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지옥 확인

아빠와 함께 2024. 6. 30. 09:23

광주강의20240628a 마태복음 26장 52절(지옥 확인)-이 근호 목사


<기독교의 허상> p.86 제목은【숨어 계시는 하나님】.【종말 때의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형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여기 ‘종말’이란 말을 안 해도 되는데요. 하나님은 늘 숨어계셨는데 종말이란 말을 집어넣은 것은, 구약 때 이스라엘에게 나타났음을 전제로 할 때에 신약에 오게 되면 그 이스라엘에게도 숨어계시는 하나님처럼 그렇게 등장하게 되죠.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숨어계시는 형식’이라 했는데 이 형식이 오늘의 주제가 되겠습니다. 숨어계시는 형식. 방식. ‘숨어계신다’ 이건 곧 ‘없음’이죠. 숨어계시니까 인간에겐 없는데, 그 뒤에 ‘형식’이라고 되어 있어요. 아, 형식은 이 세상에 ‘있음’이 되는 거예요. 숨어계신다=없음. 형식=있음.

그러니까 이 형식이 숨어계시는 방식의 형식으로 하나님께서는 나타내신다. 본문에서 뒤에 말에 ‘계시하신다’고 되어 있거든요. ‘자신을 계시하신다.’ ‘계시하신다’ 해놓고 그 앞에 ‘자신을’이라 했어요. 자신을 계시하시니까 하나님의 계시는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계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반부터 어렵지만 어려워도 그냥 밀어붙이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는 형식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 형식 속에 숨어계심도 내용에 포함되려면 어떤 문장이 적절하냐? 이 문장이 적절해요. ‘예수님은 자신이 이미 죽은 것을 아신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죽은 몸으로 오셨어요. ‘죽음’이란 것은 있음이 아니고 없음으로 이야기하고, ‘자신’이라 하니까 자신을 계시하는 내용과 이게 부합돼요.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죽은 것을 아신다’는 이것을 계시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계시가 이 안에 다 함축이 되어 있다는 거예요. 모든 계시가. 해와 달, 별, 만들어낸 모든 계시가 예수님 자신의 죽음 안에 함축되어 있죠.

따라서 성도에게 확실한 것은 딱 하나에요. 하나만 확실하면 돼요.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 성도는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이 한 개만 알면 되는 겁니다. 수능치기 위해서 고등학생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그만큼 공부를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수능 문제 딱 한 문제 나온다면, ‘숨어계신 하나님의 형식을 말하라’ 딱 한 문제 낸다면, 성도라면 답을 뭐라 해야 돼요?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는 이 답변으로 말미암아 무엇이 몽땅 잘려나가느냐 하면 ‘나는 ~한다’가 다 잘려나가요. 나는 ~한다, 나는 ~안다, 나는 ~행한다, 나는 ~소지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시에 포함돼요, 포함 안돼요? 포함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에 포함이 안 되는데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고민하는 거예요, 지금. 고민하고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애 시집도 안 가고 집에 있다 아이가. 그거는 고민할 문제도 아니에요. 물론 장려할 문제도 아닙니다만. 걱정하거나 고민할 문제가 아니에요. 뭐 교회를 어떻게 하면 되나, 이런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셨다’부터 출발점으로 해서 그다음에 성도한테 요구하는 게 있어요. 성도한테 요구하는 것은 ‘나랑 죽자’. 이 ‘나랑 죽자’를 회개라고 합니다. 나랑 죽자=회개. 계시의 확장이죠. 주님의 구축된 계시가 확장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그다음 문제. 이 계시를 어떻게 찾아내는가 하는 거죠. 숨어있다니까.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숨어있으니까 이것을 어떻게 찾아내느냐 이 말이죠.

요새 마술 프로그램도 있습니다만, 여기 편평한 A4용지가 하나 있다 합시다. A4용지가 있는데 마술사가 여기다 기를 불어넣습니다. 잘 보세요, 하면서 기를 불어넣으니까 손도 안대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여기서 이 평평한 반듯한 A4용지가 저절로 구겨지고 여기에 굴곡이 생기고 돌출이 생기고 이런 현상이 생긴다면 이게 얼마나 신기하겠어요.

‘평평한 데서 주름이 발생한다’ 이게 징후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 계시의 징후가 되는 거예요. 평평한 데서. 그러면 평평하다는 이게 뭐냐? 평평하다는 것은, 자연에다가 인간의 이성(理性)-이성이란 reason(라틴어:ratio), 따지는 것, 조리 있게 절도 있게 합리적으로 질서를 잡게 하는 게 인간의 이성이에요-을 집어넣으니까 이 자연이 평평해졌습니다. 그러니까 평평해졌다는 것은 ‘질서 잡혔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다림질이 잘 되어 있다’. 다림질이 잘 되어 있는 거예요. 똑바로 다림질이 잘 되어 있는 것.

어떤 때 그렇습니까? 무엇이 투입될 때? 이성이 투입될 때. 이성의 대표적인 모습이 뭐냐 하면 수학이에요. 수학. 수학, 물리학. 수학, 물리학에 인격이라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격은 따지지 않아요. 수학, 물리학에 인격은 따지지 않습니다. 화학에 뭐 감정 이런 것은 전혀 따지지 않아요. 이걸 질점(質點), 하나의 질점으로 보는 거예요. 하나의 물체, 존재로만 보는 거예요, 그냥.

이 수학이 경제 분야로 파급됩니다. 수학적, 합리적, 이성적인 것, 질서 잡힘이 경제로 파급되면 어떻게 되는가? 경제의 가치는 평평해져요. 뭐로 평평하냐 하면 돈 있음과 돈 없음으로 평편화돼요. 평편화. 질서가 잡히는 거예요. 질서가. 넌 줄 뒤에 서. 뒤에 서. 너는 앞에 서세요~ 이렇게. 이게 야고보서 2장에 나오잖아요. 부자는 환영하고 가난한 자는 뒤로 밀쳐지는 것(2:2-3).

인간의 이성, 합리적 판단이 개입되게 되면 가치를 논하는데 그 가치는 무엇의 가치입니까? 인간세계, 이 A4용지의 평평한 세계에서의 생명이란, 생명을 측정할 때는 돈의 가치로서 측정이 돼요. 너라는 생명은 나중에 얼마를 더 빼먹을 수 있는 생명이냐, 이걸로 측정이 된다고요. 경제 분야에 들어가면.

경제 분야가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 요소를 다 빼는 거예요. 옛날에는 물물교환해서 인간이 물건을 나눈 게 아닙니다. 정(情)을 나눈 거예요. 정을. 그래서 어떤 학자는 그걸 증여라 하는데 present, 선물하는 거예요. ‘아이고, 아재요. 전에 좋았습니다.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아이고 뭐 이런 걸 갖고 오다니. 이거 드세요.’ 증여. 거저 주는 것.

농심에 나오는, 밤중에 쌀가마 지고 나누는 형제 우애 같은 거. 돈으로나 합리적 이성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 돈, 자본으로 표현할 수 없는 여분의 것이 있어요. 끈끈한 연대성. 사랑 또는 우정, 의리. 옛날부터 농사지을 때는 노동 집약적이 되어서 끈끈한 정이 들어가야 농사를 한꺼번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농사짓던 그 사람이 도시로 이주를 해서 뭐 철공소에서 일하든지 할 때 손님을 만나든지 사업을 할 때 끈끈한 인정이 통하겠습니까, 안 통하겠습니까? 끈끈한 인정을 주장하면 등신 되죠. 그걸 ‘사기 당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기 당했다. 사기를 당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가 심리적으로 치명상을 입겠죠.

치명상을 입는다는 말은 나라는 인간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그동안 나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었던 토대 자체가 이게 소용이 없어진 거예요. 이 새로운 도시 사회에서 소용이 없는 거예요. 소용이 없으면 돈 없는 것도 무가치한데 내가 갖고 있는 인정과 성의, 이게 도시사회 구조에서 써먹을 데가 없는 거예요.

내가 써먹을 데 없으면 어떻게 돼요? 나는 존재가치가 없잖아요. 그러면 뭘 생각하겠어요? 나 죽을까 생각하겠죠. 그러니까 생명이라 하는 것은, 목숨은 원래 부모가 내려준 거다 하는데 부모가 내려준 게 아니고 부모가 살았던 상황, 그 환경이 내려준 거죠. 그 환경이 바뀌어버리면 목숨이 위태하게 되는 거예요. 등신 같이 살게 되면 목숨이 위태하게 되는 거예요.

자연에 이성이 개입되면 다림질이 되는 거예요. 이걸 경제적으로 봤는데, 이제 정치적으로 봅시다. 정치적으로 보면 이 평평하게 펴놓은 판이 권력체계라는 거예요. 권력체계. 마태복음 26장 한번 보겠습니다. 지금 제가 설명하는 것은, 숨어있는 계시가 어떻게 흔적을 내는가?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흔적을 내는 것은, 숨어있는 계시를 덮어주는 게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대적이겠죠.

그래서 평평하게 수학적으로 이성적인 질서 잡힌 이 인간세계가 어떻단 말이냐? 전에도 했어요. 자연을 인간이 가져오면 자연을 그냥 자연으로 보지 않고 인간이 지배해요. 인간이 지배한다고요. 자연을 인간이 지배하고요. 그 인간을 인간이 지배한다고요.

자연을 인간이 지배할 때는 이 무질서한 자연을 인간이 사는 데에 편리하도록 인간이 지배한다니까요. 장악하는 거예요. 인간이 장악하죠. 인간 속에서, 자연은 혼란스럽다. 그럼 인간은 혼란스럽습니까, 혼란스럽지 않습니까? 인간도 혼란스럽죠. 혼란한 것을 장악하기 위해서 인간이 인간을 또 지배하게 되죠.

그럼 이 흐름(자연→인간이 지배→이 인간을 인간이 지배) 속에 무엇이 포착되겠습니까? 무엇이 포착되겠어요? ‘권력’이죠. 마태복음 26장 봅시다. 51절, 52절, 그리고 55절.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베드로죠. 52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그 다음에, 53절이 의미 있어요.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뭐 할 수 없는 줄로 알았죠. 베드로와 열두 제자 모두 다. 예수님 체포될 때 지금이라도 천사들을 보내서 예수님이 체포되지 않게 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제자들은 왜 몰랐어요?

제자들이 지금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머릿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겁니까? 무엇이 작동되죠? 이성이죠, 이성. 이성은 어디에 썼던 겁니까? 자연을 누구 위주로? 인간 삶 위주로 생존 위주로 바꿀 때 인간의 이성이 개입되잖아요. 이 이성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게 그대로 작렬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열두 제자가 딴에 예수님 보호한다고 손에 쥔 게 뭐죠? 검. 칼이죠. 칼. 54절 보면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55절, “그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그 다음 56절에 뭡니까?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무엇의 글을 이루려 함이라?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러분 이제 이해하시겠습니까? 평평한 이성으로 체계 잡힌, 권력체제로 서열화 된 질서를 잡아놓은 이 세상에서 마술사가 뭔가 구부러뜨리고 윤곽을 생기게 한 거예요. 저절로. 윤곽이 생긴다는 것은 징후죠.

여러분들이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아까 한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계시는 뭡니까? 이 땅에 뭐 하러 오셨다? 그냥 죽으러 오신 거예요. 그냥 죽으러 오신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자연을 보면서 이성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본인이 죽겠다는 말입니까, 죽지 않겠다는 거예요? 죽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성령 이후에 주께서 말하는 회개란 뭐냐? 나랑 같이 죽자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나의 징후여야 되고 이 이성밖에 모르는 이성으로 질서 잡힌 이 세상에서 특이성을 보여줌으로써 이 평평한 세상에 인간의 이성과 권력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자발적인 어떤 윤곽이라든지 굴곡을 생기게 만드는 거예요. 다림질이 불가능한 거예요. 다림질이. 돌출부분이 있고 쑥 들어간 부분이 있고. 그것도 어쩔 수 없이 저절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저절로.

아, 이거 어렵죠. 지금부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 검, 칼, 열두 제자도 같이 생각했던 검이 그 뒤에 어떤 식으로 계속 권력을 발달시키고 있는가를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거예요. 지금부터는 어렵지 않아요. 앞부분은 전체적으로 압축을 했기 때문에 어려웠는데….

쉽게 말해서 자기생활과 신앙생활이 절단 나는 거예요. 끊어지는 거예요. 단절되는 거예요. 단절. -생활(生活), -생활(生活). 자기‘생활’, 신앙‘생활’. 자기생활은 일상생활이죠. 자기 일상생활과 신앙생활 중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보통 이 세상에서 누가 하는 걸 말하는 겁니까? 내가 하는 걸 말하죠. 내가. 난 엄마 옆에 있는 게 최고 좋아. 일상생활이죠. 내가 하는 거죠.

일상생활을 내가 하니까 신앙생활도 누가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한다고 생각하죠. 이것을 절단시키는 겁니다. 자기생활은 자기가 하되, 신앙생활은 본인이 하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죽음이니까. 생활이라는 것은 죽으려고 하는 게 아니고 살려고 하잖아요.

성도한테는 신앙생활 자체가 성립 안돼요. 신앙생활은 누가 하느냐 하면 주님이 주님의 죽음으로서 드러내는 게 신앙생활입니다. 드러내는 신앙생활을 크게 쓰겠어요. 성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신앙생활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지옥 확인’. 지옥 확인입니다.

예수님이 죽잖아요. 자살하진 않아요. 예수님에게 누가 덮쳐요. 평평한 질서체계가, 권력체계가 덮는데 이 덮는 권력체계가 요지부동으로 그냥 밀어붙입니다. 뭐 하나님이 오든 예수님이 오든 메시아가 오든 관계없어요. 권력체계는 막아설 수 없어요. 막아설 수가 없다고요. 누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고 바르게 살면 저 사람이 회개하고 반성하고 교회 나오겠지, 그러한 환상은 버리세요. 인간의 이성체제는 그냥 브레이크 없는 거예요. 브레이크 없는 벤츠 같아요. 그냥 밀어붙이고 나가는 거예요. 음주운전도 그런 음주운전이 없어요. 그냥 밀어붙여요. 막아설 수가 없다고요.

그럼 성도는 어떻게 사느냐? 거기에 받쳐서 깔리면 되는 거죠. 그게 뭐냐? 지옥 확인하는 거예요. 이상한 기대, 어떻게 바르게 기도하면 변화 받아서 회개하고… 이상한 기대는 안하시는 게 편해요. 안하시는 게 좋습니다. 안하시는 게. 그건 인간의 이성, 권력을 얕봐도 너무 얕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여러분들이 이해하시니까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 진행해봅시다. 그다음 쉬운 것, 아니 이게 쉬운 건지 어려운 건지 잘 구분 안 되는데…. 기독교 세계관하고 복음의 세계관이 정반대입니다. 이게 정반대에요. 복음의 세계관은 방금 제가 이야기했어요. 지옥 확인. 기독교 세계관은 뭐냐? 인간이 말없는, 이게 중요해요, 말없는 신에게 말을 건네는 것. 이게 기독교 세계관이에요.

여기 뭐가 중요하다 했어요? 말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계시는 죽으러 왔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자기 죽음과 관련되어 있고, ‘너도 나랑 같이 죽어’ 그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답변하거나 상담할 거리는 하나도 없어요. 제가 전에 설교 때 했죠.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치료는 뭐냐? 죽는 거예요. 죽는 것보다 더 깨끗한 치료방법은 없어요.

그런데 기독교 세계관은 뭐냐?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기독교니까 하나님에게 예수님에게 말을 건넴으로써 뭐를 수호하려고 하는 겁니까? 이 기독교 세계관을 수호하려는 시도가 기독교 들어오고부터 계속되었어요. 지금까지 계속됩니다. 어떻게 계속되었는가? 이게 교회사에 쭉 나와 있어요. 기독교 세계관의 수립.

그러니 기독교 세계관은 무엇과 반대입니까? 복음의 세계관하고는 정반대가 되죠. 정반대니까 기독교 세계관을 다른 말로 두 자로 하면 뭡니까? 이게 ‘지옥’이 되죠. 기독교 세계관이 지옥 되는 겁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반드시 여기에 무엇이 작용되어야 되는가? 인간의 이성이 작용되어야 돼요. 인간의 이성. 기독교로 평평하게 되는 거예요.

콘스탄티누스 대제(Magnus Constantinus). 로마가 있는데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유럽 이렇게 있는데 여기 이탈리아, 프랑스 이쪽에 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이쪽 이탈리아를 장악하고 있는 황제(막센티우스)와 마지막 결전을 해서 황제가 누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전쟁에 나설 때에, 그 사람이 PX가 겹친 표시로 승리를 했다는 거예요. 이게 그리스어로 ‘그리스도(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에요. 그리스도로 이겨라. 그걸로 이겼다는 거예요.

그때부터 서기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어요. 드디어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는데 밀라노 칙령이 뭐냐 하면 모든 로마 시민들은 자기가 원하는 종교를 자유롭게 믿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기독교 성직자는 부역에서 제외한다. 일종의 특혜가 되는 겁니다.

그 당시 동쪽에서는 그전에 기독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심했거든요. 박해가 심해도 동쪽 터키 이쪽에는 기독교 신자가 20%였고 나머지에는 10%였어요. 그렇게 박해해도. 그런데 391년 테오도시우스라는 황제가 기독교를 믿을 수 있다,가 아니라 기독교를 아예 국교로 정해요. 국교로 정하고부터 전체 기독교 신자가 80%로 증가했어요. 모든 공직에, 경찰, 군인, 그땐 경찰이 없었지만 하여튼, 모든 데에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 공무원이 될 수가 없었어요. 군인도 될 수 없고.

갑자기 신자가 급증합니다. 뭐 성령이 역사해서 그래요? 어떻습니까? 왜 갑자기 불어났죠? 칼. 다시 말해서 기독교라는 칼, 이 칼보다 더 센 칼이 없다는 것을 그 당시에 백성들은 감 잡은 거예요.

다시 한번 봅시다. 전에는 1.자연이 인간을 지배했죠.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잡신들을 많이 섬겼어요. 자연마다 신을 하나씩 해서 그냥 비리비리 기었단 말이죠. 그러다가 인간이 그다음부터는 뭐를 지배했습니까? 2.인간이 자연을 지배하죠. 여기에 동원된 게 뭐라고 했습니까? 이성이에요. 이성. 신에게 제사할 거 없다. 우리가 신의 비밀을 뽑아내서 그걸로 체계를 잡으면 되잖아, 체계. 그러면 하늘에 있는 신을 쳐다보고 제사할 게 아니고 우리의 지식과 이성을 뽑아내서 우리가 신의 질서를 다룰 수 있으면 되잖아.

그 다음에 세 번째가 뭡니까? 3.인간이 인간을 지배하죠. 보다 이성적 인간이 보다 무식한 인간을 다스리면 되겠죠. 그럼 이성적이라 하는 것은 그만큼 학문적으로 수준이 높은 자. 결국 이건 고위층이 돼요. 고위층.

이런 (세 가지) 과정을 통해서 이 안에 어떤 자세한 게 들었나? 인간이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인간이란, 모두가 나의 이야기를 해주길 바라요. 타인은 내 이야기를 해주는 대상체라고 여깁니다. 이걸 흔히 ‘관심사’라 해요. 관심사. 사람은 타인의 관심을 먹고 사는 거예요. 관심이 없으면 그 모임이라든지 단체에서 들썩들썩 나가요.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강의할 때 여러 번 했어요, 인간은 주변에 있는 타인의 평이 곧 내 자아가 되는 거예요.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내 이야기를 좀 해 달라 이 말이죠. 전에도 설교 시간에 이야기했는데 결혼 왜 한다 했습니까? 결혼을 왜 하느냐? 말이 통하니까 결혼을 하는 거예요. 말이 통한다는 말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거기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그 사람하고 결혼할 용의가 있다.

그런데 뭐 남자가 없다, 이 말은… 남자가 왜 없겠어요. 있는데 나보고 ‘너 누구고?’하고 그냥 지나가니까. 왜 나한테 관심이 없어? 내가 그렇게 못 생겼어? 내가 그렇게 뚱뚱해? 뭐 온갖 억측들을 전부 내세우는 거예요. 내 집안이 변변치 못해서 그래? 뭐 이런 거.

그런 데에 머리를 쓴다는 것은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나의 이야기를 해주길 바라는 거예요. 이 나의 이야기를 모을 때, 권력이 나에게로 굴러들어오는 거예요. 권력이. ‘봐. 내 편 많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 편 많아. 그런데 이것은 내가 타인에 대해 일종의 지배하는 게 되는 겁니다. 타인에 대한 일종의 지배.

지배가 되는데, 이렇게 남들이 다 나에게 이야기해주기를 다 원하지만 그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가 되고 이야기되는 사람을 영웅이라 해요. 영웅은 나중에 뭐가 되겠습니까? 왕이 되겠죠. 왕.

그러니 왕이라 하는 것은… 권력 속의 인간 중에서 최고의 권력자가 왕이 되는 이유가, 내가 뭐 감기 들고 목 쉬고 해도 별로 안 알아주는데 만약에 왕이 감기 걸렸다 하면 온 국민이 그렇게 관심사를 보내죠. 그러니까 내 이야기보다 왕 이야기가 월등히 더 많다 이 말입니다.

‘우리 집안이 말이야. 우리 집안에 이런 사람 있어.’ 왜 자기 이야기 안하고 자기 집안 이야기를 하냐 이 말입니다. 상견례 가서 ‘얘 형님이 판사입니다.’ 지금 판사하고 결혼합니까? 얘하고 결혼하지. 신랑 형이 판사인 것을 왜 언급합니까? 우리는 권력을 만만치 않게 갖고 있다는 거예요, 권력을. 보통 뼈대 있는 집안이 아니란 거예요. 뼈대만 남았지, 뭐.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권력은 나쁜 거다’하는 게 아니라 권력을 원하고 있어요. 이성에 의해서 권력을 추구하는 이걸 ‘주체’라 해요. 주체가 뭐로 바뀌느냐? 주체가 개별화로 바뀌어요. 주체가 개별화가 되면 이미 갖고 있는 권력을 기존의 나보다 센 권력 앞에 비굴하게 굽신굽신 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권력을 챙기는 식으로 자기생활을 하는 거예요.

‘제발 나보고 집에서 나가란 소리하지 마. 아빠, 엄마 관심 없으면 아무도 나한테 관심 없어.’ 아빠, 엄마 있음이 자기한테 하나의 권력이 되는 거예요. 그 권력이 있을 때만 자기는 주체가 되는 거예요. 주체가. 그래서 내가 몸이 있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주체가 확립되어야 돼요.

내가 여기 있어도 너 있나? 하고 관심 못 받는 사람들, 그걸 노숙자라고 이야기합니다. 노숙자에게 관심 없어요. 그런데 노숙자가 어느 날, 이상하게 바람에 날려 오는 로또에 당첨돼서 1등 돼가지고 그다음부터 중고 벤츠 한 2500만원주고 사서 타고 돌아다니면 그 다음부터는 그거 가지고 어디 가겠어요? 자, 노숙자가 벤츠 탔다. 갑자기 양복 딱 입고 제일 먼저 어디 가겠습니까? 자기 노숙생활 했던 그 자리에 가겠죠. ‘나 이런 사람이야.’ ‘야, 부럽다. 나 너희 회사 자리 나면 취직시켜줘.’ 갑자기 굽신거리죠. ‘너 노숙할 때 빵 남은 거 내가 반 나눠줬잖아.’ 이런 식으로 환심을 사고 관심을 획득하려고 애쓰는 겁니다.

그러면 기독교 세계관이란 것은 뭐냐 하면 말없는 신에게 호소를 함으로써 뭐를 정당화하느냐 하면 이 기독교 로마세계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인정받은, (내 이야기를 해줄) 그 타자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 로마시민 전체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왕이 하는 거예요. 콘스탄티누스 대제 그 사람은 죽을 때 세례 받았어요. 그 그림이 나와 있습니다. 세례 받은 그림. 기독교를 국교로 하고 난 뒤에 기독교 신자가 80% 되었다는 사실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1차 대전 끝나고 난 뒤에 유럽에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 제국 밑에 유고 연방이 있었어요. 유고 연방 아래 그리스 있고 지중해 있고. 있었는데 2차 대전 때 히틀러가 크로아티아를 독립시켜놨어요. 사실은 독립보다는 위성국가죠. (크로아티아는 나치 독일을 지지하고 부역하며 독일 지지하에 독립)

이름이 안테 파벨리치 (Ante Pavelić, 1889-1959)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세워지면서 국가 원수로 취임했는데, 유고 연방에 보면 슬로베니아-천주교, 크로아티아-천주교, 세르비아-러시아 정교, 중간에 보스니아-이슬람, 나머지는 잡동. 왜냐하면 오스만 제국이 1차 대전 때 이곳을 지배했기 때문에 이렇게 잡종이 섞였었어요.

아까 얘기한 안테 파벨리치라는 사람이 뭘 했느냐 하면,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유고 이 땅에 살 수 없습니다, 해서 종교 개종을 시도하면서 인종 청소를 했어요. 몇 명 죽었는가? 백만 명 죽었어요. 백만 명.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다 죽였습니다.(세르비아인 대량학살)

그럼 어떻게 천주교 신자인지 아는가? 십자가 성호를 한번 그어보라 해요. 위에서 아래, 왼쪽, 오른쪽 순서로 하면 천주교 신자에요. 그런데 세르비아 동방 정교는 위, 아래하고 오른쪽, 왼쪽 순서로 해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순간적으로 딱 물을 때 순간적으로 탁 튀어나오는 거예요. 3곱하기 3은 얼마? 9. 손가락도 천주교는 다섯 개 모아서 하는데 동방 정교는 세 개 모아서 하거든요. 다르면 단두대 목에 걸어 죽여 버렸습니다. 그때 신부들은 이 독재자를 도와주는 거예요.

왜 그런 짓하느냐?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일요일을 주일로 바꿨거든요. 그걸 왜 바꿔요? 일요일을 주일로 왜 바꿉니까? 벌써 그때 당시로부터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다신 세계를 기독교 일원화로 만드는 거예요. 이게 기독교 세계관이에요.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했다는 거예요. 지옥이 이루어진 것도 모르고.

백만 명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르비아가 나중에 2차 대전 끝나고 가만있겠어요? 백만 명 죽었으니까 두고 보자 하잖아요.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내전이 벌어져 (안테 파벨리치가) 죽었거든요. 티토라는 유고 사람이 유명한데 소련군에 포로 잡혀 와서 거기서 사회주의를 배웠어요.

빨치산이라 하는 거 있죠. partisan(파르티잔). 우리말로 하면 빨치산. 이 파르티잔 활동을 했는데 사회주의는 뭐냐 하면 이 민족주의, 종교 단일화를 어떻게 하면 없애서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나. 그것은 공산 사회주의 사상이 종교보다 우위에 있는 거예요. 왜? 이성적으로. 이성적으로 맞는 거예요. 종교로 인해 내전이 일어나서 나라가 완전히 엉망된 거예요. 백만 명 죽었잖아요. 그러면 종교보다 위에 있는 게 뭐냐? 사회주의에요. 사회주의가 더 환상적이에요. 환타지에요, 종교보다도.

물론 당연히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사회주의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라고 이야기했겠죠. 완전히 남미의 해방신학하고 똑같은 거예요. 사회주의, 빈부의 격차가 없는 것이 예수님의 진정한 복음 정신이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Misson 영화에 나오는 것.

그렇게 해서 그다음부터는 민족보다도 사회주의라는 종교에 동조하면 종교를 묻지 않고 형제로 봐 주겠다 해서 그 다음부터는 경제 발전에 치중했고 동유럽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가 됐어요. 티토. 티토가 87세로 죽습니다. 병들어 죽고 난 뒤에는 걱정을 많이 했어요. 나흘 동안 전 국민이 애도했습니다. 유고가 제일 잘 살았던 나라에요. 그 시기에.

티토 끝나고 난 뒤에 드디어 세르비아에서 복수의 칼날을 가는 거예요. 밀로 세비치(Slobodan Milosevic, 1941-2006)라는 지옥에서 올라온 검은 천사. 1989년도입니다, 극단적 민족주의로 해서 동방 정교 아닌 거 다 죽여 버려. 이제 복수에 나서는 겁니다. 복수에. 동방 정교 아닌 거 다 죽여 버려.

그러니까 천주교가 이슬람교와 손을 잡았어요. 이게 중요해요. 천주교와 이슬람하고 손을 잡는다는 거. 무엇 때문에? 권력 때문에 하는 거예요. 종교고 뭐고 살기 위해서는 뭐. 그 손잡은 나라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요. 손잡은 나라가. 그들과 세르비아가 드디어 한바탕 붙습니다.

그런데 세르비아가 왜 그렇게 세냐? 티토 때 경찰과 군인의 80%가 세르비아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니까 정규군이 힘이 세죠. 그래서 보스니아의 수도, 동계 올림픽으로 유명한 사라예보를 완전히 포위했어요. 거기를 완전히 포위해서 4년 동안 점령하는데 나토(NATO, 북대서양 조약기구)가 해도 너무 심하게 한다 해서 미국에서 평화협상해가지고 물러갔습니다.

여러분 한번 보세요. 어떻습니까? 종교보다 무엇이 더 세다? 민족주의. 종교보다 사회 잘 먹고 잘 사는 이것이 더 세죠. 그렇죠? 이게 역사적으로 증명이 된 거예요. 결국 이 이야기 들어보니 어떻습니까? 권력보다 더 센 게 없죠. 왜? 내가 권력을 추구하니까.

보통 보름이나 설에 해 보고 비는 사람들 있죠. 그들에게 ‘기도를 어떻게 했습니까?’ 물어보면 ‘그저 우리 가정 애들 다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때요? 그게 권력 집중화에요. 권력 집중화입니다. 그러니까 일상생활이라 하는 이것이 얼마나 지옥인가 하는 그걸 주께서는 성도를 통해서 확인해가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40628b 마태복음 26장 52절(지옥 확인)-이 근호 목사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말없는 하나님에게 자꾸 물어요. 기도하고. 왜 그렇게 하느냐? 현재 갖고 있는 걸 지키고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죠. 특히 사람들은 살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다. 이러한 인간의 기본적인 태도를 잘 보여주는 게 뭐냐 하면 바둑이에요. 바둑.

바둑 좀 두시는 한 분 계시잖아요. 여기에. 바둑의 특징은 두 집 못 나면 죽어요. 바둑 보면 까만 거 하얀 거 쫙, 판에 있잖아요. 바둑 못 두는 사람이 보면 야, 돌들이 전부다 쫙 깔려서 살아있네, 이러잖아요. 그런데 바둑 잘 두는 사람이 보면 그 돌들이 살아있는 걸로 보여? 죽었어. 왜? 두 집이 못 났어. 두 집이 못 나서 죽는다니. 한 집도 아니고 두 집이 못 나서 죽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럼 두 집 나면 어떻게 돼요? 사는 거예요.

바둑판이 가로 19줄, 세로 19줄 이렇게 있는데 바둑돌 놓으면서 이걸 집이라 해요. 집이 이만큼 많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따로 두 집 못 나면 죽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러느냐? 바둑을 상대방 한 번 둘 때, 나 한번 두고 번갈아가며 해요. 번갈아 하는 거예요.

인간의 기본은 거래에요. 거래. 하나님하고 거래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약속입니다. 약속은 거래하고 상관이 없어요. 거래하고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한번 두고 한번 두기 때문에 두 집이 나야, 둘다 한꺼번에 돌을 못 놓으니까 산 거예요. 그런데 한 집밖에 없으면 포위돼서 다 죽는 거예요, 바둑에서.

그래서 인간의 세계에서는 ‘너도 하면’ 누구도 한다? ‘나도 한다’가 되는데, 약속 세계는 약속의 계시 자체가 주님이 죽으러 왔기 때문에 인간이 무엇을 하든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아요.

누가복음 한번 봅시다. 누가복음 24장 25절부터 제가 읽어볼게요.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누가 누구를 설명한다고요? 예수님이 자기에 대해 썼던 모세의 글과 모든 선지자의 글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자신이 죽고 부활한 것과 관련된 내용으로 설명을 해주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약속인 거예요. 지금 인간하고는 거래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10장에도 그런 말씀 나오는데 로마서 10장 볼 거예요. 먼저 말씀드리면, 말하지 말고 들으라 이 말이에요. 말하지 말고 들으라. 사람들은 자꾸 상대에게 말을 걸어서… 아까 기독교 세계관이 뭡니까? 신에게 기도하고 신에게 자꾸 말을 하는 거예요. 말을 하는 게 뭐냐? 거래가 되어버린다고요. 이만큼 말을 많이 했기 때문에 어떤 성과가 있겠지. 평소에 인간이 인간하고 거래할 때 하는, 장사할 때 하는 그 식을 그대로 적용하는 거예요.

어디 바둑입니까? 나 한 수 두면 주님 한 수 두고. 바둑 둡니까? 누가 누가 잘하나. 몇 집 났는가 그거 볼라고? 바둑은 게임이잖아요. 바둑은 게임이라고요. 중국의 순나라가 만든 게임이에요. 천지의 이치를 아는 게임이에요. 천지의 이치라 하는 것은, 자연을 다스리는 게 누구였다? 인간. 인간과 인간 세계에서 너 한 수 두면 나 한 수 하고. 이래서 이루어지는 게 문화고 문명이고 국가고 사회다. 이게 공동체다 이 말입니다. 그게 바둑에 다 포함되어 있어요. 바둑에.

바둑이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누가 더 지혜로운지. 기회를 똑같이 주되 한쪽은 백 집 이기는 거예요. 백 집 지고 내 거 다 망해버리고 사기당해 망해버리고. 그럼 바둑 지는 거죠. 인생 졌지요. 거래했는데 뭔가 지혜가 모자라고 술수가 모자라서 또는 운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실패했죠. 아, 나 이거밖에 안되는구나. 원래 안 돼. 원래.

약속은 듣는 겁니다. 듣는다는 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로마서 10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10장 8절,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말씀이 어디까지 왔어요? 어디까지 온 거예요. 전하는 자는 누구냐? 주께서 보낸 자가 전하면 그걸 들음으로 마음으로 믿으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 참 쉽죠잉? 참 쉬운 거예요.

뭐를 빼야 돼요? 거래할 생각. 하나님과 거래할 생각을 하면 안돼요. 인간 대 인간하고 하는 모든 약속이나 거래는 이건 천국의 원칙이 아니고 조건도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 인정을 해줘야 돼요. 사고방식 자체가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을 해야 됩니다.

제 아내가 손녀를 가르치는데 가르치는 것을 옆에서 듣다가 제 아내가 손녀한테 한 질문에 대해서 제가 답을 못하겠어요. 너무 어려운 질문을 했어요. 질문을 한번 적어볼게요.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이 질문에 여러분 손들고 누가 답변해보세요. 초등학생 상대로 한 거니까. ‘새는 어떤 모양인가?’ 와아,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지요. 새는 어떤 모양인가. 저 띵-했어요. 답이 생각 안 나네요.

답이 생각 안 나니까 왜 이런 질문을 손녀한테 했는지 내가 추후에 알아봤죠. 보니까 뭐냐 하면 ‘비행기는 어떤 모양인가?’ 이게 보통 정설이거든요. 비행기는 어떤 모양인가. 정답은 뭡니까? 무슨 모양? 새 모양이죠. 그런데 질문을 바꿔버린 거예요. ‘새는 어떤 모양인가?’ 정답은 비행기가 되는 거예요. 비행기.

그럼 도대체 이 자연을 누가 장악한 거예요? 인간이 장악했다는 심오한 철학이 이 안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추이를 보니까 제 아내가 질문을 반대로 했어요. 반대로 한 것 같아요. 비행기는 어떤 모양인가, 이렇게 질문해야 했는데 새는 어떤 모양인가. 생전 이런 질문은…새는 새 모양이지. 진짜 이거는 수능의 독소조항. 킬러문항 같아.

그것이 바로 성경에도 나와요. 발상을 바꾸지 아니하면 성경을 전혀 이해 못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언약은 국가 안에 있다.’ 보통 언약을 찾으려면 하늘을 쳐다봐야 되잖아요. 이게 우리의 생각인데, 이런 우리 생각의 발상을 전환해야 돼요. 우리 안에 이미 언약이 어디에 숨어 있느냐.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숨어 있느냐’에요. 숨어 있느냐.

‘어디에 숨어 있느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마귀를 통해서 국가라는 것을 만들어서 국가가 국가 형태로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 거기에 목적이 있었던 거예요. 언약을 감추는 목적으로 국가가 성장해왔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성경 전체에서.

아까 첫째 시간에서 봤듯이 우리는 무엇을 지향합니까? 권력을 지향하죠. 권력을. 사사기 9장 보겠습니다. 사사기 9장 보고 그 다음에 고린도전서 2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사사기 9장은 구약이고 고린도전서는 신약이거든요. 구약을 바탕으로 해서 신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사사기 9장,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 어미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외조부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가로되” 2절에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인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의 골육지친임을 생각하라”

이게 기드온의 아들들 사이에 기드온이 죽고 난 뒤 권력투쟁의 양상을 보여주는 거예요. 권력투쟁. 기드온에게 권력이 있었습니까? 권력이 없잖아요. 없는데 그 당시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이겨서 압제에서 해방되니까 그들은 미디안이 압제했던 권력을 그들이 인수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들이 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들에게 뭐가 있었는가? 영웅이 있었죠. 영웅에 대한 잔상. 그들에게 영웅은 누구였습니까? 죽은 누구였습니까? 바로 기드온이었던 겁니다.

고대 사람들에게 신의 계시란, 기독교 이전에 복음 이전에 신의 계시란 이거였어요. 공동체 내에 오래오래 살아남는 신화의 내용이에요. 이게 신의 계시에요. 공동체 내에 오래오래 살아남는. 잊혀지는 게 아니고 오래오래 살아남는 내용이 신화의 내용입니다.

우리나라에 그런 사람 있죠. 이순신, 그다음에 세종대왕. 유명한 문화유산이 되죠. 이순신 장군. 그들이 우리 민족의 영웅이죠. 신화적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 신화적 존재가 현대에도 살아있습니다. 현충원. 6.25때 나라를 지켜줬던 순국선열들이 묻힌 장소. 그곳이 귀신 나오는 곳이죠.

거기에 동성애 하사도 묻혔습니다만. 동성애해서 자살한. 나 여자라 해줘, 해서 자살한 사람도 거기에 묻혔거든요. 순국선열. 오래오래 공동체 내에 살아남는. 그 동성애 하사, 성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하사를 왜 거기에 묻었는가. 그것은 이 답답한 세대가 지나고 앞으로 나중 세대가 되면 모든 세대가 다 동성애를 정상적으로 인정할 그때에 이 하사가 순국선열에 포함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참.

인간에게 있어서 신이라는 것은요. 신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신의 보호를 받는 우리 공동체, 민족 공동체든 혈통 공동체든 우리 공동체가 신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 공동체를 지금껏 유지하도록 도와주신 신을 그들이 신화의 주인공으로 삼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이 있으면 우리가 현재 믿는 신이 하나님이 이 사람을 영웅시했고 영웅적인 희생 때문에 아직도 우리 공동체가 이 땅에서 살아남았다. 그게 그들에게 하나의 결속 요인이 되는 겁니다.

공동체 우선이라는 말은 결국 ‘우리를 생존케 하는 권력이 신보다 더 우세하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지난 주일 낮 설교(240616 ‘강퍅의 구조’) 때도 했듯이 바로 왕이 왜 자꾸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가. 그 이유가 뭐냐? 왕이 하는 일은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자기 공동체를 지키는 것이 본인의 사명이에요. 따라서 그 히브리인들을 내보내면 어디에 결손이 일어나는가? 지금 바로 나라에 노동자 계급이 함몰되기 때문에 그들을 보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강퍅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런데 바로 입장에서는 강퍅이 아니고 본인이 해야 될 일이에요. 왕의 지위에서 해야 될 일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성경의 이 내용은 어느 인간치고 강퍅하지 않은 인간이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강퍅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애굽 나라라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인간들은 뭘 원하느냐 하면 각성을 원합니다. 각성. 정신 차렷! 각성의 반대말이 뭐겠어요? 회개입니다. 각성의 반대말이 회개에요. 회개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와 더불어서 함께 기꺼이 죽는 것, 그게 회개죠. 회개가 되려면 이 세상 말고 다른 더 넓은 세계관이 형성되어야 해요. 복음적 세계관이 형성되어야 돼요.

기독교 세계관은 각성을 원해요. 교회라는 조직이 있잖아요. 공동체 있잖아요. 그럼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이 말로는 회개를 원하지만 진정 원하는 건 뭡니까? 각성을 원해요. 여러분들이 교회 없이 구원받겠습니까? 각성하세요. 이 각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 사사기 9장을 보게 되면 그래서 70명을 다 죽였어요. 70명을 다 죽였다고요. 누가?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그러니까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나머지 형제들을 다 죽인 겁니다. 이게 어느 나라라고요?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은 뭐가 있기 때문에? 부동산이 있기 때문에. 지금 약속의 땅에 있는 거예요. 자기 소유가 있어요. 이걸 지키는 위해서는 모든 권력이 한 곳에 결집된 영웅적인 존재가 등장해야 돼요. 왕이 등장해야 돼요. 왕.

그래서 사사기 9장 8절에 보면,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뭐를 삼으려 한다? “왕을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왕이 되라 하매”하고 왕 뽑는 상황을 조롱하면서 요담이 나무에 비유해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요담의 주장은 뭐냔 말이죠. 아비멜렉이 왕 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이 하나님 뜻이 아니라면 그럼 요담 네가 말한 하나님 뜻은 뭐냐? 이스라엘 내에 왕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회개가 필요하죠. 왕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회개가 필요한 거예요.

아버지 기드온이 처음에 방앗간 하고 있었죠. 방앗간 농사꾼이었잖아요. 그런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더니만, 천사도 찾아왔죠, 신이 임했더니만 기드온이 그다음부터는, “하나님이 왕이시다. 하나님이 왕이시니까 인간과 하나님 간에 거래 같은 게 필요 없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약속대로 할 겁니다.”라는 것을 증거하는 자가 기드온으로 바뀐 거예요.

처음에 기드온에게 천사가 왔을 때는 “제가 못합니다.” 했죠. 제가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기드온이 처음에 어떻게 착각했습니까? “제 실력으로 능력으로 제 믿음으로 안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했단 말이죠.

그게 무슨 이야기에요? 제가 갖고 있는 권력으로서는 저 미디안 권력을 못 이긴다는 거예요. 꼭 열두 제자가 칼 들고 다니는 거랑 똑같아요. 지금도 저 아라비아 반도에 오만이란 나라는 남자들이 요만한 칼 들고 칼 차고 있어요. 참 오만하기 짝이 없죠.

칼 들고 권력을 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걸 모르는 거예요. 두 번째 시간에 이게 상당히 중요합니다. 인간들이 자기 권력에 대해서 권력이 있다, 없다를 따지는 그 자체가 뭐냐? ‘나는 갈 데가 없다’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갈 데가 없다. 이스라엘이 이걸 알았어야 해요.

나중에 기드온이 이걸 압니다. 왜냐하면 거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래라 하는 것은 누구의 가치가 아직도 살아있어요? 내가 가치 있고 없고가 아직도 따짐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약속은, 이미 약속으로 옴팍 뒤집어 씌워질 때는 나는 그 약속 바깥으로 갈 데가 없어요.

이걸 누가 아셨는가? 바로 예수님이 이걸 알았어요. 나는 이 땅에 이미 죽은 몸으로 왔다. 사람들에게 찔리기 전에 이미 나는 죽은 몸이다. 나는 다른 경우의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게 바로 하나님의 계시 아닙니까. 나는 죽으러 왔다. 요한복음 10장에, 나는 이 땅에 죽으러 왔다.

이 말은 우리에게 어떻게 들려야 돼요? 너도 마찬가지야. 너 갈 데 없어. 그냥 집에 있어. 있다가 죽어. 너 갈 데 없어. 그냥 죽어. 우리 모두의 신세가 그런 신세에요. 이게 복음적인 세계관이고 이걸 알 때 이걸 회개라 합니다. 이게 기쁨의 회개에요. 내 자리는 내가 정한 게 아니에요. 이미 약속에 의해서 정해진 거예요. 예수 안에서 약속 안에서 이미 정해진 겁니다.

다윗이 왜 언약궤 앞에서 춤을 췄는데요. 저 언약궤는 내가 만든 게 아니에요. 그냥 언약이 고맙게도 알아서 나한테 점령하러 접수하러 온 거예요. 마치 신랑이 올 때 신부가 기뻐하는 것처럼.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나 한 수 두고 주님 한 수 두고, 이게 아니고 그냥 쳐들어오시는 거예요. 그냥.

그래서 아까 누가복음 24장에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그들이 엠마오로 내려가는데 일방적으로 누가 왔어요? 부활하신 주님이 옆에 바짝 붙어가지고 그 두 제자에게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고 일방적으로 나무라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라고 그들에게 이야기하니까 그들은 도로 예루살렘에 가서 ‘예수님 부활했습니다’하고 예수님 만났다고 증거하잖아요.

내가 어떻게 된다 하는 그것은 성도의 의식 속에 이건 용납이 안 되죠. 내가 어떻게 된다는 것. 주님이 뭘 하셨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어떻게 된다는 것은 아무 문젯거리가 안돼요.

기드온은 처음에는 하나님을 시험했잖아요. 양털가지고 시험했죠. 시험한 이유가 내가 어느 정도 믿음으로 장착해야 되는가, 내가 믿음을 어느 정도 소지해서 내가 나설 수 있나 하는 그러한 인식을 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처음의 기드온은 ‘비행기는 어떤 모양?’ 이런 질문에 대해서 ‘새 모양’ 이걸 본인은 정답으로 여겼던 거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새는 무슨 모양? 완전히 새 됐어. 기드온 자체가 완전히 약속의 사람 된 거예요. 기드온 자체가. 내가 뭘 하고 안 하고가 아니라. 주님이 가셔야 될 길을 기드온이 그냥 간 겁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바로 요한복음 3장 6절, 7절, 8절에 나오는 것. ‘내가 어떻게 나를 출산할 수 있는가’.

거래하는 것만 알았던 내가, 그런 내 안에서 어떻게 약속에 눈을 뜬 그런 나를 어떻게 출산시키는가. 당연하게 이걸 누가 하겠어요? 약속이 하겠죠. 약속이 하려면 아까 언약이 국가 안에 들어온다 했잖아요. 더 명확히 이야기하면 언약은 이스라엘 국가 안에 들어가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폭파시켜버리죠.

그런데 신약이 되면 언약은 모든 나라 안에 언약이 다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유대나라가 다른 이방나라의 대표가 되는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가기 때문에. 포로 잡혀 감으로써 멈추지 않는 출애굽 사건의 연속을 포로 잡힌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속해서 사용하셔서 그 취지를 드러내는 거예요.

출애굽이 되려면 탈출이 있어야겠죠. 탈출 없는 출애굽이 없잖아요. 탈출이 있어야겠고 탈출하는 방식이 있어야겠죠. 처음 출애굽은 뭡니까? 유월절 어린 양으로 했잖아요. 그 어린 양이 인격이 된다면 어린 양 자체가 짐승이 아니고 인격이 된다면 그 인격이 언약이 적용되는 범위를 확장하겠죠. 확장.

파쇄된 이스라엘 유대나라의 흩어짐과 동일하게 확장될 겁니다. 유대인들은 포로 잡혀서 각지로 흩어졌잖아요. 바벨론만 간 게 아니에요. 이집트도 많이 갔고 이집트 간 쪽이 바벨론보다 더 많을 수도 있어요. 많이 갔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어떻게 했냐? 호세아서라든지 선지자서를 보게 되면 흩어진 내 백성을 다시 끌어 모은다고 되어 있어요. 그냥 모으는 게 아니고 흩어진 내 백성.

흩어진 내 백성이니까 그 흩어진 백성들이 어디에 있겠어요? 각자 자기 나라에 출생되어 있죠. 출생된 거기서 자기 언약적 백성을 출산시키는 작업을 주께서 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그걸 하느냐? 바로 사사기 9장에 의하면, 언약이 국가 안에 있다. 같은 말로, 이 세상 국가가 언약이 못 나오도록 밟고 있다,라고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언약은 의도적으로 국가에 밟히는 방식으로 그 안에 감추어져 있게 되어 있어요.

사사기 9장에 지금 권력을 득세한 자가 누구입니까? 아비멜렉이죠. 깡패 아비멜렉. 형제들 다 죽여 버리고 자기 혼자 왕이 되려고 하는 겁니다. 자, 아비멜렉이 왕이 된다 할 때 그 당시 백성들은 뭐하고 있었습니까? 거기에 동의했습니까, 반대했습니까? 동의했어요, 반대했어요?

이 질문은요. 아까 첫째 시간에 했던 것, 밀로 세비치라든지 그런 독재자, 인종 청소하는 그런 자들에게 그 당시 국민들은 뭐했습니까? 히틀러가 나서서 유대인 청소할 때 그때 독일 국민들은 뭐했죠? 참고로 말해서 독일의 수용소는 독일부터 시작됐어요. 독일에 수용소 만들고 처음에 집어넣은 사람들이 장애인들, 정신병자들, 그리고 여호와 증인들, 동성애자 이 사람들을 집어넣고 거기다 목사들, 성직자들을 집어넣었어요. 성직자들을 집어넣었습니다. 나치에 반대하기 때문에. 그때 국민들은 80%가 나치를 동조했어요.

왜? 왜 동조했을까요? 경제난 때문에. 1차 대전 일어나고 난 뒤에 배상금을 갚을 길 없는 경제난 때문에. 돈, 이 돈이 궁하니까 노동 사회주의라는 히틀러 당에 그들은 힘을 실어준 거예요. 힘을 실어주지 아니하면 누구도 독재자가 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지금 옆의 개개인한테 물어보세요. 올해 사는 목적이 뭐며 만약에 기도한다면 뭐라고 기도하겠습니까? ‘그저 우리 애 건강하고 우리 가정이 행복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뭐 소박합니다. 다른 욕심 없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힘 실어주는 거예요. 내 권력을 위해서 더 센 권력 밑에 나는 얼마든지 굽신거릴 용의가 되어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살기 위해서 누굴 믿어요? 하나님을 믿씁니다. 살기 위해서. 나와 내 가정이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어요. 믿을 때 바둑 두듯이 이만큼 해드렸으니까 이만큼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정성과 성의를 다해서 신에게 하죠. 이들의 무식한 점은, 뭘 몰라요? 이미 우리는 갈 데가 없다는 거예요. 갇혀있는 상태란 사실을 꿈에도 생각 못해요. 이미 우리는 지옥에 갇혀있다는 사실.

그들은 권력이 있고 거기에 갇혀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권력이 있는 게 아니고 권력 안에 숨어있는 그 언약에 갇혀 있어요. 이제는 그 언약이 기지개를 펴고 권력을 뚫어줘야 권력밖에 모르는 나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나가 출산되는 그러한 새로운 현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출산되는 자아를 가지고 성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럼 첫 번째 시간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계시는 뭐냐?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님의 죽음이 살아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이 살아있으면 예수님의 모든 계시는 죽어 마땅함으로 살아있고 죽어 마땅함을 아는 자가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출산되는 그러한 결과로 이어지겠죠. 물론 주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신약에서는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나중에 고린도전서 2장을 보겠습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바에 의하면 제 나름대로 이렇게 표현했어요. ‘권력에 인간은 취해 산다.’ 인간은 흐느적거리면서 늘 권력에 취해 살아요.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저녁 잘 때까지 권력에 취해 살아요. 남이 가져다주는 권력, 나에게 관심을 주면서 가져다주는 권력 같은 것. 내가 안심하고 내가 나의 나됨을 지켜줄 수 있는, 보장해줄 수 있는 그러한 권력.

나무 심으면 뭐가 보완되어야 돼요? 흙들이 밑에 뿌리에 든든히 있어줘야 되죠. 든든히 해주는 그 권력, 그 권력을 사람들은 원하고 있어요. 따라서 이성은 종교가 되는 겁니다. 이성은 현대판 신화가 되는 거죠. 이성, 이성하면서 사실 인간은 권력이라는 종교, 신비 종교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준비한 팝송이 하나 있어요. 집에 가서 나중에 한번 들어보세요. 제목은 ‘테네시 위스키(Tennessee Whiskey)’. 한글 가사를 한번 적어볼게요.

Tennessee Whiskey (2015, Chris Stapleton)

Used to spend my nights out in a barroom
술집에서(벌써 분위기 이상하잖아요) 밤을 보내곤 했었지
Liquor was the only love I've known
나한테 사랑은 술뿐이었어
(노래제목도 테네시 위스키(아메리칸 위스키의 한 종류)에요)
But you rescued me from reachin' for the bottom
하지만 내가 바닥까지 떨어지기 전에 네가 날 구했지

이 말은 뭐냐? 인간이 술 먹는다는 말은 무엇이 고갈되었다는 말입니까? 자기를 지켜주는 권력이 고갈되었다. 권력이 고갈되면 술, 담배, 마약 그 외에는 기댈 것이 없죠. 그러니까 어떤 여자가 찾아왔다면 이 여자는 뭐 대용입니까? 술 대용이었어요.

And brought me back from being too far gone
너무 가기 전에 날 데리고 돌아와줬어

그러니까 이 사람은 자기에게서 자기가 떼어집니까, 출산됩니까, 아니면 전에 있던 자기를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 유지하고 싶은 거죠. 인간에게 있어서 권력을 떠나버리면 곧 죽음이기 때문에 죽기 싫은 거예요. 내가 익숙해진, 그동안 내가 살았던 권력-비행기는 어떤 모양? 새 모양. 그 질문과 답변에 익숙해진 거예요.

새는 무슨 모양? 이거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에요. 그러니까 뭐든지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질문해주면 내가 답변할 용의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내가 기존에 알고 있는 것. 내가 기존에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질문해주면 나를 지켜줬던 지식으로 보답해드리겠습니다. 이건 뭡니까? 약속이 아니고 거래죠. 약속은 우리가 지옥에 있다는 것을,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이 약속이에요.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그겁니다.

*​You're as smooth as Tennessee whiskey
넌 테네시 위스키 같이 부드러워
You're as sweet as strawberry wine
넌 딸기와인 같이 달콤해
You're as warm as a glass of brandy
넌 브랜디 한잔같이 따뜻해
And honey, I stay stoned on your love all the time
그리고 자기야, 난 항상 네 사랑에 취해있어

I've looked for love in all the same old places
난 모든 옛 곳에서 사랑을 찾았었어
Found the bottom of a bottle's always dry
병의 바닥은 항상 말라있다는 것을 발견했어
But when you poured out your heart I didn't waste it
하지만 네가 사랑을 퍼부어줬을 때 난 낭비하지 않았어
'Cause there's nothing like your love to get me high
왜냐면 네 사랑으로만 내가 취할 수 있기 때문에

*반복

이 팝송을 소개한 것은, 인간은 때려죽여도 스스로 자기를 벗어날 수 있다, 없다? 없어요. 술, 담배, 마약을 찾는 이유가 자기를 못 버리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입장에서 신약에서는 권력으로 어떻게 빼내주시는가? 약속은 어떤 힘으로서 권력으로서 빼내주시는가?

그게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6절부터 보셔야 돼요.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그다음 뭡니까?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무엇의 지혜도 아니다?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관원이 뭘 갖고 있어요? 권력을 갖고 있죠. 너희들이 그렇게 비실비실대고 굽실굽실대는 그 관원의 지혜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부모로부터 태어난 이 자아는 어쩔 수 없이 권력을 가진 자아에서 못 벗어나요. 왜? 갈 데가 없으니까. 힘 없이는 못 사니까 베드로가 늘 칼 들고 설치는 것처럼 우리는 나름대로의 어떤 무기, 지식이든 칼이든 있단 말이죠. 그런 나를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그럼 우리 선에서 처리하는 게 아니고 그 권력에 숨어있는 다른 분이 처리를 해줘야 돼요.

그다음 7절 봅시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오늘 주제, 감추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절에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했다는 말은 관원만 알지 못한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이 숨어있는 약속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말입니다. 아무도 없는 거예요, 이게.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하면서 형식, 주님의 계시의 형식은 오직 십자가뿐이란 것을 여기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는 뭐지? 십자가. 십자가가 뭔데? 그 누구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심지어 십자가 죽였던 그 관원들도 십자가가 뭔지 몰라요. 예수님을 죽이고 십자가 사건이 터진 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십자가에 대해서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뭘 모르느냐? 그게 바로 2장 14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15절 다같이,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여기 신령한 자의 출산이 됩니다. 출산드라. 신령한 자의 출산드라.

모든 인간은 신령한 자가 아니에요. 신령한 자가 되려면 사건이 터져야 돼요.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터져야 돼요. 십자가 사건은 이미 이 땅에 출생된 어느 누구도 어느 인간도 알 수 없었던 그 사건이에요. 그 십자가 사건인데 하나님 속에 숨어있었던, 10절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성령은 모든 것, 다른 말로 하면 계시의 모든 것, 하나님만이 알수 있는 모든 것이 성령을 통해서 한꺼번에 우리에게 다 주어졌죠. 그러면 우리가 이걸 한꺼번에 다 알고 있단 말인가? 지식을 소유할 수는 없어요. 주께서 그다음부터 우리를 다루고 있으면 우리가 이 땅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성령을 주신 것들이 우리 몸을 통해서 계속해서 꾸역꾸역 드디어 발산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성도의 존재 이유는 이 세상이 바로 십자가 주를 몰라서 주를 죽일 수밖에 없는 그 지옥의 힘이 곧 이 세상 사람들이 선호하는 권력의 힘, 실체였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이 성령 받은 성도가 하는 일이에요.

별로 어렵지 않았죠. 주님의 사랑에 취해서 하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술에 취할 때 우리는 주님 사랑에 취해서 이걸 하기 때문에. 사랑에 취했다는 말은 성령에 취했다는 말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나한테 하게 하셨죠. 하게 하신 겁니다.

그러면 하게 할 때 어떻게 하는가? 우리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나요. 우리는 육신이라서 자꾸 주님하고 거래할 생각을 해요. 이만큼 알았으니까 이것가지고 지금이라도 천국 갈 수 있죠, 그렇죠? 그럼 이제 천국 가는 거 보장 된 거죠? 맞죠? 자꾸 내가 갖고 있는 것과 거래하려고 하는데 그 갖고 있는 자체가 나를 위한 권력이 되잖아요. 이거는 기독교 세계관이죠. 복음적 세계관이 아니에요.

증거해야 될 것이 무엇이 복음을 누르고 있고 덮고 있는가를 증거해야 될 텐데, 나는 살았지롱 이걸 자꾸 내세우는 거예요. 목사님 저 구원받은 거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걸 내세우는 거예요. 비행기는 무슨 모양입니까? 질문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을 해버려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에 대해서 입을 다물게 하고 우리가 질문 자체도 만들어낼 수 없는 질문을 우리로 하여금 나오게 하는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없는 질문, 그 질문을 우리 선배격인 사람들이 먼저 해왔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들이죠.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선지자가 공격하는 대상이 있었어요. 누구겠습니까? 수요일에 했어요. 왕. 왜 선지자가 왕을 공격하죠? 왕이 뭐를 덮고 있기 때문에? 왕이 언약을, 하나님의 약속을 덮고 있는 거예요. 왕이 왜 약속을 덮습니까? 왕은 자기 소유의, 자기가 왕 되는, 자기가 영웅 되는 왕 자기 소유의 부동산과 백성들, 자기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에 이걸 지켜내기 위해서 언약을 그냥 덮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이 덮여있던 언약을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공개하니까 왕이 누구를 공격하고 핍박하겠습니까?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이겠죠. 그러면 이 선지자가 죽는 죽음 가운데서 많은 선지자가 있지만 그중 한 사람을 대라면 삼손이었습니다. 삼손은 나실인,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는 것을 언제 제대로 알았느냐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던 힘이 다 뽑힐 때, 눈이 뽑히고 머리카락 잘릴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내 힘이 필요한 게 아니고 나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죠. 나의 죽음이.

그러면 질문을 아까 ‘새는 어떤 모양입니까?’ 그 문장에 맞추어서 질문하면 이렇게 되죠. ‘나의 죽음은 어디에 쓸모 있습니까?’ 이 반대 질문은 ‘내가 살기 위해서 뭘 믿을까요?’ 그게 반대 질문이죠. 내가 살기 위해서 뭘 믿을까요,가 아니라 나의 죽음은 주께서 어디 쓰실 겁니까.

그게 바로 누구 고백입니까? 삼손이 마지막에 했던 고백이죠. 여러분, 삼손이 굉장히 장렬하게 느껴지고 대단하게 느껴지십니까? 그런데 모든 인간은 진즉에 이미 죽은 채로 태어나요. 왜냐? 예수님은 사람에게 죽기 전부터 그 몸 자체가 죽을 몸으로 이 땅에 주어졌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결부된 죽음이냐, 아니면 언약과 십자가와 관련 없는 죽음이냐. 관련 없는 죽음은 뭐 지옥 갈 것도 없어요. 살아있을 때부터 지옥이고, 관련 있는 죽음만이 주님 나라의 백성인 것을 주께서는 매순간 드러내겠죠.

이런 사실을 요한복음 12장에서 25절입니까,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그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시고 이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누가 오신다? 성령이 모든 것, 계시를 다 쥐고 계시는 분이 이 계시까지 포함해서 우리의 남은 인생에다가 이것을 우리 안에 집어넣죠.

그러면 우리의 육신은 옛날 구약 때 왕처럼 막 약속을 누르지만 그걸 누가 이겨요? 우리 속에 있는 말씀이 그걸 이겨내고 우리로 하여금 말씀대로 우리 인생이 사는 것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범사에 고맙고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계시가 오늘날 성도와 하나님의 성령 받은 공동체를 통해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렇게 해야 될 이유가 이 세상이 지옥 그 자체인 것을 우리가 속 시원하게 밝히 드러낼 수 있는 그러한 기쁨의 사명감을 저희들에게 허락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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