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40912a창15장10절(현상)-이 근호 목사
오늘은 72페이지 <레위기와 한국교회>. 레위기는 예언에 속하지요. 그런데 (한국)교회. 중간에 ( )를 없애버리면 나머지는 교회지요. 레위기는 구약에 해당되는 겁니다. 교회는 언제 등장하느냐 하면, 신약에 보면 등장해요. 구약은 예언이고 신약은 예언의 성취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언이 성취가 되어버리면 더 이상 예언이라 하는 것은 뭘로 바뀌느냐 하면 이게 현실로 바뀝니다. 현실로 바뀝니다. 한 가지 예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에게 세 명의 천사가 옵니다. 세 명의 천사. 한 분은 하나님이고, 두 분은 천사 이렇게 봐도 되는데. 세 명의 천사가 찾아오지요. 아브라함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언을 이야기합니다. 내년 이맘쯤에 니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내년 이 맘쯤에 아들을 낳을 것이다.
자, 예언한 그 시점에 아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들이 없지요. 예언한 그 시점에 아들이 없어요. 그런데 그 다음 해에 아들이 생깁니까? 안 생깁니까? 생기지요. 그러면 예언은 뭐가 바뀌었어요? 하나님의 예언은 현실로 바뀌지요. 현실로 바뀌면서 예언이 값을 한다. 예언이 값을 한다.
예언이 값을 한다면 여러분들은 아기 이름을 뭐라고 짓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성경에는 이삭인데, 여러분들이 만약에 아브라함이라면 사라라면 여러분들이 뭐라고 이름을 짓겠습니까?
그 이름에 긍정적 이름을 짓겠습니까? 자기 부정적인 이름을 짓겠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긍적적으로 짓겠지요. 축복, 은총, 한나, 은혜 보답 이리 하는데 이름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름이 이삭이에요. 이삭은 농담입니다. 농담. 왜냐하면 웃었다 이 말이지요.
언제적 이야기에요? 1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1년 전에 예언 앞에서의 인간의 자세, 인간의 태도가 여기 예언과 인간 사이에 단절되어 있는 상태에요. 단절되어 있는 상태가 뭐로 들어오는가, 이름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예언의 성취자는 인간일 수가 없지요. 이 예언의 성취에 대해서 우리는 하등 우리는 끼어들 수 없었다가 이름이 되어버린 거예요. 예수. 예수에 대해서는 그 당시 흔하고 흔한 이름이 예수에요. 구원자 예수아 또는 여호수아 이렇게 할 수 있는데. 그 마태복음1장21절에 보면 설명을 해놨어요. 설명을. 예수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을 해놨는데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리 되어있지요. 12자지요. 12자를 압축을 한 번 시켜 봤어요. 이게 뭐가 나와요? 예수가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안 나오지요. 예수 안 나오지요.
예수라는 자체는 그냥 구원자. 구원자라는 뜻이에요. 여호수아. 모세 그 다음에 여호수아. 그냥 여호수아 이름이 너무나 위대한 분이기 때문에 자식 낳을 때 여호수아라고 이름을 붙인다 말이지요. 그 여호수아는 구원자에요. 아무리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붙여도 여호수아 이미지 바깥으로 못 나와요. 왜? 여호수아가 모델이기 때문에. 원형이기 때문에.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이름을 예수라 해놓고 간단한 이름을 해놓고 설명이 너무 길어요. 자기 백성을, 그냥 백성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이에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의 자기 백성. 구원을 죄에서 건져놓고 백성으로 규정하는. 추후에 규정하는 일을 하시는 분이 누구다?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이 예수님의 일을 선행하려면 일단은 1번, 백성은 없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셔야 백성이 발생되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백성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동안 유대 백성들이 자기 구약 성경을 가지고 백성이라고 우기는 것은 이것은 바로 예언과 본인 사이에 단절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나님의 예언을 우리가 잘 안다. 우리가 지키면 우리가 예언대로 우리가 구원받는다. 이건 너무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에요. 예언 자체가 인간하고 단절되어있고 예언의 성취는 인간이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예언을 주신 거예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이 레위기는 예언이에요. 이 레위기를 딱 보면 왜 우리는 레위기를 못 지키고 주님만이 할 수 있느냐, 요런 쪽으로 흘러가야 돼요. 왜 우리는 못하는가.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첫 번째는 백성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몽땅 죄의 세상이 되어야 돼요. 몽땅. 이게 두 번째입니다. 백성이 없어야 되고 몽땅 죄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야 돼요. 죄에서 누구 하나 지가 거기서 기어 나오면 그 사람만큼은 죄가 아닌 셈이 되니까 이건 안돼요. 말이 안돼요. 구원 받은 백성도 죄 속에 있어야 돼요. 죄 속에 있어줘야 돼요.
전에 대구강의에서 죄라는 것은 자기를 지키는 게 죄라고 했지요. 자기 자신을. “그냥 지켜. 그래. 너 자신을 지키라고” 여기 중요한 문장 하나 붉은 걸로 쓰겠습니다. ‘현실이(현 세상이) 내가 생각한 Model과 안 맞다.’ 내가 생각한 현실이, 현실에 대한 설명이, 내가 생각한 모델과 안 맞다면 내 생각의 모델을 맞추기 위해서 현실을 재해석하게 되겠지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 해석 말고 다른 해석이 없을까” “왜 그래야 되는데?” “내가 생각한 나의 모델과 실제가 안 맞기 때문에 나는 내가 생각한 모델과 나는 맞춰야 되겠어.” 맞추기 위해서는 그동안 내가 알던 현실 말고 다른 현실을 도입하게 되고 현실을 내가 만들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그 현실은 누구 현실 되지요? 내게 맞춤 현실이 되겠지요. 내게 맞춤 현실.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결과가 뭐냐, 이거에요. 다양성. 지난번에 강남 강의할 때 제가 중요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우리가 복음을 알지만 우리가 복음을 알고 세상에 나가면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이거라 그랬어요. 다르다. ‘다르다’가 기다리고 있어요. 세상은 뭐를 거부하느냐 하면 틀리다를 거부해요. 맞고 틀리다를 용납하지 말고 니는 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사는 다양성, 다수성을 존중해주고 인정해주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자, 이 세상이 그렇지요. 그러면 그 이유를 알아야 돼요. 그 이유가 뭡니까? 그 이유를 이 빨간 거로 쓴 거예요. 이유가 뭐냐, 나는 여기 있고, 세상은 내가 원하고 있고, 내가 원하는 그러한 모델에 맞춰야 되는데 이게 세상이 안 맞출 때는 내 쪽에서 바뀌어야 합니까? 아니면 세상을 재해석하고 싶어요? 세상을 다시 재해석하고 싶은 거예요. 세상을.
우리 인간사는 거 굉장히 간단해요. 내 쪽에 문제 있다가 아니라 세상은 다양성에 있으니까 거기서 내가 나를 긍정할 만한 요소를 따로 뽑아서 꽃다발처럼 이렇게 재료를 모으면 되잖아. 나는 내가 모아놓은 그 세상 현실 속에서 내가 행복하게 살면 되잖아. 세상 뭐있어. 그거지. 그게 바로 다수성이고 다양성이에요. 그런 식으로 살기 때문에 뭡니까? 틀리다는 말을 나한테 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뭔가 다르다는 말을 하라는 거예요. 다르다. 얼마 전에 강남강의에서 요걸 짧게 요 이야기만 한 거예요. 모델 이야기는 지금 제가 이야기한 거고. 모델.
계속 모델 찾기에 나서는 거예요. 모델 찾기. 예수님이 제시한 모델이 마음에 안 맞다면 그 다음에 뭐하면 돼요? 부처 찾으면 되잖아요. 부처라는 모델을 원하는 게 아니고 내게 맞는 내 욕망에 맞는 내 모델은 모델에 맞추기 위해서 부처가 하던, 예수가 하던, 공자가 하던, 거기에 내가 만들어내는 나만의 맞춤 현실을 내가 만들어보겠다는 거예요. 내가 만들어보겠다.
나의 존재를 증명할 변화 시도. 변화를 끊임없이 시도해 보는 거예요. 나의 존재를 증명할. 여기 제일 먼저 뭐가 나왔어요? 나의 모델 할 때, 뭡니까? ‘나’가 나오지요. 그런데 다시 봅시다. 예수님은 예언의 완성이지요. 자, 예언의 완성은 어렵기 때문에 일단 예언으로 갑니다. 자, 예언은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예언은 인간으로 하여금 끼어들 수 없다 했지요. 그리고 예언은 인간과의 단절을 전제로 해서 주어지지요. 왜 그러느냐 하면 예언의 성취자가 누굽니까? 예언을 던진 언약을 던진 그 분이 스스로 성취해 나가지요.
여기서 무서운 이야기가 있어요. 예언이 성취가 되어버리면.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제 입장에서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기 때문에 제가 뜸을 드리고 있는 거예요. 예언이 성취가 되면 이건 이미가 돼요. 이미. 이미가 되게 되면 수정이 불가합니다. 이것만큼 인간에게 무서운 게 없어요. 수정이 불가한 거예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창세전부터 있었던 예언이 그동안 안 들키고 있다가 예언이 성취되는 자 누굽니까? 예수님. 예수님에 의해서 꾸준하게 하나님은 예언을 수정한 적이 없고 똑바로 예언 성취만 노리면서 진격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예언이 이미 완성이 되고 성취가 되고 완성이 되어버리면 수정이 불가해요.
수정이 불가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예수 믿는다고 내 운명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내가 예수를 안 믿는다고 내 운명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아까 인간이 자유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모델을 찾지요. 존재에서 뭘 찾는다 했어요? 존재에서 뭘 시도한다? 변화지요. 변화의 내용이 뭡니까? 그 속 내용이 뭐예요? 내게 맞춘 세상에 대한 내가 생각한 내 모델에 맞춘 현실에 대한 해석거리를 수집하는 거죠. 채집, 채취.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쉽게 말하면 긁어모으는 거예요. 긁어모을 때 “나는 안 돼!” 이거 하려고 긁어모읍니까? “나는 행복해야 돼!” 그것 때문에 긁어모으는 거예요? 자기를 부정하기 위해서 긁어모으는 겁니까? 자기를 긍정해서 긁어모으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분명히 뭐냐 하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잖아요. 구원은 뭐냐 하면 강제로 헉 헉 허덕이고 있는데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치 지옥에 간 부자를 아브라함이 끄집어내는 경우, 아브라함은 그런 일이 없지만, 그건 예언의 경우에서는 그게 예언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그게 가능해요.
그러나 예언이 성취가 되어버리면 건질 자는 건지고 나머지는 그냥 버리는 거예요. 하나는 진노의 그릇이고, 하나는 자비의 긍휼의 그릇이라고요. 그걸 로마서9장, 로마서11장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겁니다. 끝났다는 거예요. 모든 게. 끝났다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은 이상 이삭을 믿을 이유는 없어요. 비록 이삭이 태어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이걸 통해서 아브라함은 자기 시대는 끝났어요. 이제는 나를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이삭 이름. 니는 하나님의 이름을 농담으로 웃음거리로 봤잖아. 이름을 웃었잖아! 제가 수요일에 이야기했지만 웃는 것 가지고 시비를 거는 거예요.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 웃던 울던 그게 무슨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에요. 니 아들의 이름이 우습다는 말은 이제는 아들의 존재를 놔두고 니는 이제 거기서 니 존재라는 아들 존재에 의해서 완전히 부정당하는 거예요.
내 중심의 모델을 찾는다는 자체가 헛수고가 되는 거예요. 내 중심에.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이삭 중심으로 세상이 흘러가기 때문에 내 중심의 그 앞에서 내 중심의 내게 맞춘 내 모델의 인생, 내 행복을 추구하는 인생 같은 것은 이것은 날아가 버린 거예요. 없는 거예요. 그럴 때 아브라함은 그 현실을 이삭의 예언된 성취된 현실을 수긍하지요. 받아들이지요. 그게 시험에 통과한 거예요. 그게 시험에 통과한 겁니다.
시험이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에 참여된 것의 시험이에요. 참여한 것. 참여해서, ‘나 위주의 현실이라는 것은 애시당초 없었구나! 하나님이 나를 이용하지, 내가 하나님을 이용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었구나!’ 하고 그걸 소급해서 되돌아보면서 파악하는 거예요.
그 때부터 아브라함은 뭘 해야 되는가, “이삭의 하나님이 누구시지?” 같은 말이에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아브라함이 자기가 주인공 있을 때는 아브람의 하나님 생각했는데, 자기 예상 밖의 일. 자기 예상을 거치지 않고 다른 노선으로 이삭을 줘버릴 때, 이삭의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이삭의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돼요?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해서 구원받습니까? 없어요. 뭡니까? “예수님이 누구시지요?” 예수님은 누구시냐는 거예요.
자, 갈릴리 바다에 파도가 일었습니다. 파도가 일었을 때에 12명의 제자들의 관심사는 파도입니다. 저 파도를 이겨야 돼요. 배속에 물들어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물 퍼내야 돼요. 어떻게 든 이 현실에서 우리가 벗어나지 아니하면 죽는다는 겁니다. 이 현실이 자기한테 비극적이고 불행스러워요. 이 풍랑이. 이 갈릴리 바다 복판에서 풍랑이 인다는 자체가 그럼 살아왔던 자체가 모든 자기의 기억과 과거가 물속에 빠져서 다 날아갈 판이에요.
열심히, 열심히 나를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뭘 하지요. 물 퍼낸다든지 하지요. 그럴 때 결국 하다 하다가 안돼서 누굴 깨웁니까? 그 때까지 계속 예수님은 잠을 주무시고 있었어요. 그 말은 제자들의 하는 일에 나서서 조언해서 이리해라, 이리해라, 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마치 없는 존재와 같아요. 제자들에서는 풍랑일 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없는 존재고, 예수님은 그걸 알고 내가 없는 존재 될 게. 하고 주무셨고.
그들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깨울 때 제자들은 뭐냐, 우리가 안 되는데 우리는 쪽수가 12명 아닙니까. 12명이 해도 잔잔하지 않은데 예수님 하나 그러면 13명 되지요. 13명이 한다고 풍랑이 잔잔할 리는 없을 거 아닙니까. 그냥 답답해서 깨운 거죠. 답답해서. 어떤 노림수 같은 거 없어요. 그냥 우리 죽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예수님에게 통보하려고 깨울 수도 있는 문제지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네 믿음이 없느냐” 했어요. 너희들은 믿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제자들이 믿지 않았을까요. 바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뭐하는데 바빴습니까? 내 힘으로 내 과거를 지키는데 내 존재를 지키는데 바빴던 거예요. 예수님은 뒷전입니다. 24시간 내 가치 지키는데 몰두하고 열중하고 있어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착실할 수 없어요. 개근상을 줘야겠어요. 자기 일에는 그렇게 충실하고 충성하고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자기 한 몸한테 바치고 있습니다.
예수님 깨울 때에 예수님께서 먼저 믿음 없다는 걸 먼저 했어요. 사태를 해결하는 게 아니고 믿음 없다는 걸 먼저 질책한 거예요.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믿음 없다는 사실, 예수 나와 너 사이에 끊어져 있다는 관계가, 같이 옆에 있어도 끊어져 남남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 풍랑이 동원됐지요.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해내지 못한 일을 했습니다. 풍랑과 바다도 꾸짖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천사가 태가 뭔가 가능성 임신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애 놓는다는 말은 우리를 질책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믿음이 있은 적이 없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예언은 인간을 피해서 주어지는 거예요. 인간을 피해서.
지금 하나님의 작전이 믿음 없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구원이 믿음 없음으로. 신나지 않습니까? 믿음 그 따위 거 준비할 필요 없어요. 믿음 없이 구원받는 거예요. 만약에 믿음 있어버리면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이건 자기 자신을 신봉했던 그것을 그냥 견지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가 날아가지 않고 계속 살아있어요. 지옥가지요.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지옥 갈 자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신경 쓰는 것이 뭐냐, 그들의 믿음을 잘라버리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믿는 믿음을 잘라버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풍랑과 파도를 꾸짖을 때에 그 때 제자들이 하는 말이 있어요. 뭐냐, “누구세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런 뜻이에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옆에 있는 예수님이 내 모델에 맞춘 예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토록 몰랐던 거예요. 내가 생각한 예수님은 예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동안 몰랐던 겁니다. 내가 생각한 다른 예수님이 내게 있었던 거예요. 내 모델에 맞춤 예수님이 아니었어요. 내 모델 나와 나의 모델 모든 걸 다 부정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에요.
아브라함은 이삭 아들가지고 사용했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12제자에서는 뭘 가지고 사용했습니까? 풍랑과 바다가지고 사용했지요. 오늘날 주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 뭘 사용했다? 이것은 바로 사도바울이 예수님에게 받은 계시에 의해서 주어졌습니다. 계시에 의해서.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사도바울의 계시의 핵심은 그거였습니다.
아까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태가 죽은 데서 살았고, 없는 데서 아들이 생겼지요. 풍랑 같은 경우에는 갑자기 풍랑이 일어가지고 옆에 있으면서도 낯선 예수, 내 사유, 내 생각에 의해서 연결된 예수가 아니고, 내 사유를 끊어버린 예수님 쪽에서 내 사유를 모든 생각을 끊어버리는 예수님이 등장했지요. 풍랑을 통해서.
그럼 오늘날에는 뭘로 하겠느냐 이 말입니다. 사도바울의 핵심은 뭐냐 하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요. 로마서4장에 나오지요. 사도바울이 로마서4장하면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그 분이 죽은 것은 우리의 죄로 인함이요, 그 분이 살은 것은 우리의 의를 인함이라. 라는 대목이 나오지요. 로마서4장25절.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
그러면 그 말씀대로라면 죄라는 것도 인간은 그동안 인간에게는 죄라는 것 자체도 진짜 죄의 개념은 끊어져 있고 의라는 개념도 진짜 의라는 개념과 끊어져 있지요. 왜냐하면 죄와 의는 누가 독점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독점하고 있었다. 인간이 죄라고 하는 것은 죄가 아니에요. 인간이 의라고 하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부터 새로 시작해야 죄가 나오고 예수님이 살아남을 기초로 해야 비로소 의가 새롭게 정리되고 개념이 확정되는 거예요.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단독적이라 말이지요. 예수님이 단독적. 한 번 적어볼게요.
사도바울이 구원받았잖아요. 아까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라고 했습니까? 누구십니까? 이거지요. 갑자기 관심사가 자기가 아니고 누굽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도바울이 거기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질문을 던지고 거기서 해답 받은, 주님께 받은 해답은 쫙 나열하면 사도바울의 편지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죄와 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겁니다. 그전까지 인간이 아는 죄와 의는 다 거짓이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독단적이에요. 의미를 품은 자. 또는 의미를 그 다음에 독단적으로 품은 분. 의미를 독단적으로 품은 분.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만 모든 진실과 비밀이 다 나오는 거예요. 이것을 구약과 연관시키면 예언의 성취가 되지요. 아까 중요한 거, 예언이 성취되면 무엇이 불가하다? 수정 불가. 하~ 이거 제목으로 하고 싶다. 수정 불가.
수정 불가해요. 수정 불가의 특징은 인간의 어떤 변화를 시도해도 소용없는 짓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독단적으로 확정했기 때문에 인간이 나서서 거기서 애걸복걸하고 요 좀 바꾸면 안 되겠습니까? 이런 게 성립이 안돼요. 수정이 안 된다니까요. 변경 불가에요. 주님은 예언대로만 실시했고 그게 아버지 뜻으로 다 이루었고 다 이루었다는 말은 수정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못 고쳐요. 합격, 불합격을 이게 고칠 수가 없어요. 이게.
야곱은 사랑했으면 못 고쳐요. 에서는 저주 받았으면 에서가 아무리 사정해도 안 되지요. 그게 이삭의 하나님이에요. 이삭이 평소에 자기 큰 아들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이건 완전 둘째 아들한테 축복이 몰빵갔지요. 오죽했으면 큰 아들에 뒤늦게 와가지고 뭘 요청합니까. 남은 축복이라도 없습니까? 했지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게, 도대체 에서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요?
에서가 잘못한 게. 일도 없어요. 에서가 잘못한 게 일도 없다고요. 그걸 이삭이 알아요. 착하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요. 나쁜 짓한다고 지옥 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요. 이게.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나쁜 짓하면 어디 간다? 지옥 간다. 착한 일하면 어디 간다? 천국 간다. 이걸 쳐버리는 게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언입니다.
이 의미를 독단적으로 품었다. 수정 불가. 그러면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 “왜 전하느냐,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는데 사도바울 니는 왜 설치느냐, 니는 입 다물고 있어. 주님이 다 했다며. 니가 안 설쳐도 안 외쳐도 구원받을 사람 구원받고, 지옥 갈 자는 지옥 가잖아. 그런데 왜 니가 복음전파를 왜 해.” 라고 물으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오늘 레위기와 굉장히 중요한 관계가 있어요. 상당히 어렵게 이야기해야 되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존재의 세계, 존재의 세계에서 인간은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있다로 말미암아 놓치는 게 있어요. 그게 바로 사건입니다.
존재의 세계에 우리가 놓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사건입니다. 레위언약은 제사지요. 제사. 제사는 사건을 고정화시키는 체제입니다. 사건을 고정화시켜요. 이건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어요. 사건이란 지나가면 끝나는 거예요. 사건 지나고 그 현장에 보면 사건 없어요. 그냥 사건의 벌어진 흔적들 이런 거만 있지, 사건 자체는 없어졌어요.
옛날에 찬송가 부를 때 은혜 받았다. 그 찬송가 불러보세요. 은혜 받는가. 안 나오지요. 안 나와요. 사건이 없이 존재만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그 때 그 사람과 똑같이 모아가지고 똑같은 행동하면 똑같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기대를 하게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수학이에요. 5년 전에 2+3=5였습니다. 5년 후에 2+3= 얼마입니까? 5지요. 똑같이 나오잖아요. 한국에서 2+3=5입니다. 미국가면? 2+3=5지요. 똑같잖아요.
변화 속에서 이 변화를 존재로 전환하기 위해서 학문이라는 게 있습니다. 수학, 과학, 철학, 내 존재를 동질화시키는데 보탬이 되는 아이디어. 아이디어들을 이 세상의 학문들을 하고 있습니다. 내 존재를 오늘 이 존재를 내일 되도 내가 되기 위해서 한 달 뒤에 내가 되기 위해서 계속해서 나를 붙잡고 나를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서 애쓸 때 그것은 나를 완전히 포장화시키는 적절한 모델꺼리를 찾아다녀서 그것으로 나를 입히는 거예요.
이걸 부산강의에서는 이걸 세자로 했습니다.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튀김 할 때 튀김옷 입히잖아요.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세자로. 이미지. 인간은 이미지에 죽고 이미지에 살지요. 자살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원하는 내 모델에 맞는 이미지가 훼손됐다고 자살해요. 밥 못 먹어 자살하는 사람 거의 없어요. 있긴 있겠지만 거의 없어요. 빚이 많아서 하는 것도 있지만. 빚이 많아서 자살하는 게 아니고. 나는 빚져서는 안 된다는 나의 이미지가 손상되기 때문에 자살하는 거예요.
이미지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두뇌에서 전피질이 있고요. 여기에 선조체가 있고 여기 해마가 있어요. 해마는 단기기억이에요. 단기기억. 그런데 단기기억을 계속 해마가 붙들면 전체 두뇌의 에너지가 많이 소비가 돼요. 이 두뇌의 에너지는 신체 20% 차지할 정도로 신경을 많이 씁니다. 에너지가 과다한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스트레스. 주입된 에너지와 소비된 에너지가 균형이 안 맞으니까 모든 내장기구 다 망가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 에너지가 망가지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게 해마가 업무량이 너무 과다한 거예요. 그래서 어떠냐, 기억에 온 거 가지고 계속해서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된 에너지를 줄일 수 있는 가만히 있어도 자동으로 되는 운전한지 오래된 거, 자전거 타는 거, 헤엄치는 거 이런 거. 수영하는 거, 오래된 것은 선조체에다가 이걸 저장을 해버려요. 장기저장은 선조체에서 하고 해마의 단기기억 가운데서 전체 내 몸을 유지할 수 있는 전에 있는 선배되는 기억에 저장이 되어버리면 에너지 효율을 줄일 수 있잖아요. 에너지 압박을 줄일 수 있잖아요. 그게 인간의 육신의 본능이다 말이죠. 본능.
그러면 여기에 선조체에서 나와서 형성된 게 이게 동영상 시청, 청각, 이런 동영상 이걸 담당하는 두뇌에서 집합에서 여기서 상징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상징. 이 전피질이 상징을 한다고요. 나는 지금 이 모습일 거라. 그럼 내가 이 모습이라 하는 것은 여기서 외부에서 감각이 들어오는데 그 외부감각이 어떤 외부에요? 외부가 어떤 외부입니까? 타인이겠지요. 타인. 남.
어릴 때부터 남들로부터 계속 선조체에 누적된 “너는 이게 맞아. 너는 이 모습이야. 너는 이래야 돼!”라는 것을 계속 들어왔잖아요. 들어왔으면 그것을 자체적으로 그것을 해마라는 기억을 통해서 선조체로 옮기면서 자기됨을 유지하는데 있어서의 에너지를 최소화시킬 수 있고 효율적으로 경제적으로 할 수 있는 방향으로서 자기의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자기의 이미지의 특징이 뭐냐, 이게 선악과를 닮았어요. 뭐냐 하면, 아름답다.
아름답다가 뭐냐 하면 진리가 되고, 아름답다가 뭐냐 하면 선이 돼요. 진, 선, 미. 삼위일체에요. 삼위일체. 진, 선, 미, 아름답다는 겁니다. 모든 각자의 이미지의 공통점이 뭐냐, 나는 아름다운 사람, 아름답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름다움이 깨졌을 때 어떻게 해야 돼요? 아름다움이 깨진다면. 이 선조체에 문제가 있지요. 그럼 선조체에 문제가 있으면 이걸 억지로 누가 동원되어야 돼요? 해마가 동원되어야 되겠지요. 새로운 기억들을 계속해서 채취해야 되지요. 수집해야 되겠지요.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나는 뭐하다? 아름답다.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아름답다. 바로 아름다움의 절정은 바로 청년 때에요. 청년부터 인간은 이제 자포자기에 들어갑니다. 왜? 선조체가 많이 피곤하면 안 되니까. 아이구, 아름다운 것도 다 귀찮다. 뭐 젊을 때는 다리 내놓고 미니 입지만, 나이 팔십 넘은 사람이 미니 입어보세요. 욕합니다. 치마 길게 해가지고 발톱도 안 보이게 해놓고, 나는 뭐든지 피곤하면 짜증 나.
분노는 어디서 나온다? 나의 에너지 체계에서 외부 압력이 강하게 공격하게 되면 선조체에서 분노하지요. 분노하면 밀어내지요. “제발 나를 건드리지 마라.” 1번, “저리 가” 2번, “제발 나를 건드리지 마!” 3번, “먼저 너가 나를 건드렸잖아.” 이걸 뇌 신경조로 하면 뭐냐, 선조체의 반응이지요. 해마, 선조체의 기억. 기억이 자아니까요. 기억된 것이 상징화 이미지로 남으니까요. 어때요? 인생 간단하지요.
나라는 인생이 몇 분 걸렸어요? 몇 분 안 걸렸지요. 해마, 선조체, 피질, 가는데 다 끝났지요. 간단한 거예요. 에너지의 활용? 끝. 그러니까 노인들 보고 교회가라 하지 마라 말이지요. 피곤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꾸 “어머님, 죽을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교회 나가야 되지요.” 하면 “왜 자꾸 교회 나가라고 하느냐” “예수 믿어야 합니다.” “예수 니가 뭔데?” 누가 먼저 건드렸어요? 예수가 나를 건드렸잖아요. 나를. 예수가 나를 먼저 건드렸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나온 불신자의 반응은 뭐냐 하면, 그쪽이 나를 건드렸잖아. 그 쪽. 그 쪽이라는 말.
자, 차가 이렇게 가다가 접촉 사고가 났습니다. 그런데 부주의 한 사람이 86살 먹은 노인네 운전사가 문 열고 나왔다 말이지요. 그런데 이쪽에는 22살 먹은 애가 운전하다 나왔다. 그러면 둘 다 선조체가 정상적이고 해마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면 어떻습니까.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 운전 좀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겠지요. 그런데 젊은 애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스트레스가 뭐냐 하면, 새롭게 주어진 그러한 감각이 내 나의 이미지에 손상 갈까봐 이 두뇌에서 본능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거죠. 그렇죠. 갑자기 할아버지라는 말을 안 하고 나이 세배나 많은 할아버지한테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쪽하지요. 그쪽. 그쪽이 잘못해서..., 갑자기 그쪽이라 하는 것은 내쪽, 그쪽은 대등한 사회 통념상 대등할 때나 내쪽 그쪽이지 나이 많을 때는 그쪽하면 아니잖아요. 너무 성질나서 그쪽이. “그쪽이 나를 건드렸잖아요.”이러지요.
그러면 자기의 모델을 찾는 사람에게 예수는 뭐가 됩니까? 예수님 하다가 뭐가 돼요? 그쪽이 나를 먼저 건드렸잖아. 그쪽이. 신이 나를 건드렸잖아. 신이. 신 그쪽이. 그러면 그쪽이라는 것은 밀어내는 거죠. 그쪽 말고 이쪽은 누가 있습니까? 나가 있죠. 나는 뭐예요? 나는 신이죠. 내가 신인 거예요.
모든 인간은 다 그래요. 모든 인간은. 아름다운 나를 안 건드렸으니까 지금 예수를 믿은 거 같지요. 그러나 나는 어떻다? 나는 아름다운 존재에요. 왜? 선악과가 뭡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러운 존재거든요. 악마는 선악과의 모습을 그 이미지 아름다운 모습을 인간 속에다가 악마가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이제 빼도 박도 못해요. 하나님은 죽었다고 하지만, 그 악마가 집어넣은 선악과와 함께 동고동락하는 우리 자신은 이 세상 천하보다 나보다 귀한 존재는 없어요.
내가 신이 될 때 에너지 효용이 가장 적게 되고 행복을 느끼는 겁니다. 내가 신이 될 때. 두뇌의 소비의 양이 적어지니까. 전기세가 적게 나온다 말이에요. 전기세가. 지금 낮 기온이 21도가 되고 저녁 기온 17도 되어보세요. 에어콘 틀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면 전기 값 적게 나오지요. 그럴 때 우리는 날씨가 선선하게 불 때 우리는 뭐합니까? “아휴, 왜 이리 행복해.” 하지요. 그게 육신이에요. 에너지 효용이 아주 작게 드는 거예요.
처음부터 인간은 범죄 할 때부터 인간은 그랬었어요. 그런데 그런 인간들 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뭘 줬습니까? 레위기를 통해서 구약에서 뭘 줬어요? 하나님의 예언을 줬지요. 예언을. 예언을 주신 거예요. 예언을. 말씀을 주신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언을 듣고 물었지요. 왜? 아름다운 나를 더 아름답게 해 줄 거라고 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수치라고 되어있어요. 치욕. 수치스럽게, 치욕스럽게. 주변에 있는 모든 민족들이 “아이고, 이스라엘아, 니가 믿던 하나님한테 니가 당할 줄이야. 아이고, 껄껄껄. 고개 흔들면서. 너희들 참 안됐다. 여호와가 뭔데 여호와가 다 해줄 거라고 그걸 그렇게 믿나? 이 바보야! 우리 봐. 자유롭잖아. 좀 본성대로 놀아. 본성대로. 억지 부리지 말고. 너 육신에 맞게 해. 니가 신이야 바로. 니가 신이야.” 그게 부처입니다. 그게 부처에요.
이거 더부러 이야기하는 건데요. 불교의 부처의 주장이 이거에요. 부처는 흰두교에서 나왔거든요. 흰두교가 전에도 이야기했는데. 잠깐 하면. 흰두교는 인간이 죽고 난 뒤에 대책이 없어요. 왜? 죽고 난 뒤를 모르니까. 그래서 흰두교의 대책은 뭐냐, 죽은 조상의 영혼 붙들면 된다는 거예요. 왜? 죽은 사람 다 모여있으니까. 모일 때 괜찮은 모임. 지옥 안 가고 낙원에 모여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부처는 그걸 반대했어요. 그리하려면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늘 제사를 드려야 돼요. 누구한테? 선배한테. 선배는 누굽니까? 죽은 조상한테. 살아서도 헤어지면 안 되고 조상은 죽어서도 헤어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흰두교에요.
왜? 사람은 육체는 죽지만, 뭐는 남아있기 때문에. 골치 아프게 영혼은 남아있기 때문에. 남아있는 영혼 문제 어떻게 해결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 말이에요. 살아있을 때는 육체라고 하지만, 죽고 나기까지 괴롬이 있으면 이건 보통 골칫거리 아니잖아요. 그건 흰두교고. 부처가 하는 말은 그것의 반대에서 석가모니가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그 조상한테 묶이지 말고 해방하자. 그걸 해탈이라고 하고. 그 해탈을 바꾸면 뭐냐, 내가 곧 모든 의미를 하는 독자적인 신이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부처이야기입니다. 내가 신이다.
그게 우리한테 맞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제사도 필요 없고, 기도도 필요 없고 오직 깨달음만 필요한 거예요. 내가 신이다. 깨달음 내용이 뭐라고요? 내가 원래부터 신이었어. 10분 쉽시다.
■안양20240912b창15장10절(현상)-이 근호 목사
존재에 대해서 인간은 자기 존재를 고정화 시키려고 끊임없이 두뇌의 감각을 해마에서 조정하고 선조체로 보내면서 자기 안정화를 추구하지요. 그 안정화 추구하는 그 방식이 전에 있던 먼저 선조체에 들어있던 자기 이미지와 이렇게 다툼없이 껄끄러움없이 수용이 되는 수납이 되는 쪽으로 계속 모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으는 방식에 그 방향성 특징이 뭐냐, 아름다움이에요. 그래서 문학을 하든 과학을 하든 철학을 하든 신학을 하든 인간의 마지막 추구하는 것은 아름다움이에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의 이성적으로 아무리 뭘 꾸며도 인간의 본성은 대인적으로 대인관계에서 나 이쁘지 그지? 탐스럽지 그지? 내가 보암직스럽지 그지? 이리 되는 거예요.
나무과실은 그냥 나무였는데 이게 나무 선악과가 인격화가 돼요. 움직이는 선악과에요. 나 어때? 이쁘지 그지? 이쁘기만 한다면 돈이 얼마나 들던지간에 나는 성형수술, 성형수술만 하면 괜찮지. 정형수술까지 해요. 성형수술 정형수술해가지고 내 이미지에 맞는 얼굴 모습과 거울에 비친 모습과 이게 차이가 나니까 짜증스러운 거예요.
내 선조체에 있는 이미지하고 거울에 비친 내 눈으로 보는 내 감각에 하고 이게 틈이 생기니까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분노가 나오는 거예요. 분노. 그 분노를 타인에게도 때리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자기 자신을 자책해요. 그동안 니 뭐하고 있었냐? 하고 내가 나보고 막 나무랜다고요. 그러면 지가 지한테 스스로 이야기해요. 앞으로 잘할게요. 앞으로 잘할게요. 이게 뭐냐, 내부대화거든요.
끊임없이 자기하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쉬지도 않고. 추궁하고 나무래지요. “내가 원하는 내가 되라는 말이야. 이 바보 등신같은 너야! 뭐하고 있냐? 열심히 해! 내게 만족스러운 내가 되라는 말이야!” 하고 채찍질하고 나무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산속에 간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니에요. 왜? 자기가 자기를 자꾸 못살게 구니까요. 못살게 구니까, 하니까 장이수 생각나네. 자꾸 자기를 못살게 구는 거예요. 행복은 없어요. 그걸 무의식에서는 그걸 욕망이라고 하는 거예요. 욕망. 욕망은 의식은 해마에서, 무의식은 선조체에서. 가만히 있어도 에너지 소비가 적으면서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무의식. 운전할 때 신경 안 쓰잖아요. 운전 오래하면. 그런데 의식은 이게 해마에서 하는데 의식은 해마에서 해가지고 계속해서 힘들게 내 존재 자체를 아름다운 존재로 변형시켜야 돼요.
시키는 방법은 뭐냐, 내 아름다움에 흠집 되는 것을 빨리 조치를 내서 털어버려야 되지요. 공부 많이 하고, 건강해야 되고, 돈 좀 있어야 되고, 친구 많아야 되고, 누구한테 늘 칭찬받고 사랑받는 것. 그런 게 있을 때 내가 흡족하지요. 내가. 특히 여자분들은 그런 기회가 며칠 후에 옵니다. 추석 때. 전 부치는 솜씨 한 번 보자. 냉장고 열어가지고 집구석 살림 하는 꼬라지 하고는. 검사받는 시간돼요. 그동안 시집와서 뭐했노. 친정에서 이것밖에 안했나. 친정에서 이런 거 배웠나? 이런 거요. 그러면 중년쯤 되면 어머님, 열심히 할게요. 이렇게 하고. 젊은 애들은 내 배째라. 이리 나오고. 내가 여기까지 와서 스트레스 받아야 하나.
인간의 욕망은 방향이 있고, 그 방향은 신이 되는 거고, 신의 본 내용은 먹음직하고 탐스럽고 아름다운 것.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그렇게 만든 이유를 아시겠지요. 이게 바로 죄거든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다 그러니까 주께서는 이미 예언이 완성된 입장에서는 수정 불가에요. 어떻게 합니까? 죄에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끄집어내면 그게 자기 백성 돼요.
자기 백성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죄에서 끄집어낸 사람이 자기 백성이 되는데 자기백성을 끄집어낼 때 어떻게 끄집어내느냐, 어떻게. 어떻게 끄집어내느냐. 그게 바로 레위기에 나옵니다. 어떻게 끄집어내느냐. 쪼개 뿐다. 쪼개 버리는 거예요.
쪼개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쌍둥이 나오지요. 쌍둥이. 야곱과 에서. 쌍둥이가 나와요. 쌍둥이. 창세기15장에 설교시간에 얼마전에 했기 때문에 여러분의 선조체 장기기억에 들어있는 거예요. 창세기15장10절,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자, 요것을 알기 위해서 9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여기 몇 년입니까? 삼년, 삼년, 삼년. 삼년이라는 숫자가 붙어있어요. 삼년암소, 삼년암염소, 삼년수양, 클래스가 높다. 계층이 있는데 높은 계층의 고급제물은 암컷이고 그 낮은 계층의 제물은 뭐냐 하면 숫양이 되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으로 왔다는 그 약속이 아브람의 언약 속에 스며들어서, 아브람 언약 속에 스며든 그것이 구체적으로 아브람을 통해서 제사 드릴 때 그 제물을 통해서 어떻게 삽입되어서 표현되는가, 표출되는가를 보는 거예요. 클래스라 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Order. 질서에요. 클래스 어떤 계층의 질서. 반차라고 합니다. 반차.
히브리서7장에서 Order. 멜기세덱의 질서체계. 하늘의 질서체제와 지상에 있는 육적인 반열. 족보와 차별되기 위해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새로운 Order(오더)를 하는 거예요. 그러한 질서체제를 따로 구분하는 거예요. 클래스가 다른 거예요. 수준이 다르고 계층을 달리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말은 이게 예언이다 말이죠. 예언. 예언이 성취가 되어버리면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성취가 됐거든요. 성취가 되면 뭡니까? 수정 불가지요. 그냥 위에서 결정한 대로 그냥 따라갈 뿐입니다. 결정한 대로. 이것을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요 단어 하나로 다 끝나버려요. 이게 뭐냐 하면 현상이에요. 현상.
세상은 모든 것이 현상이에요. 왜냐하면 수정이 불가하니까요. 현상이 되는 거예요. 두 차이 나는 오더. 차이 나는 질서. 그 질서가 각각 다른 현상을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는 진노의 그릇, 하나는 긍휼의 그릇, 한쪽은 치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나오고, 한쪽은 퉁 치니까 주님에 대한 분노가 나오는 거예요. 분노가 나오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쪽이 나를 건드렸잖아요. 그 쪽이.” 그쪽이 나를 건드렸잖아. 뭡니까? 니쪽 따로 있고, 내쪽 따로 있다는 뜻이에요. 우리 서로 관여하지 맙시다. 그냥 당신은 당신대로 노시고, 나는 나대로 놀 테니까. 그쪽, 이쪽이 되어버려요.
그 귀신이 예수님 두 청년 쫓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왜 벌써 왔습니까? 우리가 아직 멸망할 때도 아닌데 왜 왔습니까? 이런 뜻이에요. 마귀는 알아요. 마귀는 뭐냐, 그쪽과 이쪽이 다르다는 것. 그걸 구체적으로 논리적으로 못하지만, 뭐라고 했습니까? 현상은 숨길 수가 없어요. 나타난 현상을 어떻게 숨깁니까. 나타난 현상을. 못 숨기지요.
결국 뭐냐 하면 무엇이 현상이다? 십자가. 또 무슨 현상입니까? 십자가 + 부활. 죽었다가 살아난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사도바울의 복음전파의 핵심입니다. 논리를 따지는 게 아니고 현상이라니까요. 수정 불가. 끝났음. 창세전에 감추어졌던 비밀이 다 드러났음. 이건 뭐다? 너희들이 알아서 하는 게 아니고 나타난 현상이다. 그 현상을 보이면 돼. 안 보이면 이쪽 저쪽이 되겠지요. 그냥 현상이에요.
옛날부터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동네에 머리에 해바라기 꽂고 다니는 미친여자가 있었어요. 그 때 미친 여자도 참 많았어요. 이상하게. 많은데 사회에서는 그 미친 여자를 고칠 생각을 할까요, 아니면 그냥 지켜보기만 했을까요. 어떻습니까. 고칠 생각을 안했어요. 지켜보기만 했어요. 왜? 그건 인간이 고칠 영역이 아니거든요. 클래스가 다는 세상이에요. 고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 고치느냐 하면, 이쪽의 의미가 저쪽의 의미로 소통이 될 때는 고침이 돼요. 약드시고요, 잠 푹 주무시고요, 식사후에 30분 후에 꼭 드셔야 합니다. 빠뜨리지 마시고. 이게 어떤 의미 있게 들려야 약을 먹든지 뭘 하든지 하잖아요.
그런데 미친 사람은 의미가 소통이 차단되어있어요. 그래서 옛날에 정신병원이 멀면 말로 안 되고 그냥 밧줄이 제격이에요. 밧줄. 그냥 침대에 밧줄을 묶던지 되는 겁니다. 침대에 밧줄을 묶을 때 그 정신과 의사들은 그 사람을 뭐로 보느냐,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냥 동물 짐승으로 보는 거죠. 개도 말을 듣는데 개보다 더 못해. 말을 안 들어요. 가만히 있어. 하면 말을 듣잖아요. 고양이는 말을 듣습니까? 약간 듣겠지요. 그런데 미친사람은 개보다 고양이보다 더 못해요. 그렇게 한다 말이지요. 그 때는 뭐가 딱이에요. 그냥 현상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 그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을 어떻게 했습니까? 잡아죽이려고 했지요. 잡아죽인다는 말은 설득한다든지 그게 아니고 니가 율법을 잘못 해석해서 예수님이 훌륭한 분은 맞지만 하지만 예수님이 죽은 게 아니고 시체를 훔쳐가 놓고 제자들이 보았다고 사기치는 거야. 생각 좀 해봐. 머리 어디에 놔뒀어. 머리를 쓰라고. 머리 안에 뭐 들어있다고 했습니까. 전피질 뭐 들어있어요? 이미지 관리가 들어있지요. 이미지 관리는 뭡니까? 다수성이에요. 다수성. 각자 각자 나름 신이지요.
신들의 세계. 다수성의 세계 아닙니까. 다수성의 세계잖아요. 이 선조체 안에 들어있다 말이지요. 이미지로 관리하고 있다 말이지요. 그러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조사를 많이 했어요. 조사를 많이 하고, 예수님께 조언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예수님이 말을 들었습니까. 안 들었습니까. 안 들었지요. 왜? 미쳤으니까요. 그래서 사도바울보고도, 요한복음7장에서 예수님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완전히 미쳤구나! 저 미친 말을 누가 듣겠어. 아무도 안 듣지요. 12제자도 안 들었어요. 도망갔어요.
미쳤기 때문에 이용가치는 있을 지 모르겠지만, 믿지는 않지요. 믿는 말을 해야 믿지. 말 자체를 믿지를 못하는 거예요. 예언은 못 믿어요. 예수님의 말씀은 예언은 못 믿습니다. 아이 오른손이 범죄하거든 찍어버려라. 이걸 어떻게 믿어요. 이걸. 오른쪽 찍는 것 보다 더 못 믿는 것이 누가 너희보고 돈 달라하면 거저주라. 이걸 어떻게 믿습니까. 깡통 차려고. 삼성그룹 회장한테 가가지고 돈20억 거저주세요. 하면 누가 줍니까? 이 세상을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말이지요. 지성적으로.
아, 예수를 이용하는 건 좋아요. 혹시나 부활 될 수 있잖아요. 하지만 믿지는 말아요. 믿는다는 것은 내가 같이 똘아이 되는 거니까.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건 부득불 전하는 건데 왜 이게 뭐기 때문에? 이건 주님이 사건을 독점으로 사건을 만들고 사건은 반복이 안돼요. 반복이 안 되는 것을 주께서 반복을 해버리는 것도 이건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거예요. 풍랑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 것도 주님만이 하시잖아요. 죽은 사라의 태를 살리는 것도 주님만이 하시지요.
오늘날 주님이 하시는 게 뭐냐, 같은 사건을 반복하는 거예요. 같은 사건을. 이순신 장군 반복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남해가보세요. 꼭 이순신이 보인다. 그건 미친 사람이지요. 죽어서 없어요. 정신 차려. 없어. 예수님은 이미 고인입니다. 좋은 말씀 많이 남겼지요. 자기를 부인하고. 좋은 말씀을 많이 남겼는데. 남겼을 뿐이지 살아있지는 않잖아요. 마태복음28장20절에 뭡니까. 보라.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그럼 그 이야기듣고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봤어? 봤냐고? 봤냐고?
다시 말해서 이 두뇌에 외부에서 눈을 통해서 시각을 통해서 감각이 들어오지요. 그럼 두뇌에 시각을 담당하는 층에서 처리가 되어야 돼요. 처리가 돼서 전피질에 모여서 내 이미지 구성에 이게 재료가 된다고요. 예수님 보여주면 뭐할게? 믿을게. 그게 그 이야기아닙니까. 보여주면 믿을게. 환청이라도 들려주면 믿을게. 그거잖아요. 없어요. 그런 게 없다고요.
인간의 진리? 오늘 이야기가 많이 어려운데 오늘 레위기 다 보고 싶은데 어려울 수 밖에 없는데 하는 수밖에 없어요. 인간은 구조적으로 모델을 만들지요. 나를 나답게 하는 구조를 자꾸 짜는 거예요. 세상에서. 짜는데 여기 구조에 중심은 누가 있습니까? 나가 있지요.
그러면 내 맘에 맞는 모델을 하기 위해서 이 범위를 공부를 많이해서 어떻게 돼요? 더 넓혀야 되고 더 넓혀야 되겠지요. 그런데 아무리 넓히고 넓혀봐도 내가 커진 만큼 이 구조의 테두리도 프레임도 같이 커지기 때문에 이 구조에서 못 빠져나갑니다. 지평선을 누가 잡습니까? 내가 빨리 가면 뭐도 빨리 달아나지요? 지평선도 빨리 달아나잖아요. 지평선도 빨리 달아난다고요. 천문학자들의 딜레마가 그거에요. 새로운 샛별.
새로운 별을 지금껏 나오지 않는 새별을 찾기 위해서 수조원 들여서 망원경을 만들고 공중에 허블 우주 망원경을 띄우고 하잖아요. 그래서 새별 해가지고 체크 했잖아요. “야! 새로운 별 발견했다. 이름 내가 지을 거야.” 하잖아요. 그런데 한 달 뒤에 새별 또 나와요. 그럼 별의 숫자가 어떻게 됩니까. 많아진 동시에 내가 안 만큼 나의 한계도 그만큼 멀어지는 겁니다. 나의 한계도.
인간은 어디에 빠졌습니까? 인간은 어디에 빠져있지요? 자신의 모델에 빠져있지요. 그럼 방법은 뭐냐, 이걸 외부로 나가면 실패했지요. 아무리 관찰해도 도망가니까. 내부로 들어왔어요. 내부로. 내부로 가보니까 인간속에 뭐가 있다? 내부로 가는 게 정신분석학이에요. 내부로 가니까 욕망이 있는 거예요. 욕망.
욕망 속을 또 들어가봐요. 인간은 못 참아요. 기어이 알아야 돼요. 욕망 속에 들어가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내 욕망이 아니었어요. 엄마, 아빠 타인의 욕망이었습니다. 타인의 욕망을 내가 붙잡고자 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 타인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요. 타인의 숫자가. 내가 공부한 만큼 점점 늘어나요. 나 저 사람만 뛰어넘으면. 저 사람 뛰어넘었는데 또 뛰어나와요. 저 사람만 뛰어넘으면. 또 뛰어나와요.
저 사람이 제일 많이 안다. 그런데 알고 저 사람 아마추어라. 저 사람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어요. 세상에 모든 책을 다 읽어도 계속 저자만큼은 따라잡아야 된다. 따라 잡을 게 계속 생겨요. 그동안 몰랐던 것은 초보도 정복을 못했기 때문에 뒤에 준비된 것을 몰랐던 거예요. 내가 나를 가리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나를. 타인의 욕망이 끝도 없어요. 끝도 없는데 여기서 실망이 나타나는데.
나는 저 사람을 따라 낼 거야. 했잖아요. 자, 내가 저 사람만큼은 내가 공부를 더해서 저 사람만큼 될 거야. 했는데, 그 사람이 아는 것이 헛방이에요. “에게게~ 이 정도!” 다 알고나니까 에게게~ 이 정도밖에 안돼요. 바둑18급이 바둑9급을 복구했는데 9급되고 난 뒤에 보니까 9급이 아이구, 9급 바둑이 기껏 바둑 두는 거라고.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면 만약이 이 사람이 9단이 된다. 신진서처럼 세계에서 바둑 제일 잘 뒀다. 신진서가 내가 바둑의 도사입니다. 했어요? 바둑 누구한테 졌지요? 신진서누구한테 집니까? 인공지능한테 져요.
재미있는 모순이 뭐냐, 인공지능은 뭐보다 똑똑하다? 자연지능보다 똑똑하지요. 자연지능보다 인공지능이 똑똑하잖아요. 그런데 인공지능은 어디서 베껴왔습니까? 어디서 모방했습니까?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자연지능의 일부분 밖에 안돼요. 그러면 등호가 인공지능이 커야 되는데, 자연지능이 더 큰 거예요. 더 크다는 말을 못해요. 왜냐하면 커 더 버리면 인공지능에서 나온 자아가 자연지능을 의지합니까? 인공지능을 의지하는 거예요? 인공지능을 의지하잖아요. 큰 것이 작은 것에 의존하고 의지하고 충성하고 숭배한다. 이게 내부에 뭐가 생깁니까? 모순이 발견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타인에게 걸쳐있는 타인이에요. 허함. 나도 허함. 허함과 허함끼리 만나 아무것도 없어요. 결국 남 속에 내가 발견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 내가 내 모델이 된 최종모델이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음이 되지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공백이라 하는 거예요. 공백. 이걸 수학적으로 말하면 내 내부 안에 무한이 들어있다. 그 무한은 뭐냐, 끝없는 공백과 공백으로 연결되어있다.
여기에 대해서 이미 제 책에 나와 있어요. 갈라디아 속의 그리스도 <복음과 다른복음>에 나와 있어요. 이 내용이 다 들어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빠져나가야 되지요. 빠져나와서 바라봐야 되지요. 그런데 누가 빠져나와요? 못 빠져나옵니다. 못 빠져나와요. 성경은 바로 성령이 임했다. 성령이 임했다는 말은 모든 예언이 완성이 되면서 나는 하나의 완성된 분의 현상으로서 이 세상에 육신을 갖고 이 땅에 살고 있는 겁니다.
이건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예수님 경우와 똑같아요. 예수님은 죄있는 육신의 몸으로 왔는데 그 본질은 뭡니까. 이 구조의 바깥의 구조지요. 하나님이시지만 이 땅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잖아요. 빌립보서2장에서. 십자가 죽기까지 했지요. 여기서 주님께서는 예언 속에다가 쌍둥이를 집어넣은 거예요. 둘 다 현상인데 한쪽은 뭐냐, 인간의 육적인 자의 대표자가 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적 대표자가 야곱. 한쪽은 하늘에서 태어난 사람, 한 쪽은 땅에서 태어난 사람. 그게 바로 뭐할 때냐, 갈라디아서 할 때 나오잖아요. 갈라디아서. <복음과 다른복음>에 나온 내용이에요. 다시 한 번 집에 있거든 다시 한 번 보세요.
어떻게 하늘에 우리 엄마가 있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돼요? 갈라디아서4장 26절, 하늘에 우리 엄마가 있다는 거예요. 땅의 엄마가 들으면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추석 때 오지 마라. 하늘에 있는 느그 엄마나 찾아가라. 이럴 거다 말이죠. 쌍둥이를 해놓고, 쌍둥이를 만들어 놓은 이유가 뭐냐, 수정 불가에요.
하나님의 언약은 확정적이에요. 내가 뭐 되겠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언약의 현상대로만 피조물인 인간을 나는 사용하겠다. 이게 주의 뜻입니다. 그냥 내버려둬요. 현상을 말로 달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냥 현상이에요. 모든 인간은 정해진 방향대로 질주합니다. 그냥 혼자 가면 지옥가요. 그런데 성도는 뭐냐, 현상을 보여주는데, 인간은 성도는 어디로 갈지를 몰라요. 길 자체가 소멸됐어요. 인간은. ‘나, 요쪽 방향으로 인생을 살아야지. 앞으로 요 계획대로 살아야지.’ 이게 성도한테는 용납이 안되고 허용이 안됩니다.
그러나 지옥 가는 사람들은 성령이 없는 사람은 이미 다 예언이 완성된 현상을 못 보여주고 마귀가 잠식되어서 나는 아름답다에 미쳐버린 자기가 자기한테 매료된 자의 현상은 방향이 있어요. 내가 신이 되는 방향. 다시 말해서 어떤 흠집도 뜯어내는 미흡한 것을 늘 보완하고 보충하는데 온 진력을 다해요. 나 요거 모자르잖아. 나 요것만 하면 완성될 것 같은데. 완성될 것 같은데. 구조 안에서 내게 적합한 모델을 찾기 위해서 계속해서 자기를 신으로 신봉하기 위해서 계속 어떤 시도를 하는 거예요.
제물이 쪼개짐. 이건 말이 안 되지요. 내가 왜 쪼개져? 쪼개지면 뭡니까? 나는 다루어짐이 되고 이 제물이 있을 때는 명칭이 있잖아요. 소, 염소가 되는데. 쪼개지면 이 제물이 다루어짐이 돼요. 다루어짐. 쪼갠 분의 다루어짐이 되고, 내 고유의 이름은 날아가고 없어요. 그러니 자기가 무슨 계획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만날 때, 아비멜렉 만나기 전에, “여보, 당신 누이동생할게.” 이런 계획 없어요. 딱 현장에 있으니까 살아야 되겠다. 그냥 여보라고 하지 말고 내 동생이라 해라. 했을 뿐이지요. 아브라함은 언약의 백성이니까. 언약이 이 스트레스 받는 두뇌에 선조체 해마라는 육신에 본능을 인간에서는 못 빠져나와요. 그런데 언약이 더 세요. 언약이 더 세다니까요. 우리는 죄인이 맞아요. 그런데 복음이 더 세요. 죄사함이 더 세다고요.
야곱이 형한테 안 지려고 하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센 게 뭐냐, 밤중에 찾아온 여호와의 언약의 하나님이잖아요. 복이잖아요. 복. 나를 조지는 복. 나의 모든 길을 다 없애는 복이에요.
그럼 여기서 불신자들의 어떤 길이 있는데, 그 길을 한 예를 들겠습니다. 이건 말로 하는 것보다 노래를 불러야 되는데. 노래 한 동안 안 나왔잖아요. 임재범의 <고해>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나는 흉내도 못내겠어요. 소프라노 돼가지고. 제가 감히 그녀를 사랑합니다. 여기서 나온 단어. ‘감히’ 영어로 하면, dare. 감히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뜻은 뭡니까? 이겁니다. 너희들이 뭔데. 그쪽이 뭔데. 감히 나를. 감히 나를 왜 건드려! 신이 뭔데. 예수가 뭔데. 당신이 신이면 신이지 왜 누굴 건드려. 감히 나를 왜 건드려. 이거에요. 이게 뭐라고요? 그 사람이 나쁘다? 악하다? 아니지요. 임재범이 나쁘다. 아니지요. 뭐라고 했습니까? 두 자로. 현상.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는 현상.
분노가 나오는 거예요. 분노가. 그 분노의 결과는 뭐다? 십자가 사건의 현상이 나오지요. 스가랴에 보면 레위언약을 완성한 십자가 지기 직전의 스가랴 예언서가 있다고요. 스가랴 예언서의 특징이 뭐냐, 뭐를 중점으로 하느냐, 성전을 왜 안 짓고 있어? 그 이야기라고요. 성전.
그럼 성전을 지었으면 됐다. 이게 아니고 성전을 지었냐? 아니야. 앞으로 올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는 성령에 의해서 성신에 의해서 성전이 있을 것이다. 항상 내용은 성전중심이에요. 그럼 성전은 어느 언약의 법칙에 적용 받느냐, 레위언약에 저촉을 받습니다.
레위언약은 뭐냐 하면 죽은 제물의 죽은 사건을 그것을 고정화시키고 그걸 시스템화시켜서 그 다음부터 계속 그걸 반복하는 거예요. 반복하는 거예요. 그 뿌리는 뭐냐, 태가 죽었는데 이삭이 생겼잖아요. 아까 창세기15장 봤지요. 아브라함은 언약에서 레위언약이 나와요. 그게 히브리서7장에 보면 바로 아브라함 위에는 멜기세덱이 있고, 그 다음에 아브라함이 있고, 아브라함이 십일조 바칠 때 그 안에 허리에 누가 들었다? 허리에 레위지파가 들어있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난다는 말은 그 안에 장차 임신될 레위언약을 받을 레위지파도 이미 멜기세덱과 아브라함 안에서 만나고 있는 거예요. 러시아 인형 같아요. 인형 속에 인형이 있고, 인형 속에 인형이 있는 거예요. 예수님 속에 사도바울있고, 예수님 속에 우리 들어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사건은 지나간 거다.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는 것이고, 언약 사건은 지나간 게 아니고 언약 사건은 그걸로 수정 불가에요. 완전체가 돼요. 완성체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 사건 안에서 계속해서 뭐가 일어나는 거예요?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현상이. 제목을 바꾸고 싶다. 현상으로.
현상인데, 이 현상은 반드시 짝이 있어요. 쌍둥이 짝을 만나요. 쌍둥이인데 그 쌍둥이가 뭐냐 하면, 니가 내고, 내가 너에요. 그쪽이라 하는데 그 쪽이 내 쪽이고, 내쪽이 그쪽이에요. 똑같은 사고방식과 똑같은 육신의 본성과 똑같은 선조체, 똑같은 해마. 똑같은 대뇌피질, 똑같은 에너지의 능률화, 똑같아요. 다같이 죄인들이에요. 죄인들. 누굴 구원하고, 누굴 구원 안하고, 그런 조건이 인간 쪽에서는 전혀 구비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그런 조건 없어요. 똑같아요.
항상 속에서는 뭐냐 하면,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경계를 갖고 있어요. 내 쪽이 형성되니까 저쪽이 있는 거예요. 모두 75억인의 신들. 그것을 아까 한 다양성, 다수성. “서로가 다 다르잖아. 니는 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자. 허튼소리 하지 말고.” 하지요.
이 다양성과 다수성에 뭐가 투입되는가, 레위언약이 주어집니다. 레위언약이 주어지면서 뭐라고 하느냐, 죽자. 다 같이 죽자. 십자가는 다 같이 죽는 거예요. 예수님만 죽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 사는 것이 아니고 다같이 죽는 거예요. 죽자. 죽을 때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통해서 여기서 쌍둥이를 배출합니다. 쌍둥이.
죽기는 죽는데 특이한 죽음, 특수한 죽음을 일반속의 죽음 속에서 따로 빼내주지요. 그게 부활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고, 저주받아 죽는 건 동일한데 그 저주받아 죽는 죽음 가운데 한 분을 빼내지요. 특별히 부활로서 빼내버립니다. 그 십자가 부활을 통해서 언약이 이루어집니다.
그 대목을 한 번 봅시다. 부활로 빼내는 대목을. 아 참, 스가랴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스가랴를 보게 되면, 성전을 향하여 성전 구조가 두 개의 하나님의 이루어지는 것을 두 노선으로 나누어서 이야기해요. 1 → 2 → 1, 1이 2가 되고, 2가 하나되게 해요. 성전은 하나잖아요. 내용을 보면 두 개가 있어요. 하나는 제사장이고, 하나는 왕이고. 왕과 제사장으로 분리되면서 이게 통합이 되어서 도로 하나가 되는 겁니다.
제사라 하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하고, 왕이라 하는 것은 통치를 의미하지요. 세상에 대한 심판을 통해서 왕께서 심판 중에서 자기 원하는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는 기능. 요 두 가지 기능이 바로 예수님에게 와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는 거죠. 그 점을 일단 아시고.
요한계시록 11장이 바로 스가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옵니다. 11장3절 보겠습니다. 내가 나의 그 다음이 뭡니까? 두 증인이지요. 한 증인이 아니고 두 증인이에요. 예수님의 증인이 한 명이면 되는데 왜 두 명이냐, 왜 둘이 되어야 되느냐, 왜 두 증인이 되어야 되는가, 그건 4절에 보면 뭐냐, “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이게 어디에 나온 내용이냐 하면 스가랴에 나온 내용이에요. 스가랴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스룹바벨은 왕이고 총독이고, 여호수아는 제사장입니다. 두 사람이 뭐 세워라? 성전 세우라고 촉구했어요. 그 시대에. 그 두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8절에 보면, 그들이 복음을 증거하게 되면 그 증거하는 그곳에 십자가의 반복이 이루어지면서 그 동네가 애굽이라 하고 8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 되는 겁니다.
10절에 보면, 그 두 사람이 어떻게 돼요? 죽지요. 죽고 난 뒤에 다른 사람은 끝냈다고 좋아하잖아요. 11절에 봅시다. 삼일반후에 어떻게 됐습니까? 그들이. 그들이 두 발로 일어섰지요. 12절에 어디로 갑니까? 그 두 사람이 어디로 가요? 구름을 타고 어디로 올라갑니까? 하늘로 올라가지요. 이게 현상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 십자가 사건이 새로운 그 사건으로 존재의 세계에서 모든 새로운 사건이 등장함으로서 존재라는 구조가 바깥에 의해서 허물어지는 거예요. 이제는. 이 세상이라는 구조가 구조 바깥에서 빠져나오신 분에 의해서 이 구조가 드디어 완전히 무너지는 거예요.
13절에 그 때 지진이 일어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자가 칠천이라. 무너지는 겁니다. 이게 무슨 사건의 여파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서 수정 불가할 정도로 모든 것의 예언을 완성한 효과가 되는 거예요. 완성한 효과.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가셨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활동은 이 땅에서 멈추지 않고 반복되는 거예요. 십자가 반복. 십자가 반복을 위해서 뭐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자기 성도가 필요한 거예요. 주의 증인이 필요한 거예요. 주의 증인은 바로 예수님의 두 가지 기능을 한꺼번에 다 보여주는 겁니다. 이 땅에 오셔서 희생제물이 되시고 승천함으로서 심판주가 되시는 제사장과 왕직을 두 개다 오늘날 성도에게 그대로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 성도가 이 땅에서 살면 안돼요. 그럼 왕이 될 수가 없어요. 교회 다니면서 말씀이 안 들어오고 말씀이 지겹고 한 이유가 뭡니까? 살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누구로 살고 싶어서? 나로 살고 싶어서. 나로. 내가 죽기가 싫은 거예요.
이제 다시 제물로 봅시다. 창세기15장 제물로. 제물이 어떻게 돼요? 둘로 쪼개졌다 했지요. 나라는 자체가 둘로 쪼개지면 나가 없어요.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쪼개졌어요. 이삭은 자기가 밀었던 에서와 자기가 밀지 않았던 야곱은 쪼개지고, 야곱은 남은 열한 아들과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 이름이 뭡니까. 요셉이지요.
요셉의 특징은 꿈이 현실을 지배한다. 또는 통제한다. 꿈이 현실을 지배하고 통제한다. 이게 요셉이에요. 그런데 요셉은 언약을 아는 아버지입장에서 요셉은 죽은 자에요? 산 자에요?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가 살아있지 않은 죽은 자가 현실을 국무총리로 지배하는 거예요. 이게 언약의 세계입니다.
본인은 요셉도 자기가 그렇게 국무총리 될 줄도 몰랐어요. 왜? 요셉이 자기가 알고 있던 선조체, 알았던 해마, 자기가 알았던 꿈만 알지 꿈이 어떻게 스스로 펼쳐진다는 것은 요셉도 꿈의 흐름에 그냥 딸려갈 뿐이지요. 어떻게 될지는 몰라요. 다만 요셉이 아는 것은 뭐냐, 나보다 뭐가 세다? 내가 생각한 이미지보다 뭐가 세다? 꿈이 더 세다는 거예요. 이게 성도 아닙니까.
성도가 착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성도가 계획이 없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똑같아요. 성도 안에는 두뇌 없고, 선조체 없고, 해마 없습니까. 자기 대뇌피질 없어요? 칭찬받기 싫어해요? 누가 싫어해요. 다 좋아하지요. “아이고, 전 굽는 거 봐라. 완전 달인이네. 달인. 니가 이거가지고 장사해도 되겠다.” 이런 칭찬 받아보세요. 두 개 굽고, 세 개 굽고 그러지요. “왜 이렇게 맛깔스럽게 너희 집에 옛날 제사지냈나? 어디 교회 다니면서 아버지 장로면서 맛은 이렇게 잘했나?” 그거 보고 “아, 제발 좀 그쪽하고 나가세요.” 이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우리 편!
“시어머니 뭐 추석하고 나중에 시어머니 백화점가가지고 선물 사드릴까요?” 이리 나온다 이 말이지요. 자기 좋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런데 그거보다 뭐가 더 셉니까?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이 더 센데 어떻게요. 더 센데. 일단 기분은 좋지만, 십자가가 그 기분을 아주 조질 날이 올 겁니다. 장담합니다. 왜냐하면, 생각해보세요.
인간은 두뇌를 갖고 있잖아요. 두뇌를 갖고 있으면 구조를 갖고 있어요. 구조를 갖고 있는 거예요. 구조. 구조에서 나는 뭐하고 싶다? 사랑받고 싶어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인정받고 싶다. 헤겔이 이야기한 건데, 헤겔은 그 많은 책을 하면서 인간이란 뭐냐, 인정받고 싶어서 투쟁하는 존재. 이게 인간입니다. 남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왜? 인정받지 못하면 내가 인정하는 것은 짜증나거든요.
내가 스스로 있다 하는 것은 억지다 말이지요. 내가 지리산 속에서 혼자 해봐야 알아주지도 않고 남이 안 알아주면 혼자 알아주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아! 나 훌륭하다. 나 착하다. 말의 씨가 된다고 나는 훌륭하다. 훌륭하다고 하면 나는 훌륭해지는 거야.’ ‘백날 해봐야 니 혼자 훌륭해. 니 혼자.’ 안돼요. 정말 그것이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서 남들이 와서 “형님, 형님” 할 때 기분 좋다 말이지요. 식구들이 뭡니까. 칭찬하는 존재 아닙니까. 칭찬 못하고 싸울 거 같으면 그거 뭐 식구라 할 수 있어요? 웬수지요.
그런데 이 사랑받고 싶은 이 구조. 이 구조를 주님께서 날마다 십자가로서 이게 쪼개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이 쪼개짐을 당하는 현상으로서의 주님의 십자가라는 제물이 되는 겁니다. 산 제물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뭐냐, 싱긋이 웃는 사람이 성도에요. “나 요즘 망했어. 그런데 이 망한 건 수정 불가라. 내가 나는 죽을 거 같아. 그런데 이 죽을 거 같은 것이 전에는 죽으면 안 돼! 가 나왔는데, 지금은 내가 지금 죽는다면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마음으로 이것도 수정 불가다.” 하고 싱긋이 웃는 겁니다.
끝으로 그 대목 보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빌립보서 4장을 보면서 사도바울이 얼마나 진짜 대단한 존재인 것을 좀 새삼스럽게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뭐 성경보다가 잠 주무시게 하고 나도 그 정도 되겠다. 이리 나오시면 안돼요. 잠만 온다 하면 안돼요. 여기에 보면 빌립보서4장 11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 어떤 형편에 있던지 나는 웃는다. 다시 말해서 내 실수한 거 보고 웃고, 내가 혹시 잘한 거 없지만 잘한 거 있다면 그것도 웃고,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나는 철저하게 망가지는 것도 보고 웃고, 풍부에 처한 것도 웃고 그건 당연히 웃지요. 뭐 여유롭고 느긋한데 안 웃을래야 안 웃을수 없지요. 신났지요. 어떤 형편에 있던지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 있더라도 일체 비결은 뭐냐, 내가 웃는 것. 다시 말해서 내가 기뻐하는 것. 나는 이 형편에 대해서 기뻐한다. 왜? 나는 현상이니까.
이미 내 운명은 결정 났으니까. 그러면 다른 사람이 약 올라서 “니 어디서 배웠냐? 니 어디서 그런 마음을 가졌지? 너는 어떤 대목에서 은혜 받았지?” 이럴 거잖아요. 그것은 이미 나는 죽었으니까. 이게 사도바울이 내린 결론이에요.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니까.
그동안 나 자꾸 뭘 잊어버려. 나 죽었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니까 내 나름대로의 비전과 계획을 세우는 거예요. 어떤 내가 방향을 잡아서 어찌합니까? 이러면서도 어찌합니까? 이것은 협박과 공갈이에요. 내 쪽에서 하나님의 저쪽을 향하여 공갈, 협박하는 거예요.
“이리 나오는데 나 안 건질 거요?” 이런 거요. 웃음이 없어요. 웃지를 않는다니까요. 그게 잘됐다, 잘못됐다, 수정하라, 수정이 문제가 아니고 그게 웃음이 안 나오고 이게 진지한 거예요. 진지한 거. 심각한 거예요. 자기가 자기한테. 왜? 맨날 대화하니까. 조금만 더 참아라. 웃을 날이 올 거야. 웃을 날이 있는 게 아니고요. 망가지고 죽는 날이 그게 웃을 일이에요. 왜? 아브라함이 먼저 웃었잖아요. 이제는 우리가 웃을 차례라니까요.
“이번 사태가 이렇게 나한테 26억이 온 것은 이건 내가 일으킨 사태가 아니고 주께서 일으킨 사태입니다. 허 허 허” “니 방금 웃었어?” “네 웃었습니다.” “왜?” “못 미더우니까요. 믿을 수가 없어요. 내가 어떻게 25억을 받습니까. 못 믿겠습니다.” “가져가. 가져가든지 말든지.” 내가 25억 들어온 것만 예를 들었는데 25억 나간 걸 차마 예를 못 들겠어요.
웃을 수 있는 그것은 성령께서 성령의 기쁨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게 쪼개져야 되는데, 아하~ 쪼개지지 않으니 내가 나의 노예고 나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가 나를 닦달내고 나를 못살게 굴고 그래놓고는 다 남 탓하고 하나님 탓하고, 예수 탓으로 돌리는 거 주여, 이것마저 하나의 현상이라면 웃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해주시고 이 웃을 때 이것이 바로 죄에서 건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