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40711a히11장24절(하나님의 이벤트)-이 근호 목사
오늘은 63페이지. <뒤에서 본 한국교회> 63페이지에 <2.출애굽기와 한국교회> 이 대목 하겠습니다. 출애굽이라는 것은 이벤트지요. 이건 사람이 일으킨 이벤트가 아니고 하나님이 일으킨 이벤트입니다. 그 일상생활이 지루하다, 심심하다, 할 때 사람들은 자꾸 행사를 벌리고 싶어 해요.
예를 들면 집안 식구의 남편이 60이 됐다. 또는 71가 됐다. 이럴 경우에 본인은 고수합니다.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요새 60은 청춘인데 60은 됐고 70이면 몰라. 또 70되면 “하, 좀 그런 것 좀 하지 마라~ 그냥 미역국이나 한 그릇 먹으면 됐지. 아이구.” 식구들이 가만있지를 않아요. 왜? 식구들은 행사가 있어야 사는 보람이 있어요. 본인은 가만히 있는데 식구들이 아주 신났어. 엄마! 전화 몇 군데 할까? 뭐 이런 거. 다들 오는 사람들 그냥 뭐 어떻게 하고, 식사는 어떻게 하고, 어느 호텔을 빌릴까, 어느 호텔을 빌렸다가 나중에 일방통행 브레이크를 안 밟고 해가지고 죽는 수가 있어요. 호텔 빌려서 해볼까, 들떠가지고 난리라.
인간들이 행사를 벌리는 이유는 이렇게 그동안 없어져가는 닳아져가는 사는 의미,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북돋아주기 위해서 계속해서 행사를 하는 겁니다. 나라에서도 축제 같은 것을 벌리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나 이 행사는 사람들이 일반 사람들의 행사는 사람들이 만들기 때문에 예상되는 기쁨이 있어요.
그런데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고 예상도 못한 이 출애굽 이벤트는 어떤 히브리 종족을 애굽의 강력한 통치력을 강제로 그것을 제키고 그 안에서 물품들, 자기 제물들을 몽땅 끌고 국가라는 권위의 방어선을 뚫고 새로운 국가가 졸지에 며칠 사이에 다 만들어진다는 이 엄청난 이벤트, 이건 화산의 마그마가 한 순간에 분출하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이벤트지요.
저는 그래서 이걸 출애굽이란, ‘역사의 숨겨진 뒤쪽의 이면이 융기 되는 것.’ 인간의 현실 면을 뚫고 융기 되는 것. 원래 인간의 몸은 피부로 있잖아요. 피부가 있어가지고 그럴싸하게 이쁘게 되어있잖아요. 피부 밑에 병균하고 싸워가지고 요통이 생긴다. 어떻게 됩니까? 피부를 뚫고 종기가 난다든지 입술이 부르튼다든지 터져버리지요. 이게 뭡니까? 숨겨져 있는 내부가 흉물스럽게 외부로 뚫고 나와 버리지요. 그러니 이 말은 인간이 평평하게 골라낸 권력으로 평평하게 만든 역사에 인간이 손 댈 수 없는 역사의 뒤쪽에 어두운 힘과의 투쟁이 역사 속으로 토해 내는 거예요. 마그마 화산 터지면 마그마가 그 구토물을 확 토해놓듯이 마그마를 토해 놓듯이 확 토해놔 버리는 거예요.
이러한 토해놓는 이 작업은 히브리인들이 기대한 게 아니에요. 그들이 희망한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출애굽이라 하는 것은 한 번 적어보면, 인간의 기대, 어느 누구의 기대나 희망과 무관하다. 아, 요거 중요합니다. 희망과 기대와 무관합니다.
구약에서 볼 때 이걸 출애굽을 구원이라 하지요. 구원 또는 구출. 하나님의 이벤트로서의 구원, 구출은 내가 나의 희망과 기대와 무관합니다. 나의 기대와 희망과 무관해요. 구원 받고자 해서 구원받는 것은 백프로 전부 다 가짜입니다. 전부 다 가짜에요. 요 글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66페이지 중간에 나옵니다.
너무 중요해서 여기다가 문장을 다시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66페이지 중간에, ‘그가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또한 가질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믿음을 가졌다.’ 가질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믿음을 가졌다. 누가? 모세가요.
그 근거는 히브리서11장24절에서 26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요 대목입니다.
그러면 믿음을 가질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믿음을 갖게 된 거예요. 요게 굉장히 중요하고요, 늘 우리가 이걸 명심해야 될 이야기인데 왜 이게 중요한가 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인간들이 하나님과 더불어서 생각하고 있는 이벤트.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기대는 “저에게 잘해주셨으니 고맙게 여깁니다.” 이게 인간의 믿음의 한계에요. “저에게 잘해주셨으니 참 고맙게 하나님께 고맙습니다. 찬양합니다.” 이거에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데요, 왜냐하면 이게 바로 구원받지 못하는 그 한계선에 요 모습이 다 들어있어요. 구원받지 못한 한계선에. 요걸 하나의 그림으로 그리면 삽화로 하면 선이 있는데 이쪽은 천국입니다.
모세는 믿음을 가질 이유가 없는데
갖게 되었다.
천국
지옥
믿음을 가질 이유가 없는데 믿음을 가졌다.
오골 오골~~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이여!
~~오골 오골.
(첨부파일:그림참조)
천국이 있고, 여기에 사람들이 올챙이 모양으로 오골오골 여기에 다 있어요. 넘어가지를 못하고. 넘어가지를 못하면서 이들이 하는 건 뭐냐 하면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이여!” 이게 인간들이 이성적으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이거에요.
이것 구원됐습니까? 구원 안 됐습니까? 지금 구원 안 된 거예요. 이게 구원 안 된 근거가 어디 나옵니까? 믿음을 가질 이유가 없는데 믿음을 가졌다. 모세는 믿음을 가질 이유가 없는데 갖게 된 거예요.
뭐 고맙고 감사하고 이전에 그냥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서 한 것처럼 막 대들고 따지지요. 출애굽기 3장에 떨기나무에 자기는 양치고 있었어요. 양치고 있으면 주께서 이쯤 나타날 건데. 이런 시나리오를 안 쓴다니까요.
떨기나무가 많거든요. 떨기나무야! 오늘도 양치고 어제처럼 양치러 왔다. 양들아! 뜯어먹든지 말든지 하여튼 우리가 하고 다시 살쪄서 새끼나 많이 낳아라. 이렇게 했는데 그 떨기나무에서 스톱! 신발 벗어! 갑자기 떨기나무가 뭐가 붙었습니까? 뭐가 붙었어요? 불이 붙었지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모세에게 준 이벤트지요. 이 모세의 이벤트가 확대되는 겁니다. 그게 출애굽이라는 이벤트가 되겠지요.
하나님이 벌린 거예요. 모세는 말려든 거예요. 요걸 가지고 저는 요렇게 이걸 제목으로 할까, 말까, 생각하는데. ‘오골 오골’ 오골오골 교회가면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봉사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오골오골거려요. 나에게 잘해줬다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셨다고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여기 오골오골하는 가운데서요, 머리가 희긋한 사람이 있지요. 최소 교회생활 60년 한 사람들입니다. 역사 이면에 융기 그런 거 없어요. 인생 살만큼 살았으니까 이제는 남은 과제, 천국합격! 합격하는 방법은 뭐냐, 십자가 죄사함에 대해서 감사하고 고맙고 영광돌리면 천국백성! 공식 간단히 나왔지요. 오골오골~~ 여기에 또 실감나게 프랭카드 한 번 적어볼까요.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켓 들고. 내가 갖고 싶은 거, 내가 소원 한 것을 들어주셔서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런 무리들이 오골오골이에요.
그러나 정작 구원받은 모세는 믿음을 가질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게 구원된 상태에요. 그만큼 인간은 어디에 몰입했느냐 하면, 과거로부터 이어주는 이 역사라는 역사를 계속해서 역사라는 직물 textile 텍스타일이지요. 직물을 지나온 선조들이 했던 역사 직물을 계속 평평하게 짜나가는데 모든 전력의 힘을 다했습니다.
우리가정, 우리가문, 그게 더 많아지면 우리 국가, 민족, 종족, 조상의 그 했던 그것을 인수인계 받아서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 인수인계 해주기 위해서 열심히 우리 것을 내 것을 키워나가고 지켜나가는 것. 거기에 모든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다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릴 때 부엌이나 새집 같으면 장판 밑에 거실 공사할 때 제일 바닥에 고운 시멘트에다가 고운 모래에다가 시멘트 섞어가지고 흙손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판판하게 깔끔하게 평면을 유지하지요. 이게 바로 역사 속을 살아가는 인간이 자기 역사를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평평하게 만들어요. 어떤 티 없이. 후대가 왔을 때 참 깔끔하다 하는 그런 평을 듣도록.
그런데 그게 찢어지고 그 뒷면이 융기가 괴물이 솟구쳐 오를 줄은 생각도 못했지요. 사람들이 역사를 평평하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그 위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사는 이유가 가치가 거기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그것을 내 발다닥 쪽에서 쪼개지면서 뭔가 튀어나와서 이 역사를 찢어버린다는 말은 나의 그동안 모아놓았던 내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왕창 다 찢어놓는 거예요.
“어? 나 바로의 공주의 아들인데!” “공주의 아들같은 소리하고 있네.” 찢어놔버려요. “나는 이제 남은 80되어서 평생을 그냥 조용스럽게 양이나 치고 살랍니다.” 이게 모세의 소망이었어요. 누구 마음대로요? 떨기나무에 와가지고 “가자” “어디로요?” “애굽으로 너를 보내겠다.” 그러니까 이 출애굽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구원 이벤트. 하나님의 구원 이벤트에요.
구원 이벤트 때문에 역사라는 많은 인간들은 하나의 존재도 안돼요. 하나의 점이에요. 점. Point. 하나의 점같은 존재에요. 점같은 존재. 아무 의미도 없어요. 왜냐하면 주인공이 아니니까. 인간은 각자의 나름대로 역사속에 살면서 의미를 수집해서, 의미 수집이 뭘 낳느냐 하면, 주체성을 낳아요. 아이덴티티, 나의 주관성을 낳는다고요. 나의 주체성.
내가 이렇다는 것은 내가 과거에 이런 의미있는 일을 해서 그걸 종합하면 지금의 나가 되는 거예요. 지금의 나. 지금의 나가 되는데 이런 의미를 쪼개버리니까 하나의 점이 되니까 그 히브리인들은 각 개인의 주체성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개인의 주체성이 없어요. 개인의 주체성이 없다는 말은 내 이름이 무색하다. 아무 색깔이 없다. 교도소 가거나 아니면 군에 가서도 “어이! 군번 3230번!” “충성!” 군번, 또는 교도소의 죄수 번호.
내 고유의 나라는 것은 이미 역사가 찢어지면서 같이 다 날아가버렸어요. 고유한 나. 옛날부터 줄곧 있어왔던 나는 없어져요. 그것을 출애굽기12장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이걸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공간, 새로 시작 하자. 새로 시작한다. 시간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시간. 공간은 나중에 들어갈 약속의 땅. 약속의 땅은 하나님을 섬기는 그 장소 약속의 땅이지요.
역사가 뒤집어졌으니까 역사속에 있던 모든 것도 역사 이면에 의해서 몽땅 다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유월절사건이지요. 모든 인간은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냐, 모든 인간은 죽었다는 내용을 담지한다. 이 담지라는 말은 어려운 말인데, 담는 것. 그걸 자기 안에 내용물로 운반하는 것.
히브리인들에서 이스라엘로 바뀔 때, 히브리인, 이때는 나라가 없어요. 히브리인들이에요. 히브리인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 이스라엘로 바뀔 때에 뭐가 들어가느냐 모든 인간은 다 죽었다. 죽었다는 내용을 담지하고 그걸 품고, 품어서 다른 말로 하면 내포해서 새롭게 등장한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
이럴 때 모든 인간은 죽었다를 경유하면서 이걸 가지고 뭐냐, 구원이고, 구출입니다. 구원, 구출이 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살아있다에서 뭐로 벗어난다? 모든 인간들에게서 살아있다에서 빠져나와서 보니까 모든 인간은 죽었네! 이게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창세기19장 소돔과 고모라에 살던 그 롯이 빠져나와 보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다 죽었지요. 다 죽은 거예요. 죽었나, 살았나, 궁금해서 뒤돌아보다 그 롯의 부인도 죽었지요.
인간은 다 죽어야 되는데 왜 이 이스라엘은 살아있나? 이게 하나님의 이벤트에요. 하나님의 출애굽 이벤트를 이벤트의 취지를 함께 있을 경우에만 그 조건하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더불어 주의 이름과 동행하는 살아있는 이스라엘 국가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살아있는 그 안에 주님이 살아계시다. 그리 되지요. 그럼 구원이란 뭐냐, 내 안에 주님이 살아있는 걸 구원이라 하는 겁니다. 그럼 너는 뭐냐? 너는 죽고요. 베드로 이름이 뭐냐, 시몬이지요. 시몬인데 마태복음16장에서 교회가 죽음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그런 새로운 교회가 등장하면서 시몬이름이 뭐로 바뀝니까? 시몬이름이 베드로로 바뀌지요. 베드로 이름은 시몬 이름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이에요. 주님의 기능이 포함된 이름이에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다.
그런데 그 반석되는 시몬이 뭐했느냐, 바로 악마의 앞잡이 노릇했잖아요. 그 위에 악마의 앞잡이 위에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워버린 거예요. 그래야 인간이 예상하거나 기대한 인간이 예상하고 기대하는 “내 혹시 구원될 줄 모르잖아. 내 죽으면 천당가야지.” 라는 모든 기대를 좌절 분질러 버리고 그걸 좌절시켜 버리는 그 기능이 교회 안에 계속 있어야 되겠지요.
그래서 “목사님, 교회생활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면서 주께서 이벤트가 여전하거든요. 아직도 식지 않았어요. 주님의 이벤트가 내 삶속에서 너는 이미 모든 인간은 죽었고 너는 내가 살아있다는 조건하에 그 껍질로서 내포된 내용의 껍질로서 모든 인간을 죽여버렸다는 하나님의 기능을 하신 일을 그 일을 내용으로 해서 하는 껍질로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껍질로서.
“엄마, 공무원시험 또 떨어졌어.” “괜찮아. 괜찮아.” “엄마, 도대체 몇 년동안 해야 돼?” “몇 년 할 것도 없어. 사람은 40년 지나면 다 죽게 되어있어.” “아빠도 50년 지나면 죽게 되어있어. 아빠가 50년 너무 심하다. 40년. 나 죽고 난 뒤에 니가 까불던 놀던 나는 모르겠어. 인간은 결국 죽는 거야.”
그러면 이스라엘로 하여금 출애굽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약속의 땅까지 이르게 하시는 데요, 약속을 이루어가는데 그 하면서 뭘 만나게 하느냐 하면, 내 안의 세계와 내 밖의 세계에서 내 밖의 세계가 더 크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인간들은 덩치는 작아요. 키가 170에다가 여자 같으면 160에다가 몸무게가 53, 55. 해당사항 없어요? 그럼 60넘어갈까요. 키160에 몸무게 65정도. 그렇게 덩치가 작은데도 불구하고 이상한 생각을 갖고 있어요. 뭐냐 하면, 내 밖의 세계가 아무리 크고 넓어도 내 안의 세계가 더 소중하게 느껴져요. 인간은.
정치? 나 모르겠고. 경제? 나 모르겠고, 내 새끼하고 잘살면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내 안의 세계 이게 전부에요. 인간의 전부는 바깥에서 키우는 게 아니고 내 안에 키워요. 내 안에서 자라나고 있어요. 나의 세계는.
그러니까 내 안의 세계가 크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르던, 부처를 믿던, 예수를 믿든 간에 무슨 용도가 뭡니까. 내 안을 키워달라고 할 거잖아요. 그런데 그건 모든 인간이 다 마찬가지에요. 아까 오골 오골~~ 했잖아요. 제 소원을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죽어서 천국가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골오골~~.
제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너무나 사랑이 많고 너무나 자비를 베풀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그런 거. 그게 바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고백이지요. 오골오골!!
시편의 내용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편의 내용. 찬양하라. 너희를 구원해주신 분께 찬양하라. 찬양하지 뭐. 왜냐, 우리가 평소에 했던 일이 그거예요. 나한테 잘해주면 누구든 고맙게 여기는 그 마음은 우리는 한결같아요. 변화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시도하고자 은근히 시도하고자 하는 본인 구원 이벤트, 종교 이벤트지요. 상조회사 상담만 해도 냄비 줍니다. 전기스토브도 줘요. 내 장래까지 계산해서 이렇게 편리 봐주는 것도 고마운데 거기다 선물까지 안겨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상담만 받으세요. 그게 기업이지요. 기업의 판촉이잖아요.
어제 우리동네에서 차로 20분 떨어진 아양교에 금호강이 흘러요. 금호강이 얼마나 물이 많이 불었느냐, 도대체 돼지는 몇 마리 떠내려가고 냉장고는 몇 개 떠내려가느냐 그거 떠내려갔다는 뜻이 아니고요. 행여 떠내려가나 싶어 오래간만에 비 구경한다고 가가지고 비 구경보다 더 재미있는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적어왔습니다. 개척교회 비슷한 교회인데 이게 있었습니다. ‘결신 기도문’이 쇼윈도우처럼 바깥에 다 보이도록 한 거예요. 2층은 본당이고 아래층은 카페처럼 해가지고 교회 이름은 온누리사랑교회. 순복음교단. 결신의 기도문은 이리 되어있어요. “하나님 아버지, 저는 죄인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여러분, 좋아할 게 아니에요. 이게 뭐가 문제인지 질문할 거예요.) 지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음으로 기도합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제 죄를 정결하게 씻어주옵소서. 저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셔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자, 이 결신 기도문, 뭐가 문제지요? 삼위일체 처음 만들어졌을 때에 사람들이 온 교인을 온 백성을 신자되기 위해서 그 당시 교회가 삼위일체 교리를 만들어가지고 온 백성들에게 외우도록 했습니다. 다니는 사람은 세례를 줘가지고 신자되게 했습니다. 교회가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교회의 모든 진리가 어디에 들어있다? 삼위일체 교리안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 교리를 부정하면 이단되고, 교리를 인정하면 정통 천국가는 신자라고 고 문구안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자, 이런 결신 기도문, 신앙을 결심하는 기도문. 온누리사랑교회 했을 때에 이 기도문 보니까 문제 없어보이잖아요. 여러분, 신천지 신천지 하는데 신천지 책 한 번 본 적 있어요? 신천지 가르치는 거하고 기존교회하고 똑같이 가르치는데 뭐가 이단이에요? 순복음. 순두부 아닙니다. 순복음 가르침이 이리 있는데 이걸 기존교회가 순복음 교단 이단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내용 보면. 자기들하고 똑같은데.
어디가 문제입니까? 이게 무슨 이벤트지요? 교회 이벤트지요. 교회 이벤트에요. 결신 기도문은 이렇게 내는 게 아니에요. 성경대로 하면. 하나님 아버지 저는 죄인입니다. 따라서 지옥 가야 마땅합니다. 지옥 가야 마땅합니다. 지옥 가야 마땅한 존재. 구원은 우리 주님 소관입니다. 여기서 결신 기도문에서 내내 그 안 놓으려고 붙들고 있는 게 있을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저. 저는. 저의 죄를 정결케 씻어주시고. 주께서 하신 모든 것이 저를 집중해서 그 모든 영향력을 쏟아주옵소서, 에요.
그러면 주님의 존재하는 이유가 뭡니까? 나를 제거하는 용도에요? 나를 키우는 용도에요? 나를 키우게 하는 용도로서 결신 기도문이 작성됐던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사업하기 위한 컨셉이에요. 하나의 상품이 되는 거예요. 상품. 주님의 하신 일을 기억하니까 주께서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그 기억이 지금 나한테 효과를 발휘하게 하옵소서, 라고 요청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정말 우리 주님은 십자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을 뭐로 만들었습니까? 죄인으로 만들었지요. 죄인은 아무것도 요구하면 안돼요. 죄인은 요구하면 안돼요. 죄인 주제에 뭘 요구해요. 그냥 대기하고 있어. 쳐박혀 있어. 죄인이 왜 요구를 합니까?
마치 죄인이 요구하는 것이 뭐와 같으냐 하면 재판장에서 재판장이, 지금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어요. 판사님이 등장했습니다. 다 같이 일어납시다. 할 때, 죄수가 있다가, “아~~씨, 그냥 앉아합시다! 앉아. 요즘 다리 아파 죽겠는데 앉아서 합시다. 앉아서 그냥.” 검사 공소 하세요. “검사 좀 빨리 좀 하세요. 빨리. 아니 검사 경상도 사람이에요. 사투리가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이런 거. 법정의 주도권이 지금 누구한테 있습니까? 죄수 자신한테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속이 자기 바깥의 세계보다 더 소중하고 더 넓기 때문에. 자기는 평소에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은 나한테 유리하게 작동해야 된다고 우기기 때문에.
이런 결신이 신앙 결신. “OK. 믿어줄게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모세는 믿음을 가질 하등의 필요가 없다고 했지요. 믿음을 가질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주께서 이벤트가 거기에서 뛰어든 거예요.
그런데 이건 뭡니까? 지금 노림수를 갖고 있는 거예요. 노림수를. 그러니까 이게 결국 뭐냐 하면, 오골 오골. 천국은 가지를 못하고 천국을 가로막는 그 가로막에서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전부 다. 50년 60년 교회 다니면서 4대째, 3대째, 여기 4대째 신앙 가정 있어요? 평평한 역사의 지평을 생각하면서. 역사를 찢어버리는 게 아니고 이대로 이대로 4대째 이대로 가면 합격 될 확률이 높다는 거예요.
아, 누가 넣어주는데요? 이 주님의 이벤트가 벌어지지도 않았는데 들어가요? 아, 출애굽 사건이 없는데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자기의 존재가 찢어지지도 않았는데도 천국을 가요? 어제 금호강 홍수 찍으러 갔다가 이거 찍고 집에 왔어요.
주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시고 끄집어내신 것은 만남을 통해서 전에 없는 새로운 세계가 마련되면서 기존 것은 소멸됩니다. 새로운 세계 앞에 나중에 모세가 했잖아요. 시내산 올라갔다고. 그건 모세의 계획에 없었던 거예요.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내려와서 약속의 땅이라는 곳에 그냥 가면 되지 내가 시내산 화산 분화구 속에 들어간다? 그건 자기 계획에 없던 거예요. 모세는 뭘 경험했습니까?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신다를 도중에 경험케 한 거예요. 그럼 우리도 모세처럼 화산에 집어넣었다가 빠져나와야 되느냐, 인간이 화산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든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쓴 나의 일기장 그 뒤쪽으로 가는 것. 내가 쓴 일기장의 뒤 쪽. 오늘도 날씨는 맑음. 오늘 아빠가 유치원에 간다고 맛있는 과자를 주었다. 그 뒤편. 그 뒤쪽으로 가는 거예요. 그 뒤쪽에 가면 그 때 아빠는 바람둥이었고, 유치원에 가라고 나한테 초코렛을 줬다. 숨겨있던 역사의 뒤쪽으로 바라보는 거예요. 나는 그 아버지, 어머니의 죄인에서 태어났으며...,그래서 출애굽은 –1 → 0 → +1 로 가는 겁니다. +1. 그런데 출애굽은 이벤트인데.
인간은 이미 본인이 인생 자체가 자기가 이벤트 아닙니까. 그럼 어떻게 하느냐, +1를 0으로 만들고, 0을 –1로 만들고, -1에서 0을 만들고, 0에서 +1로 이리 가지요. 이렇게 들어가는 거죠.
+1 → 0
→ -1 → 0 → +1
오골오골~~
모든걸 비우고 하나님께
따르겠다.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0이 아니고
–1이에요.
(허무주의)
(하나님의 이벤트: 출애굽의 능력)
(첨부파일:그림참조)
내 인생 이만큼 잘살았다는 것. 내가 잘 살았으니까 모든 걸 비우고 하나님께 따르겠다. 요 0이 뭡니까? 오골 오골. 내가 이제 주님의 은혜를 알았으니 모든 걸 다 버리고 주께 귀의하겠나이다. 귀의. 내가 수녀가 되겠습니다. 내가 목사가 되겠습니다. 주께 한 몸 바치겠습니다. 요게 0, 제로에요. 이게 제로라고요. 이게 오골 오골이에요. 구원받을 리가 없지요. 이런 사람은. 0으로 대체된 +1이에요. +1이 죽음이 되는 게 아니고, +1이 형태를 바꾼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허무주의라 하지요. 허무주의. “그래, 인생 더러운 거야. 나는 하나님만 알고 살아야지. 하나님과 동행해야지. 모들 걸 버리고 주께만 따르겠나이다.” 이게 형태만 바뀐 나 자신을 그대로 살려 놓은 고상하게 보이고, 성스럽게 보이는 +1이에요. 자기는 아직까지 안 죽었어요.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1이에요. -, 마이너스. 0이 아니고 마이너스(-).
마이너스가 되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께 헌신한 그 자체도 뭐가 된다? 바로 그게 죄였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헌신하고, 목사되고, 주를 위해서 선교사하는 게 그게 바로 죄인에요. 죄. 헌신도 죄고, 기도도 죄고, 헌금도 죄고, 다 죄라는 사실. 여기에 들어오면 그 다음부터는 여기서는 뭐냐, 주님의 이벤트. 출애굽의 능력만 필요한 거예요. 다른 것은 필요치 않아요.
“니 화산에 들어갈래?” “집어넣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그냥 타죽던지 마음대로 하세요.” 그걸 실제로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다. 다니엘3장25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네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왕이 봤는데 느브갓네살왕이 다니엘 세친구를 불에 집어넣었잖아요. 그냥 불이 아니에요. 성냥불 정도가 아니에요. 용광로에요. 포항제철의 용광로에 집어넣었다 말이에요.
그런데 뭐를 주목하느냐, 네 번째 사람을 주목하게 된 거예요. 뭐 속에서? 불 속에서. 죽음 속에서. 어떤 인간도 어비야~ 들어가면 죽어. 들어가면 죽는다는 그 세계 속에서 네 번째 하나님의 아들. 인자같은 분이 거기서 계셨던 겁니다. 불 속에서요.
이게 다니엘세친구 같은 경우에는 그 당시에 권력자들이 의도적으로 다니엘 세친구를 불 속에 집어넣었잖아요. 그게 애굽사람들이 히브리인들에게 애굽에서 나가라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너희들은 이 나라 떠나면 죽는다. 애굽나라 떠나면 죽어요. 살 수가 없어요. 그게 왜냐하면 뒤따라오는 군인들이 권력이 세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은 애굽의 권력안에 살았어요.
권력 밖에 나가면 곧 죽음이에요. “니 빨리 안 돌아와! 다시 애굽으로 안 돌아와!” “예” 하고 돌아와야 돼요. 그래야 살아요. 이게 길들여져 있어요. 그래서 광야에서 백성들이 조금만 생활에 어려움이나 불편이 있으면 어디로 가겠다는 말입니까?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Back to 애굽!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애굽에 있던 그 주체성을 아무리 하나님과 동행해도 인간들은 그걸 버린 적이 없어요. 히브리인들은.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버린 적이 없어요. 안 버립니다. 그래서 그 점을 생각해서 이렇게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출애굽이란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이란, 출애굽 같은 말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걸 구출이라고 합니다. 구원이란 인간이 미처 몰랐던 온갖 더러움을 역사 위에 토해놓는 이게 바로 주님의 이벤트입니다.
구원이란 기어이 감추어놓았던 모든 것이 바깥으로 다 토해놓는 것. 나의 본성, 내 안에 있던 본성이 옷을 뒤집어 입듯이 옷을 뒤집어 입듯이 안에 것이 바깥에 나오듯이 완전히 뒤집어내는 그 과정이 출애굽 과정입니다. 이게 구원받은 과정이에요.
그럼 구원의 옷은 바깥쪽이 매끄럽고 완성이잖아요. 완성된 것은 내부로 들어가고 미완성 된 것은 바깥으로 나오니까 나의 죄와 부족함과 연약함이 아주 신바람 이박사지요. 신이 나는 거죠. 아! 이런 게 들어있었구나! 이게 나의 한계구나! 이게 내 본 모습이었구나! 그것이 노출되는 흥겨움이 있습니다. 이게 주님이 주신 이벤트에요. 뭐 40일동안 밥 안 먹어도 괜찮고. 물 안 마셔도 괜찮아요. 율법의 완성, 하나님의 완성이 주는 그것을 성경을 이론으로 생각했는데 실제 삶으로 이미 구원받은 것을 체험케 하실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내가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의 혜택을 죄 용서함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내가 이렇게 만끽하며 살 줄은 상상도 못한 거예요. 얼마나 신나겠어요. 구원받은 기쁨이.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 활동 무대에 보면 보통 사람들은 모든 약점을 자기가 갖는 식인데.
예수님이 좋은 사람은 예수님 앞에 나올 때는 자기가 행실이 나쁜 여자든, 자기가 중풍병자가 되든, 12년 동안 혈우병을 앓았던 그게 주님 앞에서는 전혀 부끄러울 게 없고, 이제사 오셨습니까? 의사 선생님! 닥터. 반기면서 달려들지요. 반기면서. 아낌없이. 주츰주츰하지도 않아요. 원 없이 쏟아내고, 원 없이 울고. 그 행실 나쁜 여자는 모아놓은 향수를 주님 발 앞에 탁! 깨뜨리면서 뭐 하염없이 울지요.
왜 울겠어요? 저 네 번째 바리새인이 얼마나 나를 욕했다고. 너 다섯 번째 니도 마찬가지. 너 나보고 뭐라고 했어? 너 같은 거 인생 살지도 말라고 했잖아. 시몬이라는 선지자는 성령받은 선지자는 아기 예수 안고도요, 이제 종을 편안히 놓아주신다고 했어요. 이제. 이제 모든 인생 문제가 풀린 거예요.
자기 인생 문제에다가 주님의 이벤트, 내 이벤트로 살아왔던 인생이 주님의 이벤트가 거기다가 담길 때, 이제 종을 편안히 놓아주시는군요.
그래서 for ten minutes. 우리도 10분 동안 편안히 쉽시다.
안양20240711b히11장24절(하나님의 이벤트)-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출애굽이 하나님의 이벤트인데, 하나님의 행사에요. 행사. 이벤트. 돌발적인 행사. 그 누구도 예상 못했지요. 이렇게 돌발적으로 행사할 때에. 이것이 더 놀라운 사실은 이게 유인책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서 행사를 벌림으로서 인간들이 평소에 신에게 요구했던 것에 대해서 첫째는 감탄하고, 둘째는 기적을 요구하고.
히브리인들이 또는 이스라엘.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을 통해서 출애굽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유인책이니까. 평소에 자신이 경험하고 싶은 기적을 하나님 앞에 은근히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잘 사는 거예요. 이 땅에서 잘 사는 것. 그냥 행복하게 잘 사는 것.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우리 가족끼리.
이 기적을 요구하니까 능력있는 하나님으로서 감탄하고, 이게 홍해바다 건너왔을 때 감탄했잖아요. 찬양 막 했다 말이지요. 미디안이 선창해서 찬양하고 누가 우리 하나님을 이길까. 하나님은 우리 편이다. 그러면서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이러한 멋진 하나님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감사한다 했지요. 오골오골한다 했지요. 그런 하나님. 전지전능하고 모든 걸 이기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아쉬운 거, 필요한 거, 그동안 자기가 얻고 싶은 것을 기대하고 기적을 요구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의 더러운 속셈이 다 나타나요. 다 드러납니다. 인간의 속마음이 다 드러나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애굽사람하고 상대했지요. 애굽사람하고 상대하다가 그래서 출애굽에서 실제로 역사적으로 홍해 갈라짐. 장자가 죽음. 나중에는 그런 식으로 기적을 백성들이 요구하고 있으니까 주님께서는 이 인간이 원하는 기적 말고, 다른 기적을 그들에게 줍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69페이지 밑에서 2번째 줄에 나옵니다.
하지 못해서 할 능력이 없어서 자기 백성을 구출 못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백성이 참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를 원한다. 마음 문제에요. 마음을 알기를 원하는 거예요. 이점을 우리가 오늘날까지 의미를 쫙~ 당길 수 있는 구절이 바로 주일 낮에도 했습니다만, 바로 고린도전서2장 11절 말씀이에요.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아무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정, 하나님의 마음,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지금 어떤 기적을 베푸느냐 하면, 하나님만 알고 있는 마음을 자기 백성에게 이전시키는 기적을 최종기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걸 최종기적이라고 제가 단언할 수 있는 이유가 뭐냐, 바로 12절에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의 영을 받지 않았다는 이 말은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의견조정과 다른 사람의 마음 알아주기, 서로 마음 통하는 거, 그걸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 영을 받았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그동안 하나님께서 그냥 주신 것들에 비로소 눈이 뜨여져서 ‘아,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거, 저것도 하나님이 주신 거, 하나님께서 왜 주셨지?’ 라는 그런 마음에 자기 백성들이 합류하기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이 뭐냐, 그 마음은 직접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와서 몸으로 보여준 마음이 있어요. 그게 뭐냐, 9절에 보면 십자가에요. 십자가 사건. 온통 어리석어서 인간은 다 죽을 수 밖에 없어요.
어리석음 밖에 없는 이 인간세계에 인간의 어리석음의 한 아류가 아니라 어리석음의 한 일부가 아니라 유일하게 어리석지 않고 지혜로운 능력을 바로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죽으시는 그 죽으심에서만 그게 근거가 되도록 토대가 되도록 그렇게 한 겁니다. 신구라는 그 사람이 광고했지요. “니가 게맛을 알아?” “니가 내 마음을 알아? 내가 죽는 이 마음을 알아? 내가 너를 위해서 죽는 이 마음을 니가 그 마음을 니 속에 있냐? 이 말이야.” 하고 묻는 거예요. 지금.
성령을 통해서, 은혜를 주어서 예수님 죽는 마음이 우리 마음속까지 들어오게 되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바로 에스겔36장26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예레미야3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예레미야31장33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전에는 율법을 돌판에 새겼잖아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그 돌판을 누구를 사용하느냐 하면 성도의 마음을, 인간의 마음을 돌판으로 사용하여서 주의 마음을 거기다가 그대로 새겨 넣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뭐냐 하면 언약의 대상이 되어버리지요. 우리가 주님의 언약 백성이 되어버리지요. 언약 조항이 새겨져 있어야 언약의 백성이지 뭐 언약 조항도 없는데 무슨 언약 백성이 되겠어요. 그렇게 새겨져 있으니까 그걸 인간의 힘으로 예수를 믿어서 내가 백성 되어버리면 내 마음이 나오는데 내 마음을 제끼고 내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내 속에 주님의 돌판을 새겨놓으면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과 태도를 통해서 이건 말릴 새도 없이 주님의 언약이 우리를 통해서 발현되고 있는 거예요. 발산되고 있는 겁니다.
참, 세상에 이런 기적이 다 있어요. 자, 초반에 히브리인들이 바다가 갈라지니까 참 하나님 대단하다. 적들이 애굽의 군대가 홍해에 빠지니까 야~ 최고다! 이렇게 했지요. 그 때는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누가 장악하고 있습니까? 본인이 장악하고 있지요. 내 마음은.
본인이 장악하면서 참, 우리는 하나님께 잘해야 돼. 잘해 드려야 돼. 왜? 우리를 이렇게 애굽에서 구원해주셨으니 잘해줘야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막상 그들의 생활이 어렵고 삶의 환경이 위기에 왔을 때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뭐가 발산됐어요? 하나님 찬양이 아니고 원망이 터져 나왔지요.
따지고 보면 명쾌하게 말해서 주일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식량 없으면 짐승 됩니다. 아무리 점잖고 예의 바르고 나는 뭐 연약한 여자라서 나는 어릴 때부터 곱게만 자랐다. 니가 돈이 한 번 없어봐야, 아~~ 진짜 돈이 있는 게 바로 고운거구나! 깨닫게 되지요. 돈 없고 양식 떨어지게 되면 사람은 발작을 하게 되어있어요. 거의 미치는 순간입니다. 이게 진짜 내 모습인지가 나오게 되어있어요. 우리가 그런 것을 잘 모르는 이유가 집이 넉넉해서가 아니라 좀 물가 높아가고 수입이 적어지면 그냥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고쳐쓰고 절약하면 밥이나 먹고 살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빚이 100억 있다 생각해 보세요. 빚이 100억 있고 한국에서는 살 수가 없다 할 때 어디 프랑스 갑니까. 어디 도피해서 살아야 돼요? 그럴 경우 되게 되면 정신이라는 자체가 없어요. 그냥 돈만 준다면 어떤 짓이라도 마약 운반 말고 킬러 사람 대신 죽일 수 있어요. 우선 살고 봐야 되니까. 내 양식 사고 봐야 되니까. 우리가 아직까지 그정도까지 집안형편이 망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점잖은 척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집단적으로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원망하도록 유도했어요. 하나님의 이벤트가 인간을 유인하는 거예요. 인간 속의 더러운 것들을 점잖게 내뿜어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죽이는 그러한 격분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 또는 욕설, 저주를 퍼붓는 것. 마귀가 준비해 놓은 모든 것이 다 터져 나오도록 광야를 주께서는 그런 식으로 주께서는 40년동안 이끌었습니다.
광야를 40년 이끌었지요. 거기에 숫자 맞추어서 주님은 40일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평소에도 참고 있지만, 사실은 어려울 때는 터트릴 수 밖에 없는 인간이 마귀 편에 서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예수님은 악마와 만나서 세가지로 깔끔하게 정리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그걸 미리 보여준 겁니다. 미리 보여줬다는 것은 ‘아, 우리가 이렇게 죄인이구나!’ 안다고 해서 구원된다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아무리 알아도 구원 안 됩니다.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의 능력이 임해야 돼요. 주의 마음이 우리 마음앞에 있으면 안돼요. 그냥 쓱 우리 마음을 속까지 들어와 버려야 돼요. 우리 마음속까지. 말씀이 우리 마음 바깥에 머물면 소용없어요. 우리 마음속까지 들어와 버려야 돼요.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바로 광야에서 원망했던 그 인간으로 돌변합니다.
그런데 돌변하는데 슬퍼서 돌변하는 게 아니고 짜증나서 돌변하는 게 아니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변돼 있지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게 왜? 이건 내가 예상 못한 기적이 우리 안에서 터져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예상 못한 기적이.
다시 보면 처음에는 감탄했어요. 자기 주제파악이 안돼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이랑 동행할게요. 하나님 저 알지요. 제가 결심하면 제가 반드시 지키는 거 아시지요.” 이상한 소리 하고 있네. 자기 주제파악 안돼요. 그러고 난 뒤에 너무 하고 그 다음에 약간 어려움이 와요. 그 때 ‘아, 이 때를 위함이구나! 기도하자. 기도는 호흡이다. 기도를 멈추는 건 죽는 거나 마찬가지다. 기도하자.’ 내용은? 내용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까 우리 기도를 응답하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기도 응답을 해준다는 거예요.
여러분, 기도 응답이 하나님의 약속이 뭐냐,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그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수련회에 우리 수련회 말고 다른 수련회에 순서 중에 하나가 각자 나와서 간증 비슷한 거 돌아가면서 하면서 성경을 읽었으니까 누구를 본받고 싶어요? 저는 다윗을 본받고 싶어요. 용감한 다윗. 골리앗 나와! 한판 붙자. 나 돌린다. 슈웅~~ 맞았다. 나 다윗처럼 나는 기드온처럼 용감한 군사가 되겠어요. 나는 룻처럼 시어머니 잘 모시겠습니다. 수련회 아이들 좋은 평, 좋은 평가를 노리는 고백들을 하지요.
그러나 주께서 우리에게 응답하는 것은 사도행전 5장에 나옵니다. 아나리아와 삽비라. 헌금 반 숨겨놓고 하다가 사이좋게 죽어버린 것. 그리고 뭘 응답하느냐, 바리새인, 가룟유다, 나 당신을 저주합니다 했던 베드로, 이 말씀을 우리 속에 넣어주는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이 말씀. 기도를 할 때, 그 기도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우리가 기도해서 얻는 게 아니고 이미 주어진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바로 내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가룟유다 이런 존재와 동격이라는 사실을 아는 게 이게 기적이지요.
이런 주제파악이 그동안 안되어가지고 자꾸 찜찜한 거예요. 내가 요번에 일이 안되는 것은 기도를 적게 해서 그런가, 기도를 빡세게 더 해야 돼. 아직 자기 자신을 모르는 거예요. 자기가 천하의 죄인인 것을 모르고 자꾸 주님한테 뽑아낼 생각을 하는 거예요. 얻어낼 생각을 하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끝은 뭐냐, 모방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뭐든지 모방해요. 예수님 모방하고. 어떤 좌담 프로그램 제목이 이거에요. “왜 제2의 예수는 안 나타나는가?” 이게 제목이에요. 이런 취지를 좌담하는 취지는 짐작하겠지요. 종교가 썩었는데 예수님처럼 훌륭한 분 나타나가지고 싸그리 정화하고 진짜 기독교가 기독교다운 깨끗한 기독교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그런 취지로 제2의 예수는 왜 안나타나는가, 이리 하는 거예요.
여기에 대한 성경적 답변은 여러분이 잘 알지요.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마태복음2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소자라고 했는데 그냥 작은 자가 아니고 내 형제 중에서, 아무나가 아닙니다. 내 형제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뭐다?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내 형제에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실제로 사울이라 하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했을 때 나타나셔서 뭐라 했느냐 하면, “사울아, 사울아, 니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것은 예수님과 지금 사울이 잡아 죽이려는 그 성도와 주님이 지금 같이 한 식구가 되어있다. 같이 연결된 몸이에요. 몸으로 연결되어있다 말이지요. 이것 또한 기적아닙니까.
제2의 예수는 왜 안 나타나는가, 예수가 왜 없어요? 있어요. 제2의 예수 찾지 말고, 예수님의 형제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누구에게 한 것입니까? 예수님한테 한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한 분인데 예수님의 것은 지금 여럿이 되지요. 여럿. 다수가 돼요. 다수가. 많지요. 예수님의 소유된 백성들이 다수가 된다 말이에요. 따라서 이러한 제2의 예수는 왜 나타나지 않는가, 이건 뭐냐 하면 나를 두고 인간인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모방이지요. 그럼 제2의 모방에 의해서 나타난 제2의 예수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적그리스도라 해요. 적그리스도.
인간이 은근히 기대하는 거, 이래야 예수답지 않은가, 이런 거. 온유하고, 겸손하고, 배려하고,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거, 작다고 무시하지 않고, 가난하다고 얕보지 않고, 골고루 대자대비하면서 살려주는 거,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 죄용서받고 사랑을 베풀어주는 거, 딱 뭐예요? 딱 악마지요. 뭐. 적그리스도지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알아먹기 때문에. 알아보기 때문에. 인간은 모방 못해서 환장한 인간들에게 참으로 예수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한 자체가 예수가 가짜라는 생각은 못하고 본인이 가짜라는 것을 생각 못하고 이랬으면 좋겠다는 것. 그게 바로 적그리스도지요.
그러면 지극히 작은 자 이들은 어떻게 사는가, “내가 가짜입니다. 나는 내가 매일 모범인 것처럼 이런 내가 엉터리입니다.” 주님의 언약이 그 속에 침투하면 언약 자체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내부에서 일어나요. 외부에서 내가 요구한 기적이 아니고 내부에 이미 쓱 들어와버린 그 기적속에는 십자가 사건이 반복해서 이루어지면서 그 십자가사건에서 누가 예수님 편이고, 누가 예수님을 찔러죽인 자냐, 할 때 내가 바로 예수님을 찌른 자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있습니까? 왜? 십자가 사건이 매일같이 내 내부에서 반복되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하니까 막상 소자들이 뭐합니까? “제가 언제 했습니까?” “언제 제가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습니까?” “배고플 때 언제 줬습니까?” “내가 추울 때 언제 입혔습니까?”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하지요. 지극히 작은 자한테.
그러면 지극히 작은 자라 하는 것은 사실은 내가 지극히 작은 자니까 요거 이상 하면 예수님에게 해당되지. 이렇게 모방하는 게 아니고 결국은 뭡니까? 본인 자체가 예수님의 결과물이라는 사실. 말씀의 결과물로 자기를 인식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결과물로.
자, 여기서 우리는 출애굽을 보면서 어려운 주제에 우리가 드디어 접근해 갑니다. 어려운 주제. 그게 뭐냐 하면 40일동안 원망했던 그들은 지옥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모세한테 대들고 불뱀한테 물린 그들 지옥가느냐 하는 문제에요. 여러분, 그런 질문 안 생기던가요?
고린도전서10장7~13절입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지난 수련회가 갈라디아서했습니까. 했지요. 그 때 책이 나와있잖아요. 다른 복음을 가지고 무엇을 다른 복음이라고 했던가요? 다른 복음의 내용이 뭐였던가요? 거기에 보면 강조했고 여러분은 기억이 안 나지만, 다른 복음이란, 나를 구원하는 복음이 다른 복음이에요. 나를 구원하는 복음. 내가 구원의 주인공이 되는 복음. 구원이라는 활동의 주인공이 되는 복음. 성경을 해석할 때 내 구원 위주로 해석하는 것이 다른 복음이에요.
그러면 고린도전서10장에서 너희에게 경계가 되고 거울이 되고, 하면서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믿음직해서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감당하게 하신다. 할 때 거기 감당하는 주체가 인간입니까? 주님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의 자체 연극 무대지요.
하나님께서는 아까 그걸 장이라고 했는데요. 장. 필드. 영역.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사건이잖아요. 사건을 이스라엘 내부에 확산을 시켜 놔요. 확산을 시켜놓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이 자꾸 기적을 요구하는 거예요. 출애굽이 하나의 유인책이 되니까. 왜 기적을 원합니까? 본성이 우선 나부터 살아야 되니까. 사는 게 뭔데? 애굽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야 되니까. 애굽에서는 부추도 먹고, 수박도 먹고, 파도 먹었잖아요. 그런 거 먹어가지고 정력이 넘쳤다 말이지요.
그게 그들에게 산다의 모델이 되고, 기준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왜? 남을 모방하니까. 애굽사람이 사는 것처럼 우리가 살면 사는 것처럼 여겼던 거예요. 그들은 새로운 삶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어요. 죽는 과정이니까. 출애굽은 신약이 아니에요. 신약 아닙니다. 구약입니다. 신약 아직 안 됐어요. 산다는 게 뭔지. 아까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율법에 있는 그 마음이 그들 속에 안에 들어올 때 사는 거예요. 그걸 마음의 할례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육체의 할례 말고 마음의 할례. 하나님의 마음이 자기 안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런데 왜 그 출애굽 사건을 했느냐,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주의 마음을 끌었다가 내 마음속에 심어 넣을 그런 재주가 없어요. 그런 능력도 없고 그런 마음도 없고 그런 생각도 없어요. 이미 기본이 뭐냐 하면 그냥 애굽에 있던 채로 살래. 돈있고 양식있고 몸 건강하고 행복하고 나는 이리 살래. 이리 사는데 하나님 좀 도와주소! 하나님 좀 도와주세요. 이리 되는 거예요. 하나님 도와주소! 하면 또 해서 안 좋아질까봐 도와주세요~~~ 그게 오골오골이에요. 그게 인간의 한계에요. 그게. 교회가는 이유의 한계에요. 성경듣고 복음듣고 백날해도 그 한계에 머물러 있어요.
이거하면 내 생전에 도움될까 싶어요. 몸건강하고 가정 행복하고 여유돈 많이 풍성해서 수입 매일 생기고, 그게 산다는 거 그거 어디서 배웠어요? 모방으로 배웠지요. 누가? 다른 사람 사는 거 보고. 이방민족 사는 거 보고. 그런데 거기서 누가 사라지느냐 하면 예수님이 없어졌거든요. 없어진 분을 모방으로 살아야 될텐데 없어진 분은 안 찾고 현재있는 같은 또래의 인간들 보면서, ‘아, 나는 저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고 있다 말이지요.
주님은 빠져나왔잖아요. 주님은. 주님은 쏙 빠져나왔다고요.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그 분이 죽든 말든 자기는 그냥 고기 잡으러 가면 되니까. 평소대로 사는대로 환원되고 마는 거예요. 인간은. 베드로가 나는 목회해야지. 그런 거 없었어요. 그냥 고기잡는 거예요. 그냥. 목회는 주의 뜻이고 나는 내대로 사는 게 내 뜻이고. 우리 뜻대로 따로 삽시다. 이거지요.
그래서 우리 인간의 평소에 마음도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사시고 나는 내가 잘하는 식대로 내가 살래요. 냅둬요. 그냥 내 둬요. 살던 대로 내비 둬요. 어려울 때 기도할 때나 도와주소. 그 외에는 그냥 나 살던 대로 그냥 잔소리하지 마시고 내비러 둬요.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렇다면 이거는요, 구출은? 어디서 구출 됐지요? 구출된 적이 없어요. 애굽이 부러운데 어디 애굽에서 구출이 돼요? “아이고~ 혐오한다. 지긋지긋해. 나는 옛날 사는 식이 딱 질색이야. 두 번 다시 그런 짓은 안 살래.” 라고 외친다면 그러면 대안은? 그런 식대로 하면 뭐 할래요? 그냥 도포 입고 등나무 깎아서 줄기로 칡뿌리나 먹고 살까요? 그러면. 그럼 대안이 뭔데, 어떻게 사는 건데? 말씀으로 살 거야. 그럼 말씀 종이 찢어가지고 구겨서 물에 적셔가지고 이리 말씀으로 삽니까? 말씀 외울게. 말씀 외우면 결신 기도문이나 외우면 되겠네요. 결신 기도문. 사도신경 다 나와 있잖아요. 그거 막 외우면 사는 거예요?
실제로 그렇게 사는 시도한 사람들이 있어요. 독하지요. 정통 유대주의. 이스라엘 총리가 이제부터 너희들 다 군에 가. 예외 없어요. 법으로 정해버렸어요. 무조건 군에 가야 돼. 펭귄옷 다 벗고, 머리 깎고 수염 다깎고 군에 가야 돼요. 군복 입고. 십만명 데모를 했습니다. 우리는 군에 못 간다고. 그럼 너는 어떻게 살래. 우리는 말씀이나 공부하고 살래. 이게 쉐마 들으라, 하는 신명기에 나오는 말씀 5장에 나오는 말씀 그대로 옮길래. 그럼 우리도 유대인과 같이 합세해서 데모할까요. 그러면.
도대체 사는 게 뭡니까? 주님의 죽으심인데, 누구 손에 죽느냐, 바로 내 손에 의해서 죽으심이 이것이 생명의 장을 형성합니다. 나는 항상 죄인이고 예수님보고 “저리가 가주세요. 저리 나가세요. 나 싫어요.” 라고 하는 그러한 관계성이 계속해서 지속되면 될수록 그게 바로 생명이 되는 겁니다.
천국에는 생명의 면류관도 반납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아까 모델이 된다는 고린도전서에서 구약이 모델이 된다는 말은 구약 성경이 이제 취소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구약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 대목뿐만 아니고 광야생활 뿐만이 아니고 모든 대목이 이게 펄떡 펄떡 살아서 우리 내부에 신구약이 합해서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이 매일같이 해석이 벌어지는 상태, 그 상태를 말씀이 살았다, 그 말씀이 살았다를 생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안에 말씀이 사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안에 예수님이 벌린 이벤트, 또는 연극무대가 매일같이 우리 안에서 연극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주인공이고 나는 거기에 한 역할. 역할도 허장강 있잖아요. 나쁜 역할. 누굽니까? 여로에 나오는 못된 사람. 달중이. 시대가 달라서 모르는 모양이구나. 장욱진이 나오는 여로. <여로>옛날 드라마라서 모르지요. 시청률78% 나왔던 드라마. 그 사람이 진짜 맞았어요. 나쁜 역할해가지고. 동네 아줌마들한테. 그리고 실제로 일찍 죽었어요.
악한 역할에 흠뻑 젖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빌닷이 욥기8장 7절에 보면,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에 창대하리라, 이것은 욥이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욥의 친구 아무것도 모르는 빌닷이 이야기하지요. 그 빌닷이 이야기한 거 맞는데 그 빌닷이 나인데요. 우리는 뭐든지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에 창대하고 싶잖아요. 자영업할 때 나중에 꼬라박을까요. 손님 한 두명 오는데 할까요. 만약에 여러분들과 관계있는 사람이 목회한다면 개척교회해서 뭐합니까. 시작은 대단하나 나중에 꼬라박으리라, 이리 합니까. 반대로 이야기하지요. 반대로. 여기 축사하실 분. 개척교회 개업한 거 같아요. 축사하실 분. 그저 땅 사는 건 모르겠고 시작은 교인들 몇 명 안돼도 나중에 창대케 해주세요. 기도해주겠습니다. 창대하도록.
이러한 부정적인 요소를 주께서는 우리 속에 집어넣는다는 것은 우리안에 주님이 계속 살아 계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의 십자가를 주제로 한 연극무대에서 선배 배우로서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역할을. 지옥 간 게 아니고 역할을 하고 있는 거라니까요.
바리새인이고 사두개인이고 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성령으로 구원받습니다. 역할이야 뭐 아이 뭐 우리 출신 자체가 아담의 죄에서 나온 출신인데 뭐 나쁜 역할 따로 있나요. 전부다 나쁜역할인데요. 그래서 사도바울도 이방인의 사도라 하지만 자기 유대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지요. 똑같은 입장이니까요. 예수님 빼놓고 다 같은 똑같은 입장이에요. 예수님 빼놓고.
왜 이 말씀을 우리가 꼭 알아야 되느냐 하면, 저 사람은 나같은 신앙이 아니라고 해가지고 내가 어느새 나의 신앙에 표준이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해요. 농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리새인, 사두인 서기관들이 그 역할을 했고 그 역할을 우리가 지금 인수받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 구원 안돼요. 끝까지 성령이 함께해야 되고, 끝까지 주님이 함께 해야 돼요. 그리고 끝까지 계속해서 확인될 수 있는 것은 니마음하고 내마음하고 달랐다는 겁니다. 주의 마음, 마음의 할례를 받아라. 니마음하고 내 마음하고 다시 말해서 니가 성경해석하는 그 마음과 내가 성경해석하는 마음이 다르다.
나의 해석은 하나님 아버지의 해석은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거고, 니가 하는 마음은 그 덕이나 보자는 마음, 그 심보, 그 더러운 심보밖에 없는데 뭐 같을 리가 없지요. 힘들고 나쁜 것은 주님이 하이소. 편한 건 내가 할께요. 이런 식이지요.
40년, 그들이 홍해 건넜던 선배들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야기가 신명기 초반에 나오지요. 신명기 초반에 나오면서 모세가 이런 이야기합니다. 지금 이야기한 이것은 그 때 선배들하고 세운 언약이 아니고 지금 너희들 보고 세운 언약이다. 그것은 뭐냐 하면, 말씀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목표를 향하여.
자, 그러면 남은 시간동안 출애굽에 어떤 내용인가, 출애굽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이미 다 아시지만, 정리하는 입장에서 보겠습니다. 애굽은 역사의 나라에요. 역사. 평평한 역사. 평평한 역사가 홍해를 못 건너네요. 홍해를 못 건너요. 그러니까 역사는 어디에 갇혀있다? 자연의 조건에 갇혀있어요. 홍해를 못 건너니까. 애굽군대가 홍해를 못 건너고 다 빠져죽었어요.
그런데 홍해를 건너오게 된 것은 자연을 이긴 초자연이지요. 초자연적인 능력이 이 히브리인, 이스라엘을 살렸잖아요. 살렸으면 이게 홍해라 말이지요. 애굽에 있을 때 유월절 있었지요. 홍해에서 초자연이 기적이잖아요. 이 초자연 기적이 어린양을 잡는데 어떻게 이것이 이게 그 내용으로 합류돼있는가를 우리가 이제 이해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언약, 약속, 약속 빼놓고는 다 없앤다. 라는 원칙. 이게 출애굽의 1장부터는 모르고요, 뒷장에 시내산에 율법 받고 율법 알고, 1장부터 다시 보게 되면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을 구원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그들을 통해서 언약을 살리겠다는 것. 언약 위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히브리인들을 이용한 게 돼요.
그래서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은 뭡니까? 라고 물으니까 “나? 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나 언약의 하나님이야” 그들에게 언약을 줬던 하나님.
사람 아니고 뭡니까? 언약이지요. 사람 아니고 언약입니다. 그러니 “광야에서 멸망당한 사람 지옥갑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광야에서 죽은 사람은 언약 중에서 어떤 요소가 부각됩니까?” 하는 저주 요소가 부각 되는 거죠. 요거 이해 되시지요? 언약 가운데 복도 있고 저주도 있는데, 저주 요소가 부각되는 역할을 맡은 거예요.
인간은 언약을 만나지 않더라도 이미 지옥가게 되어있어요. 지옥가는 거 당연하기 때문에 지옥 갔습니까?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그냥 있어도 지옥가고, 가만히 있어도 지옥 가는 거예요. 다만 복을 받게 되면 지옥에 안 가고 천국으로 가는 겁니다. 따라서 천국은 뭡니까? 초자연적인 기적적인 요소가 투입되는 의에 경우에 한합니다. 의에 경우에 국한해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은 특이사항이에요. 특이한 거예요. 특이한 거. 참으로 특이한 거예요. 특이하다는 말은 인간이 그걸 간직하거나 보관할 수 없어요. 인간은 시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아까 고린도전서에서 시험을 감당하는 것은 주님의 역할 문제이지 개인이 자기 구원하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내가 행동을 어떻게 처신을 어떻게 하는 그 문제가 아니에요. 구약에서는 아까 간음하다가 죽었다 했잖아요.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뭐라고 합니까? 새로운 기적이 주어져요. 마음속으로 간음 품으면 간음이다. 이건 새로운 기적입니다. 어떤 기적? 모든 인간은 지옥 가야 마땅함을 알려주는 새로운 기적이 등장하지요.
그러니 평소에 우리가 진짜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성경을 해석하면 어디가 틀린 게 아니고 맞는 게 없어요. 모든 성경을 볼 때마다 맞는 게 없어요. 주의 일인데 자꾸만 본인이 나서려고 해요. 왜? 모방하는 재주가 있어가지고. 흉내내는 재주. 그걸 발휘 안하고서는 그걸 못 견뎌요. 뭐든지 해야 안심이 돼. 뭐든지 해야. 자기가 덜 구덩텅이에 안 빠질 것아. 이미 빠졌는데. 이미 빠져버렸는데.
초자연적인 역사가 유월절 어린양으로 개입됨으로서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은 홍해앞에 섰을 때 그들은 홍해 앞에서 누굴 원망했습니까. 모세를 원망한 것이 얼마나 큰 죄였습니까. 자기 주제파악이 안됐던 거예요.
홍해바다 건널 때 그들은 “야, 놀라운 기적이다. 어떻게 어린양의 피를 발랐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목숨이 건재하지.” 뭔가 착각해도 보통 착각한 게 아니에요. 그러면 이 초자연적인 것은 어디서 알아야 돼요? 드디어 그들로 하여금 시내산 밑에 잠시 중지시키고 모세가 위로 올라갑니다. 요거 1년 걸렸습니다. 요기까지. 시내산까지. 줄기차게 행진해가지고 시내산까지 온 거예요. 시내산에서 하나님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를 이제는 거기서 그들은 받습니다.
시내산 위가 화산이지요. 불붙는 화산. 불붙는 데서 소리가 났지요. 그게 뭐냐 하면 자연을 이용한 초자연. 자연 속에 인간 있으니까 초자연은 자연도 이기지만, 누구도 이긴다? 인간의 마음도 이기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나온 결론은 뭐냐, 인간은 자기 마음도 자기 마음대로 안된다. 라는 것을 우리는 출애굽에서 배워야 되는 거예요.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 바르게 섬기고 싶어도 안 된다. 구원받고 싶어도 안 된다. 모든 것은 무엇은 된다? 주님은 언약대로 된다. 그러면 됐지요. 주님의 언약이 감잡히면 된 거예요.
이 세상은 내 위주의 세계가 아니라 언약 위주의 세계를 우리 속까지 확대시키고 퍼트린 거예요. 언약 세계가. 언약 세계 속에가 주께서는 아주 친절하게도 구체적으로 돌판을 줬거든요. 돌판을. 출애굽기32장에. 돌판까지 줬어요. 그만큼 돌판줬다는 말은 실제로 물체로 줬다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은 말이라는 관념이나 추상적이고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실제로 이 역사를 통해서 사건을 남기고 이 인류의 역사를 친히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희들은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알아야 된다고 해서 알까요? 그 다음부터는 실습에 나섭니다. 출애굽기17장8절에 보면 아멜렉 군대가 옵니다. 여기에 조연까지. 진짜 언약이 없는 민족까지 조연이 등장해요.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와야 구원받는데 그 구원 위주에 언약이 없는 민족까지 보조출연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드라마 연극장에.
그러면 아말렉이 해야 될 것은 뭐냐, 죽여라! 이거 역할하는 거예요. 죽여라! 뭘 죽여라? 아말렉이 봐서는 뭐가 보입니까? 사람이 보이지요. 아무 힘도 없고 무기도 없고 매가리도 없는 이거 완전 밥이지요. 죽여라! 이게 세상사람들이 오늘날 성도를 보는 안목이지요.
이걸 이스라엘도 느끼게 하는 거예요. 언약이 없는 자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는가, 똑같지요. 뭐. 힘없는 자로 보겠지요. 그 실습을 시키는 거예요. 그 실습을 할 때 모세하고 여호수아장군하고 대비시킵니다. 여호수아 장군이 칼을 들고 설쳐봤자 모세가 든 지팡이가 오르락 내리락하는 걸로 어떻게 돼요? 모든 전쟁은 승패는 지팡이에서 결정짓잖아요.
이게 뭐냐, 초자연적인 것이 자연을 운용하는 거예요. 지배하고 있는 거예요. 더 나아가서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기상해서 숨쉬고 있는 모든 것은 뭐다? 초자연적인 체험에 기회의 장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언약을 모르는 사람한테는 뭐냐, 세자로 ‘미쳤다.’ ‘돌았다.’ 거기다가 네자까지 하면,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이런 꾸중이 들어와요.
그 꾸중을 아말렉이 왜 우리보고 하게 합니까? 그 꾸중 들으면 우리도 모험을 해야 되니까. ‘정신차려. 정신차려. 양식이 중요하지 돈이 중요하지 그 딴 거 안 중요하지. 정신 차려 인간아!’ 성경 공부할 때는 참석할 때는 그 생각했다가 다 잊어버려. 주님의 아주 충실한 말씀의 세계가 우리 안에 열립니다. 악한 역할하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앞에 언약 위주로 사는 이 세계에 들어와서 언약대로 온갖 역할을 다 해보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놀라운 기적인지를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