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40314a고전15장56절(위험한 시험)-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25페이지 <교회의 의미>부터 하겠습니다. 교회는 마지막 때에 나타는 게 교회입니다. 마지막이 아니면 교회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나타나기 전의 시대를 구약이라고 합니다. 구약시대의 형편이 어떤 것인지는 엘리야 시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제단을 두 개를 그려보겠어요. 제단.
<불가능한 위험한 시험>
살아생전에 내가 있는지, 아니면 진실로 하나님이 계신지 테스트하는
상황 속으로~
( 그림은 첨부파일에 있습니다.)
제단1, 제단2, 제일 먼저 제단에 바알과 아세라, 바알+아세라 선지자가 다 합해서 850명 나와요. 850명. 여기 엘리야 여호와 제단은 오직 한 사람 있어요. 한 사람. 엘리야 있는데. 이 구약의 형편이 어느 정도로 대단하냐 하면 여기 850명 다 올라 간다 칩시다. 850명 다 올라가요. 제단이 비좁지만 포개서. 포개서 누워야 되겠지요. 여기는 한 사람. 엘리야가 이렇게 제단 위에 누워있다 이 말이지요. 제단에. 내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태울 것이냐, 너를 태울 것이냐, 하나님의 불이 어느 쪽에 올 것이냐 하는 거예요. 엘리야가 누운 자리 그리고 850명 누운 자리를 치우고 우리들 자신을 한 번 여기에 눕혀보자 하는 거예요. 우리 자신을 그 때 그 시절에 돌아가서. 상상을 해보는 겁니다. 아침부터 해서 제단 만들어 놓고 나를 이렇게 눕혀있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불로서 응답해달라고 요청을 기도를 해보는 겁니다. 불 떨어지겠어요? 불가능한 TEST에요. 하나님을 상대로 한 불가능한 테스트를 엘리야는 했던 겁니다.
제물을 얹었다는 말은 사실은 제물은 빌미고 본인을 여기다 올린 거예요. 본인을. 이 비슷한 예가 창세기4장에 가인과 아벨도 마찬가지에요. 가인의 제사 받았다, 안 받았다. 아벨의 제사 받았다는 말은 그 제단에 가인 너 올라오고 아벨 나 올라가고 올라가는 거예요. 올라가서 하나님이 어느 쪽에 나타나느냐 하는 겁니다.
이게 참 위험한 테스트가 되는 이유가 가장 위험한 테스트지요. 이 세상에서. 이건 자살보다 더 위험해요. 자살은 그 자살 끝에 목적을 본인이 이미 알고 있어요. ‘마포대교에 떨어지면 나는 죽는다. 뭐 죽으면 죽지 뭐. 인생 뭐 있어. 누구나 깔끔하게 가는 게 인생이지.’ 미리 짐작하고 있는 거잖아요. 자살은 자살 이후의 상황을 자살 전에 내가 미리 알고 있다는 데서 그다지 위험한 테스트가 아니에요. 일을 저질러 보는 것이지 테스트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자살을 그냥 해보는 거지만, 하나님을 상대로 한 TEST는 그 결과에 대해서 본인은 손을 놓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조치가 자기에게 취해지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게 왜 위험한 테스트, 위험한 시험이냐 하면 애초부터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애초부터 하나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다고 한다면 이 테스트 자체가 의미가 없지요. 그래서 이게 위험한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나는 있는데 나는 있는데, 나는 있다. 나는 여기 있어요. 거울 보면 내 모습 있잖아요. 나는 있는데 하나님이 내가 있는 것처럼, 내가 여기 있는 것처럼 있을까? 라는 테스트를 우리 인간들끼리 하면 이건 위험한 테스트 아니에요. 왜? 어차피 인간들은 테스트하기 전이나 테스트 후나 내가 테스트 하기 전에도 내가 있고, 테스트 끝나고 난 뒤에 에이~ 괜히 했어. 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나는 있으니까 자기가 손해볼 건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수능 치기 전에 치러 들어가는 나나 치고 난 뒤에 오후 6시에 끝난 나나 뭐는 확실하다? 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있을까, 없을까, 이 테스트에서 중요한 것은 이 테스트는 뭐와 같으냐 하면 내가 과연 여기 있기는 있는가에 관한 테스트에요.
내가 여기 과연 있기는 있는가, 라는 테스트.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이 있다는 말은 그 하나님이 만약에 있다면요, 그동안 내가 나한테 있다는 말을 더 이상 쓰면 안돼요. 왜냐하면 만약에 하나님이 있다면 하나님의 있음의 결과가 내가 점심 먹고, 운동하고, 내가 애 키우고, 내 할 일 직장에 일하고, 이게 나 있음에서 나온 게 아니고 하나님의 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모든 가정주부 설거지 하는 것도 설거지 그 현장에 내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있습니까? 그 설거지 현장에.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내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신 거예요? 하나님이 계셔서 나보고 설거지 일을 시킨 거예요. 그리 되는 거예요.
그러니 이게 얼마나 위험한 테스트입니까.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없다면 이 이야기가 이 상황을 혼자만 아이~ 기쁘다. 즐겁다. 드디어 하나님 알았네. 이건 좋은데, 이 이야기를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매개가 다 끊어져 버려요. 매개가. 전달할 수단이 하나도 없어요. 바로 그 방법을 방금 이야기한 방법을 누가 사용했느냐, 예수님이 사용하셨어요.
예수님이 분명히 본인이 계시면서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수십번 이야기했어요. 아버지와 함께 있다. 그 말은 진짜 있는 자는 나고, 내 말을 듣는 제자들이나 너희들은 하나님 앞에 아버지가 없으니 너희들은 없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걸 죽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죽는 존재가 말을 하니까 그 말 나오는 하나 하나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말 하나 행동 하나 하나가 나를 목 졸라 죽이는 거고, 나를 짓밟아 죽이고 나를 죽이고, 죽이고, 지옥으로 보내는 그 힘으로서 나는 숟가락 들고 밥 먹고 잠자고 운동하고 이 모든 것이 나를 죽이고 지옥 보내는 일의 요소가 돼요. 요건이 돼요.
왜? 처음부터 나는 내가 살아있으니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살아있는 것보다 우선해서 살아있는 자는 나한테는 통하지 않는다. 나한테는 없다가 돼요. 바로 그 테스트를 엘리야가 한 거예요. 과연 내가 있는지, 하나님이 계신지 하나님이 계심으로서 하나님이 계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잠시 인생을 사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은 아예 없고 어디서 왔는지는 하여튼 모르겠지만, 나는 여기 있고 죽어서 나는 어디가는지 나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잠시나마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잠시나마 이 땅을 살아간다. 이게 전부 다. 이게 맞는지, 아니면 누가 계셔가지고 내가 의도에 의해서 그분에 의해서 태어나게 해서 나중에 죽을 때도 그 분 세계 안으로 합류되고 그 쪽으로 들어가버리는지 이걸 살아생전에 테스트 해 보는 거예요.
아시다시피 엘리야는 죽을 때 어디로 갔습니까? 죽을 때 그 제자들이 시체를 못 찾았어요. 못 찾아야지요. 당연히 못 찾아야지요. 왜? 엘리야 존재 자체가 엘리야의 하나님이 계심 자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엘리야를 이 땅에 보여줬기 때문에 그래요.
엘리야를 보면서 엘리야만 보면 안돼요. 엘리야 보면서 엘리야 하나님도 같이 보여주기 위해서 엘리야가 선지자가 된 겁니다. 똑같은 구조와 방식이 예수님이에요.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구동성으로 해서 죽였는데. 왜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그들은 예수님만 보였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아버지는 못 봤기 때문에 그래요. 그 아버지가 진짜 하나님이에요.
그 진짜 하나님을 못 봤다는 말은 그래도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그들의 하나님은 몽땅 뭐가 됩니까? 자기들의 존재에서 만들어낸 가짜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극단적인 위험한 테스트를 인간은 하지를 않아요.
왜? 내가 여기 있고, 테스트할 필요도 없이 테스트 끝나도 나는 여기 있는 게 분명하기 때문에 자기한테 손해될 일을 내가 그 위험한 손해될 일을 내가 왜 합니까. 안하지요.
주식투자를 한 번 봅시다. 코인투자, 주식투자. 이게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왔지요. 그렇지요. 주식투자, 코인투자가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왔으면 그 투자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어떤 경제구조에서 이게 나왔고 이게 어디로 순환해서 어떤 결과로 도출된다는 것은 인간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들이 다 알고 있어요. 인간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제가 극단적인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식투자를 해서 수익이 한 5배되기를 원했어요. 회사에서 회사 일 안하고 상사 눈치봐가지고 주식 투자 뺏다 뺏다 하잖아요. 국회의원도 회의 참석할 때 이래가지고 회의 들어가면서 딴소리 하면서 했잖아요. 했을 때, 주식이 다섯배되는 결과를 원했는데 딱 주식이 발표되고 난 뒤에 문 열고 7살 먹은 남자아이가 “아빠!” 하고 들어왔다고 칩시다.
극단적인 예입니다. 주식 투자해서 다섯배되는 결과를 얻기를 원하고, 안그러면 친구가 와서 “야! 너 대박났어.” 그런 소식이 들리기를 원하는 그 때에 문열고 처음만난 7살먹은 애가 “아빠! 나 처음 보지?” 한다면 이 결과는 예상했습니까? 예상 안했습니까? 예상 못했지요. 너무 터무니없는 예라서 그렇습니까. 전혀 예상 못했지요.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이 수시로 하나님이 있는가를 테스트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셔요. 물론 그 배후에는 악마가 그렇게 부추기거든요. 악마가 부추겨요. 이게 방금 극단적인 예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인간쪽에서 신이 있다는 그 쪽으로 나아갑니다. 나아가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쪽에서 자기 백성을 찾으러 하나님 쪽에서 일을 쉬지 않고 일을 개시한 거예요.
인간 쪽에서 자기가 구원받겠다고 하니까 어떤 결과를 예측을 하지요. 기도하거나, 헌금하거나, 전도하거나 하면 나중에 얼마 되어서 내가 천국에 가있을 것이다. 성경에 기름을 준비하면 신랑 올 때 문 열고 하면 문이 닫기도 할 때 인간들은 이 결과를 예측하잖아요. 예측하는데 이런 결과를 예측하는 이것이 O냐 아니면 X냐 어느 쪽이냐 하는 것은 엘리야가 제단에 누운 이걸 테스트 해보라는 말이지요.
지금 본인이 멀쩡하게 살아있다고 하니까 자꾸 천국 가는 예측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올 때는 바로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인간이 예측한 것을 피해서 와버려요. 이건 뭐냐 하면 이 자체를 지워버립니다. 인간이 예측한 구원을 치워버리는 방식으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건지십니다. 이게 바로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이에요.
구약에도 그 예가 나와 있지요. 엘리야가 죽을 때 엘리야도 예상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물론 예상 못했고. 엘리사도 예측 못했지요. 불수레와 불병거가 마중 나올 줄은 생각을 못했어요. 이건 주식투자하다가 애가 나타난 거와 똑같은 거예요. 그러면 엘리야가 미리 그것을 예측하지 않았겠는가, 엘리야가 미리 예측했다면 엘리야는 제단에 눕지를 않지요. 그냥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말씀만 전하고 나중에 말씀 전하면 주께서 나를 구원할 거다. 그 정도만 생각하는 거예요.
엘리야가 이 제단에 누우므로서 이쪽 엘리야라는 육신과 850명의 육신과의 연결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연결점이 완전히 끊어졌지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인간 구원하는 방식과 인간이 신에게 나아가는 방식이 애시당초 끊어져있는 거예요. 끊어져 있어요. 그럼 끊어져 있는 것을 어떻게 하는가, 끊어져 있는 것을 엘리야로 하여금 테스트하게 만들어버렸어요. 하나님께서.
‘죽고 나면 뭐 하나님계시면 구원하겠지.’ 이게 아니라 살아생전에 내가 있는지, 아니면 진실로 하나님이 계신지 그것을 테스트하는 상황 속으로 엘리야를 집어넣은 겁니다. 여러분들이 그 엘리야 제단에 제물 바치는 그 대목 얼마나 자신감이 있었으면 불이 와야 될 제물에 물을 양동이 12번을 집어넣었을까요. 그것도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비가 귀한 그 상황에서. 물을 해서 그 제물이 질퍽질퍽하게 채웠어요. 이제 불이 온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거예요. 온도가 한 45도 높아서 조그만 불씨가 있으면 확 불타오르는 그런 미미한 기대조차 의도적으로 날아가 버렸어요.
엘리야가 왜 그런 행동합니까. “봐, 내 말이 맞잖아.” 할 수 있는 어떤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어떤 것을 자른다는 말은 타인과 자기 사이를 자기 쪽에서 끊어버린 거예요.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거나 설득하거나 보여준다고 해서 이게 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존재하지만 나에게는 나의 하나님이 존재하지 나는 그 존재에 비해서 나는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엘리야가 이 시험을 통해서 보여준 겁니다.
구원받으라고 보여준 게 아니고 이 850명 구원받으라고 준 게 아니고 850명은 살아있어도 죽어있어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850명 다 죽여 버렸지요. 뭔가 있어야 애닮프고 슬픈 게 있는데 이건 살아있을 때도 아무 애닮은 것도 없고 죽는 것도 물론이고. 살아있을 때 아무 가치도 없는데 죽는 게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아무 의미 없지요. 이 사실을 엘리야가 먼저 알았던 거예요. 나는 하나님 없는 나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고 죽어도 그만이고.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엘리야가 이걸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테스트를 하나님 테스트를 자기는 흔쾌히 받아들인 거예요. 왜? 자기는 noting.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번 테스트 합격해서 구원받아야지.’ 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도 좋소. 왜? 주님이 살아계시니까요. 주님이 살아있으면 됐지. 왜 굳이 나까지 살아있어야 하느냐는 것이 엘리야 의식입니다.
이상의 날개 시집에 보면 나오는 것처럼 골목길로 13명이 쫓아가는데 한 아이가 무섭다고 그래요. 아이에요. 아이. 무섭다고 그래요. 애들을 골목 끝이 무서워요. 왜? 자기가 살아온 세계의 바깥세계기 때문에 무서워요. 그래서 항상 친근한 안의 세계에서 안정감을 누리려고 하는 게 아기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아기가 어른 돼도 마찬가지에요. 어른들도 바깥세계를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공황장애 비슷한 거예요.
어떻게 대체할 줄 몰라서 육신이 몸이 신경조직이 자동적으로 반응을 나타내는 게 공황장애 아닙니까. 평생 살아온 자기 방에서 공황장애를 일으키지는 않잖아요. 바깥에 나오면 난리 나는 거예요. 누구를 만나면 저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걸고, 그 사람이 이야기할 때 어떻게 답변해야 될지 몰라서 굉장히 당황스러운 것이 몸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이게 공황장애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렇게 말 잘하다가도 밖에 대중들에게 이야기하면 말을 더듬거리다가 삐직 삐직 땀을 흘리지. 찍지 마라! 해가지고 즈그 아빠보고 찍지마라! 우리 싸우는 거 찍지 마라! 카메라 울렁증이 있는가. 대인관계 이런 거. 이것은 뭐냐 자기 존재에 대해서 굉장히 그동안 집착해 있기 때문에.
대나무에 어떤 다져 넣듯이 콘크리트 다져 넣듯이. 이런 소리도 나요. 콩! 콩! 자기 면적에다가 자기 자신의 기억을 늘 다지면서 단단해진 기억을 새기는 그 보람으로 남은 생애를 사는 것. 편집증이라 해요. 편집증. 집착. 편집 증세라 해요. 정신병의 일종입니다. 집착하는 거예요. 편집증세의 특징은 뭐냐 하면 타인에게 보여주려 합니다. 타인이 있어요.
그런데 엘리야 같은 경우에는 뭐냐 하면, 타인이 없어요. 왜냐, 주님께서 나를 제거했기 때문에. 보여주고 싶은 남이 있을 때 비로소 내가 만들어지거든요. 구성되거든요. 어릴 때부터 그래요. 남들을 의식하면서 내가 서서히 조성되는 것이 이 두뇌가 조성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항상 타인이 있음으로서. 그래서 예민한 사람들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봐 미리 지레 조바심을 내고 벌벌 떠는 거. 신체에 증상이 손에 땀이 난다든지 손발이 떨린다든지 괜히 그게 무서워서 술을 드리킨다든지 아니면 큰 소리로 외친다든지 이래가지고 “나한테 쳐들어 오지 마!” 이런 거. “가까이 오지 마!” “쳐들어 오지 마!” “나 감당 안 돼!” 이런 거.
이에 비해서 사도바울이나 엘리야 이런 분들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못할 게 있기? 없기? 없기. 없는 거예요.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 심문할 때 본디오 빌라도 벌벌 떨고 있습니다. 왜냐, 백성이 없으면 자기가 그 자리에 총독의 자리에 유지되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을 지배하지만 그 타인에게 지배받는 거예요. 인간의 소유하고 있는 모든 지위라는 거. 왜냐, 남이 없으면 내가 없기 때문에. 남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비로소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요. 남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데 그 남이 눈에 보이는 인간이잖아요. 그런데 엘리야는 그 남이 누굽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에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 하나님이 타인이 되기 때문에 인간은 더 이상 타인의 자리에 없어요. 그 타인의 자리를 하나님이 몽땅 다 차지했어요. 마태복음8장에도 나옵니다. 백부장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께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게 아까 두 개의 노선. 위에서 내려오는 노선과 아래에서 올라가는 노선의 차이점이에요.
여기서 예수님에 의해서 내가 끌려가는 입장이라면 이쪽은 뭐냐 하면 내가 올라간다 할 때에 나라 하는 것은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 850명하고 웅성 웅성 따라서 같이 올라가고 있는 거예요. 남들이 만들어진 나를 구원하려고 할 때, 여기에 나오는 이 결과, 이 구원의 결과는 뭐냐 하면 ‘만인구원설’이에요. 만인구원설.
만인구원설이라 하는 것은 나만 달랑 구원 받으려 하니까 미안해서 못 견디겠다. 미안해서 못 견디겠다. “신이시여! 정말 자비가 넘치십니까? 그러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타인들, 우선 가족들, 식구들, 자식들, 내가 아는 모든 타인들을 내가 구원 받는 것처럼 구원해주소서!” 이리 나오지요.
이런 게 교회에 성당에 범람하지요. 이런 사고방식이. 그게 바로 바알과 아세라 우상 종교입니다. 그들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겁니다. 고집 피우는 거예요. 우리 엄마 천국 안 가면 나도 안 갈래. 이런 거. 뭐 땡강도 이런 땡강이 없어요. “내 사랑하는 자식 지옥 가면 나도 천국 안 갈래. 나는 자식 없이는 못 살아.” 이런 거요. 그러니 종교단체가 종교 시설이 얼마나 위험한 동네입니까. 정말 위험해요.
그러나 성경은 너무나 냉정한 거예요. 내가 건져지면 천국 가고, 내가 안 건져지면 지옥. 이러니까 여기서 내가 알아서 천국가는 사람한테는 그 이야기가 멘붕이 오는 거예요. 멘붕. 멘붕이 오는 거예요. 일단 성경 말씀이 나오니까 일단은 허겁지겁 믿씁니다. 하고 쌍시옷하고 일단 믿어봐요. 일단 믿어보는데 감당이 안돼요. 그 뒷 감당이 안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건지면 천국, 하나님이 사랑하면 천국, 하나님이 미워하면 지옥. 이게 뭐 성경에 나오니까 빼도 박도 못하게 이건 진리 맞잖아요.
진리 맞으니까 일단 내가 진리를 포섭하고 내가 갖고 있어야 내가 진리와 엮여서 구원받을 수 있는 예측이 가능하잖아요. 예측이.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측한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구원받잖아요. 그런데 그 내용이 나의 예측마저 발길로 차버린다면 그럼 어떻게 되는가요. 우리는 거기서 정리가 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엘리야의 이 시험을 우리보고 하라 하면 우리는 아주 천국 안가면 안 갔지 이런 식으로 안합니다. 안하는데 지금 이 시대에 주님께서 말씀으로 우리가 하기 싫은 내가 엘리야의 제단에 누워서 불이 떨어지나 시험하는 내가 진짜 거북스럽게 여기고 안하고 싶은 테스트를 매일같이 말씀으로 우리를 테스트하고 있어요. 지금도. 내가 원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아니에요. 주님의 구원 작업이 그래요. 주께서 하시는 구원 작업이 그래요.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 한 문장으로 적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매일같이 말씀으로 나를 죽인다.’ 그러면 나는 시체, 내 위에 말씀이 살아있음. 나는 죽고, 죽는 현장에 말씀만 살아있다. 예수님만 살아있다 이 말이지요. 그게 바로 성도가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는 방식이 하나님이 주신 이 말씀을 주시는 방식외에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내 쪽에서 구원받고자 한다면 우리는 지식으로 말씀으로 자꾸 알려고 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지식적으로 주시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개패듯이 패버려요. 말씀으로. 예를 들면 마태복음 7장에 인생에는 넓은 길이 있고, 좁은 길이 있다. 말씀 딱 줬잖아요. 그러면 나 좁은 길 갈래. 이리 나오겠지요. 나, 좁은 길 갈래. 야! 멋진 지식이네. 요 좁은 길을 갈래, 하게 되면 말씀 자체가 우리 형편을 알고 말씀을 줬기 때문에 “니는 좁은 길을 좋다마는 니 지금 대학생인 둘째아들 지금 전혀 이 말씀 관심도 없는데 니는 엄마가 되어서 비겁하게 니만 천당가려고 애는 모르겠다고 내팽겨칠거야?” 라고 그 말이 들어올 때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조치합니까. 내가 빡시게 애 붙들어놓고 마태복음7장 이야기하지. 이리 나오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애를 놓고 특별 과외시키는 의도가 뭐냐” 라고 묻지요. “그건 내 자식이니까 내가 데려가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데려가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자는 안 데려간다는 하나님의 원칙은 어떻게 됩니까? 여기서 충돌이 되지요. 마찰을 일으키지요. “니는 니 아들 데려간다고 고집부린다마는 내가 니 아들 사랑하지 않고 안데려간다면 너 어떻게 할래?” “그러면 내가 부화나지요. 나 삐치지요.” 그럼 주께서 이야기합니다. “니가 나를 테스트하는 거야? 내가 니를 테스트하는 거야? 똑바로 하자.”
테스트는 먼저 말씀을 주는 쪽에서 일방적으로 테스트하는 거예요. 말씀 받고 말씀가지고 테스트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주는 쪽의 취지를 완전히 모독하는 거예요. 말씀을 줬으면 그 말씀 자체가 테스트에요. 일단 말씀 받고 콜! 콜하고 어디 도박하는 것처럼 이건 좋은 말씀이니까 내가 몸을 바치겠습니다. 그거 안돼요. 여러분,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서 뭐를 판돈으로 뭐를 내놓았습니까. 베드로가. 주님 따라 가겠다고 뭘 내놨습니까? 자기 목숨을 내놨지요. 성공했어요? 실패했어요? 실패했어요. 안 받습니다.
그 뜻은 뭐냐 하면 니가 나를 테스트하는 게 아니고 내가 니를 테스트하기 위해서 상황들이 이루어진 거예요. 상황들이.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이 이렇게 하지요. “목사님, 그러면 저희가 어쩌라는 말입니까?” 어쩌기는. 파마하고 얼굴 살 빼고 그냥 사는 데로 살면 되지요. 왜냐하면 죽어도 파마하고 죽는 거와 안하고 죽는 거와 다르거든요. 시체도 좀 달라요. 그래도 시체이기는 마찬가지에요.
처음부터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나의 죽은 존재로 봐가지고 말씀으로 터치하면 살아나는 거예요. 터치 안하면 죽는 겁니다. 처음부터 살아서 살고 했으면 불공평할 건데, 애초부터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가 살려주세요. 하는 것은 자기 주체파악이 안 되는 거예요.
말씀이 와서 살려주게 되면 진짜 말씀에서 산 사람은 아,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아요. 나는 말씀 오기 전에 아무리 몸부림 만부림 쳐도 천국가기 위해서 교회에서 충성을 다해도 나는 죽은 자 맞구나! 왜? 이유는 뭐냐, 나는 내가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살아있어서 이 살아있는 것을 천국까지 올려 보내기 위해서 온갖 것 다 찾아다니고 온갖 유튜브 다 보면서 나 하나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몸부림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자기가 책임져야 된다는 것. 이게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최후의 무서운 모험을 안 하려고 합니다. 그저 최선의 노력을 하지 제단에 그냥 누워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왜? 내가 할도리 내가 하면 되지 왜 내가 죽은 자도 아닌데 제단에 이미 죽은 자로 손을 펼쳐야 되는가, 사지를 뻗어버리고 그냥 죽은 인간 죽여주옵소서. 왜 그럴 필요가 뭐가 있느냐, 이리 나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누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엘리야가 바친 소가 누웠지요. 송아지가. 그런데 엘리야가 누운 거예요. 왜? 자기의 전부와 바꿔치기 했으니까. 엘리야가 누운 그 제단은 원래 인간이 그래야 될 그 자리였습니다. 원래 인간이 그래야 됐어요. 그래야 되는 그 자리를 주님께서는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십자가에 그 자리 십자가 자리에 주님께서는 그냥 매달립니다. 왜? 원래 이래야 되니까. 죄 있는 인간은 죄 있는 인간이 가야 될 원래의 자리에 최초로 예수님이 그 자리에 올라갑니다.
예수님이 올라간 그 십자가 자리에 옆에 누가 있습니까. 양쪽에 강도 둘. 강도 둘도 원래 그 자리에요. 원래 올라갈 자리에요. 지가 강도 안 돼도 그 자리 가야 돼요. 지가 국회의원 되고, 바리새인 돼도 올라가야 되고, 농부여도, 어부여도, 그 자리에 가야 되고, 모든 인간이 가야 될 자리. 심지어 태어난지 2개월만에 죽어도 그 자리에 가야 될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죄가 인간을 지배하는 그 자리. 십자가 자리.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자리.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자리 이 자리가 바로 나의 자리였던 겁니다. 나의 자리였어요.
왜 그동안 이걸 몰랐을까. 왜 십자가 매달리는 것이 내가 본래의 내 자리에 합당한 자리인 것을 왜 모릅니까. 누구 때문에? 그놈의 나를 둘러싸고 태어날 때부터 둘러 쌓여있는 그렇고 그런 타자들. 타인들 때문에 남들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들이 하루 하루 스트레스 받는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남들 때문에. 남들이 듣던 풍문으로 들었소. 그 풍문, 그 평가, 시선, 아이고 지긋지긋한 거.
그러면 교회의 의미가 뭐냐 보기 전에 요한복음 20장 21~22절 한 법 봅시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아~~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라. 새로운 타인이 등장했습니다. 기존의 알던 태어나면서 있던 부모, 형제 아니에요. 새로운 타인이 등장했어요. 성령을 받으라. 내가 너희에게 성령을 준다는 거예요.
이거 미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굳이 우리가 우리 집 마당 뒤에다가 제단 만들어서 옷 벗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필요 없어요. 그런다고 오는 그 엘리야의 시대는 구약 시대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 아들 바칠 때 옆에 어린 양 준비한 것은 구약시대에요.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에서 제물 바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그 제물을 다 태워버리는 영광이 나타난 그 시대는 구약시대입니다.
신약에는 뭐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는데 이 갭이 너무 커요. 주님은 이야기하는데 못 알아들어요. 우리가. 제자들도 못 알아먹고.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어요. 왜? 내 쪽에서 천국을 가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율법 있지요. 기적 있지요.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한다. 율법 있지요. 율법이 시키는 대로 다 해. 안식일 지키고, 할례 행하고, 다 해요. 그게 다 예수님 오심을 전부 다 모독하고 그 취지를 무산하는 배후에 악마가 그 짓하고 있었던 겁니다. 악마가. 마귀가.
마귀가 안 보이니까 그들은 말도 못하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만나서 갭(GAP)을 확인한 거예요. 너희들은 도저히 내 쪽에 건너올 수가 없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안돼요. 베드로가 목숨 바쳐도 안돼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냐 하면 내가 너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한다. 한 사람은 아니지만, 끝까지 사랑한다. 하시고 22절에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셨다. 했지요. 딱 생각나는 게 뭐냐, 창세기 2장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 때 흙으로 만들었지요. 묻습니다. 흙이 인간입니까? 아닙니까? 그 만든 흙이? 사람 모습으로 만든 흙이 인간입니까? 인간 아닙니까? 인간 아니에요. 추가적으로 뭐가 구비되어야 됩니까? 속에 하나님의 호흡이 있어야 이게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제자들에게 주심으로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뭐가 없다고 확인되었습니까? 그들은 성령 없는 채 살아있다고 우기는 족속들입니다. 성령이 없는. 그럼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뭐냐, 성령 없는 인간들이 하나님나라 가려고 어떤 분투노력하는지 우리가 파악하면 되지요. 그게 바로 파악하는 구심처가 교회입니다.
오늘 강의 교회 처음 나왔지요. 교회는 뭐냐, 성령 받은 마지막 때 성령 받은 종말의 공동체로서 그럼 그들은 구원받는가, 구원받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구원받는 게 목적이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는 일을 연속하는 게 목적이지요. 왜? 예수님도 성령 받았으니까.
예수님 성령 받고 일할 때 다른 사람 알아들었어요? 못 알아들었어요? 못 알아들었지요. 제자들도 못 알아들었어요. 갭(Gap)을 느끼는 거에요. 갭. 주님께서 교회에게 성령을 줌으로서 이제부터 성령이 성령받는 교인이 성도들이 교회니까요. 세상에 나가서 외치고 이야기할 때 그들은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지요.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 하면, 교회가 성도가 된 사람이 성령 오기 전의 상황과 똑같은 상황을 우리로 하여금 남은 생애동안 맞닥뜨리게 하는 겁니다. 나도 저랬었어. 나도 저랬어. 어떻게 내가 성경 보는 태도하고 똑같아. 똑같을 수밖에 없지요.
인간은 누구나 그게 한계니까 똑같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전하는 하찮은 정말 자기가 하찮은 걸 알았지요. 우리 노력으로 구원받은 게 안됐으니까 하찮은 거잖아요. 영어로 하면, Poor Things. 하찮은 것. 다른 번역으로 하면 가여운 것. 엠마 스톤이 주연해서 여우주연상 받은 영화에요. 제목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가련한 것들.
가련한 것들이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마태복음 5장3절, 심령이 가난한 자들, 가난이거든요. 심령이 가난한 자들. 마음 꼬라지가 굉장히 가난해요. 마음이 너무 가난해요. 어느 정도 가난하냐, 마음이 아무것도 없어요. 꼭 어린애 같아.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내거라고 내세울 게 없어요. 행동도 지 맘대로 안 해요. 니 속에 말하는 자가 마태복음10장에 보면 니 속에 말하는 자가 니가 아니고 니 속에 성령께서 말하는 대로 말하라. 그러니까 그 말은 우리 속에 내거라는 게 아무것도 있기? 없기? 없기.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어린애 같이. 공급해 주는 것만 내놓는 것이 어린애잖아요. 주는 것만 내놓는다고요.
어떤 의미에서 어린애 같다는 것은 영적인 충동성밖에 없다고 보면 돼요. 여자 속에 어린아이 몸을 집어넣으니까 이 여자는 어린아이같이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거예요. Poor Things 영화에 초반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점점 더 지옥같은 세상을 만나서 어린아이의 틀을 벗어버리고 세상에 성공한 사람의 여자의사로 변모해가는 자아성장에 관한 이야기. 성장해 가는 거예요. 충동을 자제하고 이성적으로 변해갈 때 그거 누가 왔다! 입니까? 악마가 됐어! 이제는 뭘 추방할 수 있어요? 원래의 자리가 없어도 괜찮아요. 원래의 자리가 없고 현재 내가 만들어나가는 자리가 바로 원래부터 내 자리였어야 한다는 그 생각에 완전히 몰두하는 겁니다.
내 자리는 내가 하기 나름이다. 라는 뜻이에요. 원래의 자리라는 것은 이미 인간의 이성적이 되면 끊어졌어요. 그런데 거기다가 성령받은 예를 들어서 사울이었는데 성령받고 난 뒤에 바울됐지요. 빌립집사 성령 받았지요. 스데반집사 뭐 받았어요? 성령 받아서 얼굴이 천사같이 됐다 했지요. 그 사람이 와서 뭘 전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다. 살아나신 분이다. 그분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다.” 라는 말을 저쪽에서 우리에게 건넬 때에, “나도 옛날에 교회 다녀서 다 안다.” 이리 나올 거예요. 아니면 말은 그렇게 하지만, 느낌상 굉장히 생소한 거예요.
제단에 누웠는데 하늘에 불 떨어졌다. 이건 뭐 엘리야 때 나도 알지. 알기는 아는데 실제로 엘리야가 그렇게 되면 너무 생소해도 너무 생소하게 느끼겠지요. 생소하지요. “뭐야? 저거 괴물이야? 내가 안 받은 성령 지가 왜 받지? 저거 미친 거 아니야?” 물론 이런 대우를 예수님도 받았어요.
그 받은 대우를 똑같이 받을 수밖에 없는 게 교회입니다. 왜? 예수님이 받았던 성령을 그들도 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내게 뭐가 이익이냐, 앞으로 내가 잘될 것이다. 못될 것이다. 라는 그 자체에서 이미 떠났어요. 없고, 주께서 어떻게 나를 다룰 것인가. 예수님 하신 일이 말씀으로 굳히고 말씀이 우리를 잠자고 있는 우리를 깨운다든지, 까불고 있는 촐랑대고 있는 우리를 쳐가지고 다시 말씀대로 변화시키는 그 기능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것처럼 성령 받은 사람도 동일한 말씀을 하면서 못 알아듣는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기는 겁니다.
그러면 이 갭은 천국과 갭은 완전히 끊어져 있음이죠. 그 끊어져 있는데 이상하게 전했던 그 말에 의해서 옛날에 내가 말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갑자기 그게 진리로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들입니까? 그건 바로 주께서 긍휼 입을 자를 긍휼히 건지시고, 버릴 자를 버린다는 일관된 하나님의 말씀이 하찮은 아무것도 아닌 poor things 우리를 통해서 우리를 수단으로 해서 그걸 현실화시켰다, 이리 보시면 됩니다. 그게 우리의 사명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늘 poor things 하찮은 것, 아무것도 아닌 것, 가엽지는 않아요. 하여튼. 아무튼 하찮은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서 그냥 평소대로 사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뭐 자식 자랑하고, 집안 자랑하면 “니도 이야기해봐라. 니도 잘나갔잖아. 어느 대학 나왔노?” 하면 “나? 나는 뭐 죄인인 거 외에는 자랑할 거 없다.” 자랑할 거 밖에 없다 하면, “아, 미친 거 같아. 그치? 광신도인가?” “니가 스스로 니 존재를 확인해봐.” “안 해” “니 그러면 내일 모레도 살아야 되잖아.” “나, 안 살아. 그거 내 소관 아니야.” “뭐지? 저거. 저 괴물은 뭐지?” 스데반 집사가 그래서 돌 맞아 죽은 겁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40314b고전15장56절(위험한 시험)-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밑에서 7번째 줄에, 아까 이야기한 것은 29페이지 올 때까지 이야기 다 된 거예요. 29페이지 밑에서 7번째 줄에 “성령이 창조물 위에 속하여 활동하는 한 영광은 승화된다. 요엘2장28절에서 32절에 보면 마지막 때에는 성령이 만민에게 부어주는 때이다.” 왜 마지막 때에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주는가, 왜 미리 성령이 오면 안 되는가, 왜 마지막 때냐, 여기 마지막 때가 나오잖아요.
이게 마지막 때를 이걸 새로운 때라고, 새로운 세대(마지막 때=새로운 세대)라고 이해하시면 쉽습니다. 새롭다는 것.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새롭게 하면 고물은 자동적으로 등장하겠지요. 뭐가 고물이냐, 뭐가 새로운 것이냐, 이 새롭다는 것은 의외로 마지막 때라고 하지만, 처음의 취지가 다 공개되는 때. 이게 마지막 때에요. 처음 취지가 공개되는데 어떤 단계에서 완성단계에서 다 드러나는 겁니다.
인간이 무엇이며,
땅이 무엇이며,
천국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누구시며,
이게 성령이 오시면 이게 처음에 잠복돼 있던 것들이 마지막 때가 되면 다 이게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방금 이런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러면 그림을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시대를.
처음에는 이게 마지막 때에서 처음 취지가 다 드러나기 때문에 처음에는 뭐냐 하면 잠복돼 있다. 숨어있지요. 잠복돼 있으면서 현실화되는 거죠. 현실화 되는 게 뭐냐 하면 옛 세대가 돼요. 옛 세대. 현실적으로 인간의 역사. 이걸 인간의 역사로 보지만 개인적으로 봐도 우리의 잠복돼 있는 인간성이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현실화되지요.
그리고 난 뒤에 마지막 때는 뭐가 와야 마지막 때라 했습니까? 요엘서에서 무엇이 와야? 성령이 와야. 성령이 오게 되면 마지막 때가 돼요. 그리고 마지막 때에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이 오셔가지고 모든 것이 해같이 번쩍 번쩍 빛난다고 봅시다. 빛난다. 그림이 좀 조마합니다만. 이게 옛 세대와 구분되기 위해서 영광스럽게 그려봤습니다.
<이스라엘의 경로 절차 반복>
하나님 → 이스라엘 → 예수 그리스도
(그림은 첨부파일에 있습니다.)
이게 번쩍 번쩍 빛나는 거예요. 옛세대가 성령을 받아서 새세대가 되게 되면 이게 처음 잠복돼 있던 것이 끝하고 이게 내용이 사실은 이게 동일해요. 이게 동일해지거든요.
그러면 동일해지면 옛 세대는 뭐냐 하면 이것은 잠복되어있는 것과 대비가 되고 충돌이 되고 대립이 되는 거예요. 이걸 뭐냐 정신병이라 해요. 정신병. 옛 세대는 전부 다 정신병이에요. 잠복되어 있는 것. 성경적 용어로 하면 전부 다 죄가 왕 노릇하고 있다. 죄가 철저하게 인간의 정신을 과묵하게 짓밟고 있다. 죄가 아닌 것은 아닌 것을 인간이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가 없다. 오직 죄만 되는 것. 죄악된 것만 나오는 행동, 말, 모든 것, 이 모든 것이 바로 옛 세대입니다.
Poor things이라는 그 영화에 엠마스톤이 나오는 그 영화에 한 장면을 보게 되면 이게 처음에는 충동적이라서 애가 막 울어요. 애가 우니까 애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우는 애보고 막 집어던지고 욕하고 울지 마라고 간난애보고 울지 마라고 이렇게 폭력을 행세하려고 달려들어요. 그러다가 세상 구경을 하면서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드리아가 어디있느냐 하면 이집트 지중해 그 동네에 가는데 배경이 1800중반이에요. 빅토리아시대때에. 가니까 그 아프리카 이집트 애들이 너무 못살아서 애들이 굶어죽는 것을 유람선 타고 밑에서 보면서 막 우는 거예요. 애들이 불쌍하다고.
애가 시끄럽다고 그렇게 집어던지고 욕해놓고는 막상 가난한 애들이 울고불고 먹을 게 없어가지고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 배에서 딱 보니까 땅에 가난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주인공이 너무 슬퍼서 통곡하는 거예요. 가진 재산을 전부 다 다줘가지고 좀 도와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건 뭐냐 하면 뭐가 없느냐 하면 자기 정체성이 놀아나고 있어요. 죄로부터. 죄로부터 놀아나고 있는 거예요.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굴곡이 심해요. 도대체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니고 중간도 아니고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잠복돼 있다. 예시되고 마지막 완성돼 있다. 요 세 가지의 요건을 한꺼번에 집어넣은 나라가 등장합니다. 그 나라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벌써 이스라엘 보니까 정신병이 들어있어요? 없어요? 들어있지요. 요 세 개를 세트를 해가지고 만든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27페이지에 보면 그림 하나 나오지요. 창조주 하나님 → (첫째단계)이스라엘 → (둘째단계) 예수 그리스도지요. 이 말은 하나님에서 예수 그리스도 올 때까지 뭐를 경유해야 되느냐, 이스라엘이라는 그 요소 이스라엘이 품고 있는 개념들, 개념들을 거치지 아니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올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 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아닌 유대인이 아닌 한국사람, 필리핀사람, 일본사람도 이걸 거쳐야 되는가, 거쳐야 돼요. 모든 이방인들도 이걸 거쳐야 되는 겁니다. 요 과정을. 하나님에서 바로 예수님으로 올 수 없어요.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거쳤는가, 바로 이스라엘에게 뭘 갖고 있는가, 율법을 갖고 있거든요.
이스라엘에게 율법적 기능이 이방인에게는 무엇이냐, 양심기능이 되는 겁니다. 자, 이방인들에게 양심은 뭘 만들어내는가, 우상을 만들어내요. 그리고 선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지옥도 만들어내요. 이스라엘이 만든 걸 다 만들어냈어요. 애가 우니까 시끄럽다고 육신이 본능적으로 했던 그 주인공이 알렉산드리아 18,19세기에 얼마나 힘들었어요. 아프리카 지금도 못 살지만. 굶는 아이 굶어 죽는 걸 보고 속에 뭐가 일어났습니까.
긍휼함과 불쌍히 여김이 막 나오는 거예요. 성선설. 인간은 착하다는 것. 인간은 기본적으로 착하고 양심적이라는 것. 비록 교회는 안 나가지만 내 마음 자체는 내가 워낙 착해가지고 나중에 하나님 만나면 내가 뭐 조금 실수한 거 있더라도 미미한 거고 니가 워낙 착한 일 많이했구나! 시집와서 동서들한테 잘해주고 조카 대학 갔다고 공납금도 턱 주고. 그 병든 시어머니 시아버지를 40년동안 봉양하고 남편 백수될 때 혼자서 공장 다니면서 손모가지 다 날아가면서 남편 험담하지 않고 남편 자존심 안 건드리게 하면서 “당신 걱정하지 마! 당신 건강하기나 해줘.” 이런 식으로 열녀상 받아야되겠지요. 그렇게 다 해주고.
자기가 자기 보기에도 이렇게 착한 거. 이건 바로 무슨 심이냐 하면 천심이다. 천심(天心). 마음심, 천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늘에서. 하늘의 하나님의 마음이 나한테 꽂혀가지고 내가 평생을 살아도 일관된 천심으로 살아왔다. 이게 바로 이방들에게 작용하는 율법적 기능입니다.
그런데 이 양심이라 하는 것은 문제점이 뭐냐 하면 이게 문자로 되지를 않아가지고 상황 따라서 양심 막 동원할 때 있고, 어떤 때는 양심을 지가 막 변경을 해요. 자기 자존심 상할 것 같으면 양심을 쉽게 변경합니다. 그럼 딜레마에 자주 빠지고. 그런 심리적인 테스트 많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차를 운전하는 운전사가 노선을 바꾸면 유모차 끌고 가는 애기와 엄마는 살 수 있는데, 노선을 안 바꾸면 멀쩡한 5명 죽인다. 어느 쪽으로 방향을 틀 것이냐, 이런 이야기. MBTI 심리조사할 때 그런 거 더러 나오지요. 그런 게 다 마귀 짓인 거예요. 전부 다. 선악지식으로. 악마가 왕노릇한다. 내가 왕노릇한다. 선악지식이 왕노릇한다. 양심이 왕노릇한다.
율법이 우리에게 왕노릇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그걸 율법이 했다는 아주 구체적인 것은 이스라엘 아니면 이방나라는 왜 죽는지 이유를 몰라요.
고린도전서15장56절 봅시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지금 이 대목을 딱 보면서 여러분이 뭘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사망은 실제로 있고 죄가 실제로 있고요, 율법도 실제로 있다는 겁니다. 율법과 죄와 사망도 있고 그 다음에 추가를 하세요. 뭐가 있느냐 하면 죄와 사망과 율법에 피해 입은 우리 자신도 실제로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방인에게는 자기만 있고 뭐는 없느냐 하면, 사망도 없고, 죄도 없고, 율법도 없어요. 자기 안에 자기 양심이 있지만, 양심은 그 때 그 때 달라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고, 중요한 것은 자기 육신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방인들이 자기자신을 파악한다든지 세상을 파악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너무 어설퍼요. 너무 흐지부지해요. 그 구조가 촘촘하지를 않아요. 체계가 없어요. 중구난방이라 그냥.
그런데 이스라엘은 정확하게 인간은 왜 죽는가, 인간이 있다. 인간이 죽는다가 아니라 인간이 있다. 사망이 있고, 죄가 있고, 율법이 있는 겁니다. 인간이 죽는 게 아니고 사망이 있다는 거예요. 사망이. 물론 악마의 대명사지만. 사망이 있고, 죄가 있고, 악마의 지시가 있고, 율법이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배제되고요, 악마와 하나님과의 전쟁이에요. 이게 정확한 거예요. 유교 공부했고, 철학 공부했고, 과학 공부한 사람들 니 마음속에 뭐가 있나? 하면 나, 양심있다. 이리 하거든요. 양심있는 사람들 국회의원 나와 가지고 국회의원하는 거 보세요. 양심이 있는가. 자기 자리만 도모하지 양심 있겠어요?
로마서7장에는 이리 되어있습니다. 이방인에게는 양심이 있다. 있는데 지더라. 누구한테? 자기 속에 있는 죄한테 져버리는 그런 양심이 있다. 죄가 뚝! 뭐라고 하면, 양심은 예! 하고 늘 굽신거릴 수 있는 대상이 바로 인간이고 인간의 양심이라는 겁니다. 율법적인 기능은 있는데 그 율법적 기능이 진짜 율법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율법의 취지를 온전하게 만족시킬 수가 없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해요. 쥐어 패는 거예요. 좀 맞아야겠다는 겁니다. 뭐가? 말씀이. 율법이. 봐주소. 하는 게 없어요. “봐주세요. 최선을 다했지만 상황이 그리 되어서” 없습니다. 무조건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주어지는 것은 저주밖에 없습니다. 이게 정확한 거고 명확한 거예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의 장점이라고 사도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보다 나은 점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취지와 하나님의 심판의 뜻을 그들만이 알았고, 그리고 그들은 심판대로 그 나라가 나기 나라가 망해버렸다는 겁니다.
사람이 실제로 있다는 것은 그 위에 56절에 한 번 보세요. 55절 있지요.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 말 자체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 보통 상식으로 말해서 사망이라 하는 것은 없고, 내가 죽는 그 사태를 사망이라고 해서 사망이 실제로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숨 쉬다가 끊어지는 그러한 현상을 표현할 때 사망이라 하거든요. 돌아가셨습니다. 가셨습니다. 님은 갔습니다. 요게 사망이잖아요.
그런데 55절에 보면 사망이 마치 누구 대상이 있는 것처럼 대화 상대가 돼요. 사망아! 너 언제까지 나를 괴롭히느냐? 나를 이길래? 대화의 상대가 되는 거예요.
54절에는 더합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되어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말씀 자체가 사망은 인간에게 필연이고 빼도박도 못하고 반드시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말씀의 고마운 점은 그 인간을 이기는 사망을 말씀이 이긴다는 겁니다.
어제 수요일날 그런 말씀드렸지요. 생명만이 사망을 이기기에 오벳에돔은 그 무시무시한 언약궤를 자기 집에 너끈하게 모실수가 있는 거예요. 자기가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모실 수 있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면 비로소 너희들은 생명의 보관함이 될 수 있다. 보관할 수 있다. 요한복음6장에서 사람들이 오병이어 떡 주니까 좋다고 와가지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은 거예요.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내 쪽에서 출발해서 천국에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하나님의 일? 어떻게 해야? 나를 믿는 것이 아버지의 일이다. 나를 믿는 것이. 왜? 니 대신 내가 일을 다해주니까. 예수님이 대리자이거든요.
“내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버지가 보낸 자, 나를 믿는 것이 아버지의 일이에요. 이건 아버지와 인간 사이에 사망과 죄와 율법에 의해서 끊어졌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방인들은 그걸 모르는 겁니다. 뭐라고 합니까? “천심이다. 천심. 나같이 양심 바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실수 없다는 게 아니야. 나는 항상 착함을 추구하면서 살아온 사람이다.” 이리 주장한다고요. 조폭도 그런 이야기해요. 조폭도. 조폭도 뭐라고 합니까? 차카게 살자. 차카게 살자. 차카게 살자 해놓고는 돈 다 떼어먹고 지는 짜장면 세그릇 주고. 짜장면밖에 안 주십니까. 내가 누군지 몰라? 내가 넘버쓰리야. 그러다가 마동석한테 얻어맞고.
인간세계에 경쟁이라는 거. 경쟁관계. 치열한 생존 경쟁 관계는 차카게 사는 사람이 대우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미 확정되어 놨어요. 차카게 사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그런데 점차 그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복을 받았기에 차카게 산게 맞다라고 바뀌어요.
그래서 부자 청년이 왜 모든 재물을 포기할 수가 없느냐 하면, 착하게 살던 증거물이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그거 버리면 남들같이 부자가 아니잖아요. 부자가 아니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뭐 착해도 소용없네.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켜도 소용없네. 우리하고 똑같네. 십계명 대충 지킨 우리하고 똑같네. 들 착하네.” 하면서 대중들은 어디로 가느냐 하면, 보다 착하게 사는 사람 찾아갑니다.
삼성 이재용, LG그룹, SK, 전부 다 사람들은 뭡니까? 부러움의 대상이지요. 복을 받았는데 왜? 분명히 우리가 모르는 착한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부인들이 전부 다 뭡니까. 인물이 착해요. 전부 다. 이뻐.
바로 여기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줌으로서 이스라엘 속에 뭐가 있는가 하면, 전쟁이 정신병 같은 이스라엘 내부에서 전쟁이 일어나면서 이것은 진짜 나중에 온전한 천국갈 사람을 전쟁을 통해서 뽑아내는 방식을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약간 더 난해한 이야기를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자, 이스라엘의 특징은 다른 이방종교와 다른 특징은 뭐가 있다 했습니까? 율법이 있다. 율법이 있음으로서 인간은 왜 죽는지, 왜 자꾸 위반하는지, 인간은 왜 자기 뜻대로 안되는지, 그것은 율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 거예요.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줌으로서 이스라엘은 죄인이다. 첫 번째 죄인이다. 두 번째, 그런데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망하기 전까지는 분명히 죄인인데 불구하고 끈덕지게 끌어가는 게 있지요. 끌어가는 것. 죄인인데 그들로 하여금 주께서 사랑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 말고 1번은 율법이라면, 2번은 뭐가 되겠어요? 율법 말고니까 율법외가 되겠지요. 율법 외에 뭐가 주어진다? 사랑이 주어지지요. 그런데 사랑은 어디서 나오는가, 율법이 완성할 때 사랑이 주어져요. 완성했을 때. 로마서7장에 그런 게 나옵니다. 율법이 완성되게 되면 남편이 있을 때 간음죄라도 남편이 죽어버리면 더 이상 간음죄가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준 것은 성도를 통해서 무엇을 구현하기 위함입니까? 율법의 완전함입니까? 사랑입니까? 같은 말이지만. 뭡니까? 사랑이 되는 거예요.
사랑은 반드시 뭐냐 하면 사랑은 이웃을 발생해요. 이웃 발생. 사랑은 자기 사랑이 아니고 사랑할 이웃이 발생하면서 그 이웃이 구원받는 사람이 돼요. 이웃이. 예수님 백 믿고 구원받는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본아들 백믿고 남의 자식인 우리가 양자가 되는 거예요. 그 둘 사이의 관계가 뭡니까? 율법의 완성이며 그게 뭐가 돼요? 사랑이 되는 거예요. 사랑이.
그러니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저주받아 망해가면서 어떤 면이 나온다?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을 드러내겠지요. 이 사랑은 율법 외니까 어느 쪽이냐 하면 선지자 쪽에 있지요. 그러면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것은 어느 쪽이냐 하면 제사장 쪽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상식적으로 다 아니까 어렵게 하면 제사장의 기능은 구멍 뚫기. 또는 구멍 내기. 구멍 뚫어서 구멍 내기. 우리 속에 구멍을 뚫어버리는 거예요.
왜냐 하면 성전 자체가 그렇고 성막 자체가 그러니까요. 성전은 뭐하는 용도? 제사용도. 모든 율법의 초점은 어디에 있다? 제사에 있지요. 제사를 지내면 거기에 일반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습니까? 못 들어옵니까? 못 들어오지요. 그러니까 죄인은 어디 밖에 서야 돼요? 죄인은 성전 바깥에 있어야 돼요. 성막 안에 못 들어옵니다. 못 들어와요.
그러면 죄를 지었다는 말은 안에 저주요소가 발생했다는 말이고,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내 죄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내 대신 양을 맡겨놓으니까 양이 제2의 나가 되지요. 그 양은 에헹~ 에헹~ 하면서 끌려가는 거예요. 어디까지 끌려갑니까? 제단에 가서 홀라당 죽어버려야 돼요. 하나님 보시기에 정확한 나의 팔자요, 나의 운명입니다. 타로점 그런 거 보지마세요. 점치고 그런 거 하지 마세요. 우리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어요. 우리는 죽어야 돼요. 우리는 죽어야 됩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 안에 우리는 사망을 임신해야 돼요. 저주를 임신해야 되고, 우리 태에 저주와 죄와 사망을 임신해야 돼요. 그것 때문에 율법을 준 거예요. 그리고 죄와 사망에 대해서는 우리가 손 댈 수 없습니다. 일종에 자아가 육신이 있다면 내가 여기 있는 자아 안에는 비워있고 나머지는 뭐냐, 내 자아고 같은 말인데 자아에 권력이 미치는 영역입니다. 내 영향력이 미치는 능력이 요거 빼놓고 다 있어요. 그림? 안에는 구멍이 있어서 손 못 대요.
죄와 사망에 대해서 아무리 훌륭하고 똑똑하고 철학박사, 국회의원이라도 자기 죽음에 대해서 자기가 손 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대요.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자기가 어떻게 처리합니까. 죽음이 더 센데요. 애써서 살았다, 가 아닙니다. 죽으면 아무리 애쓴 것도 일거에 전부 다 무용지물이 돼요. 오늘 죽는다면 지금 살려고 애썼던 것이 다 허사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핵심은 진짜 주도권은 뭐냐, 죄가 나를 주도하고 있는 겁니다. 이걸 율법의 제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거기서 제사장이 활동하는 여기서 뭘 주느냐 하면 용서, 죄사함을 줘버려요. 비어있는 곳에 어린양의 피가 들어와서 이 비어있던 곳에 빈곳에 하나님의 죄사함이 들어와 버리면 우리가 내가 장악하고 있는 내 행위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진짜 알갱이는 뭐냐, 주님의 죄사함이 사랑이 우리의 내부를 차지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이 율법을 통해서 이 제사 성막 제사가 있지만, 이스라엘 전체라면 중앙에 뭐가 있습니까? 성전이 있고 또는 성막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보게 되면 성막으로 모인다 되잖아요. 그런데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중앙에서 파급이 되고 퍼지게 되면 나의 삶이 뭐가 된다? 나의 삶이 곧 성막의 삶이다. 성막의 활동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삶이다. 같은 뜻입니다. 같은 취지가 돼요. 그렇게 될 때 여기서 뭐가 일어나는가, 바로 전쟁이 일어납니다. 전쟁.
제사장이 제사직을 하는 것은 구멍 둟기고 그럼 성경에는 제사장 직능 말고 또 하나의 중요한 직능이 있어요. 그게 뭡니까? 왕입니다. 왕. 왕+제사장, 이게 하나님의 언약의 원판이라 하는 것은 창세기14장에 나오는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왕이요, 제사장이기 때문에 그게 원판이 되고 이걸 증거하는 것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합해서 왕과 제사장이 되는 거예요. 기본은 왕과 제사장이 기본입니다.
왕과 제사장은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기름 부은 자. 그리스도라 이야기해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 속에서 제사장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었어요. 제사장을 통해서 죽어 마땅한 것. 그러면 안에 채우는 것은 왕이 우리 안을 채우는 겁니다. 어떻게 채우는가, 그 채우는 방법은 굉장히 간단해요. 전쟁, 골리앗. 다윗 전쟁.
골리앗은 키가 3m 가까이 돼요. 어떤 사람은 2m70Cm다. 덩치 큰 3m. 덩치가 온전하게 체격을 갖춘 3m짜리하고, 그것도 소년 다윗과 전쟁한다. 싸운다. 그것도 1:1로. 1:1로 붙었다. 누가 이기겠습니까? 당연히 골리앗이 이기지요.
생각해보세요. 소년 다윗이 나오니까 저 블레셋 쪽에서 “야, 우리도 선수 교체. 없나? 10살짜리 없나?” 이리 보냈습니까. 우리 정정당당하게 이랬습니까? 아니지요. 골리앗을 보냈던 것은 여기 블레셋 사람이나 여기 마주하고 있는 사울왕 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모두 다 골리앗보다 더 힘세고 이길 위인이 없다는 것을 전부 다 그들은 다 인정하고 있는 입장이에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말하는 것은 이번 전쟁은 무슨 전쟁이다? 하나님의 전쟁이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의 전쟁은 뭐냐 하면 이 강한 자가 누구한테 진다? 약한 자에게 진다.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긴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전쟁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의 가문입니까? 골리앗 가문이에요? 다윗 가문이에요? 다윗 가문이지요. 다윗 가문에 속했다는 말은 약한 것으로 뭘 이긴다? 세상의 강한 것을 이긴다는 그 원칙을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제일 마지막에 나와 있어요. 13장4절,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할 수 있는 모든 힘은 예수님께서 다 빼야 했던 거예요. 저건 뭐 인간의 힘이다. 저건 하나님의 힘이다. 일체 그런 말이 안 나오도록 poor things 너무 너무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로까지 내려가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왜냐하면 이 모든 인간세계는 죄와 사망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악마가 지배하기 때문에 강한 자가 이긴 자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 이게 진리처럼 이렇게 확산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거기에 이스라엘도 블레셋도 거기에 모두 동의하는 바에요.
그래서 인간 구원은 인간이 악마의 주도권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없어요? 벗어날 수 없어요. 왜? 악마는 강한 자가 복 있는 자고, 강한 자가 승리자고, 강한 자가 축복받은 자고, 강한 자가 하나님 편에 서있는 자라고 우리에게 계속해서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강한 자라 할지라도 율법한테는 진다. 율법의 뜻은 두 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제사직과 왕직이 있어요. 제사직은 레위인들이 하는 거고, 어제 수요설교에서 다윗 족속 따로 아내 따로 나단 족속 따로, 레위 족속 따라, 시므이 족속 따로 있지요. 다윗과 나단은 왕족이에요. 레위 족속과 시므이는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체계가 12지파가 있더라도 항상 핵심체계는 왕직이냐, 제사장직이냐, 그 두 개가 결합해서 이스라엘이 돌아가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기능은 반대에요. 레위인은 우리를 후벼파는 거예요. 십자가는 레위 언약에 의한 제물이고 희생물입니다. 십자가가 찾아왔다는 말은 우리의 내부를 구멍을 뚫는 것, 후벼 파는 거예요.
우리가 양심 있는 것, 최선을 다했노라. 나는 나름대로의 성실히 살았노라를 완전히 말씀이 들어와서 전부 다 두더지가 굴 파듯이 완전히 다 파먹어버려요. “착한 거 있나? 착한 거 한 거 있어?” “없습니다. 나, 죄인입니다.” 이렇게 만드는 거예요. 죄인이라고 인정한다고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이제는 그 인간으로 하여금 혼란케 했고, 인간으로 하여금 악마에 받도록 만든 그 힘, 권력, 강한 것, 센 것, 그 센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율법이 더 세게 전쟁을 해서 승리를 해야 되지요. 그 승리의 결과가 하나님께로 돌아갈만한 전쟁이 일어나야 되지요. 승리했는데 내 승리다. 이리 하게 되면 그건 안 되지요. 그건 마귀 출신이지요.
다윗은 승리하고 난 뒤에 이건 하나님의 승리라고 해요. 그 다윗의 가문에 속한 자가 천국가는 백성들입니다. 약한 것을 자랑하는 자에요. 약한 것을. 사도바울도 사도가 되어서 대단할 만 한데 주님께서는 사도에게 사단의 가시를 집어넣어놨잖아요. 고린도후서12장에 나오지요. 7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계시 받은 것이 크고 너무 자고하지 않는다. 이 말은 하나님의 계시는 내 육체에서 나온 게 아니다. 별개였다. 따로였다. 따로 였는데 따로라는 것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나는 이 세상에 대해서 우쭐대고 자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육체에 사탄의 가시를 줌으로서 균형을 맞추려고 하는 거예요.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균형 맞추기 위해서 사탄의 가시를 딱 집어넣어준 겁니다.
여러분들이 인생 살면서 고민거리가 많고 다 인생 힘들게 살아가지요. 물론 여러분들은 안에 성령님이 계셔가지고 그런 일은 없겠지만 힘들지요. 그런데 이 세상살이에서 어떤 이유던지 아프고 힘들고 괴롭고 한다 할지라도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말씀의 은혜가 떠나버리면 그 때가 오게 되어있어요.
말씀의 은혜가 가버리면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고민거리가 생기게 되어있어요. 그 틈을 노리고. 그게 사탄의 가시에요. 아, 그 때 코인 안 파는 건데. 팔아가지고. 그런데 말씀의 은혜가 와버리면 오벳에돔이 되어버리면 그게 뭔데? 오늘 저녁에 제대 날짜인데. 제대하는 마당에 군대생활 내일까지 끌고갈 필요없는데. 나 오늘 뜬다. 이 세상을 뜨는 거야. 가버리면 그게 스트레스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 되지요. 물론 5분가는가 모르겠습니다만. 7분 정도는 가줘야 되는데. 아이고 5분은 너무 짧은데.
지금 다윗에게 있어서 골리앗을 이겼을 때에 나는 골리앗을 이겼다. 하면 다윗은 끝났어요.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다윗은 이 싸움에 대해서 뭘 아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에게 장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내 인생 따로 없어요. 이제는 내 인생 없고 주께서 나를 가지고 다루시는 주님의 활동만 있을 뿐인 거예요. 그게 계속 갑니다.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할 때 다윗은 거기서 끔쩍도 안 해요. 거기에 매료되지 않아요. 한 번 비례 대표로 나가볼까. 이런 것도 없어요. 국회에 한 번 나가 봐. 그런 거 없습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으로 계속 유지되고 있어요. 계속.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계속 일하지요. 왜? 약할 때는 계속 약해야 돼요. 약한 게 한 번 이겼다 해서 강해버리면 똑같이 되거든요. 끝까지 계속해서 약해지는데서 오는 그 자유함. 그 승리감, 이것은 세상이 주는 승리감하고 족히 비교가 안 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레위지파가 보여주는 것은 제사에요. 왕 다윗 지파가 하는 것은 전쟁의 승리입니다. 전쟁의 승리. 그러니 둘을 합하면 제사 안에 참여한 자에게 주어지는 승리. 이게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가운데 이것을 시행한 사람 없어요. 둘 다 한 사람이 없습니다. 요시아 왕도 실패했잖아요. 갑자기 자기가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걸 알았는데 이걸 가지고 어디까지 확장시키느냐 하면 내 전쟁났을 때 하나님이 도와줄거라고 착각한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아주 철두철미하게 요시야를 살리기 위해서 이방나라 느고한테 말렸어요. 이건 하나님께서 나한테 말씀을 주셨는데 나서지 말라고, 안 나서야 됩니다. 라고 해도 이미 한 번 발동이 걸렸잖아요. 유월절 지키지요, 세상에 자기같이 말씀대로 사는 사람 없으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남은 인생도 승자로 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주께서 레위지파에서 요시야를 왕 다윗에서 요시야를 다 떨어버리지요. 기능과 그의 육신 존재를 떼어놓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기능에 합한 분은 육신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의 독자밖에 없어요. 그 분이 완성해야 돼요. 그 분이. 다른 사람은 얼추 비슷하게 갔지만 결국은 나중에 다 떨어져나가야만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주시는 것은 사탄의 가시까지 은혜주시는 것은 이건 너가 할 일이 우리에게 일체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밥을 먹든지 뭘하든지 주께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지 항상 뒤돌아보면 주께서 시킨 일이고 우리가 어떤 계획을 할지라도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이만큼 온 겁니다.
이게 지금이어서 그렇지 나이 80넘어서 인생 다 살고 돌아보세요. 마찬가지 똑같아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솜씨인 겁니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요엘2장보면 성령이 온다고 예언을 했지요. 요엘2장에서 왜 성령이 온다고 했느냐, 그 때가 어떤 때인가 하면 세상 모든 세상을 파괴하고 없애버리는 모든 후진 세상을 없애버리고 모든 것을 새롭게 전환 바꾸는 세계를 성령께서 하시는 겁니다.
이제 남은 시간에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도대체 새롭다는 거. 새로운 세계가 어떤 식으로 하루 일과를 스케줄을 보는 것이 새로운 세대인가, 새시대가 뭐냐, 뭐 어떻게 사는 게 새시대이냐, 사자굴에 손넣고 하는 게 새시대인가, 손 물립니다. 사파리에 가가지고 애가 오줌 눈다고 하니까 차에서 내리다가 이리가 달려듭니다. 사파리에 가가지고 차에서 내리면 안되는데 애가 오줌 눈다고 하니까 내렸다가 이리가 달려들었잖아요. 후다닥 탔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그만큼 새로운 시대라 하는 것은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겁니다. 어떤 삶이 새로운 시대냐, 세상에 대해서 사파리 생활하는 거예요. 어떻게? 십자가 안에서 또는 예수 안에서 십자가 안에 들어앉아있어서 바깥 세상을 구경하는 거예요. 바깥세상은 어흥! 범도 많고요, 사자도 있고요, 바깥세상에는 돈많고, 훌륭하고, 잘나고, 뛰어나고, 능력있고, 많이 알고 똑똑하고 이쁘고 대저택에 살고, 온갖 것으로 끊임없이 경쟁을 멈추지 않는 세계.
그런데 이 사파리 자동차 안의 세계는 뭐가 없느냐 하면, 경쟁이 없는 세계에요. 경쟁이 필요 없는 세계. 경쟁이 필요 없어요. 이 안에는 경쟁이라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안의 세계는 뭐냐 하면 시간이 종결되었어요. 시간이 종결 시간이 정지되어있습니다.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아요. 몇 백년 살 생각하지 마세요. 하루를 살아도 몇 천년 산 그 압축된 생활을 안에서 지금 누리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그래서 구체적으로 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실 거예요. 그 점에 대해서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습니다. 뭐냐 하면 말씀이 들어오는 생활인데 이게 뭐냐 하면 시키는 대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시킨대로 산다는 이게 하나님이 시켜야 되는데 이 과정이 하나님 그 다음이 뭡니까? 이스라엘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지요. 요 경로를 계속 반복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키는 대로 살게 되면 이건 오만한 자가 됩니다. 건방진 자가 돼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이제 복음이 시작 되지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어느 쪽이냐 하면 이 이스라엘의 경로 절차에 해당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다 알고, 율법 다 알고, 율법 지키려고 애를 썼던 사람이에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리 그렇게 율법대로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뭡니까. 자기의 충동과 자기의 욕망을 못 벗어납니다. 자기의 죄, 자기의 탐욕 벗어나지 않습니다.
탐내지 말라는 말은 십계명의 마지막에 탐내지 말라는 것은 니는 탐욕으로 살아가는 한시도 탐욕이 멈추지 않는 상태로 살아갔다는 것을 아시고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 내 맘대로 사는 거예요. 살게 되면 뭐를 만나느냐 하면, 여기 율법이 주어져요. 요 삶이 뭐냐 이스라엘 삶이지요.
율법이 주어지면서 율법에서 두 가지 기능이 나온다 했지요. 복습하는 겁니다. 하나는 제사장 기능. 백날 나는 잘 난체하고 싶은데 제사장 앞에서는 뭐냐, 니는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거예요. 죄인 중에 괴수. 그것은 니가 나쁘다가 아니라 육신 환경 자체가 죄를 안 지으면 안 지을 수 없게 만드는 육신이에요.
육신 자체가 충동이고 마귀가 우리를 다루고 우리를 지배하는 한 매개가 되기 때문에 배가 고플 때는 주님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걸 바꾸어서 받아야 돼요. 우리는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떡이 우선이지. 우리 육신이 솔직히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무리 복음하지만 돈보다 더 귀한 건 없지요. 돈이 최고지요. 하나님 없다고 울 수는 있어요. 울고 불고 하나님 찾아오세요. 할 수는 있지만 돈이 없이는요, 우는 게 아니고 분노가 일어나요. 살림 꼬라지 하고는. 이게 뭐야? 차라리 약 먹고 작심하고 전부 다 죽자. 이게 사는 거야? 이게 인간? 이게 짐승이지. 구질구질하게. 돈도 없이 우이 산다 말이고? 이런 식으로. 내가 나한테 분노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가 꼭 감춰놨던 옛 세대에 감춰났던 거예요.
그걸 율법 앞에서 율법이 제사직이 털어놓는 겁니다. 그래서 이쪽은 뭐냐 하면 십자가에요. 십자가. 그 다음에 십자가를 통해서 그 다음에 뭡니까? 사랑을 주지요. 너 같은 죄인을 내가 구원했다. 이것도 십자가에요. 십자가에 ?? 십자가. 십자가 앞에 강도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하는 소리를 듣는 저를 기억해 달라. 이건 사랑이지요. 요것이 십자가 안의 왕과 제사장과 다 이루었다 하는 왕의 기능을 모든 말씀 안에 다 들어있어요.
뽀글 뽀글 말씀 하나 하나가 비눗방울 안에 요게 두 개가 다 들어있어요. 이렇게 해서 다시 뭐로 오느냐 우리가 예수 안에 성령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신도는 뭐냐 하면 나는 하고 싶은 대로 산다. 이것만 이야기하는 것이 신자가 아니고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여기에서 어디까지 간 사람?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셨어. 그것도 아무 대가없이.” 이렇게 하게 되면 이제 세상에 나가서 “미쳤구나! 니가 하도 돈이 없다 보니까 정신마저 니가 정신 나갔구나! 니가 그런 식으로 해서 니가 스스로 너의 정당성이 보장될 거라 생각했어? 그렇다고 해서 니 자존심이 훼손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성도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내 과거에 니가 했던 소리를 내가 과거에 그렇게 했었어.” 라고 하면 더 이상 대화 끝! 우리는 강의 끝!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승리했다는 것이 어디서 승리했는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나를 건져줄 때 우리 자신의 탐욕과 욕심과 죄가 우리에게 가장 큰 딜레마였고 장애물인 것을 이제 뒤늦게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