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시편-2008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8강-여호와의 이름→ 말→ 약속→ 행동-말 꺼낸 내가 약속을 실행에 옮기겠다는 자기선언

아빠와 함께 2014. 1. 6. 16:42

2008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8강) 2008-01-17 23:16:18 이름 : 서경수

2008 겨울수련회 (8강)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들은 중요한 것이 많아서 되풀이해서라도 차곡차곡 정리하면 좋겠는데,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정리를 성급하게 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리할 때 지난 시간에 한 것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해야 차곡차곡 겹쳐지고 겹쳐져야 이게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가거든요. 

지난 시간에 한 것 중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시온이란 것이 분명히 다수인데 모세언약은  하나로 친다 이 말이죠. 분명히 여러 사람인데 하나로 치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들어가고 어떤 사람에게 안 들어가고 이게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거주하실 때 하나의 장소라고 여기고 거주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마치 호객행위 하는 것처럼 “손님. 우리 집에 오세요.” 하면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세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같이 있는 자리에 들어갑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것이 우리 일상과 다르게 상당히 어려워요.

그런데 이번 시간에는 이것보다 한층 더 어려운 것이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다시 근본적으로 돌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이 꼭 우리 인간들에게 간섭해야 되느냐?’ 하는 그 문제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면 다냐 말이지요. ‘하나님은 하나님 볼 일 보시고 나는 내 일이 바쁘니까 당신까지 챙길 여력이 없다. 나한테는.’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 계시면 우리가 알아서 모실 테니까 매일같이 하나님 믿으라고 들볶지 마세요.’ 이런 것이 우리 마음이 문득문득 떠 오릅니다. 이것을 비실제적이라고 하는데, 신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우리에게는 비실제적인 존재로서 우리에게서 저 멀리 떨어져 있어요.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밤하늘의 달이나 별을 갋으려고 덤비는 사람은 없습니다. “달 뗬냐? 오늘 보름이네.” 이렇게 되지, ‘저 별을 내가 갋아야 되는데, 저 별을 내가 차지해야 되는데’ 이렇게 닦달 내는 사람은 없듯이, ‘하나님 계셔. 알아서 해. 나는 내 일 바쁘니까’ 있더라도 나에게 의미가 별로 없어요. 나에게. 계시더라도 나에게는 더 실제적이고 급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뒷전으로 돌릴 수 있다 이 말이지요.

하나님은 하나님 일 하시고 우리는 우리 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시편 11편을 봅시다. 보편적으로 약간 어려운 것인데, 다시 이야기하지만 시온이라는 것은 여러 다수가 있더라도 한 장소로 생각해서 시온 대표자, 시온 입구, 다윗의 자손을 입구로 해서 하나님이 거주하실 때 “나한테 오세요.” 할 것 없이, 너, 나를 없애버리고 예수님이름으로 합해야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안에서는 뭐가 없느냐 하면, 이렇게 되면 여기에서 뭐가 허용 안 되는가 하면, 신은 소유 대상이 아닙니다. 제가 방금 신은 소유대상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때, 이 십자가마을 시편 강의를 다 듣고 난 뒤에 진짜 강의 자체가 미워서 비판을 한다면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비판할 수 있습니까? 이 강의를 끝냈다고 하고, 강의를 다 듣고 난 뒤에 미워죽겠어. 그래서 꼭 비판을 하고 싶어. 그럴 때 뭐라고 비판하겠습니까?

‘성경대로 맞는 것 같지만 관념적이다. 나의 하나님이 아니잖아.’ 이렇게 돼요. 결국 비판하고 싶을 때 항상 출발점이 뭐냐 하면, ‘그 하나님 다 좋은데 나의 하나님은 아닌 것 같아.’ 라는 느낌으로 비판하는 겁니다.  나를 남들 앞에 자랑스레 내세우게 만드시는 그런 하나님은 아니기에 구미 당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든 예수든 사람들은 그걸 뭐로 변개시킵니까? 나를 위한 하나님, 맞춤 하나님, 나에게 필요한 하나님일 때 가장 하나님이 절실하게 다가오게 마련이지요. 그렇잖아요. ‘우리 모두의 하나님입니다.’ 말은 맞는데 남의 동네 이야기 같아요. 나의 하나님일 때 가장 기쁜 거예요.

신학교 다닐 때 등록금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어떤 권사님을 통해 등록금을 주셨다. 그럴 때 그 하나님을 잊을 수가 없어요. 시편에 등록금 이야기 안 나오는데. 시편의 이야기는 너,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 하나님의 이야기, 다윗의 자손 이야기거든요. 아까 봤잖아요. 우리는 원수 만드는 것을 싫어해요. 그런데 시편에는 원수가 어떻고, 심판이 어떻고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비록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할지라도 그런 하나님은 왠지 정이 안가. 친밀감이 없어요. “나는 세상 천하에서 너만을 사랑한다.” 딱 이렇게 다가오는 하나님일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을 딱 장악하고 싶어. 이것이 소유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자기의 분열된 주체를 봉합하기 위해서 뭐든지 들어오는 것은 무조건 ‘내 것’으로 전환하는 버릇이 종교생활까지, 신앙생활까지 계속 번져서 나의 하나님이 될 때 교회에 온 보람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에게 이 십자가 중심의 신학을 비판하라고 한다면, ‘딱 와 닿는 맞춤 하나님은 아니네.’ 이렇게 비판하겠어요.

신(하나님)마저 자기 소유로 만들어야 안심하는, 그래서 그 신에게 압력을 넣어 “날 구원해 줘야 됩니다. 죄 지어도 용서해 주셔야 돼요.” 이런 식으로, 마치 집에서 애완견 강아지 한 마리 키우듯이 하면서도 ‘나도 신자다. 나도 주의 종이다.’ 이것이 와 닿는 거예요.

‘목사도 아무 것도 아니고, 집사도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했다.’ 이게 말은 맞는데 실감이 안 돼. 왜냐하면 평소에 버릇이 나를 위한 하나님이 습관화 되다 보니까 우리 모두의 하나님은 싫어해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김 집사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다. ‘아이코 교회 가기 싫어. 김 집사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니.’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나만을 예뻐해 주는 하나님일 때 그 하나님은 예쁜 하나님이 되지요.

소유의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짜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은 하늘에 떠있는 붙박이별처럼 나와 상관없는 그런 하나님이냐?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운 것이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뭐라고 자기를 증거하는가 하면, 이름을 앞장세워요.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앞장세워서 일한다. 이게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느냐? 그냥 ‘하나님이 일 하신다.’고 하면 될 텐데, 하나님께서 이름을 앞장세워서 일한다.

여러분, 수련회 교재 봤지요? 여기 엄청나게 많은 구절에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 내 이름, 여호와 이름’ 계속 이름이 나와요. 그 만큼 많이 나오는 것은 우리보고 그 내막을 알라고 그런 거예요. ‘이건 몰라도 돼. 신만 존재하면 되지 이름까지 왜 알아야 해.’ 이러면 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꼭 이렇게 ‘이름’이란 것을 왜 붙이느냔 말이지요.

이게 어렵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못 들어본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시온’도 잘 못 들어본 이야기지만.

이름’에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말이 나와요. 언어가 나온다고. 이것을 쉽게 예를 들면, 옆  방에서 뭔가 소곤소곤 말이 들어요. 말이 들린다는 것은 저 옆방에 어떤 이름을 가진 실재하는 존재가 말을 하기 때문에 그 말이 벽의 진동을 통해서 들리는 거잖아요. 누군가 말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마치 이름을 가지고 살아 있는 것처럼 살아있는 분이 말을 하는 거예요.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뭐가 어려운가 하면, 이 말을 할 때 말 자체가 행동이 된다는 것. 이게 상당히 어려워요.

오스틴의 언어행위이론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게 뭐냐 하면, “자, 회의를 시작합시다.” 라고 했을 때, 옛날의 언어 이론에 의하면 회의를 시작하는데 새삼스럽게 지시하는 기능이 바로 말의 기능이다. “자, 회의를 시작합시다.” 할 때, 회의가 시작됩니다. 회의가 있고 추가적으로 지시한다고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말인데,

그래서 거기에서 나온 것이 뭐냐, 말과 실재, 참이냐 거짓이냐, 진리냐 비 진리냐를 견주어보는 그것을 연구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죠. 뭐냐 하면, “자,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 없던 회의가 시작이 돼요. 여러분 어느 것이 맞습니까? “자,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라는 말을 하기 전에는 회의가 없었어요.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이미 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말 자체가 행위가 되는 것은 바로 모든 인간이 이름을 가질 때, 말 할 때 그냥 누구를 지시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의도, 행동에 옮길 의도를 가지고 말과 더불어 행동을 하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약속이죠. 그리고 명령 이런 것들이죠.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야, 공부해라!”이렇게 되지를 않고, “공부해라!”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자식들 마음속에 행동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네가 공부 좀 했으면 얼마나 좋겠나?” 이것이 아니고, “공부해라!”하는 요구가 명령이 왔어요. “누구시지요?” “엄마다.” 아, 실제로 누가 있어서, 벽 건너 옆방에서 누가 있기 때문에 말이 나왔고, 누가 있다는 것은 이름을 가지고 이야기하거든요. 호명을 하거든요. 누가 없을 때는 호명이 없어요. 누가 있을 때는 있는 것에 적합한 이름이 붙여졌기 때문에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 이름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너에게 명령할 것이 있단다.’ 이런 뜻이에요. ‘약속할 게 있단다.’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여호와 이름은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약속의 하나님이란 말이지요. 그 약속이 ‘부탁한다. 좀 들어다오.’ 이것이 아니라, 너는 못하지만 말을 꺼낸 내가 알아서 그대로 실행에 옮기겠다는 자기 선언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너는 따르든 말든 나는 내 식대로 밀어붙인다. 라는 실제로 생생히 살아있는 하나님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름에서 말이 나오고, 약속이 나오고, 약속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겁니다.

자, 그러면 세상 신은 뭐냐? 세상 신은 말도 없고 이름도 없어요. 그래서 인간이 이름을 갖다 붙이지요. 술 좋아하면 ‘박카스’고 태양신은 ‘아폴로’ 이런 식으로 인간이 이름을 붙여야 돼요. 이 세상에 자기 이름을 먼저 이야기한 신은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왜냐? 그분만이 살아있기 때문이에요. 다른 신은 없는데 인간이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름은 누가 붙입니까? 인간이 붙여주는 거예요.

개가 만약 인격이 있다면 개 팔려고 상품으로 내 놓았을 때 “주인님, 안녕하십니까? 제 이름은 뽀삐입니다.” 먼저 이름을 밝히겠지요. 그런데 개는 이름이 없어요. 인간이 뽀삐라고 불러줄 때 그 개는 뽀삐가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상입니다.

우상이란 것은 그에게 이름을 붙여준 그 당사자에게 예속되어 있는데, 그것이 우상입니다. 대구 팔공산에 있는 갓바위는 전에 이야기 한번 했지요? 수능시험 앞두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갓바위를 찾다가 수능시험 끝나면 발길이 뜸해요. 만약 제가 갓바위라면 정말 화가 날 것 같아요. 갓바위가 수능 가치밖에 안 되냔 말이지요. 그런 가치밖에 안 되지요. 왜? 인간이 이름을 붙여준 우상이기 때문에.

‘이런 것은 참 신이 아니잖아.’ 라고 하니까, 사람은 참 신을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필요한 신이면 그만이지, 내 소유의 신만 필요하지 진짜 신이 있으면 이건 귀찮아요. 하늘의 별은 하늘에 떠 있으면 되지 가까이 다가오면 싫어요. ‘저리 가!’ 하고 쫓아버립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 네가 왜 오는데? 별은 별들의 세상에 있어야지. 내가 부를 때 와. 잠시.”

사람은 자기가 절대자기 때문에 신도 자기 명령에 따라야 그게 좋은 신이에요. 자비로운 신이고. 그런데 하나님은 건방지게 인간이 이름을 붙여주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이름을 이야기했다는 것이 얼마나 건방진 하나님입니까. 이것은 우리와 한바탕 하겠다는 거예요. 이름을 붙여주지도 않았는데 이름을 밝히고 왔다는 것은 ‘나 여호와는 너의 손에 놀아나지 않는 신이다.’ 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나옵니까? “당신은 없는 존재야!” 라고 대결을 하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게 안 돼요. 왜 안 되느냐? 시편 19편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찾아낼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데, Sound of Silence 침묵의 소리, 가수 폴 사이먼이 불었던. 뭔가 침묵의 소리, 그 침묵의 소리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콧방귀를 끼지요. “우끼고 있네.” 이렇게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게 안 돼요.

7절을 보세요.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케 하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은 없는 것으로, 하늘의 붙박이별처럼 간주하고 싶었는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호출해서 시내산 위에서 직접 만나서 율법을 주니까, 그 율법의 말씀은 이미 인간 손에 넘어오기 이전부터 창조전반에 이미 침묵의 소리로 질서 잡힌 그러한 법칙으로서 작용하는 그 말씀이 이제는 문자화 되어서 십계명으로 박혀서 들어온 거예요. 그러니 이제는 죽었다고 복창해야 됩니다. 

신명기 28장에서 이 말씀 안 들으면 저주 받고, 그 말씀 지키면 복 줄게. 이것은 빼도 박도  못해요. 네 이름과 내 이름 중 누가 센지 한번 붙어보자는 것이지요.

고린도전서 10장 20절을 보겠습니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사실은 어디를 찾아야 되는가 하면, 시편 106편 28절 찾아보겠습니다.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자, 그러면 시편 115편 17절을 보겠습니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의 관심사가 우리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 여호와가 이렇게 이름을 가지고 생생하게 살아있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데는 죽은 자가 아무 쓸데없어요. 살아 있어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서로 살아 있다는 것 안에서 속성을 나눠주고 그 주님의 살아 있음을 증거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방인들의 제사는 어떻다고요? 죽은 자에게 제사하는 거예요. 왜 제사하느냐? 만만하거든요. 예를 들어서, 죽은 할아버지에게 제사 지낼 때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만만하게 다룰 수 있는 거예요. “할아버지, 이 술잔 받으시고 우리 후손들에게 복 내려 주세요.” 평소에 살아 계실 때는 그런 소리 못하다가 죽고 난 뒤에는 마음 놓고 할아버지를 농락하는 겁니다. 죽은 자한테는 마음대로 주무르고 가지고 놀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방 신은 뭐냐 하면, 이방 신의 테마가 뭐냐? 신은 죽은 조상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복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족종에게 다 있습니다. 조상 제사가. 천주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도고’라고 해서, 성자 리스트가 있는데 이 성자들이 전공분야가 있어요. 병 고쳐주는 성자, 입학시켜주는 성자, 부부간의 갈등 없애주는 성자, 이사 날짜 정해주는 성자 등등.

여러분들은 지금 웃고 있지만, 교인 떨어지면 철판 깔고 이런 짓을 해야 됩니다. 손님 모시려면 무슨 짓을 못해. ‘착한 아버지 만들기’ 개설하고 ‘노인 놀이문화’ 개설하고 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살아 있어야 그 인간에게 벌도 주고 복도 줌으로 말미암아 ‘봐라, 복을 주고 하는 것은 살아 있는 여호와 이름에 대해서 얼마나 인정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주어지잖아.’ 라는 것을 산 사람들 통해서 이야기하는데, 지금 죽어버리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찬양으로 증거하지 못해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빨리 일으켜서 산채로 살아 있는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그렇게 조치한다고 성경에 나오지요.

그래서 시편에 보면 죽은 자가 깨어나지요.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108:2).” 야, 주님께서 찬양하라고 부활시켰습니다. 라며 감사할 때 그것이 천국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잖아요. 부활의 세계에 대해서 너희들이 오해했다. 부활의 세계는 천사와 같아서 혼인한다든지 그런 것은 없고 순전히 하나님의 부활해 주심만 찬양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 때는 장가도 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오직 천사와 같이 주님의 살려주심, 주님의 약속대로 이루심을 찬양하는 것이 천국이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 일을 지금 우리 주변에서는 이미 하고 있지요. 보이지 않는 세상만물 속에서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는데, 이 철없는 구더기 같은 우리만 선악과 따먹고 고집이 있어서 그것을 못하지 다른 피조물 속에는 이 보이지 않는 침묵의 소리가 이미 흐르고 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에게는 감사하게도 율법을, 그 법칙을 그들에게만 제공했지요.

그러면 그 법칙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향한 그 법칙이 뭐냐?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하는데, 그 약속의 내용이 뭐냐, 그것은 장차 하나님의 왕이 이 땅에 임하신다, 시온에 임하신다는 거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미 살아 있기 때문이 이것을 한다는 겁니다.

그럼 언제 하느냐? 메시야 올 때 하는가, 그것이 아니고, 이름이라 하는 것은 그 메시야가 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이후도 마찬가집니다만, 올 때가지 이름으로 점점 더 그 메시야 오심을, 그 실체를 분명히 드러내는 일들에 사람은 관여하지 못해요. 이것은 메시야 오시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기 숙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십니다.  

때가 되어 아들 보내는 것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고, 그 준비 과정에 있어서 누가 개입합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개입하겠지요. 이 하나 개입할 때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누구 이름을 불러야 해요? ‘주여 약속대로 되니 놀랍습니다.’ 하는 식으로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 이것이 바로 시편입니다.

다시 정리를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이름에서 뭐가 나온다? 말이 나온다.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이 나온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언약을 먼저 던져놓고 그 던져진 언약을 스스로 자기 열심을 가지고 이루어 나가시는 그런 하나님이다.

그러면 그 약속의 최종 성취자가 올 때까지 그 중간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론된다는 말은, 비록 인간들은 실수해도 하나님의 일은 실패하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입니다. ‘내가 다윗에게 이야기한 것은 성실히 이루리라.’ 

교재를 한번 봅시다. 10페이지 위에서 일곱 번째 줄에,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받은 자의 얼굴을 물리치지 마옵소서.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여기에서 ‘성실하게 맹세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구절이 시편 89편에 나오는데 ‘내가 한 맹세를 반드시 이루리라.’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각자 이름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자기 이름을 가질 정도로 생생하게 우리에게 등장하는 거예요. 우리가 붙여준 이름은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가 붙여준 것이 아니기에 그 이름에 담긴 내용을 알까요, 모를까요? 구약의 사람들이. 다는 모르지요. 왜냐하면 그 이름이 어떤 분인지를 구약 사람들은 기다릴 뿐이지, 아브라함이나 모세, 엘리야 이런 사람들은 기다릴 뿐이지 그 이름의 실체는 알 수가 없지요.

알 수 없는데 언제 확연히 드러납니까? 예수님이 바로 주 여호와입니다. 예수님이 그 이름에 해당되는 그 당사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옛날에는 하나의 그림자였고 모형이었지만 이제 실체는 예수님인 것이 드러났지요.

제가 어려운 이야기 하나 더 하겠습니다. 시편에 보면 믿음, 소망, 사랑이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그것은 믿음, 소망의 그 주도권은 약속이 성취되어야만 영원한 상태로 주어집니다. 파편적이고 단편적인 것이 아니고 완벽한 믿음, 소망, 사랑은 그것이 실체가 있고 실체 안에 뭐가 나온다? 속성이 나오고, 그 속성은 하나님 은사로 믿음, 소망, 사랑으로 우리에게 공통 통념으로 주어집니다.

이렇게 주어지게 되면, 진짜 영원한 믿음, 소망, 사랑이냐 아니냐를 어떻게 판단하는가 하면, 그 사랑은 사랑의 출처로 가게 되어 있고, 믿음은 믿음의 출처, 소망은 소망의 출처로 갑니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서 그 출처는 뭐냐? 사랑이 출처예요.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지요.

사랑이 무슨 뜻입니까? 그저 주었다는 것입니다. 은혜 줄자에게 은혜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주는 이것이 사랑이잖아요. 이 사랑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을 앞당겨 주고, 그것도 영원한 겁니다. 그 영원이 이어지면서 사랑으로 모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니라.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이 없다는 말은,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요.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이 메시야를 내다보면서 그때그때마다 필요에 따라 믿음, 소망, 사랑을 약간씩, 약간씩 줘요. [헨델과 그레텔]이란 동화에 나오지요. 계모가 와서 전처의 자식들이 밉다고 쫓아냈을 때, 애가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가면서 떡을 탁탁 던집니다. 그래서 깊은 산속까지 가서 “애야 여기서 지내라.” 하고 돌아왔는데, 그 다음 날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 아빠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하고 돌아오더란 말이지요.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습니까? 던져놓은 떡을 따라 왔지요.

믿음, 소망, 사랑이 있을 때는, 구약에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고 있는데, 이것은 주의 이름에서 나온 믿음, 소망, 사랑일 경우에만 메시야와 관련 되고, 주의 이름이 아닌 우리가 만든 믿음, 소망, 사랑은 누구한테로 돌아갑니까? 결국 내가 내 힘으로 구원 받고자 하는 가짜 신과 연관되어 있어요. 언약이 아니고 내 이름을 위해서, 이근호란 자존심을 위해서 열심 내는 것밖에 안 돼요. 그것은 주의 이름을 깨부숩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나와 주의 이름의 관계를 알기 이전에 먼저 무엇부터 알아야 되는가 하면 18페이지부터 먼저 알아야 됩니다. 주의 이름을 믿지 않는 악인들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18페이지에 나옵니다.

제가 일본 영화를 즐겨보는 이유는, 일본에는 종교, 신이 없지요. 신이 없는 인간이 평소에 어떤 것을 희망삼아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아주 절실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공부하는데 무척 도움이 됩니다. 물론 제가 하는 일에 공부 안 되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렇게 변명도 하고 핑계를 대면서 할 것 다 하지만, 어쨌든 일본 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신이 없을 때 나오는 진솔한 모습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영화는 반드시 종교심이 묻어 나와요. ‘이것 하면 재수 없다. 이것은 조물주가 노한다.’ 이런 것이 있어서 순수하게 끄집어 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나라 영화에는 나쁜 놈도 나쁜 짓을 못해요. 왜? 신이 있기 때문에 신을 의식하기 때문에 나쁜 짓을 못해요. 나쁜 짓 못하다보니까 평소 생활이 어떠냐? 평소 생활이 아슬아슬합니다.

아까 쉬는 시간에 목욕탕에 갔는데, 목욕할 때 제일 어려운 점이 뭐냐 하면 피부와 때 층에서(저녁에 더러운 소리 해서 미안합니다만) 피부를 손상시키지 않고 어떻게 때 층만 밀어내느냐 하는 그 기술. 약간 욕심을 내면 피부가 상하고 욕심을 들내면 목욕해도 목욕한 것 같지 않고.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법을 만들고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헤매고 있습니다. 신의 노를 안 건드리면서도 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챙기는 그런 식으로.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 보면 종교나 교회에 안 다니면서 ‘이것 하면 벌 받아.’ 아니, 벌 받는다는 소리 하지 않고 ‘죄 받는다.’고 해요. 어법이 이상해요. 저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됩니다. 분명히 ‘벌 받는다.’는 말이 맞는데, ‘죄 받는다.’고 하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옛날 사람들 말이 “그러면 죄 받지.”

어쨌든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러면 벌 받는다, 죄 받는다.” 이런 말해요. 그런데 일본에는 그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저는 이것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그것이 바로 시편에 나오는 악인들의 모습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뭐가 없다? 하나님이 없다고 제쳐놓고 시작하기 때문에 그들은 어떻게 사는가? 시편 20편 7절에 봅시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보세요. 여기 무엇과 무엇이 대비됩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사람은 무엇을 의지하지 않는다? 병거나 말을 의지하지 않는다.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지요. 다윗도 칼을 사용했으니까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역시 믿을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칼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될지어다. 왜? 이 일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무엘상에 나오는 이 대목이 구약 성경을 보면서 우리를 아주 즐겁게 합니다. 사무엘상 17장 47절에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이 말을 한 마디로 축약하라고 한다면, 골리앗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만 생생히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란 이름을 가진 하나님도 골리앗처럼 생생히 살아 있어서 골리앗과 하나님이 붙는데 하나님이 계시단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소년 다윗 자기가 나선다는 겁니다. 그래서 소년 다윗은 그 때부터 두 번 다시 사람 죽일 때 돌팔매를 사용 안 합니다.

만약 다음에 또 돌팔매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다윗 자기에게 무기가 돼요. 이것은 아니지요. 이 전쟁은 이기도록 되어 있는 거예요. 이것을 ‘붙이심의 전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기도록 되어 있는 전쟁입니다. 무기가 좋아서 이기는 것이 아니고 이기도록 되어 있어요. 쉽게 말하면 합격증 따고 시험 치러 가는 사람입니다. 참 웃기는 이야기지요. 운전면허증 뒷주머니에 딱 넣고 면허시험장에 가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조심조심 운전하는데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해요. 여기에서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뭐냐? 다른 사람은 조심하는데 이미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는 그것에서 이미 벗어나 있는, 하나님의 하신 일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의 특징이 뭐냐? 사람들이 하는 모든 방법을 반대쪽으로 기피하고 그것과 충돌 일으키는 방법으로 일합니다.

그 다음에 안 믿는 사람들. ‘안 믿는 사람들’이라 했는데 가만히 보면 전부 우리가 하는 행동들입니다. 시편 33편 17절에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그 다음 37편 16절에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승하다는 것은 뛰어나단 말이지요. 이 구절은 우리 십자가마을에 목사님들께 다 해당되지요. 소유가 있어야지 뭐. 없는데. 그 다음 49편 6-8절에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돈 주고 사람 구원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49편 17-20절에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지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역대에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타인의 욕망 아닙니까. 남이 갖고 있는, 내가 못 갖는 결핍을 저쪽 사람이 갖고 있을 때 그 사람이 가진 것이 좋아서 그 사람을 그렇게 칭찬하고 부러워한단 말이지요. ‘나도 저 사람처럼 되었으면’ 하지만 그 사람의 실상은 “멸망하는 짐승”이라고 했습니다. 

멸망하는 짐승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무슨 명품을 걸쳤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 다음 시편 39편 6절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그림자 같이 다닌다는 말은, 아무 목적도 없이 이유도 모르는 채 그냥 가는 거지요. 그림자 같이 다닌다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장에 갈 때 마이크 쥐고 “장보러 오셨습니까? 예, 장보러 왔습니다.” 그 사람보고 이야기하면 말이 통하는데, 마이크를 쥐고 밑에 그림자에게 “그림자님, 뭣 하러 왔습니까?” 그림자는 이유도 모르고 거기 있잖아요. 인생이 꼭 그런 식이란 말이지요. 거름지고 장에 가는 것처럼. 이쪽으로 우르르 몰렸다가 저쪽으로 우르르 몰리고.

그 다음에 시편 40편 6절에 보면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 행하면 복 주는 줄 알고 있어요. 말씀대로 했기 때문에.

네 번째 한 것 다시 해 봅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뭘 뒤집어썼다? 하나님의 언약의 시스템을 뒤집어썼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것을 지키면 복 받을 것이라고 생각 하지요. 이 말씀이 그리스도와 연관되는 것을 모르고 자기 좋게 하기 위해서 매일 지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상징계라고 했지요. 어떤 법을 지키면 복이 오고, 금지한 것을 넘으면 벌 받는다. 법을 지키면서도 그 금지한 것을 넘고 싶어요. 그것이 자기를 슬프게 합니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44:6)
세상 사람들은 활도 의지하고 칼도 의지한다는 말이지요.

그 다음 시편 50편 8절에 보면, 이게 제일 교인들이 듣고 싶은 복음 아닙니까.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야, 헌금 적게 했다고 책망하는 하나님이 아니란 말이지요. 하나님의 약속은 헌금 얼마 냈느냐는 것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은 약속대로 이루어집니다. 이쯤 하면 ‘아멘!’도 나오고 해야 되는데, 영 안 나오네.

헌금 얼마 했냐? 십일조 했냐? 묻지도 않고 우리가 헌금하는 것과 상관없이 약속은 그냥 약속대로 주어져요. 믿습니까?
그런 것을 가지고 책망치 않겠다는 거예요. 그런 것은 목사가 책망하지 다른 사람은 책망 안 합니다. 하나님도 책망 안 하고. 그런데 목사만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도 이름이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장소 이동한다고 남의 것이 내 것 되는 건 아닙니다. 제물이 여기 있으나 거기 있으나 똑같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무슨 말이겠어요? ‘내가 너를 위해서 친히 준비한 것을 믿으라.’는 말이지요. 그게 뭡니까? 나는 제물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이 제물처럼 너를 위해서 대신 죽어야 될 제물을 내가 제공할 날이 올 것이란 말이지요.

그럴 때, 너희가 제물이 어떻게 죽는 것을 보라. 이것이 하나의 모형이니까 그것처럼 하나님 쪽에서 나타난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불쌍한 제물처럼 죄도 없이 죽는 그날이 올 것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변화산에서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예수님이 이야기할 때 그 이야기의 주제가 뭐였습니까? 고스톱 치면서 놀았습니까? 뭡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만큼 미리 모세와 엘리야는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내다보고 있었던 거예요.

그 다음에 시편 52편 7절에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돈 많다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 한화그룹 김00 회장처럼. 

60편 11절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그러니까 이 말이 어려운 것이,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고 하니까 그러면 안 헛된 사람의 구원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시면 안 됩니다.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고 하니까 헛되지 않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그 자체가 굉장히 수상해요.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이 세상에 나밖에 살아 있지 않아요. 나밖에 없으니까 하나님 말씀에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고 하니까, 그러면 안 헛된 방법으로 하면 될 것 아닌가. 꼭 이렇게 나옵니다. 안 헛된 방법이 뭡니까? 영성훈련인가. 다 헛된 거예요.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62:10)
‘치심치 말라’는 것은 마음을 거기에다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거 정말 어렵습니다. 재물이 늘어나는데 왜 밥 안사겠습니까? 기분 좋은데. 사지 말라고 해도 밥 사지. 재물이 늘었는데 입 닦으면 욕먹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사회생활 못하지요. 남편에 보너스 받으면 아내 불러내서 옷 한 벌 사주고 하잖아요.

그 다음에 115편 8절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우상의 특징이 뭔 줄 알아요? 언약이 없다는 겁니다. 우상의 특징은 인간 쪽에서 던져주는 대로만 이야기를 할 뿐이에요. 우상 나름대로의 계획이 없어요. 계획 잡는 것은 누가 하느냐 하면 그 우상을 믿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합니다. 

이런 예가 바로 사사기에 나옵니다. 미가라는 사람이 우상을 만들어놓고 뭐라고 합니까? 내 자식에게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빌잖아요.

그 다음 118편 8-9절에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신뢰할 만한 사람 뻔히 놔두고 그 사람을 피해가라. 힘 있는 권력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께 피해라.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지요.

146편 3-4절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사람을 믿지 말라고 하니까 사람들과 사귀지 말라는 쪽으로 이해해요. 완전히 독불장군처럼 되라는 말인데,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사람이란 것은 사람을 사귈 때는 목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 이용해 먹기 위해서 사귑니다. 그런데 이용할 것이 없음에도 사귀는 경우는 성도들끼리 밖에 없습니다. 성도들끼리는 공통 개념들이 있어서 “이상하다. 저 사람도 예수 믿나? 나도 예수 믿는데. 희한하다. 정말 하나님 살아 계시다.” 신기해서 믿는 거예요. 안 그런가요? 안 그러면 말고.

아니, 저런 인간이 어떻게 복음을, 저 사람은 분명히 예수 안 믿을 사람인데 어떻게 예수를 믿지. 정말 신기하다는 점에서 사귀는데, 그렇지 않고 사귀는 사귐은 이용거리가 있기 때문에 사귑니다. 서로가 다 마찬가지죠.

그래서 결론이 뭐냐?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힘이다. 인간들의 힘이며 재물의 힘이며 발단된 병기들로 된 군사력들이다.”(교재 20페이지) 이것에 대해서 철학자들은 습관화되어 그렇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런 힘들은 습관화가 체제가 되고 체제가 질서가 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들 힘들은 하나님의 아들 체제를 모독하고 무시하도록 악으로부터 독려받기 위해 제공된 힘이다. 기름 받은 자와 맨 것을 끊는데 동원되는 힘이다.”
세상에 있는 왕들과 방백들이 누구에게 달려듭니까? 이상스럽게 하나님의 이름에 달려들지요.

그것은 바로 “이 힘의 원천이 악마에게 있기에 이들에 대한 공격도, 이들로부터의 구원도 인간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

자, 그렇게 봤으면, 여호와 이름이란 것은 이것과 반대니까 결국 뭐냐 하면 여호와 이름이란 것은 우리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 안 믿는 사람들 속에 뭐가 있다? 악마가 있지요. 그 악마는 복음을 싫어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싫어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이름은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는다는 점을 일단 여러분들이 기뻐해야 돼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갈구지를 않습니다. 정말 기쁜 소식이에요. “돈 내 이놈아!” 하고 멱살 잡지 않는단 말이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상대할 가치가 없는 인간이에요. 우리는 하나의 전리품이기 때문에.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주몽 임금님이 자기 조선족 유민이 포로로 있을 때, 그들을 자로잡고 있는 한족과 전쟁을 벌일 때, 그 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닦달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 주몽이 나서는데 옥에서 응원가를 불러 줘야지 왜 그것도 안 해.” 이런 식으로 닦달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뭡니까? 아까 안 믿는 사람들 봤지요. 이들을 악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아닙니까. 재물이 늘었는데 한 턱 안 냅니까?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200만원씩 줘 보세요. 사람들 성격이 갑자기 좋아집니다. ‘내가 낼 게. 그냥 가지 말고 삼계탕 먹고 가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알아요. 알기 때문에 우리하고 상종치를 않습니다. “똑바로 해. 내가 그렇게 사랑했는데” 이렇게 닦달하지를 않아요. “이놈아, 넌 옥에 쳐 박혀 있어. 내가 해. 저리가 있어. 네가 협조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우리는 구원 받거든 “감사합니다.” 하고 얼굴만 내 밀면 돼요. 믿습니까? 아멘!

우리는 그렇게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예수의 피로 합격증 받았지, 우리보고 멱살 잡고 “왜 찬양 안 해?” 이러질 않는단 말이지요. 찬양을 해도 ‘나는 소프라논데 내 목소리 괜찮지?’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예를 들어봅시다. 어느 교회에서 성가대가 칸타타를 하는데 잘 했어요. 그 다음해 성가대 부담됩니다. “작년에는 잘 했는데 왜 올해는 테너가 틀려.” 이렇게 됩니다. 제가 안암제일교회에서 칸타타 메시야를 하는데, 방금 틀린 사람이 접니다. 한 박자 쉬고 들어가는데 먼저 나와 버렸어요. 100명 성대가에서 혼자 톡 튀어나왔어. 고대 교수로 있는 사람이 만날 그것만 지적하는 거예요. “그 테너 누구야?” 안암제일교회가 고려대 앞에 있었거든요. 성가대 담당 장로가 고대 교수예요. “누구야? 이번에 또 틀린 사람” 그래서 나는 “틀릴 수도 있지.” 그것 때문에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것도 아닌데.

이게 습관이 되어서 그래요. 성대가 장로로서 성가대 잘한다는 소리 들으면 채면이 서고. 이게 뭐냐?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습니다. 그 습관 하루아침에 못 고칩니다. 다만 습관을 고칠 생각하지 말고,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떠나소서.” 진짜 떠나면 안 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