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말씀의 연락망

아빠와 함께 2024. 4. 21. 16:20

안양20240411a계14장1절(말씀의 연락망)-이 근호 목사

37페이지. 밑에서 5번째 줄에. “성령이 교회에서 하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 되게 한다.” 라고 되어있지요. 사람들은 각각인데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내가 그 하나에서 빠지면 되겠지요. 나를 하나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를 하나라고 여기지 말고. 내가 만약에 하나라고 여긴다면 다른 사람이 그 사람도 하나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럼 하나가 둘이 되기 때문에 하나가 안 되겠지요. 나를 하나라고 지칭할 수 있는 나 말고 다른 분을 하나라고 지칭하게 하시는 거죠.

여기 37페이지 사도행전 4장31절 32절 말씀,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 다음에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제 것이.

성령은, 인간 속에 있는, 인간 속에서, 인간이 자기를 바라보잖아요. 자기를 바라보면서 “내 것” 이라고 하는 이것을 공격한다. 이 말입니다. 공격해서 “그게 어떻게 네 것이야? 니 것은 없어.” 내 것이 되어버리면 모든 것이 내 중심이 되어버립니다. 내 중심이 되겠지요. 그러면 이 세상에 하나 됨이라는 것은 성사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모든 걸 하나 되게 하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은 뭐냐, 내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길 때 가장 큰 방해가 돼요. 성령께서는 이것을 공격하는 겁니다. 내 것을 공격하는 겁니다. 니 것은 없다는 거예요.

성령이라고 했을 때, 성령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성령의 적이 있어요. 반대되는 것이 있어요. 반대. 성령의 반대가 뭐냐 하면, 악령이겠지요. 성령은 악령하고 싸우는 겁니다. 다윗도 마찬가지고. 다윗이 성신이 임할 때, 다윗을 공격한 사람은 무엇이 임했지요? 사울왕은 뭐가 임했어요? 악신이 임했지요. 성신과 악신이 서로 대결하는 것처럼 이 성령의 시대에서는 악령이 서로 대비가 되겠습니다.

그럼 똑같은 것을 여기다가 적용해 보는 거예요. 성령이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공격한다면 그러면 악령은 우리에게 뭐라고 옹호하고 변호해 줍니까? “이것은 내 것이라.” 그럼 악령은 뭐라고 하겠어요? “O.K! 그건 네 것이야.” 이렇게 옹호해 버리지요. “너는 너를 위해서 써야 돼. 너의 명예와 너의 잘남과 너의 인생성공을 위해서 니가 그만큼 고생한 거야.” 라고 후원하고 격려한 거. 누가 그렇게 한다 이 말입니까? 악령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번에 니가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고 니가 일이 잘 풀린 것은 다 니 기도 덕분이야. 니 믿음 덕분이야. 너의 믿음 덕분에 니가 잘된 거야.” 이 이야기를 성령이 한다는 말입니까? 악령이 한다는 말입니까? 마귀가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누가 했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결국 결과적으로 내 것이 없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내 것이 굳건하게 유지하게 하는 것. 이게 악령의 관심사입니다. 악령이 그렇게 만들어요.

이 악령과 성령이 대결하기 이전에 먼저 악령하고 대결한 분이 계십니다.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마태복음4장에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령한테 시험을 받았습니다. 자, 그 때에 여러분들이 악령이라 치고 실례지만, 악령이라 치고 예수님이 40일동안 굶고 계셨다. 저 예수님의 하는 일을 좌절시키려면 악령이 할 수 있는 무기가, 쓸 수 있는 무기가, 어떤 거겠어요? 벌써 다 나왔습니다. “니 인생 똑바로 살면 되잖아.” 그거지요. “배 고프지? 나는 배 안 고파. 당신이 배 고프잖아. 그러니까 기도를 하더라도 밥이나 먹고 기도를 해야 되지 않느냐, 사람이 살려면 밥 먹어야 사는 거야. 니가 아무리 하나님의 사자로서 하나님이 메시아로서 일을 하려면 먹고 해야지.”라고 누가 이야기했어요? 악령이 예수님한테 이야기했지요.

악령은 한결같아요. 다 우리 잘되라고 하는 거예요. 흔히 부모들이 자식한테 이야기할 때 늘 뒤에 붙는 추임새같은 것이 있습니다. “내가 이리 해도 다~ 니 잘되라고 하는 거야.” 아내가 남편한테 잔소리해도 뒤에 붙는 추임새가 뭐냐, “다 이거 내 좋아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집안 살리려고 하는 건데. 그동안 내가 집안을 위해서 희생한 것을 생각해 봐요. 내가 이 잔소리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고 우리 집안을 위해서 다 희생하자는 이야기인데.”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지요. 그래서 아내 말을 듣지 않으면 그건 뭡니까? 집구석 베린 남자. 규정이 되어버리지요.

두 번째가 메시아가 와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하니까 악마가 제안한 것이 뭐냐, “이왕 일 벌리는 거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라. 추종자가 많아야지. 화끈하게 한 번 가자. 화끈하게!” 기적부터 하고 가실께요. 이런 거요. 기적부터. 성전에서 뛰어내리고.

“당신이 방금 뭐라고 했어?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했지. 그래 좋아. 말씀 좋지. 말씀을 현실화시켜야지. 말씀이 그냥 말씀만 있으면 안 되지. 기적으로 나타나야 될 게 아니야. 그래야 당신 메시아인줄 알고 사람들이 추종세력이 따르고 당신은 목회해서 성공하고, 당신은 메시아로서의 위세가 등등하고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왕으로 섬길 겁니다. 뛰어내리라 했지요. 성전 꼭대기에서.

그 때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나 안 할란다. 이랬어요? 뭐라고 하셨지요?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일단 해보고 내 뜻대로 되면 나는 메시아 맞고, 안되면 내가 메시아 아닌가, 라고 하는 거. 이것도 뭐냐 하면 개인주의에요. 개인주의라고요. 내가 하나님의 백성 맞냐, 안 맞냐를 늘 확인케 하는 그 시도가 어디서 나와요? 악령에서 나오는 거예요. 마귀에서 나온 거예요. 이번 일만 성사된다면 아, 나 기도발 괜찮다. 뭐 이런 거. 기도발 괜찮으면 나는 성도 맞다. 오늘 죽어도 구원받겠다. 하는 거.

예를 들어서 성경에서 고린도전서14장에 방언 나오지요. 방언은 성령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건데, 성령이 임한 사람의 특징은 방언이다. 따라서 당신이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당신이 방언을 해 봐라. 성령 받은 티를 내야지 뭐 우리가 알아주지. 성령 받은 사람으로. 방언 해봐! 방언 안 돼? 그럼 될 때까지 해야지요. 될 때까지.

오산리 기도원에 가든지 해서 방언 터져 나와야지요. 그럼 방언 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아는가, 방언 하지도 않았는데 했다고 하면 안 되니까 녹음기 틀어 놓고, 요새는 휴대폰에 녹음기능이 있으니까 켜놓고 방언 해놓고 또 틀어보는 거예요. 쏼쌀쌀쌀~~, 아 짧다. 좀 길게 해야 될 걸. 다시 한 번. 연습한 번 빡세게 해서 또 방언 좀 하자. 됐어! 이 정도 하면 나는 성령 받았어. 주위사람들에게 “저, 방언했어요.”

목사는 좋아가지고 “당신은 성령 받은 성도입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당신만 성령 받으면 안 되지요. 우리 교회에 충실히 다녀서 봉사해서 다른 사람도 땅 끝까지 성령 받은 사람 채워야 됩니다. 그렇게 이제 촉구하는 거예요. 그건 뭐 길게 이야기할 거 없이 뭐냐 하면 돈 내라는 이야기에요. 다른 데 돈 내지 말고 우리교회에 돈 내라는 이런 뜻입니다.

세 번째 악령이 예수님한테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역시 단독적이고 개인적이에요. 이 세상에 모든 것. 이거 내가 너한테 넘겨줄게. 다만 조건은 내가 이 악마의 존재를 나의 존재를 세상을 통치하는 통치자의 존재를 긍정하라는 거예요. 세상에는 통치자가 있는데 그 세상의 통치자 자체를 좋게 볼 수 있다면 그는 내가 이 통치자는 확고하게 좋은 기능을 한다. 라고 확고 한다면 모든 걸 비판하고 모든 걸 지적해도 통치자 하나는 못 건드리지요. 왜? 세상의 모든 통치자를 인정했기 때문에. 그럴 경우에 우리는 같이 손잡고 세상에 대해서 좋은 세상 만들고 같이 하자. 할 때, 예수님께서 “이미 세상에 통치하는 것은 마귀 니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이 말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악마하고 대결할 때 예수님이 제시한 것은 개인 대 개인이었습니까? 아니면 악령 앞에 뭘 이렇게 딱 했습니까? 개인은 일단 아니에요. 예수님은 죽으러 오셨기 때문에 개인은 아니에요. 자기 살기 위해서 오신 거 아니잖아요. 그럼 뭐냐, 악령과 대결하는 무기는 처음에 아까 이야기했듯이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사는 거예요. 말씀으로. 말씀으로 사는 거예요.

이게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먼저 악령하고 만나고 난 뒤에 내린 결론이에요. 악령이 지배하고 통치하는 이 세상에서는 나는 어떻다. 나는 저떻다. 하는 이거 가지고는 악마의 손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그럼 뭐냐, 말씀으로 딱 부딪히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다음의 답의 공식이 나와요. 인간의 개체. 개체는 뭐로 변해야 되는가, 튜브에요. 튜브.

헌혈할 때 헌혈 다 해보셨지요. 헌혈할 때, 누워서 하게 되면 가느다란 투명 튜브에 흘러가지요. 내 피가 주머니에 담기잖아요. 그렇지요. 손 이리 하세요. 영화관람권 하나 드리겠습니다. 튜브 주머니를 꾹꾹 누르면 피가 튜브를 통해서 통과하지요. 그럼 그 피가 처음에 주머니에 헌혈 주머니에 담기기 전에 그 피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내 몸 신체 안에 있지요. 니 신체 안에 있는 피가 주머니에 담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개체 다른 말로 하면 나. 나를 이 개체를 하나님께서는 인정치 아니하면 나는 뭔가 다른 쪽에서 내 쪽으로, 내 쪽에서 다른 쪽으로 흘러가는 중간 기능, 중간 매체 기능으로 나의 신체를 사용한다, 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돼요.

지금 우리가 악마한테 맨날 지는 이유가 내가 나로 인한 의식을 내가 포기를 못해서 그래요. 아무리 은혜받고 뭘 해도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은혜 받은 사람 누구? 내가. 그러니까 이건 백발백중 진 거죠. 이번에 구원받은 사람 누구? 내. 그러니까 진 거예요. 하나가 안 된다니까요. 하나가. 나부터 챙기고가 돼요. 나부터 챙기고 보면 그건 하나가 아니에요. 나 중심의 하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거든요. 나 중심의 하나가 존재하지 않는데 내 구원이 거기서 왜 나옵니까.

처음부터 교회 나올 때 부터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지 천당 가려고 지 보험 하나 들으려고 온 거예요. 그냥.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 온 거예요. 내 구원받으면 나로 인하여 우리 집안도 구원 받겠지. 이런 식으로.

그 집안이 누구 집안입니까. 내 집안이잖아요. 역시 개인주의에요. 개체밖에 안된다고요. 그래가지고 다른 집안하고 다른 검사 집안하고 말 싸움하면 니 집안이 구원받았나, 내 집안이 구원 받았나 난리지요. 하나가 된 것이 어디 있어요. 내 것을 제 것이라고 하지 않는 건 그런 건 없어요. 인간의 개인주의는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한 마음이라는 게 안돼요. 한 마음이. 교회 가서 교인끼리 손잡고 사랑하는 우리 주님 앞에. 백날 찬송가 백날해도 한 마음이 하나가 안돼요. 부부도 하나가 안돼요. 돈 문제만 딱 들어가면 다 끝나요. 돈 문제. 궁극적으로 인간의 모든 관계는 나라는 개인과 너라는 개인 사이에 돈으로 형성되어있는 거예요. 돈으로. 돈 관계가 아니면 부모고 자식이고 부부관계고 다 없습니다. 전부 돈 관계에요.

개체가 튜브로 되어야 돼요. 개체가 튜브되고, 튜브가 면적이 되고, 면적이 되면 입체가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가 되는 겁니다. 성경 전체가. 개체가 튜브가 되려면 나 개체는 튜브가 되고, 여기에 반드시 뭐냐, 흐르고 있는 게 있어야 돼요. 튜브는 흐르지 않으면 그 튜브의 기능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뭔가 흐르고 있는 게 있어요.

개체가 튜브가 되는데 이 튜브를 위에서 나라는 이 개체 말고 나 말고 다른 어떤 분. 어떤 단일 존재. 어떤 분의 튜브에서 우리가 여기에 말려들었다. 끌려들어갔다. 이러면 이야기가 되지요. 어떤 분이 다 이루었던 그것을 다이루었다 하는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서 여기서 생성된 게 여러 가지 있거든요. 의, 천국, 은혜, 믿음, 소망, 율법완성, 생명, 영생, 전부 다 그 분이 다 이루었잖아요.

그 분이 다 이루었을 때에 성령께서는 하나 되기 위해서 이걸 나에게 할당하지 않아요. 이건 너희 것이라고 할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서 일부 너한테 떼어줄게. 이런 게 없어요. 거기 있어. 나한테 오지 마! 오지 마! 내가 가서 내가 한 성과를 너한테 떼어가지고 너도 구원받을게. 이런 거 없어요. 오히려 그 인간으로 하여금 잡아당기게 하는 거예요.

주님이 이루신 곳에 개체를 잡아당기면서 이 개체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운반처럼 바뀌는 그 일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신약으로 보게 되면 좀 이상하게 보이지만, 구약의 성경개념, 제사개념으로 보게 되면 하등의 이상한 게 아니고 너무나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이스라엘이 몇 지파지요? 열 두지파지요. 그런데 열 두 지파를 통괄하는 한 지파가 더 있어요. 그게 레위지파에요. 레위지파의 숫자와 다른 열 두 지파의 나머지 숫자의 신생아가 동일하게 맞춰 나간다고 그렇게 되어있어요. 민수기에. 왜냐하면 일대일 대응하기 때문에. 다른 지파의 하나 하나가 레위 지파의 인원수에 하나 하나와 이렇게 연결시켜 놓은 겁니다.

왜 연결되어야 되느냐, 일종의 입양 양자가 되어버려요. 레위지파는 하는 일이 뭐냐, 레위지파의 하는 일은 죽음을 다루는 일이에요. 죽음을. 양잡고 소잡고 잡지요. 그런데 유월절에 보면 양을 잡았다는 말은 양만 잡았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을 표시하느냐 하면, 느그 히브리인들 맏이 다 죽었어. 너희 히브리인들 집안의 맏이는 다 죽었어! 라는 표시로 그들은 양을 잡은 거예요.

양을 잡아서 피를 내서 문설주를 발랐다는 것은 하나님이 실시하는 그 말씀에 심판 앞에서 심판하겠다는 그 말씀. 모든 인간을 다 심판하는 그 노아도 마찬가지고. 인간을 심판하잖아요. 심판하시는 그 심판에 “하나님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심판에서 빠질 수 있습니까, 심판에서 제외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발상을 하는 것은 이게 바로 개인주의적 발상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말씀이잖아요. 그럼 어떻게 하면 돼요? 뭐 심판 말씀 속에 들어오면 되지요. 참 쉽지요. 심판 말씀 속에 들어오면 돼요. 그 노아홍수 때 노아의 부동산 어떻게 됐어요? 물에 잠겼어요? 물에 안 잠겼어요? 노아의 부동산. 즈그집 텃밭. 텃밭이고 오이 밭이고 싸그리 물에 다 잠겼지요. 노아라고 해서 너는 당대 의인이니까 니 재산 제외고 그런 거 없어요.

심판 속에 누가 들어가 있습니까? 노아가 들어가는 거예요. 노아가. 노아가 들어가면서 산채로 심판받는 거예요. 산채로. 그게 산채로 심판받는 일종의 전망대. 관람석. 역할이 뭐냐 방주입니다. 심판을 목격하게 만들어요. 심판을. 심판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하다는 것을 이제는 방주에서 나와서 늘 증거해야 돼요.

하나님이 전면적인 인류 심판에 대해서 너무나 합당한 조치였다는 것을 증거하는 겁니다. 노아가 심판 속에 들어갈 때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노아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다. 언약 안에 있다. 구약에서 언약 안이라고 하는 거예요. 언약 안. in 언약. 인 약속. 언약 약속이에요. 언약 안이 있다는 거예요.

이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이 신약에 오면 뭐로 완성이 되느냐 하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예수 + 안’, 되는 겁니다. ‘예수 + 안’ 이에요. 이 말은 내가 예수 믿는 게 아니고요. 이 개인주의적 사고방식 하면 안돼요.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그건 예수님 이용하는 거고요. 예수님께서는 옆에 뭘 마련했는가, 예수 안이라는 공간을 마련해놨어요. 이거 왜 마련했겠어요? 하늘 구원 받은 백성은 요 안에 안 들어오면 백날 바깥에서 예수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해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예수 안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예수 안으로.

그럼 예수 안으로 어떻게 들어가는가, 아까 노아 언약 이야기했지요. 예수 안으로 들어온다는 말은 예수님이 행사하시는 그 기준이 있어요. 심판 기준이 있잖아요.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는 뭐가 없다? 생명이 없느니라. 그게 기준이에요. 너 살 말고, 너 피 말고, 너 땀 말고. 너 노력 말고. 너 봉사 말고.

내 살과 내 피를 먹지 아니하면 너희는 영원한 영생이 없는 거예요. 영원한 저주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성도는. 그 예수님 안. 그 예수님 피안으로 들어오면 되지요. 안으로. 심판 안에 들어오면 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 계속 해봅시다. 자, 레위지파가 하는 일이 뭐를 다룬다? 뭘 한다 했어요? 뭘 계속 살아있는 상태로 만드는 겁니까? 하루도 쉬지 않고 두 자. 죽음이지요. 죽음. 이스라엘은요, 죽음 안에 있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는 달리 그들은 죽음 이후의 종족이 되어가지고 죽기 전에 살려고 애쓰는 이방민족에 대해서 심판하고 그걸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겁니다.

죽음 그 이후, 어린양의 죽음에 합류했다. 이러면 여러분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대표 죽음이 있고, 그 하나밖에 없는 대표 죽음에 다른 사람들은 그 대표 죽음에 합류된 상태, 그게 바로 제사제도입니다. 거룩한 제사장 제도에요. 평소에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죽음에 대해서는 ‘그건 아주 나중에 죽으면 나이가 얼마인데 죽어.’ 이런 식이지요. ‘아직까지 요양병원 드나들 그러한 군번은 아닌데.’ 이리 생각할 거라 말이지요.

죽음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나중에 늙어죽을 때나 교회가가지고 목사한테 장례나 잘 치러주세요. 이런 생각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그거 누가 시켰느냐, 그런 사고방식이 악령이 시킨 거예요. 악령이 종교단체, 종교적인 기능을 가지고 시킨 겁니다. 내가 이리 허무한 세상을 이리 살고 뭐할래? 아니면 죽어서 천국 갈래? 말래? 성경에 봐봐 천국 있잖아. 다녀야지. 가야지. 언제까지 세상만 찾으면 되겠어? 교회 나와서 회개하고 회개하면 선물로 성령을 받고, 그리고 너는 구원을 받으리라. 약속을 믿어야지. 약속을.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거기서 그렇게 이야기를 해대는 거예요.

그럼 계속 그 모든 이야기가 어디에 꽂히게 되는 겁니까? 어떤 결과를 낳는 거예요? 결국. 살아야지, 살아야지, 구원받아야지, 구원받아야지, 계속 어딥니까? 자기 개인주의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아니면 더욱 더 거기에 집착하게 만듭니까? 집착하게 만들지요. 집착은 뭘 낳는다? 공포와 두려움을 낳는 거예요.

내가 삐딱선을 타면 내가 혹시 실수를 하게 되면, 15년간 완벽하게 하는데 한 순간에 내가 엉뚱한 짓을 해서 다 날려버리면 그동안 모아놨던 그 적금 넣어놓은 거 한 번의 잘못으로 몽땅 날아가 버리면 그동안 착한 일한 거 다 날아갔어. 어떡해? 다시 그 세월 다 다시 메꿔야 되는 거야? 어떻게 해야 혹시 돈으로 메꿀 수 없겠어? 이런 식으로 온갖 아이디어가 다 튀어 나오지요.

그동안 기도 안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까 기도를 바짝 할까, 새벽기도 나올까, 십일조를 빠졌는데 십일조를 계속 할까, 선교 헌금할까, 교육관헌금을 할까, 온갖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발악을 다하는 거예요. 발악을. 금식을 할까, 성경을 쓸까, Q.T할까, 천주교식으로 한다면 주기도문 5번 외우고, 회개할까.

천주교는 고해성사 있잖아요. 신부가 삐딱하니 앉아가지고 사실 다 보고 있으면서 삐딱하니 앉아가지고 “무엇 때문에 왔습니까?” “제가 시아버지를 욕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처방전 내리겠습니다. 주기도문3번 외우시고, 앞으로 미사에 빠지지 마시고 처방전 식후에 30분 후에 약은 잡수세요.” 그거하고 기독교하고 똑같아요. 똑같이 한다고요. 똑같이. 왜? 고객이 원하니까. 나는 나 구원받는 거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관심 없으니까. 우리의 욕망이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걸 언약 안이라 했지요. 예수 안은 신약이고요. 구약에서 좀 더 절차가 있어요. 예수 안에 들어가기 전에 절차가 있어요. 언약 안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성전 안으로 바뀌어요. 성전 안으로 바뀌면서 예수 안으로 바뀝니다. 예수 안이 성전 안이 돼요. 언약 안은 노아의 언약 말고 그 다음에 언약이 뭐냐 하면 시내산부터 시작합니다. 시내산의 받은 율법이 예루살렘 성전을 낳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시내산에 내려왔는데 시내산의 모든 율법이 총 집결되는 그 장소는 뭐냐 하면 성막이지요. 성막.

그 성막은 무엇을 다룬다 했어요? 죽음을 다루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율법 안에 있다는 말은 계속해서 이 희생제물의 죽음이 얼마나 실제 효과를 내는지를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만큼은 현실적으로 그걸 겪어야 돼요. 양은 죽었는데 그 죽은 양이 살아있는 인간이 노력하는 거하고, 노력하는 그것은 아무 짝도 소용없게 만들어버리는 현실을 만들어낸다고요.

1, 2, 3, 4, 5, 6일 동안 일하잖아요. 6일 동안 일하지요. 제7일은 뭐하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이지요. 그냥 집에서 TV보고 뒹굴고 노는 게 안식일입니까. 그 안식일에 해야 될 일이 뭐냐, 제사에요. 안식일 특별 제사가 6일 만에 돌아옵니다. 그 제사를 통해서 인간의 노동하는 것이 희생제물의 죽음과는 족히 비교될 수가 없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살려고 노력하는 그것이 희생 제물에 죽음에 비할 바가 아니다. 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생명은 우리가 이 이스라엘 자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내 노동으로 사는 것은 이방민족이고요, 산다는 것은 삶의 원천은 따로 존재하지요. 바로 성막 한 가운데서 아침 저녁마다 벌어지는 그걸 상번제라 해요. 매일같이 드려지는 그 제사에 그 연기, 제물이 제단에서 피어오를 때 탈 때, 연기 오르지요. 다 탈 때. 번제. 그 죽음에 의해서 그들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살아가는 겁니다.

호세아 7장8절 봅시다.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뒤집지 않은 뭐다? 뒤집지 않은 전병이다. 전병이 이리 구웠으면 저쪽도 구워야지요. 양쪽 다 구워야 되는데 뒤집지를 않은 거예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이스라엘 전체 사람을 하나의 성막에서 성전, 성막성전의 구조화 시키는 작업에 들어가는 겁니다. 모든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전 성막에 있는 제물로서 제물화 시키는 겁니다. 인간을 제물화 시키는 거예요.

인간을 제물화 시킨다는 것은 인간을 말씀화 시키는 겁니다.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을 지켜버리면 내가 그대로 있어요. 말씀 안 지킨 내가 말씀 지킨 내가 되어버린다고요. 이건 문제가 더 커져요. 고질병되어버려요.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내가 말씀화된다 말이지요. 말씀화. 말씀화 되려면 이렇게 제사에 들어가는 전병도 양쪽을 다 구워서 시커멓게 되듯이 우리로 하여금 희생제물이 죽는 그 죽음에 참여하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도 이 희생제물의 죽음과 연관성이 있는 하루 하루가 되게 하는 겁니다. 제물의 죽음과 연관성이 되는 것. 만약에 하루를 열심히 살았는데 죽도록 해가지고 죽을 지경이다. 이건 자기 살기위해서 애써서 죽은 거고. 그 죽음은 자기 죽음과 관련된 그거 말고, 예수님의 그 희생제물에 성전에 필요한 성전이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 가지의 제물과 죽음과 연관성 있는 죽음, 관련성이 있는 죽음, 그 죽음이 되려면 성전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성전 구성 또는 성전 구조에서 뭐가 쏟아져 나오느냐 하면 여기서 말씀들이 쏟아져 나와요. 말씀들이.

말씀들이 쏟아져 나와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이니까 말씀을 들을 거잖아요. 말씀을 듣게 되면 이 말씀을 들은 것을 이것을 솎아내서 성전 안으로 그 의미를 모으는 겁니다. 모으면 제 마음도 아니고 제 것이라 하지 않고 꼭 하나의 마음에 전부다 통합이 되게 되어있어요.

우리 성전 덕분입니다. 열왕기상8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거까지 이야기하면 복잡한데 다시 말해서 솔로몬이 성전 짓고 난 뒤에 기도한 게 뭐냐, 하나님이여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게 되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가 몸이 아퍼가든지 전쟁에 지든지 할 때는 이 성전에서 기도를 하게 되면 다시 우리를 그 성전의 뜻으로 하나가 되게 해 달라. 그런 기도를 하거든요.

실제로 요나가 바닷물에 빠졌을 때에, 요나는 물에 빠져 죽었잖아요. 빠졌잖아요. 그 때 요나는 노아하고 똑같아요. 물에 빠졌으니까 죽은 겁니다. 죽었는데 노아나 요나나 공동점이 뭐냐, 살아있으면서 죽음을 체험한 거예요. 까맣게 죽으면 되는데 안 죽어. 바다 속에서도 죽지를 않았어요. 죽지를 않으면서 비로소 죽음이라는 게 내 사적으로 죽는 죽음은 죽음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진짜 죽음은 어디 안에 있다? 말씀 안에 있는 거예요. 진짜 죽음은. 그 말씀 안에 있는 그 죽음에서 뭐가 나오느냐 유일하게 생명이 나와요. 천국이 나오고, 의가 나오고, 영생이 나오고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나와요.

사람들이 교회 나가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교회 가는 몸도 내 몸이고 집에 와도 내 몸이고 똑같은 몸이에요. 교회가 운영하려고 하니까 사람들이 뺀질이 되어가지고 교회 그냥 예배 쇼보고 자꾸 집에 가고 돈 오천원 내고 다 냈다하고 집에 가니까 교회 운영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강제로 막 성경 있지도 않은 대목 동원해가지고 교회 봉사 안하면 집구석 망하고 저주받는다 해가지고 막 협박 공갈해가지고 교회 봉사하는데, 자, 교회 봉사했다고 칩시다.

백날 교회 봉사해도 교회는 남의 집이지 내 집이 아니잖아요. 내 집이 아니니까 봉사해도 후딱 어디가고 싶어요. 집에 가고 싶은 거예요. 교회 가서 주일학교 애들 20명 가르쳐보세요. 보람되지요. 그럼 주일학교 20명하고 내 아이하고 바꿀래요? 안 바꿀래요? 안 바꿉니다. 20명 가르쳐봐야 내 말썽꾸러기 내 애보다 못해요. 믿씁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큰 교회라도 작은 내 집보다 못해요. 그 정도로 인간은 개인주의적인데 이건 아무리 교회 왔다고 해도 여전히 고무줄 탁 놓으면 바로 어디로 탁 튕겨옵니까? 나한테 오는 거예요. 나한테로. 교회 봉사 한 20년 했다. 할 만큼 했잖아. 좀 놔 줘. 이제는. 남은 내 인생 즐기고 살란다. 많이 했다니까. 헌금 많이 했어. 십일조 다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 놔 줘. 나 우리 식구랑 살래. 튕~~ 하고 돌아와버려요.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이고 간에 내 식구, 내 새끼 자식보다 우리 집안보다 이 세상에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럼 왜 교회 다니는데도 그런 식으로 천국을 못 가고 있는가, 교회에서 자기 죽음을 접하지 못해서 그래요. 자기 죽음을. 사람들이 교회가 있으니까 특정 장소에 교회가 있잖아요. 여기도 교회 있지요. 무슨 광명교회 있잖아요. 그 교회가 부동산이 있고 교회 부동산이 있다는 말은 우리 집에도 부동산이 따로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가 될 수가 없어요.

그러면 교회에서 죽음을 말한다는 것은 교회가 무엇을 이야기해야 돼요? 교회가 부동산 교회 이 자체를 교회가 거부해야 되지요. “여러분, 죄인된 몸이 왔지 여러분이 교회에 온 게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되지요.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돈 쓰는 것도 헌금입니다. 이리 이야기해야 되지요. 그렇게 해야지요. 교회가 천국을 막아버리지요. 교회가 천국을 막아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부정을 못하게 만들어요.

언약이 성전 안에 말씀이 와서 그들로 하여금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단 하나의 존재. 단 하나의 그 분. 그 분 앞에 예속되게 만들어버립니다. 만약에 예속이 안 된다면 성전 불타고 성전 불타면 뭐도 불탄다? 이스라엘 불타 버리지요. 이게 구약 이스라엘의 끝장이었습니다. 성전이 없는데 그들은 약속의 땅 부동산이 있다고 먹고 살고, 백성이 있으니까 먹고 살고, 아니요. 그런 거 없어요. 성전 없으면 없는 거예요. 왜냐, 단 하나의 안. 언약 안, 그 다음에 뭡니까? 성전 안, 그 다음에 뭐지요? 예수 안. 단 하나로 모아져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약 안 → 성전 안 → 예수 안)

그래서 지금 결국 하나로 모아진다는 말은 말씀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 자신들에게, 개인주의에게 와서 무엇을 행세해야 되는가, 심판을 행세해야 돼요. 말씀이 우리를 심판해야 된다고요. 그런데 이 심판은 우리에게 뭘 주는 심판이냐 하면, 생명에의 초대에요. 생명에의 초청. 그걸 위한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면 집보따리 다 싸고 교회 안에서 살까, 기도원에서 살까, 그런 거 소용없어요.

이 심판은 뭐냐 하면 심판에 대해서 성도의 반응은 뭐냐, 내가 대처할 것은 없다, 가 됩니다. 말씀이 우리한테 와버리면 그 자체가 심판이기 때문에 심판을 모면하고 면제하기 위해서 내 쪽으로 행동을 바르게 한다든지 말씀을 지킨다든지 이런 일들이 다 소용없어요. 그냥 말씀이 덮치면 되지 말씀은 심판하기 때문에 심판 안 받는 내가 되기 위해서 내가 어떤 조치를 하면 그건 더 못됐어. 더 얄미운 거예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운 거 시작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전혀 어렵지 않아요. 이제부터 어렵게 들어갑니다. 이 어려운 걸 해야 돼요. 아까부터 성령은 모든 것이 하나 됩니다. 하나 되기 위해서는 내 개인주의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했지요.

자, 어떤 게 어려우냐 하면, 성전이 말씀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한 걸 여러분이 아시지요. 성전이 할 때 뭐를 앞장세웠느냐 하면, 천사들, 천사들을 앞장세웠어요. 천사들은 특징이 뭐냐, 융통성이 없는 천사들이에요. 봐주는 게 없는 천사들을 내려보냈습니다. 그러면 이 천사들은 우리 말 듣는 게 아니고 누구 말 들어요? 성전을 대신한 우리 주님 또는 예수님, 하나님, 하나님의 말을 듣고 움직이기 때문에 성전의 특징은 뭐냐 하면 거룩이거든요.

거룩하지 않는 것은 다 심판해 버려요. 인간이 거룩하려면 모든 말씀을 지켜야 하는데 못 지키거든요. 탐내지 말라, 같은 것은 못 지켜요. 그러니까 이건 거룩이 와서 우리를 심판해 버린다 말이지요. 천사가. 천사가 심판을 해버리니까 심판받는 자 입장에서 좋은 점이 뭐냐, 내가 내 운명을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어떤 여지가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어떤 누구도 천사의 심판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말은 뭐냐, 새삼 뭘 안 해도 돼요. 거룩의 심판이 오게 되면 그 자체가 거룩이에요. 말이 이상해졌지요. 지금. 지금 이 말을 이해 못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목사님, 저는 어떻게 거룩이 됩니까?” 라는 그것에 미련이 있는 사람들은 앞에 뭐가 붙었어요? 나는. 주께서 그 나를 빼라고 심판하는 거예요. 빼라고. 나는 어떻게 구원받겠습니까? 나는 어떻게 거룩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나를 빼라고 천사를 보낸 거예요. 나를 빼라고. 빼게 되면 여기에 덮쳐지는 게 뭐냐 하면 성전이 덮쳐져요. 성전이. 성전의 거룩이 그렇게 덮친다고요.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요한계시록1장1절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지요. 요한하고 주님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뭐가 활동해요? 천사가 활동하지요. 천사가 활동하는데 천사가 활동하는 그 주님의 모습이 1장 13절에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가슴에 금띠를 띠지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지금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 있는데 뭐가 덮쳤는가, 제대로 된 성전이 거룩한 성전이 요한에게 덮쳐버린 거예요.

덮치니까 옛날에 구약 때는 인간이 만든 촛대 위에 있었고 촛대하고 그냥 장식해놨잖아요. 그런데 이미 이스라엘 멸망할 때 다 날아가 버렸어요. 그런데 이제는 성전은 끝이라고 여겼는데 천사를 앞장세워가지고 이미 그 허물어진 성전 말고, 완성된 성전이 사도요한에게 덮쳐버리니까 그 촛대 사이에 누가 거닐고 있어요? 주님이 거닐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사도요한의 개인이 아니고 사도요한은 이제 뭐가 되느냐, 하나의 예수님의 피를 전달하는 튜브기능이 된 겁니다. 얼마나 쉬워요. 쓰여 지면 될 문제를 내가 챙길 내 구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러고 있으니까 이게 악령한테 속는 거예요. 마귀한테 속은 거예요. 그동안.

얼마나 교회에 갖다 바치고 얼마나 봉사 바치고 기도를 얼마나 해야 구원받습니까? 이게 사기지요. 사기. 사기인데 그게 왜 사기인지 모르는 거 같아. 목 쉬어도 할 수 없어요. 해야 돼요. 왜 이게 사기인줄 모르는가, 본인들이 사기에요. 본인들이. 고객들이 사기에요. 오는 교인들이 다 사기에요. 사기 치고 간 거예요.

보험금도 내가 내야 보험금 탄다. 이런 사고방식 아닙니까. 어제부로 어느 산부인과에 애가 태어났어요. 애가 태어났다고 칩시다. 어제. 그 애는 민주당 세계에요. 국민의 힘 세계 됐습니까. 어제부로 태어났을 때. 민주당 세계 됐지요. 그 애가 투표했습니까. 그냥 덮친 거죠. 본인이 나중에 커서 민주당 싫어도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그 세계가 지배를 받고 통치를 받고 스며든 겁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것은 그 이루었음을 확장시키는 일까지 주께서 계속해서 벌리신다는 뜻이에요. 다 이루었다. 다 이룸이 이제는 다 이루었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에요. 이 성전을 자기 백성까지 성전 되기 위한 그 멈추지 않는 작업, 그 작업을 예수님의 영인 성령을 보내어서 그걸 확장 확대시킨 거예요. 그걸 가지고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40411b계14장1절(말씀의 연락망)-이 근호 목사

요한계시록1장12절에,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금 촛대가 몇 개이지요? 일곱 개에요. 일곱 개. 일곱 개 사이에, 일곱 개 사이가 7이 되면 안 되겠지요. 성령이 모든 걸 하나 되게 한다 했으니까. 하나 되기 위해서는 일곱 개가 설치면 안돼요.

그 일곱 개 사이를 오직 누가 다녀야 돼요? 오직 한 분의 해당되는 분이. “교회, 가만히 있어. 내가 다닐 테니까.” 내가 다녀가지고 일곱 교회를 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뭐냐,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니가 들어라. 성령이.

주님이 편지를 보내는 거예요. 일곱 교회에. 일곱 촛대거든요. 촛대를 옮긴다. 교회를 옮기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는 교회를 자기의 말씀화시키는 겁니다. “그냥 있어. 내가 말씀으로 만들어줄게. 내가 하나 됨의 능력으로.” 그냥 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1이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7이 되겠지요. 7. 일곱 교회. 7은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12가 돼요. 12. 이게 뭐냐, 7은 일곱 금촛대 가지가 일곱 개니까. 구약의 성전구조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성전구조 그 다음에 뭐냐, 12. 12지파는 바로 이스라엘 전체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 이게 구약의 구조입니다. 이스라엘 전체 국가 구조가 열 두 지파로 되어있으니까. 야고보서에 흩어진 열두 지파라 하잖아요. 열 두 지파로 나간다고요.

이게 숫자 7, 12가 되더라도 이게 12가 7되고 이런 것은 어떻게 용납이 돼요? 안 돼요? 이건 용납이 안 돼요. 될 수가 없어요. 7이 1되려고 할 때 그 교회는 촛대가 옮겨집니다. “교회도 아니야. 저리가!” 1이 7되어야지, 7이 1되려고 하면 안 된다 말이지요. 이 말은 일곱 교회가 있잖아요. 일곱 교회.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교회. 이리 있으면 각자 각자 이 교회가 개별이 일이 되면 안돼요. 요 교회 안에 나머지 여섯 요소가 이 안에 다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일곱 촛대가 가지가 일곱 개라는 말이지, 줄기가 일곱 개라는 말이 아니에요. 가지는 일곱 개라도 줄기는 뭐냐, 하나로 통합되어 있어요. 묶여 있는 촛대에요. 하나에서 나온다고요. 방향이 하나에서 나와야지 일곱에서 하나로 들어가는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서로 교회끼리 친목대회하고 배구대회하고 육상대회 해서 친목을 도모해 봤자 그거 부정 선수 있어요. 그거 안 돼요. 트로피 가지고 싸우고 안 된다고요. 세상에서나 어떻게든 하나가 안 돼요. 개인이 있는 이상은.

12가 있는데, 12를 어떻게 표현 하느냐, 12x12x1000이에요.
12x12x1000 얼마입니까? 144,000 되겠지요. 144,000. 이 144,000이 이건 튜브거든요. 튜브. 하나의 성령의 전달체. 성전이 확대되는. 세상이 있고 주님이 있다면 세상과 주님 사이에 통과하는 튜브. 관처럼 그냥 주님의 다 이루심을 전달할 뿐이지요. 전달하는 게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뭡니까? 심판이지요. 거룩한 심판을 교회를 통해서 하는 거예요. 거룩한 심판을.

심판에 대해서 긍정적이면 구원, 그렇지 않으면 탈락이 되는 겁니다. 심판이 이렇게 오게 함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심판이 와야 내 사적인 개인이 날아가니까. 이 심판할 때요, 주님 하신 일과 내가 하는 일 사이에 심판이다 말이지요.

그럼 주님은 어떤 주님이냐, 요한계시록 1장 7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나타난 모습은 찔림을 당한 모습이에요. 찔림을 당한 모습이에요. 따라서 어떤 인간도 인간들로부터 찔림을 받은, 집단적으로 찔림을 받은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게 단독 인이 되는 거예요. 찔림을.

찔림을 받은 분은 주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 쪽에서 주님을 찾아오는 방법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찔림을 받은 것으로 이것을 자기를 찌른 자들에게 심판할 때 여기에 교회는 뭐냐, 그것이 참 정당했습니다. 라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럴 때 주님의 찔림에 대한 그 생명의 효과가 교회까지 확산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튜브가 된다면 이것은 그 다음에 뭐가 되느냐 하면, 튜브 다음에 이스라엘 전체까지 교회에 확산이 되면 12x12가 되는데 이 12x12라는 것은 면적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12x12. 민수기 같은 경우에 이스라엘이 이동할 때는 줄서서 이동해요. 그러나 이 궤가 언약궤가 중간에 딱 서게 되면 이게 하나의 사각형으로 안식을 하게 되어있어요. 진격할 때 말고. 진격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길이 좁으니까 일로 줄서서 하지만, 다시 근거지를 마련해서 거기에 정착의 모습을 띨 때는 면적 모습이에요. 12x12거든요.

그러면 1000은 뭐냐, 이걸 입체화시키는 겁니다. 12x12 이게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을 각 시대마다 이건 시간이에요. 영원한 시간. 영원한 시간마다 그 시대에 필요한 이스라엘의 백성에 대한 모집되어야 될 자들이 각 시대마다 여기서 생산되고 있는 겁니다. 각 시대마다. 이게 뭐냐 하면 천년이에요. 천년. 이리 되면 이게 영원한 구조가 되지요. 영원한 확정된 하늘나라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하늘과 땅이 입체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영원한 확정된 성전구조)



왜 12가 평면이 되어야 하느냐, 12가 왜 면적이 되느냐, 면적이 되어야 12를 둘러 싼 이 둘레의 이 어떤 중심점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중심점은 어디에 있겠어요? 요 안 쪽에 있겠지요. 요 안 쪽에. 구약 이스라엘은 몇 지파입니까? 12지파지요. 이 열 두지파가 신약에 오면서 하나의 면적을 이루어버리면 어떤 열 두 지파라도 중심되는 지파는 존재하지 않아요. 중심은 따로 있어요. 이 가운데에 있어요. 가운데에. 이 가운데에 있는데 이게 성전과 관련해서 이 가운데 누가 있느냐, 이게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가 여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구약 평면에서의 언약궤 중심)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하다가 쉴 때에는 언약궤를 딱 중심으로 하고, 그 주위에 레위지파가 딱 둘러쌓지요. 그 다음에 열 두지파가 3, 3, 3, 3이 정사각형을 이루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이 되게 되면 레위지파의 기능은 날아가 버리지요. 전체가 열 두 지파 됐던 것을 완성된 144,000이니까 12x12x1000이 되니까 이건 완성된 의미에서의 입체적 구조가 되기 위해서 12x12가 되는 거예요.

이게 12x12도 있지만, 요한계시록에 보면 12+12도 있어요. 12+12같으면 얼마입니까? 24지요. 24뒤에 붙는 게 있어요. 24장로에요. 이십사 장로는 놀랍게도 언약궤 중심으로 같은 천사들과 동석해서 같이 언약궤에 있는 어린양 예수님을 가장 근접한 가장 가까운 주변에서 이십사장로가 섬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24라는 요 사이에도 12x2라는 12의 요소가 들어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스라엘을 구약의 성전 개념으로 해서 가져가는 거죠. 일곱 촛대에서 12까지 이어지는 겁니다. 사각형 구조로 되어있어요.

왜 이렇게 하느냐, 하나 중심이 내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에. 천국 중심이 내가 아니어야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합니다. 천국 가서 일단은 구원은 챙겼고 천국 가서 더 이상 나를 섬기지 않고 ‘오우, 주님이 저 한가운데에 있네. 내가 먼저 섬겨야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 그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나 뿐이겠어요? “이거, 씨~ 내 자리야! 첫 자리는 내 자리야!” 해가지고 최측근들이 왜 그리 많은지. “너 무슨 파야? 주사파야? 링길파야? 무슨파야?” 그 주위에 파가 왜 그리 많은지. 대파도 있고.

인간이 개인주의적으로 해서 천국 가지도 못할뿐더러 문제가 일어나 버려요. 다 같이 둘러서 한 분을 바라보는 그러한 구성이 되어있어야 돼요. 다 같이 한 분을 바라보려면. 나 자신이 바라보지 않아야 되거든요. 나 자신이. 나 자신이 바라보지 않으려면 12되기 전에 어디에 들어가야 되느냐, 7속에 들어가야 되지요. 왜? 성전은 뭘 다룬다? 성전은 나의 죽음을 다루기 때문에. 나를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성전은 거룩하고 거룩이 오게 되면 내가 살려고 하는 그 어떤 것도 죽어 마땅한 것으로 규정하고 덮치기 때문에 나는 그냥 성전의 죽음에 합류되었다. 덮쳐졌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천사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무서운 천사의 심판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천국에 이를 수가 없어요.

유월절도 마찬가지에요. 유월절 되기 위해서는 그 천사를 통과해야 되는데 유월절날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으로 천사를 통과했어요? 자기가 뭐 착해서 통과했습니까. 문설주에 뭘 발랐지요. 어린양의 피를 발랐어요. 천사들이 융통성이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한 대로만 움직입니다. 그 집안에 그 가장이 어떤 인간인지 일체 묻지도 않고 관심도 없어요. 천사가 확인하는 것은 뭐 어린양의 피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 확인할 뿐이지 니가 7살 때 무슨 짓을 했고, 15살 때 30살 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런 건 아예 관심조차 하지를 않습니다.

왜? 이건 우리의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를 대신하는 그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대신한 분이 천사와 어떤 관련성이 있느냐가 문제이지 내가 천사와 상대한다? 내가 주님과 상대한다? 주님과 상대 못하지요. 천사의 심판도 통과를 못하는데 무슨 주님과 상대를 해요.

주님의 뜻은 천사한테 줬고, 천사는 융통성 없이 주님의 뜻만 우리한테 덮쳤고, 우리는 그 천사 앞에서 죽어 마땅하고 그런데 약속과 더불어서 우리는 우리가 내 개인주의를 포기하고 내 대신 다른 어떤 분이 나의 자아를 대신해버릴 때 우리는 그 분의 피로 우리는 천사를 통과할 수 있는 겁니다. 구조가. 어렵다 어렵다 했는데 따지고 보니까 굉장히 쉽지요.

천사가 온전한 율법을 줬듯이 온전한 말씀을 우리에게 줘버리면 그 천사 안에서 우리는 천사를 통과하면서 천사 안에서 우리는 뭐가 생기느냐 하면, 말씀의 격막이 발생됩니다. 격막. 막.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딱 서로 열전달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막아 놓는 그게 말씀의 격막이에요. 팥죽을 올려놔두면 뭐가 생깁니까. 막이 생기지요. 팥죽 위의 공기층과 팥죽 안의 피막이 생기지요. 말씀의 피막, 격막 같은 것이 성도한테는 성도의 자아에 꽉 둘러쌓여 있어요. 성도한테 둘러싸인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주도권이 있는 게 아니고 말씀이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를 그 말씀에 예속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성립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천사를 우리가 그런 식으로 구원받으면 된다. 천사를 자꾸 언급하는가, 이걸 아셔야 돼요. 12x12에 이 구조, 1000 곱하기 시대, 시간 흐름, 이 구조, 이전에 이 세상도 구조로 되어있어요. 그 구조가 요한계시록13장에 나옵니다.

1에서 7, 7에서 튜브 그릴 때, 요렇게 그리시면 됩니다. 다른 사람보고 하라는 게 아니고 특정인에게 하는 거예요. 1에서 뭐가 나옵니까? 7. 7이 되면 성전이 되거든요. 성전에서 말씀. 말씀의 튜브. 말씀의 튜브가 되고 구약에는 평면이고, 신약에는 입체사각형이 되고. 이런 식으로.

(시대별 성전의 구조)


지금 이 튜브부터 해가지고 개인주의는 해체됐어요. 개인주의라 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성전 안. 성전 안에 들어온 거예요. 그럼 이런 구조를 왜 하나님께서 귀찮게 이런 구조를 하느냐, 이 세상이 입체구조로 이미 되어있습니다.

요한계시록13장 14절에 보면,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자, 땅에 있는 사람들 우상을 만들라 했습니다. 우상을 만들라 했으니까 뭐가 없지요? 성전이라는 것은 성립이 안 되지요. 성전은 뭐를 다룬다? 죽음을 다루잖아요. 죽음을.

성전은 참여한 자를 죽여버려요. 왜? 심판받아 마땅하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으니 죽여버린다고요. 그러나 짐승이 만든 성전은 예배당, 교회, 성당 또는 모든 다른 종교는 뭐냐, 우리를 죽이는 겁니까? 살려주려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도 복 받고 죽어서도 천국가게 해달라는 것이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특징 아닙니까.

살려주는데 그들에게는 조건이 있지요. 할 도리는 다 하라는 거예요. 할 도리는. 그냥 맹숭맹숭 살아있지 말고 살아있으면 뭔가 해야지. 니가 염치있고 지가 뻔뻔스럽지 않는다면 너를 살려줬으니까 니가 적어도 이 정도는 해줘야 양심상 영생을 줬으면 이 정도 뭐 봉사는 해야 되지 않겠느냐, 갑자기 목소리 이렇게 하니까 도올 김용옥 같다만. 갑자기 목소리가 이리 변하지.

그러면 인간 쪽에서 그러지요. “뭐를 기적을 줘야 우리가 바치게 있을 거지.” 기적을. 그 기적이 뭐냐, 13절부터 “니 암 걸렸어? 기도해라. 내가 낫게 해줄 테니까. 니 교회 감사헌금 해.” 이런 거죠. 기적을 행하고, 불이 하늘에서 땅에 내려오고, 난리도 아니지요. 어떤 사람은 죽었는데 살아나고. 아~ 참, 죽었는데 살아났데요.

기적에 대해서 약간 말씀 드릴게 있어요. 기적에 대해서. 12x12 이게 1000의 구조거든요. 144,000. 입체라는 말은 뭐냐, 입체 안에서는 지상과 천상 양쪽을 다 겸비했어요. 이 구조 안에는. 위쪽에서는 144000이 평화롭지만, 아직 이 시대, 천년이라는 시대 동안에 밑바닥은 그야말로 환란과 환란의 엄청난 환란이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이 시대라는 말이지요. 요 맨 구조 안에 다 들어있어요.

그러면 이 지상과 천상을 연결되어있는 구약 연결되어있는 인물 중에 여러 가지 인물이 있지만, 그 중에 한 사람이 엘리야입니다. 엘리야가 지상에서 자기 사역 끝나고 나는 간다. 주께서 인도하는 대로 간다. 갈 때에 누가 따라 붙었느냐 하면, 엘리사가 따라 붙었어요. 엘리사가 따라 붙을 때에 “집에 가. 나는 나 혼자 가야 될 길이야.” “아니되옵나이다. 엘리야의 능력 곱빼기로 갑절로 주지 않으면 제가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러든 말든 하고. 엘리야의 제자들은 엘리야가 죽으러 간다고 생각한 거예요. 실제로 인생을 마감한 건데 죽으러 가지요.

여러분, 구조를 생각해 보세요. 죽는다는 것이 맨 이 안에 있으니까. 이 안에서 죽고 살고 하는 거니까. 이 안에서는 죽는 걸 사실은 안식이라 해요. 주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그냥 쉬는 거예요. 불 수레타고 올라갔어요. 위로 올라갔다고요. 천상과 지상이 서로 연결 되어있어요. 이 안에서는. 서로 통하고 있는 겁니다. 그걸 삼층천이라 해요. 삼층천. 1층, 2층, 3층. 사도바울이 봤던 거. 변화산도 마찬가지고요. 베드로가 본 변화산. 하늘이야, 땅이야, 산상이야, 그 현재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가고 난 뒤에 옷을 딱 벗어놨어요. 옷을 벗으니까 엘리사가 엘리야의 옷을 집되 그냥 집는 게 아니고 자기 옷을 찢어 버려요. 자기 옷을 찢어버리고 엘리야가 벗어놓은 그 옷가지고 찢어서 휙하고 물을 저으니까 자기도 물이 갈라지네요. 그 대목을 보면서 ‘야, 엘리사의 기적이 엘리야의 기적보다 곱빼기로 많아질 수가 있겠다!’ 생각이 들지요. 실제로 곱빼기로 많아요. 딱 두 배로 많아요. 엘리사가 한 기적이 엘리야의 기적보다.

그러면 엘리야는 불 수레타고 천사가 데려갔다면 그러면 여러분 생각에는 엘리사는 어떻게 죽을 거 같습니까. 불 수레 아니고 황금수레 내려올 줄 알았지요. 그냥 죽었어요. 그냥. 그냥 죽었다고요. 곱빼기인데. 짬뽕 곱빼기 먹으면 뭐합니까. 보통 죽음하고 차이가 없는데. 그냥 죽었어요. 그냥 죽었는데 놀라운 것은 죽고 난 뒤에 엘리사 무덤에다가 다른 사람 시체를 던져 넣으니까 그 사람이 부활이 되네요.

이건 감히 엘리야가 경험하지 못한 기적이에요. 엘리사는 자기가 기적을 행한 게 아닙니다. 이미 자기는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부활이라는 놀라운 소생되는 그런 능력이 있다는 말은 지금 엘리야나 엘리사나 이 하늘과 땅이 서로 입체적으로 통합되어있는 이 구조 안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들은 말씀을 지킨 게 아니에요. 말씀의 튜브에요. 그러니까 이 구조 안에는 개인은 없고 개인 + 개인은 없고요, 이게 뭐냐 하면 연락망이에요. 연락망. 연락망들의 연락망. 마치 우리 두뇌 속에 있는 시냅스의 연결고리 같아. 촘촘하게 두뇌 세포들이 서로 서로 전기적 신호가지고 연결되는 것처럼 연결고리밖에 없어요. 연결고리.

그러니 성도마음에는 뭐가 촘촘해야 되느냐 하면 콘센트가 전기 접속 구멍들이 있어야 돼요. 촘촘히. 아무나 와서 꼽아도 연결 되도록 다만 세상 것은 연결이 안돼요. 민주당, 국민당 이런 거 연결이 안돼요. 복음으로만 말씀이 꽂으면 소켓을 꽂으면 내 쪽에 있는 말씀이 저쪽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상호 연결될 때 그걸 하나라고 합니다. 하나. 그게 하나에요.

튜브니까 내 건 아니에요. 내 튜브다. 이건 설명이 안돼요. 내 안에 있는 것이 내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것이지요. 주님의 것이 흘러서 다른 사람한테 접속되고, 접속되고, 접속에 복잡한 접속 망들의 공간이 이 12x12x1000이에요.

그래서 아까 그 37페이지에 성령이 충만하여 말씀을 전하니 서로 서로 연결하니 믿는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자가 없더라. 여기에 근거해서 제가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헌금을 어떻게 하느냐, 헌금은 니가 내면 안 되고 내가 내버리면 아나리아 삽비라같이 돼요. 내 돈인데 하나님께 드린 거예요. 그러지 말고 헌금은 빼앗겨야 돼요.

왔는데 갑자기 옆구리에 뭔가 확 꽂히는데 보니까 소켓이에요. 보니까 돈 백만원 빼갔네. 빼갔는데 내 것이 아닌데 뭐. 제 것을 제 것이라 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빼갈 때 어디 쓸려고 빼가노? 어디 뭐 부동산 주식 사려고 빼가노? 어디 빼가노? 내가 살기 어려워서 빼간다. 살기 너무 힘들어서. 어디 가서 니한테 빼가라 해서 지시 받고 빼간다. 그렇게 빼가면 그 콘센트 빼버리세요. 반드시 흐르는 것은 돈의 흐름이 되면 안돼요. 말씀의 흐름이 되어야 돼요.

왜 소켓을 나한테 콘센트에 꽂았느냐, 나 죄인이거든. 빼가라. 빼가라. 이거하고 뭐해서 전도하려고 빼간다. 이건 이단입니다. 이건 용납 안돼요. 내가 죄인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한 돈이에요. 죄인 됨을. 내가 얼마나 뻔뻔스러우며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라는 것을 들추어내는 방도로서 주께서 니한테가서 돈 이만원 빌려라 하더라. “내 진짜 니한테 돈이나 빌리고 죽어야 마땅하지?” “그래, 죽여줄게. 돈이나 받고 죽어라. 인간아.” 그래서 빼앗기는 겁니다.

그런 경우가 여러분한테 굉장히 많아요. 아니 목사님 그런 경우 없는데요. 왜 없어요. 시집간 딸자식, 장가 간 아들, “할머니, 세배돈?” 세배돈 얼마 줬어요. 요새 만원 안 통하지요. 만원 주면 며느리가 시선이 완전이..., 용납이 안 되잖아요. 다 빼앗긴 거예요. 그렇게 줌으로서 또 죄인하나 우리 집안이 죄인의 집단이구나! 깨닫게 되는 겁니다. 전체가.

이처럼 여기 개인은 연락망으로 죽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연락망이 여기 이런 144,000 이전에 이미 인간세계에 구성되어있어요. 그게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그들이 15절에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었고, 16절에,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절,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지요. 그렇지요. 매매를 못하면 이건 굶어죽지요. 따라서 모든 인간은 이 표를 다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렇게 해놓고 그걸 구조로 이야기해요. 그 구조를 숫자로 표현하는데 18절에,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얼마라 했습니까? 666. 간단하지요. 수학에서 6과 6 두 개를 나누면 면적이고, 세 개를 하면 입체거든요. 입체구조. 이 세상은 악마의 입체구조로 된 거죠. 어딜 봐도 6, 여길 봐도 6. 어딜 봐도 6이에요.

아까 성전의 숫자는 얼마였습니까? 7. 촛대의 수가? 7. 어떻게 해도 7이 될 수 없는 세계. 아무리 노력해도 7를 이룰 수 없는 세계. 주께서 거닐지 않는 세계. 짐승이 안에서 늘 거닐고 있는 세계. 이 북한만이 아니고 남한도 마찬가지에요. 이 자본주의 사회. 이미 갇혀있습니다. 이미 갇혀있어요.

매매 못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바로 사채와 자본 거기에 대해서 자유로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에요. 매매한다는 것은 화폐 교환이잖아요. 어떤 것도 돈 축적이 되지 않으면 못 사는 세상에 그들은 이 세상외에 다른 세상은 생각도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살려고 하는 자는 어쩔 수 없이 짐승의 구조 안에 갇힌 입장에 놓여 있는 겁니다.

교제 39페이지 봅시다. 밑에서 2번째 줄이요, 아까 666 다시 설명하게 되면, 666이라 하는 것은 6 곱하기 6이지요. 안의 면적. 6x6. 6 곱하기 6인데 여기에 수직적으로 6이 하나 더 첨가하는 것은 모든 시대마다 악마가 여기에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거예요. 모든 시대마다.

교제 39페이지 밑에서 3번째줄, 모두 한 떡에서 나왔다. 서로 앞장서서 남을 존경하라(롬12:10), 서로 합심하라, 그 다음에 40페이지 봅시다. 서로 받아들이라(롬15:7),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라라(롬16:16), 서로 기다리라(고전11:33), 서로를 위하여 같이 걱정하라(고전12:25), 서로 사랑으로 남을 섬기라(갈5:13), 서로 남의 짐을 져 주라(갈6:2), 서로 위로하라(살전5:11), 서로 덕을 세우라(살전5:11),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살전5:13), 서로 선을 행하라(살전5:15), 서로 사랑으로 참아 주라(엡4:2), 서로 친절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엡:4:32), 서로 순종하라(엡5:12), 서로 용서하라(골3:13), 서로 죄를 고백하라(약5:16),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약5:16), 서로 진심으로 다정하게 사랑하라(벧전1:22), 서로 대접하라(벧전4:9), 서로 겸손하게 대하자(벧전5:5), 서로 친교를 나누자(오일1:7)이리 되어있지요.

그러면 요거 서로를 빼고요, 다시 39페이지 봅시다. 밑에서 2번째 보면, 존경, 합심, 40페이지 받아들이는 거, 거룩한 입맞춤, 기다림, 같이 걱정, 남을 섬김, 짐 져 줌, 위로, 덕, 화목, 선, 참아 줌, 친절하고 자비로운 사람, 순종, 용서, 죄 고백, 기도, 진심으로 다정하게 사랑, 대접, 겸손, 친교, 요건 뭡니까? 요 내용은 완성이지요. 완성. 완성된 거예요. 누가요? 예수님이 완성한 거예요. 완성한 것을 서로 저주 뒤에서 아래쪽에 물을 내려 받은 것처럼 주님과 결속되어있기 때문에 주님에서 완성된 것을 내 것도 아니니까 서로 서로 흘려보내는 촘촘한 연결망의 세계, 이게 바로 교회다, 이 말입니다.

자, 그러면 그 다음에요, 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튜브로서 보여주면 되잖아요. 튜브로서 보여준다. 보여줄 때에 아까 그 엘리사 이야기할 때에 엘리사가 엘리야의 옷을 가질 때에 자기 옷은 어떻게 했습니까. 찢어버렸지요. 왜 멀쩡한 옷을 찢습니까. 그냥 엘리야 옷 들고 하면 안 되고 왜 자기 옷을 찢어버리지요?

이것은 내가 이걸 기적을 행사하는 것을 주님께서 인정을 안해준다 이 말이지요. 저 엘리야에 있는 기적이 엘리야의 기적이 아니고 엘리야 나름대로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엘리야가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거거든요. 말을 바꾸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이 오니까 엘리야는 더 이상 내 것을 주장할 이유도 없어요.

똑같이 그 능력이 엘리사에게 왔다면 엘리사도 내 것이라고 주장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럼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내 것을 찢어버리는 것. 내 것을 찢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타인에게 연락이 왔다. 타인에게 연락이 오면 소위 전화로 오게 되면 먼저 할 것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의 마음을 찢어버려야 되지요.

복음을 아는 집사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누구세요? 이집사인데요. 아~ 잠깐만 기다리세요. 왜요? 우선 저부터 찢고요. 저 마음부터 찢고 전화 받는 태도, 자세, 이제는 대충 찢었어요. 당신에게 주어진 지옥이 갈라지고, 죽음이 갈라지고, 영생이 보이는 그 능력이 이제 전화기를 통해서 나에게도 흘러들어오기를 바랍니다. 같이 복음을 아니까.

당신으로 하여금 모든 인간은 자기 위주에요. 그 자기 위주를 가감히 찢어버렸던 그 주의 능력이 당신이 나에게 전화를 했기 때문에 전화 받는 순간 동일한 능력으로 이제는 제가 주님 앞에 찢겨질 차례입니다. “무슨 일 때문에 전화했습니까?” “아, 밥 먹었어요?” “밥 먹었어요. 끊읍시다.” “끊읍시다.” 그 밥 먹었다고 짧은 가운데서 같은 성도끼리 친교를 나누는 거예요. 둘 다 밥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둘 다 찢었다는 거예요. 이런 만남이에요. 이런 만남.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솔로몬이 재판할 때 잘 아시잖아요. 솔로몬 재판할 때. 처음에는 서로 살아있는 아이가 내 아이이고 죽은 아이는 저쪽 아줌마 아이라고 서로 우기니까 솔로몬이 “그래요? 그러면 공평하게 하겠습니다. 애를 두 개로 쪼개면 되겠네.” 라고 이야기했을 때 딱 듣고 진짜 엄마가 “그럴 거 같으면 저 애는 나의 애가 아닙니다.” 자기를 찢어버린 거예요.

요건 내 거야. 분명히 내 거야. CCTV까봐. 내 거 맞지. 내가 내 몸으로 낳았어. 이건 분명히 자기한테 진실이고 실제 그대로라고 이건 누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거짓됨이 없다고 우겼던 그것이 주님 앞에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나의 사적인 거짓됨은 소용없어요. 내가 개인적인 주장을 한다는 그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내 것을 내 것이라고 우기는 그것이 사기라는 사실을. 이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솔로몬의 재판가운데서 그 여인은 처음으로 알았던 거예요.

내 자식이 내 거라는 관계를 끊어버리는 그 거, 어느 자식도 내 것이 아니라는 거. 상황 터지면 내 자식이라도 내 자식 아니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주께서 만들어버릴 때 그 상황이 뭐냐, 성전안의 세계에요. 성전 안에는 내 자식도 내 게 아니고, 나도 내 거 아닌 세계. 모든 것이 주님 것이 되게 하는 그 성전이 재판이라는 이름으로 덮친 거예요. 그래서 솔로몬이 그걸 딱 보고 진짜 엄마는 쟤다. 저 여인이 진짜 엄마라고 이야기를 하지요. 왜냐, 솔로몬 본인도 몰랐으니까. 누가 자기애인지 몰랐으니까. 누가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가를 통해서 발견하게 하지요.

그런 경우가 신약에서도 나와요. 요한복음1장 뒤에 있는 나다나엘이 저는 왜 그리 좋은지 모르겠어요. 모든 것을 예수님이 보시고 먼저 이야기해요.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때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여기에 나가 등장해요.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나다나엘이 그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중심으로 자기 자신의 인생을 구성해 나간 거예요. 나.

그런데 주님께서 언급을 함으로서 내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내가 말 할 수 없는 다른 범위, 다른 세계를 주님께서 나다나엘에게 가져다주신 거예요.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만 내가 사는데 그게 나다나엘인데 먼저 말을 건넴으로서 나는 기껏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아는 것 그게 전부였구나! 전부가 되어서 그것으로 참된 이스라엘 구원 받겠다 하는 것은 주님 앞에서는 용납이 안 되지요. 그래서 먼저 찾아온 거예요.

먼저 찾아와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할 때부터 나는 벌써 너를 알았다. 해버렸어요. 그 순간 나다나엘은 자기중심에서 누구 중심으로 옮겨가야 합니까. 내가 뭘 해도 다 알아 보신 그 분 중심으로 옮겨갈 때 나다나엘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바라 봐서는 안 되는 사람이에요.

그럼 뭘 바라보느냐, 예수님이 하신 말씀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니가 보리라. 인자 위에. 나다나엘 위에 천사가 오기를 나다나엘이 기대하면 안돼요. 자기한테는 아무 일도 없어도 상관없어요. 왜?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안에 그 세계가 자기를 덮쳤으니까. 자기는 그 세계 안에 말려든 거예요. 그러면 나다나엘이 해야 될 일은 뭐냐, 연락망이죠. 이제는. 예수님 세계 안에서 촘촘한 연락망 튜브에 그 촘촘한 연락망들 중의 하나가 나다나엘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 같은 경우가 예수님의 제자들한테도 그게 성립돼요. 누가복음10장20절, 다 같이 읽어봅시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기록됐다는 말은 서판에 기록 책 안에 한꺼번에 다 들어있다는 거예요. 그 책은 두 권이겠어요? 세 권이겠어요? 단권이죠. 하나지요. 그냥 거기에 새겨진 부각된 것, 새겨진 거예요. 새겨진 거. 그래서 독립하면 안 됩니다. 그 기록책에서 빠져나와서 내 이렇다 설치면 안돼요. 새겨진 거예요.

그러면 그 책은 이미 이름이 기록되면 그 이름이 해야 될 일은 책의 범위를 못 벗어나요. 그 책이 뭐냐, 예수님의 생명책이에요. 누구한테 연락이 오든 뭘 하든 간에 이미 예수님의 생명이 다 이루어진 거예요. 예수님 홀로 다 이루었다 함이 지금 내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겁니다. 건드리면 다 이루었다는 차원의 여러 가지 행동들이 나오는 거예요.

그 다음에 구약을 잠깐 한 번 보겠습니다. 수요일에 이거 하려하다가 시간이 한 시간 반해야 싶어서 미뤘지만, 특별히 여러분한테는 에스겔 1장 봅시다. 에스겔1장12절, 신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지요. 에스겔1장에도 10장에도 마찬가지이고. 에스겔1장과10장의 천사들을 보면 이게 꼭 기마전하는 거 같아요. 함께 뭉쳐있어요. 다수가 한 덩어리 되어있다고요. 한 덩어리 되어있으면서 그 한 덩어리 바깥의 세계는 없어요.

왜? 한 덩어리 세계 안에 무지개가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보좌가 그 위에 있어요. 하나님의 보좌가 바로 인간이 오는 것이 아니고 천사의 뭉치 안에 뭉치에 의해서 보좌된 받들어 모신 상태에서 하나님의 보좌가 주어지고 그 천사들의 밑바닥에서는 세상을 향하여 뭘 쏘아대느냐 하면 맹렬한 불로서 심판을 하게 되어있어요. 요한계시록처럼.

밑에는 세상에 대한 심판, 전면적인 심판, 위에는 무지개 있고 평화로운 하나님의 보좌 성전. 이걸 천사는 전부 다 이렇게 양쪽으로 다 입체적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입체적 구조. 그 입체적 구조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요한계시록14장, 13장 끝에 666했지요. 14장1절에 보니까,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몇 명이 있어요? 십사만 사천이 있지요. 그 이마에 자기 이름이 있어요? 무슨 이름이 있어요? 자기 이름이 아니지요. 무슨 이름이 있습니까?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있지요. 어린양의 이름이 있다는 말은 뭐냐, 어린양은 성전에서 제사지낼 때 있는 양의 이름이 어린양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자신이 뭐가 됐어요? 이미 제물화 되어있고 제물화 된 것이 말씀 성취한 것과 동일한 말이에요. 아버지 이름도 쓴 것도 있더라. 그리고 난 뒤에 십사만사천이 거기서 여기에 이십사 장로들이거든요. 거문고 타는 사람 있고,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되어있지요.

그런데 이 십사만사천의 예루살렘 이 예루살렘이거든요. 시온산이니까 예루살렘 아닙니까. 구조가 그대로 땅 밑에서 하나님의 모집책들이 천사가 모집책이니까 모집책이 밑에서부터 환란 받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란 받는 사람을 계속해서 생산해 내고 있는 겁니다.

밑에서 그냥 끌어 잡아당기는 거예요. 끌어 잡아당길 때 마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이게 영생을 얻기 위해서 모집책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서.

길거리에 동에서 나온 청소차 있지요. 청소차가 가면 자동적으로 아스팔트 청소하는 거 봤지요. 동글동글한 바퀴가 막 돌면서 빗자루 같은 게 돌면서 거기서 먼지와 낙엽을 잡아 당겨서 안쪽으로 모으잖아요. 바깥에서 천사와 그리고 성령에 의해서 빨아 당기면서 저 위에 올라가면 십사만 사천이 기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도달된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전체가 그래요. 요한계시록 전체가 1장에 보면 하나님 계시고, 그 다음에 예수님 계시고 그 다음에 천사가 있고 환란 받는 가운데 밧모 섬에 누가 있습니까. 사도요한이 있지요. 순서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거예요. 뭐가 내려오느냐, 말씀이 내려오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는 게 내려오는 거예요.

내려오면서 전체적으로 심판을 하면서 그 심판을 통해서 자기 백성, 어린양을 따르게 될 사람한테는 이 심판을 통해서 모집을 하게 되어있어요. 십사만 사천안으로 다 들어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 많이 바빠요. 굉장히 바쁩니다. 바빠 가지고 그 바쁜 하나님의 일거리가 메일로 또는 여러분의 자신에게 소켓으로 또는 콘센트로 연락이 와요. 계속해서. 뭐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여러분의 내부로 흘러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뭘 어떻게 해서 내 구원 받겠다 하는 그런 쓸데없는 것은 안하셔도 됩니다. 늘 생명책에 있는 출석체크는 천사들이 빠짐없이 체크를 해요. 16번 왔어요? 안 왔어요? 16번 빨리 들어가! 24번은?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마지막에는 다 살리기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 복음 다 이루었다 하심으로 여러분들 하늘의 거룩한 언약궤 있는 성전으로 여러분들을 끌어당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이렇게 바쁜 줄 몰랐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돈 벌고 밥 먹고 살기 바빴는데 그러다 보니까 너무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것들이 주님 앞에서 심판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 그것을 십자가에 다 이루었던 그 복음 앞에서 합당하다는 주님의 정당한 조치인 것을 흔쾌히 기쁘게 감사하고 수용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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