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생명나무로 본 창조

아빠와 함께 2024. 6. 20. 19:01

안양20240613a잠8장35절(생명나무로 본 창조)-이 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오늘은 <뒤에서 본 한국교회> 53페이지 (1. 창세기와 한국교회) 창세기 먼저 이야기하고 한국교회는 약간 옆에서 현재 한국교회 사정은 잘 아는 거니까 창세기가 모르지요. 한국교회는 잘 아는데 창세기는 모르지요. 창세기와 한국교회에서 창세기는 말씀에 해당되는 겁니다.

창세기는 말씀에 해당되는 거고요, 창세기부터 해석하면 안 됩니다. 신약에서부터 창세기를 해석해보면 창세기는 뭐냐 하면 ‘계약’입니다. 계약. 언약. 이 계약, 언약을 빼어버리니까 창세기가 설명이 안 되는 겁니다. 계약으로 언약으로 맺어졌다는 말은 이 점을 꼭 염두에 둬야 돼요. 무력, 무력은 힘이에요. ‘무력(武力)이 없으면 계약은 무효다.’ 계약은 무효다.

이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에요. 계약에 누가 보증을 해줘야 돼요. 계약에. 대표적인 것이 초반부터 어려운 것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할 수 없어요. 알아야 돼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계약이니까 이 사회에서는 뭐냐 하면 기록이에요. 기록. 기록한 건데.

예를 들어서 돈 같은 거. 돈을 초등학생들이 학교에서 미술시간에 그릴 수가 있잖아요. 그릴 수 있지요. 그러면 그게 유통될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왜 유통이 안 되지요. 초등학생이 미술시간에 그린 돈이 왜 유통이 안 되는 겁니까? 그건 누가 보증을 안 해줬어요? 한국은행에서 보증을 안 해줬지요. 그럼 한국은행은 소속이 어디지요? 국가지요. 국가가 소속이다 말이에요. 국가인데 국가가 어디 있지요? 국가는 눈에 보입니까? 국가는 눈에 안 보이는데요. 국가가 어디 있어요? 보이는 사람들만 있는데.

그래서 국가라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어떤 보이지 않는 관계망이 있을 거다 말이지요. 그 관계망을 법이라고 해요. 모든 법은 항상 형식이 계약적인 형식을 띠고 있어요. 사법 공부하는 사람들은 로우스쿨 하는 사람들이 뭘 배우느냐 하면, 계약을 배우는 겁니다. 사법체계 공부하는 책에 보면 맨날 갑이 어떻고, 을이 어떻고, 병이 어떻고, 갑을병 계속 나오잖아요. 그 사이에 계약인데 이 계약은 위반했을 때 어떠한 힘의 국가의 힘의 조치가 주어지는 계약인지 아니면 안 주어지는 계약인지 그것을 선별하는 그 공부를 하는 겁니다. 그 법 속에는 모든 인간관계가 다 포함돼 있어요. 의료법부터 시작해서 종교법까지 전부 다 모든 법이 다 포함이 되어있어요.

만약에 어떤 젊은 남자가 노래를 부르는데 인기가 너무 좋아요.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럼 군에 안 가도 되는 겁니까? 가야지요. 오늘 제대하더라도 가야지요. 그럼 본인은 가기 싫어요. 왜? 인기가 계속 있어야 되고, 돈이 계속 들어오니까 가기 싫은데 왜 군에 가야 되지요? 그건 군에 갈 당사자가 다시 한 번 물어보는 거예요. 내가 왜 군에를 가야 되지? 입영통지서가 그게 뭔데? 입영통지서가 계약서입니다. “나는 이 계약 인정 안 했어. 나는 이거 거부해.” 그럼 누가 오느냐 하면 경찰이 동원되지요. 경찰이 동원해서 나를 수갑 채워서 잡아간다 말이지요.

경찰 아저씨는 나하고 무슨 관계있다고 왜 나를 나의 자유를 나의 행동의 반경을 제한하고 왜 박탈하느냐, 경찰은 법대로 시행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법이 왜 있는데? 법이 어디 있지요? 아, 이런 게 참 어려운 거예요. 법 같은 건 나는 본 적이 없고 나는 지금껏 내 마음대로 안 살아본 적이 없고 나는 뭐든지 내 맘대로 살았다. 내 맘대로 살았다. 횡단보도 나는 빨간 거, 파란 거 뭔 뜻인지 모르겠다. 그냥 걷고 싶은 대로 걷는다. 차가 와서 나를 쳤다. 이런 경우에 모든 경우에. 아~ 그러면 이게 하나 하나가 뭐냐 하면, 기성이라 하는 거예요. 기성. 기성세대. 기성.

이미 인간은 법에서 태어나잖아요. 법에서. 구분해 봅시다. 인간은 법에서 태어난다. 그런데 또 하나 태어나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난다. 그럼 이 세상은 뭐냐 자연 더하기 뭐하면 돼요? 자연 + 법하면 되겠지요. 이 법을 뭐라고 하느냐 문화라고 하는 거예요. 문화. 법은 문화에 속하기 때문에. 자연은 그냥 자연 그대로에요.

그런데 인간이 발생하면서 인간이 뭐냐, 우리가 이 자연 속에서 또는 땅의 세계 속에서 살아야 되겠다고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머리에서 나온 게 뭐가 되겠어요? 법이 되고 계약이 되겠지요.

그런데 그 법과 계약을 맺는데 만약에 그 처음 할 때, “나는 그 법을 인정 안 해.” 라고 한다면 그 다음에 누가 가만히 있지 않아요? 법의 세계에서 법이 없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어요. 누구지요? 누굽니까? 왕이에요. 왕은 절대로 법에 매이면 안 됩니다. 대통령은 왕이 아니에요. 왕이 반드시 있어야 돼요.

좀 논리가 비약적이지만, 이 세상의 왕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의 왕은 죽음이 왕입니다. 이 세상에 죽음이 로마서5장17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성경에. 제가 짠! 한다고 지어낸 게 아니고 죽음, 또는 저주, 또는 죄가 왕노릇한다. 왕 노릇한다. 이 성경의 로마서5장에 있는 이 말씀보다 더 현실을 현실답게 묘사한 데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책도 이거 보다 더 못한 거예요.

그러면 이 성경에 있는 이 죽음이 또는 죄가 왕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악마가 왕이 된다는 이 묘사 말고 인간들이 이걸 거부하거든요. 거부해버리면 인간은 이 세상에 누가 법을 법에 효력을 주고 무력을 여기다가 같이 겸비해서 법을 안 지키면 강제로 구금하고 체포하고 사형시키고 죽이고 사형언도 내리고 하는 그 주인공, 그 주체는 누구냐, 그건 인간의 왕에요. 인간의 왕입니다. 그래야 나라 꼴이 돼요. 나라 꼴이.

독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회적 혼란입니다. 사회적 혼란, 사회적 혼란을 누가 잡습니까? 독재자가 잡아요. 집에 쌀벌레 많고 집에 모기 있을 때 누가 잡습니까? 전기채가 잡지요. 파리채가 잡잖아요. 파리채가. 그걸 왜 잡아요? 모기도 자유가 있는데. 쌀벌레도 자유가 있는데 우리가 왜 잡습니까? 그건 뭐냐 하면 이 영역은 누가 왕이냐 말이지요. 누가 왕이다? 인간이 모기와 파리에 대해서 왕이잖아요. 요즘은 그게 없어집니다. 요즘은 누가 왕입니까? 개가 왕이지요. 고양이, 개가 왕이에요. 이 영역은..., 이게 참 신기한 게, 자연은 눈에 보이잖아요. 그런데 자연만큼 실질적인 게 있다는 게 신기한 거예요. 뭔가 문화에 저촉하면 안되고 법은 문화에 속하니까. 법에 저촉하게 되면 내가 죽는 수가 있다는 겁니다.

중세시대 때 서양 중세시대 때, 기독교 교인들이 왜 그리 많았을까요? 그건 간단해요. 교회 안 나오면 성당 안 다니면 죽어요. 그러면 성당에서 뭘 가르칩니까? 하나님을 가르치지요. 그러면 묻습니다. 하나님이 실지로 왕입니까? 죽음이 왕이에요? 죽음이 왕이지요. 그래서 중세에서 뉴턴 그 과학혁명이 일어나고 난 뒤 갈릴레이 갈릴레오, 그 다음에 뉴턴, 라이프리치, 과학이 발달하고 그 윌리엄 하비라는 사람은 영국의 사상가인 베이컨의 주치의인데 그 사람은 뭐냐, 혈관 순환계를 발견한 사람이에요.

피는 자체적으로 순환한다. 돈다는 겁니다. 피가. 정지될 수 있는 게 아니고 돌므로서 몸의 치료에 대해서 획기적인 발상을 바뀌게 한 거예요. 그럴 때 과학혁명이 일어나면서 무슨 권위가 히마리가 없게 되었느냐 하면 교회의 권위가 없어졌어요. 교회의 권위가 없어졌으면 그 당시 사람들은 교회 다닐 때 하나님 알고 다닌 게 아니고, 교회 말 안 들으면 죽어요. 죽는데, 과학이 발달하면서 내가 굳이 하나님 믿지 않더라도 내가 내 본성을 발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쉽게 말해서 내가 신이 되는 거예요.

신을 믿지 않아도 내가 신이 된다는 방식으로 살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아이디어가 과학발달을 가속화 시킨 겁니다. 어제 수요일 설교 중간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요즘 사람은 신이 있든 없든 아무 사는데 상관이 없어요. 신이 있던 없던 사는데 지장이 없어요. 여러분, 자녀들 생각해보면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 하나님 없으면 못 살겠어.” 막 징징 울고 하는 아이들 봤습니까. “교회에 보내주세요. 나 밥 안 먹을 거야.” 이런 거 봤어요?

오히려 반대잖아요. “왜 엄마 종교를 나에게 강요해. 나는 자유의지가 있어.” 어디서 뭐 들은 소리가 있어가지고. 그런 이야기하지요. 그것처럼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개인의 짧은 인생 가운데 반복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잠재성에서 현실화되기 때문에. 잠재성이 잠재태가 잠재상태가 현실상태로 바뀌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두움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왕에요.

아! 나이들면 죽는구나. 그게 왕이 아니고, 죽음이 왕이라는 말은 이건 창세기3장에 벌써 나옵니다. 이미 죽음이 주님께서 먼저 준비해 주셨어요. 단, 조건이 있어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죽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을 이해할 때 여러분들이 선악 지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명심해 주신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이런 생각을 해야 돼요. 이 세상을 이해하는데 뭔가 빠진 게 있다? 뭐가 빠졌을까요? 이 세상 위에 뭐가 빠졌을까요? 다 왔는데. 선악과 쪽으로 이 세상을 이해한다. 그럼 빠진 부분은요? 생명나무지요. 생명나무. 이건 초등학교 2학년도 알아요.

생명나무로 보는 창세기. 생명나무로 보는 이 창세기 성경 말고, 창조, 이 자연 세계, 과학 세계를 생명 관점으로 오늘 시간 한 번 봅시다. 한 번 봅시다. 보기 전에 선악과로 봤을 때 어떤 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느냐, 죽음에 자기가 죽기가 무서워 짓눌려 사는 생활이 바로 선악적 사고방식에 의해서 비롯되는 겁니다.

부산강의에서 의성어, 제가 소리 나는 단어 하나 세자로 이야기한 적 있어요. 딸가락! 했지요. 딸가락. 떡볶기 냄비 다 먹고 난 뒤에 숟가락으로 냄비 긁으면 딸그락 딸그락 하지요. 인간은 그 선악과 지식 위에 있어요. 그걸 뚫어낼 수가 없습니다. 뚫어낼 수가 없어요. 그게 인간의 바닥이에요. 나는 뭐냐, 선악과 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선악과 이거는요, 지진도 안 일어나요. 지진 4.5도 안 일어나요. 그냥 강한 유리보다 더 세요. 어떤 것도 마지막에 모든 사고와 철학과 과학을 다 돌고 돌고 탐구하게 되면 딸그락 소리가 나면서 선악지식에서 딱 도달됩니다.

그러면 이 선악지식이 인간에 어디에 있는가, 인간에 이미 내면화되어있어요. 이게 내면화가 중요합니다. 이 내면화가 되어있다는 말은 인간이 이렇게 있는데.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에게 두 개의 주체를 형성시킨다. 라고 볼 수 있어요. 두 개의 주체인데, 정확히 말해서 하나의 자아와 하나의 주체 이렇게 하면 돼요.

(인간에게 두개의 주체를 형성시킨다→자아(우상)를 품고 주체로 살아간다)


주체(외면의 사용가치):변화

자아(내면화):고정성


내면화 되어있는 것을 자아라고 하고, 외면에 있는 이것을 사회의 다른 사람과의 교류해야 될 그 바깥 면을 가지고 이걸 주체라고 이야기합니다. 주체는 뭐냐 하면, 사용가치에요. 나 이 세상에서 어디에 써먹을 수 있는 가치 있는 인간인가, 사용가치에요. 사용가치.

처음에 남자가 결혼할 때 사용가치가 늘 변해요. 처음 남녀가 결혼할 때는 사용가치는 뭐냐 하면, 남자 같으면 여자보고 이쁘다. “니 너무 이쁜데 내한테 시집오면 손에 물 안 묻히게 해줄게. 내가 알아서 다 해줄게. 니는 그냥 랄라라라라라~~ 니는 그냥 지중해 가가지고 놀러가고 쇼핑이나 해라. 니 내가 다 해줄게.” 그 때 사용가치는 뭐냐, 그냥 계속 이쁘기만 해. 이게 사용가치지요. 그런데 이 사용가치가 뚝뚝 떨어집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당신은 참 멋있는 거 같아. 내가 돈 벌어서 다 당신 밥 먹여줄 테니까 당신 집에서 애는 못 낳지만 애는 키울 수 있잖아. 내가 바깥에서 일해가지고 당신 전업주부해도 나는 말 안 할게.” 이렇게 말했던 그 사용가치가 뚝뚝 떨어지지요. 그러니까 주체는 뭡니까. 늘 변하는 거죠. 타인이 나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해 주느냐에 그 레벨에 따라서 이게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뭐 주식 시세도 아니고 환율도 아니고 자꾸 달라져요. 서울이 싫어. 나는 촌에 갈래. 또는 한국이 싫어, 나는 해외에 갈래. 이게 뭡니까. 한국에서의 사용가치를 주체가 주체답게 인정을 못 받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다른 나라에 가서 내가 이렇게 실력 있는 사람인 사용가치를 높여보겠다. 그러니까 이게 주체거든요.

주체를 높이는 방법은 내가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주변상황이 같이 동반해서 변해줘야 돼요. 늘 틱틱거리던 남편이 어느 날 집에 와서는 “당신 같은 여자 없었어. 최고야!” 이러고 있다 말이죠. 그런 남편이 그런 일이 있거든 거의 100% 몰래 주식하다 망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지가 캥기는 게 있으니까 갑자기 고개를 확 숙이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 덕분에 내 주체가 확 올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당신 돈 얼마 모아놨는데?” “뭐 얼마 되지 않아. 한 22억쯤 되는가 보다.” “당신 최고야!” 갑자기 주체가 확 올라간 거예요. 이게 주체에요. 그런데 자아는 요지부동이라. 어릴 때 자아, 커서 자아, 80먹은 자아, 나이 70인 자아, 자기는 항상 몇 살이냐, 28살이에요. 28살짜리 꿈속에 나타나요. 항상 28살 많이 봐주면35살. 이건 나이가 늙지도 않아. 이 자아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 주체는 변해서 가짜고, 자아는 뭡니까?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이게 뭐가 되지요? 변하지 않는 걸 한 자로 이걸 뭐라고 합니까? 이걸 ‘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변하지 않는 건 불변의 존재는 신이에요.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자아를 품고 사회로 나가서는 주체로 살아가는 겁니다. 자아를 품고 주체로 살아갑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아까 이야기에서 이 세상에서 왕이 있다, 했지요. 왕. 이 세상에 왕이 있는데 그 인간 세계에서의 왕은 뭐냐 하면 모든 계약을 수사하려면 힘, 무력이 없는 계약은 무효가 됩니다. 그러면 창세기4장을 생각해 보세요. 벌써 창세기3장, 4장 들어갔어요. 4장에 보세요. 가인의 도시가 나오지요. 가인의 도시. 가인의 후예. 가인의 도시가 나오지요. 가인의 후예를 할 때 그 유명한 제임스딘 영화<에덴의 동쪽>에 나오지만, 그들은 어디서부터 빠져나왔어요? 에덴의 동쪽 편이지요. 에덴의 동쪽 편. 에덴의 동쪽에서 따로 에덴을 구성하는 작업에 나선 거예요. 사실은 하나님이 누구보고 시켰는가, 은연중에 하나님이 가인보고 시킨 거죠.

왜냐하면 가인은 살인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됐지요. 이 말은 오히려 그걸 적극적으로 이해해 봅시다. “하나님 없이도 나 살 거야.”라는 새로운 집단이 형성되는 겁니다. 굳이 하나님에게 매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살 수 있어. 우리끼리. 우리 인간들끼리 살 수 있어. 그게 바로 인간의 문명의 개시 입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문화와 문명은 그 가인의 후손에서 나온 거예요. 아벨의 후손은 한 게 없어요. 아벨의 후손은 그냥 애 낳은 거 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이 세상의 찬란한 문명은 과학과 철학과 예술과 언어학, 정치학과 경제학 모든 것은 가인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거예요. 가인의 아이디어가 뭐라고 했습니까? 뭐 없이 사는 방식? 하나님 없이 사는 방식.

하나님 없이 사는 방식은 뭐냐, 힘과 힘에 의해서 유지되는 방식. 힘과 힘에 대해서. 지금 제가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뭐냐, 현실이 뭐냐를 지금 공부하고 있는 거예요. 현실을.

시편 8편2절 봅시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주의 대적을 인하여 그 다음에 나온 게 뭡니까?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권능을 세웠지요. 자, 권능은 권능인데, 주님과 대적하면서 주님의 적들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요. 주님쪽에서는 권능이 누구의 입에서 나옵니까? 어린아이와 젖먹이지요.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특징이 뭡니까. 힘이 없다는 거예요. 힘이 없는 것을 가지고 저쪽에는 하나님 맞은 편에는 뭐가 있습니까? 오직 힘뿐이에요.

힘이 있어야 그 쪽 세계의 계약이 체결이 돼요. 모든 상법이든지 형사소송법이라든지 모든 것 판례라든지 가정법이라든지 어떤 모든 법. 사학재단법, 모든 법이 힘이 없으면 이게 의미가 없는 거예요. 전부 다. 혼인을 했는데 혼인법이 적용되지요. 우리나라는 축첩제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구야? 누구? 그런 걸 누가 정했어? 법입니다. 법에는 그 시대에 맞게 국회에서 만드는 것도 있지만, 어떻습니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판례와 관행과 관습. 쉽게 말해서 풍습. 다른 말로 하면 문화. 문화에 힘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러시아의 인형 같아요. 옛날부터 꾸준하게 이어져오는 아버지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자식을 낳으면서 그냥 육신만 낳은 게 아니고 그 문화도 대를 이어서 꾸준하게 확대되어 왔던 겁니다.

그걸 로마서5장에서는 그 전체를 뭐냐, 아담 안. 아담이라는 단지. 그 단지 안에서 인간 세계는 거기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갇혀있는데, 자기들은 거기서 발전의 가능성이 있다고 목성이 어떻고, 화성이 어떻고, 로켓을 쏘아올리면 된다는 거예요. 로켓 쏘아 올려봐야 그 단지 안에서 노는 거죠. 단지 안에서.

진화론자의 제일 자체적인 모순은 뭐냐,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그 주장은 옛날 사고방식에서 그 범주내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 논리는 갇혀있는 논리에요. 진화론은. 진화 발전한다. 끝없이, 영원히, 영원히, 무한대로 발전할 거야. 라는 그 자체가 이미 인간에서 나왔던 이미 식상한 사고방식이에요. 옛날에 나왔던 거거든요. 그걸 잠재성이 내면화됐다, 이 말이지요.

그럼 하나의 재미있는 예를 들면, 내부적으로 자아지요. 자아인데, 이 자아가 사회에 나오면 힘을 발휘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세상은 내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은 내 중심이 아니고 누구 중심입니까? 기존에 있는 인간사회 중심이에요. 내 중심이라고 내 맘대로 하면 안돼요. 이 세상에는 법이 있으니까.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는 힘이 있으니까.

자, 여러분들이 이해를 아주 간출하게 쉽게 하기 위해서 이 힘은 어디서 나왔다고 제가 이야기했습니까? 에덴의 동쪽이니까 어디서 나왔습니까? 선악과 지식에서 나왔지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건 선악과 지식에서 나온 겁니다. 딸가락 거리는 거.

그런데 이 힘이 없는 여분의 힘이었어요. 여분의 힘. 그걸 부산강의에서 과잉에너지라 하는데. 여분의 힘. 그 여분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생명나무에서 나온 거예요. 여분의 힘은. 생명나무를 빼놓고 창조를, 인간세계는 창조를 열심히 일하는 거예요.

그러면 돈이 돈으로 유통된다는 것은 한국은행이 보증한다는 인간세계의 기록이 있어야 되지요. 기록이. 놀랍게도 여분의 힘은 무슨 나무에서 파생된다? 생명나무에서 파생될 때에, 여기서 이 생명나무에 속한 세계를 따로 만드는데. 이거 한국은행에서 돈에 기록할 때에 한국은행에 힘이 있어야 돼요. 한국은행 내가 만들어놓고 돈 찍으면 안되잖아요. 그 국가가 법적으로 보증을 해줘야 돼요. 한국은행은. 툭하면 은행에 막 보증하고 이러면 안됩니다. 보증을 하잖아요.

생명나무에서 힘이 발휘될 때 그 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경에서 이런 표현을 해요. 기록. 기록하는 거예요. 다큐멘터리. 기록하는 거예요. 눅가복음10장20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하늘에 기록을 했대요. 하늘에 기록을 했다는 것은 누가 보증을 해줬다는 얘기고요. 누가 보증을 해 준 거예요. 기록이 있다는 것은.

그 보증이 유효한 걸까요? 보증을 누가 보증합니까? 생명나무에서 보증이 되겠지요. 생명나무에서. 그렇지요. 생명나무에서 보증하는데. 생명나무는 지금 누구 손안에 있습니까? 생명나무는 누구 손안에 있지 않습니까? 마귀나 인간 손 안에 있지 아니하지요. 그러면 생명나무는 누구 손 에 있습니까? 하나님 쪽, 예수님 쪽에 있지요.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누구든지 내 양은 내 목자의 손에서 어떤 권세도 빼앗을 자가 없다고 했어요.

로마서8장에 보면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세상의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자가 없다. 왜? 계약에는 힘이 있어야 유효하고 그 힘은 인간이 아는 힘이 아니고 인간이 손도 못 대는 그 힘에서 생명나무 힘에서 나온 힘이 보증을 해주고, 그것이 실제적으로 누가복음10장20절에 처럼 기록으로 남는 거예요. 기록으로.

시편69편28절,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저희를 생명책에서 지워버려서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자, 이러한 생명나무에 힘이 있고 그 힘으로 기록된 것은 이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고 했지요. 인간의 힘은 생명나무에 접촉을 못했으니까.

그러면 성도가 도대체 뭘 믿고 사는 사람들을 가지고 성도라고 합니까. 성도라 하는 것은 내가 작용하는 힘을 안 믿는 사람이지요. 내가 하는 행동과 움직임에 대해서 어떤 효과 있을 거라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성도 맞지요. 왜냐하면 나도 인간에 속하니까. 이걸 달리 하면 자아가 원하고 의지하고 자아가 감정 느끼고 이성적으로 따지고 하는 그 모든 것과 완전히 끊어진 단절된 어떤 결과를 믿는 사람이 누구다? 그게 바로 성도지요.

이 산에 있는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던지라고 니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그랬을 것이다. 그건 뭐 우리가 믿으라는 말입니까? 결과를 그냥 받아들인다는 뜻이에요? 결과를 받아들이지요. 내가 하지 않는 일에 한 것에 대해서 내가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 그게 바로 믿음이 되는 거예요.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인간이 여기 자아가 있어요. 외부에는 주체가 있잖아요. 인간세계에 인간이 한 작업중에 하나가 철학도 있고, 과학도 있고,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에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분야가 또 있어요. 그게 뭐냐, 종교입니다. 종교.

아까 3번 이야기했는데 또 해봅시다. 중세 때 왜 그리 교인들이 많아요. 유럽이 전부 다 교인들인데. 왜 그리 많습니까? 내가 동유럽에 갔다오니까 확인이 돼요. 왜 교인이 많아요? 교외 안 나왔다 하면 어떻게 돼요? 죽어요. 그럼 뭐 안 나올 수 있지. 이리 되면 성만찬에 참석 못하면, 이 땅에서 죽는 것은 기본이고요, 죽어서 사형당해서 어디갑니까? 지옥 가요. 그 외에 다른 의견은 없어요. 그 시대에. 그러면 그들은 철저하게 성만찬을 지나 개나 다 줍니까? 누가 줘야 성만찬을 먹을 수 있어요? 신부들.

그러니까 그 신부들이 정신적으로 그 백성들을 지배하겠지요. 이게 정신적으로만 지배하는 게 아니에요. 신부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의 대리자입니다. 신의 뜻이 뭐냐, 이웃을 사랑하라, 에요. 그럼 이웃을 사랑하려면 필요한 자금은 어디서 나와야 돼요? 신부 외부에서 와야 되지요. 십일조내는 곳으로 와야 되지요. 일반백성들에게 십일조 거둬서 명분이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거예요.

어렵고 힘들고 가난한 자에게 도와주는 거죠. 그 도와주고 나머지 떨어지는 콩고물은 또 누가 챙깁니까? 신부가 챙기지요. 그리고 여러분들을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뭘 지어야 되느냐, 성당을 지어야 하겠지요. 글자 모르는 사람에게 천국을 보내기 위해서는 뭘 해야 돼요? 삽화나 그림으로 해야되겠지요. 성당은 전부 다 그림이고 그림보고 조각만들고 전부다 그런 거예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 예술가들이 발달한 곳이 바로 이태리에요. 계속해서 막대한 돈을 주고 수입해서 파리, 영국 성당 다 지었어요. 그러면 그들의 돈을 빼내야 큰 성당 짓잖아요. 성경을 그림으로 만들려하는 그런 작업을 무한적 작업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그 작업을 하는데 성당에서 짓는데 돈이 없으면 일단 성당 짓고 난 뒤에 성당 운영비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온 게 뭐냐, 연옥설이지요.

한 번 구원받았다고 좋아하지 말고 돈을 계속 내라는 말이지요. 내면 당신만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이미 안 믿고 죽었던 조상까지 다 해줄 테니까 여러분들이 얼마나 헌금을 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들은 연옥 거치지 않고 바로 천국가느냐, 연옥 복무 기간이 짧으냐,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연옥이라 하는 것은 뭐냐, 그동안 완전히 정화되어서 가야 하는데 이게 정화시설이 이 세상에 별로 안 좋거든요. 돈 번다고 안 좋으니까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 흠도 티도 없이 받기를 원하고, 인간세계는 죄로 범벅이 되어있고 중간에 뭘 하느냐 하면 정화 필터를 만드는 거예요.

정화 청호나이스. 정화 필터를 만들어가지고 그 기간이 짧아지느냐, 길어지느냐 누구 소관이냐, 그건 신부와 주교 소관이에요. 들어보니까 신부이야기 성당이야기만이 아니지요. “왜 선교헌금 안 내!” 그런 이야기를 은연중에 강압적으로 받아 본 적 없습니까? “여러분, 생명책에서 기록이 삭제 한 번 돼 봐! 시켜 봐!” 갑자기 이런 급박이 올 수 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이 종교라는 것이 선악과에서 나온 거예요. 선악과에서 나와서 선악과는 계약이라 했지요. 교회나 성당에서 계약을 만드는 겁니다. 신학을 만들어요. 이제는 말한다. 신학을 만들어 놓은 이유가 사람들이 내게 맞는 내 영혼을 카바하고 지켜낼 수 있는 신학을 찾아다녀요.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고요. 요새는. 중세 때가 아니고. 목적이 나를 지키는 거예요. 나의 가치를.

신학 가운데서 어떤 신학이 나를 지킬 수 있는가, 신천지다? 아니다! 박옥수다? 아니다! 뭐 이런 거. 그야말로 골라 먹는 재미. 합동측이다? 아니다. 통합측이다? 이런 거. 골라 먹든 그냥 강제로 먹든 간에 이건 뭡니까? 뭘 지키기 위함이에요? 변함이 없는 나의 신됨을 지키기 위해서 종교를 만드는 겁니다. 그럼 종교를 만들면 종교계가 분열되게 되면 골라 먹는 재미가 있지만, 종교가 또 권위성이 떨어지잖아요. 이건 뭐 최고의 진리라고 우기면서 이건 뭐 파가 몇 개야? 이러면 안되잖아요.

그래서 뭐냐 하면, 통일시키는 거예요. 찬송가 통일, 성경 통일. 많이 안심이 돼요. 고객들 입장에서. ‘아, 그렇지. 통일된 교파끼리 통일된 성경, 통일된 찬송가 이건 우리가 거기에 소속되면 구원받을 가능성이 확률이 높아지고 거기에 소속되지 않는 대순진리회 같은 이상한 거, 그런데 가면 나는 땡 탈락이다.’ 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이념이 또 생기겠지요. 이념이든 삼념이든 전부 다 뭘 이야기합니까. 내가 나를 어떻게 지켜낼 것이냐.

재미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외부가 뭐냐 하면 바로 주체지요. 주체. 주체는 이성이 작용하지요. 내부는 감정이 작용해요. 기분이 작용하고. 외부는 이성이 합리적으로 따지는 게 작용하는 거예요. 그럼 여기다가 찬송한다.

자, 찬송가할 때 은혜가 될까요? 목포의 눈물 유행가가 은혜가 될까요? 유행가가 은혜가 돼요. 왜? 유행가는 자아를 감정이니까 직접 호소를 하지만, 이 찬송가는 그래 믿자! 그래 믿자! 믿어야 돼! 나 이대로 살아야 돼! 계속 자기 이성에다가 힘들게 힘들게 호소를 해요. 그러면 스트레스 받아요. 이게. 스트레스 받는다고요.

찬송가에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훈계로써 인도하며 도와 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때까지 계심 바라네. 그 가사가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한테 이성적으로 호소를 하지요. 니가 이 가사에 합치된 삶을 살아야 니가 구원에 확률이 높아진다가 강조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제 수요일에 했던 가사, 내 나이도 묻지를 마세요. 서울탱고니까 리듬이 어떻게 돼요? 짠 짠 짠 짠짜짜짠 짠 짠! 방실의 <서울 탱고>니까. 묻지 마세요. 짠 짠 짠 짠짜짜짠! 감정적이지요. 인생이란 이리 저리 지나가면 그만이라 하잖아요. 그럼 어떻게 하라는가, 쉬었다 가세요. 그 다음에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이성적에서 보면 유치하고 조잡하고 천천천박해. 천박하기는 천박한데 술이 한 잔 들어가 보세요.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망상인지. 돈 한 번 사기 당해보세요. 어느 쪽인지. 그래, 돈에 속고 사랑에 울고. 맞아, 맞아. 이게 현실이야. 그 때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그거 짜증나. 김광석의 노래가 더 확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둘 다 가짜라는 말입니다. 가짜. 둘 다가 가짜라는 말이지요. 둘 다가. 뭡니까? 선악체제에요. 선악체제. 선악체제에서 종교라는 것을 만들어놓은 거예요. 자꾸 컨닝하잖아요. 여러분들은 어릴 때부터 예수 믿어서 컨닝 한번도 해 본적이 없잖아요. 컨닝이 뭐예요? 이렇게.

인생은요, 사회라 하는 것은 컨닝의 사회에요. 자꾸 곁눈질하고 이렇게 보면서 흉내내면서 모방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종교도 마찬가지고. ‘아, 저사람 저렇게 하니까 은혜받는구나! 나도 은혜 받아야지.’ 이거 다 컨닝이에요. 곁눈질하고 있는 겁니다. 공통점이 아무 거림낌없이 통한다는 말은 너도 나도 선악지식에 같이 있게 되었고 선악지식으로 창조세계를 해석하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말이지요.

그 선악지식이 뭐냐, 죽음이 왕이고, 악마가 왕이고, 죄가 왕이고, 공포와 두려움이 우리를 왕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그래서 이 자아는 항상 내부에 숨어있으면서 위험을 느낍니다. 위험을 느끼기 때문에 기껏하는 것이 뭐냐 하면, 교회야! 신학을 만들어내라. 신학을 만들어내어서 그 신학으로서 내 자아를 방어체제를 이렇게 형성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생명나무의 세계에서는 뭘 합니까? 이러한 인간들의 시도 자체도 선악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미 인간의 손탔던 체제기 때문에 생명나무는 그걸 비켜 갑니다. 나를 믿어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일은 니가 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하는 거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신 아들의 일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아버지의 일이다. 요한복음6장에 나오지요. 그 관점에서 창세기를 봐야 됩니다. 보게 되면 하나의 짧은 문장으로 시작해도 무방할 거 같아요. ‘땅에 하늘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땅에 하늘이 왔다.’ 땅에 하늘이 왔다. 이 근거 대라고 하면 여러분이 잘 아는 두 가지 근거를 대겠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6장에 나오는 주기도문.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땅에서 하늘을 찾아봐야 된다는 거예요. 물론 인간들은 못 찾아요. 그러나 찾던 못 찾던 간에 땅에 이미 하늘이 여기에 왔습니다.

또 하나의 근거는 마태복음3장에 나오는 세례요한이 이야기했던 것. 회개하라 뭐가 왔습니까? 천국이 가까이 왔다. 가까이 왔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왔다는 거예요. 천국이 실제로 왔다는 거예요. 아직 안 왔다가 아니라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게 아니고 천국이 이미 와버렸다는 거예요. 천국이. 천국은 하늘나라에요.

하늘나라면 하늘나라에 있지 왜 땅에 자꾸 내려오는 거예요? 그건 생명나무에 필요한 기록을 하기 위해서. 기록을 하는데 어떻게 기록을 하는가, 기록된 자는 탈락이 없어요. 낙오자가 없어요. 따라서 기록하기 전에 선별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 선별작업을 어떻게 하는가, 그게 바로 세례요한이 이야기한 이전의 시대, 구약성경입니다.

구약 성경에 누구를 선별했습니까? 이스라엘을 가지고 하나 하나 선별작업을 했지요. 그리고 하는 말이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그 다음에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못하게 함이라. 시편69편28절. 선별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생명책이니까 생명책은 기록은 여러번 이야기합니다. 기록은 힘으로 보증되지 않으면 이 기록은 의미가 없어요. 계약도 의미가 없어요.

그러면 보증한다는 말은 뭐냐, 이걸 지키면 이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되, 이 말씀을 안 지키면 어떻게 돼요? 저주를 받아야 돼요. 축복할 힘과 저주할 힘이 겸비되어야 기록이 기록에 가치가 유지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기록을 위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게 뭐냐, 천국과 지옥이에요.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는 이미 율법 자체가 기록된 거잖아요. 생명책에 기록된 자를 선별하기 위해서 율법을 보냈고, 율법에 부합된 자는 생명책에 그대로 기록되고 남아있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있을 거예요. 기록되지 못한 자.

그게 요한계시록20장에 보면 그들은 뭐냐 하면 바로 악마와 함께 있는 자라고 되어있고, 행위책에 기록된 자라 하는 거에요. 기록된 책이 몇 권입니까? 이 세상에 딱 두 권밖에 없어요. 무서운 사실은 이게 기록되었다는 거예요. 남는다는 겁니다.

현대의 자본주의는 기록의 자본주의라고 했어요. 인간들의 모든 하는 행동들은 어디에 기록이 되느냐 하면, 바로 인터넷에 있는 웹사이트, 유튜브, 기록되어있어요. 그걸 빅데이터라 하지요. 빅데이터. 젊은 사람들의 사회는 뭡니까? 자기가 기록된 빅데이터에요. 배달의 기수가 뭐지요? 왜 그리 사업이 되고 장사가 되는 이유가 뭡니까. 너도 나도 자진해서 자기 상점에 보는 모든 내용을 배달의 기수 쪽에 제공했기 때문에 배달의기수가 돌아가는 거예요.

“여기 광명인데요. 30분내에 치킨 돼요? 양념 반, 후라이드 반” 배달의 기수한테 해보세요. 금방 옵니다. 여기 가까운 치과가 어디지요? 배달의 기수한테 물어봐야지. 병원마다 등록되어있으니까. 기록이 되어있다니까요. 기록이. 현재 자본주의의 마지막 모습 같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이 되고 기록이 되어있어서 거기에 모든 주체가 있어요.

주체가 있어야 자아가 살잖아요. 돈을 벌어야 내가 살지요. 돈푼도 없는 게 지 잘난체하는 건 저 지리산 산속에 들어가야 돼요. 자연인 해가지고. 그런데 방송국에서 기어이 또 자연인 찾아서 또 오네. 그러니까 그들은 뭡니까? 자연인에 나왔던 사람들의 빅데이터가 또 형성되는 거예요. 이건 자연인에 들어오지 않으면 빅데이터에 없으면 이건 자연인 가치도 없어. 이건 진짜 사이비야. 자연인속에 있어야 돼요. 그게 언론에 독재지요. 언론의 독재입니다.

왜 독재를 하느냐, 제일 무서운 게 뭡니까? 사회적 혼란이지요. 인간들이 뭘 원합니까? 안정성을 원하기에 독재를 해줘야 돼요. 대학 의사협회 회장. 독재에요. 독재. 이 독재에서 어떻게 빠져나와서 구원이 되는가,
in ten minutes. 10분 쉬고.

 

 

 

 

안양20240613b잠8장35절(생명나무로 본 창조)-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KTX타는데 만약에 앉아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그거 내 자리인데요.” 할 때, 내가 먼저 앉았으니까 내 자리다, 할 수 없지요. 뭘 끄집어냅니까. 그럼 표를 끄집어내지요. 기록된 거죠. “아, 미안합니다. 3호하고 4호하고 착각했습니다.” 하고 비켜주잖아요. 그러니까 기록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나무과 선악과를 따먹을 때, 에덴동산이 인간 중심이 아니고 자리 중심이에요.

니가 여기에 에덴동산에 니 자리가 있으려면 조건이 있는데,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죽는다. 그러면 죽어도 에덴동산에서 살면 되잖아요. 그런데 죽은 자는 생명나무는 죽음이 없어요. 영생이기 때문에. 영생이 있는 영생의 동네에 죽은 자를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죽은 자를 넣어주지를 않아요. 그래서 추방해버리지요. 그런데 이게 악마가 노렸던 거예요. 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그냥 만든 게 아닙니다. 뭐 개, 돼지 만드는 식으로 만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인간에 특별한 투자를 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이 하나님 계신 곳에 같이 못산다는 그것을 못산다는 그 모순을 악마가 노렸던 겁니다. 하나님 자체의 허술함, 부실함, 모자람, 불합리함, 온전치 못함, 인간을 매개로 해서 인간을 갖고 놀면서 그걸 공격해 온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약속대로 추방하고 말았습니다. 아담이 추방했다고 해서 아담이 지옥가는 겁니까? 아니지요. 왜 아닐까요? 아담의 부인의 이름이 있어요. 아담 부인의 이름이. 그게 생명입니다. 아담은 여자 하나 잘 만났어요. 자기는 흙이지만, 부인은 생명이라고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내부적인 어떤 이동이 움직임이 생기게 만들었어요.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한 인간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만들어버리면 어떤 형상이 나오느냐 하면, 여기에 기록되었다 하는 이 자체를 이 기록된 것에 대해서 확정시켜 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움직임을 기록된 데다가 여기다가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하늘에 앉아있으면 그건 예수님이 아니에요. 어디로 와야 됩니까. 땅에 왔다가 가야 돼요. 땅에 왔다가 가야 되면 거기에 하나의 절차가, 과정이 생기겠지요.

그 과정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물이 발생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의 형상을 입은 자들이 돼요. 그걸 로마서 8장에서는 맏아들의 형상을 입은 자, 이리되는 겁니다.  롬8:29

맏아들의 형상을 입은 자의 특징은 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가 관여한 것이 아니고 누가 했어요? 예수님이 하신 결과를 그냥 받아들이기 때문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협력하여 선이 된다는 원리에요.(롬8:28) 협력하여 선이 된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이게 선이다. 합한 것이다. 협력하여 선이 되니까 그 사람에게는 선악 체제에서 뭐가 빠져버리고 말았어요? 선과 악이 같이 묶여져 있던 것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선이 되어버리면 뭐가 날아가 버려요? 악이 날아가지요.

그러면 선악에서 악이 없으니까 그 사람은 어디를 못 가느냐 하면 지옥을 못 가요. 지옥을. 아~, 지옥은 조건을 맞춰서 가야 돼요. 나무가 두 그루잖아요. 미래가 완전히 선별된 완전히 확정되고 구획으로 마감되어 버린 세계는 딱 두 세계밖에 없어요. 하나는 선악과로 가는 나라, 왜? 그래야 정녕 죽으리라,가 유효하니까. 또 한쪽은 뭐냐, 정녕 살리라, 그러면 그 가운데서 거기에 가려면 선악체계를 분질러 버려야 돼요. 완전히 박살되어 버려야 되지요. 인간세계에 이렇게 아까도 첫 째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마는, 하늘이 어디에 왔느냐, 천국이 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상이에요. 지상에.

그래서 이렇게 정리해 봅시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범죄한 인간에게 있어 생명이란, 아~ 어렵습니다. 이 범죄한 인간. 선악과를 알고 있는 인간에게서의 생명이란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여, 우리가 죄인인 건 맞는데 생명은 무엇입니까?” 라고 한다면, 안 가르쳐주지~이리 되지요. 그걸 가지고 사도바울의 책에서는 그걸 비밀이라고 했어요. 비밀.

비밀이라고 하면 여러분들이 삼손 생각해야 돼요. 수수께끼 생각해야 돼요. 삼손 혼자만의 체험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 체험을 몰라요. 사자를 힘센 날뛰는 사자를 때려서 힘으로 까불고 있어! 하고 마동석이 치듯이 한 번 쳤는데 쫙 뻗었거든요. 다시 길에 가보니까 그 죽었던 사자에서 힘센 사자에서 뭔가 달~콤한 게 나오더라. 그게 뭐냐 하면 벌들이 벌집을 만들어가지고 꿀이 나오는 거예요. 이건 누구만의 경험입니까? 삼손만의 경험이지요.

그걸 수수께끼로 냈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이 수수께끼를 풀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사흘이 아니고 넉달 줘도 못 풀어요. 이 수수께끼는 기록된 거예요. 기록된 것. 인간세계에서 현재 인터넷 세계에서의 자본주의는요, 소비를 하고 소비를 한 흔적이 기록에 다 남아요. 고객님! 하면서 전화오잖아요. 흔적이 남는 거예요. 요번 신상 나왔는데 사실렵니까. 소비한 게 기록되고 기억된 게 빅데이터, 그 전체 클라우드 모든 자료가 모이고 거기서 새로운 소비를 창출하고. 소비, 기록, 소비에 순환. 이게 현대 미디어세계에 미디어 자본주의. 기차표 안 끊었는데 내 자리가 있잖아요. 이게 뭡니까? 이게 빅데이터에요. 자진해서 내 의사를 거기다가 포함시킨 겁니다.

거기에 모조리 다 인간의 것이에요. 인간의 것에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세계입니다. 이게 점점 더 구체화되고 현실로 굳어졌지요. 거기에 생명나무가 끼어들었으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생각하기는 그 생명나무를 사람들이 이해 못할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완전히 굳어졌으니까.

이 자아가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지혜를 짜모으면 되느냐에 있어서 그것으로 확정된 세계에 하나님의 비밀이 복음이라는 비밀이 들어와버렸으니까 인간들은 그걸 이해 못하고 납득을 못해가지고 이해 못하고 납득 못하면 취하는 태도는 뭡니까? 강제로 이 인간세계에서 강제로 필요없다고 추방시켜 버리지요. 그게 뭐냐, 과잉 에너지. 남아도는 에너지 또는 여분의 에너지.

굳이 쓸데가 없는 거예요. 이 선악체제에서의 복음은 아무짝도 쓸데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선교나 전도라 하는 것은 하지 않도록 애를 써야 돼요. 하지 않도록. 상당히 중요한 건데요. 왜냐, 선교, 전도하게 되면 반드시 내가 거기다가 끼어들어요. 내가 끼어들어요. 그러면 우리라는 존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협력하여 선을 이룬 완성된 입장에서 이미 모든 것이 완료가 되고 완성된 입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의심’이에요. 의심.

내가 할 수 있는 건 의심입니다. ‘선교, 전도, 꼭 해야 돼?’ 라고 이게 의심이에요. ‘내가 그 사람을 굳이 꼭 구제해야 돼?’ 의심을 뭐든지 의심을 해야 돼요. 의심 속에서 내가 예상 못한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모든 예수님의 활동이 다 그래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잖아요. 그럼 도와줘요. 도와줬는데 그들이 예상 밖의 잉여에너지가 발생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거 이상으로 왜 주지? 우리가 이런 걸 원한 건 아닌데. 우리 오빠 낫게 해달라고 초청했는데 우리 오빠를 죽이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리지요. 우리가 이런 걸 원한 건 아닌데 이걸 왜 주시지? 그 여분의 주시는 것은 뭐냐, 우리의 행함인 손탈 수 없는 걸 주시지요.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걸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내가 이만큼을 예상했는데 내가 빨간색을 원했는데 파란색을 줬을 때에 이 파란색이 뭐를 추방하는 기능이냐 하면 “니 빨간 거 원했잖아?” “네, 원했습니다.” “그게 바로 죄야.” 라고 날마다 매일같이 니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책망하고 지적할 수 있는 근거 거리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시는 거예요. 얼마나 고마운 줄 몰라요.

“그러니까 내가 니 그만 살으라 했어, 안했어?” 그럼 우리의 답변은 뭐냐, “그래도 살아야겠습니다.” 이렇게 답변하면 틀렸고요, “주님이 살려주셨잖아요.” “그러니까 니가 나를 사랑하라 했어, 안했어?” “주님이 먼저 나를 사랑했잖아요.” 이런 대화. 이게 여분의 것이고, 잉여의 에너지에요. 이거는.

“회사 부장이 또 니 일 잘했다고 백만원 줬지?” “예, 줬어요.” “그거 꼭 받아야겠어?” “안 받으려 했는데 주시는데 어떻게 합니까?” ‘다음에 일 잘해서 이백만원 받아야지.’ 이걸 주께서는 용납을 안해요. 내 행위가 끼어드는 것을 용납을 하지를 않아요. “니 애가 또 일등했지?” “내가 10등하라고 그렇게 했건만, 먼저된 자가 나중된다고 그렇게 신신당부해도 꼬1등하네요.” 이런 식으로.

이것은 바로 이 세상이 가장 악한 욕망, 악한 욕망을 주께서는 지적해요. 악한 욕망이란 무슨 욕망이냐, 순교하라는 욕망. 스데반집사는 죽기까지 복음 전파하겠다는 것이 가장 악마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그러니까 순교하겠다고 해외로 기어나가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기어나가는지 모르겠어요. 왜 나갑니까. 차라리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사용가치를 높이겠다. 한국에서는 묻지도 않는 거, 아프리카에 가면 물어줄거다. 그러면 아프리카에 가던지 아프리카는 안가고 왜 영국에는 갔는가, 솔직하게 이야기해봐라. 나도 내 아는 공부 좀 시켜야겠다. 영어 좀 시켜야되겠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하늘이 땅에 들어왔어요. 땅은 이해 못합니다.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런데 생명나무의 특징은 뭐냐, 선별한다 했지요. 선별. 이것은 선별하는 기능을 뭐라고 하느냐, 율법적 기능이라 하는 거예요. 누구든지 말씀대로 하면 복을 주되 신명기28장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뭘 받습니까? 저주 받지요. 말로만 그렇습니까? 말로만 엄포놓는 정도에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 왔을 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어떤 엄포나 협박 공갈을 하지 않았어요. “나는 선지자인데 내한테 잘해줘!” 이랬습니까? 그래서 제가 아까 뭐라고 했어요? 그래서 아까 제가 뭐 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선교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요. 전도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아브라함은 전도 선교한 게 아닙니다. 그냥 움직였어요. 그냥 움직인 거. 여러분의 실력을 믿고 한 번 물리적으로 나가봅니다.

옛날 물리학은 있음에 관한 것이에요. 있음. 있음에 관한 것이에요. 있는 것에 던져봤다가 굴려봤다가 태워봤다가 물에 녹여봤다가 다른 용액으로 섞어봤다가 전부 다 있음가지고 설명하고 측량하는 거예요. 진화론도 마찬가지고. 오리, 너구리 했다가 진짜 너구리하고 어떻게 변화가 있느냐, 공간이 어떤 영향을 주느냐, 시간이 어떤 영향을 주느냐, 이런 거예요. 있음을 가지고 했던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물리학을 있음을 가지고 죽 설명하면서 있음에 대해서 누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인간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관찰하거든요. 그런데 양자물리학이 나와가지고 인간이 어떤 대상에 대해서 관찰을 할 때, 인간은 주도권을 갖고 있고 대상은 하나의 객체에요. 인간의 종이에요. 인간이 다루는 도구에 불구한데. 이 대상이 인간을 잡아먹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인간이 오히려 이 대상이 인간에 대해서 만약에 이쪽(대상)에서 시선을 보내고 이쪽에서 관찰을 해버리면 인간이 종이 되어버리고 이 대상이 뭡니까? 이 대상이 주가 되어버리지요. 이 대상이 뭐냐, 빛입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속도를 계산하는데 빛의 속도는 인간이 빛의 속도를 관찰하는 인간의 관찰을 종으로 만들었어요. 니가 백날 관찰해봐라. 나는 일초에 3000만Km 변화지 않는다. 이게 변해야 돼요. 뭐든지 대상은 이 세상의 물질이라 하는 것은 변해야 되는데, 빛은 물질이 아닌 거 같아.

왜 이렇게 속도가 일정하지? 속도가 일정하니까 관찰하는 내가 자(줄자)가 아니고 뭐로 자(줄자)가 되느냐 하면 빛의 속도가 자가 되어버린 거예요. 빛의 속도가. 빛은 뭐로 되어있느냐 하면 광자라는 입자로 되어있어요. 입자.

그런데 광자라는 입자가 인간의 관찰을 오히려 극복해가지고 덮어씌었어요. 여기서 인간들은 갑자기 겸손해집니다. 우리는 모르는게 있다. 이리 시작했다가 우리는 태반이나 모른다,가 되어버렸어요. 주도권을 아무 이성도 없고 감정도 없고 의지도 없는 빛한테 이걸 넘겨줬어요.

인간은 빛을 보고 입자다. 하나의 광자로 입자로 되어있다.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빛이 인간세계를 덮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결국 나온 결론은 뭐냐, 빛은 입자가 아니고 빛은 파장이다. 파장은 뭐냐, 에너지다. 고로 이 세상은 뭐다? 에너지다. 이게 인간의 지혜의 끝입니다. 인간의 지혜의 끝이에요.

그래서 요 원칙에 의해서 인간은 외계인이 있다면, 외계인을 인간이 그려낼 수가 있어요. 어떻게 그려내느냐 하면, 인간이라는 요렇게 생긴 것을 에너지의 법칙에 의해서 하게 되면 인간은 요 크기(얼굴 대비) 요 분량을 넘어서면 안돼요. 여기서 인간이 몸무게 200Kg되면 못 살아요. 이 지구라는 환경에서.

그렇다면 어느 행성에 거기의 밀도, 중력에 대한 모든 자연조건을 계산해 볼 때 기껏 해봐야 거기서 어떤 외계인이 산다면 요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을 인간이 미리 측정이 가능한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입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요, 먼저 뭐부터 한다? 에너지에서 나와서 에너지에서 뭐가 나온다? 파동이 나오고 파동이 뭉쳐진 것을 가지고 입자고, 입자가 바로 사물이에요.(파장 →입자 →사물)

그럼 어떤 사람이 말기 암에 걸렸다. 어떻게 치료해야 된다. 치료하려면 뭘로 치료하면 됩니까. 요 과정을 거꾸로 밟아가면 돼요.(파장←입자 ←사물) 인간이라는 암세포에다가 암세포는 입자 아닙니까. 어떤 대상이지요. 그 대상을 더 파고 들어가면 뭐냐, 원자핵과 양자전자로 되어있잖아요. 양자전자니까 거기서 나노미터 수준의 더 작은 파동이라든지 에너지를 주입하게 되면 자체적으로 단백질이나 아미노산 구조의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이다, 이 말이지요. 전자의 변화.

그 전자의 변화를 임의로 어떻게 조정하거나 아니면 촉매나 좋은 효소를 집어넣어서 단백질을 조정해 보면 그게 자체적으로 인간은 인간의 손을 떠나서 자체적으로 이리 맞춰봤다가 저리 맞춰봤다가 지 스스로 자연 스스로 자연은 스스로 라는 뜻이에요. 내츠럴. 자연 스스로 어떻게 하다보면 한 천번 하다보면 아다리 하나 걸릴 거다 말이죠. 그걸 포착해서 비법을 빼내면 앞으로 백발백중 치료하는 것마다 다 치료가 된다는 그런 계산이 딱 나오지요. 그거 하는데 기업체에서 많이 후원해 줘야 되고, 월급 줘야 되고, 많이 해야 돼요.

자, 문제가 된 것은 뭐냐 하면, 빛이지요. 빛인데 이렇게 되게 되면 인간은 알 거 다 알아버렸잖아요. 알 거 다 알았지요. 세세한 건 모르지만. 전체적인 구조 윤곽은 알았잖아요.

자, 그렇다면 아까 인간의 왕은 뭐가 왕이라고 했어요? 죽음. 죄. 그리고 마귀,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느냐, 해결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인간은 자연을 극복하겠다고 출발했다가 결국은 항복을 했어요. 온난화에 항복하고, 태풍에 항복하고, 인도의 최고기온이 54도에 항복하고, 중국이나 독일의 홍수에 항복했어요. 일어난 결과는 보지만 저 무안의 지진에 대해서는 단층이 중간에 쪼개진 것에 대해서는 인간이 결과는 4.5하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요. 그냥 결과만 봤지 해볼 도리가 없어요.

인간은 믿습니다. 뭘? 자연은 인간의 힘에 미치지 않고 자동적으로 안에 뭘 응축해 있다? 에너지를 응축해 있고, 에너지는 우리 말로 한 자로 뭡니까. 힘. 힘 속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여기서 태어났다가 그냥 의미도 모르고 그냥 힘 속으로 분해된다. 이건 완전히 불교사상이지요.

모든 것이 스스로 있다가 스스로 속에 우리가 함몰되는 거예요. 다시 태어난다고요? 그런 건 없어요. 그런 근거는 없어요. 위로한답시고 한 건데. 우리의 영혼 문제. 영혼 문제없다니까요. 빛이라니까요. 영혼이 아니고 에너지에요. 종교의 한계를 드러낸 거예요. 빛이 어디 있고,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고. 전부 에너지밖에 없는데. 그런 천국, 지옥을 증명하려면 뭘 동원해서 증명해야 돼요? 에너지화시켜줘야 돼요. 귀신을 사진을 찍던지, 사진을 찍는다는 말은 뭡니까? 그 인화지 위에 에너지 흔적을 남기는 걸 말하잖아요. 에너지가 스스로 뭉쳤다가 스스로 해체되는 이러한 것이 이미 다 나와있는데. 무슨 천국이 어디 있고, 예수님 도대체 어디 있어요? 하나님 어디 있어요? 삼위일체고 뭐고 없어요.

자, 이런 입자에서, 입자가 나오게 된 물리학에 나오는 것은 처음에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종교로부터 종교가 시답지 않게 되었어요. 그러면 우리의 지혜가 우리의 지혜로 해서 자연에 대해서 분석에 들어가보자 할 때에 제일 먼저 분석하는 것이 뭐냐, 물질인가, 운동인가, 제가 왜 갑자기 이 물리학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방금 제가 이 이야기한 것을 예수님이 알까요? 모를까요? 훤하게 아시지요. 왜? 죄안에 있으니까.

그게 선악지식으로 나왔으니까. 선악과는요, 선+악+( ), 그다음에 중요한 게 뭡니까? 지식이에요. 지식. 인간의 지혜에요. 지혜. 선악으로 구성된 지혜. 쉽게 말해서 3+5=지식, 지식이잖아요. 지혜는 뭐냐, 3+5가 어디에 유효하게 쓰일까가 그게 유효하게 쓰이면 선, 이게 악으로 쓰면 악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칼을 만들었다. 이 칼가지고 어디 쓸것이냐에 대해서 선과 악이 되는 거예요. 그럼 만드는 것은 어디에 속합니까? 지식에 속하고, 이 지식은 바로 가인의 후손들이 시작을 했던 거예요. 왜 가인의 후손들이 했는가, 인간이 모이면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사회적 혼란이지요. 사회적 혼란을 위해서는 어떻게 합니까? 힘을 한곳에 모아야 되겠지요. 힘을 모으는 방법은 왕을 구하는 거예요. 왕은 영웅이에요. 사회적 혼란은 싫으니까 독재자를 만드는 겁니다.

왕건이 있지요. 왕건. 완건이가 29번 결혼했어요. 왜 29번 결혼했는가, 나라가 왕건을 왕이라고 인정을 안 해줘요. 깡패 두목이라고. 인정을 안해줘요. 각자 또 다른 깡패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뭐냐, 자기 영토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지점들을 낸 겁니다. 각 호족의 딸들과 결혼해가지고 자식을 놓으면서 거기에 이는 청주 지점장, 개성 지점장, 경주 지점장, 그런 식으로 나라를 다스린 겁니다. 솔로몬도 마찬가지잖아요. 전쟁하는 비용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그 비용 줄이는 방법은 뭐냐, 다른 나라와 혼인 외교정책을 벌이는 겁니다. 그랬다가 그 여자들이 전부 다 수입해서 온 세상의 온 종교는 다 수입해가지고. 나라가 엉망 됐지만.

그러니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어쨌든간에 지금 본인의 존재, 물질, 물질을 살려야 되니까 힘을 합쳐야 된다 말이지요. 그걸 누가 알아요? 우리 주님이 아시잖아요. 주님은 무슨 몸으로 오셨습니까? 죄의 몸으로 왔지요. 죄의 일부로서 오신 거예요. 들어오신 거예요. 죄의 일부의 모습으로서 들어왔다 말이에요.

인간의 몸이라는 것이 힘에 얼마나 나약하게 노출되는지를 알아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믿음 좋고 찬송부르다가 등산하면서 찬송만 부르면서 뭐 이렇게 실로암 노래 막 부르면서 가다가 갑자기 미끄러졌다. 절벽에. 쫙 미끄러지면 순간적으로 뭐든 나무뿌리라도 쥐어야지 안 그러면 절벽에 떨어지잖아요. 그 때 온몸에서 교감신경, 부교감신경부터 해가지고 모든 신경 동원해가지고 온몸에 땀이 쫙 나는 거예요. 아이고, 땀 좀 나라. 이게 없어요. 쫙~ 나면서, ‘나는 몸이구나! 과연 몸이 나였구나!’ 그 다음에는 “주님 감사합니다.” 그건 나중에 동원된 지식 문제고.

‘몸은 몸에서 내가 나왔구나! 몸이 먼저고 나는 나중이구나! 내가 믿는 예수님도 혹시 내 몸에서 나온 게 아닌가’ 말릴 수가 없지요. 이게 바로 죄의 몸입니다. 죄의 몸에서 왔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 그게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생명은 죽음의 모습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죽음이 왕이잖아요. 죽음이 왕이다 말이죠. 그러면 호랑이를 잡으려면 어디로 가야 돼요? 호랑이굴속에 죽음굴속에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어제 수요일에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죽어도 자기 죽음을 설명하지 못한다. 내 죽음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어느 것도 설명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러한 어려운 점을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인생이란, 낡은 천조각 위에 그리는 그림이다. 인생이란. 아무리 그림을 예쁘게 잘 그려도 천조각이 세월 따라서 이게 찢어지고 낡아지게 되면 그 위의 그림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 헤어져버리는데. 헤어져서 낱낱이 다 찢어지는데요.

이건 진짜 죽을 때 되면 한낱 꿈같아요. 실컷 현실, 현실, 현실+현실, 우리 손자한테 기도를 시켰어요. 니 오늘 기도를 해봐라 해가지고 요새 손자보고 하는데. 기도를 하는데 가만히 있어서 기도를 하는 게 아니고 돌아다니면서 기도하는 거예요. 초코파이 먹게 해주시고, 그리고 초코파이 먹되 아토피 안 걸리게 해주시고, 그리고 계속..., 나머지 식구 지금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엄마 다 기도하고 있는데 혼자서 온 집안 돌아다니면서 앤드, 앤드, 그리고, 그리고. 제가 전에 그랬지요. 앤드를 붙이는 이유는 인간의 기표의 순환구조라고. 순환사슬구조에요. 사슬구조. 수직적이 아니고 그냥 수평적이에요. 수평적. 도약이 안돼요. 독수리 날개도 없고 그런 거 없어요. 그냥.

그냥 맨 땅을 애굽에서 홍해건너서 약속의 땅뿐이에요. 초월적인 것은 모세나 경험했지 나머지는 없어요. 지금 율법이 산속에서 없는데서 율법이 그들과 함께 합세했잖아요. 율법이 합세했다는 말은 그리고 모든 결정권이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결정할 때 율법에 뭐가 있다? 힘이 있는 거예요. 기록한 것을 기록한 대로 지켜내는 힘!

그리고 저주받을 자는 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다는 것을 유지시키는 힘. 그 힘과 함께하면서 무슨 작업? 선별작업을 해나갔다 말이에요. 선별작업을.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 낡은 천 조각에 어떤 인간도 이 낡은 천을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없어요. 주님은 물질로 왔는데 인간들은 뭘로 보이게 합니까? 물질 맞아요. 주님 육신 맞아요. 부활한 것도 부활할 육신 있어요. 그러나 이걸 뭐로 보게 합니까? 운동으로 보이는 거예요. 운동.

그걸 요즘 사회 말로 사건으로 보이는 거예요. 사건. 사람들은 열심히 돋보기 들고 또 제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예수님 관찰하면서 우리가 지금 제대로 지금 믿을 만한 분을 믿는지, 안 믿는지 제대로 다져보고 다져보는 거예요.

주식 투자하는 걸 뭐라고 합니까? 나 사기 하세요. 하고 내미는 것. 주식해서 맡기고 인터넷 넣어주고 하는 것 있잖아요. 주식리딩방(메신저를 통하여 주식 종목을 추천하거나 투자에 도움을 주는 행위들) 그 하나 하나가 그 사람을 만났습니까? 아니요. 봤습니까? 아니에요. 휴대폰에 돈 거래만 있지요. 돈거래만 있다고요. 사기를 왜 당합니까? 직접 본 적이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뭐냐, 주식리딩방이에요.

예수님은 눈으로 봤어요. 손으로 만졌어요. 그랬던 요한이 어땠습니까? 도망갔잖아요. 그랬던 요한이 그래놓고는 요한일서에 가서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요. 이리 이야기한다고요. 왜 그 때는 눈으로 보고도 손으로 만지고도, 식사를 같이 하고도, 왜 도대체 그 분이 생명나무인가를 왜 몰랐는가 말이지요.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건으로 보지 않고 내 몸이 여기 있는 걸 존재로 봤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물질로 봤기 때문에 그래요. 이 물질을 지키기 위해서 나한테 충성을 하고 나한테 봉사를 다했기 때문에 그래요.

몸 하나 살리기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은 주님 입장에서 보면 나는 하나의 갑자기 있다가 뽀르르 날아가는 사건 같은 거예요. 마술사들이 하는 것처럼. 모래하는 마술사. 모래하는 마술사가 모래를 모아놨는데 모래를 마구 뿌린다고요. 아이구 모래네. 하는데 손에 보니까 모래 막대기가 나오고 꽃이 나오고. 훅 뿌리니까 꽃잎이 나오고 이리 하잖아요. 속임수지만, 애굽의 마법사들이 그걸 했지요. 지팡이가 뱀이 되고, 강물이 피로 변하는 거. 마법사는 그걸 했다고요. 속임수를 했다 이 말이지요.

나중에 누가 고백합니까. 이건 마법이 아니고 우리가 지칭할 수 없는 어떤 주체자의 등장이에요. 우리 말고 따로 있다는 거예요. 우리 말고. 누가 개입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세계에 들어온 거예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상극을 이루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면 아까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 집안 이야기해봅시다. 예수님이 오실 때 그들은 예수님을 예상했지요. 예수님을 예상했다는 것은 평소에 본인들이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가를 예수님을 앞에 두고 들통나고 노출된 대상이 됐다는 거예요. 나는 예수님을 이렇게 사랑하고, 이렇게 믿습니다. 라고 했던 그것이 예수님에 의해서 조치에 의해서 그게 와르르 다 헛된 것으로 다 망상인 것으로 무너지는 거예요.

고린도전서13장3절을 보겠습니다. 이런 13장3절 같은 것은 액자해서 집에 걸어놔도 괜찮아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것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찾아온 성령의 은사가 우리의 자아 내부를 노출시키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린 평소에 뭐하고 살았는가, 내가 구제하면 그게 구제가 되고, 내가 불사르게 내어주면 그게 순교가 될 거라고 예상하면서 살아왔던 거예요. 그게 가짜라는 주님앞에 통할 수 없는 가짜라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걸 바로 주께서는 선별해 내는 거예요.

왜? 우리 나름대로 이미 기록된 게 있어요. 아까 KTX 좌석표 있잖아요. 돈 쓸 때 한국은행에 보증이 되어있지요. 우리가 쓰는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왕이 마귀라는 왕이 보증한 힘에 계약서 그 구조 안에서 우리는 안심 놓고 우리는 출세와 성공을 내다보면서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니까 그 악마가 총동원해서 예수님을 분석하고 측량해보니까 예수님의 어떤 대목도 그들의 힘의 구조에 매치되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전혀 없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생명나무는 선악과 구조로부터 떼어놓는 의미로서 생명나무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걸 비록 합치더라도 그 구분, 그 분절, 그 단절은 계속 지속하고 유지되고 있었던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성령이 우리한테 왔다. 주님이 우리한테 왔다. 우리 내부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나는 내 몸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우리 안에서 주님의 몸이 더 중요한 거예요. 이게 단절이 되어있었던 겁니다.

자, 이제 남은 문제는 낡은 천조각 위에 시간을 흐르면서 쓰여졌던 우리의 긴긴 인생 그게 천 조각이 찢어지는 순간 다시 말해서 우리 몸이 죽는 순간 몸이 운동이, 물리학적으로 몸의 운동이 정지되고, 세포에 산소의 공급이 중지되는 그 순간 우리의 기억속이 산소의 도움으로 기억했던 그 기억이 피속에 있는 산소가 끊어지게 되면 기억이 마술사의 모래처럼 뽀르르하고 우리 몸에서는 다 사라지지요.

그게 전조 증세가 치매에요. 치매. 치매현상이 일어나면서 산소 호흡이 공급되지 않으면서 점점 뭔가 잊어지는 거예요. 오래있던 장기기억보다 단기기억이 없어지다가 나중에 장기기억까지 자기 아들보고 “아저씨는 누구세요?” 이렇게 하지요. 나중에 아저씨라는 말도 단어가 아저씨인지 아줌마인지 구분도 안되고 없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가지고 뭡니까? 협력하여 뭘 이룬다? 선이에요. 그게 바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필요하겠어요? 주님 쪽에서. 자기 백성을 모집하는데 교체, 같은 말로 대신하심이 꼭 필요하겠지요. 그러면 교체와 대신하려면 이 선악과 세계 속에 생명나무가 알아서 여기에 침투해 들어와야 됩니다. 침투할 때는 힘이 없어 침투하는 것이 아니고 강력한 힘으로 침투하지요. 강력한 힘입니다.

뭘 이기느냐, 죽음을 이겨야 되고, 죄를 이겨야 되고, 사탄을 이겨야 되고, 율법의 정죄를 이기는 힘이어야 돼요. 선악과를 분질러 버려야 되지요. 이걸 이기려면 죽은 선악과 인간에게 잔소리해서 될 문제입니까? 될 문제 아닙니까? 잔소리해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뭐하느냐 방법은 딱 하나에요. 죄 안에 기록지를 남기는 거예요. 기록지를. 죄 안에 기록지를. 우리 죄인 속에 예수님의 자기 KTX 자기 좌석을 거기다가 만들어버리는 거죠. 좌석을. 그리고 이거는 내 자리라고 선언해 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우리가 뭐가 되느냐, 우리가 무명이 돼요. 무명이. 이름이 없는 존재가 되어야 돼요. 이름 있음이 이름 없음이 되어야 되고, 무명에서 누구의 이름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전환되는 절차가 필수적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전환되지요. 여기서 기록과 기록의 등장인데 요한계시록 보기 전에 잠언8장부터 먼저 봅시다.

잠언8장22절,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이리 되어있거든요. 잠언서 잠시 설명해 보면, 잠언서에서는 생명이 어디있느냐, 인간세계에서는 생명이 없어야 돼요. 생명이 없는데. 잠언이라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솔로몬의 계시지요. 솔로몬의 계시에서 드디어 생명이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언급이 돼요. 아마 잠언서에 제일 많이 언급이 될 거예요. 잠언서에서. 생명이라는 거.

시편은 하나의 절차, 역사적 절차를 말해준다면 잠언서는 완성을 의미하는 겁니다. 다 다윗의 세계 언약대로 되었다 치고 생명은 여기 저기 생명이 있다. 이리 되는 거예요. 또 완성이 된 것이 그걸 지혜의 문서라고 하는데, 또 완성이 된 것이 전도서, 또 하나는 뭐냐, 아가서. 아가서는 완전히 사랑의 낙원이지요. 들판. 날 잡아봐라~~~~ 날 잡아봐라~ 잡히면 니 진짜 사랑한데이!!! 둘이 뒹굴고 좋다고 껴안고 뒹굴고. 그게 아가의 낙원동산이지요. 낙원 동산.

이 잠언은 이미 모든 게 완료가 된 상태에서 선별작업을 이미 끝난 거예요. 생명은 어디에 있느냐, 지혜에 있다. 지혜가 뭐냐, 잠언 지혜가 뭐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게 지혜라는 거예요. 그러면 여호와를 경외하면 되겠네. 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그 잠언서에 보면 8장에 보면 그게 아니고 여호와께서 하기 전에 나를 가졌다. 나. 여호와가 일하기 전에 나를 가졌다, 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면 여호와 안에 누가 있다는 말입니까? 나라고 지칭하는 분이 계시다는 거예요. 나라고 하는 그 분의 사이는 언약관계, 계약관계에요. 계약은 힘이 없으면 계약관계 성립이 되지 않지요. 반드시 이 힘은 어떤 난관을 극복하고 그 힘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 나를 가지고 그 분이 뭐냐, 태초부터 이 모든 창조에 관여했다는 겁니다. 26절~27절,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이렇게 죽 하면서 그 때 할 때마다 누가 나오는가, 나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35절,36절에,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태초부터 천국과 지옥은 이미 기록된 대로 결정났다고 이렇게 규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찾아오면 안되고요, 주님이 주님의 자신의 스케줄에 따라서 우리를 활용하고 우리를 채용하는 수밖에 없어요. 이게 찾아오심이에요. 선택된 자를 찾아오는 거예요. 뭘 보고? 기록된 명단 보고 우리한테 찾아와서 예수님이 직접 우리안에 스며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이걸 요한계시록20장12절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보좌에 섰는데,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지금 사도요한은 거의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있습니다. 이미 죽은 자라 할 수 있지요. 죽었기 때문에 모든 사실을 알려주는 거예요.

이미 죽었다가 사신 분이 사도요한을 덮치니까 사도요한은 아직 죽지 않았지만, 죽었다가 사신 분의 지혜와 모든 정보가 사도요한을 덮쳐서 그게 계시화된 거예요. 봤는데, 책이 두 권의 책이 있어요. 하나는 생명책이고, 또 하나는 자기 행위대로 기록된 책이 또 있어요. 행위책이라 할 수 있어요.

바다가 그 가운데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 내어주었지요. 왜 바다와 죽은 자들이 산과 들과 모든 죽은 자들을 내어줍니까? 아까 잠언서에 보면 모든 창조에 누가 관여돼 있어요? 예수님 자신이 관여돼 있지요. 그럼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이 모든 창조를 만들었잖아요. 그럼 창조대로 만들 때는 모든 것이 다 가시화되고 구체화로 다 드러나야 되지요.

인간의 출생과 죽음조차도 애초부터 누가 관여했어요? 지혜라고 일칭하는 예수님이 관여한 거예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 없이는 아무것도 생겨난 것이 없고 다 말씀의 개입된 채로 살아났다면 주님의 약속된 채로 기록된 채로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구원 받지 않고서는 주님의 고유 활동이에요.

일방적으로 쳐들어오심, “니는 내 사람이고, 니는 저사람, 내 사람 아니야!”라고 선별할 수 있는 권한이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그 권한을 찬양하는 거예요. 그걸 인정하는 겁니다. 왜? 내가 개입되지 않는 일이니까. 행위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 분의 하신 일을 결과적으로 인정하고 구원받는 것. 이미 구원받았음을 그런 식으로 확인되는 거지요. 말을 어렵게 해야 돼요. 하여튼.

미움도 행함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후차적으로 확인되는 거예요. 그래서 15절에,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는 그 결과를 우리가 확인하면 되는 거예요. 여기서 말 잘 들어야 돼요.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 할 때, 반응을 이렇게 나타내면 안 됩니다. “나는 천국 갔구나!” 하면 안돼요. 나는 천국간다! 이게 아니고.

이런 일을 방금 기록되지 못한 불못에 던지우리라, 이런 일이 나로 하여금 내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이 믿어지도록 주께서 내 안에 말씀으로 작용하는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말씀이. 그래서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말씀의 작용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나의 구원은 말씀의 작용 일방적인 주님의 작용의 결과물이에요.

이게 기록의 능력이에요. 기록의 능력. 끝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아까 누가복음10장20절, 귀신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할 때에 딸가락! 딸가락!해서 정말 선악과가 딸가락되느냐, 아니면 그 선악과 조차도 허락한 것조차도 주님의 생명나무의 활동으로 딸가락거리는지 우리의 내부에 생명나무가 있는지 아니면 선악과가 있는지 그건 여러분 자신들이 아마 아시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생명나무 빼놓고 세상을 알고자 한 그것이 바로 두려움과 공포의 소산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미 주께서 다 이룬 판에알아서 자기 백성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오직 주님에게만 있고, 아버지께서 택하신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살리는 능력도 우리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 있음을 이 쉬운 것이 어떻게 믿어지는지 그저 감사와 감사케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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