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08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시편-나와 저희 서론 결론

아빠와 함께 2014. 1. 6. 16:51

주제 : 시편강해 : 나와 저희

2008년 십자가마을 겨울 수련회 강의 파일 주소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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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저희 (시편 강해 )

2008년 십자가마을 겨울 수련회 교재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 나를 지키사 저희가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행악자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나는 온전히 면하게 하소서”(141:8-10)

Ⅰ. 서 론

1. 예술론

예술론

예술은 미(美)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옛날부터 진리가 곧 아름다움으로 간주해서 진리를 얻기 위한 예술을 했다. 하이데거(1889~1976)의 표현을 빌면 철학은 그 자체가 진리이자 비진리라고 할 수 있다. 철학적 진리가 감추어 버린 이 측면, 철학적 진리로서는 포착이 불가능한 이 세계의 측면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적 진리’이다. 

현대예술은 철학의 힘으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사물의 우연적, 구체적, 가변적 측면을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적 진리’는 철학적 진리보다 우월하거나 최소한 대등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그 전에 칸트(1724~1804)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칸트는, 어떻게 인간이 자신을 절대화 하지 않고 상대화 할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우주와 마주하면서 자신을 상대화하는 일은 타고난 인식 능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부분이 우주와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보았다.

‘타고난 인식 능력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그 부분이 무엇인가?

칸트는 인식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영역과 그렇지 못한 영역으로 구분지었다. 인간이 인식 능력을 동원하여 원인과 결과의 자연법칙에 따라 조직화 할 수 있는 것을 ‘현상계’라고 분류했고, 이 인식 가능한 세계에 들지 못하고 남아 있는 영역을 예지계로 분류했다.

그런데 이 두 세계는 서로 배척 관계이기 때문에 중간에 연결 고리가 필요하다. 여기서 칸트는 ‘판단력이라는 인식 능력을 발견했다. 현상계와 예지계로 분류시켜서 인식하는 근대인의 주체는 역시 분열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이 분열을 연결하는 것을 그는 ‘판단력’이라고 보았다. 곧 ‘미(美)의 세계’이다. 미적 판단력의 활동은 두뇌를 사용하는 인식 활동에 속하지만, 활동의 결과 현상계에 해당되는 사물을 산출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장미꽃은 아름답다’는 판단을 내리는 두뇌의 활동이 ‘장미꽃은 빨갛다’는 판단을 내리는 활동과 다른 점은, 빨간 사물은 현상계에 존재하는 반면 ‘아름다운’이라는 술어에 대응하는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형용서는 판단주체의 내면에 일어난 즐거운 감정의 결과를 전달하는 술어일 뿐이다. 이처럼 칸트는 인식 능력들이 ‘미적’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주체가 즐거워한다는 구도를 고수했다. 미적 판단력은 보이지 않는 물자체의 세계를 흔적처럼 현상계로 불러들이는 것으로 보았다. 즐거워야 한다는 유쾌의 감정을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경제적 효용성으로 치면 전혀 쓸모없는 미적 사물들이 세상에 널린 까닭은, ‘신께서 우리에게 현상계를 넘어서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이 아름다운 대상을 무주했을 때, 우리는 분열된 주체와 상승하는 분열된 현실을 넘어 통합이라는 이념의 세계를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자인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이렇게 말했다. “시인이란 무엇인가? 불행한 자다. 그의 가슴에는 깊은 고통이 감추어져 있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그 어떤 신음이나 절규가 그것을 통해 흘러나오더라도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리게 만들어져 있다. 그는 팔라리스의 황소 속에서 약한 불로 서서히 고통을 당하는 불행한 자와 같다. 그의 비명은 폭군의 귀에 도달하여 그를 무섭게 하지 못한다. 폭군에게 그것은 달콤한 음악처럼 들릴 뿐이다. 사람들은 그의 주위에 몰려들어 말한다. 다시 노래를 불러라. 그게 비명 소리라면 듣기에 끔찍하겠지만, 그 음악, 그 음악은 정말 사랑스럽다.”

이처럼 시인은 세계를 괴로워하고, 그의 예술은 이 고통의 표현이자 거기서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향유의 대상이 된다는 것, 고통 때문에 지르는 비명이 미적 사건으로 감지된다는 것. 이런 예술가에 대해서 군중들은 오해한다. 마치 선지자를 오해한 것처럼.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 낭만주의적 예술관은 삶 자체에 미적 형식을 주려는 시도이며, 도덕과 법이 지우는 의무를 놀이를 하듯 무효화하려는 시도이다. 그의 실험은 심리학적, 윤리적, 종교적 혹은 정치적 관점이 아니라 미적인 관점에서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는다.

쇼펜하우어는(1788~1860), “모든 관계의 밖에서 그것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유일하고 본래적으로 세계의 본질을 이루는 것을 고찰하는 것, 그 어떤 변화에도 종속하지 않고, 따라서 그 어떤 시대에도 동일한 진리성을 갖고 인식되는 것을 고찰하는 것, 한 마디로 의지의 직접적이며 적합한 객관성을 이루는 이념을 고찰하는 것, 그것은 어떤 종류의 인식인가? - 그것은 예술이다. 천재의 작품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개념적 인식에 대해 예술이 갖는 우월성은, 단지 예술을 통해 플라톤적 의미에서 이념에 도달하는 게 가능하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인식이 삶의 뿌리로까지 연결되는 어떤 ‘태도’를 필요로 한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에게 인식은 그저 지적인 작업이 아니라 인간의 전 존재에 관련된 작업이기 때문이다. “철학만이 아니라 예술도 본질적으로 현존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작업이다.”([세계]) 인간의 현존재의 문제는 모두 ‘의지’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의지로서의 인간은 우리 현존재의 물리적 조건, 즉 공간, 시간, 인과성의 사슬에 묶여 있다.

여기서 삶의 뿌리와 연결되는 ‘태도’의 미학. 여기서 쇼펜하우어의 미학은 더 이상 인식론적 미학이 아니라 벌써 존재미학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시간, 공간, 인과성에 사로잡힌 우리의 육체는 자기의 필요, 욕망, 번뇌로 인해 진정한 물 자체를 인식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것의 인식은 오직 시공과 인과성의 피안에서만 가능하다. 때문에 일상적 욕망과 필요에 사로잡혀 끝없이 변하는 육체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살아가는 자는 불변적인 이념의 진리에 전념할 수가 없다. 때문에 어떤 “태도”, 즉 의지와 거기에 종속된 육체의 부정이 진정한 인식의 전제조건을 이루고, 이 위대한 ‘부정’의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미’다.

니체에 따르면 철학자들의 진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 역시 ‘시’이며 ‘가상’에 불과하다. “진리란 그것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망각한 환상이다. 한번 사용되어 감각적으로 힘을 잃어버린 은유이다. 새겨진 문양이 지워진 동작, 그리하여 사람들이 더 이상 동전으로 바라보지 않는 금속 조각이다.” 이렇게 니체는 예술의 이름으로 철학을 공격한다. “두 개의 절대적으로 상이한 영역들, 즉 주관과 객관 사이에는 그 어떤 인과관계도, 그 어떤 올바름도, 그 어떤 표현도 없다. 기껏해야 미적 태도가 있을 뿐이다.”

피들러(1841~1895)는 말하기를, “예술가는 다른 세계에 산다. 그는 비루한 세계에서 일탈한다. 개념의 세계를 곧바로 세계로 등치시키는 것. 거기에 오류가 있다.” 이렇게 사유와 구별되는 인식으로서 예술의 본질은 ‘직관능력’에 있다. “예술적 재능의 본질은 직관적 파악 능력을 가지고, 혹은 그런 능력을 위하여 태어난다는 점에 있다. 예술가에게 직관은 그밖에 있는 어떤 외적 목적에 복무하지 않는, 그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로운 직관이다.”

벤야민(1892~1940)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는 것처럼 현상하는 것”을 ‘아우라’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작품의 근원적 기능, 즉 종교적, 제의적 기능이 아직까지 작품에 잔존한 흔적으로 본다. 벤야민에 따르면 현실과의 모든 관련을 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아우라를 보존한 ‘예술을 위한 예술’ 역시 일종의 신학, 즉 “예술의 신학” 내지 “부정의 신학”이라고 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신은 세상을 '말'로 창조했기에 모든 사물은 언어적 본질을 갖고 있다. 즉 목소리 없는 사물이 몸 안에 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신이 사물에 담아놓은 이 언어적 본질을 인간은 음성으로 '명명'한다. 바로 이것이 아담의 언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사물이 가진 이 언어적 본질을 무시하고 제 필요에 따라 거기에 제멋대로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언어는 한갓 수단으로, 자의적 기호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이 관행의 철학적 표현이 근대의 도구주의적 언어관이다. 여기서 언어는 더 이상 사물의 고유한 가치를 반영하지 못한다. 이 아담의 언어를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도구주의적 언어관이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아직 아담의 언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로 예술이다. 조각, 회화와 같은 예술언어에는 사물을 닮으려는 미메시스(모방) 기능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의 언어는 음성이 결여된 물질의 형태로 존재하기에 아담의 언어에는 못 미친다. 하지만 미메시스의 기능이 있기에 예술은 언어가 다른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이해가 되는 만국공용어의 역할을 할 수가 있다고 본다.


아도르노(1903~1969)의 미학은 ‘작품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평의 과제는 더 이상 작품 속에 드러난 작가의 주관적 의도를 추적하는 것이 아니다. 작품 속에 재현된 세계와 작품 밖의 세계의 일치 여부를 가리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작품 속에 객관적으로 들어 있는 것, 작품이 객관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포착하여 언어로 옮기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진리는 그 속에 들어 있는 미적 주체에 관한 진리도, 그가 재현으로 반영하는 세계의 겉모습에 관한 진리도 아니다. 거기서 몸을 빼야 한다. 미적 주체의 매개를 통해 작품 안으로 들어온 현실의 객관적 과정에 관한 진리이다. 주체는 이런 추방상태를 추구하면서 경험계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몸 빼기’를 견뎌야 하는데 이 인내가 곧 예술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이다.

재현이 사라지고, 대상성이 무너지고, 서사적 연관이 파괴된 현대예술에서 작품의 구조는 수수께끼로 다가온다. 현대예술의 작품 앞에 사면 그 작품의 배후에 우리가 밝혀내야 할 그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끝없이 해석을 시도하여, 그 수수께끼에 답을 내나, 그 답을 내는 순간 작품의 진리는 우리 앞에서 또 다시 모습을 감추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끝없는 숨바꼭질의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작품의 진리에 관한 최종적 해석을 거부하고 무한한 해석의 놀이를 풀어놓는 현대예술의 구조를 아도르노는 “수수께끼”의 은유로 표현한다.

예술은 진리를 갖고 있으나 그 진리를 개념적으로 표현할 능력은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예술은 해석은 요구한다.” 현대예술 작품은 더 이상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진리를 매개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것의 진리는 본질적으로 해석을 그 상관자로 요구한다. 하지만 “관찰과 사유로 남김없이 밝혀지는 예술작품은 작품이 아니다.” 예술작품에는 아무리 해석을 해도 해석이 안 되고 남는 부분이 있으며, 예술에 수수께끼의 성격을 부여하는 이 부분이 작품의 전체에 비로소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다.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 그것에 대한 이해는 예술작품의 열린 성격, 수수께끼적 성격 때문에 본질적으로 운동, 과정, 생성의 성격을 띤다. 그리하여 아도르노는 “예술작품이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라는 것은 기술적으로 파악 가능하다”고 말한다.

들뢰즈(1925-1995)의 예술론은 차이들의 반복으로 설명될 수 있다. 시인은 언어적 차이에 의한 반복으로 액센트 있는 리듬을 창작해낸다. 단일한 의미로 차용된 한 단어가 주변의 가까운 단어들에게 어떤 인력(引力)을 행사하고 엄청난 중력을 전달하는 기법을 사용한다.

시인은 창조적 역량을 발휘하여 모든 질서와 모든 재현을 전복하는 가운데 본연의 차이를 긍정하게 된다. 영원회귀하는 영구 혁명 상태에 있는 차이를 긍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정치가는 그렇게 못한다. 정치가는 ‘차이 나는’ 것을 부정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역사 안에서 확립된 질서를 보존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혹은 이미 세상에서 자신의 재현 형식을 부추기도 있는 역사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이다.

시인이 시도하게 되는 반복은 행정가들의 단순한 되풀이 행정이 아니다. 세상을 구제하기 위한 반복이다. 이로서 반복에는 두 가지 형식이 있다.
첫 번째 경우(행정가나 정치가의 경우) 차이는 단지 개념에 외부적인 것으로 설정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똑같은 개념 아래 재현된 대상들 사이의 차이로서, 무차별성을 띤 시간과 공간으로 추락한다. 예를 들면 성경에 대한 문자적 적용 같은 것이다.

두 번째 경우(시인의 경우) 차이는 이념의 내부에 있다, 이 차이는 이념에 상승하는 역동적인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는 어떤 순수한 운동으로 펼쳐진다. 예를 들면, 성경에 대한 영적 해석 같은 것이다.

첫 번째 반복은 같음의 반복이고 개념이나 재현의 동일성에 의해 설명된다. 두 번째 반복은 자신 안에 차이를 포괄하며 스스로 이념의 타자성 안에, 어떤 ‘간접적 현시’의 다질성 안에 포괄된다.

첫 번째 반복은 개념의 결핍에서 성립하는 부정적 반복이며, 두 번째 반복은 이념의 과잉에서 성립하는 긍정적 반복이다. 첫 번째 반복은 가언적이고, 두 번째 반복은 정언적이고. 첫 번째 반복은 정태적이고, 두 번째 반복은 동태적이다. 첫 번째 반복은 결과 안에서 일어나고, 두 번째 반복은 원인 안에서 일어난다.

첫 번째 반복은 외연 안에서 일어나지만, 두 번째 반복은 강도(强度)적이다. 첫 번째 반복은 평범하고, 두 번째 반복은 특이하고 독특하다. 첫 번째 반복은 수평적이며, 두 번째 반복은 수직적이다. 첫 번째 반복은 개봉되고 설명되지만, 두 번째 반복은 봉인되어 있고 해석되어야 한다.

첫 번째 반복은 공전(公轉)의 성격을 띠고 있고, 두 번째 반복은 진화의 성격을 띠고 있다. 첫 번째 반복이 동등성, 통약 가능성(상호 약분할 요소가 들어있는 것), 대칭성을 띠고 있다면, 두 번째 반복은 비동등성, 약 불ㅇ가능성, 비대칭성 위에 기초하고 있다. 첫 번째 반복은 물질적이며, 두 번째 반복은 자연과 대지 안에서조차 정신적이다. 첫 번째 반복은 생기가 없으나 두 번째 반복은 우리의 죽음과 삶들, 우리의 속박과 해방들, 악마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첫 번째 반복은 ‘헐 벗은’ 반복이지만, 두 번째 반복은 옷 입은 반복으로서, 스스로 복장을 하면서, 가면을 쓰면서, 스스로 위장하면서 자신을 형성해간다. 첫 번째 반복은 정확성을 특징으로 하지만, 두 번째 반복은 기준은 진정(眞正)성에 있다. 

첫 번째 반복은 주체를 대변하지만, 두 번째 반복은 그 주체의 심장이자 내부요 중심부며 또한 그것의 깊이다. 첫 번째 반복은 단지 겉봉투, 추상적 결과일 뿐이며, 두 번째 반복은 비밀이다. 예술은 이런 방식으로 진리를 말한다. 


2. 신앙과 예술

신앙이란 특이한 경험이다. 보편화시킬 수 있는 방도가 없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우리 인간이 반복시킬 수 없다. 그냥 생겨버린 사건, 그래서 그대로 접수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하나님은 이 ‘신앙’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신다. 이 신앙이 만들어서 세상에 등장한 자가 시편에서는 ‘나’가 된다. 그리고 인자(人子)라고 불리운다(8:4)

그가 시를 읊는다. 시란 그 당시의 의사소통의 방편이었다. 여기에 해석이 필요하고 오고가는 의미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특별히 예술적 양식을 사용했기에 더 깊은 의미를 담거나 발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적이지 않더라도 중요한 바는 그 시가 어떤 신앙 사건을 말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는 곧 예술적 양식 자체가 신앙사건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등장한다.

하지만 예술론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이 온전히 납득해서 인간이 신의 계시를 그대로 재현한다든지 소유용으로 전환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 예술 양식의 값어치는 있다고 보여진다. 확실하게 중요한 요점은, 예술과 비예술로 나눈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저희’로 나누어지는데 의미가 있다.
이 ‘나’의 특수한 경험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세력들이 이 ‘나’라는 분의 주위에 몰려드는데 그것이 ‘저희’, 혹은 ‘저’가 된다. 시편의 시는 이 두 사이 세력 사이에 끼인 실존들의 서로 다른 세상 사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Ⅱ. 본 론

1. ‘나’라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나’의 신은 고유한 내용이 있고 그 내용은 ‘나’를 고난으로 몰아세운다. 즉 ‘저희’에서 철저하게 당하도록 하게 하신다. 그 원인은 ‘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라는 인간을 따로 만들어내시기 때문입니다. 즉 ‘나’라는 인생이 따로 있어 그 인생과 더불어 하나님이 동행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할 인생’을 ‘나’라는 이름의 사람을 없는데서 새로 생겨나게 하시는 것이다.

이로서 ‘나’와 ‘저희’ 사이가 단지 구분되는 정도가 아니라 다툼이 일어난다. 그 다툼은 상이한 서로의 신에 대한 고백의 다툼으로 번진다. ‘저희’에 해당되는 자는 본인들이 본인을 인도하는 인생이다. 본인들이 생각한 신을 그때그때마다 호출해서 동행을 요청하게 된다. 그들의 신이란 고유 내용은 없다. 단지 ‘저희’에 해당되는 자들이 담아두는 소망들이 그 신의 실체를 채우는 내용물이 된다.

2. 시편에서 ‘나’에 해당되는 구절에 어떤 경우에 나오는가?

(1)적과 대결할 때 나온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3:1)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5:8)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7:6)

“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9:3)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13:4)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17:9)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18:17)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로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버리게 하셨나이다”(18:40)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22:12-13)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23:5)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25:2)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27:3)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27:6)

“내 원수로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27:11)

“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30:1)

“나는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31:8)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31:15)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35:1)

“나의 원수된 자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35:19)

“내 원수가 활발하고 강하고 무리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무수하오며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하나이다”(38:19-20)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시 41:2)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41:5)

“내 떡을 먹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41:9)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42:9/43:2)
 
“나를 비방하고 후욕하는 소리를 인함이요 나의 원수와 보수자의 연고니이다”( 44:16)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54:5)

“내가 원수가 보응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셨나이다”(54:7/59:10/92:11)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56:2)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줄 아나이다”(56:9)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59:1)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다”(61:3)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64:1)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69:19)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69:18)

“나의 원수들이 내게 대하여 말하며 나의 영혼을 엿보는 자가 서로 꾀하여”(71:10)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훼방하며 나를 대하여 미칠듯이 날치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102:8)

“내 대적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성이 나를 소멸하였나이다”(119:139)

“나를 핍박하는 자와 나의 대적이 많으나 나는 주의 증거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119:157)

“내 원수들의 노를 막으시며”(138:7)

“내가 저희를 심히 미워하니 저희는 나의 원수니이다”(139:22)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143:9)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143:12)

(2) 다윗 언약과 연관된 자로서 ‘나’

시편에서의 하나님 통치는 아들을 중심체로 해서 이루어진다. 소위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2:2-3)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2:6-7)

이스라엘의 왕은 참 하나님이 신 여호와의 아들이 되며, 그 아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게 되어 있는데 그것은 기름 부음으로 계약 관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105:15)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 나의 거룩한 기름으로 부었도다”(89:20)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저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구히 지키고 저로 더불어 한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 후손을 영구케하여 그 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89:27-29)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이 아들이 되는 계약은 최초로 유다 지파의 한 인물이 다윗에서 시작된다.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78:67-71)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받은 자의 얼굴을 물리치지 마옵소서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치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위에 둘지라 네 자손이 내 언약과 저희에게 교훈 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저희 후손도 영원히 네 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132-10-14)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은자를 위하여 등을 예비하였도다”(132:17)

이 본문에서 여기서 시온에 대한 택함의 의미가 강렬하다. 시온을 하나님이 영원히 쉬시는 거처로 삼겠다는 것이다. 다윗과 그 후손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원히 안식하실 자리를 마련하고자 하신다.

“그 기지가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87:1-3)

세상의 열방과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서 분노하며 이스라엘을 공략하려는 이유는, 이런 ‘기름 받은 왕 체제’를 붕괴하기 위해서이다. 왜 이러한 체제에 발작하듯이 반발하는가?  하나님 아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하지 않아야 될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왜 군왕들과 이방 민족들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등극하는 것을 싫어하는가? 여기에는 필시 시편에서 말하는 ‘악’이라는 그 본질과 ‘하나님 아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음에 틀림없다.

(3) 죄인인 ‘나’

다윗의 주체자인 다윗은 자신을 죄인으로 간주한다. 과연 죄인인 주제에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 될 수 있을까? 자칫하면 의(義)의 통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의 통치로 변모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19:12)

“여호와여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25:7)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25:11)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인하여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31:10)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32:1)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38:3-4)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40:12)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41:4)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1-5)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65:3)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90:8)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103:12)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130:3)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서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143:2)


(4) 의인인 ‘나’

시편에 나오는 ‘나’ 완전하고 완벽한 ‘나’로 등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나’을 공격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길이 된다.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17:4-6)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18:20-26)

“내가 허물이 없으나 저희가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사 감찰하소서”(59:4)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119:60) 

“나의 생명이 항상 위경에 있사오나 주의 법은 잊지 아니하나이다 악인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119:109-110)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119:141/153)

“나를 핍박하는 자와 나의 대적이 많으나 나는 주의 증거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119:157)

2. ‘나’와 ‘주의 이름’과의 관계

선택된 자는 오로지 하나님의 이름에 호소하므로서 살아가는 자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에는 추호의 기대를 품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기존의 인간들에게 전혀 기대를 걸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5:11)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7:17)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시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시8: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9:2)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시9:5)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시9: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16:4)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시18:49)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시20:1)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 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시20:5)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시20:7)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 하리로다

(시22: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5:11)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시29:2)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시30: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시31:3)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시34: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시44:5)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시44:8)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셀라)

(시44:20)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시45:17)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케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영히 찬송하리로다  

(시48:10)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시49:11) 저희의 속 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시52:9)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시54:1)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시54:6)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시61:5)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시61:8)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시63:4)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손을 들리이다

(시66:2)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시66:4)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할지어다

(시68:4)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라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 그 앞에서 뛰놀지어다

(시69:30)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시69:36) 그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거하리로다  

(시72:17) 그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시72:19)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

(시74:7)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시74:10)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시74:18)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시74:21) 학대 받은 자로 부끄러이 돌아가게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로 주의 이름을 찬송케 하소서

(시75:1)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사를 전파하나이다

(시76:1)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 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시79:6)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시79:9)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시80:18) 그러하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케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시83:16) 여호와여 수치로 저희 얼굴에 가득케 하사 저희로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시86:9)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방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리이다

(시86:11)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시86:12)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오리니

(시89:12) 남북을 주께서 창조하셨으니 다볼과 헤르몬이 주의 이름을 인하여 즐거워하나이다

(시89:16) 종일 주의 이름으로 기뻐하며 주의 의로 인하여 높아지오니

(시89:24)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저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을 인하여 그 뿔이 높아지리로다

(시91:14)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시92:1)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시96:2)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 할지어다

(시96:8)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시99:3)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찌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시99:6) 그 제사장 중에는 모세와 아론이요 그 이름을 부르는 자 중에는 사무엘이라 저희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

(시100:4)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102:15) 이에 열방이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세계 열왕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시102:21)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케 하려 하심이라

(시105:1)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시106:8)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그 큰 권능을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시109:13)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저희 이름이 도말되게 하소서

(시109:21)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선대하시며 주의 인자하심이 선함을 인하여 나를 건지소서

(시111:9)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구속을 베푸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시113:1)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시113:2)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시113:3)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시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시116: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시116: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시116:17)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시118:10) 열방이 나를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시118:11) 저희가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시118:12)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같이 소멸되었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시118: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시119:55)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시119:132)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시122: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시124:8)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시129:8) 지나가는 자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시135:1)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시135: 3)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찬양하라

(시135:13)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기념이 대대에 이르리이다

(시138:2)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위에 높게 하셨음이라

(시139:20) 저희가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헛되이 주의 이름을 칭하나이다

(시140:13) 진실로 의인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

(시142:7)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 주께서 나를 후대하시리니 의인이 나를 두르리이다

(시143:11)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시145:1)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시145:2)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영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시147:4)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시148:5)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시148:13)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

(시149:3)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여기에 비해 악인들은 사람에게 기대를 건다.

(시 9:19) 여호와여 일어나서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소서

(시20:7)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33:16)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 도다

(시33:17)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시37:16)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49:6-8)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49:17-20)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지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39: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시40:6)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시44:6)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시50:8-10)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시50:16)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시52:7)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시60:11)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시62:10)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

(시108:12)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시115:8)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시118:8)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시118:9)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시146:3)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시146: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힘이다. 인간들의 힘이며 재물의 힘이며 발달된 병기들로 된 군사력들이다. 그런데 이들 힘들은 하나님의 아들 체제를 모독하고 무시하도록 악으로부터 독려받기 위해 제공된 힘이다. 기름받은 자와 맨 것을 끊는데 동원되는 힘이다. 이 힘의 원천이 악마에게 있기에 이들에 대한 공격도, 이들로부터의 구원은 인간에게 나올 수 없다.


3. 시온은 만물의 중심터

그 어느 것도 다윗을 선택하신 그 하나님의 언약 밖으로 벗어남이 없다. 달리 말해서 모든 만물은 시온을 향하여, 시온을 쳐다보면서 생존하게 된다. 시온의 계신 이의 영광과 무관한 만물은 없다. 모든 만물은 시온을 중심으로 해서 찬양의 함성을 뿜는다.

“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양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9:11)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노라”((14:7)

“온전한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50:2)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51:18)

“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요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76:2)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84:5)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87:2)

“시온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리로다”(87:5)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광대하시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시는도다”(99:2)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시며 그 티끌도 연휼히 여기나이다”(102:14)

“대저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102:16)

“여호와의 이름을 그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케 하려 하심이라”(102:21)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110: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128:5)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는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129:5)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132:13)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깨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134:3)

“예루살렘에 거하신 여호와는 시온에서 찬송을 받을지어다 할렐루야”(135:21)

“시온아, 여호와 네 하나님은 영원히 대대에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146:10)



Ⅲ. 결 론


하나님은 파괴와 심판을 멈추지 아니하신다. 구원은 이런 일이 벌어지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시28:5)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127:1)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왜 허사인가? 

하나님의 관심사는 인간의 생존이 아니라 義(의)의 발생이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 사회 내에서 전쟁하시는 것이다. 누구든지 이 의의 편에 서지 아니하면 생존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인간들의 관심은 이 의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명 유지에 몰려 있다. 이 생명 유지를 위해 인간들은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즉 스스로 자립하기 위한 힘이다. 인간에게 있어 의란, 항상 자신의 존재성과 유일성을 최우선 전제로 하여 구축된 의이다. 즉 의란, 이유 없이 자기 자신만큼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악마의 통치 안에 놓여 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 난 자식들이기 죄는 운명과 더불어 시작된다. (시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러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율법 앞에서의 인간의 현실은 다음과 같다. (시51: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출생될 때부터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못한다. 하나님이 제시한 의를 이루어 낼 능력이 전무하다. 인간에게 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율법이 개입되고부터 그 동안 배후에서 인간세계를 장악하고 있던 악이 본격적으로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시89:50) 주는 주의 종들의 받은 훼방을 기억하소서 유력한 모든 민족의 훼방이 내 품에 있사오니(시89:51) 여호와여 이 훼방은 주의 원수가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훼방한 것이로소이다

하나님의 모든 율례와 법도와 규례가, 다윗 언약 안으로 집결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 본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의 이름으로 전쟁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하신다. 악마와 대결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에게는 의가 없고 악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임을 전쟁을 통해서 밝히려는 것이다. 

(4:1)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5:8)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7:17)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24:5)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31:1)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35:28)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36:6)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

(36:10)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40:10)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51:14)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69:27)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71:2)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71:16)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71:24)내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말씀하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가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71:19)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71:2)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85;11)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

(85:13)의가 주의 앞에 앞서 행하며 주의 종적으로 길을 삼으리로다

(88:12)흑암 중에서 주의 기사와,잊음의 땅에서 주의 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89:16)종일 주의 이름으로 기뻐하며 주의 의로 인하여 높아지오니

(132:9)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