도 안 들어있는 사람이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애가 중학생입니다. 애를 많이 먹이지요. 북한에서 전쟁 일어날 때는 우리나라에 있는 중2를 보내면 승리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도 사가지가 없어서. 북한의 괴뢰군들 다 쳐부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중2가 있어서 북한의 핵폭탄 미사일 무섭지 않습니다. 그 중2 애가 할 때, 엄마는 소위 교회 다니는 엄마였는데 기도해요. 주여, 성령으로 저 애를 온화하게 성깔을 다스리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한다 말이죠.

처음에는 배운 게 있어가지고 온유와 화평과 들은 게 있어가지고 나름 온유, 화평대로 한다고요. 그런데 애가 성질을 솔솔 돋우는데 온유, 화평 다 날아가 버렸어요. 오늘부터 온유 화평 안 되겠다. 끝내겠다. 이렇게 하는데 그럼 애가 얼마나 얄미운지 몰라요. “엄마가 이렇게 때리면서도 교회 다닌다고 하는 거야! 그러려면 교회 가지 마. 이게 무슨 예수님의 정신이야. 내가 아는 예수님의 정신은 서로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데 이게 사랑이야?” 이렇게 약을 올리고 내빼네. 완전히 엄마 신앙까지 완전히 정면으로 싸 발라 버려요. 엄마 정신세계까지 완전히 개무시한다고요.

그럴 때 십자가 사건은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앞에서 나의 어떤 행동도 주께서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인정하는 겁니다. 내가 온유하게 해도 영광이 아니고 성질을 내도 영광이 안 되고 영광은 내가 누굴 믿느냐는 거예요. 내가 말씀을 지키지 못한 것을 누가 대신 했느냐 가지고 들이내야 영광이 돼요.

구약의 모세언약에서는요, 하나님께서 일반백성들 독대가 안돼요. 안 만나 줍니다. 누굴 만나느냐, 일 년에 한 번 누굴 만나느냐 하면 대제사장 만나요. 그걸 가지고 제사장 나라라고 합니다. 제사장 나라라고 하는 것은 “니들은 그냥 가만히 있어. 대표자만 나와!” 이게 제사장 나라에요. 제가 지금 진도 안 나가고 뜸 들이는 이유가 있어요. 그만큼 1장 1절이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이어갑시다.

12지파라 하는 것은 이건 이삭과 마찬가지로 약속으로서 난 사람들이에요. 야~ 여기서 또 오해하지 맙시다. “약속으로 낳기 때문에 이삭은 약속으로 낳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처럼 이 12지파도 그 약속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다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묻지 마세요. 그렇게 물어버리면 그건 성경적인 질문이 아니에요. “12지파를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 합니까?” 요게 성경적인 질문이에요. 질문 자체부터 달라야 돼요.

“12지파는 다 구원받았겠지요? 그러면 마귀들린 사울도 구원받고, 아간도 구원받았겠지요?” 이리 나오게 되면 거짓 선지자도 구원 받고 미가야를 뺨을 때렸던 시드기야 라는 그 거짓 선지자도 구원 받고 그렇게 했어요? 구약에 나오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단지 이스라엘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다 구원받았겠습니까?

어떤 국민이 어떤 나라에 속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원칙을 갖고 있어요. 현대 법에서는. 속인주의와 속지주의라는 게 있습니다. 속지주의라 하는 것은 애가 태어날 때 그 나라에서 태어나게 되면 무조건 그 나라 국민으로 등록이 되는 걸 속지주의고, 그 다음에 부모가 그 나라 국민일 경우에 태어난 자식은 그 나라 국민으로 봐주는 걸 속인주의라 하는 겁니다. 보통 두 가지를 다 섞기도 하고.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가 이게 백성이에요. 예수님을 증거 하는 자가. 하늘로부터 행함의 은사를 받은 자만 흩어진 12지파입니다. 이제 야고보서 12지파 아시겠지요?

나는 가나안 땅 출신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 구원받을 거 같으면 예수님 십자가 죽인 사람 다 구원받겠네요. 그럼 현재 육적인 이스라엘은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것이 전천년주의라는 게 있어요. 3년반 후3년반 그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약속했기 때문에 무조건 이스라엘은 일단 무조건 다 구원받는다. 비록 예수를 안 믿더라도 기어이 환란 받으면 예수 믿게 되도록 주께서 조치하신다.

첫 번째는 성도들이 하늘로 휴거 올라가고 땅에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인데 유대인들이 그렇게 예수를 안 믿더라도 악마가 와가지고 요한계시록 내용 따라 아주 막 몽둥이질하고 고난을 많이 주니까 그제서 우리가 잘못 하였나이다. 주여! 예수님을 안 믿는 게 탈이었어. 그때는 하나도 없이 다 믿어서 그 이스라엘과 그리고 이방 중에서 합쳐서 그래서 통합해서 천국의 숫자로 채워진다. 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물어봅시다. 그 예수님 죽인 자들이 누구지요? 유대인이지요. 그러면 그 다음 다 구원받습니까? 가룟유다가 이방인이에요? 가룟유다가 아프리카 사람입니까?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지요. 가룟유다 구원받았겠네요? 그리고 십자가 옆의 강도. 예수님을 조롱했던 강도는 유대인 아닙니까? 유대인이잖아요.

예수님은 반대로 이야기해요. 나라의 본자손들은 천국에서 다 쫓겨나고 오히려 이방인,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하는 백부장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그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유대인 있는데다가 보탠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유대인은 일단 다 넣어주고 그 다음에 보태는 게 아니고 본자손은 이를 갈며 쫓겨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 왜 내가 안 믿어서... 이렇게 통곡한다. 통곡.

사람이 후회할 것은요, 이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서 울어야 될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지옥 가서 우는 것밖에 없어요. 뭐 조국을 잃었을 때, 부모가 죽었을 때,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가서 실컷 평생 동안 울어라. 지옥 가서.

주님의 인생관, 주님의 가치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안 믿는 자는 뭐가 없다? 영생이 없고 그 위에 저주가 있는 거예요. 저주가. 자기 행동에 그렇게 책임지려 하지 마세요. 그게 기준이 아닙니다. 중2 팼다고 해가지고 “주여, 저는 지옥 가야 할 엄마입니다.” 하지 마세요. 그게 기준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기준이에요. 영생이냐, 아니냐,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이삭이냐, 이스마엘이냐, 그걸로 끝나는 겁니다.

그리고 이삭은 내가 이스마엘이 이삭 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이삭은 약속이 먼저고 그 다음에 약속에 의해서 조성된 새롭게 만들어진 자가 약속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약속이 먼저 있고 이삭이 태어난 거예요. 그러나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라는 육이 먼저 있고 그 하갈하고 동침하니까 이스마엘이 태어난 겁니다. 덥다고 이제는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에어컨 팍 틀어버려요.

세상이 그냥 막 돌아가니까 같이 탁류에 토사에 같이 휩쓸려 가지고 정신도 못 차리고 가는데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기준은 뭐냐 하면 예수 십자가 믿으면 무조건 영생이고 교도소 몇 번이고 들락날락해도 관계없어요. 무조건 영생이고. 예수 믿지 않는 국회의원 전부 다 저주에요. 죽어서 저주가 아니에요. 지금 하고 있는 자체가 저주라니까요. 전부 다. 제가 이렇게 고함지르면 7분가고 안 지르면 15초가고. 세상을 부러워하거나 그러지 마세요. 세상을 부러워하게 되면 자기 인생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노합니다.

자, 그 다음에 1절 봅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12지파인데 그게 뭐냐, 어떤 12지파이냐 그 앞에 3자 붙었지요. 어떤 12지파? 흩어져 있는 12지파. 이것 때문에 첫 번째 강의할 때 나 중심으로 나 의도적으로 뭉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나가 안 되도록 흩어버려요.

우리는 누굴 만나면 내 생각에 동의해줘! 나 요번에 짬뽕 먹는데 너도 짬뽕 먹어줘. 하고 강요를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강요하는 게 아니고 누구를 특정인간을 절대로 중심 되는 인물로 쳐주지를 않습니다. 이 땅에서는. 이미 은사가 온 중심이 어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서 거기서 모든 행함은 그 은사에서부터 나와서 각양 좋은 것은 어디서 나온다? 하늘로부터 나오잖아요. 내가 행함을 보여줬는데 하늘로부터 오는 은사가 아니라면 하늘로부터 행함이 아니라면 아무리 행함 있는 믿음이라도 그건 좋은 게 아니에요. 왜? 하늘로부터 오지 않았기 때문에. 말의 논리가 그리되는 겁니다. 이제 아구가 맞아 떨어집니까?

로마서하고 똑같은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나부터 출발하는 행함은 행함으로 안 받아줍니다. 왜? 나부터 출발하는 행함은 내가 평소에 훈련하고 일상적으로 했던 거지만 주께서 요구했던 행함은 나부터 출발해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행함입니다. 니 자식을 죽여라. 이건 평소에 자식 죽이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무도 없잖아요.

그리고 기생 라합한테 뭐라고 합니까? 거짓말하게 했지요. 그래서 거짓말을 할 줄 모르면 신자가 아니에요. 새로운 또 명제가 튀어나옵니다. 거짓말을 기쁨으로 하지 않으면 그건 신자가 아닙니다. 왜 거짓말을 안 하는 이유가 뭐냐 자기중심 때문에. “하나님이여, 나 거짓말 안했습니다.” 자기중심. 이거에 대한 행함은 자기 행함이 되어버려요. 자기 은사가 돼요. 하늘로부터 오는 게 아니면 그것은 가장 좋은 게 아니에요. 나쁜 거예요.

왜 나쁘냐 하면 야고보서4장4절 보고 10분 쉽시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세상과 벗된 것 자체가 뭐다? 하나님의 원수된 거죠. 그럼 세상 자체가 뭡니까?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죠. 간음은 뭐가 간음이에요? 세상과 짝하는 게 간음이에요.

이게 개인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으로 갔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을 떠났잖아요. 그것도 그냥 떠났습니까? 죽어서 떠났지요. 죽어서 떠난 그 주님과 이 세상 관계가 원수 관계, 이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 앞에 사랑에 대한 반대기 때문에 간음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 이러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12지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만 지금 야고보서를 얼추 이해하고 감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드리면서 10분 쉽시다.

 

 

안양20170811b약1장1절(의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1장1절 봅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그 다음에 나온 단어 어떤 단어냐 하면 흩어진 열 두 지파지요. 흩어진 열 두 지파. 흩어진 열 두 지파라 하는 것은 흩어지도록 강력하게 주께서는 몰아세우는 거예요. 물탱크에서 물이 나오면 어떻게 되지요? 모여집니까? 흩어집니까? 쫙 흩어지지요. 물이 만약에 같이 모인다면 그건 물이 아니고 기름이겠지요. 흩어질 때는 흩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흩어지게 되면 친목회 그런 것 좀 하지 말라 말이에요. 쭉 쭉 흩어져야 돼요. 그럼 흩어지면서 뭘 포기하느냐 하면 내 중심은 아예 애시 당초 성립이 안 되는구나!를 성도는 그걸 느껴야 됩니다. 만약에 내 행위에 내 믿음가지고 설친다면 사람들이 내 중심이 되겠지요. 흩어지는 게 아니고. 계속 흩어지려면 그 야고보, 요한처럼 사도행전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 사람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게 아닙니다.” 라고 이렇게 돼 줘야 “누군데? 누군데?” “지금 중심이 있잖아요. 예수 그리스도가 낫게 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에게는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할 때, 금과 은은 누가 갖고 있느냐 하면 사도는 금과 은을 가질 수 있어요. 또는 없을 수 있는데, 당신이 사도를 볼 때에 ‘에이~ 같은 인간들이잖아.’ 라고 생각하면서 “주세요!” 라고 돈 달라고 했을 때에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라는 말은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지금 당신이 같은 인간이라고 하는 걸 주는 게 아니고 당신에게 없는 보이지 않는 분에 대해서 제가 드리겠습니다. 그게 주 예수 이름으로 거론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자리에 다른 사람들은 주 예수의 이름이 없어요. 주님이란 이름이 없어요. 야고보, 베드로, 요한이 있지 예수는 거기에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면 거기에 없는 거예요. 없는데 낫게 했어요. 그러면 그 자리에 누가 계시다는 말입니까?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누가 있단 말이지요. 예수님이 계시잖아요. 그러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옛날에 예수님이 부활하기 이전에 예수님과 동행했던 그것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지요. 눈에 보인다. 안 보인다. 그 차이인데, 그 차이는 의미 없어요. 왜? 보이든 안 보이든 실존하기 때문에.

오늘 강의 약간 복잡하긴 복잡하지요. 그냥 복잡한 거 더 나아가 봅시다. 누가복음17장20~21절, 제가 지금 계속 흩어짐에 대해서 지금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아~ 정말 이 말씀 어렵습니다. 제가 설명해드릴게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합니까? 하지요. 이게 어느 때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바리새인이 말한 취지는 우리가 어디에 왔는지 우리가 눈에 볼 수 있는 때가 언제입니까? 눈에 본다는 것을 집어넣고 하게 되면 그 뒤에 말이 연결이 돼요. “예수여, 우리가 하늘나라가 볼 수 있도록 임한 때가 언제입니까?” 요렇게 ‘볼 수 있게’ 라는 말을 집어넣어야 이게 이해가 된다니까요. 이걸 빼버리면 다음 주님의 답변이 이해가 안돼요. ‘볼 수 있게’

그러니까 인간들은 항상 있다. 없다, 를 무엇으로 측정합니까? 눈에 보이는 감각. 눈 감각이 최고에요. 부시럭, 부시럭 소리 난다. 이건  시각이 아니고 청각인데 영~ 못 미더워. 부시럭, 부시럭하는 청각보다도 더 확실한 것은 귀신을 보는 게 더 낫겠지요. 자, 여기서 더 들어갑니다. 자, 귀신을 봤습니다. 그럼 그게 귀신일까요? 아닐까요? 아니지요. 왜? 봤기 때문에. 귀신은 보게 되면 맞아죽습니다. 보이기 때문에. “이게 어디 가짜가!” 아주 멍들어 죽어요. 안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후적으로 표현하기를 귀신 봤다! 이리 되는 거예요.

다음에는 뭘 봤는데? 부시럭, 부시럭 하는 것과 촉감이 서늘하더라. 에어컨으로도 서늘한데. 서늘하더라. 갑자가 쭛빗하더라. 아휴~ 소름이 끼치더라. 이런 증상을 융합해서 나온 추상적 개념이 귀신 봤다! 인간은 하여튼 자기 감각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데 도사에요. 도사. 자기 감각에. 그럼 귀신은 어디 있느냐 지 안에 있는 거예요. 지 안에 평소에 어떤 들었던 풍월로 그냥 기억 속에 있던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걸 아시고 하늘나라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오는 게 아니다. 그 말을 딱 들었을 때 바리새인은 뭐라고 합니까? ‘아, 그럼 하늘나라는 없네.’ 그렇게 되겠지요. 아까 최고의 감각은 시각이겠지요. 눈에 보이지 못하면 결국은 그건 없는 거예요. 눈에 보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 과학자들은 제일 작은 입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증명해 내는 겁니다. 증명하면서 수사적으로 수학적인 공식이 딱 나와 버리지요. 수학적 공식은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을 공식으로 하는 게 아니고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는 걸 있다고 쳤을 때 나오는 변화들의 추세를 규격화해서 수식으로 딱 만든 거예요. E=mC² 이런 거. 더 정확한 것은 e=ΔmC²이라 합니다. 델타m(Δm)이라 하는 것은 m2-m1 요 차이를 e=ΔmC²이라 합니다. 광속도제곱이 에너지다. 이거 눈에 안 보이지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게 되어버렸지요.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눈에 확실하게 봤습니다. 확실하게 봤잖아요. 어? 수식인데 안 보인다 했는데 눈에 보인 거예요. 그러니까 위대한 과학 종교의 승리가 된 거예요. 예측이 되는 거예요. 예측이.

그러니까 인간은 무엇을 못 벗어나는가 하면 눈에 보는 것. 못 벗어나요. 또 하나가 예수님이 지적합니다. 또 인간의 벗어나지 못한 제한된 차원이 있어요. 공간개념입니다. 공간개념. 어디에 옵니까? 라는 거예요. 그 질문을 인간이 하는 이유가 본인을 의식할 때 어떤 특정 공간 지점에 자기가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확인해요. 특정 공간에서.

만약에 잠시 자다가 눈을 떠보니까 자기가 공중에 붕 떠있다. 공중에 붕 떠있으면 본인은 흔히 나는 공중에 떠 있다. 이러면 되는데 사람은 그리 느끼지 않고 오? 이건 현실이 아니라고 본 거예요. 왜냐하면 땅에 두 발을 딛고 있는 요런 공간개념에 이탈하지 않아요. 요 법칙에 준해야 비로소 나는 있음이 돼요. 나는 있음이 된다고요. 만약에 하늘에 붕 떠있다면 필히 이것은 계속 꿈에서 못 깨어나고 있다는 증거로 봐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시간과 공간 개념이 칸트라는 철학자에 의하면 요게 기본적인 선험적인 세상을 보는데 그걸 판단하는 선험적인 배경의 환경으로 그렇게 차원을 집어넣었어요. 시간 공간을. 그게 바로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깨어져버렸어요. 뉴턴에 이은 시공간 절대 시공간 개념이 아인슈타인에서 깨어져가지고 깨어진 그것 중에 하나가 요번에 수련회에서 했던 ‘이중슬릿’이라는 그런 걸 이야기했지요. 그 ‘이중슬릿’이라는 것이 이해가 안 될 때는 인터넷에서 보면 나옵니다.

제가 설명한다면 과학자는 대상을 관찰하는데 기절초풍할 일이 관찰하는 대상이 나를 물건으로 말이 없으면서 관찰하면서 “뭘 원해? 자장면을 원하면 내가 자장면으로 변해주고. 니가 짬뽕이라고 원하면 짬뽕으로 변해줄게. 됐나?” 이리 나온 거예요. 과학으로 시작했는데 결국 과학의 막다른 길은 귀신이 나온 거예요. 귀신이. 그게 과학적이에요. 놀랍게도. 철저히 수학이 과학적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묻는다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어떤 건방짐이 있느냐 하면 당신이 뭐라고 해도 우리가 갖고 있는 선험적인 조건, “하늘나라는 눈으로 보는 것으로 어떤 특정지점에 온다는 여기에서 당신은 벗어날 수 없을 걸.” 하는데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그게 너희들의 한계야. 너희들의 그런 한계에 있는 진리를 가지고 나를 판정하고 나를 평가해?” 하늘나라는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또 뭘 깨버리느냐 하면, 공간을 깨버려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요. 바리새인들은 그 뒷말을 듣고 싶지 않지요.

왜 듣고 싶지 않느냐 하면 오늘 여러분 참 좋은 거 배웁니다. 누가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 어떤 사실이 궁금한 게 아니고 누가 궁금하느냐 하면 내가 궁금해요. 내가. 내가 누구냐를 궁금해 하면서 자꾸 질문을 던져요. “옷 얼마주고 샀습니까?” 이런 질문을 만약에 한다는 말은 저 옷을 내가 입었을 때 이쁠까? 그리고 그 이쁜 만큼 값을 치를만한 가치가 있을까? 결국 그렇게 물어서 나오는 해답이 내게 이익이 되고 보탬이 될 때, 질문을 한다니까요. 전부 다 자기는 자기한테 이끌리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한테 묻는 것은 예수님에게 궁금한 게 아니고 “나 구원 받겠어요? 예수여!” 이런 뜻이라니까요. “나 정확하게 하늘나라 보고 그리워하고 오기만 오면 제일먼저 반길 참인데, 문제는 뭐냐 어떤 식으로 오며 어디에 오는지 그걸 모르겠다 이 말이에요?” 라고 예수님에게 물으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쫓아오지 못할 답변을 해버립니다. 아까 했던 절연. 답변이 그들로 하여금 더욱더 궁지로 몰아넣어 가지고 기어이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도록 주께서 유도하신 거예요. 끊어짐이지요. 인간이 천국 가는 것은 사실상 이건 말이 안 되는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성도가 됐으면 자기가 사는 것이 정상이고 죽는 것이 비정상으로 보면 안 되고 반대로 생각해야 돼요. 진작에 죽는 것이 정상인데 Why me lord. 주여! 왜 저를 살려주십니까? 이렇게 되어야 돼요. 물론 그렇게 될 때가 있어요. 갑자기 허리 아프던지 병원에 누워있을 때 할 일 많은데 “아휴! 지금까지 건강한 것도 당연한 게 아니고 주의 은혜로운 조치였군요. 오히려 나 같은 죄인에게는 매일 아픈 것이 정상입니다.” 이렇게 병원에 있을 때는 바뀌는데 퇴원하면 또 마찬가지에요. 퇴원하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퇴원하는 건 그 때 문제고.

그래서 너희 안에 있다. 했거든요. 이거 신학자들, 주석자들 손 다 놔버렸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거죠. 내 안에 있다. 왜 이 말이 오늘 야고보서의 흩어짐과 왜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주께서 인간을 흩어지게 될 때, “흩어지세요.” 하면 “예” 하고 흩어지는 법은 없어요. 아까 했던 인간은 뭐 중심이다? 항상 자기  중심으로 내 팬 몇 명이고 내 좋은 사람 몇 명이고 이리 되거든요. 항상 자기중심이에요.

흩어질 때는 뭐가 있느냐 하면, 주께서 이 작업을 합니다. 나를 파괴시켜 버려요. 나를 파괴시킵니다. 첫째 강의에서 주님의 은사를 위해서 내가 행했다 하는 내 믿음, 내 행함 자체를 다 부정해 버려요. 가장 좋은 것은 위에서부터 온다는 말은 니가 있는 이 세상에서 나온 너는 어떤 각양 다 나쁘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좋은 것이 오려면 나쁜 것은 고난이 되면 안 되잖아요. 한 쪽이 한 쪽을 파괴해야 되지요.

파괴하면서 주님이 자기 백성을 흩어지게 해버립니다. 그러면 누가복음17장20절에서 너희 안에 있다는 말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말이 아니고 지금 너희 안에 누가 있어요? 너희 안에 있을 때에 너희에  쳐다보고 있으면 하늘나라 없어요. 우리 말고 또 누가 있어? 우리 말고 또 누가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있잖아요.

주께서 부활하셔서 요 말씀 고대로 오십니다. 이게 마태복음28장 20절에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보라, 세상 끝날까지 그 다음에 내가 누구와 함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그게 하늘나라에요. 그게 네트워크에요. 요번 수련회에서 네트워크 용어를 사용했어요.

네트워크라 하는 것은 요것은 미디아 개념이지요. 서울에서 방송해도 대구MBC는 서울MBC와 같은 거 나와요. 같이 11시 되면 <품위 있는 여자> 드라마 한다니까요. 같이. 품위 있는 여자 내용이 서울에서 한 내용하고 대구 MBC내용하고 다릅니까? 서울의 내용은 김선아 죽었는데 대구에서는 김선아 부부 살아있으면 이 드라마 두 개 되잖아요. 아예 다른 드라마잖아요. 같이 있어서 하나 된다 하는 것은 그것은 이 주님의 네트워크에서 확인할 길이 없어요.

깨지고 흩어졌는데 내가 하는 일이 곧 누가 하는 일이다? 주님이 하도록 은사가 위에서부터 가장 좋은 은사가 연결되어 있다면 이건 놀라운 교회 아닙니까? 놀라운 교회. 그래서 내 교회라는 것이 있으면 안 되지요. 요번 수련회 첫 째 강의가 뭐냐 하면 복음을 교회가 계속 가린다. 같이 모여 있으면 마치 한 동지인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된다니까요. 착각을. 부부가 같이 생활하게 되면 어떤 착각을 하느냐 하면 마음이 하나인 것처럼 착각해요. 그런데 신혼 때는 착각인 줄 몰라요. 살다보면 동상이몽이란 걸 알게 됩니다. 동상이몽하게 돼요.

그러다가 자식을 낳으니까 그렇게 싸우던 부부가 자식 낳으니까 둘 다 좋아하거든요. 그 때는 잠시 자식 어릴 때는 같은 생각인 줄 알아요. 자식이 크면 세 명이 다 달라요. 세 명이. 자식, 남편, 아내 다 달라요. 결국 하나가 안 되면서도 하나인 척 하는 위선을 떨면서 평생을 살다가 진짜 남편 되신 주님의 신부가 된 사람이 있고 진짜 남편 되는 구약의 호세아에서 바알이 남편이에요. 다시 말해서 악마가 남편이에요. 악마의 부인돼서 사모님 되어서 지옥 가서 같이 지옥 살림만 하는 사람이 있고.

인간은 영원히 나는 혼자에요.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몸을 가지고 이렇게 몸이 하나 될 때 하나인 것처럼 보이지요. 몇 초 동안에. 몇 분 동안에. 돌아서면 그 하나 됨에 불만스러워요. 더 하나 됨. 아니야! 이것보다 더 하나 됨 있을 텐데. 더 하나 됨이 있을 텐데. 그거 하는 방법 알려드려요? 마약하면 됩니다. 알콜 중독하면 되고, 도박에 빠지면 하나 될 수 있어요. 정신병이 되면 하나 될 수 있어요.

사람이 하나 됐다고 착각할 때가 뭐냐, 거의 한 일에 몰입했을 때. 몰입했을 때 자기 자신을 잃어버려요. 그래서 그대 앞에 서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작아지지요. 그 작은 끼리는 안 보이는 거예요. 고 때는 하나된 것처럼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 다시 되게 되면 이미 자기는 커져있어요. 뭐야? 당신 뭐야? 이리 돼요. 요번에 수련회 때 그걸 가지고 오야봉이라 했지요. 불쑥 불쑥 전부다 오야봉들이에요.

젊었을 때는 고분, 고분한 순한 양 같은 아내라 할지라도 나이 점점 40대 넘어가고 50대 넘어가고 이러면 이렇게 갱년기 몸 아픈 것도 당신이 나를 고생시켰다고 손가락질을 저쪽으로 할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손가락질을 한 그게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파괴입니다.

그 파괴의 현장에 주와 우리와 함께 있는 거예요. 파괴현장에. 주님을 팰 때, 주님을 뜯어먹을 때, 그 파괴현장에 함께 있는 거예요. 이것은 정말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 못하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했던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할 때에 나 중심의 하나, 나 중심으로 누구와 하나 된다 이것은 우리는 애초부터 그리 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그걸 확인할 뿐이에요.

결혼해서 확인하고, 또 이혼해서 확인하고, 자식을 낳으면서 확인하고, 자식과 확인하면서 또 확인하고, 결국은 다 내 좋아라고 내 기분 좋아라고 내 행복하라고 모든 걸 의미를 거기다 내가 부여하니까 이건 주님의 네크웍이 아니고 나의 네트웍,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내 중심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결국은 십자가를 가려버리는 원수가 따로 없어요. 내가 주의 원수다. 하는 것을 알 때, 그게 바로 주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는 그 모습이에요. 야고보가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흩어져라. 단결하라가 아닙니다. 흩어진 열 두 거기에는 파괴가 있지요. 자, 파괴이야기 하니까 해봅시다. 이 파괴 이야기를 아주 성경적이지는 않지만, 유사하게 설명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프로이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이트라는 사람의 철학은 전반기, 후반기 다른데요. 전반기는 에로스라는 거예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생식의 욕구라는 거예요. 뭐 빈틈없지요. 맞는 말이에요. 그걸 도킨스는 자기 DNA를 퍼트리는 본능이 60조개의 세포 속에 다 작용하고 있다. DNA 자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이 DNA를 분양하는 겁니다.

60조개의 세포 속에 DNA가 두 개있어요. 하나는 바깥에는 세포질인데, 안에는 미토콘드리아 있는데 이것은 여자만 통하는 DNA가 있고, 이걸 통해서 족보를 알아야 돼요. 과학자들이. 세포 안에 핵 안에 있는 DNA는 또 따로 있어요. 염색체 속에 DNA있어요. 어쨌든 이 DNA가 죽어있는 것이 아니고 DNA가 세포를 관장하고 있다니까요. 주관해요. 이게 60개조에요.

그러니 인간은 와글와글해요. 이걸 파장으로 끄집어내면 파장이 막 나온다니까요. 파장이 뭐냐 소리지요. 그럼 시끄럽지요. 시장바닥이에요. 와글~ 와글~ 시장바닥이에요. 그 시장바닥인데 갑자기 오야봉이가 지나가는 게 있어요. Cancer. 암이 위암, 암이 동네 깡패에요. 동네에서 까불어요. 동네에서. 여기서 강력하게 암 치료가 들어오면요, 작은 폭력을 큰 폭력으로 다스리면 암 환자는 “아이고, 머리 빠진다. 죽겠다.” 하지만 어느 날 암세포가 없어지지요. 큰 폭력으로 작은 폭력을 외부에서 없애버린 거예요. 그걸 가지고 치료라고 하는 거예요. 치료.

결국은 나는 없어요. 나는 그냥 세포60조개가 원인도 모르고 뭉쳐져 있는 거예요. 이게 생물학에서는 모순인데 세포60조개가 해버리면 고 세포가 왜 나라는 이름으로 뭉쳐졌는가, 고 원인이 뭐냐, 부모로부터 온 DNA가 그런 정보를 너희끼리는 뭉쳐야 아무개가 된다라고 정보를 줬다 말이죠. 그런데 그 DNA가 그런 정보를 준 건 누구냐 하면 그 DNA바깥에 보면 RNA가 있어요. 그게 그런 정보를 준 거예요. 그럼 RNA는 누가 만드는가, DNA가 만들었어요. 그러니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에요? 그걸 상호작용이에요. 상호작용.

“집사님, 지금 왜 웃습니까?”하면 “목사님이 웃게 했잖아요.” “그러면 목사님은 왜 웃습니까?” “집사님이 웃으니까 웃었지요.” 상호작용이에요. 상호작용.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인간은 혼자 살지 못한다. 정치적 동물, 사회적 동물이라 하거든요. 혼자 살게 되면 본인이 구성이 안돼요. 흔히 말해서 주체가 구성이 안 된다는 거예요. 똑같은 영양소로 했고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있어도 똑같은 음식, 똑같은 셰프 요리사가 해도 혼자 먹는 거하고 같이 먹는 거하고 밥맛 차이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차이 납니다.

나는 혼자 있으면 누룽지 먹습니다. 누룽지 먹어요. 앞에 주고받는 사람이 없으면 누룽지2,560원 주면 두 끼는 국물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누룽지 간단하잖아요. 반찬하기도 귀찮고 다 귀찮고. 여자들이 반찬하는 것은 자기 먹으려고 반찬하는 게 아니에요. 가족들 먹이는 의무 담당한다고 하는 거예요. 나중에 그것도 60넘으면 나도 못한다고 선언해버립니다. 밥 못한다. 삼식이 니가 해라. 삼식이든 오식이든 니가 해라.

프로이트는 모든 기본은 생식에 있다. 원인도 모르고 흘러가는 강물 같지요. 그게 생리대로 맞아요. 아담이 셋을 낳고 죽 죽 나온다 말이죠. 창세기5장의 이야기가 결국은 아담이 죽는데 930세에 죽는데 아담이 죽으면서 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자식 번창. 그게 육적이지만 그 외는 없어요. 성경에서 자식을 못 낳았다. 저주받은 거예요. 아브라함 때문에 아비멜렉 가문이 전체 태가 닫혔지요. 그거 저주에요. 아브라함이 기도해 주니까 태가 열렸어요. 결국 뭡니까? 인간아! 너희들이 가치 있다, 없다. 이것은 생식하느냐 여부로 달려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프로이트 말이 맞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본능은 생식과 관련되어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몸의 존재의 확장이에요. 자식 많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환갑잔치 때 자식 일곱, 아들5, 딸2 낳아보세요. “아이고~ 복 되도다.” 이렇게 하지요. 최진사댁 몇 째 딸? 셋째 딸. 이렇게 자식이 많으면 아이고, 복되다. 그만큼 내가 불멸할 가능성이 확률이 높은 거죠. 하나 있는데 하나 죽어보세요. 지는 그걸로 끝나요. 자기는 완전히 공중분해 되잖아요. 그러니 옛날부터 애를 많이 낳으라고 한 이유가 생식본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후반기에서 그게 바뀌어요.   이게 정답인데. 본능이 첫 번째는 에로스해서 성적인 본능이 인간의 모든 행동을 좌우했다. 인간의 모든 행동, 여자들이 화장하는 것은 나를 데려가서 우리들의 애기를 낳아요. 하는 건 아주 공손한 언어적 몸짓을 말합니다. 화장 이런 거 하는 거. 그런데 이게 전반기인데. 후반기에서는 뭐로 바뀌는가 하면 타나토스해서 이것은 죽음의 본능.

에로스와 다른 타나토스 죽음의 본능. 이것도 성경적으로 맞아요. 뭐냐 하면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혼돈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여기에 대해서 제가 설명한 것이 주일 오전 설교(예수님 자랑)에 지하2층 설명했지요. 기억 안 납니까? 지하2층은 충동의 세계, 지하1층은 욕망의 세계. 그리고 표면에 나와 있는 욕망의 세계를 잘 적당히 해서 나 이런 인간이요. 라고 자기를 내세우는 남한테 승인받는 상징의 세계라 하지요. 그러면 지하1층은 뭐냐 하면 지하1층에서 나가 생겨요. 욕망 때문에 나가 생긴다고요. 그러면 지하2층에는 나가 없어요. 나가 없고 거기에는 아담과 마귀만 있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보편적으로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본인이 특별한 나만 잘못했다는 것이 없이 악마의 충동에 시달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은 공히 죄 아래 있어요. 공히. “누구는 착해서 좋겠다. 천당 가니까.” 이런 거 없어요. 모든 인간은 죄 값으로 다 지옥 갑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발치하면, 발치라는 말은 뭐냐 원래 표면적인 이빨은 이렇게 생겼잖아요. 이걸 발치. 뽑는 거예요.

뽑으면 빙산처럼 표면에 나와 있는 요 것보다도 더 긴 길이의 발치가 되지요. 요 끝부분(이빨 뿌리부분)이 지하2층이고, 중간이 1층이라면 1층,2층, 표면 다 나온 거예요. 그럼 지하2층에 뭐가 딸려 나오겠습니까? 아담의 범죄 나오고 그 다음에 악마 나오지요. 요걸 성령께서는 우리 앞에 발치해서 우리한테 보여주는 거예요.

니가 그런 행동한 것은 니가 책임질 문제가 아니다. 니가 악마의 뿌리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와야 될 거다. 보여주는 고 거.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저주이야기에요. “나쁜 짓한 것만 매 맞고 착한 것은 상 줄게.” 이게 십자가가 아니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죄인이에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게 바로 지하2층에서 나온 거예요. 지하1층. 지하2층.

요거 주일 오전설교(예수님 자랑) 오용익 목사님이 잘 녹취했으니까 한 번 더 글로 되어있으니까요. 그냥 들으라 하면 사투리 심하다 해가지고 핑계대고 그럼 글로. 글로 봤는데 이게 아나운서 음성으로 하고 싶으면 스마트 앱 깔아가지고 텍스트를 글로 아나운서를 골라 잡아라 하는 게 있어요. 그걸로 하게 되면 “한글 읽어주는 앱” 요게 있어요. 요걸 찾아서 하게 되면 뭐 사투리 어떠니 하는데. 녹취가 안 되어 있어서는 안 되지요. 녹취가 되어있는 이상 그 녹취를 읽어주는 아나운서가 있어요. 남자가 좋으면 남자 아나운서. 여자가 좋으면 여자 아나운서. 해봤는데 전혀 은혜가 안돼요.

실수를 해야 되고 어설퍼야 은혜 돼요. 설교자는 자기의 수치를 드러내야 아까 무슨 본능이라 했습니까? 파괴하는 본능이 교회를 흩어지게 만들어요. 말끔한 교회는 말끔한 쪽으로 중심을 새로 잡기 때문에 흩어짐에 방해 받습니다. 흩어짐이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나온 그 토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계속 밀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당시 눈에 보이는 관찰되는 눈에 띄는 특정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예수님 옆에 열두제자 있는 식은 아닌 거예요.

왜냐하면 이미 제자들이 실패했어요? 실패 안 했어요? 이미 실패했어요. (비가 옴)저는 우산을 가지고 왔어요. 기분 좋지요. 이제 흩어져도 괜찮아요. 성령이 있다면 흩어져도 괜찮아요. 비가와도 괜찮고 덮어 쓰는 우산이 있잖아요. 그 우산은 내 행함도 아니고 내 믿음도 아니에요. 성령이라니까요. 주님이에요. 세상 끝날 까지 주와 함께 있으리라.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그게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성령 안에서 먹고 마시는 게 아닙니다. 먹고 마시려면 눈으로 관찰이 되고 모이는 거예요. “김집사는 안 왔나? 매일 빠지네.” 이리 된다 말이죠. 그게 아니고 김 집사 안 오던, 박 집사 안 오던 한 사람이 오던 두 사람이 오던 성령과 함께 있으면 그게 하늘나라에요. 왜 네트워크가 형성됐기 때문에. 지금 들을 땐 제가 너무 기분 좋은 게. 다 이해되는 듯 듣고 있거든요. 다 이해되는 듯. 몇 가지 질문해보면... 덜 흩어졌나? 더 흩어지게 아주 파괴의 힘을...

아까 한 거 다시 봅시다. 인간은 의도가 있다니까요. 이게 지하2층에서의 마귀의 의도에요. “니 신이잖아. 신. 왜 남한테 기죽어? 니가 지금 하나님 믿은 것은 니가 의지 없다는 소리야. 의지 있으면 니 힘대로 해야지. 무쏘의 뿔로 혼자 가야지. 비겁하게 예수고 하나님이고 왜 믿느냐? 어렵거든 믿는 건 이해되는데 할 수 있거든 니가 하고 안 되거든 그 때 하나님께 기도하라.” 이게 뭐냐 하면 자기중심의 네트워크에요. 지하2층. 악마가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니가 신처럼 되리라. 그 본성이 어떻게 우리가 흡착이 잘 되는지 친근감을 느껴요. 친근감을 느낀다고요.

촛불집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잖아요. 어디 복음전하니까 많이 모였습니까? 꼴 보기 싫은 거 몰아내는 데는 왜 그리 단결이 잘 되는지. 그게 뭐냐 하면 집단적 오야봉 의식 때문에. 으뜸의식 때문에 그런 거예요. 으뜸의식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설명하지 않고 후에 나오니까 참고하시면 돼요. 여기서 설명 안 하니까 이 말은 강의를 한 두 번 들은 게 아니라서 알지요. 설명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섭섭해서 안 돼요. 설명 안 하고 빨리하면 내가 섭섭해서 안 돼요.

원래 바다의 힘은 이래요. 물결친다. 물결치게 되면 바다 자체가 오해할 수가 있어요. 파도가 치니까 위에 있는 이 사람은 아래 있는 사람보고 으스대기 일쑤에요. “공부 좀 잘하지. 그랬어.” 그런데 속성은 어때요? 다 같은 바닷물이에요.

권력은 시도 때도 없이 변동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변동을 누가 그렇게 흔드는가, 그것은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흔들어버립니다. 뭘로 흔드는가. 자연세계의 변화로 흔들어요. 요거 자연세계로 흔들어서 문명이 차례 차례로 바뀌었다고 이야기한 책이 <총.균.쇠>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유명한 책이 있어요. 서울대학생 필독서입니다. 그 서평한 것이 십자가마을에 보면 있어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지혜를 짜내도 가뭄이 온다던지 전쟁병이 일어난다든지 균. 균.총.쇠니까 균이 임해버리면 하루아침에 멕시코 민족 다 날아가고 잉카민족 다 죽어버립니다. 균이 임하면. 그럼 균은 어디서 생기는가, 기후조건이 달라지면서 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문명은 전적으로 기후에 달렸는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균을 누가 주장하는가, 하나님이 파견한 일곱 천사가 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 천사가 이 자연세계를 아주 작살을 내는 겁니다. 이게 파괴에요. 거기에 씨앗 뿌리듯이 산포. 뿌리는 것. 뿌리듯이 흩어지는 거예요.

전부 다 하나의 남은 자로서 각처에 뿌려지는 겁니다. 네트워크가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아요. 왜 뒤에 연결되어 있는 호스가 있어가지고 아무리 멀리 가도 호스가 짧아 가지고 갑자기 은혜 없고 이런 거 없어요. 등짝에 호스가 쫙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그걸 가지고 “머리는 주님이요. 우리는 그의 지체니.” 라고 이야기해요. 그게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교회는 모방해서 만드는 게 아니고 흩어져서 교회가 되는 거예요. 흩어짐이라 하는 것은 처음에는 모였다는 겁니다. 모일 때가 있어요. 하지만 모인 그곳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이게 모이는 것이 오히려 흩어짐을 위반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모여야 되지요. 흩어지면 어디로 가는가. 지리적으로 생각하시면 안 되고 세상 속으로 흩어져요. 육으로 흩어지는 게 아니고, 흩어지라 하면 전부 잘 사는 나라 미국, 뉴질랜드 그런 데로 흩어지고 아프리카는 가지도 않는데.

흩어지라 하는 것은 자연 세계의 지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흩어짐이라 하는 것은 세상 속으로 흩어져요. 그럼 세상 속이라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라는 것은 주의 십자가에 의해서 그 때 그 때마다 세상이 만들어집니다.

교회가 복음을 놓쳐버리면 갑자기 그 교회가 뭐로 변화겠어요? 세상으로 바뀌지요. 그런데 만약에 성령께서 그 교회에 회개운동을 일으키면 세상이었던 교회가 교회가 되지요. 그래서 교회는 당회장이 주관하는 게 아니고 교회의 촛대는 주님이 지고 예수님을 네트워크를 증거하기 위해서 흩어진 열 두 지파를 증거하기 위해서 요동치게 만들어요.

이 요동치게 만드는 좋은 점은 뭐냐 하면 나는 이렇다. 하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그게 전부 다 파괴 되어야 하니까. 프로이트의 두 번째 사상이 뭐라고 했습니까? 죽음의 본능이라 하지요. 죽음이라 하는 것은 내가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전부 다 원형질로 바뀝니다. 원형질. 원형질 특징이 유형이 아니고 무형이에요. 형체가 없어요. 형체가 없으니까 고민되겠어요? 고민 안 되겠어요? 뭐 형체가 있어야 고민을 하던지 형체가 없는데 무슨 고민을 하겠어요. 

얼른 보게 되면 뭐 같으냐 하면 불교의 윤회설처럼 돼요. 윤회설 문제는 그게 바퀴벌레라는 게 독자적 개체가 성립되잖아요. 그게 아니고 개체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그냥 멀근 스프 죽이 되어 버린다 말이죠. 이게 성경이야기 아니고 프로이트가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죽이 되고 형체가 되게 되면 그 자체가 또 눈에 보이는데 성경은 눈에 보이는 게 아니고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열심히 분주하게 하던 그 자체를 카오스 혼돈으로 보는 거예요. 이미 혼돈으로 봐요. 그걸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구약의 이방민족입니다. 이방민족 군대가 사열할 때 보세요. 혼돈입니까? 줄이 착 착 맞지요. 정돈되어있지요. 우로 밧! 얼마나 기계적으로 잘 되어있어요. 그게 카오스에요. 그게 혼돈이에요. 왜? 십자가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교회 갔는데 그 교회는 너무 정돈이 잘 되어가지고 나이순대로 앞자리에 딱딱 앉고 질서가 있더라. 그게 혼돈이겠어요? 아니겠어요? 그게 바로 혼돈이에요. 인간들 눈에 보기 좋더라 하는 그것은 질서가 혼돈이고 진짜 복음적인 질서는 뭐냐 하면 파괴당하면서 흩어지면서 십자가는 우리는 죄인이고 주님만이 구세주라는 걸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그 질서. 그것만이 혼돈이 아닙니다. 그게 야고보1장에서 뭐냐 하면 주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은사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 다음에 좀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런데 흩어져있는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는가, 열 두 지파라 되어있다 말이죠. 열 두 지파? 지파하면 옛날이야기에요.BC1200~1100년 요 사이. 야곱이 BC1800년경. 모세가 BC1400년경이에요. 모세가 BC1440년이에요. 사사기가1300년 되니까 이건 뭐냐 BC1800년경이에요. 아브라함이 기원전2000년경이에요. 족보 계산하게 되면.

그 당시 이야기를 왜 여기 신약에다가 썼느냐, 어느 단어를 딱 따올 때는 달랑 단어만 따오는 것이 아니고 그 단어가 나오기 위해서 있었던 절차, 과정 그 하나도 안 놓치겠다는 뜻입니다. 열 두 지파. 그러면 열 두 지파가 나오는 그 연결고리를 여기서 마땅히 설명해야 되겠지요. 아까도 했지만.

자, 야곱이 이리 있습니다. 야곱입니다. 여기 자식이 12명이 있습니다. 야곱의 할아버지 이름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축복, 다른 말로 하면 번창, 번성. 이삭에게도 뭐라고 했느냐 하면 번성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그러면 여기 12명 낳아서는 안 되지요. 12명보다 더 번창해야 되지요. 별이 12개밖에 안 되는 건 아니잖아요. 요런 게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번성했다. 라고 생각하고 애기 12명보다 15명이 더 번성할거잖아요.

그러면 15명 낳아야 되는데 12명 낳으면 덜 번성한 거고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네.’ 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어떤 용어를 쓸 때는 그 시대까지 내려오는 게 아니라 장차 인간들이 모르는 미래의 것을 내다보면서 네트워크를 연결시키는 차원에서 이런 용어를 써버립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상당히 하늘의 별만큼  상당히 과장되지요. 과장되지만, 신약에 그만큼 많아진다면 그런 용어를 쓸 수 있다. 항상 미래를 시작점으로 해서 거꾸로 소급해서 이걸 봐야 됩니다.

그렇다면 이 자식 열두 명이 천국 열두 명 간다는 뜻이 아니겠지요. 열둘을 통해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 무한보다도 아주 많음. 아주 많음이지요. 열두 명만 달랑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열두 명에서 아주 많음으로 이어지려면 여기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야곱이 열두 명 낳았던 그 원리 있잖아요. 그 원리가 모두 여기 다 반복해서 거기에 원리가 삽입되어 있어야 돼요.

그 원리가 삽입되려면 야곱이 열두 명 낳는데 첫 째는 뭐냐 애기를 못 낳아요. 여자 둘 다. 레아와 라헬이 자매간인데 둘 다 애기를 못 낳아요. 레아는 사실은 야곱이 사랑하는 사람 아닙니다. 1+1 셀 때, 쏙 들어갔어요. 정말 사랑하는 여인은 라헬이었지 레아가 아닙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한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어요. 이뻤다. 그녀는 이뻤다. 그녀는 이쁜데 이게 재미있는 게 누구보다 이뻤냐 말이죠. 언니보다는 동생이 이쁜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세 번째 자매가 있다면 세 번째하고 결혼했을 거예요.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왜? 첫 째, 둘째는 둘째가 이쁘지만 셋째에 비교하면 첫째 둘째는 영 맛이 아니다. 라는 말이지요.

결국은 이뻐서 결혼했다는 말은 야곱에게서 나올 것은 인간의 야곱의 육적인 자식밖에 나올 게 없기 때문에 이건 천국에 못 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아까 했던 끊어져야 되지요. 육은 못 낳아요. 육은 못 낳고 약속이 들어가야 돼요.

약속이 들어가는데, 리브가 같은 경우에는 약속으로서 에서, 야곱이 있고, 아브라함은 사라가 있지만, 여기 야곱의 약속은 애를 낳고 난 뒤에 나중에 나와요. 그게 뭐냐 이스라엘이라는 준비된 숨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숨은 인물. 이스라엘이 누구냐 하면 요한복음1장에 보면 예수님이 이스라엘이에요. 예수님이.

인자가 오르락 내리락 한다 했으니까. 야곱이 왔다 갔다 하는 게 기이하냐, 인자가 오르락, 내리락 하리라. 그러니까 장차 오실 예수님을 위해서 미리 이런 것들이 준비되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우리의 역사관, 주님의 역사관하고 달라요. 우리 역사는 원인이 결과를 낳잖아요. 이건 원인은 주님이 원인이에요.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도 주님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원인이 되고 우리는 결과라고 고백하는 그 네크워크가 육과 전혀 다른 영적인 교회, 영적인 성도들끼리만 통하는 그런 새로운 그들이 교류가 되는 겁니다.

“집사님, 600년 후에 맛있게 잡수셨어요?” “예, 맛있게 잡셨어요.”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600년 후에 식사를 맛있게 했는지 그 때는 죽을지 살지 모르지만. 마치 엘리야가 모세보고 “모세님, 1440년경에 메시아 만나봤어요?” “만나봤지.” “언제 만났어요?” “니하고 같이 변화산에서 만났잖아. 이 후배야.”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어떤 시간의 격차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건 동시성을 갖고 있습니다. 동시성. 왜냐하면 원리는 같기 때문에. 십자가의 원리는 어떤 시대가 아무리 박하고 험하다 할지라도 구원 못되는 실패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구원이. ‘야~ 예수님 내가 구원해도 안 되는 정도로 그 정도로 세상이 악하구나!’ 이런 경우는 없어요.

그래서 한 번 보라는 거예요. 애기 못 낳는데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자식이 나오느냐, 이걸 보게 함으로서 이 원리가 이 시대로 끝나는 게 아니고 앞으로 모든 구원받는 사람은 이 확정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원칙으로만 나는 구원하지 그 외 다른 원칙으로는 구원하지 않는다. 를 확정짓고 이것을 수가 찰 때까지.

그걸 1000대지요. 12x12x1000이에요. 이게 144000. 그래서 모든 구원받는 사람은 요한계시록에서 이미 확정난 겁니다. 숫자 채우자! 가 아니라 이미 확정되고 난 뒤에 보자~~ 세상이 얼마나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는가 보자. 보자 알지요. 스톱해가지고. 이제 죽 훑어보는 겁니다. “에이씨~ 이건 아니고.”

다시 말씀 보겠습니다. 항상 주께서는 두 부류를 합니다. 기준을 우리가 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깨지고 파괴되어야 마땅한데 무슨 또 기준을 따로 내놓습니까?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육적인 기준을 깨지요.

수요예배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복권할 때 동전으로 긁어내지요.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족속을 딱 가리고 있는데 아브라함 족속은 안 보여요. 왜? 온 세상이 이스마엘 육적인 거예요. 그런데 성령에 의해서 긁어내게 되면 “여기 있었네. 약속 자식 여기 있었네.” 하고 헤헤 고개를 내미는 식으로 주께서는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를 역사합니다.

똑같이 적용하게 되면 우리는 이스마엘이에요. 우리는 오야봉입니다. 우리 가정만 챙기면 최고에요. 내 몸만 건강하면 최고지 남 보디빌딩 잘 됐다고 내 대신 살아라. 이런 거 우리는 용납이 안 됩니다. 남 행복하고 난 불행하여라. 그런 위인 없어요. 남 죽든 말든 나만 살면 그만이에요. 그걸 십자가로 긁어버립니다. 긁어버리면 나는 행복하여라. 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는 따질 거 없이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용서하심으로 이미 천국 백성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 흩어진 열 두 지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야고보서를 시작했습니다. 주께서 함께 하셔서 십자가 복음이 얼마나 고귀하고 내가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내 행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님의 피인 것을 한시도 잊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보물창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마포 귀신  (10) 2024.09.08
첫 열매  (12) 2024.09.07
천국의 조건  (4) 2024.09.07
육과 영의 경계  (2) 2024.09.06
실화  (5) 2024.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