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40329a 요한복음 19장 33절(몸이 다르다)-이 근호 목사
오늘은 p.44【무엇이 계시인가】비중 있는 주제죠. 전체를 포괄하기 때문에 담긴 내용의 무게감이 상당할 겁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 계시에 대해서 성경에서 요약하게 되면 간편해요. ‘계시는 예수님의 몸이다’ 간단하잖아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까.
여기서 이제 확장해보는 거예요. ‘계시는 예수님의 몸이다’ 이 내용을 늘이면 ‘인간에게 찔리신 몸이다’ 이게 계시가 돼요. 인간에게 찔리신 몸이다. 그럼 인간에게 찔리지 않은 몸은 계시가 아니죠. 계시란 하나님의 뜻이거든요. 계시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존재한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만약 계시가 없다면 이 세상은 인간들의 의견과 인간들의 생각들을 종합해서 인간들이 인간세계를 꾸려나갈 거예요. 계시가 없으면.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드러나니까 비로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시가 개시된 거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게 된 겁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계신다(존재하신다).’가 성립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몸이 등장했을 때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가 되는 게 아니고, 계시의 궁극적인 끝은 인간에게 찔리신 몸으로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포함되어야 돼요.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찔리신 몸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1장 7절에도 그런 말씀 나오죠.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이렇게 되어 있죠.
예수님의 재림이 주는 취지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 분은 메시아냐 아니냐는 모든 논쟁 자체가 더 이상 성립 안 됩니다. 재림 때 모든 자가 그 분을 보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실 때 예수님이 계셨던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봤습니까, 안 봤습니까? 봤죠. 봤는데 그들이 내린 결론은 뭐냐? 예수님을 찌른 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굳이 나서서 목숨 걸고 반대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뭐니 뭐니 해도 중요한 것은 이거에요. ‘찔리심’. 그것도 누구한테? 인간에게 찔렸다는 거예요. 인간에게 찔렸다. 에이, 죽어라 하고 찔러버렸다는 거예요. 그럼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인지 답 딱 나왔죠. ‘나는 여기 있다’로 규정하면 안 되고 ‘인간은 오신 하나님을 찌른 자’, 바로 이게 인간인 겁니다.
오신 예수님을 찔러버린 자들을 인간의 원형 또는 인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이든 인간이든 다 같이 합쳐서 하나님의 계시에 통합이 되는 거예요.
오늘 p.44【무엇이 계시인가】지금 이 대목을 하고 있습니다. 자, 무엇이 계시인가? 이 점에 대해서 인간들은 정답 알기를 원하죠. “무엇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하게 되면, 너. 네가 너를 아는 게 계시가 되는 거예요. 너 자신을 아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궁금해 했던 것. 소크라테스는 결국 몰랐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궁극적으로 안 게 뭐냐 하면 인간은 소경이라는 것, 그거 하나 알았어요. 인간은 소경이다. 그러면 플라톤이 제자니까 “선생님, 인간은 왜 소경입니까?” 분명히 이렇게 물었을 거 아니에요. 인간은 왜 소경입니까. 소크라테스 답변은 “인간이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해보니 소경이다.” 이렇게 된 거예요.
아, 여기서 모순점이 등장해요. 인간은 내가 모든 것을 알 수가 없는 소경인데 아무리 소경이라도 생각해보면 내가 소경이라는 걸 안다는 점에서는 그것까지는 완전한 소경이 아니다,가 되어버려요. 완전한 소경이 아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 그게 철학의 기본이거든요. 사유하고 사유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해보면 인간은 아, 아는 게 없다, 이런 거. 어떤 의미에서는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그게 전부가 되겠죠.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이 그러한 이방인, 헬라인,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철학가보다 훨씬 위대하죠. 그들은 메시아를 죽였으니까요. 찔렀으니까.
아까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의하면 주님께서 재림을 하실 때 재림의 취지라 하는 것은, 전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던 마리아 몸에서 태어난 그 당사자하고 재림하는 당사자가 똑같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게 재림의 취지거든요. 똑같다.
그때의 예수님이나 재림하는 예수님이 똑같다면 그럼 예수님 몸에 일어났던 변화 있잖아요, 찔림을 받는 이 변화를 통해서 자기 자신이 누가 진정한 나인가를 아는 것은 누구 몫이에요? 인간들이 알아야 되겠죠. ‘인간들은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에 대해서 찔러 죽인 장본인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 점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계시다(존재한다)’가 된다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가 돼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찔렀으니까. 나는 존재하고 예수 당신은 존재하지 마! 하고 찔렀으니까. 이 존재싸움에서, 우리는 있어야 마땅하고 너는 죽어야 마땅하다는 인간나라의 존재싸움에서 예수님은 없어져야 될 대상이 되니까 존재는 누구만 있어야 된다고 고집합니까? 인간만 존재해야 된다는 걸 고집한 거죠.
그런데 그 예수님이 재림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존재할 가치가 없이 됐죠. 인간은 존재할 가치도 없는 게 인간들이 메시아에 대해서 그렇게 비난하고 찔렀다면, 그래서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존재하느냐? 여기 누가 존재하느냐 하면 악마가 존재하죠. ‘악마가 존재한다.’ 그럼 인간은 한시적인 임시적 존재죠. 안개 같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거고 영원히 남아있는 것은 악마가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자의 후손의 적은 인간이 아니고 누가 적이죠? 뱀의 후손이 적이 되는 거예요. 인간세계에서는, 예수님은 인간 손에 죽었으니까 예수님은 없어졌다. 그리고 악마는 원래부터 눈에 안 보이니까 없다. 인간세계에서는 맨날 뭐만 있어요? 같은 인간들만 있겠죠.
배후에 악마가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죽이라고 했기 때문에 여기서 ‘계시란 무엇인가’ 이것은 ‘반대되는 계시는 무엇인가’하고 같이 겸해서 설명되어야 돼요. 계시에 반대되는 것. 계시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몸’이라 했죠. 그럼 이 계시에 반대되는 건 뭐겠습니까? ‘인간의 몸’이 되겠죠. 인간의 몸.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도 나왔지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성도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위해 살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죠. 그러면 인간이 내세우는 계시는 뭐냐? 누구를 위하여? 자기 몸을 위해서. 자기 몸을 위해서 사는 것. 하나님의 계시에 반대되고 대적이 되는 그것을 인간들은 날마다 뿜어내죠. 생각이라든지 아까 소크라테스도 그렇고 이 모든 것은 계시 곧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것을 꾸역꾸역 계속 토하고 있고 제시하고 나타내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 테니까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토끼가 깡충깡충 뛰고 있다’ 이걸 토끼가 이야기합니까, 아니면 누가 이야기합니까? 토끼를 지켜본 인간이 이렇게 이야기하죠. 토끼는 본인이 깡충깡충 뛴다고 이야기 안하죠.
인간에게 있어서 계시라 하는 자체가 ‘계시가 무엇입니까? 계시를 따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합니다.’ 이것은 누가 지어낸 거예요? 계시에 반대되는 인간의 몸이 자기 몸을 사수하기 위해서 지켜내기 위해서 계속 영원토록 존재하기 위해서 인간은 질문을 던지고 궁금해 했던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신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진리하고는 상관없는 게 아니고 상관있어요, 있는데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게 신학이라는 겁니다. 신학 또는 성경공부도 해당되죠.
이제 정리가 됐죠. 계시는 이 땅에 나타날 때 그냥 예수님 몸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반대되는 계시와 부딪치고 충돌하면서 계시가 성공을 해요. 계시가 어떻게 성공하는지를 이제부터 보겠습니다. 계시가 무슨 수로 이렇게 성공하는지.
요한복음 19장을 잠시 한번 봅시다. 요한복음 19장 32절에 보면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이렇게 되어 있죠. 십자가 달릴 때 그 현장에 세 사람 있었습니다. 세 사람이 있는데 두 사람은 뭘 꺾었습니까? 다리를 꺾었어요. 두 사람은 다리를 꺾었습니다. 꺾는 이유는 이 사람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를 최종 확인하기 위해서 다리를 꺾어버려요.
그런데 이상하게 순서가 두 사람부터 먼저 꺾었어요. 그리고 꺾어야 될 대상으로 예수님이 세 번째 들어갔어요. 두 강도는 다리가 꺾였는데 세 번째 예수님의 다리는 꺾으려 하다가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않았어요.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다리 꺾는 로마 병사들 입장에서 그들은 세 명의 사형수를 죽이는 데에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그들은 세 명이 죽었다고 보고할 때 “한 명 살았습니다.” 이러지는 못하잖아요. 세 명 다 죽이는 데 성공했죠.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예수님을 실패자로 만들기 위한 거예요. 자기들의 판정과 판단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생각과 자기 생각이 반대가 될 때에는 자기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실패자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인간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게 뭐냐 하면 자기가 죽는 거예요. 죽는 걸 가장 부끄러워해요. 나 죽는다~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에요. 그저 악착같이 살아야 되거든요. 그게 육인데 육은 이렇게 보면 돼요. 육이라는 것은 그냥 쉽게 인생의 바닥이라 보면 돼요. 그러니까 성경을 해석하든 뭐를 하든 항상 바닥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제가 어릴 때 국민학교 때부터 주위에 노인네들이 그렇게 많았어요. 노인네들이 많아서 그들을 관찰 안할 수가 없었어요. 그들이 말하는 거 생각하는 거 쭉 들으면서 무엇이 궁금했느냐 하면 어른들은 하루 스케줄을 어떻게 보내고 그들이 어떤 식으로 돈을 버는지가 궁금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거예요. 하루를.
그런데 제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들이 돈 버는 건 잘 모르겠고 다만 그들의 시간이 남아돈다는 것은 제가 계속 느꼈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내가 만난 어른들, 40대, 50대, 60대 그 어른들, 30대도 어른들이죠, 특징이 지금 보니까 하층민들이었습니다.
별 직업도 없고 시간은 남아돌아서 옷차림새부터 해서 시간을 어떻게 때울까 애쓰는 거. 들어보면 전부 다 쓸데없는 자기 과거이야기하고 쓰잘떼기 없는 소리들을 해요. 그래서 어릴 때는 ‘아, 어른 되면 저렇게 들어도 아무 소용없는 저걸로 소일하는구나.’ 느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서민층, 하층민들 말고 좀 산다는 사람들은 시간이 바쁘다는 사실을 이제 어른이 되고 보니까 알게 된 거예요.
아, 내가 만난 사람들은 중간치도 못되는 사람들이었구나. 중간치도 못되는 사람들이고 정말 그 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바쁜 사람들이구나. 그런데 그 사람들, 지금의 하층민들, 서민들의 이야기를 쭉 제가 많이 들었잖아요. 지금도 가다가 그런 사람들 보면 옛 생각이 막 일어나는 거예요. 옷 허름하게 해서 담배 피우고, 옷 매무새가 정돈되지 않은 거 보니까 옛날 내가 만났던 그 어른들하고 똑같은 모습인 거예요.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육을 그냥 바닥 채 다 보여주는 거예요. 육을 바닥 채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 와서 정리를 하죠. ‘사는 게 성공이다.’ 그들이 잡담하면서 하루 온종일 이야기하는 주제가 뭐냐? 살아남는 게 성공이다. 살아남는 게 성공이라는 겁니다. 죽으려 하니까 무섭고 또 살라고 생각하니까 불안 불안하고.
그러면 ‘살아남는 게 성공이다’ 앞에 뭘 하나 붙여야 돼요. ‘잘 살아남는 게 성공이다.’ 그럼 잘 못사는 지금은 실패가 되겠죠. 이 실패를 한번 분석해보면 실패 안에 ‘이렇게 살다 나 죽는다.’가 포함되어 있어요. 아, 인간은 죽는 것이 제일 실패고 그 실패를 인간은 부끄러워하는구나. 그걸 자랑스러워하지 못하고 굉장히 부끄럽게 여기는구나. 그걸 무서워한다는 사실이 지금 와서 이렇게 정리가 되죠.
그럼 ‘잘 살아남는 게 성공이다’ 이것이 인간의 몸에서 나온 계시가 되겠죠. 인간의 몸에서 나온 계시가 되는 거예요. 인간이 예수님을 왜 죽였습니까? 실패하기 싫어서 죽이는 거예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자기가 기대하고 있는 자기 몸에서 뿜어 나오는 그 계시의 내용과 맞질 않아요.
요한복음은 조금 이따 보고 누가복음 14장 봅시다. 누가복음 14장 26절,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이런 말을 누가 했어요? 예수님이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어 마땅하죠.
우리가 시작을 바닥부터 해야 돼요. 육으로부터 해야 돼요. 육은 뭐라고요? 살아남는 거죠. 어쨌거나 이러거나 저러거나 지저분하거나 말거나 어쨌든 살아남아 있다면 여태껏 나는 나름 성공한 것이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싶은 거예요. 인간의 머릿속에는 살아남는 것뿐이에요, 그냥. 그게 전부라니까요. 그게 내 몸의 계시에요. 이 몸은 다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 몸은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죽으면 안 되는데? 그건 묻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27절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십자가라 하는 것은 그 당시에 죄수들을 매다는 형틀이었어요.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죄수로 간주하고 죄인으로 간주하고 ‘나는 이미 죽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러고 난 뒤에 나를 따라오라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니까 예수님께서 맞아죽은 거예요.
그리고 33절에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 어르신들 공원에서 놀고 있고 나도 꼬마니까 무슨 이야기하나 듣고 있는데 그 어른 가운데 어느 어른도 나한테 ‘자기 모든 소유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면 영생을 얻는다.’ 그런 이야기한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어쨌든 간에 사기를 치든지 뭘 하든지 뭐 비트코인을 하든지 주식을 하든지 하나 쥐고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뿐이었어요. 야 참, 어른들 살려고 애를 쓰는구나. 어른들이라 하는 것은 결국 계속 살려고 살려고 애쓰는 그게 어른 일이구나. 그때 꼬마인 나는 그냥 집안에서 먹고 살게 해줬기 때문에 거기에 끼었죠. 만약에 내가 어른 되면 먹고 살아야 되잖아요. 그 외에는 다른 일이 없는 거예요. 그게 어른이 되는 길이고 어른이 보여주는 자기 몸의 계시가 되는 거예요. 다른 계시는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27절에 “죽어라”, 33절에는 “모든 소유를 버리라” 이렇게 해놓고 중간에 무슨 이야기가 들어가느냐 하면 28절,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이런 이야기해요.
그다음 31절,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지금 이런 이야기했다고요. “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찌니라” 그런 이야기가 들어가잖아요.
그러니까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이 앞에 27절 “모든 걸 버리라”, 33절에 “모든 소유를 버리라” 해놓고 그 중간에 들어가는 두 개의 이야기, ‘망대 세울 때 망대 준공비용 미리 계산하고, 전쟁할 때 군사력 먼저 측정해서 알아서 긴다.’ 그 이야기를 여기 집어넣을 때 이게 어울립니까? 이게 어울려요? 예를 들어도 어울릴 예가 여기 들어갔느냐 이 말입니다.
이상하죠. ‘망대 부숴버리자!’ 뭐 이런 게 들어가야 되잖아요. 전쟁했다 하면 먼저 아예 항복하고 들어가잖아요. 계산 안하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이 말이에요. 인간들이 하도 성공에 환장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실패하러 오신 거예요. 실패하러 오셨어요.
그리고 인간의 성공욕구에 뭐가 있느냐 하면 ‘죽고 난 뒤에 천국이 있다’도 인간의 성공욕구를 위한 하나의 concept(개념)으로 들어가 있어요. 이 땅에서 실패하기 싫잖아요. 죽어서도 실패하기 싫은 거예요. 성공하고 싶은 거예요. 성공하기 위해서 인간은 뭐하냐? 맨날 측정하고 미리 계산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살기 위해서 예상한다. 기대한다.’ 인간이 예상하고 기대한다는 것은 그 밑바닥에 뭐가 있느냐? ‘나의 존재는 필히 살아남는 데에 성공해야 한다.’ 이 의욕, 이 욕구가 밑에 깔려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라 한 거죠. 자기를 부인하라.
다시 말해서 너는 애초부터 이런 생각을 갖는다는 자체가 이게 바로 천국에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계시 입장에서는 벌써 실패한 거예요. 내가 잘 될 거라 기대하는 그 자체가 그게 실패작이에요. 인간은 자기가 실패작인 것을 모르고 이 정도로 나가면 자기가 얼추 성공, 성공, 성공, 계속 성공이 기다리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망대를 세우나 인간이 전쟁을 하나 인간이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 자체가 실패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실패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에 그들이 실패하는 것에 주님 자기 몸을 맡겨버려요. 인간이 제일 싫어하고 제일 부끄러워하고 제일 거부하는 것, 자기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 상황에 예수님은 뛰어들어요.
빌립보서 2장 9절에 보면 죽기까지 복종했다는 거예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다. 너희들 중에 따라오려면 따라와 보란 말이죠. 너희들이 제일 거부하고 싫어하는 쪽으로 주께서 뛰어가면서 “따라올래? 따라올 거야? 너희들이 다 거부하는 곳으로 내가 일부러 가는데 누구든지 살고자 하는 자는 따라 와!”
이 말은 뭐냐? “과연 따라올 수 있어?” 이런 뜻이에요. 왜? 따라갈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없죠. 없으니까 실패자인 거예요. 인간은 실패자인 거예요. 주님 가신 길에 끝까지 못 따라가니까 실패자가 되는 거예요.
인간들은 그걸 모르고 자기 나름대로의 몸의 계시가 있으니까 자기 몸이 살아있는 게 성공해서 살아남는 게 계시니까 인간들은 두 강도와 예수님에게 실패의 경우를 맛보게 해준다고 그 세 사람을 사형시켰습니다. 사형은 시켰는데, 그들은 사형시키는 데는 성공했는데, 그들이 실패한 게 있어요. 뼈를 꺾질 못했어요. 뼈를 꺾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양보해서 모든 걸 실패하더라도 천국과 지옥을 연결하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천국과 연결되는 유일한 창구는 인간의 어떤 노력에도 주님께서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게 뼈가 꺾이지 않았다는 거예요.
뼈가 꺾이지 않은 것하고 예수님이 유일하게 성공한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요한복음 19장 봅시다. 요한복음 19장 36절에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제자들이나 누구든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로마 군병이 하는 행동에 대해서 아주 정상적인 행정 처리로 본 거예요. 죽었으니까 굳이 뼈를 꺾을 필요가 없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죽었다고 생각하고 뼈를 안 꺾은 것에 누가 개입하느냐?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계시가 거기에 개입한 거예요. 너희들이 아무리 메시아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더라도 그 메시아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실패로 몰고 갈 능력은 너희에겐 없다는 거예요.
“뼈가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할 때 이 성경말씀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기 12장 46절, 민수기 9장 12절에 나옵니다. 그중에서 민수기 9장 12절 봅시다.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 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
야, 이거 제물 먹는데 뼈를 꺾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중요한 핵심요소로서 제물을 먹으라는 말은 예수님의 몸을 하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이미 규정했다는 뜻이거든요. 유월절 어린 양으로.
그런데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아까도 잠시 이야기했습니다만, 애굽 사람들이 사는 게 바닥이에요. 육이니까. 자기 가진 것 가지고 살고 자기 노력한 걸로 사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다른 인간이 이상타 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죽으면 수치스러우니까. 살아남아야 자랑거리가 되니까. 이게 인간의 육이고 인간의 바닥이죠. 그래서 성경은 항상 바닥부터 출발해야 돼요. 바닥부터 출발해줘야 얼마나 우리하고 성경이 무관한 존재인가를 알게 돼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소유물이 있을 게 아닙니까. 애굽에서 오랫동안, 430년 동안 4대에 걸쳐 있었으니까요. 그 소유물을 지금 유월절 앞두고 그들이 전부 매매관계를 통해 다 청산했어요.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고 다 청산해버렸다 이 말이죠. 부동산 같은 거 7천만 원 주고 팔고 다 했다 이 말이죠.
애굽 사람들과의 이웃관계를 다 청산하고 그들은 애굽에서 이제 나왔죠. 나왔을 때 그들이 갖고 있는 소유물 가지고 삽니까, 아니면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사는 겁니까, 그때부터?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살죠. 그게 특이성이죠. 애굽 사람은 전혀 상상도 못하는 특이성이란 말이죠.
그러면 그들이 가진 재산은 어디에 집중해야 되느냐 하면 어린 양의 피, 제사를 매일같이 반복하는 데에 소모되는, 소비되는 그러한 물품으로써 투입이 돼요. 제사도구 만들기, 제사장 복장 만들기. 그러니까 어린 양의 죽음에 종속된 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뭐냐 하면 ‘내 재산으로 인하여 내가 산다.’가 성립돼요, 안돼요? 안되죠. 안되면 나는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 몸 위주의 계시에서 단절됐고 끊어졌고 절단됐고, ‘어린 양의 계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나는 산다.’라는 특이한 새로운 종족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토끼가 깡충깡충 뛴다. 그것은 토끼가 이야기한 적 없었습니다. 그것은 토끼를 보고 있는 인간이 그렇게 깡충깡충 뛴다고 표현했죠.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을 부여받게 됩니다. 율법을 부여받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을 해석해야 돼요, 율법이 이스라엘 사람을 해석해야 됩니까? 율법이 이스라엘 사람을 해석해야 되죠.
그때부터 이스라엘 사람들, 애굽에 살던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인지 당최 납득 안 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요. 여러 가지 대표적인 게 있는데 그중에 한 두 가지만 이야기하면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가 돌판 받아 왔잖아요. 돌판을 받아왔고 그 돌판을 하나님께서 지키라 했으면 돌판을 계속 가지고 백성들에게 ‘주님의 뜻은 이거다. 지킬래, 안 지킬래?’말하고 ‘지킬래.’ 그럼 될 터인데 모세가 돌판을 왜 깹니까? 계약서를 왜 깨버려요? 안 돼. 안 돼. 너희들은 안 돼! 되든 안 되든 일단 지켜보기는 하고 깨야지. 그때 깨더라도 안 늦었잖아요.
예를 들어 이 책이 저의 유언이라 합시다. 제가 재벌이에요. 여러분들은 재벌 2세, 3세들입니다. 그런데 죽으면서 “손자들하고 아들들하고 며느리들 다 오라해. 이제부터 유언을 내가 낭독하겠다.” 그러면 자식들이 ‘아휴, 이 순간이 너무 그리웠었어. 이 순간만을 기다렸어.’ 기다리고 있는데 “에이, 꼴 보기 싫어!”하면서 유언장 찢어버리는 거예요. 유언장 찢어버리면 물려받을 상속분 하나도 없어요. 이걸 찢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자식들이나 며느리나 손자들을 보면, 황당하죠. 회사를 위해서 충성하면 뭐 준다, 이러면 알아서 우리가 예, 예 하고 잘 지낼 건데 아예 유언장을 찢어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들 다 백독씩 했죠? 성경 보면서 뭐 이상하지 않던가요? 왜 미리 깹니까, 미리. 성질머리도…. 그걸 왜 미리 깨요, 그래.
그것은 모세가 벌써 어느 나라 사람인가 하면 산 밑에 사람이 아니고 40일 동안 위쪽의 사람이 되어가지고 지금 하나님 편을 든 거예요. 그런데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자기 외에는 자기 편이 없어요. 자기는 무조건 자기 편이에요. 자기 편에게 유리하도록 이게 하나님의 계시가 되든 율법이 되든 딱 보고 내게 유리한 쪽으로 지킬 만하면 지키겠다는 그런 마음자세가 깔려있었습니다.
그게 아까 말한 육적인 바닥이에요. 육의 바닥이에요. 그런데 그 육의 바닥에 대해서 모세의 대처는, 언약 벌써 깨졌어. 언약 깨진 거예요. 자, 언약이 깨어지고 난 뒤에 두 번째입니다. 첫째는 도저히 납득 안 되는 것이 돌판을 먼저 깼다는 거죠. 깨진 돌판, 그다음에 이야기한 것이 뭐냐? 바로 생명책 이야기에요. 생명책 이야기.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32장 32절,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이름을 지워버리게 해달라.
모세가 40일 동안 그냥 시간 허비한 게 아니에요. 뭘 보고 왔어요. 보고 온 게 뭐냐? ‘하나님의 계시는 저장기능을 갖고 있다.’ 뭘 저장하느냐 하면 백성들의 이름을 저장하는 기능을 갖고 있어요. 인간의 이름을. 하나님의 계시가 USB에요. 이름을 저장해요.
이름을 저장한다는 말은 저장당한 이름은 결코 대표이름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저장을 해주는 이름, 저장을 하게 하는 그분의 이름 안에 소복이 들어있는 거예요. 명태가 알을 품듯이 하나의 알알이 메주처럼 포도송이처럼 한 송이에 다 모아져있는 거예요. 한 송이처럼 다 모아져있어요.
그럼 그렇게 모아져있을 때, 지금 애굽에서는 내가 중요하잖아요. 나를 위한 하나님이고 나를 위한 메시아, 그때는 메시아가 아직 없었으니까 하나님, 나를 위한 언약이어야 한다 하잖아요. 애굽에서는 그렇게 했는데 출애굽해서는 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나를 품어주는 그 보자기가 더 중요한 거예요. 보자기 안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은 가차 없이 발로 차낼 정도로 보자기가 중요해요.
왜냐하면 그건 내 이름은 무관한 게 아니고 그 보자기를 싸는 주의 이름이 내 이름보다 선행해서 중요하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그 안에 주의 이름과 무관한 것은 가차 없이 내쫓아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출애굽기 32장 32절에 모세가 저를 봐서라도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했다 이 말이죠. 저를 봐서라도 용서해 달라. 모세가 그런 이야기하는 것은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 위에서 본 게 있어요. 주님의 책에 저장되는 이름의 특징은 뭐냐? 주의 이름으로 죄 사함 받은 것을 유지할 수 있는, 그걸 모독하지 않는 자들만 그 안에 모여 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알게 된 거예요. 그걸 본인이 알았으니까 봤으니까 그걸 그대로 시내산 밑에 있는 백성에게 시내산 위에서 알게 된 것을 적용시켜요.
계시가 뭐라 했습니까?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예언에 의하면 몸의 뼈가 하나도 잃어버려지지 않는다. 몸의 뼈가. 몸의 뼈 자체로 하나도 안 잃어버려진 거예요. 반대로 강도 둘은 뭡니까? 강도 둘은 그 뼈가 꺾였어요. 메시아가 아니니까요. 보자기가 아니니까. 생명책의 주인의 이름이 아니니까요.
이게 예수님의 단독성이에요. 단독성 또는 유일성. 차이성. 다른 여타의 인간 몸과 다른 특별한 몸으로서의 예수님인데 그 몸에는 하나님의 언약적 예언의 말씀, 성경 말씀을 이루는 그 성취와 관련되는 몸이 되는 거예요. 관련되는 몸인데 그 내용 중에 이런 게 들어있는 거예요. 뼈를 꺾지 마라 하는 거예요.
아까 뭐라 했어요? 뼈를 꺾지 말아야 되는 이유가 유월절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럼 유월절 양은 왜 뼈를 꺾지 않아야 되죠? 유월절 양이면 양고기만 먹지, 치킨 살 때 뼈는 버리지 그것까지 챙깁니까? 왜 유월절 양이라는 이유 때문에 뼈가 꺾이지 않아야 되는가,에요.
뼈는 어디에 속합니까?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죠. 그래서 그 몸은 온전히 보호되었다. 보호. 보존된 거예요. 예수님 몸이 보존된 거예요. 보존된 것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그다음에, 여러분 아는 거니까 물어보겠습니다. 강도는 창으로 찔렀어요, 안 찔렀어요? 강도 둘은 창으로 안 찔렀죠. 안 찔렀으니까 강도 둘한테는 물과 피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나올 필요도 없어요. 뭐 오줌이나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예수님은 몸은 그대로인데 물과 피가 거기서 나왔다는 거예요.
물과 피는 몸이 온전한 데서 나오는 그 피고 그 물이에요.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한테 영생이 없다는 것은, 유월절에 어린 양의 피를 발랐거든요. 피를 바를 때 문설주에 피 바르고 어린 양의 고기는 히브리인들이 먹었잖아요. 그런데 뼈는 어떻게 했죠? 뼈는 꺾지 않았죠.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구약의 출애굽 때 상황을 그대로 주님께서는… 구약 자체가 비유니까, 모형이니까. 신약이라는 실체에서 저 멀리 뻗어져 나온 거예요. 연결된 채 쭉쭉 뻗어져 나온 거예요. 여러분, 주식투자에 보면 이런 용어 있어요. ‘채찍의 손잡이’라는 용어가 나와요. 채찍의 손잡이란, 채찍질할 때 잡는 부위가 손잡이잖아요.
이게 단타 투기, 단타 투자에요. 삼성해놓고 좀 올랐나? 아이고, 내려간다. 그럼 팔아야지. 이런 거. 이게 채찍의 손잡이지만 채찍의 특징이 뭐냐? 손잡이에서 일어난 변화가 긴 채찍의 저쪽 끝으로 휘어져 가면서 몇 달, 몇 년 후에는 손잡이에서 일어났던 변화의 영향력이 끝까지 휙휙 채찍 끝까지 가는 게 있어요. 끝까지 길게 이어져가는 거예요.
예수님에게 출애굽 때 일어났던 그것은 일종의 손잡이 같은 역할인데, 휙휙 바람소리 나면서 휘어진 채찍의 끝은 어디서 완성되는가?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는 거예요. 유월절 양은 일반적인 인간의 죽음과 같지 않아야 된다는 거예요. 절대로 같지 않아야 돼요. 몸이라고 다 같은 몸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이 예수님의 몸입니다.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40329b 요한복음 19장 33절(몸이 다르다)-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9장 37절,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세 명의 사형수 중에서 봐야 될 몸, 세 명의 사형수, 강도 둘하고 예수님 아닙니까, 그 가운데서 봐야 될 몸이 세 사람 다가 아니에요. 찔림을 당한 분의 몸만 봐야 돼요.
그게 스가랴 12장 10절에 보면 나옵니다. 스가랴 12장 10절에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죠.
자, 12장 10절에서 ‘그’가 나오고 뒤에는 ‘장자’가 나와요. 그가 나오고 장자가 나오는데 이 ‘그’가 찔림을 당한 자에요. 찔림을 당한 자. 그러니까 이것은 강도의 몸은 아니죠. 몸은 몸인데 동일한 몸이 아닌 거예요.
찔림이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함축된 몸을 따로 하나님께서 만들어내기 위해,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패를 함으로써 그 속에서 인간이 더는 실패케 못하는, 하나님의 최종적 성공이 거기서 나오도록 그게 부각되도록 하나님께서는 조치한 거예요.
‘인간의 시도 속에서 하나님은 비로소 성공하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인간의 시도는 뭐였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영원한 실패자로 만드는 게 시도죠. 그게 육이고 인간의 바닥층이죠. 바닥층의 본색이죠. 본색. 예수님에 대한 인상은 뭐냐? 내가 원하는 이 성공을 네가 훼방질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모독을 하니까 인간은 가만있지 못하고 ‘네가 죽어라’해서 그냥 차버린 것이 십자가 사건이잖아요.
인간의 시도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은 성공을 했는데 이 성공은 무엇인가? 인간의 계시는 기대하죠. 뭔가 기대하고 소망하고 또는 뭐한다고 했습니까? 계산하죠. 기대하고 소망하고 계산하는 것, 그것과는 일체 다른,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계시와 전혀 연결되지 않는 다른 계시가 그냥 거기서 발현되어 버리는 겁니다.
인간이 예상 못한 것. 나의 성공, 성공해야 될 내가 존재하고 내 존재, 내 존재, 내 존재…하다가 다른 노선이 되어 버려요. 다른 노선과 어긋나게 비켜 가버린 거예요. 아까도 예 들었잖아요. 돌판을 깨는 것. 납득 안 되죠. 그리고 나를 봐서라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용서하지 않으려면 생명책에 내 이름을 지워달라 할 때 그다음 나오는 말씀이 뭐냐? 출애굽기 32장 3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했어요.
죄를 짓는 자는 지워버린다. 그러니까 생명책의 이름이 고정성이 아니고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그러한 장소죠. 그런데 생명책 자체는 영원히 바뀌지 않아요. 한결같아요. 죄에 대해 용서하시는 분. 죄 용서하는 그 기능의 혜택을 입는 자는 생명책에 영원히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머리 좋은 여러분들은 이렇게 나올 거예요. 그러면 생명책에 영원히 남아있는 유일한 방식은 뭐죠? 죄 지으면 쫓아내고 생명책 자체는 죄를 용서받은 자들만 있다면 그 생명책에서 내가 남아있을 수 있는 방법은 뭐냐? 수능 나옵니다. 주관식. 뭐죠? 내가 실패를 반복하면 됩니다. 내가 실패를 반복하면 돼요. 참 쉽죠잉?
매사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즐거운 실패가 되어버렸어요. 즐거운 실패. 실패 아닌 적이 하나라도 일어나면 안돼요. 모조리 다 실패해야 돼요. 공무원 시험 치다가 실패하고 일본 가려해도 또 실패하고… 또 악담 시작됐다. 악담에 희망이 있죠, 갑자기.
내가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내 존재가 괜찮은 존재, 근사한 존재, 남 보기에 ‘아이고, 살 만하네.’라는 기대와 소망, 그런 내 몸에서 나오는 계시를 우리가 잊을 수 없죠. 그게 육이니까. 이게 기본이니까요. 그게 우리의 뭉치니까요.
이 기대, 소망을 뭐로 바꿔야 된다? 나는 뭘 해도 실패만 하기 위해서 남은 인생이 계속 질질 끌고 가야 돼요. 하나님께서 계속 인생을 살게 하는 이유는, 거봐. 어제도 실패고 오늘도 실패잖아. 늘 실패의 반복이고 연속이고 실패가 되풀이되기 위해서 우리를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성공을 기대한 우리의 예상 이것은 완전히 전혀 맞지 않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수학 하나 나옵니다. χ×0=0. χ곱하기 제로(0)는 뭘 해도 뭡니까? 0이죠. 1000×0=0이고 10000×0=0이고. 100000×0도 0이에요. 원래 곱하기라 하는 것은 더하기에서 나온 게 아니고 면적 구할 때 나온 거예요. 면적. 사각형에서 가로 x, 세로 y라면 x×y는 면적이 되는 겁니다. x+x+x+…한다고 면적 되는 게 아니거든요.
뭘 곱해도 0이다. 이게 너무나 마땅한데요. 그런데 χ×0=? 이 답을 0이라 하지 않고 ‘이게 뭐지?’ 이렇게 한다면 어떻습니까? 모든 세상 사람들이 χ×0=0인 줄 알고 있는데, 그걸 기대하고 소망하고 있는데, 이런 수학이 쓰여지고 있다는 것은 인간 자기가 실패자가 아니고 인류문명을 성공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인간의 지혜를 짜내서 만든 게 수학이거든요.
인간은 자기 방어책을 믿어요. 인간은 다 믿는 자에요. 신앙인들이에요. ‘내 몸 건드리지 마라’를 믿어요. ‘나보고 욕하지 마라’를 믿습니다, 인간은. 이미 종교인들이에요. 자기 자신을 믿으니까. 그리고 인간은 믿음, 소망, 사랑 다 있어요. 문제는 내가 최종적으로 나만 소망하고 나만 믿고 나만 사랑한다는 그 점이죠. 자기가 자기한테 계시가 되니까요. 내 몸의 계시니까.
그런데 그걸 뭐라고 합니까? 그게 아닌데….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핍박과 미움을 받죠. 정죄도 당하고 귀신 들렸다는 소리까지 들을 걸요, 아마.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핍박과 미움과 정죄 당함, 귀신 들렸다 이게 다 그 안에 빡빡하게 들어있어요. 빡빡하게.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에 대해 결국은 고개 저었던 거예요. 따라가기는 하지만 굳이 끝까지 따라갈 가치는 없다. 이게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의 합의된 결론이었습니다. 합의된 결론이었어요.
그래서 이걸 이렇게 표현하면 좋습니다. 이렇게. ‘자기 이름을 뚫고 지나가지 아니하면 주님 이름의 생명책에 들어설 수 없다.’ 자기 이름을 뚫고 지나가지 아니하면 저쪽 너머로 지나가지 아니하면 주의 나라, 천국에 못 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이런 것은 좀 복잡하더라도 여러분들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존재하죠. 존재란 말도 어려우니까 그냥 있다. 있죠. 그러면 인간이 기대하는 천국은 죽고 난 뒤에 ‘또 있다’거든요. 인간의 천국은. 이 땅에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죽고 난 뒤에 나는 또 행복해진다, 또 잘 산다, 또 영생 얻는다. 이게 인간이잖아요.
그러면 죽고 난 뒤에 관심사는, 내가 거기에 있네. ‘있다’잖아요. 있다. 죽기 전에도 내가 있죠. 내가 눈에 보이는 세계에 있는데 인간이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감 잡으니까 이제는 죽고 난 뒤에 또 다른 세계에 내가 있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기대죠. 예상하죠. 기대하죠. 그런데 그 세계에 대해서 ‘천국을 내가 믿습니다. 내가 하늘나라 처소를 믿습니다.’ 하거든요. 믿을 때 이게 뭘 믿는 거예요? 자기 계시를 믿는 거예요. 자기 계시. 내 계시를 믿는다니까요.
분명히 처음에 주의 몸은 인간에게 찔린 몸이라고요. 그런데 그런 건 다 없고 이제는 주님하고 좋은 관계 유지하게 되면 지금 내가 기대한대로 예상한대로 나는 주님과 영원히 산다고 지금 우기고 있는 겁니다. 이거 뭐 사기도 아니고요.
도저히 못 참겠다. 출애굽기 32장을 봐야 되겠어요. 32장 33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책에서 지워버린다 했어요. 책에서 지워버린다. 책이 없어진다,가 아니라 책에서 네 명단 없어진다는 뜻이거든요. 여기서 범죄가 무슨 뜻이냐 하면 주께서 주신 언약 있잖아요, 율법, 율법을 어기면 내 책에서 지워버린다는 그런 뜻이에요.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이 모세와 나올 때 상상도 못한 거예요. 이게. 돌판 깨지는 것도 희한하고 책이 있다는 것도 처음 듣는 이야기고요. 그리고 그 책 자체가 너무 언약적이라서 율법이라는 언약을 위반해버리면 그 책에 못가는 정도가 아니라, 그 책에 있더라도 나가! 하고 지워버려진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8장에 백부장 믿음을 칭찬하면서 ‘천국의 본 백성들은’ 그다음 뭡니까? 천국에서 ‘쫓겨’나죠. (8:12) 나가! 쫓겨가고 그 쫓겨난 빈자리를 이런 이방인들이 채울 것이라는 말씀이에요. 쫓겨난다는 것은 인간의 기대와 예상에 없는 거예요. 그것은 실패도 보통 실패가 아니죠.
마지막 웃는 자가 승자라고 이 세상에서 백날 믿음 좋으면 뭐합니까. 믿음 좋고 책 사십 몇 권 쓰고 강의 돌아다니고 뭐 온 전국 돌아다니고 설교 그렇게 많이 하고 했는데 나중에 죽어보니까 지옥 언저리에서 쭈그리고 있으면…
“반갑네요.” “반갑긴, 치워라!” “목사님, 왜 여기 계십니까?” “나 성공하기를 기대했거든요.” 내가 구원에 성공하기를 기대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게 바로 내가 예상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기대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부인이 되지 않았어요. 내 이름을 내가 뚫지 않았습니다.
그럼 인간들은 자기 이름을 뚫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뚫죠. 왜 못 뚫는가? 플라톤이 한 이야기 가운데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어요. 플라톤의 동굴의 예화(비유)라는 게 있는데, 예를 든 거예요. 동굴 안에 벽이 있고 그 벽에 그림자가 있는데 죄수들이 벽면을 향해 묶여있어요. 뒤는 못 돌아보고 앞(벽)만 보게 되어 있는데 스크린 역할을 하는 동굴 벽에 자기 말고 저 뒤 동굴 밖 불빛에 의해 동굴 밖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그 그림자를 그들은 보고 있는 거예요.
이 예화(비유)에서 플라톤이 예상도 못했지만 성경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를 해요. 이 사람들이 죄수들이거든요. 죄수들의 특징이 ‘묶여있는 존재’라는 거예요. 존재는 존재에요. 살아있으니까 뭘 봐요. 그림자도 보고 있는데 어떤 상태에 있어요? 묶여있는 상태에요. 묶여있는 상태인데 플라톤이 이걸 설명하면서 인간은 도대체 누구한테 묶여있는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자기 선생 소크라테스 말대로 인간은 소경이고 보는 것이 환타지고 환상이고 망상이고 공상이고 상상이고 실재라는 것은 밖에 영원한 세계에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묶여있는데 누구한테 묶여있는지를 알 수가 없는 거예요. 누구한테 묶여있는지.
이왕 어렵게 하는 거 오늘 지독하게 어렵게 한번 해봅시다, 멀리서 왔는데. 나중에 또 들으면 되죠. 마가복음 1장 23절-26절,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예수님께서 그 귀신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입 다물라. 잠잠하라.” 했어요. 왜냐하면 귀신을 상대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최종적으로 해야 될 문제지, 지금 예수님은 누구하고 상대합니까? 귀신을 나오라 하는 것은 귀신을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나와. 나랑 한판 붙자.’ 이게 아니고 인간에게서 일방적으로 귀신을 추방하는 일을 하는 거예요.
이래도 잘 모르겠죠? 누가복음 4장 41절,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야, 희한하죠. 다른 사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줄 모르잖아요. 그런데 누군 알아요? 귀신은 아는데 알면 귀신을 앞장세워서 순회 목회하는데 부흥회하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뭘 합니까?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않은 거예요. 주님께서는 지금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을 모집하러 온 거예요. 그러면 기록된 인간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다 어디에 묶여있습니까? 귀신한테 묶여있고 마귀한테 묶여있는 거예요.
귀신이 나갔다 해서 그 사람이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귀신보다 더 센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보일 뿐이에요. 귀신 나갔다고 해서 그 사람을 구원해버리면 귀신이 또 달려들어요. 돌아다녀보니 이 집보다 깨끗한 집이 없네. 친구 일곱 명 데려와서 또 들어온다고요.
그러면 뭐냐? 그러면 최종 자기 백성을 건질 수 있는 것은 뭐냐? 계시, 내가 구원받아야 된다는 것은 내 몸에서 발산되는 나의 계시에요. 나의 계시를 없애야 돼요. 내가 구원받아야 된다는 내 계시를 없애야 된다고요. 없애려면 네 몸과 예수님 몸의 특이성이 차이나야 돼요. 예수님 몸은 유별나야 돼요. 내 몸은 예언과 상관없는 몸이에요.
그러나 모든 말씀의 성취는 뭐냐? 내 몸이 아니고 예수님 몸이에요. 예수님 몸이 유월절 어린 양이에요. 내 피는 소용없어요. 뼈가 온전한 그 몸에서 쏟아지는 물과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고요. 그게 계시이고 하나님 뜻이에요. 하나님은 내가 구원받는 게 계시가 아니고, 주님께 나타나는 아버지의 뜻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게 계시에요.
그 분만이 성공이고 그리고 끝까지 이 생명책에 완료되는 것은 실패될 수 없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되는데 그 생명책은 요한계시록을 보면 어린 양의 이름으로 된 생명책이에요. 요한계시록 17장 8절, 20장 15절, 21장, 22장 쭉 나와 있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이에요. 생명책 이름이 어린 양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묶여 있잖아요. 참, 이 이야기하기 전에 도대체 우리 인간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계시가 얼마나 독하고 끈질긴지. 질긴지…. 그래서 우리는 내가 내 몸에서 나온 나의 계시를 못 버리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있음과 없음으로 눈에 보이는 세상을 판정합니다. 나는 있고 죽으면 나는 없어지고. 같은 이야기로, 있으니까 삶이고 없으니까 죽음이고. 인간들은 이러한 구분이 틀린 구분인 것을 그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있는 건 있고 없는 건 없다, 이게 왜 틀렸는데? 이게 맞는 말이잖아.’라고 하는 것은 그 전제가 뭡니까? 육이기 때문에. 바닥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납득이 되면 그게 진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있는 건 있고 없는 건 없다, 이게 납득이 된다는 겁니다.
과연 이게 납득되는지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공익광고에 이런 게 있어요. TV보면 공익광고 나오잖아요. ‘아싸! 우리 집에 이런 좋은 일이 있어요! 아싸!’ 뭐 여러 가지 이유를 대는데 ‘아싸! 우리 아빠가 담배를 끊었어요.’ 하는 게 있다고요. 담배 피우는 아빠가 담배를 끊었으니까 그 집안에 좋아요, 나빠요? 좋죠.
그런데 아예 담배를 안 피우고 결혼한 아빠는 좋아요, 나빠요? 어떻습니까? 좋습니까, 나쁩니까? 남편이 아예 담배를 안 피웠어. 결혼할 때부터 담배를 안 피웠는데 아내는 담배 안 피우는 남편을 저녁에 퇴근해서 만날 때마다 눈물을 흘려요. 너무 좋아서. 감격스러워서. 그런 일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거 뭐 당연하지. 교회 다니는 사람이 당연하지.’ 이러고 만다고요.
그러면 그 아내한테 칭찬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죠? 담배를 우선 골초로 피워놓고 그것도 한 십년동안 나 끊는다 끊는다 하다가도 1월 1일 끊는다 해놓고 1월 5일에 또 피우고 이런 걸 한 10번 해보는 거예요. 진짜 담배 끊었을 때, 우리 남편 최고! 애들보고, 우리 아빠 최고! 우리 가정에 이런 좋은 일이 있었어요, 공익광고에 나오는 그거. 그거하려고 하면 우리가 도대체 담배를 얼마나 피워야 돼요?
㉮있음을 성공으로 보고 없음을 실패로 보고, ㉯삶(살아있는 것)을 성공이라 보고 죽는다는 것을 실패로 봐요. 여기다가 인간은 하나 더 추가합니다. 이 세상 말고 이 세상과 또 다른 세상까지 인간은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요. ‘이 세상에 사는 내가 ㉰다른 세상 천국가게 되면 나는 성공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 세 가지 요건이 기본이 되어서 바닥이 되어서 그다음부터 인간의 모든 일상생활이 여기서 다 나옵니다. 일상생활의 행동과 삶의 태도, ‘얼굴 참 좋으시네요.’ 다 어디서 나왔어요? 있음, 아직까지는 버틸 수 있음, 아직까지는 천국이라는 소망을 안 잃었음. 그래서 얼굴 좋은 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어떻게 돼요? 내 몸에서 나온 계시가 무엇에 대한 충돌을 일으킵니까? 진짜 살아계신 주님과 충돌을 일으키는 겁니다. 이 세 가지 요소의 바탕 위에서 내가 살아가는 그것이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거예요. 결국 여기서 내 이름이 제거되지 않아요. 내 이름이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은 내 이름을 위해서 나는 있고 내 이름을 위해서 나는 살고 있고 내 이름을 위해서 천국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이름. 그 이름 배후에 악귀가 있었던 거예요. 귀신에 묶여있었던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처럼 귀신은 주님이 와야 떼주지, 우리 힘으로서는 쫓아낼 수가 없습니다. 벗어날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보여준 것도, 율법을 지키려고 하기도 전에 돌판 먼저 깨는 것도, 너는 애초부터 율법을 지킬 자격조차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배후에 어린 양은 뱀의 후손, 뱀과 마귀와 싸우기 때문에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어떤 자기 변화를 자기 노력으로 유도해낼 수가 없어요. 어떤 분은 그런 이야기해요. 아무리 복음 생활해도 나는 달라진 게 없다고요. 뭘 기대했어요? 아니, 뭘 기대한 거예요? 그럼 달라지기를 기대한 거예요?
성경에서 그럼 구원받은 사람은 뭐냐? 부활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예수님 부활될 때 세 명의 마리아가 갔잖아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요. 빈 무덤에 있었던 천사 둘이 여기 계신 분이 살아났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걸 듣고 여자 둘은 달려가서 제자들에게 통보하고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지금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차원이 어떤 차원이냐 하면 있다가 없음, 또는 죽었다가 삶, 이 차원이에요. 이 세상 말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그런 차원에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신 일은 뭐냐 하면 실패한 우리 몸에다가 부활을 일으켜요. 부활되기를 우리가 기대해서 부응해주는 게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가신 코스를 그대로 밟게 해요. 그러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가 돼요.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죽으셨잖아요. 죄 있는 육신의 몸이 예수님만 그래요, 우리도 그래요? 우리도 죄 있는 육신의 몸이잖아요. 죄 된 육신의 몸은 결국 그냥 죽는 것이 제 코스에요. 그게 마땅한 거고 그것은 원래 도달점이에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성령을 보내셔서 죽은 자 가운데 살렸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시고 특수한 몸이기 때문에 그래요. 구약에 주셨던 모든 말씀이 예수님 몸에서 완성이 되어야 돼요. 그러면 구약에서 부활된다는 그 몸은 누구한테 해당되어야 돼요? 예수님께 해당이 되어야 되죠. 예수님께 해당이 되어야 된다고요.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되었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코스에요.
그러면 그 코스를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그 코스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을 시키는 거예요. 적용을 시키게 되면 성령이 우리에게 드디어 찾아오게 됩니다. 성령이 찾아오면 죽은 우리를 주께서 살리시는 게 돼요. 죽은 우리를 살리시는 게 된다고요.
자, 여기서 순서를 이야기하면 내가 죽었다. 내가 죽어버리면 있다/없다, 살았다/죽었다, 이 세상/저 세상 이게 몽땅 어떻게 돼요? 다 이게 없어진 거죠. 특히 인간은 모든 행동이 자기 방어에 나서죠. 자기 방어. 자기 방어에 나서는 이유가 있어요. 어릴 때 부모로부터 가정에서 받았던 그 모든 것이 인간의 육의 바닥에서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가정에서 일어난 모든 것 중에 자기한테 필요한 것을 챙기는 거예요.
챙기니까 자기 몸을 방어한다는 것은 자기보다 우세한 자와 자기보다 못한 자, 힘없는 자를 본인이 구분하는 거예요. 우세자로부터는 방어 지키고 못하는 자로부터는 이걸 굴복시키고 해서 자기 몸을 지켜온 겁니다. 가정에서 우세한 자는 아버지에요. 아버지가 라이벌 돼서 아버지의 것을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아버지의 것을 뺏는 겁니다.
아버지를 대신하는 것은, 차남이나 셋째 같으면 동생이라면 아버지를 대신해서 누구 걸 탐냅니까? 형 걸 탐내죠. 형은 맨날 새 교복입고 나는 맨날 물려받나, 이런 거요. 형은 세뱃돈 만 원 받고 나는 오천 원 받고. 그럼 동생은 형을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죽여야죠. 죽여야 되죠.
방어적인 인간의 존재는 나만 살아있어야 돼요. 나만. 나 빼놓고 다 죽어야 돼요. 왜냐하면 나는 나한테 신앙인이기 때문에. 내가 최후에 신봉해야 될 우상이 나거든요. 그래서 나는 나만 섬기는 데에 훼방되고 방해되고 끈적거리는 것들은 전부 다 다 죽었으면 좋겠어요.
나보다 오천 원 더 받는 형은 당장 기관차 받쳐 죽어야 돼요. 차에 받치면 다치기만 하고 안 죽잖아요. 기차에 받쳐 죽어버려야 돼요. 그리고 나한테 잘해주는 엄마는 살아야 돼요. 그래서 무심코 나온 말이, ‘엄마. 엄마는 내가 돌봐줄게.’ 이런 거. 무슨 뜻입니까? 형은 죽어도 괜찮아, 뭐 이런 뜻이겠죠.
그런 내가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인하여 나를 저주시켜서 하나님께서 죽여버리는 겁니다. 죽었다면 이런 기대, 소망, 방어, 나다움 어떻게 됩니까? 다 날아가버리죠. 없죠. 내가 죄 안 지어서 생명책에 기록되어야지. 생명책에 기록되어야 된다는 것도 기대 아닙니까. 기대고 소망 아닙니까? 그것도 다 죽는 거예요.
죽고 난 뒤에 그다음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의 코스대로 죽었죠. 죽은 것을 주님의 영이 와버리면 예수님이 부활한 것처럼 그걸 살려냅니다. 살려낼 때 이걸로 살려내요. ‘실패자’로 살려내요. 실패자로.
왜냐하면 나는 내 이름이기 때문에 내 이름으로 죽었다가 내 이름으로 부활되면 안돼요. 내 이름으로 죽었다가 주의 이름으로 살려면 연합되어야 돼요. 세례가 되어야 된다고요. 나는 죽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야 돼요. 내가 죽는다는 조건 하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산다고요. 그리스도의 이름이 내 이름을 대체한다 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산 게 아니에요.
우리는 뭘 생각하느냐 하면 자꾸 자기에 대한 계시, 나는 내가 끝까지 살아남아야 된다는 그 계시 때문에 예수 이름은 믿는데 결국 예수 이름을 믿는 그 믿음을 내가 믿는다 하니까 예수 이름은 살아있는 것 같지만 예수 이름보다 더 월등하게 분명하게 살아있어야 된다고 다짐하는 이름이 누구 이름입니까? 예수 믿어주는 내 이름이에요. 자기 이름은 안 죽었어요. 귀신도 이런 귀신이 없어요. 예수 믿는다고 귀신 나가는 거 아니고 이제는 귀신이 변장을 했어요. 위장을 했죠.
누가복음 10장 20절 보겠습니다. 여기서 제자들과 예수님의 견해차가 또 나요. 몸이 다르니까요. 10장 19절부터 보면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이 말 딱 들으면 제자들이 뭘 생각합니까? 우리가 이 말 들으면 뭘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 우쌰, 내 편 들어주는구나. 역시 내 이름, 내 존재는 고귀해. 하나님께서 귀하게 나를 챙겨주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했어요. 예수님께서 나를 귀하게 챙겨준다, 하나님이 나를 챙겨준다, 하나님이 귀신을 제할 수 있는 능력을 줬다, 이 사이에 지금 뭐가 빠져 있어요? 찌른 자가 빠져있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빠져있죠. 빠지고 그 자리에 좋게 해주는 분과 좋음을 받은 자 그 관계뿐이죠.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시고 나는 지킴을 받는 자, 그 관계뿐이라고요.
계시의 핵심은 예수님의 찔린 몸이에요. 이런 생각에는 계시가 없어요. 핵심 계시가 빠져 있는 이상, 인간들이 그냥 선입관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 했어요. 이 대목까지 봅시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 해놓고 그 뒤에 괄호. 비워 놨다 칩시다. 비워놓은 괄호를 제자들보고 채워보라고 주관식 문제를 낸다면 뭐라고 하겠어요? “귀신이 너한테 항복하는 것으로 네가 기뻐하지 말라.” “그럼 뭐로 기뻐해요?” “그건 너희들이 한번 채워봐.” 채울 때, 뭐로 기뻐하지? 뭐로 기뻐하지? 우리는 이미 좋은 관계인데? 좋은 관곈데?
그 뒤에 보세요.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기록이라는 말은 기록하는 분이 주관이 되어야 돼요. 기록하는 분이. 그러면 기록했다는 말은,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자 속에 귀신도 항복했지만 귀신만 항복하지 말고 누구도 항복해야 돼요?
제자들이 예수님의 계시를 위한 하나의 기능자들이에요. 제자들 자기 계시가 아니고 자기 몸 챙기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몸이 누구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냥 부름 받은 자들이에요. 내 걸 챙기면 안돼요. 나의 대체물이에요.
이 점을 딱 보게 되면 제자들은 이래야 돼요. 아, 그동안 귀신들린 나는… 권세를 주지 않으면 귀신이 안 나갔으니까 귀신한테 꼼짝 못하고 매여 살았을 거 아닙니까. 주님께서 귀신 쫓는 능력을 안 주면 제자들이 매여 살죠. 귀신에게 매여 살 때에 내 모습이 무언가를 뚜렷하게 그걸 기억해야 돼요. 그게 실패자입니다. 그게 실패자에요.
아까 이야기를 한번 다시 하겠습니다. 귀신이 나오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를 아직 멸할 때도 아닌데 왜 벌써 멸하러 왔습니까?” 할 때, 이것은 인간의 말이 아니고 귀신의 말이에요. 귀신은 예수님을 알았죠. 자, 문제 나갑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알았을 때 그 귀신의 심정과 우리가 예수님 알았을 때의 심정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문제가 점점 어려워지죠. 귀신이 예수님이 누군지 알았잖아요. 그래서 귀신이 기뻐했습니까? 아이고, 저를 쫓아내시다니. 기뻐합니까? 기뻐하지 않죠. “나대로 살도록 그냥 두지, 왜 자꾸 참견하고 끼어드십니까?” 하잖아요. 그게 누구 고백이라고요? 귀신의 고백이죠.
그럼 성도는 적어도 그런 귀신의 고백이 아니어야 하죠. 성도의 고백은 뭡니까? “내가 나한테 묶인 나와 이제는 바이 바이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가 나와야 성도의 고백이잖아요. 내 기대, 내 소망, 내 계시, 나 잘되는 것에서 나를 떼내어 주셔서 나를 거기서 죽여주셔서 고맙습니다, 해야지 그게 성도의 고백이잖아요.
이 고백이 어느 정도로 대단하냐 하면요. 사도 바울 같으면 로마서 9장 3절에 이렇게 나와요.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나는 기분 좋다.” 끊어질지라도. 내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이름을 위한 존재라면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도 주의 이름 안에 예속되어 있는 거예요.
마치 내가 뭘 해도 귀신을 못 벗어나는 것처럼 귀신에게 묶여있는 것처럼 지금은 성령에게 묶여있고 주님께 묶여있으니까 주님께서 어떻게 한들 주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주님의 그 계시가 지금은 나의 계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주님의 계시가 되는 거예요. 성도는 주님의 계시.
성도의 모든 일과는 뭐로 끝나야 돼요? 실패로 끝나야 돼요. 실패의 연속입니다. 실패의 연속이죠. 그러면 그 실패를 어떻게 고백하게 되는가? 끊임없이 실패를 하게 하는 그 능력이 바로 우리가 주님과의 부활된 상태에요.
예수님의 육의 몸은 죽고 영광스러운 몸이 부활되었잖아요. 나의 이름은 끝까지 실패하는 이름, 죽어야 될 이름이고 그 실패하고 죽어야 될 이름을 통해서 비로소 주님의 이름이 부활되어 있고 함께 있고 같이 있고 살아 계시다는 것을 나의 실패를 통해서 드러내는 겁니다.
아까 수학 다시 봅시다. χ×0은 항상 0이다. 마땅하다, 하는데 성도는 χ×0이 0이 아니라는 거예요. 0이 아니고 뭐냐? 마이너스죠. 마이너스. 실패에요. 마이너스가 되는 거예요. 자연수가 아니고 실수(實數, real number)가 돼요. 실수. 마이너스까지 영역이 확대되는 거예요. 이 실패가 바로 은혜가 되고 감사가 되고 복이 되는 거예요.
무안을 떠나지 않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는데 또 주께서 내 뜻을 실패케 해서 주문진에 가고…. 갔잖아요, 우 집사님. 진짜 그런 실패가 어디 있습니까. 그걸 통해서 나는 지금 누구한테 묶여있는가? 내 성공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분에게 묶여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은 마귀는 오늘도 뭐를 우리 뒤에서 군불 떼며 부추깁니까? ‘너는 어떤 계획을 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항상 복 받아서 성공해라.’ 이게 지금 마귀가 계속 부추기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네 이름에 대해서 네 이름을 네가 오직 유일신으로 신봉하고 있는데 그 상태를 계속 밀어붙여야지.’ 이게 매일같이 마귀가 우리한테 부추기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도한테 마귀를 떠나게 합니까, 늘 붙여줍니까? 늘 붙여주죠. 늘 붙여줘요. 붙여줘야 악령보다 성령이 세서 뭐든지 만사에 우리 뜻대로 안되게 해주는 거죠. 우리 뜻대로 안 되는 그것을 빌립보서 4장에서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일이 고린도후서 4장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날마다 예수 죽는 죽음을 짊어짐은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하심이라” 그게 성령의 역사에요.
자, 지금까지 한 것을 요약하고 마치겠습니다. 실패하는 즐거움을 누려~ 누리시기 바랍니다. 계시는, 몸에 계시가 주어지게 되면 이게 사건이 되죠. 오늘 강의한 게 딱 이거죠. 우리 몸에 계시가 주어지게 되면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바로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에서 모든 율법은 다 이루었어요. 말씀은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사건을 다 이루었듯이,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롯이 생명책을 전부 다 완수했죠. 이 생명책에는 누구 이름만 있다 했어요? 주의 이름의 생명책이에요. 어린 양의 생명책이에요. 그 누구의 이름도 관계없이 어린 양으로 한 묶음이 되는 거예요.
전에 우리는 육이라 해서 악마의 묶음, 보자기 속에 있었거든요. 그 묶음에서 주님이 우리를 건져줄 때 그냥 건져준 게 아니라 우리를 죽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건져줬죠. 예수의 이름 아니면 우리는 마귀에서 못 벗어나니까. 그걸 주께서는 청구한다 했어요. 내 자식이다, 내놔! 예. 내 사람이다, 내놔!
그러니까 인간이 말씀 지켜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이 우리하고 의논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이 직접 다이렉트로 유일하게 주님을 아는 존재인 귀신, 마귀한테 가서 마귀로 하여금 더 이상 베드로를 갖고 놀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주께서 기도해서. 악마가 맨날 베드로보고 청구하잖아요. 내 사람이다, 막아서니까 베드로가 어떤 짓거리를 하고 어떤 배신을 때려도 아무 상관없어요, 구원 받는 거 하고.
우리의 몸에 예수님의 성령, 십자가 지니까 오는 성령에 의해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사건의 증인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의 증인. 그러면 실패라는 게 뭐냐? 이 전체가 되려면 우리가 예수님이 가셨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 일어나야 돼요.
예수님은 몸으로 왔을 때 주변에 뭐가 포진되어 있습니까? 악마의 힘이 포진되어 있죠. 마태복음 4장에 누가복음 4장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님이 광야에 갔잖아요. 그처럼 우리의 몸도 지옥 세상, 마귀의 세상 속에 우리가 놓이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은 성령의 능력이잖아요. 그러면 우리 몸의 육신은 어디와 단짝이 되어 있어요? 세상에서 출세 못하고 성공 못해서 환장했어요.
내가 번듯하게 남한테 자랑거리 되는 존재가 못되어가지고 그것 때문에 골치 아프고 나중에 머리 아프고 그러잖아요. 머리 아플 때는 무슨 약? 이빨 아플 때는 이가탄? 약까지 먹어가면서 스트레스 받는다 하죠. 스트레스 받을 때는 뭐가 좋습니까? 오토바이가 최고 아닙니까. 오토바이 타고.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으면.
모든 우리의 육신은 찝쩍거려보는 거예요. 차도 한번 팔아봤다가 사봤다가 찝쩍 찝쩍 당근마켓도 해봤다가 온갖 찝쩍거리면서… 찝쩍거릴 때 그 의도가 뭐에요? 있을 거 아닙니까? 실패하려고 해요? 모든 게 내 성공으로 돌아올 그것이 내 존재의 충만이잖아요. 또 존재의 기쁨이죠.
그걸 충분히 온몸으로 느끼게 하면서 그 다음에, ‘이제 많이 친했지? 많이 먹었지?’ 하고 그다음부터는 성령께서 십자가 피와 들이대면서 그에 의해서 내가 찔렸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한테 일어난 어떤 행동도 주께서 다 이루심을 취소시킬 수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겁니다.
끝으로 한 마디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신약 성도인 우리가 그걸 함축해서 반복해서 이 시대에 보여줍니다. 그들이 실패한 것, 그들이 타락한 것, 그들이 방탕한 것, 우상 섬긴 것 그대로 우리에게 복사판으로 그대로 하라 해서 결국 십자가 앞에 강도처럼 기뻐하면서 감사하는 것밖에 없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 전체가 구약도 되게 하시고 신약도 되게 하시고 신약 되었다가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는 그 모든 작용이 이미 어린 양 생명책에 있기에 어린 양의 영광과 그 피의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서 오늘날 이와 같은 주님 가신 그 길을 같이 밟아가도록 해주신 조치에 대해서 너무나 감사하고 고마워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