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시편-2008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9강-시편의 주제는 ”다윗언약을 성실히 이루시는 하나님”

아빠와 함께 2014. 1. 6. 16:45

2008년 십자가마울 겨울 수련회 9강 2008-01-18 18:11:46 이름 : 이장우

십자가마을 08겨울 수련회 시편9강

주의 이름을 모르면 시편 해석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그런 좋은 이야기를 하였는데 어떤 언어를 해석할 때는 해석자가 해석 하려고 나대는 그 자체가 진짜 해석을 방해한다고 하였습니다. 해석하지 않을 때는 그 말자체가 활동을 하는데, 그래 해석을 한번 해봐 하면서 분해하려고 나서는 그 순간에 실제가 감추어지고 가상이 튀어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이델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똑같지요! 그렇지요! 어떤 관찰을 하는데, 관찰하는 자의 눈은 분자의 크기이고 관찰하려고 하는 세계는 분자보다 더 작은 전자세계이기 때문에 분자 세계에 있는 것이 전자 세계를 관찰하려고 하면 그 관찰자체가 전자세계에 혼동이 일어나서 우리가 원하는 그것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전자의 흐름을 이용할 뿐이지 전자가 어디에 있는가? 운동은 어떻게 되는가? 몇 초 후에 어떻게 되는가를 필요할 대로 이용할 뿐이지 총체적으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너무 커도 모르고 너무 작아도 손에 잡히지 않기에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과학이 발달한 것은 진리를 알기 위한 과학이 아니고, 우리 생활에 얼마나 유용한 것인가 하는 것을 챙기면 그만인 것입니다. 이것을 존 듀이의 도구주의라고 하지요!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란 우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이용하느냐에 달려있기에 우리가 얼마나 순간순간에 이용하느냐에 따라 진리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 인간세계에 신이 언약을 가지고 관여하겠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관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아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욕심내지 않고 이정도면 되었으니 신이시여! 더 이상 개입하지 마소서! 하면서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만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마귀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재 15페이지 봅시다. 시편 74:7절에 보면 “7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10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그리고 시편 79:6절에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구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이렇게 나오는 주란 여호와이지요! 그런데 신약에 오면 이 주가 누구입니까? 바로 구체적인 인물 예수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굉장히 싫어합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싫어합니다.

구약의 문자를 보아라. 예수가 어디에 있느냐? 없잖느냐? 여호와 하나님이고 달리 말하면 그냥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주의 노를 부으소서! 그것을 우리가 인정하여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3세살 먹은 구체적인 청년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지옥가고 저주 받는 다는 것은 이것은 기독교로서 독선이 너무 심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비난할 때 어느 정도 그른 느낌이 우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면 존중하겠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니 2인자 아닙니까? 2인자를 하나님과 같이 대접할 이유가 있는가? 그냥 예의상 예 2인자 이십니다. 이렇게 해주면 되지 중요한 것은 1인자와 맞대결하는 것이 중요하지 하는 그런 느낌이 우리에게도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언약을 앞장세우셔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고 생각한 신들은 전부다 다 우상들입니다. 그것은 실재하지 않는 우리가 지어낸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저를 노골적으로 비난하기를 이근호 목사는 예수 일변도다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그 사람들은 그렇게 안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삼종세트를 다 갖추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구약은 주의 이름으로 활동합니다. 이름이 없이는 활동하지 않습니다. 주의 이름, 즉 예수의 이름 외에 우리에게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주의 이름 외에 다른 신을 염두에 두는 그 신 자체가 가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원수가 등장하였다는 것은 주의 이름과 결부되었다고 아까 이야기 하였습니다. 

주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열방과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열방에 주의 노를 퍼부으소서! 라고 한 것에 대하여 잠간 설명을 하겠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딱딱한데 시편 22:27절을 봅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자기 살아가는 것 밖에 모릅니다. 이 세상 전체가 누구 손에 의하여 움직이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열방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특별히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미워하고, 선택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공격하도록 조치하는데 활용하고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요?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 내 아들만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모릅니다. 우리 살아가는 것 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열방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주님께 대드는가 하는 것은 알고 싶지도 않고, 모르고 있고 그렇지요! 하지만 성경에 보니 세상 모든 것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주시도록 조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23편입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시편 22:27절에 보게 되면, 세상의 모든 열방들을 주님의 손에 장악하여 있는데 그것은 무엇을 돋보이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 되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하나님의 이스라엘과의 특별한 사랑의 관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모든 곳에 배치를 시켜놓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배열시켜 놓으신 장치들이라는 말입니다.

살아계신 주님께서 친히 너희의 목자가 되셨는데 너희가 미래와 운명이 얼마나 확정적이냐 하는 그 말입니다. 그러니 여호와가 목자라는 말은 너는 이제 안심 푹 놓아도 괜찮다는 이야기입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첫째시간에 이야기 하였지요! 사람은 욕망이 있고 그 욕망사이에 결핍, 이 부족함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공포와 불안이 있습니다. 공포는 외부세계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고 불안은 내부세계 때문에 일어나는 것을 불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시편 22편에 보시면 외부세계는 누가 장악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내부세계는 누가 장악하고 있습니까? 시편 23편에 역시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니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좀 더 어렵게 말해볼까요?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장악하시니, 미래까지 장악하시니, 여호와가 목자라는 말은 그분의 미래계획안에 우리가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산물입니다. 과거에 의하여 오늘이 되고 오늘이라는 현재가 내일이 되면 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과거가 현재의 나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니 사람이라는 것은 앞일은 모르고 뒤에서 미는 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미래라는 것은 어떻게 참고를 하는가 하면 과거가 이러하였기에 그 과거를 나름대로 참작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미래를 구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미래가 진짜 미래가 아니고 그냥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이지 이것은 진정한 미래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무엇이 발생하는 것입니까? 미래와 현재 사이에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기에 불안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낯선 사건들에 의하여 공포를 느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목자라는 것은 이러한 불안과 공포에 저촉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 푹 놓고 미래까지 장악하고 있는 분에게 맡기면 부족함이 채워주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것을 실천에 옮기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에게는 불안감이라든지 모라람 이라든지 하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달려들면 그냥 가자고 하십니다. 때로 필요하면 무화과나무도 저주하십니다. 팬들이 따라오다가 팬 관리 못하여 다 떠나면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시지 않으시면 아무도 올수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아버지가 나를 알고 내가 아버지를 알고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부족함을 못 느낀다거나 안 느낀다는 것이 아니라 목자 차원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목자가 아쉬워한다면 우리도 아쉬워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나오지요!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는 양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좋은지 목자가 양을 알아보지 못할까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목자가 자기 양을 깜박 잊었다. 이런 바보 같은 목자는 없습니다. 선한 목자는 그런 목자가 없습니다. 목자가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아는 것입니다. 양이 목자를 보고 누구십니까? 왜 쓸데없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십니까? 이런 양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설교시간에 몇 번 이야기 하였는데 삭개오를 볼 때 마다 정말 신기합니다. 마치 헤어진 친구 만나는 것 같습니다. 왜 이제 오십니까? 반갑다 친구야! 그것입니다. 얼마나 죄를 짓고, 주여 부끄럽습니다. 이런 사이가 아니고, 아이고 반갑다 친구야 하는 것처럼 나무에 올라가서 만난 것입니다. 마치 창세전부터 알았던 사이처럼, 마치가 아니라 진짜 알았지요! 기쁨입니다. 목자를 만난 것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임할 것이다. 만나야 될 사람을 만났던 것뿐입니다.

고넬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통하여 주님을 만난 것도 만날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할 사람은 쓸데없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 만날 사람은 기어이 피하게 해 주시고 만날 사람은 만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목자께서 다 알아서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 주의 이름을 좀 더 봅시다. 시편 79:6절에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라고 하였는데, 왜 주를 모르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아야 하는 것입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정답은 이것입니다. 열방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주님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반드시 주의 노가 쏟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호수아서에서 보면 은혜 받지 못할 자에게는 반드시 저주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전쟁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너희는 저주 받아야 돼 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확인 사살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고 구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비인간적이고 휴머니즘이 결여되어 있는 난폭한 깡패 같은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욕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같은 인간으로 창조하여 놓고 하나는 은혜를 받고 하나는 저주를 받게 하느냐고 하는데. 원래 열방들은 저주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하여 배치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저주가 임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 하였지요! 앗수르 군대 18만5천명이 죽었을 때에 그 군사들이 자기 집에서 얼마나 귀한 자식들입니까? 그런데 천사가 와서 하루아침에 18만5천명을 다 죽입니다.

직업도 다양할 것입니다. 농사짓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 짚신 삼는 사람, 토기장이, 대장간 하는 그런 사람들이 징병제로 차출되어 왔는데 그들이 한꺼번에 다 죽었습니다. 그들이 한꺼번에 죽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백성을 공격하였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직업과 상관없이 계급과 상관없이 천사가 와서 다 죽여 버린 것입니다. 

자 문제 나갑니다. 출애굽 할 때에 애굽에 있던 장자의 아들들이 어떤 나쁜 직업을 가졌기에 죽어야 한 것입니까? 성질이 잘못되어 죽었습니까? 왜 죽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우습게보았기에 죽습니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주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죽어줘야 주의 이름이 살아있는 표가 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주의 이름이 살아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성격이 좋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은 주의 이름 외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외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자들을 고린도전서 1장에서 교회라고 합니다. 오직 주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자랑하는 자를 교회라고 합니다. 요즈음은 거꾸로 되어서 그런 사람이 교회에서 쫓겨납니다. 세상 참 멋진(?) 세상이지요!

그 다음에 16페이지 봅시다. 아까 한 것이니 그냥 넘어가고 18페이지 봅시다. 시편 147:4절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이 본문이 구원에 관한 본문이지요? 그런가  한번 살펴봅시다. 아! 이것이 구원에 관한 말씀이 맞네요! 147:2-3절입니다. “2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를 모으시며 3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4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하나님께서 그 많은 수자를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책임지고 다 건지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20페이지 봅시다. 결론 앞의 부분입니다. 저는 시온이라는 부분에 대하여 시편 51:18절에서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이 대목을 아주 좋아합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시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다윗이 밧세바와의 사건이 있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다윗 왕에게 찾아오신 그 내용인데 시온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21페이지 봅시다. 위에서 세 번째 줄 시편 110:2절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그러니 시온에 거하는 자는 주의 원수가 무엇임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시편에 나오는 전체 사상에 대하여 죽 보아왔는데, 이 사상을 보니 이 시편 자체가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희망사항 같은 것이 전혀 포함이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자꾸만 배제해 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만 우리가 언제 개인적인 원수 갚아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러면 시편에서 흔히 나타나는 찬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사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찬양한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상관없이 주님께서 원수와 싸우셔서 승리하신 것을 우리가 이제 눈을 떠서 깨달아 알게 되었으니 그 점에 대하여 우리들은 찬양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입니다. 육적인 우리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영적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빼 돌리고 그동안 우리를 지배하였던 영적인 원수를 척결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찬양한다는 것으로 정리한다면 시편에서 크게 틀린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개인적인 이익이나 복 받으려고 덤벼들면 그 시간부터 시편을 헛보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25편 봅시다. 내일까지 150편 다 보아야 하니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25편 7절입니다.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따라 하옵소서” 이런 말을 할 때에 그 사람은 무엇은 보지 마시고 무엇만 기억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나의 죄를 저도 기억하지 않을 테니까 주님도 기억하지 마시고 다만 저는 무엇만 기억하고 싶은가 하면 주의 인자와 용서하심만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런 쪽으로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런 쪽으로 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 달라는 말은 해보고 안 되면 말고 하는 식이 아니라 지금 이것은 성경이며 하나님의 약속자체가 성경입니다. 따라서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이 내용대로 실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25:11절을 보면,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참 뻔뻔스럽다.

그 다음에 시편 27:13절, “내가 산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여호와의 무엇을 볼 것을 믿었다고 합니까? 은혜 볼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이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시편 29:8절,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하시도다” 이것은 모든 자연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집중적으로 모든 것을 배치하시고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시편 31:1절 끝에 보면,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상당히 뻔뻔스럽지요! 자꾸 부끄럽게 하지 마이~ 이런 뜻입니다. 주의 의로 나를 건지주실 것이지요! 이런 뜻입니다. 하~ 이거 뻔뻔스럽네! 지금 혼자 기분좋아합니다. 이런 뻔뻔스러움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시편 32:1절에 보면,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도 한 뻔뻔합니다. 2절,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자기는 한 것도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자의 복에 대하여 로마서 4장에서 이 대목이 나옵니다. 진짜 뻔뻔함의 대가입니다. 이름을 에스더 이렇게 짓지 말고 김뻔뻔 이렇게 짓는 것이 신앙적입니다.

시편 33:6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으심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제가 말씀드렸지요! 천지창조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이 구체화되고 문자화 된 것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율법을 얼마나 귀히 여기겠어요! 천하만국의 모든 법칙이 요약되어 있으니!

33:21절 보면,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라”여기 죄를 받으리라는 말이 나오네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이 세상의 속성을 드러낸다는 기준점에서 이렇게 김뻔뻔 이뻔뻔 이런 자들을 세우셔서 세상을 이렇게 천당 가고 지옥 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를 활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단호하게 뻔뻔하게 그냥 가는 것입니다.

35:1절을 보면,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마찬가지입니다. 일단은 다윗이 바라보는 예수님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그 다음에 시편 37:5-6절,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내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야~ 심방 갈 때 좋다. 대 심방할 때에 이런 말씀 전하면 좋겠지요!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했듯이 이것이 대 심방용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여호와께 맡기려면 우리가 믿을 만한 것은 다 끊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 했지요! 우리는 무엇을 의지합니까? 재물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합니다. 그런 것과 겸하여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지금 이런 일을 하는 것도 주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맡긴 일입니다. 이미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맡기라는 말입니다.

10절에,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이것은 마태복음에 보면 나옵니다. 온유한 자는 무엇을 차지한다? 땅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땅이란 무엇이 없습니까? 여호와를 모른다고 하는 악인은 일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 중에 들어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자세히 살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갈때에 돋보기 가져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아도 없습니다. 주께서 말끔히 청소를 하신 것입니다. 

시편 38:3-4절,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죄를 내가 알아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마지막 22절에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이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사람이 망해야 기쁘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망해야 주님이 내 곁에 있었음을 아는 그 기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39:4절,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무슨 소망의 기도가 이런 기도가 있습니까?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해 달라니요! 5절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손 넓이  큼이라는 말은 손끝이 절벽처럼 끝입니다. 내 인생이란 것은 손끝처럼 끝이 있고 그 끝에 가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요것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미래를 주님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서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우리가 언제 이런 고백을 해야 하는가 하면 무언가 일이 잘 되고 성공했다고 느껴질 때에 이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럴 때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역시 내가 아니면 안 돼! 이럴 때에 이런 말을 해야 합니다. 주여 나는 허깨비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 왜 있었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나는 쓸데없이 거기에서 어슬렁거린 것입니다. 그러니 연극무대에서 행인2, 시체3 이런 것, 주인 공 되지 마시고 항상 이렇게 없어도 무방한, 무방하지만 그저 사용하는 것처럼 마치 다윗이 던진 물맷돌처럼, 무언가 시원하게 가기는 갔는데 보니 골리앗 이마에 박힌 것입니다. 이 돌을 빼서 기념물 만들거나 경매붙이지 않습니다. 이승엽의 나무배트는 1억 5천 만 원 가지만 이 돌은 그렇지 않고 그냥 돌로 가는 것입니다. 돌이 사용되었다고 돌이 황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만이 좋은 말 한번 했습니다. 돌이 황금 되는 것이 아닌데 자꾸만 자신을 황금으로 인식하려는 것입니다. 내 아니면 되는 일이 없어! 돌입니다.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잠시 사용했다고 해서 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손바닥 넓이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파이더맨도 아니면서 손 내밀면서 이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잠시 사용했다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가 설교 좀 될 때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6절에 보면, “진실로 각 사람은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이 못하나이다” 내 것이 아닌데 뭐!

시편 40편은 했기에 넘어갑시다. 41:9절,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믿기는 왜 믿었느냐는 것입니다. 나의 신뢰하는 바, 신뢰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보고 한 말입니까? 가룟유다 보고 한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인줄 알고 일부러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일부러 마귀를 선택하였다는 것은, 마귀는 천사입니다. 천사 앞에 글자를 작게 쓰겠습니다. 악한천사입니다.

천사가 무엇입니까? 심부름꾼입니다. 심부름꾼인데 앞에 악한이 붙었으니 악한일 하도록 심부름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천사는 시편23편에 무엇을 합니까? 비록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를 쑤시고 다니는 악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사보다 더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마귀들이 설쳐도 주님께서 그렇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시편 42:1절을 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또 남의 이야기이다. 남의 이야기이다. 햐~ 요즘 자금줄 달려서 돈에 갈급하지 누가 하나님을 갈급해 합니까? 2절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니...”생존하시는 하나님, 얼마나 하나님을 생생하게 살아있는 분으로 보았으면  그 하나님을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해 하듯이 그렇게 찾겠어요!

사슴이 시냇물을 찾을 때에 이 산에는 시냇물이 없어! 지구상이 존재하지 않아 이런 식이라면 갈급해 하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히 맛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달콤하였는지 그 맛을 못 잊어 갈급하여 찾듯이 진짜 하나님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람은 갈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찾으려고 갈급해 합니다. 그것도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그래서 3절에 보면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세상이 하나님 때문에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솔직히 말해서 가끔 있습니다. 언제인가 하면 구원받은 곳이 고마워서 가끔 기쁨의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4절에 나옵니다.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자기 형편 보다가 갑자기 모든 것을 익히 아시는 누구를 봅니까?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면 그 방향성에 의하여 그 불안이 사라진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시편 44:3절을 봅시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도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나니...”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대목이지요! 칼을 쥐고 흔들고 활이나 무기를 가지고 땅을 차지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구원하였다는 이 말입니다.

이것이 실감이 나려면, 비록 칼과 활을 사용하더라도 승리하였다는 그 기쁨보다 어떤 느낌이 와야 이런 고백이 되는가 하면, 그런 과정 속에서 아하 나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느낄 때, 꼭 주님께서 팔을 흔들고 오시지 않더라도 살아계신 것만 느껴도 우리는 그 현실감의 무게를 충분히 느껴서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구나! 어떤 생존하게 하는 의지를 보여주신 분이 계셨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쟁을 일으키시고 우리에게 어려움을 당하게 해서 하나님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시편에서 계속하여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시편 51편을 봅니다. “하나님이여” 그 다음에 무슨 하나님입니까? “구원의 하나님”이지요! 이 보험이 어디까지 처리되는가 하면 그 다음 구절에서 “피 흘린 죄에서” 이야~ 이 보험 괜찮네! 고통 특례법 정도가 아닙니다. 피 흘린 죄에서도 능히 구원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그렇다고 실험적으로 사람을 때려죽이지 말고요! 사람을 죽인 죄에서도 이것이 구원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 뻔뻔이다.

그런데 그럴 때에 무엇입니까? 14절에 내 혀가 주의 의를 그냥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높이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얼마나 좋았을까? 살인 해놓고 건짐을 받았으니, 살인 해놓고도 보니 축 합격 이렇게 나왔으니, 얼마나 좋을까요? 사법고시 합격하여도 온 동네방네 플래카드 거는데 이것은 플래카드 정도가 아니라 온 우주에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편 51편을 살인자도 구원받았다.

또 이사람 말고 살인하고도 구원받은 사람이 또 있지요! 유명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 사람은 죽인 숫자도 모릅니다.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예수 믿는다고 많이 죽였어요! 그런데도 기껏 하는 말이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면서 구원받았습니다. 왕 뻔뻔입니다. 하여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과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높이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다 부립니다. 말투가 이상하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보혈의 공로만 높이기 위하여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가릴 분이 아니시죠! 여기 시편 51:1절에 참 뻔뻔하지요!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죄를 지워버린다는 것입니다. 2절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제하소서! 하는 것은 요청이 아니라 말씀이 그런 작업을 진행하고 있고 이미 완료되었다는 이 말입니다.

3절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만 범죄 하였다는 것은, 나의 죄는 같은 인간들끼리 해결한 문제가 아니고, 주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해결하여 될 그런 문제라는 것입니다. 내가 착하다고 해서 원상회복되는 죄가 아니고 진짜 죄는 모태에서부터 받은 죄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개입하여야 될 그런 종류의 죄임을 내가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럴 때에 이 다윗은 주의 의만 높이 찬양합니다. 똑같은 내용이 계속하여 시편마다 되풀이 됩니다.

그 다음에 시편 58:10절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하며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이것은 무슨 복수혈전 같지 않습니까?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하며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라고 합니다. 그래 까불다가 혼나지 하는 식으로 악인이 당하는 것을 보고 신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이 원수가 우리의 사적인 원수가 아니라 누구의 원수인가 하면 우리가 의지하는 예수님의 원수를 주께서 처리 하시는 일에 역시 빈틈이 없구나! 하면서 기뻐서 주님의 기쁨에 하나의 똘마니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시편 60편은 한 것인데 10절에서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옛날 중세 때 십자군 전쟁 때 많이 써 먹었겠지요! 그 다음에 시편 65:3절 “죄악이 우리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이것도 한 것입니다.

그 다음 시편 66:6절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도보로 강을 통과하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인하여 기뻐하였도다” 이때의 심정이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이때 기뻐하였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찬양을 분석해 보면 자기가 바다를 건너온 것이 신기해서 기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다를 건너가게 하시는 든든한 분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광을 주께만 돌리는 미리암의 찬양이 나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함께 하는 줄 알고 안 도와주면 주님이 떠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편 68:19절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나님은 포터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리어카 준비해 놓았다가 죄 짓기만 하면 들어내고 죄 짓기만 하면 들어내는 매일같이 들어 내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치 새벽에 음식쓰레기 치우고 분리수거하는 그 사람들처럼 잠자는 고요한 새벽녘에 몰래 우리 짐을, 우리 쓰레기를 가져가시는 분이십니다.  음식 쓰레기 한번 치워보세요 얼마나 더러운지 그것을 치워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68:17절 “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이것 여러분 내용 잘 알지요! 열왕기 하에서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 까불다가 문둥병 된 사람, 그 게하시가 아람군대의 포위를 보고 겁을 집어먹고 공포를 느낀 것입니다. 아까 말한 외부에서 오는 공포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공포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눈뜨고 보니 무엇이 있습니까? 적들보다 더 많은 천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붙어볼래?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과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에 옥문을 누가 열었습니까? 간수가 뇌물 받아서 연 것이 아니지요! 천사가 열었습니다. 이 말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그러면 목사님 천사가 있기는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안 됩니다. 천사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름을 가지고 생생하게 그 약속대로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무슨 중심이냐? 복음 중심입니다.

자신의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하는데 하나님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천사까지 심지어 악한 천사까지 마귀까지 동원해 가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말씀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는 것입니다. 시편 68:8절을 보면 땅이 진동하면서 까지 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시편 69편입니다. 이 시편 69편에 대하여 주석을 좀 쓴다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헷갈리고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흔히 저주시라고 하는데 21절부터 보면,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저희 앞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이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로마 사람들과 그 주위의 사람들이 느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몰라보았습니다.

이들이 왜 못 알아보아야 하는가 하면 24절에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말씀대로 주의 분노를 쏟아야 할 사람으로 배치되도록 조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구를 특별히 미워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 저주 받을 사람을 인하여 세상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님 중심임을 저주 받는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예수님의 기준 됨을 알리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놀부심정 같아 보이지만 24절부터 봅시다. “24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25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26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27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이 말은 무엇이냐? 생명책에 있는데 지워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애초부터 생명책에 들어올 자가 못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저주가 그대로 실시되고 있습니다.

시편 71편은 한마디로 주의 의로 구원한다는 내용입니다. 16절에 주의 의만 주의 의만 진술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2절에서 주의 의로 나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시편 73편을 보게 되면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이 말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복 받은 것을 실증적으로 건져서 그것을 자꾸 정리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이런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약속을 믿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이지 어떤 이런 재앙을 받지 않는다든지 죽을 때에도 건강하게 죽는다든지 이런 것을 추려보니 저 사람 아마 복 받은 사람 맞을 것이다. 저주 받은 사람 아닐 것이다. 이렇게 단정 지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18절부터 보시면 “18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이것은 아까 했으니 넘어갑니다.

시편 78:3절에 “3 이는 우리가 들은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 바라 4 우리가 이를 그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 능력과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란 무엇이냐?  하나의 매체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전달 전달하는 전달자로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솜씨 좋다, 무엇이 좋다 자랑하지 말고 예수님의 이런 은혜가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만 하면 결과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니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몇 명에게 전하였는데 몇 명은 믿고 하는 그런 실적에 대하여 신경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편 78편은 옛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망했던 이야기인데 67-68절을 봅시다.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마음대로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누구를 싫어하든 누구를 좋아하든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결정을 좋아할 뿐이지 우리가 간섭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 다음 시편 80:6절에 보시면 “우리로 우리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웃나이다” 마음대로 웃으라고 하지요! 그들이 웃는다고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81편 12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퍅한 대로 버려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 이것이 로마서 1장에 보면 나오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할 때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시편 85:11절에 보면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진리를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 무슨 뜻입니까? 땅이든 하늘이든 하나님이 벌리시는 영역내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139편에 유사한 말씀이 나오지요! 땅 끝에 가든지 바다 끝에 가든지, 그러니 땅이든 하늘이든 온 우주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일에 모든 것이 총동원되는 그런 판국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이런 주님의 은혜를 증거 하면 그것 자체로서 진리입니다. 증거 하다가 힘들다 하는 그런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아까 별을 세신다는 것을 제가 착각하였는데 이 말씀입니다. 87:6절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전 세계의 민족을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총동원령을 내리셨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모든 활동도 한님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89편은 박사학위 논문용인데 다윗 언약의 성실입니다. 1-2절만 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3-4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

지금 우리가 시편을 다 끝냈다고 합시다. 묻습니다. 저 집사님 시편을 다 끝냈는데 시편에서 무엇을 이야기 하던가요? 하신다면 이 89편 3절을 말씀하시면 아까 시험공부 열심히 하시던데 합격입니다. 그렇게 안 해도 합격이지만 이 시편 전체가 하나님의 성실성이 주께서 언약하신 대로 다윗을 선택하여 하나님을 심으신 것처럼 다윗처럼 참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그대로 건져내신다는 일관성입니다.

그래서 흔히 생각하기를 시편이라? 허허 기도잖아! 그러니 우리가 평소에 기도하는 것도 150편 다음에 들어가도 되겠네! 아니에요! 우리 기도가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다윗언약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실히 이루신다가 시편 전체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총신의 김정우교수는 시편 전체 중에서 89편을 잡아서 자기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89편 1,2,3,4절을 논문으로 쓰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입니다. 내용은 별것 아닙니다만 하여튼 이것을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윗 언약으로 자신을 다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다? 다윗 언약을 성실히 이루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며 그 언약의 성취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을 공부하고 난 후에 여러분 속에 아 하나님은 언약대로 실시하시구나 하는 것이 남으면 됩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그리고 나머지는 다음 시간에 다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