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언약과 세상 사이

아빠와 함께 2024. 4. 28. 08:16

광주강의20240426a 출애굽기 3장 16절(언약과 세상 사이)-이 근호 목사


오늘은 p.59【믿어야 할지 행해야 할지】그 대목입니다. 주님께서 믿음과 행함 뿐만 아니고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바탕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우리 바탕을 왜 드러내야 되느냐 하면 가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하나님이 하는 일을 어떤 식으로 가리는지 제가 하나의 경우를 들게 되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양심이라는 게 있어요. 양심은 선한 마음을 양심이라 하죠. 선한 마음이니까 당연히 인간이 스스로 선하다/ 악하다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본 겁니다.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이 발휘됨. 인간이 선과 악을 스스로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 선한 것을 양심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양심이 인간들은 하나님에게 향해요. 양심대로 하나님께 향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주신 거예요. 성경말씀을 주시니까 자기 양심에 비춰봐서 자기가 잘못하고 부족하고 어설프고 그리고 하나님 뜻에 위반했다 싶은, 선한 마음에 위반했다는 생각을 스스로 양심이 알아채잖아요.

그러면 회개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찾으면 인간이 회개하고 반성할 때 하나님에게서 내려오는 조치가 뭐냐 하면, 너의 죄는 내 아들 예수님의 피로 사함을 받는다. 회개하는 자는 예수님의 피로 사함을 받는다, 이 구조. 이 구조가 인간들이 교회 나오는 구조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녀도 이거는 이상하게 변함이 없어요.

딱 보면서 여러분들이 무엇이 빠졌다고 생각될까요? 여기서 무엇이 빠졌습니까? 질문한 내가 나쁘죠. 지금 인간들이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하면 하나님하고 상대를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과 상대하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나쁜 짓이 많고 잘못한 것도 많으니까 회개, 반성을 하면 하나님께서 회개, 반성 받아주면서 그 죄를 위해서 특별조치, 자기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해서 그 피로 이 죄를 씻어준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 그러면 이 구조에서 누가 중요합니까? 예수님이 중요해요, 자기가 중요해요? 본인이 중요하죠. 이 구조의 문제점은 두 가지인데 첫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안다고 여기는 거예요. 안다고 여기고 상대 대상으로 보는 거예요. 하나님은 알고 나를 하나님께 양심껏 대하는 상대 대상으로 여기는 거예요.

두 번째 잘못, 문제점은 뭐냐? 끝까지 자기 포기가 안 된다는 거예요. 자기 포기가 안됨. 그러면 여기서 세 번째를 더한다면 예수님은 자기 포기 안 되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데에 시다바리(보조)에요. 예수님은 시다바리 역할밖에 안하는 거예요. 도와주는 역할, 시다바리 역할밖에 안돼요.

재벌 총수하고 상대하는데 재벌2세는 재벌 총수보다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그런 대상으로 간주해버리죠. 이 구조. 이 구조를 누가 갖고 있었느냐 하면 바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갖고 있었어요. 그 대신 예수님을 그들은 메시아로 보죠. 메시아가 와서 자기 죄를 제사법으로 용서한다, 이렇게 본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낸 것은 이 구조 자체를 전부 다 파괴시키기 위함이에요. 이 구조 전체를 붉은 색으로 가위표 쳐야 돼요. 검은색으로는 모자라요. 이 전체를 파괴해버려요. 전체를 파괴하게 되면, 파괴했다 치고 무엇이 파괴되는지 한번 보세요.

첫째, ‘내가 양심 있고 선한 마음 갖고 있다’ 이거. 이거 파괴되었죠. 마치 이스라엘이 이란 공습할 때 헤즈볼라 노리고 폭격하는 것과 똑같아요. 두 번째, 반성, 회개 이거 다 파괴되죠. 뭐가 파괴되느냐? 이런 하나님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없어요. 자기 선한 마음을 파괴하는데, 보조(시다바리) 역할로 예수님이 들어가니까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얻는다는 이런 지식도 아무 소용없어요. 그래서 총합해서 다 파괴되어버리는 거예요. 지금 이게 안돼요. 사람들이. 복음을 공부한다든지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이 전체가 다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상상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이걸 제가 다 지우겠습니다. 이게 다 파괴되고 없어져요. 없어졌다면 그럼 이 없어진 자리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아까 하나님 파괴되었죠. 파괴된 자리에 예수님 단독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이야기하죠.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면 아버지를 모른다. 나를 모르면 아버지를 모른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아버지를 모른다. 왜? 너희들은 내가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추상관념을 따로 설정해놨어요. 그런데 따로 설정한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 보기에 양심적으로 문제가 있으니까 이걸 고쳐야 깨끗한 천국에 갈 수 있으니까 자기 질병 고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자비를 구하고 부탁하는 거예요.

천사들 파업하는 것도 모르고. 천사들 삐쳐서 병원에 오지도 않아요. 천사들이 심판하는 천사들이에요. 인간의 하소연 들어주는 그런 천사 아니에요. 그냥 심판하는 천사에요. 그게 유월절 아닙니까.

예수님 단독으로 오시게 되면, 아까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이 피를 흘려서 우리 죄를 사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단독으로 오게 되면 사람들이 여기서 일종의 창이라든지 못을 들고 전부다 우~~~~, 우~~~ 하고 달려들어서 예수님을 피 흘리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아는 설정된 구조하고 너무 다르니까.

나를 믿으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믿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왜 예수님을 못 믿느냐 하면 아까 그 구조에서 인간이 착한 양심으로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할 때 이때 인간은 이미 믿는 자에요. 누굴 믿습니까? 자기 자신을 이미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안 믿고 누굴 믿는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성립이 안돼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한테 당부한 게 있어요. 네가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율법 해석이라든지 정결법이라든지 특히 고난 주일에 막 회개하고 반성하는 것에 대해서 당신이 긍정적으로 봐야 된다. 긍정적으로 봐야 된다. 뿐만 아니고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세리와 창기와 간음한 자, 이런 자들을 어떻게 했습니까? 어떻게 했어요? 돌로 치려했죠. 그 행위에 대해서 예수님이 협조해야 되고 동조를 해줘야 돼요. 협조하고 동조하면 예수님을 죽일 이유가 없죠.

그런데 예수님은 가만히 계시는 분도 아니고 멀쩡히 바라보시는 분도 아니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데 ‘이건 잘했고 이건 못했다’가 아니라 어느 것 하나 마귀 짓이 아닌 게 없었어요. 마귀 짓이 아닌 게.

사람이 누구한테 어떤 질책을 들을 때는 바뀐다든지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차원에서 질책을 하는데 예수님의 질책은 이래요. “안돼!” 이게 질책이에요. “너희는 어떤 경우라도 안돼! 네가 의롭다고? 못 가. 천국 못 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들이 천국 못 간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강하게 부정하기 위해서 그들의 기준에서 때려죽여도 지옥 가는 사람들을 주께서는 천국 간다고 해버리죠. 세리 같은 경우에. 아무 것도 행한 것도 없는데.

그래서 아까 제가 붉은 걸로 지워버린 그 사람들, 바리새인들의 주장이, 빨간 걸 준비해야 돼요, 확 지워야 되니까, 그들이 말한 행함이란 뭐냐? 행함은 믿고 그 뒤에 믿음의 증거로서 오는 행함을 그들은 주장했던 겁니다. 믿고 난 뒤에 믿음에 합당한 행함을 주장한 겁니다. 빨간 펜 왜 준비해놨겠어요? 이거(믿고 난 뒤에 믿음에 합당한 행함) 지워버리죠.

그러면 예수님이 오셔서 말하는 이 행함은 뭐냐? 자신의 자부심을 해체하는 행위들. 자신의 동질성과 존재감과 자존감 같은 것을 부수는 그것을 행함이라고 하는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치는 거예요. 기생 라합이 자기의 모든 터전, 대대로 살아온 조상 모두를 거부해버리는 것. 그게 야고보서 2장에 나오는 믿음에 합당한 행함의 두 가지 예잖아요.

이것이 ‘자기로부터의 탈출’이에요. 이것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진 게 바로 출애굽 사건이에요. 출애굽 사건. 탈출이 있어야 돼요. 탈출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땅이 애굽이라는 사실과 두 번째는 탈출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고, 세 번째, 탈출된 상태가 옛날 내 자부심을 인정해주는 단독적인 탈출이 아니고 율법과 더불어서 탈출을 했기 때문에 결국 율법의 종이 되는 거예요. 언약의 종이 되는 겁니다. 언약의 종.

노래 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사랑밖에 난 몰라’라는 노래가 있어요. 심수봉이 불렀던 사랑밖엔 난 몰라. 사랑만 안다는 걸 강조하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은, 언약밖에 난 몰라. 하나님은 ‘언약밖에 난 몰라’에요.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 찾아올 때 지겹도록 반복한 게 있어요.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한 것을 그대로 이루러 왔다는 거예요.

아까 처음에 우리가 생각했던 개인적인 선한 양심가지고 ‘하나님 내가 살다보니까 이런 저런 잘못한 게 있는데 제가 거룩한 하나님을 못 알아보고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헌신 안하고 살았으니까 이제부터 정신 차리고 바르게 살겠습니다. 이것도 잘못했고 저것도 잘못했습니다. 회개합니다.’ 라는 그런 구조가 아니에요.

그런 구조가 아니고 ‘인간밖에 난 몰라’가 아니고, ‘언약밖에 난 몰라’. 그러면 인간과 언약이 어떻게 돼요? 대립관계에 있죠. 그 언약의 언약자가 누구죠? 예수님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오신 것은 예수님과 대립적인 존재인 인간들 세계에 예수님이 찾아온 거예요. 왜 찾아왔겠어요? 심판하려고 찾아왔죠. 저주하려고 찾아온 거예요.

출애굽기 12장을 보기 전에 다시 한번 강조하면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행함은 그 목적이 뭐냐? 자기의 자부심을, 내 존재의 자부심을 부수고 해체하는 거예요. 이것이 ‘자기를 미워한다’ 또는 ‘자기를 부인한다’가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출애굽 당시에 ‘여호와의 밤’이라는 말이 나와요. 출애굽기 12장 42절, “이 날은 여호와의 밤” 나오죠. 출애굽이 여호와의 밤이라 되어 있어요. 출애굽기 12장 42절, 여호와의 밤이에요. 그러니까 보통 인간세계에서의 밤이라는 것은 조금만 지나면 낮이 되잖아요. 밤과 낮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그런 세상이 인간의 세계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통해서 인간의 밤이 아니고 여호와의 밤이에요.

그러면 여호와의 밤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주기적으로 경험하는 인간들의 시간, 그 시간 속에서 사는 인간들이 절대로 들어설 수 없는 밤. 오직 여호와만 느끼는 밤. 인간은 그 밤에 가려면… 낮에 활동하면서 본인이 살아있다고 여기는 것은 밤 되면 어떻습니까? 의식 있어요, 없어요? 의식 없죠. 낮에 잠 안들 때는 모든 성질 다 나오잖아요. 그런데 언제 성질 안 나온다고요? 잠 잘 때 외에는 성질 계속 다 나오잖아요.

산 자가 산 채로 들어올 수 없는 새로운 시간의 시작, 그게 바로 여기 42절에 보면 새로운 날, 여호와의 날의 시작이에요. 이스라엘의 시작입니다. 이스라엘의 첫날이에요. 그 날이 너희들의 첫 날이 될 것이라는 그 말씀이 12장에 보면 나옵니다. (12:2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아까 그 구조를 생각해보면 인간이 반성을 하든 회개를 하든 간에 반성하고 회개하고 선한 양심이 어떻고 하나님이 어떻고 메시아가 와서 우리를 고쳐준다 하는 이런 모든 발언들이 그 근거가 뭐냐 하면 본인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 하나님과 관련성 맺을 수 있다는 그러한 인식 하에 나온 발언이잖아요. 그렇죠?

그들은 낮엔 뭐합니까? 활동하잖아요, 활동. 낮에는 활동하죠. 낮에는 인간들이 활동하는데 밤에는 이제 잠자야죠. 그런데 하나님께는 여호와의 낮이 아니고 여호와의 밤이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어느 누구도 여호와의 밤에 들어올 수가 없고, 여호와의 밤이 인간의 낮 속에 침투가 되어버리면 여호와께서 활동하시는 여호와의 밤이 활동하게 되면 소위 살아있던 모든 인간세계는 모조리 죽은 자인 것을 들추어내고 폭로하는 식으로 여호와는 활동하는 겁니다. 이걸 네가 믿으라는 거예요. 이걸 믿으라.

죽은 자에게 행함이라 하는 건 있을 수가 없죠. 죽은 자의 행함은 내가 하나님에 의해서 죽었음을 드러내는 행함만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의 행함이에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죽일 때 사실 자기 자신이 죽은 걸로 여기죠. 자기 살아온 모든 것의 바탕을 드러내는 기생 라합에서, 옛날 과거의 기생 라합은 이미 나는 죽은 라합이라고 인정하는 거예요.

그래서 죽은 자에게서 뽑아낼 행함은 없어요. 죽어있는 것은 그냥 죽어있는 거니까요. 죽어있는 인간들이 아는 범위, 시공간의 범위는 낮입니다. 여호와의 밤에 들어올 수 없는 낮. 그러면 이 일을, 방금 제가 출애굽 예를 많이 들었지만 성경 전체가 바로 이 말씀을 가지고 이 일을 하는 겁니다.

이번 수련회 제목을 제가 이미 정해봤어요. <말과 말씀>이에요. ‘말과 말씀’인데 인간이 쓰는 말에 예수님도 참여를 했거든요. 예수님께서 인간 속에 말에 참여하면서 이걸 말씀 쪽으로 본인에 의해서 끌어당깁니다. 그 과정을 지금부터 제가 설명해드릴게요. 말에서 말씀으로 끌어가는 과정을.

이 과정은 일단 이것만 알면 반 이상은 아는 게 돼요. ‘관절’. 인간의 관절 있잖아요. 뼈. 뼈와 뼈가 단위별로 끊어지지 않으면 인간은 행동을 못해요. 관절이 있고 뼈가 있고 관절이 있고 또 뼈가 있죠. 뼈와 뼈 사이에 관절이 있잖아요. 관절은 뭐냐 하면 그 자체보다도 양쪽에 힘이 되는 뼈가 있음을 알려주는 사이 공간, 그 사이에 있는 표현이 관절이거든요. 관절.

근섬유도 마찬가지에요. 뼈와 뼈 사이에 근섬유가 있고 이것이 발달되면 이게 근육이 되는데 뼈와 뼈 사이에 근섬유가 있어서 탁구 칠 때나 물 마실 때나 젓가락질 할 때 마음대로 자유자재로 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끊어져있어야 돼요. 끊어져있어야 된다고요.

짐승들은 우~~~어~~~ 이렇게 하죠. 짐승들의 울부짖음. 짐승들이 ‘밥 주세요’ 하면 듣는 인간이 기절해버리죠. 그냥 우~~~ 어~~~ 뭐 가슴을 친다든지… 특별한 경우 같으면 나귀가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아요. 짐승들의 말은 음절과 음절 사이가 불투명해요.

인간들도 정신이 나가버리면 짐승의 우~~~하는 소리를 하는 게 있어요. 그게 순복음교회에서 많이 하는 방언이라는 겁니다. 짐승의 울부짖음이에요. 짐승 못돼서 환장하는데 기도 빡세게 한 10시간하면 짐승 될 수 있습니다. 통성기도 자주하면 우~~~ 어~~~ 이렇게 되죠.

인간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음절마다 소리가 다 끊어지게 되어 있어요. ㅈㅣㄱㅜ 합치면 뭐가 됩니까? ‘지구’ 되죠. 이렇게 끊어지는 것, ㅈ/ㅣ/ㄱ/ㅜ 끊어놓고 이어버려요. 끊어놓고 잇는 것. 관절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몸에 관한 것이고 언어학에서는 이것을 ‘분절’이라 합니다. 분절.

끊어놓고 이어버리는데 문제는 그 끊어진 것과 끊어진 것 사이에 이음새가 말하는 가운데서 이게 날아가 버리고 사라져버려요.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표현해도 근접성, 유사성, 비슷하게는 할 수 있는데 정확하게 그걸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이유는 중간에 근섬유, 근육이라든지 관절 같은 것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이게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대충 그 정확한 것은 언제 아는가? 이게 날아가고 난 뒤에 다 듣고 난 뒤에 어떤 사태가 일어났을 때 다시 회상하면서 ‘아, 그때 네가 한 이야기가 이런 이야기였구나.’ 시간이 지나가고 난 뒤에 소급해서 그 의미를 캐치하게 돼요. 캐치하게 되면 시간이 이만큼 틈이 지나갔잖아요. 한 시간이든 30분이든 한 달이든 지나가잖아요. 그 한 달 간 지나간 시간의 틈, 그 간격 때문에 말한 당사자의 의미는 날아가 버리고 말을 듣는 사람인 내가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편집한 의미를 네가 전에 이야기했던 그 의미라고 일방적으로 단정해버리죠.

그러니까 말을 할 때 그 말한 의미를 지나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안다 이 말이에요. 그것도 지금 상황 말고, 집에 가서 동영상볼 때 그때 주어진 시공간이라는 환경 안에서 여기서 듣는 것보다 또 다른 뉘앙스로 듣게 되는 겁니다.

정확한 것은 예수님만 이야기하고요. 그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는 인간들은 그 정확성을 놓쳐버려요. 잃어버리고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자기 일방적으로 ‘아, 그런 뜻이구나.’라고 일방적으로 ‘유레카! 이제야 알았다.’ 무릎을 치면서 알았다 하죠.

그러니까 한 달 전에 이야기한 것을 한 달 후에 알았다 하는 것은, 한 달 전은 그냥 핑계고 ‘지금 이 상황에 그때가 들어와서 그때 이 문자나 기호가 나한테 재해석되어졌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겁니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해야 되는가? 성경 전체가 다 그래서 그래요. 성경 전체의 흐름이 다 그래서 그래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사가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바로 이런 뜻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잖아요. 언약을 세운 당사자, 아브라함도 그랬고 이삭도 그랬고 야곱도 그랬고 요셉도 마찬가지고 언약을 받은 자는 그 당사자가 이 언약을 일방적으로 전부다 곡해하고 오해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곡해하고 오해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결국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상황 속에 몰아넣음으로써 전에 있던 언약이라는 것이 ‘아, 이런 뜻이구나.’라는 것을 알게 만들어요. 시간이 지나가고 난 뒤에.

그래서 인간의 의미라 하는 것은 자꾸 미끄러진다. 머물지 않고 나중 나중으로 자꾸 미끄러진다는 이야기를 기호학자들은 하고 있습니다.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같은 사람이 대표적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차이’에요. 어떤 차이? 사라져버린 차이를 찾아서.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것과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그 이야기를 그 현장에서 듣는 것과 이틀 뒤에 듣는 것과의 차이. 그 차이를 발견하는 거예요.

어떻게 발견하는가? 이걸 하나 더 겹치면 돼요. 무정형(無定形), 정해진 형태도 없고 그냥 우~~~하는 소리. 예를 들어서 A, C, Y, Z, 또는 S, W 이렇게 써 놨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컴퓨터 자판기에 나오는 거지, 아무 뜻 없잖아요. 이게 배열이 되어야 어떤 단어가 되고 의미가 된단 말이죠. 이렇게 던져져 있는 것. 던져져 있는 것들이 의미 없죠. 하나의 의미를 위해서는 이게 재료가 돼요. 재료가 된다고요. 이 재료를 가지고 ‘실체’라고 이야기하고.

이제부터 기호학에서 쓰는 몇 가지 용어가 나오는데 단박에 이해되기 굉장히 힘든 단어들이 나와요. 실체가 되고 이 실체에다가 코드(code), 코드란 어떤 일정한 법칙이죠, 법칙을 대면 이게 형식이 돼요. 실체+코드(법칙)=형식이 되는 거예요.

피아노 건반이 있죠. 피아노 건반을 유치원 아이가 띵똥 띵똥 아무거나 치면 아무 의미 없잖아요. 그게 실체에요. 실체인데 뭐 바이엘 좀 배웠다고 뭔가 어떤 가락, 흐름이 나오면 그건 형식이 되는 겁니다. 코드, 어떤 법칙이 있으니까요. 도도도도도 이게 무슨 의미 있어요? 도미솔 이러면 아, 이거는 하나의 형식이 되는 거예요. ‘야, 그거 쳐 봐라. 그거 듣기 좋네.’ 이렇게 된다고요. 인간에게.

그래서 실체 따로 있고 실체에다가 옆에 형식을 따로 한다. 이건 여러분 이해되시겠죠? 형식 안에 뭐가 들어있다 했습니까? 코드. 법칙. 코드가 딱 꽂아져야 돼요. 소켓처럼. 콘센트(소켓)에 플러그가 꽂히듯이 딱 꽂아져야 형식이 되니까.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날아간 게 있어요. 사라진 것. 날아간 것과 사라진 것. 그건 실체하고 형식하고 아무 상관없고 나중에 따로 내가, 전에 이야기했던 것이 무슨 뜻인지 따로 아는 거예요. 그럴 때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내용이 있고요.

‘무슨 이야기했는데? 뭐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때 뭐 ‘지구를 지키자’, 나한테 지구를 지키자고 왜 이야기했지? 독수리 5형제가 할 일을 나한테 왜 이야기했을까?’ 이렇게 하는 거예요. ‘아, 이걸 나타내려고 한 거구나.’ 이게 표현이에요. 표현. 지구를 지켜라, 이 말은 네가 처한 자리에서 최선의 네 역할을 해야 전체가 어우러져서 지구는 지켜진다, 그런 뜻이 되겠죠.

내용은 표현됨으로써 반드시 표현을 통해서 도로 내용의 그 값을 하는 거예요. 내가 헛소리한 게 아니라는 것. 표현이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벌써 몇 개입니까? 실체 있고 형식 있고 내용 있고 표현 있으니까, 하나의 기호,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 네 가지로 나누니까, 이 네 가지를 몽땅 머릿속에 담으려니까 여기 대혼란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제가 내용과 표현은 뭐라고 했습니까? 사라진 것들을 그물로 도망가지 못하게 마저 챙겨 올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용과 표현은 사회적 기능, 역할 또는 사회적 공공의 배치, 배당, 할당, 그런 것과 관련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언어라 하는 것은 목적이 있다. 무슨 목적? 사회가 사회답게 잘 굴러가는 목적으로 언어가 있다, 이렇게 되잖아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사회가 잘 돌아가고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하고 성경하고 무슨 관계있는가? 문제는 이러한 A, C, Z, Y, 아무 뜻도 없는 그것들을 정렬해서 하나의 체계를 만들고요. 체계 만드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형식을 갖춰야죠. 형식을 안 갖추면 안 되거든요. 형식을 갖추고 체계를 만들고 내용과 표현들을 갖출 때 우리는 언어를 이렇게 사용한다, 인간들의 머리에서 이것까지 나와요. 인간들의 머리에서.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시비 걸고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왜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가에 대해 묻는 사람이 있어요. ‘왜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느냐?’ 이 질문 자체가 상당히 도발적인 질문이죠. 아까 말했잖아요. 인간은 짐승, 원숭이하고 다르고 또 얼마 전 중국 간 곰, 눈 주위 항상 멍들어 있는 판다 뭐 비슷한 종류, 인간은 그런 짐승이 아니잖아요. 인간은 짐승과 차별되는 인간다움이 있단 말이죠. 인간다움이. 인간답기 위해서 언어 사용하는 게 뭐가 잘못이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전체가 말씀입니까, 말입니까? 이게 말이에요. 지금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간의 말 속에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인간은 말로써 모든 우주를 무한대로 다 설명할 수가 있다고 본 겁니다. 뼈만 있는 게 아니고 관절이 있으니까, 실체와 형식만 있는 게 아니고 내용과 표현이 있으니까, 표현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온 우주가 언어의 지배 아래 있는 거예요.

자, 이 두 개를 한번 합쳐보는 거예요. 실체와 형식, 내용과 표현 이 두 개를 합치면 어떻게 되는가? 내용에도 실체가 있고 형식이 있고, 표현에도 표현의 실체가 있고 형식이 있다는 거예요. 형식은 뭐라고 했습니까? 코드. 법 체제 이런 거예요. 법 딱딱 맞게 규격 맞게 약속된 대로.

이 실체-형식의 토막과 내용-표현의 토막 이 두 개를 합치면 육면체 토막이 네 토막 되겠죠. 그러니까 두 개를 겹쳐버리는 거예요. 두 개를 얹으면 내용의 실체, 내용의 형식, 표현의 실체, 표현의 형식이 나오죠.

그런데 이게 따로 놀아요. 왜? 밑에는 하나의 질료이기 때문에. 실체라는 질료고요. 위에는 뭐냐? 이것은 표현이기 때문에 따로 노는 거예요. 따로 논다는 말은 다른 지층을 형성하는 거예요. 다른 지층. 지층을 보게 되면 바로 밑에 있는 지층이 1년 전이 아니잖아요. 어떤 건 수백 년 밑에 층이 있을 수 있어요. 땅의 지층.

삼국시대 위에 고려시대 사람이 집 짓는 이유가 ‘야, 이거 터 괜찮네.’ 보면 옛날 삼국시대에 집 지은 터에요. 그다음 전쟁 나서 강화도에 몽골군 와서 허물어지면 그 위에 조선시대에 또 짓는 거예요. 집 지을 때 강 근처에 집 짓기 좋은 데에 반듯한 데 하잖아요. 하다보니까 이게 계속 누적이 되죠.

그러나 층과 층 사이에는 수많은 시간이 흘러가는 거예요. 관계없다는 거예요. 관계없다. 내용과 표현, 실체와 형식에서 내용과 표현 이것과 실체와 형식이 상관없으면서 내용과 표현 안에 실체와 형식이 둘다 담기게 되는 겁니다.

피아노를 칠 때 그냥 딩딩 치면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런데 코드로 도미솔라 이렇게 치면 되잖아요. 도미솔라 치면 되는데 그 도미솔라를 내용으로 보게 되면 그 도미솔라에 근거해서 도파라로 하는 화음을 만들 수 있어요. 그러면 도미솔 하는 것이 내용의 실체지만 도파라로 거기서 응용이 되어버리면 형식이 되는 거예요. 형식. 형식이 되고 그 형식으로 표현된 소나타 형식이냐, 트롯트냐, 팝송이냐에 따라서 또 새롭게 등장하기 때문에 이 네 개의 언어가지고 이 세상의 모든 사건과 변화가 전부다 커버 가능하다 이 말입니다. 무한대로 다 커버 가능한 거예요. 사라지는 것까지 다 체크하고 가두어둘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 그게 기껏 뭡니까? 이게인 거예요, 말. 그럼 말과 말씀의 차이가 도대체 뭐냐? 말에서 말씀의 차이를 어떻게 끄집어내느냐? 왜 인간 언어를 사용하느냐 이 말입니다. 왜 인간 언어를 사용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이걸 시비 거는 사람이 있어요. 이걸 시비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라캉(Jacques Lacan, 1902-1981,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정신분석학자)이라는 사람인데 인간이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딱 이거 하나밖에 없어요. 욕망.

욕망이 자기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언어를 사용해서 지금 욕망 말고 다른 변화된 욕망을 얻고 싶은 거예요. 라캉이라는 사람이 주장하는 것 중에서 핵심적인 것은 욕망이 숨어있는 나가 되고 나는 욕망 밑에 하수인이 된다는 거예요. 라캉 이전에 사람들은 ‘내가 말을 한다’ 하잖아요. 라캉은, NO! 욕망이 너를 통해서 말을 하는 거예요.

아, 조기 구운 거 먹고 싶다. 누가? 내가. 아니 아니! 너의 욕망이 조기 구운 것을 먹고 싶다, 에요. 그럴 때 아내가 남편 미울 때 하는 방법은 조기를 한 달 내내 세끼 해주는 거예요. “그만! 그만 그만!” “왜? 좋아한다며?” 질리죠. 질렸다는 말은 나한테 물어보지 않고 욕망이 다른 색다른 욕망을 향하여 욕망 스스로가 변조하는 거예요. 그럼 어쩔 수 없이 누가 따라가야 돼요? 내가 질질 끌려가는 거예요, 내 욕망에. 그러니까 인생은 뭐냐? 욕망한테 질질 끌려가는 세월이 인생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착하다/ 안 착하다, 악하다/ 선하다 아무 의미 없어요.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죠. 남에게 기부하는 행위, 이거 욕망입니까, 욕망 아닙니까? 욕망이에요. 마라톤해서 1억씩 모아가지고 심장병 아동들에게 기부하는 쎤. 션이라는 가수 연예인 부부가 기부를 그렇게 많이 하는데 그게 멈출 수 없는 마약 중독 같은 겁니다. 욕망이에요. 계속 뭐 해야 돼요. 계속 기부해야 돼요. 전에 1억했잖아요. 2억해야 돼요. 멈출 수가 없습니다.

나는 없어요. 그냥 욕망이 있는 거예요. 욕망이 나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욕망이라 하지 않아요. 이걸 그냥 죄. 욕망을 붙인다면 누구의 욕망? 악마의 욕망. 악마의 욕망이에요. 예수님은 인간을 상대 안 해요. 이 땅에 악마하고 상대해요.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과 상대하려고 오셨어요.

그러니까 욕망이 주인이 아니고 인간이 주인이 된다면 인간들이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의미 있는 의미를 가져와서 내 것, 내 세계, 내가 주인공 되는 세계, 내게 자부심을 주는 세계, 내게 모욕감을 주는 거 말고 내가 살아있는 자부심을 항상 풍족하고 넉넉하게 만드는 그걸 위해서 의미를 나한테 채우잖아요. 의미를 채운다고요.

그런데 라캉은 뭡니까? 채우려는 그 의미가 마저 채워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인간은. 뭔가 농락당하고 있는 거예요. 라캉은 욕망이라 했는데 욕망의 주인공이 누군지를 몰라요. 그래서 라캉은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이 주인공이 죽음이 아닌가. 프로이트에 의해서 죽음 충동(drive)까지 이야기해요. 죽음 충동이 뭐냐 하면 그 욕망을 위해서 죽음을 기피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 속까지 들어가는 것을 죽음 충동이라 합니다.

그만큼 욕망이 이끌게 되면 인간은 늘 배고파요. 4강해도 배고파요. 신태용 감독 배 많이 고플 거예요, 지금. 4강으로는 멀었어요. 우승해야 돼요. 인간은 하나의 일을 하거나 하게 되면 늘 결핍을 느끼고 내가 그 일하기 전에 예상도 못한 다른 질병에 빠져버립니다. 몸은 갈수록 피폐하고 이제 피곤해하는 거예요. 피곤할 땐 어떻게 합니까? 10분 쉬는 거죠, 뭐.

 

 

 

 

 

 

광주강의20240426b 출애굽기 3장 16절(언약과 세상 사이)-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2장 2절에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애굽에서 나오면서 너희 첫 달이 되게 하라. 그리고 그 달 10일에 유월절을 반복하는 거예요. 유월절을 반복하면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의 욕망입니까, 하나님의 욕망이에요? 하나님의 욕망이죠. 하나님의 말씀이 드디어 등장하는 겁니다. 이걸 언약이라 해요, 언약.

출애굽기 3장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와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모세가 “애굽에 갈 때에 어떤 하나님이 왔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합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했어요. 그러니까 이건 언약이거든요. 언약의 하나님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언약은 기존의 인간 말에 포함이 될까요, 안 될까요? 안되죠. 왜냐하면 첫날이니까. 기존 인간세계에 없던 날의 침투니까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2중 시간관을 짊어지고 이고 가는 그러한 민족이 돼요. 특이한 민족이 됩니다. 2중 시간관.

시간이 아래쪽에 흐르는 시간과 위쪽에 흐르는 시간이 2중으로 흐르면서 그 시간은 서로 대립관계에 있어요. 한쪽 시간은 누가 뭐래도 나는 살아있다는 거예요. 거봐. 나 여기 살아 있잖아. 살아 있잖아. 누구의 글처럼, 바로 내가 살아 있잖아. 이걸 왜 부정해? 내가 살아 있잖아. 그런데 왜 죽었다고 해?

위에서는, 너는 이미 그 맏이 죽을 때 죽은 거예요. 죽고, 출애굽기 13장 12절 보면 “너는 무릇 초태생과 네게 있는 생축의 초태생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그다음에 뭡니까?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이 이야기는 13장 2절에도 나와요. 이 이야기는 뭐냐 하면 일단 죽자는 거예요.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었잖아요.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도 일단 같이 죽어라 이 말이에요. 다 같이 죽은 거예요.

다 같이 죽었으니까 이제는 누가 살고 안 살고는 하나님의 언약에 입각해서 언약이 살려주면 사는 거고 언약이 못 살면 못 사는 건데 언약이 집중하고 있는 인물이 뭐냐? 그 집안의 맏이에요. 맏딸이 아니고 맏아들이에요. 수컷이에요. 수컷. 그리고 사람 맏이만이 아니고 초태생, 가축의 첫 수컷도 다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암컷도 들어가지만 양을 잡을 때 대체로 수컷으로 인간을 대신한 가축으로 희생 제물로 같은 수컷이 들어가요. 아브라함의 언약에 보면 윗선에서는 암소, 암염소지만 일반적인 양은 암양이 아니고 수양이 돼요. 수양. 지층화 되어서 수준이 높은 쪽과 낮은 쪽이 층층이 되어있는 게 이중적으로 쌓여있으니까 인간들이 행할 수 있고 인간들이 설명할 수 있는 것과 인간들이 설명할 수 없고 행할 수 없는 것이 같이 포개져 있습니다.

언약이 이스라엘 속에 이런 식으로 개입한 거예요. 말 속에 말씀이 같이 겹쳐져 있는 그런 양상인 겁니다. 겹쳐져 있으니까, 말씀 앞에서, 다른 민족은 안돼요, 말씀이 겹쳐져 있으니까 겹쳐져 있는 말씀 밑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심코 하는 행동 있잖아요. 아까 라캉 이야기했죠? 인간의 모든 행동은 어디서 나왔다고요? 인간이 겉으로는 내가 필요에 의해서 행동하는데 사실은 내 자리를 지워버리고 욕망이 나를 이용해서 행동한다. 이 욕망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 애굽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 살다 나왔잖아요.

그래서 모든 언약, 율법들이 애굽 살던 그 방식과 차이나게 하는 것, 차이나는 것, 구분되는 것, 이것을 거룩이라 해요. 거룩이 되려면 한쪽을 버리고 한쪽 되는 게 거룩이 아니고 양쪽 다 있죠. 아까 제가 관절 이야기했죠. 뼈. 근섬유 이야기했잖아요. 양쪽 다 있어줘야 그 사이에 거룩이 나오는 겁니다. 나는 예수 믿었으니까 난 죄인 아니다, 이러면 안돼요. 죄와 의 사이, 사이에서 그 틈에서 거룩이, 성도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있어요, 없어요? 성도는 인간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잠시 제가 여기에 노래 가사를 하나 쓸 테니까 왜 인간에겐 성도가 없는지, 왜 성도가 인간에게는 해당 안 되는지, 애초부터 이 세상에 성도 없는 이유를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제목은 <가버린 사랑>인데,

가버린 사랑

백년해로 맺은 언약(언약이 가끔 인간세계에 나와요) 마음속에 새겼거늘
무정할 사 그대로다 나 예두고(여기 두고) 어디 갔나
그대 이왕 가려거든 정마저 가져가야지
정은 두고 몸만 가니 남은 이 몸 어이 하리

이 노래 여러분 중에 아는 사람 있어요? 주리 주리 임주리가 불렀던 노래인데, 임주리의 ‘가버린 사랑’이에요. 나 지금 저장이 안 되어 있는데 여러분 가사에 치중하세요. 아실 거예요. 2절 가사가 이거하고 똑같아요. 똑같은데 4번째 줄이 달라요.

백년해로 맺은 언약 마음속에 새겼거늘
무정할 사 그대로다 나 예두고 어디 갔나
그대 이왕 가려거든 정마저 가져가야지
남은 이 몸 생각 말고 만수무강 하옵소서

열녀 났죠. 한번 보세요. ‘백년해로 맺은 언약’입니다. 언약. 자, 아까 첫째 시간 공부한 것 해봅시다. 너 나하고 영원히 부부로서 하나가 되자 했죠. 그 순간에 상대가 하는 것을 본인이 안다고 했죠. 그런데 이 언약이 언제 그 의미를 알아요? 네가 너를 원할 때는 우리 같이 살자. 원할 때라는 조건은 나중에 ‘언약을 마음속에 새겼거늘’

‘무정할 사’ 이 야속한 인간아. 야속한 자가 누구냐? ‘그대로다’ ‘나 예두고(여기 두고) 어디 갔나’ ‘그대 이왕 가려거든 정마저 가져가야지’ 네 몸은 가버리고 그럼 당신을 향한 나의 정은 뭐 어떻게 처리하라고 남겨두고 갔는가? ‘정은 두고 몸만 가니 남은 이 몸은 어이 할꼬’ 이렇단 말이죠. 좀 신파조가 있죠, 옛날 노래에요.

여러분 이 노래 들어보면 ‘아, 그 노래!’ 하고 알 겁니다. 여기서 언약이라는 말 나오고 그다음에 주목해야 될 것은 뭐냐? ‘정은 두고 몸만 가니’가 성립이 됩니까, 안 됩니까? 정은 두고 몸만 가니. 정 따로 몸 따로가 인간이 돼요, 안 돼요? 이게 뼈와 뼈 사이를 다 해도 관절, 근섬유는 남아 있어요. 이게 뭐냐? 기억이에요. 이 기억은 나한테 달라붙은 근섬유에요. 근육이에요.

님은 가도 님한테 퍼주었던 희생과 봉사와 절절한 나의 모든 헌신은 비록 상대가 없어져도 나한테는 여전히 존속하는 겁니다. 팔 잘린 사람이 팔 없어져도 마치 팔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그 상처가 되게 오래 가죠. 그 잔재가. 그러니까 이걸 다시 보게 되면 그 남자(여자가 불렀으니까)가 함께 있어도 그 여자는 남자 사랑했어요, 아니면 남자 사랑한 자기의 정을 사랑했습니까? 자기의 정을 사랑했죠.

이제사 언약을 이해한 거예요. 인간들의 언약은 모조리 자기 편리 위주로 일방적 해석을 해대는 것이 바로 인간들의 약속이라는 사실. 물론 이 가사자가 거기까지 생각도 못했어요. ‘백년해로 맺은 언약 마음속에 새겼거늘~ 무정할 사 그대로다~’ 이제 가락이 기억나네요. 아주 굉장히 서글퍼요.

그럼 정 떼는 방법이 뭐냐? 죽음 충동이에요. 드라이브(drive), 충동이에요. 내가 죽는 줄 알면서도 내가 죽고 사는 것도 내 충동에 달렸지,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니까 상처를 이기는 게 아니고, 상처 속에서 나를 없앰으로써 비로소 나를 내 욕망이라는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방법을 사용해서 자기 고통을 면제하는 시도를 하는 거예요. 그게 뭔가? everybody 다같이~ 시작~ ‘남은 이 몸 생각 말고 만수무강 하옵소서’

이거 누구 좋으라고 하는 겁니까? 자기 상처를 자기 방식대로 해소하는 몸부림이에요. 쿨하게 가신 님 용서함으로써 용서 못하는 내 마음에서 내가 해방하고자 하는 것, 그게 아까 첫 번째 나왔던 인간이 하나님을 찾았고 찾는 그 구조에요. 인간이 어떤 종교를 갖고 어떤 몸부림을 쳐도 전부다 누굴 위함입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 그렇다면 방금 한 게 뭐냐? 말씀의 세계가 아니고 말의 세계에요. 인간이 스스로 자기 상처마저 자기가 벗어나려고 애를 써보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누가 온다고 했어요? 언약이 오죠. 말씀이 오죠. 그러면 이 세상은 무슨 세상이냐 하면 언약이 옴으로써 이 세상은 비(非)-언약의 세계가 되죠. 비-언약의 세계. 비-언약의 세계에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나라가 있었으니 그 나라가 바로 애굽이었습니다.

애굽은 굉장히 친근하죠. 히브리인들에게도 애굽 나라가. 거기 소속이 되었으니까. 그래서 모세와 아론을 보내도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올 생각을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나올 생각을 안 했어요. 이 고통이 완화되기를 원했지, 나온다는 건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애굽 나라의 특징이 애굽 나라는 곧 all, 모든 세계의 대표격이기 때문이에요. 즉 애굽 나라 자체가 현실이에요, 현실.

인간은 현실만 믿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인간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에요. all이니까 전부에요. 이 세상은 애굽 나라, 그걸로 충분해요. 애굽 나라 말고 다른 나라는 생각을 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애굽 나라에서 빠져나온다는 자체를 죽음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히브리인들이 탈출할 생각이 전혀 없고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서 나오라고 이야기했고. 그럴 때 히브리인들을, 자기 백성을 어떻게 설득해야 됩니까? 야, 나가자. 어디? 그때 모세가 설득한 게 뭐냐 하면 여기서 사흘 길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자 한 거예요.

그 말은 뭡니까? 애굽 나라에서 사흘 길 근처, 하나님 계신 어떤 곳이 있는데 거기서 예배드리자. 그렇다면 예배 끝나고 어디 갑니까? 도로 빠꾸죠. 도로 애굽으로 오는 거예요. 하여튼 애굽 자체가 존재의 바탕이기 때문에 애굽 없는 본인은 있을 수가 없어요. 현실적이 아닌 인간은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내 존재성은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언약은 바로 인간의 모든 존재의 바탕을 끄집어냅니다. 폭로시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꼼짝 마라,밖에 할 수 없는 것, 그 현실에서 생산된 존재가 인간들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빼내는가? 갈 마음도 없는데 어떻게 빼내는가?

이겁니다. 고난입니다. 고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또 달리 얘기해서 하나님은 어떤 때 찾아오는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고난 받는 현장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만나지, 그 외에는 만나주지 않습니다. 고난의 현장. 빠져나오는 고난의 현장.

이 고난의 현장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지만 실은 그 원판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받고 이 세상 자체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바로 히브리인들이 출애굽 때 그때 먼저 모형으로 보여 준 거예요. 모형으로.

그러면 첫째 시간 우리가 공부한대로 하면, 이스라엘이 내용이라면 예수님은 뭐가 되죠? 표현이 되죠. 이제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이스라엘이 내용이라면 예수님은 표현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표현으로 하는 내용인 이스라엘을 히브리서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모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성경에서는 표현이라 하지 않고 이걸 실체라고 해요.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게 실체인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중적으로 이중 시간관, 또는 언어학으로 이야기하면 이중 분절. 이중 분절이라는 말이 어려워요. 그냥 이중 시간관이라는 말이 적절해요. 같이 겹쳐져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인간의 말의 시작을 눈에 보이는 실체, 그게 질료적인 물질적인 거죠, 눈에 보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의미를 채우잖아요. 코드 맞춰서,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코드, 법칙에 맞춰서 질서에 맞춰서 하잖아요.

그런데 겹쳐진 시간관을 갖고 있는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은 언약 자체에 진짜배기 숨어있는 실체가 따로 있고 나머지는 모형이 되는 겁니다. 모형이 되고 언어적 표현에서는 이것이 모형인 동시에 마태복음 13장에서는 이걸 비유라고 이야기해요. 비유. 주께서는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마 13:34)

지금 여러분들이 제 이야기를 들으면 아까 첫째시간 때문에 굉장히 머리가 복잡하고 정리 안될 거라고 제가 믿습니다. 실체-형식, 내용-표현. 그게 그거고 그게 그거. 가가 가고 가가 가 같은 느낌이 들죠, 경상도 말로. 가가 가가? 가가 가 같아요, 전부다. 그런데 가 하나면 하면 되는데 가가 왜 네 개나 되냔 말이죠.

그것은 이 세상 전체를 인간들이 이미 언어로 말로 전부다 덮어놨어요. 덮어놓고 나름대로 분류하고 질서잡고 체계잡고 시스템 가동시키고 다 그런 거예요, 전부다. 물은 H₂O죠. 그럼 눈물은 뭡니까? 눈에서 나온 H₂O. 틀린 말은 아닌데 이걸 하나의 질료로 삼으면, 눈에 보이는 실체로 본다면 눈물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의 슬픔을 표현하는 거죠. 그런 식으로 이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무한으로 언어가 다 커버되도록 인간들이 이미 이 세상을 활동해온 겁니다. 그게 인간의 말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말에다가 달라붙듯이 언약, 말씀이 갖다 달라붙은 거예요. 말에 말씀이 붙었으니까 서로 대립관계인 거예요. 해석을 할 때 그때는 눈에 보이는 것부터 출발하는데 말씀은 언약은 눈에 보이는 것이 나중에 와요.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게 뭐냐? 진짜 의미는 시간이 지나가봐야 안다고 했잖아요.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더 지날 것 없이 시간이 스톱되는 정지되는 그날이 와요. 그게 뭐냐? 종말입니다. 그게 최후의 날이에요. 그게 예수님이 한 말씀, “다 이루었다”로 끝나버려요.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너희들이 알던 그 의미는 뭔가 중요한 것이 사라지고 빠져버린 거예요. 진짜 정답이.

그러니까 인간은 진리가 아니에요. 진리를 얻고자 애를 쓰는데 인간을 지배하는 욕망, 수상한 욕망이 인간으로 하여금 영 성에 안 차게 만드는 거예요. 성에 차지 않도록. 왜? 지층별로, 지층별이란 말도 어려운데 그냥 수준별로. 세 살 된 애한테 돈은 별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세 살 된 애한테 케첩은 돈보다 더 소중해요. 케첩은. 볶음밥 해놓으면 케첩을 그만 하라 해도 안돼요. 케첩 막 뿌려놔요. 돈 줄게, 해도 안 멈춰. 돈이 뭔지 몰라요. 그러나 수준이 어른 되게 되면, “이자를 케첩으로 쳐 줄까요? 이자 현찰로 줄까요?” 케첩 받아서 뭐 할 건데?

우리 동네에서 교회가 주일학교 전도한다고 애들에게 학교 앞 에서 계속 매일같이 주는 거예요. 그쪽 주일학교 주최측에서. 뭘 주느냐 하면 소세지 주고 막대사탕 주고 단 거 주고 이래요. 그래서 한 오지랖 하는 사람이 가가지고 ‘이거 집에 엄마도 몸에 해로워서 안 주는데 이렇게 하게 되면 몸에 해로운 것도 문제지만 애가 바깥에서 주는 것을 공짜로 받는 버릇이 들어서 안 됩니다.’라고 어떤, 차마 말은 못해요 누군지는, 어떤 오지랖 넓은 분이 단호하게 이야기했어요. 얻어먹는 것. 그래서 애들이 왜 받는가 손녀한테 물어보니까 저렇게 성의 있게 주는데 안 받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나중에 마약 섞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그거 주지 말고 현찰로 주지. 아차, 애들 지층이 그 정도까지 안 되는구나.’ 애들에게 현찰은 높은 지층, 수준 높은 거고 낮은 지층에서는 막대사탕 그게 먹혀들어가는 거예요. 아직까지 인지도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범위가 넓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범위가.

그러면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면서 믿어라, 행하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주신 거예요? 무엇을 알기 위해서? 몇 분 안 지났는데 벌써 다 잊어버렸죠. 크게 쓸게요. 차이. 차이에요. 다시 말해서 너는 세상과 천상 사이에 그 자리에 서라. 이 자리가 누구 자리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섰던, 예수님이 고난 받은 자리에 집어넣어진 인간을 가지고 성도, 다시 말해서 성도는 거룩함을 입은 자에요.

거룩함을 입은 자가 거룩함을 소유하고 쟁취하는 것이 아니고 더러움과 거룩함 사이에 이 두 세계가 차이 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끼어들어간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성도한테는 뭐가 없어요? 나의 구원의 성공이라는 게 없어요. 왜냐하면 나가 없으니까.

나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언약적으로 보기에 인간은 내가 없어요. 마귀의 졸개거든요. 죄의 종이에요, 인간은. 죄의 종을 뭐로 바꾼 거예요? 죄에서 해방한 나로 바뀐 게 아니고 이제 의로운 나로 바뀐 게 아니고 의의 종으로 바뀌었죠, 의의 종. 저 종이나 이 종이나 딸랑딸랑 다 종이에요. 죄의 종에서 의의 종이 된 것이지, 독립적으로 나 혼자 따로 ‘구원받았다’ 거기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애굽 나라죠, 애굽 나라에서는 차이라는 게 사라지는 게 아니고 이게 본인 중심이기 때문에 괜찮은 결실과 업적을 자기 것으로 잡아당기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이 남에게 다가서는 것은 자기를 더욱 더 굳건히 하고 키우기 위해서 남에게 잠시 들어갔다가 챙길 것 챙기고 다시 돌아오는 겁니다. 전부 자기 위주죠.

그런데 이게 무슨 세계라고 했습니까? 이게 말씀의 세계에요, 말의 세계에요? 말의 세계에요. 그런데 언약의 세계, 또는 말씀의 세계는 오직 뭐밖에 몰라요? 언약밖에 몰라요. 하늘에 있는 언약이 지상에 있는 말의 세계에 오셨다는 말은, 특히 이스라엘에게만 온 거예요, 이스라엘에게만, 이스라엘에게 왔다는 말은 오신 언약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고난 받죠.

그런데 여기서 이것만 알면 이건 틀린 거예요. 이스라엘만 고난 받는 게 아니고 언약적인 분도 여기 함께 고난 받고 있어요. 하늘과 땅 사이에 끼어서 고난 받는 겁니다. 그렇게 합류했다는 증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 출애굽기 15장 26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잘 한번 보세요. 보고 제가 질문을 할게요.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에 이스라엘이 합류되어 있다는 증거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을 나한테는 내리지 않는다는 이 사실, 이 사실에 조건이 있잖아요, 앞에. 내 계명과 내 규례를 지키는 조건 하에 질병이 내리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결코 나 위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 사람만이 이 구절을 이해하게 되죠.

만약에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우리를 뭐로 취급하겠다는 말입니까? 재앙을 받았던 애굽 사람과 똑같은 사람으로 취급하겠다는 식으로 주께서 이스라엘을 끌고 가고 있는 거예요. 애굽에서 벗어난 게 아니고 이중적으로 중첩되어 있는 거예요. 언약과 애굽이 중첩되어 있는 거예요.

‘나는 해방되었다, 누구로부터.’ 이게 아니고 이제 그들은 율법에 철저하게 매인 자가 된 거예요. 전에는 어디에 매였습니까? 애굽. 달리 얘기하면 인간의 결핍이 있는 욕망.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습니다. 천하의 애굽 바로 왕이 누구한테 시달립니까? 누구한테 당황하게 되죠? 꿈. 누구 꿈? 요셉의 꿈. 요셉의 꿈한테 그 센 바로 왕도 꼼짝 마라죠. 그러니까 직위상은 총리지만 사실은 주도권을 누가 갖고 있어요? 총리가 갖고 있는 거예요. 바로는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여기 유월절에 하나님이 찾아왔잖아요. 찾아올 때 애굽 사람들이 했던 고백이 나와 있어요. 유월절을 대했던 애굽 사람들의 고백이 이 고백이에요. ‘우리 장자는 죽었다.’ 이 고백이 아니에요. ‘우리 모두는 다 죽었다.’에요. 장자만 죽은 게 아니고 다 죽었어요.

전에 출애굽기 1장에서 바로가 누구만 학대했습니까? 히브리인들만 학대했잖아요. 학대했단 말이죠. 그런데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네 번째 재앙부터는 고센 땅에 사는 히브리인들한테는 전혀 재앙이 없었어요. 사흘 동안 깜깜해도 고센 땅에 사는 히브리인들한테는 해가 나왔다니까요. 저쪽은 해가 없는데 이쪽엔 해가 있어요.

특히 유월절에 보면 나옵니다. 일단 11장 7절을 한번 봅시다. 11장 7절을 보면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그다음에 뭡니까? “구별”하죠. 이게 바로 거룩함이에요. 그 사이. 그 틈. 아까도 얘기했지만 틈이 있다는 말은 양쪽 사이를 다 보고 있다는 뜻이에요.

출애굽기 12장 33절 읽어보세요. “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백성을 재촉하여 그 지경에서 속히 보내려 하므로” 하나님께서 언약이 현실화될 때 그 현실을 맛보았던 애굽 사람들의 솔직한 고백은 뭐냐? 우리는 그 언약 앞에서 다 죽은 거예요.

인간세계에서 언약은 당사자끼리 맺은 약속이잖아요. 하나님의 약속은요, 인간 자체가 어떻게 맺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내렸다 하지만 사실은 아브라함 속에 있는 예수님, 이삭 속에 있는 예수님, 야곱 속에 있는 예수님, 모세 속에 있는 예수님과 아버지가 언약 맺은 거예요. 이게 말씀입니다.

내용-표현, 내용이 표현 되잖아요. 내용이 있어야 표현이 된다고요. 어떤 기호학자는 이걸 상징이라 해요, 상징. 상징이라는 말은 아무리 해도 진실에 접근 못하는 거예요. 대나무를 보고 대나무라 이야기했다. “그게 왜 대나무인데?” 그전까지는 “대나무 같잖아.” 이랬어요. “그니까 그걸 대나무라고 하는 이유가 뭔데?” 이유가 없어요, 그냥. 그냥 찍었죠.

그런데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 스위스 언어학자)라는 기호학자가 말하기를, 저걸 대나무라고 하는 것은 대나무 외에 대나무 같은 대나무가 없기 때문에. 소나무도 안 되고 감나무도 안 되고 말을 새로 지어 넣어서 대나무라 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다른 나무와의 차이가 그 나무의 의미가 된다는 겁니다. 이 말은 전부 다 하나의 시스템 안에 위치를 할당받고 있다는 거예요. 시스템이 없으면 모든 의미도 홀라당 다 날아가 버리죠. 시스템이 없으면. 이걸 강남강의에서는 관계망이라 했어요. 관계망.

어쨌든 아까 고난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고난이 왔다는 것은 고난이 오게 되면 다음 두 가지가 보입니다. 하나는 봉우리고 하나는 골짜기고. 깊이 파이죠. 깊이 파인다.

자, 봉우리라 하는 것은 사람들의 욕망에 의하면 목표점이 돼요. 4강 했으니까 이제 우승까지 가야죠. 신태용 감독, 가야지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그러면 무엇과 멀어지겠습니까? 뭐와 멀어져요? 골짜기와 멀어지잖아요. 그런데 황선홍 감독은 이젠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게 되었죠. 그러니까 황선홍 감독은 복을 받은 사람이에요. 정신 차려야 돼.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이야기했는가,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다스린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모든 일을 하나님이 알아서 움직인다는 뜻이에요. 이게 시스템인데 주님은 시스템이 뭐냐 하면… 인간들, 이 세상 애굽 나라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잖아요. 주님은 뭐만 기억해요? 언약만 기억하는 깨끗한 세계, 거룩한 세계에요. 언약만 기억하는.

주님 벌이는 모든 것은 항상 너에게서 언약이 어떤 식으로 추출되고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가.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표현의 실체거든요. 눈에 보이니까. 물질적인 실체가 된다는 말이죠. 또 또 표현, 여러분들 머리 깨진다 또, 혼동되죠. 교통정리 안 되죠. 이게 안 되는 이유가요. 이쪽에서는 표현이다가 그다음에 이 표현이 내용으로 또 바뀌게 돼요. 그다음 높은 지층에서 내용으로 또 바뀐다고요. 또 바뀌어요.

띵 띵 띵 치던 피아노가 도미솔 치면 정돈된 것 같죠. 그다음에는 그것이 단조나 장조로 바뀌면서 그게 또 표현된 게 내용으로 들어가면서 다른 표현을 위해서 그게 하나의 실체가 돼요. 그다음에 또 다른 더 넓은 범위의 의미를 질서 있게 드러내기 위해서 전에는 표현이었다고 마감된 그것이 또 어떻게 사용될지 몰라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학교에 가면 학교가 있고 학교 캠퍼스에 의자 있죠. 의자가 눈에 보이잖아요. 질료 아닙니까. 물질이에요, 물질. 물질 있으면 그럼 책상을 운동장에 내놓을까요? 어디에 놔야 돼요? 책상은 교실에 들어오잖아요. 이게 코드죠. 책상, 걸상은 교실에. 코드죠. 그럼 뭡니까? 실체, 의자 그것은 코드를 만나서 코드화되면 교실에 있어야 되는 겁니다. 거기서 ‘아, 책상은 교실에 있어야 된다.’ 하나의 의미가 되죠.

의미가 되는데 이 의미가 책상만 있으면 강의가 됩니까? 강의한다는 새로운 의미를 위해서는 책상, 걸상이 교수 있는 데에 오면 안 되죠. 책상, 걸상은 저쪽 학생들 쪽에 있고 무대, 강의실 연단은 교수들이 활동하도록 비워놔야 될 게 아닙니까. 새로운 코드가 나오죠. 새로운 코드가. 그러면 강의라는 더 높은 수준의 의미가 또 발생되는 거예요.

그럼 끝입니까? 강의 있고 또 특별 세미나가 있어요. 세미나하게 되면 모든 게 위치가 또 바뀌어요. 그렇게 해서 인간의 의미라 할 수 있는 무한대를 뭐로 다 섭렵하고 커버할 수 있다? 인간의 언어가 커버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의 세계다 이 말이죠. 이해돼요?

그런데 말씀은 고난을 만들어버린다고요. 고난을. 방금 말의 세계가 뭐냐? 말의 세계가 인간의 욕망이거든요. 그러면 더 큰 범위, 더 큰 범위, 더 큰 범위,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그게 멈추겠습니까? 지옥가야 멈추죠. 왜? 지옥은 헐떡이니까. 결핍의 세계니까요.

불로 지지는 것도 아프지만 그것보다 더 아픈 것은 목마르다는 거예요. 부자가 뭘 원했어요? 돈을 원했습니까, 벤츠 차량을 원했습니까? 물 한 방울. 이게 하나 없다니까요. 그렇게 시시한 이 물 하나 없어가지고 물 달라고 하잖아요. 물도 아쉬운 데가 지옥이에요.

아, 그걸 알게 되면요. 이걸 알게 되면 우리가 성도된 게 진짜 이 세상 모든 것과 맞바꾸고 목숨 걸어도 괜찮아요. 목숨도 아깝지 않습니다. 어떻게 초월적인 언약세계와 지상의 지옥세계, 이 죄악세계양쪽을 바라보는 안목이 생겼냐 이 말입니다. 그게 언약이 이루어진 성령 때문에 그렇거든요. 언약의 완성체인 성령이 들어왔기 때문에 양쪽 다를 보는 거예요.

그리고 주님께서 철저하게 반복해서 우리로 하여금 지독한 애굽 사람, 지독한 내 결핍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싸대고 있는 내 육신의 모습을 그대로 주께서는 사용하십니다. 그대로 사용해요. 그래야 차이가 나니까요.

자,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래서 언약의 탈출하는 것이 역사 속에 등장하는데 출애굽기 13장 9절에 이런 게 있어요.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인간에다가 인간의 미간에다가 뭐를 새겨요? 하나님의 출애굽 상황을 새겨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맏이 되는 수컷은 그 덩어리 자체가 유월절을 보여주는 실체가 돼요. 유월절 자체를 보여주는 움직이는 유월절이에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정작 원하는 게 뭐냐? 그게 바로 출애굽기 30장 6절에 나옵니다. 온 율법 다 집어넣고 제사법을 상세히 하면서 6절에 나와요.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이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장소죠. 그러면 여기 증거궤, 속죄소는 뭡니까? 눈에 보이는 물질이죠. 물질을 통해서 추상적인 만남을 표현해주는 겁니다. 만남을. 그런데 보세요. 율법이 처음에는 이렇게 증거궤까지 이야기 안 했어요. 시내산에서 받은 이야기이고 처음에 모세를 애굽에 보낼 때 이런 이야기까지 안했어요. 그냥 사흘 동안 가서 어느 산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고 약간 두리뭉실하게 이야기했어요. 두리뭉실하게 이야기한 것이 하나님의 언약, 율법이 계속해서 주입되니까 점점 더 초점이 또렷해지죠. 구체적인 장소가 생겨나죠. 구체적인 장소가 뭡니까? 속죄소, 언약궤죠.

그런데 이것이 신약에 오게 되면 눈에 보이는 이것이 실체로 또 바뀌어요. 실체로 바뀌어가지고 하나님의 뜻과 코드가 맞아버리면 표현에서 나타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식이 되어버립니다. 아까 형식은 코드니까. 형식이 되죠. 그럼 만날 장소는 속죄소입니까? 속죄소 다 날아갔는데. 그럼 뭐에요? 예수 그리스도죠.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최종적인 의미는 거기서 모든 게 스톱이 되죠. 거기서 마감이 되는 겁니다. 그 말씀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에요. 말하는 인간들아, 나에게로 오라. 네 말을 내 말씀 속에다 집어넣으면서 그다음에 우리는 변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죽죠. 내가 죽죠. 내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같이 공유하게 되는 겁니다.

죽는다, 산다 하는 이것도 하나의 한시적이고 임시적인 상징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실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냥 흙이에요. 흙인데 표현적으로 하면 죄인이고 흙에 언약이 오니까 잠자는 자여, 깨어나 일어나라. 죽은 자여, 일어나라.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내가 너를 이 십자가로 살렸느니라.

그래서 어디서부터 왔으며 어디 있는지를 우리가 이 땅에 육신이 있는 한 양쪽 세계를 다 보여줄 수 있는 성령의 계시를 한꺼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계시를 다 받게 된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일을 벌이셔서 우리의 바닥부터 우리의 바탕부터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철저하게 눈에 보이는 것이 다라고 여기는 애굽 사람인 것을 주님께서 어린 양과 더불어서 끄집어내어서 우리 이마에 우리 마음속에 유월절 어린 양을 집어넣으시고 양쪽 세계를 다 보면서 고난이면서도 감사함 가운데 지내게 해주신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만 증거하기 위한 주의 조치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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