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제사 중심 체제

아빠와 함께 2024. 10. 27. 09:03

안양20241017a민23장21절(제사 중심 체제)-이 근호 목사

오늘은 75페이지 <민수기와 한국교회> 한국교회를 민수기 입장에서 한국교회와 비교해 보는 겁니다. 민수기에 대해서 알아야 되겠지요. 그러면 민수기는 어디에 속하는가, 이스라엘에 속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속하는가, 당연히 민수기는 하나님이 쓰셨기 때문에 하나님에 속하지요. 그러면 민수기와 한국교회가 아니고 하나님과 한국교회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한국교회라면 이것부터 먼저 생각을 해야 되지요. 1번 “하나님이 계신가?” 하나님이 계신가,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신가, 하고 같은 질문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아니 계신가?” 가 질문 자체를 보면 서로 반대되는 질문이지만 같은 질문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려면 계시다는 증거가 되어야 되고, 하나님이 아니 계시다면 하나님이 아니 계신 증거를 대야 돼요. 여기에 대해서 아무도 답변할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걸 답변을 못해요. 이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못하니까 무엇으로 대신 떼우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이 있었으면 좋겠네.’ 이게 1번에 해당되고, 반대되는 것은 뭐냐 하면 2번, ‘나는 하나님이 없었으면 좋겠네.’ 이런 식으로 생각이 되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있었으면 좋겠다. 없었으면 좋겠다. 이 두 생각이 실은 똑같은 생각입니다. 이게 왜 똑같은 생각이냐 하면, 결국 뭐가 있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다. 더 구체적으로 하면 “내가 여기에 확실히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것만큼은 내가 안다. 에요. 이것만큼은 내가 안다. 내가 여기에 확실히 있다. 나는 어떤 경우도 이건 포기를 못한다. 내가 있다.

‘내가 있는데 굳이 하나님이 있어야 하는가. 내가 있는데. 내가 있는데 굳이 하나님까지 있어야 되는가. 그리고 내가 있는데 하나님이 굳이 없어야 돼? 내 있음을 보장해 준다면 하나님도 있어도 무관하잖아. 상관없잖아.’ 이런 생각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둘 다 똑같은 생각이에요. 뭡니까? 내가 여기 있다 만큼은 나는 포기 못하겠다. 건드리지 말라. 그런 뜻이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으니까 이게 중요한 거예요. 신은 뒷전이라. 내가 여기 있다가 중요하니까 이왕 있는 거 나, 하나님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하나님이 없었으면 좋겠다. 내가 여기 있으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계신가, 아니 계신가, 오늘 제목이 민수기와 한국교회인데 하나님과 한국교회로 바꾸어도 된다고 이야기했지요. 이미 내가 있다는 거, 이미 종교인이에요. 종교인. 자기 있음을 최후의 교리로 장만해서 내가 있다는 것을 늘 확인하는 식으로 평생을 그걸 확인하고 검증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종교인. 이 종교가 뭐냐 하면 바로 마귀가 만든 종교. 마귀종교지요. 마귀종교. 모든 인간은 마귀종교의 신자입니다.

마귀가 인간에게 준 것은 딱 이거 한 쪼가리 줬어요. 니가 있다. 그것부터 출발해라. 뭘 하든지. 니가 있는 것은 확실하고 나머지는 모호하다. 나머지는 모호하다.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데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야. 니가 여기 있다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주위에 하나님이 있으면 도움 받으면 되니까. 없으면 없는 대로 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니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데, 문제는 니가 여기 있다는 것을 언제까지 내가 끌고 갈 것인가. 그게 니 급선무야. 이 종교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종교. 내가 있다, 에서 방금 정리하게 되면 문제는 깔끔하게 끝났지요. ‘그래 내 종교는 괜찮은 거야. 왜? 내 있음을 보장하니까. 그런데 이 있음을 보장하는데 좀 더 내 있음을 빛내기 위한 내가 있다는 것을 그냥 초라하게 있지 말고 대단하게 있으려면 전지전능하다는 천지를 창조했다는 하나님이 내 종교에 대해서 후원해 주면 더 낫지 않겠는가.’

나오는 그 다음에 세 번째 질문이 뭐냐, 3번,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가능하냐” 4번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불가능하냐” 이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왜 중요하냐 하면, 그냥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면, 하늘이라 하는 것은 뭐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전부 다 거기에 몰치면 되니까요. 궁금한 건 다 하늘에 있다 하면 되니까.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그냥 땅에서 살면 되는 거죠.

옛날에 우리 할머니들, 할아버지들, 고조, 증조, 독립투사, 이런 분들. 일상생활보세요. 거기 전부다 뭐가 있습니까. 조물주를 늘 존경하며 살아가지요. 조물주를. 그냥 자식들을 위해서 정화수를 떠놓고 빌잖아요. 나의 있음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신이시여. 도와주소서. 내가 잘되면 정성으로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라는 그걸 가지고 고급용어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고급용어에요. 직거래합니다. 당근마켓이에요.

뭐 교회를 들어올 것도 없어요. 자기 부엌에서 정화수 떠놓고 직거래하면 되잖아요. 직거래. 이 얼마나 간편해요. 교회 오고가고 하면 차기름값이 드는데. 일상에서 자기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교회는 생전 가보지 않았지만, 사업이 위태위태할 때는요, 정화수 떠놓고 빌잖아요. 한 번만 살려주세요. 이게 당근마켓이에요. 직거래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 계시고, 날씨 이런 거나 하시고, 그리고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건드리지 마시고 죽고 난 뒤에는 하나님께서 어디가 좋은 땅이냐, 그럼 니가 죽고 난 뒤에 복 받을 자손 따로 있다. 그것은 악지중에 악지야! 그 묘 쓰지 말고. 이건 죽고 난 뒤에 하는 거예요. 죽고 난 뒤에. 죽은 조상을 통해서 좀 자기 이익을 받으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은 이것은 오버한 거죠. 그냥 하늘에 계시고 하면 되는데 왜 갑자기 함께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 이 말이지요. 이것은 직거래를 넘어서서 동거까지 시도하는 하나님 그냥 계시고, 그냥 기도나 하려하니까 심심하다 이 말이지요. 화끈하지가 않은 거예요. 화끈한 거. 내가 어디가든지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어디가든지.

이번 거래가 성사가 잘 되겠습니까? 잘된다. 모든 거래라든지. 애가 법대를 갈까요? 어데를 갈까요? 법대를 가라. 이런 거. 모든 일상에 있어서 이제는 더 깊숙이 내 인생에서 보디가드처럼 수행비서처럼 나를 도와 주게 되면 얼마나 내 하는 일이 보험 이상으로 보험은 보험대로 들고 더 확실한 보험으로 보장이 되느냐, 욕심을 낸 거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면 하나님이 굳이 나와 함께 계심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하늘에 계시고, 부를 때만 찾아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되겠지요. 함께 있다는 것. 여기서 이제 5번, 6번, 극단적인 욕심이 또 나옵니다. 5번,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 멀리 있다가 가까이 옆에 있다가 이건 뭐 쓱 들어와서 내 안에 계시다. 내 안에 계시다. 이러면 무당 다 된 거죠. 내 안에 계시다. 나는 내 안에 계시는 줄 몰랐는데 막 꿈에 나타나시더라. 내 안을 하나님이 점령을 했으니까, 이제는 만사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고 나를 인도한다. 이거까지 욕심을 내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악마가 인간을 만들 때 인간 속에 뭐가 들었느냐 하면 야고보서1장에 보면 탐욕. 욕심을 집어넣은 거예요. 한 번 처음 욕심을 낼 때는 주저하지만, 한 번 욕심이 들어오고 난 뒤에는 그 다음은 주저할 게 없어요. 욕심에 욕심을 계속 키우면 되니까. 이미 들어온 거. 이게 문제인데.

1번, 하나님이 계신가, 요 이야기는 알기 쉽게 말해서 외부 타자의 탐욕이 있는가, 그럼 2번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내 욕심에 내가 감당이 안되는데 외부 욕심까지 들어오면 나는 감당 못한다. 이게 하나님이 없다,에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외부 타자의 탐욕까지 나는 고려해서 있어야 되겠다. 이런 1번부터 5번, 6번까지 가면서 무엇은 요지부동 변화지 않아요? 뭡니까? ‘내가 여기 있다.’는 변화지 않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변화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악마가 만들어준 모든 인간은 이미 악마에 무릎을 꿇고 악마에게 비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사탄에 대해서 에스겔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에스겔28장 12절에 보면,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어요? 아름다웠도다.)아름다웠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두로 지방이 그 당시에 에스겔 당시에 제일 선진국이었고 제일 잘 살았어요. 수입이 제일 많았어요. 무역을 하니까 많았는데.

그것을 에스겔은 그렇게 잘 사는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붙어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옛날의 기억, 옛날에 사탄이 에덴동산에 들어왔던 그 사건을 주께서 지우지 않고 계속 확장 시켜 나가는 거예요. 확장. 옛날에 있었던 그 창세기 3장의 사건을 주께서는 주께서 그 사건을 키우는 거예요. 확장시켜 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에게는 언약이 있고,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그 외에는 언약이 없는 곳에서 바로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이 옛날 아담이 마귀한테 유혹을 받은 것처럼 이스라엘은 흠뻑 그 언약이 없는 민족의 모든 것에 유혹받도록 하나님께서 창세기3장에 사건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뭐냐 하면, 악마라 하는 것은 그룹이고, 천사 중에 최고고, 그 특징은 뭐냐, 온전히 아름다웠다. 온전히. 온전히 아름다웠다. 권력 중의 권력이 아름다움이에요. 권력 중의 권력이. 남성의 권력도 여성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쪽도 못 쓰지요. 온전히 아름다워요. 이 말은 인간은 지향점이 있는데 그것은 온전한 아름다움을 향하여 질주하는 존재, 인간이에요.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왜냐하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러운 것이 바로 그 나무 에덴동산 나무 중에 제일 아름다운 나무가 먹고 싶은 나무가 탐욕을 자극하니까. 탐욕. 제일 아름다운 나무가 선악과에요. 사탄이 안 기웃거릴 수가 없어요. 아름다운 것은 자기 몫이니까. 그리고 게다가 인간까지 아름다워요. 인간도 아름다우니까 악마는 아름다운 선악과에다가 전리품이 한 두가지가 아니니까. 인간까지 전리품을 만들었어요. 에덴동산을 파괴시켜 버렸지요.

에덴동산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에덴동산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꼬시기 위해서 아름다움으로 유혹해서 유혹해버리면 자체적으로 에덴동산이 붕괴하는, 이스라엘이 붕괴하는 그 작전을 철두철미하게 일관성있게 한결같이 몰아붙이는 것이 바로 사탄의 전략입니다. 사탄의 전략.

아, 민수기 이야기하면서 왜 사탄의 이야기를 하느냐, 민수기1장부터 민수기의 뜻이 뭐냐 하면, 숫자를 헤아리는 거예요. 국민들, 백성들 숫자를 헤아리는 것인 민수기에요. 숫자를 헤아리는 그 이유가 전쟁하기 위해서 숫자를 헤아렸다 이 말이지요. 그럼 전쟁하려면 누가 있어야 돼요? 상대가 있어야 되지요. 누굴 상대로 전쟁을 해야 되는가,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 지금 1번, 3번, 요걸 그들은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들은 그게 탐욕이라는 생각은 상상도 못했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민수기에서 이스라엘을 숫자를 헤아리는 것은 원래 이 악마의 전쟁은 인간이 쨉이 안돼요. 인간은 악마하고 이기지를 못합니다.

창세기32장1,2절 한 번 보겠습니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할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 만났지요. 2절에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군대지요. 하나님의 군대는 따로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민수기1장1절에서 숫자를 헤아리는 것은 지금 누굴 모방하고 있는 겁니다. 천사가 하나님의 군대니까. 그건 천사들에 의해서 모아진 군대라면, 그걸 인간으로 모아진 하나님의 군대 같은 군대로 한 번 바꿔보려는 것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출애굽기12장에 나와요. 이건 안 찾아봐도 여러분이 아십니다. 밤중에 히브리인들이 어린양의 피를 보고 애굽에서 나올 때 그 때 성경 표현이 뭐냐, 너희들이 하나님의 군대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다, 라고 했어요. 밤중에 나왔어요. 밤중에. 하나님의 군대로 나왔다 말이지요.

군대로 나올 때에, 그들에게 뭐냐 하면, 출애굽기13장9절에 보면, 이건 봐야 돼요. 사람들이 잘 안 찾아보는 거니까.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으로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능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뭐를 삼고? 표. 표를 삼고.

이마에 표를 삼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레이져 광선이 이스라엘의 각 인간에 이마를 주시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그 표가 뭐냐 하면 유월절 어린양의 피에요. 피를 표로 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표가 뭐냐, 똑같은 사인이지요. 그야말로 인간 중에서 천사가 벌이는 전쟁의 시그니처. 시그니처라 하는 것은 대표 기호. 전체를 대변해 줄 수 있는 대표 기호. 아파트도 시그니처 아파트 있지요. 차도 뭡니까. 차 등급에 시그니처 있잖아요.

인간 중에 시그니처가 이스라엘이에요.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 전쟁과 관련되어 있는 시그니처. 전쟁과. 그러니까 전쟁과 관련되어 있으니까 인간이 자기 종교를 가지면 돼요? 안 돼요? 안되지요. 이건 마귀가 만든 종교이기 때문에. 마귀가 만든 종교는 표가 필요 없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엄청난 이야기를 합니다. 어린양의 표가 없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가만히 있어도 그건 마귀의 표가 있는 자라고 하는 거예요. 표.

그 표의 표상. 어느 시그니처인가를 대결하는 그 모습. 표와 표 싸움. 악마는 인간에게 인간 종교를 만들었어요. 아까 인간 종교의 교리를 봤지요. 하나님은 계시고, 우리와 함께 있고,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쪽은 뭐냐, “굳이 있어야 돼? 내가 주인공이라면 내가 알아서 내가 살게.” “교회 가서 도움 받으면 좋잖아.” “나는 아직까지 교회 갈 정도로 아직 버틸만하다.” 모든 인간은 생각이 내가 여기 있다, 로 끝났어요.

내가 있음을 돈을 벌든지 밥을 먹든지 죽을 때까지 끌고 나가면 인생 선방한거라, 그게 다에요. 그게 다에요. 그러다가 세상 살다가 어려움이 오잖아요. 어려움이 있을 때는 이 어려움을 내 식대로, 내가 주인공이니까 주인공 자기 단도리를 해야 될 게 아닙니까. 외부에 어려움이 있으니까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글로 쓴 걸 가지고 노벨문학상이라 하는 거예요.

노벨문학상이 뭐냐 하면, 인간이 내가 나를 구원하는 방법이에요. 이게 그냥 무용도 안 되고, 음악도 안 되고, 과학도 안 되고, 자본이 안 되니까 문학 방법으로 내가 나에서 나를 구원하는 거. 그 시도를 그냥 해보는 거죠. 그냥 해보는 거예요. 해답도 없고, 진리도 아무것도 없어요. 괴로워서 못사니까 그냥 해보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모든 인간이 같은 교단에 속하거든요. 같은 교단. 같은 마귀 교단이니까 전부 다 납득이 되니까 상줘라, 해서 상받은 거예요. 지가 답답하니까 광주도 건드리고, 제주도도 건드리고 하는 거예요. 아버지도 폭력적이다, 그것도 건드리고 이런 것. 평론 간단하지요.

자기의 괴로움을 남 탓으로 돌림으로서 자기 자신은 약간의 위로는 챙기겠다는 거예요. 거기에 많은 사람이 동감하니까 책이 날개 돋히듯 팔리지요. 100만부까지 갈 거예요. 나도 언젠가 본 기억이 있다 하는데 2016년도에 제가 글을 써 논 모양이라. 채식주의자 평을 집에 가서 올려야겠어요. 밑에 주도 새로 달고.

이미 종교인이니까. 내가 신이잖아요. 내가 아프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아프면 안 되는데 아파요. 왜? 해답이 없으니까. 아프니까 이 아픈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뭐냐, 남을 공격하면 되겠지요. 그 순간만큼은 약간 카타르시스 속이 시원하면서 약간은 풀리는 거예요. 아줌마들이 소설을 많이 보는 것이 그거잖아요. 좀 누구를 씹어야 자기 속이 시원하니까.

그런데 이거 지금 성경대로 이야기하면 그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자기 종교라는 것은 없습니다. 없고, “종교 같은 소리하지 마라. 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돼.” 그냥 시키는 대로 해야 돼요. 그냥 하면 안 되니까 이마에 문신을 시그니처로 유월절 피로 그냥 박아 놓고, 이제부터는, 인간교 같으면 자기가 주인이잖아요. 그런데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주인공 아닙니다. 숫자 헤아려가지고 천군천사 비슷하게 헤아려가지고 무조건 끌고 악마와의 전쟁터에 끌고 그냥 들어가야 돼요. 이게 민수기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책이에요.

그러니까 표가 있다는 것이 성경 전체를 봐서 중요하지요. 이 표에 에스겔9장6절 같은 경우에는 요걸 몇 구절을 더 찾아봐야겠어요. 왜냐하면 인간종교 나 여기 있다, 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심도 있게 파악해야 되니까요.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찌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이마에 표 있는 자 빼놓고는 다 죽여라. 표와 표 싸움이에요. 그런데 그 다음에 그 내 성소에서 시작한다. 자, 민수기의 본 내용과 에스겔9장6절과 드디어 연결점이 밝혀지지요. 하나님의 전쟁이 중심을 잡는 중심 터가 있어요. 그게 뭐라고요? 성전.

그러면 민수기는 뭐다? 약속의 땅에 가서 성전 짓기 위해서 동원된 하늘나라의 일꾼들. 간단하지요. 그런데 그들의 이마에는 유월절의 피가 있다. 유월절의 피의 내용을 그걸 더 확장하고 그걸 더 세밀화하려면 바로 피와 관련된 행위가 나오는데 그 행위를 전담해야 될 지파는 레위지파.

그래서 전쟁하는 용도의 숫자 헤아림에서 레위지파는 따로 분리되어서 그들은 따로 숫자가 헤아려지고 전쟁 하는 데는 그들은 가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켜야 될 게 따로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언약궤 지켜야 돼요. 언약궤를 레위지파는 왜 지키는가, 바깥에 전쟁하기 전에 인간의 내부전쟁부터 조심해야 되기 때문에. 누구든지 언약궤에 가까이 하는 자는 다 죽는다, 가 있어요. 민수기4장15절요.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찌니 죽을까 하노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성물을 만지면 뭐한다? 죽을까 하노라. 성물을 만지지 말고 메야 되는데, 이건 레위지파라 할지라도 죽어요. 그러니까 다른 지파들은 레위지파가 언약궤를 보위하지 아니하면 다른 지파들이 가까이 하면 죽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전쟁에 패배한 거죠. 이스라엘 내부로부터 하나님이 지키는 것과 하나님이 지키고자 하는 것을 그 중심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진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지킬 것을 지키면 너희는 살고, 하나님의 지킬 것을 못 지키면 너희들은 죽는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 종교는 뭐가 중심이라 했습니까? 내가 여기 있음. 인간들이 있음이 중심인데, 민수기나 성경에서는 뭐가 중심입니까? 언약궤가 여기 있음. 더 나아가서 성전이 여기 있음. 있음이 되지요. 나중에 땅에 내려온 성전은 나중에 하늘로 올라가지요.

땅에 성전이 없었는데 모세를 통해서 성전 지으라고 언약궤부터 시작해서 지으라고 해놓고 언약궤 중심으로 집을 지으면 성전이고, 솔로몬 때. 나중에 성전이 부서지면서 성전을 성전답게 했던 하나님의 신이 호로록 하고 성전 동쪽으로 빠져나오면서 성신이 본래에 있던 하늘나라 보좌로 다시 돌아가요. 돌아가면서 성전이 없는 이 세상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전쟁과 저주와 심판을 위로부터 쏟아지게 하는 겁니다.

에스겔에 보면 하늘나라 보좌가 있는데. 하늘나라 보좌입니다. 이 지상이 있잖아요. 여기서 그 밑에서부터 하나님의 숯불이 떨어져가지고 진노의 불이 유황불이 떨어지게 되어 있는 요 구조. 참 쉽죠잉. 억수로 쉬워요. 이 세상 어떤 세계냐, 하나님의 보좌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는 대상, 이게 이 세상입니다.

유황불을 제대로 맞는 거예요. 그게 마치 노아 때는 전세계가 물로 덮이듯이 이제는 전 세계가 유황불로 덮이는 거예요. 좀 따뜻하겠지요. 지구가 다 녹아버리니까. 그렇게 타버리고 그 주동자인 사탄은 어떻게 되겠어요? 사탄은 영원한 무저갱. 그러니까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그 유황불 있는 곳에다가 거기다가 가두어버립니다.

그러니까 가두어진 종신형을 받는 그 마귀를 주께서 잠시 풀어서 이 세상의 인간을 꼬신 거예요. 그리고 그 마귀 역할 다했으면 다시 원 위치. “니 자리로 가!” 하면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미간에 표가 없는 자들은 거기에 따라서 그들은 너희들끼리 같이 영원토록 지옥가라 해서 거기 다 몰아서 보내버립니다.

그러니까 아까 1번, 2번, 3번, 4번, 5번, 6번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신이 있느냐, 없느냐, 함께 있느냐, 이게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어차피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 는 것은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유일한 인간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예수님 자체가 임마누엘이에요. 끝이에요. 예수님 이름 자체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게 끝이에요. 우리가 예수님 속으로 접근하지 못합니다. 왜냐? 우리 쪽에서 예수님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래서 배척한 거예요. 예수님을 배척한 거예요.

배척했다는 말은, 나는 당신 모르겠고, 우리는 우리끼리 살랍니다. 해서 배척했잖아요. 그런데 배척한 그 분이 그 안에 우리가 들어있어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거예요. 진짜 이스라엘이 진짜 백성이 예수님 안에 옹기종기 같이 모여 있었던 겁니다. 마치 옛날 운동회 때 풍선 터트리기 하지요. 풍선 터트리면서 던지는 거 뭡니까. 오자미 마구 던지잖아요. 던질 때 아동들의 마음은 뭐냐, 저 안에 도대체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해서 던지는 거예요. 마치 흥부전 놀부전 박이야기할 때 슬근 슬근 톱질하세. 왜 슬근 슬근 톱질해요? 빨리 전기 텍사스 톱가지고 자르지.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한 거예요. 애들이. 청군, 백군 둘 다.

유월절 어린양에는 내가 들어있고 마귀 안에는 저주가 들어있는 거예요. 저쪽에서는 유황불이 들어있었던 거예요. 이건 뭐 내가 지어낸 말이지만, 이걸 가지고 하나님의 운동회. 가을 운동회. 하나님이 벌이신 가을운동회. 레위기에서 이스라엘 자체를 인간종교에서 천사와 똑같이 하나님의 군대로 재편돼 버립니다. 하나님의 군대로. 숫자로 헤아리는 군대로 재편되고 그들을 진두지휘하는 것은 언약궤. 다시 말해서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 진두지휘해요.

그럼 제사장은 자기 나름대로 하느냐, 아닙니다. 언약궤에 구름이 피어올라가야 돼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있어가지고 어디에 적이 숨어있는지, 어디서 적이 출몰하는지, 이것을 옛날 증기기관차 앞에 보면 증기기관차 앞에 굴뚝에 연기가 나지요. 꽤~꽥! 하면서 앞에 가잖아요. 언약궤에서 꽤~꽥! 하면서. 내가 언약궤가 가라하면 따라가면 되고 멈출 때 멈추면 된다고 민수기 10장 끝에 나와요. 언약궤가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면 된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도 마귀종교 인간종교로 이해 못해가지고 그러면 우리가 삽니까? 이러고 있다고요. “그러면 우리가 살겠습니까?” 이게 지금 따로 숫자는 헤아리고 군대라는 명칭은 있는데요, 이 출신이 뭐냐, 애굽나라 살던 사람들이에요. 몇 년 동안? 400년 동안. 400년 동안 살던 사람들이에요. 하루 이틀 산 게 아닙니다. 400년 동안 애굽에 완전한 애굽의 인간종교에 같이 동조했던 사람들이에요.

그럼 아까 다시 한 번 복습하면, 인간교회 특징이 뭐냐, 내 몸 하나 추스르기 끝! 내 몸 하나 추스르기 끝이에요. 내 육신 하나 건강하고 풍요하고 잘 먹고 잘살기. 좀 더 욕심내면 남들로부터 인기 얻기. 이건 바로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았던 순서적인 시험받는 거예요. 돌이 떡 되게 하라. 이게 기본이에요. 그러면 배부르면 인기 있으면 좋겠지. 그건 중간. 마지막 최종 노리는 것은 세상의 모든 권력을 내가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하는 것.

그때는 이제 같이 마귀하고 같이 단짝이 되어가지고 같은 동업자로서 세상을 마귀세계로 하는데 거기에 몰입하면 되겠지요. 거기에 충성을 다하고 거기에 열중하면 된다 말이죠. 그러니까 거기서 떡만 있을 때는 인간은 떡의 가치밖에 안되지요. 인기있을 때는 인기의 가치밖에 안돼요. 예를들면 국정감사하는데 누가 나오느냐 하면, 뉴진스라는 가수가 나왔어요. 질질 울었어요. 왜? 밥 세끼를 못 먹어서 웁니까? 아, 집에 먹을 게 없어서 돈이 없어서 울어요? 왜 울지요? 여러분, 애들 키울 때 울잖아요. 큰 자식들은 울지는 않지만, 짜증내지요. 왜 짜증냅니까. 밥을 안 줘서 짜증낸 겁니까? 먹을 게 없어서 짜증낸 겁니까? 내 가치가 향상되는데 왜 집구석에서 왜 안 도와주느냐 이 말아닙니까. 나의 가치.

내 가치는 그냥 밥만 먹는 집안에 있는 개와 고양이 똑같잖아요. 그 가치에서 이제는 내가 노력해서 남한테 인기있는 사람으로서의 가치에 대해서 우리 식구가 나한테 뭘 도와줬느냐 하는 거죠. 그 다음에 좀 잘나간다 하면 그 다음은 끝입니까? 욕망이. 내가 좀 더 출세하겠다는데, “아빠, 집 한 번 잡히고, 대출 한 번 내 주소! 나 한 번 믿고. 요번 큰 거 되면 내가 집 두 채 사드릴게.” 이런 거. 갑자기 권력이 확장되지요. 더 커진다고요.

“나, 엄마 싫어.” “왜?” 내 위치, 내 위상에 왜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느냐, 나 배울만큼 배웠는데, 나 교양 있는데, 엄마도 좀 수준을 높일 필요 있지 않을까. 뭐 이런 거. 해줘도 해줘도 퍼줘도 퍼줘도 끝이 없어요. 끝이 없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이마에 마귀의 표가 있으니까 그래요. 모든 친구가 마귀 친구에요. 마귀 표를 받은 사람끼리 잘 통해요. 지 가치 자랑. 지 잘난체 하는 거. 지 의로운 체 하는 거.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말밖에 없어요. 그게 인간교가 추구하는 겁니다.

야고보서1장에 보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 )를 낳는다. 이거 하면 뭘 낳는다. 사망을 낳는다. 저주를 낳는 거예요. 저주 넓은 길, 지옥가는 길로 악마가 잘 보담아서 뒤에서 서포트를 잘 해주고 있어요. 이 세상이 지옥가는데.

그런데 하나님을 따라왔던 그 애굽인들이 기껏 가치가 이미 애굽에서 430년 동안 익혔던 가치거든요. 대를 이어서 고조, 증조 전부 다 그 가치 속에 있던 자들이 나왔어요. 나오고 나니까 뭐냐, 왜 기본적으로 물이 없느냐, 왜 떡이 없느냐, 고기 먹고 싶다. 왜 고기를 못 먹느냐, 그 반란, 그게 민수기20장에 나오지요. 민수기20장.

백성들이 반란을 하니까 여기서 성질난 모세도 애굽출신이잖아요. 모세도 바로의 딸 공주의 아들이었잖아요. 해가지고 성질 나가지고 반석을 두 번쳐가지고 20장21절에 두 번 쳐요. 두 번 치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의 집안을 다 죽여버립니다. 모세뿐만 아니고 모세 누나. 20장1절에 보면 모세 누나 미리암이 죽어요. 저 뒤에 보면 누가 죽느냐 하면, 형 아론도 죽습니다. 마지막에 또 누가 죽지요? 신명기에 가면 죽지만. 신명기에는 모세가 죽지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자, 여러분 한 번 물어봅시다.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궤. 혹은 성물을 만져서 죽습니까? 아니면 그냥 광야 지나면 죽습니까? 어느 쪽이에요? 둘 다 맞지요. 그렇지요. 빨리 죽으려면 성물을 만지고, 언약궤 만지면 빨리 죽고, 천천히 죽으려면 그냥 세상 살면 천천히 죽어요. 이래도 죽고, 그냥 저래도 죽어요.

죽을 인간이 죽으면서 시그니처는 주께서 시그니처를 성숙시켜서 시그니처를 빼가는 겁니다. 그게 뭐냐, 율법을 주고 율법의 진척과정을 죽은 자를 통해서 그걸 빼가는 겁니다. 빼먹는 거예요. 인간에게서. 주님은 손해보는 장사는 안합니다.

죽을 인간을 통해서 율법이 얼마나 신약 때까지 그만큼 하나님의 내용이 계시가 많아지는지 풍성해지는지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따라서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 수시로 모세에게 대들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하면서 그들은 이제 애굽의 속성을 다 드러내지요.

광야에 나왔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속마음은 간단히 이겁니다. 도대체 우리를 어디까지 끌고 가느냐, 모세의 답변은 간단해요. 다 죽여버릴거야. 40년 동안 돌아다니면서 질질 끌고 다 죽여버릴거야. 민수기에 보면 정탐하라고 누가 시키느냐 하면 하나님이 정탐하라고 시켰어요.

정탐하라고 하나님이 시켜놓고 그들이 정탐했을 때 나오는 결과는 어땠습니까? 계속 대성통곡했지요.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대성통곡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는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하니까 갑자기 봉숭아 생각나네.

왜 못 들어갈까요? 약속의 땅에. 왜 못 들어갈까요? 그들은 종교가 뭡니까? 하나님의 천국과 안 맞는 종교를 갖고 있어요. 인간교에요. 마귀교. 그리고 못 들어가면. 애초부터 못 들어간다고 해야지. 왜 어린양 유월절 해가지고 표를 바르느냐, 그 표만 떼어가지고 가요. 유월절 어린양이 키우는 겁니다. 키우게 되게 되면 여기서 민수기에서 중간 중간에 폭탄처럼 쏟아지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제사 이렇게 드려라. 안식일 이렇게 지켜라. 절기는 이렇게 지켜라.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대표는 바로 레위지파, 제사장이 진두지휘하고 그들을 이끌어내는 제사장이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모세입니까? 제사장입니까? 어떻게 돼요? 양부체제. 모든 정치체제 제도는 모세가 지도자지요. 모세가 지도자이면서 모세와 백성과의 정치적인 조직을 해놓고 조직하면서 모세도 못 들어가고 백성도 못 들어가고,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의 체제 속에서 뭐가 빠져나와 있어요.

이게 뭐냐, 언약궤는 들어간다, 가 돼요. 그럼 언약궤가 숙성해서 들어갈 때까지 언약궤 가치가 들어갈 때까지 홍해를 한 번 더 해야 돼요. 어디에서? 요단강에서.

모세 쪽은 이미 모세가 죽어버렸으니까 모세 안에 내 안에 들어있었던 하나님의 원래 시그니처가 언약궤 이름으로서 빠져나와서 모세 죽고 난 뒤에 여호수아와 더불어서 언약궤 앞장세워서 요단강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는 뭐다? 무슨 땅? 웰컴 투 약속의 땅! 약속의 땅이 펼쳐집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41017b민23장21절(제사 중심 체제)-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민수기13장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되 그 종족의 각 지파 중에서 족장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탐지하게 하라. 족장 한사람씩 보내라 이리 했어요.

탐지하게 했는데, 그 탐지했던 그 결과, 탐지했던 결과는 32장7절과 8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느냐 너희 열조도 내가 가데스바네아에서 그 땅을 보라고 보내었을 때에 그리 하였었나니 그들이 에스골 골짜기에 올라가서 그 땅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었느니라”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여전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교, 자기가 살고자 하는 중심을 중심 교리로 잡고 그 다음에 하나님. 그 다음에 모세, 율법 이런 걸 주위에 포진한 거예요.

내가 사는 방법으로서 그런 걸 이용했다 말이죠. 이러한 생각이 그들은 이거에요. 간단히 말해서. “내가 내 살겠다는데 이게 뭐가 잘못됐습니까?” 하는 거예요. 뭐가 잘못됐습니까? 인간의 문제점은 뭐냐, 그냥 본능적으로 여기 육신이 있어서 육신 살리겠다는 게 이게 왜 자꾸 죄인이라고 간주를 하느냐, 라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살고자 하는 게 내가 이 땅에서 밥먹고 사는 게 죄라면 그럼 죄 아닌 게 뭐냐는 거예요. 죄 아닌 게 뭐냐, 그건 죄 아닌 게 뭐냐 하면 종교를 바꿔야 하거든요.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뜻을 펼치기 위해서 우리가 부역 당한 거예요. 동원된 겁니다. 동원된 일꾼들이에요. 노동자들이라니까요. 그래서 정탐꾼을 할 때 땅을 정탐하고 난 뒤에 그 땅은 그들이 낙담을 하는데 우리가 살 수 없다, 이리 된 거예요.

하나님은 답답한 게 언제 니가 살은 적이 있느냐, 너희들은 이미 유월절날 죽었어. 유월절날 애굽사람들 다 죽었잖아요. 그들이 안 죽은 것은 이마에 표 때문에 안 죽었어요. 표 때문에. 표가 존재보다 더 중요한 거예요. 유월절의 표가. 인간 존재보다 더 중요한 거예요. 주님은 그 표를 살리려고 하나님께서 몰고 왔는데 그들은 오해해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서 우리를 살린다고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두 번째 우리가 먼저 봐야할 것은 민수기20장부터 봐야 돼요. 민수기20장 그거는 하도 많이 봐서 볼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내부반란을 일으키고 불뱀 나오는 그 이야기 있잖아요. 20장에서 아론도 죽습니다. 모세도 성질났어요. 21장에 들어가면 불뱀 나오고요. 25장에 들어가기 전에 22장부터 모압이라는 나라를 만나게 돼요. 광야에서. 모압이라는 나라를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모압이라는 나라를 만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군대는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한 군대는 아니에요.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지킴이 아니라 이스라엘 속에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하는 자들이에요. 이스라엘 속을 지키는 것. 이스라엘 속에 있는 것. 이게 뭐냐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성도입니까. 그럼 여러분은 중요하지 않아요. 여러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여러분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주께서는 계속 사용하시는 겁니다. 중요한 것을 지키는 금고가 성도지요. 그걸 평소에 저는 운반체. 복음을 운반하는 운반체, 또는 전달체. 이게 바로 예수님의 중보자를 이어받아서 그런 거예요. 예수 안에서 그렇죠.

이게 무엇이냐, 이게 무엇이냐 이걸 누가 했느냐, 놀랍게도 이 이스라엘은 그냥 두고요, 바깥에 있는 이스라엘 만나는 모압. 모압나라가 더 커요. 이스라엘은 나그네니까. 쓱~ 들어온 거예요. 쓱 들어오니까 모압나라가 여기서 저주를 퍼붓습니다. 퍼붓는데 여기에 동원된 선지자가 발람 까졌어요. 발람 선지자입니다. 발람 선지자.

발람 선지자를 돈 주고 고용해가지고 저주를 퍼부으라고 했습니다. 이방나라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거예요. 그런데 발람선지자가 무얼 알았느냐 하면, 모압과 이스라엘 문제가 아니고 이스라엘 안쪽에 이스라엘이 운반하고 있는 중요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이 발람 선지자가 자기의 계시를 통해서 알아버린 거예요.

저주를 하려면 모압은 복을 받아야 하고 저주를 해서는 안 되고, 모압에 대드는 이스라엘을 저주해야 되는데, 발람 선지자가 어느 쪽에서 있느냐 하면, 돈은 모압한테 받아놓고 발람은 이스라엘 쪽에 가서 이스라엘 쪽에서 모압을 거꾸로 보는 거예요. 거꾸로 보는 겁니다.

누가 저주에 합당하냐 이 말입니다. 누가? 이스라엘이 저주에 합당한 게 아니고, 아니다, 라는 이유를 근거를 댑니다. 근거가 뭐냐 하면, 24장에 보면, 3절에 발람이 폼을 잡습니다. 폼을 잡는데, 여기에 시가 나와요. 일종의 노벨문학상 감이 되는 시가 나와요. “그가 노래를 지어 가로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이리 나와요.

9절에 보면, “꿇어 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 누구이랴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찌로다” 이게 뭐예요? 아브라함 언약 아닙니까. 아브라함의 언약이 연속돼 있어요. 연속해가지고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적 형태 속에서 아브라함 언약이 살아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발람. 발람은 한때 독일의 유명한 프로 선수 이름이 발람이에요. 의미 없는 소리고요. 축구 좋아하는 사람 다 압니다. 독일 대표 수비수. 발락이 발람에게 노하여 가로되, “발락이 발람에게 노하여 손뼉을 치며 발람에게 말하되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내 원수를 저주하라 함이어늘 그대가 이같이 세 번 그들을 축복하였도다” 손뼉을 치는 것은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왜 그래? 미쳤어. 왜 그래? 내가 그들을 부른 것은 내 원수를 저주하라 함이어늘 그대가 이같이 세 번 축복하였도다.

24장17절에,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 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라고 했어요. 여기서 24장24절 요건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깃딤 해변에서 배들이 와서 앗수르를 학대하며 에벨을 괴롭게 하리라마는 그도 멸망하리로다 하고” 보세요. 깃딤이 로마에요. 로마제국이라고요. 로마제국인데 앗수르제국은 앗수르는 있지도 않았어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17절에 한 별이 야곱에서 나온다는 말은 이건 어느 시대냐 하면, 예수님의 출생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출생을. 여호와께서 발람 선지자를 갖고 노시는 겁니다. 갖고 노신다는 말은 축복만 하는데 갖고 노시는 게 아니고, 저주하는데도 갖고 노신다는 것을 아울러서 생각해야 돼요.

그전에 이미 세 번씩이나 축복을 했으니까 23장20절에 이스라엘의 축복이 뭔가 봅시다.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수 없도다” 발람은 말하기를 내가 건방지게 누굴 축복하고 저주하고 그 쨉이 안 된다는 거예요. 다만, 여호와와 백성과의 관계에 대해서 거기에 대해서 그냥 소개할 뿐이다.

21절,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이스라엘 속에 여호와라는 그 하나님을 독점적으로 왕으로 모시는 민족이라는 거예요. 여호와가 모든 민족의 여호와가 아니라 특별히 한 민족을 택해서 그에게만 같이 복을 주기로 작정하신 분이 현재 이스라엘이다 이 말이지요. 왕이니까. 왕이니까 전쟁하면 누가 이겨요? 사람 전쟁이 아니다 이 말이지요. 어디 감히 하나님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려고. 그게 게임이 되겠어요? 그건 게임이 안 되지요. 어떻게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인간과 인간끼리 이겼다, 졌다 할 필요 없어요. 하나님을 이길 수가 있느냐. 그래서 23절에 보면,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하나님이 행하셨는데 내가 왜 끼어드느냐 이 말입니다.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연 이스라엘은 그럼 안 망한다는 말이냐, 야곱의 허물도 보지 않는다니까. 그럼 허물 있어도 허물이 없는 셈이 되네요. 허물없는 민족을 무슨 저주를 받게 하겠어요. 안 되지요. 그럼 이스라엘은 안 망한다는 이야기냐. 이스라엘은 망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망한다, 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언약, 아브라함의 언약, 축복의 언약이 바깥에 있는 이스라엘의 껍질을 밀어내고 속의 진짜배기 이스라엘을 바깥의 이스라엘을 찢어버리는 그런 일로 앞 언약이 진행된다는 것을 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안쪽 끝이 바깥 쪽을 밀어내는 거예요. 밀어내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여겼던 그 인간 종교의 것들이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율법의 취지에 의해서 진짜 긍휼 받은 자를 위해서 그 정체가 들통 나게 되어있어요.

그럼 오늘날 성도에게 이게 무슨 의미이냐,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간종교에 푹 젖어있는 나의 자아, 나의 자존심, 나의 명예심, 나의 가치를 매일같이 인생 갈 때까지 쪽~쪽~ 쥐포 찢듯이 찢어버려요.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몸집이 갑자기 커져가지고 난닝구 다 찢어진 사람. 헐크지요. 헐크가 평소에는 옷이 맞아요. 난닝구가 맞는데. 갑자기 지구를 지키려하면 힘이 들어가면 찢어지듯이 주님의 일관된 뜻이 바로 우리의 성도라고 하면서 여전히 갖고 있는 내 자존심과 내 위신과 나의 의를 지키는 것을 그 때 그 때 찢어주시는 겁니다. 그게 성도의 활동이지요.

그럴 때, ‘아, 내가 운반체구나!’ 내가 나를 위해서 하나님 예수님이 계신 게 아니라는 것을 그 때 느끼면서 감사가 찢어지면서 감사가 튀어나오는 거죠. 쉽게 말해서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을 하지 말고, 복음이 와서 나를 덮고 있다는 것을 빨리 이걸 캐치하면 되는 거예요. 내 모든 수고와 고민 같은 것이 다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지독한 나에 대한 집착에서 나오잖아요.

내가 어떻게 할까, 내가 뭘 하면 될까, 뭘 하면 내 형편이 나아질까,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게 자기 생각을 못 버리고 있잖아요. 이 남방은 빨리 팔아야 될 텐데. 이게 왜 안 팔리지.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하고 있다고요. 주께서 덮쳐버리면 니 남방인가, 내 남방이지. 너 조차도 주께서 쓰시는 도구인데. 도구가 주인을 막 들려고 시도하지요. 그러다가 또 잊어버려요. 잊어버릴 때마다 주께서 늘 또 되새기고 되새기면서 우리는 주께서 우리 안에 것을 안에 것이 우리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려운 말을 또 시작해야 되겠네요. 25장. 이렇게 발람이 이스라엘을 찢어버리고 이스라엘을 넘어서 있는 먼 미래의 역사까지 미리 예언을 다 해버렸어요. 하는데 25장에 보니까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있더니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더라, 이리 되어있어요. 자, 어떻습니까.

언약 자체가 갖고 있는 복을 복답게 하고, 긍휼을 긍휼답게 하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을 왕답게 하기 위해서는 필히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방신을 섬기는 그걸로 인하여 죽은 자가 9절에 보면,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명이었더라” 이만 사천명 죽었어요. 이만 사천명. 아~ 아까워라. 그 하나님의 백성들. 숫자가 있잖아요. 이만사천명. 숫자 세는데 그 숫자가 아깝다. 그 세려버리면 그 하나님의 인력자원이 없어지는데, 그럼 야, 이거 어떻게 되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이만사천명 죽고 난 뒤에 민수기26장1절을 보겠습니다. “염병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이 죽을 때 자기 유니폼을 벗어서 줬어요. 니가 이제부터 바람의 아들이라. 이래 가지고. 이종범이 유니폼을 아들에게 물려주듯이. 이제는 기능이 중요하지, 기능이 나에게 덮친 역할 기능을 아들에게 넘겨줬습니다. 일종의 제사장이 세습제가 된 거죠. 왕조처럼.

언젠가 제 강의에서 그런 강의했지요. 대구강의<매순간 끊어냄>인가. 자식들에게 뭘 유산으로 남겨줄 겁니까. 그 때 6자를 칠판에 적은 기억이 나요. “너 자신으로부터 떠나라.” 너무 긴데. 6자. “끊어내라. 너를!”

26장51절 봅시다. “이스라엘 자손의 계수함을 입은 자가 육십만 일천 칠백 삼십명이었더라” 자식에게 유산할 것은 이거에요. “너 자신으로부터 떠나라.” 너 자신으로부터. 이거에요. 복음으로 덮쳐버리면 더 이상 내 자신에 대해서 신경 안 써도 되잖아요. 최고 유산이에요.

이스라엘 자손의 계수함을 입은 자가 육십만 일천 칠백 삼십명이 되었지요. 왜 이렇게 숫자를 헤아렸지요? 민수기1장46절에 보면, “계수함을 입은 자의 총계가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명이었더라” 46절에 처음에 숫자를 헤아렸잖아요. 천팔백이십명 줄었지요. 숫자가 줄었다는 말은 그동안에 뭐를 겪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전쟁은 벌써 벌어진 거예요. 전쟁이. 전사자가 생긴 거예요. 무슨 전쟁이? 외부 전쟁 영향도 있지만, 이스라엘 내부 전쟁. 아까 민수기25장에서 죽은 자가 이만사천명 죽었지요.

그러니까 자꾸 사건이 터지면서 어떠한 특징이 되느냐 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외부전쟁, 내부전쟁을 이미 벌리고 있다는 것을 점점 알아가는 그들의 숫자로 굳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전쟁 중에서 결국은 광야에서 모조리 다 전사하게 만들어요.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는 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민수기31장3절에서 5절에 보면, “모세가 백성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싸움에 나갈 준비를 시키고 미디안을 치러 보내어서 여호와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되” 하나님의 원수가 왜 미디안이 됐느냐 하면, 그 민수기25장에 그 이스라엘을 유혹한 그 여자가 미디안 여자에요.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어떤 류의 사람들이 원수가 되는지를 이스라엘 광야를 가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분명히 알려줘요.

분명히 알려주면서 전쟁을 해서 31장에 보면 미디안 왕부터 해서 남자들 다 죽이고, 부녀들 다 사로잡고 가축까지 다 탈취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31장에 보면 여기서 점점 더 뭔가 체계화 되어간다는 느낌. 여기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자, 여러분이 아는 이야기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본인을 위한 인생은 없다. 하늘 하나님의 하나님이 하늘나라의 적들과 싸우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천사의 군대와 유사한 조직을 갖추었다. 그럼 천사보고 시키지 이스라엘한테 인간에게 맡기느냐, 인간에게 맡기는 이유가 있어요. 천사가 해내지 못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바깥쪽에는 전쟁을 하고 안쪽에서는 하나님이 언약궤를 확장시킨 제사법이 발달했어요. 그 제사법으로 말미암아 생산된 게 뭐냐, 거룩입니다. 거룩. 민수기에 제사법이 굉장히 많이 나와요. 많이 나오는데 제사는 뭐냐, 부정한 것을 제사를 통해서 거룩에 이르게 하는 겁니다.

이 공장을 안에 만드는 거예요. 이 시스템을. 여러분, 돈이 좋습니까? 여러분이 거룩하게 될래요? 어느 것을 원합니까? 거룩한 걸 원해야지요. 거룩한 걸. 이것은 우리가 거룩한 것은 안 받아줘요. 왜그러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합류해야 할 자기 때문에 거룩한 인간끼리 모일 거 같으면 대조해야 돼요. 그러나 거룩한 하나님이 함께하기 때문에 이 거룩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수준까지 올라가 주는 거룩이지, 인간들이 아무리 착하다, 그것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가동되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이 준한 제사법 시스템이 여기서 가동되어야 돼요. 가동이 되게 되면 부정한 것에서 거룩이 됩니다. 부정은 뭐냐, 율법에 의해서 부정한 것이 다 들추어내요. 율법에 의해서. 그러면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을 생산한 거죠. 거룩생산이죠. 거룩생산. 또는 거룩한 사람들의 생산.

요 귀중한 것. 언약궤 중심으로 귀중한 것. 하면서 바깥에는 뭐가 있다? 군인들, 군사들이다 말이죠. 세상과 전쟁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돼요? 거룩한 민족과 거룩하지 않는 민족의 전쟁터에 그들이 나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됩니까? 땅도 없어요. 약속의 땅에 그냥 들어가면 되는 게 아니고 겹으로 겹으로 계속 언약이 없고 부정한 민족들이 그 땅을 이미 점유하고 있고요, 점령하고 있고, 맞서 싸우고 있으니까 이걸 뚫고, 뚫고, 뚫고 뚫고 안하면 약속의 땅에 접근이 자체가 안돼요.

마치 약속의 땅에 앞에 방탄 조끼가 한 두 겹겹이 아닙니다. 이게. 엄청난 거예요.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룰루랄라 룰루랄라~~ 스머프도 아니고 까불면서 갈 수 있는 동네가 아니에요. 지금. 주께서 우리 내부 전쟁을 통해서 자아를 포기하고 우리 속에 있는 거룩의 그 추진력으로 거룩함의 추진력으로 계속해서 세상을 뚫고 뚫고 뚫고 나갈 때 그 때, 약속의 땅에 도달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바로 표에요. 표.

데살로니가후서1장5절 보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그러니까 이 표가 있는데 이 표는 세상에서는 바깥쪽에서는 뭡니까? 전쟁해서 심판하는 표요, 안쪽에서는 환란은 우리가 환란을 받는다는 자체가 우리가 성도라는 표시를 해주는 표다. 시그니처라 말이죠. 환란.

그럼 환란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환란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좋아하고 마시고 할 게 아니고 복음이 있으면 필히 환란이 오는 구조가 되어있어요. 이 세상은. 이 세상 자체가 복음이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복음적인 발언을 쏟아내게 되면 환란을 받게 되어있어요.

그럼 눈꼴시고 이런 것도 있지만 더 노골적인 것도 있고, 음흉한 것도 있고, 어쨌든 복음을 안다는 것은 이 세상이 무슨 종교입니까? 인간위주의 종교 아닙니까. 인간위주의 종교와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대화가. 대화가 안 되면 너 우리 편 아니네. 이리 되잖아요. 안되니까 우리의 적으로 그 쪽에서 결정 내릴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서 그러면 약속의 땅에 이방인들이 겹쳐있는데 그걸 어떻게 뚫고 들어가고 어떻게 사느냐 하는 그 문제. 그건 하나님의 뜻은 민수기에서 전쟁해라. 전쟁하면 어떻게 되느냐, 전쟁하면 전리품 생긴다는 거예요. 그 전리품이 생기면 그러면 그 전쟁이 나면 군인들만 갖게 되잖아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민수기31장에 나옵니다.

미디안하고 전쟁에 나갔거든요. 전쟁에 나갈 때 남자는 다 죽이고, 가축과 아이들과 양떼와 제물을 탈취했잖아요. 7절, 9절에서. 성읍, 촌락 불사르고 탈취한 것, 노략질한 것, 사람, 짐승 다 취했잖아요. 완전히 도둑하고 강도하고 비슷하게 됐지요. 그렇게 됐지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거룩하지만, 이 거룩이 세상 사람이 볼 때는 도적이고 강도처럼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어요. 뭐 윤리적, 도덕적, 착함, 양보, 이런 거 없어요. 아주 냉혹합니다.

그리고 난 뒤에 군대가 와서 돌아왔다 말이죠. 돌아오고 난 뒤에 그 다음 어떻게 했느냐, 22절, 23절, 24절에 보면, “금, 은, 동, 철과 상납과 납의 무릇 불에 견딜만한 물건은 불을 지나게 하라 그리하면 깨끗하려니와 오히려 정결케 하는 물로 그것을 깨끗케 할 것이며 무릇 불에 견디지 못할 모든 것은 물을 지나게 할 것이니라 너희는 제 칠일에 옷을 빨아서 깨끗케 한 후에 진에 들어올찌니라” 이게 안에 있는 시스템이에요.

이스라엘 시스템은 뭐냐, ■하여튼 바깥에 나오면 더러워요. 안에 이스라엘 안에 들어오려면 아무리 거룩한 전쟁을 하고 들어오려면 ■그 시스템에 의해서 더러움이 정결함으로 바꿔질때만 이스라엘 내부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25절부터 54절까지 이게 뭐냐 하면, 전리품 분배하는 거예요. 그 분배하는 것에 대해서 27절에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그 얻은 물건을 반분하여 그 절반은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주고 절반은 회중에게 주고” 그럼 그들은 다 차지하느냐, NO. 아니지요. 28절,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떼의 오백분지 일을 여호와께 드리게 하되”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번 전쟁을 연출하고 계획하고 적들이 쳐들어오고 나가고 물러가고 패배하고 이런 모든 것은 각본대로 움직인 연극입니다. 연극. 하나님이 벌린 연극이었어요.

연극이니까 그 앞으로 또 연극하는데 비용이 들 거 아닙니까. 그 비용을 여호와께 드린다 이 말입니다. 여호와께 드린다는 것은 바로 제사장에게 주는 거예요. 제사장은 뭘 가동하는 전문가들입니까. 안에 있는 거룩이 그 부정한 것을 거룩으로 바꾸는 그 시스템을 가동하는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에요. 민수기에 그게 굉장히 많아요.

뭐 광야에서 백성들이 원망했다, 해놓고 또 돌아서서 뭐냐, 제사는 이렇게 드리고 속죄제 이렇게 하고, 안식일은 이렇게 지키고, 제사장 복장은 이래야 하고, 죽 그 이야기해요.

거룩에 대한 그 공장. 거룩생산 공장에 수시로 관리하고 부속품이 빠졌는지, 그걸 수시로 관리하는 그 중심이에요. 그러니까 거기에 종사하는 제사장들은 12지파보다 그 우위에 서있는 겁니다. 민수기에서.

30절에, “또 이스라엘 자손의 얻은 절반에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떼나 각종 짐승을 오십분지 일을 취하여 여호와의 성막을 맡은 레위인에게 주라” 이리 되어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그들이 어떻게 살 것인지를 광야에서 전쟁을 통해서 실습을 해보는 거예요. 실습하는 겁니다.

31장 54절에,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천부장과 백부장들에게서 금을 취하여 회막에 들여서 여호와 앞에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을 삼았더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막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장차 성막이 뭐가 됩니까? 성막이 성전 되겠지요. 성전에 들아가서 성전에 그들이 들어갔다는 말은 성전이 보이지 않는 왕이 계시고 그 왕 중심의 나라가 무슨 나라? 이스라엘.

따라서 이스라엘 바깥의 문제가 아니고 이스라엘 안에 있는 왕과 백성사이 관계가 원만해야 되고 정상적으로 되려면 제사가 제대로 가동되어야 된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거룩과 더러움의 전쟁에서 그 다음에 계속 이겨내야 되니까.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무슨 지파가 중요해요? 레위지파가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32장을 봅시다. 오늘 민수기이니까 민수기 전체를 짚어보는 겁니다. 32장을 보게 되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지금 정신이 어디에 팔려있습니까? 자기의 가축과 목축 잘 키우는데 정신이 팔려있지요.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이라 하는 것은 약속의 땅 아닙니다. 약속의 땅은 요단강 서쪽의 땅이 약속의 땅이에요.

지중해 바다, 요단강, 사해있고 갈릴리 바다 있고. 이 안쪽 지중해와 이 요단강 사이가 약속의 땅이에요. 에스겔 마지막에 나오는 약속의 땅.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 모압 땅에 가다보니까 생각지도 못한 목축지가 나타나거든요. 요게 길르앗이에요. 길르앗. 와~ 참 좋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담임선생님이 인솔해가지고 소풍 가는데 다른 반보다 더 좋은 놀기를 보는데 이건 차타고 목적지도 가기 전에 가보는데 너무 좋은데 있어가지고 “야, 우리 여기서 내리자. 오늘 소풍 여기서 놀자.” 이런 식으로.

지금 관심사가 뭐냐 하면, 가축들을 어떻게 먹여야 되느냐, 가축들을 먹이면 누가 살지요. 본인들이 살잖아요. 여기에 관심 있는 거예요. 이 땅을 주옵소서. 라고 모세에게 말하는 거예요. 이 땅. 갓 지파, 르우벤지파 나중에 플러스 므낫세 반지파 이분의 일 지파, 인구가 너무 많아가지고 밀려서 온 거예요. 그러니 이 사고방식이요, 그러니까 모세나 다른 지파가 너는 싸울 거야? 이런 거예요. 다른 지파가 알지요.

자, 정리해 봅시다. 이스라엘이 산다는 것은 농사지어서 사는 게 아니에요. 전쟁을 해야 되고, 이 전쟁은 하나님의 거룩이 거룩으로 속된 것을 다 뺏아버리고 차지하고 지배하고 정복한다는 거, 거룩이 더러움을 통치한다는 그 증거로서 일어나는 전쟁이거든요.

그러니 전쟁을 하려면 이스라엘부터 뭐로 구성되어야 돼요? 거룩되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더러운 이스라엘이 거룩하게 되려면 거기에 제사가 있어야 되고, 제사는 다른 지파 12지파를 대신해서 레위지파가 그들을 대신해서 제사를 전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그쯤 이야기하고 그럼 레위지파한테 혜택이 많이 주어질 것은 아는데, 어느 정도로 레위지파가 주어지며 가는지를 우리가 한 번 봅시다. 민수기35장에 성읍을 몇 개 주느냐 하면, 48개를 줘요. 48개를 주는데, 그 중에 여섯 군데가 뭐냐, 특별한 공간이 있어요. 그게 6절에 보면, 도피성입니다. 아~ 이거 참 중요하지요. 이거 빠뜨리면 민수기 아무것도 아닌 게 돼요.

그래서 그 도피성 이야기가 민수기35장9절부터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35장 끝까지 이어집니다. 민수기 이거 이야기하려고 민수기 숫자 헤아렸다. 할 정도로 제일 중요한 것을 다 이야기해버렸습니다. 그럼 도피성이 뭐냐, 이제 그걸 설명해야 되겠지요.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공사 소리도 안나고. 왠 보너스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도피성. 아~~ 벌써 말 자체를 보세요. 도피성. 피하라 이 말입니다. 도망쳐라 이 말이지요. 너희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돼! 무엇이 필요하냐 하면 탈출이 필요한 공간에 우리가 출생했다는 거예요. 탈출이 필요한 공간에 우리가 출생했다. 생일축하합니다!!! 아니야! 아니 아니 아니야! 생일축하하면 안되고 빨리 탈출해야 돼요. 여기서 엑서더스 여기서 벗어나야 돼요. 탈출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이야기를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 우리는 탈출했는데” 하나님이 이야기하시기를 “니가 지금 너 자신에서 지금 탈출 안했잖아. 너 자신의 생존에서부터.” 아까 르루벤 자손봤지요. “야! 여기 목축지 많네. 우리 양들 키우면 되겠다. 이러면 우리 자손까지 대대로 살겠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탱큐! 고맙습니다.” 이러고 있다 이 말이지요. 지금. 그건 인간교잖아요. 인간교.

자기 몸둥아리 하나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 필요하다. 인간교 그걸 그대로 티를 다 내버린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도피성을 준비해서 도피성이 그 요단강 두 군데 이쪽이 네 군데. 내가 알기로는 그 쯤 돼요. 도피성 여섯군데에 해가지고 그 위치가 각각 40Km 100리씩 떨어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도피성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뭘 보여주느냐 하면, 이 제사장이라는 거. 제사장에서 뿜어 나오는 위력이 어떤 위력이냐 하면, 죽은 자를 살리는 위력이에요.

죽은 자를 살리는 위력이에요. 살아있는 자를 생존하는 위력이 아니고, 비리비리한 인간에게 부자 되게 하는 위력이 아니고, 죽은 자를 살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 위력이 위력답게 발휘가 되려면 어떻게 돼요? 죽은 자가 이스라엘 내부에 수시로 발생되어야 됩니까? 발생 되지 말아야 됩니까? 수시로 발생되어야 돼요.

죽는 사람이 발생되지 않으면 인간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내가 이 땅에 열심히 사는 것은 그만큼 실수를 줄이고 매사에 행동을 할 때 조심스럽게 했고, 그다지 벼락 맞을 나쁜 짓을 안 하고 피해버리면 우리는 그 행동의 결과로 말미암아 비축된 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살 수 있다. 앞으로 행동 조심하고 바르게 살아야지.’ 이리 나온다 말이지요.

그러니 이게 뭡니까. 이건 죽을 생각 하지 않고 조심~ 조심~ 해가지고 경거망동하지 말고, 착한 일, 착한 일만 계속하게 되면 주께서 살린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건 마귀가 알려준 비법이지요. 마귀의 생존 방법이지요.

여러분, 자연의 횡포는 착한 사람, 나쁜 사람 가리지 않습니다. 미국의 플로리다를 몰아친 허리케인은 헤리케인이 바람 불면서 “나쁜 사람 잡아먹는다.” 그렇게 불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 착한 사람 가리지 않아요. 다 죽여버려요. 그냥. 인간은 다 죽어요. 왜? 선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에요. 다들 나름대로의 조심스럽게 살아갑니다. 소용없어요.

제사라는 것은 모든 인간을 죽은 걸로 간주해요. 죽은 걸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래서 부정한 것만 계속해서 생산해요. 그래서 그 부정한 것을 어린양 앞에 가져오면 생산된 죄가 어린양으로 인하여 거기에 하나님의 거룩과 의로 바꾸어지는 겁니다. 멋진 기계장치 아닙니까.

제가 이리 이야기하면 “목사님, 우리 집도 그런 거 하나 들여놨으면 좋겠다” 하는데. 지금은 양, 소 바쳐도 소용없어요. 예수님의 피로 충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를 믿을게요. 아니. 예수님의 피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피가 여러분들 속에 들어와서 예수님의 피의 운반체로 우리를 사용한다니까요.

우리가 피를 접근을 못해요. 왜? 우리가 예수님을 추방했기 때문에. 배척한 관계이기 때문에 접근이 안돼요. 접근이 안 되는데 배척을 뚫고 우리속에 예수님의 사랑이 들어온 거예요.

그럼 그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죄인 되게 만들어버려요. 그게 사랑이에요. 우리를 날마다 죄인 되게 만들어서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천국 가는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거. 그게 주께서 하신 일이에요. 위력입니다.

그럼 그 똑같은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시로 일어나요. 그게 뭐냐 하면 사건 사고입니다. 여러분들이 뉴스를 딱 틀면 어떤 때는 별 뉴스 없으면, 나올 거예요. 남해고속도로에서 음주운전 하다가 7중 충돌 사건. 이리 나오지요. 그게 사건 사태 아닙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혹시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 죽었습니까. 예수 믿는데 죽었습니까. 이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럼 그 사람이 어떤 목사인데 운전하다 죽었다. 기도 좀 하지. 운전할 때는 기도하고 운전해야지. 기도했는데. 기도했는데 난데없는 남의 차가 박아서 온 일가족이 목사 가정이 다 죽었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여, 왜? 좀 유식한 사람은 Why me? Why? 왜? 그런 일이.

주님께서 준비한 답변이 있어요. 망대가 무너져 18명 죽은 것이 그들만 죄 있는 줄 아느냐, 살아있는 사람에게 경고 주기 위해서 그 사건을 일으킨 거예요. “그 다음 사건은 니 차례~~” “안 돼! 안 돼! 난 아직 우리 딸 시집도 안 갔는데. 안 돼! 피해가시옵소서. 피해가시옵소서. 다음 차례하게 하옵소서. 지금은 안돼요. 애가 아직 초등학교 졸업하려고 해서 안돼요. 안 돼! 나 더 살아야 돼. 나 애 다 키워야 돼! 애가 얼마나 원망할까. 지 엄마 죽으면.” 이러고 있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건 뭡니까. 인간교. 또 인간교 중심의 교회가 발작을 한 거예요. 또 발작을 한 거예요. 사태를 일으켰습니다. 난데없이 죽은 사람은 죽고, 죽인 사람은 살아남았잖아요. 율법에 의하면 죽은 사람 죽었으면 죽인 사람도 실은 살았다 하지만 실은 죽은 사람이에요. 그 죽은 사람을 어디에 집어넣느냐, 도피성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리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가 없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이 사람을 이용해서, “너희들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너희들의 가장을 죽였느니라.” “왜? 안 돼? 싫어? 안된단 말이야?” 이리 된다 말이지요. “이 사람을 통해서 음주운전하는 교회도 안다니는 음주운전한 그 사람을 통해서 너그 있는 가장을 죽이겠다. 왜? 그럼 니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도대체 뭐야? 니 보호하는 하나님이야? 그럼 니도 똑같은 사람이야.”

도피성은 그 대신 살인자로 갔다가 그냥 못 나와요. “나, 하나님이 나보고 일을 시켰대. 나 그럼 나올 수 있다.” 아니에요. 제사장이 죽어야 나옵니다. 그 제사장이 누구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었음이 피지요. 주께서 피를 전달하는 조건하에 그 사람은 세상에 다시 나갈 수가 있어요.

내가 산 것은 내가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피 흘렸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민수기에서 말하는 복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일찍부터 주님이 민수기를 통해서 십자가 복음을 담아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나라 그 백성들이 애굽사람들이라서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인 것을 같이 겸해서 이야기해 주시니 더욱 더 감사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십자가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늘 기억하고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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