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시27편에 관하여

아빠와 함께 2021. 11. 21. 12:08

부모로 부터 태어난 나 자체가 제거되야 되고 해체되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이 시편이라는 언약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날마다 육과 영의 경계선을 확인하는 게 신앙생활이에요. 자기부인이 안되면 육과 영의 경계선이 날아가 버려요. 오직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로 귀환돼요. 나 좋으라고 성경책 있고 하나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럼 경계선은? 네가 육이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그 전쟁은? 없지요. 나는 어떤 경우라도 잘 돼야 되기 때문에. 육이 죽어야 영이 되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뭘 아느냐? 육과 영의 경계선이 여기서 발생되는 겁니다.모든 인간들은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육이 되어서 하나님의 언약적 생산물이 아니었단 말이죠. 언약에 대해 방해물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나는 나를 조롱하지 않는 한 나는 해체되지 않아요. 해체되지 않으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여기서 고집이 발생해요. 내 존재에 대한 강력한 고집, 집념이 생깁니다.나를 유지하려는 집념! 니는 주님의 일에 방해물이 돼, 라고 그대로 나를 표현할 수 있어야 그게 바로, 이게 뭐냐? 그게 기원의 문제고, 원조의 문제고, 원형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

“진리는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되는 것이다.” 이것은 뭐냐? 언약의 확장이에요. 걷잡을 수 없는 확장입니다. 확장하면서 육과 영이 경계선이 발생되거든요. 육과 영 할 때 요 앞에 중간에 있는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 하나님의 선택은 뭘 공격한다? 내가 나를 선택하는 선택 자율성을 공격하는 거예요. 난 어떤 경우라도 나를 포기하지 않을래, 라는 것을 하나님의 선택이 공격하는 거예요. “제발 너를 조롱하고 너를 미워하고 그만큼 너를 많이 쥐고 살아왔잖아. 이젠 너를 좀 놔줘라.”

요한복음3:18 

요한복음 3장 17절과 18절을 보게 되면 설교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분명히 요한복음 3장 17절에 보면 독생자를 보내신 것은 심판을 하려 하심이 아니라고 분명히 나와 있어요. 그런데 18절에 보면 뭡니까?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돼있어요. 지금 인간적인 안목에서는 이 두 개가 결합이 안 돼요. 심판 안 한다는 느낌으로 이게 나온다고요.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아아, 심판을 안 해주시는구나.” 안 해주신다고 편안한데 18절에 가니까 벌써 심판을 받았단 말이죠.

그럼 이 두 개의 서로 상반된 내용을 통합하려면 뭐냐 하면 벌써 심판받았기에 새삼스럽게 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 라는 두 가지 내용을 하나로 통합된 사건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게 뭐냐?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거예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벌써 심판받아야 됨을 알리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신 겁니다. 이 땅에. 벌써 심판을 받았기에 심판받은 자는 심판을 안 해줄 거야, 라는 기대와 그리고 소망은 여기서는 허용이 안 되지요. 이미 심판됐기 때문에 잘하면 내 구원받을 걸, 라는 그런 헛된 망상은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인간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할 때 조금 있으면 잘못하면 심판받는다. 이럴 것 같으면 희망이 있어요. 그래 정신 바짝 차려야 돼. 하나님께서 심판주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려야 돼. 생전에 어떻게 조치를 해야 돼, 라고 했는데 성경에선 요한복음 3장 18절에 이미 심판이 되었기 때문에 심판을 유지하라 이 말입니다. 너는 심판 대상이 됐기 때문에 거기서 구원의 희망은 갖지 말란 뜻이에요. 구원을 희망은 가져선 안 된단 말이죠.

그러면 심판 안 받고 구원한다는 게 근거는 나에게는 안 나오지요. 그게 뭐냐 하면 사랑은 여기 있나니,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이란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심판받은 자에게 예상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네가 심판받아 마땅함을 유지할 때 비로소 그때 느껴지는 게 뭐냐? 사랑이 되는 거예요. 독생자 사랑이 돼요.

Whoever believes in him is not condemned, but whoever does not believe stands condemned already because he has not believed in the name of God's one and only Son.(NIV)

He that believeth on him is not condemned: but he that believeth not is condemned already, because he hath not believed in the name of the only begotten Son of God.(KJV)

"He who believes in Him is not judged; he who does not believe has been judged already, because he has not believed in the name of the only begotten Son of God.(NASB)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공동번역)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표준새번역)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우리말성경)

언약에서는 버림받음과 하나님께서 받아주심이 두 가지 내용이 다 있는 겁니다. 안 버려지고 그냥 받아주시는. 신약에서는 이걸 가지고 뭐냐? 예수님의 죽음이고, 이것이 뭐냐? 예수님의 부활이 돼요.그래서 모든 언약 안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플러스 부활의 요소가 같이 담겨있는 겁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이 시편을 통해서 미리 이야기한 예언을 그걸 그대로 현실화시키는 분은 주께서 따로 한 몸을 준비해서 투입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빼놓고 다른 몸들은 시편 27편의 나에 해당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지요. 그들은 뭐냐? 버림받아야 돼요.

언제 알아듣느냐 하면 나에게 일체 모든 희망이 날아갈 그때 알아들어요. “참 내가 아무 성과 없는 것에 평생을 몸을 담았구나. 주님의 원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못된 주의 원수다.” 그것을 아는 경우에 비로소 내가 죽음의 땅에서 살아보려고 부질없는 짓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요.

선택이란 것은 뭘 또 의미하느냐 하면 선택하신 분 따로, 나는 선택받는 자로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라는 이 삶의 공간은 내 공간이 아니고 선택하신 분이 선택의 의미를 생산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나한테 그냥 제공된 거예요. 내 인생이 없고 나를 위한 일은 존재하지 않아요. 선택하신 분이 일방적으로 선택에 딱 맞춰서 나로 하여금 천구백 몇 년도에 태어나게 해서 어느 동네에서 살게 해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선택하신 분이.

이거는 나의 일이 아니야. 아침에 눈을 뜨면 매일같이 느껴야 될 일은 뭐냐? “이것은 나의 일이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한 거예요 노인도 그렇지만 어린애가 똥 싼다고 부모한테 사과하면 그건 어린애가 아닙니다. 

이것이 나 지키는데 실익이 있을까, 유리할까, 도움이 될까, 보상이 될까, 만회가 될까? 여기서 한시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과 너무 달랐어요. 나를 어떻게 하면 버릴 수 있습니까?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특이성을 보여준 겁니다.

우리는 타고난 게 육이기 때문에 매사에 나를 집어넣습니다. 매사에 나를 집어넣기 때문에 이건 다윗도 마찬가지고요. 집어넣기 때문에 여기가 대조적으로 매사에 나를 무시하는 식으로 일을 벌이지요. 주님께서 언약적 일을 벌입니다. 그래서 전쟁이라든지 성전, 적이란 이런 모든 개념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여기 어떤 생산이 필요하고 전환이 필요한 거예요. 바꾸시는 거예요. 그래서 사울을 옛 나로 보고 다윗을 새로운 나로 보면 옛 나는 육적인 나는 날마다 뭘 공격합니까? 주께서 준비해놓은 새로운 나를 끊임없이 핍박하고 다그치고 그걸 공격하지요. 뭐라고 공격하느냐 하면 정신 차려라. 네가 지금 돈도 밥도 아무것도 안 되는 그 일에 성경 읽는다고 돈 되나? 왜 쓸데없는 일을 여태껏 하느냐고 누가? 내가 나를 계속해서 지적하고 조롱하는 거예요.
“너 기도해서 얻은 것 뭐가 있는데?” 강력한 적이 누구에요? 남이 아니에요. 북한의 김정은이 아닙니다. 강력한 적은 내가 강력한 적이에요. 마치 욥기에서 욥이 욥의 적인 것처럼. 하나님 저 의로운데 저를 치십니까? 강력한 적이에요. 욥의 고백이 오늘날 우리의 매 일상의 고백이 되고 말았어요.

주님께선 그때까지 기다린 거예요. 왜? 그게 생산할 수 있는 터전이 되기 때문에. 새사람 만들 수 있는 터전은 오직 주님의 은혜만 담겨있어야 되지 나도 얼추 노력했습니다가 담겨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끝까지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뭐냐? 구약에는 욥이고, 신약에는 십자가에요.

주께선 할 수 있는 것을 안 받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드러내시고 인간이 예상도 못한 할 수 없는 것

다윗은 살아가면서 다윗의 적과, 다윗의 적이라고 했는데 이동합니다. 뭐냐? 장차오실 나 말고, 이게 중요해요. 장차오실 나 말고 어떤 분으로 이동하는 겁니다. 어떤 분의 적이 되는 거예요. 다윗은 장막을 만들고 성전을 만들 그러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성전을 만들 능력도 없으면서 나는 하나님 편이란 말 하지마세요. 십자가 질 수 없는 인간이 나는 하나님의 적이란 말 할 자격 없어요. 그냥 생산라인에 끌려들어간 거예요.

임금 삼는다는 것은 자기들이 자진해서 뭐가 됐다? 나는 그 임금의 백성이고 싶어라, 에요. 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왜? 육이니까. 그래서 주께서는 너희들이 날 따라온 이유는 먹고 배부른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될 때 우리의 남은 인생은 아름다움의 연발이고 아름다움의 연속입니다. 남편이 술 먹고 아내를 때릴 때 그 때리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어요. “여기 때려줘, 요기 때려줘.” “이게 미쳤나?” “여기 때려줘.” 아름다움은 나의 조건이 섞이면 안 돼요. 그러면 성전의 아름다움이 안 돼요. 아름다움은 피 흘림 그 자체, 예수님의 살과 피 그 자체가 아름다우려면 내가 방해요소가 되지 않아야 되죠. 지금 나는 어떻게 살았느냐가 아니라 지금 나는 어떤 혜택을 입고 있느냐, 그게 중요한 거예요.

미리 죽는다는 것, 이것은 자기의 고유성이 파괴된다는 것. 파괴되기 위해서 지금의 상황이 딱 들어맞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이 상황은 나를 위한 상황, 내 행복을 위한 상황이 아니고 주께서 생산하는 현장, 생산현장으로서 딱 알맞은 상황을 이렇게 주었으니까 이 상황이 아름답고 찬송의 이유가 됩니다. 내 적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주님의 적 밖에 없어요. 나도 적 못지않잖아요.

하나님 아버지, 세상 모든 것이 주께 자기 중심되라고 만들어진 세상인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나를 위한 세상인 줄 그렇게 오해하며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내 안에 주님 계셔서 끊임없이 네 세상이 아니고 나를 위한 세상인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