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교회의 발생

아빠와 함께 2024. 5. 22. 16:13

안양20240509a고후4장10절(교회의 발생)-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45페이지에 보게 되면 그 중간에 고린도후서4장10절,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또 고난은 우리에게 상을 가져다 준다.(살후1:7,계2:10) 마태복음5장 11절에 나로 인하여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10.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공동변역)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표준새번역)

10.  우리는 항상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이는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우리말성경)

10.  We always carry around in our body the death of Jesus, so that the life of Jesus may also be revealed in our body.(NIV)

10.  Always bearing about in the body the dying of the Lord Jesus, that the life also of Jesus might be made manifest in our body.(KJV)

10.  always carrying about in the body the dying of Jesus, that the life of Jesus also may be manifested in our body.(NASB)


신약에 와서 복이 주어지는 방식은 구약에서는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고 되어있는데 여기서는 뭐냐 하면 예수님으로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악한 말을 할 때만 복이 와요. 신약에 와서 그렇습니다. 구약에서는 그냥 복이 오지 않아요. 신약에서는 은혜가 오지요. 아이고, 이거 중요해요. 은혜하고 복하고 다릅니다.

은혜는 김정은이라도 선이든 악이든 관계없이 햇빛과 공기주는 은혜에요. 나중에 그 은혜 준 책임추궁 들어올 겁니다. 마지막에. 인간은 은혜를 뭐로 바꾸느냐 쓰레기로 바꿔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많아서 소모를 다 못해서 쓰레기처리 하고 있는 거예요.

은혜가 쓰레기로 변하는데 거기에 뭐가 끼어드느냐 하면, 여기에 인간이 끼어들어서 은혜가 쓰레기로 변하는 겁니다. 뭐 신자라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래서 하나님 은혜는 쓰레기로 변하기 전에 요 성도는 인간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로서 들어가게 되게 되면 이것은 뭐냐 하면 생명이 되고 이게 복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은혜가 우리한테 주는 은혜가 아니고 우리와 함께 계신 그리스도에게 준 은혜가 되겠지요. 은혜라는 것은 우리가 있다면 은혜가 우리한테 주는 것은 없어요. 은혜는 반드시 예수님에게서 나와서 예수님에게로 돌아가는데 우리가 여기에 이 경로에 끼어들었을 뿐입니다.

주님이 하신 자기 노력을 주님이 건사하는 거예요. 회수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농부요, 포도나무의 원리지요. 아버지는 농부, 나는 포도나무다. 주께서 나를 키웠다. 키웠는데 그러면 성도는 뭐냐, 너는 나한테 붙어있는 가지지요. 가지다 말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 자체가 철저하게 예수님은 우리 인간존재하고 다른 존재로 구분 짓는 겁니다.

이렇게 교회의 본질이라는 제목하에 45페이지잖아요. 초반의 이 이야기는 요 교재 전체 이야기 ‘뒤에서 본 한국교회’의 전체 이야기는 교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것은 없어요. 신약 성경이 되어야 교회가 생기지 그 전까지는 이방인과 이스라엘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교회가 아닙니다. 이방민족도 교회가 아니고요.

교회라 하는 것은 사도행전20장 2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피를 흘려야 교회가 돼요. 피로 값 주고 사야 교회가 된다고요. 그러면 예수님의 피가 동원되기 전에는 이스라엘의 집단을 이루기 위해서는 뭐가 동원되겠습니까. 인간들의 자기의 노력과 자기의 애씀과 시도와 또는 순교하는 피, 이런 게 동원되겠지요.

순교자가 순교했다고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피지 메시아 피 아니잖아요. 메시아 피를 모형으로 보여주었지 모형은 모형일 뿐입니다. 모형은 실체가 아닙니다. 따라서 교회는 없다는 말은 교회는 없어요. 이 역사 속에 교회는 없는데 그럼 역사 속에 사도행전에 보면, “교회가 있잖아.” 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요. 그러나 사도행전은 역사가 아니고 역사의 끝부분이에요. 끝을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요엘에 보면 마지막 때에 오는 게 뭐냐 하면 성신이 오게 되어있어요. 요엘2장에 보면. 그러면 교회 이전에 뭐가 있다? 성령 있다. 사도행전 2장이야기입니다. 오순절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 됐잖아요.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어요. 이 성령은 언제 온다 했습니까? 역사 속에 옵니까? 아니면 마지막 때 옵니까? 마지막 때 성령이 와요. 마지막 때에.

역사의 진전이 의미가 없을 때에 그러니까 성령이 오셨다는 자체가 역사는 이제 그만! 그런 뜻이에요. 역사는 그만! 그 뒤는 뭐냐, 마지막! 마지막! 마지막! 제자리 뛰기 하는 겁니다. 어제도 마지막! 오늘도 마지막! 내일도 마지막! 마지막에 스카이 퐁퐁 하듯이 마지막을 뛰는 거예요.

그러면 멀쩡한 역사가 마지막이 되었느냐, 궁금하지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심판 받기 때문에, 심판이기 때문에 마지막인 거예요.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타작마당이라 하는 거예요. 타작마당. 한식집 간판 이름 아닙니다. 그냥 살벌해요. 타작마당이에요. 심판은 가려내고 분류하는 거예요. 짝퉁하고 진짜하고 가려내는 거예요. 뭐 중국산하고 가려내는 거예요. 이거 또 이야기하면 중국 비난하지 말라고..., 뭘 말을 못해.

심판 이게 가짜와 진짜를 가려내는데 가려내는 방법은 예수님의 자신의 몸이 기준이 되어서 가려내지는 거예요. 예수님의 몸이 어떤 몸이냐 하면, 성령 받은 몸입니다. 성령을 입은 몸이에요. 왜 교회가 없느냐, 역사 속에 있기 때문에 역사 속에 있는 인간세계는 교회가 없다.

왜 역사세계는 인간세계는 교회가 없느냐, 다 가짜기 때문에 그렇다. 왜 멀쩡한 인간을 가짜라고 매도할 수 있느냐,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은 처녀로부터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처녀로부터. 동정녀로부터 안 태어나서 그래요. 참, 하나님의 기준이 가혹하지요. 하나님의 기준은 따라 잡을 수 없게 만들어버렸어요. 흉내내기도 안될 정도로 만들어버렸어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성령을 입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는 말은 그 분만이 뭐가 된다는 말이에요. 참된 진짜 인간이다 말이에요. 진짜 인간이라면 나머지 예수님 빼놓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처녀 몸으로 태어난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는 뭐가 돼요? 전부다 가짜가 되겠지요. 당연히 가짜지요. 로마서3장에 나옵니다. 모든 인간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가짜라는 뜻이에요. 가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가짜에요. 어떤 강도가 있었다. 제사장이 있었다. 가짜. 레위인 가짜. 그러면 누가 진짜냐, 율법을 만족시켜야 돼요. 누가 그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라는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에 딱 들어맞아야 진짜가 돼요.

강도만난 사람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제사장 그리고 레위인을 날카롭게 분류시키지요. 분류시킵니다. 그건 하나의 비유니까요. 진짜 거기서 진정한 자비를 베푸는, 자비를 뭐 줬다 뺏다 하는 정도가 아니고 그 사마리아인이 가면서 그냥 내가 돌봤습니다. 하고 끝이 아니라 혹시 여비가 더 들면 끝까지 보장해줄게. 책임져줄게. 이리 된 거예요.

피가 필요하면 헌혈하고 의료보험카드 필요하면 내거 갖다 쓰고 이런 거. 끝까지 가자. 끝까지. 이웃사랑하려면 끝까지 갈 수 있는 사람. 그런 분 누굽니까? 예수님 밖에 없어요. 끝까지 가는 거. 언제까지? 강도 만난 사람이 회복될 때까지. 책임지고 끝까지 가는 것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왜? 나머지는 안 되는가? 가짜기 때문에. 내가 나를 돌보면 안 되는가, 내가 가짜기 때문에. 아주 냉철하게 봅시다. 여러분이 처녀의 몸으로 태어난 게 아니지요.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의도적으로 육의 내림에서 그걸 절단시키는 게 뭐냐 하면 남녀, 남녀, 남녀관계에 의해서 난자, 정자 만나서 태어난 그걸 의도적으로 그걸 배제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런 식으로 해야 우리들은 다 인간 맞지. 라는 이러한 통속적이고 선입감을 한꺼번에 몰아서 모조리 가짜가 가짜끼리 이야기한다가 되는 거예요. 가짜가 가짜끼리.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왜 잠시 인간이었는데 왜 도로 흙이 되느냐, 그 내막도 살펴주는 거예요. 인간 존재는 다이소 물건이에요. 헐한데 소모용이에요. 신상 나오면 언제든지 매장에서 또 갈아치우지요. 매장 개념 딱 떠오르지요. 신상. 일시적으로만 있는 것, 한시적으로 있는 것은 가짜입니다. 있다가도 없는 안개 같은 거예요. 상품을 매장에 진열하고 팔면서 그 매장하는 그 가게 주인도 상품과 같은 존재지요. 있다가 없어지는 거. 가짜입니다.

“예수님은 참 착해서 훌륭하다.” 아니에요. 성령이 함께해서 그래요. 성령님이. 그러면 우리도 성령 주면 되지 않겠느냐, 니 역사 포기할래? 성령은 마지막 때 오는 거예요. 성령이 올 때는 조건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역사 접어라. 지나간 것은 지나간 걸로 끝났어요. 역사 접어라. 옛날에 70년도에 나왔던 노래 중에 이런 노래 있어요. 과거는 흘러갔다. 라는 노래가 있어요. 과거는 흘러갔다. 여러분들은 모르지요. 나는 그 때 그 가락이 좋고, 가사가 좋았는데 지금 보니까 약간은 의미가 있어요. 지나간 거지만.

인간이 가짜라는 것은 성령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짜가 되는 겁니다. 사도행전2장16~18절 볼게요.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언제 내 영이 온다 했습니까? 언제? 말세에. 마지막 때에. 마지막 때는 심판 때입니다. 착 착 착 책꽂이에 정리하듯이 정리합시다. 뭐든지 집안에 착착착 정리가 되어야 보는 사람이 마음이 편해요.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모든 것은 차이나는 어떠한 종교나 민족이나 학력이나 이런 거 없이 그냥 주실 때나 받을 수 있는 것. 자기 인격으로 당연히 받아야 된다는 조건이 다 철폐되는 것. 열심히 했으니까 교회 충성했으니까 전부 다 이런 거 없어요. 기도 많이 해서 주는 거 없어요. 마지막 때니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습니까? 가짜 역사로서 판명이 됐지요. 그러면 주고 안 주고는 누구 마음이에요? 하나님 마음이지요.

그러면 성령을 왜 주느냐, 바로 심판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줄 때만 복을 받고 안 주면 그냥 저주 아래 저주 그대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주고 싶은 사람이 그냥 자기 마음대로 주는 거예요. 내 인생에 대해서 고민한다는 자체가 참 시건방진 일입니다.

남은 가졌는데 나는 왜 안 줘. 이 자체가 이건 그만큼 그 사람은 자기만의 과거가 있다는 티를 내는 거예요. 내가 이걸 얻기 위해서 과거에 내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이리 되어버리면 왜 나는 안 주는데? 이리 되는 거예요. 왜 성령이 나한테는 오지 않는가, 거기 2장에 보면 마지막 때에 예언을 할 것이요, 라고 되어있어요. 여기부터 약간 어려워집니다.

자, 먼저 성령 받은 분이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성령 받을 때 아무도 성령 받은 사람이 없어요. 누가 있어요? 구약 때는 성신 받았어요. 아무도 성령 받지 않았어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아~ 정말 어려운데요. 여러분한테 말씀드리고 싶어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에 내용이 함축되어서 성령이 그대로 인수인계해서 받은 거예요. 모자람이 없이. 성령 받았다는 말은 모자람이 없는 거예요.

성령의 능력이 임했다, 이건 성령 받은 게 아니에요.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힘이 오는 게 아니고 재주가 오는 게 아니고 기적이 오는 게 아니라 주님이 쓱 들어오는 거예요. 그 전까지는 말씀이 내 앞에 있다가 이제는 말씀이 들어오는 게 아니고 다 이룬 말씀이 들어와요. 다 이룬 말씀이. 참, 이거 하면 마귀가 이런 이야기에 아주 분노를 느낍니다. 분노를.

마귀는 골기퍼잖아요. 들어오지 말라고 공을 막고 있는데 대한축구협회 회장님이 공을 안고 골기퍼 비켜서 들어온 거예요. 요새 대한축구협회 욕 얻어먹고 있지만. 그냥 골 하나 들어온 게 아니에요. 축구게임 끝났음을 통고하는 거예요. 축구게임 끝났어. 인간은 게임으로 희망을 갖는데 희망을 갖는 게임 자체가 더 이상 불필요해져 버린 거예요. 그냥 성령이 왔다는 말은 그냥 생명이 쓱 들어온 거예요.

생명이 쓱 들어왔다는 말은 그 생명을 지으신 분이 끝까지 책임지는 정도가 아니고 그 생명을 증거해야 될 포장지가 필요한 거예요. 포도나무의 가지가 필요하듯이. 주인이 바뀌지요. 그래서 그 45페이지에 후딱 읽었던 본문 다시 보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나타나다. 우리가 병원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 같으면 뭡니까? 증상. 증상이에요. 증상. 발현된 증상. 어떻게 열이 나십니까? 목이 칼칼하십니까? 요런 거. 한약 한 번 달여 잡수시겠습니까? 증상이지요. 증상을 우리가 어떻게 관리합니까. 이 말은 성도는 자기 인생을 자기가 관리 못해요.

주님이 계시는 증상이 나오는데 이걸 자기 행함으로 단도리 한다. 안 되지요. 성령이 가만두지를 않아요. 요렇게 정리하면 쉽지요. 성령을 입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어요. 다 이루고 그걸 그대로 성령님께서 그걸 그대로 가지고 가짜 인간 속에 그걸 집어넣으신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16장15절,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여기서 그가 누구냐 하면, 13절에 보면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이리 되어있어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한다. 하지요. 성령은 자존심도 없어. 자기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성령은 자기 말을 안 해요. 누구 말을 하느냐 하면 예수님 말씀을 하셔요. 예수님의 것을 그냥 계속 재탕하되 어디서 재탕하느냐,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왕왕거리면서 재탕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만남은 왕왕거림이 있어야 돼요. 왕왕거림이. 생명에 관한 왕왕거림.

제가 여러분에게 초반이지만 문제 하나 낼게요. 고린도후서4장10절인데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리 되어있지요. 문제 나갑니다. 여러분들이 성도 같으면 성령을 통해서 이걸 지키는 겁니까? 말씀을 우리보고 지키라는 말씀이에요? 무슨 이야기에요? 1번 지키라는 이야기다. 2번 못 지킨다는 이야기다. 어떤 겁니까? 말씀이. 성령까지 동원하면 성령께서 이걸 하게 해서 우리가 지켜낼 수 있다고 보면 어떻습니까? 돼요? 안돼요? 안되지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이 말씀대로 살아라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지켜주는 거예요. 요 말씀을 지키는 거예요. 요 말씀을. 요 말씀을 내가 지키는 게 아니고 나 빼버리고 성령이 그 속에 이 말씀을 말씀되게 지켜줘서 우리는 하나의 발현현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증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이.

똑같은 문제인데 여러분이 쉬울 거예요. 요한복음3장16절 유명한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그 말씀은 우리가 지키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그 말씀 자체를 지키도록 해준다는 말입니까. 그 말씀을 지키도록 해준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성령이 지킬 때 무엇이 떨어져나가고 성령께서 뭘 발로 차버리는 겁니까. 요한복음3장16절을 내가 지키려는 그것을 차버리는 거예요.

“이 가짜가 말씀을 지켜? 내가 지킨다는데 니가 왜 그 말씀을 니가 왜 지키고자 해? 수상해. 왜 지키고자 해? 왜 지키려고 하는데?” “영생을 얻으려고요.” 그러니까 가짜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킨다는 자체가 행함이 되지요. 행함이 모이면 역사가 돼요. 자기만의 역사. 즉 자기의 과거가 되고. 참 쉽죠잉. 쉽다는 이야기 수천번 했어요.

우리는 헛껍데기라니까요. 우리는. 인생은. 내 안에 말씀이 살아있어야 되는 거예요. 이걸 지키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지킨다는 것은 어디서 나왔는가, 도대체 자꾸 말씀 보면 지키려고. 지키려고 끈을 찾기 위해서 말씀을 보는 이 성향. 이것도 일종의 증상인데요. 이 증상은 어디서 나왔는가, 에덴동산에 나무가 두 개 있었어요. 하나는 선악을 아는 과일을 가진 나무,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생명을 주는 생명나무, 생명나무의 과실을 맺힌 나무. 이 두 가지 나무가 있잖아요. 이 두 가지 나무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선악을 아는 과실을 따먹지 말라고 했지요.

뒤에 조건이 붙어있어요. 뭐냐 하면 정녕 죽으리라, 되어있어요. 정녕 죽으리라. 그러면 마귀가 와서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 따먹은 과실을 이걸 따먹게 했습니다. 그러면 따먹고 난 뒤에 어디로 쫓겨났습니까? 땅의 근본 이 대지로 쫓겨났지요. 저주가 늘 일어나는 저주가 용암처럼 벌벌 거리는 어디가도 저주가 일어나는 그 대지 속으로 인간들은 갔지요. 가게 되면 나라가 두 개 됐지요. 하나는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는 곳과 그 다음에 선악을 아는 지식은 있지만, 뭐가 없어요? 생명이 없는 곳과 생명이 있는 곳으로 둘로 나누어졌지요.

나누어졌는데 선악을 아는 지식에 뭐가 따라 붙느냐 하면, 정녕 죽으리라, 따라 붙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악을 알면 뭐가 된다? 정녕 죽으리라가 되는 거예요. 따라 붙어있으니까. 그래서 창세기3장에 보면 니가 실컷 살고자해도 죽게 되고 나중에 흙이 되는 겁니다. 흙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첫 째 강의 가장 중요한 테마입니다.

흙이 된다는 말은 너가 없다는 말이에요. 너가 없다.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은 없다. 가짜밖에 없어요. 가짜니까 인간 취급하지 말고 진짜 인간은 없는 거예요. 자, 인간은 없다는 인간은 흙덩어리밖에 없고 인간은 없는데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이 동의를 못하지요. 왜? 나는 엄연히 있고 엄연히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엄연히 나는 살아가야 되니까. 돈 벌고 애써서 자식 키우고 살아있어야 되니까.

인간세계에서는 이 두 가지를 포기를 못해요. 내가 엄연히 있고 나는 엄연히 살아있다. 이 모든 스토리 이야기를 여기서부터 출발하자는 거예요. 이 세상 인간들은. 성경을 보든 뭘 보든 하나님을 대하든 모든 문제를 내가 여기 있고 나는 살아있다부터 출발하자는 거예요. 내가 없고, 나는 죽었다고부터 출발하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왜? 모든 인간이 다들 거기에 다 동의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진짜 인간을 뭐로 만들었어요? 뭐로 출생케 했습니까? 처녀인데 여기에 성령이 임해서 동정녀에서 예수님이 태어났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태어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와의 차별함이 이 세상에서도 드디어 구분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성령으로 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러면 둘 중에 하나는 진짜고 둘 중에 하나는 가짜가 되는 겁니다. 둘 중에 하나가 가짜가 되는 거예요.

사도행전2장에서 마지막 때에 심판 때에 성령을 주시는데 그 성령을 주시는 내용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이리 되어있지요. 환상, 꿈, 예언, 이게 다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구약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 언제 이루어진다? 마지막 때에 이루어지는 거예요. 어떻게 와서, 성령이 와야 이루어지는 거예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요. 성령은 바로 오는 게 아니라고요. 누구한테 와서 성령이 오는 거죠? 성령 받았던 예수님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독단적으로 다 이루어 냈다는 것이 성공을 해야 그 다음에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등장함으로서 우리는 있는 존재에요? 없는 존재에요? 없는 존재에요. 우리는 죽은 자에요? 산 자에요? 죽은 자죠. 그러면 살아있는 것은 영원히 계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지요. 그러면 영원히 살아계신 분도 예수님밖에 없지요. 그러면 누가 활동하는 거예요? 영원히 활동한다는 그 의미도 예수님의 활동만 인정받고 우리 활동은 인정하지 않지요. 우리 활동 속에서는 죽음만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의 활동은 생명만 나오지요.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만 나오지요.

자,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을 가로막지요?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누가 예수님을 가로막습니까? 첫째 예수님이 안 보여요. 안 보이니까 이론상은 있지만, 실제상은 없어요. 그러면 누가 있어요? 때려죽여도 내가 있어요. 내가. 내가 있다고요. 내가 있어서 어버이날 대전 가서 부모님 모시고 하는 거예요. 내가 있는 거예요. 갈 때 빈손 갑니까. 용돈드리고 밥 먹으러 가면 용돈 드려야 되지 않습니까.

매사가 내 있는 것부터 출발하니까 매사가 주님의 있음을 밀치게 되는 거예요. 밀어내는 겁니다. 내가 가로막아요. 인간이 내뱉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말이라고 해요. 말. 요번 수련회 신명기 제목은 ‘말과 말씀’입니다. 인간이 내뱉는 것은 말이에요. 말. 가짜 인간에서 나오는 건 말입니다. 말.

그런데 주님께서 나오는 것은 말이 아니고 뭐냐 하면 말씀이에요. 그 말씀이 어떤 말씀이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하신 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예언이고, 예언은 성령과 동반해서 하지 않으면 예언이 성취성이 없어요. 반드시 성령과 동반해야 돼요. 그 모든 예언을 누가 이루었습니까. 예수님 홀로 단독으로 이루었지요. 분명히 합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 단독으로 이루었습니다. 단독으로.

단독이라 하는 것은 인간세계는 뭐가 있다? 선악지식이 있지요. 그럼 인간의 말들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말만 하면 뭐가 나와요? 선악지식이 마구 마구 쏟아지는 거예요. 폭탄 쏟아지듯이 쏟아지는 거예요.

철학자 두 명을 제가 언급해 드리겠습니다. 칸트하고 하이데거인데. 들어보세요. 칸트. 칸트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이 세상사는 윤리와 원리는 도덕은 오직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야 된다. 이런 이야기했어요. 무슨 뜻인지 감이 오지요.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둔다.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은 어떤 것도 악이다. 따라서 인간이 완벽하지 않고 실수 많고 오류가 많고 지식도 모자르고 하지만, 그러나 그 방향성 하나가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방식이라면 그가 뭐가 돼도 우리는 그걸 용납하고 용서의 대상이 된다고 했어요.

예를 들어서 어떤 인간의 존엄성 외에 다른 것에 목적을 두면 안 된다는 거예요. 사랑하되 돌보되 “내가 사랑하면 너는 얼마 줄 건데?” 이런 식으로 하지 말라는 거예요. 칸트 이야기는. 그냥 인간 자체의 존엄함, 존재함 자체를 목적으로 두고 해야 가장 완벽한 도덕이고 윤리라고 한 겁니다.

그 칸트의 주장을 그 당시 신학교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바로 산상설교의 핵심이라고 본 거예요. 인간 자체를 사랑함으로서. 이웃을 사랑한 걸로 인간 자체를 사랑함으로서 철학적으로 이웃 사랑을 그렇게 표현했다고 했어요. 그걸 신칸트주의 학파라고 하는 거, 신학에서 나온 것.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이 한 번 시비 걸어 보세요. 바로 이 언급에. 이 시비를 건 사람이 하이데거에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면 반드시 이 사회에 뭐가 있어야 하느냐 하면 규범이 있어야 돼요. 규범. 법률. 도덕. 이게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하이데거 말이. 뭐 지킬 것은 지키고 이런 거죠. 있다면. 그러면 그 규범이 그 법이 우리에게 족쇄가 되지 않느냐. 족쇄가 되지요.

다시 말해서 규범은 나는 말고 다른 사람은 지켜. 나는 내 맘대로 할 거야.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본성을 갖고 있는 거예요. 하이데거가 보기에. 그렇다면 “다 같이 불편하더라도 사람들이 힘들더라도 지켜줄 것은 지켜줘야 그게 인간이 인간다움으로 짐승과 다른 차이점이다.” 라고 한다면 그게 하이데거가 칸트를 비판한. 한다면 규범 자체를 어떻게 할 건데요. 규범 자체를. 그게 우리한테 짐이 되지 않는가, 일종의 간섭 받는 게 아닌가. 하나님이 간섭하는 게 아니고 옆에 있는 너와 내가 서로가 서로를 간섭하고 있는 이런 것에서 어떻게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얻겠느냐 하는 거예요. 어떻게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겠는가.

동네에 20대의 청년이 100명 있다. 다른 애들 청년들 군에 보내가지고 우리가 밤잠 잘 때도 보초서가지고 적들로부터 지켜 줘. 하지만 우리 애는 빼련다. 우리 애는 어떻게 하던지. “야, 너 어디 아픈데 없어? 니는 어떻게 군에 후딱 갔다 오는데 없어?” 우리 애는 꼭 전방 가서 제일 위험한데 가자. 이런 부모는 없어요.

아예 전방 보내려하면 밤잠 자지 말던지 아니면 새벽기도 빠지지 말고 기도하던지. 제일 위험한 지뢰가 바로 앞에 있는 잘못 실수하면 터지는데. 거기 가기를 원합니까, 후방에 마산통합병원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위생병원 가던지. 아침에 일어나면 바다향이 확 나오는 그런데서 한 2년 보낼 건지. 어디를 가고 싶어요? 부모보고 선택하라 해보세요. 애 군에 갔다 왔지요. 보세요. 이게 어떻게 됩니까?

규범은 남은 지키되 나는 이 자체가 짐이 된다면 그렇게 타인이 있다는 것, 또는 그런 규범이 있다는 자체가 우리의 진정한 존엄성을 훼손하는 게 아니냐 이론 따지지 말고 실제적으로 이 느낌. 느낌 알지요. 유교 집안에 시집가가지고 신혼여행 갔다와가지고 첫날 하는 게 “아버님, 어머님, 나 다른 거 다해도 제사는 못 드립니다.” 그럴 때 시부모가 “우리 집안은 대대로 지금 28대가 유명한 영의정, 좌의정 했고 유교 집안인데 그 제사 우리 1년에 야야~ 몇 번 안 된다. 열 번밖에 안 돼.” 그럼 며느리가 나는 제사하면 아직까지 혼인신고 미뤄놨는데 나 혼인신고 안 합니다. 우리 여기서 헤어져. 이럴 판이에요.

왜? 우리 집안은 제사드리지 않는 집안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스스로 자유를 과거에 키워온 내 자유를 내가 여기서 와장창 다 부서트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 인간이 내부에 갖고 있는 자유성. 다시 말해서 악마가 심어준 절대적인 신성이지요.

그러면 규범을 철폐, 밀어낸다는 말은 그럼 규범이 없다는 말이에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니까요. 없다는 말이 아니고 규범을 하던 법을 하던 누가 정한다? 내가 정한다. 이게 바로 마귀가 모든 인간에게 집어넣은 거예요. 내가 기준이 되는 거예요. 내가. 그럴 때 나는 비로소 신적인 감정을 느껴요. 내가. 왜 아들이 아버지 자리를 왜 그렇게 부러워하는지 알아요? 아버지가 오야붕이거든요. 제일 돛대거든요. 집안에서. 지금은 좀 바뀌었지요. 돈 버는 쪽이 오야붕이지요. 돈 버는 쪽이 오야붕이지 뭐.

그래서 인간에서 말하는 것은 뭐냐, 자기가 윤리이고 자기가 도덕이고 자기가 기준이기 때문에 그래서 쏟아지는 것은 말씀이 아니고 말이에요. 선악에 관한 지식이에요. 선악이 있는 한, 이거 중요하니까 적어볼게요.

‘선악지식이 있는 한, 나는 여기 분명히 있다. 없다가 아니라 있다.’ 뭐가? 선악지식이 나한테 있으니까요. 선악지식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선악지식의 증상이에요. 선악지식의 증상인 동시에 죽으리라, 의 증상이에요. 아~ 그래서 니가 죽어야 돼. 그래서. 그래서 니가 죽어야 된다고.

그러면 영생 얻는다는 말은 뭐를 죽여야 돼요? 선악지식을 이걸 죽여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걸 안 죽이고 생명나무 따먹을까 싶어서 하나님이 내린 조치가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킨 사건이에요. 이거 애들도 창세기3장보면 다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추방하는 이유. 선악지식은 인간이 소유하면 안 된다는 뜻이에요. 선악지식을. 선악지식을 소유하게 되면 니는 마귀가 되는 거예요. 사탄이 되는 거예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왜 배신했습니까? 가룟유다가 멍청이라서 그래요? 바보라서 그래요? 아는 게 있어서 그래요. 아는 게. 나름대로의 자기 판단으로 하여금 자기가 신이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요모조모 따져도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한테 덕이 안 돼요. 자기의 이상과 자기의 꿈과 맞지가 않아요.

그러면 인간의 이성과 꿈은 왜 있어야 됩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그래요. 가짜고 뭐고 모르겠고 아무튼 무조건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여기 있음이에요. 내가 여기 있음을 부정할 수 있는 재주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있는 걸 어떻게 없다고 해요. 살아있는 걸 죽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내가 있는 걸 어떻게 없어요. 있는데 있는 것을 뭐가 있는가를 조사해보니까 막 말이 나오는 거예요.

들리는 말을 종합해 보니까 뭐냐, 선악지식이에요. 이러면 되고, 이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없는 주제에. 존재가 없는 주제에 계속해서 선악지식을 앞장세워서 내 있음을 강하게 어필하라고 있는 거예요. 남들 앞에.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러한 가짜를 주님께서는 어떻게 활용하고 자기 성도로 만들겠습니까.

자, 아까 이야기했어요. 이 땅에 교회는 없습니다. 동시에 이 땅에 성도도 없어요. 성도, 교회라는 건 없어요. 인간만 있어요. 선악과 아는 인간만 있어요. 그러면 없는 성도, 없는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뭐냐, 성령이 인간을 찾아온다. 아니지요. 그냥 찾아오면 안 되지요. 반드시 누구한테 거칩니까? 예수님한테 거치지요.

예수님이 성령이 함께하셔서 마지막 한 작업이 뭐냐, 있는 자기를 살아있는 자기를 뭐로 바꿉니까? 죽음으로 바꾸지요. 그 잔을 마신 거예요. 교회는 없지요. 없는데,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죽으실 때, 또는 자기 죽음을 전제로 했을 때,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줍니다. 빵과 포도주. 빵과 포도주 안에 뭐가 들어있을게요? 뭐가 들어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살과 내 피지요. 내 살과 내 피를 먹어라. 그 안에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있지요.

성령 받은 분의 죽음이에요. 따라서 빵과 포도주 없이 그냥 죽으면 인간은 죽으면서도 죽음이 뭔지를 몰라요. 선악체제에 의해서 죽는 줄 알고 있어요. 선악체제에 의해서. 그러니까 자기는 죽어도 뭐는 남아있다? ‘선악체제는 남아있으니까 죽고 난 뒤에 선악체제로 나를 재조성하면 안 되겠는가’ 이리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염라대왕 앞에서 하는 거예요. “니가 이 생애 살 때 뭐했냐?” 이리 묻는 거요. 그러니 염라대왕의 아이디어는 극락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만들어냈느냐 하면 이미 내가 선악체계 안고 살아가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예요.

미리 죽고 난 뒤의 세계를 자기가 그려내기 위해서 그걸 구성하기 위해서 미리 만든 거예요. 모든 사람의 동의를 구할 필요 없지요. 모두 동의하니까요. 나쁜 놈은 지옥 가고, 착한 사람은 극락 가고. 그러니가 인간이 내가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선악체계로 가득 찬 존재로 있다니까요.

그 선악지식이 좋은 쪽으로 선악지식이 선과 악 쪽에서 선 쪽에 있으면 내가 사는데 보다 많이 유리하다는 아이디어를 지을 수가 없어요. 바르게 살았으니까 복 받을 거야. 이런 거 있잖아요. 천국까지 뚫어 낼 거야. 이런 거.

그럼 이걸 어떻게 죽이느냐, 이걸. 여러분이 잘 압니다. 구약의 번제단이 있어요. 숯불로 확 피워버립니다. 숯불로. 확 피워버리면. 그 제물의 특징이 뭐냐, 새카맣게 다 타버려요. 그 제물이. 그게 진노의 불이에요. 진노의 불.

자,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진노의 불에 하면 영생 얻습니까? 영생 못 얻습니까? 아, 이거 어려운 문제다. 진노의 불에 타면 우리의 몸이 제단에 누워있는 제물로 생각하고 진노의 불이라면 우리가 그 타고 난 뒤의 영생 얻습니까? 못 얻습니까? 주저하는 거 봐라. 얻어요? 못 얻어요? 둘 중에 하나인데 아무거나 하나 찍어보세요. 진도 나가 게. 못 얻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주님과 함께 되어야 돼요. 주님과 함께 죽어야 돼요. 장렬한 순교 구원 안 됩니다. 내가 나를 치는 거 구원 안돼요. 십자가에 들어가서 죽어야 돼요. 말로서 죽어서는 안돼요. 계속 말속에서만 남아있어서 안돼요. 나는 죽어도 선악지식은 살아지지 않기 때문에. 선악을 아는 지식은 정녕 죽으리라, 할 때 그 죽음을 아버지로부터 심판 받아야 돼요.

그런데 그 심판은 심판받는 자가 그냥 심판받으면 그냥 죽는 것도 진노지만 그 사람이 나중에 요한복음5장에 보면 인간도 무덤에서 부활하잖아요. 모든사람들도. 부활했을 때 지옥 갑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생명나무 되시는 분이 함께 죽어줘야 돼요.

자, 아까 다시 한 번 봅시다. 45페이지,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이 말을 하면 한결같이 여기 우리는 처음에도 죽은 인간이고 생명이 있어도 우리 몸은 어떻게 됩니까. 죽은 몸이지요. 어느 구석에 내가 살았다는 게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나는 보이는데 여러분은 안 보이십니까?

여기 고린도후서4장10절에 어디에도 내가 살았다는 게 없지요. 제가 이리 이야기하면 또 뭐 반발이 일어나가지고 이 말씀을 내가 지키면 되잖아요. 하는데 아까 제가 그럴 줄 알고 내가 뭐라고 그랬어요? 이 말씀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지켜요. 죽은 우리 몸에다가 증상을 일으킨다니까요. 말씀이 말씀을 자체적으로 지키는 거예요.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 줄곧 죽어있으면 돼요. 가짜면 돼요. 그걸로 충분한 거예요. 우리 안에 다른 분이 살아있는 거예요. 그럼 나는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우리 안에 살아있지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안 든다는 것은 뭐냐 하면 선악을 아는 내가 평소에 내가 살아있고 내가 살아있으니까 활동하고 생각하는 건 내가 생각한다. 하니까 자꾸 누가 가리워지는 겁니까? 주님이 가리워지는 거예요.

내가 마치 진짜인 것처럼 행세하니까 진짜 주님이 핍박받고 모독받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밑에 있는 구절이지요. 나로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 그 말씀. 그 밑에 보면 결국 고난이 없는 교회는 성령이 소멸된 교회. 주님의 고난이 드러나야 되는 거예요. 주님의 고난. 주님의 역사, 히스토리.

다시 한 번 첫째시간 정리해 봅시다. 교회는 없습니다. 성도도 없고요. 그냥 가짜 인간들만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처녀로 하여금 성령으로 어떤 특수한 인간을 만들었어요. 이 땅에 태어나게 했습니다. 성령이 그 분한테 집중했어요. 세례 받을 때부터 해가지고 집중 했거든요. 모든 그 분 하는 일이 집중이라고요.

그러면 성령이 있는 몸과 성령이 없는 몸으로 확연해지겠지요. 완전히 달라지겠지요. 성령이 없는 몸을 가지고 육의 몸이라 해요. 육의 몸. 육이라 해요. 육의 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요한복음7장19절에 수요일에 했지만, 어떻게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 하지요. 예수님이 생뚱맞는 질문을 했어요. 생뚱맞는 질문을 했다고요. 그러니까 듣는 사람이 이상해요. 언제 당신을 죽이려고 했느냐?

결국 모세 율법이 방향성을 지난다 했는데 어제. 그 방향성은 결국 뭐였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모든 인간은 선악지식이라는 정녕 죽으리라에서 누구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들통나는 겁니다. 제자들도 다 흩어져버리고 그런데 성령이 왔어요. 성령이 와서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말씀만 해요.

예수님이 하신 그 많은 말씀과 행하심의 결과물을 성령이 와서 알려줍니다. 알려주니까 성령이 온 우리 내부는 우당탕탕 이제 난리가 난 거예요. 나는 살았고 나는 존재한다는 이것이 속에 있는 말씀이 앞세우는 성령의 활동과 우당탕탕 여기서 대충돌이 일어나겠지요.

“내가 지키겠습니다.” “니는 못 지킨다.” 그 싸움이겠지요. “이거해서 영생 얻겠습니다.” “니는 영생 얻을 자격도 안 돼!” 그 싸움이에요. “저는 살겠습니다.” “니는 살지 마! 말씀이 살아야 돼. 니가 살면 안 돼! 너는 영원히 죽어있어야 돼.”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모르지만, 그 성령이 있는 사람에게는 내부에 일어나지요. 그 일어나는 그 경우를 미리 성경에 쫙 깔아놓은 것이 사도바울의 편지입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40509b고후4장10절(교회의 발생)-이 근호 목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악과 따먹도록 허용한 이유가 생명나무에서 나오는 새로운 인간 만들기는 필히 생명나무 되시는 분의 고난을 받아야 그 고난을 본질로 해야 하나님의 천국 백성이 돼요. 여기 45페이지 제일 밑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뭐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이 고난은 두 개가 있어야 돼요. 선악과 지식만 있으면 안돼요. 선악과 지식을 가지고 아무리 고난을 받아봤자 선악과 지식이 제거되지 않습니다.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자체가 선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두 개가 있어야 그 차이가 나고 그 차이가 거룩인데, 혼자 스스로 선악과 속에서 혼자 몸부림치면서 내가 악에서 벗어나 선대로 하겠다. 이건 티벳 불교 같은 그런 것들을 많이 하거든요.

종교에 대해서 공부하려면 여러분이 어디까지 공부해야 하느냐 하면 미리 제가 팁을 드릴게요. 종교에 대해서. 공부할 사람도 없지만. 팁을 드린다면. 어디까지 해야 되느냐 하면 티벳불교를 부처로 했어요. 천주교의 수도원들의 이론이 있어요. 천주교 수도원. 그 다음에 뭐냐, 천주교 수도원보다 급이 높은 자가 누구냐, 동방 기독교의 신비주의가 있어요. 동방 기독교의 신비주의.

동방 기독교의 신비주의보다 더 막상막하 격이 높은 것이 뭐냐, 이슬람 쪽의 신비주의가 있어요. 공통점은 다 뭡니까? 신비주의에요. 그 신비주의인데 그 신비주의와 비슷한 것이 브라만, 흰두교에 신비주의가 있어요. 티벳불교의 신비주의는 유명한 사람 자기 몸에 휘발유 부어놓고 대로가에서 스스로 불타죽은 사람이 탕비한인가 있지요. 그런 사람이 대표적인 사람인데.

그 사람들이 이런 행동할 때 영성에 관한 어떤 이론이 있어요. 이론이. 그걸 공부 좀 해봐야 아, 인간이 어디까지 뻗쳐나갈 수 있는가를 알 수가 있어요. 공부를 해봐야. 신이 된다는 것. 그냥 백날 해봐야 그거 뭡니까? 자기 속에 있는 선악지식을 뽑아낼 수 없어요. 자기가 안 다치고 구원받고자 하기 때문에. 여기 안 다친다는 말은 고난을 안 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아무리 심한 순교를 당하고 고난을 받아도 그 자존심만큼은 그 마지막 액기스처럼 살아있는 조건하에 자아가 살아있는 조건하에 이 정도 수난과 역경은 이겨내리라, 이런 비장한 각오 이런 거 있잖아요. 그걸 하기 때문에 뽑히지를 않아요. 꼭 티눈 같아요. 뽑히지를 않아요. 그게.

강원도에 있는 수도원 있잖아요. 예수원 이런데. 뭐 뒤에 원이 있으면 원장님들 다 있지만. 골치 아파요. 이쪽 종교는 다 베껴가지고. 백날 해봤자 가장 기본은 뭐라고 했습니까? 첫 째 시간에 두 가지가 있지요. 내가 여기 있고, 이걸 부정을 못해요. 내가 살아있고. 살아있다. 이걸 부정을 못해요. 이게 안 되는 거예요.

첫째 시간에 끝에 이야기한 거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언약에 의해서 인간을 진노의 불에 보냅니다. 진노 받아 마땅하지요. 할 때, 그래서 진노 받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여기에 동참을 해줘야 돼요. 성령 받은 분이 동참을 해주게 되면 똑같이 그 분의 진노에 가되 사는 것은 언약이 살아버려요. 말로 들어가서 말씀이 다고요. 인간의 말, 인간의 선악지식. 그 선악지식이 불쏘시개가 되어가지고 말씀이 고난받는 말씀으로 이게 부활되어버려요. 고난받는 말씀. 그러니까 창자국 못자국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제자들은 닭 쫓던 개가 되어가지고 관계가 다 끊어졌어요. 끊어졌는데 고난받는 주님이 찾아와요. 그 때 성령을 통해서 찾아오지요. 고난받는. 그러면 인간은 말을 남기고 자기는 없어지지만, 주님은 뭐를 남기고 본인은 없어졌습니까? 말씀만 남기고 없어졌어요. 언약대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없어지니까 그 말씀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찾아오게 되면 고 말씀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아버지께서 받으시는 예수님 자신의 믿음, 자신의 소망, 자신의 사랑이 들어있어요. 그걸 은사라고 합니다. 은사. 우리말로 하면 선물이지요. 그 선물이 들어와요. 선물이 들어오면서 아까 첫째 시간 끝에 한 것처럼 우당탕탕 한바탕 우리의 내부에서 치열하게 이게 죽을 때까지 계속돼요. 치열하게 다툼이 일어나는 거예요. 야곱이 씨름하듯이. “나 복 받은 사람 맞잖아요. 왜 이래요?” 개산?하면서. 이거 경상도 말입니다.

피테르 브뤼헐(1527~1569네덜란드 화가) 이라는 화가가 있어요. 별로 유명하지 않는데 사실은 미술계 속에서 굉장히 유명한 사람인데 네덜란드의 3대작가 중에 한 사람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그린 그림을 제가 책에서 이렇게 있는데 마침 앞에 카메라가 있으니까 잘 보이도록 10초 드리겠습니다.
제목이 <갈보리 언덕으로 가는 행진>이에요.


이 그림에서 예수님이 안 보여요. 예수님이 보이지를 않아요. 이게 뭐냐 하면 이 사람 화가가 비꼬는 거예요. 교회마다 그 당시 이게 16세기거든요. 교회마다 기독교 문화고 사회고 문명이고 모든 사람이 다 날 때부터 자동적으로 자동 세례를 받아오면서 살아온 그들이 십자가는 없고 일상만 남아있는 거예요. 일상만. 주인공이 날아가 버렸어요. 왜? 본인이 있고 본인이 살아 남아야 되니까.

그거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는 겁니다. 그거부터.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살아있고. 그거부터 이야기하자는 거예요. 나는 없고 나는 선악지식을 아는 말뿐이라는 생각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얼마나 선해지느냐 그걸 선한 게 아니고 내가. 내가. 선하면 안돼요. 이 세상 가짜 인간들은. 선하면 안 되고 내가 선해야 돼요. 내가. 왜? 내가 여기 옆에 있으니까. 선악지식이 선악지식 값을 하는 것은 내가 선할 때만 그 값이 난다는 거예요. 그 가치가 빛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뒤에 뭘 잘라낸 거예요? 선악을 아는 것은 어떻게 된다? 정녕 죽으리라를 잘라버린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선악지식을 알기 위해서는 이 성경말씀 본문을 성경 전체를 반갑다 성경아! 이리 되는 거예요. 반갑다! 성경아! 이걸 지키면 내가 기본에 갖추어져 있는 시스템은 선악지식, 성경은 말도 거룩한 성경, 따라서 이 성경을 보고 익힘으로서 지식을 확보함으로서 그걸 소유함으로서 나는 점 점 더 갱신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 말이에요. 갱신.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된다는 거예요.

있기는 있는데 더 괜찮은 인간. 살기는 사는데 괜찮은 훌륭한 사람으로 살아남는 것. 그것 때문에 생긴 것이 가짜교회잖아요. 교회라 하는 것은 말씀이 나와야 교회지, 말이 나오면 교회가 아니에요. 말씀만 나와야 돼요. 말씀만. 그 말씀 앞에 우리는 하나도 그 성경 말씀에 지킬 것은 하나도 없다가 나와야 돼요. 그걸 확인해야 돼요.

교회라는 것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만 남기고 사라진 그 말씀만 나와야 된다고요. 예수님 보고 싶다. 이러면 안돼요. 하나님께서 인간세계는 날아가도 선악지식은 남게 만들었어요. 선악지식은 남고 모든 인간은 다 날아가요. 그리고 선악지식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죽이는 것이 참으로 합당하다. 왜? 정녕 죽으리라로 합당하다는 것을 선악지식에 흐름 속에서 증명해 내시는 겁니다.

정녕 죽으리라 된다면, “선악에서 조금만 알았어! 그럼 지옥이나 가라.” 그게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저는 어떻게 됩니까? “니는 성령으로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저가 있어?”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은 가짜인데요. 그런데 성령을 받았으면 어떻게 되느냐, 받아도 마찬가지에요. 받아도 나는 어떻다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분은 말씀이어야 되지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내 말을 항상 구박하고 오직 그 구박을 통해서 감추어졌던 내 말이 감추어졌던 내 선악지식과 윤리와 규범과 도덕에 감추어졌던 예수님의 생명을 나를 핍박하고 짓밟음으로서 드러나게 하는 거예요. 드러나는데 그게 핍박하고 짓밟을 때 나도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어떻게 했습니까? 야곱이 천사하고 씨름할 때 밤새 씨름했잖아요. 우리가 믿어야 될 말씀도 나로 인하여 상처를 입은 거예요. 그게 고난인 거예요. 주님의 고난.

니가 나를 죽이는도다. 우리가 언제 주님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서로 대화가 되지를 않아요.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될 건 뭘 해야 되느냐 하면, 악마가 어떻게 활동하고 악마가 인간을 어떻게 지옥으로 몰아세우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지 그러면 그 흔적을 우리는, 악마는 말이지요. 말. 선악을 통한 말. 인간은 자기 말을 통해서 자기 존재가 살아있다. 여기 말하는 것으로 봐서 내가 살아있잖아를 증명하는 방법이 말밖에 없어요. 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안 죽었잖아. 말을 하는 거예요.

그 말을 어디서 찾는가, 제가 오늘 공부를 위해서 오면서 두 가지를 뽑아봤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도 뽑아보기를 바랍니다. 두 개의 프랭카드의 문구를 두 개 적어봤어요. 하나는 뭐냐, ‘최강취업’이에요. 우리동네에 이시아폴리스에 보면 뭐가 있는가 하면, 이시아에 섬유대학이 있어요. 3년제 전문대학급 섬유 디자인만 가르치는 대학. 그래서 딴에 취직이 잘되는 요새 50%되면 잘된다 하는 거예요. 옛날에는 90%되어야 잘된다고 하는데 요새는 점점 다운되어가지고 반타작해도 취업되었다. 괜찮은 대학이라 볼 수 있어요. 그 정도 이상 되는 대학이에요. 그래서 프랭카드가 최강취업이라고 되어있어요. 최강취업.

자, 우리가 공부하는 거 여기서 적용시켜 봅시다. 응용해 봅시다. 이게 왜 마귀 말인지. 말씀이 아니고 왜 말인지. 딱 보면 최강취업했잖아요. 그럼 뭡니까. 누가 취업하는데? 내가. 니가 왜 취업하는데? 내가 시체가 아니거든. 내가 살아있잖아요. 내가 있잖아요. 있으니까 있는 인간끼리는 말씀은 이해 안 돼도 뭐는 이해된다? 말은 이해된다. 최강취업. 최강취업 옆에 붙은 간판은 ‘탱탱 치킨’. 뭐 이해 안 될 수가 없어요. 쏙쏙 들어와요. 탱탱 치킨. 나름 브랜드를 갖고 있어요. 최강취업.

옆에 옆에 이런 프랭카드가 있어요. 프랭카드 길게. 이건 대구시 민주당에서 한 건데요. ‘공정을 포기한 편파보도. 매일신문은 국민의힘의 기관지인가’ 이게 프랭카드에 있어요. 이제 분석 들어갑니다. 이게 말씀이 아니고 뭡니까? 말이지요. 말은 성령 받지 않은 자의 입에서 나오는 게 말이지요. 그러면 그들은 왜 이게 의미 있다고 보는 이유가 뭐냐, 민주당에서 했다 말이지요. 매일신문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오래된 신문사입니다. 아직 안 망하고 있어요. 안 망하고 있는데 안 망하는 이유를 알겠지요. 국민의힘의 기관지이니까.

이걸 뭐해서 노리겠다는 겁니까? 언론이라 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공정한 언론기관이라면 무엇을 위해서 공정해야 되는가, 누구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기회를 고루 줘야 되지요. 칸트의 이론에 의하면 그게 뭡니까? 인간의 존엄성이지요. 인간의 존엄성. 먹혀들어가지요. 뭐 민주당 고난받고 있어요? 지금. 아니지요. 힘이 모자르지 고난받는 건 아니잖아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믿지 말라고 오셨어요. 왜? 성령을 안 받은 게 분명하니까. 성령은 자기만 받았으니까. 믿는다고 한다면 이건 전부 다, 믿는다고 한다면, 그건 안 되지요. 자기에게서 나온 능력이 나왔을 때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뭐 이렇게 잡았을 때에 그 때는 능력이 있지만, 이건 그 능력이 먼저 미리 온 능력이에요.

십자가의 능력은 언약대로에요. 없는 자를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거예요.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없는 존재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사라져버린 겁니다. 인간들은 눈에 띠는 것만 있으니까. 그것만 의미 있으니까. 주님은 너하고 안 논다 하고 빠져버린 거예요.

아까 제단에 제물을 올릴 때 우리가 진노의 불로 완전히 저주 받아야 된다고 말씀드렸지만, 인간은 인간의 단독적인 자기 죽음은 죽을 때에도 죽음이 작동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죽을 때에도. 죽음 앞에서 죽을 때에도 죽음이 뭔지를 몰라요. 왜 죽는지를 몰라요. 죽으면서 죽음을 모른다는 말은 성령이 오게 되면 지금 살아있으면서도 뭘 미리 안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이 죽음에서 나온 말인 것을 성령을 받는 순간부터 미리 알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과 나의 하고자 하는 말 사이에서 거룩이 나오니까 그 틈새가 거룩이니까 거룩이라 하는 것은 차별화, 거리 간격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와 주님과의 간격에서 거룩이 나와요. 단독적으로 인간의 말만 들으면 거룩이 없어요. 틈이 없기 때문에. 따라 잡을 수 있을 거 같아서. 천교도가 그게 문제 아닙니까. 따라 잡을 수 있는 거예요. 천교도. 빡시게 모든 걸 하고 그리고 정통 유대주의 같은 경우에 따라 잡을 수 있어요. 군에도 안가고 열심히 토란연구하고 율법 공부하면 누구나 펭귄 옷 입고 돌아다니면 메시아 만날 수 있다. 그거 따라 잡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말씀은 이미 절단된 거예요. 끊어진 거예요. 누가 구원받는다고 해서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언약이 들어오지 아니하면 언약을 완성하신 성령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들어오지 아니하면 우리는 죽어도 죽음이 뭔지를 몰라요. 당연히 살아도 사는 게 모르지요. 그래서 주님의 작전은 이겁니다. 마귀가 인간에게 속인 거 하고 반대지요. 주님의 작전은 뭐냐 하면 “전체를 알라.” 전체를 알라에요. 전체.

전체를 알라. 그럼 악마는 뭡니까. 악마는 어떻게 해요? “부분에 매진하라.” 이거지요. 부분에 매진하기 때문에 돈 빼먹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보이스피싱. 당신 딸이 휴대폰 액정 나갔다. 그러니까 지금 딸목소리해가지고. “엄마, 돈 한 사십만원 보내줘. 액정 나갔으니까.” 엄마가 왜 돈을 보내줍니까. “어디서 죽은 딸이 어디서 전화해?” 이런 말하는 엄마 없지요. “아이구, 니가 오랜만에 전화하는구나!” 살아있으니까. 이것은 바로 그 딸은 누구 것입니까? 나의 것이거든요.

내가 살아있는 이유는 나의 것이 있음에서 나의 이 전체를 가지고 나라고 하는 거예요. 나의 기억, 나의 자존심, 체면 모두가 내 것이 있기 때문에. 내 딸도 시집가던 말든 내 딸이에요. 내 딸 다치면 내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서는 거예요. 이걸 바로 피싱 낚이지요. 어떤 음성, 피싱. 보이스피싱이지요.

그럼 교회가 뭡니까? 영혼의 보이스피싱. 교회는 말씀이 안 나오고 뭐밖에 안 나와요? 말밖에 안 나와요. 왜? 고객들이 내 여기 있고 나를 살려달라는 거예요. 나를 죽이지 말고 나를 살려달라는 거예요. 바르게 살 테니까. 나름 착하게 살려고 노력해 왔으니까 이 노력을 가상히 여겨 달라. 목사님이 기도하던지 빽쓰던지간에 내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좀 이렇게 잘 보여 달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 교회에 뭐가 가득 차 있느냐 하면, 말들만 가득 차 있겠지요. 그럼 거기서는 보이스피싱만 신난 거예요. 하나님은 당신만 사랑합니다. 제가 강남강의하면서 잠시 노래 하나 언급했잖아요. <18세 순이> 18세 순이. 18세 순이의 그 의미가 뭐냐 하면, 참 좋은 시절을 자기가 못 놓겠다는 거예요. 순이와 있었던 그 순간은 그 다음 몇 년 지나면 아휴, 식상하고 뭐 그거 인물도 아니야. 하면 좋겠는데 이게 꽂혀가지고 그 때 18세 때 만났던 순이도 예쁘지만, 그 때 그 시절이 참 좋았었었어. 이리 되는 거죠.

그러니까 나라는 것은 무엇으로 구성된다? 타인으로 구성되는 거예요. 내가 욕망이 원하고, 내가 바라는 것들이 나의 것으로 들어올 때 그건 놓치고 싶지 않은 자아가 되는 겁니다. 아~ 그 때 거기에 가고 싶어. 하고 싶어. 그런데 그 순이가 사라져도 뭘 남긴다? 인간은 사라져도 뭘 남긴다? 말을 남겨요. 살구꽃이 필 때면 돌아온다는 말을 한 거예요. 살구꽃이 폈어요. 폈는데 한 해가 지나고 틈새에 찬바람이 와도 계속 난 기다린 거예요. 안 와요.

안 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가만히 있어야 돼요? 찾아나서야 됩니까? 찾아나서야 되지요. 그러니까 인간들의 말들세계서 나오는 그 말의 노래가 그거 생각하면요, 가스펠송이 아무 맛이 없어. 가스펠송들이. 위선적인 노래 같아. 18세 순이가 가스펠송 같아요. 왜? 우리의 저주성을 그대로 보여주니까요. 우리의 저주성을.

우리는 바로 그 세계 속에 말들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신자라는 것을 티를 내기 위해서 나는 그 대중가요 18세순이 그거 나는 누가 불렀는지 몰라. 나훈아가 불렀는지 나는 몰라. 이런 식으로. 나훈아 알면서도 모른다해가지고 가스펠송 나와버리면 이건 인위적인 조작된 차이 만들기지요. 그게 무엇이 작동합니까. 선악지식이 작동하는 겁니다. 저거는 나쁜 거고, 가스펠송은 좋은 거고.

차이를 스스로 만들어서 그 차이남을 아니까 나는 거룩한 존재로 그 다음에 뭡니까? 나가 뭐가 있다? 여기 있다. 나는 여기 있다. I am here. 나는 여기 있다.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살아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이게 자기 역사, 자기 말만 튀어나오는 거예요. 말씀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들은 영원토록 본인의 입에서는 말씀이 안 나와요. 성령이 임할 때 그것도 성령으로 곱게 나오는 게 아니고 말을 나불나불하다가 어디서 까불고 있어. 마동석한테 몇 방 맞고 난 뒤에 나는 망해도 좋습니다. 할 때 그 때 말씀이 나오는 거예요. 망해도 좋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이 이상합니다. 내가 왜 아직도 살아있지? 어제부로 죽어야 되는데.

그럼 주님께서 말씀의 성령께서 가만두지 않아요. 늘 시비 걸어요. “니가 제대로 죽어봤어?” “한 번 목숨 끊어지고.” “그게 죽음이야? 그게?” “너 저주 받아봤어? 니가 예수님이 당한 저주 받아봤어? 그럼 너는 죽음도 몰라.” 주님의 고난에 성령께서 예수님의 그 저주의 죽음을 우리한테 주님께서 섞어넣어버리면 우리는 당황스럽고 우리가 예상 못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갑자기 누가 집을 사주겠다든지 갑자기 한 10억 정도로 그냥 주신다던지 나오면 이게 내가 얼마나 엄청난 죄인인가를 니가 어디 돈맛을 한 번 알아봐! 착한 가게 사주는 걸 뭐라고 합니까? 돈질하러 왔다 하는 거. 돈줄 내러 왔다! 한 번 맞아봐라. 니가 돈으로 25억으로 맞아봐야 정신 차리지. 패지요. 죄인인데. 돈은 돈대로 챙기고. 또 돈을 내놓지는 말고. 챙기고 죄인입니다.

이게 돈이 있던 돈이 없던 성령께서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늘 나의 항상 어떤 죽음이나 말씀을 생각해도 나 여기 있고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욕망 속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게 되는 겁니다.

이왕 그 사람 그림을 하나 더 보여드리겠습니다. 아까 그림 후딱 지나가서 섭섭한데 다시 한 번 카메라 보여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없어요. 인간 우산들 밖에 없어요. 갈보리 십자가라 했는데 십자가 없어요. 또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요. <추락하는 이카로스가 있는 풍경>이에요.


아무리 여러분이 눈뜨고 봐도 여기 이카로스가 없어요. 하여튼 이 화가는 희한해. 제목은 세워 놓고 제목 주인공은 못 찾아요. 여기 눈에 보이는 그림은 어떤 그림인가 하면, 여기 한가로이 소 몰고 농사짓는 농부 보이지요. 그럼 주인공 어디 있는가, 자세히 보게 되면 물에 빠진 다리가 보일 거예요. 자세히. 자세히. 자세히 보면.

이게 뭐냐 하면 신화, 신, 하늘이야기는 농사짓는 것보다 이건 시답지 않은 내 일상의 돈 버는 일보다 중요한 일 없다는 거예요. 이카로스는 하나의 신화지요. 자기 아버지가 이카로스라는 아버지인데 재주꾼이에요. 재주꾼인데 자기 제자가 지보다 더 뛰어나니까 죽어버린 거예요. 분노사가지고 유명한 미이라 하는 거. 미이라에 갇혀가지고 또 이게 재주꾼이니까 어떻게 아이디어를 줘가지고 어떤 사람이 미이라에 잡히니까 실풀어가지고 빠져나가라는 아이디어를 줘가지고 나중에 본인도 잡혀요.

잡힐 때에 새가 날아오잖아요. 새의 깃털을 모아가지고 밀랍으로 파라핀으로 해가지고 날개를 만들어가지고 2인용해서 한사람 한사람 해가지고 아들도 잡혔어요. 둘 다 잡혀가지고 수평적으로 갇혀있으니까 수직적으로 날아가면 되지 않겠느냐 아이디어를 내가지고 날개를 하는데 그 주의사항이 있어요. 뭐냐 하면 너무 낮게 날면 습기 때문에 이게 떨어지고, 너무 높게 날면 태양에 가까이 가면 파라핀이 녹아서 분해되어 떨어진다. 했는데.

그 다음에 중요한 교훈이 뭐냐, 자기는 그걸 자기가 만들어서 바짝 신경 쓰는데 아들이 공중을 날다보니까 다시 말해서 창공을 날다보니까 약간의 신과 같이 된 거예요. 스카이다이빙하는 것이 그런 기분일 거예요. 하고 난 뒤에 한참 올라가도 한 번 맛본 자유는 내려올 줄 모르고. 다시 내려올 줄 모르는 거예요. 맛을 봤으니까. 규범을 초월한. 규범이라는 대기권에 벗어난 만끽한 일종의 마약이지요. 마약.

마약은 뭐예요? 홀로 신이 되잖아요. 그게 마약 아닙니까. 시안24라는 그 연예인이 방송중에 아무도 안 하는 짓을 해요. 뭐냐, 담배를 피우는 거예요. 실제로. 그래서 벌금 물고했는데. 이런 거 왜 아는가, 말의 세계기 때문에 내가 굳이 알 필요 없지만. 건드니까 나타나니까 한 예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 본인을 주체하지 못해요. 비싼 옷 샀다. 그걸로 만족하지 않아요. 어떤 목사가 미국에서 와서 가방 사줬다. 돈 많을텐데 그걸 거절하지 못해요. 누구 이야기인지는 아시겠지만. 이건 세상이 자기를 공중에 붕 뜨게 만드는 겁니다. 한 때 3~40대 골프치는 게 유행이잖아요. 요새 골프도 시시해요. 골프가 시시하면 뭘 하느냐, 지금 40대는요, 돈 있는 사람한테는 뭘 해야 안 시시한지를 답이 없어요. 그게 문제에요.

어디에다가 내 욕망을 불태워야 될지 못 찾아서 문제에요. 못 찾아서. 그래서 하는 게 데모나 하고 있지. 그게 재미있을 거 같애. 아니면 국회의원 나오던지. 데모하고 국회의원 나오는 코스. 운동권에서 국회의원 나온 코스 하던지 하여튼 돈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불 지른 마약 중독자 나를 더 욕망을 키울 수 있는 먹거리 없을까, 그리고 돈도 개뿔도 없는 20대는 그게 모델이 되어가지고 나도 언젠간 돈 벌어서 마음껏 저런 짓 해보느냐 그게 또 모델이 되어있고. 이게 무슨 세계라 했습니까? 말의 세계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선악지식의 세계.

선악지식의 있음과 있음으로 가득찬 세계. 주님 거기서 그냥 사라진 게 아니고 고난받고 사라졌지요. 따라서 말밖에 없는 여기에 성령을 통해서 말씀을 준 거예요. 말씀을 주니까 말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자기가 있음과 여기 살아있음을 주장하는 자들이 그 말씀을 자기가 새로운 욕망이 나왔지요. 왜? 저거 믿으면 나중에 천국 가서 천국 백성 된다. 하나님 나라 백성 된다. 이게 새로운 욕망의 불씨를 일으킨 거예요. 그래서 성경 공부하는 거예요. 자기 안 다치고 그게 저주인줄 모르고.

성령께서 오셔가지고 “니 뭐 지키려고? 이거 지키려고?” “요거요. 저거요.” “지키는 거 좋아하네. 지킬게 어디 있는데. 저주나 받아라.” 그것이 바로 주님의 고난이 주는 즐거움이에요. 주님이 주는 고난의 즐거움. 고린도후서 잠시 봅시다. 11장 사도바울 이야기인데. 일단 하나 질문을 드리면서 시작할게요. 고린도후서11장13절,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라고 되어있지요. 분명히 보셨지요.

그러면 4절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하고 지금 비난내지는 꼬고 있어요. 사도바울이. 자, 그렇게 보셨지요. 질문 하나 합니다.

사도바울 본인이 하는 것은 다른 예수 아닌가요? 다른 영 아닌가요? 다른 복음 아닌가요? 사도바울이 자기는 저 사람은 거짓사도라 하는데 본인은 거짓사도 아니라는 증거 대보세요. 저 사람들보고 사탄들이고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다 하는데 본인은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지 않았다는 근거를 제시해보라고요. 그게 제 질문입니다. 어떻게 답변해요?

그게 고린도후서11장에 나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자, 사도가 말하기를 자기의 몸에 있는 증상, 자기 인생의 증상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자기를 살리고자 하는 거예요? 죽이고자 하는 겁니까? 둘 다를 포함하지요. 나를 죽이고자 하면서 뭐만 살리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라 하는 것은 그때그때마다 내가 죽을 자라는 것을 인식하지 아니하면 복음은 가리워져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게 빌립보서4장에도 나와 있어요. 내게 능력주사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모든 것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죽도록 얻어터지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그래서 사도바울의 내심 소원이 있어요. “그만 할래. 그만 할래. 나 사도 그만할래. 나 안할래. 빨리 죽여주옵소서.” 이거에요. 뭐 사도라고 자랑질하고 그런 거 없어요. 자기를 가만두지 않아요. 누가? 성령님이요. 그 사람들의 모임을 가지고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가만두지 않아요? 고난 받으면 영생주겠다고 가만두지 않아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나를 가만두지 않는 이유는 내가 나의 존재 나의 있음과 나의 살아있음이 무엇을 가리고 있느냐, 무엇을 가리고 있는가, 에요. 무엇을 가리고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죽이는 저주의 십자가라는 것을 내가 가리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뭘 싫어하기 때문에? 저주를 싫어해요. 우리는 희망이 있어야 살지, 낙이 있어야 살지, 낙이 없으면 안 살아요.

그럼 저주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싹둑 잘라버리는 겁니까?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본능적인 축복, 내가 잘되기, 지금도 살아있지만, 더 잘되기, 지금도 존재하지만 더 빛나게 존재하기, 이 종교적인 여망, 욕망을 우리는 스스로 포기 못하지요. 왜? 나는 착하니까. 이게 근본입니다. 나는 착하니까. 나는 저희들과 같지 아니하고. 나는 착하니까.

이 말을 듣는다고 해서 우리가 새 사람되는 거 아니에요. 어떤 목사가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잘 전했습니까? 내가 복음 잘 전했지요?” 라고 할 때 그게 정신없는 말이에요. 그 복음에 자기가 왜 들어가지요. 복음을 전하면서 얼마나 후두려 맞는지 요 설교한 다음에 교인수가 몇 명 더 늘어나고 유튜브 조회 수가 몇 명 더 늘어났는지, 헌금 얼마나 더 나오는지, 사람들이 교인들이 나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이거 계산 안 할 사람 있어요?

그것과 관련되어 있는 말 같으면 주께서 다 빼게 하시는 거예요. 그것과. 아무리 예수님 십자가 부활 백날해도 그것과 내가 알고 있는 십자가와 부활은 어제까지 알고 있던 십자가는 다 없애버려요. 그래야 또 다시 어제로 끊어진 내가 또 다시 말의 종에서 말씀의 종이 되려면 말씀의 주도권을 알고 말을 했던 내가 복음을 전했지만 어느새 그것이 내가 했다가 되어버리면 말씀이 뭐로 전락됩니까? 말로 전락되는 거예요. 내가 내뱉은 말이 되어버려요. 그 말을 끊어주는 것은 말씀이 개입되어야 돼요. 성령께서. 그럴 때 나를 조지고 짓밟고 나올 때, 내가 예상 못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예상 못한 말을 했다는 말은 내가 한 게, 내가 설교했다고 할 수 없지요. 그걸 사도바울이 하는 거예요.

또 고린도후서12장에 보면 똑같은 말을 해요. 아까는 고난받는 이야기했지요. 12장에 보면 요번에는 신나는 이야기를 해요. 내가 십 사년전에 어디 끌려갔는데 삼층천에 올라갔다. 그런데 거기 내가 올라갔다 합니까? 뭐라고 합니까? 그가!  I가 아이고 it. 그가 셋째 하늘에 알렸는데 그가 몸밖에 있었는지 몸안에 있었는지 모르는데 하나님은 아신다.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본인이 본인보고 안다고 하니 이상하지요.

여기서 대구강의 한 거 잠시 그 부분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말을 한다고 했어요. 말이지요. 말의 내용의 주체는 뭐냐, 내가 들어가 있으니까 남이 한 게 아니고 내가 말을 했어. 내가 말을 했어. 라는 내용, 그 내용의 주체는 내가 돼요. 내가 되는데 이 말을 누가 하느냐 내가 해버리거든요. 내가 한다고요. 그러니까 인간은 말을 할 때 어떻게 됩니까. 벌써 주체가 몇 개 돼요? 반드시 두 개가 되는 겁니다.

“아, 배고프다.” 그 때는 내가 빠져있지요. 빠져 있어도 배고픈 사람은 누구에요? 내가 배고프면 남이 대신해 주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배고픈 것을 누가 말해요? 내가 이야기하지요. 이 인간에게는 말만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똑같은 원리로 예수님께서는 뭐만 나와요? 말이 아니고 말씀이 나와요. 십자가에서 다 이룬 말씀만 나와요.

누구에게 저 사람에게 영생을 줘야겠다. 하면 영생을 주겠다는 그 자체가 이미 완성이에요. 받고 잘 관리해라. 이게 아니고 그 자체가 완성이에요. 왜냐하면 말의 행위의 주체자가 받는 사람이 아니고 행위의 주체자가, 주체자가 자기를 집어넣어서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요한복음5장39절에 보면 모든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까? 모든 성경에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고 누가 이야기해요?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8장에도 나옵니다.

율법에 보면 내가 정당하다는 것은 두 증인만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그 두 증인이 누구냐 하면 바로 아버지와 그렇게 말하는 내가 하나, 둘이니까 둘이잖아. 이렇게 말해요.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유대인들은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이리 된 거예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말도 안되는 소리니까 너는 말의 세계고, 나는 말씀의 세계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아무도 예수를 못 믿게 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너희는 갇혀있으니까 말의 세계에. 선악과 세계에 갇혀있으니까요. 기적이라는 말 이외에는 할 말이 없어요. 기적이에요. 기적입니다.

내가 망했다. 라는 것은 내가 말의 행위의 주체 나는 내가 망해서 싫다, 라는 뉘앙스가 뒤에 깔려있어요. 나는 망했다. 내가 보기에 진짜 내 인생이 짜증난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집에 한 10억 있고 차 석대있고 애들 공부잘하고 아무 문제 없고 고부간에, 부부간에 다복하고 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망했다! 하고 활짝 화색이 환한 나는 망했다!가 되면 이건 누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자체 15억에다가 40억 있고 부동산있고, 보험5개 넣어있고, 이 자체가 망했다는 것은 같이 계신 주님이 그걸 보고 니는 망한 거야, 평가해 주는 거예요.

그럴 때 그 재산은 다 불 타야 되고 다 헌금해야 돼요? 어떻게 해야 돼요? 그 안 망했다는 나보다, 망했다는 말씀이 있는 재산보다 더 귀하게 여겨지는 거예요. 여러분! 매일같이 그렇게 살지요? 10억씩 다 있지요. 다 그리 사시지요? 망한 거예요. 그런데 망한 게 내가 나를 평가해서 나는 조졌어. 조졌어. 나 안 살래. 자살할래. 이게 아니라 주께서 이야기 해 줄까? “너 망했어!” “할렐루야!” 진짜 돈이 있던 없던 관계없이 할렐루야! 에요. 그게. 그 말씀을 내뱉은 그 모임을 가지고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이 이 말밖에 모르는 인간들에게 수난받는 수난과 더불어 함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교회는 없기 때문에 교회가 있는 거예요. 성도는 없기 때문에 성도는 있는 거예요. 성도는 있는 거예요. 왜?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안 보이는 주님이 계셔서 오늘날 교회와 성도를 없는 성도 없는 교회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런데 만들어낸 그걸 가지고 이건 나라고 되어버리면 갑자기 말에다가 뭘 집어넣은 거예요? 말씀의 세계에 말이 들어가 버린 거예요. 우리는 육신이 있는 한 평생 그럴 거예요. 그러면 5분대기조가 삥야~ 삥야~ 해가지고 성령이 와서 그걸 나를 짓밟아버리는 거예요. 어떻게 짓밟아버리는가, 예상 못할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혼줄 내는 게 아니고 돈줄을 내가지고 25억이다! 더 추가요! 패버리는 거예요. 이래도 너가 안 망했어? 비트코인 이렇게 많이 올라가도 안 망했어? 그러면 그 맞는 게 기쁘지요. 돈줄 맞는 게 기쁜 게 아니고 그 말밖에 모르는 나의 세계에 나를 저주의 대상으로 보시는 그 말씀이 너무 기쁜 거예요.

“왜, 내가 이런 복을 굳이 받아야 됩니까?” 어제 수요 설교한 것처럼. 왜 내가 이런 일이 벌어져야 합니까? 한쪽은 활짝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한쪽은 찡그리면서 이야기하면서 내가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됩니까? 똑같은 말이에요. 내가 왜 말씀을 듣고 있는 기쁜 수모를 당해야 됩니까?

따라서 교회 책임자는 교인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를 관리하겠다는 것은 아직도 선악기준에서 나를 악한 쪽보다 선한 쪽으로 더 발전시키려는 악마의 노림수가 있는 겁니다. 규범이지요. 나를 하나님보다 더 존엄있게 생각하는 겁니다.

끝으로 이 문장을 내가 내세울테니까 여러분이 판단해 보세요. 피가 중요합니까? 내가 중요합니까? 답은 딱 나와있지요. 피가 중요하지요. 그럼 내가 여기 감지하는 순간 뭐가 중요해요?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얻으려고 시도할 거예요. 교묘하지요. 죽고 난 뒤에 부활하고 싶은 거예요.

말씀을 내거로 가져오게 되면 그게 말씀이 돼요? 말이 돼요? 말이 되어버려요. 말씀이 아니에요. 계속 주님께서 이걸 묻는 거예요. 성령께서.

피가 중요해? 니가 중요해? 피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지요. 그게 뭐냐 하면 보쌈원칙이에요. 보쌈원칙. 주님께서는 자기 피를 상추쌈. 상추같은 흐리무리한 우리를 가지고 안에 돼지고기하고 홍어하고 간장하고 두부하고 요렇게 맛있게 먹으려고 하는데 우리는 상추쌈에 불과한데, just a moment! 잠깐만요!해가지고 자기가 예수님을 쌈으로 사용해가지고 영생 얻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교회 보이스피싱의 주특기 아닙니까.

“십자가 믿고 여러분 씻음 받으시고 부활했으니까 새생명으로 삶을 삽시다. 믿씁니까? 아멘.” 이러고 헤어지는 거예요. 가짜가. 가짜는 반드시 가짜에게 가짜들끼리 속아넘어가게 되어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거예요. 니가 생각할 수 있는 것. 니가 공부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침투하지 못한 다른 세계.

그것이 뭐냐, 바로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는 성령이 찾아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 믿음으로 구원받는 나는 하나의 쌈, 또는 쓰레기처럼 취급해도 나는 좋소. 하는 그리스도만 드러내는 그런 현상이 성령님의 살아계심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고 우리는 살아있지 않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우리가 무슨 생각하고 있었는지 앞으로도 우리가 무슨 생각하고 있을지 우리는 모르는데 주께서는 다 익히 아셔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함을 미리 던져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쌈으로 사용하사 그 안에다가 십자가 피가 담길 수 있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안양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이벤트  (11) 2024.07.22
생명나무로 본 창조  (0) 2024.06.20
말씀의 연락망  (0) 2024.04.21
위험한 시험  (1) 2024.03.23
진정한 보상  (1) 2024.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