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31222a 시편8편 2절(젖먹이의 출현)-이 근호 목사
오늘은 p.23【젖먹이보다 더 강한 자 있을까】역설적이죠. 이것은 시편 8편 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시편 8편 2절에,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p.23에도 그대로 나와 있죠.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되어 있습니다.
이 상황이 전쟁 상황이에요. 전쟁에 젖먹이가 나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전쟁에 어른들 나가지, 어린아이가 못 나가죠. 거추장스럽잖아요. 걸리적거리고. 그러니 이 전쟁은 보통 전쟁이 아니죠. 특별한 전쟁입니다. 시편 8편 2절 젖먹이가 동원되는 전쟁, 이 전쟁에 대해서 성경 시편 2편에 보면 그 내막이 나옵니다. 시편 2편 9절에,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전쟁 상황이죠. 전쟁 상황인데 전쟁을 하려면 적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적이 없는데 전쟁이 일어날 일은 없고. 그 전쟁에 대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시편 2편 2절에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전쟁, 어떤 의미에서 최후의 전쟁. 세상 사람들 자기들끼리 하는 전쟁, 아니지요. 아니지요.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 자기들끼리 하는 전쟁이 아니고요. 이건 최후의 전쟁이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만의 전쟁이 아니라 세상 대(vs) 기름 부음 받은 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대표해서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등장하고, 세상은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등장으로 자동적으로 한통속이 되면서 이 최후의 전쟁에서 세상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대적이 됩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그래서 이 전쟁의 시작은 이러해요. ①세상 자체를 하나님의 원수 집단으로 만드는 그러한 의도를 갖고 있고 두 번째는, ②원수니까 가만두면 안 되겠죠, 기름 부음 받은 자, 너무 길죠, 메시아의 최종 승리가 되는 두 개의 절차를 기대하고 하나님께서 전쟁을 시작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의도적으로 일으킨 거예요. 인간세계를 들쑤신 겁니다.
그럼 이 기름 부은 자의 등장을 시편 2편 7절에 보면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영적인 것에 대해서 전한다 이 말이죠, 이 세상 것이 아니고. 전하는데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아들이 등장해요. 아들이.
아들이 등장했습니다. 전쟁. 전쟁에 숨어있는 주인공을 뭐라고 칭하느냐? 하나님의 아들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하는데 여기에 동원되는 군사가 누구냐 하면 젖먹이에요. 젖먹이, 어린아이. 이렇게 동원해서 전쟁이 진행됩니다.
세상 사람들 자기들끼리의 전쟁에서는 애들은 빠지고 힘센 어른들끼리 각자 차출해서 전쟁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어떤 내막을 들쑤시는데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 집단으로 진행되어왔다는 점을 들쑤셔내는 거예요. 들쑤셔내고 그다음에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대적이니까 그냥 방치한다? 묵과한다? 아니죠. 반드시 척결하죠. 척결할 때 기름 부은 자가 등장해서 메시아의 최종 승리로 이어지는 겁니다.
뭐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십니까? 이런 성경 내용의 이야기, 시편 2편과 시편 8편을 제가 연결시켰는데 이게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를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자,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전쟁인데 그동안 그렇게 관심들이 없고 처음 들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뭐냐? 성경에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데 신경을 안 쓰는 이유가 뭐냐?
[나의 전쟁을 꾸준히 해오고 있었다.] 언제부터? [젖먹이로부터 죽을 때까지.] 무슨 전쟁이요? 꾸준히 나의 전쟁을 해왔어요. 꾸준히. 젖먹이 때는 부모가 대리전쟁 하다가 드디어 어린이집에 가면 자기들끼리 전쟁이 시작되고 어린이집에서 그다음 유치원에 가요. 유치원 졸업반을 유치원의 어르신네라고 이야기합니다. 유치원 어르신네로 발표하고 졸업하게 되면 초등학교부터 해서 이건 뭐 아는 바와 같이 자기와의 전쟁을 합니다.
자기와의 전쟁에 기본 정신 모토가 뭐냐? 이거에요. [나의 행위로 세상이 달라질까?] 이거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 행위로 세상이 달라질까요? ①달라진다, 여기 해당되는 사람이 있어요. 사기꾼, 정치꾼. ②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세상은 안 달라진다. 이것은 세상 추이(흐름)의 종이 되고자 마음 굳힌 자. 99.99%의 모든 사람들. 99.99%의 모든 사람들이 해당됩니다. 이 속에 사기꾼들도 많이 포함되죠. 세상 추이의 종이 되고자 마음 굳힌 사람들. 99.99%에요.
정치꾼들은 아니다, 내 행위로 세상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안중근 의사. 내 행동, 총을 쏨으로써 조선이 달라질 것이다. 나 하나 희생하고 나라가 살자, 이런 거. 모세가 애굽 사람 죽이고 자기 민족을 해방하려고 시도했던 그거. 그래서 뭐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나라 바뀌었어요?
대다수는 ②번, 이겁니다. 추이를 지켜보다가 후딱 갈아탈 때는 갈아타자, 이런 식이에요. 여기서 중요한 것이 나는 세상 추이에 스스로 자진해서 ‘노예’가 되기로 하는 거예요. 추이를 보고 세상 돌아가는 걸 보고 종은 종이로되 좀 편한 종 되는 방법이 없을까를 보는 겁니다. 거의 99.9%에요. 어차피 나의 행위로 세상은 안 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종이 되고, 세상은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세상은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거예요.
인간들이 전쟁을 안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전쟁을 하고 있어요. 전쟁을 하고 있는데 그 추이를 살피는 전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 몸뚱아리, 한 몸으로 태어났기에 꾸준히 뭔가 내가 나를 위한 전쟁을 하지 않으면 내가 이 땅에서 종이더라도 비참한 종이 된다, 하는 그것을 이미 인식하고 있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 세상이 하나님의 대적이 된 것을 하나님은 그냥 방치하지 않습니다. 시편 2편을 다시 보게 되면 9절에 “내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12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살아남을 길을 또 허락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12절에,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무엇이 기다립니까?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지금 시편 2편의 이 전쟁 이야기가… 시편 1편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잖아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잖아요. 복 있다는 말은 율법 안에 이 전쟁 이야기가 소복이 담겨있다는 뜻이에요.
율법을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율법에서 뭘 끄집어내야 돼요? 아들이 어떤 행위를 하시는지, 준비된 아들이 준비된 행위를 어떤 식으로 드러내시는지를 보면서 우리는 그 아들에게 입 맞추고 전적으로 굴복할, 굴복이란 패배를 의미합니다, 내가 주님 앞에 알아서 패배해버릴 준비를 하면 돼요. 그 발 앞에 입을 맞춘다는 것은 ‘제가 바로 주님의 적 맞습니다.’ 자인하고 항복해버리는 겁니다.
사로잡히는 거예요. 주님께 사로잡히는 거예요. 사로잡히겠다는 말은, ‘나는 그동안 나의 전쟁을 한 것이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을 화나게 한 행위였습니다.’ 하는 것을 자인하는 거예요.
논리상 보면 굉장히 복잡한 것 같지만, 이렇게 이야기 들어보니까 어떻습니까? 아주 간결하죠. [하나님이 전쟁을 벌였다. 알아서 기라.] 이 얼마나 간결합니까? 그런데 이 간결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그동안 몰랐다는 것은, 이러한 율법 안에 있는 복, 아들이 자진해서 벌이는 이 전쟁이야기를 가리고 있는 장애요소가 있다는 거예요. 장애요소가.
연세 많은 분들이 성경 좀 읽으려고 성경 볼라치면 갑자기 눈에 백내장 현상이 일어나고 그런 거 없습니까? 갑자기 눈에 뭐 안개가 자욱하게 낀다든지 그런 현상 없어요? 갑자기 잠이 온다든지, ‘아이고, 내가 성경 알아서 뭐 하노? 설교나 듣지. 잠이나 자자.’ 하고 마음속에도 자욱한 안개 끼어서 그냥 안개와 더불어서 눕게 된다든지 그런 현상 일어나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씀을 방해하는지 알아야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시편 8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면, 우리가 이미 젖먹이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젖먹이 시절을 훌쩍 지나가버렸습니다. 어린이집도 아니고 유치원도 아니고 우리는 마음적으로 이미 어른들이 되고 말았어요.
‘주님께서는 주의 전쟁에 젖먹이를 투입한다.’ 이 말에서 젖먹이의 특징이 뭐냐 하면 어느 젖먹이도 ‘내가 했다’ 하는 젖먹이는 없어요. 뭐든지 ‘내가 했다’가 되어버리면 이건 젖먹이가 아니에요, 이미. 장성한 자의 자의식이에요. 젖먹이와 어린아이를 주께서 투입시키는 것은 이 전쟁의 승리가 바로 8편 1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이름으로만 고스란히 다 돌아가게 되는 전쟁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돼요. ‘젖먹이가 전쟁했는데 공로는 주께 돌린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전쟁이 다 끝나고 나니까 ‘우리가 뭘 해도 우리는 젖먹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는 것을 차후적으로 일이 다 끝나고 난 뒤에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우리는 철딱서니 없었습니다.’ 하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내가 이 전쟁에 관여하거나 기여한 바는 전혀 없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겁니다. 구원받더라도 몸만 아프죠. 면역이 약해져서 아픈 병 있잖아요. 그럴 때 감사가 되죠.
그러니까 자기를 이미 성인이라고 간주하는 거예요. 성인이라는 말은 독자적, 독립적 판단의식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고 그걸 아주 자랑스러워하는 거예요. ‘나는 젖먹이도 아니고 어린아이 안 됨을 주께 감사합니다.’ 이런 식이란 말이죠. 판단의식이에요. 독립적인 판단의식이 있으니까 관심사가 주님의 전쟁이 아니고 자기 전쟁에서 한시도 자기 전쟁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단 한순간도. 자기 행위에 대해서 자기가 계속해서 판단작업을 해야 되기 때문에. 잘했을까 못했을까. 인간이 잘한들….
아까 얘기했지만 잊어버렸을까 싶어서 다시 한 번 상기시켜드립니다. 내 행동으로 세상이 달라집니까? 안 달라지죠, 내 행동으로. 안 달라져요. 안 달라지는데 우린 왜 행동해요? 뭐든지 열심히 하는 이유가 뭡니까? 열심히 한다고 세상 달라집니까? 안 달라지잖아요. 그런데 왜 하는 거예요? 왜 열심히 살려고 하고 열심히 일하려고 하고 왜 그렇게 합니까? 뭐 특별한 이유 있어요?
이제 그 이유를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이유를 알아야 돼요. 왜 그동안 우리가 주의 전쟁에 무관심하며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주의 전쟁에서 반대편, 원수 편인데 그 편에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게 하는 그 이유가 뭐냐? 그걸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타인 때문에 그래요. 남. 남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내 자아성 정립에 타인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소자(어린아이)는 처음부터 어른 되는 게 아니에요.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의 빈 공간에 어른들의 욕망, 바라는 것이 어린아이에게 투입되게 되어 있어요. 순서대로 볼게요.
①어른들의 요구사항이 어린아이의 마음을 채운다. 처음 순서가 이렇습니다. 이걸 흔히 ‘양육’이라 하죠.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부모가 없으면 무슨 기회가 줄어들어요? 양육 받을 기회가 없죠. 심리상태가 촘촘하지 않고 헐거워요. 듬성듬성해요. 동물적인 본능이 따라오죠.
첫 번째로 어른들의 요구사항이 어린아이의 마음을 채우게 되면 그다음 ②어린아이는 묻는다. 누구에게 묻는가? 어른에게 묻는다. ‘저 무엇을 하면 돼요?’ 이걸 번역하면, ‘제가 본받아야 될 타인의 욕망은 무엇입니까?’ ‘아버지, 저 어떤 사람 되고 싶어요?’ 이런 뜻이에요.
‘아버지, 저 어떤 사람 되면 돼요?’ 말을 쉽게 하면 되는데 왜 어렵게 하느냐? 나중에 크게 되면 이 마음, 어린아이의 자아성이 가까운 아버지를 비롯한 어머니와 식구들부터 해서 어른들의 요구사항에 눈치 보며 그걸 의식하는 식으로 사회에 나가게 되어 있어요. 빈 마음이 아니라니까요. 나를 더 키워주고 성장시키고 성공시킬 자들에 대해서 눈치를 보면서 그들의 욕망에 따라 내 행동이 결정되는 겁니다.
③내가 탐낼만한 타인의 욕망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그 사람에게 묻질 않죠. 누구한테 물어요? 이제 자기 스스로 자립적인 사람 되었으니까 자기 마음속에 이 마음이 들어있는 거예요. ‘나 심심한데 대선 출마해서 대통령이나 해볼까? 나 국회의원 해볼까?’ 이게 뭐에요? 내가 탐낼만한 타인의 욕망은 무엇일까를 스스로 자기가 자기에게 늘 질문하는 거예요.
대구 강의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어느 초등학생 소원이, 나는 초등학교 졸업해서 중학교는 국제중학교, 고등학교는 민족 사관학교, 그다음 대학교는 하버드, 그다음에 졸업하면 뭐한다? 미용사. 왜 바로 미용사 안 됩니까? 이미 마음 자체가 남의 의식에 종속된 자의식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④나는 타인에게서 내 것을 발굴하고 가져온다. 그러니까 나는 어디로 갑니까? 나는 도로 나에게 간다. 이게 바로 나의 전쟁이에요. 나의 전쟁.
순서 한번 볼까요? 첫 번째, 어른들의 요구사항이 어린아이의 마음을 결정한다. 채운다. 두 번째, 어린아이는 묻는다. ‘저 어떻게 살면 되죠?’ 묻죠. 이걸 묻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어른들의 마음으로 장착되어 있으니까. 세 번째, 내가 골라잡을 수 있는 타인의 욕망. ‘국회의원? 아니. 대통령? 아니. 의사? 아니. 판사? 아니. 내가 할 수 있는 것, 미용사? 오 그거 괜찮네.’ 이렇게 타인의 욕망 가운데 내가 얻을 수 있는 걸 선택함으로써 자기 자의식이 나 스스로 독립했다고 자부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네 번째는 그 타인을 이용해서 자기가 성공하는 거예요.
미용사 같은 경우에는, “야, 너 미용기술 있네? 내가 키워줄게. 키워주면 대회 나가봐.” 미용사 대회 많이 있잖아요. 엄청나게 많죠. 어느 미용사치고 동메달 안 딴 미용사 없고요. 동남아시아 대회에서 우승 안한 미용사 없잖아요. 그렇게 ‘내가 키워줄게’ 하면 그게 끝입니까? 아니죠. 네 번째로 나가죠. 이제 더 이상 나한테는 스승이 필요 없습니다. 나는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쟁취했으니까.
방금 한 것을, 잠시 영어시간이라 생각하고 영어로 한번 해보겠습니다.
Baby, I'd love you to want me
그대여, 당신이 날 원했으면 좋겠어요
The way that I want you
내가 당신을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것처럼 말이죠)
The way that it should be
당연히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해요
그다음에 더 있어요. 아까와 반대에요.
Baby, you'd love me to want you
그대여, 당신이 내가 당신을 원하도록 바라면 좋겠어요
The way that I want to
내가 원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If you'd only let it be
당신이 그걸 허락해준다면
방금 제가 한 ①,②,③,④ 절차를 이 팝송 노래가사가 너무 정확하게 잘 보여주고 있어요. You, I가 막 번갈아 바뀌죠. 번갈아 바뀐다고요. 이렇게 해서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어떻게 세상이 달라집니까?
인간은 나의 전쟁을 하면서 요구하기는 내 세상이 달라졌으면 좋겠다 하잖아요. 그런데 내 세상이 달라졌으면 좋겠다 하면서도 그 달라지는 범주가 이미 형성된 타인의 세계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거에 지나지 않아요. 이게 인간들의 한평생입니다. 인간들의 한평생. 왜 주의 말씀에 관심 없는 줄 알겠죠?
이미 타성에 젖어버린 타인의 눈치를 보면서 타인이 나한테 가져다준 것으로 인해 내 자아성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제 탐을 내도 이미 타인이 갖고 있는 것을 탐내는 식으로 이미 내 심정은 굳어져버린 거예요. 거기서 벗어나질 못하는 겁니다.
'Baby'니까 그대라고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른 거잖아요. 방금 한 노래 제목이 I'd love you to want me, Lobo가 불렀던 1972년도 노래에요. Baby, I'd love you to want me~ 하는 노래에요. 그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다고요.
그러니까 이 팝송가사나 대중가요 노래가 ‘야,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을 어떻게 이렇게 잘 묘사했어.’ 할 게 아니고, 그게 시편에 나오는 주의 전쟁과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오히려 지금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전쟁에 이게 하나의 방해물로 작동하고 있어요. 자기 전쟁에 미쳤으니까.
자, 그러면 이렇게 흥분할 게 아니고 어떤 대책이 있어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하는 것은, 인간은 이미 타인에 의해서 길들여진 자아상으로 그게 한계가 있으니까, 그 타인은 나 어릴 때 있던 어른들의 세계 아닙니까, 어른들의 세계에 계속 길들여지고 그걸 흉내 내고 모방하면서 그 방식으로 나는 나만의 절대적 자아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들이 반복해서 가는 길이에요, 그게. 인간이 반복해서.
그러면 이런 식으로 계속 반복하게 되면 하나님의 전쟁에 있어서 계속 뭐가 돼요? 하나님의 대적이 되고 원수가 될 뿐이에요. 하나님의 진노 속으로 그냥 자진해서 거의 대다수가 쏠려 지옥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무슨 대책이 있어야겠죠. 주께서 어떤 대책을 준비해놨을까요? 요새 ‘~까요?’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되는데, 어떤 대책을 준비해놨을까요?
이 세상의 어린아이 특징은, ‘어리다’ …… 앞엔 ‘빨리 어른 되어야지’라는 기대감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어린아이들은 ‘진보’를 생각합니다. 미래, 세상이 깜짝 놀랄 정도로 세상이 알아줄, 세상에서 유명해서 다들 나에게 알아서 기고 굴복하고 아주 감탄하는 그런 미래를 꿈꾸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시간요소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진보가 아닌 ‘차이’입니다. 진보가 아닌 차이를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면 이미 인간은 차이 같은 건 모르고 내가 지금보다 더 향상되는 것에만 신경을 많이 쓰고 있거든요. 이제 학교 방학하면 장사 안 되겠다고 또 김을수 집사님이 걱정이 늘어졌어요. 진보가 안 되면 어떻게 하나. 이것을 도로 젖먹이로 돌리려면 어떻게 하는가?
내가 젖먹이에 불과하고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각인되고 자인되는 경우는 하나님이 벌이는 그 전쟁의 결실, 열매로서 우리가 젖먹이가 되는 거예요. 그래, 그건 알겠는데 어떻게 하면 그게 될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그게 될 수 있는가? 그만 뜸 들이고 말씀해주세요. 말씀해드리겠습니다.
어린아이가 누구를 만나느냐 하면 나는 늘 타인을 의식하고 타인을 만나왔죠. 이 자리에 낯선 타인이 들어와요. 낯선 타인. 이게 바로 주의 이름이 복음을 가지고 들어오는 겁니다. 주의 이름은 아까 우리가 공부한 것처럼 그냥 놀러온 게 아니죠. 주의 이름은 전쟁이죠. 전쟁하는 주의 이름이에요.
나는 타인과 떨어질 수 없어요. 하루 일과가 늘 남은 어떤 좋은 걸 갖고 있는가, 남은 어떤 욕망이 있는가 지금 그거 베끼고 그걸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정신이 바짝 쏠려있는데 여기에 주의 이름이 들어와 버립니다. 주의 복음이 들어와 버려요. 이 사람과 이 사람이 만날 때에 제3자 주님이 복음을 가지고 이 속에 들어와 버리면 이 사람과 이 사람의 인간적인 만남, 세속적인 만남은 소환됩니다. 누구 앞에? 십자가 앞에. 주의 복음 앞에 소환돼요.
학교에서 학생 둘이 싸우잖아요. 그때 그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한 선생님은 뭐라고 합니까? “둘 다 교무실로 와. 내 책상 앞에 둘 다 와.” 오죠. 그러면 그 둘 사이에 누가 끼어들었어요? 선생님이, 초월적인 타인이 끼어든 거예요. 그러면 이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은 바로 A에서 B로 가지 못하고, 불렀으니까 호출했으니까 소환했으니까, 선생님이 개입하기 전에 보던 내 타인과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보는 타인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완전히 달라지죠.
이 달라지는 게 뭐냐? 십자가 앞에서 복음 앞에서 우리가 완전히 깨어지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그동안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모든 인생이 싸그리 와장창 하고 접시 깨듯이 유리창 깨듯이 그 앞에서 다 깨어지는 겁니다.
개입할 때 아는 것은, 세상은 내가 행동한다고 해서 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세상이 달라지고 있는 이 현실성을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이 세상 모든 현실은 주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되어간다는 것을 확인하게 돼요.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림을 통해서 묘사해드리겠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죄인으로 규정을 받게 돼요. 규정을 받게 되면, “왜 죄인이냐?” “그냥 죄인입니다. 죄 지었습니다.” 이런 죄인이 아니죠. 주 앞에서 죄인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행해왔던 것이 전부다 소환되는 거예요. 네가 남하고 만날 때 어떤 자세, 어떤 마음가짐으로 만났는가 십자가 앞에 복음 앞에 소환되는 거예요.
그러면 소환될 때 우리는 뭘 다시 한 번 점검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타인을 만날 때, 어떤 자세로 어떤 태도를 가지고 만났는가를 혼자만 아는 게 아니고, 주님 십자가 앞에서 이미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한 십자가 앞에서 그걸 다시 한 번 실토해내는 겁니다.
자, 그러면 주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았는지 그림 하나로 묘사해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있는데 [인간이 자기의식으로 무장(武將)되어 있을 때] -무장이죠, 무장이라 하는 것은 어떤 태도를 말합니까? ‘나의 전쟁을 한번 해봐?’ 이런 적극적 자세가 무장이죠. ‘덤비기만 해봐. 건드리기만 해봐.’ 이렇게 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방어기제. 방어기제인데 어떤 방어기제냐 하면 [공격적 방어기제]. 나를 지키는 데 있어서 그냥 수비로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남한테 확 쏘아버리는 거예요. 말이든 뭐든 행동이든 간에 확, 근처 오지 마! 하고 콱 밀어버리는 식으로 자기 방어기제를 가동하는 거예요.
무엇을 지키는가? 과거를 지켜요. 누구 과거? 나의 과거를 지켜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과거를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데 네가 와서 그걸 전부다 더럽히고 훼손하게 되면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더럽혀지잖아요. 내가 지금껏 쌓아놓은 어떤 탑이 있는데 그 탑이 무너진다면 나는 더 살 이유가 없어져요. 이것이 방어기제인데 수비적이 아니고 공격적으로 나타나요.
이것을 [(나의) 과거 고수]라 해요. 과거를 고수하는 거예요. 과거를 고수해서 지금 이 순간까지 [자기 위주의 연속성(연결성)을 시도]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방어기제까지 동원시키고 자기가 한결 같이 나는 어제와 끊어짐이 없이 계속 이어나가는데 그것마저 힘들어 못한다면 결과적으로 [자기 함몰]. 그냥 무너지지 뭐. 이게 뭐에요? 자살이잖아요.
그래서 이 사람은 항상 감사가 없고 모든 말과 태도에 분노가 피어나요. 이것이 공격적 방어기제의 일부기 때문에 분노가 피어나요. 이걸 가지고 정신병이라 합니다. 그리고 분노 가운데 감사를 얻기 위해서 환상, 환타지를 자꾸 꿈꾸고 있어요.
다시 아까 한 이야기와 연결시키면 내 행위로 말미암아, 내 것을 지키는 방어기제로 말미암아 내가 있는 소박한 나의 세계는 내 행동으로 변화될 수 있고 바뀔 수 있다는 그러한 환상에 매진하고 있어요.
어떻습니까?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 있습니까? 백퍼입니다. 100%에요, 100%. 백프로입니다. 나의 과거를 늘 기억하고 그 과거와 지금을 연결시키는 거예요. 연속성이라 했는데 더 정확하게는 연결성이에요. 연결성 시도를 포기 못하는 거예요. 그걸 지키기 위해서 공격적인 방어기제. 까이기 전에 깐다.
그도 저도 실패하면 자살할 만반의 마음준비가 다 되어 있어요. 번개탄으로 할까,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릴까. 자기 자살도 공격적이에요. 자동 소총으로 대학교에서 열 몇 명 죽이고 나도 뛰어내리자. 체코 대학에서 어제 그런 일이 있었죠. 이게 자기 함몰이잖아요. 에이, 더러운 세상. 너 죽고 나 죽자. 내가 투자를 했는데 빚이 있으니까 아내하고 자식들 목 조르고 자기도 죽고. 자기 함몰. 이게 강력한 방어기제입니다.
이 정신병은 인간세계에 보편화되어 있어요. 이 정신병에 병명을 붙인다면 ‘나는 어른이다.’ ‘나는 자립적이다.’ ‘나는 자립적 자기의식이다.’ 이렇게 되죠.
그러면 이렇게 그림 그렸으니까 여러분들은 이제 뭐가 궁금하냐? 이게 아니라면, 이런 인간이 아니라면, 진짜 천국 가는 인간은 어떤 모습인가 궁금할 거예요. 제가 또 그려드리겠습니다.
아까 자기의식이 십자가 앞에 완전히 박살난 사람인 성도는 어떤 특징이 있냐 하면 [사명감]이 있어요. 사명감. 낯선 타인에 의해서 새로운 관계를 연결하다보니까 그분이 지시하고 맡기신 사명이 있어요. 그 사명감은 매사에 [봉사]로 이어집니다. 봉사가 뭡니까? 대가(代價)보고 일하지 않는 게 봉사죠.
특징이 [과거의 상실]이에요. 내가 뭘 했지? 오 목사님 집에 가서 신이 만나거든 “누구세요?” 너하고 나하고 과거에 어떻게 있든 과거는 날아가 버렸으니까. 지금 주님께서 우리 집에 같이 살게 했다, 그게 전부에요. ‘너는 나한테 봉사 받을 준비되어 있지? 나는 너를 키울 사명감에 투철하고 있는 거야.’ 이런 거. 특히 본인이 십자가 앞에 깨어졌으니까 죄인이니까 죄인은 못하는 게 없어요. 죄인이니까. 죄인이 주는 [자유성]을 갖고 있어요. 죄인은 자유성을 갖고 있어요.
사명감, 봉사, 자유성, 과거의 상실 이런 것들이 성경에 보면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이지만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지금 염려를 판단할 권한은 오늘로서 우린 끊어지는 거예요.
매일 단절성이죠. 나로 인하여. 나로 인하여 단절되고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연결되고. 나는 단절되고 주님의 지시와 은혜에 준해서 연결되고. 연결되면 어제와 내가 연결되는 게 아니고, 어제의 주님의 은혜와 오늘 주님의 은혜가 연결되는 거죠. 이것을 바로 말씀으로 확인하는 거예요. 말씀으로. 복음으로 확인되는 거예요.
끊어졌는데 연결되었으니까 나올 수 있는 것은 어제부로 죽어야 되는데 안 죽었으니까 감사가 나오죠. 감사. 내가 살아있는 게 감사가 아니고, 주께서 살아계심을 감사하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음을 감사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내 안에 살아계심을 감사하는 거예요. 나는 주님의 운반체니까. 말씀의 운반체니까요.
이런 여러 가지 있지만 제일 근본적인 것은, 사는데 나를 위해 사는 것은 타인과의 전쟁이지만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나에게 일어나는 것은 사는 것이 주의 뜻에 의해 사는 거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사명을 감당하면 되죠. 그 사명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봉사하면 되는 거예요.
방학 때도 뭐 봉사하면 돼요. 시험기간에도 봉사하면 되고. 애들 왔다 하면 “뭐 내가 도와주면 되느냐?” “아저씨, 독서할 수 있는 방 있어요?” “있지. 내가 봉사해줄게.” “하루에 얼마입니까?” “하루에 15만원. 봉사료 치고는 헐은(싼) 거야.” 한 10명 오면 150만원. 가격이 문제에요? 마음자세가 중요한 거죠.
타인이 생각하는 나 이전에 이미 주님이라는 타인과의 만남으로 내가 깨진 상태에서 그다음에 타인을 만나죠. 또 ‘이렇게 되었으니까 만날 필요 뭐 있느냐. 구원 받았는데.’ 이러면 안돼요. 그런 타인을 만났을 때 그 타인을 만난 순간, 내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어떤 식으로 내가 다가갔던가, 주님 앞에 날마다 소환되는 것이 중요해요. 이 소환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나 이제 잘났다,가 아니라 내가 남을 만날 때 새록새록 기억나는 거예요. ‘내가 바로 나의 어른스러움으로 내가 내 걸 지키기 위해서 아주 정신병자로 살았구나.’ 하는 것을 과거 이야기하듯이… 그러니까 과거 이야기해버리면 또 뭐가 나와요? 또 감사가 나오는 거예요, 주님 때문에.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31222b 시편8편 2절(젖먹이의 출현)-이 근호 목사
소자, 작은아이, 젖먹이의 특징은 스스로 자기가 자기 될 마음이 전혀 없어요. 내가 나 될 마음이 없어요. 이미 깨어져버렸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만들어진 내가 와장창 다 깨졌으니까. 그러면 어떤 것이 들어오느냐 하면 주님께서 전쟁할 때 필요한 군인으로 군사로서 조립되는, 그렇게 생산되는 자기가 되길 원하겠죠.
그럼 이미 어른에서 도로 뭐가 돼요? 어른에서 주님 십자가가 들어가 버리면… 십자가는 복입니다.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아까 기억나죠? 율법 안에 하나님의 전쟁이 들어있다. 기름 부은 자가 하는 전쟁. 기름 부은 자에게 입 맞추지 아니하면 지옥행. 그냥 지옥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 내가 원하는 인간형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정당성입니다.
인간을 젖먹이로 바꿔요. 젖먹이로. 어른→젖먹이. 바꾸는 작업을 해주시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아까 그 두 번째 경우 있잖아요. 두 번째 경우가 발생되지 않아요. 모든 인간은 첫 번째가 다에요. 정신병이든 뭐든 첫 번째가 다에요. 자기 전쟁 거기에 완전히 미쳐있어요. 그러나 두 번째는 주님이 개입해서 발생된 새로운 변화입니다.
그런데 어른이 어떻게 젖먹이가 될 수 있는가? 인간으로서는 안 되죠.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요한복음 3장.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네가 하늘나라 못 간다.” 할 때, 니고데모가 하는 말이 “제가 어른인데 성인인데 어떻게 다시 태어나서 젖먹이부터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에서는 그걸 ‘사랑’이라 하는데 주님과의 관계를 사랑이라 해요. 사랑. 사람이 이 세상에서 타인을 이용합니다. 타인을 이용하되 사랑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자기를 잃을까봐’에요. 자기를 잃을까봐. 보세요. 이 얼마나 독합니까. 아휴, 지독한 마귀에요. 자기를 잃을까 싶어서. 다시 말하면, 상대가 나를 가스 라이팅 할까 싶어서.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는 빌미로 날 이용할까 싶어서. 아까 그걸 차단하는 것을 뭐라 했습니까, 네 자로? 방어기제.
이미 인간의 사랑의 대상은 정해졌습니다. 인간은 누구를 사랑합니까? 자기 자신을 사랑하죠. 그것을 이미 기성 어른들한테서 다 봤어요. 그래서 애들도 때로는 이렇게 하잖아요. “나 엄마한테 실망했어. 아빠한테 실망했어.” 이런 이야기하죠.
난 곧이곧대로 들어서 아빠, 엄마가 날 위하는 줄 알았는데 애가 커서 드디어 무슨 눈치를 챘느냐 하면 아빠는 아빠만 최종 챙기고 엄마는 엄마만 최종 챙긴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그걸 통해서 나도 그렇게 버텨야 내가 내 전쟁에서 패배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교회 나온다면 교회 왜 나올까요? 예수님 이용하기 위해서 하나님 덕 보기 위해서 나오는 겁니다.
자, 그러면 타인을 이용하되 사랑하지 않을 경우에는 타인에 대한 공포가 있어요. 갈수록 혼밥, 살면 살수록 혼자서 살길 원해요. 결혼 안합니다. 혼자 살길 원하는데 무슨 결혼을 해요. 내 종이 된다고 할 경우 같으면 종이 될 경우엔 내가 봐줘서 한번 살아볼까 하는 거죠.
그래서 현대 사람들은 결혼하면서 이미 헤어질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결혼해요. 결국 이렇게 되면 결혼은 결혼을 위함이 아니고 상대를 이용하기 위해서 결혼해주겠는데 헤어질 때 그다지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결혼하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교회 나와서 복음을 공부합니다. 복음을 왜 공부합니까? 자기가 안 깨어지기 위해서. 아, 정말… 마태복음 7장 없었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복음 전파하고 주를 위해서 선지자 노릇했습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누구세요? 넌 날 이용했잖아. 너는 네가 안 깨어지기 위해서 복음 공부했잖아. ‘십자가 믿습니다.’ 했잖아. 네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디서 내 앞에서 구라 떨고 있어? 내가 모를 줄 알아?” 다 알아버리죠. (7:22-23)
그럼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나님의 방법은 이 죄인, 자기밖에 모르는 이 죄인을 주께서는 이용하십니다. 죄인 안에서 주님 자신을 임신케 해요. 임신케 하고 잉태케 합니다. 죄인 안에다 주님 자신을 잉태케 해서 주님 자신에 의해서 이 죄인이라는 껍질 안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젖먹이와 소자를 생산하는 인큐베이터로 죄인을 사용하시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게 마태복음 전체에 걸쳐서 나와요. 마태복음 전체에 걸쳐서. 마태복음은 어떤 흐름으로 되어 있느냐 하면 “나는 이방인을 위하여 온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나온 말씀이죠. 나는 이방인은 위하여 온 게 아니다, 라고 분명히 해놓고 나는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찾기 위해서 왔다는 거예요. (10:5-6)
그러면 잃어버린 이스라엘이 그 찾으시는 예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느냐 하면 어린아이, 소자의 모습으로 등장해야 돼요. 소자의 모습으로. 이참에 우리 마태복음을 쭉 한번 볼까요? 이번 시간에 마태복음 다 떼버리죠. 이왕 시작한 거 다 뗍시다. 빨리 빨리 쭉쭉 넘어갑니다. 시간을 아껴야 되기 때문에.
6장 31절에 아까 했듯이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누가 구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했잖아요. 이방인 제칩니다.
6장 7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여기서, 나는 이방인들을 아예 제거해버린다. 그럼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뭐냐?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소자,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 작업에 주님께서는 나선 거예요. 그것을 마태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지금 확인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 작업에 대해서 정작 인간들은 모르는데 마귀는 알고 있어요. 마태복음 8장 29절, “이에 저희(귀신)가 소리 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조건이 있어요.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성령이 오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이 작업이 벌써 개시가 된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된 거예요. 하나님의 소자가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 6절은 아까 말씀드렸고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마태복음 11장 25절,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재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계속 지금 아버지의 뜻이라 해서 예수님 자신을 뭐로 봅니까? 이 땅에 특이하게 등장한 타자, 타인으로 보는 거예요.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런 남이 아니라 너희들이 생각도 못한 남으로서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분이 직접 이 땅에 우리의 타인으로 등장해서 어떤 일을 한 거예요. 일을 하는데 어른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 소자한테는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12장 18절에서 21절, 이건 좀 어려워요. 설명이 필요합니다.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누구한테 알게 합니까? “이방에 알게 하리라” 이방 제칩니다.
19절,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다음에 21절 보면 “이방인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20절,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계속 성령 받은 자를 앞장세워서 심판이니까 전쟁을 계속 밀어붙인다 이 말이죠. 언제까지? 이방인들이 낯선 전쟁을 파악할 때까지. 그래서 이방인에 대한 심판이 정당화될 때까지.
그러면 나중에 이방에 알려질 때까지 심판을 하는데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결국 거부하잖아요.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이스라엘이 거부되었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 빈자리에는 누가 채워질까요? 심판하는 분이 바로 이스라엘 하나님이고 여호와 하나님인 것을 아는 이방인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거예요.
그것도 마태복음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1절에 보면,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예수님이 잃어버린 자기 이스라엘을 위해서 왔는데 정작 이스라엘은 예수님 앞에서 회개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그 현상은 어떤 현상이냐?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아였지만 정작 회개는 누가 했습니까? 니느웨가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역전되어서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본 자손이라는 자들에게 “너희 왜 회개 안 해? 너희들이 너희 하나님을 왜 몰라?”라는 식으로 지적하는 경우를 발생시킨다는 말이에요.
12장 42절,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이스라엘의 본 자손을 찾으러 왔지만 이상하게 본 자손은 계속 자기 메시아를 거부하고, 거부하면서 같이 드러나는 것이 전혀 모르는 이방인이 회개하는 이방인으로 너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이런 기이한 현상이 동반해서 벌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소자냐? 지금껏 내가 살아왔던 나의 자의식을 완전히 버리고 누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사람입니까? 아까 A, B라는 두 사람이 있었지만 그 사이에 누가 끼었다 했어요? 주님이 끼어버리면 주님과의 만남을 먼저 선행한 자가 자기의식이라는 것이 이게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버리는 게 아니고, 이게 중요해요, 버리는 게 아니고 나 위주로 사는 것을 포기하는 게 아니고 날마다 십자가 앞에 소환당하는 거예요.
내가 누구를 만나잖아요. 또 여러분들이 어떤 누구를 만나잖아요. 만날 때에 ‘나는 이런 짓거리를 이런 기대를 가지고 지금 만나고 있습니다. 이게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복음에 위반되는 것이고 이것은 내가 죽어도 할 말 없는 것입니다.’ 하는 사실을 그 사람 앞에서 그걸 털어놓는 것이 그게 바로 전도고 선교다 이 말입니다.
버리는 게 아니고. 자기 과거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고 자기 과거를 소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과거를 못 버리는 것이 그렇게 지옥 같았는데 십자가를 알고부터는 과거를 소환하는 것이 그렇게 가볍고 즐거운 거예요. “나 이런 인간밖에 안됩니다.” 하는 것을 즐겨, 아주 기쁘게 그걸 고백하는 거예요. 타인 앞에서. “나 인간 안 달라졌어요.” 이걸 막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난 당신 만나면 꼴 보기 싫거든. 그런데 당신을 만나야 될 이유가, 꼴 보기 싫어하는 그 자세가 얼마나 내가 교만하고 나만 챙기는 죄인인 것을 또다시 당신을 통해 들통 나라고 우리 둘은 복음으로 만났습니다.” 그 현장성에 주님이 현존해 함께 있는 거예요. 이 전쟁이에요, 이 전쟁.
마태복음 잠깐 중단하고 교재 계속 하겠습니다. p.23 한번 봅시다. 밑에서 4번째 줄에,【성경은 이렇게 패역한 인간의 속성을 원수로 간주하고 있다. (골1:21, 롬 5:10)】골로새서 1장 21절,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 대목이 나와요. 원수에요. 악한 행실이요.
여러분들 공부됐는지 내가 확인해볼게요. 전에 우리들이 생각하는 ‘내가 악한 행실로 주님의 원수가 되었다’ 할 때 우리가 캐낸 악한 행실은 어디서 나온 악한 행실입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한 악한 행실은 어디서 나온 거예요?
어릴 때부터 부모가 ‘너 그런 사람 되면 안 돼. 그건 나쁜 사람이야.’ 했던 그 지식의 집대성이 악한 행실이에요. 그건 (성경에서 말한) 악한 행실 아니에요, 지금. 그건 기성세대가 나한테 도덕적으로 요구했던 악한 행실이라고요. 기성세대가.
I'd love you to want me 이 노래가사에 보면
You told yourself years ago
몇 해 전, 당신 자신이 당신에게 이야기한 것
You'd never let your feeling show
절대로 내 감정을 결코 드러내지 않으려고 내가 시도했었다
라는 겁니다. 이거 빠뜨리기 어렵지만 시간관계상 빠뜨렸는데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못 빠뜨리겠어요. 너무 중요한 거예요. 인간의 심보, 과거에 대한 집착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You told yourself years ago You'd (would, 뭘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죠) never let your feeling show’
무슨 뜻이냐 하면 ‘너는 너의 감정을 나에게 드러내지 않기로 네 스스로 다짐했잖아’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방어기제거든요. 내 감정을 솔직하게 당신 앞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주인공 된 사람이 이제는 오랜 시간 흐르고 난 뒤에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와요.
Now it took time for me to know
이제야 난 알았다
what you tried so not to show
당신이 안 보여주려고 애쓴 것을
‘당신이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쓴 것이 무엇이었는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이 같으면 좀 털어놓자 이 말이거든요. 복음을 알고 난 뒤에는 십자가 앞이라는 그 계기가 바로 이 사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밀당했다는 사실, 밀당이 아니죠, 일방적으로 당기고 밀 수도 있어요, 이런 것들이 소환되는 계기로서 주께서 나를 향하여 전쟁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내가 내 과거와 나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행동과 태도와 생각과 사고방식과 모든 손짓 하나하나를 하면서 내 것이 남에게 안 들키고 내 것은 끝까지 지키겠다는 그 집념 외에는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I see the want in your blue eyes. 당신의 눈빛은 늘 우울하다는 거예요. 우울하고 허전함을 볼 수 있어요. 상세한 것은 Lobo의 노래 들어보세요.
I'd love you to want me, Lobo
When I saw you standing there
I about fell out my chair
And when you moved your mouth to speak
I felt the blood go to my feet
당신이 거기에 서 있는 걸 보았을 때,
난 의자에서 넘어질 뻔 했어요
당신이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할 때,
난 피가 발로 거꾸로 흐르는 걸 느꼈지요
Now it took time for me to know
what you tried so not to show
Something in my soul just cries
I see the want in your blue eyes
당신이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쓴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요
내 가슴속 무언가가 애닯아 서글퍼 하고 있을 뿐이었어요
난 당신의 우울한 눈빛에서 허전함을 볼 수 있어요
Baby, I'd love you to want me
The way that I want you
the way that it should be
그대여, 난 당신이 날 원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당신을 원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Baby, you'd love me to want you
The way that I want to
If you'd only let it be
그대여, 당신이 내가 당신을 원하도록 바라면 좋겠어요
내가 원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당신이 그렇게 허락만 해준다면
You told yourself years ago
You'd never let your feeling show
The obligation that you made
For the title that they gave
몇 해 전, 당신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기를 당신 스스로 다짐했었지요
흔히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규약에 당신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만든 스스로의 의무감이었어요
*Baby, I'd love you to want me
The way that I want you
the way that it should be
그대여, 난 당신이 날 원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당신을 원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Baby, you'd love me to want you
The way that I want to
If you'd only let it be
그대여, 당신이 내가 당신을 원하도록 바라면 좋겠어요
내가 원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당신이 그렇게 허락만 해준다면
Now it took time for me to know
what you tried so not to show
Something in my soul just cries
I see the want in your blue eyes
당신이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쓴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요
내 가슴속 무언가가 애닯아 서글퍼 하고 있을 뿐이었어요
난 당신의 우울한 눈빛에서 허전함을 볼 수 있어요
*
**반복
하나님의 원수가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잊어버리는 게 아니고 매일같이 소환되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소환될 때마다 우리는 고맙죠. 감사하죠. ‘나는 내게 미쳤구나. 내 인생에 미쳤구나.’ 하는 사실. 이 전쟁이죠.
그럼 우리는 뭡니까? 내가 이제 와서 내 것을 따로 만들 필요 없죠. 그걸 가지고 젖먹이. 그걸 가지고 어린아이같이 산다는 거예요. 어린아이같이. 내숭떨고 있기는… 뭐 이런 식이죠. 뭘 해도 자기 사수하는 것밖에 안되는데 뭐 더 내숭을 떨어, 이런 거죠.
자, 마태복음 17장 계속 봅시다. 26절,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성전세를 요구하니까 베드로가 난감한 거예요. 성전세를 내야 됩니까? 내라. 내는데 아들들, 그러니까 예수님 뿐만 아니고 따르는 너희들도 예수님의 소자인 너희들도 성전세를 내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성전세를 받아야 마땅하다.
받아야 마땅함을, 이 세상을 향하여서는 성전세를 내기는 내되 자연현상이 아닌 초자연현상에 의해서 내줌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요구하는 레벨, 환경과 너희들이 요구한대로 주는 환경이 서로 차이가 나는 거예요.
아까 ‘차이’라 했죠. 차이 반대말이 진보라 했어요. 진보가 아니고 차이나는 거예요. 이중성. 시간이 중첩되어 있는 거예요. 수요일에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시간이 중첩되어 있다고요. 차이나는 거예요. 차이 남으로써 이 세상 말고 주께서 새롭게 만드는 소자가 따로 있음을 언급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8장 6절 봅시다. 이거는 진짜 이야기할 게 많아요. 진짜 결정적인 거네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이건 설명 좀 많이 해야 돼요.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여기서 여러분들이 이걸 발견하셔야 돼요. 아까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해야 됩니다. 질문이 뭐였냐 하면 [내 행위로 세상이 달라질까요?] 그런데 99.99%는 아니라고 하고 사기꾼, 정치꾼들은 된다고 헛된 야망을 인간에게 심겨주죠. 나만 믿고 따르면 새 사람 됩니다. 푸틴 이런 사람들 대표적인 사람 아닙니까. 안중근 의사 이런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이 세상은 인간의 전쟁으로 달라지지 않아요! 주님의 전쟁으로 달라지는 겁니다. ‘내 행위로 세상이 달라질까요?’ 여기에 대한 해답을 어떻게 제시하느냐 하면 [내 소자 건드리면 세상이 달라진다. 지옥으로.] 전쟁 이렇게 하는 거예요. 주님이 생산한 젖먹이, 어린아이 딱 내세워서 내 소자 건드리면 이 세상은 예상한 대로 지옥으로 변한다.
그럼 세상은 지옥으로 변하는 것이 기정사실이죠. 왜? 소자를 안 건드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예수님이 개입되지 않으면 누구를 만납니까? 나와 타인을 만나는데 둘 다 고만고만한 데에서 어릴 때부터 똑같은 기성세대의 세뇌를 받고 살아온 사람들이에요. 자기 옳다, 자기 옳다 주장하지만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게 나와요. 8절,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 지옥이 언급되어 있어요. 지옥이.
18장 9절에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되어 있죠. 이 범죄가 뭐냐 하면 10절,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그들을 업신여기는 것이 바로 범죄에 해당되고 지옥불에 해당되는 거예요.
어린아이 하나 건드렸다고 지옥에 간다는 말은 그 당시 어린아이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잃어버린 이스라엘 양 대신에 잃어버린 백성 대신에 새롭게 성령을 통해 생산한 이 젖먹이, 진짜 성도죠, 성도를 건드리면 그것은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게 되는 이유가 될 것이라는 거예요. 이유가 될 것이다.
이방인 제치고 이스라엘→ 이스라엘 제치고 없었던 소자→ 하나님의 아들 생산. 이게 마태복음의 흐름입니다. 18장 14절에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건드릴 걸 건드려야지. 내가 만든 생산자를 왜 건드리냐 이 말이죠.
마태복음 20장 20절에 보면 제자들 속에서 주님이 만드는 하나님의 아들을 생각해야 될 텐데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세베대의 아들, 치맛바람을 일으키려고… 자기 아들이 최고에요. 그 아들들은 그 아들이 아니에요.
주님은 주님의 아들, 자신처럼 성령 받은 그런 사람, 성령 받은 사람, 복음의 현존, 주님의 현존성 속에서 세상을 만나고 타인을 만나는 그 젖먹이 아들, 주님의 영적인 거룩한 기름 부음의 전쟁에 동원되기 위해 새롭게 생산된 아들, 주님이 친히 그 사람 속에 들어가서 임신되고 성령으로 잉태되어가지고 그 아들 속에서 소자를 빼내는 방식으로 없는 천국 백성을 생산해내는 생산 방식을 사용하는 거예요. 주께서.
세베대의 아들이니까 예수님의 제자잖아요. 예수님의 제자들 속에서 나중에 이들이 어떻게 됩니까? 성령 받으니까 이들이 뭐가 돼요? 하나님의 아들 되는 거예요.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의 어들이 아니라 새로운 주님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그럼 이것은 진보가 아니고 차이. 차이를 보여주는 겁니다.
23절을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두 아들을 인수인계해요. 인수인계란 말을 이제 아시겠죠. 전에는 내 것이었는데 손 터치하고 내 아들로 주께서 강제 입양을 시켜버리는 거예요. 양자로. 네 아들 아니다. 이제 내 아들이다.
양자를 삼아서 하늘나라 앉혀주는데 조건이 있어요. 23절, 내가 마시는 잔을 그들이 필히 마시게 될 것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이미 성인이 된 자를 다시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 시간을 역전시키는 것인데 이게 얼마나 아플까요. 제가 강남강의에서 인간은 항상 혼자 산다 했죠. 혼자 사는데 혼자 사는 인간이 하나님 백성 된다? 이것은 있을 수 없죠. 있을 수 없는데 일어나는 현상을 뭐라고 했습니까? 팝송 하나 하면서 말씀드렸잖아요.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당신 곁에만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사랑’이에요.
사랑은 미친 거라 했죠. 사랑은 미친 거예요. 그게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나오는 거예요. 주의 사랑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아가서에 나오잖아요. 얼마나 사랑이 센지, 내가 지옥가도 끄떡없다. 왜? 사랑이 지옥까지 따라오니까. 지옥불이 무섭다 무섭다 하지만 지옥불보다 더 센 게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뭡니까? 아가 8장에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옥보다 더 셉니다. 어디 거기서 자기 착함을 자랑합니까? 자기가 개과천선한 것을 어디서 말합니까? 개과천선한다고 지옥에서 빼내줍니까? 아니에요. 사랑이에요. 주님의 공로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예수님 복음 장착해서 스스로 설 생각하지 마세요.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어린아이에서 젖먹이로 가는 거예요. 누구는 나이가 거꾸로 먹는다는 영화도 있죠.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란 영화가 있죠. 갈수록 어린아이와 같이 돼요. 젖먹이같이 돼요. 뭐 삼층천 아무나 넣어주는 줄 알아요? 삼층천 아무나 안 넣어줍니다.
그다음에 마태복음 21장 28절, 두 아들 이야기합니다.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벌써 수상하죠. 두 아들이 있는데 맏이가 등장하죠. 그다음에 둘째 있죠. 자, 둘째부터 먼저 봅시다. 둘째는 아버지가 일하러 가라할 때 “나 안 가겠습니다.” 이렇게 했어요. 이게 아들다워요, 아들답지 않아요? 아들답지 않죠. 자기 독립의지, 자의식이 강하죠.
그러니까 주님의 순서 바꿈에 첫째 아들보다 둘째 아들이 더 확실한 거예요. 둘째 아들은 안 간다고 했거든요. 안 간다고 했으니까 이 아들이 개과천선할 기회는 없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둘째 아들이 안 가겠다 했는데 갔던 거예요. 바로 이 절차, 이 절차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천국 백성 모집에 나서는 거예요. 나 안 가겠습니다.
이게 ‘역전(逆轉)’이죠. 야곱하고 에서가 있는데 누가 아버지의 복을 독차지했습니까? 둘째인 야곱이 첫째 자리를 다 독차지했죠. 이게 역전이죠. 역전에 대해서 자기 기득권, 자기 연속성, 내가 잘나서 계속 잘나고 잘나고 잘나서 잘남의 연속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역전됨을 가지고 한결 같이 이렇게 외칩니다. “그것은 반칙이요!”
오늘 강의 제목은 ‘반칙’. 반칙 선언. 하나님이 반칙 쓰는 걸 모르면 그건 하나님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반칙 안 쓰려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고상하니까. 스스로 자립하는 데 있어서 고상하니까. 우리는 기성 환경, 이 세상에서 너무 교육을 잘 받았어요. 거짓말은 나쁜 것이고 반칙하는 것은 나쁜 놈이고 틀려먹었다 하는 것이 벌써 우리에게 스며들었어요.
그래서 천국 갈 때도 반칙 없이 가고 나쁜 짓 안 하고 천국 가고 싶어 하죠. 그게 가장 추잡하고 더러운 짓이에요. 자기 의. 여러분한테는 해당되는 사람 아무도 없죠. 여러분은 뭐 알아서 반칙하니까. 반칙을 감사해야 되고 주의 반칙에 우리는 늘 놀라야 돼요. 그리고 그 반칙 앞에 우리는 타고난 나밖에 모르는 이것이 날마다 소환되어야 돼요. 제목을 ‘소환’으로 바꿀까. 그건 좀 이따 생각합시다.
그다음 봅시다. 마태복음 21장 38절, 얼마 전 강남강의에서 한 내용과 비슷한 내용이죠. 포도원이 있는데 상속자가 오니까 농부들이 상속자를 죽여 버리면 이 포도원은 우리 차지가 된다고 이야기했죠.
결국 모든 사람은 44절이에요.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할 때 이 돌이 뭡니까? 하나님의 상속된, 인간 속에서 버려졌던 그 자가 우리 모든 인류의 아킬레스건이 된 거예요. 치명적인 약점을 독점하고 있는 사건이 되는 겁니다.
요셉을 팔아먹었던 요셉 형들의 결정적 아킬레스건은 뭡니까? 요셉이 다시 등장할 때에요. 이건 뭐 귀신도 아니고, 우리가 아까 버렸는데 그게 다시 돌아왔어요. 그리고 재림 날 할 말이 없죠. 주께서 재림한 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계1:7)
다시 한 번 제가 상기시켜드립니다. 예수님의 행위가 세상을 완전히 달라지게 하고 그 행위의 결실이 뭐냐? 분명히 어른인데 십자가 앞에서 응애 응애 젖먹이에 불과함을 기뻐하는 자들의 출현. 등장이에요. 제목 바뀌었다. ‘젖먹이의 출현’. 젖먹이가 등장하는 거예요. 젖먹이가.
마태복음 22장을 보겠습니다. 아들 혼인 잔치죠. 이건 여러분들이 해설할 수 있어요. 아들 혼인 잔치에 왜 안 갑니까? 자기에게 독자적인 자기 나름의 자기 일이 있기 때문에. 나도 내 일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 장가가는데 자기 장가가기 때문에 남의 혼인 잔치에 못 가는 것은 핑계가 아니고 너무나 합리적인 정당한 이유가 되겠죠.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아들 혼인 잔치 안 왔다고 어떻게 했어요, 그 임금님이? 다 죽여 버렸죠. 여러분들 이게 이해됩니까? 그러니 이 말은 뭐냐? 그 임금은, 지금까지 열심히 내 인생을 따로 단단하게 구축했다는 것을 완전히 개무시 해버리는 거예요. “누가 너보고 그런 짓 하래?” 이런 식이에요.
네가 어떻게 열심히 해도 세상은 이미 끝났어. 안 달라져. 네 행동으로 세상이 안 바뀐다고요. 네 착함과 선함과 의로움 때문에 너희 세계도 안 바뀌고 너희 행동도 안 바뀌어. 다만 멸망할 것이 멸망할 뿐이지, 바뀌어서 멸망하는 거 아니에요. 처음부터 우리는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지옥 가는 길 고이 가소서, 하고 그냥 보내버리는 거예요, 주님께서.
달라지는 것은, 차이는 예수님 때문에 생긴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마태복음 23장 7절에서 10절.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땅에 있는 자를 지도자라 하지 말라, 하는 그 이야기에요. 땅에 있는 것을 아버지, 지도자, 선생님이라 하는 것은 누가 정한 거예요? 인간들끼리 정한 거죠. 이런 것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23장 37절. 아, 참 결정적이다, 정말. 이 말씀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뭐했다?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럼 천국은 비게 됩니까? 아니 아니. 너희들을 버리면 버릴수록 생기는 그 빈자리를 이방인들로 채우는 거예요. 이방인들의 특징이 뭡니까? 자기는 하나님하고 상관없죠. 원래 여호와와 상관없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연속성을 추구하고 ‘내가 이렇게 되어야지’가 전혀 주님에게 도달하지 않는 자를 주께서는 성령을 보내어서 그 사람 속에 예수님 자신의 영, 성령을 잉태시켜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소자되게 만드는 거예요. 소자되게 만든다는 말은 주께서 말씀하신 “이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하는 그 어린아이를 친히 생산해내는 작업을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성령 받은 자는 그걸 알죠. 그렇게 해서 아는 거예요.
마태복음에서 마지막으로 27장 54절, 여기 이방인이 등장합니다. 상당히 중요한 고백을 하는 이방인이 등장합니다. 십자가 달릴 때 모습이에요. 그럴 때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그다음 뭡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하신 말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마 3:17, 막 1:11, 눅 3:22)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관계, 그게 시편 2편에 나오는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아들에게 입 맞추려면 아들에 의해서 새롭게 생긴 그 젖먹이가, 우리의 썩어빠진 이 나밖에 모르는 이 안에서 잉태되고 임신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내가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하는 것을 아주 기쁘게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그렇게 한다는 말은, 주께서 또 같이 만나게 해준 사람이 있을 거예요. 신자든 불신자든 관계없어요. 어쨌든 누구든 만나게 해주면 내가 옛날 예수님 없을 때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식으로 만나왔고 뭐를 얻고자 노렸던가가 주님 앞에 새롭게 계속 날마다 소환되죠.
만약에 상대가 복음 아는 사람이면 둘 다 같이 그것을 소환해서 하하 호호 기쁘게 그것을 고백하는 거예요. Christmas party! 예수님 탄생을 기뻐하는 파티가 그 파티죠.
마태복음은 그 정도 하고요. 다시 이야기해서 마태복음은, 이방인은 아닙니다. 이방인은 제치고 이스라엘 중에서 제치고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는데 그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격하고 예수님을 추방시킬 때 새롭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했던 그 취지가 있는 사람들이 살아나죠.
출애굽기 4장 22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내 아들이라 했거든요.(“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 아들. 진짜 아들다운 아들이 예수님의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그 근거를 십자가를 통해서 마련해주신 겁니다.
이렇게 하고 p.24 중간쯤 봅시다.【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현장은】이렇게 되어 있어요.【전혀 인간의 자랑거리가 부각되지 않는 환경이다.】여기 ‘환경’이라는 말을 했죠. 환경이에요. 기존에 우리가 태어나서 부모한테 교육받을 때 환경은 단일 환경이에요. 인간들과 인간들의 관계로 형성된 그 현실만이 유일한 현실이에요. 다른 현실 없어요.
그리고 그 인간들이 추구하는 일은 뭐였던가요? 아까 강의했듯이 ‘우리가 힘 모으면 환경이 바뀌고 세상도 더 좋은 쪽으로 나아질 수 있다는 그런 증거들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있었다. 앞으로 우리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강촌을 물려주기 위해서 우리는 아~ 대한민국 외치면서 힘을 합쳐보자.’ 이게 바로 우리가 교육받은 거예요, 이 세상에서. 그 환경은 인간의 자랑거리와 인간의 공로와 애씀, 그런 것만 남는 거예요.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이나 남방 여왕, 시바의 여왕은 뭐라고 합니까? “너 왜 회개 안 해?” 이렇게 이야기하죠. “너는 왜 하나님이 보내신 지혜자를 배격해?” 이렇게 고발한다 이 말이죠. 그 사람들 다 이방인인데.
그래서 이것은 바로【유월절 어린 양 덕분에 그들은 애굽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그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성경은 ‘권능’이라고 한다. (출13:9)】성경은 이를 권능이라 해요, 권능. 그러니까 하나님의 전쟁에 힘이 있어요, 없어요? 힘이 있는데 어떤 힘입니까? 인간으로서 표현 못할 힘이죠.
그 표현 못하는 방법이, 젖먹이와 어린아이를 통해서 다 이루게 하시는 거예요. 승리케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목이 ‘젖먹이보다 더 강한 자 있을까’에요. 이 땅에서는 납득될 수 없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계속 보게 되면【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용사가 되시는 점이 부각되려면 인간의 요소는 현저하게 소멸되어야 한다.】그리고 그 밑에 보면【그 하나님이 나타나는 경우는 인간들의 술수나 재능과는 무관한 경우이다.】
인간의 재능과 술수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분명히 나와 있죠. 그러나 우리가 누구를 만날 때 즉각적으로 육신의 본능이 먼저 나오잖아요. 주님의 현장성이 있다, 호출했다 이런 건 생각 안 나고 그냥 누구를 딱 만나면 나오는 그 대화 속에 뭐가 섞여 나옵니까? 내 노력과 내 희생과 내 봉사와 술수와 재능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아이고, 애 키우는데 내가 힘들어 죽겠다. 애한테 이렇게 했더니만 애가 새 사람 되었다.’ 이런 거요. 그거 해서는 됩니까, 안 됩니까? 그걸 해야죠. 왜? 하나님의 젖먹이는 사후적이니까. 소환되고 난 뒤에 사후적으로 주어지는 거니까.
그냥 니 맘대로 사세요. 뭐 골치 아플 거 뭐 있어요? 그냥 내 맘대로 사는 거예요. 내 맘대로. 마지막에 p.25 제일 밑에 다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18:3)】제 이야기 아닙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어른답게 되려고 노력하는 우리 안에 주께서 시도한 어린아이를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나를 이렇게 주께서 친히 만들어주시니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