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죄란?

아빠와 함께 2024. 6. 2. 08:37

광주강의20240531a 누가복음 15장 4절(죄란)-이 근호 목사


오늘은 p.80【죄란】, 거기서부터 하겠습니다. 자, 죄에 대해서 정립을 할 필요가 있어요. 죄에 대해 정의 또는 정립. 누가 ‘죄가 무엇이냐’ 할 때 죄는 이렇다고 대충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죠.

죄라는 것은 ‘너와 나의 관계’를 의미하는 겁니다. 너와 나의 관계. 여기서 ‘나’는 하나님, ‘너’는 바로 예수님. 여기서 인간은 죄에 대해서 빠져 있습니다. 빠져 있어요. 창세 전에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서 모든 의미는 이 두 분 사이에서 정립이 된 겁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는 끝났어요. 죄란, 방금 위 이야기를 통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곳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여기 있고 살아간다고 느끼잖아요. 그러면 사는 게 뭐가 되겠어요? 죄가 되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관계에서, 죄를 규정할 수 있는 권한은 아버지와 아들밖에 없어요. 그런데 천사라든지 또는 악마, 또는 인간 이것들이 모든 의미를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서 새로 수용 받아야 되는데…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무슨 관계라 합니까? 언약 관계죠. 창세 전의 언약, 창세 전 언약 관계에서 받아야 되는데 독자적으로 의미를 부여해버리는 거예요. 마귀도 마찬가지고요. 마귀나 인간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럼 이거는 나와 나의 관계에서 의미를 주는 거예요. 저기 꽃이 있다. 내가 꽃의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꽃은 나한테 하나의 꽃이 되었다.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것이 이름을 부를 때 꽃이 되고 그것이 이제 의미가 되는 거죠. 이름을 내가 불러주는 거예요. 꽃.

아담을 만들어놓고 주님께서 아담에게 이름을 부여하게 하시죠. (아담이) 짐승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이름을 부여하는데 그렇다면 아담 당사자는 어떻게 돼요? 아담이란 이름은 아담이 지었습니까? 아니죠. 아담이란 의미를 아담 본인이 만들었습니까? 아니죠. 그러면 아담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종속적인 관계에 속하는 겁니다. 예속되는 관계에요.

그 예속 관계에 있음을 더 분명히 하시는 것이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지시와 명령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죠.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것을 수만 번까지 했을 거예요. 이 내용을. 이 내용에 대한 해석을. 오늘 다시 한번 해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적어볼게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 선악과 누가 만들었어요? 인간이 만들지 않았죠.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선악과를 인간 쪽에서 만든 게 아니거든요. ‘선악과 네가 만들어놓고 따먹으면 네가 죽으리라’ 이게 아니거든요. 선악과 쪽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만들었단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선악과에도 예속되어 있지만 결국 어디에도 예속됩니까?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에 예속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의 죽음은 인간과 무관하다’. ‘무관하다’를 다른 말로 하면 ‘상관없다’. 더 나아가서 ‘나의 죽음은 나랑 상관없다’. 내 죽음은 나랑 상관이 없어요. 다들 그렇게 살고 계시죠? 내가 지금 암 말기다. “아이고, 빨리 약 잡숫고 회복하셔야 되죠.”하면 성도인 환자는 “나 죽는 것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있는데?”

그런 사람 봤습니까? “선생님, 살려주세요.” 이러고 “하나님, 뭐 때문에 저한테 이런 어려움을 주십니까?” 대전강의에서 나오죠. 합스부르크 마지막 황제 유언이 뭐였다고 했죠? “하필 이때입니까.” 사람이 죽을 때 약이 오르는 것은, 나를 지켜보는 인간들은 멀쩡히 살아있다는 거예요. 이게 약이 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임금들 죽을 때도 그 임금의 위상을 빛내기 위해서 옆에 있는 부인부터 해서 같이 순장해버리잖아요. 같이 땅속에 묻어버리죠. 100일 동안 먹을 양식 주고. 그 100일의 양식은 뭡니까? 일종의 시한폭탄이죠. 시한폭탄. 시한폭탄이야 빨간 선을 끊을까, 파란 선을 끊을까 그런 기회라도 있지만 이건 그런 기회도 없어요. 그냥 째깍째깍째깍 그 안에서.

결국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심어놓은 이상 인간의 운명은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죽으리라’는 설상 네가 죽는다 할지라도 네가 저주받는다 할지라도 너의 죽음은, 다른 말로 하면 너의 저주받음은 누구와 상관없다? 너 자신과 상관없다는 거예요.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러면 이 말을 달리 바꾸어봅시다. 내가 천국 간다. 내가 천국 가는 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상관이 없죠? 그러니까 천국은 나의 소원이 되어야 돼요, 말아야 돼요? 천국은 나의 소원이 되지 말아야 돼요. 나의 소원은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하는 그게 소원이어야 돼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그걸로 끝입니다. 오늘 강의 끝났다. 집에 가야겠다. 너무나 간단한 문제에요. 너무나 간단한 문제.

그러면 죄가 뭐냐? 이미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 앞에 이미 예속되게 했잖아요. 예속된 관계를 확장시키는 것이 바로 죄의 등장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 속에 이미 죄가 무엇인가 의가 무엇인가 창세 전에 규정되었잖아요. 규정된 것을 하나님께서 움키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시간 따라 퍼트려버리는 거예요. 퍼트려버리면 죄는 확산되면서 거기에 모든 피조물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결정된 죄의 개념, 의의 개념에 말려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심지어 마귀까지. 말려들어요.

포목집에 가면 옷 만들기 위한 원단이 있잖아요. 무늬가 없는 원단 말고 무늬가 다 새겨진, 염색 다 된 원단이 두루마리처럼 말려 있죠. 그런데 손님이 왔습니다. “아이고, 이번에 딸 시집가는데 내가 한복 한 벌 해준다 해서. 사돈 쪽 한복을 어떤 걸로 할까?”하면 “아이고, 어머님 참 나이보다 젊어 보이십니다. 이걸 한번 해보세요.”하고 두루마리 하나를 끄집어내서 그다음에 어떻게 해요? 대구 서문시장에 포목집이 유명해요. 어릴 때부터 많이 봤어요. 그 좁은 상에 확 전개시키죠. 뚤뚤 감겨있던 건 풀어보죠. 풀어낸단 말이죠.

그게 언약의 전개죠. 언약의 전개. 그럼 언약의 전개와 더불어 무엇이 전개된다? 죄의 전개가 되죠. 오늘 공부할 게 그겁니다. 죄가 어떻게 전개되는가? 그러면 죄의 전개는 이미 결론 나 있어요. 한 인물을 향하여 수렴된다. 집약되는 쪽으로 죄가 전개되겠죠. 펼치신 분으로 도로 죄의 의미를 담고 회수가 되는 겁니다. 거기에 모든 천사와 악마와 인간은 말려들었어요. 그 죄의 개념 속에 빨려 들어가죠. 죄라는 개념을 누가 지정했는가, 그 지정자에게 빨려 들어가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결론삼아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죄는 결과적이다’. 죄는 결과적이에요. 죄 짓는다 해서 짓는 죄는 죄가 아닙니다. 결과를 놓고 소급해보면 모조리 다 죄가 되는 거예요. 모조리 다 죄가 돼요.

지난 목요일에 우리교회 집사님이 점심 사준다 해서 그분과 또 다른 집사님과 같이 갔는데 질문 가운데 이게 있었어요. 어떤 질문을 하느냐 하면 ‘음행하고 음란하고 차이점이 뭡니까?’라는 질문을 했어요. 그 질문을 제가 굉장히 좋게 받아들였어요.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서 무엇을 음행이라 하느냐 하면, 우상숭배를 음행이라 합니다. 신약 요한계시록 17장, 18장에 보면 음녀가 나타나서 예수님에 대해서 모독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것, 그걸 음녀, 음행이라 한단 말이죠.

그러면 음녀, 음행이란 개념이 ‘어? 이건 바람피우는 게 아니냐? 어떻게 음행이 그런 개념이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지금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죄가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알고 있어야 되죠. 어떻게 죄가 흔히 아는 상식적인 도덕적인 음행에서 우상숭배가 죄가 되는지를, 불신이 음행이 되는지를, 전개과정에서 어떻게 확산되는지 봐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쭉 설명을 해드렸어요. 중간에 호세아를 거쳐서. 호세아 선지자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간음한 여인과 혼인하게 만들어서 의도적으로 어떤 자식을 낳게 하느냐 하면 음행의 ‘결과’성을 자꾸 뽑아내는 거예요. 결과성을.

그러면 인간이 죄 짓는다는 것은 어디에 참여한다는 말입니까? 인간이 나서서 죄를 지을 수는 없고 이미 상주한 죄에 참여해서 표현하는 식으로서 표현하는 하나의 타일, 모자이크 타일 있잖아요, 타일, 부엌이나 화장실에 있는 타일 조각 조각으로 사용되어지기 위해서 나타나는 것이 이스라엘의 기능이고 또 율법을 주신 이유가 되겠죠. 결과적으로.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이미 상주하고 확정되고 확장된 죄라는 공간에서 어떤 죄들이 어떤 사태에서 묻어나지는지, 그걸 증상 또는 징후라 하죠, 징후로서의 죄가 드러나는 겁니다. 이렇게 되게 되면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하라 참회하라’는 의미가 어떻게 돼요? 완전히 다르겠죠. 이건 윤리 도덕적으로 반성하라는 뜻이 아니고 회개하라 참회하라는 뜻은 비(非)-본래적 세계를 쳐다보고 살다가 다른 세계, 본래적 세계를 발견하는 게 회개가 되겠죠.

이 본래적 세계, 비-본래적 세계는 최근에 나왔어요. 어제 나왔어요. 어제. 수련회 교재에. 읽어보시면 나오죠. 인간이 어떻게 비-본래적 존재가 어떻게 본래적인 걸 알 수 있느냐? 제가 질문했잖아요.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몰라요.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알지 못해요. 자기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에 대해서 알지 못한 결과가 뭐냐? 자기 행위를 결과적이 아니고, 결과적 반대말, 원인적인 거죠. 누가 원인으로 등장하죠? 나. 나에게 원인을 두기 때문에 아무리 행동하고 말해도 그 의미가 어디로 돌아가요? 나로부터 나에게 의미가 돌아오는 것, 이것이 성경에서 언약적으로 뭡니까? 한 자로 말해서?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이게 죄가 되는 겁니다.

결과적입니다. 그래서 죄는 결과적이라 할 때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은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악이에요. 그냥 악이에요.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하고 그 남편을 죽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다윗을 보고? 그게 악이죠. 다윗이 악이라는 하나의 타일로 등장했을 때 비로소 다윗은 비-본래적 위치에서 본래적 위치를 발견한 거예요. 그걸 회개라고 하는 겁니다. 회개. ‘나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구나.’ 이게 회개에요.

자, 그렇다면 성경적 언약적으로 이게 죄라면 그동안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짓눌려 살았습니까? 도대체 누가 나를 짓눌렀어요? 예수 믿고 바르게 살아야 된다고 누가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교재에 이미 나왔기 때문에 교재 설명이 약간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른 기회가 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결론 부분에 나와 있어요. 교재 결론 부분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미 예수님은 이 땅에서 영구 퇴출 대상이 되었습니다. 죽여서 추방시켰잖아요. 영구 퇴출이에요. 김호중인가? 가요계에서 영구 퇴출하는 것처럼 하여튼 영구 퇴출시켰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 갖고 소환할 이유가 있느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인간들이 모이면 주고받잖아요. 너와 나의 관계니까 인간들은. 그러면 너와 나의 관계, 커뮤니케이션, 말을 한다는 것은 의미 던지고 의미 받고, 저쪽에서 의미 던지고 의미 받고 의미를 주고받는 거예요. 의미를.

예를 들면, 엄마가 딸보고 “야, 너 공부해.” 하니까 딸이 하는 말이 “나한테 공부하란 말 하지 마세요.” “왜?” “내 허락도 없이 엄마는 왜 나를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이러면 뭐의 교환이 안되죠? 어떤 교환이 안되죠? 딸의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고 무슨 교환이 안돼요? 의미 교환이 안되는 거예요.

‘공부하기 싫다’를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괜히 태어나게 해가지고 이 땅에서 숙제나 하고. 힘들어죽겠다. ‘어떻게 하면 공부를 할까?’ 엄마는 거기에 의미를 두는데, 딸은 지가 공부하기 싫으니까 후딱 자기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얼굴만 빼꼼이 내고 대꾸나 한단 말이죠. ‘이렇게 닦달 낼 것 같으면 엄마는 나를 왜 만들었어?’ 이런 식으로. 의미 안되죠.

어쨌든 간에 인간의 만남에서 의미를 주고받고 의미를 주고받잖아요. 나와 너의 관계니까. 의미를 주고받는데 왜 인간은 그 의미세계에, 윤리 도덕에 주눅이 들었냐 이 말이죠. 뭐가 인간을 그렇게 죄책감 느끼게 만들고 억압했을까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아무리 의미를 구해도 의미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니까, 그걸 아까 얘기한대로 하면 비-본래적 존재죠.

그런데 교재 결론부분에 나와 있어요. 이미 인간들이 주고받고 주고받아 내린 최종 결론이 뭐냐? ‘예수님한테는 신경 꺼라.’ 이게 결론이에요. 아이고, 그건 그 당시 유대인들이 내린 결론이고…. 아닙니다. 이미 유대인은 인간의 대표자들이에요. 그들이 내린 결론이 그 앞세대, 후세대 모든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 겁니다.

여러분, 본성을 드러냈다는 이 말도 수천 번 했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요한복음 15장 22절,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되어 있죠.

의미를 제공하는 하나님이 접촉했던 유일한 민족이 유대민족이고, 그것도 과거 유대가 아니라 예수님이 오실 때 만났던 그 유대민족이잖아요. 그 유대민족에게 예수님께서는 아까 요한복음 15장 22절을 이야기했다고요. “내가 오지 아니하였으면 너희에겐 죄가 없다.”

이 말 해석부터 우리는 그냥 넘어가면 안돼요. 내가 오지 아니하면 죄가 없다는 말은… 그야말로 그들이 죄가 없다고 유대인들이 그렇게 인정했습니까? 아니지요. 그들은 죄짓지 않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죠. 죄짓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말은 그들은 이미 죄가 뭔지, 죄가 아닌 게 뭔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거예요. 죄가 없는 게 아니고, 죄가 여기 있음을 그들은 감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라고 합니까? 너희에게는 뭐가 없다? 죄가 없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죄 같지도 않은 것가지고 그게 죄라고….” 이런 투란 말이죠. 그것도 죄라고. 아이고, 웃기네. 그거는 너희 세계의 의미잖아. 너희 세계의 의미. 너희들 인간들 만남에서 인간의 공통점에서 구성해낸 가짜 죄, 가짜 의미가 되는 거예요.

너희 아비는 뭐라고 했습니까? 악마죠. 악마가 인간에게 제공한 가짜 죄의 의미. 그 의미는 뭐로 구성되어 있어요? 뭘 따먹었어요? 선악과죠. 선악 체제로 짜여진 의미. 내가 요 근래 강의, 설교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또 하려 하니까 여러분들이 살짝 짜증낼까봐 말을 못하겠는데… 수요일에 한 이야기, 다시 한번 하고 싶네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자기가 잘한 것으로 남한테 인정받는 보람으로 살아요. 자기가 잘하는 거요.

그러면 자기가 못하는 것은 어디 갔지요? 못하는 것은 어디 갔죠? 자기 내부에 숨기죠. 그게 밤에 잘 때 뭐로 나타나죠? 꿈으로 나타나죠. 이게 교재 2번입니다. 낮에는 밤에 감추고 있던 것을 싹뚝 잘라낸 가짜 현실을 현실이라고 우기다가, 인간이 잠을 잔다는 것은 의식이 멈추는 거잖아요. 심장은 안 멈춰도 의식이 멈추죠. 멈추면 숨겨놓은 진짜배기 현실이 완전히 드라마를 찍죠. 영화를 상영한다고요.

그러다 낮에 어떤 계기가 있으면 어젯밤 꿈이 막 생각나는 거예요. 지금 내가 동유럽 갔다 왔는데 꿈에 계속 짐 싸는 꿈만 꿔요. 빨리 가야 돼. 빨리 이쪽 가고 저쪽 가야 돼. 그런 꿈 이야기를 할 때, 난 꿈이 이랬다고 이야기했어요. 진짜 꿈이 그럴까요, 아니면 꿈의 해석입니까? 꿈 꿀 때는 꿈이 지배권을 갖기 때문에 해석을 용납 안 해요. 꿈은 보이는 대로 나타나지, 해석하라고 나타난 게 아니기 때문에. 해석하는 자는 지금 의식이 없어 죽어있기 때문에.

그런데 낮이 되면 그 꿈 꾼 게 남아 있잖아요. 주도권이 어디로 왔습니까? 주도권이 꿈에 있다가 나에게 왔죠. 이게 뭐냐? 현실과 나 사이에 밀고 당기기. 밀당이죠. 낮에는 현실에 적응하려고 해요. 왜? 내가 중요하니까. 내가 엄연히 살아있으니까, 현실에. 눈만 뜨면 나는 살아있어요. 눈만 뜨면 살아있어요. 눈만 뜨면 확인되는 것이 나는 지금 살아있다는 의식입니다.

의식이 살아있는 게 아니고 내가 살아있다는 나와 결부된 의식이 살아있는 게 하루 일과의 시작입니다. 이 닦고 밥 먹고 하죠. 운동가고. 약도 챙겨먹고. 오메가 3도 꼭 챙기고. 현실이라 했는데 이 의미를 누가 주느냐 하면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현실에다 의미를 주고 내가 도로 당겨와야죠. 오늘 독서실에 애 몇 명 왔드나, 이런 거. 의미를 주고 도로 당겨오는 거예요. 독서실이 살아있는 게 아니고 내가 살아있고 내가 현실을 꾸려가고 있으니까.

특히 엄마나 아빠 같은 경우에 자식 있으면 자식도 마찬가지에요. 오늘 수련회 교재 다 하겠다, 지금 여기서. 애가, 엄마가 장에 가면 엄마가 부재(不在)한다, 없다고 여기잖아요. 그게 엄마에 대한 철딱서니 없는 짓이에요. ‘엄마가 지 버리고 가겠어요?’ 이건 엄마 생각이라고요.

그러나 애 생각은 생사에 관한 문제에요. 자기는 어른이 아니니까. 엄마 없으면 곧 자기는 죽음을 직감하게 되는 거예요. 엄마 없으면 죽어요. 그러니까 애는 5만 원짜리 지폐 필요 없어요. 신사임당도 필요 없어요. 은행 주식할까? 주식도 필요 없어요. SK 주식도 필요 없어요. 중요한 것은 엄마 존재입니다. 누구든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갑니다. 왜냐하면 내가 의미 있는 게 아니거든요. 엄마가 있으매 거기에 종속된 존재가 아이란 말이죠.

그런데 엄마는 그 애를 보고, “내가 잠시 시장 갔는데 그것도 못 참고 찔찔 울고 있냐? 찡찡거리고 울었냐?” 막 나무라는 거예요. “이 철딱서니 없는 것아. 도대체 언제 철 날꼬?” 이런다고요. 뭐 철분을 좀 먹든지… 엄마는 왜 그런 소리합니까? 엄마는 어른이잖아요. 혼자서도 잘해요. 혼자 시장보고 잘한다고요. 자기로부터 의미가 나와서 의미를 회수하는 그것으로 자기만의 현실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현실이 실은 뭡니까? 어젯밤에 꾼 꿈이 지금 현실에서 생각날 때 그게 아침 10시에 해석한 꿈, 12시에 해석한 꿈이 그 현실에 일어나는 사태 속에서 계속해서 다양하게 그때그때 달라요. 계속 바뀌는 겁니다. 이 말은 현실의 무수한 변화와 동시에 나도 종잡을 수 없이 변하는 거예요.

내가 마치 나에게 꿈같아요. 꿈속 같아요. 김광석 노래 나오는 것처럼. <거리에서>라는 노래에 나와요. 꿈결 같아요.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이 꿈결 같아요. (‘…왠지 모든 것이 꿈결 같아요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무얼 찾고 있는지 뭐라 말하려 해도 기억하려 하여도 허한 눈길만이 되돌아와요’ -거리에서 가사 中) 내가 생각하지 않은 다른 나 같아요. 이 현실에서.

그래서 남자가 멀쩡하게 집에 있을 때 남자와 예비군 군복 입혀놓고 예비군 훈련받을 때 그 남자가 다른지 본인도 느끼죠. 내가 왜 환경 따라서 이렇게 다른 인간으로 사느냐. 집에 있을 때는 아주 깍듯하게 부인한테 잘하다가 예비군 군복 입으면 지나가는 아가씨보고 휙 소리 내면서… 옆에서 하는 거 따라하니까. 따라쟁이.

왜 따라하는데? 그 무리와 같이 하지 않으면 그 시간만큼은 의미에 참여가 안돼요. 참여가 안 되면 내가 따돌림 당합니다. 새로운 이슈에 합류하지 않으면 내가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없어요. 그 뭉태기, 그 집단의 움직임에 합류가 안 됩니다. 합류될 수 없어요. 그래서 군대는 인간을 개조한다 하잖아요. 개조한다고 얼차려해서….

어쨌든 간에 내가 있음으로 인하여 현실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현실이기 때문에 이 현실 속에서 나는 있다, 없다? 나는 부재한다, 있다? 있는 거예요. 자, 한번 보세요. 이건 장난이 아닙니다. 꼭 장난 같이 보이지만 한번 보세요.

어린 아이에게 있어서 잠시 시장 간 엄마의 존재는 어린 아이인 내가 있더라도 본인은 있어요, 없어요? 엄마가 없는 상태에서 본인이 있어요, 없어요? 엄마 없어도 나는 있네, 그러면 다 큰 거예요. 울지 않아요. 그게 아니고, 나는 내가 있어도 있는 게 아니에요. 실타래라도 던져서 엄마 대용이 있어야 엄마 거기 있으매 비로소 내가 있는 거예요. 순서가 1.거기 있으매 2.내가 있는 거예요.

이게 여자에요. 여자는 두 번째 사람이에요. 첫 번째 사람이 없으면 두 번째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린 여자에 대한 징벌이 뭐냐? 남자를 사모한다. 본인은 본인을 사모 못해요. 본인을 사모할 수가 없어요. 왜? 자기는 두 번째니까. 첫 번째 있음, 그것도 든든해야 돼요, 든든한 첫 번째 있음에 자동적으로 자신도 그 품 안에서 든든한 거예요.

그런데 그 든든한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한 눈 판다. 가까운 주변에 정지칼, 경상도 말입니다, 부엌칼 있으면 그냥 성질상 죽이고 싶죠. 네가 뭔데 나를 없애느냐? 네가 있으매 내가 있어야 되는데, 네가 다른 여자 있어버리면 나는 어떻게 돼요? 내가 있을 자리가 날라가 버렸잖아요. 그럼 내 자리를 나타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참, 남편 안 죽인다. 그 여자의 머리카락이라도 잡아 쥐어뜯고… 폭력이죠, ‘늑대야!’ 다시 말해서 파괴(수련회 교재 [3.자폐증] 참고), 파괴시키죠. 파괴시켜버릴 때 나는 비로소 남편 있으매 내가 있는 겁니다. 이게 어린아이에요.

대전강의에서 했는데,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의 특징이 뭐에요? 공통점이 부재(不在)입니다. “고아 본인이 있잖아요. 됐잖아요.” 아니에요. “나그네 있잖아요.” 안돼요. “과부 자기가 있잖아요.” 아니요, 아니요. 내가 없어요. 뭔가 나로 나 있게 만드는 다른 미지의 것이 있어줘야 돼요. 나의 고향이 있든지 나의 남편이 있든지 나의 부모가 있든지.

그럼 이 미지의 물음표 자리에 누가 나옵니까? 룻 보세요, 룻. 누가 나옵니까? 고엘. 누가 나와요? 그냥 빈손으로 오는 게 아니죠, 하나님이. 뭘 주세요? 율법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 모압 여인, 고향 잃은 이방 여인의 제대로 된 유일한 존재가 되죠. 그게 신약 성경에 오면 ‘예수 안, 십자가 안, 성령 안’이 되는 거예요. ‘율법 안, 복음 안, 새 언약 안’이 되는 겁니다.

어쨌든 어린아이와 엄마에게 있어서 엄마는 스스로 자기가 존재해버리는 겁니다. 스스로 존재하죠. 지금 ‘죄가 무엇이냐’를 위해서 어제 제가 교재를 실었기 때문에 교재 내용을 이렇게 우회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럼 교재의 핵심 부분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자기의 부재를 증명한 거예요. 어디에서? 이 땅에서.

특히 요한복음 12장 많이 언급했죠. 뭐 읽어보셔야 진도를 나갈 건데.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나는 어디로 간다?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 아버지께로 가죠. 그럼 뭐에요?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버리면 열두 제자부터 해서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을 볼 때에 예수님 쪽으로 의미가 가는 진짜 예수님이 아니고, 저 예수는 나를 어떻게 구원하고 어떻게 도울 것인가 하는 있지도 않은 예수, 가짜 예수를 그동안 자기 의미를 충족시키는 재료로서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럼 이거는 회개가 안 된 거죠. 나 있는 세계를 고집하고 고수했기 때문에. 오늘 광주 여러분께만 특별히! 특별히 지금 교재에 대해 얘기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 아무도 몰라요, 이거. 예수님은 자기 부재가 증명돼요. 내가 있는 곳에 아버지가 있다고. 그런데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 부재 증명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죠. 그게 뭡니까, 한 자로? ‘죄’가 되죠.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부재하는데 네가 존재한다고 하니까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잖아요. 다른 데서 의미가 오는데 인간들은 그 의미를 누구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음부터 의미가 나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어떻게 저를 구원해주시겠습니까’라는 질문. 결과적이 아니고 항상 시작을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천당 갈 수 있습니까? 목사님, 어떻게 하면 제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선택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모든 의미를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질문을 자기로부터.

그러니까 자기로부터 시작할 때는 자기에게 선악 체계가 있잖아요. 윤리 도덕이 있잖아요. 이 정도 착하면 됩니까? 이 정도 나쁜 짓 안하고 버티면 되겠습니까? 결국 그 사람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 안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뭐냐.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게 뭐냐. 물론 돈 잘 버는 것도 잘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잘할 수 있는 것은 선악 체제에 따라서 내가 아주 개망나니처럼 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고 그렇게 노력하는 중이니까 이 노력을 하나님이여, 가상히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자, 여기서 좀 더 깊이 있게 나가보겠습니다. 깊이 있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인간이 존재한다.’ 여기서 의미 나옵니다. 의미의 내용은 뭡니까? 자기 의죠. (존재→의미→자기 의) 무조건 이 의는 나를 비켜가서는 된다, 안 된다? 절대로 비켜 가면 안돼요. 의미를 안다는 자체가 이미 ‘나는 의롭다’에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라캉(Jacques Lacan, 1902-1981,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정신분석학자)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가 바람피운다고 의심해서 계속 그 증거를 찾는 거예요. 그걸 의처증이라 하죠. 계속 증거를 찾으면서 ‘아, 바람피울 거야. 아마 지금 바람피우고 있을 거야.’ 계속 증거를 찾는 거예요. 어떤 남자가. 그럴 때 ‘맞아. 내 아내가 바람피우는 거 맞아. 내가 기어이 증거 찾아낼 거야.’ 해서 그 남자가 증거를 찾았어요. 찾았을 때 라캉이 하는 말이, “네가 한 말대로 아내가 바람피운 것이 맞다할지라도 너는 정신병 환자다.”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왜 굳이 남을 의심하는 방식으로 네 정체성을 구축해야 되는가. 그게 정신병이에요. “거봐. 내 말 맞잖아.”하는 그게 정신병이라니까요. 왜 본인이 옳아야 되죠? 아, 모든 인간이 정신병이에요. 왜 인간은 본인이 옳아야 되죠? 이거 한번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집사님, 생각해본 적 있어요? 내가 왜 옳아야 되죠? 이것도 모르고 교회 다닌 거죠. 이것도 모르고 성경공부 하러 다녔잖아요. 지금 말고 옛날에.

교회 왜 나가죠? 나의 정당성을 보증해줄 확실한 분을 찾기 위해서 교회 나갔잖아요. 하나님이, 위대한 하나님이, 절대적 하나님이 내가 옳다는 것을 판정할 때까지 고집스럽게 그 증거 찾잖아요. 대전강의 첫째 강의 제목이 뭡니까? <증거 제작소>죠. 증거를 찾는 거예요. 아, 이거 참. 이 정신병자를 어쩌면 좋죠. 이 정신병자를.

그렇게 자기 의를 고수했던 그것이 시대가 바뀌었어요. 뉴턴부터 해서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줄기차게 시대가 바뀌어가지고, 이 자기 의를 종교에서 신부나 목사의 교훈으로서 하나님이 보증해주신다, 성경 계시를 통해 보증 받던 이 시대가 뭐로 바뀌었느냐 하면 과학자에게 의존하는 식으로 바뀌고 말았어요. 과학자에게 의존하는 식으로.

과학자에게 의존하는 식으로 바뀌어버리면 교구의 신부나 담임목사가 ‘당신 구원받았어요. 당신은 창세 전부터 예정된 사람 맞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해서 마음의 행복을 느꼈던 그 행복을 지금은 그딴 건 참고로 하고 진짜는 뭐냐? 과학자한테 맡기는 거예요. 맡긴 결과가 이런 도표로 나오는 겁니다. (첨부파일 그림 참고)


도파민(dopamine), 세로토닌(serotonin),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 같은 말로 노르아드레날린(noradrenalin), 유럽 쪽에서는 노르아드레날린이라 해요. 이 교차지점에서 나오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기분이에요. 인간은 뭐로 산다? 기분 따라 살아요. 내 기분이거든요. 남 기분이 아니라 내 기분이 중요해요.

내 기분을 유지하고 균형 맞추기 위해서 정신과 의사한테 묻는 겁니다. “뭐를 더 높이면 내 의욕이 생기겠습니까?” “도파민입니다.” “내가 지금 우울증 걸려서 절제가 안 되는데 뭘 하면 됩니까?” “세로토닌 이거 약간 높이면 됩니다.” 이거 신경전달물질이거든요. 음식 먹으면 이런 게 또 들어있어요. 세로토닌 최고에요. 이시형 박사가 주장하는 거. 노르에피네프린 또는 노르아드레날린 이것도 균형을 맞추면 당신 기분이 좋다, 이걸 두 자로 하면 뭡니까? 행복. 이게 행복한 거예요.

그런데 이 이론의 문제점이 뭐냐? 정신과 의사들의 주장은 세로토닌 주입시키는 것으로 치료하는 게 아니고, ‘당신이 등산을 한다든지 운동을 하게 되면 세로토닌이 생성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생성될 겁니다. 이건 말 하나 마나에요. 세로토닌을 주는 게 아니고, 높이는 약물이 있는 게 아니고, ‘앉아서 열심히 운동해서 자생적으로 세로토닌이 증가하게 되면 당신이 좋아질 겁니다.’ 이 말이 맞아요, 틀려요? 도파민을 주는 게 아니고, 생각을 긍정적으로 먹으면 도파민이 생성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도파민 생성이 목적입니까, 내가 도파민 생성을 목적으로 해서 긍정적 마인드를 가지면 그게 이미 목적을 달성한 거예요? 어느 쪽이에요? 목적을 달성한 거예요, 그냥. 행복해라, 행복해, 행복해져라. 이러면 되는 거예요. 행복해라. 오~ 행복하네.

도파민은 엑셀레이터 밟는 것, 뭔가 가라앉았을 때 의욕을 부추기는 것. 이걸 보상회로 시스템이라 해요. 도파민은 이쪽에 관여하고, 세로토닌은 고통회로 시스템이라고 하는데 세로토닌이 떨어지면 고통스럽다는 말이 아니고요. 고통스러울 때 ‘아, 이게 고통스러우니까 내가 행동을 주의하는구나.’ 하면 세로토닌이 나온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과학도 결국 결과적이에요. 결과적 진단, 판단을 내릴 뿐이지, 내 병은 결국 내가 알아서 하면 돼요. 그럼 이 짓을 왜 합니까? 기분 좋아지라고. 행복하기 위해서. 이걸 제가 쭉 강의한 바에 의하면 이것은 바로 존재하는 나에게 의미를 주는 행위죠. 이걸 뭐라 했습니까, 한 자로? 죄가 되죠. 이게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살아있으면서 모든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두뇌에 있는 신경전달물질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사람의 행동은 기분 따라 행동하게 되어 있죠. 그리고 기분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 이게 또 말장난이 되는데, ‘내가 기분을 좋게 해야 돼’ 이 말이 맞아요, 아니면 ‘기분이 나를 결정해야 돼’ 어느 말이 맞습니까? 기분이 나를 결정하는 거죠, 기분이.

그러면 기분은 어디서 오는가? 이건 바로 환경에서 오죠. 환경은 뭐냐? 꿈의 확장인데요. 꿈은 누가 관리하죠? 꿈은 내가 관리 못해요. 꿈은 나를 죽은 자로 간주해서 죽은 자 속에서 나한테 묻지도 않고 그냥 내 속에 있는 기억을 끄집어내어서 나라는 이 세포의 기계가 자아라는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지 맘대로 몸이 알아서 움직여버리니까 나는 내 몸의 종이 되는 거죠. 노예가 되는 거죠. 끌려가고 말려들어가는 거예요.

기침을 하고 싶다. 지금쯤 기침해라, 이게 안 되잖아요. 나올라 하는데… 참아야 하는데, 하다가 나오잖아요. 몸은 내 맘대로 되질 않아요. 그리고 내 몸도 내 뜻대로 안 되지만 몸도 몸 자기 맘대로 안돼요. 몸을 둘러싼 환경이 이끄는 대로 해야 돼요.

현재 인도 최고 기온이 52도인데, 뭐 기분이고 자시고 간에 몸이 완전히 쳐질 판이에요. 최고 기온 52도. 40도만 되도 우리는 모든 게 짜증나는데 52도까지. 인간의 몸은 세포로 되어 있잖아요. 단백질로 되어 있단 말이죠. 환경에 소속되어있단 말이죠. 환경이 52도 같으면 안 되죠. 될 수가 없죠.

그러면 환경 속에서 인간의 죄는 어떻게 전개되는가? 그거는 10분 쉬고.

 

 

 

 

 

광주강의20240531b 누가복음 15장 4절(죄란)-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성경을 한 군데 찾아보면서 제가 질문을 하나 던질게요. 죄가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4절에서 6절을 제가 읽어드리고 여러분께 질문하겠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여기 죄 나오죠.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라는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죠.

자,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그 말씀대로 상황이 만들어지고요. 만들어진 상황은 어디로 수렴한다? 죄가 무엇인가 쪽으로 가죠. 그래야 죄와 의가 심판되고 구분되기 때문에. 거룩과 비-거룩이 구분될 수 있는 그 심판의 자리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방금 누가복음 15장 4절에서 7절을 보았는데 여기서 우리가 뭘 알아야 되느냐? 이 본문을 통해서 죄가 무엇일까요? 제 질문입니다. 죄가 무엇일까요? 방금 읽었던 본문 가운데서, 무엇이 죄입니까? 99마리가 졸지에 뭐로 등장했어요? 죄인으로 규정받게 되었어요. 죄인으로. 아흔아홉 마리가.

그러면 양 아흔아홉 마리는 무슨 나쁜 짓을 했죠? 목자를 떠났습니까? 아니죠. 착실하게 목자를 따라다녔잖아요. 목자를 따라다녔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주님의 의미가 누락된 채 따라다녔다는 티를 내어야 될 아흔아홉 마리 양이 되는 겁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없는 쪽이 몇 마리 양이에요? 아흔아홉 마리.

오늘 누가복음 15장 이야기는 목자 입장에서 누구를 질책하는 입장이냐 하면, 마치 아흔아홉 마리 양보고 따지고 나무라는 듯한 느낌을 줘요. 나무라는 듯한. 너희 99마리 양에게 없는 것이 있다. 그게 어디서 느껴지느냐 하면, 주님께서 99마리 양에다가 1마리 양까지 해서 100마리 양을 어깨에 짊어지고 가시는 건 아니거든요. 1 마리 양은 어깨에 짊어지고, 나머지 99마리 양에겐 ‘너희는 걸어서 와.’ 이렇게 천시하는 배척하는 대상이 되고 만 거예요. 이유가 뭡니까? 양 한 마리는 어떤 양인데요? 잃어버린 양이잖아요. 잃어버린 양.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없는 거예요. 죄가 없어요. 뭐 전체가 죄니까 달리 어느 부분이 죄입니까, 라는 말 자체가 성립 안돼요. 통째로 죄에요. 통째로 죄.

통째로 죄이기 때문에 죄 안에서 선악 체제가 가동되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통째로 뭔가는 모르고 내가 알고 있는 선악으로 해서 새롭게 이거는 선이고 새롭게 이거는 악이라고 우리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말이에요. 그 속에서 모든 인간은 그 원칙을 따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세상입니까. 얼마나 위험합니까. 세상 바깥에서 세상을 통째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어요. 우리 인간들끼리 뭐라고 하면 우리가 합의 보느냐. 인간의 합의는 끝났어요. 교재 결론 부분에 나와 있죠. 인간의 합의는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죽이자. 이미 합의 봤어요.

따라서 ‘예수님을 죽이자’가 어느새 우리 마음속에 가장 친근하고 예수님 십자가 죽고 난 뒤에 후대인들이 어떤 결론, 어떤 진리 찾기를 해봤자 나오는 결론은 ‘그래, 예수 그리스도는 그다지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어. 참조로 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 매달릴 인물은 아니었어.’라는 결론을 너도 내고 나도 내고 어느 인간도 다 그런 결론 안에서 이미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인간세계에선 없지요. 성령이 아니고는 성령이 오지 않으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살고, 자연스럽다는 것은 예수 죽이는 것에 한통속이 되었다 이 말입니다. 예수 죽이는 한통속은 죄를 지적하는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선의 출발점, 그리고 ‘이것이 나쁘고 이것이 옳지 않다’의 의미의 출발점은 모든 인간이 각자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지금 살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나름 내가 나쁜 짓 안하고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고 있는 중이니 신께서 이걸 가상히 여길 거야.’ 이런 안일하고 상식적인 생각이죠.

자, 이 세상엔 죄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뭐를 만들겠습니까? 없으니까 본래적, 비-본래적 죄 말고 본래적 죄를 만들어요. 만들면 이 양은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 이게 복이에요. 성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복은 ‘나는 죄인입니다’에요.

나는 죄인입니다. 이 복을 누가 받았어요? 다윗이 받았죠. 그게 다윗 언약이에요. 다윗 언약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럴 경우에만 이 사람은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뭐든지.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계단과 에스컬레이터 이야기를 제가 했던가요, 대전에서? 그 이야기를 다시 해보겠습니다. 에스컬레이터가 계단처럼 올라가고 내려오게 되어 있죠. 그런데 인간들은 바빠서 후닥닥 올라갔다 내려갔다 자기 일에 바쁘잖아요. 이 에스컬레이터가 놉니까, 움직입니까? 움직이죠.

그러면 내가 사는 의미는? 계단처럼 왔다갔다 왔다갔다 이러니까 에스컬레이터가 잘 고장 나는 거예요. 나 같이 이렇게 가만있지 못하고…여기 왔다갔다 평생토록 살기 위해서 노력한 나에게 의미가 주어져야 돼요, 아니면 에스컬레이터에게 의미가 주어져야 되는 겁니까? 에스컬레이터에게 의미가 주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마태복음 28장 20절,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어 일한다.” 인간은 단독자가 되면 안돼요. 일하시는 에스컬레이터와 함께 있어야 돼요. 함께 있어야 돼요. 내가 일한 것 의미 없습니다. 심지어 내가 죽는 것, 내가 지옥 가는 것, 내가 천국 가는 것, 그거 내 문제 아니에요. 나는 죄인이니까.

이 잃어버린 양은 지금 어느 어깨에 있어요? 본인 어깨에 예수님을 짊어진 거예요. 얼마나 무겁겠어요. 그게 아니고 양은 예수님 어깨에 양이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가는 곳마다 양도 따라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의 이론에 의하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게 천국이죠. 성도한테는 천국생활이 이미 시작된 겁니다.

시편 121편, 여러분 잘 아시는 말씀이에요, 3절, 이 구절은 여러분들이 성경 보다가 졸음이 올 때 보세요.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기도할 때 누가 졸았습니까? 제자 세 명 졸았죠. 그래서 졸은 대가로 지옥 갑니까? 아니지요. 너는 졸고 나는 기도했고. 다시 말해서 너는 기도한 적 없고, 모든 앞으로의 진행된 일은 나 예수님의 기도 덕분에 너한테 혜택이 주어지고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겟세마네 기도에 데리고 간 거예요.

무슨 역할 하라고요? 조는 역할에 여러분들이 충실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말 잘못했다. 지금도 충실하고 있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나한테 의미가 오는 것을 주께서 다 치워버려요. 의미 오는 그 루트를 다 치워버려요. 그냥 뭘 해도 죄고 무의미한데, 무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자, 그렇다면 지금 제가 방금 누가복음 15장을 이야기했잖아요. 창세기를 이야기한 게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제가 첫째 강의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계속해서 죄가 발전, develop, 발전이라는 말을 하기는 뭐하고 그냥 계속 전개되는 거예요. 계속 전개되고 나중에 십자가에서 완성되면 그냥 한판으로 한꺼번에 이 땅에 적용시키는 겁니다.

그럴 때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이야기하면 돼요. 죄 없습니다. 죄가 없는데 죄를 만들어야 돼요, 주께서. 만들어야 심판이 되니까. 창세 전 아버지와 아들이 설정한 죄의 개념을 적용하기 위해서 이 땅으로 접근하는 거예요. 접근할 때 각 시대마다 똑같은 원칙과 법칙이 거기다 적용되는 거예요.

이걸 제가 설명하기 위해서 어떤 법칙을 거론하느냐 하면 보일의 법칙(Boyle's law)을 하겠습니다. 보일의 법칙. 지금은 중학교 1학년 과학시간에 배우는 거예요. (기체의) 온도가 일정할 때, 부피와 압력은 반비례한다는 것. 이건 기체에 관한 겁니다. 기체에 관한 법칙이에요. 액체도 아니고 고체도 아니고 기체에 관한 법칙이에요. 보일의 법칙을 적용시켜버리면… 우리 보기에는 이게 꼭 발견할 거리가 되는지. 이거 뻔한 거잖아. 그런데 이 뻔한 것 없으면 보일의 법칙이 적용 안 되면 보일러가 안 만들어져요. 가스 보일러부터 해서….

압력은 단위 면적당 주어지는 힘을 압력이라고 이렇게 인간들은 규정합니다. 예를 들어 세 가지 경우를 보게 되면 다음과 같습니다. 스폰지 위에 비커(플라스크)를 두면 스폰지가 폭 들어가잖아요. 또 비커 있으면 스폰지 폭 들어가고 또 비커 있으면 스폰지 폭 들어가고.

비커에 물이 반 차 있을 때 스폰지가 폭 들어가는 깊이를 cm로 한번 재보고, 물이 꽉 차 있을 때 밑변은 넓고 목은 좁은 비커를 놨을 경우, 그리고 세 번째는 물을 가득 채운 비커를 물이 안 새도록 막아놓고 거꾸로 스폰지에 세워놨을 때 1번, 2번, 3번 가운데 어느 스폰지가 깊숙이 내려가느냐? 어느 스폰지겠어요? (첨부파일의 그림 참고)


1번하고 2번 비교하면 1번은 물이 반밖에 안 차 있으니까 꽉 차 있는 것의 압력이 더 세죠. 1번보다 2번이 더 세죠. 그리고 (2번과 3번을 비교해보면) 단위 면적당이니까 좁은 면적으로 누르면 더 깊이 들어가겠죠. 이것이 바로 물리학에서 말하는 압력이라는 거예요. 압력.

그런데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주님이 찾아오는 거예요. 뭐로? 압력으로. 이 예보다도 주님께서 찾아온다는 것은 현재 있는 대상을 향하여 피스톤으로 끝까지 몰아붙인다. 끝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

아까 요한복음 15장 22절, “내가 오지 아니하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내가 옴으로써 내가 피스톤가지고 너희들 끝까지 몰아세울 거야. 심판의 대상으로. 저주의 대상으로 몰아세울 거야. 선악과 왜 따먹었어? 끝까지 내가, 지구 끝이 아니고 아예 지구를 불사를지언정 내가 너희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거야.” 하고 심판해버리는 겁니다. 찾아오는 겁니다.

찾아오는데 각 언약 시대마다 그 원칙이 동일하다는 것을 제가 설명하기 위해서 보일의 법칙을 언급한 겁니다. 이제 그것에 대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부피(V, volume)는 1/p에 비례한다(p는 power,압력). V∝1/p. 비례한다(∝)는 것을 equal(=)로 하면 비례상수 k를 집어넣어서

V=k×1/p

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어요.

이 k가 상수(常數)에요, 상수. constant. 상수는 항상 일정한, 동일한 숫자로만 나타내는 걸 상수라 합니다. 상수(c, constant의 약자). k가 상수에요. 그러면 여기 P₁V₁=k가 되죠. P₂V₂=k, P₃V₃=k,…. 그 시대에 어떤 언약이 있든 똑같은 원칙이 적용되어 상수는 동일하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걸 보일의 ‘법칙’이라 한 거예요. 상황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법칙이 아닙니다. 똑같은 법칙이죠.

그러면 이걸 왜 성경에 적용시키느냐? 하나님의 언약이 올 때는 끝까지, 너 게 섰거라. 내가 너를 죄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그 밀어붙임의 상수는 동일한 법칙으로 적용된다 이 말입니다. 그 동일한 법칙을 찾아내게 되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죄가 무엇이냐가 밝혀지는 거예요. 준비됐나요? 준비됐어요, 이제? 이 상수를 찾아내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찾아오시는 언약이 하늘에서 밀어붙입니다. 아래가 기체고 위에서 피스톤가지고 압력을 주어 밀어붙인다 합시다. (첨부파일의 그림 참고)



부피는 점점 어떻게 돼요? 압력이 세지면 부피는 작아지겠죠. 계속 궁지에 몰리겠죠.

밀어붙일 때 밀어붙이는 사람이 피해자가 돼요. 피해자. 언약이 안 찾아오면 선지자나 주님은 아무 탈이 없어요. 그런데 언약과 동반해서 오게 되면 여기서 핍박이 일어납니다. 첫 번째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첫 번째 예,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신에게 요구를 합니다. 요구한다는 것은 가해자에요. 왜냐하면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 드렸잖아요. 요구를 하잖아요.

보통 기도원에 가면 뭐합니까? 기도원 스케줄 대부분이 뭐에요? 신에게 요구하는 거죠. 요구하는 자가 있어야 죄가 드디어 정체를 노출하는 거예요. 인간은 신에게 요구하면서… 권사님들 집사님들 기도가, 특히 권사님들 기도 많이 하죠. 여자의 특징은 자꾸 비니까. 자기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자기가 부재되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근사하게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상황을 달라고 빌잖아요. 사모하잖아요.

비는데 기도해서 빈다는 것은 요구자가 되죠. 요구자가 되면 어떻게 돼요? 여기서 하나님은 그 요구로 인하여 피해를 보는 거예요. 주님께서 가인에 대한 응답은 뭐냐 하면 가인의 제사 때문에 죽게 된 아벨의 죽음이 주님의 응답이에요. 너는 요구했고 네 요구 때문에 누가 죽었고? 네 동생은 죽었고. 인간들은 신에게 요구하고 누가 죽고? 하나님이 죽고. 그게 응답이에요.

그럴 때 그 가해자와 피해자의 만남에서 발생되는 것이 드디어 없었던 죄에요. 죄가 발생돼요. 그게 k에요. 이게 법칙이에요. 이건 성경적으로 생각한 거였지만 평소에 여러분들이 짜증날 때, 뭐 거의 짜증이 없고 늘 범사에 감사하며 살지만, 짜증날 때 왜 짜증납니까? 무엇이 시원찮아서 마음에 안 들어서 짜증나는 겁니까?

왜 내 계획대로 안 됩니까, 이런 경우도 있을 것이고 왜 하루 하루가 루틴하고 건조하고 지루하고 뭐 신나는 일이 왜 나에게는 발생되지 않습니까. 여기 뭐 80대까지 되신 분 없어서 내가 마음 놓고 이야기합니다만, 왜 인생을 이렇게 심심하게 뭐 짜릿한 즐거움을 왜 제공 못하고… 나에게도 뭐 신나는 일을 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늘 신나는 일. 토트넘에서 손흥민이 늘 세 골을 넣을 수 있는 신나는 일. 또는 대전 한화 이글스의 야구팬 같으면 류현진이 늘 공 잘 던져서 한화가 지금 8등인가 9등 하는데 1등 되는 그거. 늘 이렇게 즐거운 일, 신나는 일.

구체적으로 뭐 그걸 기도하진 않잖아요. 그런데 뭔가 요구하는 게 있죠. 요구하는 거. 차를 타고 갔을 때 그 앞에서 모세의 기적처럼 쫙 마침 차가 하나도 없이 파란 불 나오기를. 요구하잖아요. 그걸 요구하고 싶을 때가 있죠. 그게 우리가 가해자란 뜻이에요. 우리가 죄 유발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살아가는 자체가 죄 아닌 게 없죠. 주께서, ‘내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준 은혜대로 안 살줄 알았어. 네 마음에 안 든다 이 말이지?’ 이런 뜻이거든요. 사는 것이 네 맘에 안 들지? 그러니까 너는 뭐 하나님께 가만있지는 못하고 가만있으려니까 답답하고 그래, 내가 기도원에서 기도라도 해야지. 그게 바로 죄가 드디어 활성화되는 순간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그럼 당신 말대로 기도하지 말란 말인가?’ 이렇게 나오죠. 기도하지 않는 게 기도보다 더 못된 죄에요. 안에서 자기가 조작하기 때문에. 자기의 기대감을 자기가 조작해요. 그러니까 기도해도 죄고 안해도 죄고, 죽어도 죄고 살아도 죄고. 그냥 죄 속에서 죄된 세계 속에서 그냥 사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뭘 원하는가가 아니라 보일의 법칙이에요. 죄를 만드는 데는 딱 동일한 패턴으로 죄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인간은 가해자요, 가해자란 말은 또 나쁘게 받아들이니까, 인간은 뭔가 요구하려고 하고 주님께서는 “내가 준 걸로 마음에 안 든다 이 말이지? 그래, 내가 피해볼게.” 주님은 항상 피해자로 등장하는 거예요. “현재 네가 사는 형편이 짜증난다 이 말이지? 알았어. 내가 죽어주면 되잖아.” 이런 거.

그 예가 성경에 나옵니다. 이건 뭐 찾아볼 필요 없어요. 여러분 다 아는 거니까. 사사기 17장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어느 날 미가 엄마가 은 일천일백을 잃어버렸어요. 천백 개를 잃어버렸습니다. 확 짜증 올라오죠. 그래서 엄마가 성질 급해서 저주해버렸어요. “내 돈 가져간 자 영원토록 저주받아라.” 이렇게 된 거예요.

그 이야기를 누가 들었어요? 아들이 들은 거예요. 아들이 듣고 엄마한테 이야기했어요. “엄마 돈 내가 가져갔다.” 돈은 잃어버리지 않았죠. 아들이 엄마 주면 되니까. 그런데 이 과정 속에서 플러스 뭐가 생겼어요? 잃어버린 사건을 통해서 저주가 생겼죠.

이 저주에 대해서 뭔가 저주를 해소할 대책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대책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죠. 뭔가 이건 계획이 있고 기대치가 있죠. 그 기대치에 부응한 게 뭐냐 하면 그중에서 한 신상을 부어 만들고 그 신상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바로 여호와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호와에 대해서 양적으로 죄를 생각하는 거예요. 기체의 양, 부피, 압력의 크기. 양이죠. 이게 오늘날 과학 시대잖아요. 뭐든지 계량적으로 측정이 가능한 걸로 관찰 가능한 걸로 보잖아요. 그런데 이 과학적 정신이 사사기 17장에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자기의 죄에 대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저주를 뭐로 보느냐? 양적 개념으로 저주를 따지는 거예요.

만약에 은 천백 개를 잃어버린 게 아니고 은 반 개를 잃어버렸다. 이 정도까지는 안 할 거예요. ‘야, 은 반 개를 잃어버리다니. 저주 받아라!’ 이러진 않는단 말이죠. 이미 저주의 양은 잃어버린 돈과의 비례관계죠. 돈과의 비례관계. 따라서 인간의 해결책은 신으로 하여금 양적으로 저주를 해소하는 만큼이나 신상을 만들어두고 그다음에 그걸로 모자라서 미가 신당이 있으므로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어 제사장을 특채로 세워요. 한 아들을 세워 어떤 젊은 제사장을 세워서 이 저주를 풀어주도록 개인적인 매니저를 하나 세워서 개인적으로 저주를 푸는 굿거리, 굿판을 벌이게 한 거예요.

이 개념이 뭡니까? 양적 개념이죠. 천백이 보통 큰돈입니까. 큰돈에 대해서 그만한 양만큼 저주를 퍼부은 게 있기 때문에 이걸 회수하는 그만한 비용을 들여서라도 돈이 문제에요? 아들에게 부어진 저주를 양적으로 뜯어내야 되는 거예요. 양적으로. 그러니까 이건 전부다 양적 개념이죠.

어떻습니까? 오늘날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삶이 양적 개념이죠. 내 안에 귀신 들었다. 얼마나 들었는가? 이천 마리 귀신 들었다. 돼지 떼한테 가니까 돼지 떼 확 죽었다. 여기서 인간이 귀신 들린 것, 내가 귀신 들렸다, 내가 마귀 들렸다는 것을 우리가 손대면 안돼요. 왜냐하면 귀신이 나가면 우리가 죽기 때문에. 내 자체가 없어져요. 좋으나 싫으나 우리는 귀신과 더불어 살아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는 뭐하면 돼요? 그냥 죄인이죠. 그래서 내가 죄인인 것, 잃어버린 양, 내가 죄인된 것을 아는 걸 신자라고 합니다. 이걸 성도라고 이야기해요. 성도는 내가 죄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성경을 보는 자고 불신자는 내가 죄인 될 가능성은 있지만 전적으로 옴팍 죄인은 아니다. 뭘 해도 죄인인 정도는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불신자입니다.

그래서 불신자가 성경 볼 때는 항상 겁이 나요. 세상사는 게 겁나고 두렵고 불안 불안하고 안절부절 하고 어쩔 줄 몰라요. 이걸 정신과에서는 세로토닌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세로토닌이 부족해서. 세로토닌 부족하면 공황상태에 빠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로토닌 풍부한 음식 먹고 운동 많이 하시고 등산하시면 스스로 회복된다는 겁니다. 고통의 회로 시스템이 가동되어서 세로토닌이 점점 더 증가한다는 거예요.

인간이 그걸 좋아하는 이유가 의미가 나한테 의미 있기 때문에. 아까 미가가 우상 섬기고 여호와 이름 붙이는 것은 다 최종 의미가 누구한테 있기 때문에? 재수 없이 나한테 달라붙은 저주를 나한테서 떼내기 위해서 하는데 떼어내면 그 인간은 죽습니다. 인간은 떼어낼 수가 없어요. 자기 속에 있는 괴물을 떼낼 수가 없습니다.

신약에 와서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마태복음 1장 한번 봅시다. 1장 19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자, 요셉이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본인이 알았어요, 몰랐어요? 결과적으로 알죠. 자기가 동침하지 않았는데 임신했다는 걸 알았죠. 그럴 때 ‘아, 마리아는 믿음이 좋기 때문에 성령이 임했구나.’ 이렇게 이해했습니까? 아니죠.

마리아를 볼 때, 내가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 원칙을 그 법칙을 동일하게 누구한테 적용시킵니까? 마리아한테 적용시키죠. 그럼 마리아한테 뭘 원하느냐 하면… 마리아한테 이야기를 했겠죠. 어떻게 임신이 됐나 물었겠죠. 그런데 마리아에게 어떻게 임신했냐고 묻는 것 자체가 이미 요셉은 자기 의미에서 이탈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거예요.

내가 아는 것이 나를 의롭게 만들기 때문에 지금껏 내가 아는 식으로 살아온 것이 양적으로 나를 의롭게 만들었어요. 따라서 나는 어떤 경우라도 나한테 하자있고 문제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어요. 그런데 그 요셉의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마리아를 함부로 평했어요. 평가했어요.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하면 결코 처녀가 임신하는 법은 없다,라고 아예 단정 지었습니다.

단정 지어서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면 그래도 자기가 의로우니까 닦달내지 않고 싸나이가 신사답게 배려차원에서 종용히 ‘내가 너 용서해줄게.’ 뭘 용서한단 말입니까. ‘그래, 너를 임신시킨 남자와 네가 살더라도 나 아무소리 안할게. 결혼식 가서 깽판치고 안 할게.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 갈라서자.’ 라고 배려한 거예요.

여러분, 배려가 그 사람에 대한 모독인 줄 잘 아시죠? 남자가 여자를 배려하고 여자가 남자를 배려하는 것, 그거 사랑입니까, 모독입니까? 모독이죠. 네가 뭔데 나를 배려해? 네가 뭔데? 그거 자기 의거든요. 자기 의 아닙니까? 남한테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나는 당신한테 행동을 조심한다. 뭐에요? 되게 착해 보이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듣거나 요란스럽게 듣거나 한번만 따져보면 이게 뭡니까? ‘너는 내 손아귀에 있어’ 이런 뜻이잖아요. ‘네 주인은 네가 아니야. 내가 네 주인이야. 너는 내 배려 속에서 벗어나면 너는 죽어.’ 이거는 뭐 말없는 폭력이죠. 배려하지 마세요. 서로 배려하지 마세요. 상대에게 제일 좋은 사랑은 상대의 처분에 맡기는 겁니다. 상대의 처분에 맡기는 거예요.

따라서 기도, 헌금, 구제, 전도 이것은 어떻게 하느냐? 기도원에 가서 지가 알아서 나무 붙잡고 하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주님한테 나의 의가 빼앗겨야 합니다. 빼앗겨야 된다는 거예요. 잃어버린 양은 자기 갈 길을 누구한테 빼앗겼는가? 예수님에게 강제적으로 빼앗겼어요. 잃어버린 양은 목자가 어디 있는 줄도 모르고 자기 혼자 헤매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강제로 주님이 빼앗아 가는 거예요. 다시 주님의 소유로 빼앗아 가는 거예요.

주님의 사랑은 뭐냐? 우리가 주는 것을 받는 게 아닙니다. 빼앗는 거예요. 빼앗기시기 바랍니다. 빼앗기시는 것이 즐겁다면 여러분은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뭐 다들 그렇게 살고 있죠? 너는 내 자긍심을 모독했어. 그런데 좋아. 더 모독해줘. 약간 이상하게… 미친 건 아니지만. 그렇게 살고 계시죠? 답변은 듣지 않겠습니다. 빨리 지나갑니다.

마태복음 25장, 이제 마태복음 25장을 해석해야 될 위치에 있어요. k라는 상수에 의해서. 여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을 심판하는데 한쪽은 양, 다른 한쪽은 염소에요. 그런데 양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다 했죠.

그럴 때 이 예수님에게 먹을 걸 주고 마실 걸 준 자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아이고, 주님이 알아서 눈치 채셨구나. 나 주님 위해서 헌신한 거.” 이렇게 답변해요? 어떻게 답변해요? 집사님, 어떻게 답변합니까?

“왜? 언제? 아니, 제가 언제 했습니까? 내가 왜 주님한테 드렸죠? 이거 내 돈인데? 내가 언제 주님께 마실 걸 드렸어요? 준 적 없는데?” 주님께서 강제로 빼앗아 가놓고 너는 자발적으로 준 것이 되었다. 이 소자한테 어린 아이에게 준 것이 곧 나한테 준 것이라고 한 거죠.

그러면 여기 예수님께 준 사람이 ‘가만있어 보자. 이 땅에서 마태복음 25장에 보니까 소자한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라 했지. 어디 가난한 소자 없나. 옥에 갇힌 소자 골라보자. 골라볼까? 내가 한번 도와줄까? 누가 이혼했다고? 노소영? 아, 그런데 안돼. 1조원 탄 사람. 돈이 너무 많아. 내가 도와주면 귀때기 맞아. 그거 말고. 아주 아무것도 못 받고 그런 사람 없나? 아, 저 사람이 소자구나.’ 이렇게 골라가면서 줬습니까? 아니죠.

진짜 준 사람은 몰라요. 왜? 주님께서 평소에 그 환경이 없는 양을 생산해내기 때문에 그래요. 없는 양을. 그러면 솔직하게 인간적으로 누가 억울합니까? 염소가 억울하기 짝이 없어요. 주님이 염소한테 지옥 가는 사람한테 뭐라고 합니까? “너는 나한테 하지 않았다.” 했거든요. 그러니까 지옥 가는 사람이 염소가 당당히 이야기하죠. “제가 언제 안 했습니까?” “이 소자한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다.” “그럼 저 소자한테 했는데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소자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알아서 챙기지 못하는 대상들이에요. 인간이 챙기는 항목 속에 인간들이 감각이 없고 눈치 채지 못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고요. 거기에.

마태복음 25장 46절에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의인들이 영생에 들어간다고 주장했죠. 이 사실이 예수님 이야기잖아요. 제자들이 이 이야기를 성령 오기 전까지는 알아들었겠어요, 못 알아들었겠어요? 분명히 못 알아들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나름대로의 자기 의미로 해석했겠죠. ‘주께서 우리를 영생 보낸다면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겠지.’ 이 정도만 했죠. 그러나 십자가 지고 난 뒤에는 이것도 다 무효에요. 도망치기 바빴죠.

그런데 이 사실이 어디서 알려지느냐 하면 바로 사도 바울의 복음에서 알려집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에 보면 의인이고 죄인이고 이게 누구 소관이냐? 선택된 자, 아닌 자 이것은 일방적으로 주님이 만드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의인 만드시고 지옥 갈 사람 만드시고 천국 갈 사람 만들었다는 그것을 사도 바울에 와서 그렇게 해석내리고 그 복음에 의해서 마태복음을 회귀해서 해석해야 돼요. 회귀해서.

그럼 회귀하려면 그다음 어디까지 회귀해야 되는가? 전도서를 한번 봅시다. 전도서 1장, 여러분 잘 아니까 이것은 제가 할게요.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그러니까 땅이 있되 땅 위에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이것은 11절에 보면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이전 세대도 기억안되지만 앞으로 어떤 세대가 땅에 산다 할지라도 그들도 역시 한순간의 안개처럼 ‘있었냐? 없다. 이렇게 되는 세상이다.’라고 전도자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것이 십자가로 완료되고 십자가로 완료되기 위해서 같이 가야될 것이 뭐냐 하면 영벌 받을 사람,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을 따로 둘로 구분해서 집중해 들어가죠. 그렇다면 이제부터 남은 시간동안 아까 그 상수, 비례상수 k를 보자는 말이죠. 어떻게 하느냐? 바로 노아 홍수. 언약이죠. 언약. 언약입니다.

노아보고 언약을 만들라 했잖아요. 언약을 만들 때 노아 홍수 언약을 만든 것은 뭐냐 하면 피입니다. 피. 방주에 실려야 될, 방주에서 살아남아야 될 자가 해야 될 일이 뭐냐? 이 땅에 언약의 피를 생산하는 일에 종사하라고 노아를 살려낸 거예요. 창세기 9장에 나옵니다.

그 피를 보고 하나님께서는 뭐를 유보하느냐? 하나님의 전면적인 심판을 유보해주는 거예요. 피가 신약의 예수님까지 그 실체를 아직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운데서 죄가 계속해서 언약에 의해서 쫓기듯이 몰아세워져야 되는 거거든요. 마지막 죄는 여러분 아실 거예요. 마지막 죄는 뭡니까?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인간들이 힘을 다해서 찔러 죽여 없애는 게 죄입니다. 그 타이밍까지 그때까지 가야 돼요.

그러면 피 흘리려면 뭐가 필요하냐? 성전이 필요하겠죠. 성전이 있어줘야 하나님 여기 계시고 우리는 제사지냄으로써 하나님께서 만족스러워 하시니까. 그게 죄인지 몰라요. 하여튼 우리는 죄보다도 오히려 의롭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 일이 되려면 십자가 이전에 무슨 언약이 있어야 돼요? 다윗 언약이 있어야 돼요. 성전 언약이 있어야 돼요. 왜? 하나님의 지시 따라 그들은 움직여요. 그런데 하나님의 지시에 대해 그들은 뭘 감을 못 잡느냐 하면 최종적인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몰아세우는 일정 스케줄 속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이에요.

성전 만들고 제사 지낼 때, 모세 언약에서는 누가 지냅니까? 제사장이 지내죠. 그런데 다윗 언약 가운데는 제사장이 지내긴 하지만 그 제사장 위에 누가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왕이 있잖아요. 그것이 바로 다윗 언약이에요. 다윗 언약. 왕 책임 하에 성전이 운영되기를 요구하는 언약이 다윗 언약입니다. 그래야 내가 등불을 없애지 않겠다는 거예요.

이렇게 보면 모세 언약은 미진하다. 무엇이 아직까지 채워지지 않아서 미진하냐? 왕이 등장하지 않아서. 제사장 위에 다윗 언약이 등장하지 않아서. 히브리서 7장에 의하면 레위 언약 위에 유다 지파가 등장하지 않아서 미흡한 거예요.

그러면 노아 언약 이후에는 피 있잖아요. 노아 언약은 공간에 대한 심판을 하고 피 때문에 공간 심판을 유보했죠. 내가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 현재 이 공간은 계속 유지된다. 공간이 좋아서 유지되는 게 아니에요. 피가 뭐로 바뀔 때까지? 인격체로 바뀔 때까지. 피 흘릴 분이 어떤 특정 인물로 바뀔 때까지 공간은 유지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럼 그 뒤에 나오는 언약이 무슨 언약입니까? 아브라함 언약이죠. 아브라함 언약 때 창세기 22장에 누가 등장하죠? 거기에 아브라함하고 누가 등장합니까? 창세기 22장에 모리아 산에서 누굴 바치죠? 이삭. 이삭이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게 아니죠. 약속에서 태어났잖아요. 약속에서 태어났는데 그 약속에서 태어나서 한 일이 뭡니까? 제단에 꽁꽁 묶이고 그다음에 뭘 해야 돼요? 죽어야 되죠. 이삭이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수풀 안에 뭐가 준비되어 있어요? 어린 양이 준비되어 있죠. 이삭+어린 양=예수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아브라함 언약이라면 그다음에 아브라함 언약의 숫자가 확장돼요. 확장되는 것이 야곱이죠. 야곱의 아들이 몇 명입니까? 하나가 아니고 열두 명. 그 열두 명이 집단화되어서 애굽에서 나올 때 뭘 바르죠? 뭘 발라서 나옵니까? 유월절의 양의 피를 바르죠.

피를 바르고 난 뒤에 드디어 모세 언약까지 갑니다. 모세 언약에 시내산에서 뭘 받죠? 율법을 받죠. 율법은 뭐냐? 무엇의 반복입니까? 유월절 어린 양의 그 취지를 이제는 하나의 제사형식 안에서 특정 제단 위에서 매일같이 그것을 반복하는 그 조건 하에 이스라엘은 하나의 민족 단위로 유지 가능한 거예요. 모세보고 자기 부인이 한 말이 있어요. 당신은 피 남편입니다.

그 언약에 의한 피가 할례 언약이잖아요. 할례 언약이라 하는 것은 누락된 것, 부재하는 요소가 있어요. 끊어져 나갔으니까. 끊어진 대목에 다른 혈육, 약속의 혈육이 육적인 혈육을 마저 채우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늘의 족보로서 땅의 족보가 마저 채워질 때 이스라엘은 피를 증거하는 언약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결국 이방나라와 전쟁할 때 이방나라는 이스라엘을 잡아먹겠다고 온 거예요. 자기의 목적과 요구가 거기 있으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뭘 해야 돼요? 하나님 앞장세우고 자기는 하나님의 희생 안에 합류되어야 되죠. 그게 언약궤를 앞장세우는 전쟁이에요. 언약궤를.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아까 어린아이가 엄마는 장에 갔을 때, 자기 있는 것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엄마가 있어야 비로소 자기가 있는 거예요. 엄마가 있어야. 하나님의 언약이 있을 때 비로소 이스라엘은 있는 거예요. 그걸 확립하는 게 바로 모세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세 언약을 못 지키죠. 왜? 아직까지 십자가 때가 안 되었으니까. 계속 k라는 상수… 피해자가 되기 싫은 거예요. 피해자가 되어야 죄가 완성되는데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 싫어요. 힘을 갖고 싶은 거예요. 그것 때문에 누가 희생되는가? 사사기 뒤에 보면 룻이 모압 여인 룻이 희생되면서 룻의 족보에서 누가 나옵니까? 다윗이 나오죠.

드디어 모세 언약 속에서 피어나는 다윗 언약입니다. 다윗이 소년일 때 골리앗을 이겼어요. 소년 될 때. 왕이 아닐 때. 다윗은 누구한테 쫓깁니까? 힘 있는 사울한테 쫓기죠. 다윗은 거기서 뭘 느끼는가? 희생을 느낍니다. 그래서 다윗은 왕이 되었잖아요.

그래서 그 왕이 메시아 왕입니까? 아니죠. 다윗이 힘이 있기 때문에 피해자가 발생되었어요. 누굽니까? 밧세바, 그리고 밧세바의 본 남편 우리아 장군. 드디어 그걸로 인간의 언약은 끝났어요.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나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

바로 그 고백과 관련되어 있는 어떤 최후의 마지막 언약 사건.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에서 우리는 벌써 죄에서 태어났다. 그 죄가 예수님 오심으로써 십자가 완성되면서 비로소 알게 되는 죄에요. 우리가 죄인일 때 우리는 이미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받은 성도고 신자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죄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의 증인이 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너와 나의 관계에서 아버지는 예수님을 버렸고 버림받은 예수님은 실제로 이 땅에 와서 버림을 당했습니다. 이로써 죄가 뭐며 의가 뭐며 구원이 뭐며 천국이 뭐며 지옥이 뭐며 알려진 것을 감사합니다. 저희들 우리 자신이 그 일에 주님의 하시는 일에 증인으로서 잃어버린 양으로서 말려들어서 일방적으로 어깨에 매여 잃어버린 양으로 살게 된 것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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