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71208a약1장18절(첫 열매)-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 1장 17절,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가장 좋은 것은 위에서부터 온다. 그 이야기를 전에 했고, 그 위가 어디냐,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온다. 그럼 빛들이 위에서부터 오는 것하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하고의 차이점은 뭐냐, 변함이 없다. 지난 시간에 언급을 했죠. 팽이를 한 번 보세요. 팽이가 제자리에서 뱅뱅 돌죠. 근데 제자리거든요. 여러분 팽이 다 아시죠? 팽이가 뱅뱅 도는데 제자리다 이 말이죠. 팽이가 멀리가고 그러지 않습니다.
가봤자 맨 그 자리인데, 우리네 인생이, 모습이 팽이의 겉면이라고 생각을 해봅시다. 우리는 늘 변해요. 하루하루 변합니다. 팽이의 이쪽저쪽 동서남북을 구경하고 가지만, 성도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세상이 많은 변화를 겪더라도, 이 팽이 자체가 주님의 몸이라면, 역시 전처럼 꾸준히 변하는데, 중심은 그대로죠.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변하는데,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걸 중심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봐버리면 이렇게 팽이처럼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변하는 내가 따로 있고 변하지 않는 주님이 있어가지고 “나 저거 주님이라고 믿을래. 주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을래.” 이렇게 되면 양쪽 다 변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는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을 발견해야지, 나도 안 변하고 주님도 안 변했다면 이거는 이 세상일이지 주의 일이 아닙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세상이 핑핑 도는 변화를 통해서 변하지 않는 것이 뭔지를 비로소 찾아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평생 나는 안 변해, 안 변해, 라고 한다면, 안 변한 내가 안 변한 주님이라고 하게 되면, 이거는 가짜일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이거는 우상이 됩니다. 우상.
우상의 특징은 내 기분 내키는 대로 믿는 신이 우상이잖아요. 내 기분대로 되는 신. 기분 좋으면 믿고 안 믿으면 그만. 이게 우상이잖아요. 그럼 우상이 아닌 신은 뭐냐 하면 주님은 한결 같은데, 오늘 말씀 그대로인데, 그 주님이 한결 같다는 것을 주님 쪽에서 알리기 위해서 누구를 팽팽 돌리느냐 하면 우리 자신들로 하여금 동탄이고 어디고 온 천지를 다 돌아다니게 한다 이 말이죠. 안산이고 어디고.
그러면 뭐가 떨어져나가겠습니까? 내가 믿는 우상이 떨어져나가겠어요? 안 떨어져나가겠어요? 나를 위해 믿는 우상들이 다 떨어져나가겠죠. “나 저거 믿을래. 이거 믿을래.” 하는 것들이 다 떨어져나간다 이 말이죠. 그래서 팽이라는 비유도 완전치는 않지만, 이 비유보다 전 이게 더 마음에 들어요. 뭐냐 하면 ‘땅에 떨어진 핫도그’
저는 밤에 잘 때도 설교를 늘 생각하거든요. 하면서, ‘땅에 떨어진 핫도그’를 지금 몇 주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 비유가 너무 맘에 들어서 그래요. 땅에 떨어진 핫도그가 어떤 거냐 하면, 땅에 핫도그가 탁 떨어졌잖아요. 애들은 핫도그 먹고 싶어서 그거 안 버립니다. 주워서 핫도그에 묻은 흙을 털어내죠. 그럼 흙 털어내면 뭐가 남겠어요? 핫도그만 남죠.
주님이 우리를 주웠습니다. 주워보니까 우리가 핫도그에 붙어있는 흙덩어리 같은 것. 버려야 될 것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세상에 대해서 너무 집착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주님의 주님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탁탁 털어버리는 거죠. 가락교회 갔을 때에 어떤 목사님이 그런 좋은 비유를 이야기 했어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가 ‘땅에 떨어진 핫도그’, 또는 ‘물에 젖은 개 마냥’ 같다고 했어요. 개가 물에 젖으면 어떻게 합니까? 막 흔들죠. 그럼 물방울이 다 떨어져나가겠죠. 그럼 뭐만 남겠어요? 개 몸체만 남겠죠.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으면 그 다음부터 우리가 고요하지를 않아요. 왜? 이 땅이 정착지가 아니고 천국가야 하니까. 천국은 주님만 섬겨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 땅에서는 주님 섬긴다는 말은 하면서도 우리는 주님 섬기는 데는 관심도 없고, 내가 나를 섬기기에 바빠요. 물에 젖은 개 마냥, 그땐 주님께서 원치 않는 것을 흔들어버리면 원심력에 의해서 다 바깥으로 떨어져나갑니다. 물에 젖은 개도 괜찮지만 저는 땅에 떨어진 핫도그가 더 마음에 들어요. 핫도그를 먹고 싶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땅에 있는 것들, 묻어있는 것들을 떨어내게 되면,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주님의 의도에 의해서 살아온 것이지, 내 의도는 다 떨어져 나갈 헛된 의도일 뿐이라는 것을, 떨어져나가면서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떨어져나가면서. 떨어져나간다고 집나가고 그런 것이 아니고, 현재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우기고 살아온 내 인생인데, 그 생각이 마음대로 떨어져나가고, 이 모든 것이 주의 것으로만, 주님의 것이라는 것만 새삼스럽게 느끼게 만드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한다? 일을 벌이시는 거예요. 그것도 부지런히 일을 벌이시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옆에서 “당신 어떻게 삽니까? 왜 삽니까? 무엇 때문에 삽니까?”라고 의미를 물으면,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님의 은혜로 삽니다.” “목적은 뭐에요?”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성경에 있는 내용과 얼추 맞아떨어지죠. 우리가 전에 했던 히브리서 11장을 하면서 믿음의 선진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물에 젖은 개 마냥(처럼)살았죠.
주님이 오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 찾아와가지고 흐트러트리니까, 그들이 예상 못한 일들이, 특히 오늘 같은 일들이 자꾸 발생되는 겁니다. 예상 못할 일들이. 어찌할꼬? 절망적일 때, 모세 같은 경우에는 공주의 아들 되는 세상영광보다도 그리스도와 함께 뭐하기를 즐거워했다고 했습니까? 고난 받기를 즐거워했으니, 이는 하늘에서 뭘 줌이라? 하늘의 상을 바라봄이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히브리서 다음 야고보서를 하고 있는데, 야고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늘 자기 자신을 안정되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기 때문에, 그 고집 때문에 오늘 본문 1장 17절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내가 아니고 하늘의 것이 변하지 않는다는 이 사실을 우리가 자꾸 놓치는 겁니다.
그러면 한 번 물어봅시다. 나를 믿어야 해요? 주님의 일하심을 믿어야 돼요? 어느 것을 믿어야 돼요? 주님의 일하심을 믿어야 되겠죠. 그럼 내가 믿는 것과 주님의 일하심을 믿는 것이, 이것이 딱딱 이렇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내 인생 자체가 주님의 일하심인데, 우리는 내 인생을 내 인생 역사라고 꽉 붙들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이 번역을 다시 해야 해요. 하루하루 살아온 것이 주님의 쓰신 역사가 내 몸에 다 새겨져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지난날이 그랬듯이 앞으로도 주님이 하루하루 쓰신 일기장이지, 내가 써나갈 일기장은 아닌 거예요.
자, 18절, 오늘 본문의 핵심 부분에 들어왔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이 제일 이게 난해하고 중요합니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Of his own will begat he us with the word of truth, that we should be a kind of firstfruits of his creatures.
여기 ‘첫 열매’ 이거 설명하는 것이 오늘 강의 핵심이 되겠습니다. 열매라고 했을 때 농사짓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고요. 농사짓는 사람에게 기분 좋은 것은 열매, 특히 첫 열매 맺힐 때, ‘야! 농사 되겠다. 이번 농사 괜찮다.’라는 기쁨을 안겨다 줍니다.
그러면 아까 우리가 배운 것을 생각해봅시다. 이스라엘은 누구나라입니까? 자, 이스라엘나라입니까? 하나님나라입니까? 이스라엘은? 그 이스라엘 주인이 누구에요? 이스라엘이에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죠. 왜냐하면 동행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원래 왕이 필요치 않습니다. 제사장이 중심이죠. 왕 같은 제사장. 그 제사장을 누가 임명합니까?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임명하죠. 근데 임명 자리가 어디냐 하면 성소입니다. 성소 또는 성전.
이스라엘은 성소가 있는데 성소에는 사람이 없어요. 지성소에는 사람이 없거든요. 그러면 아무도 없느냐? 아니에요. 그 지성소 자리에 누가 계시느냐 하면, 사람이 있으면 사람 이름이 있는 곳인데, 성소의 핵심이 되는 지성소에는 사람이름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 이름이 들어가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그 이름을 ‘임재’라고 합니다. 임재.
그러면 성소 바깥 진이 한 10킬로, 11킬로가 되는데요. 텐트 치면 그렇게 돼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광야 때, 인원수가 많으니까, 계산해보니까 그만큼 텐트 진영이 넓어요. 그러면 거기에는 누구 이름이 있어요? 텐트마다? 지금 포항지진 때문에 집이 무너진 사람들은 텐트생활 하고 있잖아요. 텐트마다 누구 이름이 들어가겠어요? 사람이름이 들어가겠죠.
지성소에는 누구 이름이 들어갑니까? 하나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계셔도 안 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지성소에 가면 언약궤가 있는데, 언약궤 위에 천사가 마주보고 있어요. 마주보는 그 자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거예요. 그냥 들어가면 죽습니다. 안 보이지만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이름이 계시다. 원래 이 이름이 어디 이름이냐 하면 시내산 꼭대기에 있는 이름이었고 모세만 만났는데, 모세가 내려오면서 뭘 들고 왔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들고 왔죠. 그 하늘에 있는 언약을 땅에 모셔놓은 것이 언약궤거든요. 언약이 내려오면서 언약의 실천자, 언약의 실천자가 누구냐 하면 이게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하는 거예요. 하나님도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름이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하시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이름이냐, 하나님의 이름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인간과 하나님의 택한 백성과 관련지어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존재로만 이름이 붙여지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하시는 활동을 통해서 이름이, 내용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활동을 통해서.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는 거예요. 요새 그 이야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수요설교에서 하고 있습니다. 들어보셨어요? 거기에 쭉 보면 이름이 자기 언약을 이 땅에 어떻게 실현하는가, 그게 잘 들어보면 나오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해서 존재론을 덜렁 생각하면 안 되고, 쉽게 말해서 팔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일하시는 거예요. “야야! 며느리야! 나와라 차라리 내가 설거지 할게.”라고 하는 것처럼. 김장할 때, “어머니 김장 어떻게 해요?” “내가 할게. 내가.” 그때, 김장의 하나님이에요. 설거지의 하나님. 김장의 하나님.
그렇다면 하나님이 일하시면 어떤 결과물이 나오겠죠. 실적이 나오겠죠. 그게 야고보서 1장 18절에 나오는 첫 열매가 되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그 첫 열매는 광야에서 첫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그 첫 열매 맺히는 장소가 있어요. 보통 세상 사람들이 있는 곳을 땅이라고 해요. 땅.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첫 열매를 맺는 그 땅을 무슨 땅이라고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약속의 땅.
약속의 땅이라고 하니까, 제가 생각나는 옛날드라마가 있어요. 김진홍 목사가 일했던 것을 kbs에서 드라마로 보여줬거든요. 서울에서 빈민들 모아가지고 어디 경기도 동두천에 가서 두레마을을 만들었잖아요. 그 제목이 뭐냐 하면 약속의 땅이에요.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쫓겨남을 전제로 하고 있죠. 쫓겨남.
그러니까 성도는 이 땅에서 쫓겨나는 거예요. 우리가 사는 모든 이 세상에서 쫓겨나서 따로 사는 겁니다. 이 따로 사는 걸 감사해야 돼요. 우리가. 따로 사는 것을 감사해야 되지, 그 뭐 지남철처럼, 쥐 잡는 찐드기(끈끈이)처럼, “아이고 여기 떠나면 나 못산다. 이 동네 떠나면 못산다.” 찐드기에 붙은 것처럼, 파리 찐드기처럼, 요새는 모기찐드기도 있답니다. 그런 것이 붙어가지고 못 떼어가지고 “우짜노! 우짜노! 나는 더는 못산다.” 뭐 이런 것 있잖아요.
내용이 어려워서 쉽게 갑니다만, 이런 이야기도 있어요. 옛날 드라마에 보면 나오는데, 시집간 딸이 엉뚱한 짓을 했을 때, 친정엄마가 그 소식을 듣고 와서 등짝을 주먹으로 때리면서, “내가 이렇게 하라고 니 안 키웠다.”라고 울면서 하는 그 장면이 있죠. “우에 니가 그런 짓을 하노?” 하면서 등짝스매싱, 때리는 것 있죠. 그게 이별의 순간이죠. 그러면 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엄마 인생 따로 있고 내 인생 따로 있어요.”라고 하죠. 이렇게 드라마가 진행되죠. “야야! 안 된다.”
약속의 땅에 갈 때, 그냥 조용히 못가요. 조용히 조심스레 못가고 이 세상에서 알던 사람이 등짝을 쳐야 해요. 니가 이렇게 빠질 줄 몰랐다는 거예요. “이런 데 빠질 줄 몰랐다. 우리 같이 그냥 조용히 평범하게 살면 안 되나?” 이런 질문요. 그런데 약속의 땅의 첫 열매가 우리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제 이야기 들으면 어디서부터 시작했습니까? 이 땅에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세상에 하나님도 인간 같은 이름을 갖고 뛰어들었거든요. 그 분의 솜씨가 바로 뭐냐 하면, 그 분의 솜씨가 첫 열매에요. 그 분의 솜씨가.
시작을 지금 하나님부터 시작했다고 언급을 했어요. 시작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다면 첫 열매가 무엇입니까? 라는 그 질문을 우리가 할 수가 없어요. 제가 말을 너무 어렵게 한 것을 여러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람이 이 세상을 삽니다. 제가 지난 낮 설교에 이야기했죠. 사람이 사는 것, 밥 먹고 잘 사는 것 외에는 무슨 계획이 있습니까? 라고 했거든요. 진짜 우러나오는 말을 했어요. 사람은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기어이 모든 고민은 잘 먹고 잘 사는 거예요. 결국은 하나님은 뒷전인데, 뒷전이라도 보통 뒷전이 아니에요.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밀립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충만하심, 교제하심이 그게 뭐 우리한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겠어요? 그래서 설교를 처음 시작할 때 대목 펴놓고 그 이야기했잖아요. 도대체 사도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데 이게 우리한테 무슨 위로가 되느냐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사도바울은 못 알아듣는 이야기하고 본인은 사라졌다고요. 주일 낮 설교에서 했거든요. 그럴 때 제가 이용이 부른 <잊혀진 계절> 노래가사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헤어지는 정도가 아니고 찢어졌죠.
갑자기 우리가 말씀을 조금도 신경 안 쓰게 되면, 결국 말씀은 에프킬라처럼 뿌릴 때 뿐이고 그 다음 돌아서면 다시 윙~하고 세상 모기가 들끓게 되어 있어요. 이런 시간이 참 귀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서 분명히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먹고 살기 위해서 질문을 우리 쪽에서 던집니다. 이게 벌써 오류에요. 오류가 난 거예요. 질문을 우리 쪽에서 던진다는 말은 자기의 아쉬운 것을 도와달라고 신에게 요청한 거예요.
그러면 이 신은 뭐냐 하면, 시내산에서 내려온 그 신이 아니에요. 이 신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출애굽기 32장에서는 이 신을 바로 우상이라고 합니다. 다른 신이에요. 다른 신. 우리는 걸핏하면 다른 신을 믿고 있는 자아를 발견합니다. 아쉬울 때. 어려울 때.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질문하고 신은 답변한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매치가 되고 연결되는 신은 백퍼센트 우상입니다.
이게 출애굽기 32장에서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8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됐습니다. 우상의 특징이 뭐죠? 자기를 위해서죠. 자기이름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언약의 하나님은 언약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는 거예요. 순서를 잘 알아야 돼요. 순서를.
내가 필요해서, 밥 먹고 사는 것,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게 우리에게 전부기 때문에 나한테 필요한 신을 찾다보니까 그 신에게 아무리 간곡하게 기도하고 무시로 기도하고 철야한다 할지라도, 그건 뭐냐 내가 필요한 신이기 때문에 나를 위한 신이 돼버려요. 이게 바로 우상이 되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 따로, 산 밑에 백성 따로 한 줄 압니까? 이 세상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할 때, 그 하나님 외에 신이 어떠한 입장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는지를, 뭐 다른 신을 알아야 섬기든 안 섬기든 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 다른 신이 뭐냐, 본인이 필요해서 호출할 때 나타나는 신이 다른 신이에요. 내가 필요해서. 내가 아쉬울 때, 내가 어려울 때, 내가 힘들 때, 내가 곤란할 때, 이 네 가지 형용사 앞에 누가 있습니까? 누가? 내가. 누가 아쉬워요? 내가. 내가 힘들고 내가 괴롭고 내가 불행하고 내가 슬플 때 찾는 신. 우상입니다. 참 가만히 보니까 결국 내 인생은, 아무리 이론상 주의 인생이라고 해도 가만히 보니까 내 인생은 나의 것이에요.
우리가 출발을 질문부터 하면 안 돼요. 질문은 누가 하는가 하면, 질문을 주님부터 하고 우리는 답변하기 전에 우리 자체가 뭐냐, 주님의 작품이고 답입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첫 열매라고 해요. 첫 열매. 이게 첫 열매입니다. 첫 열매라고 하면 두 번째 열매, 세 번째 열매가 있겠지만, 성경에서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은 안에 다른 모든 열매는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대표적으로 첫 열매라고 할 수 있어요. 첫 열매.
그러니까 이런 입장에서 구약의 첫 열매의 개념에 대해서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되겠죠. 그래서 구약에서 십일조가 나오는데 십일조는 뭘 드리는가 하면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첫 열매를 드리는 거예요. 첫 열매. 첫 열매, 십분의 일이에요. 첫 새끼, 첫 장, 이게 첫 열매에요. 왜 십분의 일을 드리는가 하면 내가 나 된 것이 내 작품이 아니고, 내가 힘들게 애쓴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주님께 받은 것을 주님의 것으로 도로 가져가는 것이 십일조에요.
‘줘놓고 가져갈 거면 아예 주지 말지.’라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만약에 아예 안 주게 되면 뭐가 빠졌는가 하면 왔다간 경로가 빠져버려요. 경로가. 그 절차가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땅은 어떤 세상이다? 죄 많은 세상이거든요. 그런데 주님의 세상은 의 많은 세상이죠. 거룩의 세계죠. 거룩의 세계에서 뭔가 죄인의 세상에 들어왔다가 다시 회수가 돼버리면 여기서 어떤 경로가 나타나느냐 하면, 죄인인데 뭐 됐다? 의인됐다 아닙니까? 죄인인데 의인된 거예요. 이 경로가 중요한 거예요.
우리는 내 구원에 주목하지 말고 이 경로에 주목해야 해요. 이 경로에. “나는 이렇게 죄 많은데 어떻게 의인이 되었지?” 이 경로에 주목해야 해요. 이 경로에. 동탄 다 들어갔다. 이 경로에 주목하라고 하니까. 어디 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의 뜻은 뭐냐, “주여! 어디로 가야하나이까?” 이건 지금 내가 하는 질문이고, 주의 답변은 뭐냐, 어디를 가도 팽이는 맨 그 자리에요. 주님의 첫 열매의 자리는 뺑뺑이 돌아도 어디든지 첫 열매에요.
내가 어느 동네를 주목하지 말고 어느 동네에 가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그 원리와 원칙이 하나님의 약속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하시라 이 말입니다. 실습상 다들 이사를 가야해. 가봐야 얼마나 우리가 세속적이고 이 세상 중심으로, 그리고 내 중심으로 살았는지 티가 팍 나요. 티가 확 나요. 팍팍 나게 되어 있어요. 이 성경 아무짝에도 소용없어요. 성경공부 아무짝에도 소용없어요. 질문을 내가 하기 때문에.
질문이 이거거든요. “어떡합니까? 어쩌란 말입니까?” 결국 질문이 이거잖아요. “어떡합니까? 어쩌란 말입니까?” “뭐?” “내 인생 책임지세요.” 여기 또 내가 붙어요. 이런 사람이 천국 가면 천국 가서도 또 자기 밥그릇 내놓으라고 하겠죠. 천국은 이 나를 빼놓는 천국이거든요. ‘나’가 똑 부러진 나라가 천국이에요. 모가지를 똑 떼듯이 나를 똑 떼어가지고 이 나에다가 뭘 붙이느냐, 주의 이름을 붙이는 거예요.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가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 기관차고, 엔진이 가동되는 기관차고 우리는 뭐냐 객차가 되어야 되는데 우리가 기관차가 되어가지고 밀면 갑니까? 지옥으로 가지. 내가 주님을 땡기려고 하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내가 질문하고 주님이 답하면 이건 지옥 가는 겁니다. 주님이 질문하고 우리가 답해야 해요. 고백해야 해요. 주님께서 뭐라고 질문하느냐, “야고보서 1장 18절에, 첫 열매라고 하는데, 니가 나의 첫 열매인 것을 니가 알고 있냐?”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답변해야 합니까? “넹!” 답변해야 하죠. 그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는 것을 하늘나라라고 합니다. 하늘나라의 삶은 이거에요. 주님이 질문 던지고, 그 질문이 요한계시록 4장에 나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께서 하신 겁니다.”라는 것이. 그래서 면류관을 반납하죠.
요한계시록 4장 10절,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절,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우리는 드리고 주님은 받으시고. 그 주고받는 것을 죽기 전에 미리 이 땅에서부터 계속 연습시키고, 연습 정도가 아니고 실제로 하늘나라니까 그걸 실제화 시키는 겁니다. 근데 우리 식으로 하면 안 되잖아요? 주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안 된다고 방치하십니까? 자기백성인데? 우리 식으로 해서는 첫 열매가 안 됩니다.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여기 첫 열매가 있더라도 우리는 절대로 첫 열매처럼 살지를 않아요. 왜? 세상이 좋아서. 세상이 너무 좋아서, 여기서 남들한테 잘 살았다는 것을 자랑질 하고 싶어가지고, 이 과시욕이 있어가지고 절대로 안 됩니다.
절대로 안 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성령께서 일하실 때는 앞에 붙는 것이 있어요. “말할 수 없는 탄식.”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관여합니다. 이 탄식! 이 탄식으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관여합니다. 벌써 성령께서는 아휴! 하면서 우리에게 개입하죠. “아휴! 이 철딱서니 없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개입하셔요. 성령께서.
그러면 성령께서 개입하시면 우리는 붕 떴다가 어디로 내동댕이쳐지느냐 하면 바다로 툭 떨어지죠. 제가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는데 뭐라고 했느냐 하면 현대인은 풍선이라고 했죠. 허세와 허풍의 풍선에 붕 떠있어요. 와우~00아파트! 와우~00아파트! 생각만 해도 붕 떠 있어요. 풍선을 달아가지고 그것도 1, 2층이 아니라 15층에 붕 떠 있어요. 우리는 붕 뜨는 재미로 살아요. 붕 뜨는 재미로. 근데 탄식 바늘로 콕 찌르면 팍 터지죠. 땅바닥으로 툭 떨어지죠. 바닥을 치죠. 성령께서 이런 쪽으로 인도하십니다.
바닥을 치면 슬프다? 아니요. 감사가 되죠. 바닥을 칠 때 옆자리에 누가 계시는가, 십자가에 주님이 계시고 옆에 강도가 있어요.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이 있으리라. ‘함께.’ 주님은 혼자서 잘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아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는 고백을 듣고 싶어요. 왜? 그게 답이기 때문에. 그래야 우리가 주님의 작품이 되고 주님의 솜씨가 되는 겁니다.
찬송가에 나오잖아요.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 왜? 누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심지어 교도소 감방이라도 주님과 함께 있으면 찬미소리가 절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찬미소리가. 바라기는 한 이백억 정도 있어가지고, 우리나라 최고의 아파트, 이백억 아파트 그 방에 살면서 찬미. 꿩 먹고 알 먹고. 참 괜찮죠. 애가 공부 잘해서 멋있게 되면서 나는 예수님을 인하여 찬미. “절대로 애가 잘 돼서 찬미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면서.
자, 성경대로 합시다. 여기 첫 열매를 만들었다고 있죠. 여기 단어 자체가 첫 열매 되게 했죠. 그러면 자 묻습니다. 첫 열매가 이 땅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제가 묻는 겁니다.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이 땅에 첫 열매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땅에? 만들었다고 되어 있으니까, 있죠. 하도 질문을 꼬아서 하니까 답변하기도 그렇죠. 글자 그대로 첫 열매가 있다고 하니까, 있죠.
분명히 하나님께서 첫 열매를 만들었다고 야고보서 1장 18절에 말씀하셨는데, 만약에 우리가 첫 열매에서 탈락된다면 얼마나 아쉽겠습니까? 아쉽죠. ‘누구는 첫 열매되고 나는 첫 열매 안 되고, 인생 그동안 뭐 하며 살았나? 평생 살았다고 해도 여기 야고보서 1장 18절에 나오는 첫 열매에 포함되지도 못하고, 인생 이렇게 살아서 되겠나?’하면서 심히 통곡하면 안 되겠죠.
그럼 여기서 중요한 게 뭐냐, 첫 열매인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점이 뭐냐, 이게 중요합니다. 그거 분간하는 법이. 우선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그 분간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알곡과 가라지. 마태복음 3장에 나오는 세례요한이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리라 했고. 또 마태복음 13장 끝에 나오는 좋은 고기 나쁜 고기. 고린도전서 2장에는 노골적으로 영과 육. 확실합니다.
제가 가락강의에서 했지만, 사도바울에게는 인간은 없어요. 인간이란 세상용어고. 사도바울은 영과 육으로만 이야기합니다. 성령이 있는 사람은 영이라고 하고 성령이 없는 사람은 육이라고 합니다. 참 강의 이걸로 끝내고 싶네요. 사도바울은 말을 할 때, 주저하는 법이 없어요. 이렇게 눈치 보는 법이 없어요. 그냥 이야기합니다. 성령 받았으면 영. 성령 안 받았으면 육. 인간은 없어요.
사도바울에게 인간은 딱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누구? 아담.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다면 두 번째 아담.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 그 외에는 인간은 없어요. 그 사이에는 영의 사람, 육의 사람 그뿐이에요. 그래서 이런 관점을 가지고 kbs뉴스를 보자 이 말입니다.
자, 낚싯배가 뒤집어졌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죠. 유족들 울고불고 난리죠. 그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합니까? ‘저 사람이 영일까? 저 사람이 육일까?’ 이런 관점으로 보셔야 돼요. 그런 관점으로 보셨어요? 우리가 그런 관점으로 보는 것이 훈련이 안 된 이유가 평소에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싶은, 육이고 영이고 관계없이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모델을 우리가 따로 챙겨서 그렇고, 그렇게 챙기는 것은 우상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미리 갖고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언제 따라붙을 수 있을 것인가? 라고 자꾸 부러워하다 보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런 분류방법이 전혀 우리 머릿속에 안 들어오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탄식하는 성령께서, “아이고, 이 철딱서니 없는 것!” 등짝스매싱하면서, “세상은 육과 영이야. 영과 육이야. 그거야. 뭣 땜에 니가 침 질질 흘려가면서 거기에 정신 빠져서 그걸 부러워하고 있느냐?”라고 하시죠.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의 선조들이 세상을 부러워했습니까? 그 사람들은요, 세상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못한 인물들이었어요. 상상도 못한 인물들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다? 상상을 했겠어요? 못 이기죠. 세상이 오히려 그들을 부러워해야 합니다. 세상이. 세상이 우리를 부러워해야 하는데, 우리는 거꾸로 되어가지고 영과 육, 양과 염소, 다 잊어버리고, 그냥 세상만 부러워하고 있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걸 제가 왜 언급을 하느냐 하면 평소에 우리가 안일하게 이걸 잘못 분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자, 우선 잘못 분류한 것을 언급해드리겠습니다. 양과 염소만 남기고 다 지우겠습니다. 또 나누라고 하면 있지요. 기름준비를 한 다섯 처녀 기름준비를 하지 못한 다섯 처녀 비유. 나누는데 참 쉽잖아요.
자, 잘못된 분류가 뭐냐 하면, 세상 전체를 동그랗다고 보고, 동그라미를 그려서 반을 나누면 이쪽 구원받은 사람은 양이고 이쪽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염소다. 이렇게 분류한 겁니다. 이걸 평면적사고 라고 하는데, 평평한 하나의 종이에 청군백군 나누듯이, 이쪽은 양, 이쪽은 염소로 이렇게 안일하게 나눈 거예요.
물론 성경에도 그렇게 되어 있어요. 양은 오른쪽, 염소는 왼쪽. 이 분류가 여러분 맞다고 생각하겠죠. 어떤 농토가 있는데, 알곡 아니면 가라지, 가라지 아니면 알곡, 둘 중에 하나니까. 면적 쪼개서 알곡은 알곡대로 모으게 되면 분할을 할 수가 있죠. 나눌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이 되잖아요.
그런데 이걸 평면적으로 하지 말고 3D로 봅시다. 입체로 봅시다. 입체적으로. 이게 정답인데요. 위에서보니까 양과 염소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전부다 염소에요. 염소. 입체적으로 보니까. 염소에서 공중에 뭔가 낯선 게 떠있는데 그게 바로 양이에요. 아까 분류방법하고 차이점을 봅시다. 동일한 평면위에 이쪽 부분은 양이고 이쪽 부분은 염소가 된다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기를 양, 성도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오류가 있느냐 하면, 한번 양은 영원한 양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겠죠. 이 경계선(염소와 양을 분류시킨 선)을 안 넘어갔으니까.
양이 됐으니까 뭐만 공격하고 비판하면 됩니까? “저런 염소새끼들!” 이러면 되겠죠. 왜? 나는 항상 양이니까. 그렇다면 성경에 아무개, 아무개 권사는 양이라는 게 성경에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이근호 목사는 양이라는 게 성경에 나와요? 안 나와요? 안 나오죠.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은 뭐냐 하면 무조건 좋은 쪽에 자기가 속했다고 하죠. “내가 양이기에 너는 내 뜻하고 안 맞으니까 너는 염소다.”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잖아요. 이 자체가 염소생각이다 이 말입니다. 이 자체가.
왜냐하면 자기 부인을 안 한 상태에서, 자기가 속해 있는 중심으로, 성경내용대로 한다고, 그 잣대로 잘라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게 흔히 교회에서 하는, “우리교회는 구원받고 우리교회 비판하는 사람은 지옥 갑니다.” 이런 것. “십자가마을 사람들은 다 천국가고 십자가마을 사람들 가지고 구시렁거리고 비판하는 사람은 지옥 갑니다.”
뭐 십자가마을에는 그런 사람은 없지만. 십자가마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시기질투하면서 이런 식으로 비난하는 것을 많이 들었어요. 그 말은 뭐냐, 자기들이 평소에 자기는 천국가고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지옥 간다는 사고방식으로 꾸준히 살아오고 있다는 것을 그만 티를 내버린 거예요. 폭로를 해버린 겁니다.
자, 평면적인 것을 다시 해봅시다. 내가 속해 있는 이쪽은 천국 가고, 내가 반대한 저쪽은 지옥 간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라는 겁니다. 인간의 한계. 자기위주를 살아가는 인간의 한계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자기를 위해서’가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를 위해서’ 만든 그게 바로 우상이에요. 우상.
이름이 예수든, 여호와든, 하나님이든, 삼위일체든, 그런 것 관계없어요. 그런 이름 자꾸 들먹이지 마세요. 이름은 내 이름이 아니고, 모가지 댕강 날아가게 해야 해요. 내가 판단하면 이건 내 이름이 있다는 뜻이에요. 내가 판단하면. 그래서 판단하지 말고 비판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내가 판단한 모가지를 주께서 잘라버리는 거예요. 우리는 목 없는 처녀가 되어서 구원받는 겁니다.
잘려나간 거기에, 잘려나간 이 모가지위에 주님이 접합해서 구원받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말로만 주의 이름, 주의 이름 밤새도록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내 이름으로 사는 센터, 모든 사고방식을, “나 어떡하지? 나 어떡하지?”하는 이 모든 사고방식을 댕강, 오늘 제목을 ‘댕강’으로 할까, 댕강 잘라버리고 거기다가 “니 몸 아니야, 내 몸이야. 니 인생 아니야. 내 인생이야.”라고 접합, 접목을 시키는 방식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성령께서 왔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해요. 지난 낮 설교 하면서 아직도 기억나는 게 있는데, 에베소서 5장을 언급했잖아요. 14절,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일어나보니까 내가 있던 자리가 그게 죽음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이 기억납니까?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내가 안 깨어났으면 지금 죽은 자들과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를 뻔 했어요. 자, 그걸 어디서 깨우는가, 외부에서 깨우죠. 그러나 이게 수평이 돼버리면, 수평에 서있는 내가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내게 속한 것은 무조건 정다운 곳이고, 저쪽은 전부다 지옥 가는 곳으로 그렇게 생각하더라 이 말이죠. 모든 교회,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그러니까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평면적으로 분류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는 첫 열매고 나 아닌 것은 전부다 지옥 갈 열매다.” 이렇게 생각하면 쉬운데, 성경은 그렇지 않고 모든 인간은 전부다 지옥가야 되고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는 세리가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복음 5장 8절에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고기를 많이 잡히게 하니까 “신났다. 좋은 분 만났다.” 이게 아니라, 주여 뭐 하소서? 떠나소서. 왜? 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주여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게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이, 마땅히 자기 자신의 본성을 아는 자들이 해야 될 고백이 이 고백이에요. 우리는 염소로 태어났어요. 그래서 염소는 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염소에서 양으로 올 때는 누가 개입이 되어야 해요? 아까 개입된다고 했죠? 하나님의 언약. 언약은 어디에 있다? 하나님의 언약궤 위에 있는 누구 이름?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은 어떤 식으로, 어떤 식으로 이미 시범을 보였습니까? 누구를 만났습니까? 아브라함을 만났고 이삭을 만났고 야곱을 만났죠.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고, 없는 이삭을 태어나게 하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시는 그 동일한 작업, 그 동일한 원리원칙이 이제는 누구한테? 언약을 통해서 우리 성도에게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면 하나님의 이름이 벌이시는 이 언약적 작용에 의해서 항상 염소이어야만 하는 이게 당연한데, 뭐로 바꾸어주었습니까? 양이 되게 했죠. 이때 양은 “나는 양이다.” 이러지 않고 나는 누구의 것이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하죠.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첫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나는 농부가 아니고 나는 어떤 분이 지어놓은 농사의 수확물이다.” 수확물이 되는 겁니다.
참 길게도 왔죠. 이 이야기를 하는데. 이제 구약에서 첫 열매를 맺는데 축제가 뭐냐 하면 바로 유월절이에요. 그 다음에 나온 절기가 맥추절. 맥추절은 밀농사. 세 번째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라 여러 가지 과실이 나오니까 과실수는 수장절. 수장절이 초막절이거든요. 7월 10일 이후 일주일동안을 말합니다. 그럼 7월 10일이 무슨 날이냐 하면 이게 대속죄일이에요.
대속죄일에 대해서 제가 울산강의에서 했습니다. 대속죄일 지나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쭉 이어지는 것이 초막절, 텐트 치니까 텐트 치는 절기에요. 이게 뭐냐 하면 대속죄일은 단체로 그들의 모든 죄를 씻는 날이에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해봅시다. 죄가 뭐냐, 죄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르는 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자기가 바닥에 있어도 마땅하다는 것을 모르고, 내가 염소인 것을 모르는 것이 죄에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 죄에요.
이것을 로마서 14장 끝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믿지 않고 하는 일이 죄가 되는 겁니다. 23절,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모든 일이 전부다 주께서 벌이신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우리는 한 발짝도 걸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주님께서, 머리카락도 주님의 허락 없이는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고. 걷는 것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내 선택, 내 결정이 아닙니다. 주님의 선택이고 주님의 결정이었습니다.
제가 가락강의에서 얼마 전에 했기 때문에 기억이 나는데, 우리의 하루의 삶이 결정 또 결정, 선택 또 선택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자, 설거지하고 그 다음에 뭐하지? 열시부터 뭐하지? 누구한테 전화를 걸까? 또 선택했잖아요. 동사무소에 갈까? 또 선택했잖아요. 모든 게 선택과 선택, 결정과 결정. 그리고 집에 들어오면 그 모든 것이 기억이 되고, 기억의 기억이 기억창고에 쌓이게 되는 겁니다.
서양에서 애들 선물 줄 때, 탁 열면 음악소리가 나오는 것이 있죠. 멜로디상자라고 하죠. 우리 모든 인간 속에 그 기억의 상자가 있어요. 그 기억의 상자에 뭐가 들어가느냐, 창고인데, 결정 내 결정, 선택 내 선택이 들어가죠. 가락강의에서는 여기에다 하나 더 넣었죠. 한잔 또 한잔을 마시면 취하는 것은 마찬가지지. 한잔 또 한잔을 넣었는데, 그 가사제목이 멋져요. 남자들이 술 먹을 때 한잔 먹고 나중에 술 많이 먹게 되면 또 한잔을 마셔도 취하는 것은 마찬가지죠.
결정하고 또 결정하고 선택하고 또 선택하게 되면, 나중에는 선택할 게 없고 결정할 게 없으면 사람이 사는 것 같지도 않아요. 그걸 멍 때린다고 하죠. 멍~ 오늘 내가 뭐하지? 오늘 내가 뭘 결정해야 되지? 다음 달 괌에 놀러가는 것 할까? 항상 결정할 게 없으면 놀러갈 것 생각하고, 친구 만날 생각하고, 일 저지를 생각하고, 또 펀드 얼마 올랐는지 한번 들여다볼까? 하고.
뭐든지 평생을 선택, 선택, 결정, 결정을 해온 거예요. 결정하다보니까 이 결정한 결과물이 궁금하죠. 내 선택이 옳았는가가 궁금하죠. 궁금한 그것이 멜로디상자 같은 내 기억창고에 들어가면, 이걸 두자로 자아라고 합니다. 자아를 한자로 줄이면 ‘나’가 돼요. 그런데 이 선택 결과가 안 좋을 때는 화딱지 나서 어떻게 합니까? 나를 죽입니다. 죽이는 방법이 몇 가지가 되는데, 알려드릴게요. 이건 꼭 알 필요가 없는데요.
자아를 죽이는 방법, 한 세 가지만 할게요. 첫째는 화풀이. 남편이나 누구한테 하는 화풀이. 강아지도 괜찮아요. 고양이도 쥐어 패버리고 갖다 차버리고. “이게 성질나는데 어디 내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어!”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술이라든지 도박이나 화투. 세 번째 극단적인 것이 뭐냐, 자살이에요.
세 가지를 보면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자아를 쉽게 잊겠다는 겁니다. 화났을 때 화풀이하고 나이트가고 이런 것 있잖아요. 젊은 애들 나이트 가고. 여자들은 쇼핑가고. 돈도 없는데 갑자기 카드 막 긁어서 드라마에 보면 쇼핑백을 몇 개를 들고 있는 것 보잖아요. 남자들은 술. 만사를 잊고 싶다. 이것도 저것도 안 되니까 술 또는 마약. 도박. 도박은 남자들이 많이 해요. 프로야구, 프로축구, 게임하는 거죠. 애들이 게임하는 것 전부다 이겁니다. 여자들도 보니까 맨날 스마트 폰으로 테트리스 게임 많이 하대요. 그 시간에 성경이나 많이 볼 것이지. 세 번째는 자살.
그게 결국에는 뭡니까? 자기인생을, 자기를, 자기의 첫 열매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수요설교에서 인생은 무의미한데, 만약에 구태여 의미를 두라면 뭐라고 했습니까? 자식이라고 했죠. 자식.
10분 쉽시다.
■안양20171208b약1장18절(첫 열매)-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에서 아까 ‘첫 열매’ 할 때, 이야기가 약간 어렵긴 하지만, 결국은 첫 열매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모든 게 염소니까.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가 성도로서 주님께 온전히 감사가 돼요. 만약에 내가 병이 있어서 아프니까 낫게 해달라고 해버리면, 병을 낫고 싶었는데 낫게 해버리면 누가 부정이 안 되느냐 하면 ‘역시 나는 잘났어.’가 계속 지속되는 겁니다. 이러면 첫 열매가 아닙니다.
자, 첫 열매가 뭐냐 하면은요, 내가 쭉 가다가 내가 천당 가는 것이 첫 열매가 아니고, 이게 끊어져야 돼요. 이게 끊어져서 나 자체가 없어야 돼요. 이걸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이에요. 자기 십자가가 끝이에요. 그 다음에 주께 따라가는 것은 성령이 와야 따라가는데, 그 따라가는 모습이 질질 끌려가는 모습이에요. 나의 그 허접함, 나만 챙기는 그 이기주의, 그 적나라한 내 모습을 폭로시키면서, 참 부끄럽죠. 주님 생각한다고 해놓고 나만 생각하니까. 하지만 그게 첫 열매의 모습이에요. 첫 열매.
왜냐하면 첫 열매는 자기 자신을 보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나 같은 인간을 다 건지시다니!”라고, 나와 함께 계신 주님의 고마움을 드높일 때만 이게 첫 열매가 돼요. 그럴 때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중첩이라는 말을 써요. 중첩. 중첩이라는 말은 겹친다. 이래 되잖아요. 아브라함과 아브람이 중첩이 되고, 사라와 사래가 중첩이 된 거예요. 라헬과 레아가 중첩이 됐고, 야곱과 이스라엘이 중첩이 된 겁니다. 제일 중첩이 확실한 것은 야곱과 이스라엘이 중첩된 거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고, 야곱은 야곱이죠.
근데 야곱이 까불다가 누굴 만납니까? 하나님의 사자를 얍복강에서 만나죠. 죽죠. 야곱을 죽여 버립니다.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 이제부터는 이스라엘로 살아라.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의 것으로 살아라. 주님의 것으로 살아라. 주님의 것으로. 요한복음 1장 51절에 나오는 이스라엘이 예수님이에요.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리라. 인자 위에.
그러니까 뭐냐 하면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 것인데, 온전히 주님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말도 안 되는 우리 죄인덩어리를, 염소덩어리를 같이 데리고 다니면서 주님의 것으로 간주해주시는 거예요. 인정해주는 거예요. 우리는 죄 지은 것 밖에 없는데 주님의 것으로 간주해주시는 거예요. 그럴 때 내 대표 이름이 나 아무개가 아니고, 누가 대표이름이 되느냐 하면 주의 이름이 대표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까 첫째 시간에 했던 주의 이름이라는 것은, 덜렁 이름만 붙이는 것이 아니라고 했죠. 주의 이름은 이름만 붙이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뭐가 나온다고 했어요? 활동이 나오죠. 주의 이름은 그냥 니 알아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영원토록 주께서 우리를 주물럭주물럭 하면서 관여하십니다.
발걸음을 세시고 주위의 일가친척 모든 변화가, 그 모든 변화가 다 복음을 위해서 일어난 변화에요. 누가 아프고 자전거 타다가 엎어지고 치과의사 하다가 뭐 이러고....., 그게 다 복음이, 언약의 일이 이 세상에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들이에요. 그 답을 아는 사람은 성도고, 저들은 무식해서 그걸 모르니까 아는 쪽에서 그냥 이야기를 할 뿐이에요. 그 다음 결과에 대해서는 주의 일이기 때문에, 나도 그 이야기에 대해서 입을 떼는 것도 주의 일이기 때문에, 내가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 뭐 그런 것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인생에 책임지지 마세요. 책임지지 마세요. 안양에서 하다가 어떻게 된다, 그걸 우리들이 책임지지 마세요. 지금껏 해오게 하셨으니까. 어떤 일을 계속 생각한다는 그것도 주께서 집어넣어주셨기 때문에. 모든 매사에 뒤돌아보면서 주의 일로 봐야 됩니다. 아까 이야기한 멜로디상자가 있다면, 그걸 제가 자아라고 했잖아요. 자아. 자아가 나오는 것을 우리는 내 이름의 명예를 걸고 내 이름을 거기다 붙입니다.
근데 이것과 똑같이 주의 이름이 있다면 누가 있겠어요? 주님의 자아가 있겠죠. 주님의 기억창고가 있겠죠. 주님의 기억창고에서는 우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치 아니하리라. 우리의 모든 죄를 기억치 않아요. 다만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만 있는 겁니다. 제가 가락강의에서 한 것을 잠시 여기서 한번 해볼게요. 너무나 중요한 건데, 여러분 사랑은 혼자 합니까? 둘이 합니까?
사랑은 반드시 혼자는 못해요. 이 말은 혼자 살지 마세요. 이게 현대인들의 특징입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에 대해서 이건 상식이니까, 상식적으로 알아놓으세요. 1차 대전, 1914년 이전에는 계급사회였어요. 한번 귀족은 영원한 귀족이었어요. 근데 1차 대전 이후에 2차 대전 하면서 계급사회가 깨어져버렸어요. 계급사회가 깨지면서 무슨 사회로 되느냐 하면 대중사회로 바뀌어버려요. 대중사회. 하나하나가 하나의 입자 같아요. 입자.
입자 알죠? 하나하나 각자 있는 것. 다 깨진 것. 이것은 가족이라는 개념도 없어요. 큰딸이고 뭐고 전부다, 자식들이 어릴 때부터 그랬지만, 자의식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전부다 따로 놀아요. 그냥 경제적 효용성 때문에 그때 붙어있었지, 진짜 입자 같은 존재거든요. 입자 같은 존재에서는 뭘 사람들이 생각하느냐 하면 자꾸 망상 같은 것을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공허감, 혼자 사니까 쓸쓸하죠. 그걸 적막감이라고 하죠. 적막감. 대중사회에서 위험한 게 공허한 적막감이기 때문에, 어설픈 공동체를 찾게 되어 있어요. 어설픈 공동체. 단 자신의 위신을 알아주는 공동체. 그러니까 이 사회에서 뭐가 사라졌습니까? 혼자 사는 방법에 대해서 그만큼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발달하게 돼요. 그걸 혼술, 또는 혼밥이라고 하죠. 혼자 사는 것. 혼자 살면서 무엇을 거론합니까? 이걸 거론해요. 사랑. 이건 말도 안 돼요. 자기를 위한 것은 사랑이 아니고, 이건 욕심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가락강의에서 할 때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뭐가 있다고 했어요? 미움이죠.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두 얼굴이에요. 하나님의 두 얼굴.마지막에 만나는 얼굴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긍휼과 자비로 나타나는 얼굴이냐, 아니면 니 죽었다고 하는 미움의 얼굴인가. 결국 모든 인간은 두 개의 노선가운데, 두 레일 가운데 이미 그 레일을 탔어요. 레일 위를 지금 달리고 있습니다.
사랑과 미움이라는 것은, 결국은 마감의 상황이에요. 마감의 상황.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할까? 마감의 상황. 그냥 첫 열매로 하자. 마감은, “내가 혼자서 이렇게 훌륭했습니다. 철저했습니다.” 이게 아니라, “니 누굴 사랑했느냐? 니 누굴 미워했느냐?” 결국은 주님의 얼굴을 볼 때, 우리는 주께서 묻기 전에 딱 보면 알아요.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서 볼 것이고, 보면서 우리는 뭘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가 옛날 길을 생각하죠. “아, 주께서 억지로 이곳까지 끌로 오셨군요. 사랑이 사랑답게 되도록 이끌어주셨군요. 감사합니다.”가 나오고. 미움은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지옥 가는 부자처럼 이를 갈며 통곡하죠. “내가 이러려고 인생 살았나? 내가 여기 오려고 내 인생 이렇게 살았나? 여기 오려고?”
그러면 성도의 세상보기 시선은 어느 쪽이냐 하면, 이 마감의 자리에 서서 거꾸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돼요. 이 마감의 자리에 서서. 오늘 본문이 첫 열매인데,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은 이제 곧 뭘 해야 됩니까? 추수를 할 때가 되죠. 추수. 추수 직전에 대속죄일이 있다고 했죠. 죄 용서하고 잘라버립니다. 추수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거예요. 코스가.
주님께서 씨를 심었고, 주님께서 자라게 하셨고, 주님께서 거두시고,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심으신 자도 하나님이요 거두는 자도 하나님이요 키우는 자도 하나님이요. 거기의 사도들은 하나의 일꾼에 불과한 거고요. 사도바울이 말을 할 때 그냥 대충 이야기하는 법이 없어요.
그냥 확실하게 이야기해요. 세상의 모든 것은 생각지 마라. 세상의 모든 것은 너희 것이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세상에! 어디서 그런 추상적인, 높은 곳을 날아다니는 독수리 같이, 독수리 같은 그런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도록 하는 그런 책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느 책에 그런 것이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너희의 것이고, 너희를 위해서 일어날 핵개발이고, 전부다, 트럼프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하는 것도 너희를 위함이고, 세상의 모든 변화가. 그리고 너희는 누구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천기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세상을 내려다보며 살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걸 믿느냐 이 말입니다.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은 주께서 열매가 되게 하셨고, 그것도 주께서 거둡니다. 야고보서 1장 18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그가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하나님이 자기 뜻을 위해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출생시켰다 이 말이죠. 이걸 항상 뒤돌아보면서 확인해야 돼요.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서.
그 자국, 어제 여기 눈이 좀 많이 왔습니까? 좀 왔어요? 눈이 오면 반드시 남는 것이 있어요. 그거는 발자국이에요. 눈이 막 내리고, 날 잡아봐라~ 하면서 뛰어다니고, 막 눈싸움하고 이러잖아요. 러브스토리 영화에서. 그 눈밭을 뒹굴고 나서 보게 되면 반드시 그 자국이 남잖아요. 그 자국이. 그 자국이 우리의 세상사 같으면 나의 자국인데,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의 뜻의 발자국이고, 주의 뜻을 두자로 하면 진리라고 하는 겁니다. 또는 진리의 말씀으로.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야고보서를 보고 있으면서, 실제로 나의 일기장을 보고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성경을 봐야 해요.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내가 미처 알지 못한 진짜 내 모습은 이 성경책에 있는 겁니다. 내가 잘났다가 아닙니다. 내가 훌륭하다가 아닙니다. 나는 성공했다가 아닙니다. 뭐냐 하면 주께서 말도 안 되는 나를 이런 식으로, 지금도 부지런히 이 기준에 의해서, 이 목표대로 되게 하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미하셔야 된다는 겁니다.
이 한마디 하고 그 다음 진도 나가봅시다. 자, 다시 정리해봅시다. 시내산이 있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올라가라고 해놓고, 모세에게 뭘 줬습니까? 모세는 이미 영적사람이죠. 산 밑은 육이고요. 육은 우상숭배를 한다. 우상의 특징은 뭐냐, 자기를 위하여 신을 자기가 선택한 겁니다. 이름도 멋있게 여호와라고 해놓고요. 이 여호와하고 진짜 여호와하고 완전히 달라요.
이 진짜 여호와에게서 언약을 가져오죠. 언약을 가지고 오는 모세와 대동하고 함께 하신 분이 있었어요. 다른 사람 눈에는 모세만 보이지만, 모세에게 일을 시키는 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언약을 가지고 들고 들어온다. 근데 이 들어오는 원칙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했던 그 원칙 그대로를 적용하는 겁니다.
아까 그 원칙을 설명 안 했는데, 그 원칙을 잠깐 설명하게 되면 뭐냐 하면 죽임, 희생제물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 방법에서 나옵니다. 자, 죄를 의로 어떻게 바꾸느냐, 죄는 죄기 때문에 죄가 아무리 행해봐야 죄입니다. 아무리 바자회 해봐야 바자회한 죄인으로 돌아와요. 그럼 반드시 뭘 이야기해야 하느냐 하면 중보자를 이야기해줘야 해요. 중보자를. 나는 안 되는데 중보자가 되게 하셨다.
그 막달라 마리아가 향수를 깨트려 울면서 예수님의 발을 씻길 때, 옆에서 되게 욕 한 사람이 있었어요. 누굽니까? 예수님을 점심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들이 그 막달라 마리아 행동을 보고 굉장히 욕을 했습니다. 욕을 한 이유가 있어요. 이 동네에서 저 여자가 얼마나 더러운 여자인지를 이미 다 아는데, 소위 선지자라는 예수 당신만 왜 모르느냐 이 말이죠.
구약 율법에 보면 더러운 사람이 만지는 것은 다 더러워요. 그렇게 더러운 직업을 가지고 있는 여자가 예수님의 발을 울면서 씻기니까 그 더러움이 다 들러붙잖아요. 거룩한 주님이라고 하면서 그걸 어떻게 용납을 하느냐 이 말이죠. “저리가! 더러운 것! 내가 니 때문에 지옥 가겠다.”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존재를 보지 말고 과정을 보라 이 말이죠. 과정을. 저 여인이 왜 우는지, 누구 때문에 고마워서 우는지, 뭣에 감사해서 그렇게 아끼는 향수를 깨트리는지, 그 과정을 보게 되면 죄를 많이 용서받은 자가 나를 많이 사랑하는 겁니다. 아까 마감이 뭐라고 했습니까? 행함이 아니에요.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죠. 둘이 한다고 했죠. 상대방이 나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긴다면 그걸 끝.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았는지, 그걸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걸로 끝이에요.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도 않고 그걸로 끝이에요. 내가 잘 행세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다듬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마주오시는 분, “저벅저벅!”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할 때 그 분이 긍휼이냐, 아니면 진노하심이냐, 이걸로 인생은 끝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자, 지금 여기까지는 했고요. 그렇다면 진짜 첫 열매가 되었을 때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 세상을 보면서 살아가야 하느냐. 그럼 세상은 뭐냐 하면 예스Yes, 아니면 노No에요. 이거다 아니면 저거다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이 아니다. ~이다, ~아니다 라고 우리가 중간에 서서 판정을 내리면서 살아갑니다. 근데 이 판정을 내릴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나한테 유리한 쪽으로 내리니까, 햄릿에서 나오는 대사입니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아까 제가 우리가 문제를 먼저 던지면 안 된다고 했죠. 근데 인간은 이걸 던져요. “엄마 ~~하지 마!” 만약에 딸이 “엄마 거기가면 안 돼!”라고 했을 때는, 딸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자기가 사느냐 죽느냐 그 문제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문제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사느냐 죽느냐 그 문제가 아니고, 이 문제를 바꿔보겠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에요. 사느냐 죽느냐 이게 문제가 아니고,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에요.
이게 뭐냐 하면 사느냐가 앞에 나오죠. 제가 이걸 변경시켜서 죽느냐를 앞에 나오게 했습니다. 어서 이 세상을 떠나서 주와 합류할 것이냐, 말거냐의 싸움이에요. 이게 누구의 고백이냐 하면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죽느냐, 아니면 비겁하게 계속 살고자 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과감하게 이 나이에 세상을 청산할 것인가, 아니면 더럽게도 예수 버리고 링거 맞아가면서, 요양원에 가면서, 온갖 좋다는 보약을 다 먹어가면서 지저분하게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다른 말로 해서 나를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아직도 나를 지저분하게 붙잡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말입니다. 인생살이라는 게. 여기에서 더 파생되어 나오면 시장가서 이러는 거예요. “아줌마 이 파 얼마에요?” 좀 더 파생되게 되면 “아줌마 파 좀 더 주지.” 이렇게. 긴 연결고리를 쭉 따라가게 되면 이거 나와요. 평소에 하는 행세가 다 나옵니다. 화투 칠 때 “좀 알려주지.” 이런 것. 이게 결국 소급해보면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니가 죽든 말든 나는 살아야 되겠다. 젊은 애들 남이야 죽든 말든 자자기만 살면 그만이죠.
근데 성도는 어떤 자세냐 하면, ~이다/~아니다의 관계가 아니라 비관계라고 해요. 비-관계. 이 비관계라고 하는 것은 이 사람하고 저 사람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비-관계에 대해서 제가 가락강의에서 예를 든 게 있어요. 가락강의 두 번째 시간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어떤 목사님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비행기가 날아간다고 할 때 어떻게 되겠어요? 비행기 소리에 묻혀서 우리 둘이 이야기하는 것이 하나도 안 들리는 거예요. 이게 바로 비관계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잘났다.” “아니야. 내가 잘났다.” “동탄이다.” “동탄 아니다.” 둘이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비행기가 휑하고 지나가면, “우리가 방금 뭐라고 했지?” 우리 소리가 다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나부터 살아야 돼!” “아니 나부터 살아야 돼!” 라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주님의 피 앞에서, “의미 없다. 아이고, 의미 없다. 의미 없어!”하고 큰소리치고 가버리면 우리는 그 속에서 멀쓱하게 되는 거예요. 이 비관계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 앞에서 우리가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제가 얼마 전에 했던 고린도후서 11장의 대목을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23절에서 27절.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말은, 내가 그렇게 했지만 그게 무슨 관계냐, 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 같은 경우에는 이랬으면 환장합니다. “이러려고 내가 사도가 됐습니까?”라고 반항할 거예요. 근데 이게 뭐냐 하면 니 은혜가 족하다는 거예요. 니 은혜가 족하다. 비행기 소리 앞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앞에서, 죄인 된 것을 건져놨는데 이 앞에서 무슨 구시렁구시렁 딴 소리가 나오느냐 이 말이죠. 예수님이 피를 줬다는 것은 다 준 걸 말하거든요.
제가 아주 오래전에 성도의 칼럼에 쓴 글인데 복사를 해서 가져왔습니다. 이거는 설명이 필요한 글이라 한번 읽어드리고 질문을 던지면서 이해해 나갑시다.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왜 "피!"라고 말 못할까? 이것은 무엇을 패러디한 거냐하면 파리의 여인에서 “저 남자가 내 사람이다. 저 남자가 내 애인이다 왜 말을 못하냐?”고 박신양이 김정은에게 했던 대사를 패러디한 거예요.
왜 피 대신 '개혁주의'를 말하나? 왜 피 대신 '괜찮은 교회'를 내세우나? 왜 피 대신 '언약신학'을 말하나? 왜 피 대신 '구속사'를 말하나? 왜 피 대신 '가난하고 소외된 자의 친구다'는 소리를 하는가? 왜 피 대신 '회개'를 말하나? “저 회개했습니다.”라는 것을 왜 말하느냐는 겁니다. 왜 피를 말해야 할 자리에 회개를 말하느냐 겁니다.
왜 피 대신 삼위일체를 내세우나? 왜 피 대신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말하나? 왜 피 대신 '복음'이란 말로 대체하나? 복음이 너무 모호해요. 기쁜 소식이니까. 뭐가 기쁜 소식이에요? 돈 벌면 기쁜 소식이 돼요? 건강하면? 왜 피 대신, 예정론이나 주권론 주장하나? 무엇이 덮여 씌어서 피로부터 얼굴을 돌리려는가? 지금 마귀한테 씌어서 그렇겠죠. 미숙함인가 아니면 본심인가? 본심이죠.
정말 성령 없는 자의 본심이 이것이다! 입이 안 떨어진다. 인간으로서 딴 것은 다 흉내 낼 수 있지만 '피'에 모든 것을 거는 짓은 차마 못한다. 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준 것은, 이제부터 니가 모든 것을 나한테 줘야 될 타이밍이거든요. 주께서 모든 것을 했으니까. 일부를 위해서 한 게 아니고 너의 모든 것을 덮쳐버린 거예요.
덮쳤으면 덮쳐진 그대로 우리는 피 안에서 헤엄치고 살고 놀아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사방을 둘러봐도 피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이 깔끔한 그릇도 주의 피의 공로로. 건강한 내 다리도 피의 공로로. 모든 것을 전부다 피의 공로와 희생으로 살아왔다면, 우리가 증거 할 것은 뭐 밖에 없습니까? 주님의 희생덕분입니다. 피 덕분입니다. 이렇게 할 것 밖에 없다 이 말이죠.
피에 전부를 걸지 않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법은 없다. 왜? 천국은 그런 세계니까. 예수님만 높이는 세계고 나를 부인하는 세계니까. 정말 천국 간다면 주님께서 피만으로 이야기할 때 그 취지를 우리가 알아들어야 되겠죠. 마지막으로,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피만 쏟아 놓았기 때문이다. 피만 쏟아 놓았기 때문에.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게 비-관계에요. 자, 두 사람이 이야기할 때 이걸 관계라고 하죠. 무관계는 뭐냐, 둘 다 몰랐을 때는 무관계입니다. 근데 비-관계는 뭐냐, ~이다/~아니다를 초월해서, 인간들끼리 관계를 맺기 전에 이미 주어진, 이미 확정된 관계. 이 관계를 우리가 떨쳐버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떨쳐버려요.
동방박사가 무엇에 끌려서 예수님을 찾아왔죠? ①번 당나귀. ②번 이웃집 아줌마. ③번 스승님. ④번 별. 몇 번입니까? 별이죠. 자, 스승 같으면 안 간다고 할 수 있어요. 당나귀 같으면 쫓아낼 수 있어요. 이웃집 아줌마 같으면 안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별은 어떻게 치웁니까? 별은 못 치우죠. 별은 너무 덩치가 크고 너무 멀리 있으니까 인간은 손을 못 대죠.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 보면 그 별이 성도 마음속에 떴잖아, 라고 이야기해요. 19절,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동방박사를 인도하던 그 별이 지금 여러분 마음속에 계시는 성령을 이야기해요. 성령이 여러분 마음속에 떴으니까, 여러분들은 별을 좌지우지 못하듯이 여러분을 강제로 이끄시는 성령을 여러분 손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나쁜 짓하고 희한한 짓을 해도 성령을 어떻게 조절할 수가 없습니다.
또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8절부터 20절에 보면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에 빈들에 목동들이 양을 치고 있었죠. 그때 그들이 본 게 있어요. 갑자기 조명시설 쫙 깔리고 환해지면서 천사가 한둘이 아닙니다. 하늘나라 성가대 천사들이 총동원한 것 같아요. 천사들이 노래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그리고 난 뒤에 잠시 노랫소리 들려주고 보여주고 사라지고, 그 다음에 뭐냐 하면 후딱 가서 너희들은 강보에 누인 아기를 보라 이 말이죠. 베들레헴에 가서. 그래서 그들이 가서 보니까 과연 아기예수가 있죠.
그렇다면 그 목자의 안목으로는,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목자의 입장에서는 아기예수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기예수와 찾아왔던 그 천사들의 찬양소리와 연계시키겠습니까? 안 시키겠습니까? 연계시키겠죠. 그게 바로 성도 아닙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존재로만 그치면 안 돼요. 지금 이 순간도,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도, 앞으로 내일까지 산다면 내일 살 것도, 하늘이 뜻입니다. 이걸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늘의 뜻’이라는 것은 누구나 말할 수 있습니다. 공자, 맹자도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 맹자는 이 소리를 못합니다. 피. 모든 것이 주의 피 입니다. 피언약이라는 말을 못해요. 이 피라고 하는 것은 희생을 의미하는데, 이 희생은 반드시 상대방에게 뭘 유발시키느냐 하면, 우리를 의인에서 죄인으로 바꾸게 하는 거예요.
수요일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하나님은 죄를 찾아오는데, 우리는 건방떨면서 우리가 알아서 하늘나라 어디에 계셔도 찾아간다고 했어요. 이게 안 맞아요. 따라서 우리가 구원되려면 우리는 어느 자리에 가야 된다? 죄인의 자리에 가야 돼요. 절대로 내 뜻이 아닙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우리 뜻이 아닙니다. 그거는 핫도그에 흙이 묻은 것처럼 다 털어내야 해요. ‘아, 천당 가는 것이 내 뜻이 아니구나.’ 이걸 절감해야 해요. 인생 살아가면서.
내가 원해서 내가 선택해버리면 이거는 내 뜻이지 주의 뜻이 아니에요. 그런 꼼수 같은 것은 지옥 갑니다. 그거는 소용없어요. 첫 열매는 확실해요. 첫 열매는 주님께서 씨를 뿌려서 열매는 누가 거둔다? 주께서 거두기 때문에 그 첫 열매는 이런 연결고리를 통해서,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뒤에 성령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자, 그런 사람 같으면 이 세상에서 화를 낸다? 안 낸다? 화를 안 내겠죠. 그게 야고보서 1장 19절에 나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참, 오늘 강의를 듣기는 속히 했어요? 20절, “사람의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 함이니라”
자,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아까 첫째시간에 많이 했기 때문에 줄여서 하겠습니다. 성을 내는 이유가 뭡니까? 묻는 내가 나빠요. 성을 내는 이유는 이것 때문에 그래요. 자아. 자아가 살아있는 정도가 아니고 자아를 포기를 못해서 그래요. 자아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위신과 체면과 명예가 나오는데, 이 세 개를 하나로 하면 자기정당성, 또는 자기의 라고 합니다. 자기의.
자, 한 예를 들겠습니다. 예를 들면 확실히 알 수가 있어요. 집에 갔는데 안 좋은 일이 있었다. 성납니까? 성 안 납니까? 성나죠. 자, 안 좋은 일을 누가 시켰습니까? 하나님께서 발생시켰는데, 보는 순간 내가 성이 났어요. 그렇다면 내가 자아가 있어서 성이 난 거예요? 아니면 없는 자아를 주께서 유발시키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주님께서 그 순간 우리로 하여금 없는 자아를 유발시킨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이미 성도는 뭐로 구원받았다고 했습니까? 피로 구원받았죠. 피는 백지수표입니다. 뭐든지 다 기록해도 상관없어요. 어떤 죄, 어떤 것도 다 돼요. 모든 걸 말소시킵니다. 어떤 걸 써도 지불이 가능해요. 체크카드가 이건 무한으로 된 체크카드에요. 그 어떤 것도 누가 값을 치른다? 주님께서 값을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물건을 백화점에서 덜 샀어. 아낀다고 안 샀어요. 안 사다가 나중에 성질나니까 ‘에이, 나도 성질대로 하자.’ 해버리면, 거기에서 이미 피는 다 지불했는데, 값을 다 지불했는데 어떤 것을 다 지불했는지를 아직도 우리가 몰라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상황을 만들어서 성질나게 만들 때, 그때 우리의 자아가 나오면서, 자아가 나오면 뭐가 나온다? 자기정당성 나오죠. ‘나는 정당했는데. 나는 성경공부 왔으니까 착한일 했는데.’ 착한일, 자기의 나왔어요. 착한일 하고 왔는데 왜 집안에 갑자기 일이 있느냐? 그게 뭐냐 하면 내가 행동을 바르게 하게 되면 적절한 보상도 주어진다는 것.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우리도 미처 몰랐던,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만들었던 요건을 아직도 내가 간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만큼 내가 어렵게 했으면 그만한 보상을 나에게 주셔야 우리 사이가 적당하게 통하는 사이가 아닙니까? 라고 버티는 그것. 결국은 자아를 느끼면 느낄수록 주님의 피 흘림의 그 깊이는 점점 더 많이 우리가 알게 되는 거예요. 그걸 우리가 못돼 처먹었다고 하는데, 성질날 때는 내야죠. 성질 안 내고 있다가 우울증 걸려서 자살한다고 하니까. 내더라도 못돼 처먹었다는 것은 누구 몫으로 돌려야 돼요? 우리 몫으로 반드시 돌려줘야 돼요.
착한 일 했는데 엉뚱하게 나쁜 일 했을 때 받는 벌을 왜 받느냐 이 말이죠. 집사님 제가 볼 때 도저히 나쁜 일을 한 걸 본적이 없어요. 근데 왜 이런 고생을 합니까? 너무나 착한데. 반듯하게 사는데. 오늘 제가 너무 붕 띄워서 풍선이 터지겠다. 이렇게 착한데, 이웃의 나쁜 놈들, 그런 놈들은 좀 안 망하고 나는 착한데 왜 힘들게 하느냐 말이죠. 갑자기 뭐가 날아가 버렸어요? 피 없는 인간은 뭐라고 했어요? 육의 인간. 그래서 제가 영과 육을 왔다 갔다 한다고 했죠. 이미 구원 받았기에 왔다 갔다 돌리는 거예요.
아까 처음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팽이를 돌려야 정말 피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죠. 우리는 맨날 팽팽 돌아가요. 팽이처럼. “주여, 이렇게 착한데 복 안 주면 정말 섭섭합니다.” 또 이런 게 있어요. “내가 이렇게 착한데, 왜 이런 나쁜 일을 시킵니까?”라는 것이 있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모든 일이 너의 착함을 증거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주의 의를 위해서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이다.”라고 하시죠. 그래서 우리는 고맙고 감사해야 해요. 모든 범사에.
이런 상황 속에서 저는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묻지를 말고, ‘아, 또 내 생각을 했구나. 평소에 잠재적으로 꾸준히 내 생각만 했다는 것을 몰랐군요.’ 다시 한 번 그걸 들추어내면서 그것을 사랑의 마지막에 피로, 마지막에는 주님의 피 밖에 없어요. “이 피다.” 니 모든 죄는 이 피로 날아갔다는 것을 마지막 사랑의 증표로써 만나거든요. 그 피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같이 교회 다니는데 피가 없는 사람, 이게 안 맞는 사람은 ‘아, 더 열심히 하라는 말인가 보다. 그때 십일조만 했는데, 아, 십의 이조해야지. 기도를 두 시간 했는데 세 시간 하라고 하는구나. 하루에 시간 없다고 성경 두 장 읽었는데 석 장 읽으라고 하는구나. 앞으로는 반상회 꼭 참석하고 물건 하나 살 것도 두 개 사야지.’ 그래서 마귀가 끝까지 너 자신을 포기하지 말라고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떤 남자가수가 부른 노래가 있어요. 닭고기 아줌마인데, 그걸 풀이하면 다 포기하지 마!에요. 이걸 빨리 부르면 닭 고기 아줌 마~♬ 이러거든요. 다 포기하지 마! 계속해서 마귀가 우리에게 이런 용기를 북돋우어줍니다. 마귀가. 하면 된다. 긍정적 사고방식. 우리교회는 부흥될 수 있다. 여러분들이 조금만 도와주면 우리교회는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 영원히 가난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여러분들이 힘쓰면, 인사만 잘해도 여러분 가정이 부자 될 수 있습니다. 이번 이사 가는 문제, 이럴수록 헌금 더하고 기도 더하고 성경 더 보시면 응답받아서, 이리로 가거라! 하고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느 자리에 가도 주님께서 증거 하는 것은 다 이루었다는 것, 십자가 피 외에는 아무것도 증거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의 피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벌이는 사건들입니다. 자, 다시이야기 합니다. 왜 사람들은 성냅니까? 자아 때문에. 그 자아가 왜 성내죠? 어떤 은근한 보상을 기대했었는데, 사람은 노골적으로 보상을 기대하지 않아요. 그런데 항상 일이 안 되게 되면 그때 보상에 대해서 나와요. “내가 이런 것 받으려고 이렇게 고생했습니까?”라는. “나는 보상 같은 것 전혀 몰라요.”라고 했는데, 막상 자기 뜻대로, 예상대로 안 될 때는, “기껏 나한테 주는 보상이 이게 다야?” 이 말이죠. “평생 이렇게 살았는데”라는 생각이 문득 들죠.
그러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갖고 놀아요. 신앙의 선조들을 갖고 놀 듯이, 똑같은 원칙으로 우리를 갖고 놉니다. 그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하지만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자라는 것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갖고 놀죠. 성령께서. 자아는 자기보상을 요구하고 자기보상은 명예와 위신과 체면의 자기정당성이 나오고.
자, 여기서 조금만 더 나가겠습니다. 자아가 성을 내게 되면, 성을 느낀다는 것은 뭘 느끼는가 하면, 우리가 저주를 느낀다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이 저주받는 게 아니죠. 내가 저주받죠. ‘내가 저주받으면 안 되지.’라고 하는 것은 이미 벌써 피 안에 우리 저주가 다 담겨있음에도 불구하고, 다 끝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마귀가 또 장난질을 해가지고, ‘그래, 나 망하면 안 돼. 나 우사당하면 안 돼. 내가 얼마나 고귀한데, 귀한 존재인데.’ 이래 된다고요. 마귀가 아주 좋아서 어쩔 줄 모르죠. 또 한 인간 갖고 논다고.
그러면 내가 저주받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이 모든 탓을 바깥으로 방출시킵니다. 그럼 누구 탓이냐? 남 탓으로 돌려요. 남 탓. 남 탓으로. 왜? 자기는 잘났으니까. 욥기에 보면 욥이 처음에 반항했던 이유가 뭡니까? 주님이 주신 벌을 안 받겠다는 것이 아니고 이게 너무 심하다는 거예요. 자식 열 명 다 죽고, 재산 다 날아가고, 그것도 몸이나 건강하면 감사할 텐데, 온몸이 아픈데 감사가 나오겠어요? 자연적으로 원망이 나올 수밖에 없죠.
그것을 남 탓으로 돌릴 때, 자, 남 탓이거든요. 생각해보세요. 이 남이 있다는 것이 과연 남일까요? 그 남 배후에 누가 있을까요? 하나님 계시고 우리 주님 계십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 결국 누구 탓으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욕되게 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육이 있는 우리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만, 성령께서 불신자와 똑같은 우리를 결국 관심을 어디로 돌리게 하느냐 하면, “자, 피!” 하고 돌릴 때, 그 순간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해서 회개하면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가 나오죠. 아시겠죠?
그래서 이 성내지 말라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돌이키게 하는 겁니다. 계속해서 봅시다. 21절, “그러므로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여기서 ‘심긴 도’가 ‘십자가 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이렇게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자신에게 담게 하셨습니다. 성내지 않을 정도로 우리가 자아를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는 팽이처럼 돌게 하여 주옵소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일어날 일인 것을, 감사함으로 고마움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