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40223a 고린도전서 12장 3절(포괄 개념)-이 근호 목사
p.26 오늘은 은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교회는 성령의 은사로 이루어진다.】간단하게 나와 있죠. 은사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비(非)소유’입니다. 소유될 수 없는 게 은사에요. 은사라는 말이 좀 어려우면 쉬운 말로 하겠습니다. 선물.
선물은 주신 분의 취지가 받은 자에게 계속 남아있기 위해서 제공되는 거예요. 보통 인간세계에서의 선물은 주면 내 것 되잖아요. 그러나 성경에서의 선물은 반대에요. 줬기 때문에 그 은사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소유는 빼앗기게 되는 겁니다. 빼앗는 겁니다. 은사는 줘놓고 빼앗는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욥기에 나오죠.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라고 했을 때 거둔 자도 하나님이라 했잖아요(욥 1:21). 그런데 욥이 하나 놓친 게 있어요. 재산에 관해서만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러나 욥은 자신의 목숨, 자신의 건전함도 빼앗긴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욥이 화가 나서 ‘이럴 것 같으면 내 목숨도 그냥 가져가세요.’라고 했죠. 하나님은 안 가져갑니다. 안 가져가요.
욥에게는 뭐가 있었는가? ‘자기 의’가 있었던 거예요. 목숨과 내 의 중에, 목숨은 내놓되 뭐는 못 내놓는다? 나 잘남은 못 내놓는 거예요. 자기 의. 그러니까 인간세계에서 골칫거리가 목숨보다 더 센 자기 의에요. 자기 의. 뭐 죽으면 죽었지, 난 이거 못 내놓는다 하는 게 있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의입니다.
욥은 당대의 의인(義人)이잖아요. 욥의 주제는, 이 의(義)가 욥은 나의 의, 자기 의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 의가 욥 너의 의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이 의는 누구 의겠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되겠죠. 일단 욥에서는. 나중에는 하나님의 의가 장차 올 예수님의 의로 바뀌지만 일단 구약 욥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겠죠.
그런데 여기서 욥은 이 의가 내 믿음으로 말미암은 내 거라는 거예요. 내 것.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얻은 내 것이라 여긴 겁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실제로도 그랬지만 욥이 자기 것이라 여긴 이 의를 하나님께서 가져간다면 욥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의가 빼앗겼다는 의식을 갖겠죠. 그렇죠? 드린다는 의식이 아니고, 가져가셨다는 것이 아니고, 빼앗겼다는 뉘앙스가 뭐에요? 원래 내 건데 강제로 누가 탈취해가는 것을 빼앗겼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전반적으로 봐서는 욥은 믿음 좋고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고분고분하고 하나님께 늘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자식들한테 죄 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외부에서 볼 땐 그랬는데 욥 본인도 모르는 결정적인 자기의 취약성이 있었던 겁니다.
목숨 내놓을 테니까 이것만은 빼앗지 마세요, 하는 목숨보다 더 센 게 욥을 붙들고 있었어요. 자기 목숨보다 더 센 것. 목숨은 버릴지라도 못 떼어놓는 게 있어요. 그게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자기 의란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목숨은 빼앗겨도 어떤 노력으로도 안 빼앗기려 하는 족쇄 같은 게 있다. 그게 바로 인간의 자기 의라는 겁니다.
욥이 이런 이야기를 함으로써 예수님의 제자 중 베드로가 ‘저도 목숨 바쳐 주를 따르겠습니다.’ 할 때 그게 욥의 경우와 그대로 닮은 것을 알 수 있죠. 베드로가 ‘목숨 바쳐서 주를 따르겠습니다.’ 할 때 베드로는 ‘목숨은 내놔도 예수님에 대한 나의 신뢰, 나의 순종, 나의 복종, 나의 믿음, 주님에 대한 사랑 이것만큼은 내 걸로 해주세요.’하는 겁니다.
이걸 통해서 하나님의 원수(마귀)가 인간을 어떤 식으로 다스리고 지배했느냐가 드러납니다. 지배가 지배답게 되려면 인간은 자력으로 여기서 빠져나오질 못해야 해요. 빠져나오지 못하고요. 그래서 마지막 때에 종말의 영, 성령을 통해서 은사를 주는 것은 모든 시작을 하나님의 원수의 입장에서 그걸 파악하고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이 세상을 볼 때 하나님의 원수 입장에서.
하나님 원수가 뭐죠? 마귀죠. 악마가 인간을 어떤 식으로 다스리고 있는가에 대해 감이 있어야 돼요. 감각이 있어줘야 됩니다. 그거 없으면 자기는 하나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목숨 바쳤다는, 또다시 욥 같은 일이 재현되는 거예요.
그럼 이야기를 일단 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차지한 것은 우리의 속이고, 우리 내부를 우리가 모르니까 그 속을 뒤집어버리는 거예요. 우리 속을 간파하고 파악해내는 그러한 선물로서 은사가 온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은사가 왔을 때, 여러분 아시는 이야기에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성령이 어떤 사건 이후에 오게 되어 있어요. 어떤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이죠. 십자가 사건. 이걸 사후적이라 해요. 사후적이라는 것은 일이 터지고 난 뒤에, 그동안 기억치 못했는데 어떤 계기가 왔을 때 그걸 해석하면서 비로소 현실감각이 생기는 것, 그걸 사후적이라 하는 겁니다.
어떤 트라우마, 충격적인 것이 있었는데 그게 잠복되어 나타나지 않다가 어떤 일이 계기가 된다면 ‘아, 어릴 때 내가 그런 일이 있었지.’라고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게 다시 한번 되새겨지는 거예요. 군수실에 갔을 때 갑자기 잊어버렸던, 군수하고 이야기 나눴었던 것이 확 떠오르죠.
결국 인간은 본인이 해석하는 게 아니고 환경에 의해서 늘 해석당하며 살죠. 해석당하면서 내가 선택해서 경험했다 했는데 선택해서 경험한 게 아니고 그냥 나에게 있던 경험들이 그때그때 내 선택에 의해서 필요한 것만 느끼고 나머지는 기억의 창고 속에 다 집어넣은 거예요. 집어넣었다가 또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게 상기되겠죠.
그래서 인생은 ‘해석의 더미, 총합’이에요.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모르고 내 인생은 어떻게 내가 살면 되냐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떻게 사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해석하느냐죠.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고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되새겨 줍니다. 되새겨주는 거예요. 이게 성령 받은 교회 또는 성도의 삶이에요.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십자가가 뭔가를 내가 현재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삶이 성도의 삶이에요.
그럼 십자가 사건을 성령이 그대로 되새겨주니까 성령은 자기 일이 없고 십자가 사건을 반복하는 일, 그 일입니다. 그럼 십자가 사건이 뭐냐? 십자가 사건은 무엇의 만남인데, 인간은 배제해요, 인간은 배제당하고 하나님의 아들과 누구의 만남이냐 하면 바로 악마의 만남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악마는 예수님의 발꿈치를 물었고 예수님은 악마의 정수리, 이사야 또는 시편에서는 정수리라고 되어 있는데, 정확하게 제일 급소인 부분을 쳐버려서 더 이상 대들지 못하게 하는 그 만남의 사건이죠. 인간은 어떻게 됩니까? 배제되죠.
그럼 은사가 왔다는 말을 이제 여러분들이 아시겠죠. 은사가 선물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아신다면 선물은 무슨 뜻입니까? 내 행함, 내 노력이 배제되는 걸 의미하는 거예요. 내 행함이 배제되어버리면 선물은 지금 이 시간 속에 존재하는 나로 하여금 십자가 사건을 해석토록 하는 이것이 바로 은사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서 어떤 결과를 이루냐, 이것은 배제되어야 돼요. 배제되어야 되는 거예요. 해석을 하라고 성도의 인생은 계속 질질 이어지고 있어요. 십자가 사건을 해석하게 되면 내가 어떻게 행하고 노력했는가는 배제되고 뭐만 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과 악마의 만남에서 일어난 일의 결과로서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인간은 악마에게서 못 벗어나니까 악마와 하나님의 아들과의 만남이 십자가 사건이라면 ‘악마는 어떤 식으로 나를 가르쳤느냐?’ 또는 ‘내 마음을 관장하고 주관했는가?’ 무엇이 빠져버립니까? 예수님이 하신 해석이 없죠. 그 해석이 없다는 말은 ‘내가 한 그것이 나의 소유가 될 자격이 있다’ 이게 바로 악마가 우리한테 가르친 거죠. 내가 한 것으로 나는 이 땅에서 내 걸 가질 수 있는 자격이 된다는 거예요.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체코)라는 20세기 초의 체코 문학가가 있어요. 문학인데 국가나 사회보다도 개인의 마음에 대해서 정신에 대해서 탐구한 문학가에요. 그걸 실존주의적이라 하는데 ‘나는 누구냐’를 내부로 파고들어가는 문학이에요.
그 사람이 지은 단편 가운데 <변신>이라는 게 있어요. <변신>에서 아빠와 여동생 그리고 가족이 나오는데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맏아들인 본인이 점원하다가 열심히 노력해서 정식 영업직으로 노력한 만큼 계속해서 가정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어요. 그래서 변신의 주인공은 자기 자부심을 느끼는 거예요. 온가족은 노는데 자기 혼자 죽기 살기로 일해서 온가족이 하하 호호 웃고 밥 먹고 사는 것이 자기로서는 일할 보람을 느낀 겁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내가 일하는 것을 굉장히 존중하고 고마워할 것이라는 생각을 본인이 갖고 있었어요. 자, 방금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이게 뭡니까? 내가 한 것이 나의 소유가 될 자격, 이것이 욥에서는 뭐로 등장합니까? 자기 의로 등장해요. 자기 의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루아침에 주인공이 벌레가 되었어요. 전에는 사람 모습 안에 있는 자아였는데 어느 날 졸지에 벌레가 되어서 아주 흉측한 집게벌레 안에 있는 나가 된 거예요. 벌레 안에 내 자아상이 담기게 된 거예요. 내 노동으로 인해 밥 먹고 살고 행복하다고 ‘오빠, 고마워.’, ‘그래, 우리 아들 최고야.’라고 했던 가족들이 졸지에 자기가 벌레가 되고 나니까 벌레 안에 자아상이 있으니까 들리는 거예요. 이 벌레를 놓고 어떻게 처리할지, 가족들이 처리하는 게 다 들리잖아요.
그래서 느낀 것이 가족에 대한 배신감입니다. 죽여 버리자. 그들이 얼마나 자기에게 고마워했습니까. 고마워하고 감사했으면 마음이 마음과 서로 교류되고 통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주인공은 그걸 몰랐던 거예요. 그 내용에 보면 진짜 열심히 일할 때는 심지어 저 여동생이 나를 굉장히 존중하니까 빨리 돈 모아서 여동생이 좋아하는 음악학교, 옛날에 음악학교는 돈이 비쌌던 모양이에요, 음악학교에 넣어줘야지 생각할 정도로… 자기한테 잘해주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여동생이나 아버지나 부모가 자기한테 잘한다고 칭찬하는 노동으로 그들은 장남인 나를 본인들이 소유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돼요. 남한테 배려하는 말을 하고 남을 배려함으로써 빼먹을 것은 빼먹는 내 소유물로 이미 전락해버린 거예요. 이게 바로 실존주의에서 비로소 밝혀지는 인간사회입니다. 인간사회에요.
여기서 뻔한 질문을 해봅시다. 그 여동생과 부모는 왜 돈 잘 버는 큰 아들을 좋아했습니까? 이게 정말 뻔한 질문이지만 답변을 해보세요. 왜 좋아했습니까? 그들의 생존의지 때문에. 생존의지.
지금 욥이 하나님이 죽이는 것보다도 자기가 기꺼이 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하는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요모조모 따져 봐도 자기는 곧 죽을 거 같아. 너무 아파서, 욥이. 시들시들 내가 죽는 입장에서 목숨을 포기해야 되는 그 지경까지 밀리면서도 기어이 포기 못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자녀들한테 내가 고아와 과부한테 어려운 사람한테 내가 가족들에게 그들 신앙생활 잘하라고 제사 드린 가족들에게 높은 사람에게 겸손하고 어려운 사람 도와줬던 그 모든 것을 본인이 잊을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본인이 잊을 수가 없죠. 그거 잊지 못하면 자기 의 그대로 있는 거예요.
악마가 인간한테 꼼짝 마라 한 이유를 알겠죠. 인간은 악마와 내 관계를 생각하지 않으면 세상을 제대로 해석 못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전혀 이해 못해요. 그래서 터진 사건이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들이 남들보다 좀 더 착해야 자기가 존경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 당시에 유대 나라에 성전이 있잖아요, 이 헤롯 성전이 46년 동안 지은 엄청난 성전인데 이 성전이 있음으로써 성전에 밥 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세 들어오죠. 성전세 말고 또 여러 가지 성전과 관련된 행사 진행에 관한 비용, 굿즈, 관광업 또 그 동네 환전할 때 커미션(수수료), 그리고 소 팔고 양 파는 자에게 커미션 들어오죠. 그리고 수리할 때 인테리어 업자, 건축업자에 대한 권리금, 그 권리금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이 사람들이 장악했거든요. 장악할 때 그들이 백성들에게 존경받지 아니하면 그런 커미션이라든지 성전세가 제때 들어오겠습니까, 안 들어오겠습니까? 안 들어오죠.
그러니까 그들이 할 일은 뭐에요? 율법 공부하고 율법대로 그들에게 그럴싸하게 사는 모습을 과감하게 보여주는 거예요. 보여주는 겁니다. 신을 섬길 때는 우리처럼 섬기라는 것을 하나의 모델로 보여주면서 그들은 돈벌이가 되는 거예요. 일반백성들은 사는 데에 급급해서 그 정도 레벨까지 이르지 못하니까. 경건한 레벨에 이르지 못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성전을 계속 지으라 했습니까, 헐라고 했습니까? 성전을 헐어버리라. 자, 성전을 헐어버리라는 이 말씀이 오늘 이 강의와 관련되어서 저 끄트머리까지 연결된다면 결국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에게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너의 의를 버려라.
이것은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버리라 하는 거예요, 못 버리기 때문에 버리라 하는 거예요? 인간이 아무리 흉내 내고 신앙적으로 해도 결국은 이 마지막 멘트, 너의 의를 버리라는 이 멘트 자체가 심판이에요. ‘넌 죽었어.’ 이 뜻이에요. 넌 죽었다는 거예요.
곤충이 곤충 되면 몰라도 곤충 안에 자기가 들어있으니까 더 큰 문제죠. 곤충 안에 들어있는 자아상. 곤충 안에 안 들어가고 그냥 멀쩡한 인간일 때 있던 대우와 본인이 곤충 안에 들어가 있으면서 가장 가까운 식구들한테 들려오는 소리가 이처럼 대비적이고 대조적이고 차이난다는 사실을 이 <변신>이라는 단편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성도에게 곤충 되라는 이야기하지 않고 그보다 더 심한 이야기를 했죠. 너는 어디 안에 들어가라? 어디 안에 자아성을 가져라? 십자가 안. 예수님의 죽음 안에 네가 들어가 봐라. 그러면 세상이 지옥인 것을 볼 것이다. 온통 자기 의로 가득 찬 세상이에요.
은사는 소유하라고 주는 게 아니고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우리의 속내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주신 거예요. 십자가 자체가 우리한테 선물이 되어서 우리가 알지 못한 나의 정체를 그대로 까발려주는 이것보다 더 큰 고마운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방금 은사 이야기했는데 은사가 어디부터 시작한다 했습니까? 십자가 자체가 예수님과 악마의 만남이죠. 인간은 빠지죠. 악마의 가르침이 뭐냐? 이걸 알아야 이 세상이 악마의 세계라는 사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인간은 거기서 못 빠져나온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악마라는 말을 안 하고 인간들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과학, 철학의 시원(始原), 다른 말로 뿌리라 할 수 있는데 또는 기원,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제가 해보겠습니다. 인간의 언어(생각)로 더는 넘어설 수 없는 한계, 이게 바로 시원(뿌리)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아무리 구상해도 더 넘어설 수 없는 그것이 바로 시원 또는 기원 또는 근원 또는 뿌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악마는 어떻게 되는가? 악마는 신화에 속한 거예요. 신화. 신화는 인간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언어를 통해서 말하는 게 전설이고 신화에요. 그러니까 시원부터는 인간의 역사가 돼요. 문자 역사, 언어의 역사가 되고 그전까지는 그냥 구라지만 도대체 설명이 안 되니까 인간 현상으로 설명 안 되는 것들의 집합체, 뭐겠어요? 전설의 고향이죠.
그럼 시원부터 시작한 역사는 뭐냐? 철학과 과학의 역사라 볼 수 있어요. 수학, 과학, 철학. 이 기원이 뭐냐? 이 기원에 두 가지의 설이 있으니까 그 두 가지 설을 제가 지금 설명해드리려 하는 거예요. B.C.500년경부터 약간 이후, 이게 바로 보통 세상의 역사와 철학의 기원이라고 보는 겁니다.
파르메니데스(기원전5세기경 그리스 철학자)와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6세기말 그리스 철학자)의 양대 이론이 지금 21세기까지 과학과 철학을 전부 다 지배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냥 간편하게 설명해드릴게요. 파르메니데스는 이런 거예요. ‘변화는 없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이 변화한다.’ 일단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어요. 둘 중 어느 것이 맞습니까? ‘변화가 없다’가 맞습니까,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게 맞습니까?
성경을 한번 봅시다. 성경에도 마귀를 모르는 인간들의 주장 같은 게 나와요. 베드로후서 3장 4절,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주가 강림한다는 것은 세상이 들으면 신화에 속하죠. 절설. 그냥 무시해도 되는 이야기. 그러나 세상을 정확하게 본다면 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파르메니데스 말이 세상 말 그대로죠. 그냥 있는 거예요. 해? 졌다? 아니야. 아침 되면 또 뜰 거야. 세상은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파르메니데스가 변화는 없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이렇게 해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고 이야기해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예를 들어 커피 잔에 커피가 있고 이 커피를 옆으로 옮긴다면 헤라클레이토스가 파르메니데스한테 뭐라고 하겠어요? ‘거봐. 커피가 옮겨졌잖아. 변화가 있잖아.’ 이렇게 하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파르메니데스는 커피는 옮겨질 수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커피가 옮겨지려면 옮겨질 자리가 빈자리가 되어야 돼요. 그런데 빈자리는 ‘없는 것은 없다’라는 원칙에 의해서 빈자리는 없는 거예요. 빈공간이 있으면 옮길 수 있는데, 커피를 옮기고 변화가 있는 건데, 빈자리가 없기 때문에 커피가 옆으로 옮겨져도 이건 변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이 사상이 오늘날 과학을 지배합니다. 아무리 세상에 물질이 변해도 궁극적으로 입자라는 것만 있고 나머지는 없는 거예요. 입자는 변한다, 안 변한다? 안 변하죠. 입자는 변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파르메니데스 말이 맞는 거예요. 나중에 이 사람의 사상을 이어받은 데모크레이토스는 원자론을 주장했는데 세상에 있는 것들이 변하지 않는 것들의 만남과 부딪침, 이런 것뿐이지 궁극적으로서는 변하지 않는 이게 맞다는 거예요. 118가지의 원소라는 거예요. 원소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변하지 않는 게 원소에요.
분자, 원자, 원소에 의하면 누가 틀렸어요? 헤라클레이토스가 틀린 거예요. 모든 것은 변하는 게 아니에요. 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원적인 것, 원자, 분자는 변하지 않는다. 이 말이 맞다는 거예요, 파르메니데스가. 그러니까 빈공간은 없으니까 나중에 빈공간은 없는 게 아니고 에너지가 있다. 파르메니데스가 맞는 말했네요. 이 세상에 빈공간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있어도 뭐가 있다는 겁니다.
헤라클레이토스 이 사람은 어떤 말로 유명하냐 하면 ‘같은 강물에 발을 담글 수 없다.’ 흐르는 강물에 똑같이 발을 담글 수 없다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강물에 한번 발 담그고 강물이 내려갔잖아요. 그다음 강물에 발을 담그면 그 발은 이미 그만큼 늙은 발이에요. 늙어빠진 발이 그다음에 들어가는 거예요.
헤라클레이토스는 무엇을 절대화시키느냐 하면 시간을 절대화시키는 겁니다. 시간 안에서 모든 것은 다 변화한다. 단, 변하지 않는 것은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운동론이에요. 뉴턴의 운동론이에요. 미분 적분 여기서 다 나온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하는 거예요. 변화가 곧 변하지 않는 질서고 원칙, 진리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변화할 때 어떻게 변화하는가? 만물이 시간 중심으로 변하는 이유는 거기에 대립물이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서로 대립물이 존재하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은 없고 새로운 미움이 오면 사랑도 변한다는 거예요. 사랑은 움직이는 거거든요. 모든 게.
그러니 이 세상은 뭐냐? 이 세상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생성이에요. 서로 대립되는 것들이 부딪치고 충돌하면서 투쟁과 갈등상태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 진리는 다음 진리가 올 때까지만 유보적인 진리이지, 그다음 진리 오면 진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여기서 나온 게 헤겔의 정반합이에요. 정(正)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세월 지나니까 반대(反對)되는 게 나오고 둘 사이에서 새로운 요소로 결합되면 그다음에 합(合)이 되면서 지난 정(正)을 내쫓는 새로운 정으로서 진리의 자리를 일단은 차지한다. 차지해도 그것은 임시적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시간을 따라서 늘 차이를 드러낸다는 것이 헤라클레이토스 이야기고 파르메니데스 이야기는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천국이 있다. 이게 플라톤 사상이에요.
반면에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처음 나온 게 영혼사상이에요.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시간인데 그 시간 속에서 모든 게 변한다. 그러면 인간의 영혼은 뭐냐? 인간의 영혼은 그때그때 변할 때마다 인식이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깊이 있게 신경 쓰다가 신경을 덜 쓰다가 이런 식으로 마치 풍선이나 심장이 늘어났다가 줄었다 하는 그것처럼 인간의 영혼이라 하는 것은 적절한 만큼 커졌다가 꺼지다가 그렇게 하는데 그게 뭐냐? 인간의 영혼이라는 겁니다.
들어보면 너무 일리 있죠. 말씀 듣고 은혜 받았습니다, 해놓고 돌아서면 없잖아요. 은혜 받을 때는 커졌다가 다시 쭈그러들죠. 영혼, 인간의 마음이 그렇다는 거예요. 파괴되고 생성되고 파괴되고 생성되고. 인간의 마음속에 세상을 분별하는 인식기관이 있는데 그 인식기관을 영혼이라 하자, 이 사람이 최초로 이야기한 겁니다. 인간의 영혼이라는 것. ‘전체는 로고스(logos)고 개별적인 것은 각자 개별적인 자기의 영혼이 감당하기 때문에 나라는 것은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닌, 들쑥날쑥한 나일뿐이다.’ 하는 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입니다.
그러니 인간들 입장에서는 양쪽 다 맞고 어느 한쪽도 버릴 수가 없죠. 전부 일리가 있죠. 여기서 바로 과학과 철학과 인문학이 다 쏟아져 나온 겁니다. 방금 제가 정리한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은 이렇게 두 개로 정리되는 겁니다.
여기다가 우리의 일상을 대입해보세요. 설명이 다 돼요. 설명이. “너 뭐 8시에 만나자 해놓고 8시 반 다 돼서 왔는데 어찌된 거야?” “그럴 수 있지, 뭐. 오다가 눈이 와서 차가 좀 지연된 걸. 내 마음대로 되나. 나도 몰라. 너 그것도 양해 못하나?” 그랬던 그 사람이 다음에 약속할 때 상대방이 30분 늦게 오니까 “내가 한번 늦게 왔었다고 나한테 지금 개기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너 성질 좀 누그러뜨리면 안돼? 난 한결같아. 곧이곧대로 이거하면 이거야.” 그래놓고는 다음에 어떤 사람들한테는 “사람은 뭐 그때그때 마음 다르고 그렇지 뭐.” 도대체… 변명 핑계 좋~다, 하여튼.
자, 여러분 지금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을 이야기하니까 파르메니데스는 천국까지 이야기하고 영원한 천국까지 이야기하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두 가지 이론이 딱 나오니까 여러분들이 굳이 성경 말씀 복음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필요해요, 필요 안해요? 이 두 개 아니까 성경을 대체할 것 같은 느낌 안 듭니까, 이 철학이? 성경 없어도 충분히 잘 살 것 같죠.
이제는 악마를 대비해봅시다. 이게 마귀가 만든 거거든요. 이게. 고린도후서 10장의 말씀처럼 세상의 모든 학문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지혜로 그걸 다 묶어버리고 파괴시켜버립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10:5). 그게 십자가에요.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할 때는 인간세계 철학에 대해서 안다는 뜻이거든요.
우리는 악마가 우리한테 어떤 사상을 심어줬는지 그것도 모르는 채 무조건 복음, 무조건 하늘나라, 성경말씀, 헬라어, 히브리어 원어 따지고. 백날 따져보세요. 아까 두 가지 철학에서 벗어납니까, 못 벗어납니까? 못 벗어나요. 그래놓고 자기는 복음은 안다, 이렇게 한다고요. 복음 아니고 다 철학인데. 철학에 불과한데 자기는 복음 알았대요. 복음 안 게 아니에요.
그러면 복음 아는 것과 철학 아는 것이 어떤 차이가 나느냐? 아까 제가 이야기할 때 시원, 기원, 뿌리라 했죠. 그 뿌리 너머로 가보자는 거예요. 뿌리 너머 예수님의 안목에서 이 악마의 사상을 어떻게 보느냐.
여러분, 제가 두 가지 문장을 쓸 테니까 어떻게 차이 나는지 보세요. ■‘1.저기 있는 사람 (내가) 어떻게 처리하지?’ 악마에 속해있는 모든 인간의 심보가 바로 이 심보입니다. 저기 있는 사람 내가 어떻게 처리하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두 번째 문장은 좀 이따 하고요. ‘가난한 사람은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사람을 매정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가난한 사람이라 해도 되고 그냥 보통 사람이라 해도 돼요.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을 만난 순간 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감이 있잖아요. 그 기대감이 뭐냐 하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기 때문에 스스로 남들 사는 것처럼 사람답게 못 산다는 열등의식 같은 게 있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누굴 만나면 마음속으로 ‘제발 나를 도와주세요.’라고 하죠. ‘나를 도와주세요.’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만약에 안 도와주면 매정한 사람으로 규정하겠다는 거예요.
택배 1층부터 10층까지 왔다갔다 해도 가만있으면 좋은 사람이고 한소리 하게 되면 매정한 사람으로 본다. 너는 돈 벌어서 아파트 살지. 나는 아파트 못 살고 배달이나 하고 있다. 나 얼마나 불쌍하냐? 좀 봐줘. 뭡니까?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사람을 매정한 사람으로 이미 규정하고 들어가죠. 이 긴 말을 다음 문장으로 약간 짧게 정리할 수 있어요. ‘저기 있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처리하지?’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 이 세상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내가 너보고 욕하게 하지 말라는 그런 장치, 시스템이 우리 안에 작동하고 있어요. 이게 마귀 아닙니까. 너는 무조건 내게 보탬이 되어야 되고 도와줘야 돼. 이 인간아.
누구든지 눈에 띄면 그래요. 저기 있는 거 어떻게 처리하지? 처리한다는 건 죽인다는 말도 되지만 안 도와줬을 때는 죽어버려라, 이런 뜻도 되거든요. 이게 무슨 마음입니까? 무슨 마음이죠? 악마의 심보죠.
왜 본인은 그런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까? 내 안에는 돈이 있기 때문에? 아니요. 내 목숨이 있기 때문에? 아니요. 아까 했죠.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자기 의. 하나님이 와도 나한테 욕하면 안된다. 왜? 이유는 없어. 무조건. 하나님의 심판은 나한테 욕하면 안돼. 나를 나무라면 안돼. 왜? 모르겠어. 이게 마귀의 마음이에요. 이런 마음으로 태어나서 가족을 만나든 누굴 만나든 누굴 만나면 저 사람을 어떻게 내가 구슬려서 내게 도움 되도록 빼먹을 수 있을까? 어? 안 해줘? 이 매정한 인간아.
자, 이게 악마가 있는 인간의 심보입니다. 이것을 감추면서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공부를 하는 거예요. 의사들이. 그리고 판사들이. 그리고 대기업의 모든 공부 잘 하는 사람들이 전부 이 마음을 다 갖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게 1번입니다. 2번 안 적었어요. 2번 적어볼까요? 기대되죠? 왜냐하면 1번 이게 전부니까. 세상에 이 문장 말고 다른 문장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죠.
■‘2.당신은 왜 거기 있지? 참 신기하네.’ 집에 가니까 딸이 하나 있어요. 딸,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네가 왜 거기 있지? 억수로 신기하네. 거울 보니까 거울에 누가 비쳐요? 내가 비치죠. 내가 왜 여기 있지? 이게 복음 안에 사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저걸 어떻게 이용해먹지?’가 아니라 ‘나는 마땅히 있어야 돼’가 아니라, ‘내가 왜 있어야 되지?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거예요. 내가 있는 이유에 대해서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해줬어요. 그런데 있어. 그것도 늘 있는 게 아니에요. 늙으면 또 죽어요. 90 넘으면 돌아가셔야 돼요. 양양 가서 하시든지 뭐 함평에 계시든지… 그런데 내가 왜 있는 거예요? 도대체 내가 왜 있는 거야.
이것은 뭐냐? 십자가 앞에서 내 존재를 일단 제거해버려요. 십자가 사건은 누굴 배제하기 때문에? 인간을 배제하기 때문에. 인간이 없는 거예요. 있다면 십자가 사건이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만 인간은 두 종류의 인간이 있는 거예요. 하나는 마귀에 속한 인간과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인간, 두 종류의 인간만 있어요.
그냥 내가 있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엉터리 같은 주장이에요. 내가 그냥 있는 것. 그런데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의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여기 있다’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부터. 내가 있는데 내가 한결 같으냐, 영원히 내가 있느냐 그것은 나중 문제에요. 내가 왜 있느냐에 대해 그들은 완전히 깜깜하게 몰라요.
욥도 몰랐어요. 내가 왜 있는지. 나중에는 알게 되죠. 있는 존재는 내가 아니고 하나님만 있어요. 하나님만 있기 때문에 나의 의는 애초부터 없었고 하나님의 의만 있으면 오케이에요. 하나님의 의만 있으면 돼요. 나의 의는 내가 따로 소유하거나 나한테 있으면 안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의에 누가 방해물이냐? 내가 따로 있고 따로 있는 내가 나의 의를 가질 때, 이게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욥에서. 이걸 말로만 했던 것이, 신약에 와서 욥은 하나의 예언이니까, 그 예언이 완성된 사건이 무슨 사건이겠어요?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되지, 내가 따로 있을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은사는 바로 그 해석입니다. 이제는 근원적이고 기원적인 것보다 더 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인간의 삶은, 성도의 삶이라 하는 것이 적당하죠, 성도의 삶은 낱개로 포장된 죽음 단위입니다. 하루하루가. 낱개로 포장된 것. 각설탕. 죽음을 맞이하는 거예요. 죽음을.
죽음인데 이 죽음은 진짜 죽음이에요. 인간은 어떻게 해도 진짜 죽음을 못 죽어요. 인간이 죽는 것은 가짜 죽음이에요. 진짜 죽음은 따로 있는 거예요. 보통 인간은 모르고 성도는 하루 산다는 것이 늘 진짜 죽음을 처리하는 또는 그걸 드러내는 매개체, 운반체, 그걸 보여주는 증인, 발현체, 그런 식의 삶이 성도의 삶이에요.
그러면 성도에게는 어떤 싸움이 있겠습니까? 가짜 죽음과 진짜 죽음, 예수님의 죽음만 진짜 죽음이에요,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진짜 죽음이거든요, 진짜 죽음의 그 차이를 매순간 그 틈새 사이에서 계속해서 내놓음으로써 십자가 사건을 날마다 새롭게 해석하는 그 일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10분 쉬어야 되겠죠.
광주강의20240223b 고린도전서 12장 3절(포괄 개념)-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말은 인간이 죽었다는 것과 달라요. 인간은 아무리 죽어도 죽을 수 없어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깨어남’. 자고 깨어나고 아무리 해도 인간은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은사를 못 받으면 성령을 못 받으면 죽으나 사나 악마의 세계에서 그대로 갑니다.
지옥이라 하는 것은 바로 세상살이 그대로 이사 가는 거예요. 똑같은 의식으로 그대로 가는 게 지옥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지옥 가는 것은 순서상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요. 오히려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가 있는 천국에 간다는 그 이야기가 의외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어떻게 사람이 천국을 가? 그건 도달할 수 없는 곳이잖아요. 도달할 수 없는 곳.
그래서 인간세계란 것은 그냥 학습하는 거예요. 학습이란 말은 습관이란 말도 포함돼요. 인간세계는 계속해서 훈련하고 학습하고 노력하는 거예요. 아무리 해도 자기가 닳아지긴 닳아지지만 자기가 소거되거나 제거되진 않잖아요. 이게 얼마나 인간이 불행한 겁니까. 내가 안 사라져요.
그럼 사라지는 방법이 있어야 되겠죠. 은사에게 사라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라는 용액에 우리를 담그는 거예요. 말씀이라는 용액에 담기면 ㉯우리는 거기서 희석되죠. 희석되고 해리돼요. 갈기갈기 다 허물어지죠. 아까 전라도 말로 뭐라고 했습니까? 다시 이야기해보세요. 쪼글이, 삐글이, 히글이, 뱅뱅글이. 이게 연체동물이라는 말이에요. 모든 게 흐물해져서 어떤 구체성을 따로 챙길 수가 없는 거예요.
뭐 찌글이, 삐글이 그것보다도 약간 고상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개별 개념에서 포괄 개념으로’. 좀더 고상해보이죠. 예수님만이 포괄 개념, 죽음이라는 포괄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은사가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내려오게 되면 개별 개념, 인간은 죽는다는 개념에 뭐가 덮치는가?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예수님이 갖고 있는 포괄 개념의 죽음이 덮쳐버리죠. 그게 바로 용액이에요. 덮쳐버려요.
예수님이 죽으셨다. 그러면 그 앞에서 나의 개별적 죽음은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내가 죽은 것이 의미 없다면 내가 사는 것도 의미 없어요. 어차피 살아봤자 죽은 거니까. 사는 것, 죽는 것이 구분이 안돼요. 그게 그거니까.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갖고 있던 영이거든요, 성령은. 성령이 우리에게 은사, 선물로 주어지면 개별적 개념을 갖고 있던 자가 포괄적 개념으로 이게 드디어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죽음이라는 것만 개별적 개념이 아니에요. 인간이 철학이나 종교를 통해서 갖고 있던 개념들이 있잖아요. 그 모든 것은 전제가 ‘내가 잘 되어야 되고 나는 의로워야 되고 누가 뭐래도 나는 천국 가야돼.’라는 이 개별적 욕망이 갖고 있던 개별적 욕망과 관련되어 있던 모든 것들이 다 개별 개념으로 들통 나요. 천국이 어떠니 율법이 어떠니 사랑이 어떠니 이 모든 것도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나 잘되기 위한 조치라는 사실이 발각되는 거죠.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들은 포괄 개념이에요. 누굴 위한 겁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성경이 주어지는 겁니다. 여러분들 다 아는 이야기지만 성경 한번 찾아보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여기 한번 보세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누구니. 자, ‘산다’의 개별 개념은 뭐냐? 내가 숨 쉬고 살아야 돼, 이게 사는 거예요. 그런데 삶의 포괄 개념은 누가 사는 거예요? 주님의 생명이 삶이에요. 생명이. 내 삶은 개별 개념이에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생명으로 살고 있으니’ 그다음에 뭡니까? 죽는 것도 주님한테 유익하기 때문에 살려주는 거예요. 죽음도 주님의 죽음이 현장화 되는 데에 나를 수단으로 사용해주셨다는 것이 영광이다 이 말입니다. 그게 감사할 일이다 이 말이죠.
그런 관점으로 보니까 아까 첫째 시간 끝에 했던 두 번째 문장, ‘저 인간 왜 살아있지?’ 또 자기가 자신보고 ‘나는 왜 살아있지?’ 아, 내가 살아있는 것은 내가 산 게 아니고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내가 죽는 것이 그리스도께 유익되라고 나를 죽이는구나,라는 그런 기쁨으로 사는 거예요. 은사를 안 받은 사람한테는 신화적입니다. 무슨 이상한 소리하고 있네, 이런 이야기할 거예요. 그런데 그게 성경인데 어떻게 합니까. 이게 성경이에요.
은사를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개별 개념과 포괄 개념. 포괄 개념은 당연히 예수님께서만 아시고 그걸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은사로 주신 개념이 포괄 개념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보느냐 하면 이 세상은 전부다 동그라미에요. 이 동그라미가 공동묘지에요. 이 세상이 공동묘지입니다. 공동묘지고, 다른 한쪽은 천국이에요. 새 예루살렘 성. 옛날 성들은 그냥 성채가 아니고 요새 기능을 했기 때문에 망루가 있어요. 천국 예루살렘과 공동묘지 사이로 하늘에서 은사가 주어지는 거예요. 은사가 주어져서 공동묘지에 죽을 자를 천국의 백성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럼 저 공동묘지에 죽는 사람은 어떤 개념으로 삽니까? 개별 개념이죠. 어떤 단어, 어떤 성경말씀이 나를 살릴까.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나의 의를, 내가 이렇게 의롭고 훌륭하다는 것을 하나님이 알아주실까’라는 그 목적 하나 붙들고 심지어 자살할지라도 나는 못났다, 나는 죽어 마땅하다 이런 거 없어요. 자살해도 끝까지 나는 나한테 정당하다 그거는 못 놓치고 있어요. 그건 마귀가 줬기 때문에.
마귀가 회개합니까? 어제 누가 문자로 그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마귀도 기도합니까?’ 그래서 답변을 이렇게 했어요. ‘피곤할 땐 좀 쉬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 자체를 분석하게 되면 ‘하루하루 사는 게 왜 힘듭니까’ 그런 뜻이에요. 괜히 다른 개별 개념들 동원시켜봤자 껍데기 포장지 다 뜯어내게 되면 ‘사는 게 왜 내 맘대로 안됩니까’ 이런 뜻이에요. 푹 쉬시라 하면 돼요.
자, 여기서 성경해석을 할 때 아까 첫 시간에 해석 이야기했지만, 개별 개념에 있는 자를 이렇게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넣어주는데, 은사가 왔다. 이 은사가 공동묘지에서는 어떤 작용을 하고 천국에서는 어떤 작용을 하느냐? 이걸 이번 시간에 알아야 돼요. 정리가 되어야 됩니다.
은사가 십자가에서 나오죠. 그럼 개별 개념은 결코 포괄 개념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저쪽 인간세계에서는 공동묘지에서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는 안 믿죠. 제자들도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니까 제자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유령이라 했죠. 유령. 유령의 특징이 비(非)활성적 존재에요.
비활성적 존재라고 유령을 인간들이 그렇게 평하는 이유가 다른 게 아니에요. 유령은 내 마음먹은 대로 내가 다룰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것이 이게 짜증나는 거예요. 아까 문자 보낸 사람도 짜증나서 그런 거예요. 짜증이 나서. 왜 세상은 내가 시키는 대로 활성화되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세상은 왜 너 마음대로 노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에서 은사가 왔다는 말은 우리가 얼마나 악마적이고 마귀적인가 하는 그 적나라함이 그대로 노출되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에 담긴 해석이에요.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그 발언을 성도로 하여금 매일같이 끄집어내고 쏟아내게 만들어버려요.
용액에 뭘 하나 담그면 담긴 물질의 본색이 엄청난 색깔로 용액에 따라 막 해리되면서 해체되면서 풀어져 나오잖아요. 주님께서 은사를 줘버리면 그때부터 우리가 꼬깃꼬깃 숨겨놓았던 나의 본색이 주님 주신 은사와 더불어서 음흉한, 침침한 색깔, 더러운 죄의 색깔로 이게 마구마구 번져 나온다 이 말이죠. 번져 나오는 거예요. 그런 현상에 대해서 그걸 굉장히 고맙게 여겨야 됩니다.
그런데 은사를 준 것은 그렇게 시작하면서 결과는 뭐냐? 단 하나의 죽음이에요. 포괄 개념의 죽음인 단 하나의 죽음을 위해서 너희는 이 땅에 태어났다는 거예요. 단 하나의 죽음이에요.
삶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죽음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살아봤자 죽음밖에 없기 때문에 죽음에 갇힌 입장에서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망상에 해당돼요. 살아봤자 결국 죽잖아요. 죽음만이 유일하게 현실이지, 살아있다는 것은 비현실이에요. 그건 거짓말입니다.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죽어가고 있는 게 정답이지, 살아있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덕담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자꾸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자, 그럼 이 용액이 어디 있느냐? 로마서 10장 18절. 17절부터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20절에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21절에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사도 바울은 구약성경에 말씀이 온 땅에 퍼졌다는 이 대목에다가 완전히 다 갖다 투입을 합니다. 특히 20절에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이 말씀을 하셨는데 그러나 오늘날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는, 언제? 언제 이런 일이 있느냐, 언제. 지금이 이사야 65장 이 말씀 그대로다 하는 말이 도무지 믿기질 않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 해석을 어떻게 했단 말입니까? 나 하나 지키기 위한 해석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해석하고 이게 격이 안 맞는 거예요. 맞질 않는 거예요. 말씀이 와서 덮쳐야 되는데 나는 내 것만 챙기면 오케이에요. 나만 잘 되면 그만이에요.
하나의 문장을 쓰겠습니다. ‘돈이 있으니 웃음꽃이 피어난다.’ 보세요. 뭔 뜻입니까? 아무리 슬프고 어렵더라도 돈, 그것도 많은 돈이 있으니까 그 돈 앞에 있던 모든 집단, 무리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활짝 웃음꽃이 피죠. 어디 말씀 때문에 그래요? 그럼 한번 바꿔봅시다. 돈 대신에 말씀 있는 곳에 웃음꽃이 핍니까? 아니죠.
이 얼마나 인간은 이 땅에서 개별적이냐 이 말이죠. 자기 사정 외에는 알고 싶지 않아요. 자기 사정 외에는. 전체를 보는 안목이 없어요. 나는 유령이 되기 싫은 거예요. 나는 늘 활성체로 내 마음대로 내 선택대로 내가 결정한 대로 일이 착착 되는 그 재미로 나는 살고 싶은 거예요. 그 즐거움으로. 그게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입니다. 탁구를 쳐도 한국이 덴마크를 이겨야 기분 좋아요. 바둑을 둬도 신진서가 계속 우승을 해야 기분이 좋아요. 하여튼 내가 좋아하는 대로 움직일 때 우리는 또 하루를 살 수 있는 보람을 느끼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이라는 용액은 너무나 단호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두 구절을 이제부터 설명해야 돼요. 설명이 상당히 복잡합니다만 여러분 같이 봅시다. 전도서 1장 1-2절,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절,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다 했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아까 첫 번째 공부했던 것,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을 가지고 1장 2절을 딱 대비해보세요. 같아 보입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어떤 점이 다른가를 생각해봐야 돼요.
헤라클레이토스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철학이 어느 수준까지 올라갔는가 보세요. ‘세상은 결국 (언제나) 선하고 정의롭다.’ 이것을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의 세계라 했어요. 이걸 진리의 세계라고 본 거예요. 세상은 결국 선하고 정의롭다고 이야기했어요. 이게 맞는 말입니까? 우리가 철학이라든지 누가 했다 빼놓고 이야기해보면 굉장히 복음적으로 들리죠. 복음적으로.
여기 뭐가 문제냐 하면, 강의 들어와서 이제 처음으로 진실이 밝혀집니다. ‘은사는 나를 지목하고 나를 겨냥해서 찾아온다.’ 소위 복음을 안다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이걸 잊어버려요. 매일같이. ‘세상은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합니까?’ 지금 뭐를 빠뜨린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오는 것을 파악하기를 내가 원했던 거예요. 뭐가 빠졌죠? 너 말이야. 너! 말씀이 나한테 바늘로 찌르듯이 온다는 사실을 놓친 거예요. 나에게. 세상 참 헛되고 헛돼. 아니야! 너. 너. 너 이야기야!
세상은 결국 선하고 정의롭다. 뭐 좀 멋있어 보이고 세상에 대해 제대로 알았어요? 그 제대로 안 거기를 향하여 은사가 나한테 오는 겁니다. 은사가 아까 무슨 은사라 했어요? 무슨 사건이요? 십자가 사건이요. 십자가 사건은 어떻게 내가 십자가 질 테니까 나를 믿어라,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믿어라,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나에게 찾아와요.
그건 나를 녹여버리는 하나의 용액이에요. 무서운 용액이에요. 내 개별적 죽음이 무서워 벌벌 떨 때, ‘너는 벌써 죽은 거야!’ 하고 포괄 죽음이 나에게 찾아온 거예요. 전도서나 이 성경말씀은 신약의 십자가 말씀과 연계되어서 솔로몬에게 계시로 찾아온 겁니다.
세상은 결국 선하고 정의롭다, 하나님의 주권론, 개혁주의 신학 이거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개혁주의 신학을 이야기하고 세상은 결국 승리하고 주님은 승리합니다, 그 이야기할 때 주님은, 내가 승리한다 했지? 승리의 맛을 한번 보여줘?
우리가 어떤 성경에 있는 용어를 다 동원하고 그럴싸하게 어떤 경우라도 이건 칭찬받아야 돼, 자신만만한 그 말씀 속에서도 주께서는 경상도 말로 치아라! 치아뿌라! 전라도 경상도 다 나온다, 내가 찾아갈 거야. 네가 발언하지 마. 내가 찾아가서, 상어가 낚싯바늘에 낚이면 상어가 굉장히 아프겠죠, 아픔으로 말씀이 우리를 꿰뚫어 입을 딱 낚시 바늘로 걸듯이 꼼짝 마라는 식으로 먼저 찾아들죠.
그게 바로 은사입니다. 그래서 은사는 비소유성이에요. 피동성이에요. 말려든 거예요. 걸려든 거예요. 저는 어떻게 됩니까? 이런 것은 십자가가 도저히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그러면 실제로 그 은사에 대해서 언급한 게 있느냐? 있고말고요. 당연히 있죠. 고린도전서 12장, 이제부터 좀 복잡합니다. 12장 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이렇게 되어 있죠.
이 말씀부터도 벌써 우리에게는 장벽처럼 작용하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예 관심이 없기 때문에요. 예수님을 저주하려면요, 예수님이 우리 인생을 작살내야 저주가 돼요. 그냥 나는 나대로 살고 주님은 저대로 일할 땐 저주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저주가 나타나지 않아요.
흔히 일반 교인들은 제발 좀 편하고 조용하고 행복하게 살길 원하지, 예수님하고 다투고 이거 취미 아니거든요. 그냥 편하게 조용하게 약간은 여유 있게, 약간, 약간 뭐 한 20억 정도 약간은 여유 있게, 몸도 약간 건강하게 병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도 안 아프고 이런 거 있잖아요, 날씨 추울 때 관절도 안 시리고 이런 거요, 지금도 20대처럼 팔팔 날아다니고 약간은 건강하고. 그냥 나 챙기는 거, 온통 24시간 나 챙기는 거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예수님 그 좋은 분을 왜 저주해요. 저주 안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저주를 안 하면 뭐가 안 됩니까? 은사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잖아요. 이래도 저주 안해? 하고 우리를 조집니다. 성령이 와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은 참으로 저주해야 될 자라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버려요. 그걸 비로소 느끼게 되면 이제 와서 느끼는 게 아니고 원래부터 잠복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해요. 내 안에 여차하면 예수님이라도 나는 저주하겠다는 그런 괴물을 처음 태어날 때부터 계속 유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평소에 그게 안 들키기 위해서 믿음생활, 신앙생활, 복음생활 온갖 거 다 한 거예요. 그건 가짜 내 모습인데 진짜 내 모습은 저주를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제자 중에 대표로 저주한 사람이 누구지요? 베드로. 세 번씩이나 저주해서 CCTV 걸려가지고 책으로 나왔어요. 성경책. 그런 우사가 없어요. 뭐 간음했다, 살인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노골적으로 저주를 한 거예요. 베드로란 그 분이 변화산에서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가 좋다고 했던 사람이에요.
헤라클레이토스에요. 세상에 안 변한 게 없어요. 다 변해.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는가요? 세상 그렇지 뭐. 세상 다 변하는 거지. 세상은 변하지만, 세상이 변한다고 여기는 나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파르메니데스. 둘다 짝이라. 둘다 다 필요해요. 인간의 존재성을 위해서는 다 필요해요. 그래서 이 핑계대면 저리로 도망가고 저거하면 이리로 도망가고.
예수님에게 두 강도가 있었잖아요. 둘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한 강도가 처음부터 예수님보고 저를 생각해 달라 하지 않았어요. 둘다 그때 강도들도 같이 욕하더라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에. 같이. (27:44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은사를 준 이유는, 은사는 비소유성이죠, 아주 깊이 있게 생각해보세요. 은사가 없다는 말은, 소유성으로 산다. 은사 없는 특징이 소유성이에요. 소유성은 뭐냐 하면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내가 행위에 나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은사가 없는데 은사가 주어진다는 것은 이 은사가 인간의 은사 없음을 십자가가 공격하는 거예요. ‘너는 은사 없지? 너는 너 원하는 대로 살고 싶지?’라고 말씀이라는 용액을 통해서 노골적으로 인간을 지목해왔다는 겁니다. 온 세상에.
어떤 사람은 ‘복음이 다 퍼지지도 않았는데.’ 아니에요! 지금 온 세상이라 하는 것은 단위별로 온 세상이 계속 반복되고 있어요. 이거 참 어려운데… 판케이크를 생각하면 돼요. 판케이크. 전에 서울강의에서 했는데 네 번째 짐승, 마지막 짐승이 로마잖아요. 로마가 마지막 짐승입니다. 로마 때 십자가 사건이죠.
그러면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시간성으로 끝났어요. 하나님의 일은 언어로 표현 못해요. 그냥 일곱 때가 아니고 일곱 이레에요. 한 때, 두 때, 반 때에요. 이거는 인간이 알고 있는 시간에 대한 단어로서 하나님의 일, 예수님의 일을 곧이곧대로 그대로 표현 못합니다. 로마가 끝났어요. 로마가 끝나면서 성경도 끝나요. 요한계시록으로 끝나요.
그다음 그 뒤에 시대는 뭐냐? 이걸 반복하는 겁니다.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은 마지막 때까지 계속해서 있어야 되고 영원히 천국 가도 십자가 사건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로마까지 있었던 인류의 역사를 그 다음 시대에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는 거예요.
그럼 각 시대를 A, B, C, D라 합시다. 아무 때나 끄집어내서 C를 끄집어내면 이 시대는 두 가지로 되어 있어요. 하나는 시간과 하나는 어려운 단어로 묵시, 묵시는 너무 어려우니까 영적세계, 양쪽 다 중첩이 되어 있는 거예요. 인간은 어디 있겠어요? 시간 속에 있겠죠. 왜 세상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가? 하나님의 은사가 주어지면 아, 내 마음대로 안 되어야 다 이루어진 세상이고 이것이 바로 이미 천국에 들어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적용되는 원리는 로마 때까지 적용되는 이 성경이 성령에 의해서 되풀이해서 반복되어 이루어지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을 위하여 말씀이 새로운 용액으로서, 또 용액으로서, 또 용액으로서 그 시대에 맞는 용액이 주어진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환경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역사라는 환경의 이어짐이 아니라, 새 언약의 반복을 위하여 환경이 그때마다 만들어진다는 거예요. 그때마다 환경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적용은 이미 완료된 성경말씀, 말씀 외에 나가면 안돼요, 성경말씀이 그 시대마다 딱딱 집어넣어지는 거예요. 그 시대마다.
컴퓨터를 공장에서 만들어내죠. 그 컴퓨터에 있는 운용체계는 어떻습니까? 이미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나온 그걸 그냥 집어넣으면 되잖아요. 윈도우에 그냥 집어넣으면 되잖아요. 성경이 윈도우고 인간의 출생은, 애 계속 낳잖아요, 낳으면 거기다가 똑같은 말씀가지고 집어넣는 거예요. 말씀은 이미 완료되었어요. 더 보태거나 빼면 안돼요. 사도가 죽음으로써 말씀도 완료되었다. 말씀은 용액으로서 집어넣는다니까요. 그 말씀은 십자가 사건 안에 포함되어 있고요.
그러니까 어느 시대에 태어났든 간에 하늘나라는 늘 가까운 입장에 있습니다. 십자가 이후에는. 그게 어느 시대든, 2220년도든 2250년도든 관계없이 그 시대는 늘 하늘나라와 맞닿아 있는 상태에요.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의 효과입니다.
이 정도 알았으니까 질문할게요.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습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순신 장군. 요새 이순신 장군보다 더 잘나가는 강감찬 장군으로 갑시다. 고려 장수로 거란을 크게 이겼던 강감찬, 나이 많지만 느즈막하게 군인이 되어 설쳤던 그 사람 구원받습니까? 당연히 구원 못 받죠. 자, 구원 못 받는 이유가 뭘까요? 성경을 거기에 동원시킵시다. 이방인이기 때문에.
자, 이방인의 특징은 뭐가 없기 때문에? 언약이 없기 때문에. 언약을 이스라엘에 준 것은 하나님의 은사에요. 선물이죠. 결국 강감찬은 선물이 없었다. 어떤 선물? 내가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이것은 이미 죽은 것이라는 것을 아는 선물이 없었습니다.
‘강감찬 장군이 구원 못 받으면 어떻게 해. 구원 못 받으면 안되잖아. 세종대왕, 이순신 구원 못 받으면 안되잖아.’ 이러지 말고 이 강의 내용대로라면 강감찬 장군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강감찬 이전에 단군할아버지 때 강감찬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죠. 왜 고려 때 강감찬이 생겼습니까? 그 시대에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마치 뭐 세종대왕이 창세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지 마세요. 언약을 위해서 새롭게 만들어낸 거예요. 언약이 없는 자는 은사가 없는 자는 지옥 갈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제 뭐 깔끔하게 정리되었습니까? 뭐 나 혼자 깔끔한가. 정리됩니까? 이거 정리됐으면 응용문제 들어갑니다. 처조카는 왜 교회 안 나가죠? 시누이는 왜 교회 안 나가죠? 아까 첫째 시간과 한번 연관시켜서 생각해보세요. 왜 안 나갑니까? 바로 십자가라는 걸 드러내기 위해서 교회 안 가야 돼요. 교회가면 안돼요. 여러분 시누이 모르니까 하는 거예요. 알고는 이 소리 못하잖아요, 실례되니까. 그 시누이가 뭘 보여줍니까? 자기 의를 보여주겠죠. 박수치면 되는 거예요. 박수치면. 참, 말 더 심하게 해서 왜 아들은 교회 안 나갑니까, 하고 싶은데 각자에게 너무 큰 실례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은 뭐냐? 인간에게는 마귀가 심어준 자기 의가 있다. 그런 경우를 보여주는 존재가 등장해야 십자가 사건이 살아요. 제가 예를 든 거니까 교회 안 나가고 복음을 모르는 그런 시누이가 있다는 것은 성도 입장에서는 올케 입장에서는 주께 영광 돌리고 감사해야 되죠. 나는 지옥을 보았다. 나 살아생전에 지옥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거요. 내가 태어난 게 다 이때를 위함입니다. 그게 바로 은사가 주는 자유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불교를 봅시다. 나는 부처님 믿어서 천당 가는데 세상에 욕심쟁이 우리 엄마는 극락에 없으니 내가 천국에 와도 마음이 기쁘질 않네. 무슨 천국이 마음 안 기쁜 천국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나 혼자 구원받으니까 섭섭~한 마음이 있어가지고 부처님께 기도를 하죠. 부처님, 한번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이라 해도 되고요. 천주님, 마리아님 해도 돼요. 똑같으니까. 교리가 똑같아요. 그래, 한번 기회 줄게. 파뿌리 예를 너무 많이 해서 미안해가지고 예로 더 못하겠다마는 또 해먹자, 파뿌리 내미니까 엄마가 이제 아들 빽으로 올라오는데 보니까 이상한 한 놈 또 달라붙은 거 발로 차다가 파뿌리 끊어져서 둘다 다 죽었다는 이야기잖아요.
도대체 그 의도가 뭐에요? 의도가. 나를 잃어버리기 싫은 거예요. 종교란 것은 나를 잃어버리기 싫은 거예요. 어떤 경우에 그래요? 만약에 그래서 우리 시누이 지옥 보내고 우리 엄마 지옥 보내고 자식 지옥 보내면 우리 속에서 드디어 나타나는 건 뭡니까? 누굴 저주해요? 누굴 저주합니까? 주님을 저주하죠. 이거 무릎을 한번 쳐야 돼.
모든 이 세상의 움직임이 예수님을 저주케 하는 상황들로 우리에게 들이닥칩니다. 들이닥쳐요. ‘내 중보기도는 왜 응답 안 해주십니까. 나 혼자 구원받아서 나 혼자 천당 가면 재미지겠다, 정말. 나 지금 속상해 미치겠어.’ 이런 마음. 그게 저주에요. 그게 저주입니다.
그래서 12장 3절에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결국 이건 뭐냐 하면 믿음이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에요. 믿음은 해석입니다. 결과적인 해석이에요. 믿음이라는 해석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왜냐하면 저주해야 될 예수님을 찬양하고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런 조치를 내려주신, 어떤 조치? 시누이 지옥 가는 조치, 이런 조치를 내려주신 주님께 고맙다고 하는 것은 이게 내가 의도한 거예요, 의도하지 않은 거예요? 내가 의도하지 않았죠. 그걸 믿음이라 하는 거예요. 그걸 믿음이라 하고 성경에서 다른 말로 하면 선물이고 그게 뭐냐? 은혜고 그게 은사라는 겁니다. 은사.
이 대목에서 갑자기 제가 예상 못한…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이 가사 여러분 아마 들어본 적 있을 거예요. 조금만 하겠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이거 미친 거예요. 이럴 수가 없어요.)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이게 말이 안돼. 추임새입니다, 이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이건 말도 안되죠. 시기를 왜 안해요. 옆집에 집 팔려보세요. 시기나지.)
이제 이해되죠? 이제 됐습니다. 최성욱, 최안순이 부른 노래에요. 성경을 지키면 안된다니까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주님을 저주해야 돼요. 화를 내야 된다고요. 지키지도 못할 말씀을 왜 주고 합치될 가능성도 없는 걸 왜 주셨습니까? 그게 은사의 시작이에요. 은혜의 시작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뭐라고 하느냐?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를 주라 할 사람이 없다. 예수님이 주(主)거든요. 왕이거든요. 왕. 세상에 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구를 왕으로 섬깁니까. 제가 대구 강의 때도 했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에요. 오야에요. 오야 마음대로에요. 누구 시누이 왜 지옥 보내냐는 이런 소리, 감히 왕 앞에서는 그런 소리 나올 수가 없어요.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모든 것이 왕으로부터 와서 이것을 왕에게 드릴 마음을 허락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것을 도로 아낌없이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역대상 29장).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21절,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 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라고 되어 있죠.
읽었던 본문 23절에서 ‘아름답지 못한 지체’라는 단어가 나오죠. 이 단어 일단 우리한테 오게 되면 포괄 개념입니까, 개별 개념입니까? 개별 개념이에요.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은 것을 우리는 분별하려고 해요. 왜? 자기 수준을 알기 위해서, 자기를 평가하기 위해서, 자기를 채점하기 위해서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알고 있어요.
알고 있는 걸 보고 누가 옵니까? 주님께서는 아름답지 못한 경우도 더 아름답다는 것으로 딱 왔을 때 우리에게는 반발이 일어나는 거예요. 왜 나는 발입니까? 왜 냄새나는 발입니까? 왜 근사한 눈은 아닙니까? 왜 저 숨어있는 발입니까? 발도 괜찮아요. 왜 발가락입니까, 이런 거요.
12장 12절 봅시다. 이제 본격적으로 좀 어려운 것 합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여기에 대해서 할 말이 굉장히 많아요. 이게 어려워서. 이게 정말 어려워요. 몸의 개념이 어려워요. 어렵지만 간편하게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사건은 몸으로 표현된다.’ 이 한마디에요. 사건은 몸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예수님 몸으로 나타나요. 예수님 몸이 아닌 하나님은 없습니다. 예수님 몸을 허락한 하나님이 하나님이에요. 다른 추상적인 신은 인간의 개별 개념이 만든 신 개념이에요. 진짜 하나님은 말씀이 몸으로 오신 거예요. 몸으로 왔는데 그럼 하나님 뜻은 뭐냐? 몸이 어떻게 되었어요? 몸은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죠.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 외에 다른 하나님 뜻은 없습니다.
내가 잘 되고 몸이 건강하고 이건 뜻이 아니에요. 뜻은 하나의 죽음에 모든 것이 모집되어 있어요. 은사는 하나의 죽음만 이야기하기 위해서 찾아오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것은 너 잘해라가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너는 이미 죄인이라는 것, 네가 하나님을 죽인 하나님 원수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그것이 바로 은사의 내용이에요.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어림도 없어요. 말씀이 와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그냥 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고, 말씀대로 못 사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들킨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씩씩거리고 이런 예수 같으면 난 안 믿는다고 악마의 본색을 뱀의 혀를 나불거리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로 은사의 시작이라니까요. 말씀의 능력의 시작이에요.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뭐를 느끼느냐 하면 다 좋은 말인데 이런 식으로는 애 키우고 못 산다는 거예요. 다 맞는 말이고 좋은 말인데 이걸 지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거 내가 모를 바가 아닌데 아는데 그러면 우리는 생존이 위태롭다는 거예요. 이렇게는 못 산다는 거예요. 오해를 해도 무지무지 오해한 거예요.
지금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지키란 것이 아니고 바로 그 발언, 그 고백을 누가 유도했느냐 하는 겁니다. 누가 그 고백을 유도했냐는 거예요. 누가 그걸 유도했느냔 말이죠. 아이, 난 이젠 성경 안 본다, 이렇게 삐질 때, 누가 그렇게 삐짐-을 만들었냐. 누가 왔을 때? 소리가 이미 온 땅에 다 퍼진 거예요.
각 A, B, C, D 온 세대마다 이미 십자가 죽고 난 뒤에 성령께서 강감찬이든 세종대왕이든 오늘날 푸틴이든 관계없이 모든 각 나라의 환경에 십자가에서 나온 사태가 모두 벌어지고 있습니다. 모두다 한통속이에요. 각 시대에 구원할 사람들을 다 그런 식으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나의 본성을 알았고 나는 죄인이구나. 그런데 아까 믿음이란 뭡니까?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내 소유된 행함이나 이런 걸 개입 안했는데도 일어나버린 행위, 이게 바로 주님의 은사입니다. 은혜로 그냥 죄 사함 받잖아요. 그렇게 될 경우에 남아있는 게 뭐냐? 고린도전서 12장 12절에서 13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이제 이해되죠. 예수님의 몸은 하나이지만 우리는 그 몸을 쳐다보는 몸들, 지체들이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아담과 하와가 두 사람이지만 처음에 만들어졌을 때 우리 둘이 한 몸이라 하죠. 그 한 몸입니다. 동일한 사건을 유지하는 조건 하에 한 몸이에요.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이걸 신약에서는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오늘 이 책 안 봤는데요. 이 관점에서 어디까지 나갔느냐 하면 제가 이렇게 보니까 p.43까지 했어요. 다음에 올 때는 p.44부터 해요. p.43까지 이 이야기가 계속 가는 거예요. p.41 한번 봅시다.【참된 교회의 9가지 특징】되어 있는데요.
유튜브 보면 어떤 목사가 설교하는데 ‘이런 치과는 가지 마세요’, ‘이런 한의원 가지 마세요’ 하는 거 있잖아요. 유튜브 조회수 뜰려고. 그 목사는 뭐냐? ‘이런 교회는 절대 가지 마세요’ 하면서 내세우는 조건이 뭐냐? ‘예배당 자랑하는 교회, 자기 교회에 부자들, 유력한 사람들 많이 참석한다고 자랑하는 교회, 자기 교회가 헌금 많이 한다고 자랑하는 교회, 자기 교회가 일 많이 한다고 자랑하는 교회, 그런 교회는 절대로 가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자기 자신의 힘을 자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희생적인 어린 양을 보호하지, 힘 있는 교회를 자랑하는 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라고 유튜브가 나왔어요.
그 목사 설교의 문제점이 뭡니까? 아, 이거 너무 어려운 문제 냈네. 목사는 복음을 이야기해야지, 교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교회 이야기하는 자체가 교회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 이야기 들으면 사람들이 골라 가겠죠. 그러니까 아까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똑같은 거예요. 내가 나를 건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무슨 짓도 다 하는 것이 바로 마귀가 시킨 인간의 특징이잖아요.
아까 믿음이 뭐라고 했습니까?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나는 왜 살아있는 거예요?’ 이 질문이지, ‘어떻게 하면 바른 인간으로 유지하겠습니까?’ 그건 구약의 욥이 오해한 거예요. 욥이 오해를 하더라도 이미 그건 하나의 시작이고 결국은 욥처럼 오해하기 시작한 그것도 주께서 은사를 퍼부어주고 있는 시작인 줄 아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 성령으로 한 몸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 몸은 없고 주의 몸을 지향하고 바라봐야 될 몸인데 말씀이 주는 과정을 통해서 십자가 사건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기쁨으로 한 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