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유월절의 의미

아빠와 함께 2024. 3. 18. 18:34

강남-누가복음 22장 3절 (유월절의 의미) 240305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2장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방금 읽은 문장에서 유월절이 나오지요. 유월절은 어디에 해당되는가. 이건 시간에 해당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그 날짜 달력에 지키면 되는 거예요. 유월절이 살아있으려면 누가 살아있어야 되느냐 하면 유월절 지켜주는 사람이 살아 있어야 한다. 이 시간이라는 바탕의 유월절이 새겨져 있다면 유월절을 살리는 것은 어디에 매여 있느냐 하면은 유월절을 지키는 사람이 살아서 유월절을 지켜줘야 유월절이 살아나야 되겠지요. 그렇지요? 만약에 이 세상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뭐도 죽어버립니까? 유월절 자체도 지킬 사람이 없으니까 유월절을 못 지키겠지요. 유월절은 사람이 지켜줘야 유월절 같이 산다. 유월절은 사람과 연계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사람 이야기했고 사람들이 이해하는 시간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여기에 3절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사탄은 악령 또는 악마가 들어갔다. 악마. 사람이 없으면 유월절도 없다 라고 했을 때는 사람이 지켜줘야 유월절을 생색을 낸다 라고 했다면 굳이 유월절을 완성하는데 있어서 사단이 끼어들 자리가 없이 됩니다. 사람이 지키면 되니까요. 사탄이 왜 여기서 등장하냐 이 말이죠. 사탄이. 그럼 여기서 사탄이 등장한다는 말은 진정한 숨어있는 유월절은 사탄이 인간의 배후에 사주해서 인간이 유월절을 지킴으로서 유월절은 본래 인간들이 생각하는 본래 유월절 의미가 나타난다 그렇게 보면 돼요. 사탄이 없으면 유월절 못 지킨다가 돼요. 악마가 없으면. 그러면 이 사탄이 유월절을 지키지 말라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사탄이 노리는 게 따로 있는 겁니까? 사탄이 노리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이 거기 4절 5절 6절 보면 사탄은 누구를 노리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노리고 예수님을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서 사탄이 활동을 개시하지요. 활동을.


자, 그러면 이야기가 점점 복잡해집니다. 유월절이라고 하는 것은 달력에 박혀있는 절기에요. 절기.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한 절기. 유월절을 중심으로 해서 사람 등장하고 사탄 등장하고 여기 누가 등장합니까? 예수님까지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유월절은 그럼 누가 지키는 거냐 하는 거예요 유월절은. 유월절은 누가 지키는가? 사탄이 예수님을 제거하는 그것이 유월절의 본 뜻이 성취된다 라는 거예요. 성취된다는 겁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제거하는 그 방식이 유월절의 본래 유월절 취지를 성공적으로 지킬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사람이 유월절 지켜야 유월절 지킨다 이 말은 결국 이 사람은 진짜 유월절 지키는데 이게 장애요소가 되는 거예요. 장애요소. 장애요소가 되고 결국은 이 이야기, 많은 이 이야기를 간추리면 유월절은 충돌, 사단과 예수님과의 충돌을 통해서 유월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눈에 보이고 사탄은 눈에 안 보이니까 사단 대신에 뭘 집어넣느냐? 사단의 지시를 따르고 있는 누구를 집어넣으면 되겠어요? 사람을 집어넣으면 되겠지요. 그럼 어떤 결론이 지어지느냐 하면은 유월절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사람과 누구의 충돌? 예수님과의 충돌로 이루어진다 로 결론내릴 수 있습니다.


그럼 유월절 아이디어는 누가 끄집어낸 거지요? 유월절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사람들이 만든 거예요? 하나님이 율법으로 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주셨지요. 하나님이 주신 율법, 그중에서 이번에 유월절 하는 겁니다. 유월절의 성취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첫 번째 나오는 중요한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준 율법 또는 유월절의 성취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예수님 인물 한 분에 집약해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 한 분에 다 집약 돼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는 다 엉터리다. 심지어 뭐까지? 하나님마저 하나님이 아니올시다 라는 뜻이에요. 예수님 인물 빼놓고. 예수님 인물 빼놓고 모든 것은 다 사라져라. 다 사라져라. 그래서 예수님은 유월절을 이뤄놓고 유월절 의를 지고 이 땅에 사라졌습니다. 남아있는 것은 우리가 유월절 지켜야지 하는 인간들만 남아있어요. 유월절 남아있는 듯하고 인간들 남아있는 듯하고 유월절은 예수님은 이후에 유월절 지켜가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엉터리였습니다. 다 거짓이었어요.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러면 이 소용없다는 말은 유월절 예수님 오시기 이전에 인간들이 하는 모든 것도 다 소용없는 짓이었어요. 그럼 유대인들은 뭘 지키느냐 하면은 유대인들은 약속을 믿었죠. 하나님의 약속을.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 약속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어긋나는 약속만이 약속이 되는 겁니다. 지켜지지 않는 약속만이 약속이에요. 진짜 약속이에요. 왜? 인간들은 약속을 기다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유월절을 지키는 존재이기 때문에 유월절을 못 지키는 겁니다. 인간들은 율법을 지키고자 하기 때문에 율법의 원수가 돼요. 대적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 집약돼있어요. 예수님 한 분에게 집약됨으로서 예수님 빼놓고는 인간도 아니고요 예수님 빼놓고는 하나님도 아니에요. 하나님이고 인간이고 하는 모든 개념들은 다 거짓입니다. 전부 다 헛것이에요. 헛짓했다고요.


나는 인간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 중간에 율법 있네. 율법도 있고 여러 가지 제사법도 있네. 자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기다리면서도 뭘 기다려요? 하나님이 오신다는 메시아가 오신다는 약속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어떻게 기다리느냐? 하나님이 주신 율법 가지고 성심성의껏 지켜버리면 나중에 하나님 메시아 오신다. 이 이야기가 전부 다 한 순간에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진리 알기 굉장히 간편하죠? 굉장히 간편하죠? 너도 엉터리고 나도 엉터리고 하나님도 엉터리고 모조리 다 엉터리에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성취하고 하늘로 도망갔잖아요. 하늘로 도망갔지요. 그럼 지상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 믿습니다 하는 예수 믿는 믿음도 엉터리에요. 보따리 들고 도망갔는데. 성취한 것은 주님께서 홀로 아버지께로 그냥 달아났어요. 사라졌어요. 지상에 있는 제자들은 닭 쫓던 개 신세 된 겁니다. 아직도 자신의 기다림, 아직도 자신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본인이 믿고 있어요. 이것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약속은 충돌해서 약속이 내가 약속을 믿는 내 믿음이 유지된다면 벌써 진짜 약속은 현장에 없는 상태에요. 그냥 거짓 것만 계속 약속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율법 믿습니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날라가버린 거예요.


그래서 간단한 질문, “하나님 유월절을 어떻게 지킵니까?” 라고 질문을 하게 되면 하나님 답변은 간단해요. “너 지킬 필요 없어 상황 끝났어. 종료 됐어.” “우리가 유월절 지키라고 준 거 아닙니까?” “아니야. 네가 못 지키고, 못 지킨다는 게 율법의 취지야.” “왜 그런데요?” 라고 인간이 물으면 하나님께서 너는 약속을 믿잖아. 네가 믿을만한 약속이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을 입에서 내뱉었잖아. 믿을만해서. 메시아 온다는 게 믿을만해서 느낌이 들어서 믿잖아. 그러니까 그 약속은 파토 내야 될 약속이에요. 파토 또 다른 말로 파묘. 다 파헤쳐야 될 파토 나야 될 깨질 약속이에요. 왜? 우리가 믿을만하기 때문에 그 약속은. 약속 믿는 게 힘듭니까? 7시에 우리 앞에서 만나자. 그게 그렇게 힘들어요? 가서 옷 입고 7시에 카페에 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 카페에 주님께서 오셔가지고 카페 몽땅 들고 하늘로 튀어버렸어요. 없어요. 가보니까 카페가 없어요. 약속이 어긋났어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이나 약속의 이해가 인간 쪽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그 문제가 뭐냐? 3절에 누가 있기 때문에? 사단이 활동한다는 것을 인간들은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통지표 보면 수수수 가끔 우수수수 이렇게 되지요. 그리고 가정 열람에는 품행이 단정하며 성실하며 학업성적이 우수하며 되어있지요. 지금 그 통지표에 뭐가 빠진 거예요? 어떤 점수가 빠진 겁니까? 통지표에. 사탄이 빠졌잖아요. 사탕 말고 사탄. 악마가 빠졌잖아요. 사람들은 이걸 심각하게 보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양 잡으면 된다고 했어요. 그렇게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유월절 날 양을 잡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피를 바르는 게 목적이에요. 양을 잡아야 피가 나올게 아니냐. 아닙니다. 피를 내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양을 잡는 거예요. 말장난하는 거 아닙니다. 피를 효과 있는 피를 위해서 그 당시 그 시대에 양을 잡은 거예요. 나중에 출애굽기 넘어오게 되면 염소까지 가고 송아지까지 가요. 그룹들이 버티고 있는 언약궤에는 수송아지 피가 들어가요. 결국 신약에 오게 되면 양도 필요 없다 소도 필요 없다 염소도 필요 없다 뭐냐? 내 살과 내 피에요. 양 잡아서 피 내는 게 아니고 주님의 피를 바르고 주님의 피와 관련 있는 인물, 인사가 누구냐를 위하여 주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율법을 주면서 계속 끌고 온 거예요. 사람들은 양을 잡았다 하거든요. 양을 잡은 게 아니고 피를 내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유월절 할 때 양 잡고 했지만 요시야 왕 때 양 잡고 크게 했지만 특히 유월절은 요시야 왕 때 크게 했어요. 막판에 이스라엘 역사 종칠 판에 크게 한바탕 놀았어요.


자,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을 잡았죠. 양을. 양 잡아서 피 내서 유월절 드렸는데 왜 망합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시야 왕이 유월절 드렸는데 이스라엘 왜 망했지요? 성경은 간단합니다. 양을 잡았기 때문에 그렇다. 양을. 지금 제 말이 비약처럼 들리기 때문에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출애굽기 24장 8절 모세가 이스라엘 모아놓고 화목제 드리는 거예요. 6절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8절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되어있지요. 그때 분명히 흠뻑 피를 백성들이 받았잖아요. 그 피를 받았는데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 망합니까? 이상하지요. 피를 받았는데. 이 피를 냈다는 말은 양을 잡아서 성실하게 피를 시키는 대로 제단에 뿌리고 이렇게 한 그 피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여기 아까 충돌 없는 언약 완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 제사를 드리라는 말은 너희들이 하는 행위와 정작 하나님의 준비된 행위가 충돌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궁극적으로. 결국 충돌해요. 인간과 하나님이 충돌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충돌하기 싫어해요. 하나님을 잘 모시고 싶어 해요. 모시고 싶어 해요. 하나님을 잘 찬양 드리고 모시면 하나님도 좋지만 누구도 이익이 있어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잘 섬기고 찬양하고 예배드린 누가 이득이 옵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만 누구한테 이익이 와요? 본인한테 이익이 오지요. 본인한테 이익이 오면 본인은 제대로 된 인간이에요? 나쁜 인간 돼요? 제대로 된 인간으로서 하늘로부터 인정받을 찬스를 갖게 되지요. 주님께서는 이것을 원천적으로 이걸 거부해버리는 겁니다. 모든 뜻과 인간은 어디에 모여 있다? 오직 한 분의 인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 다 응축되었다는 것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 준비된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본인이 인간이라고 여기고 인간이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고 여기는 예배당 만들고 섬기는 것이 인간의 마땅한 도리라고 여기는 그 인간들에 의해서 충돌되는 그 당사자가 모든 율법을 다 이룬 거예요.


그 모든 율법을 이뤘다는 말은 인간들의 피는 안돼요. 양의 피도 안돼요. 염소 피도 안돼요. 오직 누구 피? 충돌의 흔적을 갖고 있어야 돼요. 누구한테? 소위 하나님 믿고 사람들 서로 사랑한다고 우기는 그 인간들, 인간들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누가 있어요? 사탄. 악마와 결탁된 그 인간들에 의해서 진짜 주인공이 충돌로 인하여 사건이 일어나야 돼요. 그러면 그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됩니까? 여기 오늘 본문에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2절에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그 다음에 뭡니까? “죽일까” 하죠. 죽일까. 양 덩어리 있지만 유월절 날 피만 뽑아낸 겁니다. 예수님이라는 육신이 있지만 거기서 뭐만 뽑아냈는가? 하나님은 뭐만 뽑으면 돼요? 피만 뽑아내면 유월절 성공한 겁니다.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그 피가 발리어져야 돼요. 왜? 그게 언약이기 때문에. 그게 약속이기 때문에. 그래서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 의해서 훼방 받고 방해당하고 인간에 의해서 저지당하는 절차가 필수적으로 개입되면서 언약은 이루어집니다. 가룟 유다만 방해한 게 아니에요.


출애굽기로 가서 계속 보겠습니다. 29장 12절 “그 피를 네 손가락으로 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제단 밑에 쏟을지며” 16절 “너는 그 숫양을 잡고 그 피를 가져다가  제단 위의 주위에 뿌리고” 라고 되어있지요. 제단 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제단에 피 뿌린다고 이스라엘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그런데 제단에 피를 뿌려야 돼요. 제단에 피를 뿌림으로서 제단에 피를 뿌리는 그 수행자, 그 실행하는 당사자가 누구지요? 인간이죠. 인간이 개입 돼야 그것도 율법대로 지킨다고 하는 인간들이 개입 돼야 그 인간과 숨어있는 하나님과 충돌을 일으켜서 이 출애굽기 28장에 제단이라든지 거룩은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야기 들어보면 굉장히 간단한데 왜 우리 역할이 나쁜 역할, 못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느냐? 그게 살짝 기분 나쁘지요. 출애굽기 29장 20절 보겠습니다. “너는 그 숫양을 잡고 그것의 피를 가져다가 아론의 오른쪽 귓부리와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에 바르고 그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바르고 그 피를 제단 주위에 뿌리고” 사람 자체에다가 신체에다가 뭘 발라요? 양의 피를 발라버려요. 양의 피를 바른다고요. 주님께서 힌트를 많이 주는 거예요. 힌트를. 지금 아론이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아론의 아들들이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아들이 구원 못하는데 이 낌새, 힌트는 듬뿍 받고 있는 거예요. 누가? 이스라엘이. 이상하게 찝찝하게 피는 왜 바르지? 바르니까 바르면 구원받습니까? 바르면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이걸 발라야 인간을 대표해서 주님과 마찰하고 충돌할 수 있는 위치가 마련 돼요.


자, 이야기 의외로 간단합니다. 뭐냐 하면은 모든 율법, 숨어있는 하나님은 인간이 아는 하나님은 거짓이에요. 우상입니다. 모든 율법과 하나님은 어디에 집약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 집약되어있지요. 한 분에 다 모여져있습니다. 모든 율법이. 그렇다면 생각해보세요. 유월절 예수님이 성취했잖아요 십자가에서 유월절 성취했지요. 다 이루었다 했지요. 그럼 여기서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은 자리입니다. 자리. 내가 뭘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십자가에서 분배 받고 할당받은 그 자리가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이 자리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 자리에 뭐냐 하면은 대제사장도 가입되어 있고 제자들도 있고 이스라엘 성전도 있고 제단도 있잖아요. 그들은 뭐냐 하면은 우리가 행해서 율법대로 구원받는다 하잖아요. 주님께서 다 이루었는데 그들은 자기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다 하니까 여기서 뭐가 생생히 살아있느냐 하면은 나의 존재, 나의 존재가 살아있는 거예요. 나의 존재성. 나의 존재성,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다가 살아있는 거예요. 내가 있다. 그런데 여기 있다가 주님 일을 이루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데 긍정적 역할을 했습니까? 부정적 역할을 했습니까? 부정적 역할을 했지요. 부정적 역할. 왜냐? 예수님 존재를 죽여버렸으니까. 누가? 어느 존재가? ‘나’라는 존재. 우리 단체라는 우리라는 유대 이스라엘 존재 집단이 예수님의 존재를 죽였는데 결과로 무엇이 이루어졌다? 유월절이 이루어진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이 존재가 부정당했으니까 이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부정적 자리가 예수님의 유월절 완성되고 난 뒤에는 이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부정적 자리가 되겠지요. 이 부정적 자리가 무슨 자리가 되느냐 하면은 구원의 자리가 되는 거예요. 구원의 자리.


예를 들면 세상에 마지막 때가 되었다. 제가 지금 그냥 내가 봐도 너무 억지스러운 예를 드는 겁니다. 억지스러운 예를 드는데 지구에 종말이 왔다. 다른 데는 다 불로써 심판받았는데 딱 한 군데 영월초등학교만 구원받는다 칩시다. 영월초등학교 있는데 그것도 영월초등학교 전체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영월초등학교 교무실만 구원받는다 칩시다. 그런데 그 교무실에 있는데 4학년1반 어떤 말썽꾸러기가 수업시간에 너무 말썽 피워서 선생님께서 “야 너 교무실로 와” 하고 혼나기 위해서 교무실로 들어오는 순간 세상 종말이 와버렸어요. 그러면 그 아이는 왜 구원받지요? 걔는 말썽장이라서 구원받습니까? 안 그러면 그 자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제가 억지스러운 예라고 했지요. 그 자리에서 구원을 받은 거예요. 그러면 걔는 쌤이 자기를 부른게 자기 공로에요? 자랑이에요? 아니죠. 뭐로 불렀습니까? 죄인으로 불렀잖아요. 죄인으로. 죄인으로 불렀으니까 너 교무실에 너 죄지은 거 자랑해봐라 지금 그걸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너 존재는 애시 당초 네 존재는 글러먹었는데 지금 무슨 자리? 너의 그 못된 행위로 말미암아 교무실 선생님이 애를 먹었잖아요. 그런데 어떤 자리입니까? 말썽꾸러기 피를 입은 그 자리가 피로 흥건한 거예요. 피로 흥건하게 된 거예요. 이왕 억지스러운 거 계속 갑시다. 교무실이 예수님의 피로 흥건, 살점과 피로 흥건히 된 거예요. 그러니까 애가 교무실 들어오니까 저벅저벅 들어오죠. 뭐가 쩍쩍 들러붙느냐. 피. 그 피는 무엇을 보장한다? 자리를 보장하는 거예요. 자리를. 그런데 그 피라는 그 자리는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배척함으로서 발생된 없던 자리가 새로 생긴 거예요. 없던 자리가. 내가 생각해도 좀 너무 억지스러운데 하다하다 끝까지 갔는데 약속이 어깃장난 거예요. 약속이 맞지를 않는 거예요. 약속이.


그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은 바로 구원의 자리는 없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요. 자기 구원을. 자기 구원을 포기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성을 포기할 생각이 일절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한번 봅시다. 고린도전서 1장17절에 보면 진짜 굉장히 어려운 말이 있어요. 이게 진짜 너무 어려운데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여기까지 이해가 되는데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는 거예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이 말이잖아요. 인간 세계에서는 뭐로 받는다? 지식으로 받아요. 지식 안에는 뭐가 담겨있다? 이 언어가 현실화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그 안에 담겼다고 의식하고 그걸 인정하고 그 지식을 확보하는 것이 인간이 구원받는 방법인데 십자가에 대해서는 주께서 그 방법을 엎어버린다는 거예요. “네가 십자가에 대해서 알아?” “알았습니다” “뭔지 이야기해봐라” 줄줄줄 “십자가 이런 겁니다” “너 탈락이야”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뭐 어쩌라고 인간이 할 도리는 다 했는데 그것마저 안 된다면 우리 보고 뭐 어쩌라는 거냐. “말의 지혜로 아니함은” 그러면 십자가의 말의 지혜를 대체할 게 있어야할 게 아니겠습니까. 대체할 게. 그 대체할 게 뭐냐? 대체할 게 없어요. 대체할 게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이 대목을 보고 믿음이 없으니까 목사 됐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믿음이 없으니까 목사된 거예요. 믿음 있는 대신 말재주가 있어. 말이 일반 교인들이게 먹히니까. 그러면 말의 지혜를 끊으면. 설교시간에 “음음음” 이럽니까? 그것도 아니란 말이죠. 말은 하면서도 말의 지혜가 안 되는 방법이 뭐냐? 그것은 인간 쪽에서 잡을 어떤 십자가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언급을 해야 돼요. 인간 쪽에서 낚아챌 어떤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준비한 게 있어요. 가을편지라고 있는데 미투로 유명한 시인 있지요. 김민기하고 그 한 사람이 술 먹고 있다가 즉석으로 시 하나 써주세요 해서 시 써주고 그 작곡을 누가 하느냐? 그때 서울대학교 1학년이었던 김민기가 작곡을 한 게 가을편지에요. 가을편지 가사를 한번 보세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자, 편지를 날립니다. 고린도전서 편지지요. 편지인데 편지 누구한테 주죠? 없어요. 편지는 쓰신 분은 하나님인데 받는 수신자가 없어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수취자가 없어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지요. 그럼 편지 보내는 자의 능력이 도달되면 누구라도 뭐가 돼요? 편지의 능력을 받은 십자가의 능력을 받은 그대가 되는 거예요. 그때 편지에 의한 관계가 형성되는 겁니다. 왜? 신약시대이기 때문에. 신약시대이기 때문에.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다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이게 고린도전서 편지잖아요.


그래서 이걸 좀 더 구체적으로 하는 가사가 아득히 먼 곳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찬 바람 비껴 불어 이르는 곳에 마음을 두고 온 것도 아니라오.’ 이게 무슨 노래냐 하면은 인간이 기억하고 있다는 거예요. 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어디서 나온다? 기억에서 나와요. 대구강의에서 언급했어요. 인간의 모든 지식은 기억에서 나와요. 기억이기 때문에 기억에서 나오는 게 뭐냐? 눈물입니다. 기억이 없으면 눈물도 없어요. 왜냐 하면은 기억은 과거 기억이 선행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시간속의 인간의 존재성입니다. 아까 유월절 시간성이 바뀐다고 했지요. 인간이 기억 속에서 지식이 거기에다가 덧입혀져요. 그런데 이 가사에 보면 ‘찬 바람 비껴 불어 이르는 곳에 마음을 두고 온 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내 기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먹구름 흐트러져 휘도는 곳에 미련을 두고 온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현재 내가 어떤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은 익히 아는 내 기억에서 출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미련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아 어쩌다 생각이 나면 그리운 사람 있어 밤을 지새고 가만히 생각하면 아득히, 여기서는 아득히 먼 곳에서 나를 그리워하게 했다 그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 가사만 보면 흥미가 없으니까 노래를 직접 한번 들어보는데 여러분 들으면 아는 목소리 나올 거예요. 누구 막 생각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서 제일 따뜻한 남자. 제일 온순한 것 같은 남자. 어려운 아가씨를 생각해서 늘 키 큰 아저씨, 나의 아저씨 드라마의 이선균이라는 사람이 불렀던 그 노래에요. 세상에 이렇게 다정다감한 남자가 또 있을까요. 못된 것한테 걸려가지고 죽었지요.


이 노래 가사를 한번 보시면 어쩌다 생각나요. 어쩌다. 그러니까 이거는 어느 곳에 있는 게 아니고 어쩌다 우연히죠 우연히 생각나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우연이라는 말은 내 속에 이미 그것이 내장되어있다? 안 되어있다? 내 존재와 결별된 상태에서 다른 존재에서 작동하고 작용하는 그런 능력이 나한테 도달하게 되면 나는 그 십자가가 생각나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나는 존재가 아니고 뭐냐? 나는 여기서 완성된 기계가 돼요. 기계. 십자가로 유월절 다 이루었다는 그 자리를 증거하는 하나의 기계로서 작동하는 겁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존재 나름대로의 뭐가 있느냐 하면은 기억 때문에 하나님의 이 일방적인 작동성이 방해를 받아요. 내가 이번에 은혜 받은 것은 기도원에 가서 빡시게 기도해서 그렇다 이러면 기도 당사자가 누굽니까? 나잖아요. 이번에 내가 은혜 받은 것은 헌금을 듬뿍했다. 그 헌금 한 사람 누굽니까? 나죠. 그럼 유대인들이 유월절 지킬 때 누가 해야 돼요? 본인들이 유월절 지켜야 유월절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유월절을 뭐로 바꿉니까? 오늘 출애굽기 22장에 보면 뭐로 바꾸지요? 마가의 다락방에 가가지고 어떻게 바꿉니까? 본인의 유월절로 바꾸잖아요. 바꾸면서 여기 누가 작용합니까? 사탄이 작용하지요. 모든 인간의 존재를 대체하는 존재.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 심지어 인간이 알고 있는 하나님 존재를 대체하는 존재 누구지요? 예수님 밖에 없지요. 예수님 밖에 없어요. 이선균 같애. 이미 죽은. 이선균 아득히 먼 곳에 가버렸어요. 주님도 아득히 먼 곳에. 아득히 먼 곳이라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언약궤에 인간이 율법을 가지고 쭉 지켜보니까 마지막에 누굴 만나게 되어있습니까? 마지막에 율법에 모두 집약하는 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거든요 이스라엘의. 그 성막 있는 곳에 누가 그걸 선점하고 지키고 있었어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에 누가 지키고 있어요? 그룹이라는 천사가 이거는 개 있잖아요. 무서운 도사견. 도사견이 지키듯이 오기만 해봐라 죽인다 하면서 지키고 있는 거예요. 그럼 이건 무슨 뜻입니까? 인간아 너희들이 아무리 애써도 막혀있다는 거예요. 올 수 없는 세계다. 아득히 먼 저 곳. 그러니까 인간은 올 수 없는 곳에 떨어진 단절된 그 안쪽 세계에서 나름대로의 분투, 노력하고 돈 벌고 난리도 아니죠.


거기서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말씀대로 지키고 다 가짜인데 다 환상에 불과하거든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 것은 너 인간 아니야 라는 뜻이에요. 너 인간 아니야. 백날 할례행하고 네가 제사 드려도 나 그거 안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미 창세 전에 확정 지었어요. 나는 한 사람만 받는다. 자기 아들만 받아요. 자꾸 추상적인 하나님의 그런 것 자꾸 생각하지 말고 딱 구체적인 인물이 바로 그분이 바로 진짜 인간이고 진짜 사람이에요. 진짜 사람이고 진짜 하나님이에요. 합쳐서 인자라고 하죠. ‘인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모든 질문은 그분에서 내뱉어져야 진리로 순환해서 진리로 돌아오지 중간에 인간이 컨닝해가지고 예수님 유월절 어떻게 지킵니까? 그거 네가 알아서 뭐하는데? 그거 알아서 뭐하는데 지키지도 못할 거 묻기는 왜 묻냐 이 말이죠. ‘나’라는 존재 유월절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나’라는 존재를 내가 포기 못 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건 네가 조작한 네 약속 성취방법이죠. 그건 네 성취방법이고 네가 우기는 약속이에요. 인간 쪽에서 하는 약속과 주님의 숨어있는 약속과 같지 않아요. 삐뚤게 어긋나는 정도가 아니라 충돌해서 완전히 폭발해야 돼. 분수처럼 터져버려야 돼. 갈라져야 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뜻과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율법을 다 이루시고 그리고 이 땅에서 무너졌습니다. 무너졌어요.


무너졌다는 이야기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렇게 되어있죠. 내어주신 거예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버지여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끊어져버렸어요. 하나님과 인간이 끊어졌습니다. 끊어지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끊어졌다는 그 사실 자체가 약속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느냐를 물으시고 다시 살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약속도 못 지키는 이유가 어쨌든 간에 안 끊어질라고 말씀을 지키고 교회 다니고 하잖아요. 하나님과 안 끊어질려고. 그러니까 가짜인 거예요. 끊어진 약속만이 약속인데. 왜? 그룹이 가로막고 있으니까. 그룹이 언약궤를 가로막고 있어요. 그 언약궤는 만남의 장소에요. 만남의 장소인데 인간은 들어가면 죽어요. 1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이 뭘 바릅니까? 피를 바르고 들어가잖아요. 피를 바르고. 그 피는 죽어야 나올 수 있는 피거든요. 대제사장으로 들어갈 때는 뭐냐? 자기 피 발린 송아지는 살고 나는 송아지가 자기 대신 살고 나는 송아지 앞에서 이미 죽은 자로 들어가는 거예요. 피 안 바르면 못 들어갑니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자기가 죽었다는 말은 뭡니까? 자기 모든 기억에서 벗어났다.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존재에 대해서 뿜뿜 뿜어낼 수 있는 모든 것과 단절됐다는 뜻입니다. 내 존재에서. 요령껏 이렇게 하면 구원받고 저렇게 하면 구원받고 이 모든 것이 끊어진 거예요. 끊어짐을 내용으로 할 때 십자가는 말의 지혜가 아니고 십자가는 끊어진 것을 주님 쪽에서 이어줌으로서 구원이 되는 겁니다. 이게 환장할 이야기. 왜 환장할 이야기냐? 인간이 그동안 요령껏 뭔가 좀 해볼라고 한 것이 무효가 됩니다. 신앙의 연조가 어떠니 저떠니 주께 봉사를 얼마나 했더니 어떠니. 다 끊어지죠. 그러면 나 구원 못 받으면 어떡해요? 안 찾아오면? 끊어진 것은 아는데 안 찾아오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끊어졌지요.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버림받은 예수님을 육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드디어 여기서 그 유명한 육과 혼과 영이 시작되는 겁니다. 육신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버림받은 거예요. 버림받았으니까 가룟 유다의 입장, 사탄의 입장에서는 인간은 자기 존재의 대명사였습니다. 대변인. 거울에 어 내가 살아있네 이런 뜻이에요. 살아있나? 눈에 뭐가 보여? 제 육신이 보입니다. 그래 그거 육이야. 육이에요.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옵니다. 그거 육이야. 주께서는 육을 원하는 게 아니고 뭘 원하느냐? 영을 원해요. 영. 육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 육을 갖고 있는 인간은 이 성경을 보면서 뭘 동원하겠습니까? 육과 영과 혼과 모든 개념 자유의지부터 해서 모든 개념을 어디다 투자해요? 이 육신으로 다 투자해서 그 투자된 육신이 이 지식을 확보해서 육신에서 영으로 환생하길 은근히 고대하지요. 그게 인간이 만든 약속이에요. 내가 나한테 사탄이 지어낸 약속이에요.


이사야 22장 3절에 보면 인간은 이유도 없이 팔렸습니다. 이유도 없이 팔렸어요. 참 이유도 없이 팔린 이 이야기하면 가슴 아파요. 영자의 전성시대. 촌에서 올라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서울역에서 납치 되서 유흥업소에 팔려가잖아요. 촌에서 와서 아무것도 몰라요. 공부도 제대로 못했어. 돈 벌어준다 그것만 믿고 가는 거예요. 값없이 팔렸어요 마귀한테. 그런데 그 말씀 뒤에 보면 구원 받을 때도 값없이 구원받는다 하거든요. 값없이. 그러니까 이미 인간은 자기 존재를 우기기 전부터 인간은 이미 사탄의 기계가 되었어요. 인간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누구의 기계에요. 그걸 종이라고 하는데 죄의 종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뭐다? 존재가 아니고 주님의 존재를 존재에 의해서 발생된 그 죄인에게 허락된 그 자리, 그 자리가 있어줘야 주님의 존재가 빛이 나는 그 자리, 그 자리를 할당받아서 그 자리확보 때문에 인간은 그 성도는 구원을 받습니다. 왜? 거기서 예수님의 존재만이 뿜뿜 하고 발휘되기 때문에.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22장 3절 (유월절의 의미) 240305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막혀있다. 그 언약궤를 덮고 있는 그룹이 바로 창세기 3장 24절에 생명 가는 길을 인간들이 오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오지 못하도록 단절시키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예수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 예수님도 짤렸는데요. 예수님도 짤렸잖아요 버림받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같은 경우에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면은 여기 로마서 8장에 보면 “내어주사”라고 되어있어요. 내어주사. 짤리기는 짤렸는데 예수님이 그 사탄에 의해서 죽어서 인간의 모든 약속은 엉터리라는 그 내용, 그 내용이 하나님께서는 고스란히 회수를 하겠다는 거예요 그 내용을. 어떤 인간도 천국에 오지 못하는 그 내용을 버리는 게 아니고 그 내용이 구원의 근거가 되게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거예요. 죄인이 없으면 예수님의 주 되심이 성립이 되지를 않아요. 예수님께서 죄인과 함께 되셔서 죄인과 함께 버림을 받을 때 그 버림받았다, 아버지로부터 짤렸다 그게 유일한 구원의 근거가 돼요. 약속 성취가 되요. 그런데 이슬람의 알라신은 뭡니까? 이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냥 막 최선을 다하여 주의 뜻이라고 하면서 주권사상 있잖아요 개혁주의에. 그냥 정성을 다하여 하루에 5번씩 기도하고 이러잖아요. 여자는 수건 뒤집어쓰고.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그걸 십자가로 이야기하면서 그걸 가지고 육이라고 합니다. 그게 육이에요. 육은 요한복음 3장에 육은 뭐다? 육은 육이요 딱 같은 단어를 이렇게 쓸 때 거기에 어떤 의미가 담기는지 알 수가 없지요. 육은 육이요. 육은 육이지 그럼 육은 육이요 이게 무슨 뜻이냔 말이죠. 안 된다 짤렸다 소용없다 그런 뜻이에요. 다시 말해서 육이 아무리 분투 노력해도 영이 될 수 있다? 없다? 막혀있으니까. 막혔다는 걸 어떻게 아는데? 예수를 통해서 보여줬잖아요. 막혀있다고. 하나님 아들도 짤렸는데 인간은 말할 것도 없이 짤리지요. 못 들어가요.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아는 것은 바로 들어갈 수 없는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지요. 인간은 못 들어가는데 못 들어가는 나라가 천국이라는 사실. 그럼 인간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는 뭐다? 모조리 다 사탄의 작품이라는 겁니다. 이사야 52장 3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 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인위적으로 뭘 할 수 있는 것을 차단시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한다 그런 뜻이고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죠 지식이 아닙니다. 이게 지식이 되면 안돼요. 왜 지식이 되면 안 되는가? 그게 능력이 되는 이유가 뭐냐? 19절에 나옵니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라고 되어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요 이런 뜻입니다. 지식은 아니라고 했지요. 지식은 아니고 지식 대신 뭐가 나옵니까? 능력이 된다는 말은 인간 세계의 인간들이 지식을 할 때 이 지식은 어디서 왔는가? 자기가 혼자 터득한 것이 아니고 인간을 둘러싼 이 환경 자체가 인간에게 지식을 제공했다는 겁니다. 인간 세계는요 빈 진공상태에 놓여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는 여기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면서 의미 체계 안에 이미 놓여있어요. 소위 똑똑하고 지혜롭고 총명한 자들에 의해서 계속 생산돼있는 의미와 그리고 약속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꽉 차 있는 것이 바로 뭐다? 우리가 놓여있는 환경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의 지식은 혼자 터득한 것이 아니고 환경에서 주입된 거죠. 얻어진 겁니다. 학교 교육도 얻어진 거예요. 그런데 이 환경 속에 누가 뛰어들었습니까? 예수님도 뛰어들었잖아요. 예수님도 뛰어들었지요. 그러니까 여기 예수님 뛰어드니까 여기 누가 동원했느냐 하면은 숨어 있는 영, 사탄이 동원해가지고 사탄이 인간 세계의 신이니까 신이 동원해서 설치니까 모든 인간은 갖고 있는 가진 모든 윤리와 도덕과 성실함과 종교성과 함을 총동원해서 그게 누구 공격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까? 사탄이 그렇게 했지요. 쭉 하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여기서 죽었다는 것은 뭘 흘렸다? 피를 흘린 거예요. 예수님이 피를 흘린 거예요. 벌써 인간과 예수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 거예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거예요. 의도적으로. 인간 존재 자체가 주님 존재와 충돌하게 되어있어요.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에요. 충돌하게 되어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육에 뭐가 왔습니까? 성령이 오셨잖아요.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부활이 되어버리면 예수님의 육은 무슨 육이 되느냐 하면은 영이라는 이름의 육이 돼요. 영이라는 이름의 육이 돼요. 육이 있고 영이 있는 게 아니고 영이라는 이름의 육이 돼요. 이거는 인간의 육하고 달라요. 인간의 육은 죄인 된 육을 말하고요 더러운 육이고 예수님의 육신은 영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예수님에게 속한 자는 어디에 속한? 영적 사람이고 예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성령 오지 않은 사람은 육적 사람이 된다고 해서 고린도전서 2장에 14절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의 일을 받지 아니한다” 되어있어요. 받지 아니한다는 그 뉘앙스가 묘하기 짝이 없어요. 열심히 노력하면 안 받는다가 아니라 일부러 영은 육적인 인간들을 기피한다는 뜻이에요 이게. 너 까짓 것 구원받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너는 인간의 육신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해서 인간은 기계잖아요. 죄의 종, 그러니까 지옥 갈 거냐? 천국 갈 거냐 권한은 십자가 사건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고유 권한이에요. 양이냐 염소냐? 인간 하기 나름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한쪽은 저주받기로 선택하고 한쪽은 구원받기로 선택해버린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인간이 이의 달고 하는 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은 사탄에게 속하고 사탄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이 세상에 구원받을 존재는 존재하지 않아요.


구원은 예수님의 육신만 구원받습니다. 그걸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두 자로 하면 그걸 ‘교회’라고 이야기해요. 또 다른 말로 하면 ‘성전’이라고 이야기하고. 공통점이 있다. 몸, 교회, 성전 공통점은 다 같이 성령이 함께 있다. 주의 부활한 영이 함께 있다는 겁니다. 주님의 영은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우리에게 온 거예요. 오게 되게 되면 뭘 아느냐 하면은 이런 환경에서 우리는 죄인이 되면서 성령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예수님과 성령께서 합류가 돼요. 합류가 되는데 그냥 합류라 하면 세례를 말하잖아요. 여러분들이 아는 식으로 쉽게 이야기하는데 이걸 더 알기 쉽게 말씀드릴께요. 창세기에 보면 창세기 2장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뭘 시키느냐 이름을 지으라고 해요. 자, 아담 이름은 하나님이 지었고 이름 받은 아담이 동식물 이름을 짓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3장에 들어가면 아담이 죽습니다. 죽을 때 죽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라고 해요. 그럼 하나님의 일의 일관성이 뭐냐 하면은 그 이름을 자기에게 이름을 주신 분 안에 인간의 이름이 있는 거예요. 이걸 예수님이 경유를 한 겁니다. 예수님이 경유를 한 거예요.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셨기 때문에 마땅히 썩어야 마땅한데 이게 썩지 아니함으로 썩지 아니함이 되는 것은 예수라는 이름이 지닌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한 이름이기 때문에 죄인을 건진 이름이기 때문에 이쪽 아담이름에서 예수 이름으로 바뀌게 됩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아요 그것 때문에. 바뀌게 된다고요.


이런 이야기하면 여러분 또 골치 아프기 때문에 제가 또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두 사람이 내기 바둑을 둬요. 내기 바둑을 두는데 내기가 뭐냐 하면은 이기는 사람한테 자기 이름을 말하기에요. 어떤 왕이 있는데 왕이 자기 여자 부하 직원하고 바둑을 뒀어요. 이름이 기대령이에요. 바둑 두는데 그때까지 부하 기대령으로 이해하지 본 이야기는 안 해요. 그런데 청나라 스파이로 갔다가 돌아와서 바둑을 둡니다. 내가 기어이 바둑을 이겨서 이름을 이야기하게 하리라. 바둑 한번 두자! 둡니다. 바둑전문가한테 이길 수가 있어요? 못 이기잖아요. 세작이라는 드라마 마지막에 보면 바둑과 관계없이 자기 이름을 말해요. 임금님 제 이름은 강희수입니다. 이제 제 이름을 강희수로 불러주세요 하고 이름을 알려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자기 이름을 이제는 본래 이름을 주신 그분에게 도로 갖다 바치는 거예요. 갖다 반납하는 거예요. 반납할 때 그 모습이 뭐냐?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표현을 하면서 반납을 하는 거예요. 왜? 흙이기 때문에 그래요. 흙. 사람인데 죄를 짓고 보니까 사탄이 인간 세계에 개입토록 하나님께서 허락해서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흙이 되는데 자기 백성은 흙에서 멈추는 게 아니고 먼저 흙에서 육신에서 영적, 부활의 영이 되신 예수님이 하신 스케줄대로 되어가는 절차를 따라서 흙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는 백성 되는 그 과정을 예수님이 이루신 그 능력에 의해서 십자가의 능력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사람이 누구냐? 성도입니다. 성도에요.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32절 33절 누가 읽어보세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아멘.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누가 개입했습니까? ‘나’라고 하는 예수님이 개입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개입한 이유가 뭐냐? 더 이상 ‘너’라는 존재를 유지하지 말라는 거예요. 나는 남이라고 하지 말고 누구를 시인해야 돼요? 내게 이름을 주시고 이름을 반납하라고 요구하시는 그분에게 내 인생을 그냥 드리면 되는 거예요. 왜?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니까. 드릴 때 드리는 능력이 어디서 오는가? 바로 성령으로부터 오는 거예요. 값없이 팔렸기 때문에 아무 대가 없이 그냥 원주인을 향하여 원래 이름을 주신 분의 이름에 운명이 들려있다고요 운명이. 그 미래가 다 확정되어있다고요. 확정되어있는 다 이루신 그분에게 그냥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주께서 알아서 쓰시는 기계입니다’ 하고 돌려주면 돼요. 실제로 내 안에 누가 계시다? 그리스도가 계신 거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고 우리 성도라는 것은 그렇게 움직여야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은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12절에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이렇게 된다고요. 내가 죽지 아니하면 그 부활의 영광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11절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라고 이야기해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요. 네 인생 네가 알아서 착실하게 살면 안 됩니까? 부모한테 효도하고 돈 벌고 자식 키우고 그러면 되잖아요. 왜 너를 대체하고 너를 대신하는 다른 존재를 왜 자꾸 내세우고 거론하느냐 이 말입니다. 불신자들이 보게 되면.


그런데 그게 사랑이거든요. 그게 사랑이라고요. 파리의 여인이라는 드라마에 보게 되면 박신양이 주인공 되는 그 사람한테 막 화를 내요. “이 남자가 내 남자다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왜 말을 못해!” 그때 상대역 김정은 씨가 이렇게 이야기해요. “내가 말하면 당신이 우습게 되잖아요 이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김정은 대사가 이래요. 내 자존심 세우려고 창피 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때 그 다음부터는 박신양이 말을 안 해요. 왜냐? 구원은 말의 능력에 있는 게 아니에요. 그 앞에서 보란 듯이 뽀뽀를 해요. 이게 능력입니다. 그 말, 내 사람이다 내 남자다 말을 뽀뽀해서 말을 막아버려요. 쳐들어와서 보는 앞에서 키스를 해 버려요. 그 대목이 기억나지요 지금. 마태복음 10장에서 그 박신양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나는 주님의 것이라고 왜 말을 못해! 주님이 나 대신 살아가고 있다 왜 말을 못해. 왜 독립적이냐 왜 자립적이냐 이 말이죠. 그 이유를 다시 고린도전서로 한번 돌아가봅시다. 이게 십자가의 의미를 통해서 사도 바울 편지를 안 볼 수가 없어요. 왜? 편지는 아무라도 그대가 되어서 날라오기 때문에 여기 1장에 보게 되면 1장 20절에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참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너나 십자가 똑똑하게 믿으면 된다 이 말을 한 게 아니에요. 너는 이미 이 세상과 한 통 속이고 이미 물들었다. 그래서 뭘 친다? 이 세상에 십자가 지혜가 그동안 너를 옥죄었던 너를 둘러쌌던 그 모든 인간의 지혜와 이 세대의 변사와 이 세상의 지혜를 전부 다 어리석은 걸로 다 공격하는 능력이 어디서 나온다? 십자가에서 나오는 거예요 능력이.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철학과 신학과 그 어떤 인간의 지혜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느냐? 없는 존재에서 구원이 나타나게 해줄 수 있는 재주가 있느냐? 없는데 끊어진 것을 천국과 인간이 끊어진 것을 이어줄 수 있는 그러한 능력, 능력입니다. 지혜가 아닙니다. 능력이 이 세상에 있느냐? 없지요. 오직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밖에 없지요. 그래서 성령이 왔다는 것은 성령이 온 게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 들이닥칠 때 값없이 용서함을 받고 구원받을 때 그때 바로 그 상태가 바로 무슨 사랑? 영적 사랑. 다시 말해서 주님의 하신 일만 증거하는 기계, 또는 주님의 자리에 할당받은 그 자리의 기능을 발휘한 사람이에요. 기능인에요. 기능인. 그래서 성도는 하는 일이 있어요. 뭘 하느냐 하면은 이 지상에다가 가는 곳마다 휘발유를 줄줄 뿌리는 일을 해요. 왜? 휘발유를 뿌려놔야 주께서 성냥해서 불날 게 아닙니까. 그래서 성도는 이 모든 세상이 십자가에 의해서 어리석고 무지하고 멸망당해야 될 세상인 것을 선도적으로 선도하면서 앞장서서 그것을 완전히 까발리는 그 역할을 누가 한다? 십자가 영을 받은 성도가 하는 겁니다. 성도가 세상 끝까지 합니다. 어떤 것을 하느냐? 절대적 절망을 선포하지요. ‘절대적 절망’.


재미있는 게 절대적 절망을 전하면 성도는 싱글벙글이에요. 희한해요. 누가복음 6장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21절에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뭐가 있다? “복이 있도다” 주님이 어깨를 탁 치면서 이 복 받을 것. 이 다행스러운 것. 네가 예수 이름으로 욕을 얻어먹어? 횡재한 거야 너. 이런 거예요. 그리고 24절에 반대로 복이 아니고 화입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이 세상에서는 경쟁체제거든요. 누가 누가 잘 먹고 잘 사느냐 경쟁체제 거기에 내몰리고 있어요. 십자가? 사탄? 관심 없어요. 수수수 우수수수 그것만 필요하지. 이 세상에는 누가 실력 있고 능력 있나 그것만 있는 세상이에요. 십자가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인간이 자기가 지혜롭다고 여기며 살아요. 지혜에 지혜를 더하면 경건에 경건을 더하면 하늘나라도 뚫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율법의 끝을 몰라요. 율법의 끝은 막힘이에요. 절망입니다. 막혀있어요. 못 간다 입니다. 25절에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절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조상들 거짓 선지자들 다 이런 짓 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완전히 뒤엎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성경의 예를 들 테니까 슬슬 여러분들이 ‘아 성경은 이런 바탕 위에 전개되었구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엘리야가 만났던 사렙다 과부. 엘리사가 만났던 수넴 여인.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이야기. 공통점이 뭡니까? 절망적이에요 절망적. 절망적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앉은뱅이. 뭐에요? 절망적이에요.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간수. 죄수가 다 탈옥해버렸어요. 간수. 절망적이잖아요. 그런데 그 정말적인 상황이 바로 그걸 주님의 살아서 일하시는 능력으로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영에 속한 사람이에요. ‘영에 속한 사람’.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돼요. 그러면 내 마음이 있다는 이 마음 자체가 절망적인데도 불구하고 이 절망적인 것을 일깨워주는 새로운 마음이 들어와버린 거예요. 그러면 나의 이 절망적인 모든 것이 절망적이다 라는 이 사실이 더 없이 기쁨과 감사의 거리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언약의 본질 내용이에요. 본질 내용. 아들이 하나님께 짤렸다는 자체가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겁니다. 끊어졌다는 사실이 이제는 우리 쪽에서 손 내민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손 내밀 때 구원이 아니 될 수가 없다는 이미 완료된 구원으로 이게 받아들이는 것,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게 성령의 역사에요. 그럼 목사님 우리가 할 건 뭡니까? 휘발유만 뿌리면 돼요. 초만 치면 되요. 초만 치면.


방금 이야기한 것을 도표로 해보겠습니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자본은 어떻게 자체 확장이 되느냐? 참 이게 마르크스가 보기에 신기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돈이 어떻게 돈을 불리나. 돈이 어떻게 돈을 불릴 수 있느냐. 이게 그렇게 신기한 거예요. 은행이 이자 받으면 추가적 이익이 온다. 이거는 돈의 증가지 자본의 증가는 아니에요. 약간 돈 더 벌었다는 것이지 자본 자체의 증가는 아니다. 자본 자체. 네가 돈 100만원 가지고 150만 됐는데 50만원 벌었다. 그거 돈 벌은 거죠. 자본 자체가 증가되는 거 아닙니다. 그거는 개인적으로 이익 본 거예요. 마르크스는 그걸 생각한 게 아니고 어쨌든 이 사회 자체가 자본이 계속 자본을 낳는 구조가 되었느냐 그게 그렇게 궁금했던 거예요. 그 전에 그걸 해답을 준 사람이 없었고 방법은 이겁니다. 자본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상품으로 바꾸고 상품을 다시 화폐로 걷어오면 이게 자본이 증식이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플러스 뭐냐? 노동값을 다 주지 않고 남아있는 잉여 노동의 가치가 추가가 되기 때문에 돌아간다는 거예요. 이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이건 개인적인 이익이라면 이것은 전체 사회가 총동원해서 오직 자본 하나만이 더욱 더 확장되는 쪽으로 사회는 어떠한 융통성 없이 그냥 밀어붙이게 되어있는 사회다. 사회 자체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 외에는 더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노동자, 노동하는 노동의 대가가 항상 제대로 제공되지 않고 떨어지는 다른 것. 그 떨어진 돈 가지고 은행 세우면 은행 이자 벌고 살잖아요. 은행 돈 말고 전체 구조, 전체 구조는 뭐냐? 인간이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데 있다는 거예요. 그럼 그 전의 사회는 뭡니까? 그 전의 사회는 상품을 상품으로 사고 파는 것이지 자본을 증식하는 용도는 아니에요. 내게 필요한 상품을 구입하는 게 목적이지 그 추상적인 자본 자체를 증식하는 의도는 없었는데 그냥 나 필요한 물건을 돈 주고 사서 쓰면 되는 건데 그게 아니고 인간 사회 전체가 뭐로 하느냐 하면은 얼마나 여분의 자본을 넌 얼마 가지고 난 얼마 가지는가 그걸로 대조하는 사회로 모든 것이 변신, 전환되었다는 겁니다. 이건 고칠 병도 아니고 이건 이대로 그냥 밀어붙인다는 거예요. 왜? 인간 사회의 타고난 욕망이기 때문에. 욕망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대안은 하나밖에 없어요. 자본가들 죽이자 이것밖에 없어요. 자본가들 죽여도 해결 안 돼요 사실은. 왜? 자본가들 죽여버리면 노동자가 자본가 돼요. 해결이 없어요.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경제와 철학은 이미 결론이 나와 있습니다. 해결책 없어요. 그냥 자본이 왕이에요. 자본이 왜 있어야 되는가? 내 욕심 안에 다 담겨있어요. 그럼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욕심을 통제할 수 있다? 없다? 인간이 자기 욕심을 통제 못하면 이 사회는 그냥 자본주의에요. 사회주의 이름의 공산주의 이름의 자본주의에요. 중국이고 북한이고 모두 자본주의에요. 이걸 마르크스가 발견한 겁니다. 다 병 들었어요. 그리고 여기서 발을 못 빼요. 빼지를 못합니다. 내일은 발명왕? 소용없어요. 발명해봐야 그거는 뭐냐 하면은 돈이 돼야 발명이 돼요. 자본이 돼야 발명이 되지 돈 안 되는 발명은 그건 휴지통에 집어넣습니다. 왜 마르크스 이야기가 갑자기 튀어나왔느냐?

 

세상의 인간의 욕망이 마르크스는 육적인 것만 보지요. 육적인 것. 영적 세계가 더 원판입니다. 더 근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줬잖아요. 말씀을 주니 인간들은 뭐냐? 나를 위한 성취를 시도해요. 그럼 여기 나오는 구원은 누구의 구원입니까? 나의 구원. 이게 바로 여기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구원에 대한 나의 욕망. 구원에 대한 욕망은 어디에 대한 무지다? 나에 대한 무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무지, 메시아에 대한 무지, 죄에 대한 무지, 율법에 대한 무지. 인간은 죄도 모르고 의도 몰라요. 모든 죄, 모든 의는 어디서 나온다? 유월절 사건에서 기준해요. 유월절 사건. 사탄이 개입해서 모든 인간의 총 궐기해서 오신 메시아를 죽이는 그 사건에 기준해서 비로소 죄가 나오고 의가 나오고 다 나오는 거예요. 인간의 존재에서 인간의 도덕 윤리적 관점에서 죄가 의가 안 나옵니다.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럼 뭐가 죄냐? 바로 이게 죄지요. 나의 구원 성취를 위해서 말씀을 분해하고 연구하는 게 죄죠. 그럼 육과 영과 혼은 뭡니까? 그 개념 자체가 자기 구원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죄가 되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고린도전서를 보면서 육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 워치만 니의 육과 혼 그 연구하는 그 모든 것이 뭐가 돼요? 죄가 되는 거예요. 사탄의 일이 되는 거예요. 사탄의 일이. 막혀있다는데 안돼요 인간은. 안돼요 안돼. 되지를 않는 겁니다. 되지도 않으면 어떻게 하자는? 되지도 않는 그 상황이 구원의 토대가 되고 근거가 돼요. 내 구원받지 못하는 조건 하에 내가 구원이 돼요. 내가 예수님과 상관없다는 조건을 갖고 있는 한 그것 때문에 우리가 구원이 되는 겁니다. 내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바탕이 돼요. 약속을 모르고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약속의 본질이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계속 한번 봅시다. 1장 17절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라고 되어있지요. 그러면 이것은 무엇과 무엇의 충돌이다? 십자가 복음의 능력과 그 반대쪽에 뭐가 있습니까? 인간의 십자가라는 신학이라는 말로 지혜로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유대인뿐만 아니고 계속해서 그 다툼이 일어난단 말이죠. 다툼이 일어나는데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 싫다 이렇게 하지는 말잔 말이죠. 왜냐 하면은 2장 끝에 보면 2장 12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되어있지요. 은혜입니다. 선물로 준 거예요. 그 다음에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아까 1장 17절 말의 지혜가 아니다 해 놓고는 입을 다물다가 2장 13절에 와서 비로소 빈칸이 채워져요. 사람의 지혜가 아니고 뭐다? 성령의 가르침이죠. 그러면 성령의 가르침에 인간의 지혜가 끼어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끼어들면 안되지요. 그럼 끼어들지 않는 방법이 뭡니까? 그게 뭐냐? 아무리 가르쳐도 이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하면 되는 거예요. 인간의 가르침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인데 인간을 구원하는 자체가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성령이 와서 인간을 구원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이 와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과 인간의 지혜 그 경계선 틈 사이에 경계선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절대적 절망. 절대적 절망. 여러분들이 신구약에 나오는 사건들 쭉 보세요. 특징이 한결 같이 뭡니까? 모조리 절대적 절망이에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메섹에 내려가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 체포하려고 할 때에 본인은 절망인줄 몰랐지요. 나중에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자기가 뭐가 됐습니까? 눈이 감겼잖아요. 눈이 완전히 갔어요. 하나님께서 낫게 해주겠지 그런 거 없어요. 눈이 갔어요. 끝났어요. 소경이에요. 아나니야에게 데려가가지고 안수 받으니까 비늘이 벗겨졌지요. 비늘이 안 떨어졌으면 어쩔 뻔했어요. 평생 소경이에요. 사도 바울은 소경이다 절룩발이다 내안에 사탄의 가시가 있다 그거는 본인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왜? 본인은 십자가를 위한 하나의 자리를 배정받은 기계에 불구하니까 십자가의 취지가 얼마나 이 세상과 대비가 되고 충돌되는가를 그 충돌 사항을 자기 내부에 두면 되는 겁니다. 자, 이 뜻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런 뜻이에요. 고린도전서 2장에서 영에 속한 사람, 영의 반대말 육에 속한 사람 있지요. 육에 속한 사람. 나는 여기 둘 중에 어디에 속해야 합니까? 오늘 1강 2강 다 했는데도 답변 제대로 해야 돼요. 나는 이 둘 중에 어디 속해야 돼요? 제 질문 자체가 이거는 반칙적인 질문이에요. 나라는 존재는 이미 이름을 누구한테 반납했어요? 주님한테 반납했다. 다시 말해서 주의 이름과 내 이름을 바꾼 거예요. 나는 자리 제공한 거예요. 내 이름으로 활동하는 내 몸이 내 육신이 주님이 활동하는 육신이 돼요. 이 육신은 더러운 육신이고 아프고요 담 걸리는 육신이에요. 갈수록 점점 더 그래요. 그 육신인데 그 육신을 통해서 주님께서 뭘 보느냐 하면은 육에서 영으로 옮겨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무대가 되는 거예요. 하나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디 속하는가? 둘 다를 포함하고 있는 거예요. 둘 다를. 그래서 감사는 영에 속했기 때문에 하는 감사는 엉터리 감사에요. 영에 속해서 감사하는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이에요. 육과 영에서 바뀌어 가면서 여기서 틈에서 뭐냐 하면은 성령의 일방적인 일하심이 나오겠지요. 이게 바로 감사가 되는 거예요 이게. 이게 감사가 되는 거예요. 나는 내 식대로 성경공부해서 구원받고자 하는 이것, 이것이 다 허사고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오는 감사. 나는 이 두 개의 상반되는 요소가 있어야 여기서 감사와 기쁨이 나오는 거예요. 범사에 감사가 나오는 거예요. 범사에.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과연 그런지 고린도전서 4장을 보겠습니다. 4장 9절에서 13절까지 읽어보면서 여러분들이 사도 바울의 심정에서 생각해서 기쁜지 아니면 짜증나는지 한번 보세요.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지금 이 이야기가 짜증납니까? 아니면 기쁩니까? 어때요? 느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감사가 됩니까? 이게 막 굉장히 고마워요 이게? 되게 고마운 거예요? 다시 한번 봅시다. 말씀이 들어왔을 때 우리가 육에 속했기 때문에 나의 구원이라고 여기고 내가 실시한다든지 또는 내가 믿든지 해서 말씀을 내 쪽에서 받아들여요. 나의 존재를 포기하지 않고 내 유리한 쪽으로 받아들여서 결국 나온 것은 나의 구원이죠. 이게 어디 속했다? 이게 바로 육신에 속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동일한 말씀으로 이걸 작살내는 거예요. 만물의 쓰레기처럼 만들었다. 이 육신을 내 손으로 걷을 수는 없어요. 왜? 이게 나의 본성이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 인식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이게 뿜뿜 막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우연적인 예상도 못했는데 이딴 게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만물의 찌꺼기가 되어도 괜찮은 겁니다.


자유, 자유의지라는 것은 뭐냐? 나의 자유를 주님께 반납하는 게 자유에요. 왜냐하면 내가 자유를 활용하면 안 되니까. 그래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께서 허락한 것을 배급받는 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요. 이게 자유거든요. 왜냐하면 주님은 이미 도망쳤잖아요. 어디로? 예수 안으로 또는 성령 안으로 또는 하늘나라 처소로 가버렸단 말이죠. 그 간 곳에 인간이 노력한다고 따라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갈 수가 없어요 막혀있다니까요. 막혀있어요. 막혀있는데 그러면 인간은 절대적 절망이죠. 절대적 절망에서 흑흑 울고 있죠. 안되겠다. 아들아 밀가루 얼마 남았나? 마지막입니다. 기름도 마지막입니다. 그거 같이 먹고 장렬하게 죽자. 우리 팔자 이거 밖에 안 된다 했는데 여기 엘리야가 등장해가지고 홀라당 뭘 뺏어가요? 마지막 나의 장렬한 죽음까지 자존심마저 싸그리 내가 먹는다 가져가버리죠.

 

절망적인 상태를 누가 활용했어요? 하나님 쪽에서 온 사람이 그걸 활용했을 때 나의 절망도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겁니다. 나의 절망도. 여러분 보고 하라는 말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살아가면 항상 여러분들이 예상 못한 우연 요소가 여러분들 인생 방향을 자꾸 틀어줘요. 영생은 있습니다. 있는데 좁은 길에 있어요. 이게 문제에요. 영생은 어떤 길이냐? 아무도 찾지 않는 것. 심지어 나도 찾지 않는 길에 영생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말씀이 와서 나도 찾지 않는 것을 나는 어디 찾아요? 좁은 길 찾아요? 넓은 길 찾아요? 고생고생 하겠습니까? 호화롭게 살겠어요? 넓은 길로 가지요. 육신의 본성이니까. 가는 것을 뒤통수 쳐가지고 대절망으로 만들어버리지요. ‘뭐야 내 것은 없잖아!’ 할 때 그게 그 절망이 뭐로 바뀌게 합니까? 예상 못한 아 내 절망 마저 주님의 십자가 재료로 사용한다는 것. 주님의 기계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에도 알았지만 새삼, 새삼스럽게 그걸 깨닫는 순간 그 기쁨으로 감사가 되어집니다. 감사가 될 수밖에 없어요. 몇 초 가게요? 한 10초 가는데 아버지 만나면 다 없어져. 아버지 요양병원 버티고 있으면 돈 다 날라가죠. 아버지 나 괴롭힐라고 자식 말 안 들어. 은혜 받고 갑자가 은혜 다 쏟았어. 헨젤과 그레텔처럼 은혜 받았는데 새들이 다 주워먹은 거 같애. 걱정하지 마세요. 반복됩니다 반복. 반복 돼야 전에 있던 감사 말고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감사가 우리가 육신에 산 만큼 또 튀어나오게 되어있어요. 기다려봐요 또 튀어나올 거예요. 내일 치 또 튀어나옵니다 내일 치. 내일 비트코인 내려가서 튀어나옵니다. 절망이야 끝났어 끝났어 나 죽었어 이제. 그때 팔 걸 까불다가.


우리에게 일어난 이 모든 사건은 이제 결론내고 마치겠습니다. 모든 사건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지워버리는 일들이에요. 지워버린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인간에게 혹할 수 있는 인간들 그러한 유혹거리를 많이 만들어줘요 하나님께서. 마귀가 그렇게 하는걸 허락해요. 해놓고 성도로 하여금 방향을 틀게 만들어요. 그거 좋지? 좋지요. 성공했지. 구원도 받고 돈도 벌고 성공했습니다. 넓은 길 좋아? 그런데 찾는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쪽 아니거든. 하고 다시 방향을 영생 쪽으로 방향을 틀어요. 틀면 외롭지만 감사하고 남한테 내세울 것 없지만 감사가 나오고 남들 보기에 너 인생 망했다고 욕은 하지만 비천하지만 쓰레기 같지만 기쁨이 사람이 모르는 예상 못한 큰 기쁨이 넘치게 만드는 하나님의 성령의 한결같은 쉬지 않는 일하심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을 우리가 느끼는 겁니다. 아까 빨리 이야기했지만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아낌없이 반납하는 게 사랑이죠. 내 사람이다 내 여자다 왜 말을 못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자기를 대신하는 사람으로 하는 거예요. 이순신 장군을 봅시다. 이순신 장군은 훌륭한 분이라고 하지요. 학교에서 배웠잖아요. 명량, 초량 영화 세 개나 나오고. 하지만 과거 사람이에요. 옛날 사람이라고요. 지금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보면 “보라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고 했어요. 이미 다 이루신 분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거예요. 무슨 뜻입니까? 네가 육신이고 너는 육신밖에 모른다는 사실을 날마다 일깨워주는 식으로 너는 나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다루겠다는 겁니다.


끝으로 물어봅시다. 우리가 고칠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가 뭘 고친다는 자체가 이거는 시건방진 일이에요. 고쳐서 뭘 할 건데요? 더 깨끗한 나의 구원을 확보하려고? 하지 마세요. 고치는 것이 아니고 고치든 안 고치든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변수는 우리에게 나온 것이 아니고 우연하게 주께서 주신 겁니다. 우연하게. 그것을 통해서 세상에 어떤 지식과 지혜는 이미 주님 앞에 짤렸다는 사실. 이미 무지하고 절망적이고 그들은 지옥 가는 마귀들의 지혜만 사람들이 믿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웃으면서 혹시 집에 여분의 돈 있거든 휘발유 사가지고 초를 치고. 주께서 그으면 확 붙도록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의사 아무것도 아니야. 데모나 하고. 의사들 데모하니까 한의사협회에서 우리를 믿으세요. 모든 이 세상은 자본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자본. 자본은 우리의 욕망의 대상이기 때문에 멈출 수 없어요. 나의 육신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멈추지 않는 그것이 세상에 우리가 구원받은 증거로 활용해주시니 진짜 이런 복이 어디 있어요. 말을 더 못하겠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대로 살았는데 주의 뜻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 것도 안 했는데 그게 주의 일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만 살아계심을 증거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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