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십자가 마을 겨울 수련회 10강 2008-01-20 19:53:20 이름 : 최형중
08겨울 수련회 시편 강의 10 080105j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시편 90편 봅시다. 시편 90편 3절에 보면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써먹을 때로 다 써먹었다는 이 말이거든요. 인간의 주체, 절대적 주체는 하나님 앞에서 안 통합니다. 나도 인간이니 이런 것은 통하지 않아요. 써먹을 때로 다 써 먹으면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그 다음에 5절에 보시면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그다음에 “우리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을 써먹으시고 폐기처분 시키시는 이유가 시편 110편을 봅시다. 시편 110편을 보면... 시편 110편을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다음에, 앞에 누구와 상대를 하시는가하면, 내 주에게, 주님에게, 그러면 여호와는 뭐고? 주님은 뭐에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갑자기 겹쳐있던 여호와가 ‘짠’ 하고 숨어 있는 주님이 새롭게 등장해 버립니다.
이 주님은 우리가 강의 처음 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고, 그 다음에 뭘 하십니까? 전쟁을 하고, 그 다음에 승리하게 될 때, 그 다음에 이게 중요해요. 숨어 있는 천국입니다. 시온인데, 숨어 있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상상하는 그런 천국은 물 건너갔어요. 인간들이 상상하는 천국은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나 이만큼 했다. 인간이 주인공이 되는 천국은 인간의 상상의 결실이지, 실제로 숨어있는 하나님 나타나서 비로소 공개하고 알려주고 소개하는 그 천국, 시온, 언약의 나라, 시온, 하늘에 있는 시온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예요.
분열된 주체를 봉합하기 위해서 절대적인 것에 기대는 것밖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유, 자유를 뚝 쳐서 던지고, 자유를 던지고, 목적을 던지고, 자기 (?)을 던져서 상상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세계는 숨어있는 점선으로 숨어있는 천국입니다. 숨어있는 천국은 누가 어떤 일을 할 때 그 결실로써 비로소 우리 앞에 알려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앞에서 할 일들이 있어요.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어요. 그 전까지는 천국이 소개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는 사람이, 신약 성경을 보는 사람이, 신학자들이, 저도 총신을 다녔습니다만, 총신 교수들이 뭘 모르냐 하면, 특히 신약을 가르치는 구약 말고, 신약을 가르치는 성경 신학 교수들이 뭘 모르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몰라요.
그래서 마태복음에 세례 요한이 외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했을 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구약을 나오는 뭡니까? 답변을 못합니다. 답변을 못해요.
예수님이 와서, 다윗의 후손이 와서 비로소 어떤 일을 진행하고 그것이 완료될 때 생기는 것이 천국이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오실, 자기 앞에 있는 예수님을 보고, 비로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종교성은 이미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간에 내가 죽어서 좋은데 가는 그런 세계를 이미 자기 나름대로 상상해가지고 그것을 이미 그려내고 있어요. 그건 말도 안 되는 헛 겁니다. 그 천국은 티끌과 함께 없어질 상상의 세계입니다. 유토피아의 상상의 세계, 허구의 세계, 허상의 세계입니다.
시편 110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주에게, 겹쳐져 있던 하나님이 여호와 한 분인지 알았는데, 드디어 그 여호와 이름은 점점 더 실제 인물로, 어르신(?)으로, 여호와라 이름하신 어떤 인격체가 장차 나타난다는 것을 등장, 소개하고 있고, 그 인격체가 하실 분은 뭐냐, 하나님의 원수를, 원수의 발등상, 여기에 보면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원수의 전쟁에서 완료될 때까지 주께서 이 땅에 와서 뭔가 실제적으로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작업을 하시죠. 그러면 여기서 뭔가 하면, 우리는 평소에, 우리가 죽으면 천국에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이 천국이라는 것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이다.
그 이유가 뭐냐, 왜 천국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냐, 애초부터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입장입니다. 에덴 동산에 못 간다는 말입니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미 추방된 입장입니다. 추방된 입장이기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자꾸 그리워하는데, 그리워하는 것이 뭐냐, 누구를 주인공 삼아서, 모델로 삼아서, 자기 자신의 결핍을 모델로 삼아서 자꾸 좋은 나라, 천국, 여호와, 성경에 나오는 하늘 나라, 여호와를 따서 내용은 자기가, 자기 욕망으로 다 채우고, 실제로는 자기 주체를 더 확고히 하는 그런 세계를 종교,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그런 것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이 말이죠.
그것은 하나님도 엉터리 하나님이고, 천국도 엉터리 하나님입니다. 제가 어제 이야기했습니다. 뭔가 일이, 뭔가 우리 곁에,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소근 소근하는 소리가 가까이 들려야 해요. ‘나는 모든 일이 잘 되는데, 나는 내 생각만 하고 살고 싶은데,’ 뭔가 저쪽에서 소리가 들리더란 말이에요. ‘어찌하여,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저 양반이 왜 저러지. 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데, 저 양반은 왜 저러지.’ 이것은 내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그 신은 내가 만들어낸 가짜 신이고, 이것은 백이면 백이 다 다른 천국이다 이 말이죠.
진짜 하나님은 실제로 오셔서 버림받는, 십자가라는 모습으로 유일한 그 접촉점으로 우리에게 비로소 알려주는 그 하나님이, 십자가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약대로 주가 되는 겁니다. 이 주는 바로 다윗의 자손, 다윗의 후손, 다윗의 자손이 전쟁을 해서 승리하게 되면 그 때 다윗의 자손에 의해서 전부다 초청 받는 사람들이 이 시온 성에 주님 따라서, 왕이 문들아 열릴찌어다. 열리는 왕 따라, 열려서. 진짜 하나님이 우리가 들어가지도 못할 불가능한 세계에 예수님이 앞장서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에는 어린양의 피로 하얗게 씻음 받은 사람이 종려나무를 들고 그 천국에 다 모이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렇게 볼 때, 다시 한 번 여러분들이 안쓰러워서 다시 한 번 당부를 합니다. 이번 시편 강해하고 뭔데? 뭐 들었는데?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때, 우리는 뭐라고 간단하게 대답해야 합니까? 시편의 중심이 뭐였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 언약을 이야기하시고, 그것을 성실히 내 쪽에서 하나님 쪽에서 이행하신다는 그런 이야기가 시편의 전체 이야기이고, 나중에 보게 되지만, 나중에 그것을 통해서 성실하심을 믿게 된 사람들이 새 하늘과 새로운 노래로 할렐루야 노래하는 대목으로, 뒷부분이 거의 다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혹시 외국에 갔다온 사람들이 주는 선물을 가져오는데, 뮤직 박스라는 것을 압니까? 상자인데, 딱 열면, ‘띵똥띵띵 띵띵띵띠딩띵 띵띵띠...’ 이런거 나오다가 딱 덮어버리면 아무 소리 안 나잖아요. 학생 그 뮤직 박스 본 적 있어요.
제가 왜 이 뮤직 박스를 이야기하냐면, 아무리 성경이 수련회 하고 해도, 성경이 뮤직 박스 같아가지고, 덮어버리면, ‘나 그런거 들은 적 없다.’ 이렇게 됩니다. 알라딘의 램프를 문지르면 거기서 최홍만이 같은 거대한 거인이 나와서 ‘마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렇게 나옵니다. 굉장이 무섭지요. 등치도 크고. 하지만 아무리 등치가 크고 무서워도, 그 알라딘의 램프, 호롱 안에 들어있는 거인 아닙니까?
그 호롱 바깥에 세계는 우리가 호롱 안에 거인을 불러 낼까 말까 하는 우리의 절대권 안에 포함되죠. 성경은 뮤직 박스와 같아서, 아무리 성경에서 온갖 소리를 해도 일단 덮고 안 보겠다하면, 이 세계는 뭐냐, 내가 절대화되는 세계입니다. 내가 절대화되는 세계.
예수 믿는 가정에서 자식들 신앙 주겠다고 부지런히 교육하고, 교육해봤자 그 절대성이 그 주체의 절대성이 남아있는 한, 언젠가는 뮤직 박스처럼 처리해가지고, ‘옛날에 엄마는 성경을 부지런히 읽었다만은 나는 이 성경 안 볼란다.’ 이렇게 되버립니다.
이것만 덮으면 여전히 나는 나의 절대 심리가 그 자리에서 실제하고 상주하고 있어요. 여러분들 2층에서 다윗 언약을 공부하지만, 아래층에만 내려가 보세요. 서한 건설 지금도 담배 피고 있지요. 밥 먹을 때 옆에, 가창력 뒤떨어지는 아마츄어 가수가 'Falling in Love' 부르고 있지요. 카운터에는 피곤에 젖은 직원이 기계적으로 인사하고 있지요.
그런데 왠지 그 세계가 정겹고 좋지 않습니까? 왜 좋으냐? 그 담배 피는 건설사 직원이나 아마츄어 여자 가수나, 그 직원들은 무슨 짓을 해도 절대적인 나를 안 건들잖아요. 절대적인, 가야산이 나를 건드립니까? 눈 덮힌 가야산이 나를 안 건들잖아요. 누구든지 내가 절대적으로 나의 영역이, 절대적으로 내가 안 건들리고 내가 그냥 좋은 거에요. 신이라고 할찌라도, 내가 사랑하는 것을 건드리면 신이라도 용서하지 않아요. 우리는.
내가 절대적인 주체, 세상의 모든 것을 끄집어 내어서 내가 이렇게 절대적이라 하는 것을 증명하고 확인하는 그런 것만으로 연속해서 평생을 살아도 우리는 기쁘기 한량 없어요. 그래서 세상의 어떤 것도 나를 감히 안 건들리는데,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습니다. 산다는 것이 참 힘들죠. 그래서 이번에도 참석 못한 사람들, 힘들어서 고된 사람들 많아요.
그래도 고되고 힘들지만 견딜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도 살아가는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뭔가 하면, 그렇게 힘들지만, 어느 누구 하나 나의 절대성 만큼은 건들리지 않더라 말입니다. 나의 절대성만큼은.
만약에 나를 붕괴시킨다면, 천국도 우리는 안 갈라고 하고, 만약에 내가 생생히 살아있다면 지옥도 마다 하지 않고 들어갈 인간들입니다. 우리가. 우리가 에덴에서 쫓겨나고 난 다음 생겨난 습관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10년 다닌다. 목사가 되었다. 백날 해 보세요. 이 성경을 백날 외워 보세요. 그것은 무엇을 더 구축하기,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함입니까? ‘난 역시 나는 절대자야.’ 라는 것을 구축하기 위해서 이 성경을 총체적으로 다 동원됩니다.
개혁주의 신학이든, 뭐든, 복음이든, 십자가든, 전부다 나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오는 이유가 뭐냐? 성경을 통해서 역시 ‘나는 내가 사랑할만하다. 역시 나는 절대자가 맞아. 내가 교회 와서 확인했어.’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 얼마나 멋진 나의 절대자 아닙니까?
신의 세상의 모든 변화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절대자 되는 겁니까? 나를 안 건들잖아요.
그래서 내가 절대자가 되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면, ‘너는 죄인이야.’ 하면 ‘맞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얼마든지 할 용의가 되어 있죠. 십자가 피로 구원 받는다하면 ‘예, 십자가 피로 구원받습니다.’라고 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은 나를 다지고 다지고, 또 다지고 우리의 내부에는 과거가 층층이 쌓여있습니다. 층층이 과거의 내가 교육받은 것, 가정교육 받았던 것, 부모에게... 층층이 쌓여 있어서 법적으로 나를, 지금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법적으로 보장해주는, 이것을 법적인 세계를 상징이라 합니다. 상징.
모든 것의 사실은, 상징의 리꼬르는 무엇으로 보는냐, 현실이죠. 현실. 상징, 그 현실이라는 것은 이것은 세상에 나로 하여금 내가 절대자인 것을 증명해 주는 현실만 우리는 취사선택해서 현실이라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말 했습니다. 끝말이 좋다니까. 중요한 것은 다 나와요.
현실이라는 것은 무엇인가하면, ‘나는 절대자 맞다. 나는 신이다. 나는 절대적인 전능한 신은 아니지만 소박하나마 나는 내 안에서 나는 절대자다. 나는 내가 좋아서 미치겠다. 신이든 예수든 이것은 건들리지 마라. 이것을 건드리면 신이고 예수고 나는 안 믿는다.’ 라는 것을 정리해 주는 데 필요한 자료들을 모았을 때를 현실이라고 하는데 학자들은 그것을 바로 그것이 상징계다. 왜냐하면 이것은 새로 기쁨의 요소가 왔을 때 그것이 업그레이드 될 때, 변화될 때, 또 다른 현실로 이사하기 때문에, 또 다른 현실을 갖추어 이사하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의 입에서 아무 맛이 안 납니다. ‘이것은 아무리 봐도 성도가 아니다.’ 그런데 이것은 뮤직 박스 같은 이 성경을 딱 펼치게 되면, 나는 뭔가 하면, ‘너는 티끌로 돌아가라’하며 엉뚱하게 밖으로 차 버려요. 하나님의 모든 현실은, 네가 하는 그것은 다 가상이다. 네가 만들어낸 것이고, 하나님은 너하고 상대하지 않고, 하나님은 네 주 여호와께서 네 주에게 하는 그 약속대로 네가 모르는 너를 지배했던 악마의 세력을 원수로 삼으시고, 그것과 전쟁하셔서, 승리하셔서 네가 상상도 못할, 네가 상상도 못할 낯설기 짝이 없는 그러한 예수님의 아들의 나라에 그것을 천국이라고 하는 들어가는 그 새로운 것이 이 뮤직 박스 속에 펼쳐집니다. 어떻게 합니까?
왜냐하면 나를 죄인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죄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진짜 죄인으로, 실제로 다루기 때문에. 그래서 뮤직 박스 안에 있는 성경 안에 있는 현실을 우리는 나의 절대성을 건든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현실로 취급을 안 합니다.
성경에서 아무리 그런 소리를 해도 내가 성경을 덮고 알라딘의 램프처럼 내가 그것을 안 불러내면 나는 성경 안에 있는 여호와보다 누가 더 세니까? 여호와를 불러내지 않는 내가 여호와보다 더 새 신이죠. 궁극적인 승리자. 내가 승리자죠.
이미 태생이, 타고난 태생이 나만 챙기는 그 죄가 이미 아담으로부터 물러 받기 때문에 우리는 자진해서 성경을 펼치고 역시 주님은 나의 주님입니다. 라고 외칠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이런 사람이 있죠. 내가 절대자인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노자, 맹자, 불경도 보지만, 성경도 봐서 역시 나는 .....
그것을 재삼 확인하는 차원에서 성경을 보지만 진짜 성경에서 이야기한, 진짜 성경에서 이야기 한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다 우상이며, 내가 생각한 천국도 가짜고, 하나님은 나와 상대도 안하시고, 우리는 저주 받아야 마땅하고, 우리는 뭘 해도 저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말고 다른 사람과 거래하고, 계약했다는. 우리를 완전이 도외시 했다는
그 이야기가 정말 기쁨으로 오고, 다가온다는 말이죠. 이것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죠. 그렇게 되는 몫은 누구냐 하면, 주님의 몫이고 성령의 몫이지.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든 교회를 다니던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든지 간에 자기 자신의 절대성을 포기 못하겠다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영어로 써야 해요. 영어로, BYE 뭡니까? 바이 바이, 우리는 예수와 바이 바이 합니다. 예수와 바이 바이해요 . 절망적입니다. 드디어 예수와 관계를 끊어 버립니다. 목사도 마찬가지고,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것을 포기해도 나의 절대성만큼은 포기 못하겠다. 내가 십자가의 복음 알아서 갈수록 내가 죄인이며 무용지물인 것을 안다면,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나의 절대성이 해체되어 버리니까, 해체된다는 것은 내 본성이 거스리는 것이잖아요. 내가 타고난 본성과 속성과 어긋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어긋나는 뮤직 박스는 덮어버리고, 성경은 덮어버리고 바이 바이를 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나를, 나의 절대성을 확인해 줄 수 있는 그 쪽 세상으로, 이제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이 없는 세상,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을 안 봐도 되는 세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그곳으로 가버립니다.
절망이죠. 여러분 절망입니까? 2008년 1월 초에 가야산에서 시편에 대해서 봤다. 그런데 강사 목사님이 말하기를 그것도 뮤직 박스더라. 내가 안 펼치면 그만이더라. 하는 거죠. 여전히 나의 그 바깥은, 절대성은 살아있으니까 이것은 안 들은 걸로 여기면 그만이더라.
그런데 그 시점이 뭐냐, 호세아서를 보면, 호세아의 부인이, 선지자들 남편과 부담이 돼서, 부담이 돼서 살게 되어서 자기 자신을 알아주는 세상으로 바람피우러 갑니다. 신나게 바람피우죠. 개인적으로 봐서는 바이 바이입니다. 바이 바이이고 절망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구원의 계시 지점입니다.
왜, 이제는 자기 쪽에서, 나의 절대성을 포기 못하고, 신이든, 예수든, 성경이든 나의 나 자체의 절대성을 건드리려 하거든 나를 찾아오지 마라. 라고 (?)를 선언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버린 그 나간 자에게 누군가 호세아가 다시 찾아간다면 그 때부터 그 사람의 찾아감부터 해서 구원 될 때 까지 모든 공로는 바로 누구의 공로로 남겠습니까?
오직 주님의 공로로 남으니. 이것보다 더 확실한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하나님의 언약이 질서가 드러난 답은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답은 없어요. 왜냐하면 확실하게 바이 바이 했으니까. 나의 절대성을 아무리 어릴 때부터 가정교육 받고, 세례 받고, 유아 세례 받고 무슨 짓을 해도, 이것은 결국은 뮤직 박스에 지나지 않고, 내가 덮으면 그만이고.
심지어 성경을 보고 교회를 다녀도 ‘내가 이렇게 위대하다. 나는 이렇게 절대성이다.’ 고 확인하는 차원에서 해석한 인간들에게 그것을 거부하고, ‘주여, 저 같은 인간 버려도 마땅합니다.’라는 식으로 돌이켜서 구원되기 까지 모두 일어났다면, 그 모든 공로는 절대로 나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보다 더 확실한 예수님의 은혜성을 드러낼 방법은 없겠지요. 바로 하나님께서 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뮤직 박스는 덮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바이 바이입니다. 그리고 외쳐야 합니다. ‘예수여 아무리 그런 소리해도, 사랑이 어때, 십자가 소리 해도, 나 자체를, 내가 원하는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써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아들로써 행세께나 할 수 있는 돈이나 주고 권력이나 주고, 내가 원하는 거, 내가 가지고 싶은 것 다 들어주면, 그 때서 내가 뮤직 박스를 펼칠께.
그런 것은 안 주고, 뭐 원수가 어떻고저쩌고 언약이 어떻고, 하나님께서 붙이시고 승리하시고, 인간의 재물이 늘어나도 거기에 마음두지 말고, 엉뚱한 소리해요. 엉뚱한 소리. 우리 살아가는 것은 티끌로 돌아가고, 살아도 고생과 슬픔뿐이요. 그런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나의 관심사는 교회 문 열 때 관심사는 지금 있는 나보다 더 위대한 ‘나’가 되는 겁니다.
위대한 나가 뭡니까? 남들 보기에 깜짝 놀랄만한 복을 받아서 돈을 번다든지, 애가 공부를 잘 한다든지, 사업이 잘 된다든지, 만사가 편하든지, 모든 시집 식구들이 나를 사랑해준다든지, 뭔가 마이더스의 손처럼 내가 손만 대면 안 되는 것이 없고, 어디가든 인정 받고, 당신은 쓸모있는 인간이지 쓸모없는 인간이 아닙니다라는 쓸모있다고 인정 받는 것. 그런 것을 줄 때 우리는 비로소 누이좋고 매부좋다는 식으로 (?) 그런 것을 원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결국 나의 절대성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고 나의 절대성을 옹호하는 신이기를 원하는 것이예요. 그러니 이 결론부분에 와서, 결론부분을 봅시다.
결론, 하나님은 파괴와 심판을 멈추지 아니한다. 다시 한 번 이야기 합니다.내가 예수 믿으면 믿는 만큼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양이 예수 믿고 잘 되었네, 너의 절대성은 정말 고귀한 절대성이고 하나님이 너를 참 고귀하게 쓰신다는 어떤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증거물들을 제공하기를 원하는 거예요.
여기 시편 28편 5절에 보면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이것은 완전히 여호와의 독재아닙니까? 깡패같은 여호와, 여호와 독재거든요. 지난 번에 봤지요. 뭡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를 무엇을 퍼 부소서. 주의 진노를 퍼부소서. 그것을 우리보고 믿으래.
내가, 쉽게 말해서 내가 내 욕망이 요구 하는 것을 성경을 펼치면 안 주더라 이 말이죠. 내가 요구하는 것, 원하는 것. 그런데, 내가 왜 그것을 원합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더욱 더 내가 신처럼 절대자가 되는데 필요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거예요. 그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역시 나는 나만 사랑하고 싶은 것이 합당해 하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거예요. 철학이고, 심리고, 신학이고, 깊은 것 할 것 없어요. 어린애들 보세요.
‘니는 누가 좋아?’라고 물으면 ‘나는 내가 좋아.’ 간단하죠. 이 긴 10시간 강의를 아무리 해도, 나 혼자만 ???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나는 내가 제일 좋아.’ 그거요, 백날 신학 해 봐야 하나의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덮어씌우죠. 덮어 씌우지만 안에는 깨어지지 않죠.
하나님께서 네가 죄인이며, 십자가 피 믿으며 너를 천국 보내준데. 까짓것 내가 잘 되는데 무슨 짓을 못해 이렇게 되거든요. 내가 잘 되는데 무슨 짓을 못해 다 한다 이 말이죠. 내가 죄인이다 이야기 해주고 예수 피 믿어 주는데, 그런데 그 안에 누가 살아있습니까? 자기가 주인공이죠. 자기가 주인공으로 천당 가는데, 천당 가서 데모할 사람이예요. 천당가서.
이번 강의 중에 상당히 중요한 것이 있는데, 나는 죄인입니다 할 때 이 죄인이라는 것은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옆에 붙는 거예요. 내가 죄인 되면 하나님께 나를 잘 되게 해 주실 것이다. 이런 속성은 누구와 연관 되서, 나와 연관된 죄인은 이것은 진짜 성경에서 이야기한 죄가 아닙니다.
이 죄는 어디서 나와야 하는가하면, 예수님의 속성에서 나와야 되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했을 때에요. 이것은 나를 위한 나의 죄인됨이 아니라 주님께서 죄라고 진리로 선포하니까 나는 이유 없이 죄인이고, 이유 없이 저주 받아도 합당합니다. 주님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죄인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 사람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이게 다 성경에 나와요. 없는 소리 하는 줄 아는데, 나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대신 죽었다가 사신 그 분을 위해 살게 하신다고 나오는 거예요.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죄인이다. 나는 구원받는다. 다른 말로 하면 나도 주의 종이다. 이게 무슨 말 이예요. 나도 주의 종이다. 너만 주의 종이냐, 나도 주의 종이다.
당신은 당신이 절대자네. 그 소리밖에, 당신은 당신이 절대자네. 절대자 정의해 보세요. 내가 절대자이지. 나는 죄인 되어서 구원받은 내가 절대자이지. 날 무시하지 마라. 이렇게 나오거든요.
우리가 다같이 모였을 때 우리를 무시하지 않는 분은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분을 우리가 존경할 때 자동적으로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는 스스로 무시당해도 서로 무시하고 무시당해도 우리는 단서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주님만 존대하기로 모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너만 주의 종이냐, 나도 주의 종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붙고 한바탕 하자는 말입니까? 그것도 모자라 공동체 운동하고 말입니다. 주체가 깨지질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스승이 필요 없습니다. 스승 해봐야 장식품입니다. 교육해봐야 필요 없어요. 교육이 아닙니다. 진짜 필요한 것은 대속자입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분이 필요하지 십자가의 스승은 필요없어요
스승이라는 것은 자기를 더 키우겠다는 그런 노림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정도 하면, 더 배울 것이 없네. 그러면 깨지는 거죠. 더 배울 것이 없으면 깨지는 거죠. 배워서 어디 써 먹을 겁니까? 왜 배웁니까? 십자가(?) 강도가 얼마나 배웠습니까? 하버드 대학을 나왔습니까?
"입에 씹어보니까 한우네! 아거 완전히 한우네!"
"주님! 살인 강도인데, 살인 강도를 어떻게 천국에 보내 줍니까? "
"누가 뭐라고 해도 이게 내 입에서 예수쟁이 맞는데?
남들 보기에는 살인강도고 교도소 열번 다녀왔더라도 내 입에는
주체가 완전히 깨어졌는데?"
그것도 설명해야 하는데, 인간의 미래라는 것이 무엇인가하면, 과거에 썼던 것을 그것을 근거로 해서 미리 앞을 보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에서 강도가 두 사람 있잖아요. 한 사람은 과거에 의해서 미래를 내다 본 사람 이예요. 한 쪽 강도만 천국이라는 것은 자기가 생각했던 연장선에서 천국을 이야기하는데, 지금 자기도 죽는 입장이니까 자기도 죽는 입장인데 어떻게 우리를 구원합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과거의 상식입장에서 말이 안 되는데, 이것은 옆에 구원 받은 강도는 진짜 씹으면 한우 맛이 나는 이 강도는 도대체 이것은 인간인지 사람인지, 신인지 어떻게 이것을 극복하느냐 이 말이죠.
누가 신기합니까? ‘당신은 구원 못해줘’ 하는 사람이 신기한 것이 아니라 분명 물이 빠져 같이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오늘 밤에 당신이 저를 기억하소서.’ ‘네가 오늘 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만남이 오히려 더 낯선 만남이고 초월적인 만남입니다.
이것은 완전 과거 법칙을 깨져버렸어요. 생각도 안 한 거예요. 다만 뭐만 생각하느냐, 구원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당신의 말씀은 이유 없이 약속대로 성취되는 겁니다. 이 말입니다. 이유 없이. 나에게 품위, 성도다운 품위 그런 것은 필요 없고.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 당신 할 것만 하면 그것으로 우리는 구원됩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 당신 할 것만 하면. 그러니까 제발 저를 무시해도 좋은데, 무시당해야 마땅한데, 그래도 저는 주님을 존경합니다.
항상 성령의 역사는 끝에 뭐가 나타나는냐, 안절부절이나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감사가 나타납니다. 그 감사가 시편 끝에 찬양이,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것으로 나와요. 앞으로 결심해야지. 이게 안 나와요. 앞으로 열심 해야지. 앞으로 행동 조심해야지, 이런 거 없어요. 이건 가짜입니다. 아직도 자기 주체가 안 깨진 거예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해서 강의 다시.^^ 10시 인줄 알고.. 다시 해도 괜찮죠.
시편 110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갑자기 다윗의 후손이라고 약속을 했는데, 다윗의 후손의 실제가 드러나지 않았는데 시편 110편에 보니까 그 다윗의 후손이 사람이 아니고 누구입니까? 인간은 티끌 아닙니까? 인간 티끌로 배제해 버리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람이 아니고 그 자리에 누가 와요? ‘주께서 주에게,’ 그러니까 둘이 다 해 먹는 거예요. 둘이.
성부 성자가 다 해 먹는 거예요. 우리는 티끌로 돌아가고, 우리는 그냥 속성만 받고 돌아가고 주님이 다 하셨는데, 주께서 무엇을 한다? 원수와 싸워서 승리케 해요. 그래서 이것은 내가 평소에 원한 그런 구조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 원수는 그동안 인간을 지배했던 원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몰랐죠. 우리는 인간들만 있는 줄 알지, 인간 밖에 악령이, 악한 세상이 있는지 몰랐죠. 신약에 와서 알지만 우리는 모르죠.
그분께서 와서 승리했을 때 우리가 예상 못한 바로 문들아 열릴찌어다. 왕이 승리해야 들어갈 세계에 약속대로 넣어 줍니다. 그런데 인간이 아무리 그런 소리를 듣더라도, 십자가 앞에서 정말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위대함에 약간이라도 관심이 있는 것 같으면 이 성경 백 날 들어도 나의 절대성을 공격한다는 이유 때문에 이것을 마치 알라딘의 램프처럼, 뮤직 박스처럼 덮어버리면 그만이다 말이죠.
‘띵똥 띵똥 띵똥띵’해도 덮어버리면 그만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도 박스 안에 갇혀있죠. 봉쇄되어 있죠. 누가 봉쇄합니까? 내가 봉쇄하죠. 그러니까 나는 누가 더 셉니까? 이 성경 안에 있는 여호와보다 누가 더 세요. 내가 더 세요. 그럴 때 우리는 기분이 썩 좋습니다. 나는 예수도 안 믿는데, 아, 기분 좋다. 나는 하나님도 안 믿는데, 아주 기분 좋아. 여전히 하나님보다 내가 더 위에 있어요. 왜냐하면 이것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성이 그래요.
하나님을 아무리 사랑해도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납니다. 그리고 누구한테 복무하고 누구한테 봉사하느냐? 인간이 결국 자기에게 복무하고 자기에게 봉사합니다. 모든 행위는 모든 신앙이든 행위는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하는 겁니다. 이거 지옥갑니다. 이거 지옥갑니다.
아직도, 아직도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버리시나이까 라는 소리가 안 들려와서 그래요.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씀에 관심이 없고나는 두 개가 매치가 안 돼요. ‘목사님, 저는 죄인 맞거든요. 말씀에 관심이 없거든요.’ 그게 두 개가 매치가 안 돼요. 아하, 바리새인일 수가 있구나. 나는 죄인이라는 것을 근거로 나를 천국에 올려 보내려는 하나의 수작으로 볼 수 있겠구나.
나는 언약 믿고 십자가 믿고 죄인인거 아니까 나는 주의 종 맞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하나의 수작이예요. 아무 맛이 안 나요. 입에서.
현재, 다시 해 봅시다. 주체가 있으면, 과거가 들어와서 층층이 쌓입니다. 과거가 지금 현재를 만들어요. 만들어진 현재를 가지고 이렇게 훌륭하게 천국 갈 준비를 다 했다. 미래의 천국은 따 논 당상이다. 라고 여기는 것은 천국 못 간 강도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죠. 주체가 안깨져서.
이 사람은 뭐냐 자기가 예수 믿던 신앙 업적들을 믿죠. 그런데 이 구원받은 강도는 누구를 믿습니까? 자기는 생각도 안 해요. 주의 말씀대로 될 찌어다 종이 믿겠나이다. 주의 말씀대로 됩니다. 저는 상관하지 말고 주의 말씀대로 하세요. 저는 세상이 좋아서 나만 챙기고 저 세상으로 나간 것인데, 이런 탕자같은 나에게 다가오신 분은 내가 다가간 것이 아니라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음성을 던지면서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비로소 나 같은 인간이 하나님께 버림받아도 마땅함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그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가 구원됨을 저는 믿습니다. 왜? 그것을 알고 했다는 자체가 선택받았다는 증거로 인정하니까. 약속대로이니까.
그래서 결론 부분에 나오는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라는 시편 28편 5절에 대해서 대 고민을 하고 찬동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주체를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을 봐야 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인자가 올 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갈 때 인자가 도적같이 온다 했단 말이죠. 그러면 28년 동안 키운 딸 애를 결혼식장에서 그 혼주는 뭘 생각해야 합니까? 그 식장에 입장한 아빠 손을 잡고 입장했던 면사포를 덮어쓰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 신부는 그 주례사 들으면서 뭘 생각해야 되요? 주여 오서 오시옵소서. 이 결혼 파토나도 저는 상관치 않겠습니다. 이렇게 되야 해요.
그런데 그 순간 뭐라합니까? 결혼식하고 빨리 괌에 가야되는데, 비행기 시간 다 되었다. 주례사 빨리 끝내주세요. 빨리. 괌에 가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나거든요. 그러면 자기는 미래를 생각하죠. 예상하죠. 괌에 가서 ‘날 잡아봐라’ 뛰는 그런 새로운 주체를 괌의 입장에서 예상해야 합니다. 주체가 안 죽었죠. 그런데 그 괌 갈 때 주께서 재림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방법은 뭐냐? 뮤직 박스를 덮어 버립니다. 세상의 어느 신부가 결혼식장에 설교 들으러 갑니까? 없습니다. 항상 주체가 우선이고, 뮤직 박스는 나중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뮤직 박스가 어떤 것이 남아 있는지 봅시다. 덮을 것은 알지만. 어떤 거인께서, 뮤직 박스의 거인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편 90편 17절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주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그러니까 항상 주인공은 누구냐, 자기가 아니고,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그런 삶을 보여주죠. 그렇게 되면 자기 주체를 이미 포기한 상태입니다.
그 다음에 시편 91편 14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시편 94편 9절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항상 뭡니까? 세상 주인공은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야.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말도 안 돼. 나를 사랑하는 분은 따로 있어. 나는 그분에게 무시 당해도 상관없어. 그 분이 세상의 주인공이야. 항상 그것을 생각해야 돼요.
11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을 뭐라고 한다? 말씀해 보세요. 사람의 생각은? 허무하다. 그런데 허무하다 해놓고, 반드시 은혜 받은 사람은 뭐가 나온다고 했어요? 허무하구나, 찡그리는 것이 아니라 뭐가 나온다 했어요? 뭐가 나옵니까? 감사에요. 허무하구나, 허무하구나 감사하네. 완전 미친 놈이죠. 허무한거 알면서 감사합니까? 앞으로 허무하지 않고 열심히 해야지. 이것은 말도 안 돼요.
모든 말씀은 감사로 나와야 해요. 어떤 감사? 나에게 대해서는 신경 뚝! (???) 이 현실의 이 새로운 현실을 알게 하신 것을, 믿게 하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거예요.
95편 7절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 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또 주님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계시는 것이예요. 진드기에요.
96편 12절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할찌로다 그리할 때에 삼림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즐겁잖아요. 감사 아닙니까? 이렇게 해야 정상이에요. 신앙 생활 정상이에요. 이렇게 모든 것이 즐겁다는 것이죠.
시편 102편 16절 “대저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19절 “여호와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 세상이 움직이는 것을 위에서 다 하게 되어 있으니까 우리가 너무 자기에 대해서 신경 안 쓰시기 바랍니다.
103편 15-16절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러분들이 어릴 때 놀았던 그 곳에 가 보세요.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허무 합니다. 한 (???) 아무것도 없어요. 그 때 잘했던 과거, 아름다웠던 추억. 그 때 그리웠던 친구 다 없어요. 그 때 늘 갔던 문방구의 주인 할머니는 벌써 파파 할머니가 되어가지고 거동을 못하시고, 자기가 있던, 자기가 상상하던 그 세계와 너무나 변해있으니까 허탈감을 느끼죠.
시편 103편 5절에 보면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새로운 힘이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이게 나중에 나오면 새노래로 부르는데요.
시편 107편 12절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백날 수고하고 애써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사람들은 엄청난 현실을 도외시했다는 이유 때문에, 뮤직 박스를 닫았다는 이유 때문에, 이 안에 진정한 현실이 있는데, 이것을 닫았다는 이유 때문에 백 날 해 봤자 돕는 자가 없다는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 시편 108편에 보면, 여기에 8-9절에 보면,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질지며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 하셨도다” 세상만사는 약속대로 이루시는 여호와의 손에 다 달려 있습니다.
시편 109편 3-4절에 보면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무고히 나를 공격하였나이다 저희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하나님 알아서 해 주이소. 저놈들, 이렇게 할 뿐이죠. 자꾸 복수를 개인적으로 하지 말고, 지금 하나님이 우리 곁에 있으니까 그 분에게 다 일임해야 합니다.
시편 113편 5-9절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이것은 항상 우리 힘으로 뭔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은혜로 주시는 방식으로 은혜를 줄 때 은혜를 주시는 방식으로 세상은 운행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모르는 사정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낮추신다는 것은 빌립보서 2:5 여러분 아시죠.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지만 그 ?의 가치는 아무리 종처럼 살아도 그 속성은 변함이 없어요. 역시 하나님입니다.
시편 118편 7절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여호와께서 우리 곁에 계시니 우리 거소가 되시니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사실은 여호와께서 계획 잡히신 대로 나에게 주어집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악한 천사, 악마나 천사나 대 자연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데 총 동원되기 때문에 그들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께서 도와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의심치 말아야 됩니다.
시편 118편 19절 “내게 의의 문을 열찌어다 내가 들어 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문이 있다는 것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이죠.
시편 119편이 굉장히 긴데, 그 중에 한 가지만 봅시다. 67절 한 가지만 봅시다. 시편 119편은 굉장히 길기 때문에 하루에 두 장씩 읽는 사람들은 시편 119편을 굉장히 지겨워합니다. 너무 길어서, 언제 끝나노.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하사 뒤에 짧은 글이 나옵니다. 뜨거운 물에 들어가 본 사람은 어지간한 뜨거운 물에는 쉽게 들어갈 수 있죠.
67절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호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전부다 말씀이 이렇게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강의 다시 해야 되는데...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주의 말씀이라는 것은 항상 우리에게 뭐가 주어집니까? 항상 내가 주체이기 때문에 주체가 나이기 때문에 주의 말씀은,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은 복음 위주로 일하기 때문에 나 위주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고난 주는 것도 나 잘되라고 주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복음이 네 곁에 있단 말이야’를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단 말이죠. 하도 우리가 고집이 세니까.
역시 나 중심이 아니라 주님 중심이구나.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 보면 이렇습니다. 왕이 성전에서 승리할 때 왕이 전쟁에서 승리해서 알지 못했던 천국에 갈 때,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과는 상관없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신경 쓰지 말고, 내가 한 일이 있는데, 그 내 하는 일이 깨어지게 만들죠. 깨어져서 관심사가 내가 하는 일에 내가,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을 금지시키고 그것을 못하게 하세요. 수시로. 주의 이름이 와서. 그것을 못하게 하세요.
‘일이 왜 이리 안 되노?’ 안 될 수밖에. 전부 자기 좋아라 한 일인데. 주님 사랑하지 않고 자기 사랑해서 한 일인데. 그것을 금지시키고 주님께서 이미 안 해도 되는 일을, 우리가 안 해도 이미 이루어진 일을 공짜로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서 무엇을 발생시킨다? 두 자로. 무엇을 발생시킨다? 감사.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 감사 나오는 방식대로 하는 겁니다. 그 감사가 나와야 할렐루야 찬양이 나옵니다.
시편 119편 75절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 야~ 참. 또 감사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했는데 뭐가 나온다? 또 감사합니다. 왜? 주의 성실하심을 몰랐었는데, 이 내 일이 ??? 통해서 역시 나의 성실보다 주의 성실이 더 세시군요. 깨닫게 하는 또 감사가 또 나와요. 또 감사가.
사람은 두려움이 생깁니다. 어떤 두려움이. 내가 하는 일이 망할까봐. 망할까봐 두려워 합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조차도 감사로 바뀔려면, 내가 하는 일이 의미가 없을 때, 몽땅 없을 때, 두려움과 함께 빠져버립니다.
내가 한 일이 잘돼야 할텐데, 내가 한 일이 잘돼야 할텐데. 내가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는 거거든요. 내가 한 일이 한 자체가 완전히 의미 없이 날아가 버리며, 나머지는 전부다 은혜와 감사밖에 없죠.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성도는 수시로 할렐루야, 하나님께 감사할 일만 남았어요.
그런데 감사는 특징이 이상한게, 감사는 지겹지가 않습니다. 감사는 지겹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안 지겨워요. 어떤 사람은 주체가 안 깨진 상태에서 이런 걱정을 한 사람이 있어요. ‘천국 가면 굉장히 심심하겠다.’ 진중권 씨가 이런 이야기 했어요. 천국은 참 심심하겠다. 왜? 그것은 주체가 살아있기 때문이에요.
주체가 없어지면 그 주님의 속성의 다양성 때문에 이것만해도 감사, 저것만해도 감사, 열두 과실을 과실 먹을 때마다 감사. 먹은 과일을 또 먹어도 감사. 맨 날 감사밖에 할 줄 몰라요. 감사만 영원토록 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감사만.
나 구원받았다고 영원히 가는 곳이 아닙니다. 자기가 살아있어서 그것은 지옥입니다. 구원받았을 때 기분 좋지 그 다음에는 기분 안 좋아요. 이제 서서히 입질이 또 자기 욕심 채우려고... 그게 아니고 대상을 보고, 대상이 사랑으로 인해 감사할 때는 이것은 ??한지도 몰라요. 영원토록.
그런데 지옥에 있는 사람은, 부자는 뭐 합니까? 맨 날 누구 생각해요? 자기만 생각하니까 결핍만 생기는 거예요. 결핍만. 물 한 방울만, 손바닥에 물 한 방울만. 맨 날 결핍이 생기는 거예요. 참 ??이 존재합니다. 지옥 가지 마세요. 부탁합니다. 여러분. 지옥가지 마세요.
지옥 안 가면 어떻게 합니까? 본인을 잊어 버리세요. 본인의 무슨 짓이든 잊어버리고, 주님이 하신 짓, 짓하면 안 되지만, 하여튼 주님이 하신 짓이 현실인 것을 받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무슨 짓을 하잖아요. 예, 하셨는데, 그것은 다 십자가 앞에서 뭐로 드러났다? 죄로 드러나고. 그것을 끝까지 따라오면서 용서해 주고, 피 값으로 용서해주는, 그 호세아 같은, 선지가 같이 탕자를 용서해 주는 그 사랑에 감사...
그 다음에 시편 121편 1-2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아, 이게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산을 봐도, 너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제가 수요일에 영어 좀 썼습니다. 'Mountain is Mountain, Water is Water'
여호와를 모릅니다. 이미 여호와를 알고 보니까 여호와께서 하신 것이죠. 도움이, 도움은 산도 아니고 물도 아니고, 여호와다. 여호와께서는 신이 아닙니다. 마지막 장에 이거 놓치면 큰 일 날 뻔 했네. 여호와는 신이 아니고, 우리가 상상하는 신이 아니고, 여호와는 구체적으로 이 땅의 주님으로써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이 여호와입니다.
구체적입니다. 아, 어딘가 별처럼 신이 계시지.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상상의 세계고, 그게 아니고,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활동하신 분. 다윗을 선택하시고, 물맷돌로 골리앗을 죽인 그, 그 분. 그리고 구체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마귀조차 우리에게 봉사하는 일꾼인 것을 깨닫게 하신 그 분. 십자가의 그 피가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신 그 분. 그 분이 우리의 신이에요. 그 분이 우리를 지키십니다.
127장 봅시다. 1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그러니까 헛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하자, 이 말 하면 아닙니다. 또 그렇게 될까봐 염려돼요. 그러니까 주께서 열심히 헛되지 않기 위해 하자, 가 아니라 ‘감사합니다’ 이러면 돼요. ‘감사합니다’이러면 됩니다. 예, 역시 주님 일 잘하시는군요. ‘감사합니다’ 하면 됩니다.
시편 132편 10절에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받은 자의 얼굴을 물리치지 마옵소서” 하여튼 시편의 주제는 다윗 언약의 약속은 빈틈없이 성실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시편 137편, 보니 엠이 불렀던 유명한 노래있죠. ‘바벨론 강가에서’ 라라랄라 랄라라... 가사가 이렇게 나옵니다. 137편. 시온성. 그래서 우리는 울면서 노래 부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놀리는 거예요. 너희들 찬송가 한 번 불러봐라. 놀리니까, 울면서 찬송가를 부르는 거예요. 울면서, 군대 신고식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놀리는 거예요. 네가 들었던, 뮤직 박스에서 노래 한 번 들어봐라. 찬송가 405장 한 번 들어봐라. 어메이징 그레이스 좋데. 놀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뮤직 박스 열고, 옛날 주일 학교 때 배웠던, 나는 구원 열차 올라타고서... 울면서 부르는 거예요. 울면서, 지금은 안 믿거든요. 울면서.
시편 138편 1절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 신들과 뭐가 대립됩니까? 주님, 언약을 이루시고, 다윗 언약을 이루시고 예수님을 보내신 그 주님, 예수님 자체가 주님이니까. 차이가 나는 거죠. 신들은 우상이고, 주님은 진짜 하나님이고.
그 다음에 8절을 보면,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시편 139편 7절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그러니까 우울하다는 말입니까? 감사하다는 말입니까? ‘고맙습니다’고 말해야 되죠. ‘아~ 이제 들켰네.’ 이러지 마시고 이것은 주체가, 아직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아~ 최면 다 구겼다.’ 이러지 마시고, 감사합니다. 어디로든 피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돼야 합니다.
시편 143편 2절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왕뻔뻔’, ‘왕뻔뻔’. 한 번 보세요.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죄는 지어놓고, 심판하지 말래요. 왕뻔뻔. 그만큼 자기가 자기를 반성하는 선한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뭐만 의지한다? 다윗 언약의 약속하심, 그것만, 주님께서 하신 일만 제가 감사하나이다.
145편 8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누가 아는 속성입니까? 진짜 은혜를 받은 사람만 아는 고백이죠.
146편 2절에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이게 우리 인생의 목적입니다. 매일같이 감사하고, 매일같이 찬양하는 거예요. 자기 생각 안 하고.
5절에 보면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복이 딴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다가... 이게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가 복이 있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나 이런 사람들, 사도 바울이나 다 복이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150편 1절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성소에서, 그 성소가 어디죠? 우리 자체가 있는 그 자리가 하나님이 기거하는 자리가 되었죠.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 이제는 할렐루야 감사,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사의 찬양만 할 뿐이죠. 이게 다, 이렇게 되도록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한 대로, 이렇게 되도록, 우리에게 반드시 조치를 하는 중에 있고, 이미 성취된 조치를 하는 중에 있고, 그 결과도 이미 보장되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것을 이용해서 우리 자신이 잘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용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실제로 우리 내외에서 주께서 현실로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짐을 현실로 받아드립니다. 이러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우리에게 만들어내진 것이 아니라 창세부터 선택되었기에 이러한 속성이 우리에게 퍼져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줄로 압니다. 이 현상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그 가운데서 우리가 죄인이며 우리 힘으로 구원되지 못한 것을 알고 더욱 더 감사하는 남은 생애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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